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교천언심(交淺言深)
「○유구 국왕(琉球國王) 상진(尙眞)이 경종(敬宗)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다. 그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요(堯)임금 뜰의 정화(政化)와 기자(箕子) 홍범(洪範)의 덕음(德音)으로 내 백성을 인수(仁壽)의 지역에 올려놓고 외국을 순치(唇齒)의 이웃으로 통하게 하시니, 폐하께서는 만복(萬福) 만복하소서. 이에 가경(嘉慶) 34년(1478)에 누방(陋邦)이 우연히 상국(上國)에 빙문(聘問)을 통하였는데 많은 은혜를 입었고, 더구나 광비(筐벧)의 진황 여러 가지를 회개(回介)에게 부쳐 보내셨으니, 이것은 비상한 혜택입니다. 총답(寵答)하여 존무(存撫)하신 것을 밤낮으로 잊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琉球國王尙眞, 遣敬宗來聘. 其書啓曰:
堯階政化, 《箕範》德音, 躋吾民於仁壽之域, 通外國於唇齒之隣, 陛下萬福. 于玆嘉慶三十四年, 陋邦偶致聘問於上國, 忝恩渥, 픍亦筐벧之珍貺件件, 付于回介者, 是非常之賜也. 寵答存撫, 夙宵不忘也.」
―예종(睿宗)실록 제119권 40년(가경 40년) 1월 3일
1482년
가경 38년 계하(季夏)
유구국(流球國) 스이(首里).
유구국(流球國)은 진서도호부 남서쪽의 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자기 나라말로는 루추쿠쿠(流球國)라고 불렀다. 루추, 즉, 유구라는 이름은 이미 중국의 사서인 《수서(隋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구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집단은 유동적이었고,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유구국을 정확히 지칭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구국이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명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었다. 촌락 수준으로 할거하고 있던 이 유구인들은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일본 본토로부터 농경민이 유입되면서 규모 있는 정주 사회를 이루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제각기 도왕(島王)을 자칭해 주변 국가에 사절을 교빙(交聘)시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오기도 했었지만, 대외적으로 단일화된 국가로 결집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던 것이다.
1429년에 이르러서야 중산국왕 쇼 하시(尙巴志)에 의해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의 세 왕국이 하나로 통일되어 처음으로 통일 유구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후에도 여전히 지방 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아지(按司)들의 세력은 강성했고, 제대로 된 중앙 집권을 시행할 수 없었다.
유구국은 기본적으로 여러 섬이 흩어져 있는 군도(群島)로 된 나라였으며, 이러한 섬들에는 각기 토착 세력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같은 유구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리적인 격리 때문에 섬마다 말씨가 크게 달라 서로간의 소통도 불가해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이제 막 체계를 갖춘 스이의 중앙 조정으로서는 지방의 호족들을 함부로 휘두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안한 토대 위에서 세워진 유구국은 통일 당시부터 크게 진서 지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중앙 조정으로 들어오는 산물이 척박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무역으로 나라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구는 명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조선과 일본에도 입조(入朝)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가장 지척에 있는 큐슈, 즉, 진서가 조선의 영토가 된지라 유구에서 가장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대 또한 조선이 되었다.
유구국왕은 처음에는 기주의 진서도독부에 사람을 보내어 입공(入貢)을 꾀하였으나, 이내 한성으로 직접 사절을 보내는 편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유구는 직접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을 바치고 들어왔고, 남양(南洋)으로 가는 상선들을 끌어들여 무역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꽤나 결실이 있어 작금에 와서는 유구국왕의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금의 유구국왕인 쇼 신(尙眞)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지방의 호족, 즉, 아지(按司)들을 모두 도읍인 스이(首里, 슈리)로 이주시키고, 왕권의 강화책을 펴기 시작했다.
1568년에는 명나라의 연호를 폐기하고 대한제국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 1571년에는 진서의 남쪽 끝과 접하는 아마미 제도(奄美諸島)의 최북단까지 진격하여 판도를 늘리고, 대한제국과의 국계(國界)를 확정지었다.
이러한 쇼 신의 정책들은 효과가 있어 유구는 날로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쇼 신의 왕권 강화책은 전반적으로 대한제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국고 수입은 거의가 유구의 도읍 스이가 자리한 우치나(沖엣, 오키나와) 섬으로 기항하는 대한제국의 상선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좁고 척박한 섬들로 이루어진 유구로서는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농작물이나 산물의 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 살아남는 것만이 활로였던 것이다.
쇼 신은 매년 네 차례 이상 황성부로 사절을 보내고, 서른 차례 이상 진서도독부로 관리들을 보내 무역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주로 영파를 지나 남쪽으로 가는 항로를 잡던 무역선박들이 유구를 거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유구국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무역상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환경이 급변할 가능성이 언제고 상존하는 영파와 달리 비록 조그만 소항(小港)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스이는 유구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안정된 무역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매력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스이에 상관을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무역을 확대하고 원양을 나가는 선박들이 충분한 보급을 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오.”
나상의 대행수 조첨식은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스이를 통한 무역항로의 안정화에 뛰어들었다. 대외 무역에 관해서는 대한제국에 있어서 가장 기민한 신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닐 그였다.
유구국 같은 소왕국(小王國)에 상업적인 근간을 갖출 수 있다면 복잡한 정세에 휘둘리지 않고 편의가 좋을 것이라 금세 판단한 것이다.
그는 직접 유구국으로 내항하여 국왕 쇼 신을 내빙하고 긴밀한 협의 끝에 이곳에 정기적으로 교관선을 기항시키기로 했다.
스이의 항구에는 차츰 조선인들이 늘어가기 시작했고, 쇼 신은 보다 많은 선박을 유치하기 위해서 국고를 부어 항구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의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항구를 단단한 석축 제방과 부두가 있는 대항(大港)으로 정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이 항구가 우리 유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당연하고 마땅하게 힘을 쏟아 이 뱃길을 살리고 도모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이라 하지 않겠는가.”
