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5장 개범도양(開帆渡洋) (36/82)

제35장 개범도양(開帆渡洋)

「14세기에서 15세기로의 전환은 단순히 세기가 바뀐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태양은 더 이상 지구를 돌지 않았고, 넓적한 세상은 둥글게 변했다. 유럽은 아시아에 닿았고, 아시아는 유럽에 닿았다.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알베르토 디 올디세니(Alberto di Oliseni)

1488년

가경 44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명진.

겨우내 얼어 있던 길이 봄이 찾아오자 녹기 시작해 온통 진창이었다.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는 포석(鋪石)이 깔린 가도가 아닌 들 위에 표정(表旌)을 걸고 나무를 쳐내 낸 곧지 못한 길이었다.

영길도 북쪽의 성채(城砦)들은 물론이거니와 두만강 너머 영진도독부로 육로를 통해 가는 것은 썩 쉬운 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북쪽에서는 해운(海運)이 번창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들짐승이 출몰하는 이 북변(北邊)의 길은 홀로 여행하는 이에게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함주에서는 매일같이 영진도독부의 영명진으로 가는 배편이 있었고, 어지간히 파고(波高)가 높고 날씨가 궂지 않으면 어김없이 배는 돛을 올렸다.

그러나 주현(柱晛)은 배를 타지 않고 직접 육로를 통해 영명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험심 강한 스물일곱의 젊은 그에게는 이러한 궂은 길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를 질리도록 탔던 그이기에 이러한 육로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현은 세훈의 증손자였다. 주현의 할아버지는 세훈의 둘째 아들인 현진이었고, 아버지는 현진의 둘째 아들인 명윤(明潤)이었다.

심왕가의 왕족이라 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 당대의 심왕인 당숙(堂叔) 서윤은 주현에게는 심리상 멀게만 느껴졌다.

거기에 할아버지가 차린 계영양행은 백부(伯父)인 경윤(景潤)이 물려받았으니, 조카인 그로서는 딱히 어느 쪽이든 종가(宗家)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현이다 보니 딱히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없었다.

혜성군(慧晟君)의 봉호(封號)를 받긴 했으나, 이것 또한 주현의 다음 대가 되면 군호(君號)가 끊기고 말 것이니 별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벼슬길에 나아가 작위를 봉작(封爵)받을 생각도 없었고, 계영양행의 일에 뛰어들어 치부(致富)할 생각도 없었다.

주현은 본디 머리가 나쁘지 않아 심양대학에서도 공부를 마쳤으나,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심도 없어 산천을 유람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장가도 들지 않고 나이만 스물일곱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명윤은 내심 주현에 대해 걱정이 많았으나, 이 제멋대로인 아들은 좀체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니, 그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든 몸만 성히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심양에서 진서(鎭西)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역을 샅샅이 유람하고 다니던 주현이 갑작스레 어떤 마음을 먹고 함주로 돌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긴 했다.

아무도 그가 함주에 들어와 얼굴을 내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수염은 힘이 좋게 터럭터럭 살아서 뻗혀 있었고, 어딜 보아도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먼 낭인(浪人)의 복장으로 주현이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있는 함주의 계영양행에 얼굴을 내민 것은 심양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거의 십 년만의 일이었다.

“우선 깨끗이 씻고 이야기하도록 하자. 강산이 변하고서야 얼굴을 내비치러 들어왔으니 뭔가 작심한 것이 있으렷다.”

아버지의 명윤의 말에 주현은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있으니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렸다.

멀끔해진 얼굴은 오랜 세월 밖으로 다녔음에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호기 좋아 보이는 눈동자에는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함주에 들른 이유가 당최 무엇이냐?”

그래도 종종 주현이 서찰을 보내와 그간의 사정은 알고 있었기에 큰아버지 경윤은 주현에게 본론부터 물어 왔다.

거칠고 질긴 영길도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경윤은 말의 수식이 없었고 항상 필요한 말만 했다.

주현은 큰아버지의 그런 성정을 으레 잘 알고 있었기에 넙죽 원하는 것을 읊기 시작했다.

“배가 세 척 있으면 합니다. 요동폐든 가경통보든 개의치 않으니 은화도 3만 냥 정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히 쓸 곳이 있으니 사용할 곳은 묻지 말아 주십시오. 배만 십 년간 빌려 주신다면, 선원들은 제가 알아서 구해 부리겠습니다.”

