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0장 준예밀물(俊乂密勿) (51/82)

제50장 준예밀물(俊乂密勿)

「이때에 동방에 걸출한 인재들이 마치 비온 뒤의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시대가 어지러우면 국난사충신(國亂思忠臣)이라고도 하였고, 가빈사현처, 국난사양상(家貧思賢妻國難思良相)이란 말도 있으니, 이 모두 시국이 어수선하면, 충직한 신하와 좋은 재상을 바라게 된다는 말이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곧, 세상이 영웅을 바라면, 영웅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일(林一), 《歷史의 英雄들을 回顧하며》

1570년

선정(宣定) 5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선정제의 등장과 함께 내지에서 벌어진 혼란상에서 한 발 비켜나긴 했으나, 요동의 정국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정제가 등장함과 동시에 황제의 누이에서 황제의 고모로 더욱 격이 높아진 중전은 심왕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에 더욱 골몰하기 시작했었다.

때마침 심왕 김유가 풍을 맞아 자리에 드러눕게 되는 바람에 중전의 정권 장악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진행되었다.

처음으로 노려진 것은 바로, 정빈 목씨였다. 그녀는 선정 원년에 갑자기 열독(熱毒)이 올라 자리에 눕더니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야 심왕 김유가 병을 얻으니,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근심을 얻어 죽고야 말았다는 식으로 에둘러졌지만, 심왕부 안에서는 중궁전이 정빈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궁내에서 찬바람 신세가 된 것이 바로, 정빈의 유일한 아들인 인양군 김율이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이었던 김율은 정치적 외풍을 피해 외가가 있는 모령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풍에서 몸을 간신히 회복하고 있던 부왕이 신경을 써 주지 못했다면, 궁중 내에 비호세력이 없는 인양군은 정치적 음모의 다음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여전히 요동의 통치 기구라 할 수 있는 도평의사사에는 중전을 견제하는 관료들이 득시글했지만, 공공연히 요동에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제국 전체에 황권을 투사하겠다고 작정하고 나오는 젊은 황제를 뒤에 업은 중전을 대놓고 견제할 수 있는 담이 큰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정지 작업을 마친 왕비는 그녀의 모든 정치력을 이제 스물둘이 된 젊은 세자에게 몰아주기 시작했다.

세자 김인이야말로 그녀의 희망이자 존재의 이유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세자가 몸이 병약하고 성품이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탐욕스럽지도 않았지만 패기도 없었고, 사람 낯을 가려서 주변에 모이는 인물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모후(母后)와 상의해서 결정할 정도였으니, 세자의 그릇에 대해 쑥덕이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모든 시선은 세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의 배에서 나온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예양대군 김민과 금양대군 김제는 세자에게 밀려 왕비의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예양대군과 금양대군이 세자의 위협이 될까 싶어, 궁밖에 나가서 살도록 했을 정도였다. 혹여, 세자가 왕위에 등극하기를 원하지 않는 무리들이 이들을 꾀어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만들까 두려웠던 것이다.

“너희는 오로지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만 하면 되느니라. 공부도 과하게 하지 말 것이며, 무예도 지나치게 닦지 말고, 왕자로서의 본분만 다하도록 해라.”

예양대군과 금양대군에게 중전이 하는 말은 늘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질책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러나 예양대군과 금양대군은 날이 지나 나이를 먹어 갈수록 형인 세자보다 더 나은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양대군은 특히 머리가 명석했으며, 금양대군은 무예에 뛰어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양대군은 심양대학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는 척 어머니의 시선을 피했으며, 금양대군은 계절마다 북륙으로 수렵을 떠난다는 핑계로 심양을 나가 있으면서 궁중의 어지러운 정세에 신경을 끊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전의 전횡은 몇 해를 가지 못했다.

심왕 김유가 풍에서 몸을 회복해 자리에서 일어나고 때마침 내지에서는 선정제가 실정으로 인해 대권을 환봉하고 칩거에 들어감으로 인해, 심양에서도 중전의 전횡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중전, 이쯤에서 그만두고 좀 물러나 있으시오.”

기력을 회복했다지만, 심왕 김유의 눈빛은 예전 같지는 않았다. 본래도 예광이 번득거리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저 속 모를 눈동자로 중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이제 그만 종통을 어지럽히지 말고 조용히 처신하고 있으라는 소리였다.

내지에서도 황권이 급격히 날개를 잃고 추락하고 있는 마당에 거기에 기대고 있는 그녀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았다.

“뜻대로 하십시오.”

힘이 죄 빠진 것은 중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쉰을 넘은 나이에 남은 것은 표독함뿐이었지만, 오로지 집념과 욕망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을 뿐, 그녀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모령에 머물고 있는 율곡을 왕경(王京)으로 불러오고, 그와 함께 인양군을 불러들이도록 하여라.”

사실상 여왕 노릇을 하고 있던 중전에게서 옥좌를 되찾은 심왕 김유는, 용상에 앉자마자 다시 더없이 아끼던 신하와 아들을 불러들였다.

