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현유출사(賢儒出仕)
「○내각(內閣)에서 각도 관찰사와 황성부 부윤(開城府府尹)에게 전지하기를,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 등이 외딴 곳에 모여 살면서 농업(農業)을 하지 않고 오로지 유기(柳器)나 피물(皮物) 등으로 생업(生業)을 삼고 있으므로, 일찍이 백정(白丁)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고 전지(田地)를 주어서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게 한 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지금 들으니, 관리와 인민들이 신백정(新白丁)이라고 부르면서 평민들과 비교하여 차별을 두며, 그곳 수령들이 사냥 등 여러 가지 일에 부리고, 유기(柳器)를 공공연히 거두어 가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시키는 잡역(雜役)의 상황을 갖추 기록하여 계문(啓聞)하라.”고 하였다.
○內閣令各道觀察使及皇城府府尹:
才人禾尺等屯聚幽居, 不事農業, 專以柳器皮物資生, 故曾改稱白丁給土田, 與平民雜處, 相爲婚姻之法, 載在《六典》. 今聞官吏人民等因以新白丁爲號, 視與平民區別, 所在官守令役於田獵等雜事, 以至柳器, 公然收斂者, 或有之. 其具雜役之狀以聞.」
―《경종실록(景宗實錄)》, 26권,
소흥(昭興) 13년(1517) 4월 6일 네 번째 기사
1516년
소흥(昭興) 12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평안도 영변부(寧邊府) 약산(藥山).
영변부는 예전 무산(撫山), 연산(延山)으로 불리던 땅으로 관서(關西)에서 제일가는 산성(山城)으로 유명한 땅이다.
철옹성(鐵甕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영변부성은 험준한 산세를 타고 축조되어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
50여 년 전 가경(嘉慶) 연간에 기존에 있던 무산부와 연산부를 합쳐 영변부를 설치하고, 그 관부(官府)를 명산인 약산 아래에 두었다.
비록 관가와 성읍은 약산 아래에 있지만 약산의 산등성이도 돈대(墩臺)와 성곽이 둘러치고 있었는데, 혹여 전란이 일어난다면 부사(府使) 이하 관리들이 이곳으로 이전하여 항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허나 평소의 약산은 그저 기암(奇巖)들 사이로 난 좁고 아름다운 길들을 따라 고찰(古刹)들이 있는 조용한 산이었고, 봄이면 그 유명한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변부중의 젊은 서생들이 진달래꽃을 구경하고자 봄나들이 하는 것 외에는 고승(高僧)의 염불 외는 소리만이 늘 약산의 한적한 계곡 사이로 들려올 뿐이었다.
진달래의 철도 이제 지나가, 장마 구름이 밀려올 때가 되어 갓과 도포를 단정히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약산을 오르고 있었다.
인적 없는 산길을 타고 온 당나귀를 벗 삼아 오르고 있는 이 남자는, 바로 조정의 대관(大官)인 조광조였다.
이제 겨우 서른 줄의 이 젊은 관리는 패기 좋은 걸음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내각에서 훈구당(勳舊黨)을 견제하기 위해 바빠야 할 이 사림당(士林黨)의 촉망받는 재사(才士)가 이 먼 영변 땅까지 걸음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의 목적지는 이 약산의 풍광 좋은 곳에 자리한 한 암자(庵子)였다.
요학재(樂學齋)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상 방 두 칸짜리의 초막(草幕)이었다.
그곳에 조광조가 만나고자 하는 이가 살고 있었다.
“거사(居士)님께서는 계십니까? 일전 서찰을 드린 조가입니다. 답신이 없으셔서 부득불 황성에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조광조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초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살펴보다, 당나귀를 소나무 아래에 매어 놓고서는 싸락담장도 없는 초막 마루까지 다가가 안을 향해 외쳤다.
대답은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바람 소리만 초막 아래 약산의 높은 절벽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로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도 알 수 없으니, 집에 없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조광조는 신음을 삼켰다.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종래 몇 번이나 한 번 만나 보고 조정으로 출사할 것을 요청하고자 장문의 서찰을 보냈었다.
그러나 답장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이렇게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약산까지 찾아와서도 만나기가 좀체 쉽지 않았다.
“안 계십니까?”
조광조는 혹여나 싶어 집 안을 향해 다시 물었지만, 대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시진가량을 그 집 마루에 앉아 기다리던 조광조는, 결국 약산부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로 마음먹고 몸을 일으켰다.
“내 집에 앉아 있는 선비는 뉘시오?”
몸을 일으켜 나서려던 조광조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화들짝 돌려 보니, 나무를 잔뜩 짊어진 풍채 좋은 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
치렁치렁한 백발의 상투는 관(冠) 없이 무명으로 질끈 동여맸고, 앞섶은 풀어 헤쳐져 있는 것이 영락없는 산골의 노부(老父)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전에 서찰을 보내 뵙기를 여쭈었던 황성의 조가라 하옵니다.”
조광조가 예를 차려 노인에게 읍했다.
“답이 없으면 그런 줄 알지 무어라고 이곳까지 또 먼 걸음을 하셨소? 나는 산을 내려갈 생각이 없소.”
노인은 멀리서 찾아온 손을 내치지도 않았지만, 그다지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짊어지고 있던 나무를 마당에 내려놓고서는, 소매춤으로 땀을 닦으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하오나…….”
조광조는 여지를 두지 않는 노인의 말에 말끝을 흐렸다.
노인은 원체 조정과는 거리를 두고 조용히 은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 학문의 명성이 팔도에 자자했음에도 제자 하나 두지 않았다.
그가 쓴 책들은 드문드문 잊을 만하면 찍혀 나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곤 했지만, 그 학문적 기량에도 불구하고 어느 학당에서도 강의를 맡지 않았다.
그야말로 산중처사(山中處士)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멀리서 온 손님을 내칠 수는 없고, 이제 곧 해도 저물 터이니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고 가시오. 대접할 것은 없소만, 담궈 둔 술이라면 조금 있소이다. 나물 안주라도 괜찮다면, 약반(藥飯) 한술에 술 한잔하시겠소?”
노인은 조광조에게 조정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고, 약주나 한잔할 것을 권했다.
조광조는 더 이상 분위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방이라 봐야 두 칸짜리 초막이니, 두 사람은 한 칸에서 같이 잠을 청해야 했다.
한쪽 방은 일종의 서책을 쌓아 둔 서고(書庫)였고, 노인이 직접 만든 책장에 빈틈없이 책이 놓여 있는 방이라 도무지 자리를 깔 수 없었다.
노인이 간단히 내어 온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으니, 조광조는 어째서 노인이 산을 내려갈 생각이 없는지 왠지 알 것 같았다.
사방의 산은 고요하고, 바람은 잔잔해서 여름 매미 소리만 어디선가 멀리 들려올 뿐인데, 호롱불 아래의 방 안은 저녁이라 선선하고 약주 한 잔에 밤이 깊어 가니 이 늙은 처사에게 더 필요할 것은 없을 듯싶었다.
속세의 먼지 구덩이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이리 고고히 살며 명예를 탐하지 않는 선비의 모습에 조광조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은 명리를 탐하지는 않았으나 뜻한 바를 정사(政事)에 두어 구중궁궐의 조정에서 몸을 더럽히고 있으니, 이 뜻 높고 기개 있는 늙은 처사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 노인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그와 사림들에게는 이 늙은 노인의 힘이 꼭 필요했다. 노인은 다름 아닌, 그 학문의 명성이 자자한 임승준(林勝俊)이었다.
그는 본래 진서 출신으로, 부친은 진서인 출신의 진서군 장교였다.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일찍 얻을 수 있어, 승준은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에 일찌감치 심양으로 건너가 그곳의 어립대학에서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그 후 그는 한동안 정치에도 뜻을 두었으나, 당시 한명회가 이끄는 패당의 부끄러움을 보고서는 출사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나라에 명성이 자자한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해 그 유일한 제자가 되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매월당이 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 머물렀던 그는, 매월당이 타계하자 그가 일러 둔 대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임승준은 젊은 시절 각지를 유랑하며 학문을 갈고닦았고, 그 범위도 한정되지 않아 유학뿐만 아니라 어학(語學), 법학(法學), 산학(算學)에도 두루 능통했으나,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와 친분을 맺은 서학영이 여러 차례 조정에 출사를 권했으나, 그 말을 듣고는 옛 고사대로 물로 귀를 씻으며 듣지 못한 것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매월당 아래에 있을 때는 사미계를 받고 불문에 귀의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고인으로, 당대 사림당의 정신적 종주로 아직 그 유명이 자자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에는, 다시 상투를 틀기는 했으나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하기만 할 뿐 정사에 관한 논의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고음제해(古音諸解)》라는 네 권의 책을 펴냈는데, 여기서도 정사에 관해서는 일절 논하지 않고 그저 한어(漢語)의 상고음을 재구하는 것에 관해서만 썼다.