그간 유랑을 하면서 심왕가의 왕족으로서도, 계영양행 영수의 조카로서도 딱히 얻어 쓴 것이 없으니, 이제 한 번쯤 이 정도 내어 달라고 말을 해 볼 수는 있다는 것이 주현의 생각이었다.

가업을 물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작위를 내려 달라는 것도 아니니 사실 주현에게 이것쯤 내어 준다 해도 사실 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십 년간 배를 빌린다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도대체 혼사는 언제 치르려 하는 것이냐. 네가 차일피일 혼례를 미루다 결국 네 동생들이 먼저 장가를 들게 되지 않았느냐. 그래도 장남이라는 놈이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세월을 보내서 어디 사내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요구한 배를 빌려 주는 것과 은화를 내어 주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주 장가들 생각을 버린 듯 보여 경윤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람이 좋아 자식에게 쓴소리 한 번 못하는 동생 명윤이었으니, 이렇게 조카를 질타할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자신마저 주현을 내버려 두면 평생 유람이나 하다가 객사하더라도 모를 지경이 되지 않을까 내심 경윤은 걱정이 많았다.

“과한 걱정이십니다. 이번에 하려는 일은 허망한 일은 아니옵고, 제가 뜻을 세워 반드시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배와 은화를 받기 위해 혼례를 치러야 한다면 치르겠나이다.”

주현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경윤으로서도 더 이상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혼사를 치른 뒤 약속한 대로 배와 돈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주현은 경윤에게서 약조를 받아냈다.

동북면(東北面, 영길도)에서 큰 기반을 갖고 있는 호족(豪族)인 영흥공(永興公) 조사의의 손자 조견(趙堅)의 여식과 얼렁뚱땅 초례청을 치른 주현은, 함주에 신접살림을 차린 뒤 채 석 달도 머물지 않고 바로 백부 경윤을 독촉해 약속받은 배와 은화 3만 냥을 인계받았다.

그리고서는 바로 배는 함주의 부두에 매어 놓고, 은화 3만 냥을 언제고 상관(商館)이 있는 곳에서 환전할 수 있는 계영양행에서 발급한 환표(換標)만 챙겨 들고서는 바로 말을 한 필 잡아 타고 영명진으로 향하는 노정에 오른 것이다.

방랑 생활 동안 혼자 다니는 길에 익숙해져 있었던지라 주현은 동행하는 시종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라도 있는 것을 오히려 만족하고 있었다.

동북방의 길이 아무리 험하다고는 하지만 길도 없는 산중을 헤매고 다닌 적도 수태 있는 주현으로서는 별로 어렵다고도 할 수 없는 여행길이었다.

두만강의 물이 질고 얕은 곳을 골라서 강을 건넌 주현은 이내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잡고 영명진으로 쉴 새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쉬어 가는 것은 말이 지칠 때뿐이었다. 그러다가도 풍광 좋은 곳이 있으면 며칠이고 주저앉아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며 죽치고 앉아 있기도 했다.

다행히도 인적 드문 길을 가는 동안에도 들짐승과 마주치는 일도 없었고, 종종이 남쪽으로 내려와 여행객의 주머니를 털어 가기도 하는 여진족 비적떼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서둘렀다가 게으름을 피웠다 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얼추 때에 맞춰 영명진에 들어설 수는 있었다.

여진족으로부터 동북방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자, 모피 무역의 거점으로서 영명진은 제법 도시 꼴을 갖추고 있었다.

해안가의 단애(斷崖)를 따라 영진분견대의 군대가 주둔한 요새는 제법 그럴싸하게 쌓아 올려져 있었고, 언덕 아래의 항만에는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거주하는 읍락(邑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그럴싸한 꼴을 갖춘 건물도 많이 들어서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영명진에서 유일하게 3층으로 올려진 계영양행의 상관이었다.

주현은 다짜고짜 영명진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을 찾아가 환표를 내밀며 상관의 사환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함주의 계영양행 본국(本局)에서 발행한 환표요. 내 백부가 행주(行主)인 김경윤이니 딱히 신분을 따로 보증할 필요는 없을게요. 이 돈을 가져다가 사람을 구해 주었으면 하오. 우선은 십 년 계약으로 하고, 할 일은 뱃일이오. 대충 백여 명 정도 구해 주면 좋겠소이다.”

