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9장 서기중용(庶幾中庸) (50/82)

제49장 서기중용(庶幾中庸)

「○황상께서 주강에 나가셨다. 주임관(奏任官) 설경(說經) 안수(安璲)가 아뢰었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소수 서원(紹修書院)이 있는데, 이는 고려 사람 안유(安裕)가【안유(安裕)의 초명은 향(珦)이며 죽계인(竹溪人)으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죽계는 지금 풍기군에 속해 있다. 동지사(同知事) 주세붕(周世鵬)이 그 고을 군수로 있을 때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또 그 곁에 서원을 지어 유생들로 하여금 모여서 학문을 닦게 하였다.】 살던 고장입니다.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모여들어 마치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白鹿洞)과 같습니다. 그런데 뜻 있는 선비들이 제반 서책을 박람하고자 하나 궁벽한 시골이라 서책이 귀하여 선비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서책을 간행할 때 한 질씩 반사(頒賜)하소서.”

○皇上御晝講. 奏任說經安璲曰: “慶尙道豐基郡, 有紹修書院, 高麗人安裕之故居也.【裕, 初名珦, 竹溪人, 有學行. 竹溪, 今屬豐基郡. 同知事周世鵬爲郡守時, 立祠其地, 又起書院於其側, 令儒生聚學焉.】一道儒生濟濟相聚, 如朱文公之白鹿洞. 有志之士欲博覽諸書, 而窮鄕下邑, 簡策稀罕, 必貽有志之嘆. 請於印冊之時, 各頒一件.”」

―《성조실록(成祖實錄)》, 119권, 건양(建陽) 32년(1555) 10월 1일 두 번째 기사

1563년

건양(建陽) 40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경상도 안동부(安東府).

당대의 이름난 유사(儒士)인 퇴계(退溪) 이황은 고향인 안동부로 내려와 학문을 닦고 있었다.

나이 환갑을 넘어서 거동이 불편하기 시작했고, 눈은 침침해 책의 글씨도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안경으로 흐린 눈을 갈음하니 조용히 처사(處士) 노릇 하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예안(禮安)이라는 고을이 바로 퇴계의 고향이었다.

지금은 그 관아가 닫히고 곁에 자리한 큰 고을인 안동부(安東府)에 폐합(廢合)되었으나, 퇴계는 습관처럼 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예안이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고향은 그에게 있어서 험난한 세파로부터 몸을 피할 곳인 동시에, 배움의 산실이기도 했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 무렵부터 내각(內閣)에 출사하라는 요청도 사양하고, 당파에 들어가지도 않고 마지못해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아주 고향에 내려온 것이 겨우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고향 마을 조용한 곳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조그마한 학당을 열고 퇴계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던 그에게 손님이 하나 찾아왔으니, 이황은 서둘러 의관을 단장하고 나아가 객(客)을 맞았다.

다름 아닌 지리산 골짜기에서 내려온 동년배의 문사(文士), 남명(南冥) 조식(曺植)이었다.

둘 다 벼슬을 꺼려 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때로는 입장의 차로 격론(激論)을 벌이기도 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 온 처지였다.

서로 가깝지 않은 곳에 기거하고 있어 얼굴을 볼 일은 매우 드물었는데, 조식이 황성부에 올라갈 일이 있어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가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안동에 들러 이황을 보기를 청한 것이었다.

“세월이 참 빠릅디다그려.”

남명은 이황과 마주 앉아서 수정과 한 모금을 들이키고서는 품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여름이 한창이라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흥건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예전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종종 뵈었는데, 이렇게 세월에 무뎌져 나이를 먹다 보니, 그때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고 그렇습니다.”

조식의 말에 이황이 초연한 웃음을 지었다.

성격이 딱 부러지고 호걸(豪傑)의 분위기가 있는 남명에 비해, 퇴계는 누가 보아도 선비였다.

말은 굽이치고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기 짝이 없었다. 둘은 사십 여 년 전에도 그랬다. 당시 약관을 갓 넘긴 둘 모두 황성부중에서 공부 중이었는데, 퇴계는 성균관에 재학 중이었고, 남명은 학습원에 재학 중이었다.

두 학교의 학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두 사람은 제각기 자신이 보는 관점에서 서로 논쟁하며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모두 4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이황은 성균관을 장원으로 졸업하고, 한림원을 거쳐 관료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차에, 그 유명한 《건양력》과 관련된 요동의 역법 문제의 해결책을 내각에 출두하여 진언한 바, 그 뒤로 조정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관력(官歷)을 쌓게 되었다.

반면, 조식은 학술원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임승준 사후 내각이 불구가 되어 척신(戚臣)이 활개치고, 정치적 모략이 횡행하는 것을 보고는 관직을 마다하고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학문을 홀로 연마했다.

오랜 기간 처사 생활을 했던 임승준을 사표로 삼아 학문을 동무 삼고 살아온 것이었다.

이제는 이황도 조식도 모두 관직에는 뜻이 없고, 그저 제각기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젊을 적 나누었던 기상을 되새겨 보는 것은 나이가 부쩍 든 지금에도 썩 즐거운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황성부에는 어인 일로 올라가시는지요?”

퇴계가 남명에게 물었다.

“황상 폐하께서 관직에 출사한 적이 없는 늙은 선비들을 모아 회연(會宴)을 베푼다고, 거동을 할 수 없을 지경이 아니면 올라오라고 명하시는 바람에 이리도 어쩔 수 없이 노구(老軀, 늙은 몸)을 일으켜 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하, 황상께서 늙은 선비들을 어찌 그리 아끼시는지요. 소생(小生)도 벼슬을 마다하면 또 다른 관직을 주어 부르시고, 좀체 놓아 주지를 않으시니, 이게 다 다름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선덕(宣德)을 보필할 바른 신하들이 내각과 관청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황은 입이 어쩐지 썼다.

