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3장 격변세태(激變世態) (54/82)

제53장 격변세태(激變世態)

「1. 성직자와 귀족들은 에드워드 왕을 “프랑스 왕국과 가톨릭 신앙의 보호자”으로 인정한다.

2. 왕은 프랑스 왕국에 있어서 법률상 관할권을 가진다.

3. 왕의 특권은 오로지 교회의 권리 및 왕국법에 어긋나지 않을 경우에만 유지된다.

1. that the clergy and the noblemen recognize King Edward as the “protector of the Faith and Kingdom of France”

2. that the King had de jure jurisdiction in Kingdom of France.

3. that the privileges of the King were upheld only if he did not detract from the church’s prerogative and the laws of the realm.」

―Act for the Kingship in France, 1585

(38 Edward VI, c.56)

1587년 맹춘(孟春)

동군연합 프랑스 왕국, 파리.

예수회가 로마 가톨릭의 전적인 지지를 업고 동방전교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유럽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르네상스와 신대륙의 발견, 동방항로의 개척을 전후하여 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질서는 재편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그 격변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改新敎]의 등장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거센 파도였다.

루터에 의해 독일에서 주도된 종교개혁 운동은 유럽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고려로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를 수립한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를 비롯하여, 북유럽 일대에는 로마의 권력에서 독립해 새로운 개신교회를 받아들인 국왕과 영주들이 점차 늘어 나갔다.

이 와중에 가톨릭 신앙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는 포르투갈·카스티야·아라곤 등 이베리아 반도의 제국(諸國)에 로마 교황청은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는 갈수록 불안정해져만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라곤 및 카스티야에 적대적인 하나의 거대 왕국이 등장한 것이 교회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국 국교회를 창설한 헨리 8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6세는 프랑스 샤를 9세의 외동딸이자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핏줄을 이어받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와 정략혼을 맺었고,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승하 이후 잉글랜드 역대 국왕의 숙원이었던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법인 살리카 법(Lex Salica)은 왕위 승계에서 철저하게 여성을 배제시키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여왕이 될 수 없었고, 이런 문제 때문에 에드워드 6세는 계승권을 주장하기 조금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루아 왕가의 핏줄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에, 에드워드 6세는 직접 파리로 건너가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의 왕좌에 올랐다. 그 명분으로 그는 백 년 전쟁 이전부터 영국 국왕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던 프랑스 왕위 계승의 권리를 주창하고 나왔다.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왕만 같을 뿐인 동군연합이라는 방책을 꺼내 든 에드워드 6세는, 프랑스 국왕 에두아르 1세( douard I)로 대관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를 서로 다른 자녀에게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겨우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왕위 계승의 경쟁자인 나바르 드 앙리에 앞서 직접 영국 국교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행보를 보인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판단이 앞선 것으로, 에드워드 왕은 그동안 아버지가 창설한 영국 국교회의 보호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단행한 것은, 그만큼 프랑스의 왕위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행보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에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당장 나바라 왕국의 후계자이자 프랑스의 신교도 진영을 대표하는 나바르의 앙리(Henri de Navarre)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나름대로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의 왕위를 물려받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가 먼저 앞서서 마르그리트와 결혼을 성사시킨 뒤에, 재빠르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프랑스 가톨릭계의 수장격인 기즈 공(公)과 밀월연대하고 있다는 소문이 프랑스 전역에 퍼지자, 앙리 드 나바르는 분을 삭이기가 힘들었다.

잉글랜드에서 또한 영국 국교도들이 크게 반발했다.

프랑스의 왕관을 쓴 뒤에, 에드워드 6세는 본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을 믿을 자유를 주면서, 영국에서도 가톨릭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신도들은 명예를 회복하고, 에드워드 6세가 프랑스의 왕위까지 차지하자 정치 전면에서 복권되었을 뿐만 아니라, 헨리 8세의 통치 기간 동안 숨죽이고 국교회교도인 척했던 사제들과 신자들도, 다시 공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천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에 잉글랜드의 국교도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에드워드 6세는 어린 시절,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를 뒤좇는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영국 국교회에 대한 강력한 보호와 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어린 에드워드 6세를 둘러싼 가신단의 영향이 큰 정책이긴 했으나, 에드워드 6세 본인 또한 확고한 국교회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충분히 나이가 들고 전략적으로 점차 사고하게 됨에 따라 종교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 왕위가 눈앞에 보이자, 그는 큰 고민 없이 바로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고 사적인 이유로 로마 가톨릭을 쉽게 던져 버리고 국교회를 선포해 버린 아버지 헨리 8세와도 닮은 모습이었다.

하나 에드워드 왕의 결정은 영국 국교도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국교회의 수장이 신앙을 버린다면 그만큼 당혹스러운 일이 없을 터였다.

이들은 에드워드 6세에 대항해 국교도 왕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물망 끝에 올라온 것이, 바로 에드워드 왕의 배다른 누이 엘리자베스 왕녀였다.

헨리 8세가 크게 남긴 자녀는 셋으로, 바로 에드워드 왕, 메리 왕녀, 엘리자베스 왕녀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왕녀는 에드워드 왕이 수녀원으로 일찌감치 보내 버렸고, 남은 것은 궁중에서 아직 머물고 있는 엘리자베스 왕녀였다.

에드워드 왕은 그녀의 혼기가 차면 정략결혼을 보내려고 생각하고서, 옆에 머물도록 허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왕녀는, 에드워드 왕의 행보에 적잖이 우려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녀 자신이 가진 야망도 적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런던을 비우고 파리로 넘어가 프랑스 왕위를 장악하기 위해 앙리 드 나바르와 내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런던에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보다는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르는 게 옳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러나 좀 더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나서는 건 어떻게 보아도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신교 계통의 영수였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이미 아들 길포드 더들리를 제인 그레이와 결혼시킨 뒤였고, 제인 그레이 또한 엘리자베스를 제외하면 가장 왕위 계승권이 높은 왕실의 일원이었기에, 노섬벌랜드 공작은 흔쾌히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전격적으로 에드워드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잉글랜드 국왕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제인 그레이를 대관시켰다. 적어도 런던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은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수녀원에 들어가 있던 메리가 이 소식을 접하고 직접 가톨릭 제후들과 연대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돌고, 그에 뒤이어서 프랑스에 건너가 있던 에드워드 6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회군한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져 왔다.

런던을 장악하고 있던 노섬벌랜드 공작은 북쪽으로 메리의 남진을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라간 상황이었고, 에드워드 6세의 군대가 칼레에 이미 다다라 언제고 도버 해협을 건너 런던에 육박할지 모른다는 풍문이 떠돌자, 런던 시의 참사회와 정부 관료들의 생각은 크게 움직였다.

노섬벌랜드 공작이 런던에 없는 틈을 타, 이들은 ‘정당한 왕 에드워드’를 연호하며, 제인 그레이를 런던탑에서 처형했다.