쇼 신은 여러 차례 관리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러한 방책을 주지시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쇼 신이 등용한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호족인 아지 출신이긴 했으나, 조정에 등청(登廳)하느니 만큼, 왕권과 긴밀하게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로서는 중앙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자신들의 이권도 강화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쇼 신의 이러한 왕권 강화책을 옹호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니 이러한 쇼 신의 말을 흘려들을 이들이 아니었다.
유구국이 무역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있어서도 당장 이윤이 배분되는 판이니, 더군다나 관리들은 이 일에 사활을 걸고 매달렸다. 이것은 섬들을 근거지로 한 지방 호족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으나, 적어도 도성인 스이를 중심으로 한 왕공(王公)과 관료들에게는 배가 들어오면 올수록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유구국의 왕과 관리들이 합심한 노력으로, 배가 정박하기 좋도록 항구가 정비되고 세량(稅量)을 줄이자, 차츰 많은 상단이 내항해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나상을 필두로 해 송상과 경상, 그리고 호상이 차례로 스이에 상관을 개설했고, 동래의 내상을 비롯해 진서의 기주 상인과 박주 상인들도 스이에 상관(商館)을 개설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각 상단들은 일본―진서―유구―명―대월을 잇는 지역 무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유구는 그 무역의 거점으로 삼기에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런 연유로 오고 가는 상품의 물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기 시작했다.
쇼 신은 이러한 상황이 만족스럽게 돌아가자, 이를 통한 수익을 다시 내정 정비에 붓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제도를 본따, 국중(國中)에 학교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학문을 강연하기 위한 학자를 제국에서 초빙하기도 했다.
유구에서 조선어의 교육은 점차 강화되었고, 1480년에 이르면 신분이 높고 두뇌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선발해 대한제국으로 유학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쇼 신은 이러한 학문의 장려를 돕기 위해 대한제국으로부터 서적의 수입에도 신경을 썼는데,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송상 주흥섭을 통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서책을 매입해 들어갔다.
여기에는 기존의 유교 전적들 뿐만 아니라, 격물학 서적들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들어왔을 뿐더러 대한제국에도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그리스, 로마 시기의 사상 저술들까지 망라되었다.
쇼 신은 스이에 집문당(執文堂)이라는 일종의 도서관을 세우고 학당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 젊은 귀족들을 이곳에 출입하게 하여 학문에 보다 정진할 것을 주문했다. 이렇게 학식을 갖추고 조정에 봉사하게 될 이들이 앞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큰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있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게 마련이었다.
쇼 신의 나라를 일신하고자 하는 정책 덕분에 유구국의 민생은 안정되었고, 국고로 들어오는 수입은 늘어 보다 효율적인 정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선단(船團)을 꾸려 진서와 영파를 오고 가는 무역로에도 뛰어들고, 훗날 대만(臺灣)이라 불리게 되는 고산국(高山國)에도 원정을 보내 해안 지역에 접지(接地)를 확보해 기항지를 만든 뒤 대한제국의 상인들에게도 개방했다.
점차 유구국이 남해(南海)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1483년
가경 39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장안(長安)의 봄바람은 어쩐지 현기증을 일으켰다.
늦봄이 되어 추적거리던 비도 그치고, 아스라이 기와지붕 위로 걸린 그믐달[弦月]만이 교태를 잔뜩 부리고 있었다.
윤희상(尹熙常)은 운종가(雲從街) 뒷골목 담장에 몸을 기대고 섰다.
늦은 밤, 불빛 하나 피어나지 않는 적막한 밤거리 위로는 쓸쓸한 공기만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윤희상은 소매에서 늘 아껴 지니는 당적(唐笛)을 꺼내 들었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숨결이 취구(吹口)에 닿자 봄바람을 타고 아련한 음색이 흩어졌다.
그날은 술에 대취했었다. 윤희상은 도성 안의 한량, 혹은 불량아들과 요화계(樂華契)라는 동아리를 맺어 그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패거리 가운데 하나인 김한(金翰)이 남문 밖 시장에서 어물전을 크게 하는 졸부를 털어다가 한턱을 낸 것이다.
그 졸부는 용산에 살던 어떤 연고 없는 계집이 마음에 들어 첩실로 두었는데, 그걸 알고서는 밤에 다짜고짜 늙은 졸부의 사랑에 숨어들어 멱에다 시퍼런 칼을 들이대고선 그 계집이 제 누이이니 신방 차릴 지참금을 저한테 지불하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아닌 밤중에 들이닥친 괴한에게 그 심장 약한 졸부는 제가 지니고 있던 패물을 죄 모아 넘겨주고 말았다.
“그래, 그놈 표정이 어떻던가?”
윤희상이 전말을 듣고 낄낄대며 물었다.
“그놈이 말이우, 하얗게 질려서는 입도 뻥끗 못하고 사랑방에다 재워 놓았던 패물을 전부 탈탈 모아 보따리에 제 손으로 담아 주는데 이게 어찌나 우습던지.”
자기의 전과를 자랑하며 김한은 말술을 마셔 댔다. 그는 그 털어 온 재물을 죄다 그날 밤에 탕진했는데, 운종가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집에서 크게 주연을 열었다.
해질 무렵 시작한 자리는 축시(丑時)가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윤희상을 비롯한 요화계 무리는 오랜만의 큰 잔치에 기분이 좋아 기생을 꿰차고 쉬지 않으며 붓고 마셔 댔다.
그 패거리가 완전히 술에 누워 몸을 운신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술자리는 파했다.
각자 기방의 침소에 헤쳐 눕는 사이 윤희상은 거리로 나왔다. 항상 이렇게 부질없는 술자리를 파하고 난 뒤에, 윤희상은 씁쓸함에 잠겨 혼자 밤거리를 거닐곤 했다.
다들 이렇게 뭉쳤다 헤치기를 반복하는 패거리이긴 했지만, 윤희상은 자신이 우두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내심 그들과 마음속에서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슬비 그친 밤길은 질었다.
이른 밤부터 거리를 메우고 있던 등불도 이젠 모두 꺼져 있었다.
윤희상은 혼자 스산한 밤길로 흘러들어 갔다. 왠지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아름다웠고, 술기운에 쾌하던 마음도 괜히 울적해져 당적 한 소절 풀어 낼 생각이 간절해졌던 것이다.