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최근의 정치는 엉망이다 못해 중용(中庸)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훈구당과 사림당은 여전히 내각을 할분(割分)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학문적, 혹은 정치적 소명 때문에 당적을 택하는 것보다, 오히려 어느 쪽에서 자신에게 감투를 씌워줄 수 있는가를 보고 철새처럼 움직이는 소인배의 무리가 그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황제와 사돈 관계에 있는 척신들이 대거 조정에 입관하고, 황성부중의 4대학교는 더더욱 문이 좁아져 아버지가 관직에 있지 않으면 들어가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으니, 사실상 집안이 명문거족이 아니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있었다.

황제라고 이러한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부친 경종 소흥제의 때 이른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갑자기 면류관을 쓰게 된 건양제는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아버지를 쫓아 황권강화의 길을 걸어가려 했지만, 이미 새롭게 판이 짜인 정국(政局)에서 스스로의 몫을 챙기기란 쉽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청렴하고 학문적 기상이 높은 선비들을 흠모하고, 이들을 관직에 등용해 자기편을 삼으려고 애를 썼는데, 이런 구애는 이황이나 조식 같은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왔었다.

이황은 벼슬이라도 여러 번 짧게나마 나아갔으나 조식은 그간 황제의 부름을 매번 거절해 왔으니, 이번에는 면목이 없어 황성부로 결국 올라가게 된 것이었다.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연회를 연다기에 그나마 발걸음이라도 움직인 것이다.

“그나저나 학당을 여셨다더니 역시나 직접 와 보니 풍광이 좋고 처마도 단아하여, 책을 펼치고 선학(先學)을 읊기에 딱 좋지 아니한가 합니다. 역시 퇴계 선생입니다그려.”

남명의 입바른 칭찬에 퇴계는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늙어서도 이런 말 듣기는 괜히 멋쩍은 노릇이다.

“험, 괜한 말씀을 그리하십니다.”

“요즘에 황성부 안에 있는 이름 난 학당들에는 지방 출신이 들어가기 힘들고, 감찰영 마다 설치된 상학(庠學)은 그저 지방의 노학(老學)들이 둘러앉아서 소일하는 기로소(耆老所)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배우고자 하여도 마땅히 배울 곳이 없고, 배워도 관직에 나아가기 힘드니 배우려 들지도 않아, 돈 없는 인재들은 모두 죄 요동이나 북해, 진서로 건너가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군문(軍門)에 몸을 투신하거나 합니다. 이참에 이렇게 젊은 재학(才學)이 학문을 연마할 수 있도록 이런 좋은 학당을 만드신 것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남명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 또한 산천재(山天齋)라 불리는 거처에서 학문을 강연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이황처럼 숙식하며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마할 수 있도록 아주 학당을 열지는 않았었다.

“일전에 풍기군(豊基郡)에 군수로 있을 적에 전조의 유사(儒士)인 안유(安裕)가 살던 고을이라, 이곳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학문을 강연하는 학당이 있었습니다. 기이하게 여겨서 그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니 다들 뜻은 있으나, 학교에 들어가기는 그 문이 너무 좁고, 밖에서 공부해 보아야 관직에 나아갈 수 없으니, 그저 학문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고 이 골짜기에 모여 경서(經書)를 강연하고 있는 게지요. 이를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아, 방법을 궁리한 끝에, 이 서원에 황제 폐하께서 직접 사액(賜額, 황제가 직접 편액을 내리는 일)하시면 관리들도 이곳을 나온 학유들에게 마지못해 관직에 응시할 길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때문에 조정에 뜻 있는 대관들과 함께 입을 합치어 황제 페하께 이 소수서원에 사액을 해주십사 간청하여, 결국 황제께서 소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이 소수서원은 지방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품을 내어 운영하면서도, 나라에서 관장하는 상학(庠學)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느낀 바가 있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온 뒤로는 학문에 뜻 있는 젊은이들에게 배울 공간을 마련해 주자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차마 서원이라는 현액은 달지 못하고 글방[學堂]이라 이름하여 부족한 학문을 교습하고 있으니, 그저 뜻이 좋을 뿐, 행동은 아직 쫓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간 제국, 특히 내지팔도에서 황성부의 관직에 등용되기 위한 절차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주로 그 대부분은 황성 내의 4대학교, 즉, 학습원, 성균관, 경애학사, 외학원의 출신이었다.

이들은 졸업 시에 이미 성적에 따라 과거 합격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고, 좋은 성적이라면 얼마든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이 소위 학교의 이름을 따서 「학외성경(學外成敬)」 혹은 「경내사학(京內四學)」이라 불리는 학교로 들어가는 문은 좁아져, 조상이 관직에 나아간 일이 없으면 입학하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변질은 너 나 할 것이 없었다.

격물학(格物學)을 탐구하고,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학습원도 이제는 그저 학교를 관직 등용의 문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학문적 발전이 정체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고아와 천출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던 경애학사는 지금은 다른 학교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신분을 따지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출신들이 관직에 나아갈 방법은 예전에 일찍이 지방의 재사(才士)들을 위해 공부할 길을 내어 주고자 각 도의 관찰사가 주재하는 감영이 있는 고을마다 세운 상학(庠學)을 졸업하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숫자는 줄고 관리를 채용하고자 하는 조정의 의지도 희박해져, 이 상학에는 졸업을 유예하고 과거 공부만을 계속하는 늙은 유생들만이 바글바글하게 되고, 그저 경전만을 강독하고 외우는 강좌가 늘어 사실상 기능이 마비 상태가 되어 있었다.

교육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가 심각해지다 보니 배움에 뜻 있으나, 출신이 빈한하고 가문이 좋지 못한 젊은이들은 그저 학문을 포기하고 요동, 영주 같은 신천지로 짐을 꾸리기 일쑤가 되었다.

