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6장 강구연월(康衢煙月) (57/82)

제56장 강구연월(康衢煙月)

「……과학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탐구된 사실 자체의 내용이 변화하는 일은 늘 있어 왔다. 소위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17세기에 들어서 발생한 과학혁명은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이 당시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과학적방법론이 확립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내용과 질적인 면, 그리고 그것이 수행되고 이해되는 방식에서도 거대한 전환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영불제국(Franco―English Empire)의 뷔테르필(Butterfield)은 1923년 《근대 과학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북반구를 근대로 이행하게 만든 결정적인 변화가, 종교개혁·지리상의 발견·르네상스 등이 아닌 바로 과학혁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뷔테르필은, 그동안 단속적으로 고립된 문화권에서 발달한 자연 및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천천히 다른 문명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 반해, 이 시기의 과학혁명이 지리상의 발견으로 수행된 동·서간의 급진하는 교류를 바탕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유럽과 동아시아가 서로 축적한 과학적 지식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상호 수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이 시대의 과학혁명이 특별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시카와 야스히로(石川康廣), 《과학사로의 초대》,

(에도: 江戶書房, 1951), p. 241.

1600년

태정(太禎) 12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경기도 예성부

춘풍(春風)은 나긋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차가운 공기가 이제 물러가고, 따뜻한 바람이 동쪽으로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유구국 선적의 교관선 한 척은 그 순풍에 돛을 활짝 펼치고 서해 바다를 건너갔다.

명나라 영파에서 출항한 이 배에는, 꽤 나이를 먹은 서양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바로 명에서 전교 생활을 오래 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였다.

리치의 목적지는 예성강 하구에 있는 예성부였다. 고려 때에는 벽란도로 불렸던 이 항구는, 원양 무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크게 성장하여 인구 10만에 가까운 큰 도시가 되었고, 개성부와 황성부의 외항 노릇을 하며 번창하고 있었다. 최근에 지근거리에 있는 해주(海州)와 남쪽의 제물포가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예성부에는 수많은 상회의 본점이 있었고, 오고 가는 물자의 양도 단연 내지에서 제일이었다.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이 항구의 한쪽 사면에는, 수많은 건물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고, 부두에는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적잖이 항구의 풍광에 감탄하며 배에서 하선했다.

“오랜만입니다. 마테오 신부님.”

한국이 초행(初行)길인 마테오 리치를 맞으러 나온 것은, 20년 전 인도의 고아에서 인연을 맺은 송상 유견이었다. 유견은 고아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리치에게 한국행을 권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베드로 형제. 이십 년만이네요.”

“조선말은 언제 또 배우셨습니까?”

유견은 마테오 리치가 발음이 좋은 조선말로 인사를 건네오자 깜짝 놀랐다.

“남경에 머물 때에 그곳에 요동에서 온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듣고 보니, 요동 발음이 많이 묻어 나오긴 했다.

요동 방언은 평안도 서북 방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심양 사투리는 단정하게 절제되는 면이 있었다. 아마 왕부(王府)가 위치한 문화의 중심지기에 절제된 언어가 식자층을 중심으로 구사되기 때문일 터였다. 마테오 리치의 발음에는 그 요동 방언 중에서도 심양 사투리의 흔적이 많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거 대단한 일인걸요. 역시 언어를 쉽게 배우시는 것 같습니다.”

유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고아에서 리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빠른 속도로 중국어를 배워 나가고 있었다. 그가 중국어를 익히는 데 도움을 주던 유견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우선은 제 집으로 가시지요. 이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시고 가고자 하시는 방향을 정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마음에 두고 있는 곳은 있으나,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견의 말에 리치는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견은 역시 서양 사람의 이목구비가 너무 큼지막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유건(儒巾)을 쓰고 옷 또한 유복(儒服)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작은 얼굴에 풍성한 수염은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언제 유견이 그러한 것들을 신경 썼던가. 평생을 물 밖을 돌아다닌 그는 인간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이 희든, 검든, 키가 크든, 작든, 그런 것은 한 사람의 특질일 뿐 그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무례하고 예절 없는 인간은 동방에도 넘쳐 났고, 현명하고 학식 있는 선비는 서양에도 충분히 많았다. 유견은 리치라면, 이 보수적이고 완고한 내지에서도 충분히 인정받고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입국을 허가하는 호조(護照)는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전교 활동에 대해서는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내지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있고, 일전의 진서에서의 동란 때 가톨릭 교회가 양측에 모두 연관되어 있던 것을 보고 혹여 내지에서 전교를 허할 경우 정치화할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황성부에서는 말씀을 전할 수 없겠군요.”

리치는 약간 실망한 듯 보였다. 그러나 유견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리치에게 말했다.

“한국은 넓습니다. 내지가 아니더라도 갈 곳은 많지요.”

“나라가 어떻게 나뉘어 있습니까?”

“어느 정도는 아시고 계시겠지만, 한국이라고 하면 제국의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원래 아조가 기원한 압록강 아래의 땅은 보통 내지라고 부르고, 혹은 옛 국명을 따서 조선이라고도 하지요. 압록강을 넘어간 곳에서 중국과 접하고 있는 곳이 요동입니다. 이 땅은 황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지 않고 심왕이라 불리는 왕이 다스리는 하나의 왕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 이미 예전에 콘스탄티노플 함락 직후 그리스 망명객들이 흘러들어 왔고, 정교회 또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진서에 대해서는 잘 아실 테고, 북해는 요동의 동쪽, 내지의 북쪽에 위치한 땅으로 척박하고 추운 땅입니다. 이곳과 대창해 너머의 영주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 통치합니다. 하지만 내지에서 전교활동을 허가 받지 못했더라도, 북해나 영주에서는 허가를 받으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리치는 유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즘에 이르러, 국호인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줄인 한국(韓國)은 내지·진서·요동·북해·영주를 모두 포괄하는 국명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본래 중국의 전통 제국들은 보통 외자로 된 국명을 붙였고, 이전에는 제실(帝室)이 유래한 땅의 지명을 본 따서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漢), 초(楚), 오(吳)와 같은 국명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이후 관습적으로 대당(大唐), 대원(大元), 대명(大明) 같은 방식으로 국호를 강조하기도 했으나, 사해를 통틀어 유일한 문명국이자 천자가 지배하는 나라라는 관념 때문에 나라의 국체(國體)를 나타내는 왕국(王國), 제국(帝國) 같은 단어는 국명에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동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보통 중국 밖의 제후국들이 그런 것처럼 두 글자로 된 국명을 전통적으로 사용했었다. 때문에 고려국(高麗國), 조선국(朝鮮國) 하는 식으로 불려 왔던 것이다.

두 세기 전, 조선이 건원칭제해서 새로이 국호를 정할 때도 때문에 먼저 고려된 것은 외자로 된 한(韓)이 전부였다. 그러나 당시 건원칭제를 주도했던 섭정공 세훈의 명에 따라 정식 국호는 나라의 국본(國本)이 황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제국(帝國)의 칭호가 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습이라는 것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매우 공식적이고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쓰이지 않았고, 일반에서는 보통 「한국」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본토라 할 수 있는 내지팔도는 자칭·타칭 지리적으로 한반도만을 지칭하는 「내지」나 「조선」이라는 단어로 불리고 있었다. 이것은 같은 한국 안에서도 엄격하게 본토와 다른 지역을 구분하려는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일 터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갈수록 제국의 본토라는 자부심은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윤색되어져 갔고, 내지, 특히 경기도와 삼남 일대는 매우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성향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진서는 일본과의 잡종으로, 요동은 속칭 「고려놈」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은근히 깔보기 일쑤였다.

요동에 고려 때에 건너가 고려계로 불리는 인구가 많고, 그 외에도 여진, 몽골, 그리스 등의 잡다한 인종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유견은 내지에서 리치가 전교 활동을 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허가가 나지 않았기에 잘못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뿐더러, 일종의 여권인 호조(護照)가 말소되어 아예 추방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평양이나 개성같이 외부 문화에 개방적인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법적인 제제 이전에 까다로운 문화적 장벽에 부딪힐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내지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명에 있을 때도 처음에는 참으로 힘들었지요. 하지만 이내 그곳의 선비들과 조정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있지요. 저도 그것이 매우 옳은 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나머지는 천주께서 순리대로 풀어주실 겁니다.”

리치의 말에 유견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적이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리치를 돕고 싶었다. 내지로 돌아온 지 5년여, 그동안 유견은 가톨릭의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진서로 옮겨가 살 생각을 해보았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제가 황성부 안의 학당에 학유 자리를 좀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외학원에서 라틴어와 유럽 언어를 가르칠 훌륭한 선생이 있다고 하면, 아마 받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당이라 하면, 어떤 종류의 학교입니까?”

