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장 각곡유목(刻鵠類鶩)
「痛(이ㅅㄷㅏ미)모全部(모다)忘(이즈)ㅅㅌㅔ
疊山(세ㅅ산)노險途(모지누이미치)오고ㅅ눈고토와
佛陀(부ㅅㄷㅏ)케니行(이)쿠爲(다메)나이다」
―다이나이유한(大內惟恒), 〈즈이란산사(登覽山寺)〉, 1580.
1579년
선정(宣定) 14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崎州府).
바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직 밖은 해가 오를 시간이 아니었다.
세밑의 한겨울이라 이불을 몸에 둘러쳐도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는 어찌할 수 없었다.
대내성(大內盛)은 결국 잠에서 깨고 말았다.
대내성은 원래 진서의 으뜸가는 명문 벌족인 백제공가(百濟公家), 즉 대내씨(大內氏, 오우치시)의 많은 자손들 중 하나였다.
그의 현조부(玄祖父)가 대내성세(大內盛世, 오우치 모리요)였다. 대내성세는 백제공의 작위를 처음으로 하사받았던 오우치 모리미의 조카이자, 제2대 백제공이었던 대내지세(大內持世, 오우치 모치요)의 셋째 아들로, 그 이후 대내성세의 후손들은 대대로 본가(本家)에 봉직하면서 대내씨의 근거지인 야마구치에 살아왔었다.
그러나 다른 진서의 한속대명(韓屬大名, 칸조쿠다이묘)들과 다르게 대내씨는 큐슈가 아닌 혼슈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고, 전국의 난세로 접어든 일본 내지의 정세는 시시때때로 짙은 그림자를 야마구치의 성 밑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서에서 강고한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던 대내씨는 대한제국에 신속한 뒤로도 백오십 년을 내려오며 강고하게 버텨왔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쌓은 성벽도 돌보지 않으면 세월 속에 저절로 허물어지듯이, 백제공가는 점차 이런저런 이유로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후계자들은 점차 나약해져 갔고, 칼을 들지 않고 진서군의 무력에 의존하기 시작한 휘하의 무사들은 싸우는 법을 잊었다.
전대 백제공이었던 대내의륭(大內義隆, 오우치 요시타카)의 때에 결국 국경 바로 바깥에 자리하고 있던 아마고(尼子) 가문과 충돌이 장기화되었고, 이 와중에 대내씨의 가신이었던 도청현(陶晴賢, 스에 하루타카)이 모반을 일으켰다. 이런 난국을 이용해 이 지방의 이름 없는 호족 중 하나였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부상해 대내씨를 완전히 혼슈에서 몰아내게 되었다.
이 결과 백제공가는 조락(凋落)을 도저히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혼슈에 있던 근거지를 모두 잃고 진서, 즉, 큐슈의 조그만 영지로 밀려난 백제공가는 공가(公家)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대내의륭과 그 자손들이 모두 그 와중에 전사하였기에, 대내의륭의 사촌인 대내휘홍(大內輝弘, 오우치 테루히사)이 당주로 옹립되었다.
대내휘홍은 절치부심한 끝에 혼슈로 진격하는 것에 회의적인 진서군 수뇌부를 간신히 설득하여, 10년만에 진서군 병력 1만 5천을 이끌고 혼슈로 진격했다.
한때 야마구치를 점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서군의 대부분이 야마구치를 되찾자마자 다시 진서로 철수했고, 이 와중의 병력 공백을 틈타 모리씨가 대대적으로 반격해 옴에 따라 결국 대내씨는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진서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내휘홍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대내씨의 몰락은 기정사실화되었고, 아무도 대내씨가 다시 그 옛날의 영광스럽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내성은 그런 와중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렇잖아도 본가와는 핏줄이 점점 멀어져 가는 방계 출신이었기에 집안의 가세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본가까지 몰락하고 나니 형편이 어떻게 보아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 와중에 대내성의 아버지인 대내휘신(大內輝信, 오우치 테루노부)까지 대내휘홍을 따라 복수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해 버려 대내성은 홀어머니 밑에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공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진서도독부에서 나오는 쥐꼬리만큼의 곡물과 어머니의 날품팔이로 대내성은 겨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대내성은 그 와중에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진서의 상학(庠學)에 좋은 대우로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학을 간신히 졸업할 즈음 홀어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말았고, 그는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조정에 출사하고자 하는 욕망도 마음 한 곳에 접어두고서 외지부(外知部)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외지부는 굳이 말을 바꾼다면 변호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백여 년에 걸쳐 대한제국의 법률 제도가 정비되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송사(訟事)가 급증하면서 덩달아 등장한 공인되지 않은 직업이었다.
글을 모르거나 법에 어두운 사람들이 송사에서 불리하지 않게 도와주고 얼마의 사례를 받던 사람들이 이내 외지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개중에는 전문적으로 법을 공부해 공개적으로 송사에서 원고(原告)나, 척(隻, 피고)를 대신하여 변론하는 이들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 때문에 소송이 번잡해지고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게 될 뿐더러, 소송거리가 되지 않는 것까지 재판에 오르내리게 된다고 판단해 이들을 엄격히 단속하기도 했으나, 외지부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음성적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하나 대내성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외지부라는 일도 법률에 조예가 있고, 송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인맥을 트고 있어야 제법 잘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한낱 이제 막 상학을 졸업한 풋내기인 대내성이 맡을 수 있는 일은 소장(訴狀)을 대서해 준다거나 하는 일 정도였다.
살림 형편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혼도 차일피일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나이는 스물셋이 다 되었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겨우 안면만 있는 대내씨 종가의 어른들을 찾아가 입관(入官)을 부탁하여 보았으나, 제 앞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종가에서도 대내성까지 돌보아 줄 여력은 없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겨울이면 외풍이 고스란히 스며드는 다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목조 가옥에서 간신히 잠만 자고 입에 풀칠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진서는 남쪽이라 본디 따뜻한 지역이고, 때문에 겨울에는 집안에 화로를 틔워 난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국에 복속한 이래로는 신분 좋고 재력 있는 이들은 내지풍속을 받아들여 온돌을 놓기도 했으나, 그럴 여력이 되지 않는 이들은 짧은 겨울을 화로에 의지해 나곤 했다.
그나마도 대내성은 겨우 다다미를 여섯 장 깐 육첩방 한 칸에 화로 하나 들여놓을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겨울에는 옷을 최대한 껴입고 다 헤어진 이불에 몸을 뉘여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며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날도 새벽녘 차가운 공기에 잠을 깨고 만 대내성은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대내성은 기주부 항구에 접한 길목의 여각(旅閣)을 생각했다. 이층의 크지 않은 객줏집이었다.
널대문 하나 젖히고 들어서면 길고 좁다란 마당을 타고 낡은 기왓장을 인 집 한 채가 누워 있었다. 낡고 기울었지만, 묘한 균형이 잡혀 있는 여각은 그곳에 자리 잡은 지 백 년쯤 된 나름 유서 깊은 곳이었다.
