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0장 동몽광막(東蒙廣漠) (41/82)

제40장 동몽광막(東蒙廣漠)

「항가이 산맥의 초막,

낯선 적들로부터 방패(Khalkha)가 되어

네 소중한 삶을 도우리니

들어오는 자들에게는 칼날이 되고

살피는 자들에게는 갑옷이 되어

네 할하(Khalkha) 일족(一族)은 진실로 너를 돕는다.」

―《보석염주Erdeniin Erih》 中

1512년

소흥(昭興) 8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盛京) 심양부.

몽골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름 내 치열한 전투 끝에 대청하에서의 방어 작전은 성공했다.

북진을 준비하며 방주로 나가 있던 건주파견대도 다행히 해서여진의 도발을 막아 내고 대청하로 합류할 수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어 요동군은 몽골군을 밀어붙여 북쪽으로 몰아내 개원을 탈환하고, 우량하이 부(部)의 영역까지 진군해 들어갔다.

명나라가 한때 설치했던 대주소(臺州所)가 있던 곳까지 진군해 간 요동군은 그곳에서 병력을 주둔시키고 대주보(臺州堡)를 건설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몽골군의 남하만을 견제하고 있었다.

요동군이 더 이상 몽골을 공격해 들어가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북륙의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요동과 본토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심왕 진영(璡榮)과 요동군 사령관 김응로는 내각(內閣) 재상 정광필(鄭光弼)이 칙령을 받들어 보낸 칙사(勅使) 조광조(趙光祖)와 마주 앉아 있었다.

“폐하께옵서는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북진한 요동군을 다시 개원으로 물리고 몽골의 대칸과 협상하여 화의를 맺으라 하셨습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이 젊은 칙사 앞에서 진영과 김응로는 표정을 굳히고서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조광조는 성균관에서 영남학파의 선생들로부터 학문을 사사했고, 졸업 뒤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도 거치지 않고 바로 관직에 출사하여 내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황제와 재상 정광필은 조광조를 총애해 마지않았고, 이 깐깐한 도학주의자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굳은 의지로 요동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요동에서는 황성부에서 내려오는 간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젊은 관료를 칙사로 보낸 것을 모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의 의지가 아니라, 내각의 뜻이지 않겠소?”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심왕 진영이 뼈가 담긴 말을 조광조에게 던졌다.

조광조는 얼굴이 잠시 붉어졌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서는 진영에게 읍(揖)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오나 내각이 폐하의 의중을 대변하여 국정을 다루는 것은 전하의 고조부와 증조부 되시는 성명왕(成明王)과 성무왕(成武王) 두 전하께서 확립하신 제도이나이다. 그것을 들어 전하께오서 내각을 비방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듣던 대로 조 공(公)의 자존(自尊)이 하늘을 찌르는구려. 어찌 전하의 앞에서 분별없이 말하시는 게요?”

조광조의 말에 진영의 표정이 굳어지자 옆에서 김응로가 조광조를 힐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광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예전 노당과 소당으로 나뉘어 다투던 정국이 이제는 소당이 몰락하여,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동의 전역(戰役)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훈구와 사림을 막론하고 추밀원에서 내각, 그리고 황제 폐하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의사는 확고합니다. 더 이상 진군하지 말고 백성의 복리를 위해 몽골과의 화평을 하시길 바랍니다.”

조광조의 단언에 진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고조부인 서윤, 증조부인 현도, 그리고 조부인 서윤과는 다른 세대였다.

진영은 심양에서 태어나 심양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황성부에 올라가 계동의 심왕저에서 머무는 때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황성의 조정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온통 요동에 쏠려 있었다.

복잡한 제국의 정치는 진영과 맞지도 않았고, 현도와 서윤을 거치며 확립된 요동의 자치(自治)에 제도(帝都)의 조정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치하에서 요동은 갈수록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 몽골과의 전역에서도 요동군은 본토의 군부에 증원군을 한 명도 요청하지 않고 자력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성부 조정에서는 이를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요동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바라 마지않는 황성의 대신들은 불안해져 갔던 것이다.