율곡 이이가 심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머물 생각으로 건너 갔던 북해에서, 그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체제하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터진 건양제의 가붕과 뒤이은 선정제의 전횡, 그와 함께 준동한 중전 때문에 벌어진 심양의 급변하는 정세에, 이이는 몸을 추스르고서 모령에서 누르하치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고 있게 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인양군까지 쫓기듯이 모령으로 오게 되니 이이는 이 두 아이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심양에 들어가게 된다면 온갖 정쟁에 노출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 상황이 오래가지 않고, 심왕 김유가 왕비를 중궁전으로 쫓아내고 그들을 불러 주니, 이이로서는 감읍하고 상경할 채비를 했다.

모령에서 출발해서 심양에 도달하기까지는 채 스무 날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금 존안을 뵙게 되니 감개무량하기 그지없나이다. 전하.”

이이는 태안궁에 입궐하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심왕 김유에게 고했다. 심왕 또한 이이를 보고 마음이 먹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간 여러 해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이를 잊지 않고 있던 심왕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몸져누워 있는 동안, 모령에서 인양군을 돌봐준 것이 바로 이이었다.

“잘 와주었네. 율곡.”

심왕은 구구절절 소회를 늘어놓지 않았다. 다만 말 몇 마디로도 그의 모든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지기를 만난 마냥 감회에 젖어 있었다.

“인양군도 왔느냐?”

“소자, 아바마마를 뵙나이다.”

3년가량 심양에서 떠나 객지 생활을 한 인양군은 낯선 아버지의 용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예를 표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아버지와도 떨어져 어린 나이에 먼 곳에 맡겨져 있던 인양군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심양과 이곳의 사람들 모두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심왕은 인양군을 곁으로 불러다가, 그 손을 꼭 쥐며 말없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음 날, 심왕은 전격적으로 이이를 최고 관직인 도평의정에 앉히고, 정력적으로 그간의 어지러웠던 정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소동 속에서 황성부, 혹은 중전과 끈이 닿아 출세했던 이들은 모두 관직을 삭탈당하고 관복을 벗어야 했다. 더러는 일부가 관직에 남기도 했지만 모두 더 이상 심왕의 의지를 거슬러서 행동할 수 없었다.

심왕 김유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에는 바로 선정제의 난행으로 인하여 제국의 공용화폐인 통보의 가치가 급락하고, 요동폐가 급격히 가치가 올라간 데에 있었다.

김유는 몸져누워 있던 와중에도 요동폐를 발행하는 은행국(銀行局)만큼은 직접 챙겨 왔었다.

때문에 이번의 사태를 통해 막대하게 축적된 심왕부의 곳간의 자물쇠는 심왕 김유가 단단히 채워두고 열쇠를 혼자 틀어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이 곳간을 열고 죄는 것이 심왕의 의사에 달려 있으므로, 심왕의 전제(專制)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선정제가 정치를 사실상 포기하고 칩거를 선언한 데다가, 황성부 조정에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심왕부에게 곳간을 열어 차관(借款)이라도 내어주던가, 세폐를 올려달라고 한 달 걸러 한 번 사람을 보내 사정하는 마당이니, 심왕 김유의 위세가 한 것 등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마당에 황성부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워 왔던 중궁전에서는 더 이상 무슨 소리를 낼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세자를 폐하는 문제였다.

“세자가 대통을 이을 그릇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저잣거리에 들끓는다지?”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심왕 자신이었다. 소문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바로 심왕 스스로가 세자를 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들은 신료들은 제각기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왕이 병상에서 일어난 뒤로 후계구도는 그렇잖아도 급변하고 있었다. 중전이 세자를 지나치게 품에 안고 도는 바람에, 똑같이 중전의 배에서 났음에도 몸을 사려 왔던 예양대군과 금양대군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심왕의 총애를 받았던 정빈의 소생인 인양군까지 심양에 복귀하면서 심양의 관리들은 제각기 어느 줄에 설 것인지 그렇잖아도 심계(心計)를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심왕까지 세자를 폐하는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

하나 세자를 폐하고 어떤 대군을 세자에 앉히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은 심왕이 어떤 심산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알아야 했다.

“제신들은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나 동궁이 학문에도 재주가 없고, 무예는 더더욱 그러며, 하다못해 잡기도 없으니, 과연 심왕의 자리를 이어서 선위의 덕업에 누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과인은 염려스럽다.”

심왕은 세자를 아들로 보기보다 이제는 골칫덩어리로 보고 있었다.

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는 말은 곧, 중전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는 말과 같았다. 애초에 정을 주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장남이라고 하나, 그 능력과 그릇은 네 아들들 중에서 가장 모자랐고, 나이를 먹고도 제 어미의 치맛자락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는 놈이었다.

“전하. 하오나 장자 세습은 국본의 원칙이라, 함부로 뒤흔들 수 없는 것이나이다. 부디 세자 저하에게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의외로 세자를 비호하고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요동파 대신들의 주장격이었던 노신 한부겸이었다.

그는 늘 중전과는 대립되는 의견을 내다가 결국 심왕이 쓰러진 사이에 중전에 의해 정계에서 물러났던 인물이었다.

심왕이 돌아온 뒤에 왕사(王師)라는 원로의 직함을 얻어 조정에 돌아온 그였으니, 심왕의 심기를 거스르며 세자를 비호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왕사는 과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게요? 나는 아직 세자를 폐하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소.”

심왕은 불편한 심중을 에둘러 표현했다. 한부겸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고, 공손히 예를 표하고 제 자리로 물러갔다.