대내성은 그곳에서 그 아이를 처음 보았다.
며칠 전, 어느 기주 토박이 장사치의 소장을 대서해 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날 밤 눈이 꽤나 내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꿈치가 쌓인 눈 위로 들썩였었다. 거리는 하얀 백포(白布)를 깔아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객줏집이 자리한 골목을 지나갈 때, 대내성은 차가운 날씨에 주춤거리며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보듬어 쓸어내던 그 아이를 보았다. 이름이 연향(蓮香)이라고 했다.
차가운 바람에 시려진 손을 불어가며 눈을 쓸어내던 그 아이가 왜 그리도 눈에서 기웃거렸는지.
대내성은 그날 장사치에게서 받은 품삯을 조금 덜어 따뜻한 교자를 사다가 입김을 불어 언 손을 데우던 그 아이에게 건넸다.
나긋한 웃음으로 한 입 만두를 베어 물며 수줍게 웃던 그 미소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아 대내성은 며칠 사이 그 앞을 서성거리곤 했다.
바람 찬 겨울 내내 그녀는 부지런히 여각의 일을 돕고 있었다.
본래 내지 충청도 어딘가의 아전 집 여식이라고 했다.
듣기에 어떠한 사정으로 몸 붙일 곳이 없게 되어 당숙인 여각 주인 송씨에게 맡겨진 것이라 했다. 송씨는 제 딸인 것처럼 그 아이에게 잘해주었지만, 여각의 사정이 그닥 변변치 못해 일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얗고 깨끗했을 손에 굳은살이 붙었지만, 굳은 바람을 아무리 맞아도 어딘가 모르게 청아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얼굴만큼은 색이 바라지 않았다.
대내성은 한 달쯤 전, 어렵사리 그녀와 말을 텄다. 연향은 수줍음을 잘 타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녹두향이 진한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면 한 가닥 풀어져 나와 곱게 흔들렸다.
대내성은 애써 말을 시키려 하진 않았다. 그냥 한 발짝 떨어져 앉아 그녀가 부엌에서 차려 나온 주안상을 객상 위에 걸쳐 놓고, 그녀가 바삐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혼자 물끄러미 보고 있다 가끔 연향이 자신에게 시선을 줄 때면 왠지 모를 따뜻함에 마음이 편해졌다.
대내성은 자신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음을 알았다. 형편이 되지 못해 여자라고는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그였으나, 그렇다고 마음이 절로 움직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형편이 나았어도 송씨를 찾아가 조카딸과 혼인하고 싶다고 청해 보기라도 했으련만, 화로 하나 들여놓을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살림이 낯부끄러워, 여식을 내어 달라고는 죽어도 입을 떼지 못할 터였다.
일찌감치 눈을 떠 버린 대내성은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틀 녘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찬바람이 몸을 에는 듯했지만 그래도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연향을 보고 싶어 여각으로 발걸음을 옮길까 하다가, 대내성은 발걸음을 진서도독부의 관헌(官憲)으로 옮겼다. 혹여나 말단 아전이라도 자리가 있나 알아보러 간 것이었다.
“일할 사람은 넘쳐 나고 일할 자리는 적으니, 요즘에는 아전 노릇 하는 것도 실력이 출중하거나 집에 돈줄이 좀 있어야 합니다. 상학을 나와 조선말에 능통하고, 한문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지라도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어디 줄 댈 데는 없으시오? 연줄이라도 타면 그나마 쉽게 자리가 나올 터인데.”
종종 찾아가 안면을 튼 진서도독부의 아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내성은 그저 알겠노라고, 그래도 혹여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달라고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퇴짜를 맞고서는 하루 종일 기주부 거리를 돌아다니며 혹여 외지부를 찾는 사람이 없나 수소문하고 다녔다.
돈이 되는 송사는 모두 능력 좋은 외지부들이 가져갔으니 대내성이 맡을 수 있는 일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종일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다가 어느덧 해가 졌다. 이제 곧 새해가 밝아올 터였다.
그러고 보니 대그믐이라 달이 실낱같이 가느다랗게 떠올라 있어 달빛조차 쓸쓸했다.
밤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하늘을 쳐다보니, 대내성은 어쩐지 달이 서글퍼 보였다. 마치 그 쓸쓸함이 자기 신세 같아서였다.
수중에 돈은 몇 푼 없었지만 술 생각이 간절했다. 아니, 어쩌면 연향을 보고픈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대내성은 집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되돌려 여각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향은 웃으며 그를 반겨 주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웃음에 대내성은 어쩐지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 자란 사내장부가 어째 우십니까?”
대내성의 울음에 깜짝 놀란 연향이 그를 뒤쪽 행랑채로 데려와 다독였다.
“그게 다 옛 사람들이 허언하는 겁니다. 사내도 모름지기 사람이건대 심정이 답답하면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답답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라도 말씀해 보세요.”
대내성은 연향에게 그간의 일을 두서없이 지껄였다.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그리고 상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더 공부할 형편이 못되어 외지부 일을 시작했던 것까지.
밤이 깊어지고 밖은 조용했다. 대내성은 연향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둘이 이렇게 가까이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연향의 숨결은 따뜻했다.
만월이 문에 어리어 일렁이고 있었다. 대내성은 가만히 연향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곱게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러운 눈매에, 고운 눈동자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향이 내어 온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키며 대내성은 연향에게 가슴에 품고 있던 모든 이야기를 토해냈다. 그간 말할 곳 없이 응어리져 있던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연향에게, 어쩐지 대내성은 말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다 그리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 밤, 대내성은 연향과 자리를 함께했다. 그녀의 작은 젖가슴은 가볍게 뛰고 있었고, 몸은 따뜻했다. 밖에서는 소쩍거리는 새 울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
한 밤, 술이 깬 대내성은 옆에 누워 있는 연향을 느끼고서는 흠칫 놀랐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서는 그는 깜짝 놀랐다.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도망치듯이 여각을 뛰쳐나왔다. 사랑하긴 했으나 그녀를 처로 맞아들인다면, 그녀가 평생 고생해야 할 길이 너무 훤했기에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술기운에 그녀의 몸을 탐해, 정조를 잃게 만들었으니 이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한데 휘몰아쳐 대내성의 심장을 터질 듯 뛰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기주부 항구가 보이는 곳에 달려가 주저앉았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하늘이 끔찍이도 무서웠다. 이렇게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감히 부모가 물려준 몸을 바다에 던질 각오는 하지 못하고, 그는 비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연향에 대한 미안함이 사무치듯이 밀려왔다. 여자를 품에 안은 기쁨보다는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다.
연향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기에 대내성은 울음을 삼키고서는 도피를 결심했다.
감히 어찌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기주부에 눌러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또 볼 것인가.