“유럽에 비교한다면 대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황성부 안에 그런 학당이 네 개가 있습니다. 물론 뛰어난 학생들도 있지만 주로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입교하는 곳입니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로마로 향한 것은, 그곳이 제국의 중심부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성자께서 복음의 싹을 틔웠기에 교황 성하께서 계시는 고귀한 신앙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게지요. 나는 서울이 동방의 로마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리치는 황성이라는 발음이 어려웠는지, 서울이란 말로 대신했다. 나라의 도읍을 뜻하는 서울이라는 단어는 이미 넓게 쓰이고 있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자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틀 뒤, 유견은 송상의 인맥을 이용해 황성부의 외학원에 학유(學諭, 교수)를 뽑을 생각이 없는지 타진해 보았다. 「경내사학」이라 불리는 황성부의 4대 학당은 학생으로 입학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한정되어 있는 학유의 자리를 얻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최근에는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도 집안이 좋지 않으면 학유로 임용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학원에서 외어(外語)를 가르치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리치 같은 뛰어난 어학적 소양을 지녔고, 동양의 학문에도 밝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상경을 허락합니다. 오셔서 일해 주십시오.”

외학원에서의 답신은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도착했다. 매우 간략하게 필요한 내용만 적힌 서찰이었다. 그래도 유견과 리치는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외국인이 황성부에 거주를 허락받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래에는 까다롭게 내지 출신이더라도 호적을 황성부로 옮기는 것을 잘 허락해 주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인구가 어느덧 40만에 육박한 황성부는, 갈수록 그 생활의 환경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도성의 서쪽인 마포 일대와 경강 너머의 노량진, 영등포 일대는 이미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황성부가 그간 자랑해 온 상하수도가 들어가지도 않았고, 수빙(水빠)이라 불리는 펌프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모두 경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사용할 정도였다.

이 일대에는 돌로 포장된 도로도 거의 없었고, 가내수공업을 하는 소규모 공방과 지저분하고 낡은 집들, 그리고 왈패들의 소굴이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부촌이라 할 수 있는 도성 안과 동대문 밖 왕십리 일대의 주민들은 이러한 황성부의 확장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높은 수준의 삶의 질을 향유하길 바라는 이들은 황성부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경계했고, 내각에 청원하여 종래에는 황성부에 거주하는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불교 승려나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자는 도성에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학당에 입학하거나 관직에 출사, 혹은 황성부민 중에 신원 보증이 있어야 간신히 거주 허가가 나왔다. 이런 면에서 리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외학당의 학유가 되면, 아무런 제한 없이 황성부 안에서 머무르고 활동할 수 있었다.

“저도 함께 올라가겠습니다. 황성부에 쓸 만한 집을 이미 수배해 두었으니, 그곳에서 같이 생활하시며 지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견은 적극적이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고, 상인으로서의 생활도 정리한 그는 그간 모아둔 돈을 리치의 전교 활동을 돕는데 사용할 결심을 한 뒤였다.

리치는 진심으로 유견의 배려에 감사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먼 나라에서, 이렇게 신앙의 동지로서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천주께서 미리 이를 헤아리시고 유견님을 제게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여름이 되어 황성부로 올라온 리치와 유견은, 남산골 아래의 비교적 한산한 주택가에 집을 구했다.

집은 꽤나 널찍했고, 그 값도 적잖이 나갔지만, 유견이 예성과 개성에 있던 재산을 처분했기에 충분히 값을 치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남은 돈으로 유견은 집의 생활을 돌보아 줄 하인들을 고용하고, 황성부에 부쩍 늘어난 고금회사의 고금을 사두어 그 이자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마음 놓고 하실 일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리치는 유견의 마음 씀씀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가을이 되자, 리치는 외학당에 학유로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라틴어와 서양철학, 그리고 잡다한 학문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부는 리치가 가르치는 학문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개중에는 서양, 혹 남만과 앞으로 교류하거나 부딪힐 일이 많다고 폭 넓게 판단해 배우려는 자도 있었고, 또 다른 이는 순수하게 학문적 호기심으로 리치의 문하에 들어오기를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리치는 이렇게 외학당의 학생들 중에서 20여 인을 모아 서양의 전반적인 제반 지식들을 가르치는 모임을 이끌었다. 이 모임은 이내 「서학회(西學會)」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학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주로 언어 외에도 리치가 전해주는 천문 및 산술에 대한 지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중에는 이미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된 천문학과 산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이가 있었고, 이들은 이내 리치와 격렬한 학문적 논쟁을 하기도 했다.

“본조의 서경덕이란 대학자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이미 계산적으로 증명했고, 이를 참조해 건양력이라는 태양력을 우리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태양이 지구를 돌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서양에서도 코페르니쿠스라는 수사가 지동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까지 지구중심설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교황께서 추인한 교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지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구가 공전하면서 발생하는 연주시차(年周視差)가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직까지 나는 천동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바뀔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 나라에도 아직까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많은데 이것이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보기에 서경덕이 주창한 허기설에 근간한 지구회전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연주시차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서경덕 선생의 책은 나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지구를 움직이게 하는 기운을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연주시차가 왜 중요한지를 이야기하자면, 지구가 천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멀리 고정되어 있는 천체를 볼 때 그 시차가 발생해야 합니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데 천체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다면, 말이 되지 않는 노릇이지요.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천체들이 아주 먼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구가 움직이더라도 그 차이를 관측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지동설이 진정 설득력을 가지려면 사소한 차이라도 있음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리치가 이끄는 서학회에는 점차 외학원 학생들뿐만 아니라, 격물학을 깊게 가르치는 학습원의 학생들도 모여들기 시작했고,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아닌 토론과 연구가 중심이 된 학습이 이루어졌다.

리치 또한 격물학에 대한 소양을 넓힐 수가 있었고, 학생들 또한 서양의 학문 수준에 대해 좀 더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리치는 이 서학회를 발판으로 황성부에서 점차 인맥을 넓혀갈 수 있었고, 고관들과 접견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류성룡과의 만남은 리치에게도 큰 인상으로 남았다.

류성룡은 격물학과 성리학에 두루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리치와의 만남을 기꺼워했고, 그에게 태정제와의 만남을 약속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리치는 이때에 몸에 병환을 지니게 되었고, 1608년 황성부 남산골의 자택에서 결국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장례는 유견과 그 문하에서 배운 서학회 출신의 학생들이 조촐하게 치렀다.

리치는 비록 공식적으로 전교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서학회의 학생들 중 일부는 리치에게 감화받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내지의 천주교 1세대를 이루게 된다.

1601년

태정(太禎) 13년 계하(孟夏)

대한제국 심요도독부 성경심양부.

요동은 6년째 내전 중이었다. 공식적인 후계자로, 세자에 책봉되었던 예양대군은 원래대로라면 심왕 김유가 진서에서 승하한 직후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하나, 공식적으로 그가 왕위를 이을 준비를 하는 사이 동생인 금양대군이 반정을 일으켰고, 때문에 유폐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금양대군 김제는 스스로 심왕의 왕위에 올랐고, 황성부 조정에 사람을 보내 공식적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태정제는 분노하며 금양대군 왕위를 내어놓고 적법한 승계자인 예양대군을 앉히라고 압박해 들어왔다.

금양대군은 본래 황성부나 내지라고 하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우선 요동이 홀로 설 수 있는 확실한 힘을 기르기 전까지, 황성부에 잠시 몸을 굽히려고 책봉을 요구했던 것인데, 도리어 황제가 질책을 하고 나오자 앙심을 품게 되었다.

사실 금양대군이 처한 상황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반정 당시 태안궁을 점거하기 위해 그곳의 경비를 서고 있던 건주 창기병들을 제거해야 했고, 그 소임을 맡은 요동군 제1보병대는 가차 없이 창기병들을 제압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창기병들이 항복의 의사를 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1보병대를 지휘하던 요동군 부장 유철은 단호하게 이들 모두를 처형했다. 건주 창기병뿐만 아니라,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심양 시내 일원에서 예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맞거나 고초를 겪었고, 이들 중에는 여진인이나 한인(漢人)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이들이 즉각적으로 금양대군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건주 창기병의 주력 부대는 여전히 건주에 남아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요동군의 지휘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예양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게릴라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북해 목씨장의 모령현남 탁시가 정치적으로 부상했다.

그는 요동에서 북해에 걸쳐 퍼져 있는 건주여진들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즉각적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해 금양대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의 외조카는 인양군이었고, 인양군이 예양대군을 지지하고 있는 지금은, 그 또한 예양대군의 편이었다.

