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3장 문예부흥(文藝復興) (34/82)

제33장 문예부흥(文藝復興)

「기실 작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새로운 학문의 경향을 익히는 것을, 무슨 난초나 서예 따위의 선비의 잡스러운 취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건대 이들은 제 우물을 더 넓히는 것도 싫음은 물론이거니와 남이 제 우물을 더럽히는 것도 원치 않기 때문이 이렇게 애써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실상 국중(國中)의 대학에서는 주자학을 넘어서 학문이 강론되기 시작한 지 이미 수십 해가 지났고, 유학(儒學)과 잡학(雜學) 사이의 경계도 사라진 지 오래가 되었다. 이기(理氣) 운운하며 과거의 헛된 망령에 잡혀 있는 것은 몽골이 한인(漢人)들을 다독여 다스리기 위해 주자의 학문을 국시(國是)로 삼고, 이것이 고려를 통해 들어와 남아 있는 학문의 대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가경연간에 이르러 국학(國學)이라 불릴 만한 학문들이 정립되어 주자학을 벗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강연하고, 먼 서역의 성인(聖人)들이 남긴 지혜로운 글귀들도 접하게 되었다.

중국만이 중화(中華)가 아니라, 아조(我朝) 또한 자강(自彊)하여 칭제(稱帝)한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옆 나라의 글귀에만 아부하고 읊조리는 이들이 남아 있는 것은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정묵(鄭默), 『시평(時評)』 중

1480년

가경 36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황성부.

안평군(安平君) 이용(李瑢)은 올해로 예순셋이다. 그는 개성공 충녕군 이도의 셋째 아들로, 이도가 귀국하여 사면받은 뒤, 1430년 종친으로서 안평군에 봉해졌다. 1431년에는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한 뒤, 한림원(翰林院)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3년간의 문부(文部) 주임관(奏任官)의 관직 생활을 제외하면, 황성부에 있는 자기 저택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부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보냈다.

그는 젊은 시절, 황보인, 김종서 등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관서학파(關西學派)의 학문적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시문, 그림, 가야금과 서예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꼽힐 정도였다.

짧은 관직 생활 뒤에 그는 예기를 갈고닦는데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어차피 황실 종친으로서 생계는 안정되어 있었고, 추밀원 의원으로서 참예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활동은 그가 생각하기에 차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연을 맺게 된 것이 안견(安堅)이었다.

안견은 원래 지곡(池谷) 사람으로, 화가로서 이미 명성이 높았다. 그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안평군 이용은 안견을 직접 초청해 자기 집에서 생활을 돌봐 주며 함께 그림을 그리고, 화법(畵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덕분에 안견은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1447년에는 걸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릴 수 있었다. 안평군이 발문(跋文)을 써 준 이 작품은, 이내 황성부에서 크게 그 그림이 대단한 솜씨라고 소문이 나게 되었고, 이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안평군의 저택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안견은 원래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郭熙)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중국 화가들의 장점을 절충하여 그림을 연마했었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에도 능해 안평군은 그를 아낄 수밖에 없었다.

《몽유도원도》를 그렸을 때 그의 나이 고작 스물둘이었으니, 앞으로 그가 그릴 그림들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가 그림을 더욱 경지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내게 말하게. 내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대에게 구해다 줄 터이니, 어려워하지 말고 부탁하라, 이 말이네.”

안평군은 안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견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림을 계속해서 연마해 나갔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는, 그 화법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가될 정도로 탁월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안견의 발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이 마흔넷에 이르러 안견은 새로운 화법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당시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로부터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의 유민들은 각종 서책을 짊어지고 제국에 입국했다.

안평군은 이때부터 이러한 서책들을 구해 보기를 즐겨했고, 안견도 곁에서 이러한 책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양장으로 제본된 이러한 그리스 서적들은 풍부한 삽화가 곁들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특유의 그림들은 안견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견은 여기에 호기심 이상의 반응을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찮게 안평군을 따라 심양으로 갔다가, 그곳의 심양대학에서 보게 된 몇 종의 이탈리아 책은 그로 하여금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이 책들에 들어가 있는 도판(圖版)은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원근법(遠近法)의 원리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들이었고, 실제 보는 것과 같은 장경(場景)을 연출하는 이러한 기술적인 원리들은 안견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안견은 그때부터 안평군을 통해 이러한 그림을 최대한 구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기회가 된 것은 나상을 따라 입국했던 베네치아 상인 빈첸초 모나텔리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원근법의 원리를 알고 취미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모나텔리는 안견에게 이러한 원근법의 투사원리(透寫原理)를 대충이나마 설명해 줄 수 있었다.

