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8장 요동흥기(遼東興起) (59/82)

제58장 요동흥기(遼東興起)

「……(중략)……대요동국(Royaume de Leunie)은 유럽에는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동방의 사정에 밝은 이들조차, 대한제국에 속한 여러 지방들 중 하나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제국 내의 복잡한 사정과 극동에 진출한 유럽인이 늘어난 것이 맞물려, 이 조용한 왕국의 존재는 이제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들은 모험심이 넘치는 개척자이자 뛰어난 상인들로, 동 시베리아 일대로 일찌감치 진출해 이슬람교도들을 앞세워 러시아의 동진을 멈추게 했었다. 그 결과 이들은 모피 무역에 상당한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고, 유럽으로 보내지고 있는 모피의 절반 이상이 요동에서 수출되고 있다.

수도인 심양(Sim ulle)에는 전통 있는 대학이 자리 잡고 있고, 이곳에서는 뛰어난 학자들이 양성되어 정부의 관료로 진출한다. 그 군대 또한 매우 강성하여 동방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 내전을 겪고 대한제국의 황제와도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이들의 고결한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다.」

―자크 에르투아(Jaques Hrtois), 《동방의 최근 사정》,

(파리:1641)

1616년

태정(太禎) 28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평안도 안주부.

요동군 7만 4천 병력과 제국군 안주 제8진위대, 평양 제10진위대 및 영녕 18진위대의 연합 병력 3만여 병력이 청천강을 둘러싸고 다툰 1616년 3월 17일의 소위 「청천강회전」은 결국 요동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요동군의 포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적의 도강을 막는다는 점에서 제국군이 유리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전투가 벌어짐에 따라 전략적인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전개되었다.

요동군은 병력 손실을 불사하고 봄철 물이 얕은 청천강을 도강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1만이 넘는 병력을 손실 본 끝에 청천강 너머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사이 10리 밖으로 후퇴해서 안주성을 둘러싸고 철벽진을 친 제국군은 전진하는 요동군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다.

요동군은 이 전투에서, 기병대와 별도로 운용하는 보병들을 10열 단위로 긴 줄을 세워 전략적인 총병 운용을 선보였다.

짧지 않았던 요동의 내전 기간 동안 충분히 실전을 겪고 단련된 요동군은, 전투 경험이 전무한 서북의 진위대들을 상대로 즉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병대는 생각보다 적의 후방을 급습하는 데 지지부진했고, 이 과정에서 기병대를 진두지휘하던 심왕세자 김홍이 전투 중 총상을 입고 결국 다음 날을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전투 자체는 원정군의 총지휘관을 맡고 있던 한의직의 지휘 아래에서 요동군이 승기를 잡은 채로 진행되었고, 결국 안주성의 방어진은 무너지고 이튿날 아침 안주성은 함락되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제국군의 병력 일부는 평양으로 퇴각을 결정하고, 한의직은 요동군을 안주성에 주둔시키고서 전투 뒤의 진열을 정비했다.

사실 한의직이 요동군을 남쪽으로 더 몰아치지 않고 안주성에 머무른 것은, 세자 김홍의 죽음에 따른 뒷수습을 제대로 하기 위한 측면이 더 컸다.

세자가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사실은 이내 요동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도 남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간 한의직과 세자를 놓고 갈라져 있던 요동군의 지휘부를 재봉합하는 문제도 시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요동군 내부의 음모로 암살되었다는 정황을 찾기는 힘들었다. 난전 중에 멀리서 날아온 총탄에 비명횡사했다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모살을 흑막에서 지휘한 한의직마저도, 자신의 수하들이 세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 아니면 전투 중의 사고로 숨을 거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의직의 명을 받고 난전 중에 적진에 뒤섞여 세자를 공격했던 수하 다섯 명 중 세 명은 교전 중 목숨을 잃었고, 남은 두 명은 진중에 돌아와서 세자를 쏘지 못했다고 한의직에게 고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세자의 죽음은 현실이었다. 모로 가나 도로 가나 서울로만 가면 될 일이다. 그 사인이 무엇이든, 결국 세자 김홍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덕에 한의직은 안주성에서 완전히 군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붙잡아 두었던 해완군 김윤의 신병을 풀어주며 은밀히 거래를 제안했다.

“사위. 세자는 전투 중 죽었네. 자네가 그간의 악연을 잊고 대업을 위해 내 힘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내가 힘을 빌려주겠네.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면 나는 주상 전하를 설득해 자네를 세자로 봉하도록 힘쓸 것이네. 주상 전하에게는 이제 아들이 없고, 왕실에 남은 핏줄은 자네뿐이니 결론은 이미 나 있네. 자네가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먼 핏줄인 바다 건너 영주의 창주공가의 자제를 모셔와 왕위에 올려야 하는데, 요동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걸세.”

언제는 붙잡아두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자신을 타이르는 장인의 꼼수에 해완군 김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누르하치의 반군에 속해서 요동의 심왕을 공격하고 다닐 때만 해도 해완군 김윤은 매일 밤마다 아버지 인양군의 원수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었다.

