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9장 북륙경략(北陸經略) (40/82)

제39장 북륙경략(北陸經略)

「심왕가(瀋王家)를 중심으로 한 심요 지역이 대한제국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된 계기로 동몽골에서 극동의 해안가에 이르는 방대한 초원과 삼림 지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수십 년에 걸쳐 성장해 온 심요 지역은 제국 내의 왕국(王國)으로서 이미 16세기에 접어들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정근(鄭勤), 《요동사(遼東史)》,

(심양:동문사, 1805), 409p.

1512년

소흥(昭興) 8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해관 동쪽, 그리고 압록강 북쪽으로 펼쳐진 넓은 땅을 요하(遼河)의 동편에 있다 하여 요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만주라는 이름은 실제 역사에서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여진족을 통일하여 이름을 만주라 고친 뒤에야 나오는 지명이니, 당대에는 사용되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요동이란 이름은 사실 주로는 심양과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반도의 일대만을 협소하게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시기에 이르러 대한제국에서는 심요도독부와 영진도독부의 영역을 벗어난 북쪽 일대를 북륙(北陸)이라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북륙이라는 명칭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좁게는 대한제국의 영향 아래에 포섭되어 신속(臣屬)한 건주여진을 제외한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야인여진(野人女眞)의 거주지만을 일컬었지만, 넓게는 대흥안령 너머 동몽골의 초원 지대와 흑룡강 너머 북방의 방대한 침엽수림까지 포괄하기도 했다.

좁은 의미에서든 넓은 의미에서든 이 북륙이라 불리는 광활한 지역은 대한제국의 심요도독부가 설치된 이래 요동 일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요동이 농경문화에 기반하는 정주지대로 탈바꿈하고, 도시가 번창하며,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심왕을 중심으로 한 요동행정서의 정책적 주도로 말미암아 도로가 닦이고, 공방(工房)이 들어서며, 광활한 영역에서 농업과 목축이 이루어지자 자연스럽게 주변 변경의 환경이 요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제3대 심왕인 문덕왕(文德王) 서윤이 심요를 통치하는 기간 동안 이러한 경향은 크게 증대되었다.

서윤은 문예를 애호하는 학구적인 왕이었으며, 그가 요동을 통치하는 동안 심양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또한 서윤의 주도로 1502년 개관한 어립장서각(御立藏書閣)에는 동서양을 막론한 각종 서책과 예술 작품을 모아 소장되어 있었다.

산업으로 보아서도 심양은 양모(羊毛)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시계, 유리, 총포(銃砲) 등을 생산하는 공방이 도처에 있었다.

또한 은(銀)과 석탄(石炭)이 주변에서 대량으로 캐내어져 심양을 비롯한 요동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대한제국 본토와 명으로까지 수출되고 있었다.

목재가 부족한 요동 일대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정에서 난방이나 취사를 하는 연료로 석탄을 크게 활용하게 되었고, 심양은 그 생산의 중심지인 동시에 소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크게 활성화된 국제무역시장인 동녕부(東寧府)를 배후에 낀 심양은 그 자체로도 커다란 상업도시였으며 요동행정서 산하의 은행국(銀行局, 구 은행서)에서 발행하는 은화인 요동폐(遼東幣)는 심요 지역, 평안도와 영길도뿐 아니라, 영진도독부와 명나라의 양자강 이북 지역, 몽골과 여진에도 두루 퍼져 극동의 북부에서 국제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동의 성장은 자체적인 발전의 도모와 인구의 증가가 주된 원인이긴 했지만, 규모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변의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로 거듭난 덕이 컸다.

특히 요동은 산업적인 혁신 능력이 뛰어났다.

세훈의 주도하에 15세기 초반에 이룩된 대한제국의 기술적인 발전은 본토에서는 반세기 이상 큰 변화 없이 지체되어 있는 반면에, 요동에서는 혁신적인 개량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괄목할 만한 점은, 열병기에 사용될 초보적인 강선(腔線)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대한제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보총(步銃)은 서유럽에서 보급된 화승총(火繩銃)에 비해서는 한 단계 앞선 수석총(燧石銃)이었지만, 한 세기 이상 큰 변화 없이 개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동에서는 북변(北邊)의 특성상 군대뿐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위협의 대처뿐만 아니라, 사냥 등에 활용하기 위해 총포의 보급이 널리 이루어져 있었고, 이것은 개량을 향한 충분한 동기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요동에서는 제련업(製鍊業)이 발달해 있었고, 강선의 도입은 시간 문제였다.