배를 타는 수부(水夫)들은 보통 한 번의 항해를 기준으로 계약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3만 냥이나 되는 돈을 들고 와서 십 년 계약을 할 수부를 백 명이나 구해 달라고 요구하니, 영명진의 계영양행 지국에서는 갑작스러운 일감에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행주의 조카가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응낙하고서는, 10년 계약을 할 솜씨 좋은 수부를 찾는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영명진의 뱃사람들은 동북방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데에 솜씨가 있었고, 이들을 고용하는 품삯은 결코 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보통 가경보나, 멀리는 특림보까지 가는 6개월 항해에서 이들 뱃사람들이 벌어오는 수당은 은화 서른 냥 정도였다. 보통 이곳의 항해는 날이 좋은 늦봄에 시작해 날이 급격히 추워지는 가을이면 끝나곤 했으니, 이 반년의 항해로 버는 돈이 보통 1년의 수입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게 1년 수입을 서른 냥으로 잡고, 10년을 계약하는 것이니 한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 대략 300냥이 드는 셈이었다. 그것을 백 명을 구하려 하니, 3만 냥은 거기에 딱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돈인 셈이었다.

다행히 안정적으로 10년간의 장기 고용을 하고자 하는 이는 차고 넘쳤고, 이제 막 항해가 시작될 철인지라 배를 타고자 하는 이들도 많아 이들을 고용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주현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10년간 부릴 수 있는 수부 100명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주현에게 고용된 이들 중에서는 윤희상도 있었다.

그는 종로에서 왈패 노릇을 하다가 그만 포청에 붙들려 재판에서 노역형을 선고받고 영진도독부에 보내져, 바다 건너 가경보까지 들어가 그곳에서 산림을 채벌하는 혹독한 일을 4년간 했다.

다행히 개중 마지막 1년은 중노동은 면해져 가경보에 정착해 있는 모피 사냥꾼들과 함께 고혈도(庫頁島)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모피를 사냥하고 토착민들과 거래를 하는 등 비교적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조금의 돈도 모았고, 이 생활이 마음에 들었던 그는 이곳 북방에 정착할 방법을 궁리하다가 배를 타는 일을 택했다.

동북방의 수부라는 것은 꼭 배를 모는 일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임한기가 40여 년 전 이곳을 개척한 이래 내려온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명진에서 출항하는 배는 주로 계절 사냥을 겸하고 있었고, 동북방의 섬과 육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토착민들과 거래하는 한편, 잠시 정박하는 동안 수부들은 사냥용 보총을 들고 근처의 산야를 탐색하며 모피를 사냥하곤 했다.

이러한 일이니 만큼, 윤희상의 적성에는 그럭저럭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윤희상은 배를 탄지 2년째 되는 지금에 와서는 그럭저럭 일을 잘하는 수부로 인정받고 있었고, 덕분에 이번의 주현에게도 고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10년간 할 일이 생겼으니 윤희상은 만족스러웠다.

비록 노역에 처해져 부끄럽게 들어온 동북방이었으나, 윤희상은 아주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내지(內地)에는 미련이 없었다.

비록 춥고 고된 지역이지만 여름철 선선할 때에 한철 일을 하고 나면 겨우내 따뜻한 집에서 충분히 쉴 수 있으니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는 것이 윤희상의 생각이었다.

운종가에서 왈패짓을 할 때에 비하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도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천성이 그러한 윤희상이다 보니 이내 성정이 비슷한 고용주 주현의 눈에 띄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뱃사람을 고용하자마자 주현은 함주에 묶어 두었던 배를 모두 불러들여 이곳에 선원들을 태우고 영명진을 출항해 예전 임한기가 밟았던 항적(航跡)을 따라가며 흔히 이곳의 뱃사람들이 해 오던 것처럼 거래도 하고 모피도 사냥하고 했다.

그러나 주현의 목적은 그러한 소소한 일들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임한기가 갔던 항로를 고집스럽게 따라가며 직접 항로를 지도에 옮기고, 일지(日誌)를 작성하며 살펴 나가고 있었다. 다른 수부들은 그러한 주현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했으나, 윤희상만큼은 달랐다.

주현이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한 것이다.

공부라고는 한 줄도 해 보지 못한 일자무식들인 수부들 중에서 그나마 황성부에서 돈 있는 포목상의 서출로 자라난 윤희상은 글줄을 읽을 줄 알고, 셈도 빠른 별난 종자였다.