방대한 제국의 영역 안에는 탐라국(耽羅國)같이 거의 자치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역도 있었고 영진, 진서와 같이 중앙의 행정체계를 따르지 않는 도독부들도 여럿 있었다.

거기에 상남이나 숙주, 영주 같은 해외의 영토까지 더한다면 정치 질서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황성부 조정의 의지가 쉽게 관철되었다.

지방관을 조정에서 임명할 뿐 아니라 군대의 운용도 중앙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동만큼은 달랐다. 이곳은 명목상 심요도독부가 설치되어 영진이나 진서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어야 마땅했지만, 심요도독부 자체가 심왕가의 휘하 기구인 요동행정서에 흡수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면서 심요대도독도 벌써 임명되지 않은지 서른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요동은 사실상 심왕이 통치하는 제국 내의 번국(藩國)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에 제동을 걸기 위해 몽골과의 전역을 기회로 삼아 트집을 걸고 나선 것이었다.

조광조가 요동에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런 조정의 목소리였다.

노당과 소당의 대립 구도가 여러 해 전에 소당이 거의 세력을 잃고 몰락하면서, 소당의 일부를 흡수한 노당이 훈구(勳舊) 세력으로 등장하고, 지방에서 관직에 출사한 사림(士林)들이 다시 훈구당을 견제할 사림당으로서 내각에 등장하면서, 조정은 훈구척신(勳舊戚臣)과 사림들 사이에서 분규를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말마따나 이들은 심양을 견제하자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진영의 선조인 세훈과 현도의 시절에는 사실상 심왕가가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대를 흘러내려 오면서 심왕가는 요동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했고, 제국의 권력은 여러 대신들에게로 돌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내홍(內訌)아닌 내홍(內訌)을 겪게 된 것이다.

윗대에서 탐라 거족들과 심왕가는 매우 밀접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나상(羅商)이 이제 심왕가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상단이 된 것처럼, 탐라 출신의 공신(功臣) 가문들은 탐라로 귀향하거나 황성에 남아서 명문가로 정치에 참여하며 심왕가와는 더 이상 이해를 같이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진영은 더 이상 할아버지인 서윤이 종종 그래 왔던 것처럼 나상을 이용한다던가, 혹은 탐라계 척신들을 종용해 중앙 정치에 뜻하는 바를 관철시켰던 행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세대가 달라도 너무 달라진 것이다.

그에게는 요동이 전부였고, 그것은 절대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다. 때문에 진영은 중앙 조정의 간섭에 대해 기분이 매우 상했다.

“지금 당장에 답을 주지는 못하겠네. 우선은 내 궁내(宮內)에 머물 곳을 내어 줄 터이니 그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도록 하게.”

언제 답을 따로 주겠다는 이야기도 없이 진영은 상한 기분을 조광조에게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광조는 말없이 진영이 나가는 길에 예를 표하고 설 뿐이었다.

그날 저녁, 요동행정서의 관리들과 요동군의 무관들이 모두 함께한 자리에서 진영은 언짢음을 드러냈다.

“과인이 심왕의 작을 이은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소. 선대(先代)의 대왕들께서는 감히 황조(皇朝)에 불충하지 않고, 제국의 존엄을 위해 분골쇄신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데 성(誠)을 다하셨소. 그런데 이제 아무런 공업(功業)이 없는 모리배들이 조정을 휘어잡고 내게 폐하의 조칙(詔勅)을 빙자하여 자신들에게 허리를 조아리라고 하고 있소. 내 어찌 감히 이것들을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이오?”

진영이 말하는 바는 요동의 관료들도 공히 공감하는 바였다.

이들은 이런저런 연유로 요동에서 관직을 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황성부 조정에 출사했다가 정치놀음에 질려 요동으로 옮겨 온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혈통에 따른 차별이 덜한 심양에서 기회를 얻고자 온 이들도 있었다.

