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3장 정축경장(丁丑更張) (44/82)

제43장 정축경장(丁丑更張)

「○법부상서대신(法部尙書大臣) 임승준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임금의 뜻이 정해지면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 하였는데, 근일의 일로 보면 재상은 오랜 법례(法例)를 고치는 것이 불가하다 하고, 시종은 풍세(風勢)를 만났으니 다시 율전(律典)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그 의논이 각각 달랐습니다. 폐하께서는 혹 이것을 따르고 혹 저것을 따르면서 적종(適從)하는 바 없다가, 사세가 급박해서야 갑자기 규례를 고치는 일을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으로 폐하께서 대제에 앞서 미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자가 또 말하기를 ‘의리(義理)를 먼저 정하지 아니하면 여러 의견에 현혹되기 쉽고, 지의(志意)를 먼저 정하지 아니하면 선(善)을 지키다가도 변할 수 있다.’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세히 살피소서. 옛말에 ‘임금은 그 임금 노릇의 어려움을 알고 신하는 그 신하 노릇의 어려움을 알면 정사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은 덕에 힘쓰게 된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상소의 말이 지금의 폐단을 바로 지적하였다. 짐이 마땅히 살피리라.”하셨다.

○法部尙書大臣林勝俊等上疏. 其略曰:程子曰:“君志定, 而天下之治成矣.” 以近日之事觀之, 宰相則以爲古法, 改日不可; 侍從則以爲旣遇風勢, 宜改舊例, 議論各異. 陛下或與此, 或與彼, 莫有所適從, 事急勢迫, 然後率爾敢行改修規例. 以此而言, 陛下之前此, 未有素定, 蓋可見矣. 程子又曰:“義理不先定, 則多聽而易惑; 志意不先定, 則守善而或移.” 伏惟陛下審察焉. 古者, “后克艱厥后, 臣克艱厥臣, 故政乃乂, 黎民敏德.”也. 傳曰:“疏言正中時病, 朕當省察.”」

―《경종실록(景宗實錄)》, 33권,

소흥(昭興) 14년(1518) 10월 15일 첫 번째 기사

1518년

소흥(昭興) 14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소란스럽게 시작된 양전 사업은 1517년의 늦여름부터 이듬해 초겨울까지 계속 진행 되었다.

탁지부대신 고형산이 움직이는 바람에 결국 훈구당의 척신들도 더 이상 이를 막아서지 못했다.

황제의 재가가 떨어지고 칙령(勅令)이 전국으로 보내진 데다가, 여기에 법부대신, 탁지부대신, 그리고 궁내부대신의 주인(朱印)이 찍힌 각령(閣令)이 떨어지니 내부대신의 하령만으로 꼼짝하지 않고 있을 지방관은 없었다.

이미 전국적으로 칙령과 각령으로 양전 수적령(量田修籍令)이 떨어졌으니 감히 이를 받들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양전이라 함은 토지를 측량하고 그 넓이와 소유주를 엄정히 하는 일이며, 수적이라 함은 호적을 고쳐 기록해 국가에서 백성의 신원을 엄정히 파악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양전을 통해서는 세금을 엄격히 걷고자 했고, 수적을 통해서는 군역을 지게 하고 백정을 구제하고자 함이었다.

이를 위해 여름에 내각 산하에 양전 수적청(量田修籍廳)이 임시로 설치되고, 그 청령(廳令, 청장)으로 탁지부 칙임관(勅任官)으로 임승준에게 고형산과 만날 다리를 놓아 주었던 윤자임이 서임되었다.

그 아래에는 양지아문(量地衙門), 지계아문(地契衙門), 그리고 수적아문(修籍衙門)의 세 부서가 설치되었는데, 양지아문은 곧 땅을 측량하는 일을 하고, 지계아문은 이를 근거로 토지의 소유권과 세수(稅收)를 낱낱이 기록해 토지대장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수적아문은 기존의 지방 관아마다 자의적으로 정리되어 있던 호적을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일원화된 호적(戶籍)으로 정리하고, 정확한 인구를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이 업무 중에는 기존의 노비대장을 불태우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일을 엄정히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전국적으로 방법에 한 치 차이 없이 같은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오. 각 도에도 이를 위해 감찰사가 주재하는 관영마다 양무국(量務局)을 설치하고, 각 부군(府郡)에는 사령(使令)을 보내어 일을 주재하도록 합시다.”

임승준은 이 일을 가장 먼저 제안한 이이니 만큼 가장 앞장서서 일을 진행시켰다.

업무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양전 수적청의 청령의 위에 총재관(總裁官)이 선임되었고, 이 총재관은 현임 법부대신·내부대신·탁지부대신·상공부대신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내부대신 홍경주(洪景舟)는 이에 반발하여 사직을 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반려하지 않고 그대로 수락해 버렸다.

황제에게 다른 권한은 거의 없었으나 내각대신의 사임 수리는 전적으로 황제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 일을 강경 반대하고자 사임을 청했던 홍경주는 졸지에 관직을 잃게 되고 만 것이다.

추밀원으로 보내진 새로운 내부대신의 선임 안에서 김굉필을 중심으로 한 개혁적인 참의들이 사림계의 김안국(金安國)을 차기 내부대신으로 뽑아 올렸다.

결국 네 명의 총재관 중에서 사림계인 법부대신 임승준, 내부대신 김안국이 이를 주도하고, 중립적인 탁지부대신 고형산이 이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다.

나머지 한 명인 상공부대신 김전(金詮)은 마지못해 총재관의 직위를 떠맡았으나, 이번 양전 수적 사업에서 그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내부, 법부, 탁지부에서 이미 이 일을 추진하는 이상 상공부에서는 그저 보조를 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하는 동안에 불거졌던 많은 잡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소흥 13년(1517년) 9월 1일에 양전 수적 사업은 동시에 시작되었다.

각 지방으로 실무진이라 할 수 있는 양무감리(量務監理)·양무위원·조사위원 등이 파견되었다.