지금의 음운이 있기 이전에는 당음(唐音)과 오음(吳音)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한나라 때에 각지의 방언을 모아 펴낸 《방언(方言)》이 있으며, 그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음(牙音)이 있어 옛 시경(詩經)을 읽는 음이 있으니, 언어는 시대에 따라 자연히 변천한다는 것이 그 책의 요지였다.
때문에 요즘의 음운으로 읽으면 자연히 옛글의 풍미가 살지 않고, 그 뜻 또한 명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 임승준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옛 고음들을 재구해서 수록했는데, 그 발음은 훈민정음으로 가려 적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내 명나라에도 그 책이 전해져 두루 읽히게 되었는데, 종래에는 제국 내의 여러 학부에서도 그의 주장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얻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임승준은 조정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주 거취를 영변의 약산으로 옮겨 이곳에 은거하면서 다른 책들을 써 내기 시작했다.
나이 쉰둘에 써낸 《대국방략(大國方略)》에서 그는 처음으로 정치를 논하기 시작했고, 작금의 정세를 비판하고 진정으로 사방에 그 위엄이 서는 천자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신료들에게 위임된 황제의 대권(大權)을 일부라도 다시 봉환(奉還)해야 하며, 북륙인이니, 내지인이니, 진서인이니 신민 간에 서로 종류를 나누는 일을 금해야 하며, 신분 또한 철폐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이 핏줄이 아니라 개인의 품성에 맞게 나누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조정에서는 당연히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권력을 잡은 훈구당을 비롯하여 사림당 또한 그의 주장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신분제의 토대 위에 서 있을 뿐더러 바로 황제의 대권을 위임받아 나라를 농단하는 이들로 지목된 것이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민간의 대부(大夫)의 품계 없는 선비들이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하는 처사들, 그리고 글줄 배운 상인이나 호농(豪農)들은 임승준의 주장에 환호했다.
이들은 세훈과 현도의 시절에는 정권의 가장 충실한 옹호자들이었으나, 이미 수십 년이 흘러 그간 조정의 내각과 추밀원이 패당이 나뉘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이들이었다.
지난 십수 년간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같은 경쟁자가 등장하며 무역 수입은 저조하기 시작했고, 그간 팽창 정책으로 얻었던 부 또한 그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통치 계층이 독점하게 되자 백성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승준은 그의 책이 화제에 오르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말을 아낀 채 은둔을 계속했다.
특히 훈구당에서 이 책을 몰수하고, 임승준을 잡아다가 함부로 정사를 논한 죄로 벌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로는 더욱더 그랬다.
그가 김종직의 문인(門人)이었던 덕에 사림당에서 비호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조정으로 압송되어 재판에 세워졌을 터였다.
그 뒤로 다시 십여 년이 지났다. 이제 임승준의 나이는 막 환갑을 넘어섰고, 그는 지금의 생활에 안분지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정국은 변해서, 조정은 개혁을 원하는 사림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었고, 그 일선에 선 조광조는 기존의 온건적인 개혁 정책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수행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임승준을 어떻게든 조정으로 끌고 나와 그 개혁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약산까지 온 것, 임승준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선생님.”
한동안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조광조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이 보잘것없는 노인이 무슨 선생이라 불린단 말이오. 그냥 노옹(老翁)이라 부르면 족할 것을.”
“어찌 뜻이 높으신 분을 그리 공대하지 않겠습니까. 불초함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내려와서 나라를 위해 정무에 힘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일없소.”
임승준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지금 조정은 난국에 빠져 옛 벌족(閥族)의 무리들인 훈구당이 내각과 추밀원을 장악하고 정사를 농단하고 있습니다. 부패의 악취가 코를 찌르고, 지방의 관직은 금 수천 냥에 매관매직(賣官賣職)되고 있으며, 군역(軍役)은 엉망이 되어 세금을 내지 못한 장정들만이 끌려가 진위대에서 낡은 옷을 입고 농사를 짓다 오니 그 꼴이 말이 아닙니다. 국가의 외정(外政) 또한 엉망이라 진서와 영진, 그리고 요동 북륙이 제각기 따로 놀고, 상남에는 해적(海賊)들까지 등장했으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심왕(瀋王)만이 백성을 돌보고 있으나, 그는 요동 밖으로는 뜻이 없고, 황제 폐하께서는 구중궁궐에서 훈구척족들에 둘러싸여 언사를 거둥하지 못하시니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백년대계도 더 이상 없나이다.”
“내가 내려간다 해도 그것을 뜯어 고칠 수 없소. 나는 본래 본도(本道, 진서, 영진 등 국외 영토에 비교해 옛 조선 팔도를 은유적으로 이르는 말) 출신도 아닐 뿐더러, 그저 일개 진서 무부(武夫)의 자식으로, 학문 또한 황성의 사대학당에서 하지 않았고 심양의 대학을 거쳐 산중의 스승들에게 배웠으니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만 해도 황망한 일이오. 내 핏줄을 멸시하고 학문에 트집 잡을 이들이 많으니, 조정에 들어가도 들어줄 이 없소. 지금 조 공께서는 내 도움을 원하나 조정에서는 원하지 않을 터이니, 내가 조 공을 도와도 정국을 바꿀 수 없소. 나 같은 늙고 이름 없는 처사보다는 명문대족 출신의 늙고 노회한 여우들을 구슬려 조금씩 고쳐 나가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오.”
임승준이 여전히 내려가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조광조는 더 이상의 설득이 의미 없다고 느끼고 행장을 풀어 서간 하나를 내밀었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칙서입니다.”
조광조의 말에 임승준은 깜짝 놀랐다.
그는 칙서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보았다. 정말로 황제의 문장인 이화문(李花紋)으로 선명하게 봉인된 칙서임에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광조를 통해 몰래 내려진 밀서(密書)였다.
임승준은 그 칙서를 우습게 여길 수 없었다.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황제의 칙서를 깨끗한 상 위에 올려 두고서는, 황궁이 있는 남쪽을 향해 구배(九拜)를 올렸다.
조광조는 말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황제를 몰래 찾아가 그 뜻을 피력하고 이 조용한 정변(政變)을 준비한 것이 과연 효과가 있었다. 임승준은 그 뜻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었다.
예를 다한 뒤에 칙서를 조심스레 열어 본 임승준은 과연, 조광조가 짐작한 대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내 내일 아침에 뜻을 조 공에게 알리리다. 오늘은 그만 밤이 늦었으니 잠을 청하는 것이 좋겠소.”
바로 확답을 내려 주지는 않았지만 조광조는 내일이면 임승준이 결국 마음을 굳히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과연 다음 날이 되자 임승준은 의관을 정제하고 조광조보다 일찍 일어나 산을 내려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조광조는 어제 매어 둔 당나귀에 임승준의 짐도 나눠 싣고서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임승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운(風雲)의 정국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516년
소흥(昭興) 12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
임승준이 황제의 밀명을 받은 조광조의 부름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조정에 출사한 그때, 내각(內閣)은 두 개의 큰 당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이른바 훈구당(勳舊黨)이라 불리는 척신(戚臣)들의 당파였고, 다른 하나는 사림당(士林黨)이라 불리는 신진 대부(大夫)들이 주축이 된 당파였다.
지난 시기, 가경 연간에 유능했던 재상 현도가 퇴진한 이후 조정이 사분오열되어 노당(老黨)과 소당(少黨)으로 대립하던 시기,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노당을 공격하던 한명회를 주축으로 한 소당이 도덕적인 명분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한명회 사후 이내 소당은 와해되고 말았었다.
그러나 찢겨 나간 소당을 흡수한 노당은 하나의 거대한 훈구척신들의 이익 집단이 되었고, 이런 사이로 김종직과 그 제자 김굉필로부터 이어지는 영남학파(嶺南學派) 출신의 지방 선비들, 소위 사림(士林)으로 불리는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노당과 소당의 대립으로 이어지던 여러 해간의 정국 운영은 이제 노당척신들의 독주 시기를 거쳐 이제 훈구당과 사림당의 알력 다툼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비록 사림이 성균관, 학습원, 경애학사 등의 주요 학당과 지방의 상학을 통해서 어렵게나마 관직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지만, 문어발처럼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훈구당과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세훈이 반정을 통해 이제 막 세워진 나라인 조선을 장악하고, 그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황제는 거의 실권을 잃고 지금은 내각이 부는 나팔에 따라 춤추는 명목상의 주권자나 다름없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 이 제도는 황제의 전횡을 막고, 유능한 관료들이 나라를 통치함에 따라 적절한 성과를 내었지만, 거의 백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소위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나눠 먹고 나라를 좀먹는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내각과 추밀원을 견제할 기관이 없었던 것이다.
훈구당의 척신들의 핏줄은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일부는 신라(新羅), 고려(高麗) 때 호족(豪族)들의 후손이오, 적어도 세훈의 반정 당시 훈공(勳功)을 쌓은 탐라계 귀족들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한 세기 가까이 이들이 짜 놓은 판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은 없었다. 심지어 이들이 노당과 소당으로 나누어 싸울 때에도, 출신 성분으로만 본다면 소당의 인물들 또한 노당과 대동소이했다.