“차라리 이렇게 부끄럽게 사느니 불가에 의탁하는 것이 낫겠다. 속세에는 더 이상 미련 없이 그녀가 행복하게 살도록 공양이나 하리라.”
몇 없는 짐을 챙기고서는, 그는 허름한 집이나마 혹여 속죄가 될까 하여 연향의 이름 앞으로 양도한다는 서간을 남겨놓고서 무엇에 홀린 듯 기주부 성문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막연하게 북쪽으로 가는 길을 걸어갔다.
박주(博州)에 이르러서 오래된 명찰(名刹)인 동장사(東長寺)에 찾아간 대내성은 불문에 귀의할 것을 청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806년에 공해(空海)라는 이름의 승려가 당에서 불법을 배워온 뒤에 하카다, 즉, 박주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니 거진 800년의 연혁을 가진 고찰(古刹)이었다.
가톨릭이 퍼져 나가 불교에 대한 지원이 줄어드는 여건이 좋지 않은 시절이었으나, 동장사는 진서뿐만 아니라 내지에도 이름이 난 절이기에 사찰의 살림은 괜찮았다.
대내성의 몸 하나 의탁하는 정도는 받아 줄 여력이 있었다. 동장사는 대내씨의 후원을 받아 왔었고, 그 정리로 대내성을 내칠 수 없었던 사정도 있다.
“법명은 유항(惟恒)이라 하게.”
절의 주지로부터 법명을 받고 머리를 모두 민 뒤에, 대내성은 백 일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했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는 가운데에도 유항은 몸을 눕히지 않았다. 앉아서 잠을 자고, 잠이 깨면 여전히 앉은 채로 참선하고, 그렇게 백 일을 하고 나니 어느덧 봄이 한창이 되어 절의 안뜰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절 뜰 안에 피는 벚꽃은 피안앵(彼岸櫻)이라 했다. 속세의 번뇌를 잊고 극락을 생각하게 해주는 꽃이라서 그리 부른다.
봄바람에 흩어지는 벚꽃을 가만히 앉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깨달음이 유항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春(하루)노微風(산데ㅅ하란)에
봄날 산들바람에
花葉(하나비라)가吹雪(후부키)
꽃잎이 눈보라처럼 날리니
笑(피)고散(지)루事(고ㅅ)모다諸行無常(제헨무산)
피고 지는 것이 모두 제행무상
급히 붓과 먹을 찾아 심상을 풀어 내니, 승려들이 다가와 글을 읽고서는 감탄을 마지않았다.
진서 일대의 불가(佛家)에는 이 무렵, 진서어로 법어(法語)를 간결하게 적는 소위 사장(詞章)문학이 발달해 있었다.
총 3행으로 완성되는 일종의 정형시였는데, 사찰에서 뿐만 아니라 진서 전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이름난 승려의 사장은 책으로 묶여 팔렸고, 속세의 처사들이 지은 법사는 속칭 세사(世詞)라 불리며 널리 읽히고 있었다.
안에 담긴 뜻만큼 문장을 세련되게 쓰는 것 또한 중요했는데, 대내성, 즉 유항이 쓴 글에 사장으로 이미 유명한 동장사의 승려들이 감탄을 마지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잘 쓰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법사(法詞)로 깨달음을 표현하긴 했으나, 유항은 글줄로 공명을 얻는 것에는 뜻이 없었다.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틀어박혀 참선하는 생활을 계속하며 간간히 드는 생각만 법사로 풀어내곤 했는데, 남긴 작품은 많지 않으나 진서에서는 그 이름이 유명하게 되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그의 법사는 진서어로, 그의 성인 대내(大內)를 읽은 ‘다이나이’와 법명인 유항(惟恒), 즉 ‘유한’을 한데 묶어 ‘다이나이유한’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알려졌고, 그중에서도 “산속 절간을 오르며 보다”라는 뜻을 가진 〈즈이란산사(登覽山寺, 등람산사)〉란 제목의 법사가 특히 널리 애송되었다.
유항은 생애에 불가의 가르침과 관련 없는 세사로 분류될 수 있는 글을 딱 하나 남겼는데, 바로 동장사에 참배하러 왔다가 기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고 쓴 글이었다.
遠(하루카)崎州(기쥬)노市廛(죠사코리)에
멀리 기주의 저잣거리에
戀(게)ㅅ다女人(뇨지)가이ㅅ나이다
괴었던 여인이 있나이다
歸(카)에루時期(도키)니書札(쇼사쓰)루傳(데ㄴ)헤쥬료
돌아가는 길에 서찰을 전해주료
편지는 아마도 연향에게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미안함을 담았을지, 혹은 미련을 담았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유항은 평생 불문에서 승려로 살아가며 속세로 돌아오지 않았다.
1580년
순화(順和) 원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
1580년, 제국 전역에 새 연호인 「순화(順和)」가 선포되었다. 새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예기치 못한 와중에 일어났다. 거년(去年)의 그믐달에도 황성부의 대신들은 새로운 연호를 선포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선정제는 이미 대전에 발길을 끊고 내전에 틀어박혀 얼굴을 내보이지 않은지 오래라, 내각의 대신들은 황제에 대해 크게 고려치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선정제는 젊은 나이에 황제에 등극하여 패기 있게 정치를 주관하고자 했으나, 경복궁의 중건과 그에 수반한 악화(惡貨)의 발행에다가, 그에 맞물려 신대륙에서 대량 유입된 은이 물가의 폭등을 가져오는 바람에 실정을 한 황제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결국, 암군의 멸칭을 듣고 싶지 않았던 선정제는 채 몇 년의 정치를 끝으로 전면에서 물러나 내각에 대권을 환봉했던 것이다.
그 뒤로 선정제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오로지 주색과 잡기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고, 정사에는 일체 관심을 끊었다.
내각이 그나마 삐걱거리면서라도 굴러가지 않았으면, 적어도 내지에서는 혼란을 면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내각에서는 황제가 다시 친정을 하겠다고 나설 것을 우려하여 은근히 선정제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부추겼고, 모자란 재정에서도 황실로 들어가는 내탕금(內帑金)만큼은 넉넉하게 채웠다.
이런 가운데 황제가 매독을 앓게 된 것도 별난 일은 아닐 것이다. 궁내의 궁녀들을 모두 건드리고 다닌 황제는,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자의 유녀(遊女)들까지 끌어들여다가 중건되어 화려하게 치장된 경복궁의 별전(別殿)에서 밤낮으로 연회를 벌였다.
그중 누구에게서 매독을 옮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제는 난잡한 생활을 몇 년에 걸쳐서 했다.
매독이란 것이 그렇지만, 처음에는 궤양이 나타나도 통증이 그다지 없고 금방 사라지고 만다.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알았던지 선정제는 내의(內醫)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고, 잠시 호전되었던 병세가 다시 도졌을 때야 궁내의 의관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증은 갑작스레 심하게 진행되어 궤양이 내장에 퍼져 나갔고, 이미 이 사실이 내각에도 전해졌을 때에는 자리에서 거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던 것이다.