“패륜아가 감히 왕을 자처하면서, 우리 여진인들을 겁박하고 고초를 주고 있다. 우리는 당당한 제국의 신민이고, 황상 폐하의 충직한 백성이었다. 요동에 머무는 우리 여진인들도 심왕부의 명령에 한 치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폐륜아 금양은 우리를 적이라 부르며 공공연히 핍박을 주고 있으니, 맞서지 않을 수 없다. 뜻있는 자는 모두 무기를 쥐고 정당한 왕가의 자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다하자!”

탁시의 호소는 설득력이 있었다. 사실 요동과 북해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은, 그 조상이 건주여진이었고, 200년의 세월 동안 그 핏줄 자체는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가계를 조사해 보면 그들의 조상 중에는 여진인들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몽골인, 심지어는 그리스인과 한족까지 뒤섞여 있었다. 대부분 여진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만큼 조선어에도 능했고, 여진 이름뿐만 아니라 조선식 이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점차 요동과 북해의 영향권이 확장됨에 따라 전통적으로 복속해 있던 건주여진뿐만 아니라 변경에 있던 해서여진들까지 흘러들어 왔고, 이들 또한 통혼(通婚)과 정착을 통해 기존의 여진 집단에 흡수되고 있었다.

요동과 북해에서 이미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여진인들은 은근한 푸대접에 그렇잖아도 상심하고 있었는데, 금양대군이 여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 격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여진계뿐만 아니라 간신히 심양에서 목숨을 건져 도망친 예양대군 지지파와 내지와 깊숙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근왕당(勤王黨)」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투쟁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강하고 요동 독립의 정서가 팽배한 심요(瀋遼, 심양 및 요양)의 서쪽에서는 요동군을 중심으로 금양대군을 지지하는 「혁신당」이, 여진계 인구가 많고 내지 및 북해와 이해관계가 밀접할 뿐더러,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동부는 「근왕당」이 장악해, 서로 일체의 타협 없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형국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강한 무력을 장악하는 요동군을 등에 업은 금양대군과 서부 혁신당은 차츰 동부를 압도해 가기 시작했다. 동부의 지사(志士)들은 의병을 일으키고, 조직적인 요동군의 군사 전략에 비대칭 전력으로 응수하고 있었으나, 갈수록 그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1년가량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 진서에 출정했던 인양군이 출정했던 요동군 4만 병력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3만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태정제는 인양군의 귀환에 전폭적으로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막대한 물자를 지원받은 인양군은 본디 금양대군을 지지했던 출정병들을 자신의 막하로 끌어들여 귀환 병력을 자신의 수하로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인양군이 예양대군을 돕기 위해 귀환한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란 금양군은 악수를 두고 말았는데, 바로 유폐되어 있던 형 예양대군을 주살한 것이었다.

병이 도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긴 했으나,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양부중에도 공식적으로 금양대군을 비난하는 벽서가 나붙었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동부의 의병들이 심양부 안에 출몰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군기를 탈취하고자 시도하는 등 정세는 난잡한 진흙탕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군 나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인양군은 맞은편에서 진을 치고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외삼촌 탁시의 군영과 합류했다.

인양군은 오랜만에 보는 삼촌을 얼싸안고서 반가움을 표했다. 이제는 나이가 꽤나 들어 수염이 허옇게 샌 탁시의 주름진 얼굴에 인양군은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일찍 오지 못해 미안합니다. 외숙. 분전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웬 말씀을요. 사실 오랜만에 말을 타고 활을 집어 들었더니, 다시 젊어지는 기분에 요즘 살맛이 납니다.”

탁시는 껄껄 웃으면서 인양군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르하치도 와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놈도 이제 나이를 제법 먹어서 애가 여럿입니다. 얼굴을 보면 아마 예전 얼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 곧 수염이 샐 나이지요.”

탁시의 말에 인양군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자란 사촌 누르하치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어느덧 십수 년이었다. 아마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자신처럼, 그 또한 이제 장년의 나이가 되었을 터였다. 생각해 보니 벌써 마흔 줄이었다.

“사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 멀리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오는 풍채 좋은 남자가 인양군을 향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오래전 기억하는 얼굴이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인양군은 다가온 누르하치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반갑다. 누르하치!”

“어서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소. 금양이 그놈이 우리를 잡고자 눈에 불을 켜고 군대를 풀어 요동 전역을 횡행하고 있소. 덕에 북해 도독부로 군세를 물렸다가 사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요동으로 넘어온 차요.”

“이제 군세가 제법 늘었으니 괜찮을 거다. 함께 싸우도록 하자.”

“그런데 황상 폐하께서는 내지의 군대를 지원해 주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내심 인양군이 이끌고 오는 귀환병들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보내는 군대도 기대했던 누르하치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내지 군대의 절반이 지난 진서 전역에 출정하였고, 다시 그중의 절반이 목숨을 잃거나 못쓸 몸이 되어 돌아왔다. 그간 돈도 막대하게 깨지고 군세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니, 황상 폐하께서도 마음은 굴뚝같으나 그렇게 하실 수 없었다. 대신 전비라도 넉넉하게 지원받았으니, 일단은 금양 형님과 맞서 싸워 보자꾸나.”

직접 진서에서 전쟁을 지휘해 보면서, 인양군은 좀 더 성장해 돌아왔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전격전을 각오하고 심양까지 단기간에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어려운 계획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내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고달픈 건 백성들이 될 것이고, 우리 또한 견뎌낼 여력이 없으니 하루라도 서둘러 이 싸움의 결착을 보는 것만이 해답이다.”

인양군은 채 며칠을 쉬지 않고, 바로 군대를 지휘해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마 금양대군은 심양을 바로 노리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군대가 앞으로 나아가면 이내 소식이 심양에 전해지겠지만, 아마 방비를 단단히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인양군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사이의 짧은 기회였다. 방비가 완전히 되지 못한 틈을 타서 심양부를 노린다면, 함락시키는 것도 어쩌면 꿈만은 아니었다.

인양군이 북쪽으로 행군하는 동안, 동부의 산간지대에 숨어 있던 근왕당의 의병과 토호들이 하나씩 합류하기 시작했고, 심양 직하(直下)의 요양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군세가 4만 8천에 이르고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면 금양대군의 휘하에 있는 8만여 병력과도 전략적으로 부딪혀 볼 만한 숫자였다. 물론 군대의 질과 무기의 보급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만큼 인양군이 이끌고 있는 부대는 진서에서 실전을 경험한 노장들이 많다는 장점도 있었다.

요양에서 처음으로 금양대군의 군대와 마주친 인양군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에 이를 격파하고 요양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문제는 예기치 못한 손실에 심양으로 진격할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인양군은 북진을 주장했고, 누르하치는 요양에서 전력을 재정비하자고 건의했다.

“지금이 기회다. 누르하치. 놓치면 다음은 없어.”

“하지만 진중의 병사들의 피로함이 극심하고, 부상병이 많아서 심양부를 노리고 갈 수는 없소. 사촌, 잘 들어보시오. 이미 요양에서 우리가 적세를 격파한 소식이 심양에 앉아 있는 금양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란 말이오. 지금쯤 금양은 방비에 만전을 기하고자 날뛰고 있을 것이오.”

누르하치는 생각보다 노련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군략(軍略)이라면 인양군이 누르하치보다는 한 끗 앞설 터였으나, 그는 점차 강박적으로 심양으로 진격하고자 하는 의욕을 억누르기 힘들어 하고 있었다.

아마 권율과 협동하여 박주를 공격할 때 썼던 쾌속전의 전략을 성공시킨 경험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 전략의 장단점을 익히 알고 있는 인양군이었지만, 그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휘하 병력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르하치, 너는 이곳에 남아 요양성을 지켜다오. 나는 외숙과 함께 심양으로 가겠다.”

인양군의 고집에 누르하치도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탁시는 인양군의 요청에 따라 함께 심양을 공격하기로 했고, 누르하치는 5천의 병력만 가지고 요양에 남았다. 남은 총군세는 이튿날 바로 심양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이놈, 인양아. 네가 무슨 연유로 형을 이리 겁박하고 들어오는 것이냐?”

하나 상황은 인양군의 예측보다는, 누르하치가 생각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금양대군은 이미 심양에 5만이 넘는 군세를 거느리고 철통같은 방벽을 쌓아 놓고 있었다.

심양성뿐만 아니라, 성 밖의 혼하(渾河) 강변에까지도 흙으로 높은 방어벽을 쌓아 놓고 그 위에 포병과 총병들을 배치시켜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심양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어벽을 이중 삼중으로 뚫어야만 했다.

