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장 동란지세(動亂之世)
「이때 박주와 기주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은 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20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3월 6일에 박주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1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3월 12일에 순신이 적선 70여 척이 기주 인근에서 박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14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 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 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8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류성룡,《진서행전록(鎭西行戰錄)》, 2권.
1596년
태정(太禎) 8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박주부.
본토에서 원군이 도착함에 따라 패전의 기운이 짙던 진서의 상황도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녹아도에서 출정한 권율의 선발대는 이사에서 적과 결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히데요시는 큰 손실 없이 일찌감치 퇴각하여 때마침 남쪽으로 내려오던 카토의 제3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잠시 기주로 퇴각하여 권율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 권율은 쉽게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는데, 이때 동쪽에서 대우의통을 쫓아 남하해 온 코니시의 제2군이 녹아도의 접경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도진의홍이 이끄는 별동대가 대우의통의 신병을 확인하였으나, 아직까지도 3만에 이르는 코니시의 군세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권율은 히데요시와의 결전을 위해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우선은 코니시와 맞서야 했다.
보다 더 큰 승전보를 올린 것은 바로 해전에서였다.
이순신은 거제에서 신립의 병력을 수송해 오기 전에 정탐 삼아 기주와 박주를 잇는 항로로 함대를 이끌고 접어들었고, 이순신의 대함대가 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쵸소카베의 수군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몇 차례 격파당했다.
당시 쵸소카베의 본대는 기주에 머물고 있었고, 박주 일대의 항로를 봉쇄하고 있던 것은 히데요시의 부장 중 하나로 쵸소카베의 수군에 감시역[見寸け]으로 참전하고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였다.
그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일본군의 주력선 중 하나인 아타케부네(安宅船)를 비롯하여 세키부네(關船) 백여 척을 이끌고 박주 인근의 바다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의 해군 참장(參將)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80여 척의 선박을 따로 내어 박주 해역으로 접어들었고, 이곳에서 와키자카의 함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박주 앞바다는 사방이 넓게 트인 바다였고, 이곳에서 파선(破船)할 경우 적군이 상륙할 땅이 없었다. 때문에 이순신은 이곳 근처로 와키자카의 함대를 유인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몇 개의 배를 내어 소규모 함대를 일본군의 근처로 보내자, 와키자카는 이를 이순신의 전체 함대로 착각하여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미리 이순신과 이억기가 대기하고 있던 해역에 이르자, 이순신은 80여 척의 배로 뱃길을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이순신은 적군의 보총 성능이 아군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때문에 함선 간에 조총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비교적 월등한 함포로 적을 기선 제압하는 전략을 펼쳤다.
전투 끝에 이순신은 63척의 함선을 침몰시키는 데 성공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승전을 자신하고 있다가, 패장의 신세를 면치 못했고, 결국 박주 해역을 포기하고 기주의 본대인 쵸소카베의 함대로 간신히 몸만 빠져나갔다.
이순신은 언제고 쵸소카베가 공격을 전개해 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50척의 함대를 박주 해역의 방비를 위해 차출하여 직접 해역에 남았다. 대신 이억기에게 본대를 딸려 거제로 보내 신립의 후발대 병력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박주로 수송하게 지시했다.
이억기가 거제로 출항한 지 채 나흘이 지나지 않아, 이순신의 예상대로 와키자카의 패보를 접한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직접 전 함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이순신은 미리 단단히 주변의 지세를 파악해 두고 있다가, 매우 빠른 물살이 흐르는 좁은 해협으로 이들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병력을 거의 괴멸 상태로 만들었다.
그 사이 이억기의 함대는 안전하게 박주로 들어와 신립의 후발대를 하선시켰고, 다시 항로를 돌려 남쪽으로 가,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도망쳐서 기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기주의 인근 해역을 봉쇄해 버렸다.
쵸소카베는 남은 수군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본토로 일시 철군할 수밖에 없었고, 히데요시는 해로를 통해 들어오는 보급이 끊김에 따라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기주 일대를 약탈해 가면서 보급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일대의 민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내려가서 평수길을 치도록 하자.”