그런 와중에 결국 요동군에 사로잡혀 심양의 거소에 유폐되었을 때조차도, 마음속의 날카로운 칼이 절대 무뎌지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아왔던 그였다.

심왕의 왕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사실은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인질 생활이 시작되고, 한의직의 딸과 강제로 결혼하게 되면서 그의 복수심도 점차 무뎌져 갔다.

원하지 않던 결혼이었으나 부인과의 애정은 도타웠고, 누르하치마저도 영주로 건너갔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와신상담하던 김윤의 마음도 점차 무너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기회였다. 날개가 꺾인 김윤이 다시 황성부로 도망쳐 재기를 꿈꿔볼 수 있는 절호의 호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안주성 공략을 틈타 도주하려던 계획은 갑작스럽게 장인 한의직이 그를 감금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다.

좌절감에 휩싸여서 이를 갈고 있던 김윤에게 한의직이 왕위를 제안하고 나온 것은 갑작스럽다 못해 경악스러운 노릇이었다.

“장인어른. 비록 뜻하지 않게 핏줄로 맺어졌고, 지금도 원한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잘 아실 겁니다. 허나…….”

“허나?”

김윤은 표정을 굳히며 한의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게 복수가 눈앞에 온 것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백부(伯父)인 심왕 김제에게 통쾌한 일격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기껏 형제와 혈족을 죽여가며 탈취한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 이를 갈며 덤볐던 조카에게 잇게 할 수밖에 없는 김제의 심정을 생각하면 김윤은 전율이 이는 듯했다.

심왕의 자리에 자신이 오르는 것으로 김윤은 꿈에도 그리워했던 복수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한의직과 손을 잡는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왕통을 잇는 것은 마땅히 그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겠지요. 장인어른이 제 곁에서 보필해 주실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좋네. 하지만 세자는 죽었어도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네. 마땅한 공적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요동의 군민들에게 충분한 납득을 얻지 못할 걸세.”

한의직의 말에 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박당해 있었던 탓에 잔뜩 굳어 있는 몸을 움직이자 온몸에서 비명을 질려댔다.

김윤은 표정을 찡그리며 팔을 주물렀다.

한의직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런 김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그 흉중을 알기 힘든 사람이라고 김윤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제가 황상 폐하에게 입은 은혜가 한둘이 아닌데 어찌 그분에게 더 이상 욕을 보이겠습니까?”

“잘 판단하게. 자네가 황제의 체면을 세워주든 그렇지 않든 왕위는 자네의 손에 들어오게 될 걸세. 허나, 앞으로 자네가 다스리게 될 요동이 어떻게 되느냐는 달라지겠지. 다 된 밥에 코를 풀 작정이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자네를 베고 심양으로 회군하여 심왕 전하께 첩실을 들여 후계자를 생산하는데 매진하라고 진언하겠네. 운이 좋다면 뒤늦게 어린 후사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 해도 영주에서 멋모르는 허수아비 하나 불러와서 왕위에 앉혀도 되겠지. 다만 지금 자네가 조금 현명해진다면…… 몇 달 뒤에 자네는 왕세질이 되어 있겠지.”

한의직은 눈가를 좁히며 김윤을 압박해 들어왔다.

김윤은 한의직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하기도 힘든 제안임에는 분명했다.

“지금 황제가 보낸 칙사가 평양을 지나 안주를 향해 오고 있다고 하네. 뭔가 체면이 깎이지 않고 타협을 볼 수 있는 방책을 찾고자 하겠지. 어차피 황제의 군병들도 요동을 도모할 능력은 없을 터이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네. 진서에서 전쟁의 경험을 쌓은 삼남의 진위대가 북상하여 우리를 막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황성은커녕 개경에 이르지도 못할 걸세. 이런 교착 상태에서 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 그것이 이번에 자네가 할 역할이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죽은 세자에게 모든 악역을 뒤집어씌우고, 자네는 전란을 정리하는 영웅이 되는 걸세.”

한의직의 말에 김윤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김윤은 그간 부친의 복수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왔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모를 감내해 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하지만 김윤의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와 아버지 인양군, 그리고 황실의 중신인 외가 친척들, 원수인 심왕과 장인 한의직, 그들의 권력을 이양받게 될 자신까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뒤엉켜 있다 못해 잔뜩 헝클어져 버린 이 구원(舊怨)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김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황제가 보낸 칙사 최명길이 안주성에 당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본디 요동군이 청천강을 넘기 전에 도착했어야 할 최명길이었으나, 생각보다 전투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던 데다가, 진위대들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최명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요동군이 전승을 거두면 거둘수록 황제가 보낸 그의 입지는 좁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최명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당당한 풍모로 안주성의 성문으로 들어섰다.

나라가 무너질 전쟁이 아니었다. 황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요동군은 반란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를 철저히 진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문제였다.

결론은 요동에 적절한 떡을 쥐어주고 이 소란을 종식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황제의 위엄의 훼손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난점이었다.

최명길은 그러나 그런 부담을 겉으로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위압당한 채로 협상에 임하면 당연히 잃는 것이 많아질 터였다.

“황상 폐하께서는 매우 진노하여 계십니다. 어찌 심왕께서는 이런 무모한 일을 벌이셨는지요.”

