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해동선산(海東仙山)
「탕왕(湯王)이 또 물었다. “물에는 크고 작음이나, 길고 짧음이나, 혹은 같거나 다름이 있는가?” 혁(革)이 대답하여 가로되, “발해(渤海)의 동쪽은 그 끝이 몇 억만 리 바깥인지 알 수 없사온데, 그 끝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가 있사오니, 이름하여 귀허(歸墟)라 하나이다. 천하 팔굉(八紘)과 아홉 들[九野]의 물이 그리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 것이 없사오나, 물이 불어드는 일도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나이다. 그 가운데에 다섯 산이 있는데, 그 이름을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라 합니다. 그 높고 낮게 둘레를 도는 것이 3만 리에 이르고, 그 꼭대기에 평평한 곳은 9천 리에 달합니다. 산과 산이 서로 맞닿아 있어 7만 리에 달합니다. 그 위의 대각(臺閣)은 모두 금과 옥으로 치장되어 있고, 그곳에 사는 금수(禽獸)들은 흰빛을 띄고 있나이다. 보옥(寶玉)과도 같은 나무들이 뭉쳐 나며, 그 꽃과 열매가 맛이 좋은데, 그것을 먹게 되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중략)……때문에 대여와 원교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떠밀려가 이내 대해(大海)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湯又問:“物有巨細乎? 有修短乎? 有同異乎?” 革曰:“渤海之東不知幾億萬里, 有大壑焉, 實惟無底之穀, 其下無底, 名曰歸墟. 八紘九野之水, 天漢之流, 莫不注之, 而無增無減焉. 其中有五山焉:一曰岱輿, 二曰員嶠, 三曰方壺, 四曰瀛洲, 五曰蓬萊. 其山高下周旋三萬里, 其頂平處九千里. 山之中間相去七萬里, 以爲퀺居焉. 其上臺觀皆金玉, 其上禽獸皆純縞. 珠즏之樹皆叢生, 華實皆有滋味, 食之皆不老不死. ……(中略)……於是岱輿員嶠二山流於北極, 沈於大海.」
―탕문편(湯問編)〉, 《열자(列子)》, 2.
1496년
가경(嘉慶) 52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영진도독부(永鎭都督府) 영명진(永明鎭).
가경제(嘉慶帝)의 치세는 요순(堯舜)의 때에 비견할 만했다.
심왕(瀋王) 세훈에 의해 조선이 새로운 체제의 국가인 대한제국으로 거듭난 뒤로, 사회의 안정과 상공(商工)의 촉진, 그리고 안정된 정치 운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세훈의 장남이자, 대를 이어 내각 재상(宰相)을 지낸 현도의 집권기 동안, 대한제국은 전대(前代)에 쌓아 둔 기반을 바탕으로 대내외적인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대외적인 무역로의 확충과 항로의 탐사, 그리고 강력한 군사제도의 운영 및 산업진흥으로 태평성세를 구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적인 번영의 뒤에는 당연히 그늘진 면도 따라오게 마련이다.
벌써 쉰 해를 넘어선 가경제의 치세 동안, 특히 현도가 재상으로 집권하던 전반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았다.
난세(亂世)를 헤쳐 나오며 기반을 쌓아 둔 세훈을 비롯한 선대의 명신(名臣)들의 고로(苦勞)가 빛을 보고 있던 때였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다시 한 번 명을 격파하여 요동의 천 리(千里)를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인도양을 횡단하여 무역로가 알렉산드리아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북해(北海)에서는 영진도독부를 중심으로 요지에 정착지가 설치되고 모피 무역이 성행하고, 남쪽으로는 유구(琉球)와 대월(大越)이 입조(入朝)했다.
내부적으로도 법률제도가 정비되고, 교육기관이 발흥했으며, 학문에도 큰 진작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적인 성장을 거치는 동안 사회 내적으로는 새로운 문제들이 쌓여 가기 시작했다.
현도가 재상의 직을 내려놓고 나라의 정치가 내각(內閣)과 추밀원(樞密院)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신료(臣僚)와 귀족들은 내각과 추밀원으로 나뉘어 서로 어깃장을 놓고, 추밀원 안에서도 당파가 나뉘어 정쟁(政爭)이 시작되었다.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격렬한 정파 싸움은 아니었으나, 정권을 장악해 권력을 쥐고자 하는 수단으로 정계에 당략(黨略)의 논리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상업의 측면에서도 나상(羅商)을 필두로 하는 경상(京商) 및 송상(松商), 호상(湖商)등의 대상단(大商團)들이 국내외의 무역과 경제를 독식하는 구조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소규모의 지역 상단들은 이들 대상단들이 장악한 기존의 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공업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쇄신을 거듭하던 대한제국의 기술력도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체제가 일단 새롭게 완성이 되고 무역 구조가 정착됨에 따라 상업적인 동인(動因)도 차츰 줄어들자, 새로운 상품의 개발과 기술의 혁신이 잘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
발화기와 보총(步銃) 등은 한 세기에 가깝게 큰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계 방직(紡織)으로 생산되는 면제품만이 수력을 이용한 동력화(動力化)의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북방에서 수렵을 통해 들여오는 모피나 요동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양모(羊毛) 등이 새로운 거래 품목에 이름을 올렸으나, 모두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것들로 기술적인 혁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도자기 또한 주요한 수출 품목이었으나 이것은 고려 때로부터 큰 기술적 변화가 없는 상품이었고, 칠기(漆器)도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원양 항해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造船) 기술만큼은 큰 혁신을 겪었는데, 이 마저도 세훈과 현도 집권 시기에 발전했던 속도를 이제는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선박으로도 충분히 대양을 항해할 수 있으므로 선박을 개량하고자 하는 욕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부분적으로는 학계와 일반 민간이 유리되기 시작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교육기관은 15세기 동안 크게 혁신을 겪었고, 유교 경전에서 벗어난 과목들도 크게 설강(設講)되면서 학예(學藝)의 발전만큼은 그 어깨를 겨룰 나라가 없게 되었다.
학습원, 경애학사, 성균관, 심양문리과대학 등을 중심으로 일종의 대학교육이 등장했으며, 지방에는 상학(庠學)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이 설치되어 교육 수준을 끌어올렸다.
기존의 사서육경(四書六經)으로부터 격물학(格物學)과 화학(化學) 등을 아우르는 신학문에다가, 그리스·로마 고전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적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른바 황성부의 4대학교는 일반 민중의 접근이 쉽지 않은 상류층을 위한 교육기관화가 되고 있었고, 그나마 문턱이 낮은 심양문리과대학 또한 요동이라는 변방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지속적인 사회 변혁의 움직임을 이끌기에는 불리한 측면이 있었다.
지방의 상학들 또한 마찬가지로, 지방 향반(鄕班)이나 유력자들의 자제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고, 교육기관의 이러한 특성은 일반 상인들과 직인(職人)들을 중심으로 한 현실 경제와 결합한 유용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1408년에 이미 강희수가 《화학소론》에서 압적식(壓積式)이라는 이름으로 보일의 법칙을 증명하는 등 학술적인 발전은 한 세기 동안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나, 이러한 것은 학내에서 강의될 뿐,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1662년 보일의 법칙이 증명된 이래, 한 세기 뒤에 증기기관이 역사에서 중요한 동력으로 등장했던 것에 비하면 실용적인 측면에서 상아탑의 학문과 민간 현장의 교류라는 것은 대한제국에서는 상당히 도외시되는 측면이 있었다.