거듭된 노력 속에 16세기의 초엽에 접어들 무렵에는 기존의 매끈한 형태의 총신에 초보적인 강선을 적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은 본격적인 강선이 들어간 선조총(旋條銃)의 단계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기존의 보총이 가진 성능을 뛰어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기마(騎馬) 상태에서도 훈련을 받는다면 총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총뿐만 아니라 이런 포(砲)에 있어서도 상당한 개량이 이루어졌는데, 바퀴를 달아 차륜식(車輪式)의 이동이 가능한 포가(砲架)의 안정성의 재고는 물론이거니와 포신(砲身) 내의 초보적인 강선(腔線), 포신의 상하 운동을 가능케 하는 포이(砲耳), 청동제의 포신, 철이나 납으로 만든 포탄 등이 등장했다.

거기에 화차(火車) 또한 요동행정서의 화기국(火器局)을 중심으로 생산되어 대신기전(大神機箭)과 소신기전(小神機箭)등이 만들어졌다.

총통(銃筒)이라 불리는 총과 대포의 중간 형태인 화약 무기도 개량되었다.

1508년 문덕왕 서윤이 여든여섯의 나이로 승하(昇遐)한 뒤에 세손(世孫), 즉 훗날에 경흥왕(慶興王)으로 알려지게 되는 진영(璡榮)이 심왕의 작을 이어받아 즉위한 뒤에도 선대에 이루어진 이러한 기조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

“너는 반드시 문(文)을 쌓아 이로써 백성을 교화시킬 것이며 무(武)를 장려해 북적(北狄)과 명으로부터 이 요동을 방비해야 할 것이다. 가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으니, 네 스스로도 수신(修身)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조부 서윤이 죽기 전 남긴 유음(遺音)대로 진영은 행하려 노력했다. 그 자신이 어립문리과대학에서 수학(受學)을 했으며, 조부의 뜻에 따라 어립장서각을 관장하기도 했다.

조금 나이가 더 든 뒤에는 제국육군에 입대하여 기병대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심왕의 왕위를 물려받을 즈음에서는 요동행정서의 은행국을 맡아서 돌보고 있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 두루 걸쳐 경험을 쌓았고,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조부 서윤이 남긴 말을 흐트러짐 없이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요동의 번영함도 언제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풍파(風波)를 대가로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군사적이나 경제적으로 북륙에서 요동이 가진 지위가 갈수록 커져만 갔기에, 주변의 여진족이나 몽골의 북원(北元)은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요(遙), 금(金), 그리고 원(元)을 이어 오는 동안, 요동은 유목민의 손아귀에 놓인 땅이었으며, 명대(明代)에 들어서서도 한족의 이주가 조금 이루어지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요동은 유목민족들이 언제고 견제를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심왕이 사실상 지배하는 심요도독부가 설치되면서 수십 년이 흐르자, 권력 균형이 깨지고 세력의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여진과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정주사회로 탈바꿈해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요동 지역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한제국과 심왕가는 이를 잘 조율해 왔었다.

여진족에서도 가장 강성했던 건주여진이 거의 사실상 심요도독부와 영진도독부에 나뉘어 복속한 뒤로, 남은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은 대한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사실상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때때로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요동의 정책에 어깃장을 함부로 놓지는 못했다.

몽골도 그동안 긴 분열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가끔 통제력을 상실한 약탈 떼가 요동까지 내려오기도 했지만, 북방을 순찰하며 변경을 통제하는 대한제국의 기마대에 의해 번번이 소탕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고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도 같은 존재였고, 이제 그 화약통에 불이 붙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1512년

소흥(昭興) 8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개원군(開原郡).

개원(開原)은 요동의 가장 북쪽에 설치된 군(郡)이었다. 성경 심양부에서 북쪽으로 길을 잡아 포하(浦河)를 지나면 의로군(懿路郡)이 나온다.

의로에서 더 올라가면 옛 명의 범하소(汎河所) 자리에 설치된 조그만 읍성(邑城)인 범하성(汎河城)이다.

이곳에서 요하(遼河)의 지류 중 하나인 범하를 건너면 심양 북쪽에서는 가장 큰 고을인 철령군(鐵嶺郡)이 나온다.

이 철령에서 다시 백 리 길을 더 올라가 대청하(大靑河)를 건너야 비로써 개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개원은 원래 명나라 요동도사 속하(屬下)의 삼만위(三萬衛)와 요해위(遼海衛)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속칭 개원(開原)이라 불렸었다.

