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장 견동답서(見東踏西)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코레아(Corea)라고 칭한다는 사실을 몰랐음에 틀림없고, 유럽인들에 대해서도 지난 세기까지는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몇몇 상인들이 인도양에 이르게 되었고, 그중 일부가 알렉산드리아까지 오게 되면서 그곳의 이탈리아 상인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로 빈첸초 모나텔리라는 베네치아 상인이 한국의 곳곳을 견문을 할 수 있었고, 익히 알려진 《조선기행Itinerarium Coreae》이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모나텔리 또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코레아라고 불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한국인들은 원래 자신들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나라 이름을 다양하게 바꾸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으로, 예전에 여러 왕조가 한국에 있었고, 그 왕조를 지배하는 가문이 바뀌면 나라가 바뀐 것으로 보고 왕조의 이름을 고치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이 땅에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과 같은 나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한(大韓)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문자만 보았을 때는 매우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한(韓)이라는 것은 사실 고대의 세 왕조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데 뭉쳐 일컫는 삼한(三韓)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코레아라는 이름은 고려라는 왕조의 이름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바로 200년 전까지 이 나라를 다스렸던 왕씨 가문의 나라입니다. 지금의 황제는 이씨로, 여러 제후들을 거느리고 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에서는, 한국을 자기 식으로 부르고, 또 다른 지역에서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국인들은 한국을 우리처럼 고려(高麗)라고 즐겨 호칭하고, 드물게 조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가라(韓)이라고 부릅니다……」
―마테오 리치, 《中國見聞錄》
1575년 맹하(孟夏)
멕시카 왕국(王國) 테노치티틀란.
북쪽에서 내려온 조선인들과 동쪽에서 들어온 카스티야인들에 의해 갑작스레 나라가 활짝 열려 버린 아스텍 제국은 예전의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왕(tlatoani, 틀라토아니)이 사실상 제국의 황제와 다름없는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몬테수마가 카스티야 군에게서 제국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조선인들의 힘을 빌려서야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고 나서는 위신이 좀체 서지 못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분열 직전까지 간 아즈텍 제국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대륙에서 건너온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병원균에 면역력이 없는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특히 많은 피해를 끼친 것이 천연두였다. 천연두는 외지인들과의 접촉 직후부터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해, 1530년대에는 절정에 다다랐다.
세 명 중 한 명이 죽어 나갈 정도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이 보급한 인두법이 없었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터였다.
동쪽에서는 카스티야 군대와 밀림 사이에서 일진일퇴하면서 끊임없이 산발적인 충돌이 지속되었고,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지면서 아즈텍 제국은 쇠락의 길을 한동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많던 신들에게 올리던 인신공희도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옛 신들이 제국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몬테수마의 제위를 이은 쿠아우테목(Cuauhtemoc)은 이러한 제국 내의 분란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카스티야의 압력에 대항해, 남쪽의 아라곤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서부에는 아라곤이나 조선인들의 함대가 기항할 수 있도록 옛 황제의 이름을 딴 악사야카틀란(Axayacatlan)항구를 건설했다. 그러나 붕괴하고 있는 제국을 단단히 하기에는 이러한 외부적 조치만으로는 모자랐다.
전통종교가 무너지고 인구가 급감한 제국은 사실상 여전히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한 세 도시의 연맹(聯盟)이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쿠아우테목은 공식적으로 다른 두 도시의 왕관을 테노치티틀란의 왕관에 합쳐 버렸고, 제국은 최초로 단일 왕권하에 통합되게 되었다.
다음으로 쿠아우테목이 한 일은 공격적으로 선교를 해 오는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쿠아우테목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고립된 안데스 산맥에서 외부 침략에도 불구하고 난국을 잘 이겨낸 타완틴수유(잉카제국)와 다르게, 아즈텍은 사실상 외부 세력과 국경을 마주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인신공양이 포함된 전통종교는 이제 급격히 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결국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쿠아우테목은 세례를 받고 유럽식의 왕관을 스스로 썼다.
왕홀을 들고 백마에 올라타, 그리고 금은으로 치장된 십자가 왕관을 쓰고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해, 신성한 옥좌에 앉은 쿠아우테목은 1541년, 정식으로 옛 세 도시 연맹의 해체와 멕시카 왕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옛 조상들의 땅을 지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여, 영원토록 이곳 멕시카 땅 위에서 번창할지라!”
그러나 새로운 멕시카 왕국은 쿠아우테목의 바람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모진 외풍에 시달려야 했다.
생각보다 개종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왕국의 지방을 장악하는 능력도 점차 회복되고 있었지만, 카스티야 식민자들은 멕시카의 고원지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려왔다.
이제 그들은 노골적으로 점령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교묘한 방법으로 멕시카 왕국 내에서 이권을 취해갔다.
재정이 궁한 멕시카 왕실에서 면장을 발급받아 고원지대 전체를 휘젓고 다니면서 은광을 찾았다. 이렇게 발견된 몇 개의 은광은 대부분 카스티야인들에 의해 파내어졌고, 더러는 아라곤, 혹은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사실상 멕시카 내륙 고원지대의 은광들은 카스티야 식민자(植民者)들에 의해 점령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막대한 은을 멕시카인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채굴하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이들의 임금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노예를 조달해 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은은 곧바로 누에바 카스티야의 식민지로 실려 가서 다시 쿠바를 거쳐 카스티야 본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은이 본토로 실려 와 주조되어야만 그 과정에서 세금을 뗄 수 있기에 카스티야 왕은 본토로 은을 실어 오는 것을 선호하였으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은 시장에 주목하고 있던 상인들은 이것을 대창해, 즉, 태평양을 횡단해 실어 나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중국은 원나라 말기의 지폐인 교초의 유통이 붕괴되고, 현물 거래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은의 유통이 거국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명 정부는 직접 은화를 발행하지 않고 있었고, 때문에 많은 양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가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중국 시장이 매력이 있었던 점은, 보통 금은 교환비가 1:10을 훌쩍 넘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중국에서는 아직까지 금은 교환비가 1:4∼5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은을 실어만 가면 값을 두 배나 높게 쳐서 받을 수 있으니 은을 확보하면 중국에 내다 팔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카스티야는 필리핀에 마닐라라는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신대륙에서 카스티야가 태평양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카스티야 상인들은 이 은의 중국으로의 수송을 사실상 조선 상인들에게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상인들은 중간 이문을 남기고 이 은을 필리핀의 마닐라나, 중국으로 가져가 직접 팔았고, 때문에 마닐라에는 카스티야 사람보다 조선인이 훨씬 많이 머무를 정도였다.
이 마닐라에는 멕시카의 은이 흘러들어 가는 거대한 중계 시장이 생겼고, 이것이 영파나 마카우를 통해 중국으로 막대하게 흘러들어 갔던 것이다.
더군다나 동래를 통해 요동을 거쳐 들어가는 신천은광의 은과 진서에서 직접 중국과 교역하는 일본 은까지 고려하면 세계에서 생산되는 은의 절반 이상이 지금 중국으로 쓸려 들어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아직까지 거대한 명나라의 시장이 요구하는 은의 양이 넘쳐났고, 때문에 은값이 높아 파는 대로 이득이 남기 때문이었다.