요동군은 요동군대로 군기가 문란해진 본토의 진위대에 비해 기강이 선 정예의 군대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들은 군부의 명에 따라 보직을 받아 요동군에 배속되지만 한 번 배속되고 나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요동은 많은 면에서 내지 팔도(內地八道, 제국 본토를 관용적으로 일컫는 말)와는 달랐다.

명에게서 요동을 빼앗은 다음에 이곳으로 이주해 온 조선계(朝鮮係)는 물론이거니와 원나라 시절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고려계, 명이 통치하던 시절에 유입된 한인(漢人), 건주여진 출신의 여진족, 원대(元代)로부터 지금까지 흘러들어 온 몽골인을 비롯해 진서(鎭西), 유구(琉球), 동로마 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혈통이 잡거하는 땅이었다.

이들은 다소 보이지 않는 물리적인 장벽이 있을지언정 공공연한 차별을 요동에서는 당하지 않았다.

요동행정서의 관직에는 혈통을 막론하고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이들이 고루 출사해 있었고, 이들은 본질적으로 제국 본토의 권위주의적 조정하에서는 관직을 얻기는 커녕 관직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도성 안 사대 학교에 취학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을 사람들이었다.

“가히 마음이 좋지 않으나, 이번만큼은 황도(皇都)에 몸을 낮추시고 변방의 몽인(蒙人, 몽골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내어야 할 때라고 조심스럽게 전하십시오. 여기서 내각의 대신들이 바라는 대로 꼬리를 내리게 되면 앞으로 두고두고 간섭의 여지를 주게 될 것이나, 그렇다고 각을 세워 대립을 하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제제를 가하고자 달려들 것이니, 공손한 태도를 잃지 마시되 다만 원하는 바를 취하시는 것이 가장 상책(上策)입니다.”

건주여진의 후리가이[胡里改路] 출신의 이악양(李渥陽)이 진영에게 진언했다.

이악양의 조상은 바로 후리가이의 족장(族長)이었던 아하추[阿哈出]이다.

그는 본래 명으로부터 건주위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관직을 받고 이사성(李思誠)이라는 이름도 하사받았었다.

그 후 아하추는 조선에 신속해 건주현남(建州縣男)의 작위와 건주병마도절제사(建州兵馬都節制使)의 직위(職位)를 제수받게 되었다.

그 후 건주현남의 작위는 그 자손인 쉬기야누[釋加奴] 이현충(李顯忠)를 거쳐 이만주(李滿住)에게 이어졌고, 이악양은 바로 이 이만주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어립심양문리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요동행정서의 관직에 진출해 정무(政務)를 맡아 보다 지금은 광록대부(光祿大夫)의 위를 제수받고 진영의 자문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악양은 그 자신이 제국화된 여진족의 후예이니 만큼 요동의 특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요동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고 이번에도 몸은 굽히되 원하는 것은 취하라고 진영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대부가 보기에는 그것이 옳은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나이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은 아니옵지요. 때로는 몸을 굽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패물과 공물(貢物)을 모아 조광조가 돌아가는 길에 조정에 진상하시고, 저들이 황제 폐하의 이름을 빌려 비답(批答)하기를 기다리십시오. 어차피 겨울이 다가왔으니 저희가 군대를 움직이고 싶어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조정에서 정말로 저희가 군대를 북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막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간섭을 하기 위해 이런 꼬투리를 잡는 것이니, 내각 대신들의 비위만 조금 맞춰 주면 저희가 원하는 것을 쉽게 허락해 줄 것입니다.”

이악양의 말은 조리가 들어맞았다.

진영은 잠시 생각을 한 뒤에 이악양에게 말했다.

“이 대부가 조광조를 만나 한 번 상의해 보겠는가? 나는 그 꽉 막힌 올챙이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네. 어린 공명심(功名心)에 언젠가 일을 그르치고 말 사람이야.”