다만 권력 장악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노당에 대항해 전복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은 애초에 이른바 경화거족(京華巨族, 서울을 중심으로 한 벌족을 일컬음)인 이들 훈구척신들과는 그 배경 자체가 달랐고, 지방의 유지(有志)가 그 근간이었다.
이들 사림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지방 사대부들은 전통적으로 주자학, 즉 도학(道學)을 받아들였고 세훈이 섭정공으로 있던 시기에 추진한 노비 혁파에 대해 반발하고 충청도에서는 변란까지 일으킬 정도로 반개혁,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격물학으로 대표되는 신학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발했던 이들이었으며,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상황도 달라졌다.
한때는 개혁을 추진했던 조정의 신료들은 권력을 거의 세습해 가면서 체제의 유지에만 골몰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뒤늦게 신학문을 포섭하고 자기 정체성을 수정하기 시작한 사림들이 개혁의 선구자들로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성리학과 격물학을 비롯한 새로운 학문들의 접목을 시도한 김종직 이후, 이들은 지방 상학을 근거로 관직으로 사람을 내보는 일에 골몰했다.
김굉필(金宏弼)이 그 문을 열었고, 그 뒤로 많은 젊은 학자들이 조정에 들어가 관직에 출사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직전제자로서 이러한 사림 출신의 젊은 관료들을 대표하는 이였고, 훈구파를 척결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사림 중에는 오래된 공신이 없었기 때문에 공훈을 세워 작위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추밀원에는 사림의 의견을 대표해 줄 사람이 없었고, 각부의 대신(大臣)이 되어야 입회할 수 있는 내각(內閣)에도 사림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 이 제도가 생길 때에는 추밀원과 내각이 서로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었지만, 차츰 추밀원의 의원들이 내각 대신을 겸작(兼爵)하는 등 사실상 이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몇 명의 훈구척신들이 정사를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급 관리들을 중심으로 점차 목소리가 높아지는 사림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조광조에게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이라는 한직을 주어 내각에 들어오는 것은 용납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황실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가 가진 정치적 권한이 대단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훈구당의 척신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궁내부대신이라는 자리는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자리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황제의 권한이 많은 부분에서 제약되어 있는 정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아무런 정치적 이득이 없는 권리일 수 있었다. 그리고 훈구척신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날개를 잃었어도 황제는 황제였다. 세훈의 시대도 아니고, 그 아들 현도의 시대도 아니라, 그저 훈구척신들이 날뛰는 이 시대에 명분은 황제에게 있었다.
조광조는 그것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된 계기는 역설적으로 그가 북륙의 요동을 다녀오면서 부터였다.
그동안 사실상 정치적 명분을 독점하고 있었던 심왕가(瀋王家)가 내지의 문제에는 거의 방관하다시피 하면서, 요동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조광조는 확인했다.
지금의 질서를 만들어 낸 세훈과 그것을 강화시킨 현도의 후손들은 이제 전연 제국의 중앙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정치를 농단하는 훈구척신들의 조상들은 모두 심왕과와 어떤 형태로든 연관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의 그 후손들은 심왕가와는 전혀 연이 없었다.
결론은 이들에게는 정사를 독점할 어떠한 명분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왕가가 요동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황성과 제국의 정치적 대의(大義)는 황제에게 있었다.
조광조는 그것을 일찌감치 파악했고, 궁내부대신이 되자마자 새롭게 황제의 위에 오른 젊고 야욕이 넘치는 새 황제 이면(李勉)과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저들은 이른바 공훈(功勳)을 세운 조상의 음덕(陰德)을 먹고 있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관직을 세습(世襲)해 가며 나라를 농단하는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예전 성명왕(成明王, 세훈)과 성무왕(成武王, 현도)이 조정에 입시하여 재상(宰相)으로서 국사를 일괄하던 때에는 비록 도의에는 벗어났으나 의기만은 가상했습니다. 그러나 심왕가는 이후 대대로 그 본분을 알고 압록강 밖에서 그 할 일을 다 할 뿐인데, 오히려 그 위세를 등에 업고 국정에 참여했던 자들의 자손들은 정사를 제멋대로 독점하고 위로는 황상 폐하를 겁박할 뿐더러, 아래로는 백성을 억압하고 있나이다.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태사(太社), 태묘(太廟)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사를 주관하지 않기에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이 늘 사냥이나 주색뿐이었던 황제는 이내 조광조와 가지는 시간을 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금상(今上) 이면은 본디 성정이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서책(書冊)을 가까이하고 이치(理致)를 기꺼워하는 왕재(王才)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덕목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도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저 소일 삼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조광조와 독대해서 국사를 논하는 것뿐이었다.
“과연 조 대신의 말이 옳소. 그러나 짐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짐에게는 나를 비호해 줄 총포(銃砲)도 없고, 나를 위해 글을 써 줄 붓과 먹도 없소. 짐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도장 찍을 옥새(玉璽)와 아이를 만들어 줄 후비(后妃)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날 감시하는 환관(宦官)들 뿐이오. 이리 적적한 짐을 찾아와 위로해 주는 것도 조 공뿐이구려.”
처음에는 그저 재미 삼아 하던 조광조와의 만남이었으나 황제 이면은 어느새 점차 조광조의 말에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광조가 주도하던 황제와의 만남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황제가 조광조를 움직이게 되었다.
임승준을 조정으로 불러들이고자 뜻한 것도 사실은 조광조가 아니라 황제 자신이었다.
오히려 임승준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던 조광조를 설득하고, 그를 통해 사림을 움직이게 한 것도 황제였다.
황제 이면은 우연찮게 임승준이 쓴 《대국방략(大國方略)》을 통해, 그의 황권을 옹호하는 사상에 깊은 호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무턱대고 황제의 권한을 우기는 것이 아니라, 논리가 정연하게 황제가 실권을 지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쓴 책이었다.
그것은 바로 황제 이면 자신이 늘 갈구했던 논리였다.
사실 조광조와 황제는 동상이몽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조광조를 통해 황권을 강화시킬 수단을 얻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조광조는 황권을 강화시켜 주려는 것이 아니라, 황제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훈구파를 척결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목적이 맞았고, 조광조는 황제가 바라는 임승준을 기용하는 일에 찬성하고 나섰다.
임승준의 생각은 이 둘과도 조금 달랐다.
임승준은 내각과 추밀원을 혁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이들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본질적으로 전제황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군신공치(君臣共治)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훈구당에 대한 생각에서는 조광조와 그 견해를 달리했으니, 그는 역시 내각과 추밀원 안에서도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 어느 한쪽 파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옳지 않고, 훈구가 승하면 사림이 이를 견제하고, 사림이 승하면 훈구가 이를 견제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보았다.
국정에서도 중용(中庸)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적어도 조광조가 대표하는 사림당과 임승준, 그리고 황제의 목표는 일치했다.
경직되고 부패한 지금의 정치를 대대적으로 뜯어 고치는 개혁이 필요하단 점이었다.
“짐은 임승준을 내부대신(內部大臣)에 보임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기존의 관료 기용 제도를 무시하고, 전례 없이 내각회의에 등장한 황제는 훈구당의 내각 대신들에게 임승준의 등용을 종용했다.
당연히 훈구당의 척신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폐하. 중차대한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일개 백면서생을 갑작스레 앉히는 것은 좋지 않은 전례를 남길 수 있는 일입니다.”
사림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전대 재상 정광필(鄭光弼)에 비해, 그 뒤를 이어 재상에 오른 남곤(南袞)은 사사건건 사림당을 제약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연히 황제의 권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부(內部)는 조광조에게 준 궁내부(宮內部)의 대신 자리와 다르게 국정의 핵심에 있는 기관이었다.
남곤 자신은 한때 사림의 거두인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기는 했으나, 지금은 훈구파의 거두로서 그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폐하. 내각의 관선(官選)은 대대로 고유의 권한으로, 이에 관해서는 추밀원과 협의하여 폐하의 재가를 받는 일이나이다. 앞선 절차를 밟지 않고 칙령만으로 각료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홍경주(洪景舟)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 사림에 대해 껄끄러워해 마지않던 그였는데, 더군다나 황제까지 나서서 임승준을 갑자기 자신의 자리에 앉히려 하니 당연히 마뜩찮아 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내부대신의 진언이 가당하옵니다. 법례(法例)를 무시하고 함부로 인사를 논할 수 없사오니, 폐하께서 이를 양해하여 주시옵소서.”
제주 양씨로, 예전 세훈과 함께 정권에 들어온 양은계의 증손자인 양의현(梁宜賢)이 가장 강경하게 황제를 압박해 들어왔다.
양의현은 살아 있는 훈구파의 신화와 같은 인물로, 양은계로부터 내려오는 남양후(南洋侯)의 작위를 습작하여 추밀원의 참의(參議)직을 맡고 있을 뿐더러, 동시에 군부대신(軍部大臣)이기도 했다.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자이니 만큼 어떤 면에서는 재상보다 그 위세가 등등했다.
