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종횡사해(縱橫四海)
「꽃은 졌다가 다시 피고, 피었다가 다시 지고, 비단 옷도 베옷으로 바꿔 입게 마련이다. 부자도 언제고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빈한(貧寒)한 이라고 언제나 적막한 것도 아니다. 사람을 밀어 올려 드높은 하늘에 올려놓을 수도 없고, 사람을 밀어뜨려 깊은 골짜기를 메울 수도 없다. 그러니 권하노니 만사에 있어 하늘을 원망하지 말라. 하늘의 뜻은 고르며 모든 사람에게 후하고 박함이 없다.」
―〈성심편(省心編)〉, 《명심보감》, 52.
1515년
소흥(昭興) 11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인도양 해역(海域) 숙주도(宿州島, 소코트라).
나상(羅商)의 서방 무역은 근래에 들어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상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인도양 항로에 수많은 공을 들여왔고, 한때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항구와 도시에 상관(商館)을 개설하고 많은 상인들을 서쪽으로 보냈었다.
당대(當代) 나상의 대행수인 조계응은 젊은 시절 부친 조첨식의 지시에 따라 서방 무역로를 알렉산드리아까지 확장하고, 중간 거점으로 소코트라를 공략해 사실상의 나상의 사유 영토로 삼기도 했었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 특히 나상의 판로(販路)는 서유럽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나상의 상인들은 기존의 대한제국에서부터 가져와 판매하던 발화기, 백자(白磁), 칠기(漆器), 청자(靑磁), 모피, 백목(白木)뿐만 아니라 중간 경유지인 남양(南洋)과 인도에서 대규모로 향신료를 사들여 이것을 매우 싼값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다.
이 거래는 쌍방이 서로 이득이었다. 이러한 물품들을 베네치아, 때로는 제노바나 카탈루냐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다음 나상은 다시 회항로(回航路)에서는 이탈리아의 유리, 인쇄기와 근동(近東)의 몰약(沒藥), 양탄자, 청동, 백옥(白玉) 따위를 가져와 대한제국을 비롯한 극동의 여러 항구에서 높은 값에 팔았다.
수십 년의 전성기 동안 나상은 인도양 무역의 정점에 있었으며, 그동안 남긴 이윤은 막대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꽃의 붉음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법이다.
아랍과 인도 상인들을 물리치고 거의 독점 무역에 가까운 대규모 무역을 행하던 나상 또한 그 적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경유해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한 것이 1498년 5월 20일의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상은 포르투갈에 대해 별다른 위협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양에 상시 투입되어 있는 교관선만 연간 50척에 달하는 나상이 보잘것없는 배 세 척을 이끌고 캘리컷에 나타난 바스코 다 가마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뒤로 더 이상 나상은 포르투갈을 경시할 수 없었다.
캘리컷은 전통적으로 나상의 인도 무역 근거지로서 이곳에서 나상은 대규모로 그곳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무슬림 상인들과 거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의 함대가 인도양에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상과 무슬림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캘리컷 무역에 불만을 품은 포르투갈은 캘리컷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코친의 지배자와 동맹 관계를 체결하고,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요새를 축조해 거점화시켰다.
이곳을 중심으로 1505년, 포르투갈은 인도총독부(印度總督府)를 설치하고 함선과 군인, 그리고 상인들을 보내 지속적으로 인도양 무역의 경략에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나상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설득해 해군을 지원받아 몇 차례 홍해(紅海)와 아라비아 만, 그리고 인도양 일대에서 해전을 벌였지만 포르투갈의 세력이 점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간 나상과 베네치아로 연결되는 동방 무역이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포르투갈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등장한 판국이 된 것이다.
포르투갈은 굳이 인도양 항로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아프리카 남단을 경유해 방해받지 않고 무역 행위를 할 수 있었고, 오히려 반대로 나상과 무슬림 상인들의 인도양 무역을 방해하고 나서고 있었다.
나상이 더 이상 포르투갈을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1507년에 아퐁수 데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가 호르무즈를 점령하고 요새화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호르무즈는 나상의 인도양 경영의 가장 요충지로, 이곳의 지배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오면서 대규모의 상관(商館)을 운영하고 있었다.
비록 예전에 비해 나상의 무역 기능은 바스라, 소코트라, 캘리컷 등의 여러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심리적인 근거지였던 호르무즈가 포르투갈의 손에 떨어진 것은 나상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게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퐁수 데 알부케르케에 대항할 인물로 나상이 선임해 보낸 것은 바로, 성득문(成得文)이었다.
그는 이제 마흔둘의 젊고 호기 넘치는 인물로, 오랜 기간 상남(湘南)의 나상 상관에서 향신료 구매를 전담해 오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소간의 함대 운용 경력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가 젊은 시절 해군(海軍)에서 위관(尉官)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나상 수뇌부에게 큰 신뢰를 주었다.
그는 신임 숙주어행수(宿州御行首)로 나상의 신임장과 황성부 조정의 임명교서(任命敎書)를 받아 숙주로 부임했다.
성득문이 숙주에 부임하자마자 추진한 것은 나상의 독자적인 해양 전력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부의 묵인하에 진서와 상남 일대에서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는 나상 역사상 처음으로 사병(私兵)을 조직해 1천 명 정도 규모의 부대를 꾸렸으며, 이들에게 보총을 쥐어 포문을 단 교관선에 탑승시켰다.