“전하께서 그리하시다면 제가 한 번 나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늙은이의 지혜도 종종 쓸 때가 있지요.”

다음 날, 날이 밝자 이악양은 조광조와 만나기를 청하고, 늙은이 특유의 말 돌림으로 조광조에게 뜻하는 바를 전했다.

조광조는 내심 속으로 탐탁지 않았으나, 일개 조정의 뜻을 받들어 온 객사(客使)로서 일을 질질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조정의 난국(亂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염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요동이 전역을 확대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심왕가의 통치 특히, 선대 심왕인 서윤의 정사(政事)를 올바른 정치의 표본으로 여기는 사람으로서 심왕가와 요동 특유의 기풍을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황성으로 다시 올라가시거든 굳이 우리의 입장을 강변해 주실 필요는 없소. 다만, 귀공이 여기서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전해 주기만 하면 될 일이오. 요동은 요동이올시다. 우리는 폐하의 황은(皇恩)을 입어 만민이 번창하고 있으나 팔도를 오랑캐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싸워야 하는 것이 옳소. 부디 그 점만 유념해 주시길 바라오.”

조광조는 이악양의 마지막 말에 구태여 반론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악양의 설득에 내심 마음을 굳히고 황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심양 일대를 며칠간 둘러보았다. 과연 물산이 풍족하고 인민은 번창하며 특히, 학문의 융성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조광조는 어립장서각에 들렀다가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사해(四海)의 책을 모아 깨끗하게 보존하고 학업을 닦는 이들에게 열람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심 도성의 사대 학당 중 하나인 성균관을 나와 이름이 드높다고는 하나 변방의 대학인 심양문리과대학에 대해 내심 깔보는 시선이 있던 그로서는, 이러한 학문적 기반하에 성장하고 있는 심양대학을 더 이상 낮게 평가할 수 없었다.

이악양의 말이 옳았다. 요동은 요동이었다. 부족함 없이 잘 번영하고 본토로 불어오는 외풍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요동을 정치 논리로 뒤흔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조광조는 황성부로 돌아가 내각 대신들과 추밀원에 요동의 입장을 변호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조광조의 설득이 아니라 그를 통해 요동에서 보낸 방물(方物)이었다.

본토에 지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요동군이 봄이 되면 몽골을 징벌하는 것을 내각은 허락했다.

황제는 그저 내각의 결정에 따라 도장만을 찍을 뿐이었다.

1513년

소흥(昭興) 9년 중춘(仲春)

북원(北元, 몽골) 우량하이 부(部).

당대 몽골의 대칸은 다얀 칸(Dayan Khan)이었다.

다얀은 바로 대원(大元)이라는 뜻으로, 원나라가 북쪽으로 밀려가 북원(北元)이 되고, 사실상 지금은 옛 영광이 남지 않은 지금에 다시 한 번 그 위업을 일으키고자 하는 칸 자신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었다.

선대(先代)의 만둘룬 칸(Manduulun Khan)이 죽었을 때 나중의 다얀 칸이 될 소년 바트 멍흐는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다.

대원(大元)을 세운 쿠빌라이의 자손들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바트 멍흐는 그 피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손(皇孫)이었다.

쿠빌라이의 후손만이 몽골의 대칸이 될 수 있다는 종법(宗法)은 이미 유야무야된 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트 멍흐는 유일하게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적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 친모(親母)로부터도 버림받았고, 몽골의 초원에서 천대받는 짐짝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때 이 바트 멍흐를 거두어 준 것이 전대 대칸인 만둘룬 칸의 황후(皇后)였던 만두하이였다.

만두하이는 거의 어머니같이 바트 멍흐를 돌봐 주는 한편,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 분열된 몽골인들을 다시 단합시키고자 했다.