나이 서른아홉의 겨울, 선정제는 새해를 며칠 남겨두지 않고, 대금이 다가오는 밤에 숨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가붕에 놀란 것은 내각이었다. 선정제는 적자를 두지 않았고, 서자도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태자로 아직 봉해지지도 않은 어린아이였다.
유언도 남기지 않은 터라, 내각에서는 급하게 황제의 가붕을 알리는 것을 이틀 미루고, 이 어린아이인 은친왕(恩親王) 권(챡)을 태자로 선포했다.
따로 책봉식도 없었고, 다음 날 바로 황제의 상청이 차려진 탓에 새해 정초부터 정국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선정제의 시호는 「영종흠천성명관인공민신무헌문지정사효헌황제(英宗欽天誠明寬仁恭閔神武憲文至定思孝憲皇帝)」로 올려졌다. 곧 영종(英宗) 헌황제(憲皇帝)이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새 황제인 순화제가 즉위하였으나,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가 정사를 볼 수 없는 노릇이니, 명목상 섭정이 필요했다.
내각에서는 궁궐 내의 여인들이 수렴청정으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질색했고, 때문에 급하게 제의를 받은 것이, 선정제의 동생이자 순화제의 숙부 되는 흥친왕(興親王) 기(琪)였다.
“부디 섭정의 작위를 가납하여 주십시오.”
사림당 계열로, 내각 재상의 자리에 앉아 있던 노수신(盧守愼)이 황급히 동대문 넘어 배봉산 터럭에 자리한 흥친왕저로 달려가서 김세훈, 김현도 이래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섭정공의 인(印)을 들어다 바쳤다.
이제 그 나이 겨우 스물여섯인 흥친왕은 당황해 사절하였으나, 노수신은 끈질기게 섭정공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했다.
이토록 어린 황제를 두고 섭정의 자리를 두지 않으면, 엄한 이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내각을 휘두르려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수신을 비롯한 대신들은 여태 정치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이며 사냥과 유락을 즐기는 흥친왕을 명분상 섭정공의 자리에 앉혀 놓으면, 내각에서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 훨씬 용이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재상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히 부끄러운 노릇이나 섭정직을 받아들이겠소.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소이다.”
이미 친왕의 작위를 가진데다가, 황숙(皇叔)의 신분인 흥친왕을 공작(公爵)의 품계인 섭정공에 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편법으로 내각에서는 섭정왕(攝政王)의 작위를 상신하여 받아들이게 했다.
이렇게 전례 없이 어린 황제와 그에 못지않게 젊은 섭정왕이 동거하는 기묘한 제실(帝室) 정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섭정직에 오르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부디 앞으로 황상을 성군으로 훌륭히 인도하시고, 내각을 편달하시어 나라의 정사를 잘 이끌어 나가실 줄, 소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사옵니다.”
어수선한 새해의 몇 달이 지나가고, 가을이 올 무렵에 정식으로 섭정에 봉해진 흥친왕을 찾아 주변의 가신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흥친왕은 이미 학습원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재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곁에 가까이 두고 있었고,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워 왔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까이 한 이들을 꼽자면, 허엽의 세 아들들인 허성(許筬), 허봉, 허균(許筠)의 삼형제와 당대 심왕인 김유의 서자 인양군(仁養君) 김율(金聿), 젊은 재사로 유명을 떨치기 시작한 이항복(李恒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이 그 면면이었다.
이들은 공부를 마친 지 오래지 않았거나 혹은 아직 수학을 계속하는 중으로 당장 정계와는 연을 맺지 않고 있는 이들이었다. 때문에 흥친왕과 그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내각에서는 그다지 우려하지 않았다.
“내각에서는 전하를 가벼이 보고, 이름만 섭정으로 내걸라고 자리에 앉혔을 겁니다.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은 뒤에 그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 상황에서는 옥쇄에 버금가는 섭정의 인이 전하께 있으며, 내각에서는 좋든 실든 이 섭정인을 받지 못하면 효력 있는 정무를 펼칠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늘 이점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 나이 서른하나로, 흥친왕의 측근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허성이 자세를 고쳐 잡고 진지하게 진언했다. 그는 이미 성균관을 졸업하고 대과에도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가 있었다. 곧 정식으로 관직을 제수받아 출사하기로 예정된 몸이었다.
“공언(功彦, 허성의 자), 고는 그저 제실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책무를 떠맡은 것뿐이다. 지금은 그런 말을 논할 때가 아니야.”
허성의 말에 흥친왕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로, 그는 사랑방에 그와 마주하고 앉은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무언의 기대와 들뜸이 그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하오면 전하께서는 섭정인을 쥐시고서도 지금의 구태의연한 정사를 방관하실 요량이십니까?”
허균이 흥친왕에게 엎드려 조아렸다. 자세는 예절이 있었으나, 목소리는 사랑방에 쩌렁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흥친왕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지금의 정치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젊은 허균에게, 흥친왕이 섭정직에 오른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던 것이다.
흥친왕이 칼을 빼어 든다면 그는 참모로 그 일을 보좌하는 것이 그가 가진 내심의 꿈이었다.
허균뿐만이 아니었다. 흥친왕을 둘러싸고 앉은 측근들 모두 흥친왕이 한 태조 유방이 되려 한다면 이들 모두 그의 한신, 장량, 소하가 되어줄 사람들이었다.
흥친왕은 그 어깨가 갑작스레 무겁다고 느꼈다.
예기치 못한 선황의 죽음으로 얼떨결에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섭정직에 오른 그였다. 물론 그에게도 포부가 있고 꿈이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어떤 식으로 형인 선정제가 황제의 옥새를 휘두르다가 자기 스스로 몰락해 가는지 지켜보았던 흥친왕은 정사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설사, 섭정직을 이용해 정략(政略)을 펼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흥친왕은 생각을 가다듬고서는 한편에 앉아 말없이 오고 가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인양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같은 허균의 성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유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인양군 같은 이가 딱이었다.
더군다나 인양군은 심양의 심왕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궁중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흥친왕이 생각하는 것과 한가지로 생각하고 있을 이는 이 자리에서 인양군뿐이었다.
“인양군. 그대 생각을 좀 말해보게.”
인양군 김율은, 흥친왕의 부름에 조용히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엎드려 몸을 낮출 때입니다. 비록 공언의 말마따나 전하를 쉬이 여겨 내각에서는 섭정인을 건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저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 어떤 방식으로든 전하께서 저들의 뜻에 반해 권력을 행사하려 하시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길을 막아설 것입니다. 설사 내각의 노회한 대신들이 우선 전하의 존재에 대해 안심하고, 진정으로 의심의 눈길을 거두게 되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더욱 차분히 기다려야 합니다. 의심은 빠르게 걷히나, 또한 언제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법입니다. 그간 천천히 정사를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장악해 나가서야 합니다. 때는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섭정의 정치가 비로소 땅에 뿌리를 깊게 박은 나무가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뜻을 펼칠 때입니다.”
