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장 만국진량(萬國津梁)
「유구국(琉球國)은 남해(南海)의 경치가 수려한 땅으로, 삼한(三韓, 조선)의 빼어남을 한데 모으고, 대명(大明, 중국)을 광대와 잇몸으로 삼았으며, 일역(日域, 일본)을 입술과 이로 삼았도다. 이 땅은 바로 그 가운데에 솟아오른 봉래(蓬萊) 섬이다. 배[舟]와 노[楫]로 만국(萬國)의 진량(津梁, 가교)을 삼았으니, 기묘한 산물과 귀중한 보배가 십방찰(十方刹)에 가득하다.
○琉球國者南海勝地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以舟楫爲万國之津梁, 異産至寶充滿十方刹.」
―[만국진량의 종(萬國津梁の鐘) 각문(刻文)] 中, 1458년.
1500년
가경(嘉慶) 56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탐라국 제주부(濟州府)
탐라(耽羅)는 대한제국 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1404년 세훈이 거병하여 스스로 탐라대도독(耽羅大都督)을 칭하고, 한성의 조정에 대항해 탐라 지역에 독자적인 행정 기구인 탐라국군정처를 설치한 이래 중앙의 행정과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다.
반정(反正)이 성공해 세훈이 집권한 뒤에도 탐라국군정처는 여전히 폐지되지 않고 있었고, 탐라의 성주(星主) 일족인 고씨(高氏)가 탐라국군정처를 통해 직접적인 행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가경 연간에 들어 이 탐라국군정처가 폐지된 뒤에도, 탐라국(耽羅國)의 국호는 유지되었다.
탐라국의 국주(國主) 직위는 세훈 이래로 세습(世襲)되었고, 심왕은 이를 제주공(濟州公) 고씨 가문에 위임하여 국부(國府)를 설치하고 탐라의 정무(政務)를 보도록 했다.
고경신(高景信)은 고봉례의 증손자이자, 고상온의 손자로서 고씨 일족의 종통(宗統)을 이은 이였다.
1404년의 갑신반정(甲申反正) 성공으로 그의 조부인 고상온은 제주후(濟州侯) 탐라성주(耽羅星主) 숭정대부(崇政大夫)에 봉해졌으며, 1406년에는 을유전역(乙酉戰役)의 공을 인정받아 제주공(濟州公)으로 진봉되었다.
공가(公家)의 사직이 세워진 이래 그 후손들은 대대로 공작의 위를 습작(襲爵)했고, 동시에 신라조(新羅朝)로부터 내려오는 탐라성주(耽羅星主)의 직위까지 겸하여 탐라국 내에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제주부의 옛 관영(官營)에 설치된 탐라국부(耽羅國府)에서는 탐라국주의 작위를 겸하는 심왕에게 위임받은 바대로, 이 제주공 탐라성주인 고경신이 지금도 탐라국의 정무(政務)를 일괄하고 있었다.
“제주의 선창(船廠)에서 교관선을 나상뿐만이 아니라 그대들도 조선할 수 있도록 허해 달라, 이 말인가.”
중앙 정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일찌감치 정계에서 물러나 탐라로 내려와 유유자적하던 고경신은, 그를 내빙(來聘)하여 전례 없는 주문을 하는 상인들과 마주앉을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패물을 진상하며 만나 주기를 요청하고 나섰던 것이다. 다름 아닌 동래의 내상(萊商)에서 보낸 행수들이었다.
“그렇사옵니다. 합하(閤下)께옵서 그간 나상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제주의 선창에 대한 이용권을 저희 내상에게도 윤허해 주신다면, 이곳에서 조선된 배를 이용해 나는 수익의 3푼을 합하께 양세(量稅)하여 드리겠나이다. 이곳에서 건선한 교관선은 원양으로 내어 보낼 요량이니, 그 수익이 과히 적지 않을 것이나이다.”
“그러나 이미 누대에 걸쳐, 이 탐라 땅은 나상(羅商)의 근거지로 외부 상인들이 들어온 전례가 없었네. 그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으나, 쉽게 허락해 줄 수가 없네.”
고경신은 우선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보았지만, 내심 속 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나상은 원래 세훈이 고봉례에게 위임받아 하던 장사를 오상기에게 넘기며 시작된 것이었다.
제주 지역의 호상(豪商)들이 이것에 참여해 지역 상단의 규모로 확장이 되었고,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원양 무역에도 일찌감치 남들보다 앞서 뛰어들어 큰 성장을 하게 된 상단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나상이 탐라에 가져다주는 이윤은 막대한 것으로, 탐라국의 7만 인구 중에 2만여 명이 직접적으로 나상에 관여하고 있었고, 나머지 5만여 명도 간접적으로나마 이 나상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나상이 등장한 지 이미 한 세기가 흘러 나상 자체의 무게 중심이 이미 탐라를 떠나갔다는 데에 있었다.
나상은 아직까지 그 본점(本店)이라 할 수 있는 행방(行房)을 제주부에 두고 있었고, 탐라 일대에서 운영하는 각종 공방도 여전히 상당수 있었지만, 실질상 이제 그 본거지는 제주라기보다는 목포에 가까웠다.
나상은 탐라국부에 직접 예속되어 있는 제주의 선창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었고, 대신 목포에 있는 대규모의 직영 조선소에서 거의 모든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
목포에는 나상이 상인들의 어학 교육을 하기 위해 세웠던 습외어학원(習外語學院)이 자리하고 있을 뿐더러, 황성부로 이어지는 서해가도(西海街道)의 종점이자 바다로 나가는 출발지라는 점에서 이미 지리적으로도 나상의 본거지나 다름없게 되어 있었다.
나상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은행이나 다름없는 객상(客商)의 본행(本行)도 목포에 자리하고 있을 뿐더러, 원양 무역을 나섰던 나상의 교관선들은 거의 9할 이상이 목포를 통해 기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탐라국의 경제를 모두 나상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미 나상은 탐라의 지역 상단을 넘어선지 오래였고, 그 빈자리를 나름대로 자구책을 만들어 메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거리가 멀어졌다고는 하나 나상은 기본적으로 탐라에서 출발한 상단이고, 지역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섣불리 다른 상단을 탐라로 끌어들였다가는 괜히 나상과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고경신이 고민하는 점은 다름 아닌 거기에 있었다. 나상의 그늘을 이제 벗어날 필요가 있으면서도, 쉽게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때문에 내상의 제안은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나상 때문에 그러한 걱정을 하신다면 저희가 한 가지 방책을 제안 드리겠나이다. 우선, 합하께옵서 국중(國中)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한다는 명분으로 저희가 필요한 선박을 만들어 주시면, 저희가 그것을 사겠나이다. 합하께서 직접 배를 만들어 팔겠다고 하시면 나상이 감히 나설 명분이 없나이다. 제주의 선창은 나상의 소유가 아니라 탐라국부에 예속된 것이옵고, 다른 상단에게 내어 준 전례는 없으나, 탐라국부에서 직접 함선을 이곳 선창에서 건조한 선례는 있으니, 감히 나상에서도 트집 잡지 못할 것이나이다.”