영국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나, 그 재위 기간이 겨우 48일에 불과했다. 제인 그레이의 치세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가톨릭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온 메리 왕녀도 있었다. 에드워드 6세는 프랑스 문제가 더욱 시급했기에 런던에 오래 체제할 상황이 못되었고, 때문에 못미더우나마 메리 왕녀에게 잉글랜드를 잠시 맡겨두고 파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에, 메리는 그의 왕권을 위협했던 주요한 인물들 중 하나였었다. 지금은 같은 가톨릭 깃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잠시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문제가 정리되면 언제고 메리를 다시 수녀원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을 대신하여 런던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잠시 섭정(攝政)하게 된 메리 왕녀도, 이러한 에드워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그녀가 이루지 못했던 복수들을 지금 가진 힘을 빌어 차근차근 진행시키고자 했다. 그녀는 완전히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을 무산시키고, 니콜라스 리들리, 토마스 크래머 같은 주요한 국교회 주교들을 체포해서 처형시켰다.

이에 반발해 토마스 와이어트가 켄트에서 봉기했으나, 메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토마스를 처형시켰다.

그러나 토마스 와이어트는 그 시작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올리고자 하는 봉기들이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메리가 에드워드를 대신해, 런던에서 반란 세력들을 탄압하고 있는 동안, 에드워드 왕은 프랑스에서 앙리 드 나바르와 심각한 내전을 수년째 벌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앙리 드 나바르의 근거지인 나바라 왕국에 막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 내전을 틈타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남프랑스로 진출할 야심을 지니고 있던 아라곤 왕국이 앙리 드 나바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무기와 카탈루냐 용병까지 손에 넣은 앙리 드 나바르는 에드워드 6세가 런던의 반란을 종식시키려 칼레로 행군하는 동안을 틈타, 파리 코앞까지 다가오기도 했다.

하나 에드워드 6세 자신에게는 다행이게도 그의 능력은 모자람보다는 출중한 편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몸이 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년에 접어들어서는 건강과 총명함을 회복했다.

이 결혼 동맹이 앞으로 튜더 왕가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에드워드 6세는 필사적으로 앙리를 제압하고, 귀족들을 회유하고, 주변국과 아슬아슬한 외교전을 펼치며 반군 진압에 나섰다.

물론 에드워드를 지지하고 있는 기즈 공작을 비롯한 프랑스의 가톨릭교도들도 에드워드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나 그들은 진성 개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오르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 귀족들의 지지는 적어도 이 시점에서 에드워드에게는 크게 힘이 되어주는 게 사실이었다.

상대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잉글랜드였다. 그가 프랑스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잉글랜드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고, 사실상 런던에 앉아 있는 가톨릭 섭정 메리와 그녀와 에드워드를 완전히 밀어내고 신교도 여왕을 앉히려는 엘리자베스 지지파가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6세는 법률상 가장 정당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이자, 지금도 그 왕관을 몸소 쓰고 있었지만,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산인 국교회를 걷어차 버린 것은 가장 큰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엘리자베스가 런던을 탈출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은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소위「오래된 동맹(Auld Alliance; Vieille Alliance)」이 해체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이해관계가 부딪힐 수밖에 없었는데,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을 겸하게 되면 스코틀랜드의 주요한 동맹이 사라질 뿐더러, 그 동맹이 사실상 잉글랜드 편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상황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에드워드 6세는, 빨리 프랑스를 장악하고자 했고, 때문에 1570년, 파리에 앙리 드 나바르를 초청해 일시적 평화협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앙리 드 나바르가 파리에 찾아오자, 소위「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 lemy)」이라 불리게 된 사건으로 앙리 드 나바르를 따르던 위그노 교도들이 학살당하게 됐다. 앙리는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하였으나, 이것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재개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라곤 왕국의 국왕 자우메 4세(Jaume IV de Catalunya―Arag )는 아라곤 왕국의 병력을 카탈루냐에서 남프랑스로 보내, 앙리 드 나바르의 작전을 도우기 시작했다.

“썩어 빠진 아라곤의 촌놈이 내 길을 사사건건 가로막으니, 무슨 방법이 없을까?”

에드워드 6세의 고민은 갈수록 더해져만 갔다.

남프랑스는 사실상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앙리 드 나바르의 위그노 교도와 에드워드를 섬기는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남프랑스의 독립적인 가톨릭교도들, 아비뇽을 중심으로 한 교황파, 그 외에 왕권을 멸시하는 남프랑스의 제후들까지 뒤엉켜 완전히 내전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된 것은, 아라곤 왕국이 적극적으로 이를 조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라곤의 국왕, 자우메 4세의 할머니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프로방스 여백작이었던 잔 드 로렌(Jeanne de Lorraine)이었다.

때문에 이제껏 아라곤은 지속적으로 프로방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앙리 드 나바르를 지원하며 프랑스에 개입할 구실이 생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파난했던 것이다.

남프랑스 일부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아라곤 왕국의 군대는 아예 마르세유 일대를 점령하고 프로방스가 아라곤 왕국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앙리 드 나바르의 위그노를 지원하는 것보다 이제 아라곤 군대는 독자적으로 남프랑스 장악을 위한 행군을 연이어 가고 있었다.

에드워드 6세에게는 아쉽게도 이들과 지속적으로 싸울 기력이 없었다. 내전으로도 진이 빠지는 노릇인데, 양쪽에서 아라곤 및 스코틀랜드와 국제전을 펼칠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내전은 점차 길어지고 있었고, 남프랑스 일부를 잠시 방기하더라도 지금은 숨을 돌려야 할 때였다. 카스티야를 충동질시켜 아라곤의 배후를 치게 하려던 계획까지 실패하자, 에드워드 6세는 아라곤 왕국의 대사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바라는 게 뭔가?”

아라곤 왕국의 전권대사로서 파견된 주안 데 라메라(Joan de Lamera)를 맞아들인 에드워드 6세는 피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나이 이제 쉰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왕국의 태반을 얻었고, 잉글랜드를 안정시키고, 카스티야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적할 만한 영토를 얻었지만, 그 작업에 모든 인생을 바쳤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력은 점차 쇠해 가고 있었고, 그의 왕국을 물려받을 아들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왕의 목소리에서 회의감이 묻어 나오는 것을 눈치챈 라메라는 공손하지만 말에 뼈를 담아서 에드워드 6세에게 말했다.

“프로방스를 포기하셨으면 합니다.”

“그럴 수 없어.”

라메라의 말에 에드워드 6세는 가당찮은 소리를 한다는 듯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남프랑스 전체도 아니고 프로방스 일대만을 이야기한다면, 겨우 한 줌 같은 땅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길목의 요충지였을 뿐더러, 마르세유 같은 항구를 끼고 있는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곳이었다.

사실상 지금 에드워드 6세의 권력이 미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포기해 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20년간 지금의 상태 그대로 교전하지 않을 것을 약속해 주십시오. 이 화의의 대가로 배상금을 넉넉히 지불하신다면 자우메 전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그냥 여기서 멈추잔 말인가? 내가 돈까지 물어주면서 말이야?”