그는 이내 주현이 하는 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고, 주현도 이런 윤희상과 이내 마음이 잘 맞아, 그에게 점차 큰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현은 임한기의 행적만을 따라가는 항로를 무려 세 해나 거듭 나가면서, 윤희상에게도 도대체 임한기의 항로를 따라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주현이 입을 연 것은 윤희상과 세 해를 함께 배를 타 마음을 열 수 있을 즈음이 되어서야였다.

“나는 임한기가 갔던 너머로 나아가 볼 생각이네.”

임한기는 아이누족들이 사는 군도(群島)를 따라 북쪽의 아주 매섭고 추운 땅에 겨울에 도착했었고, 그곳에서 많은 선원들을 잃으며 어렵게 귀항한 뒤로는 두 번 다시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은 임석(壬碩), 즉, 북방의 큰 땅이라는 뜻의 지명만 붙여진 채로, 그 뒤로 그곳까지 가는 이들은 없었다.

주현도 조심스럽게 이전의 두 차례 항해에서는 그 근처까지만 올라갔을 뿐, 임석까지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세 번째 항해에서는 항로를 잘 타서, 한 여름에 임석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일정이 짜여졌고, 이번에는 이참에 그 땅을 한 번 밟아 보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희상과 수부들도 그러한 사실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주현이 그 너머까지 생각하고 있단 말은 윤희상에게도 충격이었다.

“그곳 너머로는 아무도 가 본 이가 없고, 춥고 빈한한 대지만이 넓게 펼쳐져 있거나, 아니면 얼음이 떠다니는 바다만 있을 터인데 어째서 그곳까지 가 보려고 하십니까? 공연히 재물을 탕진하고 세월을 허비하는 일이 아닐런지요.”

윤희상의 물음에 주현은 예의 그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임석이란 곳도 임한기가 가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모르지 않았겠는가? 그럼 그 뒤에 뭐가 있는지는 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 내가 꼭 그 문을 열어 보고 싶다, 이 말이네.”

어지간히 담력이 좋다는 윤희상도 주현의 포부 앞에서는 그저 얼얼해질 뿐이었다.

1492년 중추(仲秋)

카스티야 왕국 파로스 데 라 프론테라 항(港).

제노바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다. 보통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라고 불렸으며, 제노바 방언(方言)으로는 크리스토파 켐보(Cristoffa Czmbo)라는 이름이었다.

카스티야어로는크리스토발 콜론이라고도 했다.

그는 1451년 제노바에서 모직물 직공이었던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어머니 수사나 폰타나로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도메니코는 모직물상을 직접 경영했지만 가정 형편은 그다지 좋다고 말하기 힘든 편이었고, 포도주와 치즈까지 취급해서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가는 상황이었다.

크리스토포로는 제법 머리가 굵어지자,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배에 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앙주 공(公) 르네와 대립하고 있던 아라곤 왕국(王國)의 갤리선 페르난디아호를 나포하라는 명을 받은 군선(軍船)에 선원으로 탑승하기도 했다.

그 뒤 록사나라는 이름의 배를 타서 에게해의 키오스 섬에 가서 유향(乳香)을 매입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뱃일을 배우면서 성인이 된 크리스토포로는 첸틀리오네, 스피놀라, 디 네그로 등의 제노바의 유력 상인 가문에 고용되어 유향을 영국과 플랑드르에 옮기는 상선대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상선대는 프랑스 함정에게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만다.

크리스토포로는 이 와중에 겨우 목숨만을 구했다. 그 와중에 수영을 해 포르투갈 해안에 닿은 그는, 고국인 제노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포르투갈에 머무르기로 마음먹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지도 제작업을 하고 있던 그의 동생 바르톨로메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포로는 리스본에서 동생과 함께 지도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크리스토포로는 항해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종종 항해에 참가했다.

잉글랜드 선적의 배를 타고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생활을 꾸려 가던 중에 크리스토포로는 필리파라는 여인과 혼인을 맺게 되었다. 그녀는 바르톨로뮤 페레스트렐류(Bartolomeu Perestrello)라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의 포르투 산투(Porto Santo) 영주의 딸이었다.

그녀의 신분을 생각해 볼 때 평범한 지도 제작자였던 크리스토포로에게 분에 넘치는 신부감임에는 분명했다.

결혼 후에 크리스토포로는 아내와 함께 처가의 영지인 마데이라 섬의 포르투 산투로 종종 가곤 했다.