자기네 땅에서 파내어져 나온 은임에도 불구하고, 멕시카 사람들은 그 이익을 나누는 일에서 제외되었다.
비록 카스티야인들은 이들을 노예로 부리지는 못하고, 임금을 주고 광산 노동자로 부려 먹었지만, 그 대가는 헐값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도 점차 아프리카 노예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멕시카 국왕이 떼어 가는 세금도 변변찮았다. 카스티야 광산주들은 은 생산량의 1할이나 되는 것을 멕시카 국왕이 세금으로 가져간다고 불평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배가 뒤집어지는 것은 멕시카 왕 쿠아우테목이었다. 애초에 쉽게 면장을 내어 주지 않고, 직접 그 가치를 알고 은광을 개발했으면 그 막대한 이득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초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아즈텍 제국은 신대륙 최초의 기독교왕국인 멕시카 왕국으로 탈바꿈하여 명맥을 보존할 수는 있었다.
아즈텍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1520년에서 50여 년이 흘러서야 이 멕시카 왕국은 간신히 예전의 위용을 조금씩 되찾아갈 수 있었다.
확실히 그러한 분위기는 테노치티틀란을 찾아온, 영주의 조선 상인인 오국량(吳國梁)에게도 느껴졌다.
나라의 들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오국량은 그저 미미한 장사치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는 제법 청운의 꿈을 안고 신대륙으로 건너와 멕시카까지 흘러든 인물이었다.
이제 갓 나이 서른임에도, 그간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려면 날밤을 새어도 모자라겠지만, 그래도 운이 좋아 카스티야 상인들, 그리고 아라곤 상인들, 거기다가 같은 조선인 상인들과의 경쟁을 뚫고 빠른 시간 내에 이 테노치티틀란에서 커다란 포목점을 운영하는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주로 그가 취급하는 품목은 바로 중국산 비단이었다.
조선 비단은 너무 값이 높았고, 일반 백포(白布), 즉 흰 베는 너무 경쟁력이 없었다. 한국에서 흘러들어 오는 양만 해도 상당했던 것이다.
때문에 오국량은 적당히 값이 싸면서도, 품질은 좋은 중국 비단에 주목했다.
그는 심양의 대시전(大市廛)에 흘러들어 오는 중국 비단을 계영양행을 통해 잔뜩 떼어다가 악사야카틀란 항구를 통해 받아 왔다.
심양에서부터 악사야카틀란까지 계영양행에서 사실상 책임지고 물건을 가져와 주니, 오국량으로서는 비용이 매우 절감되는 일이었다.
중국 비단 한 포(布)의 현지 가격은 대략 요동폐 쉰 냥가량이었고, 이것이 심양의 대시전에서는 대충 예순 냥가량에 팔렸다. 이것을 계영양행이 매입해 악사야카틀란에 가져오면 그곳에서 오국량이 요동폐로 백 냥에 매입해서 오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엄청 비싸지만 사실상 비단은 원래 고급 물품으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팔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사실 내지에서 생산된 조선 비단은 현지 가격만 아흔 냥가량이었다. 명나라보다 생산에 소모되는 잡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다 못해 인부 품삯도 높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런 조선 비단을 바다를 건너서 가져오면, 그 가격이 한 포에 이백 냥 가까이까지 올라가 버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면직물이나, 양모, 모피등과의 경쟁력이 떨어져 버린다.
그러나 고지대에 위치했다고는 하나, 열대 지방에 인접해 기후가 따뜻한 이런 멕시카 같은 곳은 유럽과는 그 기호가 달랐다. 모피나 양모보다는 비단이 훨씬 경쟁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조선 비단을 팔기에는 너무 값이 비쌌고, 구매층이 더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오국량은 그러한 시장 상황을 꿰뚫어 보고, 명나라 비단을 테노치티틀란으로 가져오자는 생각을 해서,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소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이름이 조금씩 나자, 이제는 직접 그의 비단을 보고자, 멕시카 국왕 이츠코아틀(Itzcoatl) 3세가 오국량을 불러들일 정도가 되었다.
“전하께서 직접 오셔서 비단을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완연하게 아라곤 식의 복장을 차려입고 있는 왕실의 시종이, 오국량의 가게에 찾아와서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옛날부터 내려오는 귀족 계급인 피필틴(pipiltin)임에는 분명했다. 오국량이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니었다.
“전하께서 직접 불러주시니 황공하여이다. 그럼 왕궁에 들어가면 될까요?”
아직은 나우아틀어가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오국량이었지만, 최대한 어려운 단어를 짜내서 공손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그 피필틴은 씩하고 웃으며 유창한 조선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굳이 불편하시면 저희 말로 말씀하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테스카틀리포카와 우이칠로포치틀리 땅을 다스리시고, 이제는 멕시카 전체의 군주이신 위대하신 틀라토아니께서는 내일 아침에 훌륭한 비단 견본들과 함께 귀하를 보고자 하십니다. 너무 긴장 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편하게 준비하십시오.”
피필틴의 말에 오국량은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준비하라고는 하지만, 오국량은 내심 간담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지만, 예전에는 산 사람의 심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치던 이들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새벽부터 오국량은 의관을 정제하고 비단을 바리바리 챙겨서 시동의 어깨에 짊어지게 한 다음, 왕궁에서 사람을 보내오기를 기다렸다.
어슴푸레 텍스코코 호수에서 올라온 안개가 도시의 운하들 사이로 걷힐 무렵에, 멀리 왕궁 방향에서 어제 보았던 피필틴을 위시한 여러 피필틴들이 휘적거리며 오국량에게로 다가왔다.
“전하께서 기침하시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피필틴들은 노래하고, 뿔 나팔을 불면서 거리를 지나갔다. 왕이 부른 사람이 가고 있으니 길을 막아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아침 일찍 길로 나온 테노치티틀란의 주민들은 소리를 듣고서는 황급히 주변으로 물러섰다. 오국량은 종종 이런 광경을 보아 왔었지만,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니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제는 종교적 기능을 모두 잃은 대신전의 옆에, 웅장한 이베리아 양식으로 건축된 왕궁이 있었다.
1540년대에 이르러서 공식적인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함께 세워진 이 왕궁은, 새롭게 재건된 멕시카 왕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대신전의 좌측에 서 있는 테노치티틀란 대성당과 함께, 구대륙화되어 가는 멕시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대신전 앞 광장을 지나 왕궁으로 들어선 피필틴들은 오국량을 내전으로 안내했다.
국왕 이츠코아틀 3세는 마치 아라곤 왕이 입고 있을 법한 복장으로 조선식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오국량은 그 광경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왕 앞에서 그것을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대가 그 유명한 비단상이로군. 내가 멕시카의 틀라토아니일세.”
생각보다 왕은 불편할 정도로 무게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수염을 길러, 기름을 발라 유럽식으로 꼬아 올린 젊은 왕은, 처음부터 오국량보다는 비단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오국량에게 비단을 모두 늘어놓게 만들었다.
