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6장 건양지세(建陽之世) (47/82)

제46장 건양지세(建陽之世)

「처음으로 회사(會社) 설립하고저 하는 者는 주지(主旨, 뜻하는 바)를 세상에 고하야 동업(同業)을 얻는다. 회사를 조직할 時에는 자금(資金), 즉 밑천의 총액(總額)과 이식(利息)의 다과(多寡)를 통틀어 계획하여 신보(新報)나 혹은 공람(供覽)으로 고하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 회사의 유익함을 알게 한다. 그런 후에 고표(股票, 주권)을 발행하는데, 만일 회사의 자금으로 1만 냥이 필요하면 10냥의 고표 1천 장을 찍어 세상의 사람이 매입하게 는 것이다.」

― 성재홍(成載洪), 《고금절요(股金節要)》 中

1533년

건양(建陽) 10년 중동(仲冬)

대한제국 황성부.

세훈이 한성부를 휩쓴 콜레라를 계기로 의학 제도의 정비를 결심하게 된 것이 1417년이었다. 이때에 호부(戶部)에 진휼서(賑恤署)를 설치해 학습원과 연계하여 의술을 살피게 했고, 그 아래에 의학교육기관인 제중원(濟衆院)과 역병을 방역하는 벽온도감(僻瘟都監)을 설치했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진휼서는 그 기능이 분할되어, 왕실과 귀족 및 대신의 진료를 전담하는 내의국(內醫局)은 궁내부 산하에, 일반 의료 전반과 백성들을 진휼하는 것은 내부 산하의 진휼국(賑恤局)으로 분담되었다.

벽온도감은 진휼국의 벽온과로 남았고, 교육기관인 제중원은 문부(文部)로 이관되어 답십리(踏十里) 일대로 옮겨졌다.

그간 소소한 의학적 개선이 이어졌지만, 본질적으로 의학의 수준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여전히 외과 의술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황제내경》 같은 중국에서 들어온 의학서가 여전히 제중원에서 강독되고 있었다.

로마 시대의 갈레노스의 의서를 낭독하며 강의하고 있는 당대의 서양 의술과도 비교해서 절대로 우위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나은 것은 콜레라, 즉 곽란을 구제하며 얻게 된 수인성(水因性) 질병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과 뒤따라 개발된 기초적인 종두법이었다.

1420년대에 이르러 인도 등 서역과의 교역이 전개되고, 이와 함께 천연두가 심심찮게 번지게 되면서 예방 방법을 모색하게 된 것이 그 기원이었다.

인도에서는 12세기 무렵부터 천연두에 감염된 경력이 있는 사람의 고름으로 미약하게 아직 병을 앓지 않은 사람을 감염시켜 면역을 얻게 하는 인두법(人痘法)이 처방되곤 했는데, 이 방법이 나상의 함대와 함께 인도에 다녀왔던 의원 안택(安擇)에 의해 전래되어 개량되게 되었다.

제중원에서는 콜레라를 구제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이후 학습원에서 격물학을 배워 제중원의 학감이 된 유현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인도에서 인두법을 익혀 온 안택 등이 이를 연구하여 처방을 고안했다.

이것은 《취비종두법(吹鼻種痘法)》이라는 서책으로 정리되어 전국에 보급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법으로 사람에게 감염되는 천연두균으로 면역을 보급시키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가 장묘법(漿苗法)으로, 고름을 짜서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의묘법(衣苗法)으로, 고름이 생긴 아이의 속옷을 벗겨 건강한 아이에게 입혀 면역을 체득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는 한묘법(旱苗法)으로, 딱지를 간 가루를 갈아서 코로 들이마시는 방법이고,

네 번째는 수묘법(水苗法)으로, 딱지를 간 가루를 물에 푼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방법이었다.

이런 인두법의 보급은 때에 따라서는 달랐지만, 천연두의 전염을 방지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하기는 했다. 때문에 제중원에서는 이 인두법을 발전시키는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 네 가지 방법도 그러한 맥락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학을 깊게 탐구하는 의원의 숫자는 적었고, 제중원의 교육이 콜레라와 천연두를 막는 방법에만 집중되다 보니, 여전히 외과 의술 및 기타 의학의 발전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예전부터 의심 없이 전래되는 의서에 쓰여 있는 한약 약재들이 큰 고민 없이 쉽게 처방되기 일쑤였고, 제중원의 의생(醫生)들은 음양오행과 이기론(理氣論)을 배우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의원 양성 제도는 결국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가경 연간에 천연두가 크게 유행하였으나, 인두법이 큰 효험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사상자를 확대시키면서부터였다.

인두법은 모든 조건이 맞을 때에는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천연두가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는데, 병의 확산을 돕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중원의 의관들은 크게 당혹했고, 내각에서 인두법을 한동안 금지시키는 등의 조치까지 취해지면서, 제중원의 의술까지 의심받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중원에 학문을 배우러 들어온 의생들은 의학의 발전에 뜻을 모으고, 병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뛰어가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방책을 찾아보곤 했는데, 이 와중에서 병이 옮아 목숨을 잃은 의생도 부지기수였다.

다행이 조금씩 그 전진은 있어 제중원의 의학 지식은 날이 갈수록 쌓여 갔는데, 이것은 경험적으로 얻은 지식들이라 때로는 부정확하고 옳지 않은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처방이 개선되고, 새롭게 의서들이 집필되며, 의생에 대한 교육도 보다 충실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황제와 내각 대신들의 진료를 봐야 하는 내의국으로 가게 될 의생들은 더욱 혹독하게 교육을 받았는데, 그 기간이 적게는 8년에서 길게는 13년까지 걸리곤 했다.

이들은 필요한 지식과 불필요한 지식을 구분 없이 모두 배워야 했는데,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구분해 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두법의 네 가지 방법이 때에 따라서 그 효험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지만, 이것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통 의학으로부터 음양오행을 끌어와 화기(火氣)에 화기(火氣)를 맞세운다던가, 천연두 딱지 가루를 물에 풀어 솜에 적시는 방법을 통해 화기(火氣)를 수기(水氣)로 죽여 이것을 예방한다는 식으로 사실상 옳지 않은 설명도 구구절절이 배워야 했던 것이다.

이때, 건양 연간에 이르러 제중원을 졸업한 의생으로 김순몽(金順蒙)과 박세거(朴世擧)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 중 김순몽은 내의국으로 발령이 났고, 박세거는 제중원에 남아 각기 진료와 의학을 계속해 나가는 상황이었다.

김순몽이 발령이 난 내의국에는, 궁녀 출신으로, 남성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제중원이 아니라 내의국 내에서 의학 교육을 받아 의관이 된 대장금(大長今)이라는 여의가 있었다. 대장금의 본명은 본래 서장금으로, 내의원의 약재를 관리하던 무수리였다.

그녀는 선대 황제인 경종 소흥제의 내의로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황제의 병을 진찰하고 다스리는 등 그 명성이 궐 내에서 높았다.

때문에 이름에 대(大)를 붙여 대장금이라고 칭해질 정도가 되었는데, 소흥제가 쓰러져 가붕하게 되었을 때마저도, 아무도 그녀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의술에 대한 신뢰는 높았다.

대장금도 고치지 못한 것이니, 누가 와도 고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궐 내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순몽, 박세거, 대장금 셋이 바로, 건양 연간에 그 의학적 업적으로 인하여 건양삼의(建陽三醫)로 불리게 되는 인물들이었다.

가장 먼저 업적을 남긴 것은 대장금이었다. 그녀는 내의국에서 여전히 갓 제중원을 졸업한 의생들을 지도하며, 의학을 연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재상 임승준이 병이 중하니 부디 가서 돌보아 달라는 청을 황실로부터 받게 된다.