이미 그 역사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리스 화가 아폴로도로스는 광선에 의한 사물의 현상에서 음영화법(陰影畵法)을 창시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에서 색채의 농담 변화를 통해 공간 감각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세기를 지나 12세기 무렵에 이르면 시각론(視覺論)을 통해 세상을 정밀하게 그려 낼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원근화법의 등장과 함께 조토에 의해 정립되게 이른다.

피렌체의 화가들은 이미 이때로부터 시점을 고정시켜 놓고, 이에 대응하는 점들을 화면에 펄쳐 놓은 뒤, 지평선을 상상하여 이들 사이에 선(線)의 형태를 조율하여 원근감을 줄 수 있는 선원근법(線遠近法)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공간 감각을 보다 느낄 수 있도록 색채와 명암의 농담에 대한 지식도 늘려 나감으로 인해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이 등장할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모나텔리는 베네치아에서 화가들과 교류하며 이러한 방법론을 습득한 바 있었고, 이것이 안견에게도 전해졌던 것이다.

안견은 이렇게 익힌 원근법을 다양한 그림에 적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는 그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하여 그림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느껴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먹의 농담(濃淡)을 조절하여 자연스럽게 공기의 질감까지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안평군은 안견이 그려 낸 이 《소상팔경도》를 보고서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탄복했다.

“그대의 그림이 과연 이제 경지에 이르렀나 보네. 마치 실제 풍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 그림이 이리도 사람에게 큰 감화를 줄 것이라고는 내 알지 못했었네. 서국(西國)의 화법이 이리 녹아 들 수 있었던가?”

안평군은 그저 감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안견이 그림을 그린 묘용에 대해서도 궁금해 했다.

평소 서화에 관심이 많은 안평군이 아니라면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런 물음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옛 중국과 본국(本國)에서도 먼 데 있는 것은 화폭의 위쪽에 놓고, 가까운데에 있는 것은 아래쪽에 놓고 그려와 그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동진(東晋)의 고개지(顧愷之)는 여사잠도(女史箴圖)에서 먼 위치의 것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 것은 크고 짙게 그려 그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나이다. 남송(南宋) 화가 종병(宗炳)의 산수화는 서국(西國)의 화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산수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쪽의 화법이 새로운 것은 아니나, 이것의 정밀함은 일전 없던 것이기에 필히 이것을 차용할 경우 보다 그림의 묘사를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이다.”

“그렇지. 옛말에도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고 하고,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다고 해서, 그 보이는 장경에서 멀고 가까움을 어떻게 묘사할지 일러 두기도 했지. 그러나 자네의 이 그림은 그 정밀함이 이루 말할 바가 없어 한눈에 펼쳐지는 듯하고, 대칭 또한 완벽하니 이것이 서법(西法)의 묘용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깊이 감복한 안평군은 안견에게 아주 화방(畵房)을 차려 주고, 도제들을 모아 교육시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화방은 서소문 밖 복사골[桃花洞]에 들어섰고, 장안화국(長安畵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안평군은 또한 나상에도 접촉하여, 가능한 이탈리아의 그림들을 구하려 애썼는데,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나 제노바 상인을 통해 이를 들여오려면 수 년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금과 품이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안평군은 사재를 털어 이것을 구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안평군의 노력 덕에 안견은 동서의 화풍을 절충한 그의 그림을 좀 더 가다듬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진력할 수 있었다.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 《팔준도(八駿圖)》, 《적벽도(赤壁圖)》등의 걸작이 이 시기에 이르러 세상에 나와 큰 찬사를 받았다.

이외에도 안견은 도시의 정경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1476년에 그린 《황성도(皇城圖)》를 시작으로 그중 걸작으로 뽑히는 《조시성경심양부도(鳥視盛京瀋陽府圖)》는 하늘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려졌다.

일종의 조감도(鳥瞰圖)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은 심왕부에 기증되어, 심왕세자 서윤이 집무를 보던 외당(外堂)에 걸렸다.

안견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 이들은 후일 주경화파(朱耕畵派)라 불리게 되었는데, 주경이란 다름 아닌 안견의 호였다.

이들은 이후에도 동서의 화풍을 절충하여 독창적인 그림을 그려 내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고, 스스로도 뛰어난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자들을 길러 낸 안견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국화공(國畵公)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안견을 끊임없이 지원해 주었던 안평군의 은덕에 대한 칭송도 뒤따랐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가 안견을 위해 구해 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라 프리마베라 (La Primavera)》의 모작은, 모작임에도 은화 3천 냥에 달하는 거금을 소요해서야 들여올 수 있었다.