“세자를 폐하는 것은 논하지 않겠으나, 언제고 왕자들 중 세자보다 걸출한 용재(庸才)가 있으면, 내 왕위를 습봉하는 문제를 다시 논하겠으니 대신들은 그리 알고 있으라.”

심왕의 말에 대신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상 후계 구도에 줄 서기를 시켜 신료들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거기에 더불어서 마음에 드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모든 계책이 한 데 들어 있었다. 심왕도 알고, 신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부겸이 세자를 폐하는 문제를 반대한 것도 사실상 신권의 약화를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그간 정권을 장악하는데 고초를 겪었던 심왕은 이제 기회가 온 이상,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심왕가의 왕위 계승을 놓고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1571년

선정(宣定) 6년 계추(季秋)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백하보(栢河堡).

이제 막 가을로 접어들었을 뿐인데도, 북해의 바람은 차갑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북해도독부의 수부인 영안부에서 족히 이천 리는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 해안가로 쏟아지는 물줄기와 마주한 협곡(峽谷)에 조그마한 요새인 백하보가 있었다.

이순신(李舜臣)은 이제 막 그 백하보에 부임한 참이었다.

목포의 해군상무관을 졸업하여 임관하고, 참위(參尉)의 계급을 수여받은 직후, 그는 바로 동북전단(東北戰團) 예하의 북해전대(北海戰隊)로 예속되었다.

북해전대의 전신은 1450년에 창설된 영진전대로, 영진도독부가 북해도독부로 개칭 되면서 덩달아 전대의 이름도 북해전대로 바뀌었다.

독립전단인 동북전단 예하의 전대급 부대라고는 하나, 이 북해전대는 실상 교관선을 개조한 포선(砲船) 세 척과 판옥선 일곱 척, 무기와 곡량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 열네 척이 전부인 조야 한 부대였다.

사실상 그 임무는 전투에 있지 않았고, 험난한 육로 대신에 바닷길을 따라 해안가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북해도독부의 여러 진(鎭)과 보(堡)를 오고 가며 육군 소속인 북해군(北海軍) 병력의 병참(兵站) 노릇을 해주는 것이었다.

북해군 또한 예전 함주 주둔의 제16진위대의 예하에 영진분견대로 편성되어 있던 것을 북해도독부가 확장함에 따라 독자 병력의 편성이 요구되어 북해군을 창설하고, 제1, 2보병대와 제1기병대, 그리고 제1포병대의 네 부대를 편성하긴 하였으나, 총 병력이 2만을 조금 넘기는 조야한 규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안부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이런 주력부대 외에도 각 진과 보로 나가 있는 수백 명 단위의 자잘한 분견대들이 수십 부대가 있었고, 이들은 북해도독부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게 해 주는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인구가 희박하고 지형이 험할 뿐더러, 겨울이 길고 매서운 이 북해도독부의 관할 지역은 사실상 국경(國境)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군현(郡縣)이 설치되어 영역을 가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안부와 두만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는 군읍(郡邑)도 설치되고, 인구도 늘어 내지나 요동에 비해서 크게 다르지 않게 다스려지고 있었지만, 영안부에서 삼백 리만 벗어나도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여전히 제국에 복속하지 않은 해서여진들이 그 일대를 떠돌고 있을 뿐더러, 그 외에도 여러 퉁구스계 부족들이 산악지대에 제각기 할거하고 있었다.

북해도독부는 모피무역과 여름에 열리는 바닷길을 관리하고, 주변의 토착 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해안가를 중심으로 진과 보를 설치하고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이러한 요새에는 민간인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점과 선으로 된 통치 체계가 북해도독부의 특징이었고, 개척된 역사가 짧은 신대륙의 영주도독부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국경선을 긋고 경계를 확정하며 국적을 구분하는 일은 적어도, 북해도독부에서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진과 보는 내륙 깊숙이 설치되었다가 다시 후방으로 물리기 일쑤였고, 해안가의 요지들만이 장기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이순신이 배속받은 해군 북해전대의 임무는 바로 해안을 따라 장기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몇몇 진과 보에 군량의 보급을 원활하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덤으로 종종 고혈도나 북방의 열도(列島)로 순시를 나가기도 했는데, 가을이 오면 뱃길이 닫힐 때까지 먼 항해는 자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순신은 북해전대의 군참계(軍站係)에 발령받아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세 요새인, 특림진(特林鎭), 다구함보(多九含堡), 그리고 백하보의 보급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조운선 두 척이 배속되었고, 늦여름에 특림진부터 보급을 마친 뒤에, 가을에는 백하보에 보급을 하고, 겨우내 그곳에서 머물렀다가 봄에 영안부로 복귀하도록 되어 있었다.

겨울철에 긴급하게 보급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이순신은 백하보에 머물러 있다가 물자를 싣고 육로를 통해서라도 다구함보나 특림진에 군참을 보내야 했다.

사실 이런 곳에서 복무하는 것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북방의 야지에서 겨우내 추위와 씨름하며 고립된 주둔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청운의 꿈을 안고 해군상무관에 들어간 이들 중에, 누가 이렇게 멋도 없고 가혹하기 만한 생활을 상상했겠는가. 적어도 남양(南洋)의 바다를 누비며 해적들과 싸우는 생활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보급이 왔다!”