조상인 양은계부터가 세훈의 휘하에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며 군문에서 출세한 인물이니 만큼, 그 자손들 또한 군문에서 명성이 높았고, 으레 때가 되면 군부대신의 직위를 거쳐 가곤 했던 것이다.
적어도 군부에서 양씨의 입김을 거스를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쟁쟁한 대신들이 앞다투어 반발하고 나서자 황제도 더 이상 임승준의 등용을 내각을 통해 적법한 방식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황제들은 내각의 기세에 억눌려 이렇게 우회적으로 국정에 개입하는 것 또한 꺼려 했다. 현 황제 이면은 눌려만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때문에 황권을 부분적으로나마 회복하고자 늘 기회를 보아 왔었다.
임승준의 등용을 계기 삼아 내각을 제압해 보고자 했으나 그 간보기가 실패한 것은 자명해 보였다. 내각의 태도는 완강했다.
“조 공도 보았겠지만, 황제를 업신여기는 저들의 태도는 방자하기가 그지없소. 내가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이제 그대가 나서 주어야겠소. 내각대신 중 하나가 대부(大夫)들의 작위를 승작(陞爵, 작위를 올리는 일)하는 것에 대해 건의할 수 있으니, 그대의 스승 김굉필을 승작할 것을 내게 주청하여 올리시오. 내 김굉필을 들어다가 먼저 추밀원에 앉혀야겠소.”
황제는 이제 직접적인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각의 훈구당 대신들의 완강한 반발을 직접 겪고 나서는 기존의 법례 안에서 판을 다시 짜야겠다고 여겼던 것이다.
저들이 법례를 들어 자신을 압박해 온다면 자신도 법례를 통해 응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종직에 이어 사림을 성장시켜 조정에 진출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운 김굉필이었지만, 그는 정세에 염증을 느끼고 지금은 가문의 종가가 있는 황해도 서흥(瑞興)에 내려가 후학을 기르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종래의 공적을 인정받아 서흥현남(瑞興縣男)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미 귀족인 그의 승작에 관해서는 내각의 대신들 중 아무라도 황제에게 건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추밀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방법이 제한되어 있는 내각이 추밀원의 귀족들을 회유할 수단으로 만들어 낸 제도였지만, 황제는 지금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현남(縣男)의 작위는 오등작(五等爵)의 말단으로, 추밀원에 의원이 될 수는 있었지만 의결권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것을 승작시킨다면 추밀원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것도 가능했고, 그를 통해 임승준을 내각에 들여보내도록 압박하는 것도 가능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임승준은 함께 동문수학했었고, 연배도 비슷해 친교가 있으며, 서로 공감하는 바가 크므로 김굉필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면 그것이 곧 임승준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이 황제의 생각이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뜸 들일 필요도 없소. 지금 이곳에서 당장 상주문을 쓰도록 하시오. 짐이 당장 옥새를 찍을 터이니.”
황제는 성성한 눈빛으로 조광조에게 말했다.
잠시 황제의 눈빛에 위압감을 느낀 조광조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서는 환관이 내어 준 지필묵 위에 상주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제는 옥새를 찍어 이것을 내각과 추밀원에 공시하고, 방문을 써 황성부중에 붙여 버렸다. 채 반나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각 대신들이 사실을 알기도 전에 황해도 서흥으로 김굉필을 불러들이는 칙령을 받든 파발이 돈의문(敦義門) 밖으로 달려 나갔고, 훈구파 척신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쯤에는 이미 김굉필이 두 단계 승작하여 서흥백(瑞興伯)에 봉해졌다는 사실이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황상께서 드디어 국정을 이간하려 마음을 잡수신 듯싶소. 나라의 기강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외다.”
훈구당의 거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상 남곤은 씁쓸한 신음을 삼켰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들이 엄정한 국법을 들어 황제를 압박했으니, 반대로 황제가 국법으로 자신들을 압박해 오는 것에 대해 반발할 근거가 없었다.
애초에 원인을 따지자면, 유화책으로 조광조를 궁내부대신에 앉힌 것부터가 문제였다.
조광조는 사림에 유화적이었던 전대 재상인 정광필에 의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남곤은 재상이 되자마자 조광조를 밀어내려 했지만 명분이 마땅치 않아 가만 내버려둔 차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화근의 싹이 되어 자신을 압박해 오게 된 것이다.
“김굉필이 추밀원에 들어온다면 백작의 작위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그 학명이 자자하니 참의(參議)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소. 재상을 가려 뽑을 때 추밀원의 의원들이 모두 뜻을 모아야 하는 것과 달리, 대신은 열두 명의 참의들만이 앉아서 인선(人選)하여 주청하게 되는 것이니, 김굉필이 추밀원에서 사람들을 움직인다면 결국에는 임승준이 내각에 들어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오.”
훈구척신의 당수(黨首)들 중 하나인 심정(沈貞)이 우려를 나타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정확히 황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심정을 비롯한 훈구척신들은 그것을 결사적으로 저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어차피 내부대신의 자리가 비어야, 내각에서 추천하는 인물의 명부를 만들어 추밀원에 보낼 수 있고, 추밀원에서는 참의들이 이들 중에서 사람을 정해 황제 폐하께 재결을 보내는 것이니, 내각에서 내부대신인 홍경주 공을 감싸서 그 흠결을 잡지 못하게 하여 자리를 보존한다면 내부대신의 자리를 바꾸자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공부대신 김전(金詮)의 말에 좌중의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어차피 법례에 따라 싸우는 판이라면,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유리했다.
지금의 제도는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권을 황권의 우위에 두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추밀원과 내각이 거의 훈구당에 장악되어 함께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더더구나 그랬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추밀원이 힘을 쓸 일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더욱 좋았다.
추밀원은 그 본질상 귀족의 작위를 받거나 훈공(勳功)을 세운 이들만이 그 의원이 될 자격이 있었고, 때문에 작위를 세습해 물려받은 훈구파의 명사들이 그 자리에 많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관직 생활을 하지 않고 작위에 따르는 봉록만으로 생활을 하지만, 추밀원에 의원으로서 표결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이들은 그다지 황성부에 근거를 두고 정계를 좌우하는 훈구당에 대해 딱히 편이 되어 준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이를테면 예전 반정에서 공을 세운 조사의의 후손인 조직(趙稙) 같은 이가 그랬다. 그는 영흥공(永興公)의 작위를 물려받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봉지(封地)가 있는 식읍(食邑) 영흥에서 기거하며 중앙정치와는 연을 끊고 있었다.
그러나 영흥공 조직은 때때로 중요한 의결이 있으면 황성부로 입조하여 입바른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 명망이 있어 추밀원에 의석이 있는 그와 같은 재향(在鄕) 귀족들이 그를 좇아 의견을 구하곤 했다.
만약에라도, 김굉필이 추밀원에서 황제의 의중에 따라 영흥공 조직 같은 이를 포섭한다면 훈구당은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와 사림의 뜻대로 순순히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너무 걱정들 않는 것이 좋겠소. 유념만 해 두십시다.”
남곤은 껄껄 웃었다.
훈구당은 내각의 자리를 더 이상 사림에 내어 줄 생각이 없었고, 그 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김굉필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추밀원에 들어선 뒤에도 내각에서는 인선을 뽑아 올리지 않았고, 내부대신을 맡고 있는 홍경주의 덕망을 칭찬하는 상소만 주구장창 올려댔다.
내부대신의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은데 사람을 인선해 올리라고 압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승준은 여전히 황성부로 올라와서도 황성부 도위(都尉)라는 한직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황성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말직(末職)에 보임된 것이다. 그나마도 그가 감독해야 할 포도청(捕盜廳)은 훈구파의 입김이 닿는 곳이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임승준은 놀고 있지 않았다. 이왕 출사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때를 기다리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는 포도청을 끈질 나게 출입하며 그곳 포도관들과 안면을 트고, 여전히 근절되지 않은 황성부 안의 왈패들을 소탕하는 일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제대로 정비가 되고 있지 않은 황성부 내의 포석(鋪石) 도로들을 정비하는 데에 간여할 뿐더러, 왈패들이 끼어들어 패악질을 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시전의 영업을 보호해 주는 데에도 신경 썼다.
황성부윤(皇城府尹)이 손댈 의지가 없었던 일을 직접 개입해 황성부의 생활 환경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은 황성부 부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이 임승준이라 알려지면서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황성순보(皇城旬報)〉와 같은 신보(新報)에서도 임승준에 대해 칭송하는 기사를 실어 황성부중에서 넓게 회람되었으니, 그 위명이 석 달이 되지 않아 황성부는 물론이거니와 팔도 전체에 자자하게 되었다.
황성부 부민들이 이름을 내어 임승준을 황성부윤으로 임명해 달라고 상소할 정도였으니, 그 이름난 것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승준이 그런 업적을 내든지 말든지 훈구당 척신들은 복지부동이었다.
