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5장 천기주행(天氣周行) (46/82)

제45장 천기주행(天氣周行)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하의 사람은 모두 거꾸로 서 있고[倒立], 사방의 사람은 모두 가로로 다닌다면[橫行], 지하의 사람은 곧 이 세계의 초목(草木)이며, 사방의 사람은 곧 이 세계의 금수(禽獸)인 셈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치란 말입니까?” 그러나 조선 사람이 조선을 바로 선 세계[正界]라 생각하고, 서양을 거꾸로 선 세계[倒界]라고 여기는 데에 반해, 서양 사람은 서양을 바로 선 세계라고 생각하고, 중국을 거꾸로 선 세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실은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사람 모두가 자기 세계에 따라 그와 같이 생각한다. 가로로 다니는 세계도 없고, 거꾸로 선 세계도 없으니, 모두 바로 선 세계인 것이다. ……(중략)…… 무릇 땅 덩어리는 회전 운동하길 하루에 한 바퀴 돈다. 땅의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진이다. 9만 리나 되는 너비를 12시진 내에 도니, 그 운행의 급함은 번개만큼 빠르고 포탄보다도 빠르다. 땅이 이처럼 급하게 돈다면 허기(虛氣)들이 물살이 솟구치듯이 움직여 허공중에서 에돌면서 땅으로 모여들고 만다. 이리하여 상하지세(上下之世)가 있게 되니, 이것이 지면 위의 형세이고,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이러한 형세는 없어진다. 이 허기들이 땅으로 모여들어 지물(地物)을 묶어 두는 관계로 지구(地球)의 반대쪽에서도 사람이 허공에 떨어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서경덕(徐敬德), 《성기운화(星氣運化)》, 3권 中

1527년

건양(建陽) 4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경기도 개성부(開城府).

개성은 옛 고려의 도읍으로, 비록 그 영화는 예전 같지 않았으나, 여전히 제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성읍 중 하나였다.

인구 15만이 기거하는 개성에는 사해(四海)를 횡행하는 송상(松商)의 근거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시한 정안군의 아들 이도가 개성공(開城公)에 봉해진 이래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기거하며 제사를 받들고 있는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고려 왕조의 유적(遺蹟)도 수태 남아서 온갖 오랜 건물들이 세월의 시련을 이겨 내고 서 있는 고읍(古邑)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금에 송도에서 가장 이름난 것은 기생 황진이였다.

황진이는 본래 반가(班家)의 서얼이었다. 아직도 처첩제(妻妾制)가 남아 있는 제국에서, 남자 서얼에 대한 차별은 그래도 많이 희석되었으나, 얼녀(孼女)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공공연했다.

비록 여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시, 서, 장(章), 화(畵)에 두루 능했을 뿐더러 고전도 줄줄이 꿰뚫고 있는 박식하고 다재다능한 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첩실에게서 난 딸은 장성하면 또 어딘가로 첩으로밖에 시집 갈 수 없는지라, 황진이는 15살에 자신을 사모하던 동네 청년이 상사병에 걸려 죽고만 것을 계기로 집에서 나와 기방(妓房)에 스스로 몸을 담았다.

송도 기생은 예로부터 유명했는데, 이들은 단순히 몸을 대접하고 손님을 즐겁게 하는 작부(酌婦)와는 달랐다. 맘에 차지 않는 손님은 받지도 않았으며, 글을 짓고 거문고를 타며 풍류(風流)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녀들의 몸을 함부로 취하고자 천만금을 들이민다 하더라도 거절하면 안을 수 없으니,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절조(節操)가 있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 황진이였으니, 그녀의 미모는 내지팔도 어디에서도 견줄 여인이 없다고 할 정도였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짓고, 문장을 논하는 일 어느 것에도 어지간한 선비는 이름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녀가 밖으로 나설 때면 어찌 얼굴이라도 한 번 볼까 싶어 길가에 남정네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가히 송도의 절색(絶色)이라 하지 않으랴.

그런 그녀의 곁에 지금 머무르고 있는 자는 개성공 충녕군 이도의 증손자인 벽계도정(碧溪都正) 이종숙(李終叔)이었다.

속칭 벽계수(碧溪水)로, 풍류에 뛰어난 미남자로 개성부중에 소문이 자자했다.

황실의 종친으로, 개성공가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는 하나, 사실 꽤나 먼 방계(傍系)로, 이도의 서자인 영해수(寧海守) 이당(李췲)의 손자였다. 수(守)라는 것은 군(君)과 부정(副正)의 아래에 자리하는 품계였다.

충녕군이 제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왕의 아들로서 친왕(親王, 황제의 적자에게 내려지는 작위)가 아닌 대군(大君, 왕의 적자에게 내려지는 작위)의 군작(君爵)을 받았으니, 그 적자가 아닌 첩 소생인 이당은 영해수에 봉해졌던 것이다.

그 아들이 영해수의 작위를 습작하였으나 이종숙은 또 맏이가 아닌지라, 종친으로서는 마지막 품계라 할 수 있는 도정(都正)의 봉호를 받아 이른바 벽계도정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황실의 종친인지라 개성과 예성 일대에 꽤 많은 식읍을 가지고 있었고, 종택이라 할 수 있는 계성공가와의 우의도 두터워 개성 일대에서는 그 이름이 자자했다.

이 벽계도정 이종숙은 그 기품이 있고 절의가 있는 인물이라, 황진이가 못내 흠모를 했었는데, 어렵사리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종숙이 황진이의 구애를 거절하다가, 황진이가 내민 시구에 감탄하여 그 정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했다.