그러던 것을 요동을 대한제국이 차지하고 심왕부가 들어서면서, 이곳에 개원군을 설치하고 1440년에는 요동군 제1기병대를, 1455년에는 요동군 제2포병대를 주둔시켰다.

북방의 야인(野人)들로부터 요동을 지키는 수비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심요도독부의 행정 기능은 모두 심왕부 속하(屬下)의 요동행정서에서 관장하기에, 사실상 황성부 조정의 입김이 닿기 힘들었지만, 군(軍)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 요동을 방비하기 위해 요동군(遼東軍)이 세워졌을 때부터 지휘 체계는 황성부의 군부(軍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반세기가량 세월이 흐르면서 황성부보다는 심양의 입김을 더욱 받게 되었는데, 대한제국의 조정이 사실상 대규모의 군대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징병제를 운용하는 대한제국은, 대상자 모두가 군역(軍役)을 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60만에 달하는 병력을 항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재정을 모두 전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역을 지는 기간이 계속 줄어 지금은 1년에 불과했지만, 원하는 자는 무기한으로 병영에 남아 있을 수 있었기에, 숙식을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로 군영(軍營)은 늘 꽉 차 있었다.

징병제를 도입한 초기부터, 제국에서는 이들 부대들에게 둔전(屯田)과 소금 및 목화 등의 전매권을 주어 경비를 충당하게 했지만,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랜 기간 전란이 없으면서, 특히 본토 팔도(八道)에 주둔해 있는 진위대는 기강이 문란해지고, 병적(兵籍) 또한 자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잦았다.

총포(銃砲)는 한 세기에 가까이 크게 개량되지 않고 있었고, 삼남(三南)의 일부 부대에서는 경비 부족을 이유로 총포의 비율을 줄이고 도검(刀劍)과 활로 무장시키는 경우까지 있었다.

요동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식량 소출이 적은 곳에 주둔하고 있는 요동군으로서는 병력 운영을 위한 식료(食料)를 대는 것부터가 곤란한 일이었다.

때문에 황성부의 군부보다는 심왕가에 재정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요동군의 요동행정서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멀리 있는 황성부보다는 심양의 명령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요동군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었다.

심양으로부터 강선 등을 도입해 개량된 총과 포를 지급받을 뿐더러, 식량이 부족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 질도 좋아졌다.

여러 주둔지에서 성벽과 둔영(屯營)이 개량되었고 심양의 재정이 군대를 더 늘리기에도 충분했기에, 1457년에는 광녕(廣寧)에 제3기병대, 1475년에는 철령(鐵嶺)에 제6보병대, 1477년에는 산해(山海)에 제7보병대, 1481년에는 의로(懿路)에 제3포병대, 1493년에는 요중(遼中)에 제4기병대, 그리고 최근인 1505년에 산해에 제4포병대를 증설하는 등 꾸준히 병력 증강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대략 한 부대에 1만 명 내외가 편성되어 있는 요동군은 총 13만 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훈련 정도나 질에 있어서는 대한제국에서도 으뜸갈 정도였다.

사실상 수렵꾼이나 다름없는 영진도독부의 군대나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진서군(鎭西軍), 그리고 본토의 엉망진창인 진위대들에 비해서 확실히 기강이 잡혀 있는 군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요동군 또한 본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요동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고, 이곳에 주둔해 있는 군사의 숫자가 많다고는 하나, 평상시 병력의 2/3 정도는 둔전(屯田)에서 농사를 짓거나 공방(工房)에 편성되어 일을 하는 등 작전에는 투입되지 않고 있었다.

전투를 항시 대비하는 병력들은 주로 넓은 요동 벌판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서 있는 성채(城砦)를 중심으로 주둔해 있었고, 인구가 희박한 변경으로 가면 사실상 국경선이 없는 광활한 벌판으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몽골족이나 여진인들이 때때로 드물지 않게 말 떼를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와 인적이 드문 지역에서 겨울을 나고 가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요동의 상인들도 특별한 허가 없이 이러한 광막(廣漠)한 변경 지대를 오고 가며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이들을 따라 때때로는 범죄자들이 행정력이 닿지 않는 먼 삼림(森林)으로 숨어드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변경 지대를 군대가 오밀조밀하게 막아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線)으로 된 국경이 있는 것은 명과 대한제국의 경계를 짓는 산해관(山海關)의 수십 리도 안 되는 좁은 길목뿐이었고, 거기서부터 북쪽으로는 초원과 숲이 계속되는 땅이었다.