성득문은 나상의 본부로 보낸 서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병사들을 입히고 먹이는 데 달마다 대략 5천 냥 정도의 은화가 필요합니다. 이곳에서는 요동폐보다는 통보(通寶)가 널리 퍼져 있으니 전액 통보로 들어오는 선편에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병사를 조련시키고 함대 운용이 숙달이 되면 바로 호르무즈[烏連摸]로 군대를 보내 포르투갈 도적 떼[浦賊]를 격파할 생각입니다. 본격적으로 전투 준비에 들어가게 되면 보다 많은 은화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캘리컷에 있는 상관에 수만 냥 정도의 은화를 예치시켜 주시면 필요할 때에 캘리컷을 통해 받아서 긴요히 쓰겠습니다.」
그러나 1512년의 호르무즈 공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성득문은 포르투갈 주둔군이 건설하고 있던 요새를 반쯤 포격으로 허물어뜨리기는 했지만, 상륙해서 호르무즈를 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잔뜩 겁먹은 포르투갈 인들을 설득해 포르투갈의 호르무즈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그곳에 다시 나상의 상관을 열 수 있도록 협상했다.
나상과 포르투갈 사이의 대립이 잠시간의 휴지기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반목은 그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상은 다시 호르무즈에 기항하기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가 그들에게 닥쳐왔다.
바로 그간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무역로를 비호해 주었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투르크 손에 멸망하고만 것이다.
이것은 일대의 재앙이었다.
여전히 나상은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할 수는 있었지만, 베네치아에 앙심을 품은 술탄 셀림은 유럽 상인들의 항구 이용권을 막았다.
결국 나상은 거래 상대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소코트라로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나상에게는 재앙이었고, 포르투갈에는 기회였다. 오스만이 이집트를 집어삼키면서 거의 빈사 상태에 빠진 인도양―동지중해 무역로는 나상과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항로를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었고, 각종 향신료를 언제고 리스본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나상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물품을 매우 싼값에 호르무즈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은 1511년 믈라카로 들어와 믈라카 술탄국과의 싸움 끝에 믈라카항을 점령해 거점으로 삼았고, 이내 곧 명나라까지 직접 기항하게 되었다.
나상의 무역로가 조금씩 포르투갈에게 잠식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포르투갈이 점령한 믈라카는 당장에 기존의 남양 무역 거점지인 상남의 존재를 위협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나상뿐만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조정까지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1514년 제국 해군 원양 전단이 상남에서 출항하여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인도의 코친을 공격했고, 이곳을 점령한 다음에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포르투갈에게는 고아(Goa)가 있었고,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상의 수입은 격감하고 있었다. 동지중해로 가는 무역이 재개되지 않는다면 나상은 큰 손실을 계속해서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경상이나 송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상만큼은 아니더라도 인도양 무역에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었던 이들도 손해를 비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포르투갈이 향료제도 무역에 직접 뛰어들면서, 이 남양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호상마저도 손해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상인들의 손을 떠났다. 상단의 수입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관세를 물리지 못해 세금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황성부의 조정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일을 맡을 사람으로, 노련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조광조가 발탁이 되었다.
조광조는 사절단을 꾸려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해 무역로를 다시 열어 줄 것을 요청했고, 술탄은 고민 끝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를 통한 무역을 허락했다.
그러나 술탄은 여기에 매우 높은 관세를 물렸고 무역은 어렵사리 재개되었지만 예전에 비해 손실은 매우 높았고, 거기에 홍해와 아라비아 만 일대에서 훼방을 놓는 포르투갈의 함선들까지 상대해야 했다.
결국 나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상단들은 베네치아와 아라곤 왕국에 접근해서 포르투갈에 대항할 것을 부추겼다.
오스만과의 전쟁 뒤에도 동지중해 무역이 예전만큼 활황하지 못해 재정적인 곤란을 겪고 있던 이들은 나상이 제안하는 대로 새롭게 대서양을 통한 무역로를 개척하자는 데에 이끌렸다.
포르투갈의 주력 함대가 인도양으로 건너가 있는 틈을 타, 지브롤터 해협의 아프리카 쪽 해안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거점 항구 세우타를 공격해 빼앗았다.
아라곤 왕국과 베네치아가 포르투갈이나 카스티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나상 또한 기존에 확보해 둔 동아프리카 일대의 항해로와 무역 거점들을 바탕으로 직접 아프리카 우회 항로를 시도했다.
포르투갈이 선점하고 있는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기항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서해안의 카나리아(Canaria)제도를 두고 카스티야와 대립하고 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이 협상 끝에 카나리아 제도를 공동 영유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곳을 통해 아라곤과 베네치아, 그리고 제노바의 상인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1515년, 경상(京商)의 함대가 처음으로 카나리아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경상보다 늦기는 했지만 나상은 대규모 함대를 카나리아를 거쳐 세우타에 기항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일부 선박은 바르셀로나와 제노바까지 항해했다.
베네치아 상인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세우타와 카나리아를 발판으로 포르투갈과 다투며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내려간 베네치아 상인들은 상아해안의 본 디아(Bon Dia)에 거점을 마련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곳에 나상의 함대를 기항시킴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를 통하지 않고도 포르투갈과 향신료 무역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무역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상을 비롯한 제국 상인들은 이제 더 이상 인도양 무역을 독점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밀려들어 와 그 영역을 뺏어 들어갔다.
