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성경왕부(盛京王府)
「요동국(遼東國)의 왕통(王統)의 시원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이니, 그로부터 대를 내려와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으로 이어진다. 신라 말에 김해김문(金海金門)은 여러 공족(公族)으로 나뉘어 각기 세가(世家)를 세웠는데, 그중 한 후손이 바로 여말(麗末)의 율은(栗隱) 김저(金佇) 공으로, 최영(崔瑩)의 생질이다. 태조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가 새 왕조를 창업하는 과정에서 김저가 여조(麗朝)에 대한 충심으로 이성계를 살해코자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목이 베이고 말았다. 그 적자(嫡子)인 계절당(繼節堂) 김전(金鈿) 또한 아비를 좇아 두문동에서 순사(殉死)하였다. 김저에게는 김전 외에 서자 하나가 더 있었는데, 바로 김익(金益)이다. 김익은 나이로는 김전의 윗배로 그 또한 부친을 따라 죽었다. 그 김익의 아들이 바로 요동국의 개조(開祖)인 성명왕(成明王) 김세훈이다.」
―이진휘, 〈遼東國 金朝를 論함〉,
《영안세론(永安世論)》, 제12호, (영안: 1824)
1550년
건양(建陽) 27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盛京瀋陽府).
심왕 진영이 붕(崩)한 것은 지난해의 일이었다. 시호(諡號)는 경흥왕(慶興王)으로 올려졌다. 나이 예순 여섯이니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그러나 옛 선조들에 비하면 단명(短命)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왕가의 선조들은 대대로 장수하는 편이었으나, 그 후손들은 그만하지 못했다. 진영의 아버지인 효공세자(孝恭世子)는 마흔 하나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으며, 후사 또한 아들 진영 하나만 남긴 탓에 그 뒤로 왕실의 적손(嫡孫)이 귀해졌다.
진영 또한 그 남긴 핏줄이 적었는데, 후궁에게서 얻은 딸 셋을 제하고는, 아들은 왕비 이씨에게서 얻은 세자 유(瑜)가 유일했다. 손이 귀한 왕실이다 보니, 진영은 일찌감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유를 세자로 책봉했었다.
진영이 더 이상 후사 없이 세상을 뜸에 따라, 소란 없이 세자 유가 부친을 이으니, 황성부에서 내려온 책봉사(冊封使)가 올해 정초에 이르러 심양왕의 왕작(王爵)과 심요도독부 대도독의 직첩(職牒)을 내렸다.
다행히 무탈하게 세자가 왕위를 이었으나, 여전히 왕실에 남자 후손이 적은 것은 종친과 대관들의 근심거리였고,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후궁을 들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다만, 여기에는 꽤 꺼림칙한 문제가 있었다.
심왕 유가 세자 시절에 세자빈으로 맞은 것은, 바로 전대 황제인 경종(景宗) 소흥제(昭興帝)의 맏딸인 의주제희경희장공주(義州帝姬慶喜長公主)였다. 의주는 그녀에게 내려진 화장령(化粧領), 즉 황녀가 배령(拜領)한 땅이고, 제희(帝姬)라는 것은 송대(宋代)로부터 일반 왕가가 아닌 황실의 공주들에게만 내려지는 부칭이었다. 거기에 장공주라 함은, 현 황제의 누이에게 붙는 존칭이니, 다른 말로 하자면, 바로 현 황제인 건양제(建陽帝)의 맏누이가 바로 심왕 유의 정비(正妃)가 되는 셈이었다. 왕비의 신분이 이러한 데다가, 그 아래로 아들만 셋을 두고 있으니, 후궁을 들이라는 이야기를 김유가 받아들이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과인의 슬하에 이미 아들이 셋이고, 또한 다들 장성하였는데, 지금 부왕을 이어 왕업을 받은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고, 또한 복상(服喪) 또한 마치지 않았는데, 어찌 후궁을 논하겠소.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신하들이 조심스레 후궁을 들일 것을 주청할 때마다, 못 들은 척 손을 내젓는 김유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후궁을 들이게 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 대대로 요동(遼東)에서 벼슬을 한 자들이 더욱 그러했다.
왕비의 아래에 아들이 셋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보아도 종친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가장 가까운 남자 종친이 지금 김유의 구촌뻘인 멀리 영주의 창주공(蒼州公) 김성규(金誠圭)이니, 바로 신대륙을 개척한 혜성군 주현의 아들이었다.
사실상 지금의 심왕가와는 일면식 없는 사이라 해도 다를 바 없었다.
때문에 언제고 유사시에 왕통이 끊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요동의 신료들에게는 항상 있었고, 황성부의 입김에서 벗어나서 왕실의 균형을 잡아줄 종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왕자들은 모두 황성부와 연이 닿아 있는 왕비 경희장공주의 슬하였다.
요동의 신료들은 황성부에서 불어오는 입김에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고, 왕비로 인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적어도 왕실 내에 견제 세력을 두고자 했다.
혹여 후궁을 들여 앞으로 그 후사가 나온다면, 왕위를 잇지는 못하더라도 왕실의 종친으로서 심양에서 입김을 행사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바로 황성부의 이익이 아니라, 심양의 이익을 위한 입김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신료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주청하는 목소리는 끊이지를 않았다.
사실, 왕비가 황가(皇家)의 사람이다 보니, 김유와도 관계가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애정보다는 정략적 이유로 맺어진 사이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경희장공주가 남편이 후궁을 보는 일에 쌍수를 들고 찬성할 리 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후궁이라니? 일개 측실(側室)도 아니고 정식으로 후궁을 들인다는 게!”
경희장공주가 대번에 눈을 부릅뜨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날개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황제의 누이가 이렇게 번국(藩國)에서 수모를 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경희장공주는 황권이 일시적이나마 강화되었던 그녀의 아버지, 경종 소흥제의 치세에 황도(皇都)에서 자라났었다.
이 북쪽의 외진 변방에 와서 남편과 그리 다정하게 지내지도 못하면서도, 꿋꿋이 얼굴을 붉히지 않고 살아온 것은 바로 황녀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아직 상감마마께서는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대관들의 주청이 끊이지를 않아…….”
경희장공주의 노기 서린 얼굴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궁녀가 목을 숙이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서슬 파란 왕비의 노여움을 감히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비는 분노를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거칠어지던 목소리도 이내 가라앉았다.
그녀는 황제의 누이였다. 쉽게 분노를 드러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침착함을 되찾은 왕비가 궁녀에게 묻는다.
“분명히 앞장서서 주상 전하께 주청을 올리고 있는 것이 의정(議政) 대감이렷다?”
의정대감이라 함은, 바로 한부겸(韓溥謙)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로마에서 귀부(歸附)하여 요동에 정착했던 한경조의 손자로서, 그 집안이 대대로 심왕가의 녹을 먹고, 요동의 명문(名門)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한부겸 또한 그 은덕을 입어 벼슬이 사실상 요동의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도평의정(都評議政)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도평의정은 심왕부에 속해 요동의 실무를 처리하는 기관인 요동도평의사사(遼東都評議使司)의 최고 장관(長官)의 관직이었다.
도평의사사는 기존의 관청이었던 요동행정서(遼東行政署)를 혁파하고 설치한 기관인데, 그 제도가 바뀐 것이 서너 해 전이었다.
전대 심왕인 경흥왕 진영이 사실상 왕부(王府)를 보좌하는 기관인데 서(署)는 격이 너무 떨어지지 않느냐고 신하들을 채근한 탓이었다.
그런 연유로 옛 여말(麗末)의 관제를 따와서 도평의사사라는 두루뭉술한 관청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이 도평의사사는 전신인 요동행정서가 가지고 있었던 요동도독부의 관할권, 요동군의 통수권, 심왕부의 내명(內命)을 출납(出納)하는 기능을 모두 이전받았는데, 그 성질상 중앙의 황성부와는 대립하고, 요동의 이익에 민감했다.
그 도평의사사의 최고 직책인 도평의정인 한부겸이 바로 그 상징이나 다름없는 인물로, 황성부 중앙 조정과는 아무 연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황제의 녹(祿)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심왕의 녹을 먹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사실 도평의사사라는 것도 그렇고, 그전의 요동행정서도 황성부에서 공히 인준한 기관은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는 심왕에게 황제가 요동도독부의 대도독 지위를 은사(恩賜)한 것이므로, 심왕부와 요동도독부, 그리고 원래 황성부의 군부에 종속되어 있었던 요동군은 모두 다 관부(官府)가 따로 있고, 벼슬도 황성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요동에서 이것을 편의상 죄 통합해서 요동행정서로 쓸어 넣고, 그 이름을 나중에 도평의사사로 고친 것이므로, 이 유령 같은 기관의 관직이 황성부에서 나온 것일 리 없었다.
좌우지간, 수년 전 있었던 새 역법인 건양력(建陽曆)의 채택을 둘러싼 소동으로, 요동의 중앙에 대한 거리감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강력해져 가는 황성부로부터의 입김에, 이제 왕비까지 황제의 누이가 되었으니, 요동 토착 세력이라 할 수 있는 한부겸을 비롯한 요동도평의사사의 대신들은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때문에 왕실에 제 편을 심어 놓고자 이렇게 후궁을 들여라 주청하는 것이었다.
“내 예악협판(禮樂協辦) 이원수(李元秀)에게 서찰을 내어 줄 것이다. 네가 긴히 이것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왕비의 말에 궁녀는 예를 다해서 명을 받들었다. 예악협판이란 다름 아닌 예악사(禮樂司)의 책임자로, 예악사는 공식적으로 예부(禮部)나 외부(外部)를 둘 수 없는 요동에서 도평의사사에 속해 중앙 조정과의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런 곳이니 만큼 이곳에는 황성부와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 관직을 보거나 했는데, 지금의 예악협판 이원수 또한, 그 당숙(堂叔)이 바로 당금의 내각 재상인 이기(李ヒ)였다.
