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장 기묘사화(己卯士禍)
「○신상(申펡)【밤에, 궁내부 판임관(宮內府判任官)이었던 신상(申펡)을 갈아서 궁내부상서대신서리(宮內府尙書大臣署理)로 삼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남곤(南袞)을 다시 내각재상서리(內閣宰相署理)로 서임했으나, 다 하비(下批)하지 못하고 구전(口傳)만 하였다. 성운·김근사(金謹思) 등도 이와 같았다.】 이 뒤에 와서 곧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조광조 등은 고서(古書)만 보고 지치(至治)에 이르게 하고자 하였으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진하여 세상을 경력(經歷)한 일이 없으므로 도리어 인정(人情)을 어겨 들끓게 한 잘못은 과연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죄주는 것이 괜찮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이미 의논해서 한 것이니 조정의 처치대로 해야 한다.” 하였다.
○申鏛【夜, 鏛以宮內府判任官, 遞爲宮內府尙書大臣署理, 南袞爲內閣宰相署理. 皆未下批, 只口傳也. 成雲, 金謹思, 等亦倣此.】後來, 乃啓曰:“臣見光祖等, 只看古書, 欲臻至治, 而年少驟登, 顧無涉世之事, 違拂人情之失, 則果不無矣, 然以此罪之, 其何如?” 皇上曰:“朝廷已議爲之, 當如朝廷處置.”」
―《경종실록(景宗實錄)》, 33권,
소흥(昭興) 15년(1519) 11월 15일 일곱 번째 기사
1519년
소흥(昭興) 15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
조정이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당의 젊은 도학자들에게 넘어간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강압적인 군제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의 상학(庠學)에서 가르치는 주자학의 비중을 높였다.
황제의 신임을 샀기에 차지할 수 있었던 대권이었으나, 여름이 지날 무렵에는 내각 각령(閣令)으로 추밀원을 제약하려는 시도에 이어, 국법을 고쳐 황제의 권한을 법으로 규제하고자 했다.
신도정치(臣道政治), 즉 신료가 국가를 이끄는 정치를 견고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작위를 가진 공훈이 있는 귀족(貴族)들이 이끄는 추밀원의 활동을 제약하고, 나라의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언제고 황권을 행사하려 들 수 있는 황제의 날개도 꺾으려는 계산이었다.
귀족, 공훈 세력이 많은 훈구당의 척신들은 이른바 소인의 당이므로 이 신도정치의 주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오로지 도덕적인 이상주의로 무장한 사림들만이 국정을 가장 깨끗하고 투명하게 이끌 수 있으며, 나라 전체를 올바른 성세(聖世)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그들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승준 같은 타협주의자도 있어서는 안 되었으며, 황제의 전제(專制)도 허락할 수 없었다.
높은 교육을 받고 도덕적으로 무장된, 선비들이 내각의 대신들로서 국정을 협의해 이끄는 것만이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이 전방위적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내각에 사람을 넣지 못한 훈구당은 물론이거니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추밀원도 막아 세울 수 없었다.
황제 입장에서도 자신이 들어다 앉혀 놓은 사림들을 이제 와서 적대시하며 훈구당을 끌어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이것을 조율해 줄 사람으로 임승준을 간절히 원했지만, 김굉필까지 나서 임승준이 관직을 사임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는 바람에 이를 만류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듬해부터 각 진위대의 병력을 2만 명 선에서 5천 명 선으로 줄이고, 각 진위대의 독립적인 재정 운용을 금지하며, 군역을 지는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인다고 각령(閣令)이 떨어졌다.
군역을 지러 간 병정들은 좋아할 일이었지만, 기존의 제도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던 군부의 수뇌들은 당연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광조는 전권(專權)을 본의 아니게 남횡하여, 기존의 군 질서를 해체시키는 데에 갖은 애를 다 썼다.
기습적으로 군부 내의 젊은 장교층의 동조를 이용해 군부의 장군들을 각종 죄목을 걸어 연행하고, 처벌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옷을 벗겼다.
군부의 중심, 특히 육군청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고 나자 지방에 산재해 있는 진위대의 장교들도 뒤숭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각 부대가 독립적으로 편재되어 있는 탓에 자신들이 혹여 이 일에 반감을 품고 사사로이 군대를 동원해 황성을 들이친다 하더라도, 다른 진위대들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어 함부로 군대를 일으킬 수 없었다.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진위대의 제장(諸將)들은 황성부의 단호한 조치를 미적지근하게나마 수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한 군졸(軍卒)의 몸이었으나, 이제 이렇게 미천하게 버려지니 감히 부끄러움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자고로 나라의 국정을 이리 문란하게 행한 전례가 없는데 이를 막지 못해서 어찌하겠습니까?”
육군청장에서 물러나 옷을 벗게 된 전양목(全梁穆)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남곤을 찾아가서는 하소연을 했다.
전양목과 비슷하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에게 밀려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집에서 소일을 하고 있던 그였다.