기세 좋게 박주에 상륙해 그곳의 민심을 수습하고, 도시의 재건 작업을 돕고 난 신립은, 지금이 공적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가 이끌고 온 후발대의 주요 병력은 권율의 선발대와는 다르게 기병대가 주력이었고, 그것은 기병의 운용을 주로 해왔던 신립의 고집에 의해서 편성된 것이었다. 주로 북쪽에서 야인들을 상대해 왔던 그의 경험은, 기병대의 위력을 맹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신립이 남진하기 시작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공격적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수세에 몰린다면 전황을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이유도 컸다. 동시에 그는 밀정을 여러 통로로 보내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병을 청원했는데, 지금 진서에 고립된 병력 만으로는 조선에서 넘어온 병력을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군대는 저도(杵島, 키시마)군 일대에서 회전을 벌였다. 생각보다 히데요시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온 것에 당황한 신립은, 아직 준비가 덜 된 군대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게 하고, 기병 전력의 우세를 살리기 위해 후방에 하천을 두고 배수진을 쳤는데, 이것이 결국 패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신립은 이 저도전투의 결과 전사하게 되고, 히데요시의 군대는 비록 손실을 보았지만, 신립의 후발대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신립을 대신해 육군 참장(參將) 김시민(金時敏)이 퇴각을 지휘했고, 다행이도 2만 8천의 군세를 살려내 박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보급이 절실했던 히데요시는, 이 박주에서 길목을 막고 있는 김시민을 최대한 빨리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김시민보다, 해상에서 일본 수군의 접근 자체를 불허하고 있는 이순신이었다.
김시민은 김시민대로,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 남쪽에서는 권율의 부대가 코니시 유키나가의 군세를 간신히 격파하고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병력 또한 상당히 줄어서 3만 6천가량이 되어 있었고, 코니시 유키나가 또한 수천의 병력을 지닌 채 북쪽으로 도주했기에 불안한 행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권율은 중간중간의 왜군 잔병들을 정리하고, 진서 남서부의 통제권을 회복해 나가며 기주로 향해 나갔다. 기주에는 박주로 김시민을 쫓아 올라간 히데요시가 남긴 카토 키요마사의 2만 군세가 남아 있었고, 공성 측이라는 불리함을 딛고서 권율은 이 기주를 함락시켜야만 했다.
히데요시의 원병 요청을 받아든 오다 노부나가가 후발대를 발진시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로 하여금 육군을 이끌게 하고,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수군을 재조직해 진서로 향했다. 이순신이 장악하고 있는 진서 서해안을 피해, 모리 테루모토와 시바타 카츠이에는 진서의 동쪽에 상륙했고, 쫓겨난 대우씨의 가령에 본진을 차리고서 기주와 박주를 향해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안전하게 보급로를 확보한 쿠키 요시타카는, 이순신과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것을 회피하며, 항로 확보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적의 강성한 해군을 물리치는 것보다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세, 토사, 세토 내해로부터 실려 온 보급 물자가 적의 방해 없이 진서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순신과 맞서기보다는 아군을 지원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
쿠키 요시타카의 상황 판단은 쵸소카베 모토치카보다는 나았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영지인 토사로 돌아가 쿠키 요시타카를 후방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덕분에 쿠키 요시타카는 막부 안에서의 위상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쿠키는 이러한 상승세를 즐기고 있었고, 때문에 가급적 패전으로 공이 훼손되는 상황을 피하려 했다. 이순신과 맞붙었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쯤에 신립의 전사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적잖이 슬퍼했다. 한때 북해의 척박한 오지에서 함께 여진족들을 막아낸 뒤로 교분을 깊게 가져왔던 장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흔들림 없이 본토에서 진서로 가는 길목의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덕분에 박주에 고립된 지경이 된 김시민은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결전은 피할 수 없었다. 모리 테루모토·시바타 카츠이에와 합류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전력을 다해 박주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전투의 결과, 김시민은 결국 전사하고 박주성은 다시 하시바 히데요시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기주에서는 권율의 군대에 대항해 카토 키요마사가 지루한 농성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전황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양쪽 모두 교착 상태를 타개할 방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심왕 김유가 4만의 군세를 이끌고 부산포에 도착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의 일이었다.
1596년
태정(太禎) 8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
“아바마마. 진정 괜찮으신 겁니까?”
인양군은 부왕 김유의 곁에 앉아서 부친의 가료(加療)를 돕고 있었다. 나이가 여든을 넘긴 김유는 부산까지 내려오는 와중에도 몸이 좋지 않아 종종 쉬어가야 했고, 인양군과 합류하기 위해 황성에 들어왔을 때는 족히 한 달을 머물기도 했다. 때로는 거동이 힘들 정도가 되어 태정제마저도 심왕이 요동군을 이끌고 바삐 진서로 건너가도록 재촉하지 못할 정도였다.
부산에 다다를 무렵에는 조금 병세가 호전이 되었지만, 이내 진서에 도착해 권율의 군대와 합류해 기주를 함락시키고, 카토 키요마사의 수급을 취해 조정으로 보낸 뒤, 김유는 급격히 쇠약해져서 기주에 마련된 거소에 누워서 요양을 취하고 있었다.
어느새 검버섯이 가득하게 오른 아비의 늙고 주름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인양군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율아.”