대신 제국 상인들이 택한 것은 역반격이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로 들어오는 동안 제국 상인들은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역적 동맹 관계인 아라곤, 제노바, 베네치아가 제국과 협력하에 대서양 무역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에 비해 이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예전같이 독점 무역의 전성기는 이제 옛말이 되고야 말았다.
1517년
소흥(昭興) 1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영진도독부 정동보(正東堡).
대한제국의 영주 개척지는 점차 확장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계영양행과 내상이라는 두 주도 세력에 의해서 신대륙 서해안에 여러 개의 정착지가 들어서고, 무역 거점들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피 무역과 대양 항해의 본산지나 다름없는 영주진을 제외하더라도, 초창기 정착에 위기를 겪었던 내상이 세운 정동보도 이제는 안정된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육로(陸路)의 출발점으로 내상과 유구국의 상선이 정기적으로 기항을 하고 있었다. 해상으로는 북쪽으로 영주진과 항로가 연결되어졌다.
윤희상이 몇 년 만에 이곳 정동보를 찾은 것은 지난해 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주현과 윤희상은 개척지 확립에 고난을 겪고 있던 정동보를 구제해 주었고, 그 이후로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신대륙의 정착지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명목으로 이곳을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 정동보를 중심으로 한 차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난 적이 있었고, 동쪽으로 들어가 사막 지대와 마주치기도 했다.
대단한 발견이 없는 실속 없는 원정이었지만, 일부 대원들이 사금(砂金)을 찾아냈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정동보를 떠나 남쪽으로 금을 찾으러 떠나곤 했다.
그러나 윤희상은 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탐험을 계속하는 동기는 주로 주현의 영향을 받아서였고, 주현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탐험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이번엔 남쪽으로 더 멀리 가 볼까 합니다. 원주민들의 대규모 정착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도시와 신전들이 남쪽의 대왕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곳과 무역로를 개척한다면 장기적으로 영주 일대는 좀 더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한동안 탐험을 쉬며 혼례를 치르고 대곡보에 머물며 정착지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던 윤희상이 어느 날 불쑥 주현에게 말했을 때, 주현은 가느다란 실눈을 뜨고 윤희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내가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같이 가자 소리도 하지 않고 혼자 다녀오겠다고 그러는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저 이번 탐험이 많이 고된 여정이 될지도 몰라 그렇습니다. 저희가 정동보에서 3천 리 정도 남쪽으로는 가 보았지만, 그 다음은 뭐가 기다릴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군(君)께서는 이곳 영주의 지사(知事)로 이제는 책무를 보셔야 하시니, 불초한 제가 홀로 다녀오겠습니다.”
주현은 솔직한 마음으로 윤희상에게 섭섭함이 조금 있기는 했다.
한때 이 신대륙으로 오는 항해를 할 때부터 고락(苦樂)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러나 주현은 갈수록 자신이 정체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왕성하게 추진했던 탐험들도, 이제는 의욕은 앞서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신대륙의 정착지가 성장함에 따라 그가 돌봐야 할 일들도 늘어났고, 처음에는 몇 년 정도 지난 뒤에는 그만두려고 했던 이곳의 관직(官職)도 마땅히 인계받을 사람이 없어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제는 가족들이 더 이상 주현이 먼 노정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반면에 윤희상은 아직까지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그 또한 주현과 같이 늙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기력이 있었고 여전히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그 또한 이제 결혼을 해 자녀가 있었지만, 여전히 가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태생이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는가?”
주현은 같이 따라 나서고 싶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마음을 접고 윤희상을 돕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함께할 원정대 100여 명 정도만 모아 주시고 말과 총, 곡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로 괜찮겠는가?”
“초행(初行)입니다. 다음도 있고 다다음도 있는 법이지요. 이번 행로는 가볍게 다녀올까 합니다.”
윤희상의 말에 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이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원정대에 합류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본토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농가(農家)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오지를 헤치고 다니는 일에 능숙한 모피 사냥꾼들은 남쪽으로 가는 탐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모피가 나지 않는 남쪽의 광야 지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탐사대는 대체적으로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 신출내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윤희상이 이러한 탐사대원들의 부족함을 덮을 정도로 능숙한 대장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원래 황성부 운종가에서 왈짜패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고, 영진도독부로 노역(勞役)을 와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벌목 노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는 신대륙을 오고 가는 함대에서 주현을 보좌하며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한 관록이 그의 몸에는 덕지덕지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대륙에서 윤희상의 명성은 주현의 그것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탐사대는 1416년 가을이 시작될 무렵에 정동보를 떠났다.
이곳에서 유구인 10여 인이 탐사대에 합류했다. 정동보에는 유구국을 떠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유구인들이 적지 않은 숫자가 있었고, 이들은 종종 조선인들에 비해 더 모험심이 넘쳤다.
정동보의 성채 바깥에는 휘가시우미누구스쿠(東海城, 동해성)라 불리는 유구인들의 거류지가 있었고, 이곳에 대략 200인 정도의 유구인들이 정주하고 있었다.
총 118인의 원정대는 그렇게 남쪽으로 향했다.
기나긴 행군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잘 알려진 남쪽의 해안가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은 어렵지 않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해안가로 떠밀려 왔고, 시원한 공기는 지친 몸을 달래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발한 지 20일쯤 지나 산악 지대로 접어들자 점차 대원들은 지쳐 가기 시작했다.