마데이라 섬은 리스본에서 사흘 거리의 대서양의 너른 바다 사이에 떠 있는 제도(諸島)였다.

이즈음에 크리스토포로는 포르투갈에서 추진하던 서아프리카의 항로 탐색에 참여해 기니아 해안을 항해하며 그곳의 지리를 익힐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크리스토포로는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탐험가인 빈첸초 모나텔리가 먼 동방의 대한제국까지 다녀와 쓴 기행문인 《조선기행 Itinerarium Coreae》을 손에 넣게 되었고, 이것을 애지중지하며 읽었다.

동방으로 가는 항해에 대해서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묘사된 대한제국을 비롯하여 동양(東洋)의 제국(諸國)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여 큰 무역을 하는 것이 크리스토포로의 소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크리스토포로는 적극적으로 카스티야어와 라틴어 등의 어학과 천문학, 지리, 그리고 항해술을 습득하기 위해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피렌체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와 교분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크리스토포로는 이 토스카넬리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입각해 서쪽으로 항해를 하더라도 동방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토스카넬리는 마르코 폴로와 최근의 빈첸초 모나텔리의 여행기를 참고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계산했던 것보다 유럽과 아시아의 거리는 짧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따라서 동방의 끝에 있다는 대한제국까지는 서쪽으로 갈 경우에, 동쪽으로 아프리카대륙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가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러한 서회항로(西廻航路)에 대한 확신을 지니게 된 크리스토포로는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를 찾아가 이 서회항로를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자신감 넘치는 이 크리스토포의 설득에 주앙 2세는 흥미를 보였다.

크리스토포로는 항해를 위한 자금 원조는 물론이거니와 성공할 경우 높은 지위와 권리, 그리고 앞으로 거두게 될 수익의 1할이라는 조건을 붙이며 이 기회를 잡아서 성공하고자 하는 의욕을 번득였으나, 주앙 2세가 이 계획의 검토를 맡긴 왕실의 수학자들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어 놓음으로서, 주앙 2세의 관심도 곧 시들해지고 말았다.

크리스토포로가 주앙 2세의 거절에 좌절해 있던 차에, 아내인 필리파가 세상을 떠나는 악재를 연달아 맞게 되었고, 포르투갈에 질려 버린 그는 리스본을 떠나 옆 나라인 카스티야 왕국으로 떠나갔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크게 포르투갈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의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세 나라는 포르투갈어,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라는 사용 언어도 다르고 역사적인 연원도 다른 왕국으로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혼인 관계로 동맹을 맺기도 하며 이베리아 반도와 주변 바다에서 각축을 벌여 왔다.

그러나 이때에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은 혼인을 맺어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일시적으로 연합왕국(聯合王國)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베리아의 정세는 안정되었고, 남쪽 그라나다에 잔존하고 있던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는 데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토포로가 카스티야 왕국으로 건너간 때가 바로 이렇게 이사벨 여왕에 의해 나라가 부흥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곳에서 크리스토포로는 유력자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계획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것은 곧 이사벨 여왕의 귀에도 들어가 이사벨 여왕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1486년, 이사벨 여왕을 처음으로 코르도바에서 접견할 기회를 얻은 크리스토포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전했다.

페르난도 2세는 이 계획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사벨 여왕은 크리스토포로의 의견에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고, 자문회를 열어 이 계획을 검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검토 작업은 수 년에 걸쳐 지체되었고, 그 사이 지친 크리스토포로는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계획을 재차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의 남단 끝에 도달하여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한 시점이었기에 주앙 2세는 더 이상 서회항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몸이 달은 크리스토포로는 동생인 바르톨로메오를 잉글랜드의 헨리 7세와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도 보내 계획을 설명하게 했으나, 이들로부터도 아무런 긍정적인 회답을 얻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검토 작업은 크리스토포로의 계획의 검토를 결국 부결하는 것으로 나왔고, 여기에 다시 재심사를 요청해 또다시 지루한 자문회의 검토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결국 1492년 4월 17일,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 이사벨 여왕은 그라나다 근교의 산타페에 크리스토포로를 초청해 항해의 지원을 약속했다.

수 년간의 기다림의 결실이 드디어 맺히는 순간이었다.

“제가 앞으로 발견하게 될 토지에 대하여 종신총독을 보장해 주실 것과 그곳에서 얻게 될 수익의 1할을 제가 취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십시오.”