이황은 이러한 상황에 깊은 탄식을 느끼고 있었고 소수서원의 일을 경험 삼아서, 이러한 사립학교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을 좀 더 늘려 젊은 학도들이 보다 학문에 즐거움을 느끼고,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황제가 사액한 서원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또한 소수서원의 전례에 따라 학업을 마치게 되면 상학을 졸업한 이와 같은 자격으로 대우해 주니, 소수서원의 문턱에는 이미 들어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이황은 아직 도산학당에 사액해 달라 황제에게 청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학교의 기반을 닦아 두면 언젠가는 이곳에서 학문적 기량이 자라나, 희망이 되어 주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허어, 그 뜻이 참 가상하십니다. 소생도 황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책과 골조를 좀 사다가 학당을 세워야겠습니다. 허허. 확실히 앞으로 이러한 서원들이 하나둘 늘어나게 되면 중앙에서 소외된 유생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겠지요.”

남명 또한 퇴계의 생각에 감명을 받은 듯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동의를 표했다.

그 또한 진정 학당을 세워 볼까 고민이 되었다. 이곳 도산학당의 마루에 앉아 멀리 내문(內門)밖으로 바삐 오고가는 유생들을 보니, 젊은 시절에 품었던 청운(靑雲)이 다시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남명은 도산학당을 떠나 황성부에 올라가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황의 도산학당에 사액(賜額)하여 서원의 이름을 내려주기를 요청했다.

황제는 남명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도산학당에 사액해 도산서원의 이름을 내려주고, 또한 남명에게도 직접 현액을 써서 서원을 건립하라고 건네주었으니, 바로 덕천서원(德川書院)이었다.

남명이 황성부에서 지리산 덕천으로 다시 내려오는 길에, 황제의 칙유(勅諭)와 사액된 현판을 이황에게 건네니, 퇴계는 그저 감읍하여 남명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다.

이렇게 풍기의 소수서원에 이어 영남(嶺南)의 「삼당(三堂)」이라 불리게 될 도산서원과 덕천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간 배움의 기회를 갈망하고, 관직에 나아갈 조그만 끄나풀이라도 잡고자 하는 젊은 유생들이 구름과 같이 영남으로 모여드니, 이 세 서원은 얼마 가지 않아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맥(宗脈)을 따른다고 할 수 있는 도산서원과 격물학(格物學)에 깊게 감화된 조식의 학통을 이은 덕천서원은 그 뒤로도 서로 대립하고 협력하며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1564년

건양(建陽) 41년 중동(仲東)

대한제국 함경도 함주부(咸州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그해 겨울을 함경도 함주에서 맞고 있었다.

세찬 동해의 겨울바람이 비껴 들어오는 함주부의 외항(外港)은 조용히 바람만 몰아칠 뿐, 오고 가는 배 없이 바람 소리만 맥없이 들려올 뿐이었다.

한겨울이 되면 시끌벅적하던 함주의 항만은 늘 조용해지곤 했다.

다름 아니라 북해(北海)나 영주로 나가는 선편이 모두 끊기기 때문이었다.

뱃길로는 그리 멀지 않은 북해도독부의 수부인 영안부(永安府)만 하더라도, 한겨울 두 달 정도는 바다에 살얼음이 끼어 항구에 배를 접안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마당에 북방의 대양으로 나가서 유빙(遊氷)들을 피해 다니며 영주로 건너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겨울철에는 모두 남쪽 항로를 이용해서 동래에서 출발하는 선편을 이용해 영주로 건너가곤 했던 것이다.

“나으리, 인차 눈발이 날릴 것 같시니 날래 려각에 드시우요. 겨울에 소곰바람을 잘못 맞았다가는 지레 앓우다. 피매말은 단디 매여 놓았시니 념려 말고 어서 드시우요.”

함주 사투리로 옆에서 짐꾼이 재촉하자, 이이는 마지못해 겨울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고 항구에 면한 읍내로 향했다.

함주부는 거의 인구가 10만에 육박하는 거읍(巨邑)이었고 물산도 풍족한 편이었다.

고을이 커지다 보니 자연스레 함주에 관찰사를 두고도 영길도라고 부르던 것이, 이제는 아주 함경도라고 고쳐져 불리고 있었다.함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성천강과 호련천(瑚璉川)이 만나는 합류지에 위치한 본래의 함주읍성(邑城)으로, 이곳은 옛 태조 고황제, 즉 이성계가 머물렀던 곳이자, 동북면의 제1읍으로서 지금도 함경도의 감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에 비해 함주만(咸州灣)의 해안가에 면한 소위 함주항(港)은 성벽도 없고 역사도 백 년 남짓으로 짧으나, 오히려 읍성 지역보다 훨씬 번창하는 곳이었다.

북해도독부와 함경도 전역의 물자가 이곳 함주항으로 모여서 실려 나갔다.

모피를 한가득 적재한 창고가 항만가에 여기저기 서 있었고, 모피를 가공하는 소규모 공장과 산악지대에서 실려 나온 광물을 제련하는 철공소(鐵工所)도, 성천강이 바다와 만나는 길목에 세워져 있었다.

거기다가 10만 인구가 빼곡하게 함주항에서 읍성으로 올라가는 성천강 물줄기를 따라서 가호(家戶)를 세우고 살고 있으니, 동북제일시(東北第一市)라는 위명이 가히 허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이 번창하던 도시도 일순 침묵에 빠져들고, 마치 죽은 도시마냥 조용해지기 일쑤였다.

신력, 즉 건양력으로 11월 중순 무렵이면 오고 가던 배가 끊기고, 남쪽에서 드물게 오는 배들만이 최종 목적지를 함주로 잡고 종종 들고 날 뿐이었다.

12월의 섣달을 지나 1월은 아주 주민들이 출타하는 것도 꺼릴 정도로 조용하게 변하는데, 북쪽의 산간지대에서 넘어오는 바람이 살벌할 정도로 차가웠다.

2월이 되어서야 이러한 동면에서 깨어나 다시 도시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겨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개마의 산간지대에서 나오는 은금(銀金)이 함주로 보내져 제련되고, 육로(陸路)를 통한 교역은 한겨울에도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함주까지도 들어오는 가도를 따라 역마차가 황성부로 오고 가고 있었고, 이 함주까지 일단 물건이 들어오면, 이곳에서 함상 소속의 대상(隊商)들이 나귀와 말에다가 짐을 잔뜩 싣고 겨울 중에 북해도독부로 들어가 물건을 내다 팔고, 모피도 실어 오고 그랬다.

