제32장 일월삼주(一月三舟)
「불가의 육장경(六藏經)에서 이르기를 일월삼주(一月三舟)라 하였다. 달은 분명히 하나가 떠 있을 텐데, 가만히 머무른 배에 오른 사람은 달이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에 탄 사람은 달이 물길을 거스른다 할 것이며,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배를 젓는 사람은 달이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일월삼주라는 것은 같은 것을 보아도 보는 이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라고 한들 그것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우리도 제각기 여러 구설(口舌)을 듣고서는 평하는 서로 바가 다르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호남(湖南)사람이 말하는 것과 진서(鎭西) 사람이 말하는 것과 심요(瀋遼)의 사람이 제각기 말하는 것이 다르다. 이러할진대 사해(四海) 만국의 사람들이 나와 같이 생각하리라고 하는 것은 속단에 불과하다. 내가 마음을 열고 남의 의견이 다름을 존중하며,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때에야 상대방 또한 귀를 열고 나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정묵(鄭默), 『시평(時評)』중
1477년
가경 33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崎州府).
임승준(林勝俊)은 진서도독부 기주부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래 일본국 키이국(紀伊國) 히다카(日高) 출신의 몰락한 무사였다. 사실상 무사라고 하기도 곤란한 것이, 이미 두 대 위로부터 모실 주인도 없이 농사만 짓고 있었으니 사실 무사 계급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집안에 도(刀)와 갑(鉀), 그리고 집안에 내려오는 하야시(林)이라는 성만이 그래도 한때 무사 가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임승준의 할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하야시 신자부로(林新三郞)로, 이름에서 보다시피 셋째로 태어났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밥만 기식하고 살기가 뭣해, 유랑행에 나섰다가 이요국에 들어섰을 때 그만, 이요(伊予)국의 국주가 코우노 미치유키(河野通之)의 병졸들에 의해 끌려가 이요 수군에서 노잡이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노잡이만 세 해째 하던 차에, 전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카라노쿠니(韓國)의 외구(外寇, 외적)가 상륙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야시 신자부로는 그러려니 했었지만 결국 이요 수군도 참전하여 단노우라로 가게 되었고, 이곳에서 이요 수군은 몰살에 가까운 패전을 겪게 된다.
하야시 신자부로는 이때 겨우 목숨만 건져 인적 드문 해안에 표착했다.
다행히 곧 전쟁은 수습되었고,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 보아야 별것 없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조선군이 들어와 번영하기 시작한 새로운 항구인 기주(崎州)에 들어가 생활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야시 신자부로가 처음한 일은 그냥 항구에서 물건을 내리고 옮기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체력 하나는 좋아, 먹고 살 돈은 벌 수 있었고 결혼도 해서 자녀도 낳았다.
하야시 신자부로의 장남이 바로 임승준의 아버지였는데, 원래 이름은 카즈오(一男)이었다.
하야시 카즈오는 운이 좋아 아주 어릴 적 조선군 장교의 집에 급사(給仕)로 들어가 시중을 들며 조선말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열넷이 되자 하야시 카즈오는 당시 정부 시책으로 기주에 설치되었던 상학(庠學)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모시던 조선군 장교가 이 상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하야시 신자부로는 아들이 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자, 기분이 날아갈 듯해 집에서 떠나올 때 몰래 가지고 나온, 집안에서 내려오는 도를 카즈오의 허리춤에 채워 주며 기세가 등등했다.
“네가 다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라. 우리는 원래 무사의 가문으로 한 치 부끄럼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니라. 지금은 비록 이렇게 비루먹는 꼴이 되고 말았지만 사실 키이국의 옛 명장(名將)들은 우리 집안에서 나오곤 했다.”
카즈오는 아버지의 말을 유념하고서는 상학에 나가서 공부를 매진했다.
머리가 명석한 편이긴 했지만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던 카즈오는 그저 그런 성적으로 상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사실상 공부를 계속해 이곳 진서도독부의 다이묘들의 아래에 들어가 관직(官職)을 얻거나, 혹은 운이 좋으면 진서도독부 부청(府廳)에서 판임관(判任官), 즉 정7품에서 종9품 사이의 하급 관리라도 할 수 있을까 했던 꿈이 사라졌다.