양무감리는 각 도에서 양전 사무를 주관하는 일을 맡아, 각 도에 설치된 양무국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한 세대 전의 탁월한 지학자(地學者)였던 양성지(梁誠之)가 남긴 측량법을 다룬 책인 《탁지산법(度地算法)》에 따라서 일괄적인 측량 기준이 수립되었고, 삼각법(三角法)으로 정확한 측지(測地)를 위해 각 학교의 준재들을 임시적으로 등용하여 이에 대한 교육한 뒤 지방 관아로 파견시켰다.

이와 함께 내부(內部) 산하에 지적국(地籍局)이 설치되어 또한 양성지의 《제도해용(製圖解用)》에 따라 측지된 땅을 정확히 지도로 옮겨 기록하도록 했다.

전국의 땅마다 지번(地番)이 매겨지고 기존의 땅 문서를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거두어서 이를 각 도의 감영에 일괄적으로 봉인(封印)하고 새롭게 지계(地契, 땅문서)를 발급했다.

또한 이 지계의 양식을 통일하기 위해서 그 양식을 목판으로 만들어 각 지방으로 보냈고, 이 목판으로 찍어 낸 틀 위에 정확히 그 관계를 기록하도록 지시했다.

호적대장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새롭게 작성하도록 했는데, 황성에서 일괄적으로 보낸 목판으로 찍어 낸 양식 위에 가족 관계 만을 기록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해당인이 천출(賤出)인지 아닌지는 기록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사업에서 주목할 부분은 지도를 만드는 사업과 함께 이루어져 지형이 함께 표시되었다는 점이고, 또 면적을 척수(尺數)로 정확히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주·소작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토지에 시주(時主, 지주)와 시작(時作, 소작인)의 성명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토지에 따른 소작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서, 함부로 땅 주인이 소작을 빌미로 갈취를 하거나 전횡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소작권(小作權)을 인정하여 빈한한 소작농들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 소작농들에게 정확한 세금을 걷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 사업의 목적을 오로지 천민들을 일반 양민들과 뒤섞는 데에 있다고 알고 있었던 지방의 평민들도, 사업이 구체화됨에 따라 조금씩 민심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또 남의 땅을 부쳐 먹는 사람은 또 그러한 사람대로, 모두 이 양전 사업에 쌍수 들어 환영하고 나선 것이다.

〈영남제국신보(嶺南帝國新報)〉는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구 근교의 어떤 농민은 “그동안 지방 관아에서 호적을 제멋대로 정리하고, 땅문서 또한 임의대로 찍어 내어 힘없는 백성들이 피를 보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 내 땅을 내가 찾고, 내가 부쳐 먹는 땅을 함부로 빼앗기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아니할 손가.”라고 말하며 자기 땅으로 양전 나온 관리들을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도왔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양전 사업의 물결에 가려 호적을 고치는 수적 사업은 오히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때문에 지방 관아의 옛 노비 문서와 기존의 호적들을 일괄적으로 거두어 폐기하는 일은 큰 저항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성(姓)이 없는 양민들에게 성을 지어 주기도 했는데, 특히 천민 출신의 이들이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적 사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민과 양민의 구분은 대대적으로 철폐되었음에도, 양반의 특권은 호적상에서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데에 있었다.

노골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본관(本貫)을 기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문제였다. 사대부 가문 만이 그 성씨가 난 관향(貫鄕)을 가지고 족보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본관을 기입할 수 있는 것은 사대부 출신뿐이었다.

일반 양민들에게 본관이 있을 턱이 없으니, 그저 기입되는 것은 성명(姓名)과 소유한 집과 땅, 그리고 가족 관계뿐이었다.

극심한 반발이 예견되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업이 시작되자 사대부들이 잠잠해진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천민과 양민의 구분은 완전히 없애고, 일반 양민과 사대부 계층을 좀 더 확실히 구분 짓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적에 본관을 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그들의 편수된 족보에 따라 8대조까지 호적에 가계도를 올릴 수 있었기에, 확연히 일반 양민과 구분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일반 양민이 그렇게 정리된 가계도가 있을 리 없었고, 조상의 생년은 커녕 이름도 잘 알지 못하니 호적에는 그저 3대가 올라가면 다행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호의적으로 전환된 민심에 힘입어 조금씩 성공적으로 양전 수적 사업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일 수 있었다.

이미 노비제가 대대적으로 혁파되어 지속적으로 양전 사업도 이루어지고 있던 충청도가 가장 먼저 끝나 그 토지 대장과 호적 대장이 각 관아에 보관되고, 그 사본(寫本)이 황성부로 보내졌다.

그 다음은 황성부를 포함한 경기도였다. 이듬해가 되자, 전라도의 수적 작업이 끝났고, 조금 뒤늦게 황해도의 양전 사업이 완료되었다. 이듬해 6월쯤 되자 경상도에서 일괄적으로 양전 수적을 모두 마쳐 황성부로 올렸고, 전라도에서 양전을 마무리해 올렸다.

그러나 문제는 영길도와 평안도, 그리고 강원도였다.

지세(地勢)는 넓고, 산지가 많으며, 인구는 없는 이 지역에서 이러한 작업을 진척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한 토지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고, 심지어는 산간을 돌아다니며 화전(火田)과 수렵(狩獵)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도 많으니 엄정하게 조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평안·영길 양 도는 본디 나라의 변경으로서 지세가 험악하고 사람이 많지 않았소. 거기에 유랑하는 백성이 많아 어제까지는 이곳에서 오막을 짓고 밭을 꾸리던 이들이, 다음 날이 되면 산으로 들어가 버섯을 캐고 노루를 잡고 있으니 관청에서 이를 초치(招致, 불러 앉힘)하여 두는 것이 쉽지 않소. 더군다나 어떤 날은 강을 건너 요동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영진(永鎭)으로 건너가기도 하니 호구를 계수(計數)하는 것이 쉽지 않소.”

북쪽 지방에서 양전 사업이 잘 진척되지 않자 임승준은 재상 남곤의 주도하에 내각에 불려가 신랄하게 공격당했다.