이른바 제국의 성장이란 것도 결국 일반 백성의 삶을 크게 나아지게 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앙법의 도입을 통한 농업 기술의 개량, 그리고 법률 제도의 정비를 통한 백성들의 법에 대한 접근권의 개선, 마지막으로 상업의 발전과 화폐의 전반적인 도입으로 인한 거래의 활성화와 세금의 안정 등의 몇 가지 혁신을 제외하고는 백성들의 삶은 한 세기 전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백성 개개인의 삶은 질적으로 후퇴한 측면이 있었다. 고려말에서 조선의 개국, 그리고 명과 일본과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사회는 동요했고 인구수는 그다지 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15세기의 한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대한제국의 인구는 크게 늘어 2천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대내적으로 식량의 소모를 크게 늘렸고,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질 높은 식사를 포기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농업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탓에 세훈의 집권 말기에 일반 농가의 대부분이 백미(白米)로 식사하던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이 쌀을 농사로 지어 이것을 시장에 팔고, 자신들은 잡곡으로 연명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노비를 혁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주제도는 여전히 상존했고, 제국의 성장을 등에 업고 이러한 지주들이 토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는 전국 각지에서 수시로 드러나고 있었는데, 소작농들이 이러한 지주들에게 저항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우리 농민들을 속여 땅을 빼앗고, 제 배를 불리는 악덕한 지주들을 어찌해야 좋겠소? 황성을 비롯한 성중(城中)의 부민(府民)들은 배가 부르나, 우리들을 딛고 사는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을 해 남의 배만 불려 주니, 무엇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소. 겨울과 봄을 날 식량을 거둘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청한 것이 무슨 죄라, 이렇게 오랏줄을 동동 묶어 데려온단 말이오?”
경상도 밀양(密陽)의 농민 정초도 이러한 농민들 중 하나였다.
정초의 조상은 빈농(貧農)이었으나, 세훈의 집권기에 이루어진 얼마간의 토지개혁을 통해 농지를 불하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초는 아버지가 농사짓던 이 땅에서 수십 년을 열심히 농사지었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이 땅의 소유권은 지역 유지인 공 씨(孔氏)에게 있었고, 공 씨는 의도적으로 소작료를 스무 해 동안 받지 않았다.
당연히 배움이 없는 정초는 이것이 자기 땅이라 생각하고 소작료를 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소작료를 내란 소리도 일언반구 없으니, 아무 걱정 없이 농사를 짓고 가족을 꾸린 것이었다.
그러나 공 씨는 정초의 앞으로 매년 장부에 소작료를 달아 놓았고, 스무 해가 지나 소작료가 막대하게 쌓이자 이를 들이대며 정초의 경작권을 박탈하고, 땅을 빼앗은 것이다.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은 정초뿐만이 아니라 수십여 인에 달했고, 이들이 정초를 중심으로 공 씨의 집 앞을 찾아가 항의하고, 밀양의 관아(官衙)에 매일같이 드러누워 호소를 하다가, 결국 법정에 서게 된 것이었다.
순회판사(巡廻判事)는 이들을 선처해 벌하지 않았으나, 결국 정초와 농민들은 공 씨로부터 땅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사회가 안정화된 것은, 결국 신분을 다시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하거나, 변경으로 내몰리는 수밖에 없었다.
땅과 식량이 모자란 농촌의 사람들은 도시로 이주해 성 밖에 움막을 짓고, 분뇨를 처리하거나 물을 져 나르는 잡일을 해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 나갔고, 일부 젊은이들은 심요도독부나 영진도독부 등 외지로 떠나 목축(牧畜)이나 모피 사냥 등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영명진의 길거리에 나서면 얼기설기 지은 너와집들이 늘어선 골목에 일거리를 찾는 젊은 청년들이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들은 늦봄에서 초가을 사이에 주변 섬들로 모피 사냥하는 배가 출항할 때 선원으로 타서 푼돈을 만지거나, 그나마도 일이 없는 겨울에는 혹독한 벌목(伐木) 일을 하러 삼백 리 길의 눈길을 헤쳐 산중의 침엽수림으로 들어가 겨우내 도끼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나마도 일거리가 흔하지 않았고, 보총(步銃)을 영진분견대로부터 불하받을 수 있는 권리는 제한되어 있어, 아무나 가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그 십 년 사이에 배가 뜬다 하면 서로 타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뱃일은 매우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가 힘든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조선계의 농민 출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진도독부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사회에 융화된 여진계 주민들도 많았고, 특히나 사회의 하층부에 위치한 이들 여진계는 뱃일을 유난히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상단에 고용되어 벽란도, 목포, 제주 등지에서 먼 바다로 떠나는 숙련된 고급 선원들과 다르게 영명진이나 함주에서 북쪽 바다로 출항하는 북해선(北海船)의 선원들은 믿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못한 영명진에, 풍랑에 여기저기 상한 배들이 귀항(歸航)했을 때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은 봄철에 출항해 먼 바다의 섬과 뭍을 돌며 모피를 사냥하고 늦가을에 귀항하는 모피 선단들과 다르게, 늦봄에 일찌감치 배가 귀항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이들이 가져온 소식은 영명진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게 사실이오?”
“그니까, 모피가 넘쳐 나는 땅이 뱃길로 석 달 거리에 있단 말이지?”
영명진의 주막에 앉은 청년들은 새롭게 들려온 소식을 놓고 서로 입에 올리기 바빴다.
일거리가 부족해 무료하게 술로 하루하루를 달래고 있던 이들에게 이 소식은 하나의 희망이 되고 있었다.
“북쪽의 섬들을 돌며 추위와 싸우고, 고된 모피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저 동쪽의 땅으로 가면 풍부한 모피를 따뜻한 계절에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오. 늦봄쯤 날씨가 좋을 때 출항해, 그곳에 여름에 당도해서 겨울을 한차례 나고, 다시 그곳에서 이듬해 봄에 출항해 이곳에 여름에 도달하면, 한 해 머물며 큰 소득을 남길 수 있다고 하지 뭐요.”
사실 소문이 빠르게 퍼진 데에는 이번에 들어온 배들이 모피를 잔뜩 항구에 내려놓은 탓이 컸다.
여름철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질 좋은 모피들이 잔뜩 항구에 쌓여 계영양행 상인들의 손에 높은 값에 팔려 나가는 광경을 영명진의 주민들이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배에 올랐던 선원들이 지불받은 모피 값으로 영명진의 선창(船廠) 근처 주막에서 크게 놀면서, 입소문은 순식간에 영명진의 무거운 공기를 들뜨게 했던 것이다.
영명진의 주민들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계영양행의 영명진 지부도 바빠졌다.
함주의 본국(本局)으로 보내는 서간이 급하게 선편(船便)으로 부쳐졌고, 여름철에는 모피가 거의 들어오지 않기에 묶어 두었던 자금들을 모두 풀어 이번에 들어온 모피를 대량 구매했다.
더군다나 질 좋은 모피를, 그것도 거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계절인 여름에 대량으로 풀어 놓은 것은 계영양행의 행주(行主)인 경윤의 조카 주현이었다.
당연히 계영양행은 모피를 매점(買占)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본국에도 자세한 사항을 보고했다.