간소하게 차려진 막사에 한의직과 나란히 앉자마자, 최명길은 선수 쳐서 한의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유감입니다만, 우리 요동군은 황상 폐하를 겁박하고자 군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들을 징벌하고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이었소이다. 조정은 패당을 나누어 서로 싸우기에 급급하고, 민심은 도탄에 빠져 있으니, 이것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간신배들이 가리고 있기 때문이오. 심왕께서는 이를 우려하시어 직접 군세를 일으켜 내지로 보낸 것이니, 어찌 이것이 황상 폐하를 다치게 하고자 하려는 목적이었겠소.”

한의직은 거창하게 명분을 들이대며 말했다.

현실을 보았을 때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분명했으나, 명분으로 대기에는 좋았다.

황제를 위해서 일으킨 군대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줄은 한의직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최대한 한의직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대들이 무슨 연유로 군세를 일으켰든 폐하께서 진노하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이다. 삼남의 진위대가 지금 명을 받고 대기하고 있소이다. 한마디 말만 떨어지면 언제고 북쪽으로 군병을 향하게 해서 압록강을 도로 넘어 요동을 진탕으로 휘저어 놓을 것이라, 이 말이요.”

최명길은 압박의 수위를 좀 더 높였다.

내지의 진위대를 모두 그러모아도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최명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왕도 애초에 같이 죽자고 벌인 전쟁은 아닐 터였다. 아마 요동 또한 전면전을 벌일 각오는 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 최명길은 확신하고 있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심왕께서는 폐하의 근심을 일으키고자 군대를 거병하신 것이 아니외다. 우리가 그렇게 싸울 이유는 하나도 없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평안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며 안주까지 내려 오셨소? 황제 폐하의 윤허도 받지 않고 말이요.”

“모두 세자의 뜻이었소. 원래 압록강 변에 군대를 대기하고 황제 폐하께 윤허를 받은 다음, 황성부로 당당하게 들어가 간신배들을 숙청할 생각이었소. 그러나 윤허를 받기 위한 사절을 보내기도 전에 세자가 군권을 강탈하여 공격을 명했으니 모두 세자의 잘못이지요.”

“심왕의 뜻이 세자의 뜻이 아니겠소. 그 세자가 바로 심왕의 뒤를 잊게 될 것이 아니오? 이 난국을 빠져나가려면, 심왕 세자가 마땅한 책임을 지고 벌을 받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오.”

“당연히 그렇소만, 세자 저하는 전중에서 전사하셨소이다. 죽음으로 죄를 갚았다고 해두지요.”

한의직의 덤덤한 말에 최명길의 얼굴에 순간 당혹함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심왕은 황제의 윤허 없이 내지로 군대를 옮길 생각이 없었고, 세자가 독단으로 이 일을 지휘했으나, 결국 세자는 죽었다는 논리였다.

책임을 물릴 소재가 불분명해진 데다가, 군대를 동원해 심왕을 강제로 추궁할 방법도 마땅찮으니 최명길이 사용할 수 있는 패가 줄어든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 안일한 말로 이 일을 묻어둘 수는 없소.”

“실리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여기에 돌아가신 인양군의 아드님이시자, 지금 내각재상에 앉아 있는 허균 공의 외조카 되시는 해완군 김윤 공이 종군해 계시오. 세자 저하가 돌아가셨으니 아마 다음 심왕 자리는 해완군께서 잇게 되지 않겠소?”

한의직의 말에 최명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조곤한 목소리로 한의직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내가 지금 그분을 뵐 수 있겠소?”

“그렇잖아도 곧 이곳으로 오실 것이오.”

한의직의 말대로,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해완군 김윤이 회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명길은 해완군이 어릴 때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앳된 얼굴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분명히 해완군 본인임을 최명길은 알아볼 수 있었다.

“군나리께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최명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해완군에게 읍을 했다.

해완군의 이력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해완군이 친 황제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명길은 내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한의직의 꿍꿍이가 눈에 훤히 보이긴 했지만, 잘못은 죽은 세자에게 뒤집어씌우고, 해완군을 내세워 화평을 맺는다면 황성부의 입장에서도 명분이 좋았다.

“황상 폐하와 내각의 어른들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모두들 몸 건강히 잘 계십니다. 다만 갑작스러운 충돌로 인해 마음이 많이들 근심스러우십니다.”

최명길의 말에 해완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부러 한의직과 최명길 사이의 상석에 앉았다. 회의를 자신을 중심으로 이끌어 가고자 계산된 행동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나, 한의직은 해완군을 제지하지 않았다.

“불행한 일이나 돌아가신 세자 저하께서 만용을 부리어 일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소. 황상 폐하를 뵐 낯이 없소이다.”

이미 한의직과 합의가 되어 있는 해완군 김윤은 자리에 앉자마자 세자에게 죗값을 돌렸다.

최명길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으로 해완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에라도 군세를 돌리고 폐하께 죗값을 청한다면 폐하께서도 그간의 심왕가에서 보여준 충정을 감안하실 것입니다.”