때때로 고원(高原)과 황량한 광야를 통과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물도 구할 수 없는 사막 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이었다.
많은 대원들이 갈증과 탈진으로 쓰러져 나갔다. 사막 지대를 통과하는 열흘 간 탐험대는 12명의 대원과 8마리의 말을 잃었다.
그중 3마리의 말은 갈증을 채우기 위한 피를 얻기 위해 죽인 것이었다.
다시 관목(灌木)이 거칠게 난 산악 지대로 접어들어 재와 계곡을 넘어가자 황량하게 끝도 모르게 뻗어 있는 고원지대가 나타났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종종 정주 형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대원들은 이러한 마을들을 통과하면서 환대받았다.
기이한 차림의 탐험대는 분명히 이들에게는 낯선 외모였지만 그들은 탐험대가 북쪽에서 내려온 신들의 사자라고 여겼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상당한 오해에서 기반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그런 기이한 복장과 외모를 지닌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탐험대는 남쪽의 거대한 제국으로 가는 길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원주민들은 탐험대를 만류하거나 혹은 독려했다.
남쪽에 자리한 아즈텍 제국은 북쪽에서 내려온 일단의 나우아틀어를 쓰는 사람들이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학살해 가며 세운 나라였다.
이들은 원래 먼 북쪽 땅의 아스틀란(Aztlan)이라 불리던 땅에 살았기에 아즈텍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쪽의 고원지대로 이주해 오면서 자신들의 수호신의 이름 중 하나인 멕시(Mexi)를 따 스스로를 멕시카(Mexica)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방랑 끝에 이들은 독수리 한 마리가 선인장 위에서 쉬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멕시카인들은 이것을 우이칠로포치틀리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고 독수리가 있던 호수의 섬들 위로 테노치티틀란(선인장이 무성한 돌 근처의 땅)이라 불리게 될 도시를 세웠다.
테노치티틀란과 호수 주변의 도시들은 정치적인 동맹 관계를 맺은 다음, 주변의 토착 문명과 민족들을 탄압하고, 때로는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쳤다.
아즈텍은 상당히 많은 양의 공물을 속국(屬國)들에게 요구했고, 탐험대가 지나친 아즈텍 북쪽의 많은 촌락들은 정기적으로 아즈텍 전사들의 약탈 대상이 되곤 했다.
때문에 토착민들은 탐험대들을 걱정해 만류하기도 했지만, 어떤 이들은 혹시나 이들이 정말로 신의 사자라면 아즈텍을 막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을마다 탐험대를 말리거나 독려해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행군하게 하거나 제각각이었다.
탐험대는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원주민들의 말을 신뢰하고 발걸음을 멈출 이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대는 나우아틀어에 능통하면서 조선어를 배울 의지가 있는 신분 높은 원주민 하나를 동행시킬 수 있었다.
통역까지 구한 탐험대는 보총(步銃)과 말로 무장하고 있었고, 사실상 거칠 것이 없이 남쪽으로 행군해 들어갔다.
“지치지 말고 행군하도록 해라. 곧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열릴 것이다.”
윤희상은 대원들을 독려해 가며 행군을 계속했다.
멕시카(Mexica)의 고원지대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고, 대원들은 행군 중에 지친 땀을 식혀 가며 몸을 돌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었을 무렵, 그들은 거대한 문명과 마주하게 되었다.
“도로가 있습니다. 이쪽을 따라가면 저들의 수도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대원들이 아즈텍 제국의 북쪽 변방에 있는 도시 옥스트릴파(Oxtlilpa)에 다다랐을 때, 이들은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정비된 도로와 마주쳤다.
탐험대가 나타나자 옥스트릴파의 지배자는 깜짝 놀라 이들을 마주하러 나왔고, 그는 고집스런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지만 아즈텍의 관도를 이용해 제국의 수도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몇 명의 재규어 전사들을 이들의 곁에 붙여 감시하는 한편 길을 안내하도록 도와주었고, 다행히도 거친 저항에 처하지 않고 제국의 수도로 향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말과 총을 처음 보았고 그것을 신기(神器)라고 여겼기에 함부로 아즈텍의 잔혹한 재규어 전사나, 독수리 전사들로 하여금 이들을 공격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즈텍 제국은 내부로부터 허물어져 가고 있는 단계였다. 지나친 영역의 확장과 속국들에 대한 핍박은 내부적인 긴장 상태를 높은 수준으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낮선 외부인과의 부적절한 충돌은 아즈텍 제국의 어떤 귀족들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탐험대는 안내를 받아 남쪽으로 향했다.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길들은 상인들이 고용한 짐꾼들이 때때로 담요나 깃털, 구슬, 염료, 금, 목면, 옥수수와 카카오 콩 등을 머리 위에 이고 제국의 수도로 갈 때 이용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상인들은 국경 밖으로 나설 때는 때때로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제국의 경내(境內)에서는 이러한 무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저들이 교역하는 물품들을 보니, 제국의 수도로 가면 큰 시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의 지배자와 이야기가 잘된다면 영주와 이곳을 잇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행하고 있던 계영양행 상인의 말에 윤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그러한 무역으로 얻어지는 이윤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동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금과 보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득을 취하고 싶어 하는 대원들의 마음까지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그는 최대한 이들을 위해 제국의 지배자와 협상하여 이들이 교역권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었다.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은 다시 엿새가 걸렸다.