개성부중에서 심심찮게 읊어지는 황진이의 시조가락은 이내 팔도에 퍼져 나가 크게 사랑받았는데, 그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자신의 구애를 거절하는 벽계수에게 한 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니, 이리 사랑을 청할 때 곁에 머물라는 은유였다.

이에 감탄한 이종숙은 황진이의 곁에 머물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니, 벽계수로 개성부중에서 불리게 된 곡절이었다.

이 두 남녀가 봄이 한창이 되자, 개성부 성문 밖 탄음정(彈音亭)에 나와 거문고 한 가락 튕기며 봄 풍경을 즐기고 앉았다. 이 풍류를 즐기는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중년의 선비가 하나 앉았으니, 이는 황진이와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 명유(名儒) 서경덕(徐敬德)이었다.

여러 해 전, 황진이가 아직 어려서 치기 있던 시절에, 이름 높은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와 서경덕을 각기 유혹하였는데, 지족선사는 그녀의 유혹에 빠져 10년의 수련을 작파하고 파계를 하였으나,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절조가 드높음에 황진이가 감복하고, 제자가 되기를 서경덕에게 청했다. 서경덕은 본디 이름난 문인으로 신분의 고하나, 재산의 다소를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이는 모두 제자로 받아 가르쳤으니, 여자인 황진이라 하더라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여인과 단둘이 머무를 수 없다 하여,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될 때에는 벽계도정 이종수도 함께 나란히 앉아 시세(時世)를 논하곤 했던 것이다.

이종수 또한 서경덕의 문덕(文德)에 흠모가 깊어, 이렇게 봄놀이 삼아 함께 나와서 시를 짓고 문장을 논하며, 또 깊은 가르침도 듣기를 청하게 된 것이었다.

함께 앉아 시도 짓고, 거문고도 타며, 술을 기울이던 세 사람은, 그렇게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절조 높은 선비라고는 하나,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들이 자리한 개성 탄음대는, 성문 밖의 언덕 위에 자리해 주변이 훤히 둘러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멀리 송악산(松嶽山)의 기세와 개성부 성문도 볼 만했지만, 무엇보다도 황성에서 출발해 의주로 가는 서북가도(西北家道)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개성원(開城院), 즉 개성의 역마차 정차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 주변으로는 장사치들이 모여들어 잠자리와 술을 파는 여각이 들어서 있었고, 또한 음식점과 각종 패물을 파는 가게가 늘어져 있었는데, 이 탄음대에서 그 풍경을 구경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잠시 술 한잔 기울이고 앉아 말없이 그 모양을 지켜보던 서경덕이 이종숙을 바라보며 묻는다.

“도정(都正)은 이 땅이 평평하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둥글다고 여기는가?”

“당연히 평평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들 똑바로 서 있지 못할 터인데요.”

뜬금없는 서경덕의 물음에 이종숙은 순간 당황했지만, 재치 있게 대답하여 넘겼다.

평소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이니 당연히 해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상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대답을 한 것이었다.

“진이는 어찌 생각하는고?”

이번에는 서경덕이 황진이를 바라보며 묻는다.

“일전에 남원 자작[南原開國子] 양성지(梁誠之)께서 쓴 《제도해용(製圖解用)》을 읽은 적이 있나이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옛 희랍(希臘)의 명유(名儒)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여기고 천문을 측산(測算)하여 마땅히 옳은 답을 내었다고 적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혜성군 등이 대창해를 건너 영주를 척지하는 일에 이 측산법을 마땅히 따라서 바다를 건너갔다고 들었나이다. 그러나 저 또한 어찌하여 땅이 둥근데 만물이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지는 감히 짐작을 못하겠나이다.”

황진이의 대답에 서경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미색만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명석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괜히 멋쩍어진 이종숙이 머리를 긁적이는 것을 보고는, 서경덕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내가 이 문제로 한참을 고민하였으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네. 그런데 오늘 여기 앉아서 들고 나는 역마차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머리를 번쩍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네. 지구의 둘레가 9만 리에 이르니, 내가 여기 앉아서도 지구가 둥근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하루에 먼 길을 가 보아야 100리에 이르지 못하고, 내지팔도를 두루 유람해도 겨우 3천 리인데, 9만 리를 걸으며 어찌 그 땅이 휘고 곧음을 알겠는가? 일전 황성부에서 태양의 앙각(仰角)을 재어 본 일이 있는데, 다음 해 같은 날 개성에서 재었더니 그 각도가 미세하게 달랐었네. 분명히 땅이 곧지 않고 굽었음이야. 그러나 저 역마차를 타고 오는 이는 그 사이 땅이 넓고, 산과 들이 굽이치니, 곧장 평평하다고 여기는 게지.”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뒤집힌 곳에서 사람이 설 수 있겠습니까?”

이종숙이 다시 물어 온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위이고, 다른 곳은 아래라고 여기나, 그곳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곳이 위일 터이니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북과 남을 나누나, 이 지구의 남쪽에서는 천하가 뒤집혀 남쪽이 북쪽과 같으니, 이 광활한 천구(天球)에 어찌 북과 남이 따로 있겠는가?”

서경덕에 말에 이종숙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따른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흘러가, 두보와 이백을 논하다가, 요동의 정세를 말하고, 다시 금강산의 절경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언제 한 번 금강산을 가 보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함부로 유랑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기생이라 하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내 언제 한 번 진이를 데리고 가려 했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렷다. 망측한 일이나 관직에도 나서지 않아 노는 몸이니, 내와 이번 여름에 함께 금강산에 가 절경을 구경치 않겠는가?”