그런 카즈오에게 조선군 장교는 육군진무관(陸軍振武館)에 들어가 군문에 들어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상학을 졸업했기에, 육군진무관에 시험을 쳐 볼 자격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카즈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다행히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육군진무관에 합격해 본토의 진주로 건너가 장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임관을 하여 진서군(鎭西軍) 제1보병대에 참위(參尉)로 부임하여 왔을 때, 하야시 신자부로는 기쁨에 겨워 쓰러질 정도가 되었다. 정말로 아들이 이제는 무사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무라이답게 카즈오도 갑옷을 갖춰야 하지 않겠냐는 하야시 신자부로를 가족들은 뜯어말리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진서군 군영(軍營) 내에는 특히 일본계 군인들이 많았다. 보통 통칭 진서인(鎭西人)이라 불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진서도독부의 진서인들도 징집 대상이 되었는데, 다만 이들은 진서군 안의 자기 고향의 파견대에서 군역을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우치, 시부카와를 비롯한 진서의 다이묘들은 여전히 각기 영지를 거느리고 황성의 추밀원에 참여할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칸조쿠다이묘들을 비롯해 성(姓)이 있는 무사 계급의 사람들은 보통 그 한자로 적힌 이름을 조선음(朝鮮音)으로 독음해 읽었다.
예를 들자면, 오토모 모치나오(大友持直)는 대우지직으로, 시부카와 미츠요리(澁川滿賴)는 삽천만뢰로 읽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姓)을 가지고 있는 다이묘, 무사 계급의 인구는 매우 적은 편이었고, 일반 농민들은 성이 없이 이름으로만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 진서도독부에서 호적을 짜며 이들에게 조선식 성(姓)을 붙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진서의 인명은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다.
김일세(金一世)라고 써 놓고는 킨 이치요라고 읽거나, 혹은 성만 달랑 붙어 천씨(千氏)라고 하거나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서 카즈오는 무사 계급의 자부심을 가지고 성을 버리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성이 외자라 조선음으로 읽으면 임(林)씨가 되었다. 그냥 그렇게 군문에서 그는 하야사 카즈오이면서 임일남(林一男)이 되었던 것이다.
카즈오는 그 뒤로 진서군에서 쭉 복무하면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혼인 상대는 조선인 아버지와 진서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여식이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바로 승준, 즉, 카츠토시(勝俊)였다.
임승준은 꽤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었다.
진서도독부는 이원적인 체제를 지니고 있었고, 도독부의 직할지를 제외하면 조선에 복속하기 전부터 영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다이묘들이 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지가 외부의 위협 요인 없이 안정이 되자 특별히 학정을 펼치거나 하지 않고 진서도독부와 협력 관계하에 대세적인 상황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신분적으로 이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일반 농민들은 기본적으로 배움의 기회도 얻기 힘들었다.
반면에 임승준의 경우 할아버지가 진서도독부의 수부(首府)인 기주부에 정착한 덕에 아버지 카즈오도 배움의 기회를 얻어 육군 장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정된 무관직인 진서군의 장교로, 아버지가 부령(副領)까지 올랐기에 임승준도 어려서 공부를 부족함 없이 할 수 있었다.
“나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부딪히는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해 왔다. 덕분에 대단한 자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적어도 군문에 들어와 남부럽지 않는 위치에까지는 올랐다. 네가 열심히만 한다면 황성이든 심양이 되었든 유학을 보내 줄 테니 반드시 노력하여라.”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긴 임승준은 매일같이 공부에 매진했다.
사실 부친이 시켰기에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공부하는 것이 체질에 맞고 즐거운 편이었다. 손아래 동생인 카츠히사(勝久, 승구)는 노는 것을 훨씬 즐겼지만 임승준은 책을 보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비록 군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아버지 카즈오는 기주상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책을 즐겨 읽는 애서가였고, 임승준은 아버지의 서책부터 시작해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두 구해 가며 읽었다.
나이가 차서 열둘이 되자 조금 이른 나이임에도 아버지가 나왔던 기주상학에 입학 허가가 났고, 임승준은 이곳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집안은 들썩였다. 아버지 카즈오도 상학을 나오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우등한 성적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었다.
“이제 무엇을 할 테냐? 유학을 보내 달라면 보내 주도록 하마. 어디로 가고 싶으냐?”
아버지 카즈오의 생각도 그랬지만, 임승준도 아버지를 따라 군문에 들어설 생각은 없었다.
몸을 쓰는 것은 둔한 편이었고, 오히려 공부를 하는 편이 적성에 맞았다. 문제는 어느 학교로 진학하느냐는 것이었다.
“심양으로 가겠습니다.”
“왜, 황성으로 가지 않고. 네 성적이라면 황성의 이름난 학교에서도 입학을 거절하지 않을 텐데.”
“심양의 어립대학에 훌륭한 선생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는 관료도 좋지만 학문을 계속 갈고닦아 학업을 대성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심양대학을 졸업하고 학문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요동행정서에서 관직을 얻을 기회도 많다고 하니, 문이 좁은 황성부의 학교로 가는 것보다는 심양으로 가는 것이 저에게는 훨씬 좋을 듯합니다.”
