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4장 을미왜란(乙未倭亂) (55/82)

제54장 을미왜란(乙未倭亂)

「왜구(倭寇)가 진서에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신장(平信長, 오다 노부나가)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아조가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진서에 파견하여 내지를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진서도독부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수길(平秀吉)·평청정(平淸正)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 왔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소창진첨사(小倉鎭僉使) 진서군 육군 부령(副領) 정발(鄭撥)은 마침 단포(壇浦, 단노우라)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박주부(博州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승안군(勝安郡), 신기군(神埼郡), 좌하군(佐賀郡), 소성군(小城郡), 송포군(松浦郡) 등 여러 군을 함락하였는데 진서군 참장(參將)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이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倭寇至鎭西. 先是日本賊酋平秀吉爲關白, 幷呑諸國, 殘暴日甚. 常以我朝不許朝貢爲憤, 嘗遣鎭西僧玄蘇等, 乞假途犯內地, 鎭西都督府以大義拒之甚峻, 賊遂傾國出師, 以玄蘇, 平秀吉, 平淸正等爲將, 大擧入寇. 賊船蔽海而來, 小倉僉使鎭西軍陸軍副領鄭撥, 方獵於壇浦, 謂爲朝倭, 不設備, 未及還鎭, 而賊已登城. 撥死於亂兵. 翌日陷博州府, 府使宋象賢死之, 其妾亦死之. 賊遂分道陷勝安郡, 神埼郡, 佐賀郡, 小城郡, 松浦郡等諸郡, 參將李珏, 擁兵先遁. 昇平二百年, 民不知兵, 郡縣望風奔潰.」

―《세조실록(世祖實錄)》, 21권,

태정(太禎) 7년(1595) 2월 19일 첫 번째 기사

1595년

태정(太禎) 7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

가마솥에 물을 넣고 뚜껑을 덮은 뒤, 한참을 장작불 위에 올려두면 김이 새다 결국 압력에 의해 뚜껑이 들썩이게 마련이다.

진서를 제외한 일본 전역을 손에 넣은 오다 노부나가가 처한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전국시대의 동란 속에서 백 년 가까이 끓어온 일본이라는 가마솥은, 장작을 치웠다고 해서 쉬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다가 연 아즈치 막부에 깃발을 접고 들어온 뒤에도, 여전히 지나치게 무장하고 있는 각지의 다이묘들과 넘쳐나는 무사들,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평화에 대한 반동적 복고주의 등이 오다 노부나가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힘을 외부로 발산시키는 것이다. 더군다나 좋은 명분도 있는 것이, 진서의 고토(古土)를 한구(韓寇, 조선 도적)으로부터 되찾아온다는 것이다.

물론 목표야 클수록 좋으니, 조선의 본토를 치기 위해 진서도독부에 길을 내어 주고, 다시 복속하라는 「정한가도(征韓假道)」의 뜻을 전달했으나, 당연히 황성부에서 임명받은 한인 관료들이 오다의 겁박에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평화롭게 다시 일본의 품으로 돌아와 구적(仇敵)인 조선을 치자고 권했음에도 진서에서 거절을 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일본 대내적으로 오다에게는 좋은 명분을 주었다.

특히 그의 부장(副將)들 중 하나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특히 진서원정에 유난히 신경을 썼고,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원정군의 우두머리로 삼아서 서쪽으로 보낼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가 다이묘들에게서 차출받은 18만의 병력과 그간 생산해 둔 각종 무기로 무장하고 진서로 건너가게 되면, 오다는 쿄토의 지척인 아즈치의 거성에 앉아서 국내의 사정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사실상, 진서야 얻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전란은 길어질수록 좋았다. 그만큼 오다 노부나가가 지금은 굴복했다지만 언제고 적이 될 수 있는 내부의 다이묘들을 상대로 아즈치 막부의 반석을 단단히 다져 놓을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전쟁이 결심만 했다고 해서 쉽게 벌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오다가 1586년 장남 노부타다를 쇼군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칸파쿠(關白)의 자리에 올라 아즈치 막부(安土幕府)를 연 뒤로, 10년이 걸린 뒤에야 오다는 진서로의 침공을 결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그는 쿄토의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야 했고, 잠재적인 모반자인 다이묘들을 단속하고, 각종 제도 개혁과 문물의 도입을 통해 개혁 정치를 시도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추진한 개혁의 중심지는 거성(居城)인 아즈치 및 쿄토와 가까운 주요 항만 도시인 사카이(堺)였다.

그중 사카이는 무로마치 시대 이래 번성하기 시작한 도시로 진서, 조선 및 남만과 연결되는 항구였다. 상인들의 자치로 운영되는 도시를 직할령으로 만들기 위해 오다는 이 도시를 한 번 불태웠다가 재건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각종 병기창(兵器廠), 야금장(冶金場), 주물 공방 등을 세워서 본격적으로 무기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사카이에서 생산되는 주요 무기는 크게 남만, 즉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으로 전래된 기본적인 화승총뿐만 아니라, 진서에서 흘러들어 온 조선식의 보총인 수석총(燧石銃)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당초 요동 보총의 명성을 듣고, 그 총을 몇 자루라도 구하고자 했으나 한국 황제도 얻을 수 없는 총이란 소리를 듣고는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다 노부나가는 요동 보총에는 미치지 못하나, 정체되어 있는 제국 내지의 제총술에는 지지 않을 정도의 총기를 개발해 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진서에서 데려와 측근에 두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인들과 접선을 놓았고, 각종 대포를 수입해 손에 넣는 데도 성공했다.

오다는 이것을 직접 생산하라 명했고, 사카이의 공인들이 3년 넘게 매달려서야 겨우 그럴싸하게 모방해 낼 수 있었다.