어차피 내각의 자리는 결원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조광조를 밀어낼 궁리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내각에 조광조가 있음으로 인해 그간의 일들이 벌어졌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를 궁내부대신에서 밀어내면 설사 결원이 생겨도 자신들이 사람을 추천해 올릴 수밖에 없었고, 유일한 사림계 대신인 조광조의 의견은 당사자로서 반영될 수 없으니, 다음 궁내부대신은 당연하게 훈구당의 사람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훈구파 대신들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굳건했다.
그 자신이 깔끔한 성정으로 흠결을 잡을 것이 없는 이인지라 먼지를 털어 어떻게든 몰아내 보려고 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황성부중에 집 한 칸이 있었으나, 그나마도 처가에서 빌려 준 초막(草幕)이었고,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쌓아 둔 것이 없었다. 옹색한 집에는 수백 권의 책과 옹색한 찬그릇, 그리고 옹기(甕器) 두 독이 전부였다.
상황은 이렇게 고착화되는 듯했다.
훈구파는 비록 임승준이 벼슬을 얻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김굉필이 추밀원에 입시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지금 신경 쓰는 것은 조광조를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한 교착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법부대신 안명계(安明啓)가 졸중(卒中)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거동이 불가능한 사람을 대신의 자리에 계속 앉혀 놓을 수 없으니, 내각에서는 새롭게 사람을 인선해서 추밀원에 올려야만 했다.
내각대신들은 각기 사람을 한 명씩 추천할 권한이 있었지만, 대체로 의견을 모아 하나에서 둘 정도만 추밀원으로 이름을 올려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조광조가 여전히 궁내부대신으로서 인선을 할 권한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임승준을 들여보내려 했던 내부대신의 자리는 여전히 훈구파에서 가지고 있었지만, 법부대신도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제도(制度)를 고치고자 한다면 법부에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훈구파 대신들은 의견을 모아 지금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심정(沈貞)의 이름을 올렸지만, 조광조는 예견했던 대로 임승준의 이름을 궁내부대신의 직권으로 상주했다.
이제 추밀원에는 차기 법부대신의 후보자로 임승준과 심정, 두 이름이 올라가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추밀원에서는 훈구당과 결탁한 참의(參議)들이 심정을 뽑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간 김굉필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김굉필은 영흥공 조직을 설득해 황성으로 올라오게 만들었고, 그동안 표결을 지연시키는 데에 진력을 다했다.
영흥공 조직이 추밀원에 등장하자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조직의 의견을 좇는 재향 귀족들 중에는 참의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여럿 있었고, 이들은 충분히 임승준을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열흘 밤낮에 걸친 설전 끝에, 결국 전례 없이 합의를 보아 사람을 뽑아 올리던 관행을 깨고, 추밀원 참의들은 거수 투표를 하게 되었고, 결국 7대 5로 임승준이 발탁되었다. 이름이 올라가면 황제가 재가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황제는 재가를 내리고 칙령을 내려 임승준을 법부대신의 자리에 앉혔다. 음력 섣달에 대규모로 인사 이동을 하는 소위 대정(大政)에 즈음해서 였으니, 그가 황명을 받아 황성부로 상경한 지도 반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비록 어렵사리 대신의 자리에 오른 임승준이었으나, 이제 그 파란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그믐을 전후하여 정사가 휴정(休廷)하였으나 이듬해 원단(元旦)의 조회(朝會, 모든 관리가 나아가 임금을 뵙는 일)에는 임승준이 법부대신으로서 황제를 직접 알현하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직권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1517년
소흥(昭興) 13년 원단(元旦)
대한제국 황성부.
새해 설의 조회(朝會)는 각별한 의식이었다. 문무백관이 모두 정전(正殿)에 모여 황제를 배알(拜謁)하고 해외의 사신들도 조례(朝禮)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폐하께서는 해옥주(海屋籌)를 산같이 쌓아 오천만세의 황업(皇業)과 복록(福祿)을 길이 전하소서.”
내각의 대신들은 의례 이 자리에서 다음 해의 국정에서 이끌어야 할 과업들을 황제에게 상주하고는 했는데, 어디까지나 요식 행위로서 대부분은 황제의 만수(萬壽)를 기원하는 입바른 소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여러 대신들이 하례를 올리고 법부대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대례복을 차려입은 임승준은 홀로 옛 의식대로 폐(陛) 아래에서 고두(叩頭), 즉 머리를 찧고서 다시 섬돌을 올라가 황제 앞에서 구배(九拜)하고서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옛 예법을 한 치 흩뜨림 없이 홀로이 행하고서는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는 광경에 대신들은 일소(一笑)를 금치 못했으나, 이 명분뿐이라지만 장엄한 의식 속에서 임승준은 일시 돋보였음에 틀림없었다.
감격한 황제는 친히 엎드린 임승준을 일으켜 세워 그의 손에서 상소를 건네받았고, 대신들을 세워 둔 채 그 개략(槪略)을 읽어 보았다.
“임 공은 가히 재사(才士)로다. 나라를 위해 짐에게 이리도 간언(諫言)하니 짐이 어찌 듣지 아니하겠는가? 모든 이들이 경의 고견을 들을 수 있도록 말해 보도록 하시오. 짐이 이제껏 받은 상소 중에서 가장 탁월한 식견으로 대략을 삼고 있소.”
황제 이면은 임승준의 절절한 상소에 감복하고서는 임승준에게 그 내용을 대신들 앞에서 부언하라 일렀다.
“신은 일개 대부(大夫)의 몸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인(良人)으로, 조상은 진서 출신이옵고, 아비는 겨우 진서군의 무관 말직에 있었나이다. 그러나 황은을 입어 일개 백성으로 두루 배움을 얻을 기회를 얻었고, 이에 감히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 벼슬을 얻어 나오니,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젊은 몸이 추한 노구(老軀)가 되는 동안 보고 들은 바가 있어, 감히 이렇게 상주하여 올립니다.”
임승준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킨 다음에 생각한 바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정국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었다. 훈구파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쩌면 사림들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흔 해 전에, 성명왕(成明王, 세훈)이 의정(議政)을 지내던 때에 구래(舊來)의 양천제(良賤制)를 혁파하고 노비를 환속하여 양민으로 삼았나이다. 그 이후로 법으로는 천민(賤民)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비 문서는 각 고을 관가(官家)에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직업을 엄격히 소농(小農)으로 제한하고 있으니, 이들은 상업이나 공업에도 나아갈 수 없을 뿐더러, 글을 익히는 것도 금기되어 있나이다. 지방의 사대부들은 이들을 자자손손 부려 땅을 내어 농사를 짓게 하나 여전히 세금은 나라에 걷히지 않고 이들 대부들의 곡창을 불리고 있으며, 법적으로는 양민이라 군역(軍役)을 지고 머릿수에 따라 세금도 나라에 내게 되어 있지만, 그 자손들은 여전히 누구 집의 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옛 조상의 주인들에게 고혈을 짜이고 있습니다. 이들 환속된 노비들 외에도 전조(前朝, 고려) 때에 천민들을 모여 살던 향, 소, 부곡을 가경황제의 치세에 모두 일반 군읍(郡邑)으로 고치게 하고, 이들을 일반 백성들과 같이 백정(白丁)으로 부르게 했나이다. 백정은 고래로 일반 백성들을 일컫는 말로, 천하게 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천민들을 백정으로 부르게 하자 이제 백성들은 스스로 그 말을 꺼려 하며, 이들을 신백정(新白丁)이라 멸시하더니, 이제는 백정이라는 말이 사라진 천민을 대신해 그 핏줄을 기피하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옛 향, 소, 부곡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환속된 노비들도 그 핏줄이 모두 기록되며 백정으로 불리고 있으니, 이 땅에 천민은 없어졌으나 다시 백정이 되어 남았습니다. 사대부들은 이들을 수탈해 배를 불리고, 일반 백성들은 이들을 천시해 통혼(通婚)을 하지 않을 뿐더러, 모욕을 주고 동리에서 내쫓기 일쑤이니 그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나이다. 때문에 이들은 도망쳐 영진, 북륙으로 살길을 찾아가기 일쑤고, 더러는 진서로 흘러들어 갔다가, 근방의 왜적(倭賊)들과 함께 세를 꾸려 남양(南洋)에서 해적질까지 하기도 하니 그 고충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또한 나라에서도 나이가 찬 장정들과 그 식솔들을 나라의 동량으로서 불러 쓰지 않으니 더 이상 예전의 장영실(蔣英實)과 같은 천민 출신의 대부는 이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천출이라 할지라도 그 재주가 비상하고 머리가 총명한 이는 늘 있는 법인데, 국법에는 천민이 따로 없고, 사민(四民)이 평등한데, 사실 일이 굴러가는 것은 이와 같지 못합니다. 이에 신은 감히 진언해 올리건대, 법으로 이들을 대우하는 것에 일반 양인과 다름이 없게 할 것을 정하고, 수십 년간 행하지 않았던 호구(戶口)를 조사하는 일을 다시 행하여 전국의 토지와 인정(人丁), 그리고 세수를 낱낱이 밝혀 이를 탈루하거나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각 고을의 노비 문서는 모두 태워서 이들이 앞으로 그 출신으로 인하여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 엉망이 된 호적을 제대로 바로잡아 사람이 나라의 재산임을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읊어 나가는 동안, 섬돌 아래에 도열해 있는 관료들의 시선은 점차 굳어져 갔다. 임승준이 예견한 대로 비단 훈구당의 척신들 뿐만 아니라, 사림당의 당색을 가진 이들까지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국법으로 이미 오래 전에 천민은 사라졌지만, 사실상 이 핏줄은 대대손손 기록에 남아 물려 오며, 지방 사대부들이 땅을 쉽게 부쳐 먹게 해 줄 뿐더러, 일손을 고용해 돈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실상 종 노릇을 아직까지 하고 있었다.