황진이의 말에 이종숙이 쌍수를 들고 함께 가자고 한다. 황진이도 대뜸 이종숙의 권유를 응락하고 나서 보니, 스승이 걸려서 서경덕을 돌아본다.

“스승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황진이의 말에 이종숙의 표정이 순간 떨떠름해졌지만, 서경덕이 눈치 없이 그런 곳에 끼어들 사람이 아니었다.

명색이 이름난 선비가 아닌가, 풍류도 처신 있게 하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올해 여름에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닐세. 나는 올 여름에 요동에 가 볼 생각이네.”

1527년

건양(建陽) 4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 심양부(盛京瀋陽府).

벽계도정 이종숙이 황진이와 함께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경덕은 행장을 꾸려서 요동으로 가는 역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짐에는 직접 만든 각종 천문기구와 주판 따위가 들어 있었다.

격물학의 진전과 상업의 발전으로 정교한 계산은 날이 갈수록 생활에서 많이 요구되기 시작했고, 이쯤에 이르러서는 웬만한 학자나 상인은 이러한 주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산판(算板)이라고도 불리는 이 주판은 훈련만 충분히 된다면 계산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훌륭한 도구였다.

서경덕 또한 이러한 주판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의 주판은 특별히 틀을 늘려서 보다 높은 자리의 숫자까지 계산할 수 있도록 직접 만든 것이었는데, 조(兆) 단위까지 계산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서경덕이 이렇게 짐을 꾸려 요동으로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의 학자들과 서한을 꾸준히 교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천문학에 특히 조예가 깊은 유중수(劉重琇)가 역산(曆算, 역법을 계산하는 일)의 문제로 긴히 서경덕과 논했으면 하노라고 서경덕을 요동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서경덕은 이번 요동길이 초행(初行)이었다. 언제고 가려고 했던 길이었으나, 그간 때가 맞지 않아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직접 요동에서 자신을 불러 주었으니 가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서경덕은 어떤 학문적 계보에 명확히 속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따지자면 관서학파(關西學派)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었다.

실사구시의 태도로 격물학에 대한 이해를 가장 우선에 놓는 이 학파는, 개성뿐만 아니라 평양과 심양의 학유(學諭)들에 의해서 넓게 가르쳐지고 있었다.

서경덕 또한 어린 시절 송도상학(松都庠學)에서 공부하며 이러한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진위대의 하급 무관이었던 부친 서호번(徐好蕃)의 아래에서 기초적인 산법과 독도법(讀圖法), 그리고 한문을 일찌감치 깨우친 뒤였다.

송도상학에서는 당시 상학의 산과(算科, 수학과)의 학유로 있던 채규일(蔡奎壹)에게 사사받았는데, 그는 특별히 역량 있는 학자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학생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는 발군인 사람이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서경덕은 성리학뿐 아니라 서방 사상이나, 역학(易學) 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게 쌓을 수 있었다.

그는 늘 학문을 할 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를 중시했고,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의(懷疑)적인 태도로 사색하는 자득지학(自得之學), 즉 스스로 얻는 학문을 늘 강조했다.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비판을 하며, 직접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려는 태도를 늘 견지해 온 것이었다.

어릴적부터 그런 이치를 깨달은 터라 그와 관련해서는 개성부중에 이런저런 일화들이 회자되곤 했다.

모친의 심부름으로 나물을 캐러 다녀오는 길에 종달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치를 따져 보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화는 물론이거니와 열네 살 무렵 송도상학에 입학하여 《서경(書經)》을 배우다 태음력(太陰曆)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홀로 생각해 터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뒤에는 《대학(大學)》을 읽다가 “그 뜻을 성실히 하려는 자는, 우선 지(知)를 닦아야 한다. 지를 닦기 위해서는 우선 사물의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라는 구절을 읽고서는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이 다 무슨 소용인가.”하고서는 온갖 사물의 이름을 벽에 써붙이고서는 그 이치를 탐구하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학자로서의 자질이 차고도 넘치는 이였으나, 관직에는 출사를 하지 않았다.

내지팔도는 물론이거니와 제국 전역에 이름이 퍼져 나간 뒤에도 그랬다.

그가 나이가 차 송도상학을 졸업하고 황성부의 학습원(學習院)으로 학적을 옮겨 공부를 더하려 했으나, 이미 훈구척신들의 자제들이 명단에 가득하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

때문에 서경덕은 홀로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몸이 된지라 노모(老母)를 봉양하기 위해 심양의 문리과대학으로 가려던 생각도 접고 말았다.

그러나 워낙에 탁월한 준재(俊才)인지라, 얼마 가지 않아 학문적 명성이 팔도를 뒤덮었는데, 그 뒤로 관직에 나오라는 천거(薦擧)도 모두 거절했다.

때가 때인지라, 시국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치며 온갖 폐정(廢政)이 이어졌고, 서로 당파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내심 학문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임승준이 스스로 자청해 관직을 물러나오고, 사림이 권세를 누리다 조광조 등이 몰살당하며, 또 이어서 훈구당이 재집권했다가, 김안국에 의해 또 죄 쫓겨나는 등 어수선한 국면에서 관직에는 뜻을 더 이상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특히 천문학과 지학(地學)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동안의 성과를 《성기운화(星氣運化)》라는 책편으로 묶어 곧 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땅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근 공 모양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 천체의 움직임을 살펴보다 지구가 천구(天球)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그 중심으로, 지구또한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서경덕이 그 이치를 명확히 규명해 낸 것은 아니었다. 이 운행의 기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서경덕은 성리학적 이론인 허기(虛氣)를 끌어들였고, 이 허기가 천공 사이를 운행하면서 질서를 잡아 준다고 여기기에 이르렀다.