계곡 사이에 있는 거대한 호숫가에 도달했을 때, 이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거대한 호수 위로는 수많은 보트들이 떠 있었고, 호숫가에는 장대한 도시들이 기슭마다 펼쳐져 있었다.
텍스코코호(湖)의 호안에는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텍스코코(Texcoco), 틀라코판(Tlacopan)같은 커다란 도시들이 있었다.
아즈텍 제국 자체는 이 텍스코코호를 둘러싸고 세워진 이들 세 도시의 동맹 형태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테노치티틀란이 가장 강성했고, 그리고 그 테노치티틀란의 지배자가 사실상의 제국의 황제로 대우받고 있었다.
바로 몬테수마(Montezuma)였다.
탐험대는 텍스코코에서 이곳의 왕(Tlatoani, 틀라토아니)인 카카마친(Cacamatzin)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카카오 음료를 맛볼 수 있었다. 이 강렬한 맛을 많은 대원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윤희상은 이 카카오를 좋아했다.
그 음료는 머리를 맑아지게 해 주고, 몸을 건강하게 해 준다고 윤희상은 생각했다. 많은 아즈텍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 카카오 콩의 씨앗을 얻어 낼 수는 없었는데, 그만큼 귀중한 작물로서 귀하게 재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그 씨앗을 이방인에게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윤희상은 텍스코코의 왕으로부터 테노치티틀란으로 건너갈 수 있는 카누를 제공받을 수 있었고, 대원들은 다음 날 안개가 자욱한 텍스코코 호수를 건너갈 수 있었다.
텍스코코 호수의 맞은편에는 십수 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도시 테노치티틀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도시의 윤곽이 드러날 때, 윤희상을 비롯한 대원들은 아무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주술(呪術)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물 위로 수많은 건물들과 사원들이 떠 있었고, 거대한 탑과 피라미드가 안개 너머에서 고요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새벽녘의 테노치티틀란은 그야말로 신비함의 극치였다. 대원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보는 광경이 꿈이 아닌가 되묻기도 했다.
그것은 어떠한 말로도 자신 있게 묘사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텍스코코의 호수물이 도시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져 있는 네사하울코요틀(Nezahaulcoyotl) 제방을 지나 배가 테노치티틀란을 둘러싼 내호(內湖)로 들어서자, 이내 도시의 풍경이 눈앞에 훤히 드러났다.
그것은 그들이 제국의 본토를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온 뒤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빚어낸 또 다른 마법과도 같은 문명이었다.
“높은 곳에서 오신 사절들을 영접합니다.”
테노치티틀란에 카누들이 도달하고 그곳에서 대원들이 내리자 기괴한 깃털과 장신구들로 온몸을 치장한 늙은 노인이 수백의 전사들을 대동하고 대원들을 맞이하고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신관은 탐험대를 곧바로 위대한 군주 몬테수마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몬테수마는 이 북쪽에서 온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 옛 전설 속의 신 케찰코아틀과 그의 종복(從僕)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탐험대를 영접했던 텍스코코의 카카마친은 이들이 신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원정대에게 내어 준 카누에 함께 탑승시킨 신관을 통해 전달했다.
몬테수마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이들이 정말 신이라면 그는 발 벗고 나아가 엎드려서 수많은 심장들을 그 자리에서 내어 바칠 것이다.
그러나 반대라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몬테수마는 정말로 새로운 경쟁자가 멕시카 고원에 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이 낯선 이방인들을 신들에게 제물로 바칠 의지가 있었다.
몬테수마는 그래서 이방인들이 테노치티틀란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바로 총애하는 신관들을 불러모았다.
상형문자로 쓰인 역서(易書)를 들고 몬테수마의 앞으로 나아간 신관들은 점복(占卜)을 보고서는 몬테수마에게 은밀히 아뢰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신들께서 드시는 음식은 다릅니다. 저희가 신들에게 사람의 심장을 도려 바치는 것은 신들께서 그것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맞이하실 때 저들에게 사람의 음식인 옥수수와 칠면조, 그리고 토르티야와 함께, 신들이 즐기시는 사람의 피에 적신 토르티야를 함께 내어 주십시오. 저들이 옥수수와 칠면조를 택한다면, 저들은 사람임에 틀림없고, 피에 적신 토르티야를 선택한다면 저들은 신인(神人)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혹여 사람의 음식을 택한다 하더라도, 점괘에 따라 이것은 길(吉)한 일임에 틀림없으니, 잡아 죽여 신들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천둥을 불러일으키는 막대기를 들고 신들이 기르는 짐승 위에 올랐으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관들이 이방인들을 인신공양에 바치자고 권하지 않은 것은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나왔다면 결국에 탐험대와 몬테수마는 유혈 충동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테수마에게는 아쉽게 되었지만, 탐험대는 당연히 사람의 피에 적신 토르티야를 보고 질겁했다.
이들은 오로지 칠면조에만 손을 댔다. 옥수수와 그것을 빻아 만든 토르티야조차도 탐험대에게는 낯선 음식이었다.
육류가 부족했기에 칠면조는 환영을 받았고, 이 기괴한 만찬을 지켜본 몬테수마는 그제야 탐험대의 앞에 나타났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이들인가?”
이제 탐험대가 신이 아님을 확신한 몬테수마는 한껏 편해진 표정으로 탐험대에게 물었다.