일이 쉽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고, 그것은 임승준의 잘못도 아닐 뿐더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더욱 양전과 수적 작업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훈구당에서는 그저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든 것이었으니, 그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임 법부대신은 그 직위가 법부(法部)의 사무에 한정되어 있음에도, 마치 국상(國相, 나라의 재상)이라도 된 것처럼 굴며 양지 업무를 진행하였으니, 양전 수적청이 마치 내각과 추밀원에 위에 있는 듯한 형국이 되었소. 그러면서도 총재관 중 한 명인 내게는 아무런 간여할 여지를 주지를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사림들이 정국을 도모하기 위해서 간사한 꾀로 만들어 낸 일이라 하지 않겠소?”

임승준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상공부대신 김전(金詮)이었다. 그는 명목상으로 양전 수적청의 총재관 중 한 명으로 보임되어 있음에도, 사림계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에서 아무런 간여를 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간여를 하기 시작했다면 사업을 방해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찌 되었든 의사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김전은 이를 노골적으로 문제 삼아서 임승준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일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와 평안도의 경우 7할 가까이 이미 사업이 진행되었소. 영길도는 그 진척이 매우 더디지만, 이미 영진도독부에서는 함부로 경계를 넘어 정착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영길도로 속환하고 있고, 함주부(咸州府)에서는 올해 중으로 이 일을 마칠 것을 장담하고 있으니 어찌 그리 속단하겠소. 김전 공께서는 상공부대신으로서 총재관을 겸직하고 계신 터이니, 양지하고 수적하는 일에 사실 염려할 일이 많지 않소. 사정이 그리한데 어찌 국사를 농단할 목적으로 그리 말씀하신단 말이오?”

김전의 말에 당장 내부대신 김안국이 반발하고 나섰다. 예기치 않은 공격에 김전은 움츠러들었다.

내각의 상황도 예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각 대신 8명 중 훈구당계는 5명으로 줄고, 사림당계는 3명으로 늘어 있었다. 더군다나 훈구당으로 분류는 되어 있으나, 고형산은 사실상 중립적으로 사업 자체는 지지하고 있으니, 임승준을 비롯한 사림계에 대한 정치 공세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칙령과 각령으로 나라 전체에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에 물러섬은 없소. 올해 중으로 팔도의 양전 수적이 모두 끝나면, 이를 진서와 영진, 그리고 요동으로 확대해 진행할 생각이오. 외부대신께서도 상남서(湘南署)로 양전관을 보낼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오.”

임승준은 딱딱한 어조로 자신이 할 말을 통보하고 일어섰다. 그는 더 이상 훈구척신들에게 협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대쪽같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일신의 영달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허어, 아주 왕이라도 된 듯하오이다.”

마지막으로 일방적 협조를 요구받은 외부상서대신 고훈(高薰)이 혀를 끌끌 찼다.

고훈은 세훈의 처숙(妻叔, 처삼촌)이자 공신(功臣) 고봉지의 4대손으로, 거의 집안의 가업처럼 외교에 종사하고 있었다.

고봉지의 후손들 중 외부대신을 거쳐 간 이들만 고훈까지 줄잡아 4명으로, 훈구당에서도 가장 강경한 기득권자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일어나 보겠소.”

임승준은 자리에 다시 앉지 않고 고훈을 노려보고서는 내각의 정청(政廳)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오. 내 폐하께 이를 간언하여 고 대부를 필히 탄핵하리다. 고 대부는 조심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법이다.

임승준을 따라 일어나서 고훈을 향해 한마디 쏘아붙인 조광조의 말에 고훈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다.

고봉지가 정의공에 봉해진 뒤에 그 아들 고상경으로 이어진 핏줄을 잇는 명문대가의 후손이었다. 그 자신이 공작(公爵)의 작위로 정의공을 습작하고 있었고, 외부대신을 지내며 그 명망이 드높은 사람이었다.

고훈은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 조광조가 위세를 등에 업고 설치는 마냥이 꼴사납기 짝이 없었다.

“이놈이!”

고훈이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났다. 조광조는 그러나 고훈의 노여움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임승준을 따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리에 앉아 눈치를 보던 내부대신 김안국도 슬며시 자리를 일어났다.

“그만 진정하시오. 저 위세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외다.”

쫓아 나가 멱살이라도 잡으려 하는 고훈을 재상 남곤이 잡아 앉혔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 어찌 참겠소. 새파란 애송이가……!”

“저렇게 위세를 부리는 것이 도리어 그자들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오. 도리도 지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하는 것이오.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하고 절개를 내세운 들, 중용(中庸)의 덕이 없으면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소.”

남곤은 분을 삭이지 못하는 고훈을 달래고서는, 시선을 옮겨 불편한 내색으로 앉아 있는 탁지부대신 고형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탁지부대신. 뭐라고 말을 좀 해 보시오. 대신이 저들을 편든 덕분에 일이 복잡해졌소이다. 예전에 정광필(鄭光弼) 대감이 재상으로 계시던 연간에 조광조를 들어다 쓰는 바람에 사림의 기세가 점점 거세져, 지금은 그 꼴을 참고 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소. 그런 전례가 있음에도 이제는 또 대감이 저들을 싸고돌아 일이 이 마당까지 이르렀구려.”

훈구당의 사람이면서 어째서 또 사림을 도와 일을 이다지 복잡하게 만들었냐는 힐난이었다.

“그, 그런……!.”

고형산은 발끈했으나, 할 말이 마땅찮았다.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에 그 뜻이 옳기에 도운 일이었다. 딱히 사림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양전 수적 사업은 더 공격해 봐야 얻을 것이 없소. 우리는 다음 판을 기다립시다. 저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오. 이것저것 다 입맛에 맞게 뜯어 고치고, 자연스레 권력을 늘리려고 할 것이니, 이내 여기저기서 반감을 사게 될 것이오. 우리는 그때만을 기다리면 될 일이올시다. 탁지부대신도 잘 생각해서 줄 서시오. 목이 달아 나냐 붙어 있느냐의 일이 될 것이오.”

남곤의 말에 고형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도 이제 조만간 절조와 목숨을 저울 양쪽에 매달아 놓고 그 무게를 재어 보아야 할 터였다.