“독 위에 물을 계속 붓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흘러넘치고 마네. 조금만 기다리 보게나.”
전양목을 다독이며 남곤은 그리 말해 보았지만, 자신도 뾰족한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류(時流)가 심상치 않음을 읽어 내는 촉각은 남아 있었다.
조광조가 국정을 전횡(專橫)한다는 소리가 조야(朝野)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물론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들은 아니었다.
군제 개혁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었고, 비슷하게 그가 손을 대려 하는 교육제도나 조세제도, 관직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으로 예전에 비해 수탈과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고, 걷히는 세금들 중 많은 부분이 흔적 없는 곳에서 전용(轉用)되기 일쑤였다.
교육제도나 관직제도도 매한가지라, 처음에는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학교에서 오랜 기간 충실히 교육을 받은 이들을 관료로 뽑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잘 굴러갔다.
그러나 황성부 내의 소위 4대 학당을 비롯한 지방 상학(庠學)에서 갈수록 사대부 자제의 비중이 늘고, 소위 사금(謝金)이라 불리는 비공식적인 학비까지 걷으면서 일반 대중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매우 힘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특히 황성부 내의 4대 학교의 우수한 졸업자들에게 사실상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훨씬 많이 주는 지금의 제도는 음서(蔭敍), 즉 공훈이 있는 조상 덕에 타고난 핏줄로 관직에 등용되던 옛 제도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계 젊은 대관(大官)들은 우여곡절 끝에 내각을 장악하고 추밀원을 압박해 이러한 문제들을 고치기 위한 개혁에 손을 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도덕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학적인 정치를 추구해 세상을 이상적으로 바꾸려는 데에 있었다.
정치적 타협은 전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의 반발을 군자답지 못한 처신이라며 면박이나 주기 일쑤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대권을 쥐어주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황제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제의 목적은 개혁보다는 황권의 강화에 있었다. 사림이 정권을 쥐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개입의 수단을 확보한 황제는,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정사에 간여할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임승준으로부터 시작해 조광조의 사림 내각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황제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발판을 다지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황제에게 늘 도학적인 왕도정치만을 요구했을 뿐, 황제가 권한을 확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줄곧 개혁론만 외쳤을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교적 도학정치(道學政治)는 누구나 자신을 갈고닦으면 군자의 덕목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군자가 된 이들이 신료로서 위로는 황제를 덕화(德化)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敎化)시켜 군자의 길로 이끌어야 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신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했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대신들이 황제에게 기대한 바는 바로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황제가 전제를 하게 되면 패악한 폭군이 나와도 이를 견제할 수 없고, 따라서 왕도정치가 무너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상적인 덕화정치를 펼치는 군주의 자리는 딱 필요한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훈구당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이었던 황제와 이들 사림 간의 신뢰 관계는 이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짐의 밀지(密旨)를 긴밀히 남곤과 심정(沈貞) 등에게 주어서 늦은 밤 긴밀히 입궐(入闕)하도록 해라.”
황제가 이를 갈고 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저 훈구당이 장악하던 대권이 사림당에게로 넘어간 꼴밖에 되지 않았다. 군 개혁을 통해 입지를 늘려 보려던 황제는 군개혁의 나팔이 임승준에게서 조광조로 넘어가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자 이미 심통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국법을 고쳐 황제의 권한을 제약하고 명시하겠다고 나오자 뿔이 단단히 나고야 만 것이다.
전에는 내각의 총사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통해 개입할 여지를 만들 수 있던 황제였지만, 이미 제도를 장악하고 움직이는 사림당을 통제할 방법은 지금 그에게는 없었다.
황제 이면은 처음에는 임승준을 통한 사림당의 통제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임승준이 이를 마다하고 정치적 난장판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낙향해 버리자, 황제에게는 한동안 꺼낼 패가 없었다.
그러나 사림당의 패권적인 개혁정국에 자연스럽게 반발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그것을 주시하고 있던 황제는 이제 다른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제 자신이 사림들을 도와 몰아내었던, 훈구당의 척신들과 친위반정(親衛反正)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폐하, 불러계셨나이까.”
황제의 밀지를 받은 훈구당 척신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가 야밤을 틈타, 평소에는 닫아 놓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은밀히 황제를 찾아왔다.
“짐이 그대들을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는 잘 알고 계실 것이오.”
황제는 다 알고 오지 않았냐는 투로 이들 노신(老臣)들을 슬며시 압박해 들어갔다.
“저희는 그저 부르심을 받고…….”
남곤, 심정, 홍경주는 황제가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 정말 짐작을 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내심 자신들을 이용해 사림을 몰아낼 생각이 있지는 않을까 여기기는 했지만, 반대로 황제가 파 놓은 함정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이들은 일전의 사태를 통해서 이 젊은 황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황제는 어떻게든 권력을 확대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껏 그 목표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단을 통해 충실히 달성해 가고 있었다.