“그러니까, 한 해를 머물며 사냥하기 좋은 땅이 동쪽 멀리 있단 말이지? 겨우내 고되게 모피를 북쪽 섬들 사이로 헤집고 다닐 필요도 없고, 선단을 크게 꾸려서 보내면 남는 장사라, 이 말이겠다.”
계영양행의 영명진 지부에서 올라온 소식을 접하고 바로, 영명진에서 여독을 풀고 있던 조카 주현을 함주의 본국으로 불러들인 경윤이 물었다.
이재(理財)에 밝은 그는 기존의 모피 거래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나상이나 송상 같은 거대 상단과도 경쟁할 수 있는 경쟁력을 키우길 원하고 있었다.
계영양행은 함상(咸商)을 사실상 지휘하고 있었고, 동북면과 심양에 걸쳐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능력은 거의 모피에 의존하고 있는 터였다.
다른 시장에 진입하기 힘들다면 모피의 공급 능력을 늘여야 했는데, 지금 같은 비용이 많이 들고 효율이 낮은 모피 수렵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조카가 큰 건을 물어 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기회였던 것이다.
“네. 임석(壬碩, 캄차카) 남쪽으로 군도(群島)가 뻗어져 있고, 직접 가 본 경험에 의하면 여름철 항해만이 안전합니다. 9월 중순이면 바다 위에 빙산(氷山)이 떠오르기 시작해, 3월까지는 항해를 곤란하게 하니, 한 해 안에 다녀오기는 힘듭니다. 이 군도를 따라 한 달여를 항해하면 질곡 많은 해안이 나타나고, 이 해안은 남쪽으로 끝없이 있습니다. 남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면 기후가 삼남(三南)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온화한 땅이 나타나고, 이곳에는 무성한 삼림(森林)이 넓게 펼쳐져 있어 모피를 겨우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가혹하지 않으니 겨울에도 모피를 얻기가 쉽고, 겨울 모피가 최상품이니 그곳에서 가져온 모피를 여름에 내려놓은 지금은 그 수익이 최상입니다.”
“그곳에 나라나 혹은 사람은 없는가?”
“나라는 없고, 야인(野人)들의 땅입니다. 이들의 성정은 특별히 거칠지도 않고, 순하지도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만, 앞으로 이들을 유념해서 잘 다루어야 할 듯합니다. 우호적인 관계로 대하되, 다음에는 총포(銃砲)를 갖추어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면 충분히 혹시 모를 위험을 방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좋다. 내 함주의 상인들을 모두 모아 이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네가 이제 나이가 차 스스로 한 사람 몫을 해, 이런 좋은 결과를 가져오니 백부(伯父)인 나로서도 기쁘기 짝이 없구나. 조정에도 알려서 우리가 그 독점권을 가질 수 있도록 교섭을 좀 해야겠다. 너만 좋다면 네가 앞으로 새 땅에 관한 일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만, 어떻냐?”
경윤은 진심으로, 이제 한량 노릇을 좋아하던 조카가 제 몫을 하는 것이 기뻤다. 더군다나 이것은 보통의 제 몫 정도가 아니라, 아무나 해내기 힘든 일을 해 온 것이었다.
물론 경윤은 새로운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것보다 모피를 비교적 안전하게 사냥할 수 있는 땅이 늘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나,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조카가 제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맡아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한 서너 해 정도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그 땅을 둘러보고 바닷길을 넓혀 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번 항해에서는 안전을 확보하고 모피를 거두는 데에 집중해 매우 넓어 보이는 땅의 일부만을 확인했을 따름이니, 다음에는 자유롭게 유람하고 싶습니다. 십 년간 빌리기로 했던 3만 냥의 대금은 이번 모피 대금에서 제 몫을 제하여 갚겠습니다. 다만, 제 덕에 큰 건을 건지셨으니 빌려 주셨던 배들은 제 몫으로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항해를 계속하겠다고?”
“예. 다만, 몇 년간은 새로운 땅에 정착지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몫으로 이 땅에서 얻게 될 수익의 삼 할만 주십시오. 그 돈으로 이곳에 새로운 개척지를 꾸리고, 주변을 탐사하는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진정 그럴 생각이냐.”
“제 생각은 굳건합니다. 윤가(尹家)라는 놈이 있어 제 대신으로 이 일을 잘 돌봐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은 그가 새로운 땅의 일을 돌봐 줄 것이고, 제가 있는 동안은 그가 대신해 항해를 할 것이니, 일이 돌아가는 것은 유념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주현의 말에 경윤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항해 자체도 주현이 우겨서 결혼을 조건으로 허락해 준 것이었다.
그것이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지고 왔으니, 이번에도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이 항해를 한답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좋다만, 네 처는 언제까지 저리 독수공방하게 내버려 둘 셈이냐?”
“거두어 가야지요. 새 땅에 정착하게 되면 그곳에 데려가 후손도 볼 생각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다. 네 증조부(曾祖父) 되시는 성명왕(成明王) 세훈 할아버님의 자손(子孫)들이래야 모두 남자가 열이 안 된다. 심왕가(瀋王家)의 적통은 서윤 형님 아래에 있던 네 육촌 되는 주흥(柱興)이 남긴 세손(世孫) 진영(璡榮) 하나이다. 우리 집안도 내가 아들이 없고 딸만 여섯이고, 명윤이도 아들이 너 하나이니 집안의 대를 이을 적손(嫡孫)이 종가에 하나 있고, 그 말고는 너뿐이다. 네가 어서 후사를 보지 않으면, 네 할아버님 계양군의 가계도 여기서 끝이니라.”
“유념하겠습니다.”
자유롭게 살아온 주현이었으나, 이러한 압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아직 자녀가 없으니 혈통이 끊길까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그 일가(一家)에게는 모피 무역보다도 후사가 더욱 중요할지 모를 일이었다.
주현은 그날 수년 만에 함주의 집으로 들어가 아내를 보았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길게 맺혔다. 주현은 말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남아(男兒)로 제 좋은 일을 하겠다고 가정을 억지로 꾸려 내던져 둔 뒤로 돌아보지 않았던 그였다.
어찌 부끄럽지 않을 것인가. 성긴 북쪽 바다의 된바람은 무섭지 않아도, 제 처의 눈물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1496년
가경(嘉慶) 52년 계추(季秋)
대한제국 경상도 동래부(東萊府).
혜성군(慧晟君) 주현이 동쪽의 끝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잔잔한 파도처럼 대한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온통 인도양을 건너는 서방 무역에 관심이 쏠려 있는 국내에서는, 사실 변방에서 이루어지는 모피 무역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소문 이상의 큰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 발견이 가지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항해를 하는 이유란, 무엇보다도 무역로를 개척해 먼 곳에 떨어진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주현조차도 그 스스로 탐험을 하고자 동북방의 먼 바다를 헤집고 다녔음에도, 새로운 땅이 가지는 의미를 모피 무역에 한정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고, 정부에서도 그랬다.
비단 대한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편 해안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도 그 가치를 그렇게 높게 보지 않았다.