내상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나오자, 고경신도 조금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심왕가에서 탐라국주의 명칭만 유지하고 탐라국에 대한 권리를 고씨에게 양도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탐라의 성주(星主) 집안인 고씨는 실질상 탐라국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탐라국의 행정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부(國府)는 고씨를 중심으로 한 양씨(梁氏), 부씨(夫氏), 문씨(文氏) 등의 호족 세력의 협의체나 마찬가지였고, 그중에서도 제주공이자 탐라성주인 고씨 당주(當主)의 의사가 결정적이었다.
실로 탐라는 제국 내의 소왕국(小王國)과도 같은 곳이었다.
때문에 국부에 딸려 있는 선창과도 같은 곳은 실질상 고경신이 소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국부에서 직접 배를 건조하겠다고 하면 다른 상단에게 선창을 내어 준 것이 아니니 나상과의 암묵적인 협약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할 권리는 실질상 고경신에게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겠네. 여(余)의 입장에서도 과히 나쁘지는 않게 여겨지는군. 내 다른 후백(侯伯)들과도 숙려를 해 본 다음에 그대들에게 대답을 해 주도록 하지.”
고경신은 우선 대답을 미루고서는 내상의 행수들을 물려 놓은 다음, 내상이 어째서 교관선을 원하는지 탐색에 들어갔다.
원양 무역을 크게 하지 않던 내상이 교관선이 갑작스레 필요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를 비롯한 탐라의 귀족들은 세훈이 탐라의 호족들을 이끌고 갑신반정에 성공한 이래 중앙정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하고 있었다.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것은 일종의 기득권으로 굳혀졌고, 추밀원의 귀족들 중 삼분의 일에 가까운 숫자가 탐라계의 권속이거나, 혹은 이들과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를 맺은 이들이었다.
고경신 자신은 이 추밀원의 직위도 반납하고 탐라에 내려와 있었지만, 그의 젊은 두 아들들은 모두 황성부에서 추밀원 의원의 직위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고, 다른 탐라계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이용해서 내륙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이 거의가 황성부에서 나고 자라, 종가(宗家)의 사묘(四廟)를 모실 때만 제주로 내려와 제사를 지내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본디 속한 곳이 탐라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역적 연고를 근간으로 강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었다.
황성부로 몰래 파발을 보내 황성부에 자리한 탐라계의 제가(諸家)와 연통을 취하게 한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고경신은 꽤나 그럴싸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해가도를 따라 황성부에서 목포까지 이르는 것은 역마차로 사흘 길이었고, 목포에서는 제주로 건너오는 급편(急便) 선박이 매일같이 있었다.
도합 닷새면 황성의 소식을 제주에서 듣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령이 전달해 준 내용을 꼼꼼히 살핀 다음에 고경신은 다시 내상의 행수들을 불러들였다.
조금은 기다리는 데에 지친 듯 보였지만, 이들은 내색하지 않고 고경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고서는 차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고경신은 잠시 무표정을 가장하고서는 속으로 계산을 헤아렸다. 내상의 행수들은 침묵한 채 고경신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사실 자네들이 왜 교관선이 필요한지 알아보았네. 영주(瀛洲)로 건너가 모피 무역에 뛰어들겠다는 심산인 듯 보이더군.”
고경신의 말에 내상의 행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법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제주에 앉아서 자신들이 비공개적으로 추진하는 일을 알아낼 것이라고는 짐작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경신은 내상의 행주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미 영주의 모피에 관해서는 계영양행이 함상(咸商)의 명의로 조정에 윤허를 받아 두었네. 영길도와 영진도독부의 수렵꾼들이 이미 영주로 수백인이 넘게 건너가 있다, 이 말이네. 조정의 허가 없이 거기에 뛰어드는 일이 위험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 함상에게 윤허한 땅은 사방 천 리이나이다. 영주진에서 천 리 바깥부터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니, 저희가 도달해서 새로이 척지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나이다.”
내상 행수의 대답에 고경신은 미간을 좁혔다.
황성부의 조정에 트집 잡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과연 그렇군. 좋네. 내게 먼저 선입(先入)으로 금전을 대어 준다면 교관선 네 척을 조선해 주겠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직접 자금을 내어 척지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영주 무역에 참여하고 싶다, 이 이야기일세.”
“그러시다면 저희로서는 좋은 일이옵니다.”
고경신은 내상의 행수와 밀약을 체결하고 선입금을 받아 바로 제주의 선창에서 교관선의 조선에 착수했다.
제주의 선창은 세훈이 탐라에서 거병하기 이전부터 뭍과 탐라를 오가는 배를 만들던 유서 깊은 곳이었으며, 나상이 등장한 이후로는 기술의 이전을 받아 교관선을 만들어온 경험이 있는 곳이었다.
근래에는 그 활동이 매우 위축되어 있었지만, 제주선창의 선공(船工)들의 기술은 녹슬지 않고 있었다.
교관선은 고경신의 지휘 아래에 곧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상의 새로운 모험에 탐라의 고경신이 뛰어든 것은 내상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상으로서는 힘을 얻어야 할 상대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유구국이었다.
1502년 계추(季秋)
유구국(琉球國) 스이(首里).
1502년은 유구국왕 쇼 신(尙眞)의 치세가 26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 나이가 열둘의 어린 나이었으나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았으니 젊은 국왕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미 그가 왕위에 올라서 서른 해에 가까워졌으나,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는 올해가 그 원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쇼 신은 종래 명(明)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었다. 1479년 명 황제 헌종(憲宗)은 동민(董旻)을 책봉사로 유구로 보내 쇼 신을 중산왕(中山王)으로 책봉했었다.
그러나 쇼 신의 치세 동안 유구와 대한제국과의 관계는 복잡하게 발전했고, 명과의 조공무역보다 삼한(三韓, 조선)과의 관계가 더욱 두터워지면서 쇼 신은 새로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유구가 속한 국제 질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대한제국을 중심으로 한 것에 가까웠다.
명의 영파를 통한 조공무역은 사실상 실효가 없었고, 대한제국의 상단들에게 기항지를 제공함으로 인해 유구의 무역로는 북쪽으로는 북해의 섬들로부터 남쪽으로는 마자파히트, 서쪽으로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쇼 신은 대한제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에 이르러 결국 대한제국에 사절을 보내 책봉을 해 주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명과의 사대를 끊고 대한제국에게 그 예를 다해 섬기기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각(內閣)에서는 이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경제(嘉慶帝)는 내각의 주청을 받아 유구국의 사신과 접견한 자리에서, 직접 쇼 신을 유구국왕에 책봉하는 칙서(勅書)를 내렸다.
칙서를 받아들고 유구국으로 보내질 책봉사로는 정사(正使) 안윤덕(安潤德), 부사(副使) 유순(柳洵)이 임명되었으며, 1402년, 가경 58년 정초(正初)에 동래항을 출발했다.
책봉사절단은 물경 8백인에 이르는 거대한 숫자였으며, 문무(文武)의 관리들과 학자, 상인들이 대동한 대사절단이었다.
동래부를 출발한 책봉사는 이른바 봉주선(封舟船), 혹은 어관선(御冠船)이라 불리는 배를 타고 진서의 기주(崎州)를 거쳐 유구에 도달했다.
스이의 항만(港灣)에 면한 곳에는 대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천사관(天使館)이라 불리는 빈관(賓館)이 있었다.