인양군은 고민 끝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어렵사리 혼하를 도강하여 건너편 육지에 상륙했지만, 그때부터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던 금양대군파의 병력에 이내 인양군의 병력은 순식간에 괴멸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혼하에 빠져 죽은 자도 부지기수요, 총을 맞고 죽은 자도 수천이었다. 아비규환이 된 전장을 보면서 인양군은 그제야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아까까지 옆에 서 있던 탁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퇴각을 명하고 황망한 가운데 살펴보니, 탁시는 총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외, 외숙!”

“살아 나가셔야 합니다. 군 나리까지 돌아가시면 이제 금양을 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탁시는 헐떡이며 인양군의 손을 붙잡고 간곡히 말했다. 이내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늙은 노장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인양군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한때의 잘못된 선택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하고, 심지어 외숙부의 죽음까지 초래할 줄은 알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과 부족한 시간에 대한 압박감이 그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요양으로 간신히 잔존 병력과 함께 몸을 피한 인양군은, 패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외숙부를 따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부인 허난설헌은 어린 아들 윤(崙)과 함께 부군의 임종을 지켰다.

함께 평생을 살자고 약속했던 부군을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내는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쉽게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붓을 들어 그 원통함을 조금이라도 달래는 것뿐이었다.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흔들리는 창가의 난초, 그 가지와 잎이 어찌도 향기롭더니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가을바람이 스치고 가자 찬 서리에 모두 시들었구나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빼어난 그 모습은 사라졌으나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누나

누르하치는 인양군의 뒷자리에 남아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는 허난설헌과 어린 인양군의 아들을 황성부로 안전하게 보내어 그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서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금양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북해도독부로 건너갔다.

이로써 요동은 금양대군의 손 위에 완전히 놓이게 되었다. 1601년 겨울의 일이었다.

1604년

태정(太禎) 16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

요동을 제재할 수단을 잃은 태정제는, 금양대군을 왕으로 봉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에는 윤허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양과 황성부 사이의 관계는 전례 없이 냉기가 흐르고 있었고, 언제고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국이 이러하자, 이런저런 이유로 심양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났는데, 그중에서는 예전 예양대군을 따랐던 학자들도 섞여 있었다.

민응로(閔鷹鷺) 또한 그런 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심양대학에서 오랜 세월 교편을 잡고 있었고, 젊은 나이에 전대 심왕 김유의 총애를 받아 관직에도 나간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보다, 학문을 사랑하는 성품이 맘에 들어 예양대군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었고, 때문에 뒤늦게 가산을 모두 잃고 몸만 겨우 건져서 요동을 도망쳐 나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그 명성만큼은 어떻게 하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기에, 다행히도 황성부로 건너와서도 학습원에서 교편을 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응로가 학습원의 준재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마음에 쓰고 있는 일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인양군의 어린 아들 김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황성부 외가에서 어머니 난설헌의 손에 자라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좋은 스승을 백방으로 물색했고, 때마침 민응로가 요동에서 황성으로 피신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찾아가 김윤을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민응로는 당연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김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두 해가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도련님께서는 언젠가 북쪽으로 돌아가셔서 아비의 원수를 갚고 심왕가의 왕통을 다시 올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이 선생이 당부하고 싶은 말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배움이 그 대업을 위해서라고 항상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민응로는 항상 김윤에게 북쪽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김윤의 나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고, 요동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곳은 어쩐지 세상 밖에 있는 것처럼 그 아이에게는 여겨졌지만, 그래도 민응로는 심양이야말로 김윤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저는 먼 심양보다는 여기 황성이 더 좋은 걸요.”

아직 어린 김윤은 거창한 명분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비록 아버지가 없었지만, 생활은 윤택했고 외가 친척들의 사랑을 받으며 걱정 없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철없는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 난설헌이 호되게 야단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가끔가다 이야기였다.

“그럼요. 때론 어떤 사람들은 원래 자기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보다 더 큰 세상의 짐을 지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온갖 사람들의 염려와 기대, 원망과 의혹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무거운 짐이지요. 이런 짐을 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것을 성실히 짊어지고 가더라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지만, 만약에 짐을 내던지기라도 하면 온갖 비난과 실망의 탄식이 뒤따르게 됩니다. 군자는 온갖 영락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절대 그 짐을 버리고 가지 않고, 소인은 무겁지 않은 짐도 조금 힘들면 쉽게 내던지는 법입니다. 도련님께서도 이런 짐을 무겁게 지고 태어나셔서, 도련님께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짐을 지고 갈지, 버리고 갈지를 택하는 것은 도련님의 자유입니다. 하나 이 스승은 도련님께서 군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 짐을 끝까지 짊어지셔서 심양에 언젠가 입성하시면, 이 노인이 무덤에서라도 뛰어나와 절하겠나이다.”

어머니 허난설헌과 외가 친척들의 관심을 받으며, 그리고 뛰어난 스승인 민응로의 학문을 사사받으며, 김윤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머리가 굵어졌을 때, 어머니와 스승이 하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다. 원체 부모의 뛰어난 머리를 물려받아, 생각이 빠른 아이였다.

자신은 심왕의 손자였으나 아무런 군호도 없는 왕실의 사람이 아니었다. 삼촌인 지금의 심왕 김제가 형제들과 싸워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장 요동과 씨름을 버릴 형편이 되지 않는 황제는 이를 갈면서도 심왕을 책봉해 주었고, 그 탓에 자신은 심왕가이면서도 심왕가가 아닌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물론 태정제는 여러모로 인양군의 남은 가족들에게 처우를 잘해주었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를 넘어서서 마음껏 쓸 수 있도록, 경기도 이천에 넓은 식읍을 하사했고, 인양군의 처가인 허씨 가문이 모두 조정에 출사하고 있는 바, 이들을 통해서도 난설헌과 김윤의 생활에 모자람이 없도록 신경 쓰게 했다.

그러나 태정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김윤은 나이가 차츰 들수록,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참 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저 태정제의 후견을 믿고 조정의 관직에나 출사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언제고 우환이 될 수 있는 자신을 심왕 김제가 눈꼴셔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황제와 내각의 우산 아래인 황성부에 있기에 그런 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심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에도, 그것은 스승 민응로의 말처럼 결단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스승은 어렵더라도 그 길을 가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어머니 난설헌도 자신에게 넌지시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북해로 가보고 싶습니다.”

김윤의 나이 열넷이 되던 해, 갑작스럽게 이 젊은 도령은 어머니에게 뜬금없는 요구를 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냐, 윤아.”

허난설헌은 바느질하느라 들고 있던 옷감을, 반짇고리에 다시 넣고서는 김윤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녀는 이제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도 점차 얼굴에서 이울었지만, 그 총명함과 품위는 나이가 갈수록 더해져 갔다. 부군인 인양군을 잃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강인했고, 단단했으며, 똑똑하고, 현명했다. 뛰어난 문장으로 여항(閭巷)에 이름이 높았으나, 그것이 그녀의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뜻한 바대로의 삶을 살았을 여인이었다.

“진외당숙 어른을 뵙고 와야겠습니다.”

김윤의 말에 난설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진외당숙(陳外堂叔)은 아버지의 외사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니, 김윤에게 있어서는 항렬상 진외당숙이란 누르하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여전히 이제는 공식적으로 심왕의 자리에 오른 김제를 인정하지 않고, 북해에서 요동을 넘나들며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로 수많은 여진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심왕 김제가 여진인들에게 원한을 갖고 이들에게 수모를 계속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제가 왕이 된 뒤로 여진인들은 관직에 출사할 수도 없었고, 그 이름 높던 건주 총기병대는 해체되고, 군문에도 나갈 수 없도록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진인이란 이유만으로 세금을 곱절은 더 내야 했고, 공공연히 부역을 시키고 핍박하니 생활이 끔찍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제는 혹여 누르하치의 반군에 이들이 가담할까 싶어 찍어 누른 것이었으나, 이것이 도리어 누르하치의 세를 불려주고 있었다.

여진인들은 요동에만 살고 있지 않았다. 좁게 보아도 심왕의 권력이 닿지 않는 북해도독부에 훨씬 많은 여진인들이 살고 있었고, 북륙으로 올라가면 대한제국의 호구대장에 등록되어 있기는커녕, 북쪽의 요새를 공격하며 약탈을 일삼는 야인여진들까지, 많은 곳에 흩어져 있었다.

비록 자기가 태어난 씨족과 핏줄을 잘 벗어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요동의 여진인들이 김제에 의해 찍어 눌려지니, 이들이 자연스럽게 북해로 넘어가 누르하치에게 가담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때문에 누르하치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점차 피로감을 느껴가고 있었지만, 김제를 상대로 저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원한을 입어 시작한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보다는 핍박받는 여진인들에 대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진인뿐만 아니라 심왕 김제로부터 탄압받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 북해로 넘어왔고, 살림이 어려워진 목씨장에는 굶어도 좋다는 식객들이 부지기수로 앉아 있었다.