크리스토포로 콜롬보가 발견한 신대륙은 아직까지 인도 혹은 중국의 해안인지 아니면 새로운 땅인지 갑론을박하고 있었고, 열대수림이 무성할 뿐 금은보화가 없는 새로운 땅은 그 가치가 폄하되고 있었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의 다 가마가 개척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가 더욱 높게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한제국에서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정부와 대형 상단의 초점은 전반적으로 인도양과 남양 무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주현이 발견한 신대륙의 가치보다도 오히려 새롭게 인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의 함선들이 미칠 영향에 더욱 민감하게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나상과 송상은 십여 년 전부터 향신료 무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동남아와 인도 각지에서 매수한 후추와 육두구 등을 숙주(宿州, 소코트라)에 집산시킨 다음, 홍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내 베네치아나 제노바 상인들에게 매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간 중간 거래를 전담하던 이슬람 상인들에게는 손해였지만, 적어도 대한제국과 이탈리아 상인들 사이에서는 꽤나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런데 여기에 포르투갈이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막대한 유럽의 향신료 시장을 놓고 만만치 않은 상대와 씨름을 붙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한 판국이니 만큼 당연히 황성부에서는 주현의 새로운 개척지 발견이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이 발견에 자극받은 것은 심양(瀋陽)의 학자들이었다.
지구가 공과 같은 형태라는 사실은 이들 사이에서 진리로 확증된 지 오래였지만, 남반구에서 어떻게 물체가 땅에 붙어 있을 수 있는지와 지구의 둘레는 어느 정도인지를 추산하는 문제는 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때문에 넓혀진 지리학적 지식으로 이미 유럽에 대해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들 학자들은, 주현이 발견한 새로운 땅이 신대륙(新大陸)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지구의 형태에 대한 확증을 얻고자 했다.
“고희랍(古希臘)의 학자 에라스토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25만 2천 리(里, stadia)로 계산했소. 에라스토테네스가 살았던 애급(埃及)에서 쓰던 리(里)는 대략 우리가 쓰는 리의 절반 정도이므로 이것을 12만 리 정도로 환산해 볼 수 있소이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까지 항로가 밝혀진 바, 그 거리가 5만 리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둘레가 10만 리가 넘소. 그런데 이번에 혜성공께서 발견하신 땅이, 영명진으로부터 3만 리에 까우니, 그곳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7만 리에서 8만 리에 가까운 거리가 남소. 그곳에 분명히 막대한 넓이를 지닌 땅이 있음이 틀림없소이다.”
논쟁에 쐐기를 박은 것은 지학(地學)에 있어서는 제국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양성지(梁誠之)였다.
나이 여든에 가까운 이 노학자는, 1441년에 학습원을 졸업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학문을 배운 뒤, 《고려사(高麗史)》의 개찬에 참여했으며, 이후 지학(地學)에 관심을 두고 집현전에 근무하면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 《진서십삼주도(鎭西十三州圖)》를 작성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편찬하고 1455년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63년에는 황명을 받아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한 이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본관인 남원(南原)에 자작(子爵)으로 봉해졌으며, 남원개국자(南原開國子)로 그 봉호(封號)가 오르게 되었다.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은 1481년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었다.
본토의 8도뿐만 아니라 진서(鎭西), 심요(瀋遼), 영진(永鎭)의 세 도독부를 자세히 다루어 제국의 전역을 망라한 지리서였다.
그 외에도 《탁지산법(度地算法)》에서 측량법을 다루고, 《제도해용(製圖解用)》에서는 지도 제작술에 대해서 논의한, 당대 최고의 지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이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심왕 서윤의 초청으로 요동으로 건너와 심양문리과대학에서 지학(地學)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벗어난 격물학(格物學)을 근간한 지학(地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그가 심양문리과대학에서 그리스 학문을 접하고 그 산법(算法)과 지리학 지식에 관심을 보였고, 논의가 불거지자 계산적 논증으로 주현이 발견한 땅이 신대륙임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양성지의 주장은 큰 논란 없이 학계에 수용되었는데, 양성지 자신이 워낙에 대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학에 있어서 아직까지 학문적 전통이 수립되지 못한 대한제국의 학계에서 그 사실을 논박할 마땅한 주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마저도 어디까지나 학계 안에서의 일이었다.
특히 정계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계영양행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지역에 대한 무역 독점권의 인허(認許)를 손쉽게 내어 줬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의조차 두지 않았다.
세훈, 현도,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윤필상(尹弼商)에 이어 제6대 내각 재상에 오른 노사신(盧思愼)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신대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드러냈다.
“이미 황은(皇恩)이 닿는 지역이 북으로는 빙해(氷海)에 이르고 남으로는 남양(南洋)에 이르러 그 교화됨이 충만한데, 벽지(僻地)의 땅 몇 리가 무슨 유용함이 있겠는가.”
이것은 비단 노사신 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노사신이 1495년(가경 51년)에 재상의 직위에 오른 것은 그가 최공손과 한명회의 대립으로부터 시작된 노당(老黨)과 소당(小黨) 사이의 힘 겨루기가 이루어지는 정치 국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당파 대립의 근원이었던 최공손과 한명회 모두 몇 해를 차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대립의 유산은 여전히 정계에 살아 있었다.
노당에는 주로 세훈의 집권 시기부터 내려오는 탐라거족(耽羅巨族) 출신과 경화사족(京華士族)의 귀족들이 가득 포진하고 있었고, 소당에는 윤필상(尹弼商), 유자광(柳子光)을 비롯한 한명회의 후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열세였던 소당은 정치적 투쟁 끝에 윤필상을 재상의 직에 앉히는데 성공했었다.
그러나 채 두 해가 지나기 전에 윤필상의 국정(國政)은 문제를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특히 조정에 쓴소리하기를 마지않는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 등의 소위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영남학파(嶺南學派)에 대해 지나친 견제를 하고, 이들의 서책을 간행하지 못하게 하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소당은 조정에서는 노당에게, 재야로부터는 사림으로부터 공격당하게 되었다.
이 사태의 중재를 잘한 덕분에 재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노사신이었고, 때문에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도 그의 관심은 이러한 정파 정치에 가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에 수만 리 바깥의 야인들이 사는 땅들 이래 봐야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계뿐만 아니라 학계를 제외한 대부분이 이 신대륙 발견이 가지는 함의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계영양행만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앞서 나가는 패를 손에 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대규모 상단들 간의 싸움에서 뒤쳐진 일부 소상단들의 관심은 재빠르게 돌아갔다.
조금이라도 이윤이 남을 수 있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살길이었던 것이다. 포화 상태인 기존 무역에서는 더 이상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조정에서 별다른 논의 없이 이번에 계영양행을 비롯한 함상(咸商)에게 새로이 발견된 땅에 대한 권리를 주었소. 그러나 유의할 점은, 이 권리가 사방 천 리에 한정된다는 것이오. 천 리라면 자못 좁지 않은 땅이긴 하나 이번에 심양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 생각보다 넓은 육토(陸土)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오. 그간 우리 내상(萊商)은 북쪽은 함상에게 밀리고, 서쪽과 남쪽 바다로 가는 것은 나상, 송상, 경상, 호상 등에 치여 진서(鎭西)와 왕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이마저도 진서의 박상(博商)과 기상(崎商)과 다투어야 할 뿐더러, 이들이 가진 일역(日域, 일본 본토)에 대해 접근할 우위조차 없으니 지방의 토상(土商)으로 안분지족함마저도 위험함이 있었소. 그러니 이번에 상단의 모든 전력을 기하여 이 새로운 동역(東域)에 뛰어드는 것이 어떻소?”