안평군은 이 그림에 발문(跋文)을 넣어 족자로 만들었고, 이것은 안견의 장안화국에 걸려 있다가 황제에게 진상되어 경복궁 향원정에 걸리게 된다.

1480년

가경 36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강원도 금강산.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어린 시절 그 총명함이 자자해 장안에 소문이 났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경애학사를 졸업하고, 다시 학습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친 다음 관직에 오르지 않고, 심양으로 건너가 심양대학에서도 학문을 했었다.

이곳에서 그는 서윤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어 요동행정서 문교아문(文敎衙門)의 판서로 공직 생활을 했다.

이 시기 그는 걸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하고, 요동도독부의 각 부군(府君)에 내지의 상학(庠學)에 갈음할 수 있는 향교(鄕校)를 세웠다.

이 향교는 다른 이름으로 중학(中學)이라고도 했으며, 이 아래에는 소학(小學)을 세워 소학―중학―대학으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오래 앉아 있지는 않았는데, 서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465년에 더 이상의 관직을 사양하고 은둔할 것을 거듭 청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기지 않고, 생업에도 큰 연이 없어,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나이다. 다만 학업을 계속하다 뜻이 닿아 열 해를 넘게 이곳 요동에서 선비 된 본분으로 민생을 일으키고자 관리의 삶을 살았으나, 본시의 성정과 맞지 않아 이제는 내려놓고자 합니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였고,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겨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는 것이 타고난 품성이라, 문장으로 관직에 올랐던 것만으로도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지금에 와서 느끼기를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행할 수 있는 데도 몸을 깨끗이 보전하여 윤강(倫綱)을 어지럽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나이다. 천성이 명리와는 거리가 멀어 관직에 오래 있을수록 자기 자신을 돌보기가 어려워지니, 이제는 그만 관직을 사양하고 천하의 명승을 유람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시습의 의지가 굳음을 확인하자, 서윤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놓고 만류할 수 없었다.

김시습은 그 길로 관복을 벗고 평양(平壤)으로 내려갔다가, 개성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명승을 유람하다가, 황성부로 들어가 그곳에서 잠시 모교인 학습원에서 교편(敎鞭)을 잡기도 했다.

그 뒤에도 유람기(遊覽記)와 소설의 집필을 계속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문학성이 뛰어나고 글의 생동감이 있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독자들을 얻었고, 황성부에 들어오는 외국 사신들도 그를 한 번 보고자 청할 정도였다.

그 뒤, 김시습은 돌연 강원도로 떠나 그곳에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을 나누며 그를 찾아 함께 산수(山水)를 즐기거나 서신 왕래를 하거나 했다.

그는 유자한의 거처에 잠시 들러 가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양양,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그는 유자한의 요청으로 양양의 상학(庠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이때 강원도의 명승을 둘러보고 쓴 100여 편의 시를 《관동일록(關東日錄)》으로 묶어 냈다.

이 《관동일록》은 나오자마자 또 호평일색으로 시중에서 넓게 읽혔는데, 김시습의 문장은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그의 소설과 시를 모방한 작품들이 연일 쏟아져 나왔으며, 이른바 매월당풍(梅月堂風)이라는 문체 풍조가 유행할 정도가 되었다.

김시습은 그러나 이때에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금강산 장안사로 들어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했다.

“출가(出家)를 하신다구요?”

장안사 주지 무염(無厭)은 김시습의 말에 적잖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관직까지 내려놓고 유랑 생활을 하다 산중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겠다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던 까닭이다.

조선 초에 유교(儒敎)가 국시가 되고, 척불(斥佛)이 나라의 기풍이 된 이후로, 사찰들은 성읍에서 쫓겨나고 산으로 들어가 혹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세훈이 집권하고 시대가 흐르는 와중에서도 배불(排佛)의 정책은 강조되지도 않았지만 따로 폐지되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굳이 불교를 쫓아낼 필요도 없지만 장려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조정의 중론이었다.