“가장 보기 좋고, 질이 좋은 것들로만 가지고 왔습니다. 혹여 몰라 제가 잘 취급하지 않는 것이지만, 조선 비단도 가지고 왔습니다요.”
오국량은 한결 말이 좀 편해졌지만, 여전히 책이라도 잡힐까 싶어 긴장한 채로 이츠코아틀 3세의 옆에서 물건을 설명했다.
왕은 이리저리 비단들을 보더니, 옆에 있던 피필틴 한 명을 불러서 물었다.
“무슨 색이 괜찮을까?”
“전통적으로 왕가에서는 녹색을 많이 썼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푸른 색도 그나마 괜찮습니다.”
여전히 옛 방식대로 몸에 긴 망토를 두른 전통 복장을 하고 있는 늙은 피필틴의 말에, 젊은 왕은 불만스럽다는 듯 혀를 날름거렸다.
완전히 유럽에서 유행하는 방식대로 옷을 차려입고 있는 왕이었다. 더군다나 조모 대에 아라곤 핏줄도 섞여서, 겉보기에도 이질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왕 자신이 전통과 현재 사이의 단절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옛 문화와 새 문화의 융합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오국량은 그런 왕의 모습이 자못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얼굴에 티내고 있을 우둔한 자는 아니었다.
왕은 조금 더 고민한 끝에, 녹색에 청포무늬가 새겨진 비단 열 포와 마음에 드는 색깔과 무늬들로 가지각색으로 고른 비단 마흔 포를 해서, 총 쉰 포의 비단을 오국량에게서 사 갔다.
이츠코아틀 3세는 볼일이 끝나자, 오국량에게 그저 가타부타 말없이 슬쩍, 씩 하고 웃음을 보이고서는 침전으로 사라졌다. 이 왕의 인상은 오국량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대금은 무엇으로 치러 드릴까요? 베네치아 두카트도 있고, 심니움 두카트도 있습니다.”
왕이 물러가고 나자, 아까 왕에게 초록색 비단을 권했던 늙은 피필틴이 나우아틀어로 물어왔다.
심니움 두카트란 다름 아닌 요동폐를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 요동폐의 영향권이었던 옛 영길도·영진도독부 출신들이 개척한 신대륙의 영주에서는 요동폐를 처음부터 널리 사용했었다.
나중에 통보도 들어오기는 했으나, 선정제의 실정으로 인한 폭락 이후로는 아주 쓰지를 않았다. 당연히 요동폐는 이곳 테노치티틀란까지 흘러들어 와 조선 상인들에 의해 보급이 되어 있었고, 주요 결제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베네치아에서 주조된 은화인 두카트였다. 유럽 대륙에서 넓게 쓰이는 은화답게, 이베리아 식민자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들어왔다. 당연히 조선계 상인이자 주 거래처가 계영양행인 오국량으로서는, 대금을 받을 화폐는 정해져 있었다.
오국량은 씩 웃음을 지으며 늙은 피필틴에게 말했다.
“당연히 요동폐지요.”
1576년
선정(宣定) 11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백 년도 더 전에, 한명강화장정(韓明講和章程)의 체결로 개국 이래 두 번의 큰 싸움과, 그 외에도 자잘한 전투들을 치렀던 한국과 명나라 사이의 관계는 기나긴 소강상태에 들어갔었다.
황성부 정동에는 명에서 파견한 주재정사가 머무를 수 있는 공관이 마련되어 있었고, 북경에도 마땅히 한국의 주재정사가 머무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종 때로는 재정적인 이유로, 때로는 외교적인 이유로 이것은 끊기기 일쑤였다. 특히 명이 북경을 비우고 남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명이 남경으로 천도한 것도 거의 백 년이 다 되가는 성화제(成化帝) 주견심(朱見深)치세의 일이었다.
한국과의 전쟁 이후에 요동을 완전히 내어놓게 되었고, 요동과 경계를 짓게 된 산해관에서 북경은 지척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마당에 오이라트와 달단몽골이 계속해서 국경을 불안정하게 하고, 종래는 북경까지 내려오는 일까지 발생하자, 성화제는 불안감에 못 이겨 남경으로 천도를 추진했다.
그렇게 명의 조정이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 가자, 북경으로 주재정사를 보냈던 한국에서는 남경으로는 더 이상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뿔이 난 명에서도 한동안 황성부에 보내던 주재정사를 더 이상 파견하지 않았다.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한 이후 재상으로 등용된 장거정(張居正)이 극구 사람을 한국으로 다시 보내어 주재정사의 옛 제도를 복원할 것을 주장하여 다시 황성부로 명의 주재정사가 다시 보내진 것은 겨우 일이 년 사이의 일이었다.
정동의 다 무너져 가는 옛 공관을 수리하고, 거의 백여 년 만에 정식으로 파견된 주재정사로서 들어앉은 이는, 장거정이 직접 선임해서 보낸 명나라의 중신인 장사유(張四維)였다.
나이가 쉰 줄의 노련한 정치인인 장사유는, 장거정이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지금 사정이 좋지가 않아 그런 막대한 자금을 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장 공. 차라리 요동을 찾아가 보세요.”
장사유는 황성부에 도착하자마자, 뻔질나게 외부대신(外部大臣)과의 만남을 요청해서 차관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조정의 곳간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정 초년의 재정 붕괴를 이제야 겨우 만회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통보의 시장 신뢰가 완전히 상실되어,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존의 가운데가 뚫려 있던 전통적인 주화 모양을 포기하고, 완전히 요동폐를 따라 둥글게 된 은화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순도 높은 은으로만 제작하고, 이것으로 조정이 대금을 치를 것을 강요하니, 10년이 지나가는 지금에 와서야 시장에 통보가 조금씩 돌기 시작하고, 재정도 회복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뜬금없이 사람을 보내서 돈을 빌려달라고 청한들, 나올 구멍도 없고, 내어 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명에서 사람을 보내 이토록 갑작스럽게 사정하게 된 연유에는 바로 선정제가 저지른 문제가 뒤에 있었다.
명나라는 그간 은의 대대적인 유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은화를 주조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한국에서 흘러들어 온 통보를 명나라 전국에서 폭넓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값이 높은 명나라의 시장 상황상, 통보는 실제 한국에서 유통되는 값보다 거의 두 배 높게 쳐서 명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에서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이 통보가 폭락하고 말았다는 데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은화의 부족에 시달리게 된 명에서는 현물을 순은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신대륙이든 일본이든 할 것 없이 은을 매입해 들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은값이 높아 모든 무역망을 통한 은 거래의 최종 목적지가 되고 있던 중국이었다.
그런데 이제 명나라 정부에서 나서서까지 은을 매입하기 시작하자 상선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서의 기상과 박상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을 수입해다가 영파에 내다 팔았고, 내상은 신천은광의 은을 가져와 해주에서 요동폐로 바꿔다가 화북 지방에다 풀었다.