동래성(東萊城)의 여각에 모여든 내상의 행수들은 새로운 행로를 모색하고자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내상은 원래 일본과의 무역을 업으로 삼던 동래 지역의 상인들이 주축이 된 상단이었다.
그러나 기해동정 이후, 진서가 제국의 강역에 들어옴으로 인해 박주, 즉 옛 하카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서 상인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기주에 등지를 튼 기상들과도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이 자유롭게 본토의 항구에 기항할 수 있게 됨으로 인해, 내상이 가지고 있던 우위가 사라진 것이었다. 거기에 이들은 일본 내지로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마저 있어 내상은 갈수록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었다.
내상은 한때 목표를 바다 바깥에서 내지로 돌려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상단의 구조를 재편할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나마도 이미 대구의 구상(丘商)이 영남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앉았으니 그나마도 용이치 않았다.
때문에 내상은 갈수록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상인의 숫자도 무척 줄어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관선이래 봐야 세 척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유구국 너머로는 가 본 전례가 없소이다. 더군다나 그런 항해를 꾸준히 하고, 그곳에 기반을 마련해 수익을 내고자 한다면 앞으로 투자되어야 할 자금이 막대할진대, 이것을 우리가 어찌 모두 충당할 수 있단 말이오?”
“…….”
앞서 긍정적 의견을 냈던 행수를 다른 행수가 반박하고 나서자 좌중은 일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수단을 내어야 했지만 상단이 워낙 존망 위기에 처해 있다 보니 모험을 시도하기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상단의 돈을 최대한 적게 들이고 일을 추진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내상의 행수들 중에서도 가장 젊은 방동일(方東壹)이었다.
그는 원래 상인이 아닌 양반의 서자로, 조금의 밑천을 가지고 장사에 뛰어들어 유구무역에 참여한 뒤 탁월한 수완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거두고 내상의 행수까지 거머쥐게 된 이였다.
다들 그런 방동일의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생각하는 방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좌중의 시선이 모아지자 방동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내상만큼 새로운 방책이 절실한 곳을 끌어들이면 될 일이지요. 내상 단독으로 일을 추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호남(湖南)의 나주(羅州)는 원래 유서가 깊은 고을로 이곳에는 예로부터 연안을 오고 가는 장사치들이 많았는데, 탐라의 나상(羅商)이 목포(木浦)를 쥐고 흔들게 되면서 생계가 막역해졌습니다. 이들은 영산포(榮山浦)를 중심으로 영산강 뱃길을 오고 가며 수운(水運)에 종사하고 있는데, 소위 영산상인이올시다. 이들은 무역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 규모가 워낙에 일천하다 보니 수단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우리에게 자본을 조금 내어 함께 권익을 나누자고 유도하면 결국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인들이 영산상인뿐만이 아니라, 충청도 강경에도 있고, 강원도 강릉에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규모가 작아 상단을 꾸리지는 못하나, 지방의 수운에 종사하면서 꽤나 자본을 굴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자본을 받아서 우리가 보태, 교관선을 동쪽 바다로 보내 본다면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행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살구의 빛깔이 좋다고 해서 그 맛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이 실패하면 서로간에 신의를 잃고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우선 우리가 갖고 있는 교관선 세 척을 모두 동쪽 대해로 보내 버리면 당장 유구와의 무역에 막대한 손실이 생기오. 그나마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은 유구에서의 상관 운영뿐인데, 유구국으로 가는 교관선이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면 당장 수익을 기대할 수가 없소.”
“우리는 한 척만 내고, 두 척은 빌리면 됩니다.”
“어디서 말이오?”
“꼭 나라 안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요. 이 일에 필시 관심을 보일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다시 행수들의 시선이 방동일에게 모여들었다.
방동일은 짐짓 시간을 끌더니 행수들을 천천히 둘러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유구국 국왕 전하께서 함선이 많으십니다. 모두 예전 명나라에 조공입례(朝貢立禮)하면서 명국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조공선들인데, 근래에 들어 본방(本邦)과 친밀해져 명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탓으로, 이 조공선들이 적잖이 노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유구국은 본래 땅이 좁고 사람이 많아 무역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나라인데, 그간 본방의 상단을 유치해 그 고물을 먹고 살았으나, 대신 원래 유지하고 있던 남양으로의 무역로가 나상과 송상 등 대형 상단에게 잠식당해 손실이 있습니다. 때문에 유구국왕께서는 방책을 바라 마지않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 수익을 약속하고 배를 빌린다면 우리도 좋고 유구에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덩달아 유구에서의 지분도 늘릴 수 있다면 이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동일의 말에 내상의 행수들은 모두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북방항로를 통해 성공한 동쪽의 신대륙을, 원양항해의 경험이 없는 내상이 덤벼드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험은 분산하면 되고 수익은 나누면 된다. 그것이 상인의 방법이었다.
실패하게 되었을 때의 손해보다 성공했을 때의 이득이 더 많다고 여겨지자 이들은 두말없이 방동일의 안에 찬성을 표했다.
내상은 며칠 지나지 않아 행수들을 나주, 강릉, 강경 등지로 보내 지역 소상(小商)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방동일은 직접 내상의 행수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유구로 가는 교관선에 올랐다.
유구왕 쇼 신(尙眞)과 직접 대면해 내상의 제안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 자신이 판단하기에 이 일은 분명히 승산이 있었다.
쇼 신은 고민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응하게 될 것이었다.
방동일은 국면을 넓게 보는 능력이 있었다. 장기판에서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다 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은 있는 법이었다. 오로지 모든 것은 장기 말을 어떻게 두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방동일은 지금, 국면을 전환할 말들을 조금씩 움직여 보려 하고 있었다.
1497년
가경(嘉慶) 53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명진.
황성부에서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들어 모신 칙임관(勅任官)이 가경 53년의 새해가 밝자 영명진으로 보내졌다.
외부대신이 주청한 새로운 영토에 관한 사안을 추밀원은 반려하지 않고 간단히 동의했으며, 이 동의를 바탕으로 외부대신은 내각 재상 노사신과 함께 황제에게 이 안건을 상주(上奏)했다.
황제는 그의 치세 동안 늘 그래 왔듯이 몇 가지의 확인만 거친 뒤에 옥새를 서류 위에 찍었고, 황명(皇命)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각에서 선임한 주임관이 직접 칙령을 받들어 영명진으로 보내진 것이다.
이러한 절차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계영양행에서 주청한 권리를 승인하려면 그 땅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받는 땅이어야만 했다.
1465년 나상에서 소코트라를 점령하고 숙주(宿州)라 명명하고 관할권을 확보하자 했을 때도 내각(內閣)에서는 적법한 절차를 들어 황제의 칙임관이 직접 소코트라에 상륙해 칙령을 선포하는 절차를 거치게 했다.
이 절차는 거의 수년이 걸렸다. 칙령으로 숙주가 제국의 새로운 영토로 선포된 뒤, 공식적으로 외부(外部)에서 숙주서(宿州署)의 관청이 설치되고 이 숙주서의 장관직이 나상에 위임되었다.