천체가 움직이고, 소리가 전달되고, 빛이 나아가는 것은 모두 이 천공의 허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자신은 진공(眞空)을 부정하고 이것이 실상은 공기와 같은 허기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잘못된 인식이었으나, 그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고, 유학적 토대가 아직도 짙게 깔려 있는 제국의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었다.

서경덕의 우주관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요동의 유중수를 비롯한 학자들은, 그를 직접 초청해서 역산(曆算)뿐만 아니라,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이 탄 역마차는 서북가도를 따라 지치지 않고 나아갔다. 서북가도는 이미 정비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방의 거친 길들과 다르게 꾸준히 포장을 다듬고 관리를 지속해 요동과 황성부를 잇는 동맥(動脈)의 노릇을 다 하고 있었다.

개성에서 심양까지는 엿새를 밤낮으로 가야 했다. 해주, 사리원, 평양, 의주, 동녕부를 거치는 일정이었다.

중간 중간 유숙(留宿)하지 않고 말을 바꿔 가며 달린다면 도로 사정이 나쁘지 않아 사흘이면 갈 길이지만, 하루 종일 역마차에 올라 있는 것도 고된 일인지라, 승객들은 천천히 가더라도 묵어 가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개성에서 심양까지 역마차 품삯이 은전 열 냥에다가 각기 숙박 대와 식비는 알아서 지불해야 했으니 결코 싼값이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말을 타거나 걸어가면서 감내해야 할 수고를 덜 뿐 아니라, 일찍 목적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까울 돈은 아니었다.

이렇게 역마차를 달려 심양에 도달하자마자 서경덕은 마중 나온 유중수와 함께 심양대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체류하는 손님을 위해 응빈관(應賓館)이라는 조촐하지만 썩 머물 만한 객사(客舍)가 있었고, 그곳에 서경덕은 짐을 풀었다.

“먼 길 달려오신 손님을 바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이 예가 아닌 줄 압니다만, 사실 이 문제는 대학뿐만 아니라 요동행정서와 심왕전하께서도 관심을 지니고 계신 일이라……. 괜찮으시다면 내일부터 저희와 함께 직접 역법을 논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좋은 가르침을 받고, 닷새 뒤 심왕부 정전(正殿)에서의 알현 때 직접 전하께 내용을 강연해야 하는지라. 전하께서 관심이 아주 지대하십니다.”

이때의 심왕은 바로 진영으로, 동몽(東蒙) 정벌이 끝난 후로는 줄곧 내치(內治)에 몰두하며 요동을 부국으로 만드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중앙의 조정에서 정란이 반복되는 가운데에도, 요동의 심왕은 일절 관여치 않고, 내부 사정에만 신경을 모두 쏟고 있었다.

오히려 백성들이 내지의 어지러운 사정을 보고서는 심왕이 황성부로 직접 올라가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심왕 진영은 괜히 그런 일에 발을 담그다가 곤란한 상황이 되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다. 요동에서는 일찌감치 황제가 장기 말을 움직이듯이 상황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요동에서 괜히 그 신경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상 공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심왕부의 요동 자치는 어찌 생각하면 내각(內閣)을 이끌며 대대손손 재상직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심왕가가 북쪽의 변방으로 밀려난 꼴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을 포기하고 조정에 불간섭하는 대가로 얻은 소중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적절한 때에 정권에서 물러선 덕에 민심도 얻었을 뿐더러, 요동에서는 사실상 제국 내의 한 왕국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다.

진영은 그것이 바로 선조들의 공업(功業)이라고 생각했고, 이곳 심요 지역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몽골의 침입 때도 자력으로 지켜 낸 요동이었다. 제국의 복잡한 정세에는 불필요하게 연관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우선 요동이라도 가능한 번성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한 진영의 생각은 국정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이미 전대의 심왕인 문덕왕 서윤 때로부터 기조를 그대로 이어 나가, 문물 제도를 개량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에 진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산(曆算)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기존에 원나라 때 정비된 대통력(大統曆)을 요동을 비롯한 제국 전역에서는 아직까지 그대로 쓰고 있었다. 가경제 치세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수찬(修撰)하여 교정하긴 했으나, 사실상 명나라 역법을 그대로 아직까지 받아 쓴다는 점에서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정치상의 문제에만 국한된다면 상관이 없는데, 진영은 이 요동 일대에 농경(農耕)을 폭넓게 보급하려 하면서 이 역법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요동 일대는 상당히 북쪽에 위치한 지방으로 조나 콩이 드문드문 심어졌을 뿐,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지지는 않던 땅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급증하면서 이를 지탱할 부양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게 되었다.

곡량을 모두 내지로부터 들어와 먹을 수도 없고, 가까운 명나라와는 정치적 이유로 거래가 이뤄졌다 끊겼다 하기 일쑤이니 좀체 쉬운 형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혹여 곡식의 산지에 가뭄이라도 들면 쌀이 이곳까지 흘러들어 오질 않아, 백성들이 돈을 쥐고도 굶기 일쑤이니, 요동으로서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영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왕 서윤 때로부터 꾸준히 시험해 수십 년에 걸쳐 북방의 기후에 알맞게 개량한 요동벼를 보급해, 농사를 원하는 이들에게 땅과 함께 종자를 나누어 줬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한랭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밀을 대대적으로 심도록 권장했다.