사카이에서 생산해 내는 것은 무기뿐만이 아니었다. 예전 나상이 교관선을 만들기 위해 강남과 왜의 조선공들을 좋은 값에 불러들였듯이, 오다 노부나가 또한 자금을 아끼지 않고 뛰어난 조선공들을 각지에서 불러 모았다.

일본의 조선 능력 또한 뒤처지지 않는 것이었으나, 원양 항해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잖아 있었고, 이를 해소하고자 진서·유구·포르투갈 등의 조선공을 사카이에 불러 모아 함대를 건선하는 기술을 사카이의 조선공들에게 터득시키게 했다.

전쟁이 지척에 온 줄도 모르고 진서에서 건너온 상인들은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에 환호했다.

사카이가 번영하기 시작하면서 이 항구와 밀접한 무역 관계에 있던 박주의 상인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번창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가누비토 출신으로 가톨릭 신자인 이들은 1592년(태정 4)에는 무려 태정통보로 12만 냥에 달하는 거금을 갹출하여, 「박주성모대성당(博州聖母大聖堂)」을 봉헌하여 옛 하카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울 정도였다.

유럽에서 모셔온 성유물에다가, 금박을 입힌 화려한 제단, 고딕 양식을 모방한 높은 첨탑, 그리고 로마의 교황이 직접 은사(恩賜)했다는 동종(銅鐘)이 걸린 이 성당은 곧 박주 상인들의 자부심과 번영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일본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중계무역에서 나온 부였고, 행복함도 잠깐, 이내 이것은 박상의 목을 죄어 오게 된다.

“일본과의 무역을 사사로이 행하지 말고, 반드시 관아의 인허를 받아서 할지니, 매년 통보 5백 냥 이상의 무역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사흘 내로 도독부 관아에 출두하여 신고하라.”

황성부에서 조카를 제위에서 몰아내고 태정제가 직접 면류관을 쓴 뒤, 중앙 정계에서 사실상 밀려난 황윤길(黃允吉)이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게 진서대도독으로 부임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성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가진 바 성품대로 진서대도독의 최고 임무나 다름없는 진서의 통치와 방어에 주력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포착된 것이 바로 지척에 있는 일본이었다. 이미 전국의 동란이 끝나고 오다가 통일을 완수했으면서도, 여전히 군비를 확충하고 무기를 개량하며, 배를 건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윤길은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만약에 그 군대가 일본 밖으로 향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표적이 될 곳은 자명했다. 원래 일본과 하나였던 이곳, 진서였다.

하나 진서에서 일본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때는 제국의 여러 군대들 중에서도 강맹하기로 손에 꼽혔던 진서군은 지금은 반쯤 누더기 군대가 되어 있었다.

점차 병력을 줄여 지금은 겨우 4만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군역 대신 세금을 내는 관습이 퍼져 나가, 진서도독부에서 돈을 주고 병사를 고용하게 됨에 따라 질이 좋지 않은 병력만이 가득 차 있었다.

번창하고 있는 진서에서, 굳이 호구지책으로 병역을 살려는 자들은 정말 살기 힘든 자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이렇게 칼끝을 어디로 겨눌지 모르는 일본이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이들로, 황윤길이 지목한 것이 바로 박상을 비롯한 가누비토 계층들이었다.

이들은 남만인, 즉 포르투갈인들과도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인들과는 상업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상인들뿐만 아니라, 학자들 또한 진서나 내지에서 학문을 배워, 그 배운 것을 일본에 건너가 가르치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본토의 사정에 비해서, 일본에서는 한학(韓學)을 배우고자 하는 열풍이 불고 있었고, 이 전수자의 노릇을 진서의 지식인 계층은 감당하고도 남았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해서 황윤길이 빼어 든 것이, 바로 「도왜제한령(渡倭制限令)」이었다.

도독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사사로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없고, 무역을 행할 수 없다는 단순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치 못한 반발을 크게 불러왔다.

“지금 진서는 도독부도, 내지도 아닌 바로 일본이 먹여 살리고 있소. 사카이와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면 이 박주는 다음 날 바로 굶게 될 것이외다.”

“세금은 세금대로 잘 바치고 있는데, 갑자기 무역을 제한하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그간 누구 덕에 그렇게 배를 불려 왔으면서 갑자기 이제는 무역을 하지 말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박주의 상인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박주, 기주, 녹아도(鹿兒島, 카고시마) 등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가누비토 계층 전체가 도독부에 정책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연행하고, 잡아들이고, 매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이들은, 이제 이것을 신앙에 대한 탄압으로 여기고 있었다.

황윤길의 입장은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와 조선 기술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전처럼 무역을 행하도록 하라.”

결국 한 발짝 물러나서 무기와 조선 기술에 대한 부분만 금령을 두고서 나머지는 예전의 관습대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윤길의 예상은 옳았다. 알고 도와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다 노부나가는 박상을 비롯한 진서 상인들과 예수회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고, 나라의 체질마저 바꿔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대한제국에 대해서 면밀하게 보고를 듣고 있었고,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을 칼같이 구분해 냈다.