책봉사절단은 이로부터 넉 달에 가깝게 유구에 체제하면서 책봉의식을 행하게 되는 것이었다.
책봉의식의 첫 번째는 이른바 유제(諭祭)라 불리는 것이었다.
유구국에는 종묘(宗廟)에 해당하는 역대 국왕의 위패를 모신 숭원사(崇元寺)가 있었고, 이곳에 정사와 부사가 입례하여 대한제국의 황제가 친히 내린 유제문을 낭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조문(弔文)으로 유구국의 선대왕들에 대한 치적과 덕성을 치하하는 제문(祭文)이었다.
그 다음이 본격적인 책봉의식이었다.
천사관에서 스이의 도성을 행진하여 왕성으로 사절단이 올라오면 쇼 신 국왕이 직접 수례문(守禮門)으로 나아가 사절을 맞이했다.
책봉의식은 정전(正殿)과 북전(北殿), 그리고 남전(南殿) 및 봉신문(奉神門)으로 둘러싸인 어정(御庭)에서 거행되었다.
정전 앞에는 궐정(闕廷)이라는 임시 궐각이 설치되어 가경제가 친히 내린 물품이 진열되었고, 남전의 앞에는 선독대(宣讀臺)가 설치되었다.
이 선독대에 정사가 올라 친히 책봉하는 조칙(詔勅)을 읽는 것이었다.
“가경 오십팔 년, 임술(壬戌)의 해에 조칙(詔勅)을 내리노라. 짐(朕)이 삼가 천명(天命)을 받아 팔도(八道)와 사주(四洲, 탐라, 진서, 심요, 영진)의 군주(君主)가 되어 일시동인(一視同仁)하여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에 간격이 없었다. 무릇 봉후(封侯) 건국(建國)한 물 밖의 여러 나라 군장(君長)들로 하여금 그 민중을 통솔케 하며, 모두가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준수(遵守)하고 무사태평(無事泰平)함을 도모하여 모두 태평성대(太平盛大)에 이르게 할 것이다. 중산세자(中山世子) 상진(尙眞, 쇼신)은 그간 능히 선대(先代)의 뜻을 계승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황제를 섬겨 태만함과 어김이 없었거늘, 이에 마땅히 계승할 군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상진은 구왕의 적장자(嫡長子)로서 품성이 충후(忠厚)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는 바이다. 지금 특별히 정사 안윤덕과 부사 유순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내려 유구국왕(琉球國王)으로 봉(封)하고 국사(國事)를 이어 맡게 하니, 무릇 나라 안의 대소 신서(大小臣庶)들은 힘써 마음을 다하여 돕고 잘 인도하며, 각기 예절과 분수(分數)에 따라서 혹시 참람되거나 지나친 일이 없게 할 것이며, 반드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生業)에 종사하여 태평한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면 짐(朕)의 품고 있는 생각에 거의 맞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서(詔書)를 내려 효유(曉諭)하니, 모두 그들로 하여금 들어서 알게 하라.”
쇼 신은 이로부터 유구국왕에 봉해져 대한제국에 입조(入朝)하게 된 것이었다.
정사 안윤덕이 돌아간 뒤에도 부사(府使) 유순(柳洵)은 유구에 주재정사(駐在正使)로 남아 천사관의 관루를 받아 공관(公館)을 설치하고 머물렀으니, 황성부 조정의 칙령을 유구국에 전갈(傳喝)하고 유구국에 체재하는 제국인의 안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유구국에서도 이에 상응하여 사족(士族)의 가장 높은 위계인 웨카타(親方)인 종일품(從一品) 삼사관(三司官) 휘쟈 료호(比嘉良方)을 황성부로 보내 주재정사로 삼게 했다.
쇼 신왕은 대한제국을 전범으로 삼아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구축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유구국은 그 통일된 시기가 채 백 년이 되지 않았고, 쇼 신왕 자신도 기존의 왕조를 뒤엎고 새롭게 왕조를 창시한 쇼 엔(尙圓) 왕의 아들로 유구의 통일 왕조는 이제 겨우 2대째라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이미 다년간에 걸쳐 지방에 할거해 있는 호족들인 아지(按司)들을 도읍인 스이(首里, 슈리)로 모아 거주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국가로서 왕권을 발휘하기는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토속적인 신앙과 결부된 지방 세력을 다루는 것은 강력한 왕권을 손에 거머쥔 쇼 신왕 자신에게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구국은 전통적으로 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역할을 오로지 여성이 맡고 있었다.
속된말로 이것은 오나리신 신앙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오나리란 바로 여성을 일컫는 유구어였다.
오나리(女性)는 영력이 높아 에케리(男性)을 수호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고, 때문에 여자 사제인 노로(ノロ)들이 고을마다 제사를 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 신왕은 이것을 국가의 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로의 위에 왕이 임명하는 오아모(大阿母)를 두게 만들었다. 그 오아모 위에는 치쿠에오치미(聞得大君, 키코에오키미)의 직(職)을 두어 민간신앙의 전체를 감독하게 만들었다.
쇼 신왕의 누이인 오토치토노 모이카네가 이 치쿠에오치미의 자리에 오르고, 왕의 딸인 마나베다루를 사스카사(佐司笠)에 임명한 것도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토속신앙을 관제(官製)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성 위주의 왕권 조직과 여성 신관들이 수호하는 토속신앙 사이에는 결합할 수 있는 부분보다 그렇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쇼 신은 처음에 신불(神佛)을 공존시킨 일본의 종교를 본받아 불교를 도입해 왕령(王令)을 세우기를 도모했었다.
스이성 인근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해 명나라에서 승려를 불러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야무야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여전히 배불(排佛)기조가 살아 있는 대한제국과 신종 관계를 맺으면서 불교를 수호하기도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이런 차에 쇼 신왕의 눈길을 잡아끈 것이 바로 심양에서 보내진 그리스 정교의 수사들이었다.
심양대주교구(瀋陽大主敎區)의 수사 율리아노스 트라이팔라기온(Julianos Traepalagion)과 유경직(柳經直) 페트로스, 그리고 소제극(蘇濟克) 파울로스의 세 수사가 심양대주교구의 관할에 놓여진 숙주(宿州, 소코트라)의 주교구로 파견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유구에 방문하게 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본래 그리스 정교의 전통대로 적극적인 선교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때문에 유구에서도 그 신앙을 전파하려기 보다는 단순히 숙주로 가는 길에 체류하고자 머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연히 그들을 숙주까지 데려가기로 한 나상(羅商)의 상인 채응규(蔡應珪)의 주선으로 쇼 신왕을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대들이 믿는 신은 불타(佛陀)나 우리의 신령(神靈)들과는 무엇이 다른가?”
“저희는 세상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의 신을 믿습니다. 저희가 믿는 바에 따르면 세상에는 하나의 조물주인 천주(天主)만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우상(偶像)으로 여겨 믿지 않나이다.”
“그렇다면 우리 유구의 고신(高紳)들도 모두 잡다한 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냐?”
“세상 만물이 천주의 손에서 난 것인데, 어찌 거기서 또 다른 신령이 나겠나이까.”
“그렇다면 그것이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옥황상제와는 무엇이 다른가?”