폐병까지 들었는지, 김유는 기침을 쿨럭이며 인양군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심왕 김유는 아들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애초에 죽었어야 할 몸이나 이제껏 버티고 있었던 것은, 이때를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내가 노구를 이끌고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바로 네 형인 예양에게 안전하게 보위를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부디 너도 내 뜻을 헤아려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다오.”
인양군을 바라보는 심왕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실 그는 늦게 본 인양군을 제일 마음에 담아두고 사랑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중전에게서 본 자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꼈던 정빈 목씨에게서 본 자식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금 김유는 인양군에게 심왕가를 물려줄 수 없었다. 그렇게 될 경우 요동은 반드시 사분오열되고 말 터였다.
“소자는 왕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아바마마께서 쾌차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인양군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그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보며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왕위에 욕심이 있긴 했었다. 또한 젊은 시절을 태정제와 어울려 지내며 황성부에서 생활한 탓에 요동을 좀 더 중앙과 가깝게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은 아버지의 늙은 모습 앞에서는 한 줌의 쓸모없는 먼지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애써 쥐려고 해봐야 손아귀의 힘이 풀리면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날아가 버리는 그런 티끌 말이다.
“네가 황상과 교분을 맺지 않았더라면, 아니, 황상이 직접 선제(先帝)를 몰아내고 황위를 취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네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방법을 궁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요동은 황성부와는 거리를 필요로 해왔다. ……내 말을 이해하겠니?”
김유의 말에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인양군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종군하여 진서에 나와 있는 훌륭한 의원을 청해 두었습니다. 신의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반드시 아바마마의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건 되었다. 사람이 늙어 죽는 것은 부처가 오더라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낱 의원이 그 일을 어찌하리요.”
인양군의 말에 김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말로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양군은 이대로 앉아서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때가 되었음을 예감하면서도, 자식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의원이 당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서 부관이 알려오는 소리에 인양군은 피로함에 못 이겨 다시 잠이 든 아버지의 손을 잠시 내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마당에는 쌀쌀한 가을 공기에 빨갛게 익은 단풍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곳에 나이가 쉰 줄로 보이는 되어 보이는 의관 한 명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시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인양군은 의관을 서둘러 내실로 들여보냈다. 지체 높은 신분의 환자를 왕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관은 당황함을 내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인양군은 그 모습을 보며 안정감을 되찾았다.
행동거지를 보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의원이었다. 설사 부왕의 병세가 호전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 의관이 하는 말이면 실상 그러하리라고 인양군은 생각했다.
김유를 진찰키 위해 불러온 의관은, 이미 내지팔도에 명성이 자자한 허준(許浚)이었다. 그는 의학의 귀재로 소문난 이로, 어린 나이에 제중원(濟衆院)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곳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그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음양오행에 의거한 전통의술에 염증을 느꼈고, 때문에 도전적으로 임상의학을 전개하며 온갖 비난에 직면하고 있는 광혜원(廣惠院)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김순몽·서장금과 함께 당시 건양삼의로 불리던 뛰어난 의자(醫者)인 박세거(朴世擧)의 밑에서 허준은 의욕적으로 공부를 했고, 이곳에서 많은 외과 임상의 경험과 함께 실제 인체를 해부하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광혜원의 의술을 사사받았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그 의술이 뛰어났기에 허준은 내의국에 들어가 황실의 시의(侍醫)가 될 수 있었고, 이곳에서 각종 의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며 의학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임상의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때문에 진서에 동란이 발발하자 자청해서 종군의가 되었던 것이다.
내실로 들어서서 늙고 초췌하게 누워 있는 김유의 용안을 보자마자, 허준은 이미 때가 지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진맥을 하지 않고, 들고 온 꾸러미에서 종이를 말아서 원통형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상한 기물을 꺼내 들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것을 김유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고, 한쪽으로는 귀를 가져갔다.
인양군은 허준이 하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허준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의문이 들었으나, 인양군은 가만히 허준이 하는 모양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그렇게 원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허준은 몸을 바로 고쳐 앉고서는 인양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소의가 고치기에는 이미 병세가 완연하여 방도가 딱히 없습니다. 용서하소서.”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인지라 인양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맥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가? 그래도 한 번 진맥을 봐 보는 것이 어떠한가?”
인양군의 말에 허준은 고개를 저었다.