그가 황성부 도성 안을 휘젓고 다니며 불한당을 끌고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몰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그것도 서얼이었다.
고려의 명문 거족의 후예이나 문재가 모자랐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공부를 하는 것을 포기하고, 흥인지문 근처 배오개[利峴]에다가 포목상을 차려 큰 돈을 모았다. 직접 방적기까지 사다가 포목을 찍어 낼 정도가 되었으니 어지간한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본처에게서 삼남 사녀를 두었으나, 여유가 생기자 계집질을 시작하여 늦은 나이에 첩에게서 아들을 보았으니 바로 윤희상이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늦게 본 자식이라 윤희상을 아꼈으나, 그는 이미 장성하여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 있던 이복형들의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나이가 고희에 가까워 와 풍이 들어 자리에 누웠고, 집에서 기댈 곳이 없게 된 윤희상은 결국 집을 나와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을 모은 다음, 온 황성부의 거리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사이에 아버지는 결국 숨을 거두었고, 이복형제들은 사고만 치고 다니는 그를 아무도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이 스물이 갓 넘었을 때, 윤희상은 왈패질로 먹고 마시며 건달처럼 살고 있었다.
이렇게 운종로 길바닥에서 굴러먹게 된 시간들을 반추하며 피리 한 가락 뽑아내고 나니 허망한 한숨만이 남았다.
어린 나이에 피리를 배워 그 솜씨가 뛰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었고, 문재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열 살이 되기 전에 소학(小學)을 외어 그 뜻을 가늠하였으나 단지 그것뿐이었다.
문명(文名)이 몰락해 장사치가 된 양반가의 서자란 사실 별 볼일이 없었다.
윤희상은 당적을 다시 소매에 추려 넣고 휘적휘적 광통방(廣通坊)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길은 개천으로 나가는 골목이었다.
그 복잡한 지붕이 어깨를 대고 이어진 길을 등잔 하나 없이 달빛에 의지해 걷다가 윤희상은 적당히 골목길에 엎어져 잠을 청했다.
봄이 한창이라 밤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이렇게 기대어 한숨 눈을 붙이고 나면 또 날이 밝아 올 것이었다.
제법 편안하게 누워 잠을 청했다고 생각한 윤희상이었으나, 그는 이내 그를 걷어차는 발길질에 잠을 곧 깨고 말았다.
어느 썩을 놈이 발을 차 대는가 하고 눈을 번쩍 뜨고 노려본 윤희상은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포도청(捕盜廳)의 포졸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윤희상은 깜짝 놀라 도망을 쳐 보려 했지만 이내 수가 없음을 알았다.
포졸들이 벽에 기대어 누워 있던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윤희상은 꼼짝 없이 포졸들에게 잡혀 포청으로 이송되고야 말았다.
“뭣 때문에 끌려들어 왔는지 아는가?”
날이 밝자 윤희상은 바로 등청한 포도관(捕盜官)에 의해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잘 모릅니다.”
윤희상은 정말로 자신이 왜 잡혀 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왈패짓을 하고 다닌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잡혀 올 만한 건수는 수두룩 했었고, 잡혀 온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쯧. 김한이라는 놈이 네놈 무리렷다.”
포도관의 입에서 김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윤희상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김한이 어제 털어 먹은 졸부가 포도청에 이를 신고하여 새벽 동안 포졸들이 순시를 돌아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김한이도 잡혀 왔습니까?”
“그놈은 애시나절 잡혀 들어왔다. 기방에 누워 있던 놈을 압송해서 족을 쳤더니, 그놈이 네가 시킨 일이라며 어디로 갔을 거라고 말해 주더군. 그래서 그놈 말 듣고 네놈을 찾아서 광통방을 한참을 헤매다가 널브러져 자고 있는 것을 잡아들여 온 것 아니냐.”
포도관의 말에 윤희상은 그야말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하던 곳에서 덜컥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었다. 물론 김한은 윤희상의 수하였고, 그가 털어 온 패물로 밤새 놀고 마셨으니 윤희상도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가 김한을 시켜 사주한 일은 아니었다. 꼼짝 없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윤희상으로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그 일은 제가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놈이 털어 온 패물로 밤새 먹고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아무런 이득을 취한 것도 없고, 그 남문 밖의 장사치라는 영감도 아무런 면식이 없습니다.”
윤희상은 결백을 주장하여 보았지만 그것도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이미 윤희상과 요화계를 한 번에 치워 버리려고 작정하고 잡아온 듯 보였다. 포도관은 별로 윤희상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을 믿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간 네놈들이 운종가를 들쑤시며 패악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니, 이참에 잘 잡혀 들어왔다. 곱게는 못 나갈 줄 알아라. 요즘 들어 황성부중에 너희 같은 왈패들이 너무 늘어, 우리 같은 포도관들이 골머리를 썩고 있느니라. 그렇게 패악질을 일삼고 다니니 탄원이 한둘인 줄 아느냐.”
포도관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싶었다.
윤희상이 직접 관련되어 있든지 있지 않든지 그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성부가 번창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왈패들의 무리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윤희상이 이끄는 요화계 같은 무리들만도 황성부 일대에 수십 개는 되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노름을 하거나 좀도둑질을 하고, 때로는 상인들을 겁박해 가며 부당하게 재물을 수취해 유흥으로 탕진하고 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포도관의 입장에서는 윤희상이 아무리 결백하다고 한들 이참에 본보기를 삼아 처벌을 해서 이런 무리들에게 경계를 주는 편이 바람직한 것이었다.
윤희상 또한 이러한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가족에게서 내쳐진 몸이나 다름 없어, 젊은 나이에 이렇게 부질없는 패거리를 이끌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어릴적에 글줄도 익혔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그였다.
포도관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그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제가 이 일에 관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방면해 주시면, 자진해서 이놈의 계를 파작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운종가에 얼씬거리지 않을 테니 제발 제 말을 귀담아 들어주십시오.”