“옥황상제는 듣기에 여러 세상의 신령들을 주재하는 제왕(帝王)이라 하옵니다만, 천주께서는 오로지 그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니 신령은 오로지 그에게만 있으며, 다른 이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그대들은 그렇다면 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있을 때 어느 것을 따르는가?”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임금의 것은 임금에게, 천주의 것은 천주에게 공양(供養)하라 말했으니, 이것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나이다. 옛 라마(羅馬, 로마)의 국중(國中)에서는 그 땅의 천자(天子)가 직접 신에게 바칠 것을 감독하고 다스렸으니, 임금을 섬기는 것이 곧 천주를 섬기는 것과 한 갈래이고, 거역하는 것이 신위를 따르는 것은 아니옵니다.”
“내 그대들의 믿음에 관심이 가는구나. 혹여 몇 명의 수사들을 내게도 보내 줄 수 있는가?”
“감히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분부하시는 대로 따르겠나이다.”
쇼 신이 정교회 수사들을 요청한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그로서는 제도적으로 왕권을 뒷받침해 줄 종교가 필요했었다.
지방 호족들과 강하게 연관된 토속신앙은 그런 방편이 되어 주기 힘들었고, 불교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동방에서는 심양대주교구를 중심으로 요동 일대에서만 몇 만 명 정도의 신자를 가지고 있는 정교회로서도 이러한 확장의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유경직과 소제극의 두 수사는 숙주로 떠났으나, 율리아노스 트라이팔라기온 수사는 심양대주교구의 윤허를 받아 스이의 국중에 정착했다.
쇼 신은 정책적으로 이 정교회를 지원하기를 아끼지 않기 시작했다.
그로서는 국가의 통일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신앙은 왕권의 방패가 되어 줄 것이었다.
그는 정책적으로 왕권을 떠받드는 유교(儒敎)를 장려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것이 신앙(信仰)으로 여겨지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자연적인 신령들의 힘을 믿는 유구인들에게 잡신(雜神)을 배격하는 유교는 신앙이 될 수가 없었다. 쇼 신은 율리아노스 트라이팔라기온의 조언을 받아 왕권이 천주(天主)로부터 나온다는 관념을 선포하고, 스스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쇼 신이 주도한 정교회 신앙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는데, 민간신앙의 토대 위에서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쇼 신이 기존의 토속신앙을 통제하는 데에 사용한 무녀(巫女)들의 조직은 새롭게 세워진 여자 수도원 조직에 흡수되었고, 지방에서는 정교회 신앙을 장려하면서도 기존의 신령들을 모시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고유 제사상의 중요한 성지였던 벤누우타키(弁之御獄), 소노한우타키(圓比屋武御獄)에는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정교회 신앙과 민간신앙은 물에 칼 베듯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소노한우타키의 석조 배전(拜殿)에서는 쇼 신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제사가 여전히 올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양대주교구에서 유구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신앙의 변질을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율리아노스 트라이팔라기온 수사가 새롭게 등장한 유구대주교구(琉球大主敎區)의 대주교로 옹립됨으로서, 심양대주교구와 동일한 위계에 자리하게 되어 심양대주교구에서 감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율리아노스 대주교는 토속신앙을 강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어디까지나 정교회가 앞으로 유구국의 국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 협력해 정치적인 타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민간의 많은 신령들은 축성(祝聖)되어 의인화된 성자의 신분으로 살아남았고, 민간 성지에는 교당(敎堂)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신학을 넘어선 이러한 타협은 쇼 신의 입장에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국가의 신앙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왕권을 전반적으로 나라 전체에 투사하는 것이 보다 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율리아노스 대주교의 집전 아래에 왕권을 지지하는 많은 호족들이 성직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동로마제국도 몰락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도 오스만 투르크 술탄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면서 그리스 정교회의 조직 자체는 거의 위계가 불분명해진 상황이었고, 교황(敎皇)과 같은 종교를 지도하는 주체가 없기에 쇼 신이 자신의 왕권을 정교회 신앙에 투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유구에서 정교회 조직은 왕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쇼 신은 이러한 교회의 기능을 뚜렷하게 이해했고, 이것을 왕권 강화에 이용하는데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쇼 신은 이렇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국가 장악을 완수하고 나자, 국가의 기간을 조영(造營)하는 일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왕가의 능묘로 다마우돈(玉陵)이 조성되었고, 스이성과 중심 항구인 나화(那覇, 나하)를 연결하는 도로인 마다마미치(眞珠道)를 건설했다.
이 마다마미치의 길가로는 유구와 대한제국의 상인들이 상관(商館)을 앞다투어 열었다.
내상(萊商)의 행수들이 쇼 신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쇼 신이 내상의 행수 방동일(方東壹)에게 제안을 듣고 영주로 가기 위한 배와 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관심을 보인 것이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대한제국 본토의 여러 소상들을 끌어들이고 탐라국에서까지 이 일에 관심을 보이게 되자 내상의 계획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종래에 쇼 신에게 제안했던 바대로의 협의를 마무리 지으러 쇼 신에게 알현을 요청한 것이다.
“전하께옵서 때가 되면 일을 도와주시겠노라고 하신 일을 저희가 기억하고 있사옵나이다.”
“과인이 분명히 그때 방 행수가 나를 찾아왔을 때 그러겠노라고 말을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네. 듣자 하니 탐라(耽羅)에서도 이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자네들의 준비도 거의 마무리되었다고 하니, 바다를 건너자고만 한다면 내 어떤 도움이든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네.”
“저희가 전하께 요청 드리는 바는 다름 아니라 전하께서 가지고 계시는 조공선 일곱 척과 노련한 수부(水夫) 삼백인 정도이나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경비를 지원해 주신다면, 앞으로 척지하는 땅에서 나오는 수입을 전하께도 조세로 바치겠나이다.”
“황성의 폐하께옵서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대들은 제국의 신민들이오, 나는 변방(邊方)의 군주이니 내가 폐하의 신민들을 들어다가 내 일을 도모하는 꼴이 되어 가히 노여워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있네.”
“조정에서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인들이 하는 일이니, 저희가 세금만 제때 바친다면 조정에서는 이를 말릴 이유가 없나이다. 전하께서도 어려이 생각지 마시고 약조하신 대로 하여 주시면 될 일이나이다.”
내상 행수 방동일의 말에 쇼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 일을 도와주기로 약조는 여러 해 전에 되어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조공선은 여러 해를 놀고 있었고, 이 배를 빌려 주고 수부를 지원하여 주면 장기적으로 소소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일이 성사될 단계에 있는데 굳이 여기에서 발을 뺄 이유는 없었다.
또한 쇼 신으로서는 중요한 동기가 있었다.
일찌감치 유구에 진출한 나상은 거대한 규모를 앞세워 유구국에서도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고, 쇼 신의 입장으로서는 일개 상단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달가워할 수 없었다.
쇼 신은 장기적으로 유구국의 자체적인 상업 능력도 제고할 뿐더러, 그동안 나상을 견제하기 위해 제국의 여러 다른 상단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
규모가 작은 내상은 그런 의미에서 협력하기 매우 좋은 관계였다. 내상은 유구국을 발판으로 좀 더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쇼 신은 그들을 통해 보다 상업적인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
“출항을 위한 준비는 어디에서 할 생각인가?”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는 이곳 유구에서 하고자 하나이다.”