“안색을 살피고, 진맥을 하고, 복부를 만지고, 변의 용태를 살피는 것은 모두 정확한 진단에 용이하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감히 사용하고 있는 것이 타진법이온데, 이것은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입니다. 내장의 상태에 따라 이 소리가 차이가 나니, 그나마 사람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살필 수 있는 수단입니다. 다만, 감히 신의(宸儀, 임금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 종이로 만든 원통으로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삼가 듣기에 심장과 폐의 소리가 건강한 사람의 것과 같지 않고, 기침 소리와 안색을 보건대 폐병이 이미 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재나 시술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환으로 오는 것이라 제 불민한 의술로는 이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허준의 말은 조리가 있었다. 인양군은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여 세상에 정말 하늘이 내린 의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구해다가 부왕의 앞에 앉혀 놓을 방도가 없었다.
하물며 내지팔도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허준이, 지금 진서에 때마침 와 있어 소견을 보게 했음에도 이런 결론이 났다는 것은 이제 부왕의 꺼져 가는 숨을 되돌려 놓을 방법은 정녕 없다는 것이었다.
“살펴봐 주어 고맙네. 병을 고치기를 이제는 바랄 수 없을 듯하나, 그래도 종종 들러서 병이 괴롭지 않도록 살펴주었으면 하네. 그래 줄 수 있는가?”
“심히 부끄러운 의술이나, 고통을 경감시키고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을 돕는 재주는 있습니다. 매일 아침 들어와 신의를 살피겠나이다.”
그 뒤로 허준은 약속대로 매일같이 찾아와 심왕의 어체(御體)를 살폈다. 이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김유에게 허준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양귀비에서 뽑은 아편으로 고통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허준은 이러한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꽤나 거친 외과 수술을 집도할 때나 환자가 병세가 깊어 고통이 짙을 때 아편이 효과가 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김유는 그 이후로 한 달을 더 살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의 화살을 더 이상 비껴갈 수는 없었다. 1596년, 태정 8년 늦은 가을 진서 기주부의 군막(軍幕)에서 결국 숨을 거두니, 향년 86세였다.
시신은 기주에 모셔졌다가, 뒤늦게 바다 건너 본국으로 운구되었다. 장례는 늦어졌고 훗날에 와서야 「의민왕(懿旻王)」으로 추증되었다.
안타깝게도 인양군은 부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김유를 따라 종군했던 4만의 요동군 군세를 이제는 그가 직접 지휘해야 했고,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던 전황은, 다시 꿈틀거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하시바 히데요시 이하 일본군의 주력은 박주성에서, 제국군은 기주에서 버티고 앉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움직인 것은 바로 이순신이었다.
그는 일본군의 병참을 확실하게 끊어 버리기 위해 남쪽으로 항로를 돌아 유구국에서 나온 해군 지원 병력과 합세해, 쿠키 요시타카가 몸을 사리고 있는 진서 동쪽 해역으로 들어섰다.
2달에 걸쳐, 이순신은 쿠키 요시타카의 군대를 세 번에 걸쳐 꺾었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쿠키는 우선 시코쿠의 토사로 철군해, 진서에 남은 일본군에게는 일시 보급이 끊기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물러서지 않고, 유구국의 수군 장수 위이바루 우미구라(上原思五良)와 함께 쿠키 요시타카가 진서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섰다.
이와 동시에 이억기는 혼슈와 진서 사이의 좁은 해협인 단노우라에 진채를 짓고 이곳에 함대를 주둔시켜 해협을 봉쇄해 버렸고, 인접한 혼슈의 모리 테루모토의 영지에 상륙해 아직도 대내씨에 대해 충성심이 남아 있는 토착 사무라이들을 충동질했다.
이들은 모리 테루모토가 진서로 참전해 영지를 비운 사이 일대를 소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혼슈와 시코쿠 어느 방면에서도 진서로 보급 물자를 접근시키기가 힘들어졌다.
이러한 이순신을 비롯한 해군의 공적 덕분에, 다시 진서의 육군은 체계를 정비하고 일본군을 몰아내는 일에 주력을 할 수 있었다. 신립과 김시민의 전사로 인해 사실상 와해된 후발대를 제외하고, 인양군이 이끄는 요동군과 권율이 이끄는 선발대의 잔존 병력이 도합 7만여였고, 이 외에도 진서 각지에서 추가로 징발된 병력까지 총 9만 군세가 진서 남부에서 기주에 이르는 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하시바 히데요시 이하 일본군은 오다 노부나가가 2차로 보내준 원군까지 포함하여 11만 정도였고, 숫자상으로는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계속되는 보급의 단절로 이 병력들은 많이 지쳐가고 있었는데, 특히 이순신이 진서 동부의 해역을 완전히 장악한 뒤로는 굶주림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겨울이 되기까지는 가을걷이를 하는 농민들을 노략해 식량을 일부 충당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겨울로 접어들면서 곤란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을 파악한 기주의 권율과 인양군은 논의 끝에 조금 무리하더라도 한겨울이 되기 전인 11월 초에 병력을 움직여 해가 지나기 전에 승부의 결착을 보고자 했다.