임승준의 나이가 이미 여든에 가까워, 사실상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평균 수명이 채 마흔이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천수를 누린 나이었다.

임승준은 병색이 짙음을 스스로 알고서는, 자리에 누워 재상에서 사임할 것을 청하고, 내각을 통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 병을 낳게 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의 병증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주 시력을 앗아갈 지경이 된 백내장(白內障)이었다. 노인에게 잦은 이 백내장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탕약(湯藥)으로는 다스려질 질병이 아니었다.

“내 눈을 다스릴 수 있겠소? 어차피 떠나갈 몸이나, 가는 길에 눈을 잃고 가는 것은 슬프구려.”

임승준은 자리에 누워서 초점 없는 눈으로 말했다.

대장금은 의학 경험이 두루 높았으나, 백내장 같은 경우에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배워 왔었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물리고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임승준에게 물었다.

“백내장은 그간 다스려서 낳게 한 전례가 없습니다. 다만, 확인해 본 일은 없으나 서역(西域)에서는 안압(眼壓)을 내려 이를 치료했다고 하는 기록을 본 적은 있습니다. 안압을 내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눈의 가장 윗 꺼풀 안으로 가는 바늘을 밀어 넣어 혼탁해진 부분을 밀어내는 것인데, 아직 이것을 실제로 행하였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결정한다면, 그대가 행해 주겠는가? 어차피 늙은 몸, 앞으로 보지 못할 것이라면 혹여 그 시술이 잘못되더라도 잃을 것이 무에 있겠는가? 우선 왼쪽 눈이라도 한 번 시술해 주게.”

대장금은 임승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방법은, 각막의 가장자리로 바늘을 집어넣어, 혼탁해진 수정체를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시술 방법이었다.

당연히 실패의 위험성도 있었고,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많은 제국의 의관들이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도 이러한 간단한 외과 시술의 경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노재상의 눈을 살려보기 위해서 이 시술을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 방법은 인도는 물론이고,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에서도 드물지 않게 행해지는 방법이었다.

이른바 백내장압 하강술이라 하는 것으로, 실패의 위험성도 있었으나, 어차피 백내장이 생기면 잃은 눈이나 다름없는지라 시술받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장금은 문헌을 통해서만 접한 이 방법을 직관적으로 효험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임승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이 시술을 시도해 볼 용기도 얻게 되었다.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는 바늘을 구하게 한 뒤, 그것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잡아 임승준의 왼쪽 눈 각막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뒤 바늘 끝이 수정체 위의 백내장 덩어리에 닿자 그것을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을 완전히 제거하자면, 각막을 벗겨내야 하니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다만, 빛을 받아들이는데 지장 없도록 아래쪽으로 밀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눈으로 바늘이 들어오는 일인지라, 임승준 또한 이것을 견뎌 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끊임없이 밀고 내려오는 눈꺼풀을 하인이 계속 잡고 있어야만 했다. 조심스럽게 하는 일인지라, 이 시술은 꽤나 시간이 걸렸고, 한 시진이 걸려서야 끝을 낼 수 있었다.

안구의 다른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각막에서 바늘을 빼낸 대장금이 임승준에게 물었다.

“보이시나이까?”

대장금의 말에 임승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이 따끔거리는 듯, 그는 주름진 눈가로 눈물을 배어 내며 대장금의 손을 쥐어 잡았다.

“고맙네. 그래도 가는 길에 얼굴들은 보고 가야지.”

대장금은 임승준의 나머지 오른쪽 눈도 백내장을 밀어내는 시술을 해 주었다.

비록 눈은 되찾았으나, 그의 수명은 더 오래가지는 못했다.

시력을 되찾은 뒤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한참을 피를 토하다 죽었으니,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진양백(鎭陽伯)의 작위가 추증되고, 그의 유일한 자녀인 서자에게는 진양백의 작위가 습봉되도록 하였다. 또한 태묘(太廟)의 선대 황제인 경종 소흥제의 신위 아래에 그 위패가 함께 봉안되니, 그 공적을 인정받은 까닭이었다.

비록 임승준의 노환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으나, 대장금이 행한 임승준의 백내장 치료는 이내 도성으로부터 시작해 구름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를 보는 수술은 아니었으나, 제대로 된 외과 시술로서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들 고칠 수 없다고 여겨지던 병을 그녀가 치료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어떻게든 치료를 받아 볼까 하는 환자들과 그 비법을 배우려는 의관들로 진휼국의 문이 닳을 지경이었다.

대장금이 있는 내의국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진휼국으로 찾아가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내각에서는 대장금으로 하여금, 이례적으로 여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제중원에서 이 시법을 강연하도록 하고, 앞으로 재능 있는 궁녀들 중에서 사람을 뽑아 그녀에게서 의술을 배우도록 하니, 그녀 홀몸으로 여자 의원들이 발을 붙일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건양삼의 중의 다른 한 명인 김순몽(金順蒙)은 대장금과 함께 당시에 내의국에 있었다.

그는 특히 제중원 의생 시절부터 종기를 다루는 실력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특히 이쯤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종기를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고, 외과적인 기술로 절제를 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보다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얻기 위해 자청하여 내의국을 나와 진휼국으로 옮겨 갔다.

황성부에는 진휼국의 의관들에게 진찰을 받으려는 내원자들로 늘 문전성시였는데, 그중에서는 종기로 인해 고생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는 대장금의 외과 시술로 인한 백내장 치료에 자극을 받고 있었고, 외과적 시술을 꺼려 하는 종기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여 절제술을 행하고자 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몸에 칼을 대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환자가 많았고, 선배 의관들의 눈초리도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순몽은 종기에는 절제가 가장 좋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모든 종기 형태를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름이 찬 종기에만 수술을 권했을 뿐, 더러 그를 찾아와 종양을 절제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에게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종양은 그 성질이 복잡하여,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는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농양(膿瘍), 즉 고름집을 째는 시술만을 취급했는데, 농양을 배종(背腫)·내종(內腫)·음종(陰腫)·항종(項腫)·고창(鼓脹) 등으로 분류하여 시술했다.

그의 시술법은 간단한 편으로, 녹이 슬지 않은 칼로 이 종양을 째어 고름을 빼내고, 이것이 나을 때까지 반복해서 시술하는 것이었는데, 때로 이것이 심할 경우에는 소작법, 즉,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서 아주 재발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가 하는 시술이 마취를 할 수 없어 상당히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효과가 소문이 나 종기 환자들이 그 앞에 줄을 설 정도가 되었으니, 그 명성 또한 대장금에 이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여기에서 의술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연두를 예방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존의 인두법이 지닌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요동으로 떠날 기회가 있었다. 요동에는 목축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여러 해 전 요동에 천연두가 퍼졌을 때 이들 목자들만이 천연두를 피해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인두법을 시술받거나 한 적이 있소?”

김순몽의 물음에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당시 천연두가 피해 간, 목축을 주로 하는 북변의 마을의 인구 200여 인 중에서 인두를 한 번이라도 접종받은 경험이 있는 자는 네 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오래되어 그 효험이 남아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을 탐색하던 와중에, 김순몽은 소 또한 마마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천연두가 퍼져 나가기 여러 해 전에 이 마을의 소들에게 천연두가 퍼져 소들이 마마를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그 상관관계가 김순몽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들은 천연두에 걸린 소와 지속적으로 접해서, 인두를 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은 것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소의 것이라면 사람에게 일부로 옮겨도 그 병증이 강하지 않을 것이고, 인두법에 비해 그 효험이 좋을 것이라 여겨졌다.