이이 또한, 이 한겨울에 동북가도(東北街道)를 오가는 역마차에 올라, 금강산을 거쳐 함흥까지 온 마당이었다. 물론 겨울 중에 이 역마차는 열흘에 한 대 꼴로밖에 오고 가지 않았다.

“이보게. 북해도독부로 들어가는 건 봄이나 되어야 하는가? 겨울 중에는 꼼짝도 할 수 없냔 말일세.”

함주항에 면한 여각, 「동북정(東北停)」으로 들어서던 이이는 옆에서 쫓아오던 짐꾼에게 물었다.

함주 토박이인 이 짐꾼은 방언이 심했지만, 어느 정도는 하는 말을 알아들을 만하긴 했다.

“고조, 아, 선핀(船便)은 겨울엔 아니 가우다. 다만 종종 날씨가 나쁘지 아니 하면 상자(商者)들이 말을 매여다가 두문강 물길 넘어서 북해으 가는 일도 있슴다. 그거이 쫓아 가시우며는 혹여 함께 가 줄는지 모르겠슴다.”

짐꾼의 말에 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각 문을 들어서면서 그는 함주에 들어와 여각을 알아봐 주고, 짐을 옮겨다 준 짐꾼에게 은화 한 닢을 심부름 값으로 주어 보냈다.

2층으로 된 조금은 낡은 여각은 1층은 구들장이 놓인 온돌방이고, 2층은 창고와 함께 화로(火爐)나, 바닥을 높여 구들장을 놓고 난방하는 객실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초면인 사람들 너댓 명이 한 방에 유숙하는 것은 기본이고, 2층보다는 1층의 값이 훨씬 높았다.

그래도 사대부에다가, 요동에서 관직을 살았던 이이는 돈이 아쉬운 형편은 아니었다. 1층의 온돌방을, 그것도 혼자 쓰는 방으로 잡고서 몸을 온돌에 누였다.

하루 숙박료만 은화 두 닢이었다. 그것도 통보로 내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가치가 비교적 잘 보장되는 요동폐로 냈을 때 이야기였다. 그래도 뜨뜻한 기운이 바닥에서 올라오니 그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렇잖아도 추운 북쪽 바람에 시달릴 때면, 이렇게 뜨뜻한 구들장이 그립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 함주까지 그가 오게 된 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

심양에서 학교를 나오고, 그곳에서 관직을 살며 어린 나이에 심왕 김유의 총애를 받아, 심왕가의 선원을 밝히는 일을 하고, 《선원록》을 편찬했을 뿐 아니라, 선왕들의 추존시호까지 잡아 올렸었다.

예악협판(禮樂協辦)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도 일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잘해냈으니, 오죽하면 심왕이, 세자의 시강(侍講)을 이이에게 맡길 정도였다.

한데 그때, 시가가 있는 파주로 들어가 몸을 요양하던 어머니 사임당이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이는 그 길로 관직을 내려놓고 강릉으로 말을 달렸다.

그녀는 보통 어머니가 아니었다. 시화(詩畵)에 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이를 직접 교육시키다시피 했을 정도로 문장(文章)과 학문에도 능했다.

격물학에도 관심이 있어 직접 집에서 호박의 종자를 개량하기도 하고, 비누를 만들어다가 쓰기도 했을 정도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도 엄청나, 이이는 그 어머니 품에서 키워진 것이라 해도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이로서는 당장 관직에서 출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3년 시묘(侍墓)는커녕, 3달간의 시묘도 번잡한 예속이라 하여 장례를 치르기에 바쁜 일인데, 이이는 자청해서 3년의 시묘를 살겠다고 어머니의 장지에서 숙식을 했다.

그 이후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속세와 연을 끊은 아버지 이원수를 한동안 모시려 했으나, 이원수가 결국 재혼을 결심하고 새어머니를 들이자, 이이는 다시 집을 나와서 행장을 꾸렸다.

한동안 명승을 둘러보며 마음을 추스르려는 생각에서였다.

몇 해 전에는 도산에 가서 이황을 방문하고, 집안 간에 약속이 되어 있던 대로, 성주부윤(星州府尹)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가약도 맺었다.

그쯤 되어 이이는 다시 요동으로 돌아가 관직생활을 계속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세상을 떠났다. 다시 아버지의 삼년 시묘를 마치고 나서 이이는 이제야 요동으로 돌아가 볼 생각으로 짐을 꾸려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가려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집에 남겨둔 처자(妻子)의 걱정도 그러하거니와, 풍문에 들려오는 요동의 번잡한 상황 또한 그랬다.

미묘하게 있던 갈등이 이제는 심왕부를 아주 뒤흔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때문에 결정을 미루고서 이이는 요동으로 가던 발걸음을 틀어 목적 없이 함주로 발길을 옮겼다.

가을에는 금강산에서 잠시 머물며 불경(佛經)도 공부를 좀 하고, 겨울이 되어서 이 동북의 고읍(古邑)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이는 내친김에 북해도독부까지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곳이니 만큼 분명히 깨우칠 것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보통의 유생들에게 있어서 북해도독부는 일 년의 반은 겨울이고, 눈발이 흩날리는 산악지대를 거친 엽사들이 짐승을 사냥하고 돌아다니는 곳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이이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영안부의 읍성도 한 번 둘러보고, 인근의 진보(鎭堡)도 두루 살피며 북해를 오고 가는 배도 한 번 타볼 생각이었다.

“때마침 보름 만에 영안부로 가는 대상단이 내일 출발합니다. 요동폐 닷 냥만 주시면, 가시는 길에 숙식을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다음 날, 여각 객주에게 수소문해서 함주 시전통에 나가 알아보았더니, 다행히도 영안부로 들어가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이이는 기왕 이렇게 기회가 닿은 것,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하고 이들과 함께 영안부로 가는 길에 몸을 실었다.