1596년 10월 30일, 권율과 인양군은 각기 좌군과 우군을 이끌고 기주성을 나서 박주로 향했다. 전쟁의 향방을 가를 주요한 전투가 이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1596년
태정(太禎) 8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심왕 김유의 부음이 진서에서 심양으로 전해지는 데는 족히 한 달 가까이가 걸렸다. 뒤늦게 붕어(崩御)의 흉보를 접한 심양은 막 찾아온 혹독한 겨울 추위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소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금양대군이었다. 갑작스럽게 부왕 김유가 진서 출정을 결심하고, 전격적으로 금양대군의 손위 형인 예양대군을 세자로 봉하고 후계 구도를 정해 버린 뒤, 금양대군은 충격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북륙 개척 등의 성과로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점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조만간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부왕은 요동군 병력의 삼분의 일을 전장으로 끌고 나가 자신의 한쪽 팔을 꺾어 버렸고, 예양대군을 세자의 자리에 앉혀 명분을 세워 줌으로써 자신을 우스운 꼴로 만들어 버렸다.
이 일로 인해, 금양대군은 부왕에 대한 증오심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게 되었다. 때문에 먼 타지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도 슬픔보다는 씁쓸함이 먼저 밀려왔다.
아버지 김유의 뜻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금양대군이 생각하기에 진정 요동을 생각했더라면, 부왕은 문약한 예양대군에게 세자를 물려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금양대군은 진심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부국강병이야말로 요동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있었다.
“아직 대군 나리께는 요동군 8만이 옆에 있습니다. 선왕 전하의 죽음으로 심양의 거리가 뒤숭숭한 이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결단을 내리십시오.”
복잡한 심경으로 부왕의 부고를 접한 금양대군을 찾아와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바로 그간 말을 아끼며 그의 옆에서 충실하게 받아든 임무를 수행하던 한의직이었다. 그의 예기치 못한 제안에 금양대군은 도리어 놀랐다.
“그대가 내게 그런 일을 권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 보고 아비의 뜻을 버리고 형제를 해치는 그런 패륜아가 되라고 말하는 것인가?”
금양대군은 놀란 척 한 발 빼기는 했지만, 사실 한의직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옆에서 금양대군을 지켜봤던 한의직은 단조롭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지금 거병하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용상은 대군 나리의 것이 됩니다. 말씀만 주십시오. 지금 당장에라도 요동군의 장수들이 명을 받들 것입니다.”
금양대군과 요동군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미 후계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정쟁을 벌인 것이 이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었다. 그동안 총명하지만 문약하다는 평을 들었던 형 예양대군은 요동도평의사사의 중신들의 지지를 확고하게 얻었고, 반대로 금양대군은 요동군으로부터 거의 심왕에 버금가는 충성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요동군이 금양대군을 지지하는 것을 표명한 적은 없었지만, 요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동군이 금양의 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요동군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 장수들은 모두 금양대군과 함께 젊은 시절 장교로 복무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요동무관학교(遼東武官學校)」를 설립해 요동군의 장교를 본토의 육군진무관이나 해군상무관이 아닌 요동 자체에서 조달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금양대군이 깊게 개입했고, 그 결실이 바로 몇 해 전에 맺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최근에 요동무관학교를 졸업해 요동군의 신진 장교로 임용된 이들 또한 금양대군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 절실하게 금양대군이 반정에 힘을 보탤 것을 요구할 경우, 요동군은 거부할 가능성이 거의 전무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금양대군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형님도 무언가 예상하고 계실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간 조용히 있었기에, 좀 미심쩍다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 과연 아무런 대비도 해놓지 않고 있을까?”
금양대군의 말에 한의직이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는 금양대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최근 여진족으로만 구성된 건주 총기병들이 태안궁의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당초 그들에게 대군 나리의 입김이 닿지 않는 것을 세자 저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자들은 원래 인양군의 편 아니었던가? 같은 여진 핏줄이라 말이다.”
금양대군은 인양군의 이름을 언급하며 껄끄럽다는 듯 손을 한 차례 내저었다. 그가 보기에 아직도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여진족의 배에서 난 인양군은 왕가의 일원이라 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친분은커녕 같이 지낸 경험도 거의 없는지라 그저 느낌상으로는 형제라기 보다는 먼 친척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각설하고, 1431년에 건주에서 창설되어 요동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건주 총기병대는 원래 이름이 건주파견대 휘하 여진기병대로, 당초 만들어질 때부터 여진족 출신으로만 만들어진 부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요동군 내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그런 점을 이유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어느 정도 요동군의 수뇌부에서 자유로운 독립 부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 건주 총기병대는 대체적으로 금양대군을 지지해 온 요동군의 일반과 다르게, 당초부터 공공연하게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인양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건주 총기병대가 세자가 된 예양대군의 궁정 경호를 맡고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인양군의 밀지를 받은 듯합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시며 남긴 유언에 따른 것일 겁니다. 이것이 정말로 세자를 도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내다보고 미리 포석을 쌓아두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인양군이 물밑으로 세자 저하를 지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한의직의 말에 금양대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참고 싶지 않았다. 북륙 무역으로 다져 놓은 금권(金權)과 요동군의 무력에서 나오는 군권(軍權)이 모두 자신의 손에 있었다.