김순몽은 그 즉시 바로, 자신의 아들에게 우두(牛痘)를 접종하였고, 서너 해 뒤에 천연두가 잠시 창궐했을 때, 아들이 그 병증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우두신서(牛痘新書)》를 써서 이 우두법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는데, 과연 천연두에 탁월한 효험이 있어 이내 민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김순몽은 이 공로로, 이화장(李花章) 대훈위 2등을 받고, 임제개국자(林除開國子)의 작위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추서되고, 그 스승인 허종(許琮)까지 대부(大夫)에 추증되었으니 나라에서 그 공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 까닭이었다.

앞의 두 명의가 그래도 호의적인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면, 제중원에 남아서 의학을 강의하다가 갑자기 불명예를 얻게 된 것이 바로 박세거(朴世擧)였다.

박세거는 의술을 행하는 것보다는 의학 자체에 흥미를 느껴 공부를 계속하고 의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중원에 남았고, 동문인 김순몽이 종기의 치료로 크게 명성을 얻는 와중에도 그는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의생들이 늘었고, 음양오행으로 원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합리적인 병의 기작을 찾아내려 하는 그의 태도는 제중원 내에서 동지도 만들었으나, 적 또한 만들었다.

전통적인 의학 교육에 대한 의구심과 반발의 원천으로 지목되었음에도 박세거는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자들을 가르쳐 나갔다.

그가 가르치는 것에는 기혈론(氣穴論)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것에 대해 늘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이것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으니, 의심은 가나 답답한 노릇이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동안 제중원에 종종 들어오는 각국의 의서(醫書)를 꼼꼼히 살피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개중에는 명과 일본의 것뿐만 아니라 드물게 인도나 아랍, 그리고 서양의 것도 섞여 있었다.

외부(外部)의 관리들에게 부탁한다면 어렵게 이것을 옮겨 줄 터이나, 그리 한가할 리가 없을 노릇이니 박세거는 뜻을 모르더라도, 그러한 의서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랍이나 서양의 의서를 보는 이유는, 그곳에 인체의 해부도를 그려 놓은 것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박세거는 제대로 인체를 이해하고 의술을 행하기 위해서는 해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격물학의 영향으로 전통 성리학의 개념이 많이 희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대의 대한제국은 유교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시체를 아무리 의술을 목적이라고 한다 하나, 칼을 대어 해부하는 것은 좀체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전면적으로 해부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법령에 따라 짧게는 1년에 다섯 구, 혹은 5년마다 1구 하는 식으로 제한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지역에 따라서는 엄격히 금지되던 시절이었으니, 그나마 해부가 의학에 필요하다는 인식도 부족하고 제대로 이루어진 적도 없는 대한제국에서 이것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박세거는 그 필요성에 대해서 자신을 쫓는 의관 및 의생들과 숨죽여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내 몇 년이 흐르고서는 공공연하게 그 필요성을 주장하며 내각 등에 탄원하기 시작한다.

내각에서는 이것이 역겨운 일이나, 정말로 필요하다면 허락할 수 있다는 정도로 제중원에 통보했으나 제중원 내의 의견도 분분한 것을 알고서는, 당초의 방침을 바꾸어 민심과 풍속을 고려해 허할 수 없다고 나왔다.

“이것이 모두 자리를 꿰차고 앉은 늙은이들의 허명이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결국 좌절한 박세거는, 제중원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그 제자들과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제중원에서 나와, 사적으로 의학을 교육하는 학교를 열고자 마음을 먹는다.

결국 그는 용산 일대에 광혜원(廣惠院)을 세우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것을 제중원이나 조정의 대관들이 고깝게 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광혜원에서는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일부로 죽여서 밤에 몰래 해부한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연히 광혜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의 발길은 끊어졌고, 의업을 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싶어 광혜원으로 의술을 배우려 오는 의생들도 줄어들면서 박세거와 광혜원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박세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광혜원의 운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뜻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해부를 공식적으로 허용받을 수는 없었으나 때때로 당국에서는 사형을 당한 죄수들 중, 그 시신을 거두어 갈 친지가 없는 이들에 한해서 사체를 해부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 덕에 박세거와 광혜원의 의생들은 사람의 실제 몸을 일 년에 두어 차례기는 하나 직접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썩는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정된 사체로 온갖 인체 장기와 신체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해부에 전념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기회기에 하나하나가 소중한 경험이었다.

죄수의 죽은 몸이라 하나 이들은 사체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해부가 끝난 뒤에는 사체를 고이 화장하여 불장(佛葬)을 치르고 도성 밖 절간에 공양을 맡기곤 했다. 갈가리 찢긴 몸이니 매장할 수 없어 화장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 인체의 해부를 토대로 인체해부도 등을 그려서 시체가 없을 때에도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를 남겼다. 이러한 것들은 십여 년여가 더 흐른 뒤에 《인체도설(人體圖說)》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명의(名醫)로 이름이 높았던 대장금과 김순몽에 비해, 박세거는 당대에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만 그 저술과 제자들을 광혜원을 통해 남길 수 있어서, 후대에 이르러 해부와 외과의술이 보편화된 다음에 인정받을 수는 있었다. 그때에 가서야 후대 사람들이 이들을 한데 묶어 건양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비록 당대에는 초라하고 궁색 맞은 출발이었으나, 이러한 외과 의술의 전개와 우두 접종, 그리고 매우 제한적이나 해부 등의 실시로 인하여 제국 의학의 발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537년 맹동(孟冬)

타완틴수유(Tawantinsuyu)제국 포토시.

모든 것은 피사로로부터 시작되었다. 신대륙으로 떠난 카스티야 출신의 정복자들 중 하나였던 그는 멕시코, 즉 아즈텍 제국을 방랑하던 중에 남쪽의 부유한 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전부터 종종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그 남쪽에 막대한 은과 금으로 치장된 궁전이 있고, 그는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합디다.”

조선인들의 개입으로 인해 아즈텍 제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고, 동부 해안 일대에 식민지를 구축하고, 교역에 만족할 수밖에 없던 카스티야의 정복자들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정복에 실패한 뒤에도 누에바 카스티야, 즉 카스티야령 신대륙 식민지의 총독이 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있었는데, 그가 아즈텍 제국을 압박해 조선인들과 동등한 무역권을 보장받은 덕이 컸다.

그러나 더 이상 카스티야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자들은 정복 활동을 통한 손쉬운 부의 획득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고, 총독부에서 무역 허가증을 받아 적대적인 아즈텍 경내로 들어가 조선인들과 경쟁하며 무역하는 것이 유일하게 은을 손에 쥐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또한 이렇게 막대한 부를 기대하고 신대륙으로 건너왔으나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빈털터리가 된 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피사로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나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돼지를 돌보는 일을 하며 자라났고, 용병 생활을 거쳐 발보아 원정대를 따라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1513년 발보아의 함대는 파나마에 다다라 태평양을 발견했고, 이 일대를 카스티야 왕국의 영토로 선포하고는 쿠바로 철수했다.

탐험대의 남은 인원이 스물일곱 명에 불과했기에 이곳에 정착지를 건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을 본국에 보고하기 전에 이미 신대륙 해안 일대까지 들락거리는 아라곤 상선들이 이 소문을 접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얼마 전까지는 속칭(俗稱) 스페인이라는 이름으로 한 나라를 이뤘으나, 결혼 동맹이 이사벨 여왕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두 왕국이 서로 다른 후계자에게 상속되면서 이제는 치열한 경쟁 국가가 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이 먼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뚫고, 대한제국과 경쟁을 하고 있었으니, 카스티야와 아라곤 모두 시선을 신대륙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새로운 발판을 상대방보다 먼저 마련하고자 하는 이 신경전에서, 첫 출발은 카스티야가 빨랐지만 아라곤은 지중해 무역으로 이룩한 대규모의 함대를 포르투갈에게서 빼앗은 세우타를 통해 대서양으로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었다.