소위 오이라트라 불리는 서몽골과 오랜 세월 반목해 온 동몽골은 만두하이 앞에서 충성을 다짐했고, 결국 바트 멍흐는 만두하이의 노력으로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칸의 이름은 다얀(Dayan)이라 했다.

다얀 칸은 많은 만두하이의 돌봄 아래에서 점차 몽골의 대칸으로서의 위엄을 갖춰 나갔다.

그가 장성해 열일곱이 되자, 마흔둘의 만두하이는 칸과 혼례를 치러 칸의 아들을 일곱이나 낳았다.

만두하이가 낳은 아이들은 단절될 뻔했던 쿠빌라이의 가계를 다시 이어 갈 동량(棟樑)이었다.

만두하이는 스물다섯 살이나 연하인 남편이자 아들과도 같은 다얀 칸을 훌륭한 대칸으로 키워 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몽골의 오이라트를 정벌해 복속시켰으며, 다른 부족들도 하나둘씩 대칸의 위엄 앞에 복종시켰다.

“바트, 꼭 대칸으로서 오랜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한 번 사해(四海)에 떨칠 수 있도록 하세요. 칭기즈칸, 쿠빌라이 대칸, 그리고 많은 조상들처럼 말입니다. 저승에서 소비(小妃)가 지켜보겠습니다.”

만두하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다얀 칸은 명나라와의 몇 차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몽골의 부족들을 정비해 소위 좌현(左舷)에는 할하 부, 차하르 부, 우량하이 부를 편속(編屬)시켰고, 우현(右舷)에는 오르도스 부, 튀메드 부, 용시예뷔 부를 편속시켰다.

그 외에도 옹그리구드, 아수드, 카르친 같은 많은 몽골 부족들이 대칸의 위엄에 복종하고 있었다.

다얀 칸은 그중 할하 부와 차하르 부를 직접 다스렸고, 우량하이 부 또한 그와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혹독한 겨울에 몽골 전체가 시름에 잠겼을 때, 이제는 마흔을 넘겨 원숙한 군주가 된 다얀 칸은 요동을 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일이 잘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몽골을 먹여 살릴 식량은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일이 잘된다면 요동을 복속시키고 대원제국의 위엄을 다시 만방에 떨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동몽골 3부, 즉 좌현의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요동을 급습했음에도 결국 대청하를 넘지 못하고 반격당해 우량하이 부 깊숙한 곳까지 쫓겨 들어오는 신세가 되었다.

요동군은 숫자로 밀어붙이는 기강이 엉망인 명나라 군대와는 전혀 질이 다른 이들이었다. 엄격한 훈련과 기율로 다져진 요동군은 비록 몇 번의 손실을 입기도 했지만 다얀 칸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얀 칸에게는 가슴 아픈 패배들이었다. 그 자신도 무릎에 총상을 입었으며 사랑하는 아들 중에서 둘을 잃었다.

“이제 어찌해야 좋겠는가?”

대흥안령(大興安嶺, Amba Hinggan)의 기슭의 초원에서 다시 겨울을 난 다얀 칸은 막하(幕下)의 제장(諸將)들을 자신의 게르[天幕]에 모아 놓고 그렇게 물었다.

“손실을 많이 입었습니다. 이제 다시 군대를 물려 초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여름을 이곳에서 나며 저들과 싸워 봐야 저희의 아들들만 수고로운 목숨을 바칠 뿐입니다.”

휘하의 만호(萬戶)들은 대체로 대칸에게 그렇게 고해 바쳤다.

그들은 천성이 전사의 핏줄이었으나, 이득 없는 싸움에 오랜 기간 골몰할 정도로 모자란 이들은 아니었다.

다얀 칸으로서도 이런 불리한 전쟁을 질질 끌어 봐야 위엄만 손상을 입을 뿐이었다.

“차라리 말 머리를 돌려 중국을 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장성(長城)만 잘 넘어선다면 비옥한 토지에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를 치자고 주장하는 만호들도 있었다.