에드워드 6세는 정말로 그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화의를 맺지 않는다면 내전은 끝없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남프랑스의 제후들의 배후에는 아라곤 왕국이 있었다. 그들은 가톨릭 제후들이었으나, 기왕 발루아 왕조가 절단 난 다음에야, 잉글랜드 출신의 못 믿을 에드워드를 섬기느니, 아라곤의 가톨릭 대왕 자우메의 품으로 들어가겠다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앙리 드 나바르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던 카탈루냐의 아라곤 왕국과 연대하는 꿈만 꾸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에드워드에게는 유리할 것이 별로 없었다. 하루 바삐 화약을 맺고 잉글랜드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결국 1년이 넘게 질질 끈 끝에, 에드워드 6세는 1577년 1월 30일, 파리 근교 퐁텐블로에서 아라곤 왕국과의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른바 「퐁텐블로의 화약(和約)」이라 불리게 되는 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공식적으로 에드워드 6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공동 군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반면 아라곤은 사실상 프로방스와 남프랑스 일대의 몇몇 영지를 지배할 수 있었다. 물론, 에드워드 6세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음 세대의 전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프랑스 방면에서의 정리가 끝나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로 관심을 돌렸다. 잉글랜드로 귀환한 에드워드는, 그간 자신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다스렸으나, 그만큼 평판을 잃은 메리 왕녀를 전격적으로 런던탑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내전을 벌이며 단련된 군대를 반란군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입시켰다.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메리 스튜어트의 지원을 받아 요크(York)에서 군대를 이끌고 버티고 있었고, 이제 완연히 여군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이끄는 군대는 생각보다 에드워드의 왕병(王兵)에 맞서서 잘 싸웠고, 결국 싸움은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다.

결국 내전이 싱겁게 끝나게 된 것은, 점차 잉글랜드와 각을 세우고 싸우는 데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가, 잠시 보급을 받으러 에딘버러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왕녀를 사로잡아, 그 신병을 에드워드에게 넘기는 대가로 휴전을 청해오면서였다.

에드워드는 이를 수락하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경에서 엘리자베스의 신병을 인도받았다.

“나는 누이를 죽이진 않겠소. 다만 다시는 잉글랜드의 땅을 밟을 수는 없게 될 것이오. 그리고 원하지 않겠지만, 시집도 가셔야겠소.”

오랜만에 보는 누이 엘리자베스를, 에드워드 6세는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이 마흔이 되어 홀몸으로 모진 풍파를 살아온 여인이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죽인들 어찌하겠습니까?”

엘리자베스는 담담했다. 그녀의 포박을 풀어주고, 깔끔하게 단장시켜 런던으로 데려온 에드워드 왕은, 그녀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시집을 갈 수 있을 만한 상대를 물색했다.

전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III)의 4남이자, 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2세(Frederik II)의 동생인 에릭(Eric) 왕자가 그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 비해 9살이나 연하였지만, 왕위 계승 구도에서 밀려난 데다가, 약간 모자란 구석이 있어서 다른 나라의 왕녀와 신분에 걸맞는 결혼을 하긴 힘든 왕자였다.

형인 크리스티안 3세는 고민 끝에, 에드워드 6세로부터의 공식적인 청혼을 받아들여 엘리자베스와 에릭의 결혼을 허락했다.

내전 당시 엘리자베스의 측근이었던 월터 롤리(Walter Raleigh)가 신대륙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개척한 로어노크(Roanoke)섬의 식민지는, 이제 에드워드 왕의 손에 놓여 있었다.

그는 월터 롤리가 엘리자베스가 결혼하기 전, 그녀를 기념하여 붙인 버지니아(Vriginia)라는 지명을 그대로 추인했고, 엘리자베스를 버지니아 여백작 및 로어노크 여자작에 임명하여, 사실상 신대륙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그 권한을 다시 월터 롤리에게 위임했고, 남편과 함께 덴마크로 건너가 지내게 된다.

남편 에릭이 일찍 죽어, 그녀가 신대륙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게 될 때까지, 그녀는 덴마크에서 지내며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모든 관심을 끊고 지냈다.

이로써 드디어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안(兩岸)에서 안정을 달성한 에드워드 대왕(Edward the Great)는 본격적으로 내치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각기 법률·작위·의회 등을 별도로 보유하나, 국왕만 같은 동군연합(同君聯合)의 체제로 들어선다. 이때에 훗날 영불제국(英佛帝國)이라 불리게 되는 「연합왕국(聯合王國)」의 초석이 닦이게 된 것이다.

1588년

순화(順和) 9년 중동(仲冬)

대한제국 황성부.

북악산을 넘어온 세찬 겨울바람이 종일 몰아치고 있었다.

경강(京江, 한강)은 얼어붙었고, 며칠 전 내린 눈은 녹지 않고 길가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황성부민들은 전례 없는 한파에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칠흑같이 내려앉은 차가운 겨울 밤, 인적 끊긴 황성부의 거리를 몇 명의 인영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조심스럽게 이들이 모인 곳은, 바로 북촌에 있는 내부대신 허엽의 자택이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찾아온 손님을, 뒷문에서 맞은 것은 바로 그 집의 셋째 아들 허균이었다.

이제는 연륜이 조금 묻어 나오는 나이가 된 그가 허리를 숙여 맞은 사람은 바로 섭정인 흥친왕 이기였다.

“어서 안내하게.”

흥친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호종해 온 시종들을 모두 물러가 있게 한 다음에, 집의 깊숙한 안쪽으로 허균을 따라 들어갔다.

허균이 머물고 있는 별채에는 이미 서른 명 남짓의 사람들이 흥친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각의 몇몇 대신들을 포함한 흥친왕의 측근들이었다.

인양군 김율,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 허씨 형제들 같은 원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도, 내부대신 허엽, 외부대신 류성룡(柳成龍), 문부대신 김성일(金誠一) 등의 면면이 있었다.

흥친왕은 수년에 걸쳐, 조심스럽게 내각에 대한 자신의 힘을 확대시키는 데에 주력해 왔었다. 2년가량 일절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하지 않고, 내각에서 요구하는 대로 움직였던 흥친왕은, 훈구당과 사림당이 오랜 기간 서로간의 타협으로 안일해진 사이를 파고들었다.

훈구당과 사림당 공히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젊은 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을 조금씩 포섭해 나갔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세력을 확보하자, 흥친왕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이들을 내각의 주요 직위에 진출시켰고, 어느 순간 훈구당과 사림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흥친왕의 가신들이 내각과 추밀원에 심어지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사림당 출신의 준재(俊才)들이 많았는데, 그것을 떠나서 훈구당에 속했던 인물들도 다수였다.

이들은 교묘하게 내각재상이 된 송강 정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지금 공석으로 만든 상황이었다.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이, 바로 반정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흥친왕과 그의 측근들은 보았다.