일 년에 열 척 남짓의 배였으나 겨우 한두 척을 어렵사리 보내고 있는 가난한 나라, 카스티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라곤은 카스티야의 발보아 함대가 파나마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를 선점하고자 서둘러 대서양에 나와 있던 4척의 함선을 모두 보내 130명의 선원을 상륙시키고, 이곳을 아라곤 왕의 영토로 선포한 다음, 파나마 시(市)를 세웠다.

프란세스 데 피뇰(Francesc de Pinyol)이 이곳의 총독으로 곧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치열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파나마 일대를 자국의 발보아가 먼저 발견하고 영토로 선포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카스티야 정부가 강력하게 아라곤에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아라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파나마에 정착했다고 발뺌하고 나섰고, 거기다가 먼저 사람을 거주시키고 총독까지 파견했으니 카스티야의 주장은 실효가 없다고 나섰다.

카스티야는 파나마로 함대를 파견해 아라곤으로부터 무력으로 파나마를 탈환할 생각을 했으나, 이내 아즈텍으로 관심이 돌려지면서 열대 우림만 무성한 파나마에는 점점 관심이 줄어들었다.

결국 1524년, 톨레도 조약으로 파나마 일대에 대한 아라곤의 권리를 카스티야가 인정해 줌으로써 결국 이곳은 정식으로 인정받은 아라곤의 영토가 되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론의 이름을 따 이곳은 콜롬비아(Colombia)로 명명되었고, 그 총독부가 주재한 곳은 파나마(Panama)로 이름 붙여졌다.

커다란 대륙을 잇는 곳에 자리한 가느다란 지협을 중심으로 양쪽 바다로 접근할 통제권을 아라곤이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발보아 함대에 참여했던 피사로는 이러한 정치놀음 때문에 큰 손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만약 아라곤이 잔꾀를 부려 파나마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그 땅에는 자연스레 발보아가 총독으로 부임했을 것이고, 그 부관이었던 자신 또한 출세를 기대해 봄직했다.

그러나 땅은 땅대로 아라곤에게 빼앗기고 발보아도 병사를 하는 바람에 피사로는 그만 줄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몇 년간 아즈텍 무역에 어떻게든 참여해 볼 기회만 노리던 피사로는 어렵사리 아즈텍으로 들어가는 상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지만, 그것 또한 기대했던 것보다 수입이 적었다.

유일한 성과라면 남쪽의 번성하는 금과 은으로 치장된 제국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뿐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피사로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제국에 관한 것만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군인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신부인 에르난도 데 루케를 조력자로 얻을 수 있었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험을 불사할 작정이었다.

그는 누에바 카스티야의 총독부를 찾아가서 탐험대를 조직하는 것을 도와달라 요청했지만 설득에 실패하자, 직접 카스티야 본토로 다시 건너가 무작정 카를로스 국왕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카를로스 5세는 카스티야뿐만 아니라 이제 막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계자로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대의 막대한 영지를 상속받은 차였다.

그는 그의 제국을 좀 더 늘리기를 원하고 있었고 피사로의 구미는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만약 그곳에서 금과 은을 충분히 건져 낼 수 있다면 그의 정치 사업도 보다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카를로스 국왕은 전대 카스티야의 여왕 후아나(Juana)가 정신 질환으로 수도원에 유폐되어 왕위를 양위받은 상태였다.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결혼 동맹이 끝난 뒤에 카스티야는 둘 사이에서 난 딸인 후아나가 물려받았고, 아라곤은 원래 두 왕국을 모두 물려받았어야 할 아들 후안이 죽음에 따라 유복자(遺腹子) 엔릭(Enric, 카스야어로는 엔리케)이 왕위를 계승한 것이었다.

서로 사촌지간인 이 두 왕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고, 파나마를 결국 내어 주고 말았던 카를로스 왕은 사촌에게 겸사겸사 한 방 먹일 겸해서, 이 피사로를 지원하고 나선 것이었다.

왕으로부터 얼마의 함대와 자금, 그리고 병사와 무기를 지원받은 피사로는 의기양양하게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남쪽의 제국으로 가는 길목은 아라곤의 식민지가 가로막고 있어 이동이 매우 힘들었다. 아라곤이 길을 수이 열어 줄 턱이 없었으니, 피사로는 우회로를 강구해야만 했다.

때문에 그와 그가 이끄는 정복자들은 열대 우림 속을 한참 행군하고,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도 넘어서야 했다.

1531년 1월 스물일곱 필의 말과 180명의 병력이 성공적으로 산맥을 넘어 새롭게 발견한 제국의 경내(境內)로 접어들었다.

케추아어로 황제를 칭하는 잉카(Inca)가 나라 이름으로 와전되어 후일 알려지게 되는 이 제국의 정식 명칭은 타완틴수유(Tawantinsuyu)로, 사방(四方)의 땅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국명이었다.

수유(Suyu)는 곧 제국의 행정 구역을 일컫는 말이었고, 이것이 사방으로 네 개가 있어 곧 제국 전체인 타완틴수유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타완틴수유의 황제(Inca)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그 아들 사이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두 왕자 우아스카르(Hu scar)와 아타우알파(Atahualpa)를 놓고 저울질하던 피사로는 우아스카르에게 접근해 아타우알파를 물리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참전을 약속했다.

공식적으로 우아이나 카팍을 승계한 것은 아타우알파였고, 피사로는 명분상 밀리는 우아스카르가 쉽게 이 제안을 승낙할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이다.

물론 피사로는 금과 은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우아스카르를 이용해 제국의 장악에 성공한 다음에는 이곳을 카스티야 국왕의 영토로 선포하고 통치권을 행할 복안까지 이미 있었다.

그러나 내전은 피사로의 생각만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우아스카르와의 불완전한 동맹 때문에 피사로의 소규모 원정대가 가진 기술적 이점과 약점이 내전 쌍방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피사로는 코르테스가 기습전의 실패로 아즈텍을 점령하지 못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심스럽고 정치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피사로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말과 총으로 적들을 위협할 수 있었지만, 그 원정대의 숫자는 적었고, 탄약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27필뿐인 말은 이내 그 숫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탈출로가 없다는 것이었다. 북쪽은 아라곤 식민지였으니 어떠한 보급과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정복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아타우알파는 이 피사로의 군대에 심각한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고, 새로운 동맹을 찾기 시작했다.

때로는 멀리 아즈텍까지 무역을 떠나곤 했던 자들이 파나마의 아라곤 식민지와 아타우알파를 연결시켰고, 아타우알파는 피사로를 견제할 세력으로 이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아라곤령 콜롬비아 총독 프란세스 데 피뇰은 이내 직권으로 개입을 결정하고, 120필의 말과 총으로 무장한 250명의 병사를 포함한 병력을 아타우알파에게 지원했다.

이미 식민지가 정착된 아라곤의 지원은 신속했고, 태평양을 통해 배로 이 병력을 쉽게 실어 보낼 수 있었다.

아라곤의 지원 덕분에 아타우알파는 결국 우아스카르를 몰아낼 수 있었고, 피사로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라곤군에 넘겨져 파나마로 압송되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몸값을 지불하고 누에바 카스티야로 돌아온 피사로는 그곳의 총독 코르테스에게 재원정을 간곡히 사정하기 시작했다.