다얀 칸은 잠시 이들을 물려 놓고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이럴 때 만두하이가 옆에 있었다면 무어라 조언을 해 주었을지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만두하이는 그만큼 칸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제는 곁에 없는 그녀의 짙은 그림자를 느끼며 다얀 칸은 밤새 고민을 거듭했다.

마유주(馬乳酒)와 건육(乾肉)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든 칸은 다시 휘하의 만호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군대를 물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다음에 어디로 향할지는 다시 몽골의 대초원에서 다시 한 해를 보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량하이의 부족장들은 불안감을 드러냈다.

대칸이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몽골 벌판으로 돌아가 버리면, 대흥안령 동쪽에서 요동과 마주하고 있는 유일한 몽골족인 우량하이들은 보복성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들만으로는 요동군을 상대해 내기 역부족이었다.

“대칸께서 이렇게 군대를 물려 보내시면, 아, 저들은 자비 없이 저희를 짓밟을 것입니다. 부디 모쪼록 저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얼마간만 더 머물러 주십시오.”

우량하이 부족장들은 다얀 칸에게 진심으로 주청하며 설득을 했고, 대칸은 마지못해 여름까지만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한 선택이었다.

늦봄이 되자 요동군이 이제 북쪽으로 몽골군을 향해 진격을 개시한 것이다.

다얀 칸이 조금 더 일찍 돌아갔더라면 아마 싸움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시기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대칸의 병졸들과 요동의 군대는 외몽골(外蒙古)로 가는 길목인 아룬(Arun)의 벌판에서 크게 붙었다. 그리고 다얀 칸은 이 전투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1513년

소흥(昭興) 9년 맹하(孟夏)

북원(北元, 몽골) 할하 부(部) 카라코룸.

개원(開原), 건주(建州), 광녕(廣寧), 요중(遼中)에서 징발된 요동군의 기병 전력은 아룬에서 대칸의 군대를 대패시킨 다음, 몽골 내지(內地)로 도망쳐 들어가는 이들을 쫓아 몽골 초원으로 깊숙이 진군해 들어갔다.

이들은 거의 사실상 요동의 기병 전력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4개의 기병대가 하나의 연대(聯隊)를 이루어 몽골 경략(經略)의 기수가 되었고, 그 지휘는 요동군 사령관인 육군 부장 김응로가 직접 맡고 있었다.

김응로는 제1기병대의 부위(副尉)로, 개원에서 패전하고 후퇴할 때 성공적으로 많은 인원을 살린 전력이 있는 주청렬(周淸烈)을 참령(參領)으로 2계급 특진시키고 자신의 부관겸 연대의 독전관(督戰官)으로 삼았다.

주청렬은 기병대에서 잔뼈가 굵은 장교였기에 김응로가 지시한 바를 정확히 기병대의 운용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각 기병대의 지휘관들을 조율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개원에서 패전한 설욕은 이미 아룬에서 적을 대파함으로서 갚을 수 있었지만, 이번 원정의 목적은 보복전을 넘어서서 다시는 요동을 넘보지 못하도록 전면적인 제압을 하려는 데에 있었다.

때문에 승전을 거두었음에도 주청렬은 부대의 독전관(督戰官)으로서 자신이 가지는 본분을 잊지 않고 기병들을 독려하고 감독하는 데에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다.

추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름께를 흥안령을 넘어 초원지대를 쫓아 들어가자 곧 북원(北元)의 수도인 카라코룸(Karakorum)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얀 칸의 군대는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진둔하고 있었는데, 옛 명성은 온데간데없고 적막한 폐허처럼 남은 카라코룸은 쓸쓸한 분위기만을 풍기고 있었다.

카라코룸은 옛 몽골제국이 강성하던 시기에 온 몽골을 통치하는 제국의 수도였다.

14세기만 해도 번창하던 이 도시는 몽골 초원에서 유일한 도시였다.