실질상 나상에서 파견한 숙주어행수(宿州禦行首)가 숙주의 행정권을 관할하지만, 법리상으로는 이것은 조정이 그 기능을 나상에게 위임하는 절차가 끝난 뒤에야 합법적이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선례를 들어 계영양행의 요청을 간단히 받아들였고, 황제의 칙령이 내려오자마자 서둘러 칙임관을 선발해 영명진으로 보낸 것이다.
봄이 되면 새롭게 발견한 땅에 기항지를 세우고 모피 사냥의 거점을 만들 육백여 명의 선원들이 영명진에서 출항하게 될 것이고, 칙임관이 이 선단(船團)에 동행해서 그곳에 황제의 이름으로 행정권을 선포하게 될 것이었다.
“삼가 폐하께서 내리신 칙명을 받들어 새롭게 척지(拓地)한 땅을 영주(瀛洲)라 이름하고, 그곳에 외지를 다스리는 법도에 준하여 진(鎭) 및 보(堡)를 세우고, 그 땅을 영진도독부의 관하(管下)에 두기로 하였소. 계영양행에서는 폐하와 조정의 결정을 받들어 이곳에 대한 무역권을 가지게 될 것이며, 폐하께서는 내게 그곳의 진령(鎭令)을 선임할 권한을 주셨으므로, 나는 이미 요청받은 바대로 혜성군 김주현을 새롭게 창설될 영주진의 진령으로 봉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계영양행에서는 이에 따라 제반 사항을 준비해 주시오. 영주진은 앞으로 영진도독부의 관할에 놓이게 될 것이며 영진도독부의 행정은 영길도 관찰사의 속하(屬下)에 놓여 있으니, 혜성군이 영주진령으로 부임하게 되면 영길도 관찰사의 직령(直領)을 받아 삼가 복착(服着)하고 그 권령을 대권(代權)하게 될 것이오. 출항은 통지받은 대로 이월의 보름께로 알고 있겠소.”
조정에서 내려온 칙임관 조수형(趙秀炯)은 성정이 까다롭고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영명진에 도착하자마자, 영진도독부와 계영양행의 관련자를 모두 모인 환영연에서 일방적으로 사항을 통고했다.
실질상 심왕의 통제하에 놓여 있는 심요도독부와 다르게 영진도독부는 현실적으로 영길도 관찰사의 주재하에 놓여 있었고, 때문에 황성부에서 내려오는 훈령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는 술 한 잔 들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영양행의 입장에서도 칙임관 앞에서 차질을 빚어서 좋을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 연의(演義)에 나오는 몹쓸 독우(督郵) 같지 않습니까? 제 할 말만 해 버리고 나가는 성질머리 말입니다.”
칙임관 조수형이 일방적으로 통지를 마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희상이 주현에게 속삭였다. 윤희상은 주현을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함상의 행수에 임명받고 계영양행의 임원이 될 수 있었다.
영진도독부에서도 그에게 명예직인 영명진 해관주사(海關主事)의 공직을 주었기에, 공식적으로 이 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주진령이 되는 내가 평원현령이 된 유비의 노릇이고, 너는 장비쯤 된단 말이냐? 내가 보기에 성미가 까다로워 보이긴 해도 독우처럼 탐욕스럽고 이재를 밝히는 인물은 아닌 듯싶다만.”
주현이 웃음을 지으며 윤희상에게 대꾸했다.
어차피 새로운 땅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는 별 욕심이 없는 그였다.
계영양행이 앞으로 그곳에서 독점적인 권한을 확립하기 위해 그를 내세우는 것에는 협조할 용의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새롭게 세워질 영주진이 제대로 정착된다면 그곳을 기반으로 신대륙의 땅과 해안을 탐측하고 탐험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조정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한 것이 없음에도 당연하게 권리를 행사하려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도대체 저희가 직접 돈을 들여 먼 바다로 나가 기회를 찾는 동안, 조정에서는 당쟁(黨爭) 말고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저희가 찾은 땅에서 모피를 수렵하고 이것을 파는 게 조정의 허가 없이는 안 되는 일이라니요. 어불성설입니다.”
윤희상이 불만스럽다는 듯 구시렁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정자의 난간으로 다가갔다. 파장이 난 환영연이 열린 벽송정(碧松亭)은 영명진의 항만이 내려다보이는 관경(觀境)이 좋은 곳에 서 있었다.
영명진 항구에는 며칠 뒤에는 먼 바다로 떠나갈 교관선들이 부두에 매여 있었다.
윤희상은 물끄러미 그 배들을 바라보다가 주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이곳에서 주재한 환영연에서 술 한 잔 들지 않겠다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무례한 일입니다. 할 만만 던지고 일어나다니요. 앞으로 항해가 피곤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배들을 타고 새로운 우리의 땅, 영주까지 항해하는 것은 짧게 잡아도 석 달, 길면 반년은 걸릴 일입니다. 그동안 저런 까다로운 상전을 모시고 험한 바닷길을 헤쳐 나간다는 건 선단을 통솔해야 할 제 입장에서는 매우 피곤하다 못해 넌덜머리나는 일이 될 겁니다. 부디 군(君)께서 칙임관과 저희 사이의 일을 잘 조율해 주셔야 합니다.”
윤희상의 말에 주현은 묵묵부답, 술잔을 들이켰다.
칙임관이 일찌감치 일어난 뒤로, 삼삼오오 사람들은 칙임관을 쫓아 자리에서 일어나고 정자 위에는 윤희상과 주현만이 남아 있었다.
“자네는 우리가 척지(拓地, 개척)한 땅에 조정의 입김이 부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구만. 그럴만도 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모피를 넉넉히 구할 땅을 찾아간 것이고, 그 모피를 팔기 위해서는 이곳 내지(內地)로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이네. 내지를 다스리는 것은 조정이며 황제 폐하이시고, 우리는 그 신민(臣民)이네. 신민이 척지한 땅은 당연히 폐하의 복토(福土)가 된다는 것은 요순(堯舜) 이래의 진리이네. 감히 누가 그것을 들어 부정하겠는가. 다만, 내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우리가 갈 땅은 천만 리 밖이고, 옥좌(玉座)는 그곳에서 멀고도 먼 황성부에 있다는 사실이네. 칙임관은 그곳에 상주하지 않을 것이야. 그가 한 번의 수고로운 항해로 영주에 다다라 그곳에서 칙령을 선포하는 순간, 신천지는 우리 손에 놓이는 것이네. 자네와 나, 그리고 우리 항해에 따라 나선 많은 이들은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네. 그걸 망쳐 버릴 수는 없어. 조금 참게. 고단한 항해가 되더라도 그건 기껏해야 몇 달일 뿐이야. 늙고 고집센 옹졸한 늙은이 비위를 그동안 맞춰 주는 게 뭐 그다지 대수란 말인가.”
주현은 윤희상에게 등을 진 채로 말했다.
상 위에 올라온 아직 식지 않은 성찬(盛饌) 위로 그의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주현의 태연자약함에 윤희상은 그만 피식 웃었다.
주현은 배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천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꿈에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뛰어들어서, 아직은 가늠할 수 없는 기회를 줄 땅을 찾아냈다.