때문에 요동은 사실상 도로를 따라 서 있는 고을들을 중심으로 통치될 수밖에 없었고, 대략적인 국경의 범위는 있었지만 확정된 선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그러한 상황이 요동의 정세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1512년, 소흥 8년의 봄이 왔을 때 이들은 이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개원의 날씨는 청명했다. 구름 한 점 떠다니지 않는 봄날이었다.

지난겨울의 추위가 상당히 혹독했기에 봄이 왔을 때 이곳 개원의 2천 군민(郡民)들과 제1기병대와 제2포병대에 소속되어 주둔하고 있는 1만4천 명 정도의 병졸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그저 추위가 물러감을 기뻐하는 개원의 주민들과 다르게 북방의 유목민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특히 몽골 초원에서는 극심한 추위로 인해 가축들이 떼 지어 죽음을 맞이하고, 봄이 왔을 때는 먹을 것 하나 구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재앙이었다.

몽골의 유목민들이 서로 충돌할 조짐을 보이자 북원(北元)의 다얀 칸은 굶주린 도적떼가 된 자신의 백성들을 모아서 남쪽으로 향했다.

몽골 초원의 게르[天幕]들이 걷어졌고, 유랑 떼 같은 대칸의 병졸들이 요동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 놈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늦봄의 좋은 날씨에 멀리까지 말을 달려 보름에 걸쳐 순찰을 다녀온 요동군 제1기병대 부위(副尉) 주청렬(周淸烈)이 보고를 했을 때, 기병대장 정령(正領) 도형흠(都炯欽)은 사실 그렇게 귀 기울여 듣고 있지 않았다.

“오랑캐들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이던가. 봄이 됐으니 어디론가 말 떼라도 몰아가려나 보지.”

도형흠이 말하는 오랑캐란, 다름 아닌 몽골의 일파인 우량하이(Uriankhai, 兀良哈)였다. 원나라가 중원에서 쫓겨나, 몽골 초원으로 다시 들어가 북원(北元)으로 불리기 시작한 뒤로, 명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달단(Tatar)이라 칭하며 경시했다.

북원이 동몰골과 서몽골로 나뉘어 내홍(內訌)을 겪는 동안 명에서는 몽골의 가장 동쪽, 요동의 바로 북쪽에 자리 잡은 몽골 일파인 우량하이 부(部)를 단속해 여기에 복여위(福余衛), 타안위(朶顔衛), 태녕위(泰寧衛)의 우량하이 3위[兀良哈三衛]를 설치 해 간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명나라보다는 몽골 내륙의 세력이 강성해지면 여기에 복종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다.

이들은 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으며 때때로는 심심찮게 요동으로 약탈을 내려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요동에 대한제국군이 진주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요동의 통치권이 명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오자 명이 우량하이 부족을 통솔하기 위해 세웠던 세 개의 위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권력 공백이 온 사이 몽골을 일통(一統)한 북원의 다얀 칸(Dayan Khan, 大元汗)이 이 우량하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이었다.

다얀 칸의 지배 후에 우량하이는 조금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요동 북방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는 했다.

우량하이라는 말에서, 조선인들이 야만족을 칭하는 오랑캐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그 사실을 반증해 줄 정도다.

조선인들은 여진족들을 야인(野人)이라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지만 근래에 퍼져 있는 야만(野蠻)의 대명사는 다름 아닌 이 우량하이, 즉 오랑캐였다.

요동을 중심으로 오랑캐라는 말은 처음에는 우량하이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점점 그들이 여기기에 야만적이라고 여기는 종족에 붙여지게 되었고, 본토로도 퍼져 나가 주변의 이적(夷狄)들을 오랑캐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기 개원에서 오랑캐란 다름 아닌 몽골의 우량하이였다.

그리고 개원의 주둔군들은 우량하이에 대한 동태를 관측하기를 항상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여진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곳에서는 몽골족이 주된 경계 상대였고, 개원에서 방비해야 할 이들은 바로 다름 아닌 우량하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동몽(東蒙)에서 많은 부족이 떼 지어 나온 듯싶습니다. 보통 평소에 보이던 숫자에 비해 그 수가 몇 배로 늘어나 있습니다. 지난겨울 추위가 혹독해 저희에게 식량을 구걸해 갈 정도였으니, 그 사이 숫자가 자연스레 늘기는 커녕 오히려 죽어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봄이 되자마자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주청렬 부위가 조목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그제야 도형흠 정령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주청렬의 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 봤을 때 상황이 심상치 않기는 했다.

“숫자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던가?”