그는 처음에는 황성부에서 벼슬할 것을 뜻하였으나, 4대 학당을 나오지 못해 과거에 입시(入試)할 기회가 마땅치 않았고, 그때 내각의 대신 자리를 놓고 당쟁(黨爭)을 벌이고 있던 당숙 이기는, 혹여 친족에게 관직을 알선했다가 책이 잡힐까 하여 그에게 요동에서 벼슬길을 찾아볼 것을 권했다.
그런 연유로 이원수는 강릉의 호족(豪族) 신명화(申命和)의 딸과 혼례를 치른 뒤 강릉의 처가에서 수년간 머무르다, 요동으로 건너와 이곳의 심양문리과대학을 뒤늦게 졸업하고, 심왕부에 출사(出仕)하여 그 벼슬이 예악협판에 이르렀다.
이원수는 요동에서 벼슬을 살면서도 꾸준히 황성부와 연을 끊지 않고 있었으며, 처자식은 종종 처가인 강릉이나 혹은 자신의 본가가 있는 파주로 보내어 내지에도 꾸준히 연통을 두고 있었다.
특히 당숙인 이기가 내각 재상에 오르고 나서는 더더욱 황성부에 여러 선을 두고서 민감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있는 이원수야말로, 요동에서 벼슬을 하는 내지 출신 재사(才士)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 이원수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경희장공주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대외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왕비를 대신하여 그 수족 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궁을 들이라는 제일선(一線)에 요동 토착의 벌족(閥族)들을 대변하는 도평의정 한부겸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비요동 출신으로 이곳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관리들을 대변하는 이원수가 있었던 것이다.
왕비의 서간을 그날 저녁에 받아 든 이원수는, 다음 날 바로 심양의 태안궁(泰安宮)으로 입궐했다.
본래 이름이 건양궁(建陽宮)이었던 태안궁은 당금의 황제가 연호로 건양을 택함에 따라 이름을 태안궁으로 고쳐야 했다.
저잣거리에서는 이것 또한 심양을 간보려고 하는 황성의 장난질이라는 이야기가 무성했었다.
“전하, 후궁을 들이시도록 하소서.”
갑작스레 알현을 청하여 들여보냈더니, 이제껏 후궁을 들이는 일에 날이 서게 반대했던 이원수가 왜 갑자기 후궁을 들이라 하는지 심왕 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난데없이 과인을 찾더니, 그대까지 내게 후궁을 들이라 하다니, 속셈이 있는 것이로다. 그래, 그대에게 중전이 어찌하라 방법을 일러 주던가?”
이제 왕위에 갓 올랐다고 하나, 김유가 우둔한 군주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의 조상들에 비해서는 탁월하지 못한 면이 있고, 기가 죽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런 궁중에서 오고 가는 물밑 정치에는 더욱 촉각이 곤두서 있는 것이 그였다.
“……중전마마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이르지 않으셨나이다.”
심왕의 말에 이원수가 한 발을 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왕비의 사주를 받아 이렇게 왔노라고 인정할 리가 없었다. 김유는 용상에 몸을 깊게 묻으며 이원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한가. 어디, 그대가 내어놓을 고견(高見)을 과인에게 풀어보아라.”
“여러 제신(諸臣)들이 왕실의 번창함을 기원하여 후궁을 들일 것을 건백(建白)하고 있는 것에는 부당함이 없나이다. 대체로 열성조께서는 후실(後室)을 거의 보지 않으셨으나, 때문에 이 큰 심양의 거리에서 종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대로 손이 귀하고 지금도 동궁(東宮, 세자)과 두 대군이 있사오나 왕실의 계보에 더욱 여러 군호(君號)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홍복(洪福)일 것이나이다. 다만, 중전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의 누이 되시는 분으로, 감히 후궁을 자기 집안에서 내어 이로써 위세(威勢)를 부리고자 하는 자들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어찌 척신(戚臣, 임금과 성은 다르나 일가인 신하)을 만들어 내명부의 질서를 어지럽히겠나이까. 하오니 요동의 관리들의 여식들 중에서는 후궁을 택하지 마시고, 내지에서도 그 후궁 감을 물색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그 가문이 천하지 않으면서도, 감히 요동의 일에 간섭할 수 없는 집안의 딸을 들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원수가 말하고 있기는 하나, 사실상 중전이 남편인 김유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한마디로, 후궁을 들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는 대신, 들이더라도 심양의 정사(政事)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있는 집안의 딸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여 며칠 내로 도평의사사를 통해 비답(批答)을 내릴 것인즉, 예악협판은 나가는 길에 다른 관리들에게 전해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허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전하게.”
심왕 김유는 이원수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그를 물려 보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요동 벌족 출신의 대신들이 후궁을 들이라 청하는 이유는, 왕비를 통해 중앙의 입김이 세지는 것이 껄끄러울 뿐더러, 이참에 아주 자신의 핏줄을 혹여 후궁으로 만들어 왕실에 입김을 넣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심왕의 입장으로서는 첫 번째 이유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바였지만, 괜히 두 번째 목적까지 그들에게 달성시켜 줄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보아서, 지금까지 그는 후궁을 들이라는 요청을 줄기차게 거절해 옴으로 인해 왕비에게도 체면을 이미 세운 뒤였다.
왕비가 이미 이 문제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겠는 신호로 이원수를 통해서 조건을 제시한 것은, 더 이상 김유가 이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미룰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차피 왕비와는 남녀의 애정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었다. 후궁을 들여서 정을 쌓아 보는 것도 김유에게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왕비의 제안을 따라서, 이 상황을 정리한다면,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될 터였다.
어차피 김유는 왕비가 황성을 등에 업고 심양에 불 수 있는 입김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후궁을 들인 뒤에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고 말고는 신하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일도 아니었고, 왕비가 우려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왕좌에 앉아 있는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김유는 알고 있었다.
1551년
건양(建陽) 28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모령군(毛怜郡) 목씨장(目氏庄).
북해도독부의 수부(首府)인 영안부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근래에 군읍이 설치된 목양군(木陽郡)이 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하루 거리에 모령군(毛怜郡)이 있다.
나지막한 흙성으로 둘러싸인 이 조그만 고을과 면한 개활지에 이른바 목씨장(目氏庄)이라 불리는 목씨세가(目氏世家)의 장막이 있었다.
이곳은 본래 건주여진의 일파인 오도리 일족이 북해도독부의 전신인 영진도독부에 귀부하여 정착한 곳으로, 목씨(目氏) 성을 사성받은 오도리의 족장 충샨(充善, Cung an)의 후손들이 모령현남(毛怜縣男), 즉 남작의 작위를 세습하여 일대의 여진족들을 관할하고 있었다.
충샨, 즉 목충선의 손자로, 당대의 모령현남이자 목씨장의 주인은 바로 목각창안(目覺昌安)이었다.
그의 여진족 이름은 바로 기오창가(Giocangga)로, 그 나이가 아직 서른 후반인 젊은 족장이었다.
그는 종종 영안부에 들어가서 도독부의 조회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곳 목씨장에 머물면서 3만 남짓의 그의 일족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이곳 일대에서 크게 말을 길러 그 말을 가깝게는 영안부, 멀게는 영길도 함주나 요동의 동녕부에 있는 마시(馬市)에 내다 팔았다.
그가 한해에 파는 말의 숫자만 해도 수백 필에서 수천 필에 이르렀으니, 그로 축적한 재부(財富)도 남부럽지 않았다.
겨우내 올해 내다 팔 말을 관리하고, 새롭게 목장을 조성하는 일에 몰두하던 기오창가는 새해가 밝자마자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심양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이 누추한 초막까지 어인 일로 발걸음 하셨소?”
기오창가는 따뜻하게 데운 술을 한 모금 들이키며 그를 찾아온 요동의 손님에게 물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며 보니, 사방 수십 리에 말들이 그득하더이다. 가히 목씨장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동에서부터 기오창가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심왕의 명을 받들고 온 이원수였다.
그는 염소터럭 같은 수염을 훔치고서는, 기오창가가 내어 준 술을 자신도 한 잔 받아 들었다.
“어헙, 술이 독하기도 합니다그려.”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서는 이원수는 얼굴이 그만 퍼렇게 질렸다.
평소 술을 즐긴다고 자부하는 사람인 그에게 있어서도 이 목씨장의 마유주(馬乳酒)는 마시기가 쉽지 않았다.
“술이 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입에 맞지 않아서 그럴 것이오. 이곳은 북방이라 곡물이 그리 나지 않아, 말젖으로 술을 담그니 알싸하기 짝이 없지. 그나저나, 아직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으셨소. 어인 일로 오셨소이까?”
기오창가는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예절을 몰라서가 아니라, 번잡하게 말을 엮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익히 기오창가의 성품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던 이원수도,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기오창가의 눈을 마주 보고서는 입을 연다.
“혼담을 전하러 왔습니다.”
“혼담이라? 누구랑 말이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기오창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속하의 여진족과 조선계 사이의 통혼은 이미 백여 년이 넘게 있어 왔던 일이었고, 기오창가의 측실 중 한 명도 영길도 경원 출신의 여자였다.
실상 그가 이끌고 있는 오도리 일족 또한 핏줄로 따졌을 때는 여진계니 조선계니 따지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사는 이곳 북해도독부에서나 성한 일로, 요동에서 자신에게 혼담을 청하러 온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따님께서 과년(過年)하여 배필감을 찾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예러의 이야기라면, 그렇긴 하오. 그 아이가 열아홉이니 혼기를 살짝 지나긴 했지. 원래 정혼했던 함주부윤 이길(李吉) 공의 아들이 재작년에 낙마하여 죽는 바람에 그만 시집갈 곳이 마땅찮게는 되었소. 그대 아들에게 내 딸을 보내라 청하러 온 것이오?”