그는 지금 한국이 전성기가 지나가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고, 그 주 원인은 쓸데없이 권력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준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중앙 권력은 황제와 내각과 추밀원이 서로 나눠져 있고, 지방으로 가면 진서·요동·북해가 모두 제멋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쿄토에서는 귀족들이 서로 물어뜯고, 지방에서는 다이묘들이 할거하는 옛 일본과 다를 바가 없게 될 터였다.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는 물질적인 성장을 하는 동시에, 일본 내부의 정치적 개혁에도 주도면밀하게 손을 대기 시작했고, 아즈치 막부의 쇼군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다이묘와 무사 출신의 막신(幕臣)들이 아니라, 오로지 쇼군을 위해서만 봉행(奉行)할 정신(廷臣)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노부나가의 생각이었고, 그 결과 「쇼헤이코」라는 교육기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황성의 4대 학당을 모방하고, 일부는 서양의 대학 제도를 참조한 것으로, 그 이름인 쇼헤이(昌平)는 바로 공자(孔子)의 고향인 노나라 창평(昌平)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학교는 막부의 바로 지근거리에 있는 비와호(琵琶湖) 동안의 쇼헤이자카(昌平坂)에 세워졌고, 진서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종래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막신이 된 안가 베드로가 학장(學長)으로 부임되어 오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제도하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직접 선별한 무가의 자제들이 학문을 익혀 가신단에 들어오게 되었고, 점차 권력에 중추로 이들을 올려 보내면서, 동시에 노부나가는 기존 세력들을 한 번의 전쟁으로 밀어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그간 자신에게 충성을 다 바쳐 왔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고 권력을 위협하는 낌새를 보이는 하시바 히데요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쇼군과 칸파쿠의 명을 받들어, 진역(鎭域, 진서)을 정벌하는데 하시바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함께 출군할 것과 이를 준비하기 위해 야마구치 성을 대업에 바칠 것을 권하노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때 대내씨를 몰아내고, 진서와 바로 마주한 혼슈의 서쪽 끝에서 번성을 구가하던 모리씨도, 결국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몸을 숙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명하는 대로 진서로 출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이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자기 몸이 가지 않더라도 자식이나 병력을 이 전쟁에 인질 삼아 내어놓아야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실 전쟁의 승패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기면 이긴 대로, 공이 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줄 땅이 생겨서 좋은 일이고, 지면 진 대로 앞으로 짊어지고 가기 부담스러운 잉여 사족들과 병력이 모두 알아서 사라지게 될 터였다.

많은 계산 끝에 오다는 설사 진서를 침범한다 하더라도 지금 한국의 약화된 군사력을 보아 전쟁이 일본 본토로 확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힘들겠지만, 결국 전쟁은 진서를 놓고 싸우는 형국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이 경우 오다 노부나가로써는 잃을 것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판단 끝에 준비가 모두 되었다고 여겨지자, 오다 노부나가는 지체 없이 공격명력을 내렸다.

진서가 지척으로, 예전 대내씨의 거성이었던 야마구치에 모인 14만의 병력은 제각기 세 갈래로 나뉘어 진서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중, 제1로에 선 것이 바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지휘하는 절반에 상당하는 7만의 군세였고, 단노우라를 건너자마자 바로 폭풍처럼 진격하여 박주성까지 거꾸러트리게 되었다.

박주부(博州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저항 끝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을미년, 1595년 봄, 전쟁은 갑작스레 폭풍처럼 시작되었다. 오로지 진서에서 이 일을 예견하고 있던 것은, 진서대도독 황윤길과 일부의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이렇게 대단한 규모의 전면전이 될 것이라고는 이때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1595년

태정(太禎) 7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박주부.

오다 노부나가는 진서로 들어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든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히데요시는 나름의 전략대로 진서를 빠른 속도로 취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이끈 제1군은 진서의 서쪽으로 내려가 기주부를 장악하고, 그곳의 도독부를 폐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시코쿠에서 건너가 진서의 동쪽에 상륙한 제2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끌고 있었고, 보름의 차를 두고 뒤늦게 출발한 제3군은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맡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의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충성을 뒤늦게 증명하기 위해 출진한 모리 테루모토 같은 다이묘들에게 독자적인 군대를 이끌게 하지 못하게 하고서는, 자신이 속한 제1군 아래에 다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하여 이들의 신병을 지척에서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대신에 제2군과 제3군에는,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인 코니시 유키나가와 카토 키요마사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능력이 증명된 이들이었고, 히데요시의 인선이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점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쟁이 시작된 초창기 20여 일간, 이들은 거의 파죽지세로 기주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박주부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나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진서군의 보총대와 기마대는 기주로 가는 길목인 옥산(玉山)에서 진서군 전체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2만의 병력으로 매복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육군 참장(參將) 김민범(金敏汎)이 이끄는 이 군대는 3월 1일에 히데요시의 제1군을 맞아 격렬하게 싸웠으나, 결국 적을 저지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3월 4일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3천의 병력만이 남아서 지키고 있던 기주부는 히데요시의 1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지금 문을 열고 공손히 우리를 맞아들인다면, 그 목숨과 재산은 보호해 주도록 하겠다.”

히데요시는 으스대며 기주부를 향해 외쳤다. 이미 사카이를 거쳐 이세를 지나, 기주의 앞바다로 일본의 해군력도 도달하고 있었고, 기주는 이제 땅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포위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꽤나 뛰어난 전력인 진서의 해군을 상대로 먼저 승리를 거두어야 했지만, 토사의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이끌고 오는 일본 수군은 10년간 공들여서 완성된 대함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 함대를 이끌고 있는 쵸소카베 또한 무시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고려해 봤을 때, 히데요시는 기주가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래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기주가 스스로 성문을 열거나, 아니면 함락되어서 수중에 놓이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라. 우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할 것이다.”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진서대도독 황윤길의 의지는 강경했다.

그는 항복을 권유하는 일부 도독부 관리들의 목을 베어 성문에 내걸었다. 히데요시는 이내 그들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리 매수해 두었던 관리들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제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해졌으니 남은 것은 싸움뿐이었다.

쵸소카베의 수군이 도착해서 저들의 바다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버려야 본격적인 고사 작전이 가능했다. 히데요시는 조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단 열흘이면 충분할 터였다.

