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구곡간장(九曲肝腸)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등장은 15세기에 이르러 항로가 동과 서로 활짝 열린 다음에 시작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쪽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항해자들이 신대륙에 도달하고, 동방항로를 개척했으며, 동쪽에서는 한국의 상인들이 아프리카에 다다르고, 신대륙에 정착지를 세웠다.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무역 체계가 주변부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경쟁은 격화되었고, 시장은 통합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금권(金權)이 세계의 질서를 규율하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피에르 갈리망, 《세계자본주의의 역사》, p. 369.
1558년
건양(建陽) 35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숙주도(宿州島).
지난 4년간 아라비아 반도에 면한 인도양의 고도(孤島, 외딴 섬)인 숙주(宿州, 소코트라)는 지속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상 나상(羅商)의 상단령이나 다름없는 이 작고 외로운 섬은, 인도양에서 위축되고 있는 나상의 영향력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도양 전체에 상업 기지를 구축해 가며 나상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상단들을 조여 들어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이 마카우를 거점으로 유구국과 진서도독부 일대까지 함선을 이끌고 나타나기 시작했고, 일부 칸조쿠 다이묘(韓屬大名, 한속대명)들이나 기상(崎商, 기주 기반의 상인), 박상(博商, 박주 기반의 상인)들과 거래를 트고, 싼값에 화승총 따위를 넘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황성부의 조정에서도 우려를 하는 바였지만, 가장 포르투갈인의 상업적 확장에 피부로 위협을 느끼는 것은 바로 제국의 상단들, 특히 그중에서도 나상이었다.
나상은 본래 세훈의 정치적 성공과 함께 탐라 출신의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상단이었다.
초반기 나상의 기틀을 잡은 오상복이나 페르시아 출신의 바호디르 같은 쟁쟁한 상인들이 나상의 인도양 항로를 개척해 냈고, 전성기에는 알렉산드리아까지 들어가는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무역망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상의 독주는 내부적으로는 제국 내의 후발주자인 송상(松商)이나 경상(京商)에게 위협을 받았고, 외부적으로는 지난 세기 말엽에 갑자기 인도양에 나타난 포르투갈 상단으로부터 견제받기 시작했다.
나상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포르투갈이나 카스티야에 뒤이어 지중해와 신대륙으로 진출하던 비교적 세가 약한 아라곤 왕국의 상인들과 제휴를 맺었고, 간신히 아프리카 남단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가는 항로를 확보함으로서 유럽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상과 포르투갈의 주력 항로는 완전히 겹치는 것으로써, 이들의 등장으로 거의 퇴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인도와 아랍의 상인들이 지니고 있던 인도양 무역의 이익을 두 세력이 나눠 가지는 체제가 되었다.
물론 이것을 나누어 가진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산출되는 이익은 막대한 것이었는데, 나상의 입장에서는 짧은 기간이나마 이 무역로를 거의 독점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진출로 인해 그 이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라곤을 통해 유럽으로 보내는 무역품의 비중이 크게 늘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의 인도양 무역 항로에서 나오는 소출이 줄어든 데다가, 인도 각지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연안에서 포르투갈의 전략적인 무력공세가 지속되면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후발주자였던 송상(松商)이 포르투갈과 전략적 제휴를 맺음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포르투갈의 동방 항로는 말라카 해협이 위치한 상남(湘南)에서 가로막혀 앞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송상이 이것을 뚫어 줌으로 인해서 나상은 골치 아픈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와중에 신대륙에는 진출을 포기한 탓에 함상(咸商)이나 내상(萊商)이 이를 독점하도록 내버려 둬 이미 포화 상태인 인도양 항로에서 제살을 깎아 먹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거기에 호르무즈를 점령하고 나상을 쫓아낸 포르투갈이 이제는 소코트라, 즉 숙주에 대한 공격까지 지난 네 해 동안 계속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인도양 무역이 정지되는 상황에까지 나상은 몰리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무장한 인도양의 포함(砲艦)들과 아라곤의 군함의 도움을 받아 겨우 숙주를 사수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입게 된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나상은 이제 전환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도달했다.
“숙주를 방어하는데 온 힘을 쏟는 동안, 방주(方洲)의 남쪽 끝 희원곶(希願串)을 돌아가는 바닷길이 모두 끊겨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본국의 상단에서는 숙주에서 철수하는 것을 깊게 고려하고 있으나, 여기에 몸담고 있는 우리로서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 할 수 없소. 숙주를 지키고, 나아가 방주와 태서(泰西) 연안의 각국과 교통을 트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오.”
숙주에 있는 나상의 여러 행수들을 모아 놓고, 숙주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숙주어행수(宿州禦行首) 함재용(咸材勇)이 입을 열었다.
그는 본디 전라도 사람이었으나, 사실상 탐라보다는 목포(木浦)를 그 중추로 하게 된 나상의 수뇌부 태반은 이제 호남 출신의 상인들이었으니, 별스럽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나상이라는 이름이 탐라의 나가 아니라, 전라의 나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예전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진출하던 무렵에, 숙주를 기점으로 나상의 무역로를 사수했던 몇 대 전의 숙주어행수인 성득문을 따라 숙주에 자리를 잡은 함혁(咸赫)이었다.
함재용은 바로 이곳 숙주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뒤 젊어서 본토로 들어가 목포에 있는 나상의 교육기관인 습외어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상의 행수가 되어 인도양 무역에 종사하다가 종래에 숙주어행수가 되어 고향인 숙주에서 다시 10년 가까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코가 컸으며, 피부색도 약간 거무잡잡한 편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이곳 숙주 토착민 출신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함재용은 어머니의 핏줄뿐만 아니라, 종교까지 물려받아 정교회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그 점이 그가 숙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숙주에 체류하고 있는 나상의 사람들 중에는 함재용뿐만이 아니라 꽤 많은 혼혈인이나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숙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많았는데, 이점 때문에 그들은 목포에 있는 나상의 수뇌부와 다른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숙주는 그저 무역의 거점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이고 지켜야 할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우리도 방주(方洲)에 거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포인(浦人)들이 쉽게 대양을 오고 가는 것은 그들이 항해에 필요한 요지들에 요새와 거류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항로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주 서해안의 상아연안(象牙沿岸)의 배인(裵人)들의 성새(城塞)에 다다를 때까지는 임시변통으로 해안에 정박하여 식수를 공급하고 선박을 수리하며, 혹은 그도 여의치 않아 좌초되어 물자를 잃고 목숨 또한 버리기 일쑤이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항로를 운용할 수 없습니다.”