코르테스 또한 점증하는 아라곤의 세력에 이때쯤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고, 자신이 아즈텍 정복에 실패한데 비해 아라곤이 타완틴수유를 고스란히 얻게 된다면, 신대륙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피사로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코르테스는 신대륙 식민지 전역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250필의 말과 7백여 명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것을 피사로의 지휘에 맡겨서 다시 타완틴수유로 들여보낸다.

피사로의 2차 원정대가 타완틴수유로 다시 들어왔을 때 아라곤 군대는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아타우알파에게 금과 은을 내어놓으라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타우알파는 만족스러운 보상을 아라곤 군대에게 해 주지 않고 있었고, 때문에 이들의 긴장 상태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쿠스코(Cuzco)를 에워싸고 주둔한 아라곤 군대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기습적으로 상륙해 잘 닦인 제국의 관도를 돌파하여 쿠스코까지 진격해 들어온 피사로의 군대에, 아라곤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쿠스코를 둘러싼 아라곤과 카스티야 사이의 혈전은 결국 피사로의 승리로 끝났다.

쿠스코 성으로 쏜살같이 들어간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석방 조건으로 많은 금과 은을 제시받았다.

피사로는 한 번 이것을 받고 아타우알파를 풀어 주었지만 쿠스코에 아주 주둔하고서는 지속적으로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하고 보화를 내어놓으라 압박하고 들어갔다.

결국 이러한 와중에 1533년 피사로는 결국, 카스티야 왕 카를로스 5세에 대한 반역죄를 명목으로 들어 아타우알파를 처형시키고 이곳을 페루(Peru)라 명명한 다음, 스스로 총독을 자임한다.

쿠스코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파나마의 아라곤 총독은, 피사로에게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바로 제3자를 또 이 진흙탕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아즈텍의 북쪽으로 진출해 있는 조선인들은 이미 포르투갈과의 경쟁 때문에 대서양 일대에서 아라곤과 결속을 맺고 있었다.

사실상의 상업 동맹인 이들이 이번 작전에 군대를 빌려 준다면 다시 쿠스코에서 카스티야인들을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총독은, 사절을 아즈텍으로 급파한다.

테노치티틀란에는 조선인 대표가 상주하고 있었고, 이것은 곧 영주진으로 보내져 그곳의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개입을 결의하게 된다.

새로운 시장이 생길 수 있는 기회인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아즈텍 문제에서 이와 같이 개입한 전례가 있었고, 영토를 차지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았지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몸을 사리지 않았다.

1523년에 가장 남쪽에 개척된 조주보에는 신대륙 경략을 위해 일곱 척의 군선(軍船)과 1,5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영주파견대(瀛洲派遣隊)라는 정식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지만, 군선에 탑승한 일부 해군을 제외하고는 병력 태반이 사실상 현지에서 편성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그나마 훈련이 잘된 700여 명의 병사가 파견대장 육군 참령(參領) 류근형(柳勤炯)의 지휘하에 5척의 함선에 나누어 타고 남쪽 바다로 항로를 잡아 내려갔다.

이 항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가는 길이었고, 어렵사리 아라곤령 콜롬비아의 파나마에 도달해 겨우 보급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부터는 아라곤 항해사의 도움을 받아 타완틴수유까지 무리 없이 항해할 수 있었다.

이들 영주파견대가 상륙했을 때에는 이미 피사로에 의해 아타우알파가 처형된 뒤로, 사실상 제국은 정치적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피사로는 여전히 제국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피사로를 물리치기 위한 잉카인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피사로는 부관인 알마그로와 불화를 빚고 있었고, 때문에 한 줌 같은 카스티야군은 내분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근형이 이끄는 부대는 북부의 카하마르카(Cajamarca)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쿠스코의 피사로에게 최후 통첩하고 물러갈 것을 종용했다.

난데없는 소식에 깜짝 놀란 피사로는 쏜살같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이들과 맞섰지만, 결국 무기와 병력 모두 우위에 있는 류근형의 군대에 패배를 겪고 다시 북쪽으로 도망가게 된다.

부관 알마그로는 류근형에게 투항해 아라곤령 콜롬비아로 보내지고, 쿠스코의 통제권은 이제 류근형의 손에 떨어졌다.

피사로와 다르게 류근형은 이 제국을 집어삼킬 생각이 없었다.

이미 북서쪽의 식민지를 경영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곳으로 오기 이전에 영주진령 겸 창명첨사로서 사실상 조정으로부터 신대륙 경영을 위임받은 셈인 혜성군 주현에게 점령은 하지 말고 이권(利權)만 취해 오라는 분부를 받은 터였다.

어차피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정복한 자에게 총독이 될 권리를 주는 카스티야와 다르게 이곳을 정벌해 보아야 류근형으로서는 사사로이 이득될 것이 없으니 그가 따로 욕심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피사로의 부대가 지니고 있던 금과 은을 노획해 자신을 비롯한 원정군에게 나누어 주고서는, 그는 더 이상 약탈을 하지는 않았다.

쿠스코에 들어선 류근형은 아타우알파의 동생인 우알파 투팍(Huallpa T pac)을 황제, 즉 사파 잉카(Sapa Inca)의 자리에 앉히고는, 그와 협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류근형은 우알파 투팍에게서 포토시(Potosi)의 은광(銀鑛)을 넘겨받았고, 조선 상인과 아라곤의 상인들을 위한 무역권도 보장받았다.

류근형을 대동한 아라곤 상인들은 항구를 건설할 것을 제의했는데, 이미 피사로가 새로운 페루의 수도로 계획하고 땅을 다져 놓은 리마(Lima, 利瑪)가 선정되었다.

이 항구는 대한제국과 아라곤 왕국의 상인들이 협정에 따라 자유롭게 출입하고 상호 공동으로 번영할 것을 약속했다.

피사로와 카스티야 왕국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만족스럽게 일은 처리되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타완틴수유는 잃은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을 뿐더러, 아라곤 왕국은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한제국 또한 큰 손실 없이 무역권을 확보한 데에 만족했으며, 오히려 신대륙에서의 경쟁 세력인 카스티야를 또 한 번 저지한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알지 못했으나 진정 큰 소득은 포토시의 은광이었다.

이미 1462년에 그때의 사파 잉카였던 우아이나 코팍이 이곳에 광산을 팔 것을 명령하기는 했으나, 조금의 은을 긁어냈을 뿐, 이곳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우알파 투팍 또한 대한제국에게 사소한 보상으로 이 광산을 넘겨준 것이었다.

케추아어로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의 의성어인 포톡(potoq)에서 나온 포토시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겨우 산 표면으로 삐져나온 은맥을 조금 망치를 쳐 긁어내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영주에서 새롭게 인수받은 광산의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영주진에서 관리가 파견되고,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포토시 광산의 가치는 재평가되었다.

이 산 일대에 어마어마한 은 광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산의 권리를 내어 준 우아이나 코팍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대한제국으로서는 횡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주진에서는 이 광산의 중요성을 금방 파악하고서는, 우아이나 코팍에게 이 광맥의 가치를 알리지 않고 다시 한 번 이 광산의 권리를 확인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게 한 뒤, 총포와 말로 무장한 200의 병력까지 주둔시키고 광산 일대를 지키게 했다.

신대륙으로부터의 엄청난 은의 행렬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1542년

건양(建陽) 19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경상도 동래부

계영양행에 이어 신대륙 경영에 뛰어들었던 내상의 성적은 그동안 그다지 좋은 편이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여러 내지의 소상인은 물론이고, 유국국왕 쇼 신에게까지 투자를 받아 개척에 나섰었다.