“이리 들고 오게.”
노신들이 고개를 그저 주억거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황제는 내관에게 일러 쟁반을 하나 들고 오게 했다.
황제는 대신들 앞에다가 이 쟁반을 놓았다.
쟁반 위에는 뽕나무 잎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잎사귀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 형상대로 좀이 먹어 있었다.
남곤 등은 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여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것을 뚫어지게 보던 홍경주가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황제에게 엎드려 조아린다.
“폐, 폐하! 이런 괴사를 소신은 이제껏 보지 못했나이다!”
홍경주는 본디 머리가 재빨리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뽕잎의 좀먹은 글씨를 보자마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다.
조광조의 조(趙)를 쪼개면 주(走)와 초(肖)가 된다. 따라서 주초위왕이란 말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을 황제가 내밀었다는 것은, 당연히 작정하고 자신들을 불렀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정말 하늘의 계시이든 누가 작정하고 만든 것이든 혹은 음모를 꾸미기 위해 황제가 직접 작정하고 내민 것이든 그러한 뒷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이제 황제가 사림들의 편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남곤과 심정도 그 자리에서 엎어지며 황제에게 읍소한다.
“이는 가히 모반을 꾀하는 것이나 다름없나이다. 이런 역모를 획책한 자들을 잡아서 벌주어야 마땅하옵니다.”
“감히 종사를 뒤엎으려는 이러한 모리배들의 작태에 소신, 그저 눈물이 그치지를 않사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엎어지며 들썩이자 황제는 속으로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짐이 어찌해야 좋겠는가?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를 묻기 위해서였네. 국법에 따라 짐이 내각을 통제할 방안이 없으니, 이들을 치리할 방법도 없네.”
황제의 말에 훈구척신들은 그제야 머리가 번쩍였다.
중요한 것은 황제가 어떻게 내각을 몰아내게 도와줄 것이냐는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니 만큼 신중해야 했다.
“지금 유일하게 도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졸은 시위대(侍衛隊)뿐으로, 이들의 대장(隊長)인 장계(張溪)는 이번 군제 개혁에 반발하여 스스로 관을 벗고 사흘간이나 대궐 앞에서 고두(叩頭)하던 자이나이다. 그가 이 일을 계기로 사직하게 되어, 군역에서 물러가게 되었으나, 그 후임이 마땅치 않아 아직 시위대의 대장이 체직(遞職, 직을 바꿈)되지 않았나이다. 시위대의 통솔권이 장계에게 아직 있으니, 폐하께서는 그를 불러 용단을 내리십시오.”
이번에도 홍경주가 읊조린다.
이때만을 기다리던 그였다. 그는 내심 이 장계를 움직여 자신이 사림당에 대항한 반정을 할까도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나 자신이 주도해 일을 벌이면 실패할 경우 대역죄로 참형이오, 성공한다 해도 모반의 혐의를 씻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 판국에 황제가 직접 방도를 묻고 있으니, 황제를 업고 이 일을 벌인다면 대의에도 명분이 있는 일이오, 사림당도 확실하게 몰아넣을 수 있었다.
군부에서는 사림에 대한 반발이 팽배하니, 이 일을 막아서겠다고 도성으로 올라올 진위대도 없을 터였다. 오로지 지금, 도성 내에 주둔하고 있는 유일한 부대인 시위대의 병력을 움직여 내각을 폐쇄하고 사림당을 추포(追捕)하여 대역죄인으로 몰아붙이면 될 일이었다.
“……!”
홍경주의 대담한 발언에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남곤과 심정마저도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홍경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서 황제의 결단을 바란다는 뜻의 강고한 눈빛만 담담히 흘리고 있을 뿐이다.
“좋소. 그리하리다. 내가 옥새(玉璽)를 찍어 지금의 내각대신들을 모두 파직하고, 이들을 대역죄로 추포하라 이르겠소. 남곤, 그대를 지금부로 내각재상서리(署理, 임시 관직)에 보임하고, 신상(申鏛)에게는 궁내부상서대신서리, 홍경주에게는 군부대신서리, 심정, 그대는 법부대신서리로, 그리고 김근사(金謹思)는 내부대신서리로 임하니, 지금 즉시 신상과 김근사를 궁내로 들라 하고, 시위대에 변통하여 죄인들을 잡아들이라 이르시오.”
황제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을 받은 새로운 대관들은 각기 관직에 남아 있거나 쫓겨났던 훈구당 척신들을 모두 줄줄이 연통해서 입궐하게 한 뒤, 황제의 조칙(詔勅)이라는 이름으로 반정을 선포했다.
그 사이, 내관을 대동해 황제의 조서(詔書)를 들고 간 홍경주는 내각군부대신서리의 이름으로 시위대장 장계에게 황실을 호종하고 죄인을 잡아들이라는 명과 함께, 황성부 일대가 소요하지 않도록 병졸을 동원하라 명했다.