함재용의 말에 행수 한 명이 거수를 하고서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방주라 함은, 아프리카를 일컫는 말로, 최근에 들어 정착된 지명이었다.
옛 경서(經書)에 해가 지는 곳으로 방산(方山)이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이름을 취해 아프리카를 방산이나 방역(方域)으로 부르다, 방주라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정착이 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본토의 지리학자들도, 크게 세계를 본주(本洲, 유라시아)와 방주, 그리고 영주(瀛洲, 아메리카)로 나누어 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본주는 대동(大東), 즉 제국의 본토와 중국을 포함한 중원(中原)과 페르시아와 아랍 일대, 그리고 인도를 포괄하는 서역(西域), 천축(天竺), 마지막으로 유럽일대를 일컫는 태서(泰西)로 나누는 지리 관념이 정착이 되었다.
바다에도 대창해(大蒼海, 태평양), 인도해(印度海, 인도양), 태서해(泰西海, 대서양)같은 명칭들을 붙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접근하게 된 지역에도 지명들이 하나둘 붙여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것은 직접 붙이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먼저 정해진 이름을 차용하기도 했다.
상아연안(象牙沿岸)이라는 것은 바로 상아해안(Costa do Marfim)을 옮긴 것이고, 희원곶(希願串)은 바로, 희망봉(Cabo da Boa Esperana)을 가져온 말이었다.
또한 포르투갈을 포도갈 혹은 포국(浦國), 베네치아를 베네사 혹은 배국(裵國), 아라곤을 아라공 혹 아국(雅國), 카스티야인들을 가데라 혹은 가국(伽國)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나라 명칭은 주로 포르투갈어나 아라곤에서 주로 쓰이는 카탈루냐어의 발음을 음차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행수의 말인 즉, 아프리카 해안가에 나상의 거점이 없어 상아해안에 있는 베네치아 인들의 요새인 본 디아(Bon Dia)까지 가는 동안 위험한 항해를 감수하고, 포르투갈인들에 비해 불리한 여건이 있으므로, 무리를 해서라도 아프리카 해안가에 거점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다를 돌아 태서로 가는 무역은 어디까지나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한 것으로, 다만 돌궐국(突厥國)의 태제(太帝)와 협의를 하여 예전 사용하던 홍해(紅海)를 경유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길을 다시 편히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돌궐과 포인들은 서로 종교가 달라 내왕하지 못하고 적대시하고 있으니, 돌궐국의 태제를 잘 설득하여 세율을 낮춰 교역의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다른 행수는 앞의 의견에 반대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을 설득해서 교역에 물리는 관세를 좀 더 낮추어 홍해를 통해 알렉산드리아로 나가는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애초에 숙주 자체도 이 무역로의 거점으로 사용하고자 점유한 섬이니 만큼, 지금의 상황에서는 타당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교역로를 어떤 방향으로 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교역할 상품도 더 이상 마땅치 않고, 수익이 남지 않아, 무장을 하기도 점차 벅차지고, 바다 위에서 우리를 쫓는 세력은 늘고 있다는 것이오.”
함재용은 행수들의 격론을 지켜보다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면직(綿織)은 우리가 가장 주력으로 삼던 품목이었으나, 이것은 경상이나 송상 또한 공히 파는 제품이고, 발화기는 이제 태서에서도 직접 생산할 정도가 되었으니 별로 채산이 맞지 않아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교역품에 올리고 있지 않소. 인삼은 서역인들은 찾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도 송상이 독점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없고, 은이나 동(銅, 구리)은 산출이 많은 일본국이나 진서에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영주로는 아주 출항하는 배가 없어 물건을 들여올 방법이 없소. 남은 것이 도자기와 모피인데, 그나마 모피는 함상의 계영양행에서 우리에게 절매(折賣)를 끊어 버리고 값을 높이 부르기 시작하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사서 팔 수 없는 상황이오. 다만 남은 것은 태서인들이 즐기는 후추나 육두구를 이곳에서 직접 사서 태서상인들에게 넘기는 것뿐인데, 이것은 포인들이 우리와 나란히 경쟁하고 있으니 그나마도 쉽지가 않소.”
함재용의 말에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한때 나상이 장기로 삼았던 무역 품목들은 이제 시대에 뒤쳐진 것이 되거나, 혹은 경쟁자들이 난립하여 나상의 장점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
면직물은 이 시대에 있어서는 사치품으로, 세훈의 시기 이래 방적기를 이용한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지만, 비단이나 모피와 같은 경쟁 품목이 있을 뿐더러, 면직물 자체도 똑같이 면직공장을 지니고 있는 경상이나 송상과 경쟁을 해야 했다.
나머지 품목들도 마찬가지로, 이제 발화기는 쉽게 여러 나라에서 모조되고 있었고, 광물자원은 나상이 뒤늦게 뛰어들려 해도 거래선조차 확보하기 힘드니, 결국 남은 것이 도자기와 향신료뿐이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품목들이 있으나, 선적과 운송에 들이는 수고에 비해 남는 것이 적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오.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포인들을 경계하고, 상남의 해군은 이 포인들을 추포(追捕)하여 내쫓기 일쑤였는데, 송상이 이들과 결탁하는 바람에 항로가 뚫려 이제 포인들은 명국(明國)과도 상통(相通)하고 있소. 더군다나 경상(京商)은 우리보다 앞서 방주를 돌아 태서로 가는 항로를 개척해, 우리보다 긴밀히 아라공이나 베네사와 교통하고 있으니, 우리가 아인이나 배인들과 교역하고 도움을 얻는다 하더라도, 경상에 비해 아래에 위치했다고밖에 할 수 없소. 그나마도 우리가 경상이 숙주에 기항하는 것을 금지해 버리면 그들도 역으로 우리가 방주를 돌아 태서인들과 교역하는 것을 막아버릴 터이니, 우리가 우위에 있다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소.”