함주까지 올 때처럼, 그나마 편한 역마차에 올라 빠르게 가도를 타고 오는 편안한 여행은 아니었다.

하루에 반나절 이상을 말안장 위에 올라서 험지(險地)를 오가는 성긴 길을 달리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벅지 안쪽이 헐고, 찬바람에 몸이 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노련한 대상들 사이에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이는 어서 영안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여행길을 버텨냈다.

일행이 영안부에 도달한 것은, 거의 함주부를 출발해서 보름이 지나서였다.

두만강을 넘는 길에 녹둔도(鹿屯島)에 주둔한 병졸들이 대상을 잡아 세우고 호패를 확인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여름철에는 심심찮게 보이는 산적이나 야적(野賊)들도 겨울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함주도 겨울이 모질었지만, 이곳 영안은 그 추위가 한층 더했다.

처음 영안에 도착해 항구에 나가 보았더니, 영안부 항구가 위치한 만(灣)의 입구에 있는 늑부도(勒富島)까지 살얼음이 보얗게 바다 위로 얼어 있었다.

큰 배는 얼지 않는 육지와 떨어진 바닷가에 닻을 내려 두고 있었고, 작은 배는 육지로 끌려 올라가 있었다.

동지섣달에는 영안부에는 배가 일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으리, 대도독께서 찾으십니다요.”

영안부의 유명한 여각, 「북해여숙(北海旅宿)」에서 시부를 써주고 한 줌과도 같은 숫자의 지방 양반들과 교류를 하며 겨울을 보내던 이이에게, 나졸 한 명이 찾아와 북해도독부의 대도독이 자신을 찾는다고 알려왔다.

요동에서 말고 별다른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이이의 이름은 이미 내지팔도를 비롯해 제국 전역에서 유명했었다.

우선 흔치 않게 부모의 상을 모두 3년 시묘를 한 효자였으며, 심양대학을 졸업한 이후, 요동과 내지에서 도합 9번의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그였다.

또한 이미 젊은 나이임에도 문장이 탁월하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그에게 글귀를 청탁하는 사람이 시묘 중에도 문턱에 그득할 정도였다.

그러한 이이가 자기가 감독하는 영안부중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북해대도독 천중명(千重名) 또한 그를 초청해 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천중명은 본래 그 가문이 기해동정 이래로 활약하여 무반(武班)에서 이름 높은 천안석의 후손이었다.

바로 천안석이 김종서의 뒤를 이어 이곳 북해도독부의 전신인 영진도독부의 기초를 쌓고, 원대의 영명성의 옛 성터를 고쳐 영명진을 설치하고, 지금의 영안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으니, 그 후손인 천중명이 이곳에 부임한 것은 그러한 내력과 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해도독부는 본래 북방의 개활지와 마주한 춥고 배고픈 땅이라, 모피 외에는 딱히 산물도 없었고, 때문에 지방관들은 이곳에 부임하는 것을 꺼려 했다.

그러나 천중명은 고조부 천안석의 발자취를 쫓아 이곳 북해도독부까지 들어와 이곳의 대도독으로 4년째 머무르고 있는 데다가, 그동안 선정까지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인품의 인물이 초대한 것이니 만큼, 이이 또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영안만이 내려다보이는 영명곶(永明串) 위의 해송정(海松停)에서 따뜻하게 화로를 틔워 놓고, 따뜻한 청주를 나누면서 천중명과 이이는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 이름난 선비께서 어찌 이 한겨울에 이 북방의 외지까지 걸음을 하셨단 말이오.”

“북쪽 바다의 검은 파도와 살을 에는 삭풍(朔風)에 정신 한 번 번쩍 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술이 들어가, 얼굴이 불콰해져 볼을 씰룩이는 이이의 농에 천중명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이는 군자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허례허식에 매여 있는 이는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웃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었다.

“하면, 언제까지 머무르실 생각이오?”

“글쎄요. 좀 더 있어 보아야겠지요. 요동의 사정이 시끄러워 바로 그리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흠……. 그렇다면 혹, 귀족 자제의 글 선생을 하며 조용히 심신을 추스를 생각은 없으시오? 뭐 딱히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고, 지극히 대접할 터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오.”

천중명의 말에 이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천중명의 부탁은 이이쯤 되는 재사(才士)에게는 조금 무례한 것이기도 했다.

한때 심왕 세자의 시독학사(侍讀學士)로 있으며 세자를 가르쳤던 이이였다.

그러나 천중명도 이이도 북해의 관습대로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적고, 그중에서도 학문을 가르칠 만한 뛰어난 양반이 거의 없는 이곳 북해에서, 이이 같이 뛰어난 선비가 잠시만이라도 머무른다면 심왕가보다 더한 대접이라도 아낌없이 할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잠시 머물면서도 정을 주고받고 서로가 베푸는 것이 북해의 인정(人情)이었다. 체면과 허식(虛飾)보다는, 끈끈한 유대감이 이곳의 정서였다.

“어떤 집안의 자제분 되십니까?”

“율곡 선생도 잘 아는 집안이올시다. 모령현남의 손주가 글 선생이 필요하여 사람을 구하고 있소.”

모령현남의 손자라면, 바로 다름 아닌 누르하치였다. 심왕에게 목해간이라는 이름을 받기도 했던, 어린아이는 이제 아홉 살의 꼬마로 자라나 있었다.

그동안 여진족의 관습대로 어린아이에게는 공부를 따로 시키지 않았던 할아버지 기오창가였으나, 아버지인 탁시가 아들에게도 학문을 가르쳐야겠다고 판단하여 글 선생을 구하고 있던 차였다.

“목씨장입니까.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름 사연이 있다면 사연이 있는 집안이었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가 바로 사실상 중신을 서서, 정빈 목씨를 그 집안에서 심왕가로 모셔왔었다. 더군다나 자신도 요동에서 관직에 몸담았으니, 어떻게든 끈을 닿자면 목씨장과 전혀 연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대학자 율곡 이이가 목씨장에서 2년간,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를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1566년

선정(宣定) 원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황성부.