기오창가가 혼기를 지나친 딸을 떠올리고서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요즈음 제국에서 만혼이 성행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통 스물 전후로는 시집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진 풍습에서는 그보다 더 빨리 혼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주 늦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오창가의 딸이 적절한 혼기를 지나친 것은 사실이었다.
“제 슬하에 이(珥)라 하는 아들놈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이제 열여섯으로 아직 공부가 한창입니다. 더군다나 겨우 요동에서 작은 벼슬을 하고 있는 제가, 어찌 작위 있는 귀문(貴門)의 따님을 청하겠습니까. 제가 오늘 가지고 온 혼담은, 심왕부(瀋王府)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왕부라는 말에 기오창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는 들어 올리던 술잔을 다시 내려놓고서는 이원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묻는다.
“방금 심왕부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심왕 전하께서 아드님이 여럿 계시지만, 아직 혼담이 오고 갈 나이의 자제분은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소만. 아니, 그보다 왕부에서 어찌 미천한 집안에 혼담을 보내셨단 말이오?”
“대군들의 혼담을 취하려 보낸 것이 아닙니다. 따님을 전하의 후궁(後宮)으로 보내 주시길 청하러 온 것입니다.”
이원수의 말에 기오창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떤 연유로 심왕의 후실을 들이는 일을 이곳에 와서 청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실이 아니라 후실로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작금의 심왕의 정비가 황실의 장공주(長公主)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를 떠나서, 역대 심왕의 왕비 중에서 공가(公家)보다 못한 곳에서 시집을 온 이가 없었다.
성무왕 현도의 왕비는 백제공의 딸이었으며, 문덕왕 서윤 또한 그 배필이 순천공 김종서의 손녀였다. 전대 심왕 진영의 정비는 개성공가(開城公家)에서 시집왔었다.
거기에 당금의 심왕인 유는, 그 부인이 아주 제실(帝室)에서 시집온 귀한 몸이니, 애초에 심왕가에 겨우 시골의 현남인 자신의 딸을 정실로 보내겠다는 것은 언감생심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기오창가가 당황한 것은 다른 이유에 있었다. 아무리 후궁을 들이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심왕가에 딸을 보내려 하는 명망 있는 집안은 수도 없을 텐데, 심왕부에서 어째 자신에게 이를 청하러 왔느냐는 것이었다.
기오창가는 직감적으로 기뻐하기보다도 그 뒤에 무슨 이유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심왕 전하께 딸을 보내는 것은 나와 우리 가문에게 있어서도 홍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하나, 많고 많은 명문대가의 여식들을 뒤로하고, 이 말장수의 딸을 취하려 전하께서 그대를 보내셨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스스로를 말장수로 깎아내리긴 했지만, 기오창가는 당당하게 작위를 물려받은 귀족이었다. 물론 그 작위가 제일 말단이고, 그 핏줄 또한 여진계라 스스로도 명문지족(名門之族)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장수라니, 겸양이 과하십니다. 그리 물어보시니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왕부에서는 그 가문의 힘이 강성하여 왕업(王業)에 누가 될 수 있는 가문에서 후실을 들여오길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요동의 많은 강성한 문벌의 신하들이 딸을 궁문 안에 들이고자 했으며, 내지의 여러 고관들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왕부에서는 외척(外戚)이 발호하는 것을 원치 않기에 요동과 먼 곳에서 미천하지 않으나 그 가문이 지나치게 강대하지 않은 곳을 찾았고, 그런 와중에 현남의 따님께서 혼기가 찼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기오창가는 그 말을 듣고서는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감을 잡았다.
이곳 목씨장에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일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요동에는 종종 말을 팔러 휘하의 가솔들과 함께 매년 몇 주간 머물다 오는 기오창가였다.
요동의 여러 대관들이 왕비인 장공주를 통해 들어오는 내지의 간섭을 누르고, 덤으로 자신들의 힘을 확대하고자 후궁을 들이기를 청했을 터였다.
그러나 당연히 왕비는 반발했을 터이고, 그 사이에서 일종의 조정을 거쳐서 후궁을 들이되 왕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만한 집안을 찾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이원수가 전한 말의 속내를 가만히 계산해 본 기오창가는 이 제안에 응하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딸이, 어쩌면 자신까지 심왕가의 복잡한 사정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확실히 심왕과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과 가문에 있어서 영광이기도 했다.
“조금만 생각해 볼 여유를 주시오. 내 다음 날까지는 대답을 드리겠소.”
“좋은 답변 삼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진 기오창가는 일단 이원수와의 자리를 물린 다음, 아들 탁시(Taksi)를 불러들였다.
탁시는 이제 약관의 나이로, 아구(Agu)라는 이름의 택주(澤州) 근방의 와산진(窪山鎭)의 여진 수령의 딸 어머치(Emeci)와 혼례를 얼마 전 치렀다.
탁시는 이미 기오창가의 후계자로서 그 이름이 북해도독부 일대에 자자했는데, 머리가 좋을 뿐만 아니라 활 또한 신궁이라 불릴 정도로 잘 쏘았다.
기오창가는 탁시가 장성한 뒤로는 불러다 많은 일을 함께 논하곤 했다. 더군다나 집안의 혼사와 관련된 문제이니 기오창가는 탁시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예러 누이를 심왕부에 시집을 보낸다고요?”
기오창가로부터 일의 대략을 전해 들은 탁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유난히 손아래 누이인 예러를 아꼈던 탁시였다.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별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아. 존체 높은 심왕가에서 사람을 보내 청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거절할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하며 덜컥 시집을 보낼 수도 없는 것이니 내 머리가 복잡하기 짝이 없구나.”
아버지 기오창가의 말에 탁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누이 예러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적당한 집안에 시집을 간다면 북해도독부 안에서는 적당히 권세 있고 이름 있는 친정의 덕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평생 큰 걱정 없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덜컥 분에 맞지 않은 심왕의 후궁으로 들어간다면 앞으로 펼쳐질 순탄치 않은 길은 탁시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뭣보다 입궐하여 내명부의 어른으로 모셔야 할 왕비가 황제의 누이였다.
혹여 그 미움이라도 사게 된다면 누이뿐만이 아니라, 이곳 모령의 목가장 또한 그 친정으로서 성치 못할 터였다.
“아버지, 위험합니다.”
탁시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기오창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혹여 예러가 그곳에서 잘하여 심왕 전하의 예쁨을 받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분에 넘치는 복이 될 것이다. 하다못해 요동에다 말을 파는 것조차도 예전보다는 쉬워질 것이야. 혹여 아들이라도 놓게 된다면 내 손자이자 네 조카가 군작(君爵)을 받은 심왕가의 일원이 되니 가문으로서도 영광이다.”
기오창가의 말도 옳았다.
지금으로서는 예러를 후궁으로 들여보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았다.
후궁의 친정이 지나치게 발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먼 곳에서 기오창가의 딸을 청한 심왕가였으나, 그래도 몇 가지의 편의는 쉽게 봐줄 터였다.
뭣보다 지체 높은 곳에 시집을 가는 것이니 심왕가에서 내리는 예물 또한 적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예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낯선 심양의 궁궐로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잖습니까?”
탁시로서는 집안이 얻게 될 이득보다도 누이동생이 그저 걱정이었다.
열아홉이라고는 하나, 탁시에게는 그저 어린 동생일 따름이었다.
“예러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른이다. 그 아이의 품행이 방정하고 조신하게 몸을 숙일 줄 아니, 심양에서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탁시, 내 아들아. 내가 지금 결정하려는 것이 옳은 것이라 말해다오.”
기오창가의 말에 탁시는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기오창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시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아들의 귓가에 대고 그는 씁쓸한 한숨을 토해냈다.
“예러가 행복하기를 빌도록 하자.”
기오창가는 다음 날이 밝자마자 직접 이원수를 찾아가 혼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탁시는 누이인 예러를 찾아가서 무거운 어조로 이 사실을 전했다.
“예러. 아버지께서는 너를 심양으로 시집보내려 하신다.”
“이미 들었어요, 오라버니. 이미 목가장의 사람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심양에서 온 관리라는 사람이 이미 소문을 다 냈나 봅니다. 그게 제 귀에까지 그날 밤에 들려오던 걸요.”
예러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탁시에게서 등을 돌린 채 흑단 같은 머릿결을 다듬으며,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기쁨도, 실망도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잘 지낼 수 있겠니?”
“집안의 맏딸로서 당연히 언젠가는 약조된 곳으로 시집을 가리라 어릴 때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함주로 갈 줄 알았으나, 이제는 그곳이 심양이 된 것뿐이지요.”
“그래도 후궁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울 리 없지 않느냐?”
탁시는 누이동생의 어깨를 잡아다가 자신을 향해 돌려 앉혔다.
“예러야.”
그제야 예러의 얼굴을 본 탁시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침 내 단장했던 얼굴의 화장이 얼룩지며 번져 가고 있었다.
그녀인들 정말로 담담할 리 없었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예러는 탁시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돌아앉았다.
옷깃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뒷모습에 탁시의 마음은 답답하게 잠겨들었다.
그는 그길로 다시 아버지 기오창가를 찾아갔다.
“아버님!”
“이미 이 협판에게 혼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탁시가 혼담을 물리자고 찾아온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기오창가는 아들의 어깨를 부여잡고서는 말했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본 탁시는 이제는 아버지를 만류하는 것이 누이를 보내기 싫은 어린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서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 이 협판은 오늘 바로 요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한 달 내로 다시 심왕부에서 보내는 예물과 함께 정식으로 예러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겠노라 했으니, 이 일은 이제 물릴 수 없게 되었다. 네 누이가 심양으로 갈 때까지 네가 잘 살펴보아 주도록 해라.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다.”
기오창가의 말대로 한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예러는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상시와 똑같이 일상을 보냈다.
탁시는 그런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한 달이 지나자, 심양에서 수십 인의 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찾아왔다.
이원수는 이번에는 관복(官服)을 차려입고서는 공손히 기오창가에게 예를 표한 다음에 금괴와 온갖 패물을 실은 수레에서 예물을 내렸다.