“너는 아직 너무 어리다. 정말 가야 할 이유가 있느냐?”

“과연 심양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뜻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도 주변에 없습니다. 때문에 밤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응어리가 좀체 풀리지 않습니다. 하온데, 북해의 진외당숙께서는 그 싸움을 계속 해오고 계십니다. 제가 옆에서 직접 보고 느끼지 않으면.”

김윤은 거기까지 말을 하고서는 들고 왔던 책을 옆으로 탁 치우며, 어머니의 앞에 허리를 공손이 숙였다.

“……아무리 책상물림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머님.”

허난설헌은 내심 적잖이 놀랐다. 아들이 어느새 이만큼 성장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 키도 훌쩍 크고, 품새도 단정해진 아들이었다. 물론 그 마음이 아직 다 여물지는 않았겠으나, 그래도 이제 제법 사내장부 같은 말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홀로 보내줄 수는 없다. 봄이 되거든 네 외삼촌에게 부탁해 보도록 하마. 전부터 한 번 북해로 네 진외당숙을 만나러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분명히 몇 달간 널 위해 짬을 내어줄 것이다.”

김윤의 외삼촌은 다름 아닌 허균이었다. 태정제의 측근 중 하나로, 내각의 법부대신(法部大臣)까지 승승장구해 올라간 그였다.

젊은 나이에도 총명한 두뇌로 일찌감치 인정받았었고, 지금도 태정제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 중 하나였다. 그러나 허균은 슬슬 한 번 주변을 경계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권력이 자신에게 모이고 있었고, 분명히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태정제는 자신을 의심하고 목을 조아올 것이었다. 권력 앞에서 사람은 비정해지는 법이다. 오랜 지음이나 다름없는 그라 하더라도, 태정제가 황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기는 순간 좋은 꼴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적당히 몇 년 정도 관직에서 물러나 숨을 돌리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가급적이면 좀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허균에게 난설헌이 때마침, 김윤과 함께 북해의 누르하치를 보러 갈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해 온 것이었다. 허균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잖아도 내 전부터 목씨장의 누르하치 공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소. 모두가 버렸음에도 홀로 그렇게 열심히 싸워 나가는 사람을 또 어디서 보겠소?”

허균은 진심으로 누르하치에게 적잖이 감탄하고 있었다. 인양군과 인연이 있기로는 누르하치 못지않은 허씨 집안과 태정제도, 상황이 고약하게 돌아가자 결국 심왕 김제를 인정해 주고 말았다. 그 사이는 아무리 포장해도 절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압록강을 두고 내지와 요동 사이에 더 큰 규모의 내전이 발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어서도 황성으로부터 받는 소소하고 은밀한 지원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누르하치는 지치지 않고 몇 년에 걸쳐서 심왕 김제를 괴롭히고 있었다. 허균은 같은 남자로써 진심으로 누르하치의 끈질김에 감탄하고 있었다.

허균이 갑작스럽게 내각 법부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람을 떠나겠다고 하자, 당연하게도 태정제는 그의 말을 일축하고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허균은 진심으로 부복하고서는 태정제의 노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면서, 잠시 심신을 추스르고 나면 반드시 조정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사람들을 물리고 태정제와 단둘이 독대하고 앉은 자리에서 자신의 목적지가 북해임도 밝혔다. 누르하치를 찾아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부를 움켜쥐고 권력을 휘둘러도 되는 허균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음지에서 봉사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인 태정제는, 기분이 좋아져 허균의 북해행을 허락했다.

덤으로 여비로 쓰고 누르하치에게도 군자금으로 내어 주라며,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는 어음까지 내어 주었다. 여기에 액수를 기입하고 지역마다 큰 규모로 돈을 취급하는 상단이나 객줏집을 찾아간다면, 분명히 황제의 내탕금에 대한 신용으로 막대한 자금을 내어 줄 터였다. 허균은 이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그 어음장을 받았다.

“화, 황은이 망극하여이다, 폐하.”

태정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사실 정말로 허균이 자신을 위해 봉사를 하려는 것이든, 아니면 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잠시 쉬어가려는 의도로 이러는 것이든, 큰 상관은 없었다.

이미 태정제는 안정적으로 황권이 약간 우위에 있는 내각과의 권력 균형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상 갈수록 그 권한이 약화되고 의미가 퇴색하고 있는 추밀원을 제외하면, 황제 대 내각의 균형으로 나라가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태정제는 내각에 자기 측신들을 심어 내각에 대한 우위를 확보한 뒤로, 필사적으로 전제정치를 펼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태정제는 철저하게 내각에 대한 우위만큼은 놓지 않으려 하고 있었는데, 적절한 시점에서 너무 힘이 들어간 허균이 스스로 바람을 빼고 오겠다면 말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물론, 가급적 가상한 이유로 그런다면 더더욱 좋을 일이었다.

이렇게 태정제로부터 넉넉한 자금까지 지원받아, 김윤과 허균은 북해로 가는 길을 출발했다. 1604년 가을의 일이었다.

1605년

태정(太禎) 17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청년의 이름은 조시진(趙翅眞)이었다. 진서도독부 기주 출신으로,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였다. 사실은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살아 있기는 했다. 다만 그가 혼인을 맺지 않고 어미와 통정하여 그를 낳았고, 그 후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채 불문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기에,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기주부의 친척이 운영하는 객줏집에서 일을 돕던 소녀였으나,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 그 집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신세를 지고 있는 형편에 아비 없는 아이를 배었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 앞에는 모진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박주로 옮겨간 그녀는 독하게 마음먹고 홀로 살아 나가기 시작했다. 등에 업힌 아이를 생각하면 살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기주는 호황기라 상인들은 돈을 많이 굴리고 있었고, 저택을 크게 짓고 하인을 많이 부리곤 했었다.

조시진의 어머니는 그런 박주 상인들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고, 적어도 그녀 자신과 조시진의 밥은 먹일 수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그 박주의 동장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종종 눈에 띄지 않게 얼굴에 장옷을 걸치고 동장사에 가서 불공만을 드리고 올 뿐이었다.

이제는 이미 사장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그에게, 속세에 남겨둔 자식이 있으니 책임지라고 할 마음이 그녀에게는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남을 일절 탓하지 않고 묵묵히 그저 살아 나갔다. 그녀를 눈여겨 본, 주인집의 마님이 박주 저잣거리에서 유리공방을 하는 늙은 홀아비에게 중신을 서 주었고, 그녀는 그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서 뒤늦게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홀아비는 젊은 부인에게 딸린 자식을 제 새끼처럼 거두어 주었다. 다 늙어서 씨가 마른 탓인지 그 뒤로도 자기 피를 이은 자식을 보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젊은 부인과 동침을 하고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니, 마음속으로 단념하고 조시진을 제 자식 삼아 키웠던 것이다. 조씨라는 성도 바로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시진은 일찌감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일언반구 내색하지 않고 늙은 아버지를 잘 따랐다.

조씨 노인은 조시진에게 공방을 물려줄 생각을 했고, 때문에 조시진에게 어릴 적부터 일을 꼼꼼하게 가르쳤다.

다른 공방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일은 도제식으로 어릴 때부터 엄격한 위계 질서 아래에서 훈련을 받아 익히게 되어 있었고, 때문에 어린 나이에 뜨겁고 거친 유리공방에서 조시진은 아버지와 함께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시진에게는 썩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들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조시진이 열다섯쯤 되어 공인(工人)으로 한 사람 몫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에, 진서 전체를 전란의 파도가 휩쓸었다. 박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군병을 이끌고 진서에 도해하자마자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다행히 조시진의 가족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생계는 점차 곤란해져 갔다.

전란 중에 상인들은 하나둘 짐을 싸 도망가기 시작했고,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남은 카토 키요마사의 군대는 집집마다 곡량과 돈이 되는 물건들을 수탈하러 다니기 일쑤였다.

기술을 지닌 장인들도 그 군대에 많이 끌려갔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아직 그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도자기와 유리장인들이 주요 대상이 되었다.

진서에서도 흔하지 않은 유리장인은 카토 키요마사의 귀에도 일찌감치 들어갔고, 때문에 조씨 노인은 카토 키요마사의 진영에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운이 좋다면 카토에 의해서 일본 본토에 보내져 유리를 만드는 일을 계속했을 것이고, 운이 나빴다면 전장을 전전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어머니의 차례였다. 그녀는 전란 중에 몸이 더럽혀지는 수모를 겪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박주 성의 주인이 바뀌고 종래에 포위전까지 펼쳐졌을 때,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어떻게든 조시진이 먹을거리를 마련해 보려 했지만, 그것이 가능할 턱이 없었다.