원래 당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양에 들어섰을 때 위기 탈출을 위해 먼저 유럽으로 가는 항로를 뚫은 것은 바로 나상이 아니라 경상이었다.
경상은 당시 포르투갈의 인도양 진입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보고, 나상을 제압할 호기라고 생각했다.
즉각적으로 실론에서 인도양을 횡단하는 항로를 개척해 동아프리카 연안에 여러 항구들에 기항권을 얻은 경상은, 바로 방주(方洲, 아프리카)의 남회를 시도하여 희원곶(希願串, 희망봉)을 돌아 최초로 태서해(泰西海, 대서양)으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포르투갈 및 카스티야에 뒤이어 원양 무역에 뛰어든 후발주자였던 아라곤과 베네치아 등과 접촉했다.
아라곤은 당시 아프리카 서해안의 카나리아 제도를 카스티야와 분할 점거하고 있었고, 종래에는 작은 전투와 협상 끝에 카나리아 제도 전체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의 아프리카 쪽 항구인 세우타와 카나리아 제도를 발판으로 아라곤은 신대륙의 아라곤령 콜롬비아 식민지와 안전한 항로 확보에 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전통적으로 이 아라곤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아라곤이 확보한 이들 지역의 제해권 덕분에 안전하게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아프리카의 황금해안과 상안해안 일대의 두세 개의 무역 거점을 두고 있었고, 포르투갈과 노예무역을 경합하고 있었다.
경상은 먼저 태서해로 진출해 이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한 것이었다.
나상은 그저 어부지리로 경상이 개척한 항로를 같이 공유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태서항로는 경상이 사실상 나상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금의 교역로도 언제고 포인들이 작정하고 숙주를 함락시키려 들면 유지할 수 없을 것이오.”
함재용의 마지막 말에 행수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통탄한 한숨만을 내뱉었다.
인도양에 있어서 나상의 몰락 추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설사 인도양과 유럽 무역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나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상은 이미 유구·월남·상남을 잇는 무역로에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어떤 세력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아성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상은 인도양 무역에서 지분을 계속 잃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수익의 4할을 인도양에서 내고 있었고, 이것이 중단될 경우 한동안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이상의 성장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불가능할 터였다.
더군다나 인도양이나 유럽무역으로 재진입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었다.
때문에 함재용의 머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숙주와 인도양무역을 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것을 지속하고 끌고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나상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숙주를 중심으로 해 인도해와 태서만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것입니다.”
의외의 제안을 내어 놓은 것은, 행수 중 한 명인 배추경(裵錘倞)이었다.
그는 애시나절에 나상의 문제는 넓은 지역을 일관되게 묶어 놓고 통제하려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숙주 이외에는 그렇다 할 지역 거점을 확보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목포에서 출항한 배가 카나리아 제도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런 항로는 한 번 움직이는데 족히 2년이 걸릴 뿐더러, 수익도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빠르게 상업적 판단을 하기에도 너무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게 무슨 말인가? 배 행수.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함재용의 말에 배추경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말을 이어 나갔다.
“당초에 나상이 파사국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인도해에 들어섰을 때에는, 귀한 동역(東域)의 물건을 서역(西域)에 내다 파는 데에 중점을 두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토착 상인들은 우리가 가져오는 물건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인도해의 각처를 오고 가는 큰 규모의 무역을 우리 나상이 독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상단이 아국(我國) 안에도 경상이나 송상을 비롯해 여럿 있을 뿐더러, 이제는 포인까지 합세한데다가 근래에는 종종 가데라(카스티야)인 까지 출몰하니 총체적으로 난국이 아니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오나, 숙주에서 독자적으로 상단을 출범시켜서 본국의 나상과는 상남에서 거래하고, 희원곶의 서쪽으로는 아라공(아라곤) 상인들이나 베네사(베네치아) 상인들과 거래하여, 우리 숙주에서는 그저 인도해 주변만 바삐 오고 가며 중개무역을 하면 될 일이니, 살아남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또한 숙주를 오고 가는 여러 배들에게 기항지로 제공하여 정박료를 받고, 이곳 숙주를 인도해를 오고 가는 모든 교역품의 집산지로 만든다면 앉아서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배추경의 말에 행수들의 귀는 번쩍 뜨였다.
어차피 본국의 나상에서 자신들과 인도해의 무역을 포기하려 하는 심산이라면, 차라리 본국을 설득해서 자립해 나서는 것이 나았다.
기존의 인도양 항로와 그곳을 오고 가던 배들, 그리고 거래처를 모두 숙주에서 물려받아 잘 키워낸다면, 홀로서기를 도모해 볼 만했다.
또한 나상뿐만이 아니라 거래 상대를 송상이나 경상은 물론이거니와, 적이었던 포르투갈과도 거래를 할 수 있으니 오로지 인도양 안에서의 중계무역에만 힘을 쏟아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내는 것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배 행수의 생각대로 한다면 이미 인도해 안에서만 움직이며 교역을 중계하고 있는 파사나 인도의 상인들이 부지기수요, 돌궐(튀르크) 상인들도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하고 있소. 본국이나 태서와 떨어져서 무슨 실익을 이 가운데에서 취할 수 있겠소?”
함재용의 우려도 타당한 것이었다.