“애초에 뜻하지 않게 불미스럽게 벌어진 일이니 응당 그리해야겠지요. 허나 황상 폐하께서도 이 일로 인하여 얻으실 것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최명길은 해완군의 말에 담긴 뜻을 분명히 알아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면, 태정제는 분명히 이것을 계기 삼아 권력을 좀 더 집중시키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지방군을 숙군(肅軍)할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였다.

외부의 적이 내부를 결속시킨다는 간결한 논리였다.

이미 태정제는 진서의 왜란을 계기 삼아 내부의 권력을 한 차례 자신에게 집중시킨 적이 있었다.

“허나 이 난국에 책임이 있는 심왕 세자가 목숨을 이미 잃었다고 해도, 심양에 아무런 견책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최명길의 입장은 간결했다. 그냥 이대로 어영부영 전란을 종결짓는 것으로는 황제의 위엄에 가해질지도 모르는 손상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나와 한의직 장군은 곧 군대를 다시 물려서 심양으로 돌아가, 황성의 조정에 반하는 세력들을 요동에서 일소하고 다시금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다만 무작정 그럴 경우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요동의 민심을 위무하는 것에 곤란함이 많습니다.”

요동의 사정은 서로 익히 아는 바이다.

언제고 내지의 영향에서 떨어져 나갈 궁리만 하는 요동이었다.

적절한 타협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칙령으로 군나리께서 심왕 세질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요동의 숙정을 약속하신다면, 번왕에서 국왕으로 그 위계를 올려, 정식으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국호를 정하는 것을 황제께서 충분히 가납하실 것입니다.”

최명길은 이러한 조건으로 황제를 설득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어차피 사실상 독립되어 있던 요동이었다. 차라리 이참에 심왕이라는 모호한 번왕의 작위 대신에 요동에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해주어 해완군의 입지를 단단히 해주고, 이 모든 것을 황제의 은덕으로 돌리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했다.

사실상 이 회합에서 손해를 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곤란해진 것은 요동도, 내지도 아닌, 이 전쟁을 주도했다가 지붕 위의 닭 쫓는 신세가 될 심왕 김제와 이미 목숨을 잃은 세자 김홍뿐이었다.

이미 해완군을 등에 업고 심양으로 돌아가,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기로 결심한 한의직 또한 한 배를 탄 몸이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성총을 내려주신다면, 마땅히 사죄하여 죄인인 세자의 수급을 조정에 바치고 요동의 기강을 바로 잡아 제국의 국본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겠지요.”

해완군은 최명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1617년

태정(太禎) 29년 맹추(孟秋)

요동국(遼東國) 성경부(盛京府).

안주성의 회담 직후, 공식적으로 요동으로 돌아가 반황(反皇) 세력을 징치하라는 칙령이 요동군에 내려졌다.

세자의 죽음을 제물 삼아 요동의 반란군이 황제의 근황군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심왕의 명을 받고 출정했던 한의직은 이제, 해완군과 결탁해 황제의 명을 받은 몸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회군을 개시한 요동군은 그간 안주성에서 주둔하는 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진 숙군 작업으로 완전히 해완군과 한의직에 손안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심양에 도달해 아무런 제지 없이 성안에 들어서, 심왕 김제에게 황제의 칙령과 함께 세자의 죽음을 전했다.

심왕 김제는 격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가장 측근으로 신뢰해 마지않았던 한의직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더군다나 유일한 자신의 핏줄인 세자를 잃었다.

그 자리에서 졸도한 심왕은 결국 다시 자리에서 잃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삶에 대한 미련은 그의 숨을 오랫동안 붙어 있게 했다.

졸중(卒中)에 쓰러져 거동도 못하고 의식도 없이, 그렇게 열두 달을 심왕 김제는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그동안 해완군 김윤은 황제의 칙령을 받아 정식으로 왕세질(王世姪)의 자리에 앉았다.

요동군을 장악하고 있는 한의직을 뒤에 배경으로 삼은 김윤을 감히 반대하고 나서는 세력은 없었다.

오히려 심양의 민심은 김윤의 집권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한때 심왕 김제에 반대해서 싸웠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왕 김제의 편에 서 있었던 이들도 재빠르게 세태를 파악하고 김윤의 뒤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새롭게 부상한 권력에 바투 다가가고자 심양의 정계는 소란스러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윤은 손쉽게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부분을 한의직에게 기댄 불안한 동거이기는 했다. 다만 김윤은 장인인 한의직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지금 쥐고 있는 권세를 잃기 싫어 세자를 밀어내고 자신을 올려 세운 그였다. 그 권세가 적절히 보장되는 이상, 한의직은 경거망동하지 않을 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심왕위를 이을 것은 김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는 재빠르게 황제 태정제가 혼란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심왕이 충격으로 쓰러져 아주 거동도 못한다는 사실을 들은 태정제는 직접 나서서 심왕을 아주 폐위시키라는 조칙을 내리고, 왕세질인 김윤을 임시로 심양권지국사(瀋陽權知國事)로 인정하고, 약속한 바대로 나라를 창업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황제는 잃은 것이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이유 없이 죽어 나간 평안도의 진위대 병사들만이 헛된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감히 조정을 겨누어 병력을 일으킨 심왕 김제와 그 세자는 이제 쓰러지고 목숨을 잃었으며, 정당한 후계자인 해완군 김윤을 황제가 황은으로 감읍시켜서 병력을 심양으로 돌아가게 하여, 요동을 안정시켰다는 식으로 이번 전란은 포장되기 시작했다.