때문에 승려가 도성을 출입하는 것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찰을 성안에 세우는 것은 불법이었다. 다만, 성 밖의 성동(城東), 용산(龍山)에는 사찰들이 세워져 신도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고, 팔관회도 큰 규모로 열리는 등, 불교는 점차 고려 때의 융성함을 다시 회복하려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관료를 비롯한 사대부층의 불교에 대한 냉대는 변함이 없었고, 그러한 사대부 출신의 김시습이 승려가 되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계율을 지키며 산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주지 스님. 그간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어 암자를 하나 지어 희사(喜捨)하겠으니 부디 속세의 때가 잔뜩 묻은 저이나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조용히 정진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주지 무염의 걱정에 김시습은 확고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날로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장안사의 승려가 되어 조용히 불경을 외고 글을 읽으며 은인자중 하는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道敎)에 이어서, 그리스·로마의 철학사상을 섭렵해 나갔다. 그는 이를 비교하며 도(道)를 찾는 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공부에는 좀 진척이 있으신가 모르겠습니다.”

김시습이 장안사에 희사한 암자, 금오당(金鰲堂)은 금강산 골짜기를 한참을 들어가야 있었고, 김시습은 이곳에서 기거하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주지 무염은 종종 이 금오당으로 찾아와 김시습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김시습 또한 이 학식 높은 고승(高僧)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곤 했다.

“늘 그렇지요. 성현들의 차고 넘치는 말씀을 어찌 글 몇 줄 보아 깨닫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만도 장경 판적이 수태인데, 평생 보아도 그 오의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진척 있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러나 김시습의 겸손과는 달리 그의 학식은 어지간한 이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범주에 접어들고 있었다.

절필을 하여 공개적으로 글을 쓴 지도 오래되었음에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절절히 힘이 있었으며, 경전을 두루 꿰는 그의 학덕은 공부를 많이 한 장안사의 승려들도 감히 넘겨 볼 바가 못되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간 공부한 바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돌연 든 김시습은 주지 무염에게 청을 넣었다.

“무엇입니까?”

“글을 쓸 수 있도록 종잇장과 필묵(筆墨)을 좀 넣어 주십시오. 잔잔히 배려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지 무염은 토를 달지 않고, 바로 다음 날로 강릉부에서 가장 좋은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구해다가 금오당으로 올려 보내 주었다.

김시습은 이곳에서 글을 써 내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소설과 시부는 짓지 않고 오로지 도(道)에 대해서 강론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써 낸 책은 《논강(論講)》이었다.

이 책에서 김시습은 논어와 불교의 초기경전, 그리고 플라톤의 저술들을 폭넓게 탐독한 것을 풀어 나갔다.

이들의 특징은 공히 위대한 성현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말을 대화편(對話篇)으로 묶었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논강》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논강에는 세훈과 충녕군 이도, 그리고 김시습 자신을 의인화한 매월당(梅月堂)이 등장한다. 김시습은 여기서 매우 풍부한 경전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군자로서 지녀야 할 덕이란 무엇이며, 정치는 어떻게 행해져야 하고, 또 인간의 윤리는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이 《논강》은 1481년 장안사에서 처음으로 목판으로 인간(印刊)이 되었고, 그해 겨울에는 주흥섭이 이 책을 구해 읽은 뒤 김시습을 직접 찾아와 사정한 끝에 인쇄를 허락받아 자신이 소유한 황성의 박문사(博文社)에서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박문사에서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김시습의 명성을 등에 업고 책은 날개가 돋힌 듯 팔려 나가게 되었다.

이 출판 대금으로 받은 돈이 적지 않았는데, 김시습은 이것을 몽땅 장안사에 희사하고서는, 다시 새로운 집필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동서의 고전을 폭넓게 역주(譯註)하고 그 사상들을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훗날 《주론대계(主論大系)》라는 이름으로 편찬되게 된다.

김시습은 이 책을 죽을 때까지 장안사에서 머물며 집필을 계속했는데, 결국 저술을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 김시습 문하(門下)에서 성장한 서생과 승려들이 이 《주론대계》의 주해서(註解書)를 집필하는 동시에, 생전 출시되었던 김시습의 저술들을 바탕으로 이 《주론대계》의 뒷부분을 가필(加筆)하여 완성하게 된다.

총 96책 15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로 완성된 이 책은 국중(國中)에 널리 전해져 읽히게 되니, 가히 김시습이 남긴 이름의 값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1481년

가경 37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 심양부.

세훈의 손자 서윤의 나이도 어느덧 환갑에 접어들었다.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아주 왕작(王爵)까지도 현도가 서윤에게 물려주어, 서윤은 심왕(瀋王)으로서 황성부 계동저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심양의 심왕부에 머물며 요동의 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심왕부에 머물며 요동을 다스린 지도 어느덧 서른 해였다.