계영양행은 카스티야가 멕시카에서 생산한 은을 배로 실어다가 마닐라에 뿌렸고, 마닐라에서는 또 포르투갈 상인들이 그 은을 사서 마카우로, 나상은 영파로 가져갔다.
이렇게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이 중국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수십 년 전, 가경 연간에 내지의 단천은광에서 개발된 단천 은 제련법과 카스티야인들이 확보하고 있는 수은 제련법이 세계 전체에 퍼져 나감에 따라 은의 생산량까지 늘어났고, 자체적으로 이러한 기술도 없을 뿐더러, 변변한 은광을 확보하지 못한 명은 무조건적으로 은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국에서 은값까지 덩달아 폭락하던 것이 진정된 것은, 명에서 갑작스럽게 은을 대량으로 매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은의 공급량이 다시 떨어지고 화폐 가치도 안정이 되면서, 한국의 재정 위기도 다시 회복세로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명이었다. 잔뜩 은을 사들여서 은괴(銀塊) 형태로 유통을 시키긴 했는데, 여전히 국가에서 은화를 따로 주조하지 않았기에, 사제 은화가 널리 쓰이고 있었다.
북방에서는 산해관을 넘어온 요동페가 사실상 화폐 노릇을 하고 있었고, 강남(江南)에서는 말굽 형태로 만든 소위 불순물이 잔뜩 낀 말굽 모양의 마제은(馬蹄銀)이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 조정은 자금 곤란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이기가 힘든 경색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희대의 정치인 장거정이었다.
만력제가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서 내각 수보, 즉 재상으로 등용된 장거정은 일대의 개혁을 의욕 있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전대 명나라의 황제인 가정제(嘉靖帝)는 도교에 심취하여 기행을 일삼고, 명의 국고를 파탄 낸 장본인이었다.
가정제의 즉위 기간 동안 명의 정치는 어지럽기 그지없었고, 가정제의 사후 만력제가 즉위하자 장거정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전국적인 토지 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시행을 단행한 것이다.
나라의 곳간을 틀어쥐고서 장거정은 일제의 황실에서 사용하던 사치재를 끊은 다음, 명나라 전국의 세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은으로 거두고자 의욕 있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문제는 바로 그 일을 추진할 돈도 없을 정도로 남경의 국고가 완전히 비어 있다는 데에 있었다. 현물로 거둔 조세를 바로 시장에다 팔아서 은으로 바꾸어 자금을 대려 하더라도, 방만한 조정 재정에 그대로 흘러들어 가니, 장거정이 여윳돈을 만들려 해도 만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장사유가 한국 황성부로 오게 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고가 비었으면, 그간 국고가 충실했던 나라에서 빌려 오면 될 일이었다.
서로 황제국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지내 왔던 명과 한국이었으나,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교류가 끊이지 않고 물건이 활발히 오고 가고 있었다.
막연하게 황성부에 비축 자금이 있을 것으로 알고 황해를 건너온 장사유는 오자마자 한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유례없는 선정연간의 자금 위기로, 황성부의 조정도 완전히 난리가 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리나 귀국이나 다를 게 없군요.”
장사유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강고한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있는 장거정이었다.
모든 입을 틀어막고, 권력을 혼자 전횡하며 일을 추진하고 있으니, 그만큼 독단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사유는 돈을 구하지 못하면 귀국해서도 장거정에 의해 탄핵당할 판국이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장 수보가 바라는 돈의 규모가 얼마입니까?”
빌려 줄 수도 없는 돈이지만, 장사유와 마주 앉은 내각 외부대신 허엽은, 이제는 허옇게 쇤 수염을 쓸어내리며 장사유에게 물었다.
장사유는 혀를 차고서는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백만 냥이올시다.”
“허허, 지금 당장 그 돈을 곳간에 쌓아두고 있는 이는 아마 심왕밖에 없을 겝니다.”
“심왕에게 돈을 빌릴 수는 없겠습니까?”
장사유는 절박한 표정으로 허엽에게 물었다. 요동폐 이백만 냥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게 그쪽에서 뭘 해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방법은 있지요. 우리 쪽에서도 심왕에게 돈을 내어놓게 할 방법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간 잘 쓰지를 않았어요. 어차피 돈을 가져와도 갚아야 하고, 잘못 그 돈이 들어왔다가는 요동폐에 의해 나라 전체가 흔들릴 우려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심양에서 차관을 떼어 오신다면 이자는 얼마나 셈해 주실 요량이십니까?”
“지금은 이자가 문제가 아니오. 넓고 넓은 명나라 전토를 샅샅이 톺아서 땅의 대장을 작성하고 세금을 은화로 매기면, 순식간에 나라의 곳간이 불어날 겁니다. 그런데 눈에 뻔히 보이는 일을 돈이 없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노릇이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돈을 빌려 가면 오 년 동안 이자를 오 할로 하지요.”
“육 할은 어떻습니까?”
역시나 강남인들이 통이 크다고 생각하면서 허엽은 당황하지 않은 척 수염을 쓸어내렸다.
허엽이 노리고 있는 것은 간단했다. 어차피 재정경색의 위기 국면은 탈출했지만, 여전히 지속적으로 여윳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좋소. 육 할에 해드리지요. 이백만 냥을 심양을 통해 빌리면, 5년 뒤에까지 총 320만 냥으로 갚으리다.”
그만큼 명은 새 법에 자신이 있었다.
이미 국토의 삼 할 정도의 지적 조사가 끝나 땅의 소유 관계와 소출이 기록되어 있었고, 은으로 세금을 걷는 법이 점차 시행되면서, 5년이면 명의 국고를 총 천만 냥 가까이로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이 이미 서 있었다. 120만 냥의 이자야, 지금 상황에서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심양에는 이자를 1할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예?”
“나머지 5할이 황성부로 오는 거지요.”
조정의 계산은 간단했다. 이번에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해 주어 심양을 끌어낸 다음, 돈을 내어놓게 하는 것이었다.
그 돈을 명나라에 빌려 주어 가만히 앉아서 이자를 꿀꺽할 수 있으니 황성의 조정으로서는 수고 하나 들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돈을 5년간 백만 냥 가까이 주워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심양에게도 손해는 아닐 터였다. 명나라가 돈을 제대로 갚기만 한다면 종계변무도 해결하고, 1할의 이자도 도로 쳐서 돌려받을 수는 있었다.
문제는 추가로 들어오는 이자들을 조정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삼켜 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허엽이 명에게 제의한 이 제안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외교놀음으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심왕 전하께서 얼마든지 융통하라고 어음을 끊어 주셨습니다.”
열네 달 전에 황성에 올라와 종계변무가 해결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종계변무사 이이는, 허엽이 명에 차관을 내어 주면, 대신 종계변무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해 오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어음을 끊어 주었다.
어차피 문제를 질질 끌면 계속해서 조정에 돈이 샐 것이라고 심왕은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고 조정이 큰 몫을 내어놓으라고 하면 범위 내에서 통 크게 지불하라고 이이는 지시받은 터였다. 거기다가 차관이라니, 운이 나쁘면 떼이겠으나, 어지간하면 돌려받을 수 있을 터였다.