죄인으로 이곳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우연찮게 주현의 항해에 끼어든 덕에 이 자리에까지 오른 윤희상으로서는, 또 한 번 주현의 뻔뻔스러움을 믿어 볼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영주(瀛洲)라니, 조정에서는 고사(古事)를 운(云)하지 않으면 땅 이름도 못 붙이나 봅니다. 탐라(耽羅)도 그 별칭을 영주라 하고, 유구(琉球)도 영주니 봉래(蓬萊)니 하며 부르고, 일본도 그 섬들을 영주라고 하는데, 도무지 그 땅들이 모두 서불(徐市)이 불로초를 구하러 갔던 신선역(神仙域)이란 말입니까. 동쪽에 있다면 죄다 그런 이름을 붙이니, 머잖아 그 땅 위에 봉래(蓬萊)라는 이름도 붙을 테고, 방호(方壺)라는 이름도 붙을 겁니다. 그 북쪽의 모진 바다를 헤쳐서 지금에서야 다다른 땅이 서불이 닿은 그 땅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에서도 쉬이 가지 못하는 그곳이, 천 몇 백 년 전 진시황 때의 도사(道士)가 간 땅이라니요. 터무니없지 않나이까.”
“왜, 희상이, 자네가 그 땅 이름을 붙여 보고 싶었나 보지.”
“제가 붙였다면, 아마 나으리의 군호(君號)를 따다가 혜성(慧晟)이라 하던가, 지세(地勢)를 보아 요곡(嶢谷)이라 했을 겁니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골짜기들 위로 웅장한 산세가 뻗쳤으니 절경입지요. 그런데 영주라니요. 아마도 저희 선원들이 모피가 아니라 불로초를 캐올 모양입니다. 허허.”
윤희상은 본디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뒷골목에서 껄렁패를 이끌다가 형벌을 받고 영진도독부의 거친 삼림(森林)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고된 선원 일에 적응하고, 그가 가진 재간을 살려 주현의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황성부 조정에서 이리저리 간섭하는 것을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주현은 그러한 윤희상의 기질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또한 조정에서 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윤희상이 하는 말에 어깃장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내키지 않은 조정을 해야 할 처지였다.
“내 잘 알지, 잘 알고 말고. 낸들 그리 마음에 들겠는가. 그러나 나는 본디 출신이 심왕가의 혈통으로 군호(君號)를 지니고 국록을 먹는 봉신(封臣)된 처지이고, 일을 망치지 않으려면 위에서 하는 일에 고개를 주억거려 줄 필요도 있는 법이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목소리는 잠시 죽여 두고, 일단 항해를 합세. 그렇지 않아도 고된 항해가 되지 않겠는가.”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희상의 곁에 섰다.
정자 아래로 보이는 동해(東海)의 파도는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먼 영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는 배들은 그 잔잔한 파도 위에서 거의 미동 없이 놓여 있었다.
“저 배들을 보게. 우리는 튼튼한 여덟 척의 배 위에 수백의 사람을 태워 가게 되겠지만, 저 배들 중 몇 척이 남아서 돌아올지, 사람은 얼마나 남아 올지 모를 일이네. 어떤 이들은 그곳에 남게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숨이 붙어 오지 못하겠지. 칙임관이 피곤하게 한데야, 저 바다 위에서 목숨을 내놓고 항해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칙임관에게는 황성부의 궐각이 제 집이겠으나, 우리에게는 바다 위의 배가 집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칙명을 등에 업고 있다 하나, 일단 배가 뜨면 칙임관은 손님일 뿐이네. 그리고 앞으로 영주에 들르는 모든 이들이 손님이 될 게야.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만이 주인인 것이지.”
“이번에 건너가게 되시면 내지로는 아주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내 식솔에게도 일러두었네. 영주에 기반이 잡히면 그리로 불러서 정착할 생각이야. 나는 본시 호적이 황성부에 올라 있고, 우리 종가(宗家)는 심양에 있으며, 자라기는 함주에서 자랐네. 그리고 철이 들고서는 팔도를 유랑하며 기식(寄食)하고 다녔고, 근 여러 해간은 북해(北海)의 바다를 자네와 함께 떠돌아 다녔네. 이런 내가 무슨 고향이 따로 있고, 이곳에 무슨 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영주는 새로운 땅일세. 그곳은 나나 자네 같은 역마살 걸린 이들에게 딱 맞는 곳이지. 자네도 아주 그곳에 자리 잡을 생각이지 않은가.”
“물론이지요. 바다는 푸르고, 산은 높고, 숲은 울창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사내대장부가 걸터앉기는 딱 좋은 땅이지요.”
주현의 말에 윤희상은 걸쭉한 웃음을 지었다. 바닷바람에 그의 수염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바다 너머 먼 곳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땅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은 지대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1499년
가경(嘉慶) 55년 계추(季秋)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주진(瀛洲鎭).
두어 해가 흘렀다.
칙임관 조수형은 기진맥진한 항해 끝에 동토(東土)에 도달해 칙령을 받은 바대로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새로운 척지(拓地)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선포했다.
땅 이름은 영주(瀛洲)라 붙여졌으니, 과거 도인(道人)과 선인(仙人)들이 거닐었다는 창해(滄海) 끝의 복토(福土)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윤희상이 우려한 것과 다르게 조수형은 깐깐한 성미로 선원들을 괴롭히지 못했다.
그는 항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었고, 결국 영주에 다다라 칙령을 선포한 사흘 뒤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새로운 땅 위에는 새로이 영주진령으로 임명된 혜성군 주현과 그의 심복 윤희상을 비롯한 영진도독부와 영길도 출신의 북해인(北海人) 육백여 명만이 남았다.
여인은 거의 없었고 젊으나 늙으나 남자 선원들뿐이었다.
태반은 모피 사냥에 종사하는 이들이었고, 이들은 거칠고 낮선 땅에서 머무는 데에 능숙한 이들이었다.
배가 다다라 정박한 곳은 예전 항해 때 도달했던 만구(灣口) 위로 제법 커다란 섬이었다.
섬에는 원주민들이 있었고, 제국인들은 그들을 피하기 위해 섬을 피해 협만(峽灣)으로 다시 배를 움직였고, 그곳 해안가에 새롭게 접안한 뒤 요새를 세우기 시작했다.
집들은 대충 목재를 베어다 너와집으로 지었고, 돌로 축성(築城)할 여력이 없었기에 해안가 언덕 위에 목책(木柵)을 둘러싸서 가호(家戶)를 보호했다.
배를 대기 용이하게 간단한 부두가 들어섰고, 이 모든 일이 끝나자 겨우내 모피 사냥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관심사는 바로 다름 아닌 모피였다.
본토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진 땅이 개척된 주요한 동인은 다름 아닌 모피였던 것이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모피는 의복의 재료로 큰 수요가 있었고, 그 희귀함 때문에 가치가 높았다.
영진도독부에서 모피 사냥이 시작된 이래로 대한제국은 가장 크고 왕성한 모피의 공급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기회를 찾아 사람들은 보다 먼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첫 겨울의 모피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영주진을 중심으로 주변의 협곡(峽谷)과 산지를 돌며 많은 양의 모피를 얻을 수 있었다.
원주민을 마주하는 일은 종종 있었고,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드물지도 않았다. 영주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콰미시(Squamish)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있었다.
첫 접촉은 싱거웠다. 스콰미시인들은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산중에서 영주진에서 출발한 사냥꾼들과 마주쳤고, 이내 활로 위협해 들어왔다.
일대의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는 서로 암묵적인 경계가 있었고, 이곳을 헤집고 들어온 낯선 이들은 손쉽게 발각된 것이다.