이순신이 이끌고 온 조운선 두 척이 백하보의 조악한 선창가에 다다르자, 목책으로 둘러쳐 진 막사 안에서 바닷바람에 얼굴이 벌겋게 익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두꺼운 옷 위로 엽사들이 쓰는 것과 같은 보총을 어깨에 둘로 메고 있는 병사들은, 성긴 수염과 사나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더러는 범죄를 저질러 징역 대신에 이곳에서 군역을 지러 오기도 할 정도로, 오지중의 오지인 백하보였다.

이들에 비하면 풋내기나 다름없는 북해의 해군들은 혹여 이들과 시비가 붙을까 조심스러워하며 배에 실려 있는 보급품을 선창에 내리고 있었다.

“이거, 못 보던 얼굴인데? 이번 보급의 책임자요?”

보급품을 살펴보며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제치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지휘관 한 명이 뱃전으로 다가왔다. 계급장을 보니 부위(副尉)였다. 이순신은 간단히 경례를 올리고서는 관등과 성명을 댔다.

“예. 이번에 막 북해전대의 보급계로 발령받은 참위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보급을 마친 뒤 겨우내 이곳 백하보에 머물라 명받았습니다.”

“호, 반갑소. 어차피 여기서 계급 하나 차이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거니, 나한테 너무 예를 차릴 필요는 없소. 나는 신립이라 하오. 지난해에 부위의 계급장을 달고 이곳 백하보의 권관으로 부임해 왔소. 여기서 겨울을 한 번 났지.”

신립(申砬)은 이 백하보의 권관(權管), 즉 수장(守將)이었다.

보통 백 명에서 5백여 명이 주둔하는 보(堡)의 권관은 참위(參尉)가, 3백여 명에서 천 명 사이의 병력이 주둔하는 진(鎭)의 권관은 부위(副尉)가 맡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렇게 북방의 외진 곳에 위치해 그 무게가 더한 곳에는 이례적으로 보의 권관으로도 부위가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립이 바로 그런 예였다.

“겨울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번 있어 보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하실 게요. 그렇게 나쁘진 않소.”

신립은 이순신의 말에 씩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도 올해 겨울을 나라고 보내준 보급품은 그다지 적지는 않았다. 쌀에는 온갖 잡곡이 뒤섞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양은 부족할 정도는 아니었고, 전에 없던 옷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자체적으로 수렵 활동을 해서 북방의 추위를 이길 가죽옷을 만들어 입고 있는 이곳 사정에 비추어 볼 때, 한 겹이라도 더 대어 입을 수 있는 옷감을 보내 준 것은 가장 고마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술까지 보내주었으니 백하보의 병졸들은 신나서 야단법석이었다.

“이 참위.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영안부에서 이렇게 옷감에 술까지 보냈답디까?”

작년에 이곳에 도착했던 보급품의 양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신립이었다.

쌀은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은 잡곡은 그나마도 양이 부족하고 돌덩어리까지 들어 있었다. 옷감은커녕 총에 재울 탄약도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 작년의 일이었다.

그나마 이곳 백하보 일대에 겨울을 날 땔감은 충분하고, 수렵으로 고기를 얻어 배를 채웠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겨울은 분명히 끔찍했을 터였다.

“조정에서 내려보낼 곡량이 충분하지 않자, 심양에다 지원을 바란 모양입니다. 때문에 올해는 북해도독부로 오는 물자가 모두 요동군이 보내왔습니다.”

이순신의 말에 신립은 씁쓸하다는 듯 떫은 웃음을 보였다.

“그렇소? 웬일로 이렇게 보급이 잘 나왔나 했지. 허허. 역시나 그럼 그렇지. 올해는 여기에 몇 명 남기로 하셨소?”

“저를 포함해서 병졸 다섯입니다.”

“생각보다 적게 남는구먼. 작년에는 족히 열 명은 남았었는데.”

“영안의 모항으로 돌아가 월동준비를 해야 하는데, 어지간히 손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조운선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인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순신의 말에 신립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이제 겨우 늦가을인데도 날씨는 모질게 쌀쌀했다. 코끝이 찡한 느낌에 이순신은 얼굴을 찌푸렸다.

같은 북해의 관구(管區) 안에 있는 데도 영안부와 이곳의 날씨는 또 달랐다. 한 겨울에는 밖에서 오줌을 뉘면 곧바로 얼어붙는다고 농담할 정도이니, 춥기는 정말 추울 터였다.

“벌써 날씨가 쌀쌀해지기는 했지만, 있다 보면 그런대로 버틸 만할 것이오. 둔지 전체가 땅 위에 바로 세우지 않고, 땅을 파서 반쯤 묻듯이 세웠소. 그나마 보급도 부실한데, 다행이라면 주변에 삼림이 무성해서 겨우내 나무 땔감은 충분하다는 것이오. 막상 필요한 한겨울에는 추위 때문에 나가서 벌목하기가 힘드니, 지금쯤이 사실 제일 바쁠 때외다. 나무를 잘해 둬야 겨울을 잘 나니 말이오. 그래도 여기는 바닷가라서 날씨가 그나마 따뜻한 편이고, 한겨울의 한두 달 정도만 잘 버티면 나머지는 그럭저럭 지낼 만하외다.”

신립을 따라서 백하보의 둔지 안으로 들어서 보니 확실히 신립의 말마따나 둔지는 잘 조영되어 있었다.