인양군의 말이 바로 흥친왕이 바라던 대답이었다.
온갖 권모술수가 오고 가는 궁중의 내막을 몸소 체험해 본 이들이야말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젊은 피는 겉보기에는 패기가 있고 강단이 있으며, 이상적인 정치를 추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사에 깊게 손을 뻗고 있는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보다 몇 수 앞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
조광조가, 선정제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혈기 좋게 칼을 쥐었다가 몰락했던가.
흥친왕은 자신의 이름이 그들의 뒤에 오르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의 측근들은 모두 뛰어난 재사들이었으나,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바로 연륜이었다.
이들은 세상을 쉽게 보았고, 뜻하는 바가 있고 노력이 따른다면 모든 것을 성취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성의가 아니라 사실은 이해관계였다.
지금은 내각의 노대신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기에 흥친왕이 섭정직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이해가 어긋나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된다면 언제고 도리어 저들에게 팽(烹)당하는 수가 있었다.
제국은 이백 년 가까이 걸쳐 신권과 황권이 때로는 서로 조력하고, 때로는 대립해 오며 권력의 분산이 이루어져 왔고, 특히 그중에서도 약한 쪽은 황권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 황권을 잠시 위임받은 섭정의 권력은 내각의 지지 없이는 부평초(浮萍草)나 다름없었다. 섭정의 도장을 쥐고 있어도, 그 위세를 아무도 떠받들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언제고 다른 인물을 섭정에 앉힌다거나 재빠르게 어린 황제의 신변을 장악하고 유야무야 친정을 선포한 뒤 내각에서 직접 황제를 통제하려 할 수도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흥친왕은 그저 내각이 황제를 배제하고 정치를 독단하려는 것을 모양상 부드럽게 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씨 형제들의 말처럼 황권을 대리해서 정치 개혁에 나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흥친왕과 인양군은 그러한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비록 이들이 허씨 형제들이나, 이항복, 이덕형만큼 문리가 트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만큼 몸으로 체득한 정치의 법칙이 있었다. 그들의 혈기가 바로 이런 냉정한 판단으로 제어되어야만 했다.
“어찌 되었든, 내일부터 나는 매일같이 궐에 등청하여 어린 황상이 계시든 부재하시든 내각에서 올라오는 장계에 섭정인을 찍어야 하네. 나는 가부를 묻지 않고 도장을 찍을 생각이네. 지금은 허수아비가 되어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허장성세를 부릴 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닦아야 할 때란 말이네. 그러니 부디 그대들도 엉뚱한 소리를 퍼뜨리고 다니지 말고, 필요할 때 내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학업에 정진하게. 어서 대과에도 급제하고 관직도 사여받아 궐각마다 하나씩 자리를 꿰차고 앉으란 말일세.”
흥친왕의 말에 허균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대망을 꿈꾼다고 갑자기 발이 천 리를 나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큰 꿈을 벼리면서 한 걸음씩 우직하게 천 리를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1582년
텐쇼(天正) 10년 중하(仲夏)
일본국 키나이(畿內) 야마시로노쿠니(山城國) 혼노지(本能寺).
그날 밤, 혼노지(本能寺)는 붉은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달의 빛을 삼키며 하늘을 가득 메우고, 비명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서 노부나가의 신병을 확인해라!”
수백의 군세가 혼노지의 경내에서 뒤엉켜 있었다.
이때 혼노지에는 일본 전국(戰國)의 혼란을 종식시킬 가장 유력한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가 잠시 군막을 설치하고 머물고 있었다.
혼노지가 공격받은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오다 노부나가의 신병이 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오다의 오랜 적들이 아니라 바로 그의 막하(幕下)에 웅크리고 있었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였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주요한 숙적 중 하나였던 다케다(武田)씨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서 귀환한 직후, 서쪽의 모리(毛利)씨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해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를 원호(援護)하기 위해 출전할 것을 명받는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1만 3천의 원군을 이끌고 나섰고,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가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계속해서 원군을 요청하는 서찰이 날아들었기에,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보낸 뒤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의 원정에 나설 결심을 하게 된다.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이참에 아주 모리씨를 지도에서 지워 버릴 결심을 하고 있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쿄토(京都) 혼노지에 거취를 잡고 이곳으로 배하의 병력을 집결시킬 것을 명했다.
닥쳐오는 위협을 알지 못하고, 오다는 이곳에서 차회(茶會)를 열고 있었다.
전국시대를 거쳐 온 일본의 여러 사찰들이 그렇듯이, 혼노지 자체도 완전히 개방된 방비 없는 절은 아니었고,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성새(城塞)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 하시바 히데요시를 돕기 위해 서쪽으로 가고 있어야 할 아케치 미츠히데는, 돌연 군세를 돌려 쿄토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한 아케치는 모반을 결심하고 전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휘하의 일부 중신(重臣)들에게만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반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리고, 일반 무사들과 병졸들에게는 오다의 명을 받아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치러 간다고 알렸다.
이 1만 3천의 군세는 아케치의 장기말이 되어 차근차근 오다의 목을 죄기 위해 혼노지로 향해 갔던 것이다.
“아케치 님, 노부나가의 사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잿더미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새벽녘, 오다 노부나가가 겨우 백여 명의 가신들과 혼노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습격을 단행한 아케치 미츠히데였다.
혼노지를 샅샅이 포위하고 공격했으니, 절 안에 그의 사체가 있어야 했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곤혹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일을 벌인 이상 돌아설 수 없다. 천하에 명백하게 오다의 수급을 직접 드러내 보이지 않는대서야 언제고 그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하시바 같은 놈들이 내 목을 죄러 오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져라.”
아케치 미츠히데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빨리 노부나가의 수급을 찾아서 군세를 일단 물린 다음에, 차근차근 쿄토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아, 아케치 님. 노부타다가 방금 쿄토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별동대를 보내 막아서게 하였으나, 결렬하게 저항하여 결국 붙잡지 못했습니다.”
노부타다(信忠)는 다름 아닌 오다 노부나가의 적자(嫡子)였다.
아버지와 함께 출정하기 위해 쿄토에 올라와 혼노지가 아닌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다가 참변을 알고 도망친 것이었다.
그러나 아케치 미츠히데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아버지가 기습을 당한 것을 알고 지척에 있으면서 구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을 노부타다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생사도 모른 채 꽁지를 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젠장!”
아케치 미츠히데는 머리에 둘러쓰고 있던 카부토(兜, 투구)를 거칠게 바닥에 던져 버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다의 주검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 아들인 노부타다가 도망치고 있다면 결론은 뻔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서 빠져나가 노부타다와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서 빨리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해 샅샅이 추포망을 펼쳐라. 한 놈도 그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말이다!”
“옛!”
아케치의 명을 받고 부장들이 황급히 뛰어갔다.