잃는 돈이 아니고, 종계변무를 해결할 수 있으니 손해는 절대 아니었다.
물론 황성부 조정에서 이자놀이를 할 것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이이는 그것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었다.
아무도 손해 보는 사람이 없다면, 이쯤에서 한번 조정에 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성 생활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벌써 두해 째에 접어들고 있으니 이제는 심양에 돌아가야 했다.
“왜 도평의정은 나와 상의 없이 일을 결정하신 겁니까!”
그 지난한 문제를 겨우 해결해 기분이 좋아 객관으로 돌아온 이이는 예양대군에게 이제 심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양대군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이이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니라, 그동안 이곳에 와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기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상 세자를 노리고 있는 예양대군으로서는 이번 종계변무사에 딸려 보내졌을 때, 무언가 해내었어야 했다. 혹여나 부왕의 신임을 잃기나 할까 싶어, 괜히 이이를 족쳤던 것이다.
“공이 필요하면 가져가시옵소서.”
이이는 예양대군의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말했다. 한 치 떨림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말이었다.
예양대군은 이이의 서슬 퍼런 눈빛에 잠시 질려서는 씩씩거리던 숨을 가라앉히고서는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만 됐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예양대군도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내내 불안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심양과 떨어져서 종계변무에 매달리면서도,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하고 결론도 짓지 못하는 것이 못내 답답해서였다.
지금 동생인 금양대군은 재빠르게 심양에서 사람들을 규합해 가며 착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매일같이 그의 귓가에 들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문제가 해결되고 말았다. 그건 괜찮은 일이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예양대군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인양은 어떻게 한답니까?”
어깨가 늘어진 예양대군은 이이에게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황성부에서 공부를 계속하시려 합니다.”
“학습원보다 우리 심양에 있는 심양대학이 훨씬 교습 수준이 나은데 어찌 굳이 황성을 고집한답니까? 함께 돌아가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피가 섞이지 않았고, 정을 준 적이 없어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어차피 경쟁 상대로 여기지도 않는 인양군에게까지 날카롭게 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지금부터라도 잘 다독여서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금양대군의 목을 같이 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예양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이를 통해 인양군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심양에 돌아가시려는 마음이 없으신 듯합니다. 이곳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여 친우도 만들고 즐겁게 생활하고 계십니다. 이미 또한 심왕 전하께도 황성부에 한동안 머물 것을 허락받으셨으니, 제가 설득해도 꿈쩍하지 않으실 겁니다.”
예양대군은 이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이이에게 성질을 제멋대로 부리긴 했지만 예양대군 또한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어깃장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차라리 다시 심양으로 빨리 돌아가 정면 승부를 보고 싶은 마음도 끓고 있었다.
이제는 어차피 자신과 금양대군 사이의 양자전이었다. 형님 세자는 폐해졌고, 어린 동생 인양군은 황성부에 남았다.
예양대군은 쳐져 있던 어깨를 다시 펴고서 당당하게 서서 이이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어서 돌아갈 채비를 합시다. 도평의정.”
1578년
선정(宣定) 1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중랑천 물이 청계천과 만나서 한강으로 흘러가는 마장(馬場) 인근의 언덕에 위치한 학습원(學習院)은 그 전신이 화학전습원으로 세워진 지 170년이 지난 유서 깊은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대한제국의 격물학과 의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나, 시간이 흘러 지금은 왕공제후(王公諸侯)의 자손과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거쳐 가는 관문처럼 되어 예전의 학예적인 생기는 잃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성 안 4대 학당인 소위 「경내사학(京內四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공부를 시키는 학교이기도 했다.
신분이 높으면 들어가기도 쉬웠고 나오는 것도 쉬웠지만, 바로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과거의 가장 높은 급인 전시(殿試)를 치르기 위해서는 좋은 성적을 얻어야 했다.
학습원의 학유들은 전통적으로 다른 학당에 비해서도 성적을 매기는 데에 있어서 인색했고, 때문에 일단 들어오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졸업 뒤에 학문을 하기 위해 학교에 남지 않고, 관직에 출사하다 보니 학문적 발전에 있어서는 수십 년간 정체된 채로 큰 성과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인양군 김율이 종계변무사에 끼어 황성부에 올라온 뒤, 이곳에 당분간 머물기로 결정하고 들어간 곳이 바로 이 학습원이었다.
「경내사학」의 서열은 속된말로 흔히 「학외성경」이라 하였으니, 가장 앞자리에 있는 것이 학습원이었다. 인양군은 성균관에 들어갈까도 고려하였으나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성균관과는 성질이 맞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학문을 폭넓게 배울 수 있는 학습원이 체질에 맞았다.
학습원에 입교하던 해에 임시로 시험을 보기는 했으나, 인양군이 심왕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입교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습원 자체가 인양군의 조상인 성명왕 세훈이 공들여 세운 학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심왕가의 자제들이 경쟁 학교라 할 수 있는 심양의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을 나왔던 것을 고려해 볼 때, 학습원 입장에서는 인양군이 이곳에 다니고자 마음먹은 이상, 학교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진정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군 나리께서는 어떤 공부를 하고자 하시나이까?”
학습원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인양군의 생활을 돌보도록 배정받은 젊은 학유 하나가 물어왔다.
보통 마마라는 호칭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에게만 붙이는 것으로, 보통 대군이나 군은 나리라고 불렀는데, 그렇다고 아랫사람이 군호(君號)를 함부로 부르는 것도 예도에 어긋나니, 학유로서는 인양군을 군 나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둘씩 배우다 보면 뜻에 맞는 학문이 있겠지요. 천천히 익히며 생각해 볼 생각입니다.”
학습원에 처음 입교하면 보통은 제각기 능력에 따라 일 년에서 삼 년에 걸쳐 예과(豫科)라는 과정을 밟게 되어 있었다. 유학경전과 함께 세훈의 몇 안 되는 유고 중 하나인 《물학본원》같은 기초적인 격물학 과정과 「수신(修身)」이라 불리는 다양한 예법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기본적인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함께 격물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과 신분에 걸 맞는 예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넘어가는 것이 보통 말하는 본과(本科)의 과정인데, 그간 학습원의 역사와 함께 쌓여 온 다양한 학문 과정이 강좌로 개설되어 있어, 제각기 원하는 분야를 마음껏 배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초창기에는 산과(算科)니 물과(物科)니 하는 식으로 학과가 구분이 지어져 있었으나, 관료 양성이 주 목적이 되고, 학제가 정리됨에 따라 이제는 따로 학문 분야별로 과가 분과(分科)되어 있지는 않아 있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제각기 알아서 과정을 이수해야 했는데, 마지막 졸업 시험인 소위 「통람(通覽)」에서 시험을 볼 과목을 택할 수 있었다.
그 성적에 따라 석차가 매겨지고 좋은 성적으로 통과하면 바로 전시를 치를 자격이 주어지고, 학습원의 학유로도 선발될 수 있는 진사(進士)의 학위가 수여되었다.