혹여 한파라도 들어 작황이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해, 더욱 질긴 조와 보리도 적절히 재배하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북방의 토지는 비록 기후에서는 불리했으나, 토양 자체는 매우 비옥한 흑토(黑土)라, 비료를 많이 쓰지 않고도 자양분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몇 년간 노력의 성과가 있어 작황은 점차 늘어갔지만 그와 함께 문제점도 도출되기 시작했다.

바로 농사를 지을 역법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에 있었다. 보통 농민들은 절기(節氣)를 따라 시기를 가늠하여 농사를 행하곤 했다. 그러나 북방의 농사가 따뜻한 남쪽과 같을 수 없었다.

벼 또한 늦게 심고 빨리 생육시켜 수확해야 했으며, 춥고 긴 겨울에는 남쪽처럼 보리를 심을 수도 없었다. 보리는 벼 갈이를 할 늦여름 무렵에는 심어서 겨울이 오기 직전에는 걷어야 했다.

토양이 비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무리한 농사는 애초에 불가능 했을 터였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지금의 역법으로도 농사의 때를 맞출 수는 있었지만, 매년 같은 절기를 지날 때에도 날짜가 다른 지금의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으로는 정밀한 농사 일정을 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줄곧 문제로 제기되어 왔었다.

심왕이 역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매년 날짜만으로도 농사의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잘 헤아릴 수 있는 책력을 연구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아라비아에서 들어온 회회력(回回曆)과 그것을 다룬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아무리 들쑤셔 보아도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고, 원에서 명나라를 거쳐 들어온 대통력 또한 몇 년에 한 번은 윤달을 삽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 일을 책임지고 맡았던 심양대학의 학유들은 이 문제로 수 년간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고, 결국에는 천문 계산에 미묘한 착오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다시 정밀하게 계산해 내기 위해서는 천체를 보다 엄밀히 관측할 기술과 함께 이것을 다룰 계산 능력이 필요했고, 이 돌파구를 찾던 와중에 서경덕과 접촉하게 되어 그를 초빙하게 된 것이었다.

서경덕의 서간과 그가 쓴 서적들을 검토한 심양대학의 학유들은, 그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유중수를 중심으로 서경덕을 초빙해 토론을 거쳐 강연을 열겠다고 심왕에게 윤허를 받아 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니 만큼 먼 길을 온 손님을 이리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의 전말을 다 듣고 난 서경덕은 그간 여행을 하며 중첩된 피로도 잊고서, 심양대학의 학유들과 함께 밤새 토론과 토론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심양에서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은, 바로 그리스 학문의 전래를 통해 확립된 지구구형설과 천동설(天動說)이었다.

지구는 평평한 땅이 아니라 공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운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구구형설은 긍정했으나, 천동설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천동설을 수용하더라도 역법을 계산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태양이 지구를 1년에 거쳐 돈다고 가정하든 지구가 태양을 1년에 걸쳐 돈다고 가정하든 1년의 길이는 일정하니, 이것만 정확하게 알아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애초에 태양과 지구뿐만 아니라, 주변의 천체들의 움직임도 잘 관찰하지 않으면 정밀한 역법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옛 희랍의 유생 아리스타르코스도 그런 주장을 하기는 했지요. 그러나 그것을 확증할 방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떻게 서경덕의 가설을 증명하느냐였다.

단순히 역법을 수정하고자 했던 문제는 이제 천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의 문제로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나는 희랍의 선사(先士)들에 대한 것은 잘 모릅니다. 요동 밖에서 그런 지식을 폭넓게 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나 격물학이라면 소시적부터 밤낮으로 익혀 왔습니다.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지요.”

서경덕은 품속에서 종이 한 절을 꺼내 탁상 위에 펼쳐 놓았다.

학자들은 그 주변으로 모여 들어 꼼꼼히 서경덕이 그려 놓은 일종의 설계도를 들여다 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벽돌 1만장이면 지붕 없이 천개(天蓋)를 열어 하늘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일종의 천문대(天文臺)이올시다. 심왕부 또한 명색이 왕부(王府)인데, 여태껏 역법을 정밀히 하고, 하늘의 운행을 관측할 천문대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심왕 전하께 찾아가 강연할 때에 역산 문제는 조금 뒤로 미루고, 우선 이 천문대를 지어 천문의기들을 이곳에 매어 달아 천체를 살피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아뢰어 주십시오. 전하께서 윤허하신다면, 제가 직접 이것을 감독하여 일 년 내에 마땅한 결과를 올리겠습니다. 이미 개성의 옛 고려 시절 첨성당(瞻星堂)에 앉아 홀로 관측한 결과들이 있으니, 이것을 이곳에서 엄정히 다듬기만 하면 됩니다. 이곳 심양의 유리 기술이 으뜸이라고 하니, 좋은 천리경(千里鏡,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를 가까이 관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경덕의 말에 제유(諸儒, 여러 선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 문제가 잘 풀린다면 단순히 농사를 짓기 위한 역법을 고치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천문학을 뒤흔들 일이었던 것이다.