때문에 지금 이들이 자리에 모여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준비는 모두 마쳐졌는가?”

흥친왕은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늙은 신료들을 밀어내고도 충분히 이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관록이 쌓인 인물들이었다.

이제 서른 후반에서 많게는 쉰이 넘어가는 이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흥친왕을 중심으로 국정을 쇄신하는 것이었다.

“시위대가 언제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제고 명만 내리시면 됩니다.”

젊은 시절, 북방에서 험한 둔지들을 돌아다니며 경력을 쌓은 신립이, 흥친왕과 연이 닿아서 참장(參將)으로 진급하고, 시위대장으로 보임된 것이 바로 열 달 전이었다.

신립은 그동안 시위대를 착실히 장악해 나갔고, 언제고 명이 떨어지면 궁궐을 접수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지금 궁내부대신인 이산해의 거취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산해가 이미 냄새를 맡아서 어린 황제를 비호하고자 할 게야.”

“이산해가 저녁 무렵 퇴궐하여 오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람 몇을 움직여 그 집 주변에 이미 매복시켜 두었으니, 신호만 전달되면 곧 이산해의 신병을 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친왕의 꾀주머니라고 할 수 있는 허균이 읊조렸다.

흥친왕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고서는, 인양군 김율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나와 함께 궁으로 가세. 내일이면 새 천하가 벌어질 것일세. 그 다음은 자네 차례라, 이 말이지.”

흥친왕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각각 황실과 심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았음에도, 그동안 철저히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었다.

지금 요동에서는 점차 노쇠해 가는 당대 심왕 김유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인양군의 이복형들이 서로 노골적인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언제고 피바람이 몰아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황성부에 머물고 있던 인양군은 완전히 그 경쟁에서 도태되어 있었고, 이복형들도 그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인양군은 나름의 계산이 서 있었다.

서로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이복형, 예양대군과 금양대군이었으나, 한 가지 같은 점이 있다면 황성부라면 질색을 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차대 심왕의 자리를 자신이 얻어 요동에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대 심왕 김유는, 황성부에 대해서 전대의 심왕들이 그랬듯이 거리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위험한 무리수는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예양대군이나 금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러한 온건한 정책은 물 건너가고, 심양이 본격적으로 황성부에 대립하게 되는 시대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때문에 흥친왕은 거사가 성공한 뒤에는, 자신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는 인양군이 심왕의 작위를 얻을 수 있도록 전심전력으로 밀어줄 생각이었다.

“우선은 눈앞의 거사부터 생각하셔야 합니다. 전하. 제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양군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흥친왕에게 말했다.

“정확히 축시(丑時)가 되면 경복궁을 포위하고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한다.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자는 모두 베어도 좋다.”

결심을 확고하게 굳힌 흥친왕이 신립에게 말했다.

명을 받든 신립이, 시위대를 지휘하기 위해 먼저 물러갔고, 남은 신료들은 흥친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섰다.

“귀공들은 제각기 시위대의 호위를 받고 있다가, 거사가 완료되면 모두 등청하여 내각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하시오. 다음 날, 바로, 아무 문제없이 모든 일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오.”

흥친왕은 거사가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린 황제에 대한 모략에도 공을 들여왔던 것이다. 비록 조카이긴 하지만, 이 유약하고 근본 없는 황제에 대해 흥친왕은 애정이 전혀 없었다.

지금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순화제는, 이제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 어머니는 기생 출신으로 궁녀가 된 여인으로, 사실상 법도를 무너트려 가면서까지 선대 황제인 건양제가 국정에 관심을 돌리지 못하도록 조장한 내각 대신들의 작품이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분명한 매독 증상이 순화제에게도 나타났다. 바로 전대 황제인 건양제가 죽은 원인인 매독이었다. 건양제가 순화제의 어머니인 귀비 안씨에게 옮긴 것인지, 아니면 귀비 안씨가 건양제를 감염시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흥친왕은 이 사실을 안 뒤 쾌재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에는 기생 출신인 귀비 안씨가, 순화제를 궁궐 밖의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 얻었고, 이를 알지 못하는 건양제는 오쟁이를 지고 매독까지 옮아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건양제가 벌인 경복궁 중건공사와 그 전후로 일어난 극심한 경제적 곤란을 기억하는 황성부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 못난 선황제가 이제는 근본 없는 핏줄까지 황실에 끌어들여 와 용상에 앉혀 놓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대신에 부상한 것이, 최근에 선정을 펼쳐 명성을 얻은 섭정 흥친왕이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내각과 추밀원의 원로들은 흥친왕에 대해 견제 심리를 가지게 되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흥친왕과 원로대신들 사이에 대립이 뚜렷해지자, 흥친왕은 전격으로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결국에는 내각재상으로 흥친왕 견제의 선봉을 맡았던 정철을 정계에서 쫓아내 버렸다.

정철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혐의에 연루되어 북해의 오지로 쫓겨났고, 흥친왕은 내각재상이 빈 지금을 거사의 기회로 보고 재빠르게 시위대를 장악하고 오늘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어차피 황제가 매독이 심해 그 핏줄이 물려진다면 대대손손 황제는 매독을 지고 살아야 할 터이니, 이 무슨 괴사인가. 황음함도 이 정도면 하늘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그 근본 없는 핏줄을 끊고 제실을 제대로 돌려놓아 하늘에 봉선하고자 하니, 지금이라도 뜻을 달리하는 자가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황제에게 달려가거라!”

침묵 속에서 자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흥친왕은, 자명종이 자시를 알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측근들을 향해 외쳤다. 아무도 도망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환호성으로 흥친왕의 기세에 답했다.

그 시각, 신호가 올라가자 시위대는 신립의 명에 따라 즉각적으로 경복궁을 둘러싸고, 몇 명 안 되는 근위 병력을 제압한 뒤 빠른 속도로 경복궁을 장악했다.

어린 황제는 깊게 잠을 들지 못하고 있다가, 소란에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가, 이내 시위대 병력에게 붙잡혔고, 황제를 붙잡았다는 신호가 전달되자, 말을 타고 광화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흥친왕은 준비해 두었던 황제의 문장인 이화문(梨花紋) 깃발을 치켜 올리고 경복궁 근정전으로 향했다.

“이산해는 어찌 되었는가?”

근정전에서 측근 대신들의 비호 속에 용상에 앉은 흥친왕이 먼저 물은 것은 이산해의 거취였다.

“조금 전 추포하여 금부로 압송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허균이 조심스럽게 아뢰자, 흥친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순화제에게서 빼앗아 온 옥쇄를 치켜들었다.

“이제 내 손에 옥쇄가 있다. 열성조에게 누를 끼친 핏줄을 몰아내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았으니, 제신들은 내게 아낌없이 그 지혜를 빌려주고, 그 뜻을 함께 펼쳐 성세의 치를 이루어 낼 지어다.”