1519년

소흥(昭興) 15년 정초(正初)

대한제국 황성부.

임승준 주도하의 정국이 파란을 일고 온 지도 어느덧 두 해가량이 흘러가고 있었다.

많은 말이 무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전 수적 사업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 영길도와 평안도에서도 이를 마쳐 보냈다.

이에 따라 세금이 처음으로 거의 정확히 걷히게 됨에 따라서 가경통보로 8천4백만 냥에 가까운 세수가 국고에 들어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사업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쑥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심 훈구파를 비롯한 사대부의 속은 쓰렸다. 추가로 확보된 세수의 대부분이 이들이 그동안 호구 제도의 문란을 이용해 탈세하던 세금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성과라고 한다면, 내지팔도의 정확한 국세(國勢)가 처음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내지팔도의 인구는 2,180만 명가량으로 추산되었다. 이 호적 조사를 바탕으로 내부의 호적국(戶籍局)에서는 최초로 국가 통계를 산출했는데, 이것을 연감(年監)으로 내었다.

이른바 《소흥십사년국세연감(昭興十四年國勢年監)》으로 속칭 《소흥통람(昭興統監)》이라 불리는 통계서였다.

이것은 사실상 근대적인 통계와 기존의 정치산술(政治算術)의 중간쯤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미 수십 년 전 세훈이 재상으로 있던 시절에 현도가 최해산의 후임으로 상공부대신이 되면서 전국의 상업과 공업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학술원 산학과의 학유(學諭), 특히 조진과 협력해 《동국계상산법(東國計商算法)》이라는 정치산술서를 저술했고, 여기에서 다루어진 기초통계학에 기반하여 1437년 정사년에 이미 전국의 상공부 사무국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정사연감(丁巳年監)》이 발행된 바가 있었다.

때문에 이번의 《소흥통람》은 이미 보급되어 있는 이러한 통계 기술을 바탕으로, 양전 수적 사업을 통해 확보한 양질의 정보를 가지고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가세(家勢)를 그 척도로 삼아서 《소흥통람》에서는 내지팔도의 인구를 크게 공경(公卿), 대부(大夫), 중인(中人), 평민(平民), 소민(小民)으로 나누었다.

가장 앞의 공경은 작위를 세습하거나 관직에 나아가 있는 자들의 호구수를 말하는 것이었고, 대부는 호적에 본관을 올린 사대부 집안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외 중인, 평민, 소민은 직업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땅의 소유 유무와 그 정도, 혹은 재산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그 조상이 농민인지, 상인인지, 아니면 노비나 백정 출신인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조사 결과, 공경에 속하는 이들은 총 920호 3,620인이었으며, 대부에 속하는 이들은 대략 12만호에 43만인이었다. 그 외 중인이 대략 200만인, 평민이 550만인, 그리고 나머지 1,200만 명이 소민에 속했다.

소민(小民)에 포함된 것은 거의가 경제적 기반이 없거나 소작을 부쳐 먹는 사람들인데, 이런 빈한한 계층이 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대부분의 전답(田畓)이 공경대부와 중인들에 의해 소유되고 있고, 그나마 땅이 있는 평민들도 손바닥만 한 자기 땅에 더해 남의 땅을 부쳐 먹어 생계를 잇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한 세기간의 이런저런 개혁으로 많은 땅이 일반 평민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었고, 이앙법의 도입으로 쌀의 소출도 많이 늘었지만, 그만큼 그 사이 인구가 2배 가까이 늘었기에 사실상 백성들의 삶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늘어난 인구는 간신히 부양되었지만 제대로 삶을 꾸리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각 지역의 번창하는 읍성(邑城)들을 벗어나면, 지방에는 대부분이 한두 칸짜리 옹색한 초막에서 백성들이 겨우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은 충청도로, 자기 땅이 있는 평민으로 통계에 포함된 550만 여 명 중 절반이 넘는 230만 명이 충청도에 있었다. 그에 반해 경상도는 전체 인구가 600만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수는 겨우 70만에 그쳤고, 소민의 숫자가 거의 500만에 달했다. 반대로 수탈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대부와 중인의 숫자가 가장 많은 것도 경상도였다.

이것은 1424년 세훈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충청도 공주의 대부인 안학기를 중심으로 일어난 변란의 여파로, 충청도 일대의 사대부들이 몰살의 화를 면치 못하고 땅과 재산을 내어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땅의 많은 부분이 가난한 소작농이나 속환된 사노비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그들이 고스란히 중인이나 평민 계층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반면, 경상도는 신라 때로부터 내려오는 강고한 계급 질서가 면면히 살아 있는 고장으로, 소위 명문대가들의 본향(本鄕)도 이곳에 많았다. 여러 차례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백성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지 않고, 군역을 진 다음에 군대에 그대로 남는 장정의 숫자도 경상도 출신이 많았고, 영진이나 북륙으로 도망치는 백성도 경상도에 많았다. 많은 경상도의 한민(閒民, 일이 없는 백성)들이 진서로 건너가 잡역(雜役)에 종사하기도 했다.

“나라의 부가 모조리 한 줌과 같은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백성들이 이리도 빈한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짐이 이번의 장계를 받아 보니 충청도의 백성들이 안락하고 생활이 안정되어 세금도 능히 내고 먹고 자는 일에도 부족함이 없으니, 마땅히 나라 전체가 충청도의 전례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황제 이면이 직접 나서서 이리 말할 정도였다. 황제는 자신이 지원해 추진했던 이번 정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간 공경대부들의 나라의 곳간을 거덜 내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자, 이를 빌미 삼아 국정에 개입할 여지를 늘리려고 시도했다.

전례 없이 내각회의에도 수시로 출몰하기도 할 뿐더러, 직접 추밀원의 의정(議政)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훈구당에서 올리는 서계에 재결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노골적으로 가지고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해 국정에 간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훈구당이 황제의 이런 대책에 대해서 강경한 자세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군권(軍權)이 황제가 아니라 신료들의 손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전 수적 사업이 끝나자마자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군정(軍政)의 개혁 문제였다.