그 뒤 사흘간 예러는 목씨장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보낸 다음에, 성장(盛裝)하고서 심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기오창가는 담담하게 딸을 전송했고, 탁시는 차마 누이가 가는 길을 보지 못했다.
그는 불상 앞에 앉아서 동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1552년
건양(建陽) 29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모령현남 기오창가의 딸 예러가 심왕가에 시집온 다음 받은 당호(堂號)는 정빈(禎嬪)이었다. 사서에 남는 정빈 목씨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정빈이 처음 입궐하여 심왕을 배알하던 날, 심왕 김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후궁의 자색(姿色)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는 실상 후궁을 들이는 일에 소소한 기대는 있을 망정,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비와 신료들 사이의 알력 다툼의 일환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시집오게 된 이 여진 여인을 보는 순간 그는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소첩에게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마마.”
정빈의 몸짓과 목소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심왕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않았고, 혹여라도 주변의 번득이는 눈들에 책이라도 잡힐까 해서 실수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왕가에 후궁을 들일 때는 대례(大禮)를 치르지 않는 것이 법도였다. 정빈은 간단한 의례를 거친 뒤에 태안궁 안쪽 깊은 곳의 적당한 내당(內堂)을 그 거처로 받았다.
“주상께서 정빈에게 그리 관심을 보이신다지?”
최대한 눈에 뜨이지 않게 자신의 거처에서는 출입조차 잘하지 않는 정빈이었지만, 왕비에게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직접 손을 써서 대관의 자제가 아닌 먼 곳에서 들이게 한 힘없는 후궁이었으나, 막상 대궐 한쪽에 후궁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질투와 기묘한 시샘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딱히 남녀 간의 애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남편 심왕 김유가 정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한 질투라기보다는, 정빈이 가진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에 가까웠다.
물론, 더욱 큰 문제도 걸려 있긴 했다.
궁내에서 심왕의 총애를 발판 삼아 자신을 견제할 세력으로 정빈이 성장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오나 아직 전하께서는 정빈을 찾아 머무르거나 하지는 않으십니다. 여전히 집무를 마치신 뒤에는 조용히 책을 들여와 늦은 밤까지 읽다가 주무시거나, 혹은 활을 쏘거나 하며 여인을 찾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중궁전으로 들어오지도 않으시지.”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심왕 김유가 중전을 찾은 것은 세자 시절이 마지막이었다.
몇 년 전, 그들 사이에서 셋째 아들 제(齊)가 태어나자마자 김유는 마치 할 의무를 다했다는 듯, 그녀에게 오는 발길을 끊었다.
합궁(合宮)은커녕 그 뒤로는 마주치고 이야기할 일도 드물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감히 황제의 누이인 나를 이 심양에서도 누가 함부로 하겠는가. 아무리 역적(逆賊)의 핏줄들이라고는 하나 말이다.”
중전의 목소리는 그르렁거리듯이 잠겨 들어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심왕가는 역적 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어느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소흥제는 황권을 강화하면서 예전 심왕가의 김씨들이 뿌려 놓은 씨앗들에 대해 수도 없이 이야기했었다.
김세훈과 김현도가 70년에 걸쳐 정권을 농단한 이야기와 제멋대로 심왕의 작위를 받아 심요도독부를 집어삼키고 요동을 마치 자신들의 왕국처럼 만든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황권에 마땅한 경의를 바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들 말이다.
어릴 적부터 그러한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고 자라났던 중전에게 있어서 이곳 심양에서의 삶은 오로지 정치적인 목적으로 움직이는 전쟁과 같은 것이었다.
내지와 요동, 황성과 성경(盛京, 심양) 사이의 결속을 위해 그녀는 이곳에 시집을 왔고, 심왕가의 자녀들을 낳고, 그리고 이 북쪽의 무례한 인종들과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남편과 자신 사이에 사랑이 싹틀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라는 사실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누군가가 가져가 자신을 위협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너는 내가 준 패옥(佩玉)을 받고 궐 밖으로 나가 협판 이원수의 처를 찾아가 나를 은밀히 찾아오도록 해라.”
왕비가 궁녀를 통해 부른 것은 바로 협판 이원수의 처인 신씨(申氏)였다.
어릴 적의 이름은 인선(仁善)으로, 요즘에는 스스로 붙인 당호인 사임당(師任堂)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남편인 이원수가 종종 부인인 사임당의 뒤에 거론될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전국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할 뿐만 아니라, 부인으로서 집안을 살피고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어 양처(良妻)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이제 마흔을 넘겨 얼굴에 주름은 잡히고, 건강이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 친정이 있는 강릉에 내려가 있던 그녀는, 얼마 전에 아들 이이가 심양문리과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됨에 따라, 부군과 아들이 있는 심양으로 올라와 있었는데, 중전 또한 그녀가 심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삼가 중전 마마를 뵙나이다.”
감히 중궁전에서의 부름을 거절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었기에 사임당은 호출을 받자마자 태안궁으로 입궐해 중전을 찾았다.
“그대 남편이 그간 나를 많이 도와 일을 해 주어 항상 너희 집안이 강건하기를 바라 왔느니라. 오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긴히 부탁을 할 일이 있어서이다.”
사임당을 자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한 중전은, 궁녀에게 시켜 발을 내려 버리도록 하였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둘만 남은 중전은 사임당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녀의 심중을 읽으려 애썼다.
그녀가 재능이 많고 현모양처로 이름 높은 덕이 있는 부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녀를 위해 일해 줄 사람이었다.
“눈매가 자네 부군같지는 않군.”
“함께 몸을 나란히 누이고 살아도 눈만큼은 닮아지지 않는 법이지요.”
중전의 말에 사임당은 조곤한 목소리로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을 했다.
중전이 보기에도 과연 남편보다 부인이 아까웠다.
자신이 들여 쓰고 있으나 이원수는 탐욕스럽지는 않으나 권력에 대한 소망이 능력에 비해 컸고, 재능보다는 수완만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사임당은 그야말로 득도한 사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중전은 잠시 그녀에게 부탁하려던 것을 그만둘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하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대 남편이 내 부탁을 받아 정빈을 북해에서 데려온 것은 알고 있는가?”
“규방의 여인은 바깥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군이 북해의 목씨장에 다녀온 사실은 알고 있나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남편이 가는 길을 부인이 따르는 것도 양처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일은 남정이 할 수 없는 일이라 규방에 있을 처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남편을 대신해 내 손발이 좀 되어 주어야겠네.”
“…….”
중전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사임당이었다.
그녀는 괜히 심양에 올라온 것이 아닌가 싶어 조금 후회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자마자 이런 정치놀음에 휘말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지아비가 당숙인 이기를 쫓아 벼슬자리를 하고자 할 때부터 그를 뜯어말려 왔었다. 괜한 명리를 탐내다가 일가를 망치는 일이 흔한 세상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벌어진 지 채 몇 해 지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벼슬에 대한 욕심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심양까지 건너와서 요동의 관직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성부에서 출사하는 것만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왕직(王職)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했다 해서 사임당은 지레 안심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곳에서도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사임당은 나이를 먹은 남편이 아직도 아들보다 철이 없게만 느껴졌다.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남편이 따르고 있는 중전의 제의를 물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심왕의 왕비이기 이전에 황실의 어른이었다. 밉보였다가는 요동이나 내지팔도는커녕, 제국 어디를 가도 맘 편히 몸을 뉘일 수 없을 터였다.
“윤허하십시오. 따르겠나이다.”
“잘 생각했느니라. 정빈은 여진 여인으로 말이나 팔던 시골 현남(縣男)의 여식이다. 부족한 것이 많을 터이니, 그대가 그녀에게 예절과 법도를 가르쳐 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중전은 말을 마치지 않고 사임당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아서 정빈의 거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에게 잘 전달하라는 이야기였다.
말이 좋아 정빈에게 아녀자로서의 예절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는 이야기였지, 사실상 왕비의 첩자 노릇을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임당으로서는 지금 딱히 그것을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중전은 그날 바로 심왕 김유에게 뵙기를 청해 사임당을 정빈에게 보내 가르치게 할 것을 권했고, 심왕은 앞뒤 사정을 대충 짐작하면서도 정빈에게 좋은 스승이 붙는다고 생각해 그것을 허락했다.
왕실의 여인을 가르칠 스승이 되면 사숙(師塾)이라 불리게 된다. 사임당이 스스로 그러한 직첩을 맡기에는 여인의 몸으로 황망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내전(內殿)에 남자를 함부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드십시오.”
사임당이 처음으로 정빈을 찾아간 날, 그녀는 내심 정빈의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전은 여진족 여인이라 정빈이 품위도 없고 예절을 모른다고 했지만, 사임당이 그간 보아 왔던 누구보다도 정빈의 태도는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일국의 빈(嬪)으로서, 그녀의 사숙이 된 사임당을 모셨다.
“빈께서 참으로 정숙하고 예절을 아시니, 제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임당은 그녀를 보는 순간 절로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빈은 고아한 미소로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고서는, 사임당과 마주 보고 앉았다.
“스승님은 중전 마마의 부탁을 받고 이리로 오신 게지요?”
자리에 마주 앉자마자 정빈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서 사임당에게 물어 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임당은 얼굴이 굳어 버릴 뻔했다. 그녀는 간신히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는 정빈을 바라보았다.
“그렇사옵니다. 중전께서 직접 정빈 마마를 위하여 소첩을 보내셨습니다.”
“중전 마마께서 참으로 좋은 스승을 내게 보내셨습니다. 스승님의 이름은 제가 사가(私家, 친정)에 있을 무렵부터 익히 들어 왔습니다. 예국(濊國) 땅에 매우 뛰어난 여인이 있다고 말입니다.”