“내 직접 여쭈어 아뢰오리다. 서 공께서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동행하여 전하께 이것을 함께 말씀드리고, 천문대를 세우는 것을 윤허해달라 청하도록 합시다. 전하께서는 명민하시어 역법 문제에도 조예가 있으시니, 저희가 조금만 설명해 드리면 분명 허락하시고 남으실 겁니다.”

유중수는 기꺼이 단언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심왕 진영은 경연에서 이 문제가 나오자 유중수와 서경덕으로부터 설명을 듣고는 곧장 국고에서 요동폐 1만 냥을 내어 심양 서편의 널찍한 들판 위에 천문대를 세우게 했다.

반년간의 공사 끝에 이곳에 유례없이 높은 천문대가 들어섰으니, 동원된 인원만도 물경 8천 명이었다.

심왕 진영은, 직접 이곳에 관천대(觀天臺)라는 이름을 하사해 내리니, 이곳에서 서경덕, 유중수를 비롯한 심양의 천문학자들과 심왕부의 역관(曆官)들이 모여 밤낮으로 별을 관측하고 계산을 행했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학자들보다도, 가장 이곳에서 큰 몫을 해낸 것은 망원경이었다.

그리스 유민 아타나시오스 지아노풀로스, 조선명으로 지안태(祗安泰)가 1457년께에 심양 교외에 성경초자공방(盛京硝子工房)을 세워 유리 기술을 보급한 이래로, 심양은 제국 및 명과 일본을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대규모로 유리를 생산해 내는 곳이 되었다.

독자적인 기술 개량과 발전을 거듭해 이 즈음에 이르면 요동에서는 유리로 창문을 장식하고, 안경을 생산하며, 천리경을 만드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의 유리가 황성부를 비롯한 내지팔도는 물론이거니와 배에 조심스럽게 실려 매우 비싼 값으로 일본과 명으로도 팔려 나갈 정도였으니, 이 초자(硝子), 즉 유리는 요동 번영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그러한 기술로 천문학자들에 의해 직접 개량된 망원경은 직접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일에 투입되었고, 이것을 통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일을 통해, 그동안 관측하지 못했던 별을 발견하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달의 표면을 예전에 비해 정교하게 관측할 수 있게 되어, 달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굴곡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월면지도(月面之圖)〉라는 이름으로 그려져 황성부 조정에 올려 보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주된 관찰은 지동설을 지지하고 정확한 지구의 일주(一周) 기간을 계산하는 데에 할당되었다.

이렇게 1년이 지나, 이 관천대의 학자들은 명확한 확신은 아니지만 지구를 중심으로 천구가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 또한 돌고 있다는 것을 거의 사실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에 준거해 이들은 일 년의 정확한 주기를 365.2422일로 계산해 내었다.

문제는 이것을 기존의 역법에 어찌 적용할 것인가였다.

기존의 역법을 이에 맞추어 고치자는 주장과 아예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격론 끝에 서경덕과 유중수의 지지를 받아 태양력으로 역법을 제정하자고 의견을 모으게 되었고, 서양의 역법도 참조하여 한 달을 각각 30일로 나누고, 1월, 5월, 7월, 9월에는 각기 하루를 더해 31일로 만들었다. 그러나 매년 대략 0.25일이 남게 되므로, 4년마다 한번씩 11월에 하루를 더해 1년을 366일로 만들게 하였다.

이것의 틀은 근본적으로 로마 시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으로 제정된 율리우스력과 거의 같은 것으로, 각 달의 날짜와 윤년이 들어가는 날짜만 다를 뿐이었다.

그러나 거의 1500년을 써 온 율리우스력이 그간의 오차로 10일 이상이 실제 날짜와 차이 나는 것을 요동의 학자들은 고려하지 못했다.

물론 아직 정밀한 역법 체계인 그레고리력이 등장하지 않아, 율리우스력은 서방에서 넓게 쓰이는 달력이었고, 여기에 비해서는 요동의 역법 또한 손색은 없었다.

사실상, 이 역법 개정 문제를 통해 비화된 진정 중요한 일은 요동에서 처음으로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앞으로 천문 연구의 발판을 닦을 기초적인 지식들을 확립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토대로 지동설을 포함한 천문학 전반을 다룬 서경덕의 《성기운화(星氣運化)》가 편수되고, 유중수를 비롯한 요동의 학자와 역관들이 저술한 새로운 태양력 역법 체계를 담은 《역학(曆學)》이 편찬되어 심왕에게 진상되었다.

심왕은 이것을 보고 감탄한 뒤, 다음 해, 즉 1529년, 건양 6년의 음력 정월 설날에 맞추어 새롭게 역법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요동 전역에서 전면적으로 구역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음력 설에 맞추어 새로운 해를 시작했으므로, 이 새로운 태양력은 서양의 그것과는 대략 한 달 남짓이 차이 나게 되었으나, 역법의 산정 방식이 거의 같으므로 1년의 길이는 똑같게 되었다.

기존의 윤달은 모두 폐지되었고 4년에 한 번 윤일(閏日)이 들어가니, 당시에는 지동설 자체보다도 이 역법의 개정이 더 중대한 개혁으로 여겨졌다.

심왕부에서는 이것에 대해 단순히 농사의 편의를 위한 역법의 개정으로 내심 여겼으나, 이 문제는 곧 큰 소동을 불러오게 되니, 이른바 역법비정 문제였다.