계획이 종내 통과되어 자신만만해진 크리스토포로는 여왕에게 이러한 제안을 내걸었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던 이사벨 여왕은 이러한 크리스토포로의 조건을 별 수정 없이 수락했다.

항해의 경비가 이내 조달되기 시작했고, 항해에 필요한 자금은 곧 크리스토포로의 손에 건네졌다.

결국 1492년 8월 3일, 대서양에 면한 파로스 데 라 프론테라 항구에서 크리스토포로는 출항의 돛을 올렸다.

항해에 나선 것은 카라벨선(船)인 니냐호, 핀타호, 나오선(船)인 산타 마리아호의 총 세 척의 선박이었다.

모두 90명의 선원이 탄 배는 크리스토포로가 이미 계획해 둔 항로를 따라 물결을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카나리아 제도에 들러 대항해를 위한 준비를 마친 다음, 곧장 서쪽으로 나가는 항로였다.

대서양의 한복판에는 섬 하나 없었고, 항해는 크리스토포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지기 시작했다.

10월 6일에는 소규모의 폭동이 일어나고, 그 3일 뒤에는 선원들의 불만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크리스토포로는 결국 선원들에게 제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3일 동안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다시 뱃머리를 돌려 돌아가도록 하겠다.”

크리스토포로로서도 이것은 확신할 수 없는 도박이긴 했다. 그러나 그 직후 바닷물에 떠내려 온 나무가 목격되고, 10월 11일이 막 되어 약속한 3일이 다 되었을 무렵, 핀타호의 선원이 육지를 발견했다.

다음 날 아침, 크리스토포로는 그 섬에 상륙해서 그곳의 점령을 선언하고 산 살바도르, 즉, 신성한 구세주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대륙이 발견된 것이다.

1494년

가경 50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명진.

대륙의 반대편 끝에서 크리스토포로 콜롬보가 신대륙에 도달한 사실도 모른 채 주현은 여전히 북방 항로에 대한 탐색 작업을 몇 년째 계속하고 있었다.

세 번째 항해에서 여름철에 임석에 상륙한 주현은, 공들여서 그곳에서 다음 항해에서도 들러서 보급지로 쓸 만한 땅을 물색했다.

주현은 임석(壬碩, 실제 역사에서의 캄차카 반도)이 뾰족한 끝을 가진 일종의 곶(串)과 같은 지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임한기가 이미 사십여 년 전에 도달해서 겨울을 났던 서쪽 해안에서 머무르지 않고, 주현은 이 곶을 돌아 동쪽 해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울창한 수림과 해안가에 맞닿은 산맥이 있는 그곳에서 주현은 외풍이 심하지 않고, 사냥감도 적당히 있어 배를 대기에 좋은 만구(灣口)를 발견하였고, 그곳에 다음 해 항해에서 전진기지로 쓰기 위해 오두막을 몇 채 세운 뒤,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영명진으로 돌아갔다.

한 번의 항해로 승부를 보아야 했던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와 다르게 주현에게는 시간이 충분했고, 기회도 많았다.

무리해서 북쪽의 바다를 횡단하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주현은 땅이 계속 이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했을 뿐, 거창하게 지구를 반 바퀴 돌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호기심에 의해 항해는 계속되어졌다.

네 번째 항해에서 주현은 이전 항해에서 임석의 동쪽 해안에 확보해 둔 전진기지를 곧장 찾아갔다. 겨우내 많은 외풍에 손상을 입긴 했지만, 간단한 보수로 사람이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고쳐 놓을 수 있었다.

이곳에 배에 실어 온 보급 물자를 적재해 놓고, 주현은 동쪽의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으로는 끊임없이 해안선이 이어졌다. 그러나 여름임에도 북쪽으로 다가갈수록 날씨는 급격히 싸늘해졌고, 위협감을 느낀 주현은 다시 남쪽으로 항로를 틀어 보급지를 찾아 돌아갔다.

보급지로 돌아간 주현은 세 떼가 날아온 방향을 유추해 이번에는 동쪽으로 항로를 틀어 보았고, 그곳에서 두 개의 섬을 발견했다.