스콰미시는 제국인들을 위협으로 여겼다. 몇 차례의 소모적이고 산발적인 충돌 끝에 스콰미시인들은 영주진의 요새까지 내려왔고, 격렬한 전투가 발생하기 직전에 윤희상이 이끄는 수십 명의 기마대가 이들과 맞섰다.
보총(步銃)으로 선제(先制)를 가한 윤희상은 스콰미시의 원로들과 협상에 나섰다.
말은 통하지 않았고, 서로가 적대적인 앙금이 쌓인 뒤였지만, 격렬한 충돌이 쌍방에게 손해가 될 것이라는 점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북해(北海)의 여러 섬들을 누비며 모피 무역을 해 온 이들은 타협 없이 공격만을 하는 야만적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평화만을 쫓는 이들도 없었다. 표면적인 부분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모든 것은 이득과 손해로 계산되는 거래의 영역이었다.
첫 거래는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서로간의 공존 가능성을 확인을 할 수는 있었다.
직물과 술, 그리고 발화기 같은 것들이 스콰미시들에게 건네졌고, 그 대가로 스콰미시들은 수십 장의 담비 가죽을 넘겼다.
“이들은 진정 주술사다. 먼 곳에서 큰 물 위로 집을 띄워 이곳에 도달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스콰미시 부족 안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번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들은 고질적으로 말과 문화가 다른 주변의 다른 부족들과 대립하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고, 거래를 통해 맺어진 든든한 지원 세력이 등장한다면, 이들로서는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영주진의 사냥꾼들이 원하는 것은 모피였고, 스콰미시들은 술과 총을 원했다.
“보총을 이들에게 쉽게 내어 줄 수는 없습니다. 전적으로 우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잖습니까. 이걸 내어 주게 되면 저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스콰미시의 전사들이 총을 요구하고 나왔을 때, 영주진의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저들이 총을 원하는 이유는 명쾌했다.
압도적인 무기를 획득해 주변의 부족들을 제압하고 나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윤희상은 총을 저들에게 쥐어 주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총은 먼 땅에서 신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어차피 저들은 총을 생산할 수도 없고, 화약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으니, 저들에게 총 몇 자루를 쥐어 주고, 저들이 원하는 화약의 공급을 우리가 틀어쥘 수 있다면 그다지 많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네. 대신 우리는 여기서 든든한 조력자를 얻을 수 있고, 모피 공급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야. 사실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고, 어려운 거래도 아니네.”
윤희상의 걱정에도 불과하고, 결국 주현은 결정을 내렸다.
보총 몇 자루가 스콰미시들에게 건네졌고 그들의 전사들은 신물(神物)을 다루듯이 총을 귀하게 보관했다.
그것은 일종의 우정의 징표에 가까운 것이었다. 영주진의 제국인들이 그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든 적어도 스콰미시들은 영주진의 조선인들을 형제로 여기기 시작했다.
사실상 관념의 문제였다. 원주민들에게 구대륙의 사람들이 가진 토지의 사유권(私有權) 개념은 없었지만, 부족들 간에 배타적인 수렵을 할 수 있는 영역의 개념은 있었다.
스콰미시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조선인들이 들어온 것을 용납하고 거래 관계를 체결함으로서, 일종의 혈맹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인들도 그러한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스콰미시는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이 전반적인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결국 시간 문제였다.
북방의 모피 사냥꾼들은 이러한 것을 영진도독부의 개척 당시에도 여러 원주민들과 행한 바 있었다.
이들은 총과 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무력을 점유할 수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새롭게 진입한 땅에 자기편을 만들 필요성은 있었다.
주현은 그것을 꿰뚫고 있었고, 스콰미시들을 장기적인 협력 관계로 지목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이 낯선 땅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피일세. 우리가 이곳에서 살고자 하는 이유는 다른 것도 있지만, 모피를 이곳에서 구해다가 본토에 팔아 엽전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이지. 적어도 이곳에 정주한 몇 백 명의 사냥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여자도 없고, 따뜻한 집도 없는 이 먼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과 맞서 가며 남아 있는 이유가 달리 무엇인가. 바로 모피일세. 그리고 저 토족(土族)들은 우리에게 모피를 구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줄 것이고, 주변의 적대적인 융적(戎狄)들로부터 우리의 편이 되어 줄 것이네. 거래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필수일세. 희상이.”
원주민들과의 협력에 부정적이었던 윤희상도 결국 주현의 설득에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계곡을 하나 넘어갈 때마다 적대적인 부족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다.
스콰미시들이 없었다면 영주진의 사냥꾼들은 주변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 싸우거나 물러가거나의 선택을 해야 할 판이었다.
첫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밝자 얼마간의 선원들과 모피를 싣고 배는 영주진을 출항해 본토로 귀항하는 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곳의 배가 본토로 돌아가는 동안 본토의 영명진과 함주에서도 새로운 이주민들을 태운 배가 영주진으로 향했다.
본토로 귀항한 사람들보다 조금 많은 이들이 영주진에 도달했다. 주현은 윤희상에게 이들을 이끌고 개척을 나갈 것을 명했다.
윤희상은 이미 스콰미시들과 안정된 거래 관계가 확립된 북쪽 대신에 아직까지 탐사를 해 보지 않은 남쪽으로 향했다.
복잡한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만구(灣口) 남쪽으로 영주진에서 500리 정도 떨어진 곳에 풍족해 보이는 땅이 있었고, 그곳에 정착지를 세우고 대곡(大谷)이라 이름했다.
주현은 이곳에 보(堡)를 설치하고 윤희상을 대곡보(大谷堡)의 만호(萬戶)로 임명했다.
영주진에서는 북쪽으로 모피 수렵을 떠났고, 대곡보에서는 남쪽으로 모피 수렵을 떠났다. 소규모의 농사도 시작되었다.
쌀의 작황은 좋지 않았으나 보리는 그럭저럭 좋았다. 조의 수확도 나쁘지 않아 속맥(粟麥, 조와 보리)으로 곡물을 그럭저럭 확보할 수 있었다.
육류는 수렵으로 제법 넉넉하게 구할 수 있었고, 어류는 풍부했다.
영주진과 대곡보의 두 정착지는 두 해가 지나가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들어온 선단(船團)은 한 해를 머물고 다음 해에 떠나갔고, 배가 떠나가는 동안 본토에서는 새로운 선단이 출발해 또 이듬해까지 머물기 위해 영주진으로 향했다.
이런 정기적인 항로의 운영이 이 먼 외지에 숨통을 틔워 주었다.
모피 거래는 제법 이윤이 남았고, 본토의 인구 증가로 인한 압력은 새로운 땅으로 떠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증가시켰다.
두 해가 지났을 때, 영주진에는 285명의 남정(男丁)과 48명의 부녀(婦女)가 정주했고, 대곡보에는 102명의 남정과 24명의 부녀가 정주했다.
바다 바깥의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세금은 거의 없었고, 부과되는 노역도 드물었다.
법망이 느슨한 대신에 이 새로운 정주민 집단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영진도독부 등 북방 지역 태생의 모피 수렵꾼 출신이라는 것이 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 관계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좋은 핏줄을 타고난 이들이 아니라 사냥꾼 출신들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사들이었다.
주변 원주민들과 협력과 반목을 거듭하며 오로지 모피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