“이번의 양전 수적을 통해 알게 된 바와 같이, 백성들이 과중하게 군역을 지고 있나이다. 나라의 곳간에는 돈이 없어 수십만의 정병을 거느릴 수 없으나, 예전 정해 둔 법대로 여전히 한창 일할 장정들이 모두 징병되어 2년간 둔전(屯田)을 일구며 허송하다 나오니 이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는 이들 모두에게 군복과 군량을 대어 줄 수 없어, 이미 오래 동안 각 진위대에서는 제각기 방책을 마련하여 땅을 일구고, 목화를 전매하거나, 혹은 병졸을 동원하여 공방(工房)을 꾸리고는 했나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근래에는 잘 이루어지지 않아 굶주린 장졸들이 새벽을 틈타 둔영을 이탈하여 민가를 약탈해 소와 닭을 잡아먹고, 진위대의 군관들은 군비를 대기 위해 벌여 둔 전매 사업이나 농사짓는 일에서 사사로이 이득을 취하여 배를 불리고 있으니 그 폐단이 이만저만 하지 않습니다.”

임승준은 황제를 직접 내알해서는 군제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세훈 당시에 계속되는 외부와의 전란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강화된 군제(軍制)는 백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군대에 들이는 돈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군역은 여전히 모든 장정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고 있었다. 군역을 지는 기간도 짧지 않아 2년에 이르렀다.

한때는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던 제도였으나, 그간 본토라고 할 수 있는 옛 고려 때부터의 영역인 내지팔도는 한 세기 가까이 전란을 전혀 겪지 않았고, 이미 나태해질 대로 나태해진 군부는 온갖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총탄은 지급되지 않았고 포는 녹슬었으며, 군복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많은 장졸들이 무명옷에 검은 칠을 대충 해다가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만에 가까운 대군을 무용하게 유지하고 있으니, 그 먹고살 궁리가 막막해 진위대 둔영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오, 온갖 사업에도 사사로이 손을 대고, 심지어는 근방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으니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굴러간다면 다행인데, 처음에는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손을 대었던 사업들이 군관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사대부가 출신으로 참교(參校)로 군역을 지러 가는 이들은 군역을 지는 동안 이러한 이득을 조금이라도 취해 나오는 한편, 반대로 일반 병졸로 복무하는 양민의 자제들은 피골이 상접해서 몸을 상해 나오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제국의 군대가 모두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육군에 비해 소규모로 유지되는 해군은 겨우 2만의 병력에 불과했으나, 그 함선은 근방의 바다를 성공적으로 제해(制海, 바다를 통제함)하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판옥선(板屋船), 귀갑선(龜甲船, 거북선), 그리고 교관선을 개조한 대함(大艦)이 지속적으로 건조되어 서쪽으로는 인도양으로부터, 동쪽으로는 대창해(大滄海, 태평양)까지 횡행하고 있었다.

해군력에 있어서는 당대의 어떤 나라보다도 수위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며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심왕가의 휘하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요동군(遼東軍)의 경우 자발적인 무기 개량과 군제의 개혁으로 수는 적으나 막강한 화력을 가진 정병들로 거듭나 있었다.

진서에 주둔한 진서군은 탄력적으로 구래의 제도(制度)를 잘 활용해 기강을 잡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지팔도에 자리한 스무 개가 넘는 진위대들은 제국의 핵심전력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망가진 군대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이들을 이끌고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탄식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조야에서 나오고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제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훈구당의 신료들의 권력 기반 중 하나가 바로 군부대신(軍部大臣)을 통한 군권의 장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강이 엉성한 군대이나마 40만의 병력을 손에 틀어쥐고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황제가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없으므로 인해 이들에게 대항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법부대신의 말이 옳도다. 군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일이다.”

황제가 권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각료들과 군대 사이의 결속을 끊어 놓던가, 하다못해 그 군대를 대대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황제는 임승준이 군제 개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마자 이에 찬동하여 조정을 다시 한 번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훈구당 대신들이 극렬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상 남곤은 질색하고 상복을 입고서는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나아가서 고두(叩頭, 머리를 찧음)하며 재상을 내놓고 낙향하겠다고 황제를 압박해 들어갔다.

훈구당의 내각대신들도 일제히 연명상소를 올리며 이 일을 계속 추진한다면 재상을 따라 관직을 반려하겠다고 나섰다.

일전의 제국이 수립되고 그 제도가 자리 잡을 때에, 신권을 강력한 우위에 놓고 황권은 미약하게 제한해 놓았다. 황권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잘 아는 진종 흥정제, 태종 가경제 모두 정사에 그다지 개입하지 않았다. 신권의 핵심에는 세훈에서 현도로 내려오는 강력한 심왕가가 있었고, 이들이 국정을 유능하게 잘 이끌었기에 민심도 이들의 편이었었다.

그래서 황제들은 그 안에서 안분지족하고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분상 중요한 사안들은 황제의 재결(裁決)을 거치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았고, 법적으로는 황제가 옥새를 찍어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내각과 추밀원에서 복잡하게 황제를 압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고, 황제가 하는 정치라는 것은 그저 내각에서 문서를 올리면 옥새를 찍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황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바로 재상이나 대신들이 사임을 할 때, 그것을 막거나 허락하는 일이었다. 예전에 현도가 재상의 자리를 내놓고 칩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경제가 만류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자신의 그런 권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물론 가경제는 현도의 뜻이 이미 정해진 것을 알고 더 이상 사임장을 물리지는 않았다. 이미 정치적인 실권을 지니고 있는 신료들이 굳이 황제를 압박하기 위해 사임장을 꺼내 들 이유가 없으니, 여태까지는 황제도 그저 사임장을 받으면 옥새를 찍기만 했다.

반면 지금의 정국은 달랐다. 노당과 소당으로부터 시작되어 훈구당과 사림당으로 나뉘는 당파정치가 계속되면서, 황제가 이들 권력 관계를 이용해 정치에 끼어들 여지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선대 황제인 가경제와는 다르게 젊고 패기에 넘치는 소흥제는 이것을 얼마든지 이용하고자 했다.