주현은 그곳을 발견한 날이 계미일(癸未日)이었기에, 그날의 간지를 따서 대계미도(大癸未島)와 소계미도(小癸未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발견의 기쁨도 잠시, 슬슬 날씨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고, 겨울이 다가오는 긴박함을 느낀 주현은 다시 항로를 서남쪽으로 잡아 영명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야겠네. 분명히 계미도 동쪽에 섬들이 이어져 있음에 틀림없네. 이른 봄에 유빙(遊氷)이 물러날 때쯤부터 항해를 시작해 천천히 그간의 항로를 따라 움직인 다음, 여름이 시작할 무렵에 일거에 동쪽으로 가 볼 생각이네.”

겨우내 영명진에서 다음 해의 항해만을 생각하던 주현은 윤희상에게 자신의 굳은 의지를 말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여러 차례의 항해의 와중에 선원들을 규합하고 통솔하는 위치에까지 오른 윤희상은, 어려운 항해에 선원들을 도닥여 주현이 뜻하는 바대로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나 주현의 굳은 의지와 다르게 1492년의 다섯 번째 항해는 결국 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크리스토포로 콜롬보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 해 여름에 주현과 선원들은 임석 동쪽에 확보해 두었던 근거지에 들이닥친 원주민들과 충돌이 빚어지고, 배 한 척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어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불운을 겪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소계미도에서 새 떼의 이동을 관찰하여 동쪽에도 섬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493년 여섯 번째 항해에 나선 주현과 윤희상은 선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불안한 동쪽 바다로의 항해를 먼저 나서기 전에, 임석의 북쪽으로 항로를 마저 탐색해 보기로 했다.

아직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시간은 충분하게 여겨졌다. 불안하게 바다로 나가는 것 보다 큰 땅을 끼고 항해하는 것이 충분히 안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북쪽 끝의 외로운 해안을 항해하면서, 그들은 축치(Chukchi)족과 마주칠 수 있었다. 어렵사리 이들과 의사소통을 행한 주현은 분명히 그가 예상했던 곳에 섬들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축치인들은 카누를 통한 항해에 능했고, 때로 사냥을 위해 남쪽의 알리아트(Aliat), 즉 축치어로 섬에 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알리아트란 말을, 주현은 안력(岸礫)이라는 글자로 옮겼다. 들리는 대로 적은 국문을, 다시 한자어로 옮겼으니 원래의 뜻을 파악하기 힘들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현은 그때부터 두루뭉술하게 아직 탐험되지 않은 동쪽의 지역을 안력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기 시작했다.

슬슬 가을로 접어듬에 따라, 북쪽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그만두고 주현은 항로를 남쪽으로 돌렸다.

어느 정도 북상하던 항해에서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으므로, 이번에는 도발적으로 좀 더 깊은 바다로 돌아가는 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이미 항로도에 그려 둔 육지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는다면, 언제고 육지에 사흘 안으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만 항해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남쪽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섬을 발견했고, 주현은 이곳의 위치를 탐측하여 계산해 보고, 윤희상과 상의한 끝에 이곳이 소계미도의 동쪽에서 머지 앉은 곳에 위치한 섬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몇 차례의 항해 동안 있을 것이라고 추정만 하던 섬을 발견한 것이다.

주현은 항해도에다 이 섬을 안력도(岸礫島)로 기입했다. 후대에 이르러 이 주변 일대의 제도(諸島)가 안력제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데, 실제 역사에서의 알류산 열도이다.

알류산이라는 이름도 축치어의 알리아트에서 나온 것이니, 안력이라는 이름과도 같은 말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곧 겨울이 다가오기에 주현은 다시 침로를 서남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10년간의 계약 중에 6년이 지나갔다.

주현은 다음 해의 항해에서 안력도에서부터 동쪽으로 섬들을 따라 항해해 볼 계획을 단단히 세웠고, 이번에는 아주 영명진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보다 동쪽의 고혈도에 위치한 가경보에 함대를 기항시키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이번 일곱 번째 항해에서 사활을 걸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주현은 함주에 연락하여 그간 해 온 계획을 소상히 설명하고, 자금의 지원을 백부 경윤에게서 얻어낸 다음에 해가 바뀌기 무섭게 이 돈으로 추가로 계영양행에서 두 척의 배를 더 빌렸다.

한 척의 배가 이전 항해에서 파손되었기에 총 네 척의 배가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주현은 간단히 이 배들을 갑자(甲子), 을축(乙丑), 병인(丙寅), 정묘(丁卯)라는 시원찮은 이름들로 불렀다. 함대에 편입된 순서대로 붙인 것이니, 이름을 붙이는 재주만큼은 별로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 네 척의 배에 백 명의 선원을 나눠 태우고 봄이 되자마자 주현은 안력도로 곧장 향했다.