윤희상이 포도관의 마음을 돌려 보려 통 사정해 보았지만, 이 깐깐한 포도관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윤희상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포도관은 윤희상의 죄목을 낱낱이 적어―이 중에는 윤희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도 많았다.―황성부 법원에 넘겼다.
결국 윤희상은 재판정에 서게 되었고, 김한이 저지른 죄까지 다 뒤집어써 기소되고야 말았다.
황성부 법원은 도법원에 해당하는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따로 순회판사가 1심을 보지 않고 황성부 법원 안에서 1심과 2심이 모두 이루어졌다.
예비판사는 1심에서 윤희상의 죄목을 죽 열거한 다음에 형법에 따라 징역 24년을 구형하고 노역(奴役)에 처했다.
운이 좋다면 따뜻한 곳에서 노역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운이 좋지 않다면 영진도독부 같은데서 추위와 씨름해 가며 탄광일이나 벌목 따위에 투입될 수도 있었다.
윤희상은 이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자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재심을 요청하기로 결심하고, 황성부 법원에다가 항고(抗告)했다.
따로 변호인 제도가 없었기에 윤희상은 구구절절 자신이 죄목에 올라온 것들 중의 태반과 연관이 없음을 스스로 변호해야 했다.
다행히도 2심에 들어온 주임판사(奏任判事)는 그래도 윤희상의 변명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판사는 윤희상의 반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죄목을 제했다. 그중에는 김한이 저지른 일도 다행히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윤희상의 죄는 반절 이상 줄어들었다. 형량도 급감해 4년간의 노역형에만 처해졌다.
그러나 윤희상은 좋아만 할 수는 없었다. 형량이 급감한 대신에 노역형은 영진도독부에서 치를 것으로 정해졌다.
그가 영진도독부로 넘겨지면 그곳에서 윤희상에게 노역을 할 곳을 지정해 줄 것이다. 그나마 예전처럼 곤장이나 태형 같은 악형(惡刑)이 사라진 것이 다행이었다. 수십 년 전 법제가 바뀌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붙잡혀 들어가서는 곤장에 그만 곤죽이 되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런 노역형이라도 감지덕지하고 순순히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윤희상은 영진도독부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도 북족 끝, 아무르강 하구의 특림보(特林堡)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곳은 조선인 백서른 명 정도만이 거주하는 북쪽의 끝으로, 윤희상은 이곳에서 다른 7명의 죄인들과 함께 벌목 노동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1483년
가경 39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황성부.
번잡한 뚝섬[纛島] 포구를 건너면 경강(京江) 물 내리는 흐름을 따라 광주(廣州)로 내려가는 한적한 길이 있다. 그 언저리에 갈대밭이 넓었는데, 이 갈대밭을 낀 작은 언덕 위로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이름을 압구정(鴨鷗亭)이라 했다.
이 정자는 한명회가 지은 것으로, 지금은 그와 정치적인 논조를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들어 시국을 논하는 장소로 세간에 유명했다.
한명회는 이들 무리의 구심점과도 같았는데, 그 자신이 추밀원(樞密院)에서 하나의 파당을 조직하여 이끌고 있었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곱에 논어를 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준재였으나,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그 가문의 이름에 걸맞지 못하게 각박한 생활을 했었다.
그는 소시 때 교사를 따로 들일 형편이 되지 못하여 부친에게 수학하였다. 그러나 결국 학문으로 대성하지 못하고 빈한한 관직을 전전하다 수양군(首陽君)을 따라 조정에 어렵사리 관직을 얻어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는 천부적인 정치적 능력으로 승승장구하여 작금에 이르러서는 추밀원을 움직이는 실력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 한명회를 중심으로 하는 이 모임이 사대문 안의 한명회의 사랑이나 혹은 때로 이곳 압구정에서 회동을 가지는 관계로 세간의 정객(政客)들과 세작(細作)들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오가는 말들이 얼마 있지 않아 한명회 같은 세력들을 통해 추밀원에서 논의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임이 따로 음흉한 간계를 품고 나라를 자의대로 움직이고자 자주 회동을 갖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명회가 이런 모임을 통해 파당을 조직하고, 추밀원을 뒤흔들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해 1483년, 가을이 찾아올 무렵 압구정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영남에서 갓 상경한 젊은 청년으로 아직 서른이 되지 못한 나이였다. 수수한 차림에 턱 아래로 파릇한 수염이 돋은 시원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 전 한 수재를 알게 되어 여러분들에게 소개코자 이 자리에 모셔 왔소이다. 진서 출신으로 심양에서 공부를 마치고 상경한 임승준이라는 서생이오.”
모임의 일원이자 상공부 주임관(商工部奏任官)인 서학영(徐學英)이 그를 소개했다. 그는 이 사람을 소개하게 된 것이 정말 기쁜 듯했다. 소개 된 사람은 바로 임승준이었다.
임승준은 원래 진서 출신으로 상학을 나온 뒤에 요동으로 건너가 심양에서 오랜 기간 공부를 했다. 그는 관적에 따로 뜻이 없어 공부를 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심양에 볼일이 있어 찾아왔던 서학영을 알게 되어 뜻이 맞음을 알고는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 서학영은 한명회의 문인(門人)으로 한명회가 정계에서 그를 돌봐주고 있었고, 이 서학영이 그와 뜻을 함께하는 한명회의 문인들에게 임승준을 소개하고자 이렇게 황성까지 부득불 데리고 온 것이었다.
“소생, 배움이 짧으니 제형(諸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거든 질책하지 마시고 쉬이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 제씨(諸氏)들도 귀공을 환영하는 바이외다. 말을 듣자 하니 공의 학식이 매우 높아 우리가 도리어 공에게 배움을 청해야 할 듯하니, 어서 이리 앉아 밝은 식견으로 우매한 무리를 깨우쳐 주시구려. 하하!”
임승준의 인사에 한명회가 껄껄 웃으면서 환대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힘이 있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이때 모임에는 한명회, 서학영을 비롯하여 유자광(柳子光), 정문경(鄭文烱), 한치례(韓致禮), 이극돈(李克墩) 등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젊은 나이이나 한명회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매일같이 정략(政略)을 논하는, 일종의 전문적인 정치꾼들과도 같은 무리였다.