용상에 올라앉은 흥친왕의 자세는 위엄이 철철 풍기고 있었다. 한동안 잠룡으로 엎드려서 시세를 관망하던 젊은 황족이, 이제는 황제의 자리를 스스로 쟁취해 만인을 오시하고 있었다.

“황상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인양군이, 두 팔을 활짝 펴들고서 몸을 굽혀 절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내 흥친왕을 쫓아 반정에 참가했던 대신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그를 쫓았다.

만세 소리가 경복궁을 가득하게 뒤덮었다.

이제 황제가 된 흥친왕은, 황실의 피를 더럽혔단 이유로 순화제의 어미인 귀빈 안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순화제는 이씨가 아니고 그 아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으니 어머니의 성을 쫓아 안씨로 삼게 하고, 황족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 다음에, 멀리 영주로 쫓아 보냈다. 순화제는 이렇게 영주로 유배 가는 배에서 사약을 받고 주검이 되어 바다에 버려졌다.

기존의 대신들은 모두 자리를 잃고, 흥친왕이 직접 보임한 관리들이 내각을 완전히 채우게 되었고, 특히 이산해는 근신을 명받고 있다가 모반 혐의에 휘몰려 사약을 받게 되었다.

황윤길(黃允吉)을 비롯한 흥친왕계가 아닌 다른 신료들은, 이내 몸을 숙여서 자비를 구했다. 흥친왕은 이들을 다시 들어 쓰긴 하였으나, 중용하지 않고 철저히 권력을 주지 않았다.

다음 해, 흥정제 이래 백 수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봉선의 의식을 태백산에서 치르고, 흥친왕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연호를 「태정(太禎)」이라 했다. 훗날 사서에 그 시호인 세조(世祖)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1589년

태정(太禎) 원년 중춘(仲春)

북륙 열나하(列拿河) 유역.

한해(瀚海, 바이칼 호)에서 발원하여 북륙의 침엽수림을 돌아서 북빙양으로 빠져나가는 강이 있다. 수천 리에 걸쳐서 뻗어 나가는 이 강의 이름은 열나하(列拿河)로, 야쿠트어 「욀웨네(............)」를 옮긴 이름이었다.

이 열나하는 이미 북방 유목민들을 통해 존재가 알려져 왔었지만, 요동에서 출발한 탐험대들이 열나하에 도달한 것은 채 열 해 전쯤의 일이었다.

최초의 탐험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채 수십 년 전에 요동은 몽골인 들과 한 번 크게 부딪힌 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전쟁에 승리하고 몽골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춥고, 거칠고, 야만적인 북방의 이미지가 요동인들의 뇌리 속에는 남게 되었다.

도대체 따뜻한 온돌이 있는 집도 없고 거친 들판 위로 성긴 풀만 무성한 북쪽에 무슨 이유로 간단 말인가?

더군다나 북쪽으로 가고자 해도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동은 무기류, 특히 총기에 관해서는 요동군 이외의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소지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다. 폐도령(廢刀令)도 끊임없이 내려져 사사로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예외적으로 임야(林野)에서 전통적으로 사냥을 해온 여진계의 몇몇 부족에게는 무기 소지가 허용되어 왔지만, 압록강 연안에서 백두산 북안(北岸)에 퍼져 사는 이들에게 북쪽 사정이야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요동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북방의 초원지대에 이르게 되면, 정기적으로 이 지역을 순찰하는 요동군의 기마병들을 제외하고는 요동인들의 발자취를 찾기 힘들었다.

몽골인들과 야인여진들, 그리고 각종 북방 수렵민들이 떠돌아다니는 북륙(北陸)에 대해서 요동 사람들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몇몇의 사람들이 그 모진 대지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금양대군 김제였다.

이제 나이가 마흔 줄에 접어든 심왕의 셋째 아들인 그는, 왕위 계승의 주요 경쟁자인 바로 위의 형인 예양대군과는 달리 무위를 숭상하고, 도회적인 분위기와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요 지지 기반은 바로 요동군의 군부였다. 젊은 시절 직접 요동군에서 복무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군인들과 어울려 북쪽 깊은 곳까지 여름철이면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기 일쑤였었다.

지금은 갈수록 형인 예양대군과의 정쟁이 격화됨에 따라 심양을 가급적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그가 마음을 편하게 느끼는 곳은 심양같이 번잡한 도성이 아니라, 그 밖의 너른 벌판이었다.

문치를 중요시하게 여겨온 심왕부의 여러 군주들을 거쳐 오면서, 요동에서는 문(文)을 중요시하는 기조가 널리 퍼져 있었고, 때문에 실제 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학문에 조예가 깊은 예양대군에 비해 금양대군은 조금 뒤처지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요동도평의사사의 관리들은 사실상 예양대군을 편들어 주고 있었고, 족히 백 년을 넘어가는 안락한 시대에 익숙해진 요동의 백성들도 예양대군을 남몰래 지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양대군이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형인 예양대군에 비해서 시세를 읽는 후각이 좀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심양 생활이 좀이 쑤셔 몸에 맞지 않았지만, 금양대군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이 정치 싸움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금전이었고, 때문에 항상 눈여겨 보아왔던 북륙에 더욱더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다름 아닌 모피 때문이었다.

그간 모피는 북해도독부의 엽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은 혹독한 바닷가와 그 일대의 삼림지를 오고 가며 모피를 사냥해 왔다. 이들은 모피에 대한 수요량이 늘자, 굳이 어렵게 여진족이 사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신천지나 다름없는 신대륙으로 향해 갔다.

모두가 북륙에서 모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되는 위험을 무시하고 기반 없는 곳으로 섣불리 들어가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소규모의 원정대가 흑룡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쪽으로 진출하기도 했지만, 가져오는 모피에 비해서 위험이 더욱 컸었다.

금양대군이라고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좀 좋은 수가 있었다. 그의 신분과 요동군의 지지를 배경으로 무기를 소지한 원정대를 구성할 수 있었고, 더군다나 길목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몽골과의 관계가 개인적으로 좋았다는 점이었다.

북원(北元)의 대칸인 투멘 자사그트칸(T men Jasagtu Khan)의 딸 중 하나를 금양대군은 일찍 죽은 부인을 대신해 후비(後妃)로 맞아들였고, 이를 통해 금양대군과 대칸 사이에는 끈끈한 결속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들어맞았고, 만약 직접 북륙에서 모피를 얻어올 수 있다면, 금양대군은 이를 통해서 국제적인 무역과 연결될 수 있었고, 자금을 확보할 뿐더러, 요동의 상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 세자를 세우지 않고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하게 자신에게로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대가 이 일을 맡아서 직접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능성을 탐지해 보아 주었으면 좋겠네.”

몇 달간의 고민 끝에 금양대군이 은밀히 불러들여 북륙으로의 탐사를 명한 것은, 바로 동로마에서 귀부한 한경조의 고손자이자, 요동도평의사사의 의정까지 지낸 정계의 실세였던 한부겸의 손자 중 하나인 한의직(韓宜直)이었다.