“신, 삼가 황명을 받들어 일을 수행함에 있어 한 치 모자람도 없이 하겠나이다!”
때만 기다리고 있던 남계였다. 당연히 이를 거역할 이유가 없었다.
남계의 명에 따라 즉시 도성 안에 있던 2만의 시위대가 궁궐을 에워싸고 접근을 엄금하는 한편, 도성 길가로 흩어져 역적으로 지목된 사림당 대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조광조를 비롯한 기존 내각대신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모두 잡혀 들어와 하옥되는 처지가 되었다.
서소문(西小門) 근처에는 일명 도옥(都獄)이라 불리는 경비가 삼엄한 감옥이 있었고, 이곳에 갇힌 이들은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직접 간언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요청했지만 감히 듣는 이가 없었다.
이렇게 사림당의 젊은 대관들을 잡아들여다 놓고 황제는 친히 친림내각(親臨內閣)을 구성해서 정무를 주재했다.
경복궁 근정전에 도열한 백관(百官)들 중 많은 이들이 사림의 집권과 함께 밀려났던 훈구당의 척신들이었고, 이들은 제각기 황제의 명에 따라 복권되어 들어앉게 된 것이었다.
또한 추밀원의 원로들도 황명을 받고 이 자리에 불려 나왔는데, 이들 중에는 훈구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의 재화(災禍)를 간신히 비껴 나간 사림당의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중도적인 입장인 정광필(鄭光弼)도 있었다.
“짐이 대신들을 이리 불러 모은 것은 모반을 꾀한 죄인들을 어찌 치리할 것인지 고견을 듣기 위해서요. 설사 죄인들과 사사로운 인연이 있다 한들, 대역에 모반되지 않은 경들에게까지 죄를 묻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은 죄가 확정된 이들을 어찌해야 할지만 논하도록 하시오.”
세훈 이래로 황제가 직접 이렇게 정무를 주재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세훈을 정점으로 한 신료 집단이 똘똘 뭉쳐서 정사(政事)와 군사(軍事)를 모두 장악하고 있던 때에는 당연히 그럴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나 당파정치가 길어지면서 지금의 황제 이면은 당파정치를 이용해 정국에 개입할 방법을 알아냈고, 결국 이렇게 친위반정을 도모해서 군대를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죄인들은 천하의 대역죄를 지은 이들이니, 마땅히 사사(賜死, 죽음을 내리는 일)하여야 할 줄 아뢰옵니다.”
이번 반정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는 홍경주가 앞서 나가 황제에게 읊조리며 말했다.
홍경주의 말에 좌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 정광필, 감히 읍소(泣訴)하옵니다. 저들의 잘못은 막중하나, 죄로 말하자면 그저 도리를 따지고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니, 죽음을 내리기는 과한 줄 아뢰옵니다.”
정광필은 재상으로 있던 시절에 조광조를 조정에 불러다가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준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이후 재상에서 물러나 교동(橋洞)의 집에서 머물며 매와 난을 치며 조용히 지냈지만, 간언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의견을 냈던 사람이었다.
정광필이 지니고 있는 그간의 공적과 명성 때문에 백관들의 귀는 순간 정광필에게로 기울어져 갔다.
“다른 이는 없는가?”
온화한 대책을 권하는 정광필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던 황제는 애써 못들은 척하고서는 다른 대신들을 재촉했다.
“법전에 따라서, 대역죄인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제도법원(帝都法院)에 특별 법정을 열어 모든 내각 대신과 추밀원 의관(議官)들이 참례한 가운데 직접 판시하도록 되어 있나이다. 부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율례를 따르도록 하시옵소서.”
아직까지 내각이 임시로 구성되어 있기에, 법부상서대신이 아니라 법부상서대신서리로 재직되어 있는 심정(沈貞)이 나와 말했다.
여기서 의론할 것이 아니라 율례에 따라서 법정에서 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황제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황제가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되있던 것이 대역죄였다. 거기에 아직까지 죄가 추정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시선을 돌려서 조광조를 비롯한 이들이 대역죄인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여러 대신들은 속으로 헤아리고도 남았지만, 아무도 함부로 나서서 조광조를 변호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관모를 벗고 엎어져서 울며 이를 막아서는 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조광조의 스승이자 사림의 종주(宗主)인 김굉필이었다.
이 늙고 추레한 노신(老臣)은 상투를 풀어 헤쳐서 백발을 어깨 밑으로 떨어뜨리고서는 눈물로 황제에게 호소했다.
“신, 제자를 잘못 가르쳐 이렇게 늙어 부끄러움을 보게 되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로 말씀드리자면, 조광조를 비롯한 대관(大官)들은 대역죄의 혐의를 받고 있을 뿐, 그것이 확연한 것은 아니오니 부디 이를 사전에 심리(審理)하여 법정에 세울 수 있도록 하소서. 이들이 반역죄가 마땅하다면 친국(親鞫)에 서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정사를 잘못한 죄로 친림재판에 설 이유가 없나이다. 황제께서는 통촉하여 이들의 죄상을 명확히 하고 재판에 세울 수 있도록 하소서.”