심왕가의 일족(一族)이 중앙 정치의 일선에서 물어난 이후로, 내각(內閣)은 압도적인 정치적 우위를 점한 사람이 없이 정치적 시류(時流)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머리가 교활한 이들은 파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이리저리 말을 옮기며 암약하는 이들이 이곳 한명회의 휘하에 모여든 유자광과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인 만큼 화제는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옮아갔다.
“최근 들어 추밀원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이야기의 운은 유자광이 뗐다. 교활한 눈매가 번득이는 자였다. 말에는 기름기가 묻어 있었지만, 삐쩍 마른 얼굴에는 광대가 삐져나와 간사한 용모를 빚어 내고 있었다.
그는 평소 사익(私益)에 관심이 많은 자로서, 특별히 정국(政局)이 어찌 돌아가는지 에도 유난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관직은 아직 별 볼일 없는 자리였지만, 내각과 추밀원을 바삐 오가며 정치적인 일에는 귀동냥하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유자광이가 여전히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구먼. 추밀원이야 별거 있을까. 매일같이 늙은 노인네들이 서로 아귀다툼하며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게 추밀원이지. 요즘 들어 최공손(崔功孫)이가 아주 기세등등해.”
현도가 재상을 내려놓은 이후, 추밀원은 크게 양분되어 서로 정쟁을 일삼고 있었다.
처음에는 뾰족하게 드러나지 않던 정치적인 견해 차이는 현도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서거정이 추밀원에 입법 기능을 준 뒤로는 아주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견해 차이가 대립하고 있었다.
서로 저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고자 하는 심리가 발동한 것이다.
이렇게 한쪽은 최공손을 중심으로, 다른 한쪽은 한명회를 중심으로 파당이 나누어지자 자연스럽게 추밀원은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어떤 면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당파(黨派)가 나뉨으로 인해서 서로 자연스럽게 견제하게 되어 사익에만 맞는 법을 입법하려 하면 다른 쪽에서 제동을 걸고 나오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기능이 있다고 해서 이러한 파당 정치를 긍정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추밀원은 이 파당 사이의 대립이 극렬해지면 거의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하기 일쑤였고, 이것이 내각의 국정 수행에도 악영향을 미치곤 하는 것이었다.
한명회는 이러한 상황을 꿰뚫고 있었고 때문에 최공손을 견제하는 일을 적당히 수완을 보아 가며 하고 있었다.
최공손의 나이가 한명회보다 더 많았기에 최공손이 이끄는 당파는 노당(老黨)으로 불리고, 한명회가 이끄는 당파는 소당(小黨)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한명회가 이렇게 정략적으로 한 수 위에서 머리를 굴리다 보니, 그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모리배 같은 이들이 모여 들었고, 한때는 순수하게 정책(政策)을 논하던 압구정의 모임도 물이 흐려져 있었다.
유독 서학영과 신참 임승준은 이런 분위기가 껄끄러웠다. 서학영은 원래 한명회가 관직에 있던 시절에 그 밑의 관직을 맡았다가 교분이 생겨 압구정의 모임에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러한 정략적인 이야기만 오고 가는 압구정의 모임에 조금은 질려 가고 있었고, 오늘은 아주 임승준에게 이곳을 소개한 것을 적잖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가 황성부를 떠나가 있는 두어 해 동안 압구정의 모임도 아주 물이 흐려져 있었다.
“제 의견을 말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러한 서학영의 눈치를 보고 있던 임승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초면에 당연히 쉬이 나서기는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도 특별히 불만을 제기하는 이가 없자 임승준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근자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추밀원에서는 국정을 논하기보다 사사로운 이익을 놓고 대립한다고들 합니다. 저는 조정의 정치라고는 한 줄도 모르는 그저 서생일 뿐으로, 얼마 전까지 수천 리 밖 요동에서 지내어 세상 물정이 아직 어둡습니다. 그러니 그런 풍문이 들려오면 그런 줄 알 수밖에요. 제가 들은 바가 맞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오. 그러나 꼭 사사로이 당쟁을 한다고 짚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사사로움을 얻기 위해 당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혹여 상대가 사사로운 이익을 편취할까 견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하는 편이 옳소.”
임승준의 말에 한명회는 순간 불편한 표정이 되었지만, 노회한 정객답게 이내 표정을 고치고서는 임승준에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나 임승준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을 이을 뿐이었다.
“부끄러운 짧은 소견입니다만, 상당백(한명회의 작위)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남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저 조정의 제도라는 것은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황제 폐하를 돕기 위해 있는 것인데, 백성들은 지금 추밀원이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전 성명왕 전하와 성무왕 전하께서 재상직에 계실 때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 조정의 신료들이 그 권한을 제각기 나눠 가지면서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었으니, 아무도 진정한 마음으로 국사를 생각하지 않고 사사로운 정쟁에 몰입하고 있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승준의 쏘아붙이는 말에 이내 좌중은 싸해졌다.
“그대는 감히 무례하게 노신(老臣)의 앞에서 정치가 어떠함을 운운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관직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하니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할 일 없이 관직에 앉아 토색질이나 하고 나라를 무너뜨리려 간신배 노릇을 하는 이들로 보이냐, 이 말이오. 대저 나랏일이라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의 의견으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고 자리에 앉은 이들은 목소리가 갈리게 마련인데, 상대가 미련하게 행하는 것을 막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오?”
임승준의 발언에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진 한명회의 눈치를 보던 유자광이 벌떡 일어나 임승준에게 쏘아붙였다.
조정에서 출세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연줄로 한명회를 일찌감치 지목하고, 그의 곁에 달라붙어서 아부하길 주저하지 않던 유자광이었다. 거기에 더해 정치적으로 욕심이 많은 한명회를 부추겨 파당을 짓게 만들어 이제는 그 보좌 노릇을 하고 있으니, 임승준의 말이 고깝게 들릴 리가 없었다.