그러나 아케치의 안색에는 어떠한 기대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일을 그르쳤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니 이제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으나, 천하의 오다가 이런 습격에서 살아남은 마당에 순순히 붙잡혀 줄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소식이 이제 사방으로 알려질 것이고, 오다가 살아 있다면 그의 막하에 있던 많은 장수들이 자신의 목을 치기 위해 병력을 일으킬 것이었다.
‘쿄토에 남아 있어야 하나, 아니면 지금에라도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해야 하나, 아니면…… 일이 잘 안 되면 할복밖에는 답이 없는 것인가?’
아케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명쾌한 해답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적지 않은 기간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왔었다. 아케치는 오다에게 중용되었고, 그의 명을 쫓아 일본 전역으로 군사를 이끌고 다니며 싸워왔었다. 그럼에도 모반을 결심했던 것은, 오다의 이상이 자신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패왕(覇王)이었다. 그는 관습과 전통을 경멸했고,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일본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천황도 경외하지 않고, 부처도 섬기지 않고, 오로지 현실만을 보며 전국의 난국을 수습해 나가는 오다 노부나가를 사람들은 경외했다.
아케치 자신도 그랬다.
하나 경외라는 것은 공경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두려움도 그 의미에 들어 있는 것이다.
사실상 전국 난세의 종결을 눈앞에 두고 쿄토까지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를 기존 질서에 이끌어 들이기 위해 쿄토의 조정에서는 온갖 관직을 오다 노부나가에게 하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다는 코웃음 치며 그러한 관직들을 모두 거절하고, 쿄토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채 조정을 질식할 것같이 만들었다.
이미 유명무실한 지 오래였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문을 공식적으로 닫게 한 것도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 다음 차례가 천황과 조정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아케치는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을 보는 것이 점점 두려워졌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전에도 이미 자신을 오랫동안 섬겨온 가신들을 숙청한 전례가 있었다. 가신들뿐인가? 막부도 닫았고, 불교를 탄압하고, 조정까지 억압하고 있었다.
오다가 꿈꾸는 미래에 몸을 같이 맡기느니 차라리 기회가 온다면 자신이 천하동란의 종지부를 찍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아케치는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이 선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으나, 어느 정도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마저도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아케치가 보낸 별동대는 오다 노부나가를 생포하지 못했다.
그는 살아 있었고, 아들과 함께 거성(居城)인 아즈치(安土)로 퇴각해 아케치를 토벌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다의 생존 소식을 들은 아케치군의 전의는 급격히 상실되었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 화전(和戰)하고 군세를 동으로 돌려 오다 노부나가를 도와 아케치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 나섰다.
이제 도리어 쫓기는 몸이 된 것은 바로 아케치 미츠히데였다.
소위 야마자키의 회전(山崎の戰い)으로 불리게 된 전투에서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와 그를 쫓아 군사를 이끌고 온 하시바 히데요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할복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전투 뒤의 패잔병을 사냥하는 와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내가 품 안에서 사자 새끼를 길렀구나!”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수급을 보고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그는 갑작스러웠던 위기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잠재적인 모반자들, 혹은 아직까지도 동북과 서쪽에서 자신에게 대적하고 있는 다이묘들이 다음 수를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군세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호죠(北條), 쵸소카베(長宗我部), 다테(伊達), 모리 등의 가문이 결국 오다의 깃발 아래로 굴복하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각지의 은광(銀鑛)을 점유하고, 이곳에서 나오는 은을 국제적인 은 무역 시장에 내어놓아 막대한 군비를 충당했다.
막대한 은을 빠르게 생산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혁신적인 은 정련 기술인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의 덕이 컸다.
함경도에서 최초로 개발된 이 기술은, 이내 신대륙 개척과 함께 신천광산에서도 넓게 활용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진서를 통해서 일본에도 건너가게 되었다.
전국의 동란 속에서 이 기술은 점진적으로 혼슈 일대에 전파되었고, 사실상 난세를 종식시킴으로써 안정적인 광산 운영이 가능해진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에 이르러서 그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일본의 산지에는 은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고, 바로 지척에서 고정적인 은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명나라는 좋은 시장이었다.
바다에 면한 사카이(堺) 항구에서 수많은 무역선들이 돛을 올리고 이 은을 실어다가 진서의 박주로 보냈고, 이곳에 모여든 조선, 명, 포르투갈 상인들이 제각기 이 은을 실어다가 각지로 보냈다.
이렇게 차입된 은을 바탕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소위 철포(鐵砲)를 생산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포르투갈로부터 전래된 화승총 기술이 아닌 조선의 보총을 제작하는 기술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
어렵게 수십 정의 보총을 구한 오다 노부나가는 이것의 모조를 명해서 직접 생산하는 데에 성공했고, 대포를 제작하는 기술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는 이러한 기술들이 단순히 기술의 확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적대적인 세력의 정리가 일단 끝나자, 오다 노부나가는 다음 계획을 위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에게는 지금 그가 생각하는 일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있었다.
“야스이에 이사오를 불러들여라.”
아즈치 성의 내전에 오다 노부나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1583년
순화(順和) 4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진서독부 박주부(博州府).
혼슈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져 천하 통일의 포무를 펼쳐 나가는 동안, 진서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진서의 상인들은 일본이 전국시대의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여러 다이묘들을 상대로 적잖은 이윤을 남기고 있었는데, 언제고 해상에서 약탈이 일어날 수도 있을 뿐더러, 전란 중에 몰락한 다이묘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하는 등 손해도 적잖았다.
그러나 진서의 상계, 특히 가장 영향력 있는 박주 기반의 박상(博商)이 거래선을 오다 노부나가와 연결되어 있는 사카이의 상인들로 단일화화면서, 안정적인 거래망이 일시적으로 성사되게 되었다.
이 루트를 통해 막대한 일본의 은이 진서로 흘러들어 왔고, 이것에 다시 이문을 붙여서 내지팔도, 혹은 요동, 아니면 명과 포르투갈의 상인들에게 되팔아서 단기간에 박상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이윤의 일부는 진서도독부로, 또 다른 일부는 삽천(澁川, 시부카와), 대우(大友, 오토모), 도진(島津, 시마즈) 같은 한속대명(韓屬大名, 칸조쿠 다이묘)에게 흘러갔다.
대내씨가 혼슈의 본거지를 잃고 몰락한 뒤에도 진서의 다른 한속대명들은 건재했고, 소위 대진천(大津川) 삼가(三家), 진서어로는 「다이진체이 노 미케」, 약칭「미케」라 불리는 벌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내지의 공경(公卿)들과는 다르게 제국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령(家領)을 유지하며 토호(土豪)의 노릇을 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직접 상인들과 결탁해 무역에 나섬으로 인해서 재력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 세 가문은 진서 안에서 점차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고, 진서도독부에도 이들 세 가문 출신의 관료들이 다수 진입해 있었다.