건양제가 승하한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복열(伏熱)에 시달리던 황제는 결국 수라도 끊고 시름시름 앓다가 유명을 달리 하고야 말았다.

그해 봄에 낙마(落馬)한 탓이라고 의관은 이야기했다.

건양제의 초휘(初諱)는 제(霽), 아명(兒名)은 성신(誠信), 자가 관형(寬亨), 호는 도연(淘淵)으로, 가붕할 때 그 보령(寶齡) 마흔일곱이었으니, 때 이른 죽음이었다.

황권의 강화를 추진했던 아버지 경종 소흥제의 죽음과 함께 갑작스레 다섯 살의 나이에 황제에 즉위하여, 척신들의 그늘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 부패한 신료들을 조정에서 걷어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도(皇道)의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것이었다.

내각에서는 황급히 국장(國葬)을 선포하고, 인왕산 아래 황실 능역에다가 장례를 치르고, 그 시호를 「성조범해천안숙돈경장무태신위인강태효예황제(成祖範海天安肅敦慶章武泰神威仁康太孝叡皇帝)」로 올리니 곧 성조(成祖) 건양제(建陽帝), 혹은 예황제(叡皇帝)이다.

다행히 태자(太子) 견(鵑)이 장성하여 보위를 물려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태자 견이 스물여섯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듬해부터 새 연호인 「선정(宣定)」을 선포하니, 선정 연간의 이 해에 막이 오른 것이었다. 서력으로 1566년이었다.

새로이 보위에 오른 선정제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게 활력이 있고, 정치에 지대하게 관심이 많은 황제였다.

그는 타고난 추진력으로 마치 할아버지 경종 소흥제처럼 구제도를 혁파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들을 깔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아버지 건양제는 개혁을 갈망했지만 결국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여전히 발흥해 있던 척신(戚臣)의 세력들은 내각에서 일소되지 않고 있었다.

“지난 세월에 법도가 많이 무너져, 임거정 같은 모리잡배가 도적이 되어 경기와 서해(西海, 황해도)를 소란스럽게 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하여 제각기 배를 타고 외지로 떠나거나, 혹여는 굶주려 원성이 자자하니, 이 모든 것이 내각대신들이 천덕(天德)을 모르고 제각기 배를 불리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짐은 생각하노라. 이에 내각에 자숙(自肅)을 유(諭)하니, 대신들은 한 달간 궐 안에 출입을 하지 말고, 관청에 등청하지 말 것이며, 또한 기름진 고기와 구첩반상을 끊고, 보리와 잣죽으로 식사를 대용할 것이니, 혹여 이를 어기고 감히 사치를 부리거나 음주하여 즐거이 떠드는 자들은 앞으로 누누이 근심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선포한 것은, 내각에 자숙을 요구한 것이었다. 황제가 이를 강제할 방법은 마땅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전횡을 일삼는 내각 대신들이라 하더라도, 새 황제가 직접 칙유를 내린 마당에 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상께서 아주 단단히 마음을 잡수신 모양이네.”

“외부대신의 집으로 들어가던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일절 딱 끊겼다는 것을 보아하니, 대신들도 감히 어깃장을 놓지는 못하는 모양일세.”

황성부의 부민들은 길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러한 말들을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내각 시책에 따라 그동안 내각을 비판하는 글을 찍어 내지 못하고 있던 신보(新報)들도 새 황제의 즉위와 함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비판하고 파당정치의 문제를 논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는데, 도성의 분위기는 새 황제의 즉위와 함께 마치 온갖 문제가 사라지고 태평성대가 도래할 것 같은 기묘한 기대감과 함께하고 있었다.

하나 새로운 황제의 포고에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내각 재상의 자리를 십 년째 꿰차고 있던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그 담 큰 이였다.

윤원형은 원래 전전대의 황제인 경종 소흥제의 두 번째 황후인 문정익황후(文定翼皇后)의 동생으로, 경애학사를 졸업한 뒤에 성적이 좋지 않고, 과거에도 낙방했음에도 내각의 배려로 말직을 얻어 벼슬길에 올랐다.

한때 그 자질이 문제되어 당대의 권신이었던 김안로(金安老)에 의하여 파직되고 유배되었다가,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복권되어 관직을 되찾았다.

경종 소흥제의 사후, 누이인 문정익황후의 아들인 성조 건양제가 다섯의 나이에 즉위를 하자, 누이와 함께 황제에게 입김을 불어넣으며 권력의 확대를 도모했었다.

다행히 당시 내각이 명재상인 임승준을 중심으로 재편됨에 따라 윤원형은 사사로이 정치를 농단할 수 없었으나 임승준 사후, 권력이 공백화 된 틈을 타 누이인 문정익황후의 사주를 받고 권력 장악에 나서서 윤임(尹任)을 몰아내고, 이기(李ヒ), 정순붕(鄭順朋), 임백령(林百齡) 등과 결탁하여 내각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경종 건양제가 약관을 넘겨 정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황제를 겁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유해 가면서 정권을 내어 주지 않고, 종래에는 내각의 여러 관직을 겸작 해 가면서 이기와 함께 정권을 농단했던 것이다.

권력을 거의 장악한 윤원형은 누이를 움직여 작위까지 받아, 그 개봉(改封)된 작위가 마땅한 공적이 없음에도 서원후(瑞原侯)라는 높은 직첩에 이르렀다.

윤원형은 공작(公爵)에 봉해지기를 바랐으나, 그나마도 누이인 문정익황후가 만류하여 후작으로 낮춘 것이었다.

작위를 받아 추밀원(樞密院)에까지 손을 뻗힌 윤원형은 훈구당이나 사림당을 막론하고 사실상의 당파정치를 문 닫게 한 다음, 양 당에 모두 자기 사람을 심어 놓고 마음에 드는 이들을 내각 대신에 돌려 가며 앉히는 횡포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 권세가 드높아지자 윤원형의 앞으로 뇌물이 수도 없이 쌓이고, 황성부 내에 집이 스무 채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혹자는 당대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이 모두 윤원형의 손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로 홀로 권력을 장악한 이는 세훈과 현도의 시대 이래에 제국 내에는 윤원형이 최초라 불릴 정도였다.