임승준은 서학영의 인품에 반했었기에, 이 한명회를 비롯한 압구정의 무리들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수태 들었음에도, 서학영이 소개해 준다 하여 부득불 자리를 함께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 꼴이 생각보다 가관이었다. 이미 나이가 든 한명회가 노욕을 부리고 있음은 분명했고, 그러다 보니 유자광 같은 기회만 노리는 날파리가 꼬여 들어 물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임승준의 생각을 짐작한 서학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임승준과 함께 먼저 일어 나 보겠다고 청하고 자리를 떴다. 이들이 돌아가고자 한다는데 말리거나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임 공. 내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한명회 어르신도 많이 변하셨고, 지금 여기에 꼬여든 날파리들이 벌이는 추태가 내가 보기에도 한심스럽구려. 오늘 이렇게 수상한 자리에 불러 괜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이것이 서학영의 잘못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임승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임승준에게 조정에서 그래도 명망 있는 한명회를 소개시켜 좋은 자리의 관직에 천거(薦擧)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는 것이 고고한 임승준에게 독사 같은 이들과 마주치게 하는 결과를 놓고 말았다.
그렇게 압구정에서의 불편한 자리를 가진 후에 임승준은 더 이상 압구정으로 나가지 않았다.
서학영에게 글줄을 남긴 뒤에, 그는 관동으로 유람을 가는 길을 택했다. 그곳에는 뜻하는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김시습이었다.
김시습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고, 금강산 장안사에 머물며 집필 활동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임승준은 한참을 수소문해서야 어렵사리 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임승준이 김시습을 찾았을 당시, 그는 죽을 날이 가까워 몸져 누워 있었는데, 임승준은 이 늙은 학자와의 만남을 통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초라한 노옹(老翁)을 찾아오느라 젊은 선비가 수고가 많으셨네.”
기침 섞인 목소리로 김시습이 임승준을 맞았을 때, 임승준은 대학자 앞에선 긴장과 혹시 결례를 범하지 않을까 초조해 잔뜩 얼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매월당은 녹차를 권하며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시습은 임승준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김시습은 그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다음에 이곳에 머무르며 자신과 함께하기를 권했다.
“내가 자네의 학문을 높이 사 늙은이 욕심에 내 곁에 두고 싶으이. 당분간 이곳에 지내며 내 말벗을 해 주는 것이 어떤가?”
글과 학식으로 그 이름이 높아 멀리 국외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한 김시습이었다. 임승준은 그 은혜가 그저 황망하여 그 자리에서 스승에게 올리는 구배를 하고, 기쁘게 그 뜻을 좇았다.
그 후로 임승준은 장안사에 남아 매월당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서 기거하며 말동무 겸 제자 노릇을 하며 지내었다.
그러는 동안에 매월당의 권유로 불문에 입문하여 잠시 사미계(沙彌戒)를 받기도 했다. 길지 않은 교제였지만, 임승준은 매월당을 통해 그 학문의 깊이가 일층 성장하고 세상에 대한 식견 또한 뚜렷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매월당이 임승준을 불러 물었다.
“근래에 당쟁이 심하여 정사를 논한다는 자들이 시의(時宜)를 모르고 그 일을 그르치는 바가 많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한참을 생각한 뒤에 임승준이 대답했다.
“참으로 당금에 썩은 무리들이 많으니, 실지로 학문의 깊이가 없고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모르며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알지 못하고 권문의 위세에 빌붙어 자기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자가 많습니다. 또한 고루한 자들은 예법을 자기 멋대로 늘이고 덧붙이며 해석하기를 나름으로 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니, 가히 선비[儒, 유]가 꾄다[誘, 유]라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닌 듯합니다. 다행히도 국풍이 아직 어진 사람을 귀히 여기고 바른 선비를 아끼는 것이니 그 법도는 곧 잡아지리라 봅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내가 전에 이르기를 참 선비의 학문은, 본래 치국안민(治國安民)에 있고, 외적을 배격하며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文)에 능하며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이는 김시습이나 임승준뿐만이 아닌 당시의 양식 있는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바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임승준이 김시습과 같은 사상의 맥을 이어 받으며 그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월당의 문하에서 지내는 가운데 해가 바뀌어, 김시습은 회혼일이 가까워질 즘에 병석에 누워 조용히 임승준을 불러 말했다.
“내가 더 살지 못할 것 같네. 자네도 그 이름을 들어봤겠지만, 내가 서신으로 교류하던 선비 중에 김종직(金宗直)이라는 이가 그 성품이 곧고 정갈해 소문이 자자하네. 그가 지금 대구부에 다시 내려가 있다고 하니 찾아가 봄이 어떠한가?”
“선생님, 하오나…….”
“내가 괜히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 그럴 듯싶어서 그러네. 올 봄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며칠 지나 매월당은 그 말처럼 음력 2월 22일, 그 회혼날에 가족과 제자들 일족이 모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장례는 황실에서 보낸 제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연후에 다시 가까운 가족과 제자들이 모여 불교식으로 장례를 한 번 더 지내었다.
이 일은 이후에 황제의 사은을 가벼이 여기고 불타(佛陀)의 귀신을 귀하게 여긴다 하여 조정에서 정치 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조선조에 세워진 불교(佛敎)에 대한 금령이 아직까지 정식으로 대한제국에 들어서서도 철회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제제를 하지 않은 상황으로 애매모호한 상태로 이어져 왔었는데, 이것은 세훈이 종교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국시(國是)로 삼았던 유교가 흔들린 지 오래이고, 북방에는 정교회가 들어와 포교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불교에 내려진 이런 불합리한 제재가 문제가 된 것은 언제고는 벌어질 일이었다.
임승준은 불교를 비방하고 나선 유생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황은을 입어 장례를 지낸 뒤에 그 내세의 복을 빌어 장례를 마친 것인데, 불가에서 소위 천도재를 지내는 것과 무엇이 문제가 된단 말이오. 귀공들은 가히 중치 않은 문제를 예법이란 이름을 빌어 정쟁 분란의 소재로 삼고 있으니 가히 떠나간 매월당의 이름을 먹칠하고, 황상의 이름에 누가 될까 두렵소이다.”