김굉필이 간언하나, 황제는 더 듣지 않았다.
직접 대역죄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세워, 직접 전례 없던 친림재판을 통해서 황권을 시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황제는 이것을 물리고자 할 생각이 없었다.
“이만 듣지 않겠소. 짐이 사흘 뒤에 제도법원에 친림(親臨)하여 재판정을 열 것이니, 내각 대신들과 추밀원 참의들은 모두 재판정에 참례하여 국문(鞠問)을 도우시오. 그동안 국청(鞠聽, 죄인을 심리하는 기관)을 열어 이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놓겠으니, 더 이상 대신들은 중언부언하지 마시오.”
황제의 말은 쌀쌀하기 짝이 없었다. 국청을 열어서 죄를 심리하겠다고는 했으나, 이것이 사실상 반역죄를 확정 짓겠다는 소리인 줄 알아듣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겨우 사흘의 말미밖에 주지 않았으니, 그동안 기소문(起訴文)을 작성하기도 빠듯한 노릇이었다.
사흘 뒤, 이미 공시된 대로 황제가 직접 칙령으로 재판정을 열었고, 반역죄로 기소된 사림당의 내각대신들은 줄줄이 사로잡혀 들어와 오라에 묶인 채 꿇어앉혀졌다.
황제는 격정(激情)을 내며 이들의 변호도 듣지 않고, 재갈을 물린 채로 판시(判示)를 내렸다.
영문을 모르고 잡혀들어 왔던 조광조를 비롯한 내각 대신들은, 황제가 직접 나와 그들을 판시하는 것을 보고서는 그제야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믿었던 황제가 이제 직접 그들을 내치고자 벌인 일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조광조와 김식(金湜)은 사약을 받게 되었고, 박훈(朴薰)은 교형(絞刑)에, 나머지 김안국, 한충, 김정, 홍언필 등은 모두 절도(絶島, 외따로이 떨어진 섬)이나, 영진도독부의 험한 북방산림으로 유배령이 떨어졌다.
그중에서도 김안국은 특별히 새롭게 개척된 창해 너머의 영주(瀛洲)로 보내져 그곳에서 다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조광조는 재판을 받은 뒤 석 달간 도성의 옥중에 갇혀 있었다. 결국 예정된 날이 되어 사약을 받아 들고서는, 한 수의 절명시(絶命詩)만을 남기니 바로 다음과 같았다.
愛君如愛父 임금을 아버지같이 사랑했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걱정했다.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땅에 내려와
昭昭照丹衷 밝게 비취어 내 속마음을 알아주리니.
정치적 주체로서의 황제의 부상, 그리고 훈구당의 일시적 몰락과 그에 이은 사림당의 개혁, 그리고 연이은 훈구당의 부활로 시종일관 어지러웠던 이 정국은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인사들의 죽음과 유배로 끝을 맺으니, 소흥 15년, 기묘년에 있었던 일이라, 후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불리게 되는 것이었다.
1523년
소흥(昭興) 19년 중추(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 아름다이 핀 꽃도 채 열흘을 붉지 못하는 법이다.
황제가 기묘사화를 통해 대권을 쥐게 되었으나,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어렵사리 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제는 다시 남곤(南袞) 등을 탄핵해 자리를 물러나게 한 다음, 김안로(金安老)를 등용해 대권을 주었다.
김안로는 능력 있고 정치에 재주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만큼 노회하여 재물을 밝히고 권력에 대한 탐욕이 지나쳤다.
집을 지나치게 꾸미고 사치하느라 온갖 전횡을 저지르니, 사방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황제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김안로를 그간 적절히 활용했으나, 김안로의 권세가 지나쳐지고, 김안로를 등용한 황제에게까지 원성이 미치자, 이내 또다시 반정을 획책하여 김안로를 사사시키고는, 이번에는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던 정광필을 다시 재상으로 불러다 앉혔다.
늙은 노신은 감히 부름을 거역치 못하고 허수아비 같은 재상 자리에 앉아 있다가 대사(大事)를 맡게 되었으니, 바로 그렇게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황제 이면이 기묘사화로부터 채 다섯 해를 넘기지 못하고 급사(急死)하고 만 것이다.
어의(御醫)들은 감히 조심스럽게 뇌에 출혈이 있어 황제가 가붕(駕崩, 황제의 죽음을 완곡히 이르는 말)하였노라 했으나, 백성들은 조광조의 귀신이 황제를 잡아채 갔다고 수군댔다.
선대 황제인 할아버지 예종(睿宗) 가경제(嘉慶帝)의 뒤를 이어 서른다섯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었다. 19년간 나라를 통치하며, 황권을 확대하고자 온갖 기를 소진하고 쉰 넷의 나이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만큼 부지런하고 국사를 돌보는 데에 정성을 쏟은 황제는 없었으나, 사실 그 이유가 황권의 확대라는 한 가지 초점에 맞춰져 있었기에, 그의 치세는 별 소득 없는 개혁들로만 이루어지다 말았다.