황제는 해완군의 충정을 치하해서 나라를 열 수 있도록 윤허해 주었고, 김윤은 대대로 황실에 변치 않는 충성을 맹세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황성의 입장이었다.

태정제는 아주 기세를 몰아서, 군을 개혁하는 일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 군기가 해이한 북방의 군세였다고 하더라도 요동군에게 참패한 것은 사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요동군과의 전력 격차를 실감한 태정제는 군부에 칼날을 들이대 병제 개혁을 단행했다.

조광조 시대에 이루어진 군의 개혁 이후 다시 100여 년이 지나가고 있었고, 제국군은 그간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한정된 예산으로 강병을 꾸리기 위해 태정제는 병역을 이행하지 않는 대신에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를 강화했고, 군의 병력을 대규모로 축소했다.

태정제는 「숙군칙령(肅軍勅令)」을 반포하여 전국적으로 28개 부대가 산재하고 있는 진위대를 통폐합하여, 20개로 줄일 것을 명했다.

각 진위대의 병력은 5천으로 못 박아, 육군의 전체 병력 규모를 10만으로 공식화했다.

여기에 해군 1만여 병력에 수도근위부대인 시위대의 병력 1만을 더해 총 12만의 군대를 내지에서 운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북해와 영주, 진서의 주둔군은 원칙적으로 각 지역에서 충당하는 것으로 못 박았고, 각기 그 규모를 5만을 넘지 못하도록 법령화했다.

대신 병력의 규모를 줄임으로서 생긴 자본적 여유를 태정제는 무기를 개량하고 강화하는 사업에 재투자했다.

새롭게 요동의 동맹자로 결탁한 김윤과 합의하에 요동보총의 기술을 이전받아 진위대의 기존 보총을 단계적으로 교체하게 하고, 기병 전력을 강화하며, 포병 또한 보충하게 했다.

창과 활은 무기 체계에서 완전히 배제시켰고, 병력의 훈련 과정 또한 총포(銃砲)와 기마술, 제식(制式)의 훈련을 중심으로 개편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태정제는 군부를 아주 내각에서 독립시켜서 황제 직할로 편성했고, 내각의 아무런 동의 없이 황제의 명령만으로 군대를 움직일 수 있도록 구조화시켰다.

군부대신은 이제 내각에서 선발되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태정제가 이렇게 요동과의 충돌을 계기 삼아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숙군을 단행하는 동안, 요동에서도 새롭게 권력자로 부상한 김윤이 황성과의 모종의 결탁을 유지하며 정치를 일신하기 시작했다.

심왕 김제에 대한 황제의 폐위 칙령이 떨어진 지 얼마 가지 않아,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의식을 잃고 있던 김제는 모진 목숨을 땅에 두고 승하했다.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김윤은, 정식으로 새롭게 조정을 구성하고, 요동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새롭게 이름을 고치고, 육조(六曹)를 구성했다.

그 뒤 정식으로 도읍을 심양으로 정하고, 그 정식 호칭을 성경부(盛京府)로 고쳤다.

성경부의 태안궁의 좌우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세워지고, 정식으로 의정부에서 조회를 주재하여 새로이 국명을 추렴해 올리도록 김윤은 명했다.

“본디 옛일을 상고해 볼 때, 나라의 이름은 그곳에 자리한 옛 지명에서 취해오는 것이 전례에 부합합니다. 이곳 요동에는 예로부터 옛 조선 및, 고구려와 발해, 요와 금이 있었으니, 이 중에서 마땅히 취하시는 것이 옳으실 줄 압니다.”

“조선은 제국의 옛 국명으로, 내지의 통칭이니 우리가 사용할 수가 없으며, 요와 금의 외자 국명은 황제국에나 붙일 수 있으니 이 또한 맞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이미 왕씨 고려에서 취한 바가 있고, 발해는 요동보다 지금의 북해에 강역이 있었으니 이 또한 마땅하지는 않습니다.”

국호를 둘러싼 문제는 보름이 넘게 의정부를 들썩이며 회의가 되었다.

이렇게 국호를 택하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으로 추렴된 것이, 땅 이름을 딴 「요동」과 옛 나라 이름을 딴 「발해」였다.

대진국(大辰國) 또한 마지막까지 주장되었으나, 나라를 높여 부르는 대(大)를 제외하면 외자국명으로 황제국이 아닌 왕국에는 격이 맞지 않다 하여 반려되었다.

이렇게 요동과 발해의 국명 중에 택하여 정해달라고 김윤은 황성의 태정제에게 보냈고, 태정제는 이 중에서 요동의 국호를 택해서 내려 보냈다.

태정제는 북방에 근거지를 두고 신라와 병존했던 발해의 뒤를 이은 나라로 요동이 자처하기를 원하지 않는 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이라는 국호 또한 문제가 있기는 했다.