그는 대체적으로 예양대군을 지지하는 가문의 다른 형제나 사촌들과 다르게, 군문에 투신했었던 것을 계기로, 홀로 금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있었다.

사실상 가문과 절연하고 금양대군의 곁에 남은 터라, 그에 대한 금양대군의 신뢰도 깊었다. 때문에 중요한 임무를 한의직에게 맡길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길만 뚫어주신다면 북쪽 끝이라도 다녀오겠습니다.”

한의직은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강고한 외모에 어울리는 단단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고, 한 번 내뱉은 말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군대에서 익힌 지도력까지 있는 사람이었으니, 이런 혹독한 원정을 지휘할 만한 최고의 적임자였다.

“내가 그대 덕분에 항상 힘이 나는구나.”

금양대군은 한의직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는 직접 칼 한 자루를 신뢰의 증표로 한의직에게 내려 주고서, 북륙 개척의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

이렇게 사실상 비밀리에 시작된 북륙 탐사의 첫 원정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열악한 지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의직은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30명 내외의 전직 군인들로 구성된 이들 탐사대는, 상인으로 위장하고 동몽골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무장을 단단히 갖춘 다음에 한해(瀚海, 바이칼호)로 향했다.

한해는 몽골말로는 달라이노르(Dalai―Nor)로, 큰 호수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 호수는 이미 신성한 호수로 그 이름이 크게 알려져 있었고, 중국과 조선에서는 한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몽골의 협력을 받았기에 한해까지 이르는 길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곳에서부터였다. 다행히도 여름철에 북쪽으로 들어갔기에, 고생스러운 추위를 겪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북쪽의 수렵민들의 영역을 고작 30명의 인원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한해에서부터 시작되어 서쪽으로 흘러, 예니세이강과 합류하는 앙가라강을 따라 한의직은 탐험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을 지나가며 몇몇 수렵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확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충돌을 간신히 피하기도 했다.

앙가라강과 예니세이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나아간 한의직은, 그곳에서 시비르 칸국(Seber xanlı ı)의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더 이상 서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앙가라강으로 거슬러 온 한의직은, 앙가라강의 연안에 진지를 세우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겨울은 혹독했다. 북륙의 추위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30명의 인원들 중 절반 이상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겨울이 끝났을 때 한의직을 포함해 겨우 12명의 인원만이 동몽골을 통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탐험 와중에도 질 좋은 담비 가죽과 여우 가죽을 수백 장 이상 구해 요동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북해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질 좋은 모피였다.

“수고 많았네. 내 직접 부왕께 상주드려서 본격적으로 북방 경략을 해볼까 하니, 그때도 자네가 좀 수고해 주었으면 좋겠네.”

한의직의 성과에 금양대군은 적잖이 만족했다. 이틀 뒤, 바로 부왕을 찾아간 금양대군은, 요동도 북방 경략을 통해 모피 무역을 시도할 수 있고, 그것으로 국고를 채울 수 있다며 설득에 나섰다.

금양대군에 대해서 조금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던 심왕 김유도, 이번의 제안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의 평가를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금양대군은 전심전력으로 부왕을 설득했고,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고서는 요동군이 주둔하는 가장 북쪽 진지인 대주보(臺州堡)에 무역 기지를 설치하고, 일대의 요동군의 지원을 받아 흑룡강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야인여진들을 정토(征討)하기 시작했다. 북륙으로 나아가는 안전한 길목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지속적인 야인여진에 대한 정벌 작업과 동시에, 한의직이 이끄는 두 번째 원정대는 천여 명의 대규모로 흑룡강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몽골의 호의에 의존해 그들의 영역을 통과하는 대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야인여진의 습격에 맞서며, 대주보에서 흑룡강으로 가는 길목에 여러 개의 둔지를 세웠다. 이 둔지들 사이로 요동군이 임도(林道)를 닦았다.

그중 가장 크게 조영된 둔지가 쌍성보(雙城堡)로, 금나라 때에 세워진 포달채(布達寨)와 달하채(達河寨), 두 성의 폐허 위에 조성되었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요동군이 이곳에 5천 명으로 구성된 쌍성파견대(雙城派遣隊)를 주둔시켰고, 이들이 대주에서 흑룡강까지 이르는 「북륙임도(北陸林道)」의 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흑룡강 연안에 나무로 만든 작은 성채인 애혼보(愛琿堡)를 세운 것으로 2차 원정대의 임무는 끝났다. 금전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이 대주에서 애혼보까지 천 리에 걸쳐 닦인 이 북륙임도는, 이듬해 출정한 3차 원정대가 쉽게 북륙의 오지로 들어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3차 원정대는 흑룡강 애혼보에서 출발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그곳에서 한해까지 가는 루트를 개척하고, 열나하(列拿河, 레나강)유역에 다다라 그곳의 야쿠트인들과 모피 무역을 시도했다.

열나하 남쪽 지류의 언덕 위에 신암보(新巖堡)라는 나무 벽을 둘러싼 조잡한 요새를 하나 만들고, 그곳에 30명가량을 겨울 동안 나게 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열나하를 따라 나무배로 오고 가며, 여름을 중심으로 일 년에 넉 달가량을 모피 무역에 집중적으로 종사했다.

이 3차 원정에서 한의직은, 요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암보와 애혼보를 오고 가며 모피 무역이 정착될 수 있도록 4년에 걸쳐 애를 썼는데, 그 결과 고정적인 길이 개척되고, 그 길 가운데에 모피 상인들과 엽사들이 머무르거나 몸을 피할 수 있는 산채(山寨)가 듬성듬성 세워졌다.

그 결과, 금양대군은 지속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품질 좋은 모피를 송상 등에게 팔아서 이윤을 남길 수 있었고, 이 이윤의 삼분의 일을 부왕에게 진상해 국고에 귀납시킴으로써 신뢰를 살 수 있었다.

남은 차익으로는 한의직을 통해서 「북륙고금상사(北陸股金商社)」를 설립케 하고, 이 자금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형인 예양대군과의 정치적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북륙의 모피 무역은 안정되기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인구가 조밀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들어서 있는 중위도 지역과 달리, 북쪽의 유목민들과 접한 요동은 명과 접한 서쪽을 제외하고는 달리 국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이 없었다.

먹을 종이 위에 뿌리면, 짙게 색이 남은 중심에서부터 점차 옅게 주변으로 번져 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먹이 묻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처럼, 요동의 국경이라는 것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요동이 북륙으로 가는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동군이 임도를 닦고, 그 길을 따라 성채를 세우고 진둔하게 되었지만, 임도라는 선과 요새라는 점을 제외한 바깥은 여전히 야인여진이나 몽골인이 출몰하고, 주인 없이 유목민과 수렵민이 들락거리는 잡거지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지대를 통과하면, 요동군의 보호 없이 서쪽으로 한참을 오고 가야 했고, 이들에게는 자발적으로 허가를 받아 무장하는 것이 유일한 신변 보호 방책이었다. 때문에 산발적인 교역이 끊겼다가 반복되기 일쑤였고, 안정적인 모피 취득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금양대군에게 있어서는 모피는 곧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고, 때문에 각별히 한의직을 지원하면서 북륙의 개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정착해 가는 모피 무역에 대해, 예기치 못한 복병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때는 금양대군도, 한의직도, 요동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1590년 맹추(孟秋)

시비르 한국(Seber xanlı ı), 카쉬르크(Qalıq)

14세기 말, 금장한국(金帳汗國)이 무너진 뒤, 유라시아의 서부 초원지대에는 여러 유목국가가 난립했다. 그중 하나가 시비르 한국이었다.