예국이라 함은, 바로 옛 예(濊)의 땅이었던 강릉(江陵)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흔히 강원도에서도 관동(關東) 지방을 예국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 강남(江南)을 오국(吳國)이라 부르는 것이나, 사천(四川)을 촉국(蜀國)이라 부르는 것이나 매한가지의 방식이었다. 그 예국의 현모(賢母)라 하면 사임당을 말하는 것일 정도로, 사임당은 유명했었다.
“심양은 어떠하신지요?”
“이제 겨우 서너 달을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요. 스승님께서도 예국에서 심양으로 올라오신 지는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마마께서 이곳에 시집을 오실 때 즈음에 남편과 아들을 좇아 요동으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이곳 땅이 넓고 사람들의 기개가 좋으나, 저는 아직 강릉의 친정과 아기자기한 마을, 그리고 조용한 바닷가가 생각이 나곤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난 곳이 가장 맞는 법이지요.”
정빈의 얼굴에서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것을 느낀 사임당이 돌려 말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는 이제 아마도 다시는 고향 땅을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사임당은 그녀가 나고 자란 북해의 목장(牧場)이 어떠한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정빈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애틋한 곳이리라.
심양의 대궐이 아무리 화려하고, 이곳에서 누리는 음식과 의복이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고향의 소박한 바람 냄새를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시는군요.”
정빈은 수줍게 웃었다. 그녀 또한 마음이 조금 풀려 있었다.
중전이 보낸 사람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정빈은 사임당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깊은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함부로 사욕을 위해 자신을 모함해 중전을 기쁘게 할 여자가 아니었다. 정빈은 이곳 심양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나눌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렇게 왕비 때문에 기묘하게 시작된 정빈과 신사임당의 교류는 날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정빈이 문제가 될 행동을 일절 하지를 않았기에 사임당이 중전에게 고해야 할 만한 일도 없었다.
그녀들은 서로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쌓아 가면서 그림을 그리고, 난을 치고, 시를 짓고, 때로는 조심스레 세상이 돌아가는 일도 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러한 일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심왕 김유가 정빈의 침소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혹여 왕실 내의 묘한 균형을 깰까 싶어 정빈을 후궁으로 들인 뒤에도 발걸음을 하지 않던 심왕이 정빈의 자색을 잊지 못해 발걸음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열흘에 한 번 정도이던 것이 사흘 걸러 한 번이 되고, 종래에는 매일같이 정빈의 처소에 드나들었다.
“전하께서 정빈의 침전에 들어오셔서 낮이 되도 나가시지 않으시니 제가 함부로 드나들 수 없습니다.”
중전이 사임당을 불러다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다그쳤으나, 사임당으로서는 사실대로 고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정빈 그년이 전하를 꼬드긴 것이렷다?”
“정빈은 전하께서 직접 오시기 전에 전하 앞에 나아 선 적이 없사옵니다. 정빈이 거느린 궁인(宮人)들도 모두 도리어 여진족의 여인네라고 자신들이 모시는 정빈을 속으로 멸시하고 있으니, 지금 정빈의 주변에는 그녀의 편이 없습니다. 소첩 그간 정빈의 스승으로 말동무를 하며 지내오니, 정빈은 모략을 꾸미고 간계를 부릴 여자가 아니니 심려는 그만두시옵소서.”
불같은 중전의 눈매에도 굴하지 않고 사임당은 말을 돌려 가며 간결히 중전에게 정빈에 대한 투기를 그만두라고 간언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중전은 아니었다. 그녀는 괜히 사임당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그만 물러가게.”
사임당을 보내고 나서 중전은 가만히 혼자 앉아서 일의 앞뒤를 따져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때로는 종종 심왕가가 아니라, 황성부에서 내궐에 출입하는 일반 대신에게 시집을 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랬다면 남편은 황실의 권위가 두려워 함부로 자신을 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첩실은커녕 혹여라도 그녀가 비위가 상할까 싶어 매사의 행동을 그녀를 위해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황실에 대해 껄끄러움은 있을 망정 두려워하지는 않아 보이는 이곳 심양의 정서는 그녀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늙어가고 추레해져 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남편은 자신을 찾지 않았고, 이곳의 분위기는 십 년을 지내도 낯설기만 했다. 그런 그녀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황성에서 나오는 위세뿐이었다.
황제의 맏누이. 그것이 바로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마음대로 굴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임당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세자는 자신의 배에서 나왔고, 세자를 제외하고도 아들이 둘이었다.
더군다나 심왕이 아무리 황실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황녀의 배에서 나온 자식이 아닌 여진족 첩실의 아들을 세자에 올릴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
중전은 당분간 정빈에게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그녀는 한창 자라나고 있는 세자의 육아에 더욱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시간은 기다리고 참는 자의 편이었다. 아버지 소흥제도 여유 없이 굴다가 스스로 화병이나 일찍 세상을 뜬 것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중전이 잠시 그 손을 거두어 정빈이 숨통이 트인 사이, 그녀는 태기(胎氣)가 들었다. 회임한 것이었다.
열 달이 지나 그녀의 배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바로 인양군(仁養君) 율(聿)이었다.
세자 인(璘), 예양대군 민(珉), 금양대군 제(齊)에 이어 심왕 김유의 네 번째 아들이자, 동시에 측실 소생으로는 첫째였다.
정비(正妃)의 소생이 아닌 탓에 대군(大君)이 되지 못하고 군호(君號)를 받았으나, 어린 막내에 대한 심왕의 예쁨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갔다.
정빈은 아들이 너무 지나치게 왕의 어여쁨을 받는 것이 기쁘기 보다는 조심스러웠다. 중전 또한 애써 그러한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세자에게만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다.
심양 태안궁에서는 그렇게 다음 세대의 불안한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1554년
건양(建陽) 31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이이(李珥)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아버지 이원수가 심양에서 관직을 살고 있었기에, 그 또한 심양으로 따라와 어립심양문리과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터였다.
심양대학은 보통 그 과정을 마친 이에게, 본토의 진사(進士)나 거인(擧人)에 해당하는 학사(學士)의 학위를 수여했다.
그 다음에 공부를 더 원하는 이들은 학유시보(學諭試補) 과정에 응하여 석사(碩士)를 취득할 수 있었는데, 보통 3년이 걸리는 과정을 이이는 단 반년 만에 마쳤다.
이 학유시보를 마치면 심양대학에 학유(學諭, 교수)로 들어가거나 혹은 요동도평의사사에서 관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이는 도평의사사의 예악협판 자리를 제수받았다.
아버지 이원수가 맡고 있던 자리를 사실상 습직(襲職)한 것이었는데, 요동에서도 이것을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이이의 재능으로 취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이이의 뛰어남에 대한 소문은 요동 전역에 자자했다.
이원수는 아들 이이에게 관직을 물린 다음 관리 생활을 그만두고 아내를 쫓아 강릉의 처가로 들어갔다. 사임당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심양의 찬 공기를 마주하고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그녀와 격의 없이 교류했던 정빈은 매우 안타까워했고, 더 이상 이원수와 사임당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중전은 그와 사임당의 낙향에 시큰둥해 했다.
부모가 모두 떠난 심양에서 열아홉 어린 나이에 높은 관직을 맡게 된 이이는 정빈도 중전도 아닌 바로 심왕 김유의 총애를 그득하게 받고 있었는데, 심왕이 그 총명함을 크게 산 때문이었다.
“추존(追尊)을 해야 한다?”
심왕이 이이를 총애하는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이이가 아버지인 이원수처럼 황성부, 그리고 중전의 편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양의 명문대관들처럼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도 아닌, 바로 심왕가를 위해서 의견을 폈기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그가 예악협판에 오르자마자 시작한 일은 바로 심왕가의 선조들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백하고 나온 것이었다.
“본디 왕가(王家)가 창업되면 그 조선(祖先, 선조)에게 4대를 추존하는 것이 예법이나이다. 황제는 5대를 추존하고, 왕은 4대를 추존하며, 공후(公侯)는 3대를 추존하니 그것이 바로 그 가계를 엄정히 하고 선조를 떠받치는 옳은 법도입니다. 그러나 그간 선원(璿源, 왕가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편수(編修)해 둔 글 몇 자 만이 있을 뿐 계보(系譜)도 없으며, 추존 또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우선 시급한 일인 줄 아옵니다.”
사실상 몇 대에 걸쳐서 추존이 되지 않은 것은 바로 심왕가의 첫대 군주인 세훈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훈의 당대에는 이것에 관해서 자세히 논해져 전하는 것이 없었고,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저 세훈이 경상도 진량의 토호인 김익(金益)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전해져 왔다.
김익은 벼슬을 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무런 기록이 사서에도 남아 있지 않으니 그 계보가 막연한 것이 사실이었다.
“과인 또한 과인의 선조를 밝혀 마땅히 모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어쩐 일인지 엄정한 기록이 따르지 않아 모실 수가 없었다. 어립장서각에 선원에 대한 일이 전해져 오는 책이 있다고 하나, 내용이 산만하고 이를 훈고할 방책이 마땅치 않았느니라. 그대가 내게 제안한 일이니 마땅히 이것을 잘 살핀 연후에 내가 알려 선원을 추존하여 모시게 하도록 하라.”
심왕은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이이를 독려했다.
세태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해동(海東)에서도 법도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왕가가 창업될 때에 이미 추존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을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것이었음에도, 그간 심양의 대관들 중 어느 누구도 이것을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이가 이 문제를 심왕에게 직접 건백했다는 것은 심왕 김유에게 있어서는 이이에게 있어서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나 다름없었다.
“분부 받들어 마땅히 그르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이이는 그날로 예악아문에다가 종친부(宗親府)를 설치하고 왕실의 계보를 정리하고 선원을 따지는 일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 자료는 더욱 없었다. 우선 세훈의 아버지라고 추정되는 김익에 대한 기록부터가 매우 적었다.
여말(麗末, 고려말)과 선초(鮮初, 조선초)의 공식 기록에는 김익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경상도 진량에서 편찬된 향지(鄕誌)에도 승국(勝國, 전대의 왕조, 고려) 말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많은 전답을 지니고 있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이 없었다.