“북쪽의 먼 항로를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곳은 매우 남쪽에 있는 나라인데?”
“저희는 기존의 함상들이 사용한 항로를 따라갈 생각이 없나이다. 이곳 동쪽의 창해를 곧바로 가로질러 가 볼 생각입니다.”
1504년 중추(仲秋)
유구국(琉球國) 스이(首里).
내상과 대한제국 내의 소상들 그리고 탐라와 유구국이 연대한 새로운 함대의 출항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준비되었다.
이들이 가고자 하는 항로는 일전에 시도된 적이 없는 항로였다.
그들로서는 앞으로 경쟁 상대가 될지도 모를 계영양행이 주도하는 함상(咸商)의 북방 항로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이 컸다.
그들은 영진도독부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모피 무역의 거점들을 잇는 항로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고, 이러한 무역 거점들은 함상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내상의 상인들이 고용한 탐라와 유구의 선원들은 원양 항해의 경험은 있지만, 빙산과 거친 파도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북방 항로를 항해한 경험은 없었다.
더군다나 동래, 탐라, 유구 어디를 기점으로 삼더라도 북방 항로에 대한 접근성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차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오히려 유구로부터 바로 동쪽으로 나가는 항로를 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준비가 단순할 리 없었다. 내상에서 이 일을 추진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진척은 매우 더딘 속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계획한 대로 나주, 강릉 등지의 지역 소상인들을 이 모험에 끌어들이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이러한 내상의 제안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고, 설사 동조하고 나섰다 하더라도 큰돈을 내어놓지 않았다.
내상의 행수들은 많은 기간 동안 팔도의 각지를 오고 가며 개인적인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고, 몇 년이 지나서야 대략 가경통보 6만 냥 정도의 대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접촉한 것이 탐라국의 제주공 고경신으로, 그가 2만 냥에 교관선 네 척을 건조해 주었다.
그는 이 2만 냥 중에 다시 1만 냥을 투자금 명목으로 내상에 돌려주었는데, 이런저런 소소한 지출을 포함해, 내상에게는 대략 4만6천 냥 정도의 항해를 위한 자금이 남게 되었다.
유구국왕 쇼 신에게 조공선 일곱 척을 빌리고 유구인 수부들을 고용하는 데에는 다시 2만 냥이 들었다.
쇼 신은 그중 8천 냥을 내상에게 투자하는 명목으로 반려해 주었다.
내상은 남은 돈을 나화항의 항만을 확충하는 데에 일부 사용했다.
내상이 꾸리게 될 동방선단이 독점적으로 이용할 접안 시설을 만든 것이었다.
이곳에 탐라에서 건조한 교관선 네 척과 쇼 신이 지원한 조공선 일곱 척 그리고 내상에서 직접 내어놓은 교관선 한 척, 그리고 여덟 척 정도의 소선(小船)이 출항을 기다리며 정박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준비가 끝나자, 다음으로는 인력의 확충이 시급해졌다.
탐라와 유구에서 고용한 수부들은 이미 7백 인에 달하고 있었지만, 보다 노련한 선원들이 필요했고, 이들은 나상 같은 대규모 상단에 고용되어 있었기에 빼오는 것이 좀체 쉽지 않았다.
내상은 노련한 선원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7백인의 일반 수부들을 감독할 1백 명 정도의 기술 좋은 선원들을 1년에 걸쳐서 겨우 고용할 수 있었다.
항법사(航法士)와 조타수 등은 구하기가 더욱 쉽지 않았는데,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창해의 망망대해를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인원을 꾸린 내상의 행수들은 방동일을 이 함대의 책임자로 선임했고, 방동일은 직접 유구국 나화로 건너와 출항을 위한 최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식량과 물품이 선박에 적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창해를 건너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선원들을 독려해 배에 오르게 하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 1504년 여름의 일이었다.
내상이 이 항해를 도모하기 시작한 지 벌써 7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만큼 소규모 상단인 내상으로서는 감히 시도하기 힘든 항해였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도 가 보지 않은 항로를 가야 했다. 준비가 길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총 스무 척, 인원 8백여 명의 대함대가 돛을 올린 것은 1404년 가을의 일이었다.
여름의 태풍과 풍랑을 피해 바다가 잔잔해지자 출항한 이들은 나화항을 출항해, 유구국의 섬들을 따라 올라가 진서의 동쪽 바다로 빠져나갔다.
이들은 계획했던 바대로 동쪽으로 직선 항해를 할 수는 없었는데, 풍향(風向)과 조류가 뜻하는 바대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양에 나서면 연중으로 항해에 큰 영향을 끼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바람과 조류이다.
저위도에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쉬지 않고 강하게 부는 무역풍(貿易風)이 존재하고, 중위도에서는 북동쪽으로 비껴 부는 편서풍(偏西風)이 지속적으로 분다.
이것을 거슬러서 항해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북반구의 대양에서는 순환하는 거대한 조류의 흐름이 있는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적도 부근에서는 서쪽으로 향하다 대륙과 마주하면 다시 고위도 쪽으로 올라가 동쪽으로 선회한다.
이것이 다시 반대편에 마주치면 남하해서 서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반구의 적도 부근에서는 바람과 조류 모두 서쪽을 향해 동쪽으로 향하기가 힘들고, 중위도에서 고위도 사이에서는 모두 서쪽을 향해 동쪽으로 향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람과 조류 모두를 거스를 수 없었던 내상의 선단은 결국 일본의 연안을 따라 북상하는 조류의 흐름을 탈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편서풍을 받아 돛을 올리고 조류의 도움을 받아 동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함상이 항해하는 항로에 비해서는 상당히 남쪽에 있는 것이지만, 사실상 이들이 탄 조류와 바람은 함상이 이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함상은 열도(列島)가 대륙 간에 뻗어 있는 북위 50도 부근에서 종종 연안의 대륙풍에 잠식되는 편서풍의 도움을 받아 항해한 것이라면, 내상의 함대는 북위 40도 근경(近境)에서 매우 강하게 부는 편서풍과 빠른 속도의 북태평양 해류에 올라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다년간의 원양 항해 경험이 있는 선원들은 처음에는 낯선 바다에서 당황했지만 곧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가는 바람과 조류에 편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안정적으로 항로를 운용할 수 있었다.
“바람과 조류 모두 좋습니다. 이 상태로 돛을 펼치고 동쪽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머지않아 영주의 바닷가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항법사의 말에 방동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동일을 비롯한 각 배의 선장들과 항해사들은 거의 이들이 큰 문제없이 동쪽 끝 땅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원들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이 마주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런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함상이 섬과 섬이 이어지는 북방 항로를 택함으로서 심리적인 불안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데에 비해, 내상이 택한 항로는 수십 일을 지나가도 육지 하나 보이지 않는 항로였다.
이들은 바람과 조류가 자신들을 동쪽으로 날라다 주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도대체 이 항해가 언제 끝나게 될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어렵사리 계산해 낸 영주와 유구국 사이의 거리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추산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배 위의 어느 누구도 이 막연한 바다 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은 큰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들은 노련한 수부들로 오랜 기간 원양 항해에 단련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항해사들은 그들이 동쪽으로 가는 바람과 조류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선원들에게 끊임없이 확신시켰다.