대신들을 숙청(肅淸)하고 다시 등용하기를 반복해 일관성 없는 정치가 계속되니, 백성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는 바가 없었다.
그나마 양전 수적 사업이 효과를 보아 민심은 안정되고 국고의 수입은 늘었으나, 그 이후의 군 개혁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고, 다른 문제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홍범(洪範, 헌법)에 규정된 권력 분립에 대한 것을 황제에게 유리하게 고쳐 놓지도 못했으니, 자기 자신은 황권을 운이 좋게 전횡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물려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였던 맏이가 스물둘에 폐렴으로 죽는 바람에, 손아래에는 겨우 다섯 살 난 인친왕(璘親王) 이제(李霽)만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황태자로 올리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긴급히 내각이 주재하여 이 인친왕을 황제로 옹립하고, 구제도(舊制度)의 복원을 선포해 버리니, 그간의 난국은 해결 없이 봉합되고 말았다.
시호는 경종(景宗)으로, 능지는 처음으로 풍수에 따르지 않고 도성 안에서 택지(擇地)하여, 인왕산(仁王山) 아래 기슭에 황릉역(皇陵域)을 조성하고, 숭릉(崇陵)이라 이름해 안장했다.
이렇게 신료 주도의 정국에서 탈피해 황권을 키우고자 시도했던 황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바로 경종(景宗) 소흥제이다.
1524년
건양(建陽) 원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황성부.
다섯 살 황제가 보위에 오르니, 그간 소흥제가 추진했던 황권 강화 정책도 공중에 흩어져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 새로운 어린 황제의 외척(外戚)들이 대권을 쥐고 흔들려 시도하였으나, 노련한 재상 정광필(鄭光弼)은 기묘사화 이전의 균형정치로 돌아가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며 정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안국이 황제를 받들어 전횡을 하는 동안,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사림뿐만 아니라, 정난공신(靖難功臣), 즉 황제가 주도한 친위반정에 공훈을 쌓은 남곤 등의 훈구척신들까지도 정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소흥제가 죽은 직후의 정치는 먼저 대권을 쥐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다행히도 당시 재상에 앉아 있던 정광필은 사사로이 욕심을 부려 정국을 흔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인물들을 다시 복권시킬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사림 계열을 다시 정치로 불러들일 수는 있었다. 그리고 훈구척신들 또한 정권에 기용하여 정치의 균형을 도모하고자 애썼다.
정광필의 수고로움 덕에 다행히 새로운 어린 황제 치하에서, 내각과 추밀원은 안정을 되찾고, 아슬아슬하나마 권력 분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 년여를 정국 안정화에 최우선을 두고 동분서주하던 정광필은, 노환(老患)을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고, 내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작정하고 차기 재상이 될 인물을 물색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들은 죄 그간의 사화에 연루되는 바람에 사람이 없었다. 고심 끝에 정광필이 이름을 올린 것은, 바로 기묘사화 직전에 관직을 내어 놓고 낙향하여 화를 면했던 임승준이었다.
임승준은 영변의 약산에 있는 초막으로 돌아간 뒤, 다시 칩거 생활을 하며 조정과는 연을 끊고 있었는데, 조광조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더더욱 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혹여 화가 미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바뀌고, 정광필이 직접 사람을 보내 다시 정치에 나서 줄 것을 청해 온 것이었다.
임승준의 나이는 이미 칠순으로, 정광필의 나이보다도 서넛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재상으로 국정에 돌아와 달라 하니, 임승준은 대뜸 허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나이가 이미 일흔에 가까워, 더 이상 정무를 보기에는 눈이 탁하고 생각이 명료하지 못하니, 일을 그르칠까 두렵소. 재상께 돌아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전해 주시구려.”
그러나 한 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정광필이 직접 대신들까지 동원해 연명으로 서찰을 써서 재상으로 다시 나아가 줄 것을 청하니, 임승준은 마지못해 이를 다시 수락하고서는 조정에 입시했다.
환갑이 넘어 조정에 처음으로 출사했다가, 정국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초막으로 돌아갔던 그였다. 그리고 일흔이 되어 다시 재상이 되어 조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부디 심려(心慮)하여 나라와 조정을 이끌어 주시오. 지금 기틀을 잘 세워 놓아야 소란스러운 정치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겁니다. 김굉필(金宏弼) 공도 지난해 울적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고, 남곤 공 또한 그간의 사화로 겪은 부끄러움과 울증(鬱症)을 들어 정치와 연을 끊었으니, 사림에도 사람이 없고 훈구에도 사람이 없게 되었소. 부디 임 공이 아니면 이 정국을 이끌어 나갈 이 없으니, 이때에 뜻을 펼쳐 보도록 하시오.”