그리고 그러한 히데요시의 생각은, 성안의 진서군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저들이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듯합니다. 지금에라도 대도독께서는 몸을 건져 내지로 귀환하시어 원군을 청하십시오. 진서군의 병력은 마지막까지 기주에서 버텨보겠습니다.”

진서군 육군 부장(副長) 남기웅(南基雄)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 전투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을 적에게 그냥 훌쩍 넘겨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적의 살을 최대한 도려낸 다음에 죽을 작정이었다.

“……그게, 뭐, 듣기엔 좋은데.”

남기웅의 생각과 다르게, 해군 기주전단(崎州戰團)의 절도사(節度使)인 해군 참장(參將) 원균(元均)은 곤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기주전단은, 탐라국 제주에 있는 탐라진충함대(耽羅盡忠艦隊)의 통제사(統制使)가 내리는 지휘를 받는 예하부대였다.

그는 기주전단이 탐라진충함대 내에서 가장 편한 부대라고 생각해 스스로 자청해 절도사로 부임해 왔으며, 별다른 공적 없이 기주 부내의 기생집이나 들락거리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이런 그에게 육군과 같이 이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항전한다는 것은 꿈에라도 사절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 우선 해군 전력이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되니, 대도독을 뫼시고 나는 본토로 가서 원병과 곡량을 좀 실어오겠소. 지금 같은 때에 해군이 할 일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부끄러움에 말을 꺼내지 못하던 원균은, 한 번 입이 터지자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내뱉었다. 한마디로, 해군은 할 일이 없으니 나는 좀 몸을 피해야겠다는 이야기였다.

괜히 핑계를 대기 곤란하니, 원균은 다시 한 번 대도독 황윤길을 물고 넘어졌고, 원균의 심계를 간파한 황윤길은 역정을 냈다.

“원 참장. 함부로 군대를 이곳에서 뺄 생각을 하지 마시오. 나도, 남기웅 부장도,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외다. 만약 전투가 패하여 결국 끝나거든, 그때 가서나 몸을 어떻게 살려볼지 궁리하시오.”

황윤길의 질타에 원균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간 원균에 대한 성품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혀를 차며 볼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금 기주의 함대는 모두 원균의 통제하에 놓여 있으니, 만에 하나 적의 수군이 기주 앞바다에 나타나면, 원균이 잘 싸워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황윤길은 내키지 않게 원균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위로연까지 열어주었고, 전군의 단합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원균은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끝끝내 앙심을 풀지 않았다.

이렇게 기주의 상황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여 있는 사이, 히데요시는 기주 공략에 정신이 팔려 몇 가지 실수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가, 바로 제2군을 지휘하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제3군을 지휘하는 카토 키요마사에게 서로 맞지 않는 임무를 내린 것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둘을 서로 다른 군로(軍路)에 배속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는, 제2군의 진로에 버티고 있던 대우의통(大友義統, 오토모 요시무네)과 마주쳐 싸워야 했다. 문제는 이 풍주백(豊州伯) 대우의통이 당주로 있는 풍주백가, 대우씨가 바로 진서에서도 유명한 가톨릭 한번(韓藩, 카라한)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대내(大內, 오우치)씨의 백제공가가 그 힘을 잃었고, 남은 것이 축주후(筑州侯) 삽천(澁川, 시부카와)씨, 그리고 살주백(薩州伯) 도진(島津, 시마즈)씨였다. 박주를 중심으로 사실상 도시귀족화된 삽천씨를 제외하고, 진서 동부와 남부에서 막대한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대우씨와 도진씨였다.

그중, 대우씨는 전대 풍주백인 대우의진(大友義鎭, 오토모 요시시게)이 가톨릭에 귀의한 뒤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코니시 유키나가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보니, 전투의 명분이 좀체 서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하시바 히데요시의 장수들, 그중에서도 특히 코니시 유키나가가 내세우고 있던 것이 자유롭게 가톨릭 신앙을 전도하고 믿게 해주며, 고을마다 성당을 세우고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높은 진서의 중추 계층인 가누비토를 움직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시바 히데요시가 코니시 유키나가를 「키리시탄 백작」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대우씨의 영지로 진격시킨 것은 이러한 주장을 그저 허장성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미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영주 자신이 가톨릭교도인 이곳에서 코니시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대우의진과 대우의통이 그간 보이지 않게 불교를 겁박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독실한 불교 신자인 카토 키요마사의 3군을 이 방향으로 진격시키는 것이 내홍을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했을 터였다.

이렇게 코니시 유키나가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풍주백 대우의통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있는 동안, 또 하나 하시바 히데요시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바로 제3군의 카토 키요마사를 박주부에 머무르게 한 것이었다.

일찌감치 박주를 무너트린 히데요시는 이곳의 가누비토들에게 정상적으로 생업을 할 것을 주문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그리고 기주로 진격하면서, 뒤늦게 바다를 건너온 3군의 카토에게 박주의 감독권을 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카토 키요마사는 키리시탄이라면 질색을 하는 니치렌종(日蓮宗)의 신자였고, 때문에 가누비토를 중심으로 가톨릭 문화 일색이 되어 있는 박주에 들어서자마자 질겁했다.

“어떻게 남만교 사당 따위가 불전보다 클 수 있단 말인가?”

카토 키요마사는 박주의 유명한 사찰 동장사(東長寺)의 중건 명령을 내렸고, 이에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강제로 끌려 나와 역사하게 되었다.

심지어 동장사의 승려, 유항이 직접 나서 이를 막아보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토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스님 몸에 대내씨의 피가 흐른다던데, 얼마나 대단한 피인지 한번 봅시다.”