임승준의 판단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곳 진서도독부에서는 피부로 느끼기 힘들었지만 본토로 건너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
사는 형편이 거기서 거기인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야 본토 출신이든 진서 출신이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진서 출신이라는 벽인 동시에 본토로 치자면 명문대족, 진서로 치자면 다이묘가의 출신이 아니기에 칙임관(勅任官)급의 관직에 오르기에는 힘들다는 신분적인 벽이기도 했다.
아버지 카즈오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서군에 들어와 부령까지 진급했지만, 만약 본토에서 근무했다면 아마 지금쯤 겨우 참령(參領)을 달았을 것이다.
그가 느끼기에 진서인이라는 존재는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었다. 분명히 대한제국에 소속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옛 조선(朝鮮)과 등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진서인은 거기에서 빠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요동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곳은 마치 진서와 같으면서도 다른 곳이었다. 물론 명에게서 뺏어 온 영토라는 점에 있어서는 일본에게서 뺏은 진서와 크게 다를 점이 없었지만, 2할의 조선인과 8할의 진서인으로 크게 나누어진 진서와는 다르게, 요동은 조선인이 많기는 했으나 복잡한 인종 분포를 보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심왕가에서는 이런 것을 전혀 유념치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해 쓰고 있었으며, 덕분에 심양은 지금 조선계는 물론이거니와 원나라 때부터 이곳에 눌러앉은 고려 출신의 후손인 고려계, 그리고 여진인, 몽골인, 한인(漢人)에다가 지금은 비록 수는 적으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그리스인들까지 뒤섞여 있었다.
진서에서도 요동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수태 있었고,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다들 잘 적응해서 정착했다고 했다.
그러니 임승준이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면 요동만 한 곳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황성부의 4대 학교와 견주어서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기술학문에 있어서는 학습원(學習院)을, 어학에 있어서는 외학원(外學院), 유학은 성균관(成均館), 시문학(詩文學)은 경애학사를 가장 으뜸으로 쳤지만, 심양대학도 이에 견주어 문헌학(文獻學)과 고증학(考證學)이 수위였으며, 동로마 제국을 통해 전래된 이른바 희랍학(希臘學), 즉, 궁리학(窮理學, 철학)과 수사학(修辭學), 논리학(論理學), 기하학(幾何學), 자연학(自然學), 고전희랍어(古典希臘語), 라틴어 등에 있어서는 대한제국 전역에서 견줄 바가 없는 학교였다.
임승준은 그렇게 요동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1473년 봄에 심양에 도착해 심양대학에 입교했다.
그는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이내 관심이 수사학(修辭學)으로 옮겨졌다.
그는 수사학을 열심히 공부한 다음에 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대학사로, 지금은 심양대학에서 궁리학, 즉, 철학과 논리학을 강의하던 페트로스 테밀리오스(Petros Themilios)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임승준은 고전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논리학에도 정통하게 되면서 보다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는데, 바로 문법(文法)이었다.
고전희랍어와 라틴어는 이미 문법적인 체계가 분류되어 있었고, 이들이 보이는 특징인 격변화(格變化)와 성수(姓數)는 동양의 언어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임승준은 조선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어(漢語)에 매우 식견이 높았다. 임승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티베트어, 몽골어, 여진어에 지금은 사라진 거란어, 탕구트어까지 두루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동양 언어에 적합한 문법 체계를 발견하고 정식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내 졸업을 하게 된 임승준은 졸업 시험에서 갑등(甲等)을 받아 진사(進士)의 자격을 얻게 되었고, 원한다면 중앙정부의 관직을 밟기 위해 황성으로 가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승준은 우선 심양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황성에서 보통 4대 학교를 졸업하면, 관직에 출사하여 한림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고, 그곳을 나와 대부분이 관료로 등용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한림원에 속한 집현전(集賢殿)에서 연구를 하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니 집현전이야말로, 명문 4대 학교를 나와 한림원을 졸업하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국가 최고의 연구 기관이라고 해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심양에서도 이에 걸맞는 제도가 시행되려 하고 있었다.