정광필은 단단히 당부하고서는, 다시 교동의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칩거 생활로 들어갔다.
정광필이 황제의 사후 겨우 수습해 놓은 국면을 곧바로 물려받은 임승준의 마음도 답답하기는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 재상이 되었는데 조정에는 인물이 없어 들어 쓸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환국(換局)이 엊그제 같은 노릇인데, 지금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된 이들을 풀어다가 관직을 맡기자고 주청하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채 오 년이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새롭게 성장한 젊은 관료들은 그 나이가 어려 경험이 짧아 일을 원활히 하지 못하니, 임승준의 고충은 또한 이루 말할 바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만큼 임승준이 그간 생각했던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쉬운 환경도 없었다.
사림당도 훈구당도 그대로 내각과 추밀원에 남아 있었지만, 예전같이 쟁쟁한 거물들이 주도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채 나이가 쉰이 되지 못한 이들이 내각에는 득시글거렸고, 추밀원의 원로들은 이제 기력이 쇠해서 적극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지를 않고 있었다.
임승준은 기왕지시 조정으로 돌아온 것,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무에 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수명도 얼마가 남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동안 앞으로 백 년을 내다보고 기틀을 새롭게 다져 놓지 않으면, 불안한 정국은 계속해서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았다.
임승준은 반쪽짜리 개혁으로 남은 군대 개혁부터 손을 다시 대기 시작했다.
조광조가 남긴 유산으로 병졸 수가 이미 절반으로 줄어 있는 군대였다. 임승준은 이것을 예전의 규모로 다시 회복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시위대 대장으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공을 세워서 지금 군부대신까지 오르게 된 장계를 불러들였다.
일전 조광조가 군제 개혁을 추진할 때 끝까지 반대하다가, 결국 친위반정에 가담해 일거 군권을 틀어쥐게 된 자였다.
그는 그동안 군부를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훈구당이 황제에 의해 다시 밀려나고, 김안로가 정권을 잡아 전횡을 하는 바람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 정국이 안정되었으니, 장계는 언제고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려고 할 것이고, 임승준이 군제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 장계를 잘 설득해야만 했다.
“다시 돌리지 않으시겠단 말씀입니까?”
임승준의 말을 천천히 듣고 난 장계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로서는 조광조가 추진하던 군제 개혁이 어째서 지금에 와서까지 되돌려지지 않는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반대로 임승준에게 있어서는 기왕에 군대의 규모가 줄고 재정이 건전하게 된 만큼, 여기서 군세를 강화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공도 그간의 폐단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오. 조광조가 비록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개혁을 추진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소만, 군부로서도 이것을 기회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소. 병력의 규모는 늘리지 않되, 국고를 조금 더 내어서 병기를 개량하고, 군부와 병졸에게 들어가는 지급(支給)을 확대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오.”
나이 겨우 쉰둘의 장계였다.
비록 마음에 안 드는 제안이었으나, 일흔씩이나 먹은 노재상을 상대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임승준이 하는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제안을 따른다면 장계로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조광조의 개혁을 통해 군부의 선배들이 옷을 먼저 벗게 되는 바람에 때와 운이 좋아 기묘사화와 함께 새롭게 부상한 그였다. 지금 군부에서는 딱히 그를 견제할 사람이 없었다. 이 참에 군제 개혁을 완성시켜서 지금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장계 또한 그 개혁의 수혜자였던 것이다.
“그리해 주신다면 뜻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30만의 상비군은 필히 있어야 하니 여기서는 더 이상 줄일 수 없습니다. 또한 병졸의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나라에서 내려오는 돈은 적은데, 각 진위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길도 모두 막혀 버려 여전히 궁색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방의 진위대가 각기 목화나 잡물을 전매(專賣)를 하는 것은 다시 허락하지 못하더라도, 둔전(屯田)을 허락하고 군부의 예산지급을 더 늘려야 합니다.”
“그리합시다. 내 우선 군제를 정상화시키는 것을 일단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니, 추밀원을 설득해서 군비를 증강할 수 있도록 하겠소. 지금의 참의들은 내각의 뜻을 따르는 추세이니 가히 잘 다독인다면 일이 풀리게 될 거요.”
임승준의 말에 장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광조와 임승준이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임승준 또한 강경한 개혁의지로 이름 있었고 한때는 훈구당과 이를 으르렁거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을 추진할 때 타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전 수적 사업을 하면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지만, 조광조처럼 아주 훈구당이 재기불능이 될 때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비록 조정에서 대립하기는 했지만 정도껏 황제와 훈구당, 그리고 사림당 사이에서 조율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그렇지 못했고 이상을 앞세우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임승준은 그러한 점을 꿰뚫고 있었고, 다시 조정에 돌아와 개혁을 추진하면서는 더더욱 예전보다 신중해졌다.