1505년 정동보를 세우고 개척지를 세우는 데에 성공하고, 이어서 1419년에는 소흥보로 세워 그 개척지를 넓혔지만 사실상 신대륙을 가장 먼저 개척한 혜성군 주현을 비롯한 함상(咸商) 계통의 계영양행 상인들의 우산 아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들은 아즈텍 무역에도 뒤늦게 뛰어들어야 했고, 개척지의 규모가 작은 탓에 늘 식량 및 식수 보급 등 사소한 부분에 있어서도 인구 4,000명의 대규모 정착지로 성장한 영주진을 비롯한 계영양행 계통의 정착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상은 간신히 적자를 매우며 버텨 나가고 있었는데, 그간에 입은 손실이 커서 이득을 볼 때까지는 감히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주요 투자자라고 할 수 있는 유구국왕이나 탐라국주로부터 빨리 이득을 취해 오라는 압박이 없었기에 버텨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기회가 왔으니, 바로 포토시 광산이라는 대맥(大脈)을 터트린 것이었다.

혜성군 주현은 누구나 그랬듯이 이 광산의 가치를 그다지 대단하게 보지 않았기에, 고전고투를 하고 있는 이들 내상에게 배려 차원에서 광산의 지분을 절반 떼어 주었다. 더불어 새롭게 개척된 항구인 리마로 입항할 수 있는 권한도 발부해 주었으니, 한 번 새로운 무역 시장에 뛰어 보라는 권유였다.

내상으로서도 이것을 별로 대단한 기회로 보지 않았고, 신대륙의 제국 식민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혜성군의 권유이고 하다 보니, 처음에는 반쯤 억지로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내 채 몇 해가 흐르지 않아 광산의 가치가 재발견되었고, 내상은 그제야 큰 기회를 잡았음을 알아차렸다.

광산 지분의 절반이었으니, 파기만 하면 수익이 나오는 이 광산을 통해 그간의 적자를 면할 뿐더러, 엄청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을 간파한 것이다.

제국의 통화 체제는 은본 위에 기반한 것으로, 은이 곧 화폐였다. 그런데 이런 막대한 은광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곡괭이만 들이대면 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상은 바로 이 광산 개발에 전력으로 뛰어들었다.

나머지 절반의 지분은 계영양행이 쥐고 있었는데,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에 매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국고(國庫)로 절반이 흘러들어 가고, 나머지 절반은 내상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셈이었다.

문제는 기회는 뻔히 보이는데, 이 광산을 채굴하기 위해서 기반을 닦으려면 투자금이 필요했고, 지금은 내상이 쥐고 있는 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간 적자를 매우는 데 골몰해 왔으니 착수금이 있을 턱이 전무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광산 개발을 하기가 힘듭니다. 이미 영주파견대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광산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고, 이미 이 병력의 보급을 저희가 떠맡기로 이야기가 다 된 상황입니다. 계영양행 쪽에도 돈을 융통해 보려 했으나, 이 광산의 개발권을 넘겨준 것이 배가 아픈지 자금을 융통해 주기는 커녕 광산 지분을 도로 매각하라고 성화였습니다. 본토에서 돈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광산 개발을 떠맡은 행수의 말에 내상의 수뇌부는 머리를 맞대 모았다.

처음에 신대륙 경영에 나설 때도 부족한 자금을 매우기 위해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 모았던 그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방법을 쓰면 좋을 터였지만, 이미 투자받은 돈도 충분히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추가 투자를 받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늘 하던 방식대로 하되, 이 투자받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려 내어놓는 것입니다. 비록 만 냥 단위의 거금을 한 번에 융통할 수는 없겠지만, 신대륙 경영 전반을 전담하는 상단을 조직하고, 그 이익을 얻을 권리를 일반에 내어놓고 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에 은전을 놀리는 백성들도 이것을 사서 돈을 투자할 수 있으니, 비록 은전 다섯 푼짜리더라도 이런 것이 수백, 수천 장 모이면 큰 돈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투자받아 광산을 파기만 하면 수익이 확실한 일이니 이윤을 충분히 지급할 수 있고, 우리가 이 고본(股本, 사업을 경영할 때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내는 밑천)에서 지분을 절반 이상 확보한다면, 이 상단을 운영하는 데에 통제권 또한 확보할 수 있으니, 남은 지분만 고권(股券, 주권)을 발행해 얻으면 될 일입니다.”

또다른 행수가 의견을 내었다.

그의 의견은 혁신적인 것으로, 사실상의 주식 제도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일반 민간 시장에 주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내어놓아 이익과 손실을 모두 이 투자자들과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상단은 운영 자금을 쉽게 모을 수 있었고, 또한 이 운영이 잘되면 투자자들 또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이미 내상이 그랬던 것처럼 상당한 부를 가진 왕족, 귀족, 상인 등이 함께 이 고본을 내어 경영하는 일은 있었지만, 혁신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권리를 잘게 나누어 일반 백성들도 쉽게 매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도의 가치를 금방 알아본 내상의 수뇌부는 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곧바로 기존의 신대륙 경영 부분을 창해고금합명상사(滄海股金合名商社), 약칭 창해상사(滄海商社)라는 새로운 상단으로 만들어 총 자본을 30만 냥으로 설정하고, 그중 16만 냥을 내상에서 내고, 기존의 투자받았던 소규모 지역 상단 및 유구국왕과 탐라국주의 지분을 7만 냥으로 환산하여 고권을 내어 주고, 나머지 남은 7만 냥 치를 은화 닷 냥짜리 고권 1만4천 개를 발행하여 아무나 자유롭게 매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 신보(新報)를 통해 전국에 알리니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매입하고자 했다.

고권 한 장이 닷 냥짜리면 적은 돈이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입에 풀칠할 수 있는 농민 가정이면 빠듯이 모아 한 번 내어 볼 만한 돈이었다.

잘되면 돈이 남으니 좋은 일이고, 못되어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터이니 약간의 마음만 먹으면 고권 한 장을 사는 것은 크게 힘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집에 좀 모아 둔 돈이 있다면 이참에 고권 한 장 사 보는 것은 어떤가? 은화 닷 냥이면 나라에 뜸뜸이 바치는 세금과 큰 차이가 없으니, 어렵지 않게 내어 볼 수 있을 걸세.”

“그런가? 그런데 고권 한 장으로 되겠는가? 남아 보아야 얼마 남지 않을 터인데.”

“쌓아 둔 돈이 많지 않은 우리 같은 소민(小民)이 한 장이면 족하지 뭐. 우선 내어 보게나.”

은화 닷 냥이 적은 돈은 아니었다. 특히 소민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돈을 내어 자본을 증식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조그만 땅을 부치거나 남의 소작을 조금 크게 하는 정도의 소민들은 이러한 궁리는 많았지만, 일부만이 고권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부는 이 사업이 잘될 경우, 여윳돈을 만질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가장 많이 고권을 구입한 것은 어느 정도 안정되게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거나 하는 이들이었다.

그 외에도 고을의 아전(衙前), 향반(鄕班) 등 고권을 여러 장 사 둘 여력이 되는 중간 계층이었다.

고권이 예상보다 성황리에 팔려 나갔고, 살 수 있는 수량이 줄어들자 저절로 그 가격이 뛰기 시작했다.

창해상사에서는 이 고권의 가격을 사흘마다 한 번씩 매겨 신보에 공시했는데, 창해상사가 정가에 내어놓은 고권이 모두 동 난 뒤에는 이것을 뒤늦게 구입하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 상사가 채 완전히 출범하기도 전에 그 고권의 장당 가격이 은화 열 냥으로 뛸 정도가 되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했음에도 기대만으로 그 가치가 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예전 내상의 신대륙 경영을 위한 초석을 놓았던 행수 방동일(方東壹)이 창해고금합명상사의 총재(總裁)로 임명되었고, 이는 이 권한을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포토시 광산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포토시 광산은 내상에 의해 내지에도 널리 알려져 속칭 신천은광(新天銀鑛)이라 불리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의 은광이라는 뜻이었다.