심양대학을 나오게 되면 우선 졸업한 이들에게 전부 요동행정서의 문교아문(文敎衙門)에서 학사(學士)의 학위를 부여했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제국 본토의 진사(進士)와 거인(擧人) 사이의 학위로, 학사는 졸업 시험의 성적에 따라 진사일 수도 있고, 거인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학사의 학위를 취득하게 되면 1473년 심양대학에서 개설한 학유시보(學諭試補), 즉, 대학의 교원이 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과정에 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3년간 마치면 석사(碩士)의 학위가 나왔다. 이것은 심양대학에서 계속해서 급료를 받으며 머무를 수 있다는 자격 증명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요동행정서에 좋은 대우를 받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임승준은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이 과정에 응시했다. 갑등으로 졸업한 그가 통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언어학(言語學)의 기틀을 세우게 될 총아가 심양대학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477년
가경 33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瀋遼都督府)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
임승준이 학업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동로마 출신의 학자들은 같은 대학 안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나이가 꽤 들고 노쇠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곳에서 동로마 제국의 학예(學藝)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 중에서는 이곳에서 혼인을 해서 자녀를 가진 이들도 있었고, 드물지만 가족이 모두 이주해 온 이들도 있었다.
1478년 당시 부모 한쪽의 피라도 섞여 그리스계로 분류될 만한 사람은 심양에 총 60여 호 150명 내외였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학문적으로 탁월함을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심양대학에서 학유로 활동하거나 요동행정서의 관료, 그리고 일반 기술 부문에서 활발하게 업적을 남기고 있는 이들은 고작 마흔 명 내외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지난 20여 년간 가르침을 받은 학생의 수는 점차 늘고 있었고, 이들은 이제 심양을 중심으로 요동의 각지에 나가 성과를 내고 있었다.
대부분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심요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중앙 관직에 나아가 황성부로 가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가기도 했다.
강백진(康伯珍)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말단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렵사리 학문을 공부하고자 뜻을 세워 심양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법학을 깊이 공부하고, 고전희랍어도 익혀 로마법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꼼꼼히 주해를 달아 가며 익혔다.
이것을 중국의 법률과 비교한 《법리촬요(法理撮要)》는 재학 중 쓴 글임에도 1471년 출간되었을 당시 크게 호평받았다.
강백진은 한경조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법학에 있어서 논리학과 수사학의 중요성에 대한 한경조의 이론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1474년 학유시보로서 석사 과정을 위해 개설된 동문숙(同門塾)에 입교하여 1477년에 석사의 학위를 취득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림원에 들어간 강백진은 특별히 심양대학에만 있는 석사 과정에 대한 특례(特例)를 인정받아 한림원을 1년 만에 마무리 짓고 법부(法部)의 주임관(奏任官)인 통덕랑(通德郞)에 임명되었다.
법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뒤, 강백진은 개성의 육전학당(六典學堂)에 들어가 법리학을 연구하고, 경상도 대구의 도법원(道法院)에서 예비판사(豫備判事)로 근무했다.
이때 강백진은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끌고 있던 김종직(金宗直)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내의 학문 사조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조선 개국 당시에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를 주축으로 한 정통 성리학에 이어, 세훈에 의해 탐라학파(耽羅學派)가 등장했었다. 탐라학파는 김세훈, 최해산 등에 의해 격물학(格物學)의 체계를 세우고 각종 실용적인 태도로 실제 정치에 접근하는 태도로 신진사대부와 대별되었었다.
이 탐라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독자적으로 계속 이어지지는 못하고, 경사학파(京師學派), 혹은 관학파(官學派)라 불리는 한림원, 특히 집현전 중심의 학문 사조와 관서학파(關西學派)라 불리는 요동과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학문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관서학파와 관학파의 차이점 중, 가장 큰 것은 성리학에 대한 취급 문제였다.
관서학파는 김종서에 의해 정리되어 세훈의 손자인 서윤에게 이어졌고, 심왕가에서 세운 어립심양문리과대학에서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들의 학문적 전통은 심양으로 건너온 동로마 학자들과 결합되었고, 전반적으로 성리학 전체를 부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만을 전범으로 삼는 철저한 실증적 학문 체계를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관학파의 경우 기존의 유학과 세훈이 요구했던 실용주의의 경계를 허물고 절충하려는 시도로, 허조를 비롯한 한림원 학사들에 의해 정립이 처음 시도되었다.
이후, 격물학(格物學)을 기존의 유학적 전통 안에서 해석하려는 발호를 통해 충녕군 이도에 의해 집대성되어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중 일부는 심양으로 건너가 요동행정서와 심양대학에 관여하며 이들 관학파와 관서학파의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반면, 기술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고 농본주의를 주장한 사조도 등장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직이 주장한 농업입조(農業立朝), 즉, 농업이 나라의 근간이라는 이론이었다.
이직은 철저히 새로운 격물학을 기존의 유학에 부수하는 경세(經世)를 위한 부차적 학문으로 취급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관학파 출신으로 이직에게 감명을 받은 성삼문(成三問)에 의해 정리되었고, 성상문이 크게 관여한 공주의 상학(庠學)을 중심으로 호서학파(湖西學派)가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완고한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학맥을 가장 정통적으로 이은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嶺南學派)였다.