수부들은 바다에 관해서는 잡다한 미신들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들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믿는 것이 있다면 바람과 해류의 힘이었다.
그것은 거친 폭풍과 마주치지 않을 가능성을 예견해 주며, 또한 그들이 무풍(無風)속에서 고립되지 않을 희망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꼭 항해가 희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음 10월 24일 진서의 남단(南端)의 소항(小港), 녹아도(鹿兒島, 카고시마)에서 마지막 보급을 받은 뒤, 이들은 아무런 식량과 식수의 보급을 받지 못하고 대양 항해를 해야 했다.
일본 열도를 벗어날 때쯤에는 폭풍우를 만나 작은 선박 세 척이 침몰하고, 조공선 한 척이 반파되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고, 남은 열여섯 척의 배들도 항해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가게 되었다.
음 11월에 들어서서 편서풍에 올라 항해에 속도가 붙었지만,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었고, 잔혹할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북위 40도의 기온이 따뜻할 수는 없었다.
말린 쌀 이외에는 마땅한 식량 공급이 없었기에 선원들 중 일부는 각기병(脚氣病)에 시달렸고, 괴혈병(壞血病)도 드물지 않게 나타났다.
이들은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고, 증상이 악화된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면 부패가 진행되기 전에 제대로 된 장례 없이 바다에 던져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쥐와 벼룩은 공공의 적이었고, 가끔 드물게 내리는 빗물을 받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깨끗한 식수를 얻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실어 둔 막걸리로 수분의 많은 부분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이것대로 선내의 기강에 위협이 되었다.
80일째 뭍을 보지 못한 1405년의 정초(正初)에 이르러서는 결국 술로 인한 소동이 일어났는데, 유구국왕이 하사한 조공선 중의 한 척에서 유구인 선원이 자신의 상관인 유구국 하급 관리를 술에 취해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것은 그 선박에서 이내 소요사태로 발전해 다른 선박들에서 포격(砲擊)을 가한 끝에 진정시키는 소동으로 비화했다.
날이 갈수록 선원들은 지쳐 갔고 항해에 대한 확신도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북태평양, 즉 제국인들이 창해(滄海)라 부르는 거대한 대양(大洋)은 북위 40도 일대에서는 육지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보다 북쪽으로는 계영양행의 함상 선원들이 이용하는 섬들이 늘어서 열도를 형성하고 있고, 적도에 가까이 내려가면 하와이 제도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중위도 지역에서는 변변한 섬 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항해가 100일에 가까워져 오면서 선원들은 매우 지쳐 있었고, 함대를 이끄는 방동일 자신도 각기 증상이 조금 나타나고 있었다.
“요즘 근육이 심하게 아파서 좀체 걸을 수도 없으니 지독한 기분이 드네. 이 항해가 언제 끝나게 될지 좀체 자신할 수 없구만.”
자신을 보좌하던 항해사에게 방동일이 이렇게 말했을 즈음에는 모든 함대의 선원들이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당할 정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해가 백 일 하고도 열흘이 지날 무렵 선상 소요의 분위기가 감지될 때에, 앞서 나가던 교관선 한 척에서 큰 나팔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내 붉은 깃발이 그 배에서 게양되었는데, 육지를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함대의 선원들은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채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수림이 우거진 뭍에 다다를 수 있었다.
큰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육지가 양쪽으로 뻗어 있었고, 그 좌우로 풍족해 보이는 해안이 펼쳐져 있었다.
항해사는 밤이 되자마자 측각(測角)으로 그곳과 영주의 거리를 가늠해 계산했고, 대략 영주에서 거리가 천 리보다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은 이곳을 대한제국 황제, 그리고 탐라국주와 유구국왕의 이름으로 새로운 영토로 선포했다.
그리고 이곳에 백여 명의 선원을 남긴 다음, 총포를 일부 지급하고 흙과 목재로 목책을 쌓은 다음에 정동보(正東堡)라 이름했다.
황성부에서 직선으로 동쪽으로 나아간 곳에 위치한 곳의 보루(堡壘)라는 의미였다.
남은 선원들은 이곳에서 봄 동안 머문 뒤에 해류를 타고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함대는 40일간을 항해해 내려가 해안의 상세한 해도(海圖)를 작성하고, 넓은 바다에서 무역풍이 서쪽으로 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서는 북위 15도 근방에서 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동쪽으로 오는 동안 편서풍과 해류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이번에는 무역풍과 서쪽으로 가는 해류의 도움을 받았다.
바람의 세기와 해류가 일정했고, 때문에 귀항로에서는 대략의 일자를 추산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름이 다가온 것에 있었다.
강렬한 폭풍과 바람이 심심찮게 선단을 덮쳐 왔고, 6월 초엽에 이르러서는 교관선 세 척과 조공선 두 척, 그리고 소선 두 척까지 총 7척의 배만이 남아 있었다.
운이 좋은 경우 배를 포기하고 선원들을 구제할 수는 있었지만, 목숨을 잃은 이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구제한 것은 바로 북태평양에 외롭게 떠 있는 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諸島)였다.
이곳에는 폴리네시아인들이 섬마다 정착해 알리 아이모쿠(Ali‘i ‘aimoku)라 불리는 군주를 떠받들고 있었다.
알리 아이모쿠는 일곱 개의 섬마다 한 명씩 있었고, 이들 아래에 조그마한 영역을 다스리는 알리(Ali‘i)들이 있었다.
섬들의 이름은 하와이(Hawai‘i), 오아후(O‘ahu), 마우이 (Maui), 몰로카이(Moloka‘i), 라나이, 카우이(Kaua‘i), 그리고 니하우(Ni‘ihau)였다.
내상의 선단이 이 제도에 다다른 것은 1405년 음 6월 스무 날의 일이었다.
이들은 제도의 남쪽 끝에 크게 자리한 하와이 섬에 도달했고, 하와이 섬의 알리 아이모쿠인 하카우 아 릴로아(Hakau-a-Liloa)가 이 선단의 등장에 깜짝 놀라 병력을 집결시켜 이들 선단의 상륙을 저지하고 나섰다.
하카우는 나이 마흔의 강건한 남자였고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릴로아의 자리를 이어 알리 아이모쿠에 오른 지 벌써 열 해째였고, 하와이 섬의 알리들을 무력으로 이끌어 온 능력 있는 군주였다.
“도대체 우리가 저들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카우는 전사들을 모아 놓고 고민을 거듭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주민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해변에 거뭇하게 나타난 모습을 지켜본 선단에서도 불안감에 휩싸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총포로 주민들을 위협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양질의 음식과 식수가 필요한 것은 내상의 선단이었고, 당장 아쉬운 것도 그들이었다.
방동일은 고민 끝에 조그마한 소선에 몇 명의 선원을 태우고 직접 해안가로 향했다.
하카우는 해안가에 나와 있었고, 방동일은 직접 해안에 내려 하와이인들과 마주섰다. 통하지 않는 언어로 그들이 물과 음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겨우 전달할 수 있었다.
하카우는 공격적인 태도를 풀고 그들을 자신이 거처하는 마을인 와이피오(Waipio)로 초대했다.