다만, 심왕가가 세워진 뒤에 심왕부에서 편찬한 몇 가지의 사료에는 세훈의 아버지가 김익이고, 진량의 향반인 김해김씨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매월당 김시습이 심양에 체재할 무렵에 남긴 《요동지(遼東誌)》에 김익이 여말의 김해김씨 무관(武官)인 김저(金佇)의 서자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김시습은 “세상에 전하기를…….”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이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사실상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이었다.
김시습 이후의 사서들이 모두 심왕가의 근원을 논하면서 김시습의 기록을 인용해서 적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일대는 신라 때로부터 김해김씨가 가진 장원(莊園)이 많아 그 후손들이 고려 대에 이르러서도 토호 노릇을 했고, 이것이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물려져 왔었다.
김저(金佇)의 후손들은 거의가 예천에 있으나 경산, 대구, 진량 일대에도 전답이 꽤나 있었다는 기록을 상고해 볼 때, 김저의 서자인 김익이 진량의 땅을 물려받은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 또한 명확해 보였다.
율은(栗隱) 김저는 조선이 창업되기 바로 전해에 우왕(禑王)을 복위하고 이성계를 주살하려던 일에 연루되어 그 목숨을 잃게 되었고, 거기다가 이성계와 대립했던 최영(崔瑩)의 손윗누이가 바로 김저의 어머니였던 탓에, 완전히 그 가문이 멸족(滅族)의 길을 걷게 되고 조선 초에는 그 많던 땅도 나라에 몰수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김저의 적자인 계절당(繼節堂) 김전(金鈿)은 두문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자인 김익도 아버지와 형을 따라 자진했다고 하니 세훈이 초기에 장사치로 떠돌게 된 연유도 아귀가 맞았다.
세훈의 조부가 율은 김저임을 확신한 이이는 이것을 정확히 고증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여러 개의 단편적인 다른 자료들을 근거로 삼은 뒤에 심왕 김유를 찾아가 고했다.
“전적을 상고한 바, 전해져 오는 바와 같이 전하의 5대조인 현조부(玄祖父) 되시는 성명왕(成明王, 세훈) 전하의 아버님 되시는 분이 진량의 진사(進士) 김익 공이시고, 그 아버님이 바로 여말의 충신 율은 김저 공임을 확인을 했나이다. 기록이 명확히 전해져 오지 않은 것은 바로 전하의 7대조 되시는 김저 공께서 여말에 충절을 다하여 목숨을 잃은 탓에 새 왕조가 창업되면서 폄훼된 탓이니, 지금에 와서는 마땅히 그 충절을 다시 되새기고 추존하여 심왕가의 조선으로서 위패를 모시는 것이 마땅할 줄 아옵니다.”
이이의 말을 들은 김유는 바로 용상에서 내려와서 이이의 손을 맞잡았다.
이이는 황공히 몸을 낮추며 엎드려서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종계(宗系, 왕의 계보)를 제대로 갖추는 것은 그 근원을 밝히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선왕들의 공업을 찬양하고, 기록을 남겨 만세에 전하는 데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또한 황성부에도 사람을 보내 선원(璿源)에 대한 기록을 변무(辨誣,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밝혀 고침)토록 해야 할 것이나이다.”
“과연 공의 말이 옳도다. 이제 선왕들의 계보를 밝혀 마땅히 정리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공의 덕이도다. 오늘부로 내 선왕 존위에 추존(追尊)하는 일을 그대가 맡아서 마무리 짓도록 하라. 그 공을 내 높이 사 벼슬과 식호를 내리도록 하겠으니 부디 마지막까지 성심을 다해 주도록 하거라.”
심왕 김유의 명을 이이는 공손히 받들고 물러났다.
계보를 밝히는 일을 맡기 위해 임시로 설치되었던 종친부는 이내 정식 기관으로 확장되어 많은 젊은 신료들이 모여 선위를 추존하고 그 공덕과 이력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며, 또한 황성부 조정에도 알려 심왕가의 세표(世表)에 정확한 기록을 할 수 있도록 주청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추존 선위는 어떻게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이가 종친부로 편속된 젊은 재관(才官)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이곳에는 주로 토착 요동인 출신이며 심양대학을 졸업한 수재들이 편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의 이이는 제일 젊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마흔 아래의 청관(淸官)들로, 다음 세대의 요동을 짊어질 동량들로 이름이 높은 이들이었다.
“황제는 5대를 추존하고, 국왕은 4대를 존호를 올리며, 일반 공후(公侯)는 3대를 살펴 올리니, 마땅히 4대를 해야 할 것입니다. 황성부에서도 건원칭제를 하고 예전의 태조대왕께 고황제(高皇帝)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그 위로 4대의 목조대왕, 도조대왕, 익조대왕, 환조대왕께 각각 선황제(先皇帝), 정황제(禎皇帝), 인황제(仁皇帝), 진황제(眞皇帝)의 존호를 올렸습니다. 그런 연후에 목종대왕은 지난 소흥(昭興) 연간에 이르러서야 선황제(宣皇帝)의 존호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총 6대를 추존하였으나, 애초에는 5대를 추존하였으므로, 마땅히 법도에 따라서 나중에 여러 대왕들에게 존호를 올리더라도, 지금은 성명왕(세훈) 전하의 윗대로 4대를 존호를 올리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세훈의 위대로부터 4대를 추존해 올리자는 의견을 낸 것은 바로 지청인(池淸寅)이었다.
그는 원나라 때 요동으로 이주해 온 고려계의 지항(池恒)으로 그 후손들이 요동에 심왕부가 세워진 뒤에 청요직(淸要織)을 두루 거치며 관리를 배출해 왔었다.
본관 또한 동녕(東寧)으로 선대에 하사받게 되어 동녕지씨라 하면 요동에서 이름 있는 명문세가 중 하나였다.
“원래 추존은 당대를 살펴 위로 네 대를 올리는 것이니 예전의 건원칭제 때에 제실에서 선조 열위를 다시 황제로 추존해 올린 것은, 그 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심왕부의 주상께서는 위로 4대가 모두 왕호를 지니고 계시니 따로 상고하여 위대로 추존해 올리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지청인의 말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유임(劉臨)이었다. 그 아버지 또한 어립심양문리과대학에서 학유를 지낸 유중수로, 일전 태양력의 편찬 당시에 서경덕을 초청해 함께 일한 인물이었다. 그 아들인 유임이 이제 관직에 나아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에야 추존을 논하게 된 것은 그간 때가 이르지 못하고, 왕부를 열 때 마땅히 살펴서 그 성의를 다하지 못했던 때문이니, 지금에 와서라도 바로잡아 선조 열위들께 존호를 올리는 것이 옳지 않겠소?”
“그러나 예법에 맞지 않습니다. 황성부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존호를 살펴 올리는 것이 예법에 맞지 않게 되었단 말이오?”
논쟁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여러 관료들이 제각기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붙어서 변론에 변론을 거듭했다. 이이는 한참을 그들이 하는 말을 살펴 듣고 있다가, 손을 들어 이들이 다투는 것을 멈추게 했다.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선조 열위께 존호를 올리는 것을 단순히 왕위의 선원을 사려 깊게 밝히는 것으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요동의 자존을 고양하기 위한 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실상 지금 우리 심왕부는 단순히 심양 일대에 봉작된 번왕을 넘어서, 심요도독부의 경내를 모두 통괄하고, 요동군을 거느린 왕국이나 다름없소이다. 비록 국호를 정하고 종묘사직을 세워 그 격식을 다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선왕의 존호를 올리는 것은 그간 다하지 못했던 예법의 문제를 이제야 다해, 요동지왕(遼東之王)인 전하의 존체를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마땅히 이 부분을 살피지 않으면, 신하된 몸으로 군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이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관리들은 웅성거렸다.
대부분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더러는 위험한 발언이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왕이라는 작위도 격이 있다. 제국으로 국호를 높이기 전에 조선은 명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았으나, 국계(國界, 나라의 경계)와 국호, 그리고 종묘와 사직을 가진 어엿한 왕국이었다.
그러나 번왕(藩王)은 달랐다. 예로부터 황제들은 자신의 아들들이나 매우 총애하는 신하를 왕작(王爵)에 봉하는 경우가 수태 있었다.
이들은 그 땅을 식읍으로 받고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긴 했으나, 전반적인 행정권이나 체제는 황도에서 나오는 관리들의 손에 있었다.
원래는 심왕 또한 그러한 자리가 되어야 마땅했으나 국초의 혼란 속에서 심왕은 사실상 요동 일대를 자기 왕국으로 다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문제의 애매함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심왕이라는 것은 본디 심양에 봉해진 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상 심왕은 다스리는 국토를 가지고 있었고, 관청과 군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화폐를 따로 찍어내며 요동의 세금 또한 심양으로 걷혀 들어온지 오래였다.
물론 심왕부에서 매년 세폐(歲幣)로 막대한 양을 황성부로 보내긴 하지만, 본토의 행정력은 사실상 요동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상이 이렇다고 하더라도 원래대로라면 이 땅은 심왕이 아니라 황성부의 황제에 속해 있어야 하는 땅이었다.
황성부에서는 대대로 심왕을 심요대도독에 함께 책봉해 줌으로써 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요식행위가 나름대로 충돌을 방지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놓고 요동지왕이니 운운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듣기에 따라서는 황권에 도전하고 제국의 질서를 흔드는 이야기로 해석될 소지도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본토 출신으로, 심양에서 황성부의 영향력을 넓히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이른바 황제의 누이인 심왕비의 계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인 이이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 의도를 오해받기에 딱 좋은 것이었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을 추려서 조정에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여 버리려는 수작으로 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이의 성품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이의 발언 때문에 회의는 잠시 웅성임에 뒤이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입을 연 것은, 바로 4대 추존을 먼저 지지하고 나섰던 지청인이었다.