둔지 한가운데에 있는 곳에 처소를 받은 뒤에, 이순신과 해군 병졸 5명은 짐을 풀고 월동준비를 시작했다.

나머지 병졸들은 이순신과 함께 온 다른 조운선의 참위(參尉)가 인솔해서 배를 끌고 영안부로 내려갔다.

이제 이순신은 이곳 백하보에 남아서, 겨우내 이곳과 흑룡강(黑龍江) 하구에 있는 특림진, 그리고 그 두 진지 사이에 있는 다구함보의 월동 보급을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 보급 문제에 있어서 올해는 그렇게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 않을 듯했다.

요동에서 보급이 나온 덕에 예년보다 물자가 넉넉했고, 특림진과 다구함보에도 충분히 물자를 내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특림진은 흑룡강 하구에 위치한 덕에 주변 야인들과의 교역도 잦았고, 모피상과 일반 민간인들도 수십여 명이 머무르고 있어, 어떻게든 먹는 문제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혹여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이곳 백하보에서 겨울 다섯 달을 머물며 있는 것이나, 실은 겨울 동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다.

곧 겨울이 찾아오고, 이순신도 이곳 백하보의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신립이 이래저래 신경 써 준 덕이기도 했다.

날씨가 조금 풀리는 날은 밖에 나가 고누도 치고, 노루 사냥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둔지 안에서 따뜻하게 온돌을 때워 두고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일상은 곧 깨지고 말았다.

섣달그믐이 지나 새해가 밝은 무렵이었다.

연중 가장 추울 때라 백하보의 병사들의 경계도 조금은 허술해질 때였다.

백하보의 목책은 완전히 닫히고, 병사들은 막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틈타 야인여진(野人女眞)의 무리가 백하보를 습격해 왔다.

원말(元末) 이래로 여진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졌다. 그중 가장 남쪽에 있던 건주여진은, 대한제국에 초무되어 사실상 심요도독부와 북해도독부 일대에 흩어져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작의 작위를 받고 훌륭한 말을 길러내 이름 높은 목씨장의 여진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좀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륙의 광활한 대지와 정착생활을 하는 제국의 영역의 경계에서 반쯤은 수렵민의 생활을 하고 있는 해서여진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제국의 경내를 드나들며 말이나 모피 따위를 팔고, 여러 가지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돌아가기도 했으며, 때로 심왕부나 영안부로 내려와 진상품을 바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전의 몽골이 요동으로 침공해 들어왔을 때 함께 준동하였던 것에서 보듯이, 이들은 언제고 상황이 여의치 않고 삶이 궁색해지면 남쪽으로 약탈을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북쪽, 흑룡강 유역에 살고 있는 야인여진들은 거의 수렵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무리들이었다. 원체 사는 지역에 농사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환경이 가혹하다 보니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 야인여진들은 종종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북해군과 충돌을 빚기 일쑤였는데, 십수 년 전에는 흑룡강 하구의 특림진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오기도 했었다.

특림진의 방비가 다행히 허술하지 않아서, 배로 급히 실어온 병력 지원을 받아 버티긴 했지만, 야인여진의 공격이 언제고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백하보는 이제껏 야인여진과 충돌한 경험이 없었다. 오히려 이곳은 여름철에 북쪽 멀리까지 모피사냥을 가는 배들이 중간에 들러 가는 곳의 성격이 짙었다.

서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이니, 바다로 오지 않고서는 원체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해서여진의 영역과 야인여진 영역의 경계 지역에 있는 곳이라 자연스레 균형이 이루어져 있었다. 서로가 껄끄러워 함부로 출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야, 야인들이 벌 떼같이 몰려옵니다. 천 명은 되어 보입니다요!”

차가운 겨울 날, 해가 막 밝았을 무렵인데 갑자기 호각이 울리고 깃발이 치켜 올라갔다.

이순신이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군복을 차려 입고 나와 보니, 이미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신립은 군복 위에 단단히 두정갑을 쓰고, 군도를 패용하고서는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어서 빨리 전투 준비를 하여라! 총에 약을 재우고 장전한 뒤, 각자 맡은 곳에 가서 적을 막아라!”

신립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졸들은 화급하게 총을 들고서 목책 사이로 난 조그만 틈으로 총을 빼고 적을 살피며 발사할 준비를 했다.

여전히 이곳의 총은 구식 보총(步銃), 즉 화승총(火繩銃)과 수석총(燧石銃)이 뒤섞여 있는 수준이었지만, 병사들의 사격 실력만큼은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빼어났다.

본래 북해는 엽사로 유명한 고장이었고, 그 실력은 군역을 지는 동안 병영에서 길러지는 것이었다.

이순신 또한 신립의 곁에 서서 총을 빼어 들었다.

해군상무관에서 만져 본 뒤로 처음 쥐어 잡은 총이었다.

신립은 검을 빼어 들고 지휘를 하고 있었고, 이순신은 신립의 바로 곁에서 그를 엄호하며 전황을 살폈다.

“야인들이 이곳까지 말을 끌고 산을, 그것도 한 겨울에 넘어올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분명 이곳에 식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오. 올해 겨울이 좀 춥긴 했지만, 설마 약탈을 여기까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내 불찰이외다.”

신립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백하보의 방비는 매우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신립은 게으른 장수가 아니었고, 이곳에 권관으로 머무르면서 병사들의 조련을 잘 시켜 두었다.