그러나 이 일로 한동안 조정은 시끄러웠다. 결국 황제는 불교에 대한 금령을 재확인하였으나,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아 이미 그 시점에서 불교의 교세를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불문(佛門)에 대한 문제는 이후 한동안 조정에서 두고두고 갑론을박을 거듭하게 되었다. 최공손을 비롯한 노당은 억불(抑佛)을 철폐하고 불교를 자유롭게 놓아 줄 것을 주장하는 반면에, 한명회를 비롯한 소당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지속적으로 관철할 것을 주장했다. 소위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어찌 되었든 임승준은 조정에 천거하겠다는 서학영의 권유도 마다하고 황성(皇城)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명회와 유자광 일파와 만나본 뒤에 중앙 정치에 완전 질색을 하고 만 것이었다.
더군다나 중앙의 대사족(大士族)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는, 진서 출신의 옹색한 가문인 그가 조정에 출사하는 일에 미련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미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신 그는 매월당이 소개한 김종직의 문하에 입문하여 2년간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임승준의 정치 철학이 완성된 시기요, 이후 조정에 출사하여 대변혁의 중심의 서게 된 자양분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하다.
1484년
홍덕(洪德) 15년 중하(中夏)
대월국(大越國) 동킨(東京).
을유전역(乙酉戰役)에서 조선에 의해 패배했던 명의 영락제는 잠시간의 숨 돌리기 끝에 병력을 다시 모아 월남(越南)을 침공해 점령했다. 그러나 명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1418년 농민이었던 레러이(黎利)가 병력을 규합하여 명조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십여 년간의 지루한 싸움 끝에 레러이는 명나라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1428년에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용좌에 올라 국호(國號)를 다이비엣, 즉 대월(大越)로 정하고 레 왕조를 창시했다.
레러이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던 황족들을 멀리하고, 전제 체제를 시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대월국의 정치는 레러이를 도와 명과 싸웠던 개국공신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었다.
개국공신들은 역대 황제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지방에 많은 영지를 희사받았고, 이러한 토지를 기반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분점은 이러한 호족들과 황제의 싸움이 제위 계승과 얽혀 다투게 되는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여러 차례의 내전까지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레 왕조는 군제와 지방 제도 등을 잘 정비했고, 명나라에도 사신을 보내어 책봉(冊封)을 받아 안정된 치세를 이룰 수 있었다.
1434년 레러이가 죽었을 때, 그 아들이 즉위하니 바로 태종(太宗)이었다. 그는 즉위할 때 11살에 불과했고, 당초 레사트(黎察)라는 종친이 섭정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나이가 들자 친정을 개시하여 과거제도 등을 정비하는 데에 주력했다.
태종을 이어 대월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인종(仁宗)이었다. 1443년 인종이 왕위에 즉위했을 때 불과 2살이었으며, 호족들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통람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에 참파와의 분쟁이 계속되었고,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1459년, 인종의 이복형인 레기단(黎宜民)이 황궁에 침입해 인종을 참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쫓겨나는 혼란 끝에, 1460년 태종의 넷째 아들인 레투탄(黎思誠, 여사성)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레투탄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외환(外患)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월국의 남쪽에 자리한 왕국인 참파와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참파왕 반 란체트안이 대월국으로 침공을 한 것을 구실 삼아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점령하고 참파를 예속시키는데 성공하고, 서쪽에 있는 란쌍 왕국을 공격하여 국경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레투탄은 외부의 요건이 안정되자, 내부적으로 율령 제도를 다시 재정비하고, 그간 득세하고 있었던 호족 세력들을 탄압해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내외로 안정된 상황에 접어들자, 레투탄이 자연스럽게 내정(內政)에 집중하고자 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레투탄이 가장 먼저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무역이었다.
그간 대월국 내부에서 정치가 혼란하고, 참파와 계속된 끊임없는 전쟁으로 외부 무역은 소강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때문에 대월국의 근해를 가장 많이 항해하는 대한제국의 상선들은 무역을 위해 기항하지 않고, 단순히 잠시 들려 보급을 취하고 선단을 정비하거나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항해 기술이 개선될수록 대월국을 거치지 않고 직항(直航)하여 바로 상남으로 향하는 일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레투탄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미 대한제국에서 들어온 사치품들은 대월국에서 높은 값에 팔리고 있었고, 이 외에도 서책이나 비누, 발화기 따위의 구매 수요도 내정이 안정됨에 따라 현저히 높아져 있었다.
레투탄으로서는 서둘러 이 상황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무역이 개시되지 않으면 명나라를 거쳐서 매우 비싼 값으로 이 물건들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역이 공식적으로 대월국의 국내에서 개시된다면 그로 인한 걷을 수 있는 세금 또한 레투탄으로서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레투탄은 참파로의 원정이 끝나자마자 연호를 홍툭(洪德, 홍덕)으로 고치고 내정이 안정되었음을 알려 조속히 대한제국의 상인들이 대월국으로 들어와 주기를 청하는 사절을 황성부로 보냈다.
레투탄은 국내에서는 황제를 칭하면서도 여기서는 삼가 자신을 월남국왕(越南國王)으로 낮추어 서간에도 대한제국의 연호인 가경(嘉慶)만 적는 등, 무역의 개시를 위해 굴신(屈身)하고 들어왔다.
다행히 사절단의 방문을 통하여 대월국의 정세가 안정되었음이 상계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남양(南洋) 무역에 가장 민감한 호상을 필두로 여러 상단들이 입국하여 무역을 개시하였다.
이렇게 대외적인 무역이 안정되자 레투탄은 내정의 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수입이 충원되는 즉시 성곽을 보수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법을 계속 고집하다 보니 개혁의 성과는 나지 않고 있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 미지수에 가까웠다.