칭기즈칸의 핏줄을 이어받지 않은 케레이트 출신의 타이부가(Taibuga)가 처음으로 시비르 한국을 세웠고, 황금씨족이 아니면 칸을 칭할 수 없다는 유목민족의 전통은 칭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핏줄을 이어받은 가문 중 하나인 샤이바니드가(家)의 사람들이 시비르 한국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타이부가의 가문과 샤이바니드 가문 사이에 여러 번 칸의 자리가 교대된 뒤, 지금의 칸의 자리에는 샤이바니드 출신의 쿠춤 이븐 무르타자 이븐 이바크 칸(Kuchum ibn Murtaza ibn Ibak Khan)이 앉아 있었다.

쿠춤 칸의 치세 아래에서 시비르 한국은 번영하고 있었다. 가장 북쪽에 자리한 이슬람 국가로서, 초원의 가운데에 자리한 위치 덕분에 초원길의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부상하기 시작한 서쪽의 루스 차르국(Tsarstvo Russkoye)의 존재는 시비르 한국에 큰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루스 차르국의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반 4세 뇌제(雷帝)가 스스로를 「차르[帝王]」로 칭하면서 제국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차르의 권한은 점차 강화되었고, 전제적인 황권을 수립함에 따라 러시아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권력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반 뇌제는 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망상증의 증세가 있었고, 손에 넣은 권력으로 폭력적인 지배도 서슴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귀족 계층인 보야르들의 조력에 힘입어 그는 각종 개혁에 착수했고, 군대와 지방통치제도를 완전히 재조직했다.

내부적으로 힘을 축적하자, 이반 뇌제는 1552년 볼가강 유역의 카잔 한국을 공격해서 병합하고, 그뒤 바로 볼가강과 카스피해에 면한 아스타라한 한국도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반 뇌제는 볼가강 유역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 다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우랄산맥 너머의 광활한 대지였다.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병합함으로써 우랄산맥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연 이반 뇌제는, 부유한 상인 가문인 스트로가노프(Stroganov)가문을 통해 동쪽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반 뇌제는 아니케이 스트로가노프(Anikey Stroganov)에게 우랄산맥에 근접한 막대한 토지를 하사하고, 막대한 세금을 면제해 줬다.

아니케이 스트로가노프는 이런 배려에 힘입어 우랄산맥 서쪽 사면의 넓은 대지에 대규모의 이주를 기획했고, 많은 숫자의 농부와 사냥꾼, 그리고 채염(採鹽) 기술자와 광부들을 이주시켰다.

마지막으로 그가 착수한 일은, 우랄산맥 너머의 유목 및 수렵 부족들과의 교역을 트는 것이었다.

아니케이 스트로가노프의 뒤를 이은 세미온 스트로가노프(Semyon Stroganov)는 코사크인들을 고용해 시비르 한국의 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코사크의 두령인 예르마크에게 역으로 시비르 한국의 공격을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쳐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결국 1581년, 예르마크는 1,630명의 원정대를 꾸려 우랄산맥을 넘었고, 타길(Tagil)과 투라(Tura)강을 따라서 시비르 한국의 심장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격적인 진격에 시비르 한국은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고, 결국 수도인 카실리크(Qashliq)가 일시적으로 함락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러나 수도를 잃는 와중에도 쿠춤 칸은 다행히 탈출을 하는 데 성공했고, 휘하의 기마대를 모아서 이르테쉬(Irte )강에서 예르마크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3일에 걸친 이 전투의 결과로, 쿠춤 칸은 다행히도 예르마크를 우랄산맥 서쪽으로 다시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점점 늙어가는 군주 쿠춤 칸은, 우랄산맥 서쪽의 비옥한 토지를 근간으로 점차 성장해 가며 압박을 해오기 시작하는 러시아에 대해 증오심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는 장기적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단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한 번의 승리를 거두어 일시적으로 러시아를 몰아내기는 했으나, 이들은 언제고 마음만 먹는다면 우랄산맥을 넘어 시비르 한국의 황량한 대지를 유린하고도 남았다.

“미친 기독교도들이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산맥 서쪽에서 힘을 기르고 있는데, 내게는 겨우 수천의 나약한 병사와 무너져 가는 천막들밖에 없구나.”

쿠춤 칸은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는 탄식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양한 핏줄을 지닌 우랄산맥 동쪽의 초원 부족들은 시비르 한국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기는 했으나, 강력한 왕권 아래에 통합되어 있지 못했고, 그저 유목국가의 관습대로 쿠춤 칸의 영도 아래에 느슨한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병력을 동원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시비르 한국 내부의 고질적인 종교 문제 또한 쿠춤 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인 쿠춤 칸을 비롯한 지배층과 달리, 지역의 토착 부족들은 샤머니즘을 신봉하고 있었다.

“칸, 예니세이강 중류에 낯선 상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칸을 직접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칸께서 허락하신다면, 지체하지 않고 카쉬르크로 오겠다고 합니다.”

번민에 쌓여 있던 쿠춤 칸에게 어느 날, 예니세이(Y nisay, 예니사이)강 동쪽에서 올라왔다는 수상한 대상(隊商)들에 대한 보고가 전해져 왔다.

“도대체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근심거리는 서쪽으로 충분한 데 말이다. 몽골인들인가?”

“아닙니다. 몽골말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솔롱고에서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솔롱고라,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고 합니다.”

전령의 말에 쿠춤 칸은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 먼 데서 이곳까지 찾아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뭐란 말인가? 그들이 내게 위협이 되어 보이던가?”

“쉰 명 남짓으로, 무장을 하고는 있으나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하라. 내게 무엇을 얻어가고자 하고, 또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들어보도록 하자.”

쿠춤 칸의 허락이 떨어진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카쉬르크의 성문으로 괴상한 복장을 한 상인들 쉰여 명이 들어섰다.

이들은 오랜 여행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낯선 땅에 대한 기묘한 두려움을 눈가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끄는 상인들의 영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쉬르크의 성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성 안의 허름한 객사가 이들을 위해 내어졌고, 사흘 뒤 쿠춤 칸은 이들의 영수가 자신을 알현하는 것을 허락했다.

“요동왕의 명을 받아들고 칸을 뵈러 온 한의직이라 합니다.”