이순신은 그것을 전투가 시작되자 깨달을 수 있었다. 채 백여 명 남짓한 병력이었지만 여진족이 목책 바로 앞까지 들이닥쳤음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총을 쏘고 있었다.

야인여진은 생각보다 공격이 수월하지 않자, 멀리서 불을 틔워 목책 안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백하보가 나무로 만들어진 요새이니 목책을 태워 버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매우 차갑고 건조한 날씨니 불이 잘못 붙으면 크게 오를 터였지만, 신립은 목책을 포기할 각오로 적의 공세에 눌리지 않고 방어를 계속했다.

생각보다 공격이 용이하지 않고 병력 손실을 입기 시작하자 야인여진들은 결국 백하보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산중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참에 적을 끝까지 쫓아 추토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소이다.”

다행히 백하보의 병력 손실은 거의 없었고, 적이 사실상 사분오열해 흩어진 것을 확인한 이순신이 신립에게 제안했다.

분명히 백하보를 공격하기 위해 여러 씨족들이 연합해서 쳐들어온 것일 터였다.

공격이 실패했으니 제각기 흩어져서 도망갔고, 그중 한 무리 정도는 이곳의 병력으로 추토하기에 충분했다.

“떼거지로 모여 있지만 않다면 괜찮을 것이오.”

신립은 흔쾌히 이순신에게도 병력의 일부를 운용하게 내어 주었고, 이들은 각기 북서쪽과 서쪽의 계곡지대로 가서 이곳에 흩어져 있던 야인여진들의 숙영지를 들이쳤다.

이렇게 여진족 백 수십 명을 사로잡고, 야인여진의 족장 중 하나인 도친[多秦, docin]을 베었다.

그가 바로 백하보의 공격을 주도한 이였으니, 이 수급(首級)을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봄이 되어 조운선이 올라오자, 여진족 포로와 함께 실어다가 영안부에 품신(稟申)하니, 이내 신립과 이순신에 대한 포상을 논하게 되었다.

신립은 계급이 올라 정위(正尉)가 되어 특림진의 권관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순신은 해군으로서 육전에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부위(副尉)로 진급하고 황성부 용산에 있는 군부(軍部) 해군청(海軍廳)의 교리(校理)로 발령받게 되었다.

1574년

선정(宣定) 9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심양은 번영하고 있었다. 선정제의 실정과 그에 따른 통보의 가치 폭락으로,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요동에는 부가 축적되었다.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통보를 대신해 제국 전역에서 요동폐가 널리 쓰이고 있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그 가격이 안정되었지만, 8년 사이 요동의 경제적 위상은 한층 내지에 비해 우월해져 있었다.

요동폐와 통보의 가격비는 선정 9년에 이르러 1:8 정도로 안정되었고, 황성부 조정에서는 악화를 찍어낸 것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예전보다 오히려 은의 순도를 높인 양화(良貨)를 발행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문제는 통보의 시장선호도가 낮아졌다는 데에 있었다.

더군다나 본질적으로 단순히 악화와 연관된 문제가 아니라 신천은광 등에서 캐오는 신대륙의 은과 진서를 통해 일본에서 들어오는 은이 대량으로 유입됨에 따라 은의 가치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정부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지대(地代)를 은화로 받고 있던 대지주들도 이 일로 큰 타격을 보았지만, 대부분의 상인들과 일부 자영농들은 물가 상승으로 이득을 보았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곤란한 시기에는 무엇보다 현물을 쥐고 있는 자가 상황이 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동이라고 은의 유입으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체 식량 같은 경우는 내지나 명나라에서 싼값에 사 오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그랬다.

쌀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북방에 위치해 소출이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워낙에 내지에서 일어난 통보의 가치 하락이 심한 탓에 요동폐의 화폐 가치는 오히려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실제의 가치보다 높게 신뢰 형성으로 인한 기댓값이 포함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심왕부와 요동은행국에 대해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렇게 축적한 부를 가지고, 심왕 김유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일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한때 심양에서 적지 않은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심왕비는 이제 일절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조락(凋落)한 것이 바로 세자의 권위였다.

애시나절 심왕 김유와 중전 사이의 장남이라는 것과 중전이 작심하고 세자를 싸고 돈 것 외에는 사람들이 세자를 차기 왕으로 볼 만한 이유가 없었다.

세자 김인은 나이 서른일곱에 이르렀고, 조사의로부터 내려오는 영흥공가(永興公家)에서 세자빈을 들여 혼례를 치른지도 어언 스무 해가 지나고 있었음에도 자식이 없었다.

세자의 아기씨가 마른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심양에는 무성했다.

그래도 본인의 능력이 괜찮다면 모를 테지만, 세자 김인이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닭 울음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딱히 지능이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군왕의 자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성품 또한 차라리 이기적이더라도, 강단이 있고 판단력이 있는 것이 나을 터인데, 귀가 얇아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니, 사람들이 믿고 따르지를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왕이 병상에서 일어나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자는 어미 잃은 오리 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세자를 탐탁찮아 하던 부왕은 아주 폐세자시키는 문제를 공론으로 끌고 나왔다.