“깊숙이 들어가 볼 수는 없어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얼핏 보아도 늘 보이던 숫자의 몇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숫자가 이곳의 10리 바깥까지 출몰하고 있습니다. 보통 봄이 되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 아니라 북쪽이나 서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숫자를 늘려 남쪽을 향해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징조가 좋지 않습니다.”

도형흠 정령은 턱 아래의 짧게 돋아난 수염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약간 보신주의의 기질이 있는 도형흠은 자신이 이곳의 기병대장으로 머무는 동안 큰 일이 없기를 매일같이 산신(山神)에게 치성 드리며 기원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욕심을 부린다거나 경계를 게을리한다거나 하는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흩뜨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호전(好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심상찮은 준동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모를 일이니 최대한의 방비를 해야겠다고 도형흠은 생각했다.

“우선 요양(遼陽)의 본영(本營)에 이 사실을 알리고, 요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철령의 6보병대장과 의로의 3포병대장에게도 사실을 알려 혹여 모를 일에 즉각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부탁하도록. 내 2포병대장에게는 직접 오늘 말하도록 하지. 자네가 꼭 믿을 만한 부관을 선임해서 오늘 즉시 요양으로 파발을 보내도록 하게. 그리고, 성 밖의 둔전에 나가 있는 병력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무장을 시키도록 하고, 혹시 모르니 주변 경계를 3교대로 쉬지 않고 돌리도록 하게.”

“예. 차질 없이 이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형흠의 명령에 따라 주청렬은 지체 없이 전령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고,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해 준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전투태세에 들어간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간 이러한 일에 대비해 바짝 준비해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보는 성격인 도형흠의 판단이 이번에는 그들을 살리는 데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대청하(大靑河) 물길에 면한 개원성 밖 들판에 몽골족 전사들이 한가득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금 떨어진 내륙에 노약자들을 두고서 건장한 남자들만이 말에 올라 진군해 들어왔는데, 평소의 소규모 약탈꾼들과는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그 숫자가 거의 수만에 육박했으니, 동몽골의 건장한 몽골 남자들이 거의 다 몰려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에라도 문을 열고, 길을 내어 주면 성안의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

몽골군 측에서는 위협적인 어조로 개원의 주민들을 협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통의 민초(民草)들보다는 정규 병력이 대부분인 개원의 성문은 그렇게 쉽게 열어 줄 이유가 없었다.

1만4천의 병력이 이러한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전투태세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동군 측에서는 경시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개원에는 보병 병력이 주둔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주둔 병력의 대부분인 1만 명 규모의 기병대는 사실상 숫자에서 몽골군에 비해 열세라 성 밖으로 말을 끌고 나가 돌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성 내에서 총으로 지엽적인 견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4천 명 규모의 포병대는 보다 효율적으로 성 내에서 적들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다음 달로 예정된 탄약의 공급을 받지 못한 채 전투가 시작되어 화력(火力)의 부족은 예견된 사실이었다.

그래도 믿어 볼 수 있는 것은 멀지 않은 철령에 주둔한 1만2천 명 규모의 요동군 제6보병대가 봉홧불을 보고 진군을 개시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철령의 보병대가 도착할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전망이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적들이 함부로 대청하를 건너 남쪽으로 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대청하를 건너지 못하면 요동 경내(境內)로 들어서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여기가 뚫려 대청하를 저들이 건너게 된다면 심양(瀋陽)까지는 저들을 막아 세울 병력이 별로 없다. 우리와 철령의 6보병대를 빼고는 의로에 3천 명 내외의 포병대만이 있을 뿐이니, 거의 심양까지 저들은 제멋대로 약탈하고 불태우며 행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도형흠 정령은 휘하의 장교들에게 일장연설을 하며 전의를 북돋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몽골인들의 화살이 개원의 성안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전투가 개시된 것이다.

도형흠은 허리에 차고 있던 호각(號角)으로 대응을 지시했다. 성의 총안(銃眼)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수들이 총포 사격을 개시했다.

1512년

소흥(昭興) 8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요양부(遼陽郡).

요동군의 본영(本營)은 요양부에 있었다. 요양은 원래 명의 요동도지휘사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으며, 요동 정벌 이후 1438년 이곳에 대한제국의 요동군 본영이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심요대도독이 파견되어 있었지만 심요, 즉 요동의 행정 기능이 거의 심왕가로 통폐합된 뒤로는 요동행정서가 심양에 설치됨에 따라 이곳의 행정적 중심 기능은 심양으로 모두 옮겨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양에는 요동군 본영이 자리해 군사적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심양부와 동녕부를 잇는 길목에 위치해 이른바 심양과 요양, 즉 심요(瀋遼)의 한 짝으로서 번창하고 있었다.