배추경이 제안하는 자립한 뒤에 인도양 내에서 중계무역을 하자는 것은 이미 외부 세력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인도양을 둘러싸고 인도, 페르시아, 아랍의 상인들이 해오던 일이었다. 여기에 끼어들어서 무슨 이득을 남길 수 있을지 또한 사실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문을 닫아야 할 판국이라면 이제 와서 꺼릴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배추경의 제안 외에는 지금은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함재용은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도양의 항로를 유지하는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던 나상에서는 숙주에서 독자적으로 무역로를 유지하겠다는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완전히 관계를 끊는 것은 서로가 부담스러웠기에, 고권(股券, 주권)을 발행해 지분을 나누어 가지기로 했다.
나상이 4할의 자금을 내어 지분을 소유하고, 3할은 숙주의 행수들이, 나머지 3할은 상남이나 내지 각지에 공고하여 지분을 매각하고, 이렇게 만든 고본(股本, 자본금) 50만 냥으로 인도고금상사(印度股金商社)를 설립하고 숙주에 본부를 두었다.
그 총재(總裁)로는 함재용이 취임하였다.
이것은 일찌감치 함상이 계영양행에 돈을 대어 모피무역과 영주개척을 전담하게 하였고, 내상이 신천광산의 은 무역을 주도할 목적으로 방동일로 하여금 창해고금합명상사를 세우게 하여 자본을 끌어 모았던 것을 답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상 또한 시시각각 변하는 인도양 무역에 대처하고, 무역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종의 구조 조정을 단행해 인도양의 무역만을 전담할 인도상사를 설립시키고, 나상 스스로는 적어도 인도양 무역에 있어서는 지주회사로 남은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 세워진 인도고금상사의 앞길은 좀체 밝지 않았다.
많은 물품을 정리하고 대신 인도상사의 수뇌부는 제국 본토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을 취급하는 대신에, 인도 내륙에서 가내공업(家內工業) 형태로 싼 면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신료 무역에 집중하여 무역 품목을 인도산 면직물과 후추 등으로 한정시키고, 이것을 바로 숙주에서 경상(京商)이나 아라곤, 혹은 가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넘겼다.
이런 방식으로 벌어들인 자본금으로 당시 아랍 연안에서 크게 즐겨 음용하고 있던 커피의 원두를 대량으로 사들여 인도와 상남 등지에 팔아넘기고, 이 돈으로 다시 상남에서 사탕수수를 사들여서 이것을 가져와 파는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때 인도양의 무역을 지배했던 나상의 무용담은 지난 시대의 일로 저물어 갔지만, 여전히 그 후예들은 숙주를 중심으로 인도양 무역의 중추를 담당해 나가며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1559년
건양(建陽) 36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崎州府).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진서 일대를 대한제국이 통제하게 된 지도 어언 15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기주부(崎州府)에 설치된 진서도독부는 여전히 건재해 있었고, 그동안 진서는 한인(韓人)과 왜인(倭人)의 잡거지로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본래 이곳 진서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인들은 진서인(鎭西人)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진서인이라는 명칭은 비단 토착민들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종종 진서에 뿌리 박은 한인(韓人)들과 새롭게 일본 본토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센코쿠지다이)의 변란을 피해 도망쳐 온 일본인들, 그리고 얼마 간의 유구인이나 강남인(江南人), 즉 중국계를 포괄해서 부르는 명칭이기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곳 진서에서 자리를 잡고 수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진서에는 여전히 옛 기해동정 때 조선에 복속한 다이묘들, 즉 소위 한속대명(韓屬大名, 칸조쿠 다이묘)라고 불리는 영주들이 정식으로 작위를 받고 봉(封)해져 많은 영역에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다만 군권(軍權)만큼은 제한되어 진서군이 일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이르러서 진서는 독특한 문화를 향유하며, 언어 또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기층은 일본어의 큐슈방언(九州弁)을 바탕으로 하여 어휘 면에서 조선어를 대량 흡수한 소위 진서어(鎭西語)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음운 구조와 문법 체계는 여전히 일본어의 형태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지만, 어휘의 수용을 보았을 때는 조선어에 가까운 독특한 형질이었다.
이 진서어는 때로는 히라가나로 표기되기도 하고, 때로는 국문(國文) 즉, 훈민정음으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진서와 박주등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해서 진서 각지로 넓게 퍼져 나가, 이제는 사실상 진서 지역에서 제1언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서어는 결국 중세 일본어와 중세 한국어의 크리올(creole, 두 언어가 합쳐져 탄생한 신종어)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본토에서 건너온 관리들이 이것을 배우는 것은 꽤나 고약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진서도독부의 판임관(判任官)으로 이제 막 부임해 온 송강(松江) 정철(鄭澈) 또한 이 진서어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를 시작했다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말을 옮겨 봐 주게.”
“예. 말씀하십시오.”
내지 조선어와 진서어 모두에 능통한 진서 출신의 직급 낮은 주부(主簿) 귤차랑(橘次郞)을 옆에 데려다 놓고, 정철은 말을 옮기고 써 가면서 진서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엇디 하리잇고 마파람 저리도 푸르게 불어오는듸.”
정철이 시구 한 귀를 읊자마자 주부는 바로 이것을 진서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此何ㅅ치야루카南風쥬우리니靑카吹ㅅ테來루노니.(Iotchi yaruka minamiharaN jyrini aoka futteurunoni.)”
“좀체 알아듣기가 쉽지 않구나.”
조선어의 단어와 형태를 많이 차용하였다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이해가 될 정도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중세기 큐슈 방언에서는 ‘오오’를 ‘우우’로 발음하기 일쑤였고, 형용사를 쓸 때 ‘카’를 어미에 붙였다. 이러한 것이 진서어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옷치, 하란, 쥬우리니 같은 단어는 모두 조선어의 이, 어찌, 바람, 저리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여전히 할까(야루카), 남쪽(미나미), 푸름(靑, 아오) 같은 상대적으로 기초 어휘에 가까운 단어들은 고스란히 이전의 일본어, 특히 큐슈 방언에서 사용되던 어휘들을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본시 어학에 스스로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정철이었으나, 모국어로 입에 붙어 있는 조선어가 일본어와 기묘하게 결합하여 변형된 진서어는 친숙한 동시에 낯설기 짝이 없어 도리어 배우기가 힘들었다.