사대부들의 토지에 여전히 예속되어 있는 이들 천출의 백성들은, 일전의 변란(變亂)으로 완전히 노비 제도가 무너진 충청도 일대를 제외하고는 영남과 호남은 물론이거니와, 경기, 황해, 평안의 각지에 여전히 잔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분상 노비를 면해서 얻은 것이라고는 군역을 지고 인두세를 낼 의무뿐이었다.
여전히 지방 향반(鄕班)들은 물론이거니와 황성부 안의 대가(大家)에서도 사실상 노비나 다름없는 종들을 부리고 있었고, 대부분의 천민들은 환속된 뒤에도 토지가 없어 사대부의 토지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종놈의 집안과는 통혼하지 말고, 백정의 무리와는 상종하지 말라.’는 속담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로 이러한 인식은 뜯어 고치기도 힘들 뿐더러, 그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문제는 사대부들이었다. 권력을 지니고 이것을 혁파할 힘이 있는 이들은, 그 권력의 근간에 이러한 비정상적인 신분제를 깔고 있었다.
사실상의 천민, 노비를 존속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지출 없이 부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훈구파뿐만이 아니라 사림의 대부들도 마찬가지였고, 사실상 이들도 고향의 종택(宗宅)에서는 수많은 소작농들을 사실상 노비로 부리고 있을 터였다.
더군다나 이들의 명부는 여전히 고을의 관아에 기록되어 이들이 도망치거나 종살이를 거역하면 소작료를 미납했다거나 하는 다른 구실로 처벌하여 감히 꿈도 꾸지 못하게 하니, 법에는 노비가 없으나 현실에는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승준은 이러한 상황을 예전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때문에 법부대신이 되자마자 이 문제를 공공연하게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는 격언을 임승준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때문에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지난 세월 오래간 은거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이미 한명회의 일당과 압구정에서 만나서 정사를 논했을 때, 자신의 뜻이 조정의 척신들과는 맞지 않음을 젊어서 깨우친 바였다.
그러나 이제 환갑이 넘어 부끄럽게도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꺼려 할 것이 없었다.
지켜야 할 식솔도 없고, 수명도 이제 만년(晩年)에 이르러 개인의 영달을 구할 것도 없는데, 하늘 아래 누구를 두려워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이 임승준의 생각이었다.
“짐이 경을 들어 쓴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오. 참으로 말이오. 짐은 법부대신의 말이 한 치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하오. 나라를 위해 밤낮으로 진력하는 백관(百官)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기오. 그러니 내각에서는 법부대신의 진언대로 전국의 호구를 다시 조사하고, 기존의 노비 문서를 모두 태울 것이며, 또한 새로이 호적을 작성하여 군역을 지거나 세금을 내는 일을 엄정히 하게 하고 백성들이 폐단으로 고충을 겪지 않도록 새로이 법령을 시행하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짐의 바람이오.”
명(命)을 내릴 수 없는 황제였다. 그러나 이 새해 첫날에만 있는 조회에서만은 달랐다. 평소에는 내각에서는 대신들이 끼리끼리 모여, 추밀원에서는 의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혹은 훈구당이니 사림당이니 당파대로 모여 제각기 정략(政略)을 도모하는 것과 다르게, 모든 나라 안의 귀족과 명망 있는 대부들, 그리고 관직에 출사한 문관과 무관이 모두 모인 이 자리에서는 감히 식언(食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자리에서 떨어진 황제의 말을 이행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으나,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온 말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 관리들은 제각기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이 일을 피해 가려 애를 쓸 것이고, 어찌 되었든 오늘 저녁이면 도성 전체와 사방팔방의 고을이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니, 황성이나 지방이나 할 것 없이 이 문제로 동요하게 될 것이었다.
아마 임승준이 이 문제를 조회가 아니라 내각을 통해 제기를 했더라면, 훈구당의 대신들은 모두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압박했을 것이고, 황제가 상소를 받더라도 설사 재결을 한들, 내각에 강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임승준이었기에, 공개적인 조회에서 이 문제를 대놓고 끄집어낸 것이다.
여기에 황제가 임승준의 안을 시행할 것을 촉구했으니 더더욱 묵살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아, 과연 그 지모를 가릴 자가 이 조정에는 없구나.’
섬돌 아래에서 시립하고 있던 조광조 또한 임승준의 패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훈구당의 반발은 막을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제 해야 할 일을 뚜렷이 알게 되었다.
사림들까지 이것으로 동요하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사림들이 임승준을 적대하고, 훈구당과 부화뇌동해 임승준을 저지하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든 저지해야 했다.
다행해 스승 김굉필이 황성에서 봉직하고 있으니, 사림들을 어떻게든 다독여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 임승준은 이러한 사실까지 계산에 넣고 움직였을 것이다. 조회가 끝나면 조광조는 이제 사림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을 것이다. 그가 부르지 않아도 그들은 이 사태를 놓고 성토하고자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 터였다. 이제 자신이 나서야 했다.
1517년
소흥(昭興) 13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황성부.
임승준이 일으킨 파란은 이내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사대부들만이 동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자신들 아래에 천민을 존속시켜 계급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있던 일반 백성들 또한 불만에 차게 만드는 일이었다.
제국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계급 제도를 폐지했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계급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조정에 출사하는 관리들은 거의 대부분이 수십 개로 한정된 명문가(名文家)에서 배출되었고, 대부분은 법으로 그 권익을 보호받는 귀족의 작위(爵位)가 가문에 하나쯤은 있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양민(良民)이라 불릴 수 없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그 연원이 신라, 고려 때의 왕족, 호족, 그리고 명문가에 맞닿아 있었고, 지방에는 이들에게 막대한 토지와 가산이 축재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고을마다 유지 노릇을 하고 있는 향반(鄕班), 혹 사대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속된 말로 양반(兩班)이라 불렸는데, 벼슬을 하지 않은 이들도 핏줄에 따라 양반으로 불렸다.
법으로는 이들 또한 양인(良人)이었으나, 관청에서는 족보를 가진 이들과 가지지 못한 이들을 가려서 대우했다.
양인이 사사로이 족보를 가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이미 족보를 보유하고 제사를 모시는 집안에 대해서는 그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놓고 있었다.
사실상 양반과 그 아래의 계층이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군역을 질 때도 일반 백성들과 같지 않게 육군조련소(陸軍調練所)와 해군조련소(海軍調練所)로 입대하여 참교(參校)로 복무하도록 하고 있었다.
병졸로 생활하지 않고, 하사관계급에 속해서 군역을 지는 것이었다.
원래 군제가 정비되기 전인 국초(國初)에도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취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반가의 자제들은 잡색군이라 하여 별도로 군역을 지게 한 것을 조금 손질해서 실정에 맞게 한 제도였으니, 그 한계는 처음부터 자명한 것이었다.
그 다음이 이른바 중인(中人)으로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상업(商業)이나 공업(工業), 혹은 여러 분야의 학문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로, 사실상의 중간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양반 계층에 속한 이들이었고, 또 어떤 이들은 어렵사리 밑바닥부터 올라온 이들이었다. 때문에 그 경계는 불분명했고, 철저히 사농공상의 지위에 맞추어 있던 예전 시절에 비해, 양반들이 상업이나 공업에 손을 대고, 일반 농민들도 이런 일들에 뛰어들어 가장 계층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업이나 공업을 막론하고 그 기득권이 자리를 잡으면서 여러 상단을 중심으로 그 재물과 직분이 대물림되기 시작했고, 상공업을 막론하고 모두 제각기 이권을 따라 긴밀한 인맥(人脈)으로 연결되어 있어 아무리 걸출한 인물이라도 새롭게 판을 깨고 성공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거의 준양반으로서 대접을 받았고, 일반 양인들도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 다음이 수가 가장 많은 일반 농민들이었다.