본디 요동이라는 것은 요하(遼河)의 동쪽 땅을 중원에서 관습적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산해관 이동에서 요하의 서쪽까지의 땅 또한 점유하는 요서(遼西) 또한 강역에 포함하고 있는 나라의 이름으로는 반쪽짜리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당송(唐宋) 이래로 요동이 산해관 이동을 통칭해 부르는 용례가 정착되어 있었고, 심왕가의 심요도독부 200년 치세 동안에도 요동이라는 통칭이 정착되어 있었기에, 김윤은 이 이름이 충분히 나라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정식으로 태정제의 윤허까지 받자, 김윤은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요동국(遼東國)」의 개국을 선포했다.

심왕의 작위는 이제 폐지되고, 심왕은 요동국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심요도독부 또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요동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 체계가 완전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제국 내에서 이전의 요동의 위치가, 심양 일대의 왕으로 봉해진 심왕이 사실상 제국에서 임명한 심요대도독의 지위를 겸해 심요도독부를 통치하던 미묘한 체제였다고 하면, 새롭게 요동국이 건국됨으로 인해 대한제국 수립 이전의 명과 조선의 관계와 같은 예속되어 있으나 독립된 체제로 변모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요동은 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였고,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에게나 붙일 수 있는 조종(祖宗)의 시호를 붙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요동왕 김윤을 비롯한 요동의 신진관료들도 이것까지 내어놓으라고 황제에게 닦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리하여 공식적으로 요동은 내정·사법·군권을 포함해 외교를 제외한 모든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태정제는 정식으로 재상 허균(許筠)과 새롭게 외부대신에 보임된 최명길을 보내서 요동에 고명(誥命)을 내렸다.

김윤은 정식으로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갖추어 입고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지니고서 이들을 맞아들였다. 요동국의 정궁이 된 태안궁 평녕전(平寧殿)에 이르러 허균은 왕이 된 외조카 앞에서 황제의 고명을 선독(宣讀)했다.

“예전 삼황오제가 정치를 하매, 덕이 다하고 베푸는 것이 넓어서, 만방을 덮어 기르니, 무릇 나라를 가진 자는 내외의 사이가 없이 신하로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군장을 세워 그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여, 황제의 번병(藩屛)이 되게 하였다. 짐이 대통을 이어받아 예전의 성덕을 본받으려 한다. 그대 심양권지국사 김윤은 심왕가의 왕통의 전위를 이어받아, 그 땅을 다스려 편안케 하고, 직공(職貢)을 다하여 예를 따르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봉(封)함을 받지 못하여 빌고 청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지극히 하므로, 이에 너를 명하여 요동국왕을 삼고, 금으로 된 인을 주어, 정식으로 요동의 나라에 봉하고, 북쪽 땅의 군장이 되게 한다. 그대는 덕을 쌓는 데에 힘써서, 성현의 가르침대로 집에서는 효우하고, 윗사람에게는 충순하며, 아랫사람에게는 어질고 은혜롭게 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받고, 후손이 밝게 본받도록 하여, 길이 짐과 제실을 도우라. 땅을 열고 집을 세우는 것은 덕이 아니면 마땅한 것이 없을지니, 그리한다면 어찌 그대의 백성들이 공경하지 않겠는가.”

임금이 고명을 받고 나서, 새롭게 요동왕에 즉위한 김윤은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사은례(謝恩禮)를 행하였다.

두 세기에 걸친 심왕가가 이제 요동국의 왕가(王家)로 새로이 거듭나고, 북방에는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1617년 8월 1일의 일이었다.

1620년

태정(太禎) 32년 맹춘(孟春)

요동국(遼東國) 성경부(盛京府).

김윤이 요동국왕의 작위를 받아 나라를 창업(創業)하고 고명을 받은 것은 제국 내에서 소소한 이야기거리는 되었을 망정 논란거리는 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의 복수를 위해 반군에 가담해 결국 폐주(廢主)가 되어 죽은 금양군 김제에게 잡혀 인질 생활을 하다,

「서북변란(西北變亂)」의 와중에 급작스럽게 부상해 결국 요동국 창건의 대업을 달성한 김윤의 일화(逸話)가 인구에 회자되기는 했다.

이렇게 제국 내의 여론이 요동의 자립을 대수롭게 보지 않은 이유는, 시기가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인식이 사람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요동국 자체가 갑작스럽게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곳에 심왕가가 깃발을 꽂음으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나라의 패퇴 이후, 명나라가 채 요동에 확고한 지배를 확립하지 못한 사이, 초대 심왕인 김세훈이 명과 조선의 전란 와중에 심왕의 작위를 손에 넣음으로서 요동의 독자 노선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이후 조선이 황제국을 칭해 국호를 한국(韓國)으로 삼고, 요동에 심요도독부를 설치한 뒤에도, 심왕가는 심요대도독을 겸작(兼爵)하며 요동을 심왕부의 사영지(私領地)로 삼게 되었다.