그간 심양은 완연히 정비되고, 물산은 풍족하며, 학문은 융성하여 서윤은 그간의 결실을 돌보는 것 외에는 특별히 정력적으로 추진할 일이 줄어들었다.

한동안 조용하게 여유를 즐기는 생활을 하던 그는, 이내 부유해진 심왕가의 사재를 털어 서책과 회화(繪畵) 등 예술품을 모으는 일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이가 여든 줄에 가까워져 심양에 들어와 조카인 서윤의 곁에서 머물고 있던 현진이 그 일을 돕고자 나섰다.

현진의 호는 당영(當榮)으로, 1404년 세훈의 차남으로 제주에서 태어나 군호(君號)를 계영군(啓永君)으로 받았다.

육군진무관을 제9기로 졸업하고 군문에 들어서 강릉, 나주 등의 진위대에서 근무를 한 뒤, 영진 분견대장의 보직을 마지막으로 1436년 육군 부령(副領)으로 예편, 함주에서 계영양행(啓永洋行)을 조직해 모피 무역에 뛰어들었다.

정사전역 이후 심양이 심왕의 봉지로 하사되면서 심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도심 정비 및 무역업에 힘썼다.

함주를 기점으로 영진도독부와 동북면(東北面), 그리고 심양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사업적 감각으로 계영양행을 번창시켰다.

동시에 심양에도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심양부를 발전시키는 데도 적극 일조했었는데, 나이가 일흔이 되자 계영양행을 장남인 경윤(景潤)에게 물려주고 심양으로 돌아와 조카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소요되는 돈이 적지 않지 않겠습니까?”

서윤이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현진은 내심 걱정이 되어 되물었다. 비록 조카이지만, 이제 어엿한 심왕의 작위를 가진 서윤이니 만큼 현진은 공손히 공대를 올리고 있었다.

“그간 비축해 둔 심왕부의 내탕금(內帑金)이 요동폐로 은화 52만 냥, 가경통보로 16만 냥에 이릅니다. 30년간 차곡차곡 모아 둔 돈이니 만큼 따로 긴급히 써야 할 용도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데에 낭비하지 않고, 후세에 물려줄 만한 일을 하는 데에 쓰고 싶으니, 계영양행의 상관들을 통해서 서책과 도록(圖錄)을 모으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다니 장한 일입니다. 그렇게 모은 물품들은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이미 10만 냥을 들여 바실리오스 카넬리스의 아들 가안직(可安直)에게 궁 맞은편에 이를 소장할 석조 건물을 세울 준비를 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그자가 아비에게서 배운 기술이 탁월해 이미 요양에도 건물을 몇 채 지었으며, 최근 여순구의 항만을 정비하는 일에도 그 성과를 보였으니 믿고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가안직은 곧 안티코스 카넬리스의 음역으로, 심양에 들어와 건축으로 명성을 떨친 동로마제국 출신의 유민 바실리오스 카넬리스와 조선인 여인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건축법을 익혀 이미 요동에서는 그의 기술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

“소백(小伯)이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돕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미 그리 단단히 준비를 해 주셨으니, 빠져나갈 궁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조목이 구하고자 하시는 품목의 목록을 일러 주시면 이 숙부가 사해(四海)를 뒤져서라도 구해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현진을 통해 서윤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서책을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간 심양대학과 심왕부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책을 우선 모아 들였다. 그 권수만도 10만 권에 가까웠고, 그중에서는 동로마에서 가져온 귀한 서책들도 2만 권에 달했다.

이것은 한경조와 알렉시오스 수사와 그 뒤로 들어온 동로마 유민들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일괄적으로 수매(收買)하여 장서(藏書)하고 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서윤은 요동행정서에 특별 기관으로 장서국(藏書局)을 설치하고 책을 모으는 한편, 요동에서 앞으로 출판되는 책을 일괄적으로 두 부씩 납본(納本)받도록 하는 한편, 제국 본토에서도 기존에 출간된 책들을 가능한 모두 구해 사들일 수 있도록 예산을 지급했다.