“이 공의 말이 옳습니다. 마땅히 그리해서 존체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모두 우리 주상 전하의 덕업을 칭송하고자 한 말이니, 모두 불미스러운 이야기를 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청인은 그렇게 말한 뒤 이이를 바라보았다. 이이는 꼿꼿하게 앉아서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지청인의 시선을 받았다.
지청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혹자는 이이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할지 모르지만 그간 지청인이 지켜본 이이는 오히려 심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본향은 강릉이었으나 젊은 시절 요동에서 학문을 닦고 이곳에서 벼슬을 살며, 옛 심왕들의 문덕(文德)을 흠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전 조광조가 찬탄했듯이 어지러운 황성부의 조정이 아닌, 바로 이곳 심양에서 이이는 왕도(王道)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청인은 이이와 숱한 교류를 통해 그러한 이이의 심중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이이의 생각과 같았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원나라 때부터 요동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었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는 요동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고, 탐욕스럽고 이곳의 물정을 모르는 황성부의 관리들이 요동의 문제에 간섭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경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종계의 법통을 세우는 것에 더 이상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4대를 추존해 올립시다.”
지청인의 말에 술렁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열며 4대 추존에 뜻을 모음에 따라서, 반대파의 목소리도 이내 수그러들었다.
그들 또한 대부분이 요동 사람으로서 그 자부심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대관들이 뜻을 모아서 세훈의 부친으로 여겨지는 김익으로부터 4대의 존호를 정해 심왕 김유에게 상주하니, 김유가 이를 받아 들고서는 가납하여 이듬해 정초(正初)에 제사를 올리고 선조 열위에 제사를 올렸다.
존호가 올라간 것은, 김은(金형), 김계을(金系乙), 김저, 김익의 4대이니, 다만, 번왕의 작위임을 살펴 조종(祖宗)의 시호는 올리지 않고, 다만 왕으로만 추존하였다.
올려 바친 왕호는 각각 경인왕(慶仁王), 창의왕(昌義王), 예강왕(禮康王), 성지왕(成智王)이었다.
이렇게 선위를 추존하여 올리고, 《선원록(璿源錄)》을 편찬하여 김수로왕과 김유신을 지나 세훈으로 내려오는 계보와 심왕가의 핏줄을 이은 창주공가의 방계 혈족의 계통까지 모두 기록하여 수록하니, 그야말로 심왕가의 계보가 수대 만에 제대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바로 황성부에 이를 알리고 황성부에 기록된 《심왕세표(瀋王世表)》등을 이에 따라 고쳐야 했던 것이다.
이를 주청하고자 이른바,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도평의정 한부겸이 직접 황성부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다음에 논하도록 합시다.”
한부겸이 황성부로 올라가 이것이 심왕부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설득했으나, 여전히 요동을 고깝게 보는 황성부의 관료들은 이 문제를 시정해 줄 생각이 도통 없었다.
요동 심왕부와 황성부 조정의 긴장을 빚어낼 종계변무 문제의 시작이었다.
1555년
건양(建陽) 32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여러 선위에 왕호를 추존해 올린 그때, 심왕부에는 또 다른 경사가 있었으니, 바로 정빈 목씨, 즉 예러가 심왕 김유의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그간 세 명의 왕자를 왕비에게서 얻은 뒤로, 김유는 좀체 중궁전으로는 행차하지 않았었는데, 갈수록 중전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렇잖아도 손이 귀한 심왕가에 네 번째 왕자가 태어난 것은 오랜만의 경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김유의 대에 이르러서야 그 아들들이 많아 왕가가 번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자의 탄생은 그다지 축하받지 못했다. 정빈의 미묘한 위치 때문이었다.
분명히 심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그녀였으나 궁중에는 세력을 만들지 않고 있었고, 더군다나 중전이 멀쩡히 중궁전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정빈이 아들을 생산한 것은 경계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심왕은 친히 새로 본 아들에게 인양군(仁養君)이라는 군호와 함께 율(律)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놈 참 얼굴이 잘생겼구나.”
심왕은 괜히 왕비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정빈에게서 인양군을 본 뒤로는, 더더욱 정빈에게 가는 것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양군이 눈에 밟혀 종종 행차해 이렇게 밤중을 틈타 조심스레 놀고 가곤 했다.
“소첩과 인양군을 그리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불편함이 없으니 대왕께서는 국사에 좀 더 힘을 쏟으십시오.”
심왕이 와도 불편하고, 오지 않으면 더욱 근심스러운 것이 정빈의 마음이었다.
애초에 큰 기대 없이 시집온 심왕부였다. 심왕 김유가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아 주어 그녀 또한 심왕에 대한 애정이 돈독했으나, 괜히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까 싶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들이 태어난 것은 기뻤으나, 괜히 중전의 마음에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두려운 것이 정빈의 마음이었다.
“과인이 그대를 이 먼 타향으로 불러 마음을 고생스럽게 하는구려.”
앞뒤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심왕 김유 또한 정빈의 말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김유에게 있어서도 중전은 매우 불편한 상대였다.
그녀는 황제의 누이로서 여전히 그녀는 황성부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곳에서의 삶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결혼부터가 새 역법인 건양력의 반포를 둘러싼 심양과 황성부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자꾸만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고 하는 심왕부와 요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황성부의 내각대신들로 하여금 결혼을 통한 결속력의 확보를 추진하게 만들었다.
이미 한 번 새 역법을 마음대로 반포했다가 크게 황성부로부터 반발을 샀던 전대 심왕이자 김유의 아버지인, 경흥왕 진영은 황성부로부터 나온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때문에 유일한 아들이자 당시 세자였던 김유와 황제의 누이인 의주제희경희장공주(義州帝姬慶喜長公主)의 혼례를 마지못해 승낙했었다.
이렇게 성사된 결혼에서 행복은 사치이고, 불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었다.
제2대 심왕이었던 성무왕 현도처럼 사랑하는 이와 혼례를 치룬 경우도 있었으나, 그 이후 대부분 왕가의 자식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략결혼의 멍에에 매일 수밖에 없었다.
한데 김유의 경우 그중에서도 부담스럽고 불편한 혼인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심왕가의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성혼(成婚)한 뒤로도 내내 중전과의 관계는 소원하기 짝이 없었고,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황성부의 입김을 심양에 불어넣으려는 그녀를 견제해야 하는 매우 골치 아픈 상황에 김유는 몇 년간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정빈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빈이 알아서 처신을 조심히 하는 것에 김유는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뒤엉킨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과인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 줄 터이니.”
김유는 품에 안겨 있는 정빈의 귀에 속삭였다. 그로서는 하나라도 정빈에게 더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첩은 부족한 것이 없으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러지 말고 말해 보시오. 사람이 어찌 불만과 근심이 없고 항상 좋기만 하단 말이오.”
김유의 말에 정빈은 고개를 젓는다.
“어찌 감히 미천한 제가 이리 왕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성은까지 입어 인양군을 제 슬하에 놓게 되었는데, 무엇이 부족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 번도 뭔가를 부탁하거나 바란 적이 없던 정빈이었다. 김유로서는 그것이 정말 부족함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혹여 중전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조심했을 터였다.
더군다나 아들까지 생긴 지금, 더더욱 조심할 때라고 정빈은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김유는 백 번을 물어도 정빈이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혹시 그대의 부친과 오라버니를 보고 싶은 생각이 있소? 과인이 그대를 모령으로 다녀오게 해 주는 것은 힘드나, 그들을 이곳 심양으로 불러 그대와 만나게 할 수는 있소.”
“하오나……!”
김유의 말에 정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차마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지는 못했으나 그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 년간 보지 못했던 가족이었던가. 그녀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북해의 바람이 밀려오는 푸른 초장(草場)이 선하게 그려지곤 했다.
말들이 목장에 가득하고, 서늘한 바람이 처마를 비껴가는 그곳. 비록 가난하고 질박한 고향이었으나, 그녀에게는 그곳만큼 마음이 편한 곳이 없었다.
지금도 아마 그곳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말을 달리며 하루를 살아 나가고 있을 터였다.
“조금 기다려 보시오. 바로는 어렵더라도 내 조만간 그대의 가족을 볼 수 있게 해주리다.”
김유의 말에 정빈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는 가장 큰 바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만남은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정빈에게 좋은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날카롭게 반응하고 나오는 중궁전을 거스르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심왕 김유는 공식적으로 정빈의 가족을 심양으로 초청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몇 년 만에 중궁전으로 직접 행차했다.
“여기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주상 전하.”
중전에게서 호의를 기대했던 김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한기가 냉랭할 정도였다.
차갑게 가시 돋친 말투에 김유는 개의치 않는 듯, 애써 표정을 굳히며 중전과 마주 보고 앉았다.
“지아비가 지어미의 처소에 드는 것이 뭐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소?”
“그렇지요. 당연한 일인데, 당연하지 않은 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김유의 말에 중전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 벼려 온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 또한 정략결혼의 피해자였다. 시집을 오더라도 황성부의 대관의 자제에게 시집을 갔더라면, 그렇지 않더라도, 설사 돈이 없고 미관말직에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갔더라도, 이렇게 마음이 휑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제국 내에서 황실 다음으로 격이 높은 심왕가에 시집을 온 것이 도리어 화근이었다.
이곳 심양의 사람들은 황성부 조정에 기묘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적대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심왕부에서는 그녀에게 겉으로 보이는 예는 다했지만, 왕부(王府)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마음속으로 환영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고, 이곳 심양에 적응하려 모진 애를 썼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심양 사람들은 그녀의 의도를 왜곡하고 의심하며 그녀에게 눈초리를 주었다.
그것은 도리어 황성부에 그녀가 기대게 되는 결과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요즘도 내지 출신의 관료들과 가까이 지낸다고 들었소.”
“모두 제 고향 동기나 매한가지인 이들입니다. 잡초 무성한 이 중궁전에서 몇 안 되는 기쁨이지요.”