임꺽정 또한 한창 준동할 무렵에 이 윤원형을 척살하고자 마음먹고 황성부에 잠입한 일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윤원형의 횡포에 대해 백성들의 미움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선대 황제인 성조 건양제가 윤원형을 제약하려 가진 수를 다 동원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있던 신료들이 윤원형을 비방하고 견제하였기에, 그나마 조정이 온건히 건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윤원형은 재상의 자리에 앉아서 탐욕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새 황제 또한 자신의 손아래라 생각하고 깔보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고기반찬에 술을 즐기며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것이다.

황성부 내의 모든 대신들 중, 재상 윤원형만이 홀로이 황제의 칙유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상소를 받은 선정제는 분노에 휩싸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윤원형이 자신을 간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 새 황제는 윤원형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만만치 않았다.

때마침 윤원형의 권력의 근원이었던 문정익황후가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때가 온 것을 확인하고, 훈구당의 원로인 이준경(李浚慶)과 중립적 위치에 서 있던 윤두수(尹斗壽)을 불러다가 윤원형을 몰아낼 계책을 논의했다.

이 과정은 실로 그 할아버지인 경종 소흥제가 조광조를 몰아낼 때 썼던 친위 쿠데타의 계책이었으나, 다만 이번에는 민심의 화살 또한 윤원형의 제거를 바라고 있다는 점만 달랐다.

아버지 성조 건양제가 사림당과 발을 맞추어 윤원형을 몰아내려 했으나, 이황 같은 이들이 삼가 벼슬을 마다하면서 등청하지 않았던 것을 지켜보아 왔던 선정제는, 훈구당을 중용할 생각을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결국 윤두수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곧 바로 즉시 친위내각을 구성한 선정제는 이준경을 내각 재상의 자리에 앉히고, 윤두수를 내부대신, 허엽을 외부대신 등에 보임시켜 정국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제 난정을 정리하고 정국을 일신하였으니, 대신들은 짐을 보위하여 마땅히 태평성세를 일으킬 수 있도록 보좌할지어다.”

젊은 황제는 의기양양했다.

차마 할머니의 동생으로 피를 나눈 윤원형에게 사약을 내릴 수는 없어, 남해의 절도(絶島,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내긴 했다.

그러나 윤원형에 부화뇌동한 간신들을 모두 대역죄로 황제의 친림법정에 세워 친히 죽음을 명했고, 이렇게 죽인 이들이 거의 백여 명에 다다랐다. 완전한 숙청을 끝내고, 20대의 혈기로 황제는 자신의 친위반정을 도운 윤두수나 이준경 같은 이들을 이제 경계하면서 내각에 입김을 불어넣으려 했다.

“폐하. 국초로부터 나라의 일은 관리들이 논의하여 처결하였고, 황제는 이를 감리하여 신하들이 어긋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법례였나이다. 황상 폐하께서 직접 모든 일을 챙기려 하시면, 감히 신하들이 폐하께서 주재하는 일에만 구름처럼 몰려다니고, 보이지 않는 일은 거들떠 보지 않아 분명히 살피지 못하는 일이 태산같이 쌓일 터이니, 이것은 백성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기울게 할 것입니다. 숙고하여 결정하여 주시옵소서.”

황제가 대권을 잡고 흔들려 하자 영남학파의 영향을 받은 유생들 중에서도 가장 강고하게 성리학을 사수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학자 중 하나인 기대승(奇大升)이 기함을 토했다.

그는 바로 득달같이 상경해서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서 사흘 밤낮을 엎드려 진언했다.

선정제는 기대승이 고향인 전라도 나주에서부터 짚신을 신고 쫓아와 광화문 앞에서 머리를 찧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를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짐이 한 가지만 묻겠노라. 그대가 이름난 선비라고 하니 어렵지 않게 대답하겠지. 그대는 나 보고 신하들과 대권을 나누어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신하들에게 대권을 주어서 나라가 잘 굴러갔던가? 그 제도를 악용해 가까이는 윤형원 같은 탐욕스러운 자들부터, 멀리는 김세훈 같은 이가 황권을 농락했도다. 그 연혁이 거의 누대에 걸쳐서 백 수십 년에 이르니, 그동안 감히 이를 바로잡고자 나서는 이가 없고, 조종의 열위에는 원통함만이 사무쳐 있도다. 너는 지금 나에게 열선조의 위명을 더럽히라고 말하는 것인가?”

기대승의 의견을 듣겠다고 부른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를 모욕 주어 쫓아내려고 황제는 그를 궐 안으로 들인 것이었다.

선정제의 행동은 그저 젊은 패기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욕심 많은 신하들이 정권을 농단하여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성명왕 김세훈은 비록 신하로서 분에 넘치는 권력을 가지긴 하였으나, 제국의 초석을 닦고 황가를 호위한 명 재상이었나이다. 또한 윤원형 같은 이는 극히 예외로, 가까이 임승준 같은 재상이 나서 나라를 바로 이끌고자 하였고, 예악을 아끼는 조광조 같은 인물도 나라에 있었나이다. 내각에 권한이 주어져서 발생하는 폐단보다도, 그렇지 않아 생기는 폐단이 더 많으므로, 폐하께서는 부디 숙려하시어 옛 제도를 복원하소서.”

기대승의 말에 황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용포를 휘적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기대승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후려쳤다.

거친 숨소리가 황제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대전에 입시하고 있는 내관들의 귓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쩍, 하는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울리고, 대전은 일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네가 이름난 유사라고 하여 짐이 이쯤에서 네 용렬한 입을 용서하겠노라. 짐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당장 황성부에서 행장을 싸서 네 초막으로 돌아가거라!”

기대승은 황제의 노기에 감히 진언을 더할 생각을 못하고, 황제의 지근거리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 병사들에게 끌려서 경복궁 밖으로 내쫓겼다.