국법으로는 황제 이하 특별히 인정된 귀족과 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인에 속했지만, 사실상 양인, 혹 양민이라 한다면 거의 이들 농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법적으로 학교에 자제를 보낼 수도 있고, 공부를 가르쳐 관직에 출사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양질의 공부를 시킬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 이들이 사실상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한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한 줌에 불과한 숫자였다. 그나마도 예전 당상관에 해당하는 칙임관(勅任官)의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지막이 예전 고려 때에 향, 소, 부곡으로 불리던 천향(賤鄕)에 살던 사람이나, 그 핏줄이 노비 출신인 천민들이었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천민의 굴레를 벗었으나, 백정이라는 조롱에 가까운 말로 사실상 구별 지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의무만 있을 뿐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이제는 양민이라고는 하나, 경제적으로는 양반들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학교에 보내거나 공부를 시키려 해도 고을 정무(政務)의 편의라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남아 있는 옛 노비대장에 따라 그 후손들은 글을 익힐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방 상학에서는 이 대장에 포함되어 있는 자들을 암암리에 조회해서 받지 않았고, 돈이 없으니 따로 글 선생을 불러다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거의가 소작농으로 종살이나 다름없이 살다 보니, 자기 땅을 가져서 독립하는 것도 꿈과 같은 일이었다.
혹여 이런 이들이 나타나더라도 일반 농민들의 천대에 못 이겨 땅이고 집이고 내놓고 쫓기든 다른 고장으로 옮겨 가기 일쑤였다.
국법으로는 모두가 양민이나, 사실상 작금에는 다섯 개의 계급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모든 사회 활동이 이것을 벗어나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임승준은 바로 그러한 것을 건드린 것이다.
훈구당의 반발은 물론 하거니와 당연히 사림들까지 기겁하고 나섰다. 그들 뿐이랴, 고을마다 천출이 아닌 자들은 모두 이것에 대해 내심 반발하고 있었다. 상소가 빗발치듯이 올라왔고, 조정은 이내 내홍에 휩싸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난국을 헤치고 임승준을 지원하기 위해서, 스승인 김굉필과 함께 사림들을 다독이는데 집중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국법에서는 감히 사사로이 핏줄에 따라 사람을 천시하지 못하게 하고 있소. 우리들 또한 모두 양인들로, 나라의 은덕을 입어 대부라 불리고 있으나, 본디 황제 폐하 아래의 백성들로서 한 치 나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오. 또한 호구를 조사하고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행하는 것은 본디 조정에서 늘 하는 일로, 사대부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세수를 엄정히 걷고 군역을 공평히 지게 하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것이오. 도학(道學)의 엄정한 가르침을 쫓는 우리가, 악습에 기댄 사사로운 이익에 목을 매어 훈구당의 모리배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하늘에 대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조광조가 김굉필을 등에 업고 사림들을 다독이니, 하나둘씩 높이던 언성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임승준에 대한 반발감은 잠시 접어 두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살을 깎아 가며 훈구당을 공격하는 것이 여전히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 일을 필시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 가는 일이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림당에 속한 이들 거의가 젊은 이상주의자들로, 결국에는 조광조의 패기를 쫓아가게 될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결국 조광조에게 설복하고 자기 뜻을 굽히고는 임승준의 방략에 쫓아 국정을 행할 것을 촉구하는 연명상소를 공개적으로 올렸다.
이들은 방을 붙이고 신보(新報)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으며, 훈구당을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격론이 붙은 것은 조정에서만은 아니었다.
“천인(賤人)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역적 자손이거나 모자란 자들의 핏줄인데, 어찌 그것을 양민들과 같다고 말하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네 같으면 딸자식을 그런 화척(禾尺) 놈이나 재백정(才白丁)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어허. 그야 핏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나름이지. 예전 장대부(蔣大夫, 장영실)또한 노비 출신이었으나 그 기량이 높아 학식도 뛰어나고 벼슬이 공경(公卿)에 이르렀으이. 그런 사람이라면 시집보낼 수도 있지.”
“장대부야 장대부고, 이 동리 바깥에 사는 화척 놈들을 보란 말이네. 원래 야적(夜賊)질하던 놈들을 사람 만들고자 받아들여서 살게 해 주었더니, 이제는 기세가 등등하여 왈패처럼 온 고을을 휘젓고 다니지 않는가. 아랫마을 교씨(橋氏) 딸을 겁간해 애를 배게 만든 것도 그 화척 놈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어. 그래서 교씨네 딸은 자결하고 교씨도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지 않았나. 관아에서는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고, 교씨의 딸이 정분이 나서 잘못 처신하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된 게 아니냐고 하지만, 교씨의 딸이 얼마나 정숙하고 참한 아이였던지는 우리 고을 사람들은 다 아는 노릇이네. 그 동리 바깥의 화척놈들이 일을 작당하고 그리 만든 것이 틀림없어. 교씨가 예전에 그 화척놈들에게 모욕을 준 적이 있으니 말이네.”
“관아에서 하는 말도 믿지 못하면 어찌하는가.”
“관아라니, 무슨 놈의 조정에서 그 화척 놈들과 어울려 살라고 하는데 어찌 관아를 믿겠는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가장 격분해서 떠드는 것은 사대부들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양민들이었다. 사실상 하층 계급으로서 사대부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아래라 생각하는 천민들을 모욕 주고 천시하며 사소한 우월감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비록 나은 처지는 아니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음을 통해 사소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나라에서 그것을 금하고자 나섰으니 반발이 치미는 것도 당연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퍼지니 자연스럽게 훈구당의 기세가 점점 등등해져 갔다.
“나라 전체에서 이 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소. 아무리 황상 폐하의 뜻이라고는 하나, 어찌 풀뿌리 같은 민초들의 목소리를 거슬러 가며 추진하겠소? 우리 내각의 대부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위로는 폐하를 바른 길로 이끌고, 아래로는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겠소?”
재상 남곤의 목소리는 자근자근했다. 그는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오히려 차분하게 웃음을 지으며 임승준과 조광조를 압박해 들어왔다. 내각에 이제는 사림계열이 두 명이 되었지만, 여전히 절대다수는 훈구당의 세력이었다. 다른 대신들도 고까운 미소를 지으며, 남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쪽 같은 임승준과 조광조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찌 천출(賤出)이라 하여 백성에 들지 않겠소. 국법으로 이들을 양인이라 정한 지 이미 한 갑자를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 이리도 그들을 멸시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면서 어찌 군역을 지고 세금을 내라 하겠소. 지금 우리는 멀리 영주(瀛洲)로 대창해(大滄海, 태평양)을 건너 군민(軍民)을 보내고 있고, 영진의 북쪽 위로는 지킬 사람도 없고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소. 이렇게 사람이 절실한 때에 이들은 모두 나라를 지킬 동량들이고, 위로는 황제를 받들고, 아래로는 땅을 일구고 국부를 일궈 낼 사람들이외다. 어찌 천민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제 직임(職任)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소나 잡고 피륙을 다지는 일만 맡기겠소?”
임승준의 말은 정연했다. 그러나 모두들 이상론에는 코웃음을 치게 마련이다.
노회한 대신들은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는 자들이었다.
기득권이 있으면 내어놓기가 힘든 법이다. 오히려 조금씩 내어놓다 보면 모든 것을 잃게 될까 싶어 전전긍긍하게 마련이다. 사소한 개혁도 이런 이유 때문에 늘 힘든 법이었다.
“……누가 왜놈 핏줄 아니랄까 봐.”
한쪽 자리에 앉아 있던 내부대신 홍경주가 혀를 끌끌 차며 비아냥거렸다.
혼잣말인양 한 것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그 말을 못 들은 이는 없었다.
분위기는 일시에 차가워졌다. 훈구파 대신들은 거들지는 않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표정으로 임승준을 쳐다보았다.
자리에 서서 열변을 토해 내던 임승준은 얼굴이 벌겋게 익어 올랐다.
“어찌…… 그런 말을…….”
임승준의 폐부 깊은 곳에서 진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탁상을 짚고 자리에 앉았다.
“도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옆에 앉아 있던 조광조가 귓속말로 임승준을 위로했지만, 임승준은 모욕감에 사무쳐 이를 질끈 물었다.
오랜 세월 속세와 떨어져 마음을 다스리고자 했던 그였으나, 사람인지라 이런 모욕은 견디기 힘들었다.
진서(鎭西)가 평정되어 제국의 강역에 포함된 지도 어언 백 년이었다. 임승준은 스스로를 제국인이라 생각하고 살아 왔으며, 진서인 또한 황제를 받들고 군역을 지며, 또한 관직에 출사하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어서 하등 내지팔도의 조선인들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하기는 그렇지 않았다. 차별을 받는 것은 천출들만이 아니었다. 진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왜놈 핏줄 운운하는 차별 의식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쉽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홍 공. 말씀이 무례하시오. 사죄하십시오. 진서 백제공(百濟公)가의 숙녕왕비(淑寧王妃, 에히메)와 성혼하셨던 성무왕(成武王, 현도) 전하와 그 핏줄을 이어받은 심왕가는 또한 왜놈 핏줄이란 말이오? 어찌 일국의 왕공(王公)도 능멸하고 거기에 지금 대신으로서 대부에 오른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능멸한단 말이오? 진서의 백성들이 함께 황제 폐하의 일우(一宇, 한 지붕) 아래에 들어온 지가 어언 백 년의 세월이오. 어찌 그리 무례한 언사를 하신단 말이오.”