중전의 말에 심왕 김유는 내심 속으로 웃었다. 그녀 스스로 고향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을 했으니, 정빈이 가족을 보는 것도 문제 삼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김유의 쾌재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오래 동안 황상 폐하를 비롯한 제 혈족들을 못 보았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심양에 시집와서 뻔질나게 황성을 드나든다면, 그야말로 세간으로부터 조롱을 받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향 사람까지 내치라고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 될 일이십니다.”
중전의 말에 김유는 안색이 무거워졌다. 하긴,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없었다. 가족을 보고 있지 못하기는 중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자신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김유는 속으로 조금 중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과인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왕실의 법도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이까. 그대가 갈 수 없다고 황상 폐하를 심양으로 뫼실 수도 없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소. 그러나 과인은 동기지간의 형제나 자매도 없으니 그 또한 외롭지 않겠소이까.”
전대 선왕인 진영과 그 부인인 개성공의 딸 혜은왕후(惠恩王后) 이씨 슬하의 자식은 김유 하나였다. 경흥왕 진영은 후궁을 들이지도 않았으니, 배다른 형제도 그에게는 없었다. 이제껏 심왕가가 손이 귀하다는 말이 달리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요. 어디 누구 하나의 잘못이겠나이까.”
김유의 말에 중전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도 알고는 있었다. 그저 사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었다.
앞에 앉아 있는 지아비 또한 그녀와 같은 세태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제는 없는 사랑을 자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자빈 시절, 한때는 그에게서 사랑을 얻고자 노력했으나 이제는 타고 남은 마음에 퍼석거리는 잿가루만이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왜 원망하기 힘들게 이곳까지 또 오셨습니까. 차라리 아예 발걸음을 마실 것을.”
그게 바로 그녀의 마음이었다. 김유는 고개를 내젓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중전은 그런 김유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중궁전을 나오며 마음이 무거워진 심왕 김유는 정빈을 위해서 목가장의 기오창가와 탁시를 초청하려던 생각을 잠시 미뤄 두었다. 그 문제를 잊을 생각은 없었지만, 당분간은 내명부의 문제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신경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종계변무 문제였다.
“이번이 벌써 세폐와 함께 보낸 두 번째 사절인데도, 조정에서는 왕가의 선원에 대한 기록을 고쳐 줄 생각이 없단 말이오?”
벌써 심왕가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을 고쳐 줄 것을 황성부에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요청한 것이 수차례였다.
올 한 해 동안 그런 것이 벌써 숫자가 그랬다. 그러나 황성부에서는 이 문제를 요동의 간을 볼 기회로 생각했는지, 좀체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황성부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나중에 심양에 요구할 것이 생겼을 때 그것과 맞바꿀 패로 삼아둘 생각인 듯하옵니다.”
벌써 두 차례 사절의 단장으로 다녀왔던 한부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노구를 이끌고 황성부까지 다녀와서 진력을 빼는 일이 쉬울 턱이 없었다.
김유는 그의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있는 노신(老臣)을 바라보며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한부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황성부의 심산은 김유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받아줄 문제라면 처음 한부겸을 보냈을 때 해결해 주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이번에 다시 한부겸을 보냈더니 오히려 종묘를 세우거나, 함부로 고황제(高皇帝)에 누가되는 기록을 편찬해서는 안 된다는 핀잔만 듣고 왔다.
물론 애초에 종묘를 세울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 나라를 세워서 종묘와 사직을 만들 계산까지는 심왕에게도 없었다.
그런데 고황제에 누가 되는 기록을 편찬하지 말라는 것은, 이성계가 주도한 고려 우왕(禑王)의 폐위에 반대해 칼을 들었던 김저(金佇)를 칭송하는 기록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세훈의 조부로 사실상 공식화된 김저에게는 예강왕(禮康王)이라는 존호까지 이미 올려 바쳤다. 또한 이미 편찬된 《선원록》에 왕실의 선조들을 찬양하는 글을 이미 수태 쓰고, 이것을 간행하여 어립장서각에 장치(藏置)해 두었다.
그런데 황성부에서 고황제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한 것이 곧 선조를 칭송하지도 말라는 소리이니 심각한 내정간섭이나 다름없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황가를 사실상 세워주고, 제국을 이만큼 번영하도록 초석을 닦은 것이 바로 심왕가의 선조들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윗대의 선조들이 고려 말에 충성을 다했다고 해서, 이성계를 욕되게 한다는 황성부의 주장은 심왕가에서 보기에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조선(祖先, 조상)들을 뵙기에 낯이 부끄러운 일이로다.”
김유는 이마를 쥐어 잡았다.
황성부의 황제와 대신들은 심양에 이제는 공공연하게 멍에를 지우려 하고 있었다.
안에서 중전이 이에 호응해서 심양의 정치를 어지럽게 할 공산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은 더욱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황성부 조정에서는 결국 심왕가의 선조로서 예강왕 전하를 비롯한 선왕 열위들을 인정할 생각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일부 사서에 역신(逆臣, 임금을 반역한 신하)로 기록된 것 또한 바로 잡아줄 생각이 없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나이다.”
심왕의 썩는 속을 모르는 한부겸은 정확히 문제를 집어다가 김유에게 바쳤다.
숨이 답답해져 온 김유는 한부겸을 내쳐 물렸다.
“도평의정은 그만 물러가 보시오.”
공손히 예를 표하고 한부겸이 물러가자, 김유는 대전의 문을 활짝 열게 하여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서는 중궁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원래 없던 중전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차가운 공기에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모령군으로 사람을 보내 모령현남과 그 아들을 불러와 정빈을 볼 기회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꽁한 마음에 김유는 잊었던 정빈과 그 가족을 상봉하게 해 주는 문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중전에 대한 안쓰러움과 복잡해져 가는 정세 때문에 잠시 미뤄둔 것이었지만, 이제는 약간의 좀스러운 중전과 황성부에 대한 보복 방법으로 정빈을 챙기고 나선 것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챙겨줄 생각이었으나, 시점이 그러하니 그림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유는 이것저것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빈이 기뻐하는 모습과 중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모령의 기오창가와 탁시는 심양에서 온 공식적인 초청에 기뻐하며 심양으로 향하는 여장을 꾸렸다.
“예러가 심양에서 매우 잘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심왕 전하께서 직접 사람을 보내 우리를 초청하셨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심양으로 가는 내내 기오창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아 해를 기다려 심양으로 발길을 재촉한 기오창가와 탁시는 그곳에서 몇 달을 머무르며 정빈과 함께 식사를 들고, 심양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기도 하는 등 썩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처남도 아들을 보았다지?”
“예. 전하께옵서 부족함 없이 돌보아 주신 덕에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을 생산하였습니다.”
심왕은 중전이 보라는 듯 이들을 정빈과 함께 불러다 궁 안에서 연회를 열기도 했다.
정빈은 내심 속으로 불편했으나 기오창가나 탁시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이번에 그대의 누이가 내 아들을 낳아주어 이름을 율이라 지었네. 그런데 몇 달 차이로 그대가 아들을 보았으니, 이야말로 겹경사가 아닌가. 그래, 이름은 무어라 지었는가?”
“누르하치라 하였습니다.”
심왕 김유의 물음에 탁시가 웃음을 띄며 공손히 읊조렸다.
“누르하치라, 여진 이름이구나. 무슨 뜻인가?”
“부끄럽사옵니다만,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옵니다. 멧돼지 가죽처럼 질기게 살아 나가라고 제가 그리 지었사옵니다.”
“아, 빙부(聘父, 장인)께서 손자에게 직접 지어주신 이름입니까?”
김유의 물음에 기오창가가 읍을 하고서는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멧돼지 가죽이라. 좋은 이름입니다. 혹여 괜찮다면, 과인이 조선식으로도 이름을 하나 주어도 좋겠습니까? 그리고 빙부께서도 우리 인양군에게 여진 이름을 하나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유는 기오창가에게 매우 공손했다. 장인이라고는 하지만 정빈은 측실(側室)이니, 이렇게까지 그 부친에게 예를 차리는 것은 과례(過禮)였다.
그러나 아주 작정하고 정빈의 핏줄을 우대하려고 든 김유에게 그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빈의 앞에서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안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나이까.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다면, 보자, 누르하치라, 멧돼지 가죽이니 시혁(豕革)이라 하는 것이 좋겠으나, 너무 조야 하니, 해간(亥즨)이라 하자. 목해간이라. 어떻습니까, 빙부께서는?”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나이다.”
“그럼 이제는 우리 인양군, 외손주에게도 여진 이름을 지어 주셔야지요.”
심왕의 곁에서 인양군을 안은 채로 앉아 있던 정빈은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지만, 기오창가는 그저 기뻐서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서는 이름을 생각하느라 열중해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전하. 너무 제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베풀고 계십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진 정빈은 아버지 기오창가가 아니라, 이제는 옆에 앉은 김유의 귀에다가 대고 이렇게 지나친 대우는 그만하라 간청했다.
이것이 중전의 심기를 거스를 것이 자명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왕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빙부께서 저리 좋아하시는데 왜 그것을 딸이 된 도리로 막으려 하시오.”
김유는 웃음을 지으며 기오창가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좋은 이름이 있습니까?”
“예. 전하. 우시하가 어떨까 합니다.”
“우시하라?”
“별이라는 뜻입니다.”
여진말로 우시하(usiha)는 별이라는 뜻이었다.
기오창가는 외손자의 삶이 별같이 빛나기를 바라며 이름을 우시하라 지은 것이었다.
김유 또한 아들의 여진 이름이 썩 나쁘지 않게 들렸다. 별이라, 괜찮은 이름이었다.
“좋은 이름입니다. 율아, 너는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나. 허허.”
심왕 김유는 옆에 앉은 정빈에게서 아들 인양군을 건네받아 번쩍 안아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김율은 아버지의 손길에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