이미 전반적인 학문적 추세가 이기론(理氣論)을 그 핵심으로 하는 성리학과는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느낀 김종직은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성리학을 좀 더 현실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학문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성리학에 입각한 정책을 내부(內部)에서 주임관으로 봉직하던 시절에 여러 차례 내어 보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내각(內閣)에서 반려되어 돌아왔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정도(正道)에서 멀어져 천박한 학문을 가까이 한 조정 관료들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실질적으로 성리학이 효용성을 지니려면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세의 묘용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강백진이 대구의 경상도 도법원에서 예비판사로 일하고 있을 때,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와 있었다.
대구(大邱)는 1424년 갑진경장 때, 원래의 이름인 대구(大丘)에서 구(丘)가 공자의 이름인 공구(孔丘)의 구자와 같다고 하여 이를 휘(諱)해 구(邱)로 고친 뒤 경상도 감사영을 설치했다.
김종직은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온 뒤, 대구상학(大邱庠學)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깊게 관심을 쏟는 한편, 동시에 성리학의 실제 적용에 어떠한 수단적 방론이 있을 것인지 깊이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그러던 와중에 강백진이 쓴 《법리촬요(法理撮要)》를 읽게 되었고, 그중에서 자연법(自然法)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강백진에 따르면 자연법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상에 본디 주어진 천성이 있어 이것에 의해 저절로 지켜야 할 규범화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할 것, 사람을 죽이지 말 것, 서로를 해하지 말 것 같은 기본적인 도덕 원리들이 자연에는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로마의 자연법 사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강백진의 견해는 김종직에게 성리학이 실질 학문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실마리를 주었다.
때마침 강백진이 대구의 경상도 도법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종직은, 그를 감영으로 초청하여 학문적 견해를 나누는 자리를 가지기 시작했다.
“주자께서 말씀하신 이기론을 바탕으로 법리적 해석이 가능하단 말씀이시오, 그럼?”
“그렇습니다. 사실 자연법이라는 것이 그 근원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법이 인간의 판단에 근거한 실정법과는 다른 것이라고 했고, 스토아가(家)에서는 자연법이야말로 올바른 이성에 부합하는 완전히 평등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대진국(大秦國)의 대학자 키케로는 진정한 법이란 모든 인간 안에 스며 있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키케로가 말하는 올바른 이성이라는 것이 주자께서 말씀하신 이기(理氣)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라는 것이, 한편에서는 이가 자연법칙을 가리키며 또 한편에서는 사람의 윤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지요. 이 자연법칙과 상통하는 사람의 윤리라는 것이 바로 자연법이 추구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백진에 대답에 김종직은 큰 감명을 받았다. 강백진 또한 김종직의 끊임없는 학문적 열정에 감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김종직은 성리학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강백진 또한 김종직에 의해 성리학적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김종직과 강백진은 각각 황성부로 다시 올라와 관직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문인(門人)을 받고 이들을 조직하여, 남산 아래에 성양재(成樣齋)라는 문당(文堂)을 열고 학문적 교류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 문하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 이맹전(李孟專), 이종준(李宗準) 등이 모여들어 학문을 논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학문의 틀을 성리학에서 출발하되, 자연법(自然法) 사상 등을 강론하며 생활에서 이(理)를 구하기 위해 실천하고 행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비록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비평적으로 습득하며 관직에 출사하기도 하여 도덕적인 정치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1479년
가경 35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경기도 예성부 벽란도.
벽란도는 고려 때부터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항구였다.
예성강 하구에 자리 잡아 배가 들고 나기에 넉넉했으며, 도읍이었던 개경이 배후에 있어 그 외항(外港) 노릇을 했다.
비록 도읍은 한성, 즉, 지금의 황성부(皇城府)로 옮겨 갔으나 이 무역항의 기능만큼은 세파를 견디고 살아남아 흥정 원년, 즉 1433년에는 인구가 물경 3만에 다다른 이 벽란도에 예성부(禮成府)를 설치하였고, 예성부사의 휘하에 벽란도승(碧瀾渡丞)을 두어 항만 관리를 감독하고 있었다.
이 항구를 통해서 많은 물품이 들고 나갔는데, 최근 들어 이 벽란도에서 나가는 주요 수출품으로 급부상한 것이 바로 서책(書冊)이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대한제국은 확실히 주변 국가에 비해 학문적인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명나라로부터의 학문적 영향이나, 그에 따른 서책의 수입은 거의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고, 오히려 대한제국에서 펴낸 책이 명나라로 수입되어 들어가 그곳 학자들에게 읽히는 역조(逆潮)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문으로 간행된 책들은 비교적 주변 국가에서 접근하기가 용이한 것이었고, 명을 비롯해 대월(大越), 유구(流球), 일본(日本) 등지로 끊임없이 수출되어 나가고 있었다.