그런데도 형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그 자리에 올려놓고 갔다는 이유로, 이제 자신은 신하가 되어 새 왕을 섬겨야 할 판국이었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이미 때는 늦어 버린다. 뒤집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인양군이 서간 몇 통으로 심양에 간섭을 하려 해도 먼 곳에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자신은 바로 이곳 태안궁의 지척에서 언제고 손가락 한 번 움직여서 요동군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 좋다. 한 번 엎어보자.”
금양대군이 도포를 차려 입고, 갓을 쓰며 말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말을 몰아 한의직과 함께 심양 외각의 요동군 본영(本營)으로 달렸다. 본디 요양에 있었던 요동군 본영은 심왕가에서 사실상 요동군을 거느리게 된 뒤로 왕부가 지척인 심양의 변두리로 옮겨와 있었다.
금양대군은 오랜 세월, 이 본영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이곳에서 모르는 얼굴이 거의 없었다.
“오셨습니까. 필히 오실 줄 알고 미리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양주둔 요동군 제1보병대의 대장인 유철(劉哲) 부장(副將)이 금양대군을 맞았다.
사실상 병력을 움직인다면, 심양 성내에 주둔하고 있는 제1보병대의 힘이 중요했다.
다행히도 제1보병대는 이번 진서 원정에 병력을 차출당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심양 성내에 정예병 3,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건주 총기병대와 맞붙어서도 태안궁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건주 총기병대가 궁궐을 사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 여진 놈들의 총 병세가 얼마나 되오?”
금양대군이 자리에 앉아 유철을 향해 물었다. 유철은 고개를 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받았다.
“고작 오백여 명입니다. 제 휘하 병력으로만 둘러싸도 금방 제압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유철의 말에 금양대군은 어렵다는 듯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쉽게 판단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곳 요동군 본영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결심을 한 번 하는 것은 좀체 쉽지 않았다.
과연 반정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패왕의 길을 걸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저 몸을 숙여…….
답은 나와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궁을 제압해 주시오. 내 그 공을 잊지 않으리다.”
금양대군의 입이 떨어지자, 유철과 그 휘하 부장들은 가볍게 군례를 올리고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이내 나팔 소리가 울리고 말발굽이 내달리는 소리가 건물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힘이 빠진 금양대군은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유철 부장은 훌륭한 장수입니다. 두 시간 남짓이면 좋은 결과를 전해올 것입니다. 그간 눈이라도 붙여두십시오.”
옆에서 한의직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금양대군에게 말했다.
“자네도 집안 사람들과 척을 져가면서까지 왜 내 옆에 있는지 모르겠군.”
“사람은 자기 있을 자리를 알아야지요.”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이룬 것이 많아. 내 잊지 않고 자네 가족들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네.”
“그저 뜻대로 하시면 될 일입니다. 소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한의직의 말에 금양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한의직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양의 한씨 가문은 이후 정국 운영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
지금 그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예양대군을 지지하고 있겠지만, 어차피 금양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를 위해서 출사를 하게 될 터였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더니, 어느새 심양의 중심부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금양대군은 창가로 다가가 섰다. 심양에서는 이제 흔한 유리창 밖으로 눈길을 던져 보았지만, 늦은 밤의 심양성은 어슴푸레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잘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금양대군은 숨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태안궁에서부터 큰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달을 향해 치솟는 불길과 검은 연기를 보며 금양대군은 일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금양대군의 곁으로 한의직이 다가와 공손히 읊조렸다.
“경하드립니다. 심왕 전하.”
1597년
태정(太禎) 9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풍주(豊州) 부내(府內).
풍주(豊州)라는 이름은 옛 일본의 율령제하의 나라 중 하나인 분고노쿠니(豊後國)에서 나온 지명이었다. 이곳의 다이묘였던 대우씨가 조선에 복속, 풍주백(豊州伯)의 작위를 받게 되면서 그 이름은 진서 바깥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분고노쿠니의 옛 국부(國府)가 있던 곳이 바로 오이타(大分)강의 연안이었고, 이곳에 대우씨의 관소(館所)도 들어서게 됨에 따라 이 일대는 부내(府內)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200년 간 대우씨의 풍주 통치의 본거지는 부내였고, 진서어로는 부나이로 불리는 이 꽤나 번성하는 거리는 진서 동북부의 제일가는 성읍이 되었다.