장서국은 현진이 알선해 준 계영양행의 상인들을 통해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또한 서책을 국외로 거래하는 일에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벽란도의 송상 주흥섭과도 접선하여, 반대로 국외의 책을 들여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흥섭이 하는 일은 제국에서 출판된 책을 국외에 내다 파는 일이었으나, 반대로 이들의 부탁으로 인해 명과 일본, 유구와 대월,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나온 책들까지 사 모으는 일도 떠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주흥섭에게는 은화로 4만 냥이라는 거액이 지급되었다. 주흥섭으로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막대한 금액을 미리 지불하고 촉탁(囑託)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만큼 주흥섭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의뢰인이 그 이름 높은 심왕가이니 만큼 주흥섭은 한 치도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중에는 명나라 조정에 의하여 관리되는 총 본문 2만 2,877권, 목록 60권에 달하는 영락제의 명에 의해 칙찬(勅撰)된 유서(類書)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의 사본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주흥섭의 수완이 보통은 아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4만 냥이라는 적지 않은 의뢰금의 값은 한 셈이었다.

서윤이 사들이는 책의 종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현진은 계영양행과 거래선이 있는 나상(羅商)과 접촉했고, 여기에도 은화 5만 냥을 지불해 서방의 책들도 구매해 주기를 부탁했다.

심왕가의 왕족이 직접 이끄는 계영양행과 다르게 나상은 오상기로부터 독립된 상단으로 기능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심왕가와의 인연만큼은 오래된 것이니 만큼 이런 부탁을 특별히 신경 써서 돌봐 주었다.

호르무즈와 소코트라를 중심으로 나상의 상인들에게 책을 사 모으도록 지침이 하달되었고, 이들은 바그다드, 타브리즈,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능한 많은 수의 책을 구매하려고 노력했다.

페르시아어, 아랍어, 힌디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된 책을 가리지 않고 사 모았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특별히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상인들에게 유럽에서 찍혀 나온 책들을 살 수 있는지 타진했다.

이렇게 먼 곳에서 배에 싣고 들어오는 책의 값은 비싸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상을 통해 들여온 책은 총 4,200종 1만 8천여 권에 달하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구텐베르크가 1450년에 찍어 낸 《구텐베르크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토마스 아퀴나스(Tomasso hAquino)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비롯한 중세기 철학자의 저술들, 그리고 이븐 루쉬드(Ibn Rugd, 혹 아베로에스) 같은 이슬람 철학자들의 명저(名著)들도 포함되었다.

거기에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La Divina Comedia)》의 인쇄본 초판이나, 보카치오의 저술들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서윤은 이렇게 동서 각지의 서책들만 모은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들도 공들여 모았다.

예술 작품들이 앞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식견을 드물게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윤이 젊은 시절, 할아버지인 세훈의 곁에서 시종(侍從)하며 수발을 들 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훈은 말년에 들어 조용히 서화(書畵)를 즐기고, 때로는 미학(美學)에 대해서 서윤에게 종종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것이 예술에 대한 서윤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안견의 그림들도 높은 값을 쳐서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각종 명화(名畵)들을 구입해 들여왔다.

당송(唐宋)의 귀한 그림들뿐만 아니라 근래 들어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무로마치 산수화도 사들였다.

이미 안평군이 나상을 통해 이탈리아의 거장 화가들의 모작품을 들여온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치마부에, 조토, 보티첼리의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도나텔로의 조각품까지 일부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사들여 왔다.

이것은 나상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 상인에게 주문하고, 이들이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모아 다시 나상에게 건네 심양에 들어오기까지 거의 1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거기에 소요된 비용도 만만치 않아 거의 요동폐로 은화 15만 냥이라는 거액이 소모되었는데, 이렇게 모은 작품이 100점 정도가 되었다.

이외에도 고려청자를 비롯한 도자기와 족자, 병풍 등도 공들여 모아졌다.

이렇게 모아진 서책과 예술품들은 가안직에 의해 설계되고 지어진 어립장서각(藏書閣)에 하나둘씩 수장되기 시작했다.

이 어립장서각은 심양의 심왕부 앞 대광장, 속칭 비석광장의 남측에 세워졌는데 이로 인해 광장은 중앙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심왕부의 정궁(正宮)인 건양궁(建陽宮), 서쪽으로는 어립심양문리과대학, 동쪽으로는 정교회 심양주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심양 성 사도대성당, 그리고 남쪽으로는 어립장서각에 의해 둘러싸인 형태가 되었다.

어립장서각은 동로마 제국의 건축 양식을 기초로, 바실리카 양식과 대한제국의 석조 건축 양식, 그리고 최종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일부 반영한 형태로 완성되었는데, 총 4층의 높이에 달하는 웅장한 석축 건물이었다.

공사는 꽤 오랜 기간이 걸려 모두 완성되기까지 총 10년이 걸렸는데, 거중기 등의 각종 건축 기구를 동원하고 막대한 인원과 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그만큼 걸린 것이었다. 당초 계획했던 10만 냥을 초과해 건축 비용은 18만 냥에 달했다.