와이피오는 수백 채의 집이 있고, 돼지와 얌이 풍부한 군락(群落)이었으며, 선원들은 다행히 이곳에서 하카우의 대접 가운데에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방동일은 답례로 술과 발화기, 그리고 면직물을 비롯한 선물을 하카우에게 했고, 하카우는 이것에 대해 기뻐했다.
하와이에서 보름여를 머문 뒤 선단은 다시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했고, 8월에 여송(呂宋, 루손)을 지나 9월 초에 유구국 나화항으로 귀항할 수 있었다. 많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항해는 성공적이었다.
1505년
소흥(昭興) 원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주진(瀛洲鎭).
가경제(嘉慶帝) 이현(李泫)이 가붕(駕崩)한 것은 전년(前年) 여름의 일이었다.
향년 일흔넷이었다. 열넷의 어린 나이에 선황(先皇) 진종(眞宗) 흥정제의 보위를 이어 즉위하였으니, 그 치세만 60년이었다.
시호는 예종(睿宗)으로, 양주의 안릉(安陵)에 모셔졌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훙거(薨去)한 황태자를 이극(李剋)을 대신해 황태손(皇太孫) 이면(李勉)이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면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연호는 소흥(昭興)이라 했다.
황성부중이 온통 추념(追念)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동안에도 배는 끊임없이 바다를 오고 갔다.
먼 동쪽 바다 끝에 영주진이 설치된 지도 어느덧 다섯 해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소흥 원년에 이르러서 영주진과 대곡보(大谷堡)의 인구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영주진은 어느덧 물경 팔백인 정도가 상주하는 소항(小巷)이었고, 대곡보 또한 오백인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영주진과 대곡보를 잇는 선박이 드물지 않게 오고 갔고, 육로로도 좁은 임로(林路)가 개척되어 말을 타고 오고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영주진의 진영(鎭營) 한쪽에는 그럴싸한 동헌(東軒)이 세워졌는데, 이곳 개척지에서는 드물게 기와를 올렸다. 그곳이 바로 영주진령(瀛洲鎭令)이자 창명첨사(滄溟僉使) 혜성군 주현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대곡보의 만호(萬戶)로 남쪽을 개척하기 위해 나가 있던 윤희상이 한 해 만에 이곳을 찾은 것은 1504년, 소흥 원년 그믐달의 일이었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나야 별일 있겠는가.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한 해가 지났던가?”
윤희상이 동헌의 사랑채에 들자 주현은 서책을 덮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윤희상을 맞았다.
고단했던 항해를 함께하던 시절부터 이들은 깊은 우정을 쌓아 온 사이였다. 비록 신분의 고하가 있을망정, 그것을 뛰어넘는 고락(苦樂)을 함께해 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떨어져 있던 지음(知音)을 만난다는 것이 반갑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목책을 좀 더 단단하게 세우는 일을 마무리 지어 놓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요즘 주변에 대곡보를 노리는 만적(蠻賊)들이 심심찮게 나타나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찾아와 이들이 얼씬거리지 않는 덕분에 길을 나설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세모(歲暮)에 찾아뵈었는데 벌써 그믐이니 한 해 만에 뵙는 것이 맞지요.”
말투는 한껏 정중해졌지만, 여전히 몸에 건들거림이 배어 있는 윤희상을 주현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하나의 보(堡)를 돌보는 만호의 자리에 올라서도, 오랜 습관을 버리지는 못하는 윤희상이었다. 윤희상은 주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을 보고서는, 제 얼굴도 한껏 펴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득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내 나이도 며칠 뒤엔 마흔 넷이니, 일찍 본 것은 아니지.”
“그간 안방마님께도 소홀하셨잖습니까. 이제 와서 금슬이 좋으신 걸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그놈의 바다를 헤집고 다니시느라 집안에 부인을 여러 해나 독수공방 시키셨잖습니까.”
“그야 내 따로 할 말이 없지. 허허.”
“그래서 이름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성규(誠奎)라 하였네.”
“군작(君爵)은 내려졌습니까?”
“군호가 내려오는 것은 나까지네. 아,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는 것은 나에서 끝이지만, 이래 뵈도 심왕가의 종친이다 보니 심양에서 대부(大夫)의 위를 사여(賜與)하더구만. 두 달 전에 교관선을 타고 이곳 영주진에 들어온 상인 하나가 심왕 전하께서 내려 주신 교지(敎旨)를 내게 건네주었네. 성규 놈을 대부에 봉한다고 말이네.”
“역시 그 핏줄이 보통 핏줄이 아닌 모양입니다.”
주현의 대답에 윤희상이 껄껄 웃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마나 머물다 갈 생각인가?”
“이곳에서 새해를 나고 갈 생각입니다. 혹여 마누라 하나 얻을까 싶어 좀 알아보려 왔습니다.”
“그렇긴 하네. 자네도 이제 혼인을 맺을 나이가 훌쩍 넘기는 했지.”
“서른을 넘긴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 빨리 혼사를 맺어 아이를 보지 않으면 대가 끊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려. 그나저나 좀 수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 말인가?”
“대곡보에서 사냥을 나가는 패거리 하나가 가을에 남쪽 멀리 다녀왔는데, 그곳의 야인(野人)들이 발화기로 불을 틔우는 것을 보았답니다. 대곡보에서는 자기들이 처음으로 그곳까지 나간 것인데, 이상하게 여겨서 캐물어 보았더니 남쪽을 손으로 가리키더랍니다. 총을 처음 보았을 텐데도, 그 야인들이 낯설어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남쪽에도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흠. 그자들이로구만.”
“예?”
윤희상의 말에 주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주현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윤희상은 주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두 달 전에 내게 교지를 전해 준 상인이 소문 하나도 전해 주었네. 내상(萊商)에서 오랜 기간 준비해서 이쪽으로 선대를 띄운 모양이야. 작년 가을에 유구국에서 출항하여 올해 봄에는 이미 남쪽 어디께 이르러 진채를 세우고 귀항한 모양인데, 본토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한 모양이더구만. 올해 9월 초에 귀항(歸航)하여 돌아오는데 성공했다고 하며 영명진에서 이곳으로 출항하기 며칠 전에 소식이 들려와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그자들이 확실한 모양입니다. 내상에서 아주 이곳에 정착을 하고 있다니, 저희가 부여받은 특령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것은 이곳 영주진을 중심으로 사방 천 리(千里) 안의 특권이네. 그 밖에서 척지를 한다면 우리가 감히 나서서 무어라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합니까?”
“사실 나나 자네야 별 상관이 있겠는가? 아쉬운 것은 우리 백부(伯父)의 계영양행이나 함상 상인들이지. 그래서 말인데, 나와 함께 몇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그 내상의 진채를 찾아가 보지 않겠는가. 이번 가을에야 본토에 귀항했다고 하니, 그 진채가 보급 없이 고립된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을 것이네. 내상의 다음 배는 내년이나 되어야 올 터니 지금쯤 우리가 간다면 반겨 줄 걸세. 같은 조선인들끼리 부딪히고 아귀다툼할 필요가 있겠는가. 식량과 술을 좀 실어다가 건네주면 좋아할 걸세.”
“속도 좋으십니다그려.”