여진말이나 강남말(漢語,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차라리 편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만하도록 하세나. 이거 원 처리해야 할 장계도 산더미 같은데 진서말까지 입에 붙이려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르구먼그려.”
“하하. 차츰 지내시다 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요. 처음에는 다들 어렵게 느끼시다가도, 진서에서 일 년 이상 머무르신 분 치고 진말을 조금이라도 익히시지 못하시는 분은 그간 보지 못했습니다요.”
주부 귤차랑이 반쯤 농으로 하는 말에 정철은 그냥 실소하고 말았다.
하긴, 진서에서 족히 삼 년은 머무르게 될 터인데, 그간 진서어도 익숙해지게 될 터였다.
“그나저나 군부에서는 장주(長州)로 출진한답니까?”
갑작스러운 귤차랑의 물음에 정철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잖아도 진서도독부와 진서군의 수뇌부에서는 이 문제로 격론이 한창이었다.
처음에는 진서군이 진서도독부의 행정 기능을 모두 통괄했었지만, 이후 이것이 기묘사화를 전후한 군제개혁과 함께 조정에서 보내는 문관(文官)들에게 이양된 이후로, 진서군의 무장들과 도독부의 관리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긴장 관계가 늘 상존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터진 것이 바로 백제공(百濟公) 대내의륭(大內義隆, 오우치 요시타카)를 둘러싼 문제였다. 대내의륭을 비롯한 대내씨는 기해동정 이래로 본주(本州, 혼슈)와 구주(九州, 큐슈) 양쪽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백제공가의 중심지는 기해동정 말기에 여전히 지니고 있었던 나가토노쿠니(長門國)과 스오노쿠니(周防國)의 양 지역이 그 모태인 장주(長州)와 방주(防州)로, 모두 본주에 위치한 땅들이었다.
때문에 대내씨는 줄곧 진서도독부의 최전선에 위치해서 군사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 본토는 기해동정과 뒤이어 발생한 오닌의 난으로 기존의 정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전국시대로 접어들어 약육강식의 전란이 거듭되고 있었고, 이러한 여파가 진서에 전달되지 않도록 고스란히 대내씨가 버티고 서서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주변 정세는 점점 복잡하게 변해갔다. 대내씨가 자리한 바로 동쪽에서 세력을 키운 아마고(尼子) 가문은 지속적으로 대내씨를 노리며 대립각을 세워왔다.
아마고씨는 대내씨에 대해서 일본의 강역을 다시 천황에게 복속시킨다는 명분을 가지고 압박해 들어왔고, 진서군의 도움을 받은 대내씨는 이러한 아마고씨의 압박을 잘 막아냈다.
문제는 바로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던, 진서도독부와 일본의 경계가 갈리는 아키노쿠니(安藝國)에서 일어났다.
당시 아키노쿠니에서 세력을 기르고 있던, 호족(豪族)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 핵심에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는 원래 아마고 가문 아래에서 그 세력을 점차 키워 나가고 있었으나, 대내씨와 진서도독부에서 막대한 지원과 함께 회유를 하자, 대내씨에게 종속을 자청하고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대내씨 내부에서 내란이 터지면서 정세는 꼬이기 시작했다. 대내의륭(大內義隆, 오우치 요시타카)이 백제공의 작위를 이어받아 대내씨의 당주가 되자, 이에 반대해서 휘하의 가신이었던 도청현(陶晴賢, 스에 하루타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도청현은 대내씨의 영지만이라도 다시 일본에 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내의륭을 살해하고 그 조카를 내세워 대내씨의 영지를 통제하려 했다.
도청현은 아예 진서도독부와 단절을 선언했고 본주로 건너가 있던 진서군의 4천 병력은 도청현과 전투를 시작했다.
그 사이 세력을 키워 왔던 모리 모토나리는 이 정세의 급변을 이용하여 도청현을 이츠쿠시마(嚴島, 엄도)에서 기습하여 패퇴시키고, 연이어 진서군의 잔존 병력마저도 본주에서 완전히 몰아내어 본주에 있던 대내씨와 진서도독부의 세력을 일소(一掃)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진서도독부는 완전히 본주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말았고, 대내씨 또한 겨우 대내의륭의 아들들까지 전사하여 대가 거의 끊기는 바람에 진서로 나와 있던 대내씨의 원로들이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으로 대내의륭에게 양자를 들여 겨우 가문의 명맥만 잇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벌써 5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진서군은 대내씨의 영지를 다시 회복하고, 혼슈에 있던 거점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세를 이끌고 모리 모토나리를 칠 것을 지속적으로 진서도독부와 황성부의 군부(軍部)에 탄원했고, 반대로 진서도독부의 관료들은 이것이 대한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와 나라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복잡한 정세 속에서 대내씨 내부의 내란(內亂)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며 더 이상의 개입을 자제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 본심은 자칫하다가는 진서군이 일본의 내전상태에 깊게 휘말릴까 싶어 저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는 진서군과 비교적 안정을 선호하는 진서도독부의 관료들 사이에서 수년간 분란이 계속되었고, 진서로 이제 막 부임해 온 정철도 이러한 문제에서 완전히 비껴 설 수 없게 되었다.
“그야, 황성부 조정에서는 사실 백제공가가 완전히 멸문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본주(本州)의 끄트머리에 있는 땅을 조금 잃었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인 양 호들갑 떨지도 않을 테니, 사실상 군대가 움직이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진서군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도 없으니, 중간에 있는 우리 같은 도독부의 관리들만 힘이 들 뿐이지.”