카토 키요마사가 겁주려 하는 소리에, 유항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진서의 가톨릭 신앙을 전쟁에 이용하려 했는데, 사실상 그 총본산이나 다름없는 박주에서 카토 키요마사가 그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사실상 황성부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서도독부에서는 가톨릭 전교를 사실상 허용하고 있었고, 수많은 신자들이 진서 전역에서 수를 불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신앙을 수호해 준다는 말에 일본군을 반겼던 사람들까지도 점차 상황이 녹록해지지 않자 반감을 가지고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표면으로 올라오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가 대우의통에게 가로막혀 진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황은 꽤나 양호했다.

진서군은 거의 괴멸 상태였고, 대우의통과 살주백 도진의홍(島津義弘, 시마즈 요시히로)이 이끌고 있는 각기 1만 정도의 병력이 진서의 군사력 전부였다.

이러한 시점에, 적적하게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수군을 이끌고 기주 앞바다에 당도했고, 황윤길에 의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기주전단을 이끌고 쵸소카베에 맞서 싸우러 나간 원균은 30분도 싸우지 못하고 배를 모조리 잃은 다음, 바다에서 겨우 목숨만 건져 땅으로 도망쳐 왔다.

“이런 썩을 놈을 보았나!”

원균의 실전으로 기주의 바다는 봉쇄되었고, 장수가 되어 제일 먼저 도망친 책임을 물으려고 했으나, 원균은 재기 좋게 목숨만은 건졌다.

기주부의 남은 병력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수만의 병력에 맞서서, 거의 17일 간을 버티며 항전했으나, 결국 성문은 뚫리고 말았다.

황윤길은 자결하고, 남기웅은 총탄에 장렬히 전사하였으나, 원균은 다시 한 번 결사의 탈주를 감행하여 달아났다. 명장들은 노도 앞에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으나, 졸장은 숨이 붙은 채로 잘도 도망쳤다.

히데요시의 군대가 통과한 기주부의 동문은 사흘 밤낮으로 불탔고, 진서도독부의 청사에 직접 지휘부를 꾸린 히데요시는, 대우의통과 도진의홍의 병력을 정리할 방법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바다 건너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1595년

태정(太禎) 7년 중하(仲夏)

대한제국 황성부.

“이게 무슨 소리냐!”

진서에서 급하게 들어온 전황을 전해 들은 태정제는 분노에 차서 앞에 놓여 있던 벼루를 땅에 던져 버렸다.

태정제뿐만 아니라 내각의 대신들도 이미 왜군이 진서에 상륙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흔히 있었던 해적의 준동 정도로 생각하고는 크게 우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동래부에서 올라온 장문의 서계에 적힌 내용은 이미 진서에서의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박주와 기주가 이미 적의 손에 떨어졌고, 풍주백과 살주백이 각기 군세를 이끌고 이를 막아보려 하고 있으나, 이미 진서군이 절멸된 상태에서 한번(韓藩)의 독자적인 군세로는 적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적이 텟포 아시가루(鐵砲足輕)라 불리는 보총으로 무장한 일반 보병을 운용하고 있을 뿐더러, 해전에서도 진서의 주요 수군인 기주전단이 원균의 실책으로 궤멸하여 해상이 봉쇄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무기로서도 그다지 우위를 점할 수 없고, 병력 수에서도 적에게 밀린다면 이제는 진서가 일본의 손아귀에 다시 떨어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이를 어찌해야 좋을 것인가? 대신들은 의견이 있는 대로 모두 내어 보아라.”

태정제는 긴급하게 내각의 총회의를 주관해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대신들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고, 특히 일본이 침입할 일은 없다고 평소에 호언장담하던 김성일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폐하. 신이 불미하게 앞일을 헤아리지 못하여 이러한 괴사를 빚어낸 것을 벌하소서. 가히 달게 받겠나이다.”

김성일은 태정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선발로 달려 나가 머리를 찧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태정제는 굳은 표정 그대로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과오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저들을 진서에서 다시 쫓아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방책을 논하려 만든 자리이니 경은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 할 몫을 다 하라.”

태정제의 마음 같아서도, 김성일을 벌해서 일이 다시 원상 복귀된다면 백 번이라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해서 별반 이득을 볼 것이 없었다.

“지금 동원 가능한 군세가 어느 정도 되는가?”

황제의 하문을 받은 군부대신 권율(權慄)이 부복하고 입을 열었다.

“북해와 요동을 제하고, 육군은 내지팔도의 진위대 총 30개 대에 각기 병력이 오천에서 만이천 가량으로, 모두 도합 하면 24만 명가량이나이다. 이중 진서로 파송이 가능한 것은 삼남의 병력을 주로 하여 약 13만가량이나이다. 해군 또한 탐라진중함대와 남해함대에서 언제고 출항할 준비를 마치고 있사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지의 병력은 증강되기도 하고, 감축되기도 해왔지만, 대체적으로 근 수십 년간은 총 20만가량의 병력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지팔도의 인구가 총 2,800만가량임을 감안할 때, 적은 숫자임에는 분명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장정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군역을 지는 것은 돈이 없고 먹고살 방법이 마땅치 않은 하류층들이었고, 때문에 군대의 질이 많이 저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권율도, 태정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서로 보내 적에게 맞서게 할 당장의 전력이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당장은 그 병력으로 충분히 진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세를 완전히 몰아내려면 부족하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스스로 조카를 쳐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내각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꾸리고 있는 태정제의 위엄에 감히 입방정을 놀리는 대신은 없었다. 문제는 필요할 때에 내어야 할 의견마저, 종종 자취를 감춘다는 데에 있었다.