그 후 두 세기에 걸쳐 역대의 심왕은 심양의 번왕(藩王)으로서가 아니라 심요대도독의 자격으로 요동을 통치해 왔었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런 구분은 무의미해져 갔고,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며 갈수록 사회 구조가 경직되어 가는 내지의 영향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요동의 노력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근자에 이르러서는 연공(年貢)으로 조정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황성부 조정에 지는 의무가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태정제와 전대 심왕인 폐주 금양군 사이에 긴장 관계가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간 언제고 터질지 몰랐던 불씨는 요동 내전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그 결과, 금양군이 요동군의 군사 행동을 단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당초 금양군이 군사 행동을 벌이며 목적했던 것은 요동의 자립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성부 조정을 전복시킬 의도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전황이 돌아감에 따라 그의 의도는 무산되었고, 도리어 유일한 아들이었던 세자 김홍을 죽음에 몰아넣고, 제거하려 했던 조카 김윤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해완군 김윤은 본래 황성부의 조정 및 누르하치가 이끌던 반군과 정치적·혈연적으로 긴밀한 연을 맺고 있었다.

때문에 요동과 제국군이 대치했던 소위 서북변란을 마무리 짓는데 그만큼 적임자도 없었다.

요동군을 이끌고 있던 김윤의 장인 한의직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던 비운의 왕손은 시대적 이해관계가 때마침 잘 맞아떨어짐에 따라, 본래 금양군이 꿈꿨던 요동국의 건국을 자신의 공업으로 삼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불가능해 보였던 황성부 조정과의 연대까지 이끌어냈다.

황성의 태정제와 성경의 요동왕 김윤은 전통적인 두 도읍 간의 공모 관계를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왔던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 이런 정치적인 결탁에는 희생자가 필요했고, 그 제물로는 폐주 금양군과 그 아들 김홍이 바쳐졌다.

모든 서북변란의 책임 소재는 그들에게로 돌아갔고, 금양군은 결국 왕으로 죽지도 못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동안, 황제는 그를 전격적으로 폐위시켜 버렸고, 결국 시호도 받지 못하고 능역(陵域)에 묻히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 아들 세자 김홍은 요동군을 부추겨 황제에게 반역했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시체는 버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군호(君號)와 작위(爵位)를 박탈당하고 왕가의 족보에서도 이름이 지워져 버렸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타서 운이 좋게 왕위에 앉게 된 것이 바로 요동왕 김윤이었던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하게, 그리고 아주 손쉽게 요동국왕의 자리에 앉은 김윤이었으나, 그가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생각보다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상 개국공신이 되어 버린 그 장인 한의직의 그늘이 컸기 때문이었다.

한의직의 일가는 본래 국초(國初)에 서역으로 보내졌다가 동로마까지 흘러들어 갔던 한학정의 아들인 한경조가 심양으로 귀부(歸附)해 옴에 따라 시작된 가문이었다.

심양한씨(瀋陽韓氏)의 일문은 그 뒤로 누대에 걸쳐 요동의 여러 관직에 일족의 이름이 두루 오르고, 심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가에 반열에 올라 정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본래 요동의 내란이 벌어질 무렵, 금양군이 아닌 예양군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가문과 절연한 것이나 다름없던 한의직이 금양군을 옹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덕분에 가문 전체가 기사회생(起死回生)하게 되었다.

때문에 심양한씨의 일족은 여전히 심양의 명문거족으로 행세할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강성해져 갔다.

서북변란 당시 심왕세자 김홍이 한의직에게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것도, 바로 이러한 한씨 일족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꺼꾸러뜨리고자 했던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회한 한의직은 도리어 이 과정에서 사실상 자신이 죽이려 했던 해완군 김윤을 등에 업고 요동국 창업에 일조함으로써 정치적 변신에 성공했다.

그 위치가 단단해진 한의직을 몰아내는 것은, 아직 기반이 취약한 김윤으로써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새롭게 세워진 요동국의 조정은 사실상 요동왕 김윤과 의정부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한의직을 위시한 심양한씨 사이의 연립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의직으로부터 최소한의 정치적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요동왕 김윤은 황성부의 태정제와 결탁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윤과 한의직 사이에는 큰 균열이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요동 내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이들이 분열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내전 당시,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던 예양대군을 지지하고, 반군의 선봉에 섰던 동부를 중심으로 한 「근왕당」과 금양대군을 지지하던 「혁신당」의 뿌리 깊은 반목은 여전히 요동에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던 근왕당이 요동국의 건국과 함께 다시 재부상하게 되었고, 여전히 잠복하고 있는 서부의 혁신당 일파를 누르기 위해 김윤과 한의직은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동군을 장악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는데, 금양군에 대한 향수가 짙은 요동군을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요동군에 영향력이 강한 한의직의 수완과 요동왕 김윤이 가지고 있는 명분이 동시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윤과 한의직은 서로 제각기 움직일 수 없고 발을 맞추어야 하는 전략적 결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윤은 어느 정도 이러한 정치적 조율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하자, 새로운 요동의 설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심양한씨의 지지를 바탕으로 요동 내에 남아 있는 금양군이 심어놓은 인사들을 상대로 숙정(肅正)을 단행했다.

처음으로 밀려난 것은 한의직에게조차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내는 요동군 내의 강경파들이었다.