이번 항해에서는 선원들을 간곡히 설득하여 토착민과의 거래를 위한 정박도 하지 않고, 모피 사냥을 위한 상륙도 하지 않은 채, 가장 단순한 항로를 택해 안력도에 다다랐다.

주현은 이제 항해술에 꽤나 전문가나 다름없이 된 윤희상과 논의해 약간 동남쪽으로 진로를 잡아 안력도에서 식수를 실은 다음 바로 항해에 나섰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봄은 이제 한껏 한창에 접어들고 있었고, 유빙이 물러간 바다를 고요히 항해하는 동안, 수평선 너머로 섬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 섬들은 마치 징검다리처럼 늘어져 있었고, 마지막 섬에 다다랐을 때 주현은 그곳이 섬이 아니라 꽤나 커다란 육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기에, 주현은 조금 더 욕심을 내서 그 해안을 따라 항해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이 실제 역사에서 알라스카로 알려지는 지역으로, 주현은 이 땅을 옛 전설에서 나오는 동쪽 바다 끝에 있다는 섬의 이름인 부상(扶桑)으로 명명했다.

빙하가 깎아내린 장엄한 해안은 1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주현은 욕심이 나 무리하게 항해를 지속했으며, 결국 어느 순간 늦여름으로 접어들어 회항을 시도했다가는 돌아가는 중에 겨울이 찾아와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쪽으로 해안선이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주현은 윤희상을 선실로 불렀다.

“올해는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비교적 따스한 곳이 나오면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 다시 봄이 시작하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한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현의 생각에 윤희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상황에서 별다른 대안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우선은 선원들이 안전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겨울철에 이 북쪽 바다에서 무리한 항해를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을 동안 주현은 해안선을 따라 항해도를 그려 가며 남쪽으로 천천히 조금씩 배를 전진시켜 나갔다.

복잡한 섬들이 펼쳐진 해안선을 따라가는 동안 가을이 한창으로 접어들었다.

아직 북쪽 지대에 있는지라 이미 외투를 걸치지 않고서는 갑판 위에 서 있기 힘든 날씨였다.

그래도 다행히 항로는 방해받지 않고 남쪽으로 일관되게 내려갈 수 있었고, 겨울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극심한 추위가 느껴지지도 않고, 북쪽 바다에서 보여야 할 유빙이 보이지도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주현과 선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을 날 걱정을 던 것이다.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간 그들은 적당히 육지에 둘러싸여 바람이 막히는 좋은 기항지를 발견하였고, 그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이 선택한 기항지는 바다와 섬 사이의 좁다란 해협(海峽)을 따라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해안가를 따라서는 높은 거목(巨木)들이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었고, 겨울바람은 차가웠음에도 바다의 습기를 잔뜩 머금어 그렇게 매섭지 않았다.

배를 대어 놓기에도 물살이 거칠지 않아 좋았고, 튼튼해 보이는 나무들은 겨우내 기거할 거처를 지을 재료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무인지(無人地)로만 여겼던 이곳도, 사실상 주인이 있는 땅이었을 줄은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배의 닻을 내려 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안에 임시로 거처를 만들고, 쓸 만한 나무를 베어 오기 위해, 그들은 섬의 안쪽으로 향했다.

깊숙한 원시림(原始林)에는 습기 찬 겨울바람이 스며들어 와 나무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윤희상은 선원들을 이끌고 지리를 탐사할 겸, 목재를 살펴보며 이 숲 속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다행히도 짐승도 많고, 물도 깨끗해 마실 만했다.

이렇게 열댓 명의 선원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던 윤희상은 사람이 남긴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흔적들과 종종 마주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을 코목스(Komox)라 부르는 원주민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옷을 입고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붉은 피부의 사람들과 주현을 비롯한 선원들은 서로 마주하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목스인들은 윤희상을 비롯한 선원들에게 다가와 그들의 몸을 만져 보고, 코를 쓰다듬고, 체취를 맡았다.

활이 분명한 무기로 무장한 그들에게 대응할 적절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나왔던 윤희상과 선원들은 쉽사리 칼을 빼어 들지 않고 그들의 반응에 일단 숨을 죽였다.

이 조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이 불편한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알 수 있으리라.

1494년 음 11월, 그들은 그렇게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가 조우하는 현장에 서게 되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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