황제의 하문에도 한참을 말이 없는 대신들의 모습에, 태정제는 답답함을 느끼고서 허균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외부대신의 자리에 올라 있는 그는, 황제의 시선을 받고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불초한 의견이나마 감히 내오자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책이 있사옵니다.”

“말해보라.”

“심왕에게 출병을 명하소서.”

허균의 말에 좌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있어서 요동은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요동의 심왕부는 분명히 명이나 몽골, 여진 등이 함부로 내지까지 준동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철벽(鐵壁)과도 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매 해 조정으로 보내는 세폐의 액수 또한 엄청났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마따나, 요동은 내지팔도, 즉 관습적으로 조선이라 부르는 땅은 요동이라는 입술이 없으면 찬바람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요동은 황제의 권위를 훼손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황성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중앙에 속해 있어야 할 대권인 군권(軍權) 및 통치권 등이 요동에서는 심왕의 손에 놓여 있었다. 비록 황제의 신하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언제고 제멋대로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살펴볼 때, 심왕이 조정에서 명을 내린다고 수천 리 길을 군사를 움직여 진서로 가서 싸울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물론 당대의 심왕인 김유는 늙은 여우 같은 사람으로, 황성부와는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척을 지지는 않으려고 꽤나 애쓰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직접 종군하라는 명을 내린다고 해서 그 스스로가 대군을 이끌고 움직일지는, 말을 꺼낸 허균도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설사 김유가 출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생각하기에 꼭 칙령은 내려져야 했다.

“그가 짐이 명한다고 해서 선뜻 움직이겠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토벌할 구실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심왕으로 하여금 선대로 부터의 의무를 다하게 하소서.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근심이 남아, 조정에서 내리는 다른 명들을 이행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단 말이로구나. 심왕의 머리가 복잡해지겠군. 좋다. 이참에 잘된 일이다. 어서 사람을 보내 인양군을 들라고 하라. 짐이 그와도 의견을 나누어 보아야겠다.”

장기적으로 태정제는 자신의 측근인 인양군을 심왕의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후계 구도에서 어느새 밀려 나 있는 인양군을, 심양의 왕좌에 앉히기 위한 포석으로, 이번의 출병을 명하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소신의 부친은 아마 폐하의 명을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태정제의 말에 담긴 저의를 이미 꿰뚫고 있던 인양군은, 궐로 부름을 받아 이야기를 듣자마자 태정제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지금 기호지세(騎虎之勢)로, 태정제의 측근으로서 벼슬까지 누리고 있는 이상 그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심왕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사실 태정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그 자리에 앉히려 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심양의 배다른 형들과는 관계가 틀어진 뒤였고, 태정제의 보호 없이는 황성부의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도 없으니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설사 태정제가 부왕인 김유에게 출병령을 내린다고 한들,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다. 내가 당장 칙령을 내려 이항복의 손에 들려 보내겠다.”

“다만, 폐하. 만약에 제 부친이 군사를 이끌고 진서에 가겠다고 하면, 저도 따라서 종군하겠나이다. 자식 된 도리로 아비를 전장에 내모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이것만큼은 허락해 주십시오.”

태정제는 인양군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는 인양군을 전장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인양군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좋게 보자면, 인양군이 출전하여 군공을 세워온다면, 심왕의 자리를 향한 후계 구도에서도 좀 더 좋은 명분을 쌓을 수 있긴 할 터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윤허하겠다.”

태정제로는 우선 인양군의 뜻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이 되자, 태정제는 군부에 명하여 삼남의 진위대를 거제에 집결하도록 명했고, 군부대신 권율에게 원수(元帥)라는 특별 계급을 내리고, 삼남의 모든 진위대와 진서군, 그리고 해군에 대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 휘하의 육군 총지휘관으로는 육군 참장(參將) 신립을 대장(大將)으로 두 계급 특진시켜 권한을 주고, 해군은 탐라진충함대와 남해함대의 지휘권을 모두 일시적으로 통합한 다음, 해군 참장 이순신을 역시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남양해군통제사(南洋海軍統制使)로 명했다. 총 병력 12만 9천여 명, 함선 230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원정이었다.

그와 함께, 내각 재상 류성룡은 황제의 칙지를 받든 다음, 이를 이항복에게 위임하여 심양으로 보냈다. 다름 아닌 심왕의 출정을 명하는 칙령이었다.

이를 받아든 여든다섯의 늙은 심왕 김유는, 예상치 못하게도 직접 칙령을 받아들여 출정하겠다고 나섰다. 요동군의 전체 병력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원행(遠行)을 나선 김유는 부재시의 심양을 둘째 예양대군에게 위임하고, 그를 세자에 봉했다.

김유는 일찌감치 황제가 인양군을 통해 요동에 간섭하려 한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가장 아끼는 아들로, 세자로 봉할 것도 고려를 했었던 인양군이었지만, 그가 태정제와 엮인 이상 김유는 더 이상 심왕의 자리를 물려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정이 괄괄한 셋째 금양대군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도 위험했다. 자칫 일이 틀어지면, 금양대군은 황성부 조정과 내전까지도 불사할 성품이었다.

김유는 때문에 황제의 칙령을 차라리 반겼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종군하여 혹여 목숨을 잃더라도, 안전한 후계를 만들어 물려주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동군이 주요한 세력 기반인 금양대군은 김유가 직접 병력을 빼서 출정하면 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김유가 직접 늙은 몸을 이끌고 출정했으니, 이 부재시에 대비해 세자를 임명하고 갔다고 하면 황제 또한 할 말이 없었다.

김유는 의무를 다 했으니, 이를 핑계 삼아 인양군을 세자에 앉히라고 태정제가 압박해 올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미 살 만큼 산 몸이니, 내 한 몸 버리더라도 지금 이 정국을 기회로 삼아 심왕가의 사직을 튼튼히 보전하는 편이 옳다.’