「통람」에서는 몇 가지 과목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제껏 가장 많은 과목에서 진사의 학위를 받은 이는 바로, 지학(地學)에 있어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양성지(梁誠之)로, 산학(算學, 수학), 궁학(窮學, 철학), 물학(物學, 물리학), 유학(儒學), 역학(曆學)에서 진사의 학위를 받았었다.
그 이후 오랜 기간 학습원에서 학유로 봉직하며 지학의 분야를 개척하여, 그간 횡행했던 음양오행에 따른 택지술(擇地術)과 풍수(風水)를 타파하고 학문의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내심 인양군은 속으로 이 옛 대학자인 양성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세자 자리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심양으로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없었다. 대신 열심히 지학을 익혀, 배를 타고 영주(瀛洲)로 건너가 탐험도 해 보고, 아직 전인미답의 땅을 밟아서 기록하는 일도 하고 싶었다.
인양군은 학교에 들어가서부터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어렵다는 학습원의 과정을 밟아 가는 속도도 빨랐다.
처음에는 왕자의 신분인 그를 보고, 지위에 걸맞는 능력을 보여줄지 사람들이 의심도 많이 했으나, 탁월한 재기(才氣)로 논란을 불식시켰다.
“자네 유명이 자자하여 내 한 번 보고 싶어서 청했으니, 함께 술이나 나누며 담소라도 하는 것이 어떠한가?”
인양군이 학습원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자 그 주변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현 황제인 선정제의 동생인 흥친왕(興親王)과의 조우는 인양군의 황성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었다.
흥친왕 또한 황실의 자제로서는 드물게 성균관이 아닌 학습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학문적으로 탁월한 학생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으나, 그렇다고 딱히 모자란 부분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장기는 사람을 다루는 데에 있었다. 그런 흥친왕이 자신의 곁에 인양군을 두고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전하께옵서는 어떤 일에 뜻을 두고 계십니까?”
만남이 깊어져, 속에 있는 흉금도 터놓을 사이가 되자 인양군은 흥친왕의 심중은 넌지시 떠보았다.
흥친왕은 그런 인양군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어 왔다.
“그런 그대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갑작스러운 반문에 인양군은 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사람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흥친왕에게는 있었다.
황실과 심왕가는 그다지 편한 사이라고는 하기 힘들었다. 인양군이 흥친왕에게 질문을 했을 때, 그 안에는 앞으로도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지를 묻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흥친왕은 그것을 알아보고서는 오히려 인양군에게 되물어 온 것이었다.
“심양에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나 또한 황궁의 대사에 몸을 매여 있고 싶은 생각이 없네.”
황실과 심왕가의 관계가 어찌하든, 둘 다 황위와 왕위를 승계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니 뜻하는 바대로 함께 살아보자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흥친왕은 인양군에게 여러 대관들의 자제를 소개시켜 주고, 함께 시세를 논하며 친분을 쌓도록 독려해 주었다. 그중에는 외부대신 허엽의 자제인 허성(許筬), 허봉, 허균(許筠)의 3형제와 쌓게 된 교분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격물학을 깊게 공부하고, 영주대도독으로 십여 년간 큰 바다를 건너가 있었던 아버지 허엽의 자제답게, 세상을 보는 눈이 트여 있고 세사(歲事)를 평하는 관점이 남달랐다.
특히 막내 허균은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학습원에 입교하여 그 탁월한 재능을 일찌 감치부터 드러내고 있었다.
“군 나리. 나리께서 우리 누이를 데려갈 생각은 없습니까? 분명이 마음에 드실 겝니다. 혼약을 맺기로 내정된 김가의 성립이라는 놈이 좀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주색이나 즐기고, 학문과는 담을 쌓고 있으니, 분명 대성하지 못할 놈입니다. 가문의 위명을 빌어 겨우 들어간 게 경애학사이고, 그곳에서도 딱히 재능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으니, 누이에 비해 부족함이 많은 놈이지요. 혼약을 파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버지께서도 심왕가로 누이를 보낸다면 분명히 재고해 보실 겁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허씨 형제의 둘째 허봉이 넌지시 인양군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인양군은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허봉과 허균의 동복남매인 허초희(許楚姬)는 여자임에도 학문이 남다르고, 자색 또한 뛰어나 그 명성이 황성부중에 자자했지만, 이미 혼인을 치를 상대가 일찌감치 약정되어 있었던지라, 감히 넘겨보는 남자가 없었다.
인양군 또한, 소문만 듣고 다른 이와 혼약이 약정된 이를 뺏어 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허초희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허봉은 술자리에 그치지 않고, 몰래 인양군과 누이동생 사이에 서간을 교환하도록 주선했다.
처음은 이랬다. 허봉은 내심 진정으로 누이동생이 인양군에게 시집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동생이 쓴 것처럼 서간을 꾸며 인양군에게 보내고, 인양군이 쓴 것처럼 서간을 날조해 동생에게 보냈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시작된 서간 교환이었으나, 나중에는 서로가 허봉에게 부탁해서 서찰을 나눌 정도가 되었다.
인양군은 내심 허초희에게서 오는 서간의 내용을 볼 때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다. 뛰어나고 학식이 높은 여자였다. 이런 이와 성혼하여 살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들고 있었다.
그간 연애라고는 겪어 본 적이 없는 인양군의 마음에 춘풍이 들어 설레고 있었다.
“군 나리십니까?”
허봉은 둘의 마음이 깊어진 것을 눈치채고는, 우연을 가장해서 허초희와 인양군을 조우시켰다. 달이 밝는 날, 정월대보름을 보러 외출한 허초희를 허봉이 인양군이 노는 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그렇소. 바, 반갑소이다.”
허초희의 자색을 처음 본, 인양군은 그만 말을 잊고 말았다.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간 쉬지 않고 매진해 왔던 공부도 작파할 정도로 그날 이후로 인양군은 마음의 갈피를 못 잡았다.
자나 깨나 오매불망 달밤의 허초희의 모습만 생각이 나니, 시름시름 앓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흥친왕과 허봉이 직접 나서서 허엽에게 찾아가 딸을 인양군에게 시집 보내는 것이 어떻느냐고 떠보았다.
“하나, 이미 정혼한 상대가 있는데…….”
허엽으로서도 고민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허초희와 정혼이 되어 있는 김성립의 부친은 예부의 주임관(奏任官)을 지냈던 관리로, 그다지 가문의 품이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허엽의 가문에 비해서는 격이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돈을 맺을 상대가 심왕가라면 전연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간 내각에서 요동의 간을 보는 일을 주로 맡아 왔던 허엽이었기에, 요동 심왕부의 허와 실을 황성부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허엽에게 더 고민거리가 되었다. 인양군은 분명히 세자의 자리를 꿰차지 못할 것이라는 게 허엽의 판단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허엽은 적당히 가문도 훌륭하고, 그러면서도 정치놀음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은 인양군에게 딸을 시집 보낸다면, 딸이 제 하고 싶은 일을 맘것 하며 편한 삶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지금 요동정국의 한복판에 있는 예양대군이나 금양대군이 상대였다면, 두 번 생각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양군이라면 차고 넘치는 상대였다.