아닌 게 아니라, 정철뿐만 아니라 진서 도독부의 관리들 대부분이 그러한 심정이었다. 주부 귤차랑도 정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바다 건너 떨어져 있는 땅을 유지하기가 어디 쉽던가요. 그간 백제공가가 워낙 잘 버텨 왔으니 망정이지, 땅으로 일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이 원체 불안했습니다요. 어차피 모리니 어쩌니 하는 토호도 어찌 운이 좋아 대내씨를 몰아내긴 했지만 작정하고 해협을 건너서 진서로 들어올 엄두는 내지 못할 테니, 그저 진서만 안정 된다면 저 같은 범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요.”
진서군의 강경 행동에 암묵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정철 같은 도독부의 관리들뿐만 아니라, 귤차랑 같은 진서의 평범한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서라는 지명은 원래 큐슈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번에 모리씨에 의해 잃게 된 혼슈의 일부가 진서도독부에 편입된 것은, 오로지 기해동정에서 그곳에 근거하고 있던 대내씨가 깊숙이 개입해 공을 세워 조선에 복속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후 150여 년을 거쳐 오며, 이 일대 또한 진서의 일부로 여겨지기는 했었지만, 본질적으로 진서는 곧 큐슈라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서의 환경은, 이곳 사람들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내지팔도, 즉 조선과 다르고 또한 한때는 속해 있었으며, 지금도 한 뼘 언저리의 바다 건너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일본과도 다른, 독특한 자의식이 그간 이곳 사람들의 머릿속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정체성은 바로 동쪽에서 바다 건너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끊임없는 내전에도 무신경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관심이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진서의 번영과 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 마당이니 괜히 전쟁이 벌어져 군대가 혼슈로 진군한다거나 해서 지금의 안정이 뒤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간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변고가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으리는 아직 젊으시지 않으십니까. 저야말로 처자와 식솔이 딸려 있는 마당에 아들놈은 진서군에 입대해서 지금 군역을 지고 있습니다요. 아들놈이 전역에 끌려 나가는 것도 걱정이고 말입니다.”
“예끼, 이 사람아. 젊다고 해서 다 피가 끓는 줄 아는가. 나도 본토에 돌아가면 늙은 노모가 계신다네. 여기서 비명횡사하면 그게 무슨 불효인가.”
두 사람은 괜스런 걱정을 하며 앞날이 어찌 될까 점쳐 보았다.
진서군의 개전(開戰) 주장도 슬슬 힘을 잃어 가고는 있었지만, 동시에 전란의 불씨는 이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도 있었다.
언제고 저 바다 건너의 내전이 정리되면 다시 일본을 통일하겠노라고 누군가가 군대를 이끌고 진서로 건너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561년
건양(建陽) 38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지난 몇 해간 황해도는 아주 난장이었다.
여러 해에 걸쳐 든 기근에 이어서 포악한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계속되면서 황해도의 민심은 흉흉하다 못해 폭발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황해도는 서북(西北, 평안도)과 경기(京畿)의 사이에 위치한 지방으로, 본래 적은 수의 농민들이 고을마다 흩어져서 제각기 농사를 짓는 평범한 땅이었다.
황해도뿐만 아니라 조선팔도의 고을들이 다들 그랬었다.
그저 농사만 짓고 살아 안민태평(安民泰平)할 수 있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에 있겠냐마는, 황해도를 비롯한 내지팔도의 농촌들은 날이 갈수록 곤궁함이 사무치고, 빈한함에 시달리기 시작하니,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곤민(困民, 괴로운 백성)들은 걸식하고 유랑하기 일쑤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제국은 여전히 번영하고 있었다.
황성부를 비롯해 개성, 평양, 목포, 동래, 함주와 같은 도시들은 어마어마한 금은(金銀)과 사치품들이 모이며 번창하고 있었다.
황성부의 인구는 어언 50만을 웃돌고 있었고, 개성과 평양 같은 곳 또한 30만에 다다르는 거읍(巨邑, 큰 고을)이 되었다.
동래와 함주에서는 날이 샐 때마다 멀리 영주의 개척지로 가는 배가 닻을 올리고, 막대하게 유입되는 신대륙의 은괴(銀塊)가 이곳 주민들의 배를 불렸다.
한데 이런 번창하는 성시(城市)에서 한 발짝만 내륙으로 발을 옮기면 펼쳐지는 풍경은 판이하기 짝이 없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유복한 고을들을 제외하고 산간을 끼고 있는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옛 영길도)의 고을들은 갈수록 빈곤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난 시절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양전 수적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여전히 양반들이 막대한 전답(田畓)을 가지고 소작농들을 부리고 있었고, 양민이 된 백정(白丁)들은 여전히 동화되지 못한 채 천민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지난 백 수십 년간 이앙법의 도입과 낱알이 많이 맺히는 볍씨의 보급으로 소출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그랬다. 늘어난 식량은 그만큼의 인구를 불렸고,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인구는 고스란히 다시 식량의 부족을 불러왔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사람을 배 불리기 위해 자신이 지은 벼를 내다 팔았고, 그 벼를 내다 판 수입으로 지주들에게 지세(地稅)를 내고, 나라에는 조세(租稅)를 바쳤다.
몇 푼 남지 않은 돈으로는 그저 싼값에 보리나 조를 간신히 주린 배를 채울 정도로밖에 살 수 없으니, 그 삶이 괴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그래서 고향을 등졌다.
어떤 이들은 평양에 가서 야금술을 배워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떠났고, 다른 이들은 북해(北海)로 건너가 엽사(獵師)를 하겠다고 짐을 쌌다.
이도저도 아닌 채, 그저 빚에 쫓겨 밤에 가족을 이끌고 도망쳐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늘 있어 왔고 때로 풍년이 지속되면 줄어들기도 했으나, 이번에 황해도에 들이닥친 고난은 이루 말하기 힘든 것이었다.