하나 이러한 한속대명의 미케[三家]가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곧 진서의 일반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영지에 속해 있는 백성들은 과중한 노역을 부과 받고 있었고, 생활수준 또한 내지팔도나 진서도독부 직할령에 비해서 넉넉하지 못했다.
조선계 유지들과 진서도독부, 그리고 미케를 정점으로 하는 진서의 최상층과 이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사실상 진서의 허리 노릇을 하는 것은 그 숫자가 많지 않은 도독부 직할령의 진서인들이었다.
기주와 박주의 상인들, 학자, 장인들은 점차 그들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혈통으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잡다했는데, 진서 토박이들도 있었고, 내지에서 건너와 정착한 조선계도 있었으며, 뒤늦게 일본 본토에서 전란을 피해 진서로 도망쳐 온 이들의 후손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조상의 족보로 분류되기 보다는 자신들을 진서인이라 여겼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진서어를 입에 익히고, 진서어로 쓰인 글을 읽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경계에서 장사를 하거나, 도독부의 하급 관리 혹은, 미케의 가신이 되어 일을 했다.
진서에서 사실상의 중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진서어로 「가누비토(間人)」라 불렸는데, 말 그대로 가운데 사람이란 뜻이었다.
문제는 거의 백여 년 가까이 진서의 토착적인 계급 문화의 허리가 되어왔던 이 가누비토들이, 갑작스러운 호황과 함께 분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미케 출신의 귀족들과 박상을 비롯한 일부 상인 출신의 가누비토들은 점차 부유해져 가고 영향력이 커져 갔다.
반면에 학문을 업으로 삼았던 이 중간 계층의 많은 이들은 경제적으로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진서의 관료 계층은 그 폭이 얇았고,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이들 가누비토 출신의 젊은이들은 군문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불문에 귀의하는 것으로 입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 잘되는 일이라 할 정도였다.
기껏 글을 배우며 오랜 공부를 마쳐도 불러주는 곳이 없으니 그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닌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파고든 것이 바로 종교였다.
송상과 결탁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나상의 기존 항로를 잠식하며 동양에 진출했을 때, 이와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도 함께 동방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동방전교에 뜻을 둔 집단이 예수회[耶蘇會]였다.
예수회는 1552년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가 진서에 처음으로 상륙한 것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애초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대한제국의 본토에서 전교 활동을 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서찰을 보내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는 황성부 조정에서는 답신조차 주지 않았다.
본토 상륙이 좌절된 하비에르는 유구국에서 머물면서 선교를 시작했으나, 이미 쇼신왕의 때에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요동에서 수입해 온 그리스 정교회가 이미 뿌리 깊게 자리잡은 유구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배척되었다.
이런 곤란한 와중에 하비에르는 진서 최남단의 한속대명인 도진(島津, 시마즈)씨 휘하의 무관인 팔차랑(八次郞, 야지로)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그와 그 동생을 전도하는 데에 성공하여 세례를 주게 되었다.
야지로를 통해 도진씨와 접촉할 기회를 얻은 하비에르는 주요 경쟁 상대인 유구국을 뛰어넘기 위해 독자적인 무역 루트를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던 도진씨의 당주 도진귀구(島津貴久, 시마즈 타카히사)의 초청을 공식적으로 받아 진서에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추후 진서도독부에서도 전교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낸 하비에르는 본격적으로 진서에서 가톨릭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하비에르는 《예수전(耶蘇傳)》이라는 책을 직접 진서어로 썼을 뿐더러, 이어서 가톨릭의 교리 해설서인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책을 진서어와 한문으로도 출판했다.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기주 출신의 가누비토 출신의 이양음(李養音, 리 야넨)이라는 젊은 청년이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양음은 이내 세례명인 베르나르도로 유명해졌는데, 하비에르는 리 베르나르도를 예수회에 가입시키고 로마로도 보내 신학 공부까지 마치게 했다.
리 베르나르도는 진서에서 포교 활동을 정착시키고 원래의 목표였던 내지팔도로의 입국 허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하비에르를 대신해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진서에 성당을 세우고 신자 수를 불렸다.
그 대상은 주로 불교에 염증을 느끼고 유교에도 거리감을 가진 가누비토 계층이었다.
이들은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단발하고, 유럽풍의 의상을 착용하는 이른바 「남만장속(南킑裝束)」을 유행시켰다.
15세기 초에 제국령으로 편입된 진서는 14세기 말에 일본의 무사 계층으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앞머리를 밀고 주변부 머리만 길러서 투구를 쓰기 좋게 뒤로 속발(束髮)하는 사카야키(月代)를 하지 않고, 머리를 밀지 않고 가급적 풍성하게 길러 한데 묶는 소하츠(總髮)라 불리는 상투 짜는 습속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조선식 상투의 영향까지 받아서 진서에서는 민머리를 거의 볼 수 없었는데, 남만장속의 유행과 함께 상투를 짜지 않고 머리도 밀지 않는 단발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관(冠)을 쓰는 것은 그만두지 않았는데, 주로 흔한 형태는 관 대신에 유럽 모자를 쓰고, 목에는 「히다에리(퇱襟)」라 불리는 카스티야풍의 러프 칼라(영:ruff collar, 카스티야:gola)를 두르는 것이었다.
풍부한 깃털 장식과 어깨가 강조된 의복이 유행하자 일부에서는 이를 비웃기도 했으나, 빠르게 진서의 가누비토 계층 사이로 퍼져 나갔다.
가톨릭을 전교함으로써 이러한 풍속의 변화를 가져온 하비에르는 1558년에 결국 내지로의 입국 허가를 얻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였고, 가톨릭은 그 뒤를 이은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리 베르나르도, 프란치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 같은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진서에 국한해 성장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교황의 인가를 받아 「진서포교구(鎭西布敎區)」가 설치되었고, 신자 수는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신도 수가 진서에 2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가누비토 계층이었다.
“일본으로 선교 활동을 갈 사람을 찾고 있는데, 신앙이 깊을 뿐더러 학식이 있고 담대하며, 일본어 실력도 출중한 사람이 필요하네. 자네가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네만.”
이렇게 진서의 가톨릭이 무르익어 갈 즈음에 진서포교구에는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 is)라는 이름의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가 머무르고 있었다.
그 또한 처음에는 대마도를 거쳐 경상도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일언지하에 포교 활동 인가가 거절된 뒤에는 생각을 바꾸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안정되어 가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러나 일본의 물정에는 밝지 못했고, 때문에 진서 출신으로 일본의 물정에 밝은 예수회의 신부를 찾고 있었다.
결국 물망에 올라온 것이, 나이 스물일곱의 명석한 젊은 신부 안가 바울로였다.