전대 대우씨 당주였던 대우의진의 지배 아래에, 이 부내성은 인구가 3만의 육박할 정도로 큰 마을이 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도였던 대우의진은, 이곳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의술로 치료하는 병원인 「부내료(府內療)」를 세울 수 있도록 자금까지 지원해 주었다.
이곳은 그간 내지의 발전하고 있는 의학 기술은커녕 전래로 내려오는 한방의를 접할 기회도 거의 없었던 이 일대의 주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대우의진은 이 부내료를 지원하여 주민들이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 힘입어 부내를 비롯한 풍주의 많은 주민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진서에서도 박주에 이어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고장이 되었었다.
대우의진은 낡은 절을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아 성당으로 바꾸었고, 그 아들인 대우의통의 대에 들어서서도 가톨릭의 교세는 수그러들 기미 없이 번창하기만 했다.
대우의통 자신도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가톨릭의 세례를 받았었고, 선교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번영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한 진서 침공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같은 가톨릭교도인 코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을 향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 대우의통은 솔직히 협상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을 약속하고, 그냥 코니시의 군대를 지나 보내는 것이었다. 「키리시탄 백작」이라고 까지 불리던 대우의통은 가급적이면 코니시와 분란 없이 일을 매듭짓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냥 길을 내주기만 하겠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정말 신앙을 지키시려면 우리와 함께 싸우셔야 합니다.”
코니시는 대우의통을 직접 보기를 청했고, 부내성 밖의 들판에 차려진 군막에서 두 사람은 회동을 했다. 그 사이에 코니시를 쫓아온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앉았는데, 코니시는 그의 의견을 크게 참고하고 있었다.
세스페데스는 심리적으로 내지 전교를 절대 불허하고 있는 한국에 비해, 오다 노부나가가 재정적으로까지 지원해 주고 있는 일본이 보다 신앙의 동지에 적합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진서가 일본에 복속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세스페데스의 의견이 예수회의 방침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러한 생각이 코니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어림없는 소리. 나와 내 영지의 백성들은 이미 황조(皇朝)의 백성으로 신앙을 봉행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소. 다만 내가 길을 빌려주겠다고 한 것은 같은 가톨릭 신자로서 마주쳐 싸우기가 싫어서였소. 그런데 내게 그대들 편에 붙어서 전쟁을 강요한다면, 나는 원래 내가 맡은 당연한 직분대로 그대들은 이곳 부내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세울 것이오.”
대우의통의 의견은 강경했다. 그는 코니시가 끝까지 함께 합류해서 일본의 편에 설 것을 강요하자, 손을 휘젓고 나가서 바로 전투 준비를 했다.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대우의통에게는 진서군 풍주 파견대 병력 5천가량과 자신의 가병(家兵) 3천 정도를 충분히 재량껏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대우의통은 부내성에 틀어박혀서 코니시를 향해 농성을 시작했고, 놀랍게도 지원 없이 거의 몇 달을 버텼다. 그러나 병력 수에는 현저한 한계가 있었고, 결국 성이 함락 직전에 놓이자, 대우의통은 가신 몇 명과 함께 탈주하여 남쪽의 도진씨 가령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쫓아 코니시의 추격이 계속되었고, 거의 사로잡히기 직전에야 도진씨의 가령에서 구조될 수 있었다.
간신히 녹아도에서 머물며 체력을 회복한 대우의통은 절치부심 다시 부내성으로 입성할 기회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박주와 기주를 놓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는 바람에 그가 뜻하던 바를 한동안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초겨울, 권율과 인양군이 이끈 군대가 승부의 결착을 보기 위해 박주로 향했고, 대우의통도 따라서 쫓아간 그 전투에서 제국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제 나도 내 가령을 되찾을 수 있겠구나!”
박주가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당연히 다음 차례는 부내성이 될 것이라고 대우의통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풀리지 못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여전히 3만 5천의 병력을 지니고 있는 채로 부내성으로 물러가 농성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종전을 위한 협상을 제의해 오고 있었다.
슬슬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권율 또한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조정에도 장계를 보내 협상을 윤허해 달라는 서계를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되자 부내성을 한동안 되찾기가 요원해졌다는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그 성을 점거하고 앉아서 협상을 계속 청해 오는 동안은, 그 성이 다시 대우의통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이 없었다.