그러나 이 어립장서각은 대한제국 최초의 도서관 겸 박물관이라 불릴 수 있는 건물이 되었고, 그 장관은 동시대의 사람들을 감격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건물은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고, 특별히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출입해 장서를 열람하거나 소장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심양대학의 학생들이나 요동행정서의 관리들에게는 관람에 대한 제한이 없었고, 심양대학에서 가르치고 공부하는 이들은 거대한 학문적 보고(寶庫)에 언제고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어립장서각은 1486년부터 비공식적으로 장서국에서 모으고 있는 물품들을 인계받아 수장하기 시작한 뒤, 건물이 완성되고 일차적으로 계획했던 수장품의 확보를 마치자, 1502년에 정식으로 개관했다.

이미 이 일의 일익을 담당했던 현진도 죽은 뒤였으며, 서윤의 나이도 여든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서윤은 생전에 일생의 계획이 완성된 것을 보고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만큼 어립장서각은 심양에서 계획된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고, 이 일에만 심왕부에서 비축했던 내탕금이 거의 모두 소진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내탕금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기에 따로 세금을 더 거두거나 요동행정서의 예산에 빚지지 않을 수 있었고, 심왕가의 사재로 문화적 유산을 후대에 희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훗날 이곳을 둘러본 조광조(趙光祖)는 이렇게 단평(短評)을 남겼다.

“학문을 장려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군주의 단연한 미덕(美德)이다. 그러나 고금(古今)을 통틀어 이렇게 학문을 보전하는 일에 고매한 업적을 남긴 군주는 드물었다. 문덕왕(文德王, 서윤)의 공업(功業)은 심양에 남아 성현의 빛을 만방에 비추게 되었으니,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서책을 불태운 일에 비견해 볼 때 이 얼마나 애학(愛學)하고 경학(經學)하는 것인가.”

1483년

가경 39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황성부.

세훈의 아들이자 제2대 심왕이었고, 조정에서 30년간 재상의 직위를 지낸 현도가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한 것은 1483년, 가경 39년 겨울의 일이었다.

늦가을부터 심한 폐렴을 앓아 손님도 맞지 않고, 계동저에 칩거한 채로 병을 낫고자 노력했으나, 노환인지라 큰 소용이 없어 결국 겨울이 되자 유명을 달리하고만 것이다.

그간 대한제국의 의학 기술도 조금씩 진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외과적 조치로 다룰 수도 없는 폐병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노환(老患)이라 탕약으로 다스릴 수도 없는 것이니, 겨울이 오자 급격히 나빠진 병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이 현도의 죽음은 유난히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던 그의 처 혜희에게도 충격이었고, 그녀는 현도가 죽은 뒤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 또한 나이가 있어 지병이 있던 차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이 급격히 좋지 않아진 것이 결국 때 이른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원앙지애(鴛鴦之愛)라 하여 부처(夫妻)의 죽음을 애도했다.

졸지에 큰 상청(喪廳)을 차리게 된 것은 아들 서윤이었다. 장서각을 세우는 일에 매진하고 있던 그는, 황성에서 올라온 비보에 주저앉아 크게 울었다. 이미 그 또한 환갑을 넘긴 나이였으나, 부모의 죽음을 애통해 함은 노소가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천 리 밖 심양부에 앉아 요동의 정사를 돌보느라 황성의 부모에게 문안한 지 벌써 몇 해째인지라,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마음을 욱신거리게 짓눌러 왔다.

비록 아버지 현도보다는 조부인 세훈과 훨씬 감정적 교류가 깊었던 서윤이었지만, 어려운 아버지일망정 자신을 낳아 준 부모로서 깊은 공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부친의 망종(亡終)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서윤에게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꼬박 하루를 쓰러져 울던 서윤은 내관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거동하며 황성부로 올라가 상을 치를 채비를 마쳤다. 삼촌 현진과 함께 어용(御用) 마차에 올라 황성으로 달리기 시작해 사흘이 지나기 전에 황성에 들어섰다.

경복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상청을 차릴 것을 허락받고, 제례품을 하사받은 뒤에 계동저로 들어가 시신을 염하고 장등(葬燈)을 문주에 내걸었다.

여러 내빈들이 상청에 들어와 고인을 추도했다.

현도가 서른 해 동안 집무를 보는 동안 이룩했던 성세(成歲)를 기억하는 황성부 부민들은 계동저 앞에서 그를 추모하며 곡을 했다.