주흥섭(周興燮)은 이 벽란도에서 서책만을 전문으로 도매 취급하는 장사꾼이었다.
원래 송상(松商)의 계리(計理)였던 그는 문자에 밝았고 글을 읽는 것을 즐겼다. 때마침 인쇄술의 개발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책들을 그는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주흥섭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서책이 그럴싸한 수출 품목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당대 중국의 학문적 영향력은 적어도 대한제국 내에서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타국에서 제국 내에서 펴낸 서적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학문적 열등감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대한제국에서 그간 펴낸 서적들이 실질 정치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책이거나, 격물학 관련 서적이거나, 혹은 그리스 로마 고전의 국문 번역이거나 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문과 국문이 병서된 책이 주종을 이루기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특수성이 있는 대한제국의 서적들을 외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사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해외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서적은 조금씩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 물결을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낀 이들 중 하나가 주흥섭이었다.
그는 벽란도의 송상 상관(商館)에서 일하던 때에, 우연찮게 진서 박주(博州)에서 온 진서인 상인과 교류할 일이 생겼다.
이 박주 상인은 벽란도에서 직접 물건을 자기 소유의 선박으로 실어다가 박주를 통해 일본으로 내다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주로 거래하는 품목은 도자기와 철괴 등이었고, 더러는 쌀도 매입해 가곤 했다.
“요즘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진서에서 대단한 인기입니다. 한문으로 쓰여 있어 조선말이 조금 짧더라도, 글을 배운 식자(識者)들은 보고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벽란도로 오는 길에 책을 여러 권 부탁받았고, 진서를 통해 일본의 학승(學僧)들도 즐겨 구해 봅니다. 저도 이번에 금오신화를 몇 편 구매해 두었습니다. 인쇄기로 찍어 내 값이 비싸지 않고, 선물을 하기에 부담 없으니 책만큼 좋은 물건이 없습디다.”
이 박주 상인은 그저 진서를 거쳐 일본에서도 김시습의 책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만, 주흥섭은 좀 더 별다른 냄새를 맡고 있었다.
박주 상인은 그저 책이 선물하기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주흥섭은 여기서 대한제국에서 찍어 낸 책을 국외로 내다 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나라 밖에서 찾는 사람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더군다나 많은 책들이 국한문의 병용(倂用)이기는 하나, 한문으로만 찍힌 책들도 더러 나오니 같은 문자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동양 안에서는 거래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송상에서는 특별히 행수들의 수장을 대행수라고 하지 않고 도방이라고 불렀는데, 주흥섭은 직접 이 도방 서석린(徐碩隣)을 찾아갔다.
“서책을 무역하고자 합니다. 제가 계리로 일하다 보니 장사를 해 모아 둔 돈이 없습니다. 분명히 돈이 될 일이니 차금(借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서석린은 처음에는 이 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주흥섭은 오랜 기간 송상에서 일해 사업을 벌이고자 하면 송상에서 대출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서석린은 당장에 큰돈을 내어 주지는 않고 조금 지켜보자고 주흥섭을 달랬다.
서석린이 생각하기에 주흥섭의 계산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었던 것이다. 노회한 서석린은 사업에 있어서 예민한 촉수를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 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하니 만큼 주흥섭이 들고 온 전례 없는 사업에 미심쩍은 반응을 보인 것은 서석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흥섭의 생각은 달랐다.
주흥섭은 공연히 이 일에 덤비는 것이 아니었다. 황성과 개성을 오고 가며 출판업을 하는 이들과 접촉해 책을 찍어 내는 단가를 이미 알아보았고, 이것이 아직 대량 인쇄를 하지 못하는 명이나 일본의 서책의 값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명, 일본, 유구, 대월의 상인들과 접촉하여 이미 소규모로 일부의 상인들이 책도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파악했다. 그러니 제대로 자금만 들어가서 일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주흥섭의 생각이었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가경통보로 1만 냥만 내어 주시면, 좋은 결과로 송상에 득이 되도록 보답하겠습니다. 설사 일이 잘되지 않아 손실을 내게 된다면 제 집과 전답을 모두 내어 차압하셔도 좋으니, 제 재산을 모두 담보로 걸고 자금을 내어 받겠습니다. 이 일은 저만의 이익이 아니라 송상 전체에 있어서도 큰 수익이 될 터이니, 부디 한 번 제 판단을 믿어 주십시오.”
주흥섭의 고집에 서석린은 송상의 행수들과 상의한 끝에 8천 냥을 내어 주었다. 나상과 마찬가지로 송상도 고려말부터 송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들의 계로부터 출발한 상단이었다.