다행히도 조시진이 어머니의 다음 차례가 되지는 않았다. 죽음의 화살은 그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질 때가 되어서야 그를 비껴 나갔다.

인양군과 권율이 이끄는 군대가 박주의 성문을 결국 열었고, 일본군을 축출한 다음에 곡량을 풀었던 것이다.

잡곡을 타다가 미음을 끓여 먹고서 조시진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리는 기분이었다. 겨우 기운을 차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고서,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유리공방으로 돌아왔다. 그 공방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다행히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죽음의 도시나 다름없었던 박주의 분위기도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상들은 다시 억척같이 군수품을 납입하거나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박주 전체에 하나 남은 유리장인인 조시진에게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시진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유리를 만져서 그 솜씨가 늙은 장인의 것에 버금갔고, 그 수완도 좋았기에 이내 공방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이후로는, 박주 「성모대성당」을 재건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카토 키요마사에 의해 성당은 이런저런 훼손을 입은 상태였다.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박주의 박상을 포함한 가누비토 계층들에게 자부심이었던 이 성당을 훼손된 상태로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고, 때문에 박상들은 다시 돈을 만지기 시작하자마자, 갹출하여 재건 사업에 또다시 출자했던 것이다.

성당에는 유리가 많이 사용되었고, 카토의 군대에 끌려가지 않은 유리장인은 조시진 하나였다. 고급 유리의 일부는 요동에서 직접 수입해 가져와 사용했지만, 자잘한 유리나 그 장식 따위는 조시진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가족을 잃게 만든 전란이었으나, 그 덕분에 조시진은 유리장인으로 박주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아 수백 냥에 달하는, 일반 장인으로써는 엄두도 내지 못할 재산을 축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허망함이 깃들어 있었다. 종교 또한 그의 마음에 위안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부처가 되었든, 이 박주의 많은 가누비토들이 치성을 올리는 성모와 예수가 되었든, 조시진은 그런 성스러움을 믿을 수 없었다.

대신 조시진에게 남은 것은 학문에 대한 미련이었다. 나이가 스물에 접어들 때가 되어서야, 조시진은 자신이 한문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평생 유리를 만지는 기술만 배운 그였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밀려오자 조시진은 전쟁이 끝나자 내지에서 건너오기 시작한 유리장인들 중 한 명에게 공방을 넘기고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기주로 옮겨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기본적인 학문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조시진은 기주 상학에 입교하는 것을 거절당했다. 진서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다는 그 학교에, 나이 들고 견식 짧은 그가 앉을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시진은 좌절하지 않았다. 이 년간 기주의 글방을 전전하며 글을 배우고, 밤낮으로 학문을 익힌 다음에 스물하나의 나이가 되어서야 기주 상학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조시진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주상학은 진서 제일의 명문으로, 바로 이름난 재상인 임승준이 나온 학교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진서의 명사들은 두루 이 기주상학을 거쳐 갔는데, 그중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은 내지와 요동으로 진학하여 4대 학당이나 심양대학으로 가서 명성을 떨치곤 했다.

조시진의 목표는 그중에서도 학습원이었다. 본디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었던 조시진은 격물학에 대해 깊게 매료되었고, 때문에 학습원에서 그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시진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학습원을 필두로 한 소위 경내사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엄격한 신분 질서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혈통을 지니고 태어나면, 본인의 능력이 그다지 높지 않더라도 쉽게 입학이 허가되었으나, 반대로 배경이 없는 이들은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삼키기 일쑤였다.

물론 출신이 좋지 않은 이들이 경내사학에 들어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매우 어린 나이에 이미 그 재능을 확실하게 인정받은 경우에 한했다. 뒤늦게 만학(晩學)을 시작한 조시진에게 학습원은 언감생심이었다.

보다 이러한 차별이 없는 심양대학으로 유학을 고려해 보았으나, 당시 심양대학은 금양대군의 집정과 이에 뒤이은 내전으로 혼잡한 상황이었다. 심양대학은 수년째 폐쇄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물론 수십 년 전쯤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소위 서원(書院)이라 불리는 사립학교에 진학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러한 서원들은 격물학을 깊게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조시진에게 적합한 곳을 찾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만하면 되었소. 공부라는 것은 원래 선비들이나 하는 것이니, 못 올라갈 곳을 쳐다보지 말고 어서 혼례나 치러서 가정을 꾸리는 게 어떻겠소?”

주변에서는 조시진에게 에둘러 타일렀다. 허망한 꿈을 꾸지 말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소리였다.

학업 중에 많이 까먹긴 했지만, 유리공방을 하며 모아둔 돈도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고, 그만한 기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언제고 일을 할 곳은 있었다. 그러나 조시진은 여기서 나약하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뜻한 바가 있으니 끝까지 가보겠소.”

조시진은 상황에 굴하지 않고, 안면을 트고 일단 박주의 거상들을 하나씩 찾아가 한 가지 제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내지와 요동은 물론이거니와 유럽과 일본에서도 대학은 가장 고등학문을 취급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진서에는 변변찮은 대학이 하나 없어, 기주상학을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도 바다 건너로 유학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 진서에서도 대학을 하나 세워, 진서인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조시진의 말에 반응이 시큰둥하던 상인들도, 점차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심지어 진서보다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던 일본도 이미 「쇼헤이코」라 불리는 대학에 상당하는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진서는 비록 전쟁을 막 겪고 난 상황이라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않았고, 이제 겨우 회복을 위한 장로(長路)에 접어들었으나, 그만큼 진서를 빨리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으로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조시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박상을 중심으로 한 진서의 허리나 다름없는 가누비토 계층은, 자신들을 위한 고급교육기관의 수립을 진심으로 열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지로 가서 경내사학이나 서원에 들어가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기회도 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맹률이 낮고 교육 수준이 높은 가누비토들은 어떻게든 여건이 된다면 내지로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진서에 대학에 세워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박상과 가누비토들, 그리고 이제는 「박주주교구」의 예수회 가톨릭 사제들, 동장사를 중심으로 한 진서의 불교 종단들, 마지막으로 살주백과 풍주백 두 제후가 각기 돈을 추렴하고, 대학을 세우기 위해 「진서대학창건기성동맹회(鎭西大學創建期成同盟會)」를 조직했다.

조시진은 이곳에 몸을 담고 필사적으로 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내지의 대학에 낙방을 한 뒤로, 그에게는 진서인이라면 누구나 차별없이 능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을 수립하는 것이 소망이 되었다. 그 자신도 남은 재산을 모두 이 일에 쏟아부었다.

일은 점차 진전을 보기 시작했다. 박주뿐만 아니라, 기주의 상인들과 가누비토들도 점차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며 참가하고자 했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진서인들은 이 대학의 설립하는 일에서 희망을 보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진서도독부에서도 관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때 지원 장교로 진서에 참전하기도 했고, 종전 후에는 벼슬길에 출사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이때에 진서대도독으로 부임해 와 있었다.

그는 이 대학 설립 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청해서 황성부 조정에 하교를 바라는 장문의 상주문을 보내기도 했다.

황성부에서는 사실 경내사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 독점을 내심 바라고 있었고, 서원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이들 교육기관에 경내사학과 동등한 지위를 절대 부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동란이 막 끝나고 민심이 뒤숭숭한 진서를 위무(慰撫)할 필요는 확실히 있었고, 내각에서는 내키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태정제에게 이를 직접 보고했다. 태정제 또한 진서에 대해 우려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지나치게 가톨릭이 성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핏줄, 관습이 너무 내지와 상이한 곳이 진서였다. 이런 가운데 고급 교육을 스스로 실시하겠다고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조정에서는 요동의 사례를 통해 이를 간접 체험한 바가 있다. 요동은 독자적으로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제도를 운용하고 있었고, 이곳 출신의 요동인들이 대거로 요동의 관료층을 형성함으로 인해서 독립성향이 부추겨졌다고 태정제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흔들리고 있는 진서를 억압하는 정책을 취한다면 동란이 끝난 직후의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태정제가 제시한 것은, 내각의 문부대신이 직접 임명하는 학장(學長)을 파견하여 대학의 전반을 감독하게 하는 조건으로 설립을 인가해 주는 것이었다.

독자적인 대학 건설에 비록 제동이 가해지긴 했지만, 일단 대학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진서인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자금이 꽤 모아졌기에 설립 계획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박주 남쪽의 높지 않은 언덕에 넓은 부지가 조성되었고, 이곳에 건물들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이사회라 할 수 있는 10인회가 조직되었고, 이 10인회의 구성원은 각기 감독(監督)이라 불리게 되었다.