때문에 그는 장계를 직접 불러들여다가 그를 설득시키는 데서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그가 어느 정도 동의하고 나오자, 다음에는 내각 대신들을 모아 놓고 군제 개혁에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조광조가 이미 군대를 절반으로 동강 내는 바람에 얻은 반사이익도 있긴 했다. 덕분에 임승준이 보다 원활하게 군제 개혁을 마무리 짓고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의론은 모아져서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60만이나 되는 비대한 병졸 수와 이를 지탱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도입되었던 각 진위대의 전매 제도를 다시 돌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각 진위대를 비롯한 모든 군대는 둔전, 즉 직접 밭을 일구어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허락되나, 사사로이 금전을 마련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고, 모든 것을 국가에서 내어 주는 자금에 의존하도록 되어졌다.
물론 나라로서도 지나친 부담이기는 했으나, 이미 양전 수적 사업으로 세수가 많이 확충되었고, 절반이 넘게 줄어든 27만 명의 군대를 지탱할 능력은 있었다.
식량을 대부분 자급으로 해결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나라에서 책임질 것은 바로 유사시를 대비한 군량(軍糧)을 확보하고, 총포(銃砲)를 개량하며, 또 병사들의 입을 것을 잘 지급해 주는 일이었다.
해에 따라서 다르긴 했으나, 대체적으로 근 수년간 세금은 거의 8천만 냥 내외로 걷히고 있었고, 이 중에서 2천만 냥 정도를 군부에 지출한다면 유지가 가능한 규모였다.
양전 수적 사업과 군제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거의 3천만 가량의 세금으로, 그중 천 6백만을 군대에 부어야 했으니 훨씬 나아진 상황이었다.
“각 진위대에는 탁지부(度支部)에서 감사(監査)를 보내어 그 재정을 감독하게 할 것이오.”
가장 개혁에서 암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임승준이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군부 외 사람에 의한 재정 감독이었다.
이것은 군부의 반발이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고, 임승준은 여기에 있어서 특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개혁에 동참해 주고 있던 장계마저도 여기에는 난색을 표했다.
“이것은 군부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재상.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나라의 세금을 쓰는 일이니 꼭 해야 할 일이오. 이들을 통해 각 진위대나, 해군 군영(軍營)에서 필요한 예산을 나라에 소청할 수 있을 터이니 꼭 군부에 해가 된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소.”
임승준은 이 문제는 꼭 관철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기존의 폐단이 완전히 정리될 수 있었다. 물론 감사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그곳의 재정을 쥐고 부패하게 된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부패하는 것은 군부에서 견제할 것이고, 군부가 부패하는 것은 이들 감사들이 견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들이 결탁한다고 하면 그것대로 좋지 않은 일이었으나, 1년 이상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최대한 그럴 가능성을 줄이자는 것이 임승준의 생각이었다.
어렵사리 군부를 설득시킨 임승준은 이를 겨우 관철시켜서 제도적인 개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은 그간 완전히 불능(不能)이나 다름없게 된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쇄신하는 일이었다.
일부 지방 진위대에서는 오래된 총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도리어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이 무기 체계의 결함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병졸의 숫자를 줄이고 재정을 개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진위대가 여러 차례의 전역을 겪으며 각 지방 곳곳에 설치될 때, 좋은 무기들을 지급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해가 갈수록 공급이 줄어들면서 근래에 이르러서는 총포(銃砲)를 나라에서 별로 생산하지 않는 판국이었다.
세훈의 시절에 세워진 부천의 무기창(武器廠)에서는 한 해에 팔백여 정의 수석총과 40문의 포를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일부는 배에 실려 수출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암담한 실정이었다.
“요동의 심왕 전하께 청해서 무기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요동에서는 이미 총포가 개량되어 월등한 화력으로 일전 몽골과의 전란에서도 크게 승전하였으니, 내지 병력의 도움 없이도 일궈 낸 성과외다. 새로이 진위대의 무기를 정비하면서 이러한 기술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무기를 정비할 수 있으면 좋을 일이오. 다만 모든 장졸을 이렇게 무장시킬 수 없는 노릇이니, 우선은 각 진위대를 1만 병력으로 보고, 3천을 일반 보병(步兵)으로 하여 총을 지급하고, 2천은 기병으로 하며, 나머지는 포(砲)와 노궁(弩弓), 그리고 병참(兵站)을 운용하게 하여 전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겠소.”
임승준의 생각대로 된다면 대략 10만 정의 새로운 총과 2천 문 정도의 새로운 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번에 충당할 수도 없고, 요동만 배불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에서 직접 운용하는 무기창의 기술도 증진시켜야만 했고, 한 번에 이를 다 처리할 수도 없으니 최소 20여 년을 계획을 하고 군비를 증강시켜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첫발은 떼어졌고, 임승준의 계획대로 군비는 정열되기 시작했다. 세훈 이래 변화 없이 오히려 쇠퇴일로를 밟아 가고 있던 대한제국의 군대가 이제 다시 전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