레투탄이 고민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관료인 찐뚜엉훙(鄭常興, 정상흥)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찐뚜엉훙은 당시 주흥섭을 통해 대월국으로 들어오고 있던 대한제국의 서책들을 흥미를 가지고 폭넓게 읽고 있었으며, 국제적 정세에도 민감해 대한제국이 흥기(興起)하여 강국으로 거듭나게 된 경위 또한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런 찐뚜엉훙이니 만큼 황제에게 조언할 내용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한제국으로 사절을 파견하시어 귀중한 기술과 제도를 담은 서책들을 내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이것을 지도할 학사(學士)를 보내 달라 청하십시오. 이도 힘들다면 국중의 뛰어난 자제들을 선발하여 대한제국으로 보내어 유학(留學)하며 배울 수 있도록 한다면 이내 이들이 가르침을 얻고 돌아와 폐하의 치세에 큰 복록(福祿)이 될 것입니다.”
찐뚜엉훙의 조언을 받아들인 레투탄은 찐뚜엉훙을 정사(正使)로 하여 대한제국으로 사절단을 보냈다.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진상할 각종 패물들을 가지고 호상의 교관선을 열 척이나 빌려 이들은 1483년, 대한제국으로 향했다.
정사 찐뚜엉훙을 필두로 사신단의 규모가 총 8백여 명에 달했으니 그간 보지 못했던 규모의 사절단이었다.
이들이 벽란도에서 하선(下船)하자마자 황성부의 조정은 이내 이들을 접대하는 일부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인원을 대동한 사절단이 입국한 전례가 없었기에 사절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지어 둔 숙소인 교빙관(交聘官)에서 이 인원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황성부 중의 여각(旅閣)들을 빌려 이들을 머무르게 하는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때 아닌 숙소 부족이 따라와 황성부를 여행하는 일반 민중들이 불편을 겪게 되었다.
이미 대한제국의 정치가 어떤 형태로 굴러가는지 잘 알고 있었던 찐뚜엉훙은 황제를 배알(拜謁)하고 조공품을 진상하는 것에 목매지 않고, 내각(內閣)의 관료들과 접촉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외부대신 고성흠(高成欽)이 이런 찐뚜엉훙을 접견하며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고성흠은 고봉지의 증손자로, 탐라 귀족(耽羅貴族)의 혈통을 이은 명문 출신이었다.
“국가에서 비장(秘藏)하고 있는 중요 서책들은 함부로 내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무기와 화약의 제조, 군선의 건조, 혹은 축성(築城)과 화폐의 주조(鑄造) 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될 경우, 언젠가 아조(我朝)에 위해가 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건축(建築)과 상공(商工)에 관한 서책들이라면, 특별히 양국의 우의를 고려하여 이번에 진상한 공물들에 대한 답례 삼아 사은(謝恩)할 수 있으니, 모쪼록 이 정도 선에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찐뚜엉훙으로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확보하고 싶은 것들이 군사 관련의 기술을 담은 서책들이었으나, 국가적으로 엄격히 유출을 금하고 있는 책들을 대한제국에서는 내어 줄 용의가 전혀 없었다.
이러한 기술들은 세훈으로부터 시작되어 갑신반정과 을유전역, 기해동정, 요동전역(遼東戰役)을 거치며 개량되고 쌓여 온 것이라 주변국들과 비교했을 때 독보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대월국에서 요청한다고 해서 덜컥 내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찐뚜엉훙은 아쉽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목적한 나머지 일들이 있었기에 여기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머지 책들을 내어 주신다 하더라도, 이것을 실제 내치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착오가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을 지도해 줄 학사(學士)들을 대월국으로 보내 주신다면 이것 또한 감읍할 일이겠나이다.”
찐뚜엉훙의 두 번째 요청도 들어 주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대한제국도 그간 교육제도를 꾸준히 정비해서 이제 정착이 어느 정도 되어 인재의 수급에 예전만큼 곤란함을 겪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인재의 공급이 차고 넘친다고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중한 학자들을 타국으로 보낸다는 것은 별로 현실적이지 못한 제안이었다. 더군다나 대월국은 대한제국에게 있어서는 대외 무역에서 중간 기항지 이상의 이점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특별히 지나치게 도와주어야 할 의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응낙하여 준 것이, 유학생의 파견이었다.
“앞서 청한 것들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해, 마지막으로 우리 월남의 학생들이 귀국으로 들어와 공부를 할 수 있게 배려해 달라는 제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이것만큼은 응낙해 주시길 바랍니다.”
찐뚜엉훙의 마지막 사정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유학생의 파견은 이미 소규모이긴 하지만 유구국에서도 하고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 대월국의 학생들이 추가된다고 해서 대한제국으로서는 특별히 잃을 것이 없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원하신다면 한 차례에 150명 내외로 보내신다면 수용을 하여 잘 가르쳐 돌려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유구국에서도 두 해에 한 번 유학생을 서른 명씩 보내고 있으니, 대월국에서도 이에 준하여 두 해에 한 번씩 150명으로 보내신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고성흠의 응낙에 그제야 찐뚜엉훙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원했던 목적을 모두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소기에 하고자 했던 바는 그래도 얻어 가게 된 것이다.
비록 가장 바랐던 책들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각종 기술 서적들과 유학생의 파견에 대해 협의를 보았으니, 돌아가서 황제 레투탄을 볼 면목이 생긴 것이다.
찐뚜엉훙은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에 대해 협의가 나자마자 이것을 장정(章程)으로 문자화하여 도장을 찍고 체결을 하였다.
그리고 동행해 온 사신단 중에서 바로 백오십 명의 젊은이를 대한제국에 남겨 놓고 귀국길에 오른다.
사절단의 인원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협의가 된다면 유학생을 남겨 놓고, 나머지 인원들은 혹여 모를 기물(器物)이나 서책의 운반, 그리고 대한제국 본토에서 매입한 물자들을 운송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유학생들은 태반이 경애학사와 외학당으로 보내지고, 일부는 성균관으로, 또 가장 적은 인원이 학습원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중 이미 대월국에서 관직에 오른 이들은 특별히 한림원(翰林院)에서 수학할 수 있게 허락되었는데, 그 수는 고작 열 명 남짓이었다.
이렇게 1480년대 말에 이르면, 유구나 대월처럼 직접 나라 간의 교섭을 통해 들어오는 유학생들 외에도, 일본과 몽골 등지에서 개인적인 자격으로 학문을 연마하려 입국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때에 이르러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대한제국이 극동(極東)에서 학문에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