감독의 추천권은 황성부 내각 문부에서 1인, 진서도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2인, 풍주백이 1인, 살주백이 1인, 진서대교구에서 2인, 박주 동장사에서 2인, 박상에서 1인으로 배분되었고, 초대 학장으로 황성에서 오윤겸(吳允謙)이 부임해 왔다.

결국 1611년, 「진서대학」이 공식으로 세워지고, 기주상학 출신을 중심으로 126명의 1기생을 뽑아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 126명의 1기생 중에는 나이 서른이 된 조시진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어린 동기들과 함께 조시진은 학문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진서에 대학을 세우고, 이곳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기까지 지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그는 한시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황성부 학습원에 있던 요동 출신 학자 민응로가 초빙되어 왔고, 그는 격물학에 대한 강좌를 이 대학에 개설했다. 또한 예수회 출신의 서학(西學)을 가르치는 학유들도 진서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조시진은 이들의 강의를 두루 수강하면서 자신만의 학문 체계를 정립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기술자나 장인은 학문을 주도하는 세력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아무리 격물학이라 하더라도 학당에서 이루어지는 고준담론(高峻談論)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로, 르네상스를 지나오며 기술자들이 자연과학에 공여해 온 공로는 점차 잊혀져 가기 시작했고, 학문에 매진할 여력이 있는 유한계급(有閑階級)에 의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학문의 발전이 수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자이자 장인 출신인 조시진이 가지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3년간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 민응로의 제자로써 이곳의 진서 대학의 견습학유(見習學諭)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광학(光學)에 대한 탐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리공방에서 체득한 여러 가지 실물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측 기기들을 개발하는 일에 전력했다.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망원경을 개량하는 작업이었다. 보다 정확한 렌즈를 만들기 위해 조시진은 직접 대학의 한 구석에 만든 작업장에서 유리와 씨름하며 숙식했다.

이미 렌즈를 깎는 일은 마경(磨鏡)이라 불리고 있었고, 볼록렌즈는 양경(陽鏡), 오목렌즈는 음경(陰鏡)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조시진은 이러한 렌즈 연마에 매우 능숙했다.

소위 천리경(千里鏡), 혹은 만리경(萬里鏡)을 개량해 처음으로 망원경(望遠鏡)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보다 큰 형태의 망원경을 제조해 진서대학에 천문을 관측하는 측건단(測乾壇)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로 조시진은 양경과 음경을 맞대어 기초적인 현미경(顯微鏡)을 제조할 수 있었다.

조시진은 이러한 성과물에 힘입어 여러 진서대학의 학자들과 함께 다양한 대상을 관측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제국 최초의 학술지라고 할 수 있는 《진서격물규보(鎭西格物ね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예수회 선교사는 아니나, 이들을 따라 진서에 입국한 젊은 아라곤 학자 바르토뮤 카르세레스(Bartomeu C rceres), 진서 출신의 학도(學徒) 귤강조(橘康助) 등이 조시진과 함께 이를 활용한 연구를 함께했다.

특히 바르토뮤 카르세레스는 처음으로 유리관에 수은을 넣어 온도를 측정하는 수은온도계(水銀溫度計)를 발명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620년에 이르면, 진서 기주부 및 박주부에서 처음으로 계량화된 기상 관측을 전담하는 천기국(天氣局)이 세워지고, 이미 황성부에서 들여와 계량한 측우기(測雨器), 서양에서 수입된 뒤 독자적으로 생산 기술을 확보한 자명종(自鳴鐘), 망원경, 온도계, 풍측계(風測計) 등으로 기상 관측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다.

온도는 단순히 눈금에 따라 갑자(甲子)부터 계해(癸亥)까지 60등분으로 나뉘어졌고, 이 온도 표기법은 한동안 진서를 중심으로 제국의 관측 기록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빠른 속도로 진서는 한국·유럽·일본 등의 학문이 서로 교류하고, 동시에 격물학, 혹은 자연과학의 발전의 첨단에 서는 지역으로 변모하게 된다.

전쟁 뒤 다시 부를 모으기 시작한 박주의 상인들은 자제들을 교육시켜서 학계로 진출시켰고, 이들은 다시 진서도독부의 관료, 학자, 혹은 살주백이나 풍주백의 가신으로 들어가 가누비토 계층을 점차 두껍게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상업 자본을 활용하여 진서에 최초로 상업 작물의 재배를 시도했고, 이때를 전후하여 들어온 담배가 이들의 주요 투자 작물이 되었다.

이외에도 고추, 감자를 비롯한 다양한 식량 작물이 진서에 가장 처음으로 뿌리내렸고, 이러한 새로운 작물 및 기존의 식물 등을 연구하여, 그 재배와 약효 등을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의 기초 또한 진서에서 처음으로 놓이게 된다.

1611년

태정(太禎) 2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영안부의 외항(外港)이 내려다보이는 해송정(海松停)에 서서, 누르하치는 가만히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오촌 조카 김윤과 함께 찾아왔던 허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누르하치는 심왕 김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희망을 가지고 임하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는 여진족을 중심으로 한 1만여 병력이 있었고, 개마고원을 타고 넘으며 요동에 출몰하여 일시적으로 건주부를 점령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고서, 허균은 누르하치에게 무거운 안색으로 조언했었다.

“이 상태로는 몇 년 가지 않아 점차 싸움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오. 김제는 지금 요동군을 다시 강군으로 건사하기 위해 총력적으로 모든 재원을 쏟아붓고 있고, 서부를 중심으로 요동 일대를 점차 확실하게 장악해 나가고 있소이다. 그에게서 등을 돌렸던 심양의 관료들도 이제 그의 궁정에서 봉사하고 있고, 민심도 어서 내전이 끝나 안정된 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소. 이미 그가 심왕부에 버티고 선 이상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소이다. 이후에는 어찌할지 생각을 해두시는 것이 장래를 위해 좋을 거외다.”

그때, 누르하치는 허균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적어도 여진인들 사이에서 심왕 김제에 대한 반발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이들은 생업을 내팽개치고 누르하치 아래에 들어와 싸우기를 청할 정도였다.

“나는 그다지 우려하지 않소. 하늘의 뜻은 우리 편에 있소이다.”

누르하치의 대답에는 자신감이 가득 묻어나왔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 뒤로 누르하치의 생각보다는 허균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허균은 누르하치 휘하에 남기를 원하는 김윤을 남겨두고, 다시 황성부로 돌아갔다. 그 뒤 한 2년간은 누르하치의 저항 운동이 점차 결실을 보는 듯했다.

여전히 요동의 동부 지역에서는 김제에 대한 반발감이 심했고, 이를 이용해 누르하치는 요동에 작은 산채들을 마련하고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 아래에서 성장한 김윤은 이러한 산채에서 직접 별동대를 지휘하며 산개해 있는 요동군과 맞붙어 전과를 내기도 했다.

하나 요동군에 대해 완전히 정비를 새로이 한 심왕 김제는 명나라가 지금 국경을 소란하게 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부의 요명 국경 사이에 배치되어 있던 요동군을 전격적으로 동부로 모두 옮겨 강력한 토벌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북해에서 요동으로 넘어오는 주요 산로(山路)는 요동군에 의해 하나둘씩 장악되었고, 여진족 부락에는 군대를 주둔시켜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여진족에 대한 탄압을 임시적으로 잠시 해소시켜 줌으로 인해, 더 이상 저항군으로 인원이 유입되지 않도록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상황의 안정을 위해, 심왕 김제는 황성부에 매년 여러 차례의 특사를 보내어 조공과 함께 태정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력했고, 북륙에서 들어오는 모피 무역을 다시 활성화시켜 내지의 상단들과 연계해서 자금을 확보했다.

심왕 김제를 제재할 수단이 마땅하지 않던 차에, 먼저 김제가 고개를 숙이고 저자세로 들어오자 태정제는 요동에 대한 견제를 줄이기 시작했다.

태정제는 인정보다는 먼저 정치적인 고려를 우선시하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한때의 친우였던 인양군을 대신한 복수보다는 제국 전체의 안녕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태정제와 심왕 김제 모두, 이러한 전략적이고 일시적인 제휴에 대해 내부의 반발을 무릅써야 했지만, 둘 모두에게는 정치적으로 계산이 빠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황성부와 심양부의 오월동주(吳越同舟) 덕분에, 북해의 누르하치에게 흘러들어 오던 태정제의 자금 지원은 끊기게 되었고, 결국 누르하치는 사면초가의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행이라면, 그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북해의 정서는 아직까지 그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었다.

북해의 생업은 모피 수렵이었고, 최근 들어 북륙에서부터 대량으로 모피를 조달해 오기 시작한 심왕 김제 때문에 북해의 경제는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모피 무역에서 요동에 밀리기 시작하자,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생업 수단이 마땅치 않은 북해의 주민들은 곤란에 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호구지책으로 결국 영주로 건너가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요동에 연줄을 대어 엽사 경험을 살려 북륙의 모피 무역에 참여하던가의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북해도독부의 관료들 또한 누르하치의 활동에 대해 제재는 하지 않았다.