“우리는 아스틀란에서 왔소.”
아직까지 조선어가 충분하지 못한 통역은, 북쪽에서 왔다는 윤희상의 말을 옛 아즈텍, 즉 멕시카 인들의 고향땅이자 신들의 땅으로 여겨지는 아스틀란으로 옮겼다.
전승에 따르면 아스틀란은 먼 북쪽에 있었으므로 이것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몬테수마에게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우리 조상들은 아스틀란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온 사람들이네. 그대들이 왜 다시 아스틀란의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온 것인지 말해 보게.”
이번에도 나우아틀어를 조선으로 전달하기에는 통역의 입이 짧았다.
대한제국 황제의 우호와 신의를 바라며 몬테수마가 조공을 바치게 되면 황제께서 기뻐할 것이라는 윤희상의 말을 통역을 통해 잘못 전달되었다.
“먼 곳에까지 이름난 테노치티틀란의 군주 몬테수마에게 아스틀란에서 공물과 패물을 바치려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신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통역이 불충분하긴 했지만 적어도 상호간의 감정이 상하지 않고 우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오해가 작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몬테수마는 아스틀란에서 왔다는 사절들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사방에 선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윤희상은 윤희상 대로 앞으로 이곳에 드나들며 교역을 수행할 수 있을 뿐더러, 대한제국의 위엄도 전달했다는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는 틀어질 오해였으나 적어도 노골적인 상호간의 속셈이 고스란히 드러나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는 것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총탄에 테노치티틀란 시민들이 도륙당하거나 혹은 반대로 조선인들이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제물이 되거나 사이의 어떤 중간 지점에서 밋밋한 조우가 실현된 것이었다.
윤희상과 탐험대는 몬테수마의 대접을 받으며 보름 가까이를 테노치티틀란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 의식에 초대되어 끔찍한 인신공양 의식을 목도해야 했다.
이것은 윤희상을 비롯한 탐원대원들에게는 매우 비위 상하는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야만적인 의식의 순간을 제외하면 테노치티틀란에 머문 나날들은 신기하고 진귀한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중앙부에 들어서 있는 높은 대신전 아래로 펼쳐진 광대한 도시와 시장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북적였고, 텍스코코 호수에는 수많은 배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비누나무의 열매로 몸을 깨끗이 닦는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은 조선인들이 보기에도 깔끔했고, 구세계의 대도시에서는 만성적인 오물로 인한 악취도 테노치티틀란에는 없었다.
건물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드넓게 조영되어 있었고, 오물들은 텍스코코의 호수에 버려지거나, 혹은 도시 밖의 옥수수 밭에서 거름으로 쓰이는 탓에 도심지 자체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보름을 머문 뒤에 그들은 테노치티틀란의 장려한 둑길 너머에 있는 거대한 시장이 스는 도시 틀라텔로코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멕시카 고원지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상업도시였고, 매일같이 거의 6천 명에 달하는 상인들이 이곳에서 상행위를 하고 있었다.
일찍이 멕시카 고원지대에는 화폐가 없어 카카오 씨, 금가루, 작은 구리도끼, 혹은 옥수수 등으로 물물교환을 행했다.
그러나 화폐경제가 없음에도 이곳은 거대한 규모의 상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것은 외국으로 나가 상업 활동을 하는 것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도 매우 놀라울 정도의 규모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부 탐험대원들이 이곳에서 무역을 행할 경우에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 계산해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백 명 남짓한 인원으로는 이 제국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잔혹한 인신공양의 의식을 목도한 뒤로는 이들과 대립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다만, 이 아즈텍 제국과 교역을 하게 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는 거의가 희망적이었는데, 빠르고 쉬운 약취(掠取)보다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거래를 선호한 데에는 탐험대의 수뇌부가 상인 출신이었다는 영향도 컸다.
윤희상 자신은 상인으로서의 삶을 산 적이 없었지만, 그 또한 계영양행에서 받은 지원을 바탕으로 주현과 함께 신대륙에 들어올 수 있었고, 그와 대동한 상인, 지도 제작자, 부관(副官) 등은 모두 계영양행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탐험대와 아즈텍이 첫 만남에서 평화적인 관계로 교역을 타진한 것은 매우 희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아즈텍 제국에게는 이 조선인들과 조우하게 된 것이 호재(好材)와 악재(惡材)를 동시에 만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재는 바로 몇 년 뒤에 닥쳐올 카스티야인들에 대한 대응이 좀 더 현실적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이고, 악재는 바로 조선인들과의 접촉으로 아즈텍 제국 전체에 퍼지게 될 천연두를 비롯한 구세계의 질병들이었다.
1519년 맹동(孟冬)
아즈텍 제국 테노치티틀란.
그해 겨울, 아즈텍 제국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름 내내 천연두가 기승을 부렸고, 구대륙에서 건너온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아즈텍인들은 이 정체 모를 질병에 하나둘 쓰러져 갔다.
이들에게 닥친 것은 천연두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접하는 각종 질병이 몇 년째 아즈텍 제국 전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테노치티틀란으로 걷혀 오는 공물의 양이 급감한 것을 황제 몬테수마 2세가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아즈텍 제국의 경내(境內)에서만 인구의 1/3이 5년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테노치티틀란의 전사들은 몬테수마의 명령에 의해 속령(屬領)들로 잔혹한 인간 사냥을 나섰고, 신들의 노여움으로 닥친 질병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 포로로 잡아온 이들을 수없이 제물로 바쳤다.