이 신천은광에 대한 기대는 날이 갈수록 부풀어져 사실상 투자받은 돈으로 창해상사가 은광 개발에 착수하고, 인력을 고용하는데 돈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고가(股價, 주가)가 올라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은을 파내기 시작하는 1545년에는 이미 고권의 개당 가격이 은화 15냥 선에서 거래되고 있었으니,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 가치가 무려 세 배를 뛴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헛되지 않아 광산에서는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하루 하루 고가가 오르니 신보를 볼 때마다 기쁘기 그지없으이.”

“이미 이 고권이 요동으로도 넘어가서 통보로는 열닷 냥, 요동폐로는 열세 냥에 팔리고 있다고 하네. 옆 마을 조가는 딸 혼수 삼아 이 고권 서른 장을 딸려 보냈다더만.”

창해상사에 고금을 투자해 놓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 동향에 시선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상 내지팔도에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신대륙의 사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은 신천광산의 개발 동향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동래항에 영주에서 건너온 선박이 정박하기라도 하면, 서로 소식을 들으려 구름처럼 몰려들곤 했다.

이러한 사정이니 이 무렵 창간된 신보인 〈동래순보(東萊旬報)〉에서는 열흘마다 한 번씩 발간될 때마다 창해상사의 주가를 공식적으로 개제하고, 동시에 영주, 즉 신대륙의 사정도 가능한 모아서 전달했다.

태완국(泰琓國, 타완틴수유, 즉 잉카), 맥서국(貊西國, 멕시카, 즉 아즈텍)이니 하는 이름이 널리 이 신보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계영양행과 창해상사 간의 경쟁, 혹은 최근 영주 무역의 동향, 거기에 드문드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식민지 정보까지 신보를 통해 알려졌다.

물론 이러한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은의 채굴이 본격화되면서 신대륙을 오가는 함선의 양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나, 동래부에 들어와 싣고 온 은을 내려놓는 것은 거의 두어 달에 한 번 있는 일로, 이러한 소식들은 그 선편이 들어올 때에나 전해지는 것이었다.

이 신천은광의 채굴을 바탕으로 창해상사는 일장월취의 기세로 성장해 나가는데, 이 은을 내지에 가져와 파는 수익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년간의 첫 채굴에서 창해상사가 남긴 이익은 거의 80만 냥에 이르렀는데, 아직 채굴을 처음 시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자본금으로 조성했던 자금의 거의 3배에 가까운 수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가는 자고 일어나면 오르기를 반복해, 고권 한 장당 20냥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섰으니, 서로 이것에 끼어 이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 막대한 은이 풀림으로서 가져올 충격을 짐작조차 못했으니, 유통이 늘어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는 눈앞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이 신대륙에서 은을 싣고 오는 행렬은 내지에서는 반갑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창해상사의 본국이 있는 동래 일대는 순식간에 고금으로 부자가 된 이들이 늘어났고, 초기에 많은 돈을 내어 투자했었던 유구국왕과 탐라국주도 큰 이득을 보았다.

창해상사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원만한 항해를 기원하며 제국 최초의 등대(燈臺)를 부산포(釜山浦)의 영도에 세웠다.

높이가 수십 척이 훌쩍 넘는 이 등대는, 영도화대(火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속칭 등대라고도 불렀는데, 후일 등대라는 이름이 화대를 제치고 정착되게 된다.

이 등대는 낮에는 연기를 틔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주변을 밝혀, 먼 바다에서부터 오는 배들을 동래부의 외항인 부산포로 안전히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로 따지자면 신대륙의 은이 주식과 등대를 탄생시킨 셈이었으니, 창해상사는 이러한 기회를 얼떨결에 거머쥔 덕에 이러한 공헌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48년

건양(建陽) 25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영주도독부(瀛洲都督部) 창주부(蒼州府).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은의 양이 급증하고 아즈텍 및 타완틴수유, 즉 잉카와의 무역을 통해 얻는 소출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정의 관심 또한 자연스럽게 이곳에 쏠리게 되었다.

약관(弱冠)을 넘겨 부친 소흥제의 가붕과 함께 사실상 유야무야되었던 황권 확대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황제는 적극적으로 정무에 관여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처음으로 내각(內閣)에 권고를 한 사안이 바로 신대륙에 대한 관할을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아조의 뱃사람과 상인, 그리고 방백(方伯, 지방관)이 대창해를 건너가 정착한 지도 어언 마흔 해가 흘러 먼 동쪽의 이방(異邦)과 교역하고 은을 캐 오며, 또 서이(西夷, 서양 오랑캐)를 견제하며 황업을 새로이 빛나게 하고 있소. 그러나 그간 그 땅이 멀어 조정의 제도와 문물이 잘 닿지 않아 어지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소. 허나 이제 그 땅의 호구가 늘고 물산이 풍족해져 마땅히 새롭게 제도를 고쳐 조정의 가르침이 영주의 백성들과 주변의 이적(夷狄)들에게도 밝혀지도록 해야 할 터이니, 내각 대신들은 과연 뜻하는 바가 있으면 이를 의론하여 짐에게 장계하여 주시오.”

임승준 사후 내각의 정치는 파당 논리에 따라 사림과 훈구의 균형을 맞춰 오고 있었다. 서로 반복해서 재상을 배출하고, 내각 대신의 숫자도 적절히 나눠 갖기 위해 때로는 정쟁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황제가 다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황제나 대신이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한쪽이 황제를 반대하고 나서면 한쪽의 세가 자연히 위축되게 될 터이니, 서로 황제의 뜻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각은 서로 앞다투어 황제의 뜻을 쫓는 내용을 장초로 만들어 상주(上奏)했다.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그중에서도 일전의 역법 비정 문제를 겪은 뒤에 우여곡절 끝에 결국 훈구파 계열로 조정에 입당(入黨)하여 이때에 외부대신을 역임하고 있던 서경덕(徐敬德)의 의론이었다.

“오래 전에 북방의 험지를 개척하여 성루와 항만을 보수하고 영진도독부를 설치하였었나이다. 그로부터 이곳에 뛰어난 뱃사람과 엽사(獵師)가 많아 그 기개가 장대하여 포부를 지니고 바다를 수이 건넜나이다. 그러나 북방의 땅들은 척박하고 사람이 정주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 이들은 배로 닿는 곳마다 조그만 보루(堡壘)를 세우고 여름에만 들러 머물기 일쑤였으니, 이것이 영주까지 닿아 혜성군이 넓고 비옥한 땅을 척지(拓地)하게 되었나이다. 때문에 이 관할을 영진도독부에 묶어 그간 다스려 왔으나, 사실상 그 통교가 쉽지 않아 혜성군이 영주진령과 창명첨사를 겸직하고 영주를 사실상 관할해 왔나이다. 그러나 그 인구가 늘고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져 지금은 영주에 기거하는 인구가 물경 수만에 이르니, 어찌 영진도독부에 묶어 두겠나이까? 하오니 새롭게 이 영주에도 도독부를 설치하시어 대도독(大都督)을 임명하고, 그에 따르는 관속(官屬)을 보내어 호구를 자세히 살피게 할 뿐더러, 땅의 지경(地境)을 파악하여 경계를 알리는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고, 또한 사람이 머무는 진(鎭)과 보(堡)에 관리를 보내 세금을 엄정히 걷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혜성군의 일가가 이 영주를 척지하는 데에 장헌한 공이 있고, 계영양행과 창해고금합명상사에 이미 내어 준 교역특허(交易特許)가 있으니, 이 권리들을 보장하여 주되 다만 시행함에 엄정하게만 하소서. 이리하면 자연스럽게 국고가 더욱 풍족해지고 바다와 그 너머가 안정될 것이니 마땅히 새롭게 관역(官役)을 다듬어 이를 마땅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서경덕의 의견은 간단히 말하자면 기존의 영진도독부에서 영주까지 관할하게 두고서 사실상 혜성군에게 그 관리를 맡겨 두었으니, 이것을 봉환(奉還)받아서 새롭게 영주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조정의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다만 기존에 쥐어 준 권리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이것까지 빼앗지는 말고 다만 잘 위무해서 세금도 걷고 국가의 통치권도 행사하라는 말이었다.