심왕 김유는 확고한 마음을 먹고 출정했다. 그의 출정을 많은 신료들이 반대하였으나, 김유는 뜻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그의 머릿속으로 몇 해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이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 결심을 일찌감치 이해해 주었을 터였다.

1596년

태정(太禎) 8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녹아도(鹿兒島).

녹아도의 도진(島津)씨는 오랜 세월 진서의 남부에 웅거하고 있던 벌족이다. 1197년 시마즈 타다히사(島津忠久)가 사츠마에 자리를 잡은 뒤로 대대로 도진씨는 이 지역의 다이묘 노릇을 해왔고, 1413년에는 당시 조선의 진서 정벌 당시에 가주였던 시마즈 히사토모(島津久豊)가 귀부하여 살주백(薩州伯)에 봉해지면서, 소위 한번(韓藩) 혹은 칸조쿠 다이묘(韓屬大名)이 되었다.

이 히사토모의 6대손이 당대 가주, 즉 살주백인 도진의홍(島津義弘)으로, 공식적인 황성부의 「녹명록(錄名錄)」에는 앞의 도(島)자를 떼고 사성(賜姓)받은 진의홍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도진씨뿐만 아니라, 진서의 대제후들은 이러한 사성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대우씨는 대(大)씨로, 삽천씨는 천(川)씨로, 대내씨는 부여(夫餘)씨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성은 매우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았고, 진서에서는 본래 지니고 있던 씨명(氏名)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다만 읽는 법은 구래로 내려오는 일본식에서, 진서어 발음으로 옮겨가고 있었는데, 도진씨는 그대로 시마즈로 불렸으나, 대우씨는 오토모가 아닌 다이우, 삽천씨는 시부카와가 아닌 삿젠으로 불리는 식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살주백 도진의홍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였는데, 황성부 조정에서 내려오는 공식적인 각령(閣令)에는 그 이름이 살주백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의홍으로 적혀 있었고, 진서에서는 진서어로 읽는 방식대로 시마즈 노 이혼, 일본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로 불렸다.

이렇게 집단에 따라 복잡하게 불린다는 사실 자체가 이 도진의홍을 비롯한 진서의 제후들이 가지고 있는 단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은 대체로 카마쿠라 막부 시기를 전후하여 조정 및 막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각자의 영지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원래 그들이 가진 권리는 바로 위와 같은 관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조상들이 천황의 명을 받드는 다이묘로써 지내온 세월에 버금가게, 지금의 도진씨나 대우씨는 황성부에서 봉해준 권리로 진서의 꽤나 많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영지를 통치하고 있었다.

단순히 연수로만 따져도 이백 년에 가까웠고, 그동안 진서에서 초래된 진서 특유의 문화의 등장을 생각하면, 그 의식의 균열은 생각보다 깊은 것이었다. 위로는 도진씨나 대우씨로부터 아래로는 하층 농민까지, 자신을 일본인으로도, 조선인으로도 생각할 수 없었고, 어중간한 진서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도진의홍 자신도,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아들여 진서를 침토(侵土)해 왔을 때, 진서군과 함께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고 영지를 보존받는 조건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실 히데요시 자신도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해 도진의홍에게 만약 일본 측에 협력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살주, 즉, 사츠마의 번령(藩領)을 보존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쿄토 조정에서 천황이 내리는 관직과 함께, 아즈치 막부의 주요한 가신단에 포함시켜 주겠다고 을러왔었다.

히데요시는 「별지동근(別枝同根)」의 네 글자를 도진의홍에게 전해왔는데, 바로 다른 가지이나 같은 뿌리라는 뜻으로, 다시 뿌리로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진의홍이라고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서의 남쪽, 유구국과 접하고 있는 남해(南海) 연안의 영주인 그에게 있어서는 황성부나 쿄토나 저 멀리 있는 뜬구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는 오로지 살주의 영주로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고 애썼다. 며칠 밤낮을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일본으로 귀부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진서도독부는 내지로부터 갈수록 자율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더군다나 자신 같은 구래로 내려오는 가문이 통치하는 가령(家令)은 고스란히 영주의 재량 아래에 남아 있었다.

매년 전체 가령에서 걷히는 소출의 십분의 일만을 진서도독부로 보내면, 나머지는 모두 도진의홍에 손에 떨어졌다.

그가 기거하는 녹아도(鹿兒島, 카고시마)의 거소는 진서에서 제일갈 정도로 화려했고, 유구국과 가지는 긴밀한 관계 덕분에 남양 무역에서도 적지 않은 지분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히데요시에게 협력한다면 당장은 아즈치로부터 이런저런 보상이 올 수도 있었지만, 결론은 오다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보아 자율권을 상당히 잃고 해체일로를 걷게 될 것이라는 게 도진의홍의 판단이었다.

만약 정말로 히데요시가 진서에서 승전하여 대한제국이 진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하면 자신은 어쩌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었지만, 도진의홍이 판단하기에 황성부에서 진서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빠른 시일 내에 구원군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오히려 공을 사서 더 많은 특권을 보장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도진의홍의 판단은 적중했다. 거의 사 개월이 넘게 아주 적은 병력으로 히데요시의 제1군 병력 수만을 막아내야 했지만 도진의홍은 버텨낼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남쪽의 외진 곳에 있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손바닥 보듯이 잘 아는 영토 안에서 유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적은 섣부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권율 원수가 이끄는 구원군이 남하하여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박주와 기주가 이미 히데요시의 손에 떨어져 있기에 적절하고 안전한 상륙 지점을 찾고 있었다. 1차로 출정한 병력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선단에 탑승하여 남쪽으로 향했고, 도진의홍은 이들을 녹아도로 이끌었다.