그의 속명은 안가훈(安家勳, 안가 이사오)이었는데, 가톨릭에 귀의한 기주부의 소상인의 아들로, 리 베르나르도에 의해 신부로 발탁되어 인도의 고아로 보내져 신학 공부까지 마친 뒤였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조선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하고 라틴어와 포르투갈어, 카스티야어 또한 능숙하게 쓸 줄 알았다. 루이스 프로이스로서는 동행할 인물로써 이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라면 저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루이스 신부님과 함께라면 꺼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안가 바울로는 활짝 웃으면서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말했다. 오래 준비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을 비롯해 삼십여 명의 신부와 신도들로 구성된 선교단은 일본으로 들어가 사카이 항구를 통해 쿄토로 올라갔다. 1571년의 일이었다.
“호오라, 그대들이 말로만 듣던 남만교 승려들이란 말이지?”
당시 정복 사업에 한창 매진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본성인 아즈치 성이 아닌 쿄토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일본 통일 뒤의 전략을 모색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과 기술, 그리고 무역을 관장할 수 있는 집단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에서 학자들을 초빙해 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자생적으로 조선으로부터 흘러온 학문을 연구하며 등장한 「칸가쿠샤(韓學者)」들은 그 학문의 깊이가 깊지 않고, 그 숫자 또한 모자랐다.
대한제국의 학문과 기술을 뒤쫓아 배우는 것으로는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고 판단한 오다 노부나가는, 이들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남만인(南蠻人)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왔고, 이제 그들이 직접 찾아오자 거리낌 없이 맞아들였다.
“마음껏 포교하고, 단, 내가 필요할 때에 힘을 좀 빌려주었으면 하네.”
오다 노부나가의 포교를 대가로 한 조건은 단순했다. 사실상 일본 최고의 실력자의 비호를 뒤에 업게 된 프로이스를 비롯한 예수회는, 쿄토에 진서포교구에 이어 「일본포교구」를 설치할 수 있었고, 초대 포교장으로 루이스 프로이스가 임명되었다.
프로이스와 안가 바울로는 일본포교구의 활동에 전력으로 매진했다. 그들의 활동이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도 기세 좋게 뻗어 나갔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뒤, 그 후 이 년여간 나머지 다이묘들까지 무릎을 꺾게 만든 오다 노부나가는 그간 소소한 도움을 대가로 포교를 허락해 주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일본 내에 증가하고 있는 기독교도들, 즉 키리시탄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했다.
“키리시탄들은 진서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고, 더 나아가면 남만인들의 법황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난세가 정리되었고, 다시 진서도 정벌해 일본을 통일해야 하는 시점에 이들은 몸속의 혹이 될 수 있습니다. 금령을 내리시어 이들을 신주에서 쫓아내십시오.”
가장 격렬하게 예수회를 쫓아내자는 주장을 내세운 것은 바로 하시바 히데요시였다. 양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막하에서 차츰 공을 세워 가장 큰 공신이 된 그는, 난세의 종결 이후 싸울 대상을 잃은 무사 계층을 달래고 지방에 넘쳐 나는 다이묘들을 정리하고 땅을 나누어주기 위해 진서부터 시작해 조선, 그리고 명까지 정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 들끓는 힘을 외부로 돌려야 하고, 그래서 내치(內治)의 안정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위험 세력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보기에 예수회를 비롯한 키리시탄들은 위협이 되고 남았다.
“원숭이(히데요시의 별명) 네 말도 맞긴 하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저들의 도움이 조금 더 필요한 때다. 다만 적절히 감독할 필요가 있는데, 아예 저들을 내 가신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어떨까?”
오다 노부나가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은 했다. 그러나 즉각적인 금령은 곤란했다. 지금은 아직 이들에게서 뽑아낼 것이 많았다.
당장 지금만 보아도 예수회를 통해서 오다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사카이의 상인들을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진서의 박상들과 연결해 이득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쪽으로 숨어들어 온 칼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저쪽으로 들어간 칼침일 수도 있단 말이지. 어쨌든 야스이에와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군.”
오다 노부나가는 늘 엉뚱한 생각을 내어놓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일리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발상의 전환으로 난세를 헤쳐 나오지 않았던가.
“하오나…….”
히데요시가 예수회를 썩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최근 들어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이 된 야스이에 이사오의 존재 때문이었다.
진서식 본명은 안가 이사오, 조선식으로 안가훈, 세례명은 바울로로, 바로 루이스 프로이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그 신부였다.
이제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는 일본식 복장을 입고, 사무라이들처럼 패도(佩刀)하고, 머리는 사카야키를 하고 있었다. 뒤통수에 촘마게(丁髷)를 진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오다의 가신들 중 하나였다.
막상 난세의 전장에서는 아무런 공을 세우지 않은 안가 바울로는, 지금에 와서 갑작스럽게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측신인 모리 나리토시(森成利)까지 개종시킨 안가 이사오는 야스이에 님[殿]으로 불리며 오다 노부나가 막하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속에 무슨 생각을 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이래저래 하시바 히데요시의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헤이지(平氏)의 핏줄을 이어받은 내가 쇼군이 되는 건 말이 안 되지?”
히데요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오다 노부나가는 한쪽 눈을 찌푸리고서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예수회를 어떻게 하는가 보다는, 진서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수중에 들어온 일본에 어떤 질서를 세우냐는 문제였다.
“쇼군이 되신다 하더라도 감히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계속 안가 바울로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히데요시는 오다의 갑작스러운 말에 화들짝 놀라서 엎드려 읊조렸다.
수백 년 전 겐지(源氏)가 헤이지(平氏)를 단노우라에서 거꾸러트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이래, 무로마치 막부에 이르기까지 쇼군의 자리는 황족을 제외하고는 겐지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다는 암묵적인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핏줄은 거슬러 올라가면, 겐지가 아닌 헤이지에 맞닿아 있어 명분상 막부를 창설하고 쇼군의 자리에 오르면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사실 쇼군이라니, 성에 차지 않는 노릇이지. 천황이고 교토의 쿠게(公家)고 무슨 능력이 있어 그 자리에 앉아 있단 말인가. 다 밀어 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좀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 원숭아. 노부타다와 이에야스, 그리고 막하의 가신들을 모두 불러 들여라. 이 문제를 좀 논해 보자.”
“예.”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소집된 가신들은 이런저런 의견을 내어놓았고, 결국은 몇 가지 방안 중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마음에 드는 의견을 골랐다.
명분을 세우기 위해 후손 없이 절연된 겐지의 핏줄을 이은 방계 가문의 여인을 아들 노부타다와 혼례를 치르게 하고 가독(家督)을 받게 하여 쇼군에 오를 명분을 취한 다음, 손아귀에 있는 오기마치(正親町) 천황에게 막부 창설을 허하는 칙령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1596년 4월, 오다 노부나가는 정식으로 자신의 거성인 아즈치 성에 막부를 설치하고, 초대 쇼군으로 자신의 아들인 노부타다를 임명하고, 자신은 황제에게서 사성(賜姓) 받아 칸파쿠(關白)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 속에 아즈치 막부(安土幕府)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막부의 이런저런 주요 관직을 제수받은 이들 중에서는, 안가 바울로의 이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