황제가 보기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다른 대신들의 의견에 비해 서경덕의 것은 정직하고 마땅히 이치에 닿는 바가 있었다.

조정의 통제권이라는 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세금을 어떻게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 통치가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방법을 서경덕이 일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대신의 말이 가장 옳구나. 마땅히 그리하는 것이 어떠한가?”

황제가 내각에 다시 하문하니 내각 대신들은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사림당에서는 어떻게든 그곳에 군자(君子)가 됨직한 인물을 보내 교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훈구당에서는 제도(制度)를 잘 갖추어 마땅히 산물을 자유로이 교역하고 인근의 이적들과 통교를 잘 맺을 수 있는 노련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모두가 서경덕의 의견대로 도독부를 새롭게 설치하고 관무를 주재하게 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異見)이 없었다.

결국 황제의 칙명(勅命)이 떨어졌다.

기존의 영진도독부를 나누어 옛 영명진이 있던 영안부(永安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북해도독부(北海都督府)로 이름만 고쳐 옛 기관들을 그대로 두고, 영주는 따로 영주도독부(瀛洲都督府)로 고치고, 기존의 영주진의 이름을 창주부(蒼州府)로 고쳐 도독부의 관아를 그곳에 두게 했다.

새롭게 영주대도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바로 허엽(許曄)으로,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 서른 살의 젊은 재사(才士)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서경덕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에 영주를 발견하고 초창기에 정착하여 그곳의 기틀을 잡고 관할을 해 온 혜성군 주현과 그 부관 출신인 윤희상 등이었다.

둘 다 이미 노쇠한 나이로, 실제로는 지역의 유지들이 협의하여 영주 일대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새롭게 인물을 보내어 대도독을 삼으려면 이들을 잘 위무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새롭게 부임하게 된 허엽은 조정에서 이들에게 주는 녹명(錄名)도 같이 가져가게 되었다.

심왕가의 종친으로, 일찍이 항해에 나서 영주를 발견하고 이곳을 척지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 온 혜성군 주현에게는 공(公)의 작위를 내려 창주공(倉州公)에 봉하고, 영주도독부에서 걷히는 세금의 7푼을 그 공가(公家)의 녹봉으로 받도록 하였다.

또한 창주공의 작위와 함께 영주도독부의 부도독(副都督)을 겸작하게 하였으니, 사실상 기존에 혜성군 주현이 가지고 있던 영주에서의 이권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이와 함께 윤희상 또한 그가 개척했던 대곡보에 봉지(封地)를 주어 대곡백(大谷伯)의 작위와 함께 식읍을 주고, 영주도독부로부터 녹봉을 사여(賜與)받도록 했다.

대곡보 또한 그 고을의 등위를 올려서 대곡군(大谷郡)으로 올렸다.

외방(外邦)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도독부에 진과 보가 아닌 부와 군이 설치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도독부의 수부(首府) 정도에나 부(府)의 관청을 설치하고, 나머지는 진이나 보를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곡보를 바로 위의 진이 아닌 군으로 올린 것은 그곳을 근거 삼아 살아온 윤희상의 치적을 인정해 준 것이었다.

봉지의 등위가 보(堡)인 것보다는 군인 것이 딸려 나오는 식읍과 녹봉이 높으니, 조정에서 마땅히 이를 고려하여 조치한 것이었다.

“다 늙어서 이제야 공훈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윤희상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주현에게 말했다.

“그거야 이리되면 잘된 것이지. 자손들이 작위라도 이어 내 음덕(陰德)을 보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조상들에게 이제야 부끄럽지 않으이.”

나이가 이미 여든여섯이 된 주현은 가마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어렵사리 거동해 왔었다. 황제의 칙명을 받는 일이니 집에서 말로만 들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영주에 잔뼈가 굵고 내상을 이곳으로 보내 정동보 등의 여러 진과 보를 개척하게 한 공이 있는 내상의 행수로, 지금은 창해상사의 총재인 방동일에게도 대정개국자(大定開國子)의 작위와 녹봉을 하사하니, 봉지인 대정은 곧 정동보를 이번에 고친 이름으로, 대정진(大正鎭)으로 고을의 등급 또한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을 받아든 혜성군 주현은 이것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이내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이미 나이 여든여섯으로 거동도 힘든 상황이었으니, 이때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창주공의 작위는 그 장남 김성규(金誠奎)에게 내려지니, 그 나이 마흔넷의 일이었다.

윤희상도 이내 여러 해를 넘기지 못하고 혜성군 주현을 따라 세상을 떠나니, 그의 작위 또한 장남에게 물려졌다.

이로써 영주를 개척한 1세대는 떠나가고, 새롭게 설치된 영주도독부는 신대륙의 땅을 개척하는 척지(拓地)와 사람을 보내어 살게 하는 식민(植民)의 업을 관장하게 되니, 초대 영주대도독 허엽은 이 책무를 성실히 하여 조정에서 받은 칙지(勅旨)대로 지방의 진과 보를 정비하고 그 호구를 세며, 정계를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영주의 인구는 옛 영주진인 창주부의 1만2천 명, 대곡군의 5천 명, 대정진의 2천 명을 포함하여 이외 4개 진과 16개 보에 걸쳐 5만여 명이 상주하니, 당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식민지에 비해서 월등한 규모였다.

이 5만 명의 구성은 가지각색이었는데, 북해도독부, 즉 옛 영진도독부를 거쳐 들어온 모피 수렵꾼들과 뱃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류였다.

그러나 이후 상인들이 들어오고, 또한 먹고살 길이 막막하고 차별을 피해 온 전국 각지의 백정(白丁) 및 소작농들, 그리고 진서인과 유구인, 여진족들까지 이곳으로 기회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들은 제각기 모피 사냥, 목축, 농업 따위에 종사하며 이제 터전을 정착시켜 나가고 있었다.

허엽은 이 인구를 엄정히 파악하여 각기 호적(戶籍)을 확실히 하고, 또한 영주파견대에서 군역(軍役)을 이행하도록 하였으며, 호패를 발급하여 그 신원을 보증케 하였다.

허엽은 또한 주변과의 관계의 정비에도 나서서 영주대도독의 이름으로 주변의 아즈텍, 타완틴수유, 카스티야령 누에바 카스티야, 아라곤령 콜롬비아에 영사(領事)라는 직책을 주어 사람을 보내니, 이들은 통상의 통교 업무를 수행하고 그곳을 다니는 영주의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통상적인 외교 관계를 내각의 외부대신이 담당하는 것과 달리, 이 지역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사들을 파견하고 감독할 권한을 영주대도독에게 주었는데, 현지 상황에 맞게 적절한 판단으로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주대도독 허엽은 특별히 가장 중히 여기는 일종의 신대륙에서의 동맹 관계인 아라곤령 콜롬비아에는 영사를 호종할 이졸(吏卒) 및 말을 옮길 역관(譯官)도 여럿 보내어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증진하게 하였다.

신대륙 개척기의 여명도 저물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동쪽에서부터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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