그야말로 광기의 시대였다.
질병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즈텍 제국에 위협이 되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은 작년에 닥쳐온 기근으로 옥수수의 작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변경 지역에서 출몰하는 이방인들이 급증한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조선인들이, 동쪽에서는 카스티야인들이 드물지 않게 목격되었다.
조선인들은 그 수가 적었고, 이미 몬테수마 2세는 이들에게 아즈텍 중심부에서 상거래를 할 권리는 주지 않았지만, 북쪽의 변경 도시에서 아즈텍의 상인들과 평화적인 거래를 하는 것은 허락했다.
때때로 드물게 몇몇 조선인들은 테노치티틀란으로 들어와 몬테수마를 만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매우 국한된 경우였다.
카스티야인들은 달랐다.
이 스페인 사람들은 매우 드센 정복자들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북부 고원지대인 엑스트라마두라(Extremadura)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만성적인 가난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었다.
소위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 정복자)라 불린 이들은 지휘관들은 대체적으로 엑스트라마두라의 가난한 소귀족(小貴族) 출신이 많았고, 휘하의 병졸들은 이 지역의 빈곤한 자유민이나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고향 땅을 떠나 일확천금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올랐고, 때문에 정복과 그 부산물인 황금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대서양을 건너온 카스티야의 정복자들이 아즈텍 제국의 변경 지대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몇 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었다.
지금은 쇠락한 마야인들의 땅인 유카탄 일대에는 카스티야 정복자들이 이미 몇 해 전부터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1517년에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탐험대가 유카탄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이러한 소문은 몬테수마의 귀에도 들어가 있었다.
문제는 1519년이었다. 이미 윤희상이 이끄는 조선인 탐험대가 1517년에 몬테수마를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북쪽이 아닌 동쪽에서 질적으로 다른 정복자들이 아즈텍 제국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다른 콘키스타도르들과 마찬가지로 엑스트라마두라의 소읍(小邑) 출신의 가난한 귀족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가 바로 그 우두머리였다.
그는 황금이 풍부하다는 아즈텍 제국에 관한 소문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
그는 무려 대원이 600명에 이르고 총과 말은 물론 대포까지 대동해 유카탄 반도에 상륙했다.
이곳의 마야인 귀족들은 코르테스 군대에게 압도되어 자발적으로 코르테스에게 여인 몇 명을 선물로 바쳤다.
그중에 한 여인이 나중에 카스티야어로 도냐 마리나, 혹은 라 말린체(La Malinche)로 알려지게 되는 말린친(Malintzin)이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아즈텍에서 쓰는 나우아틀어와 유카탄 일대에서 쓰는 마야어에 모두 능통했다. 그녀는 곧 코르테스의 애첩이 되었고, 카스티야어도 익히기 시작했다.
코르테스는 유카탄 일대의 마야 도시들을 돌며 정복 활동을 펼쳤고, 대서양에 면한 곳에 베라 크루스(Vera Cruz)라는 마을을 세우고 한동안 주둔해 있었다.
어느 정도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코르테스는 동쪽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몬테수마가 보낸 사신들과 조우했다.
사신들은 아스텍 신들의 의상을 가지고 코르테스 앞에 나아갔고, 코르테스에게 케찰코아틀의 의상을 입혔다.
케찰코아틀 신의 예언은 오랜 세월 아즈텍인의 신앙심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케찰코아틀은 날개 달린 뱀의 형상을 한 신이었다.
뱀은 땅의 권력을 뜻하고, 날개는 하늘의 권위를 나타냈다. 마르고 건조하며 따뜻한 남성의 힘을 상징하는 하늘과 축축하고 습하며 차가운 여성의 힘을 상징하는 대지를 이어 주는 상징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케찰코아틀은 멕시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 예를 들자면 옥수수를 경작하는 법이나 베를 짜는 법, 그리고 역법(曆法)을 가르친 신이었다.
그는 풍요와 평화의 신이었고, 전쟁의 신 테스카트리포카의 음모로 인해 먼 나라로 쫓겨났지만, 그는 돌아오리라 예언을 했으며, 아즈텍 사람들은 곧 그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몬테수마 황제를 비롯한 일부 아즈텍인들은 윤희상이 이끄는 조선인 탐험대가 찾아왔을 때도 이들이 케찰코아틀이 아닌가 의심하기는 했지만, 코르테스가 찾아왔을 때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예언에서 케찰코아틀이 돌아오리라 말한 때가 거의 다가와 있었고, 더군다나 6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사들을 이끌고 대포를 쏘아대는 코르테스의 위엄이 기이할 정도였다.
아즈텍인들은 총과 말을 이미 조선인들을 통해 접해 보았지만,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신들의 땅인 아스틀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는 판국이었다.
카스티야 정복자들의 기이할 정도로 흰 피부와 총마저 압도하는 대포의 위용은 아즈텍인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다.
갑작스레 만연한 질병에 지쳐 있던 아즈텍인들은 전염병이 전쟁의 신 테스카트리포카(Tezcatlipoca)가 내린 재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드물지 않게 아즈텍 일대에 출몰하게 된 조선인들이 옮겨 온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해안가의 유럽인들로부터 퍼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즈텍인들은 테스카트리포카의 저주와 같은 역병을 끝내기 위해서는 케찰코아틀이 돌아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때마침 코르테스가 도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몬테수마의 의심이 발목을 잡았다.