상인들은 요동의 모피 원정대였고, 그들을 이끌고 온 것은 바로 한의직이었다.

한의직은 썩 격식을 차린 몽골말로 칸에게 자신을 요동왕의 특사라고 소개했다. 이 말을 다시, 칸의 궁관(宮官)이 타타르 말로 옮겼고, 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의직을 흘겨보았다.

“요동이라, 그곳은 중국의 속방인가? 아니면 그대들이 전에 말한 대로 솔롱고라는 나라에 속한 땅인가?”

“솔롱고의 황제는 여러 왕들을 거느리고 있고, 그중 하나가 몽골의 동쪽에 위치한 우리 왕이십니다.”

“그런가? 그래, 도대체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쿠춤 칸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고, 경계의 눈빛을 지우지 않으며 한의직에게 물어왔다.

그러나 한의직 또한 눈썹 한 번 꿈쩍 하지 않고, 당당한 눈으로 칸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들은 예니세이강 동쪽에서 비싼 값으로 모피를 사들이고 있으며, 칸의 속하에 있는 부족들과도 모피를 거래하기를 원합니다. 칸의 영토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에 대해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칸께서 원하시는 만큼 세금을 바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서쪽에 있는 러시아 잡배들도 모피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감히 그들이 그것을 탐내지 못하게 나는 일체 모피의 거래를 금지하고 있노라. 근데 도대체 그대들에게만 이를 허락해 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칸의 말을 들은 한의직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그는 카쉬르크의 성내로 들어오면서 본 검게 탄 건물들과 피폐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모종의 전투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혹시 카쉬르크를 공격한 이들이 칸께서 말씀하신 러시아인들입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들과 무슨 상관인가?”

“저희들은 모피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무기들도 전하께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한 번 무기의 성능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 곳까지 탐사를 다니느라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는 한의직의 말을 쿠춤 칸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시간을 내서 그들이 말하는 무기의 성능을 봐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면 매질을 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내쫓아 버리면 될 일이었다.

“좋다. 한 번 내게 그대들이 말하는 무기의 힘을 보여보아라.”

바로 그날 오후, 한의직이 이끌고 온 원정대원들 중 요동군에서 오래 복무한 경력이 있는 이들 10명이 추려져, 카쉬르크 왕궁의 뒤뜰에 모였다.

이들은 유일하게 요동에서만 보유하고 있는 조잡한 강선이 들어간 수석총을 등에 매고 있었다.

발달된 제련업을 바탕으로, 요동에서는 16세기 초에 기초적인 형태의 강선을 새긴 수석총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것은 요동군에 수십 년에 걸쳐 점차 보급되었다.

심지어 내지에조차 이 기술을 건네지 않고, 요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선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간 개량이 계속되었고, 이 시기에 이르면 선조총이라 부를 수는 없으나, 동시대의 다른 열병기들과 비교해서 가장 우수한 형태의 총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량된 무기 덕분에, 요동군의 기마대는 기마 상태에서 총을 사용할 수 있는 전략적인 이점을 얻게 되었고, 그러한 훈련을 받아온 요동군 출신의 원정대들은 기마 상태에서의 총술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의직이 믿고 있는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한의직이 얼핏 보기에 시비르 한국의 군대는 전통적인 유목군대였다.

이들은 칭기즈칸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군사적인 기술을 그대로 지금까지도 답습하고 있었다. 이들의 장점은 기동력이었기에, 기마 상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총이 주어진다면 그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한의직이 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요동군을 제외하면, 이 당시 화약 무기로 무장한 기병은 독일 일대에서 등장한 권총 기병(Reiter)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기마병인 시비르 한국의 군대에는 장총인 요동 보총이 훨씬 적합했다.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된 군대에서 전략적으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는 권총 기병과 다르게, 요동군의 기마대는 오로지 기마병만으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기와 이러한 전술을 시비르 한국에 넘겨준다면, 장기적으로 북륙의 서쪽에 안정된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 요동에서 시비르 사이의 거대하고 광막한 침엽수림 지대에서 안정된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제 사격!”

기마 상태로 왕궁 뒤에 너른 뜰에서 달리던 사수들은, 한의직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표적을 향해 총을 쏘았다. 타닥거리며 튀는 화약 소리와 함께 이내 표적으로 총탄이 내리꽂혔다.

“……!”

이들의 무기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쿠춤 칸은, 실제로 그 위력을 보고 나서는 할 말을 잊었다.

저 무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우랄산맥을 넘어오는 러시아인들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았다.

화약 무기의 존재는 잘 알고 있는 쿠춤 칸이었으나, 기마 상태에서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는 이유로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이 정도의 운용이 가능한 무기라면 충분히 도입할 가치가 있었다.

“내게 몇 정을 내어 줄 수 있는가?”

“요동으로 돌아갔다가 내년에 돌아오는 길에 500정 정도는 가능합니다. 왕국에서 함부로 반출을 금하고 있는 무기라,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칸께서 저희와 꾸준히 전략적인 동맹 관계를 약속해 주신다면,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지원을 확대해 볼 수 있습니다.”

“좋다. 좋아. 내가 그대들에게 내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면장을 발부해 주도록 하겠다.”

쿠춤 칸은 기분이 잔뜩 고양되어 한의직을 얼싸안으며 약속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모든 시름이 사라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쿠춤 칸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고서, 한의직과 원정대는 다시 천 리가 넘는 길을 돌아가 한해 서쪽에 세운 전진 기지인 서안보(西岸堡, 이르쿠츠크)로 향했다.

예니세이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류인 앙가라강을 따라 올라가면, 한해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바로 동몽골로 들어가거나, 혹은 열나하 유역을 거쳐 흑룡강으로 돌아가는 루트를 이미 개척해 놓은 뒤였다.

이곳에서 머물며 한의직은 요동으로 전갈을 보내 금양대군에게 시비르 한국과의 무역로를 열었다는 사실을 알렸고, 덧붙여서 특별히 보총 500자루의 지원을 부탁했다.

전략적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 요동 보총이었으나, 그간 모피 무역의 성과에 고무되어 있던 금양대군은 심왕 김유에게 간곡히 청해서 보총 500정을 불하받을 수 있었고, 이것을 봄이 되어 길이 열리자마자 서안보로 보냈다.

이 무기는 이내 정기적으로 시비르 한국으로 오고 가기 시작한 한의직 휘하의 대상들에 의해 쿠춤 칸에게 전달되었고, 칸은 이 무기로 휘하의 군대를 훈련시켜 이듬해 예르마크가 다시 우랄산맥을 넘어왔을 때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예르마크의 목숨마저 취할 수 있었다.

이로써 러시아의 동진(東進)은 일시 그 기세가 꺾였고, 이반 뇌제의 죽음과 함께 초래된 동란(動亂)과 서쪽에서 러시아를 압박해 들어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존재 때문에 일시적으로 우랄산맥을 넘어가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

북륙(北陸, 시베리아)의 모피 무역이 한동안 요동의 손아귀에 쥐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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