그러니 만큼 상단 소속의 장사에 대해서는 비록 밑지더라도 지원을 해 주게끔 합의가 되어 있었다.
송상에 오랜 기간 몸담아 왔던 주흥섭에게 대부를 거절한다는 것은 송상의 전체적인 기율을 생각했을 때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서석린을 비롯한 송상의 행수들은 주흥섭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담보까지 잡았으니 믿고 빌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원했던 1만 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8천 냥이라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
벽란도 항구에 면한 목 좋은 곳에 적당히 큰 창고가 딸린 건물이 대략 은화 5천 냥 정도에 거래되었으니, 장사를 시작하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돈이었다.
주흥섭은 그간의 인맥을 이용해 항구에 면한 곳에 4천 냥이라는 시세보다 싼값으로 3층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전성기였던 고려 초를 지나 고려시대 중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조선초에 들어서서도 벽란도는 여전히 나라 제일의 항구였고, 이내 예성부가 설치되고, 세훈의 등장 이후 대외 무역이 진척되면서 벽란도는 다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벽란도의 항구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황성부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벽돌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주흥섭이 매입한 건물도 이러한 것들 중 하나로 지은 지 15년도 안 된 건물이었다.
이곳에 “해동서관(海東書館)”이라는 간판을 내걸고는 나머지 돈으로 황성과 개성에 있는 인쇄소들과 계약을 체결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1천 냥으로는 송상 선적의 선박을 1년간 임차했다.
주흥섭이 처음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품목은 단연 김시습을 필두로 한 문학 작품들이었다.
김시습이 내어 놓은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한문 소설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을 국역(國譯)한 해적본이 떠돌 정도로 민간에서도 즐겨 읽고 있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작품 중에서도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황제 이현도 읽고 김시습의 재주가 대단하다고 감탄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드넓게 읽혔다.
김시습에 이어 여러 시중의 작가들이 이를 모방한 소설들을 내어 놓기 시작했는데, 사대부들이 소일 삼아 품격 있게 써 낸 것들은 한문(漢文)으로 쓰여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고, 저자의 말솜씨 좋은 입담꾼들이 구술하는 것을 받아 쓴 작품들은 순 국문으로만 쓰여 출판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 주흥섭은 한문 소설들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미 김시습의 이름은 명과 일본에도 알려져 있어 그의 이름을 선전하며 나머지를 파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벽란도에 기항하는 외국 상인들에게 직접 판매를 하는 대신, 주흥섭은 송상에서 임차한 선박을 끌고 나서 진서의 박주(博州)와 기주(崎州)에 들러 서적의 공급 계약을 채결하고, 다시 남쪽으로 건너가 유구국(流球國)에도 거래선을 뚫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영파로 건너간 주흥섭은 그곳에서 명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계약을 체결하고서는, 선급금으로 은화 4천 냥을 벌어 왔다. 주흥섭은 그것을 고스란히 배를 임차하고 책을 구매하는 데에 재투자했다.
주흥섭의 사업은 갈수록 성장하기 시작했다. 주흥섭이 취급하는 품목은 소설에서 시부(詩賦)로, 거기에 정갈한 활자로 찍혀 나온 경전(經傳)으로 넓어져 갔다.
1472년에 이르러 주흥섭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황성의 박문사(博文社)에서 금속활자의 전집으로 찍어 낸 것이다.
불교를 고려 망국의 원인으로 보았던 유교 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었던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계층을 막론하고 생활이 뿌리 깊게 자리한 종교였다.
더군다나 그 집판(輯版)에 있어서 천하제일이라고 일컬어졌던 고려의 대장경이었다. 이 대장경에 대한 사실은 주변 여러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을 뿐더러, 국내에서도 한 번 견식하고자 하는 이들이 해인사 문주를 닳도록 밟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것을 인쇄기로 찍어 낸다는 것은 수요를 보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이 대장경에 대한 갈망이 높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주흥섭은, 이 《고려대장경》의 초간된 1천 질 중에서 5백 질을 거금 4천 냥에 구입하여 곧바로 진서로 건너가 풀었다.
이것은 바로 기주에 있는 거래처를 통해 일본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알려져 이를 구매하고자 하는 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부유한 사찰과 다이묘들, 그리고 돈 있는 상인들과 쿄토(京都)의 공경(公卿)들이 모두 이 《고려대장경》의 전질을 갖추길 원했다.