훈구당으로서는 그러한 소흥제의 의지를 간 보는 것을 계속해 왔고, 처음으로 자신들도 써 본 적이 없던 사임장이라는 압박 수단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양전 사업 때문에 내부대신 홍경주가 이 방법으로 황제를 압박했다.

“물러나고 싶다면 물러나시오. 그리고 홍 대신의 후임을 빨리 내각에서는 인선하여 추밀원에 보내고, 추밀원에서는 사람을 정해 짐에게 알리도록 하시오. 마땅한 사람이 올라온다면 재결하리다.”

황제는 홍경주의 탄원을 두 번 듣지도 않고, 무턱대고 그의 사임 의사를 수락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림계인 김안국이 앉으면서 양전 수적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훈구당은 그때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대신 홍경주 한 명이 자리를 사직하겠다고 압박하는 것과 재상을 포함한 대신 6명이 연명상소하여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압박하는 것은 상황이 달랐다.

여기에는 심지어 양전 수적 사업에는 협력했던 탁지부대신 고형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황제가 설마하니 이 사임장을 받아들여 정치적 도박을 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가 이들의 사임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훈구당 전체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포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뿌리 깊게 권력을 쥐고 있는 훈구당과 그 인척 세력들의 전반적인 반발을 불러올 것은 당연지사였다.

아무리 젊고 철없는 황제라지만 이런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훈구당 대신들의 그러한 생각은 빗나갔다.

“내각의 남은 대신들은 사람을 인선해 올리시오. 짐은 재상과 대신들의 사임장을 받아들였소.”

대전으로 나와 황제가 한 말은 겨우 두 문장이었다. 요컨대 ‘사람을 뽑아 올려라, 내가 저들을 잘랐다.’였던 것이다.

여태껏 자신들이 물러나겠다고 소청하던 이들이었으니, 이 상황이 되어서 다시 이것을 물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상 남곤을 비롯한 훈구당 대신들은 황망하게 얼이 빠진 채 탄식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첫날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둘째 날이 되자 분기가 탱천한 것도 당연했다. 순식간에 내각이 사림당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 판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각에 남은 대신들은 법부대신 임승준, 궁내부대신 조광조, 그리고 내부대신 김안국으로, 모두 사림당이었다. 내각에서 공석이 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추천해 올려야 추밀원에서 사람을 정해 황제에게 재결을 맡을 수 있으므로, 빈자리에 누굴 뽑을지를 정하는 것은 오롯이 이 세 사람이 되고야 만 것이다.

당연히 사림당에서 이를 기회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겉으로는 임승준, 조광조, 김안국이 인선해서 올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김굉필 이하 사림당의 거두 유생(儒生)들이 전부 나서서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인물을 천거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 대규모 인사를 어찌 단행하느냐를 두고 당연히 왈가왈부,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사림당이 이리 소란스러운 동안, 훈구당은 그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끼어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제 무덤을 파고야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내각이 일단 사림당패로 꾸려지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오호라, 어찌 이리도 시국을 몰라 스스로 화를 자초했는가?”

얼떨결에 재상의 자리를 저도 모르게 박차고 나와 자기 집 사랑방에서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된 남곤은 그저 처량하게 탄식할 도리밖에 없었다.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오로지 사림당색의 인물로만 채워진 천거록(薦擧錄, 천거할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을 받아든 추밀원에서는 훈구당 계열의 참의들마저도 어쩔 수 없이 그 인선(人選)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추밀원이 하는 일은 재상 및 내각대신의 자리의 결손이 있을 때, 남아 있는 내각 대신들이 협의해서 올린 천거록 중에서 사람을 골라 황제에게 올려 보내는 것이었다.

적절히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들이 골고루 올라와 있을 때에는, 추밀원에서 내각을 적절히 견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이번처럼 오로지 사림당계의 인물들이 올라와 있는 천거록에서는 누구를 뽑아 보아야 그 나물에 그 밥인 노릇이었다.

“재상(宰相)이 누가 되느냐의 문제만 남았소이다.”

한참을 천거록을 두고 입씨름을 하던 추밀원의 참의들은 특히 재상을 누구로 선임할 것이냐의 문제로 한참을 격론했다.

재상의 후보로 올라온 것은 임승준과 조광조였다. 훈구당계에서는 그나마 조광조(趙光祖)를 지지하고 있었다. 임승준이 워낙에 전면에 나서 개혁정국을 주도해 온 때문에 조광조를 그나마 온건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림당계에서도 조광조를 오히려 선호했다. 사실 사림당으로 분류되고 있는 임승준이기는 하나, 워낙에 산야에서 혼자 학문하던 사람인지라 그 생각이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었다.

사림당에서는 임승준의 거동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임승준이 벌인 일들이란 것이, 원체 사림당계의 관리들과도 의론하지 않고 직접 황제를 통해 벌인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임승준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김굉필이었다.

임승준과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기도 했고, 동시에 조광조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사림당의 당수(黨首)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임승준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 만이 임승준의 사람됨을 올바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훈구당에서는 임승준이 더욱 문제가 될 인물이라고 보아 반대하고 있지만, 사실상 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훈구당이 몰락하지 않게 적절히 균형을 잡아 줄 것은 조광조가 아니라 오히려 임승준이었다.

김굉필은 그러한 임승준의 생각을 진즉에 꿰뚫고 있었다. 임승준이 노리는 것은 사림당색으로 천하를 뒤덮는 것이 아니라 황제, 사림당, 훈구당 사이에서 적절하게 권력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황제, 내각, 추밀원이라는 제도적인 다른 축과 함께 굴러간다면 적절한 권력 분립으로 국가를 중용(中庸)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조광조는 사림당을 군자당(君子黨)으로 보고, 훈구당을 소인당(小人黨)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이번을 기회 삼아서 재상의 자리에 오르면, 젊은 패기로 일을 그르칠 확률이 높았다. 이 참에 아예 훈구척신을 몰아내고 도학정치의 세상을 열려고 할 터였다.

사림의 거두로서 김굉필은 당연히 임승준의 그것보다는 조광조의 생각에 훨씬 가까웠지만, 그러나 그는 조광조에게는 없는 연륜이라는 것이 있었다.