황제에게 뺨을 얻어맞고 고향 길로 내려가는 기대승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는 차마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한강을 건너기 전, 마포에 이르러서 유서를 쓰고는 황궁을 향해 구배를 올리고는 스스로 자진하고야 말았다.

기대승이 목숨까지 끊어 가며 올린 진언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정제는 기대승이 자진했다는 소리에 그저 그의 유해를 고향에 보내어 잘 묻어주라고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기대승의 죽음이 가져온 여파는 엄청났다.

황성의 신보들이 조사(弔詞)를 써서 게재했다가 황제가 군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동원한 시위대 병사들에 의해 폐간되는 소동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기대승과 오랜 기간 교유를 가졌던 이황이 도산서원을 박차고 나와 황제에게 진언을 올리겠다고 황성부까지 올라왔으나, 입경(入京)을 허락받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황제의 친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선정제는 이참에, 황권의 위엄을 더욱 보여주겠노라며 경복궁을 중건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선정제는 칙령을 내렸다. 내각과의 협의 없이 칙령으로 꼭두각시로 앉혀 놓은 대신들에게 명하여 정부에서 발행하는 화폐인 통보(通寶)에 동을 잔뜩 섞어 찍어 내게 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황성부 조정에서 통보를 찍어낼 때, 순은에다가 동을 조금 섞어 찍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화폐 발행에 붙는 일종의 세금이었다.

비록 순도가 완전하지 않은 은화이지만 조정의 신용을 믿고 동이 섞였음에도 원래 가치대로 시장에서는 유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정제가 경복궁 중건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량 화폐를 잔뜩 찍어냄으로써, 일시적으로는 황제의 곳간에 돈이 가득 찼지만, 이내 신용은 붕괴되고 시장에서 통보의 유통이 경색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경쟁 화폐인 요동폐가 있는 상황에서 시장에서는 불안정한 통보를 유통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통보의 가치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선정제는 악화(惡貨)를 찍어내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더 찍어내어 손실을 만회하려 했다.

거기다가 내각의 군부대신에게 압력을 넣어 지방 진위대들을 상경하게 해 중건공사에 동원하니, 그들을 먹이기 위한 비용도 모두 국고에서 지출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이것은 결국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끔찍한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렇잖아도 신천은광의 개발로 인해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은의 양이 갑작스럽게 늘어나, 은의 가치가 폭락하고 있던 차였다. 예전에는 은화 한 냥으로 살 수 있던 물건이, 차츰 가격이 올라 근 수십 년 사이에 닷 냥의 가격까지 올라 있었다.

기본적으로 금은 너무 희소하고 가치가 높기에 유통에 편리하도록 은을 기축통화로 삼는 것이 이 시기의 세계적인 흐름이었다.

통보의 경우 대충 같은 무게의 금과 1:12대 1로 교환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금은 교환비가 1:12, 페르시아가 1:10, 인도가 1:14정도였으니 특별히 불안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악화를 찍어내면서 통보에 대한 신뢰도가 폭락해 통보의 금은 교환비가 1:150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내 곧 물가의 폭등을 가져왔다. 악화뿐만 아니라 기존에 유통되던 통보의 가치까지 폭락하면서 통보로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알거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더군다나 더 이상 같은 값으로 물건을 사올 수 없으니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황성부 조정은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채 몇 달 사이에 통보, 그중에서도 특히 선정제의 즉위 후에 찍어내 선정의 연호가 선명한 선정통보(宣定通寶)는 돌덩어리나 다름없는 가치가 되고 말았다.

상인들은 아무도 선정통보를 받지 않으려고 하였고, 그동안 가치가 잘 보전되고 있던 요동폐가 품귀 현상이 되면서 거의 1.2:1로 교환되었던 요동폐와 통보 사이의 교환 가치가 105:1까지 폭등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이 일련의 소동으로 배가 불러진 것은, 심왕부뿐이었다.

심왕은 황제가 요구하는 세폐는 가격이 잔뜩 떨어진 통보로 보내고, 나머지 돈을 고스란히 요동폐로 국고에 축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요동폐만이 가치를 보증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국 전역에서 급격히 화폐가 통보에서 요동폐로 대체되는 바람에, 사실상의 제국 전체의 경제를 조절할 수단이 황성부 조정에서 심양으로 넘겨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쯤이 되자, 선정제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자존심 때문에 아집을 부려 경복궁 중건을 마치고, 왕조 창업 이래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정궁을 황궁(皇宮)에 걸맞게 탈바꿈시키긴 했지만, 국고는 파탄이 나고, 민생의 원성은 들끓었다.

차라리 윤원형이 전횡을 부릴 때가 나았다는 벽서가 황성부중에 나붙을 정도가 되니, 황제는 그 어깨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대권(大權)을 환봉(還封)하노라.”

선정제는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몰린 것을 직감하고서는, 발을 빼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늘 주재해 왔던 어전회의를 이제 열지 않고, 국사를 내각에서 논하라고 명한 다음에, 「환봉대권(還封大權)」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짧은 단 네 글자의 칙령(勅令)을 내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황제는 빗발치는 백성들의 원성을 피해 2년간의 짧은 대권을 휘두르다 내전으로 물러 들어갔지만, 막대한 경제적 공황의 후유증은 오래간 지속되었다.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농촌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그간 부유함을 자랑해 왔던 성읍들까지도 제값에 곡물을 구하지 못해 굶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 눈치 빠른 대상(大商)들은 통보와 요동폐를 잘 굴려 환차익으로 큰 이득을 얻었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사농공상을 막론하고 큰 손실을 입고 휘청거렸다.

창해고금합명상사가 세워진 뒤로 유행하기 시작했던 고금상사(股金商事, 주식회사)들도 줄줄이 무너졌으며, 이로 인해 알거지가 되어 저자거리로 내몰린 이도 부지기수였다.

“이 모든 것이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황제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 참으로 성명왕의 앞일 내다보는 지재가 뛰어났구나.”

도산서원에서 이황은 기대승의 기일이 다가오자 향을 피워 제자를 추모하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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