풍년은커녕 흉작이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되었고,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 힘든 판에 황성부의 내각에서는 인성이 모자란 벼슬아치들은 황해도로 내려 보내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요동폐와 내지의 통보(通寶)를 시세에 맞게 교환해 주는 환금시장(換金市場)으로 유명한 해주부(海州府)의 사정은 나았지만, 그 넓은 황해도에서 겨우 해주 하나였다.
나머지 고을들은 곡량이 없어 굶어 죽는 이들이 매 해 생길 정도였다.
“이놈의 세상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도 잘못되었다. 내각은 재상 윤원형(尹元衡)이란 놈과 내부대신 이량(李樑)이란 놈 둘이서 휘어잡고 있고, 그놈들이 보낸 관리들이 황제의 눈을 가리고 백성의 입을 막아 수탈을 자행하니, 이 무슨 괴악한 일이란 말이냐. 옛 조정에서는 칠천(七賤)을 풀어다가 호적도 죄 고치고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여전히 차별은 유행하고, 가렴주구가 그치지를 않으니, 내 도저히 못 참겠다. 이놈의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으면 이 분함이 그치질 않으리라.”
호적상 양민이나 양전 수적 이후에도 여전히 그 조상을 따져 천출(賤出)이라 사람들이 부른 이들 중에 임꺽정[林巨正]이라는 호걸(豪傑)이 있었다.
갖바치 일을 하면서 그는 온갖 설움을 감내하고 살아왔었다. 근근이 살아가는 와중에 동네 아전이 그를 찾아와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군역을 이미 진 그에게 다시 진위대로 입대하거나, 아니면 통보로 은화 스무 냥을 내라고 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꺽정은 견디다 못해 구월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그곳에서 비슷한 처지로 유랑하고 있던 사람들을 긁어 모았고, 살기 위해 도적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민가를 털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이내 임꺽정과 그 일당은 자신들과 처지가 매한가지인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근원인 배부른 자들을 털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義賊)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두 황성부 조정의 간사한 벼슬아치들이 황제 폐하의 눈을 가리고 제 배를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 벌어지는 일이므로, 우리 백성이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 누가 그것을 바로 잡겠소이까!”
임꺽정의 외침은 설득력이 있었다.
점차 그의 곁으로 먹고 살기 힘든 젊은 피들이 모여 들었고, 구월산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도 그에게 부응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정에서 임꺽정을 어떻게 추포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그것을 지체 없이 그에게 알려 주었고, 때문에 임꺽정은 신출귀몰하면서 잡히지 않고 의적 행위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대담해진 임꺽정의 무리는 황해도 일대를 휘젓고 다니다 못해 나중에는 개성부까지 들어가서 거점을 개성 안에 두고 그 일대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당시 개성부의 포도관(捕盜官)으로 있던 이억근(李億根)은 포졸(捕卒) 40여 명을 이끌고, 그 소굴을 습격했다가 도리어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댁에게 따로 원한은 없소만, 살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망 마시오.”
임꺽정은 관리를 죽이는 것을 저어하는 부하들을 단속하고자 이억근을 생포하자마자 굳게 마음먹고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억근의 죽음은 이내 황성부 조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개성부의 한갓 포도관에 불과한 이억근이었으나, 일개 도적 나부랭이에게 조정의 관리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조정의 위엄을 일시 무너뜨릴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다.
더군다나 개성에서 황성부는 지척이었다. 언제고 임꺽정의 일패가 황성부에도 출몰하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싸늘하게 내각을 감돌기 시작했다.
내각의 대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큰소리로 임꺽정을 잡아들이라고 외쳐 대기 시작했다.
개성부윤은 내각의 명령에 임꺽정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정작 임꺽정은 잡지 못하고 피라미 같은 잡도둑들만 잔뜩 잡아들였을 뿐이었다.
이렇게 임꺽정을 잡아들이는 일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거년(去年, 지난해)에는 황성부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들은 황성부 안을 휘젓고 다니며, 장통방(長通坊)에서는 포졸 몇 명을 총으로 쏘아 맞히고서는 도망쳐 달아났다.
임꺽정과 그 일당이 총까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도성 전역에 퍼지자, 이내 조정은 완전히 뒤숭숭해졌다. 화총(火銃)이 도적 떼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군부 내에 협조자가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단순히 도적 떼가 아니라 역도(逆徒)의 무리로 지목된 임꺽정을 잡는 일에 황해도와 개성 일대의 진위대까지 동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꺽정은 봉산(鳳山)에 그 소굴을 두고서 황성부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올라가는 가도(街道)에 출몰하면서, 역마차를 약탈하고 육로 교통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 출몰할지 모르니 군대는 임꺽정을 잡으려 해도 우왕좌왕하기 일쑤였고, 언제 임꺽정의 손에 털릴지 모르는 역마차들은 운행을 거의 중지하고, 서해가도(西海街道)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가도의 역참 중 하나인 금교역(金郊驛)에다 추포군을 꾸리고서는 서울로 임꺽정이 들어오지 못하게 엄밀히 감시했으나, 이것은 되레 가도의 교통을 이중으로 마비시키는 결과만을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거의 넉 달에 이르는 기간 동안 물류는 완전히 멈추고, 서북에서 황성부로 길이 막혀 조세를 올려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 될 정도였다.
오히려 이렇게 막혀 있는 가도를 피해 임꺽정의 일당은 개성과 서울 황성부를 자유자재로 오고 가며 그곳에 집을 사두고 출몰하기까지 했고, 거의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벼슬아치들은 잠을 못이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조정 측에 반격의 계기가 온 것은 작년 12월 무렵에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 두목을 숭례문 밖에서 추포하는 데 성공한 때부터였다.
엄가이는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라는 자였다.
서림은 조정의 회유와 협박에 결국 굴복해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임꺽정 일당에 대한 정보를 모두 술술 내뱉어 놓았다.
조만간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이고 아주 봉산군을 점거해서 임꺽정이 거병(擧兵)할 계획이라는 것을 서림을 통해 알아낸 조정에서는, 황해도 황주부에 주둔하고 있는 제20진위대의 병력 5천을 내어서 평산 일대를 지나 봉산을 지나며 임꺽정 무리를 잡아들이기 위해 진군케 했다.