거의 두 달여를 고민한 끝에 허엽은 결정을 내리고서는 김성주의 집에 사죄의 예물을 잔뜩 보내어 혼약을 물리고는, 정식으로 흥친왕에게 딸 허초희와 인양군 사이의 중신을 봐 줄 것을 청했다.
“내 기꺼이 맡아서 해 드리리다. 대관은 걱정 말고 기다리기만 하시오.”
흥친왕은 자신이 아끼는 허씨 가문과 인양군 사이에 사돈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는 발 벗고 나서서, 직접 심왕부에 파발을 보내어 이 결혼의 가부를 물었고, 심왕 김유로 부터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렇잖아도 막내 아들 인양군을 어디에 장가 들게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던 심왕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심왕은 예전 황실이 혼맥을 통하여 요동의 내정에 간여했던 것처럼, 반대로 기왕 황성부에 머물기로 작정한 인양군을 통해 요동의 의사를 황성부에 반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양군이 흥친왕과도 친분이 생기고, 내각의 입김이 큰 허엽의 자제들과도 친해졌다는 말을 듣고서는 내심 속으로 여러 계산을 마친 뒤였다.
그에게도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속으로는 다들 이런저런 꿍꿍이가 있었겠으나 이 혼례는 결국 성혼되었다.
인양군 김율과 허엽의 딸 허초희가 백년가약을 맺으니, 1578년 선정 13년 봄의 일이었다. 허초희는 훗날 난설헌(蘭雪軒)이라는 당호로 더 알려지게 된다.
1579년 맹추(孟秋)
포르투갈령 인도 고아항(港).
인도 서해안에 위치한 고아(Goa)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경략의 전초지였다. 이 항구를 점령하고 교역 거점을 세운 포르투갈은 이곳을 통해 막대한 양의 무역품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수사(修士) 마테오 리치(Mateo Ricci)는 이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1552년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마체라타라는 소읍 출생으로, 1571년 예수회에 입문하여 동양에 가톨릭을 전교할 뜻을 품고 공부에 매진했었다.
로마 대학교에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에서 철학 과정을 이수한 다음 바로 건너온 곳이 바로 이곳, 인디아의 고아항이었다.
포르투갈 선박을 타고 리스본을 출발한 그는 당초에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할 생각을 했으나 이즈음 들어 더 동쪽의 중국으로 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중국은 거대한 땅이라, 그곳에 복음을 전한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네. 뜻을 두었으면 앞으로 중국에 건너가 중국의 관습과 말을 배워 보는 것이 어떤가? 그렇잖아도 포르투갈인들이 중국 남부에 마카우라는 거점을 마련해 두었으니, 그곳에 간다면 어떨까 하네만?”
고아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의 신학 공부를 지도해 주던 예수회의 안돌로 수사의 말에 마테오 리치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과연 그곳에 뜻이 있는지 아닌지 아직까지 확신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그곳으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일지 아직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저보다 분명히 유능한 사제들이 더 직분에 맡는 일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나 안돌로 수사가 보기에 마테오 리치만큼 이 일을 떠맡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 분야에 걸쳐서 식견이 뛰어나고, 또한 신학에 대한 이해도 넓었다.
언어를 빨리 습득하는 재주고 있었고,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가지 못한다면 누가 갈 것인가?
“좀 더 생각을 해 보게.”
안돌로 수사의 말에 마테오 리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분간 신학 공부를 잠시 쉬면서, 고아항에 나가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조선 사람 유견(劉遣)을 만난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유견은 송상(松商)의 행수였다. 송상은 인도양 무역에서 나상을 누르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포르투갈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나상 출신의 숙주 상인들이 결성한 인도고금상사에 의해 숙주항의 출입이 금지당했고, 때문에 대신할 항구로 포르투갈이 점령 중인 고아항을 이용하고 있었다.
송상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더 이상 서쪽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고아에 이르러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물품을 매각하고는 다시 동쪽으로 회항하곤 했는데, 포르투갈도 때문에 직접적으로 동방무역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고, 웬만해서는 송상과 함께 항로를 운영했다.
송상은 포르투갈 동방무역에 있어서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동방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믈라카 해협에 위치한 대한제국의 점령지인 상남항에 입항할 수 있도록 길을 뚫어준 것도 송상이었고, 중국 관료들과 대신 협상해서 마카우에 기항지를 만들어준 것도 송상이었다.
덕분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우까지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최근에는 송상과 협의하에 진서도독부까지도 배를 운용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포도주, 크리스털, 망원경, 탁상시계 같은 물건을 인도로 가져와 팔았고, 이곳에서 그 물건 송상에게 매각했다.
송상은 이것을 인도 내지와 아시아로 가져가 팔았다. 때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고아에서 멈추지 않고 상남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송상 상관을 통해 향료, 침향 등을 매입했고, 최종적으로는 마카우에서 도자기와 금, 사향 등을 매입해 들였다.
이러한 포르투갈의 무역 유통 과정의 모든 단계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송상이었다.
송상은 사실상 포르투갈의 무역망을 함께 이용하면서 이들이 아시아 지역의 내부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뚫어 주고 있었다.
즉, 포르투갈이 움직이는 곳에서는 송상도 함께 이문을 남기는 구조를 정착시켜 놓은 것이었다.
대중국 무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은 무역의 경우는 거의 조선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는 판국이었고, 아라곤이나 카스티야처럼 생산지도 확보하지 못한 포르투갈은 마닐라를 통해 들어오는 신대륙의 은을 확보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스티야인들은 경쟁국인 포르투갈의 입항에 적대적이었고, 때문에 포르투갈을 대신해 마닐라에서 은을 매수해 주는 것도 송상이었다.
이렇게 포르투갈과 송상의 협력은 동쪽으로는 마카우에서,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상을 뛰어넘고 아라곤, 베네치아 등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 경상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것이다.
유견은 이러한 포르투갈과의 협력을 담당하고 있는, 송상의 인도무역의 중심에 있는 간부였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마흔에 이르렀음에도 뒤늦게 배운 포르투갈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뿐더러, 광동 지방의 통화(通話)인 월어(패語, 광동어)와 유구어에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아에서 벌써 4년째 머무르고 있었는데, 주변에 친한 포르투갈인들도 여럿 있었다.
황성부의 조정에는 대양에서 이루어지는 일반 사무역에 대해 이렇다할 식견이 있는 대신이 없었고, 때문에 전반적으로 진출한 모든 지역에서 아라곤 왕국과 협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상이 포르투갈과 사실상의 사적인 동맹을 맺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제약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라 전체로 보면 제 살 깎아 먹기인 것을 유견을 비롯한 송상의 행수들도 잘 알고 있었으나, 확실히 적어도 송상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포르투갈과의 협력은 남는 장사였다.
인도양무역의 후발주자였던 송상이, 나상에게서 뺏은 이문을 포르투갈과 나누어 가짐에 따라, 그 규모가 점점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덕분에 선정연간에 벌어진 통보의 폭락 사태에도 불구하고, 송상은 건재할 수 있었다.