“여기는 아직까지 적세의 발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비축해 둔 곡량도 꽤 남아 있고, 유구국으로부터 언제고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이곳에 본영을 차리고 진서 경략에 나서십시오.”

도진의홍은 반색하고 병력을 환영하며 맞아들였다. 그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적들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지친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환영해 주어서 고맙소이다. 어서 함께 전략을 논해 보도록 합시다.”

권율이 도진의홍의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그는 체구가 당차고 수염의 숱이 많은, 장부형의 인물이었다. 둘은 도진의홍이 한때 황성부에서 유학겸 2년간 체류할 때 안면을 튼 구면이었기에, 썩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쪽에 계신 분은 뉘신지?”

도진의홍이 권율의 곁에 선 날카로운 인상의 장수를 보고 물었다. 그는 무장이라기보다는 문사(文士)에 가까워 보이는 인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 내가 소개를 진즉 했어야 하는데, 우리 해군의 기둥이올시다. 문무 양면에 탁월하고 북해에서도 야인여진들을 막아내며 많은 공적을 세웠소. 한때 상남에도 파견되어 그곳에서 해적 소탕을 했고, 영주까지의 원양 항해를 지휘한 경력을 인정받아 이번에 해군을 총괄하게 된 해군 대장 이순신이오.”

“아, 제가 대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살주백 진의홍이라 합니다.”

도진의홍은 가볍게 목례하며 이순신에게 말했다. 이순신 또한 귀족인 진의홍에게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몸이나 이번 전역의 해전을 지휘하게 된 통제사 이 모라 합니다.”

“이 대장은 여기서 열흘간 머문 뒤, 다시 함대를 지휘해 신립이 이끄는 후발대를 싣고 오게 될 것이오.”

권율의 말에 도진의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기에 군대의 기강은 그다지 잘 잡혀 있지 않아 보였지만, 머릿수나 무장만큼은 대단했다. 숫자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는 충분히 이 정도라면 히데요시가 병력을 증강해서 덤빈다 하더라도 맞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황상 폐하께서 진서에 쏟고 계신 각별한 관심 덕분에 이렇게 구명의 은혜를 지게 되었습니다.”

녹아도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도진의홍의 거소는, 대대로 내려오는 왜성 형식의 본성(本城) 밖으로 조선풍의 성채를 둘러쳐서 건조된 절충 형태였다.

이 성의 높은 곳에 자리한 누각에, 구원군의 장수들과 함께 앉은 도진의홍은 이들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진서는 이백 년 가까이 한 지붕 아래에 같은 나라를 이루고 살았소이다. 손발이 아픈데 어찌 머리가 멀쩡히 있겠소이까? 구원군은 당연한 일이니 함께 분전합시다.”

권율은 사람 좋게 웃으며 도진의홍에게 말했다. 권율은 전장에서는 군율을 중요시하고, 엄정한 군기를 세우는 권율이었으나, 사석에서는 격의 없기로 유명했다.

이러한 그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도진의홍인지라 편안하게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세는 지금 기주에서 남하해 몇 달째 이곳 살주로 내려오는 길목인 이좌(伊左, 이사)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 고장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에서 본관 속하의 병력이 이들을 막아서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내고 있으나, 더 이상 버티기가 곤란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우선은 히데요시가 첫 상대가 되겠구려. 그렇다면 다른 군세는 어디로 갈라져 나가 있소이까?”

권율의 물음에 도진의홍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진서는 산지가 많아 본디 남북의 교통이 육로로 원활하지 않고 뱃길로 이루어지는데, 전란 통에 육로와 해로 모두 불안정해서 빠른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달 전쯤에 풍주백 대우의통 공이 분전 끝에 결국 코니시 유키나가에게 패하여 동남쪽으로 몸을 피신했고, 코니시 군대가 이를 쫓아 산간지대로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토 키요마사는 박주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키리시탄 가누비토들이 카토의 시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을 학살로 진압한 다음에 박주를 불태우고 히데요시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박주가 불탔단 말입니까?”

도진의홍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순신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박주는 대마도와도 지척에 있는 항구로, 이 성읍을 다시 수복한다면 병력이나 물자를 본토에서 보내는 것이 매우 수월해진다. 그러나 카토가 그 성을 불태워 제대로 도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순신이 당초에 세웠던 전략도 조금은 수정해야만 했다.

“예. 하지만 아직 그곳의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이 다행이도 죽음은 면했고, 카토가 물러간 다음에 화재를 간신히 진압하여 이곳에도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내지에도 박주의 소식을 보내 절실하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박주가 카토의 손에서 벗어났다면, 차라리 신립 장군이 이끄는 제2군을 박주에 상륙시키는 것은 어떠할까요?”

생각을 정리한 이순신의 말에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진군하여 적세를 한 군데에 몰아넣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이 동란을 정리할 수 있겠지. 좋은 생각이외다.”

녹아도에 상륙한 후, 권율의 군세는 사흘간 정비를 가진 뒤에 기세 좋게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투가 이루어질 진서 일대가 산악 지대가 많다는 점을 고려해 기병보다는 보총으로 무장한 보병 위주로 편성된 부대였다.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히데요시가 진출해 있는 이사까지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권율이 출진하고 닷새를 더 녹아도에서 머문 이순신은, 함대를 다시 이끌고 해안을 따라 박주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립을 녹아도가 아닌 박주로 실어 나를 예정이라면, 이 일대의 해상을 봉쇄하고 진을 치고 있는 쵸소카베의 함대를 먼저 공략해야만 했다. 일전의 각오를 다지고, 이순신은 기주에서 박주로 가는 항로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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