몬테수마는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으로 오기 전에 텍스코코로 사람을 보내 그곳에서 조선인들에게 썼던 음식물을 이용한 판별 방법으로 코르테스를 시험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카스티야인들은 사람 피를 묻힌 토르티야를 보고 기겁했다.
몬테수마의 의심은 짙어졌다. 그는 조선인의 전례를 따라 이들을 우선 테노치티틀란으로 불러 보려 했으나, 그전에 수상쩍은 동태를 감지한 코르테스가 텍스코코의 지배자와 귀족들을 인질로 사로잡고 그 도시를 점령했다.
놀란 몬테수마 황제가 황급히 마법사들과 재규어 전사들을 보내 코르테스를 제압하려 했으나 성과는 좋지 않았다.
이들은 총포에 손쉽게 학살당했고, 코르테스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이었다.
코르테스 군대는 시시각각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했다. 몬테수마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과 대립하고 있던 틀락스칼라를 먼저 공격해 이들을 제압한 다음, 동맹군으로 삼았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단순한 논리 아래 틀락스칼라는 코르테스 군대에 협력했고, 원주민 군사들을 포함해 세를 불린 코르테스는 점차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아즈텍의 신성한 성소였던 촐룰라에서는 대량의 원주민을 학살했으며, 결국 테노치티틀란으로 진입해 몬테수마 2세를 포로로 잡고 지배권을 강탈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코르테스와 대립하고 있던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코르테스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베라 크루스에 상륙시켰고, 코르테스는 부관인 페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테노치티틀란을 맡겨 두고, 이 벨라스케스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에게 맡겨 보낸 진압군을 공격하러 길을 나섰다.
이때가 아즈텍의 마지막 기회였다.
코르테스의 주력군이 나르바에스의 진압군과 싸우고 있는 동안, 의심 많고 잔혹한 성격의 알바라도가 아즈텍 귀족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지레짐작하고 이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었다.
때문에 테노치티틀란에 남아 있던 소수의 카스티야 군대는 곧 강력한 저항에 마주치게 되었다.
1520년 7월 30일, 훗날 ‘슬픔의 밤’으로 알려지게 되는 그날에 카스티야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아즈텍 전사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몬테수마는 바로 틀라텔로코의 시장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들은 50여 명의 조선인 자원자로 구성된 용병들과 함께 총과 말을 몬테수마에게 건네주었다.
영주의 조선인들은 카스티야인들을 신대륙 경영의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다.
테노치티틀란이 잠시 코르테스에게 점령되었을 때 아즈텍에 체류하던 조선인들은 바로 그 소식을 북쪽으로 보냈고, 윤희상의 주도하에 아즈텍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즈텍에게 상황이 조금 유리하게 호전되어 몬테수마가 조선인들에게 접촉해 오자마자 윤희상의 지시하에 조선인 상인들이 무기를 매각하고 소규모의 용병까지 알선했던 것이다.
몬테수마에게는 새롭게 얻은 조선인 용병과 총, 말뿐만 아니라 슬픔의 밤에 카스티야 군인들이 내버리고 간 칼과 갑옷, 그리고 말들도 있었다.
부족하나마 코르테스의 군대에 저항할 만한 무기를 갖춘 아즈텍인들은 이듬해에 개시된 코르테스의 테노치티틀란 공세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그대들의 공헌에 고맙소. 앞으로 내 제국 안을 자유롭게 다니며 상업에 종사해도 좋소.”
몬테수마는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구조받은데 대해 진심으로 조선인들에게 고마워했다.
이들은 아즈텍의 전사 상인 계급에만 주어졌던 광범위한 특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어떤 경우에도 인신공양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보장까지 받았다.
코르테스는 결국 아즈텍과의 전투를 포기했지만 완전히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베라 크루스를 중심으로 멕시코 해안 지대에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시켰고, 고원지대로 들어오는 입구에 해당하는 코아테펙(Coatepec)까지 군대를 주둔시켜 카스티야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불완전한 정복이었지만 코르테스는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의 정치적 모략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거기에 새로운 멕시코(Mexico)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생전의 오랜 기간 동안 멕시코 해안지대와 마야의 정복을 통해 얻은 유카탄 반도를 지배했고, 아즈텍 제국과의 분란의 씨앗을 남겼다.
아즈텍 제국은 살아남게 되었지만 북쪽의 대한제국과 동쪽의 카스티야 왕국 식민지에 둘러싸여 어려운 생존을 도모해야 하게 되었다.
데 베가(de Vega)신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스테카(Azteca)는 스페인 사람들의 우레 같은 총탄으로부터 살아남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러운 시대의 종말이면서 고통스러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들은 닥쳐오는 수십 년 동안 그들이 지녀 왔던 모든 관습과 전통을 버려야 했다. 동쪽에서 들이닥친 카스티야 왕국의 정복자들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했고, 북쪽에서 내려온 코레아(Corea)인들은 노골적이진 않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아스테카의 정치에 개입하고 경제를 잠식했다. 더 이상 여기에 신대륙적인 것은 없었다. 생존을 위해 그들을 괴롭게 했던 인신공양 같은 전통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즐겁게 해 주었던 많은 전통들도 내다 버려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었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고통스러운 산고(産苦)일 따름이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