분노를 삭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임승준을 대신해 조광조가 일갈을 토해 냈다.
그러나 홍경주는 추호도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뺏어다가 임승준을 앉히려 했던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사림당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이가 그였다. 오히려 그는 한술 더 뜨고 나왔다.
“전조(前朝, 고려)의 왕통이 몽골 오랑캐와 통혼하여 그 머리가 우둔해진 탓에 나라를 잘 이끌지 못하여, 본조(本朝)의 태조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왕업을 다시 창건하셨소. 심왕가라 하여 무에 다르겠소. 성명왕과 성무왕은 그간 나라를 위해 많은 공훈을 쌓으셨으나, 잘못된 핏줄을 받은 탓에 그 후손들이 모두 북륙에 틀어박혀 조정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오랑캐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어차피 심왕가는 이제 그저 요동의 맹주일 뿐이라는 것이 홍경주의 생각이었다. 정사는 자신들 공훈 세력이 이끌어 간다. 그리고 북륙은 한갓 제국의 일개 변경일 뿐이었다.
황성부에서 제국을 이끌어 가는 자신들이야말로 나라의 기둥이고 충신들이라는 것이 홍경주를 비롯한 훈구당이 내심 여기고 있는 바였다.
그러한 판국이니 제국 전역에서 으뜸가는 공신가라 할 수 있는 심왕가도 이리 모욕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수천 리 밖에서 천한 오랑캐들과 살을 부대끼고 사는 심왕가래야 더 이상 두렵고 공경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심왕가를 이리 공공연히 건드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전의 몽골과의 전역(戰役)을 거치며 심왕이 더 이상 내지의 일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요동에서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생각이 공훈 세력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옛 관습대로라면 일개 번국(藩國)의 왕일뿐이었다. 지금의 훈구당 대신들의 심왕가에 대한 생각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제국의 중심부인 황성에 앉아 있는 자신들이 그런 반쯤은 오랑캐나 다름없게 된 심왕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찬연히 옛 조선(朝鮮, 고조선)과 삼한(三韓, 고구려·백제·신라)로부터 내려오는 예의지방(禮義之邦)인 우리가 어찌 여진(女眞), 몽골, 왜적(倭賊)의 무리들과 같다고 하겠소. 이제 그들에게도 황은이 두루 미치고 있지만, 이들을 교화시켜 금수와 같은 무리에서 사람으로 만들려면 갈 길이 머오. 천민들도 마찬가지요. 이들은 성정이 괴악한 무리들로, 양인의 신분을 주었다고는 하나, 온순한 백성들로 만들려면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이들을 갑자기 백성의 무리 중에 흩어 놓는다면, 어찌 풍속이 더럽혀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겠소. 어찌 되었던 법부대신이 직권으로 양전을 하든, 법령을 고치든 내 알바 아니오나, 내부에서는 절대 협조하지 않겠소. 각도의 방백(方伯, 지방 수령)들에게 이 일에 경거망동하지 말라 공문을 보낼 테니, 능력 것 알아서 해 보시오.”
홍경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휘젓고서는 재상 남곤에게 고개를 꾸벅한 뒤 임승준과 조광조를 바라보며 비웃음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어차피 협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리도 모욕을 주고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 훼방을 놓고 나올 줄은 몰랐다.
“조 공. 우리도 이만 일어납시다.”
계속되는 홍경주의 모욕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임승준이 깊은 한숨을 토해 내고서는 조광조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더 이상 이런 자리에서 말을 계속해 봐야 우이독경(牛耳讀經)에 불과했다.
조광조는 무어라 한마디 더하고 싶었지만, 임승준의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임승준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자리에서 나가자 내각 대신들은 삼삼오오 앉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더 이상 고집 부려 봐야 소용없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임승준이나 조광조나 패기만 있지 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각의 강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임승준은 그 자리에서 좌절하고 멈추지 않았다.
“지금 국중(國中)의 내각에는 8부가 있소. 궁내부, 내부, 외부, 탁지부, 상공부, 문부, 군부, 법부올시다. 이들 중 궁내부와 법부를 제하고 남은 6부의 대신이 모두 훈구당의 사람들이오. 그러나 이번 호적을 재정비하고 양전을 하는 일은 내부와 탁지부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힘든 일이오.”
임승준은 지금의 상황을 또렷이 알고 있었다.
조광조에게 푸념조로 상황을 읊어 보니 과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방의 행정을 관장하는 내부(內部)와, 조세(租稅) 및 재정(財政)을 관장하는 탁지부(度支部)의 협력 없이는 사업 자체가 힘들었다.
“탁지부 상서대신 고형산(高荊山) 공을 한 번 만나 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 공은 비록 훈구당의 척신(戚臣) 중 하나이나 성품이 바르고 근검하여 옳은 일은 당파의 뜻에 맞지 않아도 몸소 실천하고, 그른 일은 설사 이익이 된다 하더라도 발을 담그지 않습니다. 고 공은 지금 저희가 하는 일이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고 여겨 좋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일이라 설득할 수만 있다면 탁지부를 움직여 일을 돌보아 줄 수도 있습니다. 탁지부에 제 오래된 친우인 윤자임(尹自任)이 근속하고 있으니, 그를 통해 만남을 주선해 보지요.”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고형산이 그 이름이 난 것처럼, 대쪽 같은 사람이라면 그에게 이번 양전 사업이 옳은 일이라는 사실만 납득시킨다면 도움을 줄 것이었다.
임승준은 조광조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운종가의 외진 여각에서 임승준과 고형산은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훈구당의 내각 대신들이 교묘한 언사와 노골적인 면박으로 임승준에게 모욕을 주고 사림당을 비웃을 때에도, 고형산은 가타부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만 했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임승준은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광조와 윤자임을 통해 이 자리에 나왔다는 것은, 이야기는 한 번 들어 보겠다는 말이었다.
임승준은 고형산을 설득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귀 공이 하고자 하는 일은 나라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일이오. 국초(國初)에 정변이 있어 나라의 제도가 세워지고 건원칭제하여 만방에 빛나는 공업(功業)을 다했으니, 그 옛 제도대로 흠모하고 쫓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오. 비록 여러 번의 내우와 외환이 있었다고 하나, 이 제도가 올바르고 모범이 되었기에 큰 해를 입지 않고 종사의 황업을 지킬 수 있었소. 옛 규범을 지켜 내려가는 것이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고형산은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유로 대쪽같이 옛 제도를 사수하는 일에 목을 매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승준은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성명왕께서 의정(議政)에 계시면서 노비를 혁파하고 이를 모두 환속해 양인으로 만든 것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소. 덕분에 나라를 지킬 정병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이 제 능력을 찾아 직분을 얻을 수 있게 됨으로서 나라의 국고도 풍족하게 되었소.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일전의 폐단이 아주 가시지 않아서 여전히 이들을 차별하고 천시하며, 재능을 피우지 못하게 글을 익히는 것도 사사로이 금제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 아래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소? 또한 그간의 호적이 문란해지고 군역과 세금을 내는 것을 회피하는 자들이 늘었을 뿐더러, 자녀를 놓아도 장적(帳籍)에 올리지 않고, 새로이 나라에 속한 땅을 개간하더라도 이것을 관아에 알리지 않아 아무런 조세를 바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모든 것을 바로잡고, 새롭게 나라를 튼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전(量田)을 하여 땅의 결수를 파악하고, 호구를 새롭게 조사하여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고 기존의 제멋대로인 호적을 바로 잡아야 하오. 이와 함께 사사로이 관아에 보관되고 있는 노비 문서를 태우고, 이들의 이름을 호적에 다른 백성들과 함께 올림으로서 앞으로 천시받는 일이 없게 해야 하오. 이것이 어찌 옳지 않은 일이라 하겠소?”
임승준의 말에 고형산은 잠시 고뇌에 빠졌다. 임승준의 말은 분명히 옳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형산 자신도 뜻이 옳다면 그것이 비록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절개 있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정말 그러한 것인지 핑계에 불과했는지 곰곰이 따져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내 주위의 처사(處士)들과 함께 이 일에 대해 한 번 의론을 해 보아야겠소. 뜻이 맞다 하면 내 탁지부의 호관(戶官, 호적 담당 관리)들을 내어서 일을 함께 맡을 수 있도록 하겠소. 그러나 궁리를 해 보아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소. 그러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오.”
그 자리에서 설득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 고형산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했다.
임승준과 조광조가 며칠을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형산은 자신의 집에서 식객으로 머물고 있는 선비들을 모아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게 했고, 도학주의적 냄새가 짙은 이들 선비들은 격론이 붙었으나, 결론은 노비 철폐를 떠나서 나라를 위해 양전 사업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붙였다.
그 의견을 듣고 밤새 고민한 고형산은 다음 날 법부대신 임승준의 관저로 직접 찾아가 탁지부의 자원을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에 동원할 것을 약속했다.
안개와 같은 정국 속에서 개혁의 일보(一步)가 간신히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