안팎으로 오랜 세월 정치라는 것을 피부로 느껴 온 김굉필은 훈구파가 비록 내각에서 축출당했어도,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몰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고 복권을 시도할 것이고, 추밀원에는 여전히 막강한 발판을 가지고 있었다.

조광조가 지나친 정책을 밀어붙이는 순간, 훈구당은 그것을 기회로 삼을 것이다.

김굉필이 우려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구구절절 훈구당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훈구당과 사림당이 모두 내심 조광조를 바라는 가운데에 홀로 임승준을 지지하는 것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김 참의께서 계속 임승준을 말씀하시더라도, 우리는 훈구나 사림이나 당색을 떠나 궁내부대신 조광조 경을 차기 재상에 올리는 것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이쯤에서 매듭짓지요.”

자기들끼리 합의를 보고 와서 이렇게 말해 버리니 김굉필은 더 이상 자기 주장만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폐하께 인선(人選)을 올리러 입궐하겠소.”

참의들이 내어 준 인선을 들고 궐전으로 올라가는 김굉필의 어깨가 달리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추밀원에서 결정한 인선을 보고서는 한마디를 물었을 뿐이다.

“왜 재상에 임승준을 올리지 않았소?”

황제 또한 내심 재상에 임승준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황권 강화의 근거를 임승준의 정치 철학에서 찾고 있던 황제였다.

물론 황제가 생각하는 전제군주로서의 황권과 권력을 이루는 솥발의 하나로서의 황권을 말하는 임승준의 생각은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것을 제 입맛대로 해석했고, 때문에 임승준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런 황제의 의중까지도 읽은 김굉필은 용안(龍顔) 앞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스며 나왔다.

“이리 결정했다면 나는 받아들이겠소. 조광조 경은 궁내부대신으로 재직하며 짐의 뜻을 많이 받들어 주었으니 그 또한 좋은 인선이라 생각하오.”

다행히 황제는 김굉필의 무례를 맘에 두고 있지 않은 듯했다. 황제 앞에서 한숨을 내쉰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김굉필은, 황제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인선을 윤허하겠다고 하자 한숨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관보(官報)를 통해 공시된 새로운 내각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제10대 내각 재상(宰相)에 조광조, 법부대신에 임승준을 유임, 내부대신에도 역시 김안국을 유임, 외부대신에는 한충(韓忠), 상공부대신에는 김정(金淨), 탁지부대신에는 김식(金湜), 궁내부대신에는 홍언필(洪彦弼), 문부대신에는 유인숙(柳仁淑), 그리고 군부대신에는 박훈(朴薰)이 임명되었다. 이 모두가 사림의 신진사류(新進士類)로, 나이 마흔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다.

국초 이래 이와 같이 젊은 유생들에 의해 나라가 이끌어지게 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1519년

소흥(昭興) 15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조광조가 임승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펼칠 것이라 기대했던 훈구당의 기대는, 조광조가 재상의 직위에 오르자마자 깨어지고 말았다.

승천을 기다렸던 용이라도 된 마냥 조광조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일 당장 입궐하여 황제 폐하께 조칙을 받아 군제 개혁을 단행하겠소.”

임승준이 본래 제안하고 추진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자신이 재상에 오른 이상, 앞장서서 일을 뚫어 줄 임승준의 필요를 더 이상 크게 느끼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황제가 자신의 말을 다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조광조는 군제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군제 개혁의 방향은 임승준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일전 조정의 칙사(勅使)로서 몽골 문제 때문에 요동을 들락거리던 때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제3대 심왕인 문덕왕(文德王, 서윤)의 치세를 왕도정치의 표본으로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치세가 동안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지금의 요동이 풍족한 땅으로 성장하고, 그 힘을 입어 군대가 강성한 것도 보았다.

지금은 비록 제국 내의 번국(藩國)이기는 하나, 이미 화폐 제도가 다르고, 군대도 거의 독자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제국 내의 번잡한 정치 논리나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요동에서는 굳이 따라서 받아들이지 않고 시의적절하고 실로 대의에 맞는 정치를 추구했기에, 지금과 같이 강성한 때를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조광조의 생각이었다.

“요동은 요동이고, 내지는 내지올시다.”

조광조는 일전에 요동에 들어갔을 때 들었던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간 인구가 늘었다 하나 겨우 300여만 명에 불과한 요동이 그리도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군사와 경제, 정치, 학문 모두가 탄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광조는 지금 이상으로 요동이 독자적인 길을 걷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앞으로 황성의 정부는 군사력으로도 요동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군사수를 줄이는 것은 백 년을 내다보고 짜는 계획이 아니었다. 중앙이 변방보다 강력해야 변방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요동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영진, 탐라, 진서 같은 도독부뿐 아니라 상남이나 숙주 같은 속주(屬州), 유구 같은 조공국들도 언제고 제멋대로 굴려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느슨하지만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짜여 있는 제국의 체제를 무너뜨릴지 몰랐다.

같은 군제 개혁이나, 다들 동상이몽을 하고 있으니 조광조 식의 군제 개혁이 추진되자마자 황제와 임승준 모두 당혹하고 말았다.

“국상(國相)은 오히려 군비를 확충하고, 내각 군부에서 권한은 한 움큼도 내어 주지 않으려 하오.”

오죽하면 황제가 임승준을 따로 불러 독대하는 판국이었다.

“신이 감히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말해 보시오. 짐이 원했던 것은 바로 내각이 군대를 틀어쥐고 막대한 자금을 소모하면서 짐의 목줄을 잡고 흔드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었소. 짐이 재상으로 경이 선임되기를 바랐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소. 조 재상은 지금 길이 많이 어긋나게 가고 있소.”

황제는 조광조의 개혁을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이 드릴 말씀은 가히 따로 없습니다. 그저 이제는 한 가지 일은 마무리 지었으니 그만 산으로 돌아가 처사로 남고자 하니 이만 대신의 자리를 물려 주십시오.”