언제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능력 있는 왕자들에게 세자를 넘기겠다는 심왕의 언질에, 심양에서는 공공연하게 줄서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다른 왕자들이 능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나이가 서른셋이 된 둘째 예양대군 김민은 머리가 좋고 이재에 밝았다. 한때 세자에게 독이 될까 해서 자신을 견제했던 모후의 시선을 피해, 심양문리과대학에서 잠룡(潛龍)처럼 승천할 날만 기다리며 스스로를 갈고닦았던 인물이었다.

영민하고 계산이 뛰어나 어린 나이에도 학문을 빨리 흡수했고, 나이 열일곱에 대학의 학유들과 함께 정치를 강론할 정도로 머리가 탁월했다.

부왕이 용좌에 다시 앉아 폐세자를 논한 뒤로 부터는 조심스럽지만 거침없이 왕좌를 향한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자를 폐하는 문제에 반대했던 조정의 중신인 한부겸마저 예양대군의 인품에 매료되어 막내딸을 그에게 시집보낼 정도가 되었다.

요동 벌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한부겸을 등에 업고, 심양대학에서부터 교유해 온 젊은 관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은 예양대군은 사실상 언제고 세자로 책봉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양 내에서 그 이름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왕자들이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둘째인 금양대군 김제는 당년의 나이 서른하나로, 무예에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어린 시절 겉돌며 왕성을 나서 수렵을 다니곤 했던 소년은, 이제 완연히 군신(軍神)과 같은 용모를 지니고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키 또한 장신이고 체격도 좋았으며, 더욱이 부왕의 명에 따라 요동군에 투신하여 몽골의 내습을 방비하는 제1선이라 할 수 있는 서쪽의 광녕군(廣寧郡)의 요새들을 직접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형인 예양대군처럼 명가의 여식과 혼례를 치르지 않고, 군문에 있던 시절에 별 힘없는 광녕군수인 변응현(卞應玄)의 여식과 혼사를 맺었다.

어쩌다가 변응현의 딸에게 반해서 변응현을 찾아가 딸을 내어달라고 고개를 숙인 것이 여러 번이었다.

부왕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신부감을 구해 왔으니 혼날 법도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심왕 김유는 껄껄 웃으며 쉽게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이러한 금양대군의 호쾌한 성정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고, 특히 결정적으로 요동군의 군부는 금양대군을 내심 물밑에서 지지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지 조정의 군부 휘하에 있다는 인식보다, 완전히 심왕부 직하 기관이라는 생각이 확고한 요동군이었다.

나라가 아니라 그저 심왕부와 심요도독부, 그리고 요동군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 요동의 행정 체계였기에, 요동군은 행정기관인 요동도평의사사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심왕의 명만을 받았다.

요동군을 유지하는 자금과 군량이 모두 심왕부의 곳간에서 나오고 있으므로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상의 심왕 친위군(親衛軍)이나 다름없는 이 요동군은 정사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절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으나, 요동에서 독자적으로 요동군의 장교를 키워내기 위해 세운 심양무관학교(瀋陽武官學校)에서 배출된 젊은 장교들은, 모두 하나같이 금양대군을 대놓고 지지하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모두들 주로 세자의 자리를 놓고 이렇게 예양대군과 금양대군 중 누가 가져갈 것이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막내인 인양군이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어머니가 후실(後室)이라는 약점이 있었지만 인양군 김율은 이제 약관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오성(悟性)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은 명쾌하고 밝았으며, 학식은 예양대군에게 지지 않고, 무용(武勇)은 금양대군에게 지지 않는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더군다나 은사나 다름없는 이이(李珥)가 정치적으로 인양군의 뒤에 서 있었으며, 요동 벌족 출신이 아닌, 오로지 심왕을 모시고자 몸을 담았던 청관(淸官)들이 인양군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여전히 요동도평의사사의 내부에는 요동 벌족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지의 황성부와 끈이 닿은 것도 아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소장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인양군의 잠재적 지지 세력인 것이다.

인양군은 그러나 형들에 비해 세자 책봉 문제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맏형을 폐세자하지 말아 달라 상주를 올리거나 하는 조심스러운 행동만 보였다.

애초에 인양군 자신이 세자의 자리를 거머쥐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인양군과의 관계가 단단한 이이조차 도평의정으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할 뿐, 인양군을 정치적으로 밀어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금양대군과 예양대군 어느 쪽도 지지를 하고 있지 않은 소장파들은 인양군을 어느 시점이 오면 정치적으로 지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묘한 경쟁구도가 거의 사오 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그동안 폐세자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모든 이의 시선 밖에 난 세자는 갈수록 야위어 가고 피폐해져만 갔다.

“이게 다, 어마마마 때문입니다! 이게 다, 어머마마 때문이란 말입니다! 제가, 제가 왜!”

언제 폐세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세자 김인은 갈수록 성격이 성마르게 변하다 못해, 기어이 중궁전으로 칼을 차고 들어가 어머니인 왕비의 앞에서 휘두르는 변고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강퍅하게 자신을 휘두르던 모후의 치마놀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세자는, 그간 그렇게 따라 마지않았던 모후에 대한 감정이, 온통 증오로 바뀌었다.

비록 왕비는 다치지 않았으나, 이 일로 세자는 견책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 유야무야 언젠가는 터질 일로 미루어져 왔던 폐세자 문제가 물위로 끌려 올라온 것이었다.

“세자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차마 나라를 물려줄 수가 없게 되었다. 과인은 이에 세자를 폐하고, 진양대군(眞養大君)의 군호를 내려 궁에서 내보낼까 하노라.”