박봉에 시달리는 북해의 관료들은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노략해 온 물품을 대신 팔아서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었고, 이런 관행은 몇 년 사이에 만행하여 황성부에서 내려오는 북해대도독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김윤 공자께서 요동군에게 포위되어 저항 끝에, 결국 적군에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북해의 지지를 바탕으로 간신히 저항 운동을 지속해 나가던 누르하치였으나, 결국 결정적으로 김윤이 심왕 김제에게 사로잡힘으로 인해서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동안 누르하치가 내세웠던 것은 적법한 심왕가의 승계자인 김윤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것이었고, 김윤이 결국 심왕 김제에 의해 포로 신세가 되자 저항 운동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윤이 자청해서 요동으로 들어가 싸우겠다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누르하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김윤을 죽이지는 않도록 심왕 김제와 협상하는 것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다시는 요동과 북해의 경계를 넘지 말 것이며, 스스로 아래의 군졸들을 해산하고 근신하라.”

비록 한참 품계가 낮았지만, 누르하치는 심왕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봉신(封臣) 중 하나였고, 심왕은 누르하치에게 법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이 정도에서 타협을 해준 것이었다.

그 대가로 심왕 김제는 김윤을 죽이지 않고, 왕족으로 인정해 주고 군(君)의 봉호를 내려 주었다. 대신 김윤은 심양의 모처에 근신을 명받고 심왕의 윤허 없이는 출입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왕 김제는 자신의 측근인 한의직의 딸을 김윤에게 강제로 시집보냈고, 이로써 반란의 불씨를 자신의 손안에 가둬둠으로써 내전을 일시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거의 십 년에 걸친 저항 활동이 무산된 누르하치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바깥 출입도 하지 않았다. 그의 당당하고 풍채 있던 외모는 급격히 늙어갔다.

“아버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다음을 도모하셔야지요.”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 중 하나인 홍타이지(皇太極)가 누르하치를 찾아와 간청해도, 누르하치는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 그렇게 2년을 모든 세상과 단절하고 틀어박혀 있던 누르하치에게 다시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바로 불심(佛心)이었다.

이때 몽골의 라마승이 북해 지역을 순례하고 있었고, 이를 누르하치가 초청해 많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목씨장이 무너지길 기다리며 가문의 선조들에게 누를 끼치는 짓을 계속할 수는 없다. 우리도 이제 다른 길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다만 나는, 그리고 내 자손 만대로 이 원한만큼은 잊지 않고 길이 기억할 것이다.”

누르하치는 1610년의 추운 겨울, 가솔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눈은 다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거멓게 죽어 있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북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를 두고 언성이 높아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많은 이들은 고향이자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목씨장에 남기를 원했고, 또 다른 이들은 가산을 모두 정리해 진서로 건너가 상계에 투신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높았던 의견은 바로 영주로 건너가자는 것이었다.

심왕 김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런저런 이유로 당시 북해로 건너왔던 여진인들은 저항 운동이 와해되고 북해에서 생업을 찾지 못하자 굶주림을 피해 영주로 대규모로 이주하고 있었다.

수년간 영주로 배를 타고 넘어간 건주여진 출신의 여진인들만 해도 물경 수천 명이었다.

여기에 점차 점진하는 요동의 북방 개척에 밀려난 해서여진들도 북해로 건너와 다시 영주로 넘어가는 이민 행렬을 이루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상 여진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누르하치는,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면 여진족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 또한 이런 사실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물러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방법이 없구나.”

누르하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여진인들의 이민 행렬에 기대어 영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이를 가솔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통보하며, 누르하치는 소위 후대에 「칠대한(nadan amba koro, 七大恨)」으로 알려지는 심왕 김제에 대한 원한을 잊지 말라는 경계를 남겼다. 그 칠대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심왕 김제가 누르하치의 아버지 탁시를 죽인 것.

2. 심왕 김제가 여진을 학대하고 그들을 터전에서 내쫓은 것.

3. 심왕 김제가 정당한 승계자인 인양군을 주살하고 왕위를 탈취한 것.

4. 심왕 김제가 여진을 막기 위해 모략으로 괴롭힌 것.

5. 예허[葉赫]여진을 비롯한 몇몇 여진 부족이 같은 여진으로서 신의를 저버리고 심왕 김제의 앞잡이가 된 것.

6. 심왕 김제가 누르하치에게 그가 요동에 지니고 있던 정당한 가산(家産)을 내어놓으라고 협박한 것.

7. 심왕 김제가 임명한 건주부윤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여진인들을 착복해 도탄에 빠트린 것.

이렇게 절치부심(切齒腐心)한 누르하치였으나, 이에 대한 원념은 가지고 가되 복수는 요원한 일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김제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건주여진 전체를 보듬고 나가야 할 누르하치는 더 이상 그들을 싸움터로 내몰 수는 없었다. 지금 다시 심왕 김제와 싸우기 시작한다면 몰락을 모면할 수 없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황상 폐하께 은사를 부탁하자. 우리가 안전히 영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게다.”

누르하치는 차남 다이샨(Dai an, 代善)과 사남 탕굴다이(Tangguldai, 湯古代)를 직접 황성부로 보냈고, 허균을 통해 태정제에게 하소연했다.

일시적으로 심왕 김제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그만두고 있는 태정제였으나, 여전히 그는 사실상 볼모가 된 김윤에게 심왕 김제가 손을 대지 못하도록 여러 방면으로 압력을 꾸준히 넣고 있었다.

그간 자신을 대신해 싸워온 누르하치 또한 태정제가 단칼에 내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다시 내탕금을 일부 내어 누르하치의 아들들에게 주었고, 북해대도독에게 명하여 그들이 영주로 안전히 건너갈 수 있게 교관선을 수배하고 항로를 보필해 주라고 명했다.

1611년의 새해가 밝고, 봄이 되어 북방 항로가 트이자, 누르하치의 아들들이 먼저 일부를 이끌고 영주로 떠났다. 이들은 이미 제각기 건너가 있는 영주의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땅을 개척해 자리 잡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누르하치가 나머지 가솔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는 여진인들을 이끌고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누르하치가 영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건주여진, 해서여진 할 것 없이 많은 여진인들이 다시 그의 아래에 찾아와 함께 가기를 청했다.

누르하치는 이들 모두를 거둘 수는 없었으나, 제각기 알아서 영주로 건너온다면 그곳에서 다시 받아들여 줄 것을 약속했다.

한때 그가 저항군을 지휘하며 이끌었던 사람의 숫자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으나, 그의 영웅적 활동으로 인해 여진인들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갈수록 고달파지는 요동이나 북해에서의 삶을 견뎌내느니, 누르하치를 따라 영주로 가는 것이 더욱 낫다고 판단하는 여진인들이 점차 늘어났던 것이다.

태정제는 누르하치의 출항이 점차 임박하자, 그에게 「동영주척토사(東瀛州拓土使)」라는 직함을 내리고, 그가 영주로 건너가 새로이 개척하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허락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심왕 김제는 태정제의 누르하치에 대한 배려에 불편함을 표시했으나, 그로써도 딱히 막을 방법이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차라리 그가 먼 영주로 건너가 버리면 앓던 이가 빠진 노릇이니, 속으로는 환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심왕 김제는 이 소식을 듣고 진외당숙을 쫓아 영주로 가게 허락해 달라고 사정한 김윤의 호소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여전히 심양의 군저(君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어(囹圄)의 몸이었다.

“아버님. 이제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모두 배에 승선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문득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회상에서 깨어났다. 아들 홍타이지였다. 무거운 심정인 자신과 다르게, 이 어린 아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묘한 열망이 피어올라 있었다.

“너는 영주로 가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구나.”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말에 얼굴의 표정을 굳혔지만, 담담하게 아버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는 그곳에서 영주의 그저 그런 호족으로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영주도독부 밖에는 넓디넓은 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여진인들만의 나라를 세우는 것도 꿈만은 아닐 테지요.”

홍타이지의 말에 누르하치는 흠칫 놀랐다.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로 보았던 홍타이지가 어느덧 당당하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그가 품고 있는 소망이 실현 가능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적어도 원대한 포부를 품고 도전을 즐기는 모습에서,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을 누르하치는 보았다.

1612년, 태정 23년의 초여름,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 2,000여 명을 태운 함대가 동쪽으로 출항했다. 만주족(滿洲族)이라 불리게 될 여진인들의 기나긴 신대륙 이민사의 시작이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10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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