임승준은 조정에서 개혁정국을 주도해 왔었지만 이제는 황제와의 견해 차는 물론이거니와 조광조와의 견해 차도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사림당과 함께하기는 했었지만 스스로는 당색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이제 조정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나 다름없었다.

조광조가 재상이 되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일순간에 발언권이 크게 줄어든 임승준은 당혹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자신을 불러다가 황권을 옹호하는 나팔수로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자신이 추진했던 군제 개혁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조광조의 모습을 보며 임승준은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이름을 빈 사림패권주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짐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경은 그만 물러가시오.”

자신의 말을 듣기는 커녕 오히려 사직을 청하는 임승준의 말에 황제는 그만 기분이 조금 상했다.

쫓겨나듯이 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임승준은 김굉필을 만나러 북촌(北村)에 들어섰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헤아려 줄 사람은 김굉필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김굉필은 당대 영남학파의 종주였다. 영남학파의 학맥은 그 뿌리가 깊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의 백이정과 안향(安珦)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현(李齊賢)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목은 이색(李穡)으로 내려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를 거쳐 지금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라고 할 수 있는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에게로 내려오게 된다.

지금 정치 일선에서 움직이는 사림당의 인물들은 거의가 바로 이 김종직의 후인(後人)들로, 그 1세대가 직접 김종직의 문하에 있었던 김굉필(金宏弼) 같은 이였고, 그 2세대가 바로 조광조의 세대였다.

조광조의 패권적 개혁정치론은 비교적 온건한 바로 윗세대인 김굉필에게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내각 인선을 추릴 때 우려한 점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젊은 나이와 지나친 이상주의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좋은 조합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늘 왕도(王道)를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김굉필이었지만, 왕도를 이루는 일에는 중용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에게는 그것이 아직 부족했다.

“임 공. 어서 드시오.”

임승준이 어떤 이유로 찾아왔을지 짐작하고 있는 김굉필이었기에 두말 없이 임승준을 사랑방으로 불러다 앉혔다.

함께 김종직을 스승 삼아 공부했던 동문이었다. 비록 임승준은 사림의 적통이라 할 수는 없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김종직 문하에서 동문수학했으니 가히 형제와도 같은 처지였다.

“술 한잔 주겠는가?”

“물론이다마다. 그렇잖아도 술 한잔 생각이 났으이.”

“어인 일로?”

김굉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임승준이 물었다.

위로받고자 온 길이었으나 도리어 김굉필도 말벗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강백진(康伯珍) 선생께서 낙마(落馬)하셔서 그만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방금 받았네.”

“아……!”

강백진이라 하면 임승준에게도 선배이자 스승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심양문리과대학에서 그리스 학자들의 문하에서 법을 깊게 공부했고, 한경조의 학통(學統)에 속했다.

이미 재학 중에 《법리촬요(法理撮要)》라는 명저를 써 그 명성이 드높았고, 육전학당을 거쳐 대구의 경상도 법원에서 예비 판사로 있던 때에 김종직과 만나 학문을 교류하면서, 서로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사이였다.

이 둘의 교류로 인해 김종직은 전통적인 영남학파의 정통주의 성리학과 신학문의 절충을 시도해, 지금의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도학적 경세론(經世論)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과 강백진은 황성부에도 남산 아래에 성양재(成樣齋)라는 문당(文堂)을 열어 제자를 받아들였고, 이들 문하에서 성장한 것이 바로 한 세대를 풍미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 이맹전(李孟專), 이종준(李宗準) 같은 영남학파의 거유(巨儒)들이었다.

임승준 또한 모시던 스승인 김시습의 타계 이후 그가 추천했던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강백진에게도 사사받을 기회가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김종직보다도 사실 강백진이었다. 그러니 만큼 김굉필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임승준은 그저 듣는 순간 관을 벗고 하염없이 남쪽을 향해 머리를 부딪치며 울 뿐이다.

“그만 다 울었는가?”

한참을 통곡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든 임승준의 술잔에다가 김굉필이 씁쓸함을 가득 담아 술 한 잔을 붓는다.

“환갑이 된 나이에 무슨 영달을 누리고자 이리 관직에 나와 부끄러움을 보는고. 사대관모를 차고 관청에 나올 것이 아니라, 스승을 뵈러 내려가 보필을 했어야 하는데……!”

“궐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만.”

김굉필은 임승준이 관복을 입고 들렀을 때부터 대충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폐하께 청했으나 가납치 않으시네.”

“폐하께서는 자네에게 많이 의지하고 계시네.”

“내가 감히 해드릴 수 없는 일이네. 폐하께서는 자네 제자들에게 지금 조금씩 역정을 보이고 계시네. 그래서 날 불러다가 그들을 견제하려고 한 것일세. 나는 이런 정치놀음은 이제 신물이 나네. 이미 양전 수적은 모두 끝나 내 할 몫은 했으니, 이만 물러가 산이나 구경하고 살았으면 하는데 시절이 나를 돕지 않는 듯하네.”

“아, 광조가 지나침을 모르는구나!”

김굉필은 임승준의 말을 듣고서는 술잔을 쓰게 들이켰다. 자신의 나이 어느덧 일흔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임승준보다 몇 살을 더 먹은 나이었다. 이미 재상이며 내각대신들을 꿰차고 앉아 있는 제자들을 이미 자신의 손을 벗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정국이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네. 내가 하고자 했던 중용정치는 힘들어졌네.”

임승준의 씁쓸함 만에 김굉필은 말을 아꼈다. 그저 지금은 술 상대를 해 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김굉필은 다음 날 황궁을 찾아가 임승준을 대신해 그의 사직을 황제에게 주청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이번에도 역정을 냈다.

“임 공이 짐이 가납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관철하고자 김 참의까지 내게 보내어 이리 못살게 군단 말이오? 어서 돌아가시오!”

그러나 김굉필이 늙은 몸으로 섬돌 아래에 엎어져 밤늦게까지 엎드려 비답을 기다리니, 황제도 그만 이길 수가 없었다.

“어허……!”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임승준의 낙향을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굉필이 황제를 설득한 덕분에 임승준은 정치적 난국을 피해 영변 약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임승준은 뒤에 몰아쳐 오는 파도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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