요동군의 본영이 이곳에 있는 탓에 요동 각지에 설치된 봉화는 이곳 요양의 근교의 대봉화대(大烽火臺)로 전달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대봉화대 바로 아래쪽에 요동군의 본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대봉화대에 연기가 다섯 개 피어올랐고, 이것은 적군과의 전투가 개시되었다는 지급(至急)의 신호였다. 순식간에 요동군 본영은 어수선해졌다.

“북변(北邊)의 개원군 쪽에서 봉화가 올라왔소. 사흘 전 전령을 통해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과를 지켜보고자 했는데, 채 며칠 지나지 않아 벌써 이런 위급 지경에 들어오게 되었소이다. 제장(諸將)은 각각 의견을 내어 보도록 하시오. 시간이 다급하니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적들이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 것이외다.”

요동군의 사령관은 육군 부장(副將) 김응로(金應露)였다.

그는 올해 나이 쉰 줄에 접어든 노련한 장수로, 젊은 시절에는 건주파견대에서 해서여진(海西女眞)을 토벌한 적도 있었다.

그의 본가는 동녕부에서 평안도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의 오래된 고려계 가문이었고, 요동이 대한제국에 편입된 뒤로는 그의 부친 또한 무관(武官)이 되어 황해도 황주의 제20진위대에서 근속했었다.

그 또한 부친을 이어 육군진무관에 입교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제5진위대, 황성부의 육군본청, 건주파견대, 요동군 제2보병대를 거쳐 산해(山海)에 제4포병대 창설에 관여한 뒤 요동군 본영으로 들어와 감사국(監査局)을 거쳐 부장으로 승진해 사령관이 되었다.

김응로는 이제 막 사령관에 취임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은 차에 중차대한 국면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철령의 제6보병대가 아마 개원을 돕기 위해 이미 출발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유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이곳 요양에 있는 제5보병대와 동녕의 제3보병대, 그리고 건주의 제2기병대 정도입니다. 의로의 제3포병대는 혹시 모를 길목을 사수해야 하므로 섣부르게 움직일 수도 없고, 산해와 금주 일대에 주둔한 병력들은 혹여 모를 명과의 충돌에 대비해 움직일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앞서 말한 요양과 동녕의 병력을 모아 북쪽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산해관을 넘어 요동으로 들어오는 요서회랑(遙西回廊)은 매우 좁은 길입니다. 산해에 주둔한 제7보병대와 제4포병대 만으로도 혹시 모를 명군을 막아 세울 수 있으므로, 금주(錦州)의 병력은 가용(可用)합니다.”

휘하 참모들의 의견은 옥신각신했다.

요동은 원래 여진 및 몽골과 접하고 있어 소규모의 토벌전은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대규모의 내습(來襲)에는 대처 경험이 없었다. 때문에 병력 운용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규범(規範)이 없었던 것이다.

김응로는 자신이 이제 판단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요동은 번영하는 지역이었다.

예전이라면 들을 비우고 청야전술을 사용했을 테지만 심양부, 요양부, 동녕부 등 인구 수만의 도시가 밀집되어 있는 요동의 중심부까지 몽골군이 내려온다면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만 했다.

심양부의 인구는 거의 35만에 가까웠으며 요양과 동녕에도 10만에 가까운 인구가 몰려 있었다. 주변 지역의 인구까지 합하면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구가 요동의 핵심부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까지 몽골군이 진격하게 된다면 요동은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만 했다.

심왕가나 요동행정서에서도 이것을 절대 반기지 않을 것이었다.

“즉각 이 사실을 심양으로 파발을 보내 행정서와 심왕 전하께도 알려 드리도록 하고, 건주부에도 파발을 보내 그곳의 파견대로 하여금 방주(坊州)까지 나아가 있도록 전갈하도록. 혹여 철령까지 무너진다면 이들이 길목을 잘 막아야 할 것이야. 이곳 요양의 5보병대장은 즉시 나와 함께 출정 준비를 하도록 하고, 동녕부의 제3보병대와 요중(遼中)의 제4기병대도 즉각 출정하도록 파발을 보내도록.”

김응로는 대응 방침을 간결하게 참모들에게 전달했다.