9일 장을 마친 뒤에 시신을 심양으로 운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을 때, 종로통에 운집한 사람들의 숫자가 물경 8만에 이르렀다.

황성순보(皇城旬報), 제국신보(帝國申報) 등에서도 앞다투어 고인을 추념하는 글을 실었고, 황제 이현은 국장을 선포했다.

그날의 분위기를 제국신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故) 전하(殿下)의 호는 정명(貞明)으로, 성명왕(成明王) 전하의 장남이셨다. 학습원(學習院)을 졸(卒)하신 뒤에 전시(殿試)에 급제하시어 한림원(翰林院)에서 수학하실 때에 이미 그 지명(智明)함이 장안에 자자했다. 성명왕 전하께서 재상의 직을 내려놓은 뒤에, 그 뒤를 이어 내각 재상의 직에 올라 황상을 뫼셨다. 금차에 전하를 쫓아 결국 붕어하신 비(妃) 전하는 백제공 각하(閣下)의 장녀로 태어나시어 고 전하와 혼례를 맺었으며, 그간 경애학사 등의 운영에 기여하셨다. 이 양 전하의 관이 계동저를 나와 심양으로 가기 위해 운구되는 길에 십만의 군중이 나와 통곡하며 양 전하의 죽음을 추모하며 애통해 했다. 관이 지나가는 운종가(雲從街)는 인산인해로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으며, 길에 엎어져 울음을 멈추지 못하다 실신하는 자까지 있었다. 황상께서는 직접 이를 배웅하기 위해 거둥하셔서 칙문(勅文)을 내려 이를 위문하시고, 고 전하에게 성무왕(成武王)의 시호를, 비 전하에게는 숙녕왕비(淑寧王妃)의 시호를 내리셨다. 운구는 심양까지 보름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며, 성명왕 전하께서 이미 묻혀 계신 심왕가의 능역(陵域)에 합장될 것이다. 현 심왕 전하께서는 양친의 붕어하심에 눈물을 흘리시며 식음을 전폐하고 계시다고 한다. 황제께서 또한 이를 위문하시고, 내각(內閣)과 추밀원에서도 장례를 주관하며 열흘간의 국상(國喪)을 선포했다.」

시신은 예정대로 심양으로 옮겨졌다. 가는 길 내내 들르는 성읍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념하고 통곡했다.

이것은 세훈이 죽었을 때보다 한층 더한 기괴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세훈은 공적도 많았으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혼란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 옳지 못한 일도 행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 기틀을 물려받아 일신된 제국(帝國)에서 재상으로서 집무(執務)했던 현도의 경우 백성들에게 사랑받은 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이리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셨단 말입니까.”

이러한 열기는 서윤의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를 추념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백성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아버지 현도가 항상 강조했던 애민(愛民)을 스스로 실천했던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내려놓아야 할 때 권력을 내려놓고 재상의 직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을 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일을 했으니, 그 백성들이 현도를 생각하는 마음은 가일층 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형님 전하께서는 항상 올곧고 그른 일은 행하지 않는 바른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재상에 계시던 서른 해 동안 나라의 기틀이 완연히 굳혀져, 지금 사해(四海)에 빛나는 제국이 되었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비록 형의 그늘에 가려 일찌감치 군문에 투신했다가, 이후에는 상인의 길로 들어서 계영양행을 이끌었던 현진이었으나, 현도를 공경하는 마음만큼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심왕가를 이어야 할 책무를 지고서 형이 앞장서 준 덕분에 자신은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거국적인 추념 속에서 심양으로 옮겨진 왕과 왕비의 시신은 이미 세훈과 그의 처 고상희가 묻혀 있는 심양 북측의 망산능역(亡山陵域)에 장지가 조성되어 하관(下棺)되었다.

심양에서는 세 달간의 추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모든 요동의 백성들은 흰 옷으로 갈아입고 갈모를 쓰고서 선왕의 죽음을 추모했다.

시호는 성무(成武)로 내려졌는데, 이것은 그가 직임하던 기간에 정사전역(丁巳戰役)에서 명을 물리치고 요동을 변방의 기틀로 삼은 것을 기려서 내려진 것이었다.

이렇게 제2대 심왕, 성무왕 현도와 숙녕왕비 에히메 부부는 거국적인 추도 속에서 1483년 겨울, 심양의 묘역에 묻히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명사의 죽음을 떠나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왕과 왕비의 죽음을 추모하는 종소리가 심양의 성 사도 대성당에서 저녁마다 울리며 모든 심양부 부민들에게 그 죽음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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