“속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네. 다 좀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세.”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주현의 말에 윤희상이 되물었다.
“그쪽과 잘 이야기를 하여서 그곳을 기점으로 내후년쯤에 남쪽으로 탐사를 나가 볼까 하네. 그간 오 년 동안 이곳 일대의 지도를 만들고 땅을 누벼 보았지만 알다시피 땅의 넓이가 아직 가늠할 수가 없네. 북쪽으로는 올라갈수록 춥고 척박한 땅들 뿐이니 남쪽에 좋은 땅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말이네. 쌀이 넉넉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고 말이야.”
한 해가 저물고 설을 보낸 뒤에 주현과 윤희상은 서른 명 정도의 사냥꾼들을 꾸려 곡물과 술을 넉넉하게 말에 실은 뒤에 길을 나섰다. 봄이 찾아오기 시작해 기온이 한껏 풀려 있었고, 대곡보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대곡보에서부터였다. 남쪽에서 야인들과 접촉했던 사냥꾼들 중 둘을 길잡이 삼아서 다시 행로를 떠나서, 해안가를 따라 행군을 계속했다. 보름 길을 지나도 좀체 진채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영주진이 들어선 곳이 실제 역사에서 밴쿠버 일대이고, 대곡보가 들어선 곳은 시애틀과 멀지 않은 곳이니 그 사이만 200km, 500리에 가까운 거리였다.
그런데 내상이 도달해 진채를 세운 곳은 실제 역사에서 샌프란시스코가 자리한 곳이니 대곡보에서는 거진 1,000km, 2,500리나 떨어진 곳이다. 도달하기가 쉬울 턱이 없었다.
신대륙의 동해안은 울창한 삼림과 거친 원주민들, 그리고 험준한 산령(山嶺)이 이어지는 땅이었고, 이곳을 목적지가 불분명한 채로 헤쳐 나간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남쪽에 내상에서 진채를 세운 것이 사실일까요. 그저 선편(船便)으로 들어온 소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도대체 이미 천 리 길을 지나왔는데도 어딘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가 그 남쪽에서 흘러들어 온 야인들이 발화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좀체 설명이 되질 않지. 처음 마주치는 야인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지요.”
다행히도 야인들과 대치하거나 위험한 금수(禽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이들은 준령(峻嶺)들을 몇 번이나 넘어서며 고단한 행군을 계속했다.
그래도 말이 있어 하루에 꽤 먼 거리를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말을 지나치게 혹사시킬 수도 없을 뿐더러, 길이 따로 없고 산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험준한 지형이라 때로는 말에서 내려 직접 길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일이 계속된다는 점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 150리를 나아가기도 했으나, 어떤 날은 겨우 10리 남짓만 가기도 했다. 더군다나 지도를 만들어 가며 나아가는지라 때로는 지세(地勢)를 파악하느라 걸음이 늦어지기도 했다.
내상의 진채를 찾아갈 목적으로 나선 길은 어느새 신대륙의 광범위한 동안(東岸)을 탐사하는 일로 바뀌어 있었다.
주현과 윤희상은 행로를 꾸준히 바꾸어 가며 주변을 살피길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들이 바다를 건너온 것이 분명한 물건들을 소지한 원주민들과 마주한 것은 그렇게 행군을 개시한 지 석 달 만인 3월의 일이었다.
이들은 가경통보임에 분명한 은전(銀錢)에 구멍을 뚫어 장신구로 착용하고 있었다.
주현과 윤희상은 이들에게 술을 조금 내어 주고, 협조를 얻어 내상의 진채로 가는 길을 수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거리를 더 나아가 결국 목적했던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곳은 허름한 진채였다. 흙으로 간단히 다져진 토대 위에 나무 울타리가 얼기설기 올라서 있었다. 내상의 진채임에 분명했다.
내상에서 세운 정동보(正東堡)였다.
정동보에 남겨진 내상의 선원들은 주현과 윤희상을 매우 반겼다. 이들은 백여 명이 남겨져 있었지만 그간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겪었을 뿐더러, 식량이 넉넉치 않아 살아남은 이는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
기약 없는 내상의 선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차에 같은 주현과 윤희상이 곡물과 술을 싣고 찾아왔으니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비록 여행 중에 곡물의 절반 이상을 잃고, 술은 거의 남지 않았음에도 정동보의 선원 서른 명을 구명(求命)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정말 이렇게 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원을 통솔하라고 남겨 놓은 내상의 객주(客主)도 원주민과의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기에, 남아 있는 선원들은 연장자인 교(喬) 노인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교 노인은 선원들을 대표해 주현에게 거듭 절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간 고로가 많았소. 우리가 찾아오길 잘한 것 같구려.”
주현과 윤희상을 비롯한 일행은 정동보의 선원들과 함께 간만의 휴식을 만끽했다.
정동보의 선원들은 오랜만에 곡물로 지은 밥을 먹었을 뿐더러, 술까지 들이킬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들로서는 죽다가 살아난 셈이니 이들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내상의 선단은 언제 다시 돌아온다 하였소?”
“이듬해나 되야 올 것입니다. 저희가 총도 있고, 주변에 들짐승도 많으니 연명하기는 힘들지 않으리라 여겨서 저희를 남겨 두고 간 것인데, 근방의 야인들도 드세기 그지없어 여름에 이들을 몇 차례 막아 내다 보니 많은 목숨들이 떠나 버렸습니다. 그 후로는 식량을 구하기도 곤란해 그나마 우호적인 야인들에게 당장에 쓸모치 않은 물품을 넘기고 먹을 것을 구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겨울이 되자 여의치 않아 곤란해 하던 차였습니다. 곡식이라고는 한 톨도 없으니 고기를 구해도 목으로 넘어가질 않습니다.”
“그거 안타까운 일이로구만. 우리가 이번에 오는 길에 볍씨를 조금 가지고 왔으니, 조금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파종을 좀 해 보시오. 이곳의 기후를 보아하니 온난하고 물 또한 풍족하니 얼마간의 쌀을 건질 수는 있을 것이오. 그간 먹을 수 있도록 짊어진 곡식을 모두 내려놓고 가겠으니 아껴 먹도록 하시오. 혹시 모르니 우리가 대곡보로 돌아가게 되면, 바로 이곳으로 곡량을 들려 다시 사람을 보내겠으니 조금만 더 견뎌 주시오.”
주현의 말에 정동보의 선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읍했다.
어찌 보면 주현이 뚫어 놓은 기회를 나눠 가지려 내상에 의탁해 먼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었다.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이렇게 구명해 주었으니 이들로서는 더더욱 감읍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상에서 선단이 오거든 우리가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그린 지도를 그대들에게 베껴 줄 터이니, 그것을 보고 잘 헤아려 항로를 조금 북쪽으로 돌려 영주진에도 한 번 기항하라고 전해 주시오. 이 영주진령이 기꺼이 환대하겠다고 말이오.”
“감히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그리하겠나이다.”
교 노인에게 단단히 약조를 받아 내고서 하루를 더 머문 다음에 주현과 윤희상, 그리고 사냥꾼들은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대곡보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만큼 멀지 않았다. 이제는 길이 훤하니 달포면 충분했다. 한 번 가기는 어려워도 두 번은 쉬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