그러나 임꺽정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다양한 경로로 온갖 보총(步銃)과 무기를 획득한 임꺽정은 중구난방이나마 자신의 졸개들을 무장시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 중 태반은 군역을 지면서 보총을 다루는 법을 익힌 자들이었다. 똑같이 징병되어 군역을 살고 있는 백성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된 진위대가 이들보다 우위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임꺽정 무리의 숫자 또한 거의 삼천에 육박하고 있었으니, 제20진위대가 이긴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지나치게 몰아세우지 말고 지휘관 놈들만 잡아서 사로잡거나 죽여라!”
임꺽정은 오히려 진위대의 병사들을 설득해 자신의 무리에 합류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진위대의 병력을 지칠 때까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 임꺽정의 무리는 종래에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육군 정위(正尉)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일부 병사와 총, 그리고 말까지 빼앗아서 숨어들었다.
진위대의 병사들 중 거의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아예 무장한 채로 임꺽정을 따라 도망칠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이제는 내각의 탄원에 못이긴 황제, 건양제가 직접 나서서 칙령(勅令)을 내려다가 황해도 해주부의 제1진위대, 경기도 개성부의 제11진위대의 병력을 죄 긁어모은 뒤, 남아 있는 제20진위대의 잔병까지 합쳐 도합 2만4천의 부대를 조성해서 이 임꺽정을 소탕하는 일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성과는 좋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잖아도 보급이 부실한 군대가 황해도와 경기도, 평안도를 휘젓고 다니면서 백성들의 원성만 높아졌다.
탈주병이 늘어나고 군수품이 사라지는 것은 약과로, 엉뚱한 유랑민을 잡아다가 임꺽정의 무리가 아니냐고 추궁하고 잡아들이거나, 민가의 곡량을 약탈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했다.
다른 진위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 또한 오랜 기간 전투 경험 없이, 그저 군역을 지기 위해 온 백성들로 꾸려진 군대였다.
그나마 임승준과 조광조의 시대에 이루어진 군제 개혁으로 그나마 수월해진 군역이었으나, 그렇다고 빠듯한 군부의 살림이 나이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병사들은 훈련보다는 둔전(屯田)지를 개간하는 일에 더 많이 동원되었고, 이렇게 부대가 움직이고 있을 때는 그나마 보급도 끊기기 일쑤였다.
결국 이 진위대들을 통솔해 이끌고 있던 육군 부장(副將) 김협(金俠)을 경질시키고, 육군 부장 남치근(南致勤)을 토벌대의 책임자로, 육군 참장(參將) 김세한(金世澣)을 그 보좌로 임명해 토벌대를 운용하도록 내려 보냈다.
그때로부터 또다시 황해도 일대에는 소란이 지속되었다.
그나마 조정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확연히 눈에 띄는 속도로 임꺽정의 세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임꺽정의 부하들이 토벌대와의 격전 끝에 목숨을 잃었고, 반군의 수중에서 돌고 있던 총포들도 거진 토포대에 의해 회수되고 있었다.
“남치근은 마지막까지 성을 다해서 역도 임거정을 잡아들이도록 하라.”
황제는 근간의 보고를 듣고서는 간단히 칙유(勅諭)를 내렸다.
황제 또한 그저 내각에게 이것을 미루어두고 좌시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임꺽정은 공공연하게 천명(天命)을 말하며 나라의 질서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황제라고 더 이상 예외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남치근은 재령 일대에 진을 치고서 임꺽정의 목을 죄여 가기 시작했고, 임꺽정은 결국 평야(平野)에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구월산으로 일부 부하만을 데리고 달아났다.
남치근은 구월산을 샅샅이 톺으면서 임꺽정의 숨통을 끊어 나갔고,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가다가 결국 생포되고 말았다.
“내가 대의(大義)를 다했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나를 잡아 죽여라.”
임꺽정은 붙잡혔음에도 눈은 형형하고 한 치의 굽힘도 없었다.
남치근의 앞에 꿇어 앉혀져서 주리를 틀리고서도 말 한마디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조정에서 고문을 금한 지가 벌써 수대 전의 일이거늘, 어찌 사사로이 법관에게 나를 세우지 않고 군관인 그대가 내게 주리를 트는 것인가?”
임꺽정의 당당함은 남치근마저도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 정도였다.
결국 더 공을 세우기 위해 생포한 임꺽정으로부터 역모를 자백하게 만들 심산이었던 남치근은, 임꺽정의 신변을 법부(法部)로 인도할 수밖에 없었다.
임꺽정은 법부에서 대역죄로 죄목이 올라갔고, 때문에 황제가 직접 친림(親臨)하는 법정이 세워졌다.
법정이 열린 지 15일도 되지 않아 임꺽정은 결국 대역죄를 선고받고 참수형에 처해지니, 여러 해 동안 나라 전역을 들끓게 했던 그의 행적도 그 끝을 마지하게 된 것이었다.
실록에서는 그의 마지막을 전하며,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사관은 논한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 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정사(政事)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역모(逆謀)를 도모했다고 하나 실상은 그저 잘못된 정치에 분노한 것이었을 뿐이니, 어찌 그들을 탓하기만 할 수 있을 것인가. 성이 둘러쳐진 대읍(大邑)에서는 소민(小民)들마저도 비단옷을 두르고 호의호식하며 기와가 올라간 집에서 사는데, 성문 밖을 나서면 온갖 탐욕스러운 방백(方伯, 지방수령)들이 목민(牧民)을 행하지는 못할 망정 없는 살림을 쥐어뜯고, 백성들을 땅에서 내쫓아 산과 들로 횡행(橫行)하게 만들고 있다. 임거정은 이러한 시태에 내몰린 이들을 긁어모았을 뿐이니, 임거정이 난민을 부릴 수 있도록 만든 조정이 먼저 선정을 궁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