새로운 역법이 요동에서 시행되었다는 소식이 황성부로 흘러들어 가자마자 이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1529년

건양(建陽) 6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천자만이 선포하고 내릴 수 있는 역법을 감히 일개 제후가 사사로이 제정하여 반포하다니요. 당장 요동의 심왕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이 일에 가담한 서경덕 이하 역적들을 황성으로 잡아들여 치죄(治罪)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기의 운행을 바로 알고자 역법을 주해(註解)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없으나, 이것을 폐하에게 알려 조정의 윤허를 받지 않고, 일개 번국이 사사로이 시행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엄중히 물어 마땅하나 그간의 공훈을 가상히 여겨 자중하라 이르고, 역법을 다시 폐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이다.”

한동안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오던 요동의 심왕과 관료들은 미처 이것이 중차대한 정치 문제로 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요동에서는 단순한 문제였던 것이 황성부에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큰 사단이 나고야 만 것이었다.

말마따나 이들 내각의 신료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전통질서에서 천자만이 선포할 수 있는 역법을 사사로이 제후가 제정했다는 것은 크게 문제될 만한 것이었다.

다만, 사실상 요동의 심왕가가 일개 제후가 아니었다는 것이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황제가 오랜 세월 유명무실했던 제국에서는, 비록 요동으로 물러났다고는 하나 심왕가가 제1의 세도가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폐 또한 따로 찍어내 요동폐(遼東幣)라는 이름으로 조정에서 직접 발행하는 통보(通寶)보다도 더 높은 값에 유통되고 있는 지경이었다.

지방의 행정 제도도 달랐으며, 관료를 등용하는 법도 달랐고, 군대마저도 거의 따로 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며 사실상 중앙의 제재를 받지 않다 보니, 이번에도 심왕과 그 아래 관료들은 새 역법이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예전 같았으면, 도학주의자들이 요동의 역법을 폐하라 상소를 올리다 지쳐 무마될 문제였다. 그러나 전대 소흥제 시기의 황성부 조정 정국은 요동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갈 소지를 남겨 두었다.

황권이 처음으로 강화되었고, 사림당, 훈구당 할 것 없이 내각 신료들부터가 예전 심왕가의 공적을 역사로 여길 뿐, 현재의 상황과 더 이상 결부시키지 않게 되었다.

황성부에 있는 천자의 조정이 천하의 중심이고, 요동은 번국(藩國)이며, 심왕은 마땅히 제후로서 황제, 엄밀히 말하자면 황제의 이름을 떠받드는 내각에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변변찮은 문제로 사사롭게 요동을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주의적인 훈구당뿐만 아니라 이제는 도학주의자들인 사림당 또한 정부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고, 임승준에 의해 다시 등용된 이 사림당의 젊은 관료들은 이런 예법(禮法) 문제에는 끝도 없이 깐깐한 이들이었다.

감히 천자의 권리인 역법의 선포를 일개 제후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자는 하늘을 받들어 세상을 주재하는 이였고, 이 정통성과 가장 크게 결부된 것이 역법이었다. 천기의 운행을 가늠하고, 절기에 따라 제사를 주재하며, 나라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모두 예로부터 천자만이 행할 수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각에서의 소란은 재상 임승준이 나서 중재를 하려 했음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상 황제가 아직 어려 아무런 주장이 없으므로, 이것은 내각에서 불거지는 소동이었다.

추밀원은 소흥제의 통치 기간 이후로 사실상 불구나 다름없게 되어, 내각에서 주도하는 정국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각 대신들이 참의(參議)를 겸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이런 풍조는 임승준마저도 손대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임승준의 개혁은 전적으로 내각의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으니, 그가 다시 조정으로 불러다 키운 사림당과 훈구당의 젊은 관료들에 의해 추밀원뿐만 아니라 그의 행동에도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한림원(翰林院)에서 관료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던 이름난 젊은 학자 이황(李滉)이 구구절절 이 문제를 논하는 상소를 공개적으로 나 붙이니, 이것이 이내 문제의 화두가 되었다.

이황은 곧 내각회의에 출석명령을 받았고, 당당한 풍채로 들어서서는 자신의 주장을 내어놓았다. 영남학파의 학문적 세례를 받은 이황은, 사림당의 당색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도의를 주장하면서도 지나침이 없어 모두가 이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옛 일을 상고해 볼 때, 천기의 운행을 다스리는 역법은 천자만이 반포하는 것으로, 제후가 이를 사사로이 제정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조(我朝)가 제후로서 당송(唐宋)을 섬길 때에는 그 역법을 중원으로부터 받아와 사용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감히 사사로이 연호를 쓰는 것도 금지되었고, 묘호(廟號)를 올리는 것도 제후로서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전조(前朝)와 옛 누대(累代)의 일을 떠올려 볼 때, 역법을 따로 반포하거나 연호를 쓰지는 않았으나, 조종(祖宗)의 묘호(廟號)는 제후임에도 올렸으니, 고려의 왕건 태조(太祖)가 그리하였고, 이후로도 그런 기풍은 몽고의 변(變)이 있기 까지 줄곧 그래왔습니다. 다만 역법을 고치지 않은 것은 그 뜻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은 책을 잡힐까봐 두려워서였으니, 대신 간지(干支)를 널리 융통해서 썼습니다. 지금의 심왕은 연호도 받아쓸뿐더러, 묘호도 따로 올리지 않았으나, 역법은 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동의 변론을 들어보건대, 이는 단지 황업을 사사로이 거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백성의 농업을 바로 돌보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 뜻마저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감히 외람되게도 이 역법을 구해 살펴보니, 기존의 중국 역법에 비해 산란함이 없고, 천기가 일정하며 날짜의 누락이 없었습니다. 개성의 유자(儒者) 서경덕의 학문은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그 타당함이 구구절절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겠으나, 그는 적어도 역학(曆學)에는 통달한 인물이라, 그와 유중수 등이 개정한 역법은 감히 타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천자와 제후의 도리를 어긴 것은 백번 죄를 물어도 부족함이 없는 일이나, 새로운 역법만큼은 거스름이 없고 이치에 옳으니, 그 공훈(功勳)을 따져 죄를 삭감하고, 심왕으로 하여금 역법을 폐하여 옛 법을 따르도록 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아조가 황제지방(皇帝之邦, 황제의 나라)을 세우고서도 그동안 마땅히 새로운 역법을 취하지 않았으니, 이 서경덕 등이 개수한 역법을 황명으로 다시 반포하여 전국에 내려 쓰게 하시고, 그것을 다시 심왕이 직접 받아 절차에 맞게 쓰게 하면 조정으로서도 위엄이 서는 일이고, 절차에도 부합하니 문제가 없을 줄 아룁니다.”