“이제 와서 갑작스레 협상이라니…….”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간단히 생각하면 이제 남은 잔당만 몰아내면 전쟁은 대승으로 끝이었다. 아니, 육군은 전쟁을 멈추었지만, 지금도 바다에서 이순신은 진서로 접근을 시도하는 왜선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벌써 22전의 주요한 해전 중 단 한 패도 없는 이순신의 위명이 진서뿐만이 아니라 내지와 일본에도 자자했다.
대우의통이 보기에 육군도 마음만 먹는다면 이순신처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내지의 병력은 전국의 동란 시대를 막 거쳐 온 일본군의 노련함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무기와 훈련 수준을 떠나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때문에 권율같이 훌륭한 장수가 하시바 히데요시 같은 천출의 장수에게 정략적으로 휘둘리는 것이라고 대우의통은 생각했다.
“협상은 그저 저들이 시간을 지연시켜 원군을 더 불러오려는 수작입니다. 그만 이를 작파하시고 저를 선봉에 세워서 부내를 공격해 주십시오!”
대우의통은 작심하고서 갑옷과 검까지 모두 갖춰 입고 권율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원조군의 총지휘관에 계급이 원수라지만, 공식적으로 제국의 귀족, 백작의 신분인 대우의통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소리였다. 권율 자신도 당황할 정도였으니, 대우의통으로서도 단호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풍주백의 고견은 잘 알겠소. 그러나…….”
권율은 진심으로 더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우의통의 말마따나 혹여 저들이 그저 지연전술로 협상을 제의하는 것이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협상이 잘 타결되면 피를 보지 않고 다시 부내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을, 지금 굳이 싸워서 문제를 헝클어트리고 싶지 않았다.
권율의 거절로 대우의통이 머리를 싸매고 시름시름 앓게 된 사이, 협상은 점점 늘어져만 갔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적절한 군공을 얻은 다음에 돌아가야 한다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압박감이 문제를 점차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태정제의 딸 중 하나를 일본 천황의 후비(后妃)로 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와 더불어, 지금 점거하고 있는 풍주를 비롯한 진서의 동북부를 내줄 것, 일본 상선의 제국 영토의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요구는 어떻게 들어도 도무지 허락해 줄 수 없는 것이었고, 하시바의 진정성에 의심을 하기 시작한 권율은, 조정에서 직접 이 강화 회담을 주재하기 위해 내려온 류성룡과 논의하여 일본의 조정과 아즈치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직접 협상을 제의하는 사절까지 보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즈음에서 전쟁을 끝내도 좋겠다는 계산을 마친 뒤였다. 그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제시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물리고, 다른 현실적인 조건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배가 대한제국 함대에게서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대창해(大蒼海, 태평양)을 오고 갈 수 있을 것, 진서의 항구에 입항할 수 있는 상선의 제한을 없앨 것, 학문과 기예를 가르칠 훌륭한 인재를 얼마간 일본에 보내줄 것 등이었다.
진서의 영토에 관한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는데, 제국과 일본 모두 이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고래로부터 일본의 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하는 지역이었으며, 한국으로서도 200년을 넘게 통치해 오며 제국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앞뒤 사정을 서로 재어본 뒤 양측은 강화에 동의했다. 1598년 7월의 일이었다.
이렇게 권율과 오다 사이에 강화 협상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진서 부내성에 고립된 채 독자적으로 협상 제안을 줄기차게 하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결국 위암으로 인해 부내성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직후 오다 노부나가의 귀환령이 남아 있던 장수들에게 떨어지고, 모리 테루모토 등을 중심으로 차례 차례 진서에서 철수하여 일본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훗날 「진서전쟁」이라 불리게 되는 4년간의 전쟁이 이로써 끝을 맺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내부적인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그 사이 안정된 오다 막부의 초석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과의 전쟁을 종전시키고 내지로 돌아온 각 장수들은 특별히 전쟁의 공훈을 인정받아 작위 및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각별히 포상을 받은 것은 바로 전쟁 중 해전에서 무패전승(無敗戰勝)을 거둔 이순신이었다.
그는 온양백(溫陽伯)의 작위에 봉해졌고, 일거에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영전(榮轉)되었다.
전체 원정을 지휘한 권율 또한 파주백(坡州伯)의 작위를 받고 추밀원(樞密院)으로 들어갔다. 전사한 신립조차도 그 장남에게 평산개국자(平山開國子)의 작위가 내려졌으나, 원균은 참수되어 그 수급이 기주 성문에 내걸렸다.
전쟁 초기에 기주성 함락 때 도주했다가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강화 협상이 타결된 후 다시 신병이 인도되어서도,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그의 태도에 태정제가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감히 원균을 비호하려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탓에, 그렇게 그는 기주 성문에 목이 열흘이 넘게 내걸려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