재빠르게 거래 수단을 요동폐와 두카트로 바꾸어 오히려 차익을 남겼고, 근래에 들어서는 내상과 협력을 구축하여 신대륙과 일본의 은을 마카우나 고아까지 실어 와서 포르투갈에게 넘기는 장사로 쏠쏠한 이문을 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진서에서 캐낸 구리를 싼값에 수출하기 시작해, 독일 지역의 동광(銅鑛)을 운영하는 상인들이 몰락할 정도로 유럽에 크게 풀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견은 매우 서양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친분이 있는 포르투갈인 예수회 수사를 통해 어느 날 마테오 리치와도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유견이라 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받은 유견의 첫인상은 매우 지적이고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보통은 귀족들이나 풍길 법한 분위기를 상인인 유견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마테오 리치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한국의 상인이시라 들었습니다.”
“먼 곳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고향 생각도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저 인도해를 오고 가는 많은 상인들 중 하나일 뿐이지요.”
두 사람은 포르투갈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테오 리치는 유견의 포르투갈어 실력에 놀랐고, 유견 또한 마테오 리치의 포르투갈어 실력에 감탄했다.
유견은 보통 상인은 아니었다. 그는 상인 중에서는 드물게 개성의 양반 집안 출신이었다.
젊은 날에는 황성부의 외학원(外學院)에서 공부를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었다. 그러나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지 못한 집안 내력 때문에, 뒷배를 봐줄 사람이 없어 관직을 결국 얻지 못했고 고향 송도로 내려와 상업에 몸을 담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유견이 세상을 보는 식견은 남달랐다. 그는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세에도 눈이 훤했고, 특히 인도의 토호(土豪)들이나 학자들과도 교유 관계가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곧 유견에게 감화받아서 그와 나누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천학이라는 것이 곧 당신네들이 믿는 종교라면, 하늘에서 내린 학문이란 말인데, 과연 그걸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 있겠소? 옛 말에 괴력난신은 함부로 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천주가 세상을 창조하고 땅에 법도를 내렸다는 말은 믿기가 쉽지 않소.”
“성자의 뜻은 구절을 달 수 있어도, 신의 법도는 인간의 뜻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법입니다.”
마테오 리치와 유견이 서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리치는 유견이 지적하는 말들에 마땅히 대답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아직 신학공부가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동방사람들과 자신과 같은 유럽인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공자와 부처 중 누가 더 중합니까?”
리치는 고민 끝에 어느 날, 유견을 만나서 불도를 공부해야 좋을지 아니면 유학을 공부해야 좋을지 물었다. 동방으로 건너가 전교를 하자면 그 나라 사람들이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바를 알지 못하면 곤란했다.
“삼한이나 중국이나 모두가 불법은 천히 보고, 유학은 떠받들지요. 한번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유견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대한 소양이 있는 선비였다. 비록 상인이지만, 기초적인 것을 리치에게 가르쳐 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어로는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고, 때문에 리치는 유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유견은 리치에게 한자와 중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좀체 쉽지 않습니다.”
리치는 빠른 속도로 중국어를 배워 나가 유견을 감탄케 했지만, 도리어 자신은 진척이 느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어나 카스티야어를 익힐 때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언어인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익혀야 할 글자가 수도 없이 많으니, 마테오 리치로서는 혀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2년 간에 걸쳐서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테오 리치는 차츰 유견을 가톨릭에 감화시켜 갔고, 유견은 반대로 마테오 리치의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었다.
“동방전교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 가 볼까 합니다.”
마테오 리치가 안돌로 수사와 상담 끝에 중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유견을 찾아오자, 유견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마테오 리치에게 말했다.
“가시기로 마음먹으셨으면, 그전에 내게도 세례를 받게 해 주십시오. 천학을 보다 마음 깊이 공부해 볼까 합니다.”
혼인도 하지 않고, 젊은 나이에 인도양으로 나와 오랜 기간 타향 생활을 했던 유견이었다. 믿고 의지할 만한 대상을 찾고 싶은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감격해서 유견의 손을 맞잡고서는, 고아에 있는 성당에서 유견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유견은 최초로 가톨릭 성사를 받은 조선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감사합니다. 마카우로 건너가서도 꼭 잊지 않겠습니다.”
마카우로 갈 마음을 굳힌 마테오 리치는 출발이 예정된 날까지 남은 넉 달 동안, 유견과 함께 머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한국에 가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미 정교회가 심양과 유구에 들어와 있으나, 로마의 법도를 전할 수사는 제국 내에 아무도 없습니다.”
유견은 마테오 리치에게 강요가 되지 않을까 해서 못내 고민을 하다 이야기를 꺼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유견의 제안에 마테오 리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만을 보고 있느라 한국으로 가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제안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에 들어가서 전교하는 것이 가능할지 어떨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유견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법도가 지엄하여 감히 허락 없이는 전교가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에는 전교자들이 이미 들어가 있다고 하나, 아직까지 한국, 특히 내지 팔도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진서에는 이미 예수회의 수사님들이 여럿 건너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같은 대한제국의 경내라 하더라도, 종교정책에 있어서는 차이가 매우 컸다.
내지 팔도는 여전히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고, 불교에 대해서도 깔보는 시선이 여전했다.
반면에 진서에서는 불법(佛法)이 성행하고 있었고, 도독부의 허가 하에 예수회 선교사들도 이미 서넛이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었다.
요동은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흘러들어 온 유민들이 전한 정교회 신앙이 꽤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요동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이렇다 할 주관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 바로 요동이었다. 영주에서는 잡다한 종교가 성행하여, 신대륙의 아라곤 인들로부터 전해진 가톨릭 신앙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받아들인 유구인들이 가지고 온 정교회 신앙, 그리고 불교와 도교도 성행하고 있었다.
척박한 개척지에서 의지할 대상을 찾는 이가 늘어나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지에서 전교하는 것은 아직까지 전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영향을 짙게 받은 내각의 대신들이 허락을 해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유견은 마테오 리치에게 선뜻 한국의 전교에 대해 확신을 줄 수 없었다.
“우선은 마카우로 가 보겠습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길을 마련해 주시면 한국에도 갈 수 있겠지요.”
마테오 리치는 고민 끝에, 우선은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마카우에는 이런저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는 즉시 전교 활동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유견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리치의 결정을 존중했다.
“이곳 인도에서의 생활이 정리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때 중국을 거쳐 들어갈 테니, 혹여 그때도 뜻이 있으시다면 함께 한국으로 가도록 합시다.”
유견은 리치를 얼싸안았다.
곧 마카우로 가는 배가 출항할 터였다. 마테오 리치가 타기로 한 배는, 포르투갈 선적이 아니라 송상의 배였다.
유견이 내어준 유복(儒服)과 관을 입은 리치는, 이제부터 동방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밤낮으로 비를 퍼붓던 몬순의 계절도 끝나가고 있었다.
고아항으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타고 리치를 태운 송상의 배는 닻을 올렸다. 1579년의 일이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