이황의 말에 대관들은 다들 감탄하며, 그의 의견대로 들어 쓰라고 임승준에게 말했다.

임승준 또한 이황의 말을 들어보니, 그 안이 가장 좋다고 여겨졌다. 그로서는 제국 전체에서 역법을 고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이번에 요동에서 시행한 역법이 충분히 좋은 제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을 이끄는 재상의 몸으로서 이러한 예법 문제를 묵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곤란한 처지였다. 그러한 가운데, 이 젊은 학자인 이황이 나서서 해결책을 내어 주니 그로서는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여기기에는 이황의 말이 옳은 듯 한 데 대신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임승준이 분위기를 살펴 물으니, 내각 대신들 또한 이황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후국에서 사사로이 만든 역법을 그대로 융통해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땅히 그 역법 자체는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되, 그에 맞게 시각을 재고 일시(日時)를 운용하는 제도는 관상국(觀象局)의 역관과 학술원의 제 학유들이 모여 의론케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요동에는 칙사(勅使)를 보내어 이 뜻을 받으러 역법을 우선 폐지한 다음 다시 황명으로 받아들여 쓰게 하시고, 이렇게 완전히 편수된 역법과 제도를 내년 정월에 맞추어 넓게 쓰리니, 대관들은 이를 중히 여겨 각기 차질이 없도록 해주시오.”

임승준이 최종안을 내어 놓자, 반대하고 나서는 대관들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밖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었다. 제후가 사사로이 황제의 역법을 받들지 않고 만들어 쓰는 것이 문제라면, 건원칭제하고 제국을 세운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가도록 중국 역법을 그대로 쓰고 있는 지금 상황도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요동의 무례함을 탓하던 것이, 이제는 역법개정의 문제로 비화되어 대대적인 개혁이 되고 만 것이었다.

요동으로 가는 칙사는 이 의견의 대강을 낸 이황이 선임 되었고, 그는 요동으로 가서 심왕 진영을 알현하고 이 문제를 지적하고 조정의 뜻을 따르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심왕부로서도 이런 것으로 조정과 척을 져 좋을 것은 없으니, 어차피 일 년을 기다려 역법을 쓰게 된다면 그렇게 따르겠다는 자세로 나온 것이었다.

이황은 이것을 매듭지은 공로로, 법부(法部) 칙임관(勅任官)에 제수 받았을 뿐더러, 집현전(集賢殿)에서 강연할 권한을 얻었다. 또한 어린 황제의 황사(皇師)가 되는 영예까지 얻었으니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다.

조정의 뜻을 받들어, 천문 역법을 관장하는 관상국(觀象局)에서는 서경덕 유중수등이 편찬한 요동역법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에 맞게 제도를 고칠 방법을 궁리했다. 이에 따라 미처 요동의 역관들이 고려하지 못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그것을 고칠 방법도 마련되었는데, 하루의 시간이 100각법(角法)의 시제(時制)에서 96각법으로 고쳐졌으며, 이에 따라 모든 시계의 시각 눈금이 바뀌게 되었다. 또한 원주(圓周)가 365도 하고 1/4도에서 360도로 고쳐졌고, 각도법 또한 종래의 10도법에서 60도법으로 고쳐졌다. 천문의기의 눈금도 모두 고치도록 바뀌었다. 또한 기존 대통력등의 역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길흉(吉凶)을 점치는 점복(占卜)에 관련된 주해(註解)들도 새 역법에는 일절 포함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수정된 역법이 완전히 정리되어 그때의 연호를 따 《건양력대편(建陽曆大篇)》이라는 책으로 편수되어 나오니, 이것을 따로 출판하여 내지와 외지를 막론하고 전국의 제후와 지방관에게 내려 받아 쓰게 하였다. 여기에는 유구국도 포함되어 있어, 유구국에서도 건양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련의 험난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경덕과 심양의 천문학자들이 탄생시킨 새 역법은 건양력이라는 이름으로 내지팔도와 요동, 영진, 진서, 그리고 새롭게 개척된 영주의 척지(拓地)는 물론이거니와, 외방제후국인 유구에서도 새해를 기점으로 쓰이게 되니, 건양 7년 1월 1일, 당시의 서양 율리우스력 날짜로는 1530년 1월 29일의 일이었다. 이 때로부터 제국의 건양력과 서양역법의 일수 차이는 28일로 고정되었다. 대략 한 달이 늦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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