이것을 독점적으로 일본에 들여 판 주흥섭이 큰돈을 만지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대한제국의 내에서 팔려 나간 물량과 거의 비등한 숫자로 일본에서 팔려 나갔다. 명과 유구에 들어간 분량까지 합한다면 오히려 국외에서 판 수량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 국외 판매를 주흥섭이 꼭 잡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대장경을 통해 큰돈을 번 주흥섭은, 그 자본금으로 남아 있는 송상에 진 빚을 모두 갚고, 거래처였던 출판사인 박문사마저 사들였다. 보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직접 국외를 겨냥한 서책을 찍어 내 파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그 이윤이 고스란히 주흥섭에게 돌아오는 것이니, 출판소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썩 괜찮은 일이었다.
그러는 한편 주흥섭은 판매 대상을 경전에서 더 넓혀, 그간 대한제국 국내에서만 소비되고 있던 격물학(格物學) 서적과 관서, 경사, 호서, 영남학파 등의 주요 저술을 취합해 직접 찍어 낸 책을 해외로 팔기 시작했다.
조정에 의해 엄격이 제한된 기술 서적을 제외한 이러한 사상서(思想書)들은 국외의 반출에 대한 제한이 없었고, 주흥섭은 이러한 책들을 마음껏 국외로 팔 수 있었다.
국외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책들은 주로 영남학파의 저술들이었다.
성리학적 전통에 깊게 입각해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점필재집(佔畢齋集)》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명에서 팔려 나갔다.
전통적 유교관에서 크게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대한제국에 비해 명나라는 사상적인 큰 변혁 없이 송나라 이래로 전래된 주자학을 답습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한 상황이니 만큼 변화의 요구를 점차 받고 있으면서도 국시(國是)나 다름없는 주자학을 무너뜨릴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주자학, 즉, 성리학은 중앙집권적인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사상적 수단이기도 했을 뿐더러, 이것이 송과 원을 거치면서 지방의 신사 계층에게까지 내면화되어 있어 대한제국에서 건너오는 개혁적인 사상을 이들이 흡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학파의 저술의 경우에는 이러한 성리학적 세계관을 토대로 일종의 사상적인 진보까지 이루고 있어 명나라의 식자층에 의해 손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점필재집》은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정직해 까다로운 명의 유학자들에게서도 격찬을 받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것은 개성공 충녕군 이도의 저술들이었는데, 이미 수십 년 전 대한제국에서 크게 읽혔던 이도와 장영실이 함께 집필한 《격물학론(格物學論)》은 일본의 지식층에 널리 읽히며 큰 충격을 끼쳤다.
이미 대한제국에서는 각종 학교의 일차적인 강독본(講讀本)으로 벌써 두 세대 넘게 가르쳐지고 있는 책이었으나, 일본에서는 뒤늦게 이 책을 주흥섭을 통해 접하게 된 셈이었다.
더군다나 기해동정 이래 대한제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일본의 식자층들 사이에서 걸러지는데도 시간이 걸렸으므로, 이렇게 대한제국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수십 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물학 관련 서적들은 일본에서 빠른 속도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혼슈(本州)를 중심으로 다이묘들이 성장해 쿄토의 조정과 막부를 누르기 시작하면서 전국(戰國)의 혼란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일본이었기에, 이러한 서책은 주로 세외, 이러한 정세에서 비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대규모 사찰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들 대규모 사찰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일종의 장원(莊園)을 이루고 있었고, 각 종단(宗團)에는 일종의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들이 산재해 있었다.
더군다나 유교적 관습과는 무관한 불문(佛門)이기에 이러한 격물학 서적이 안정되고 손쉽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흥섭이 취급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주로 어립심양문리과대학과 집현전(集賢殿)에서 편수되어 나온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었다.
이것은 거의 국한문 병용으로 옮겨지고, 주해 또한 국한문의 병서로 달려 있었기에 주흥섭은 우선 이것을 한역(漢譯)하기 위해 서생들을 고용했다.
대한제국의 서책의 반향에 비해 조선어를 습득하고 있는 사람은 바다 바깥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서책의 전파도 한문(漢文)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니, 주흥섭은 국한문 병용의 책들을 매끄러운 한문으로 옮기는 것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한문으로 옮겨진 책들은 명과 일본보다 유구와 대월에서 그 반응이 좋았는데, 각각 학문적인 견고한 전통이 있는 명과 일본에 비해서 유구와 대월은 외부 학문의 흡수에 대해 비교적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이 쉽게 팔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479년에 이르러서 주흥섭은 이 성공을 발판으로 송상의 행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의 성공담을 본받아 뒤늦게 서적의 해외 판로에 뛰어드는 이들도 점차 생겨나고 있었다.
명의 영파에서는 주흥섭의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인근의 남경(南京)에서 온 책장수들이 부두에 떼로 앉아 거적을 두르고 책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고 할 정도니, 그 인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