지휘 체계가 잘 서 있는 요동군에서는 명령이 하달된 즉시 즉각적인 수행이 뒤따라 올 수 있었다.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요양군 본영에서 각지의 주둔군으로 가는 파발이 연달아 출발하였고, 요양의 제5보병대는 출정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다음날이 밝자, 김응로는 제5보병대장인 육군 참장(參將) 이혁(李赫)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닷새간의 서두른 행군 끝에 심양의 근교를 통과해 범하(汎河)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좋지 않은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범하의 맞은편에서 패퇴하고 있는 요동군의 군병(軍兵)들이 널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도강(渡江)을 한 김응로는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팔이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는 젊은 장교가 바로 이 패잔병들을 이끌고 있었다.

바로 개원의 제1기병대에 소속되어 있던 기병대 부위(副尉) 주청렬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말해 주지 않겠는가?”

“예! 개원군의 전투에서 저희는 오랑캐들과 맞서 항전하였으나, 3일간의 공방전 중에 기병대장 도형흠 정령 및 이하 4인의 장교가 순사(殉死)하여 제가 잔존 병력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철령의 보병대가 도착해 대청하 건너편에서 사격 지원을 실시하였으나, 몽골군의 압박으로 도강하지 못하고, 개원성의 고립이 격화되어 철군(撤軍)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손실이 적은 포병대가 북산(北山)을 우회해 군민(郡民)들을 비호하여 의로(懿路) 방향으로 먼저 후퇴하였으며, 저는 남은 병력인 5천여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제6보병대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후퇴에 성공했습니다.”

“그럼 지금 몽골군은 누가 저지하고 있는가?”

“제6보병대의 이형상(李炯尙) 정령(正領)이 대청하를 몽골군이 건너지 못하도록 막아서고 있습니다.”

“대청하를 넘어서면 곧바로 철령이고, 이제 6보병대를 제외하면 적을 막아설 병력은 우리밖에 없구나. 귀관은 병력을 재정비하여 우리에게 합류해 지휘를 받도록 하게.”

“예!”

개원이 이미 몽골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김응로로서는 씁쓸한 것이었다.

절반 이상의 병력을 보존해 성공적으로 후퇴한 것은 칭찬해 마땅할 일이지만, 도형흠 등 여러 장수를 잃었다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수습한 패잔병까지 총 3만에 가까운 군세를 이끌고 김응로는 철령군(鐵嶺郡)으로 들어섰다.

이미 북쪽으로 출정해 비어 있는 제6보병대의 둔영에서 하루 숙영한 이들은 김응로의 지휘하에 북쪽으로 다시 출발했다.

제6보병대가 몽골군을 언제까지고 막아 세울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들이 괴멸적인 손실을 입기 전에 어서 도와야만 했다.

1512년

소흥(昭興) 8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영안부(永安府).

영진도독부의 수읍(首邑)이었던 영명진이 칙령에 의해 그 이름이 영안(永安)으로 고쳐지고 진(鎭)에서 부(府)로 승격한 것은 두 해 전의 일이었다.

그와 함께 그간 영길도 관찰사에게 받던 행정감독도 더 이상 받지 않고 영안부의 영진도독부 행청(行廳)에서 직접 관할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그것은 영진도독부가 그간 그만큼 성장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관할 영역이 신대륙까지로 넓어졌을 뿐 아니라 영안부, 즉 옛 영명진의 인구도 6만 명에 육박해 부(府)로 승격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영길도 함주부에 주둔한 제16진위대의 휘하 분견대로서 기능했던 영진분견대도 이와 함께 승격되어 일반 진위대와 동격인 영진파견대로 승급(昇級)되었다.

그와 함께 인원도 증가하였으나, 넓은 관할 구역을 군사적으로 포괄하기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사실상 영진파견대가 주둔하고 있는 영안부 일대를 제외하고는 이곳 병졸 출신이 압도적인 모피 사냥꾼들이 자경(自警)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영진도독부의 현실이었다.

그래도 요동으로 이어지는 백두산 북쪽 터럭을 지나는 역로(驛路)만큼은 병력을 보내 관리하게 하고 있었는데, 본토를 지나지 않고 바로 심요도독부의 관할 경내와 이어질 수 있는 지름길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관도가 지나는 곳은 백두산 북쪽의 넓은 고원지대의 수림(樹林)으로, 지형이 험난하고 사람이 정주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제국에 복속한 건주여진의 부족들이 드문드문 정착해 살고 있었고, 고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택주(澤州)라는 이름의 개척된 지 얼마 안 되는 관도상의 보(堡) 하나였다.