1368년에 원조(元朝)가 무너지고 대칸은 이곳 카라코룸으로 돌아와 도읍으로 삼았지만, 1388년 명나라 군대에 의해 카라코룸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1415년 도시는 복원되었고 다얀 칸은 다시 이곳을 북원의 수도로 선포했다.

다얀 칸의 의지에 의해 카라코룸의 사원(寺院)들과 궁궐이 다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옛 성벽은 허물어진 채였고, 그것은 요동군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포병(砲兵)을 동반하지 않은 강행군이었기에 기병만으로 성벽을 넘어서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결착을 보고야 말겠다.”

몽골의 중심지에서 적을 격퇴하겠다는 김응로의 의지는 굳었다.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수천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는 여전히 강성한 6만여 명의 몽골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훈련받은 3만이 넘는 요동군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벽 무렵 개시된 전투는 요동군의 공세나 다름없었다.

몽골군 진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병대를 정지시키고 일제 사격을 가하도록 한 김응로는, 적들이 접근해 오지 못하도록 사격을 중단 없이 계속하도록 지시했다.

강선의 도입과 장전 방식의 개량으로 기병대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요동식 보총(步銃)은 이 전투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몽골군은 카라코룸 근교의 언덕을 점거하고 사격을 해 오는 요동군에 의해 부지기수로 쓰러져 나갔다.

고지대에서 정지사격을 행하는 3만이 넘는 군대에게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돌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얀 칸에게는 대포도 몇 문이 있었지만, 몽골군 중에서는 이 대포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지어 화약조차도 없었다.

칭기즈칸의 시대로부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몽골군의 냉병기(冷兵器)는 열병기(熱兵器)로 공세를 퍼붓는 요동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적군의 진열이 흩어지고 기세가 주춤해지는 것을 확인한 김응로는 전 부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고,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몽골군은 붕괴되고 카라코룸은 점령되었다.

다얀 칸 자신은 어떻게든 몸을 피해 보려 했지만 결국 주청렬이 이끄는 기동대에 의해 생포되는 처지를 면할 수 없었다.

다얀 칸뿐만이 아니라 몽골 부족들을 이끄는 만호(萬戶)들도 다수가 붙잡혔고, 카라코룸의 보잘것없는 왕궁에 감금되었다.

다얀 칸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몽골을 꿈꾸던 그의 야망도 이 패배로 한풀 꺾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요동에서 몽골과 전후 처리를 위한 협상 사절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요동군은 여전히 카라코룸에서 다얀 칸을 비롯한 몽골 귀족들을 인질로 잡고 주둔하고 있었고, 강압적인 분위기가 카라코룸에 팽배해 있었다.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아든 제국 사절로는 조광조가 선임이 되어 왔고, 심양에서도 이악양을 정사(正使)로 선임해 보냈다.

다얀 칸은 몽골의 칸으로서 앞으로 대한제국의 황제와 형제의 우의를 맺을 것과 이에 따라 매년 조공을 황성부로 들려 보낼 것, 그리고 다얀 칸 자신의 아들들 중 둘을 황성으로 인질로 보내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요동에 대해서는 우량하이 부(部)를 보다 북쪽으로 철수시켜 요동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동의하고, 옛 우량하이의 태녕위(泰寧衛)가 있던 곳을 요동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우량하이는 북원에서 벗어나 앞으로 심요도독부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곳에는 여러 위소(衛所)가 설치되어 심양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었다.

다얀 칸은 광대한 몽골 제국을 다시 한 번 꿈꾸었지만 결국 그는 그 꿈을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그는 평생 다시는 요동 방향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명(明)으로 공격을 시도했고, 섬서(陝西) 일대에서 잔혹한 약탈을 행했지만, 결국 명군에게 쫓겨 다시 몽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517년, 다얀 칸은 대칸의 자리를 대한제국으로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향한 셋째 아들 바르스 볼루드(Bars Bolud)에게 물려주고 숨을 거두었다.

그 또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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