심왕의 하유(下諭)에 도평의사사의 어느 관원도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오히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세자를 비호하는 이는, 이제 적어도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나름 계산 끝에 줄서기를 마친 뒤였던 것이다. 이미 시기의 문제였지,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세자는 결국 동궁을 비우고, 진양대군으로 강등되어 북산군(北山郡)일대에 조그만 식읍을 받고 쫓겨나다시피 심양에서 내보내졌다.

북산군은 요동의 가장 동쪽에 있는 고을로 백두산의 북서쪽에 면한 곳이었다.

그만큼 땅이 험하고, 숲이 우거져 사실상 무언가를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말이 식읍이지, 유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진양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내보낸 뒤에도, 심왕은 바로 세자를 다른 대군에게 넘기지 않았다. 오히려 세자를 정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아직 때가 아니니 함부로 이 일을 논하지 말지어다.”

대신 심왕 김유가 신하들에게 요구한 것은 서둘러 종계변무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황성 조정에다가 선원의 계보를 고쳐 달라고 사람을 벌써 십수 번을 보내고, 갈 때마다 정성들여 방물을 보낸 것도 이미 스무 해에 이르렀다. 이십 년째 황성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과인이 거느리고 있는 신료들조차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음의 대를 잇는 세자를 논할 수가 없느니라.”

어떻게 선원에 대한 기록을 바로 잡지 않고서 부끄럽게 후계를 잇는 문제를 논하겠느냐는 논리였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지 못했는데 자리 물려주는 것은 그만 논하라는 심왕에 말에, 관리들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만큼 스무 해 동안 종계변무 문제는 심왕부의 숙원사업이었다.

문제는 황성부에서 이것을 지극하게 정치적으로 보고서, 요동에 대한 협상 수단으로 생각하고 좀체 해결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문제로 황성에 발목 잡힌 심왕부는, 선정통보의 급락과 조세급감으로 신음하고 있던 황성부 조정에 이래저래 구호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사태로 큰 이득을 본 심왕이었지만 곳간에 한 번 들어온 돈이, 갈취당하 듯이 줄줄 새 나가는 것을 보는 심정이 좋을 턱이 없었다.

이순신이 백하보로 가져갔던 군량도 모두 이런 식으로 조정이 요동에게 대신 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심왕 김유는 때문에 특히 종계변무 문제에 대해서 뿔이 단단히 나 있었다.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결착 짓겠다는 심왕의 의지가 단단했다.

“이번에도 다시 종계변무사를 꾸려서 황성부 조정으로 올라가 문제를 반드시 결착 보도록 하라. 도평의정 이이가 이것을 책임지고 할 것이며, 금양대군과 인양군이 동행하여 이이를 보좌하도록 하라.”

심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관들은 수군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왕자들에게 중요한 국사(國事)에 참여하게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 일을 잘 매듭짓고 오면 세자로 봉하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는 이야기로도 들렸다.

그러나 예양대군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고, 의외로 인양군이 금양대군과 함께 보내진 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금양대군이 세자로 사실상 내정된 것이 아니냐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만큼 인양군은 세자에 오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구설을 뒤로하고 새롭게 꾸려진 종계변무사는, 성경 심양부를 출발해 가을에 황성부로 가는 길에 올랐다.

배다른 동생에 대해 그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는 금양대군 때문에, 황성으로 가는 길은 내내 미묘하게 불편한 공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인양군은 황성부로 올라가는 길 내내 문득 모령의 초원을 떠올려 보았다. 2년 남짓 머물렀던 곳이었지만, 그곳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 그리고 자신의 외가친척이 모두 있는 그곳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행렬을 빠져나와, 말을 달려 모령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상에 빠져 있다가, 인양군은 옆에서 말을 몰고 있던 이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이는 인양군의 얼굴을 보고서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나마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스승 율곡이 없었다면, 인양군은 심양 생활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 복잡한 심양의 사정 때문에 어머니도 죽지 않았던가.

“이게 모령에 가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양군이 이이에게 넌지시 말했다.

“제게도 군 나리에게 있어서 모령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이이는 말을 모는 속도를 늦추고, 인양군의 곁에 바짝 붙어서 넉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예나라 땅 강릉입니다. 그곳 바다를 먹먹하게 바라보고 있던 유년의 기억이 아직도 잠자리에 들면 꿈결에 사무치곤 합니다. 소나무 우거지고, 대청마루에는 어머님 앉아 계셔, 그 무릎에 몸을 뉘이고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듣곤 했지요.”

“…….”

“그러나 그리움은 그저 그리움일 뿐입니다. 뜻한다고 갈 수 없고, 머무르고 싶다고 하염없이 있을 수 없으니, 사람에게는 허락된 때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여, 강릉에도 벌써 못간지 오래되었으나, 그저 꿈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삽니다.”

이이의 말에 인양군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철없이 투정부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을 부리는 것은 어릴 때부터 호사였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객지를 전전하다, 서릿발 같은 궁중의 엄한 분위기 속에서 유년을 보냈던 인양군이었다. 새삼스레 감상에 젖어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이의 말이 옳았다. 지난 것은 묻어두고 힘들고 척박해도 앞길로 나아가야만 했다. 언젠가는 이곳이 내가 설 자리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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