그래도 이 택주보가 지니는 중요성은 매우 컸는데, 이곳에서 건주여진의 도온(挑溫)과 발고강, 탈알령 등의 부족이 정기적으로 요동이나 영진의 상인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건주여진의 다섯 부족 중 오도리 부족이 목(目) 씨의 성을 받고 영안부 일대에 정착하고, 후리가이 부족은 이(李), 동(董), 민(珉), 극(克) 등의 성씨를 받아 건주부 일대에 정착하고 거의가 정착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다.

산야(山野)에 거주하는 나머지 건주여진 부족인 도온, 탈알령, 발고강은 여진족 고래의 습속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이들의 거주지를 벗어난 목단강(牧丹江) 유역의 해서여진이었다.

여진삼부 중 이미 제국에 신종하여 정착생활을 하는 건주여진과 북해(北海)의 변경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야인여진들의 사이에서 목축을 영위하는 것이 이 바로 해서여진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대한제국과 우호적인 관계와 적대적인 관계를 번갈아 가면서 가졌는데, 이들이 몽골의 다얀 칸으로부터 교묘하게 부추김을 받으면서 사단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전 해의 한파(寒波)는 몽골뿐만 아니라 해서여진에게도 끔찍한 재앙이었고, 기존의 제국 경내에 거주하는 건주여진들이 해서여진을 상대로 이를 기회로 삼아 높은 값에 곡물을 팔면서 적대감이 폭증했던 것이다.

해서여진은 크게 우라[烏拉], 후이파[輝發], 하다[哈達], 예허[葉赫]의 네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들 자신을 옛 금(金)나라의 직계 후손으로 여겼으며 스스로를 후룬[扈倫]이라 칭했다.

이들은 목축을 주업으로 삼아 제한적인 농경을 했는데, 이번의 한파로 가축이 떼죽음 당하고 곡물이 떨어지면서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던 차에 북원의 다얀 칸이 보낸 사절이 제국을 들이칠 것을 제안하니 더 고민 하지 않고 바로 네 부족이 합심해 병력을 이끌고 건주여진과 거래하던 주요 장시(場市)이자, 영진과 심양을 잇는 길목인 택주보를 친 것이다.

택주보에는 겨우 300여 명의 병력과 건주여진의 기병이 얼마간 있을 뿐이었고, 방비도 목책으로 둘러쳐져 있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성난 해서여진 전사들이 택주를 완전히 파괴하고 약탈하는 데는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이 사실은 사흘이 지난 뒤에 영안부로 전해졌는데, 봉화가 설치되지 않은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사람이 전해 주는 파발만이 유효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해서여진의 부족들이 택주를 약탈하고 역로를 파괴하여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들은 일대를 돌며 도온, 탈알령 등의 건주여진들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겨우 목숨을 건져 나온 건주여진 출신 병사의 전갈에 영안부는 혼란에 빠졌다.

영진대도독 조찬(趙讚)은 곧바로 영진파견대장 참장(參將) 오정하(吳定賀)를 비롯한 문무(文武)의 관속(官屬)을 불러 논책(論策)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논의한 내용은 바로 요동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자는 것이었다.

영진파견대의 부대가 동쪽에서, 요동군이 서쪽에서 해서여진을 들이치면 금방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곧 영길도에서 온 소식에 의해 요동군은 지금 몽골의 대군(大軍)을 막아서느라 난국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분명히 몽골과 여진 일파가 연관되어 함께 벌이는 준동이 확실합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이곳 영안부까지 야인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어서 방비태세를 갖추시고 영길도 관찰사와 함주의 진위대에 전령을 보내어 병력의 파병을 요청하십시오.”

관리들의 충언을 받아들여 대도독 조찬은 곧바로 조치를 시행하도록 했다.

영안부와 영길도의 회령을 잇는 길목에 있는 모령진(毛怜鎭)과 구산진(九山鎭)에 병력이 증파되고, 영안부 북쪽에서 해서여진들이 들어올 때를 대비해 목양진(木陽鎭)에도 병력이 보내졌다.

영안부의 방비를 대신 맡아 줄 함주의 진위대가 해로(海路)를 통해 도착하는 대로 영진파견대의 오정하 참장은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택주보로 향해 해서여진들을 소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해서여진들을 소탕할 기회를 결국에 갖지 못했다.

영안부에 함주 진위대가 도착해 택주를 향해 출발한 그는 이미 해서여진이 반대편 방면으로 넘어가 요동의 방주(坊州)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방주군에는 몽골군을 막기 위해 건주에서 전진 배치되었던 건주파견대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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