이들은 서북변란에 동원되지 않았던 북방과 산해관 일대에 주둔해 있던 병력을 움직여 심양을 공격하려는 반정(反正)까지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손이 닿은 곳은 금양군의 정치적 위세를 등에 업고 요동의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요동도평의사사가 의정부와 육조(六曹)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밀려났고, 이차적으로 식읍(食邑)을 박탈당하고 관직에서 파면됨으로써 완전히 정계에서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빈자리는 요동내전 당시 예양대군, 그리고 인양군을 옹호하는 바람에 사실상 멸문(滅門)의 수난을 겪었던 옛 가문들의 후예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이 마무리되자, 요동의 정계는 심양한씨를 중심으로 하는 「동당(東黨)」과 김윤에 의해 다시 정계로 불러들여진 옛 근왕당 중심의 「서당(西黨)」으로 나뉘게 되었다.

김윤은 그러나 이 두 파당 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대신에, 정치적인 연대를 추구하는 소위 탕평책(蕩平策)을 국시로 삼고 정국 운영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자칫하다가는 다시 혼란으로 빠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이러한 조율 작업을 하는 동시에, 김윤은 재빠르게 기존에 폐주 금양군이 손에 쥐고 있었던 북방 모피 무역의 통로를 장악하는 데 매진했다.

사실 이 무역 거래의 지분은 실제 북방 개척에 큰 공을 세웠던 한의직이 크게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김윤은 이것을 장악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한의직이 통 크게 양보하지 않았다면, 김윤은 정치적 균형을 잃고 곤란에 빠질 수도 있을 정도로, 모험적인 행보이기도 했다.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의 두 자리를 심양한씨에게 내어주는 대가로 얻어낸 이 북륙 무역의 관할권을 이용해, 김윤은 내탕금(內帑金)을 쌓기 시작했다.

자금 운용의 중요성을 깨달은 김윤은, 기존에 요동도평의사사에 딸려 있던 은행국(銀行局)을 확대 재개편하여 「왕립요동은행(王立遼東銀行)」을 세웠다.

「왕립(王立)」이라는 단어는 이때 처음으로 사용되게 되었는데, 기존에 드물게 쓰이던 어립(御立)이란 단어의 격을 높이는 동시에, 요동국왕이 의정부의 영향에서 독립해 직접 세우고 전권을 지니는 관청이라는 의미를 적극 부여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용어였다.

김윤은 왕립요동은행의 설립과 동시에 기존에 발행하던 요동폐(遼東幣)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새롭게 「환」을 단위로 하는 화폐제도를 출범시켰다.

기본 단위인 환의 위에는 관(貫), 아래로는 전(錢)이라는 단위가 도입되었다.

김윤이 수립한 화폐제도는 금·은 복본위제도였는데, 기본 단위인 환은 은화(銀貨)로 발행되고, 10환을 금화(金貨) 1관으로 환산하도록 법제화시켰다.

보조 단위인 동화 100전은 은화 1환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했는데, 동화 1,000전=은화 10환=금화 1관의 고정 비율이 정해졌다.

이 새로운 화폐는 통칭 「요동화(遼東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기존의 요동폐는 새롭게 왕립요동은행의 산하기관으로 설립된 조폐창(造幣倉)의 감독하에 새로운 요동화로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요동의 경제적인 목줄을 틀어쥐는 데 성공한 김윤은, 조심스럽게 다음 단계의 개혁 작업에 착수했는데, 바로 심양에서 팔려서 내지로 옮겨진 다음에 외국으로 수출되던 모피 무역의 경로를, 내지를 생략하고 바로 요동에서 수출이 가능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요동에는 모피뿐만 아니라, 급속도로 성장하는 제조업이 부흥하고 있었고, 이러한 물품을 보다 이윤을 남기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수출 창구를 손에 쥐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요동과 내지 사이에는 관세가 없었고, 때문에 물건이 요동에서 내지로 옮겨져 예성·목포·동래 등을 통해 수출되면 관세는 심양이 아닌 황성의 국고에 고스란히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직접 관세를 물릴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지의 항구들에 지지 않는 새로운 요동만의 항구가 필요했다.

“과인이 하는 일을 장인께서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주신다면, 내 새롭게 건설되는 항구의 이권을 각별히 보장해 드리겠소.”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신료들의 견제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것은 김윤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새로운 항구의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의직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처음에는 김윤이 새로운 항구를 건설해 자금력을 한층 더 확보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한의직이었으나, 새롭게 건설되는 항구에서 나오게 될 이권을 한의직에게도 나누어주겠다는 말에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국왕 김윤의 내탕금과 의정부에서 관할하는 요동국의 국고(國庫)에서 막대한 자금이 추렴되어 새 항구 건설에 투입이 예정되었다.

새롭게 항만이 개발될 위치는 물색 끝에 요동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여순구(旅順口)가 낙점되었다.

천혜의 항만을 보유하고 있는 이 한적한 시골 고을은, 즉각 여순부(旅順府)로 고을의 등호가 승급되었다.

이곳의 부윤(府尹)으로 한의직의 조카인 한재흠(韓載欽)이 파견되고, 이내 막대한 인력이 투입되어 항구가 축조되기 시작했다.

김윤은 이곳의 국유지를 헐값에 심양한씨의 일족에게 넘겨주었고, 항구가 개발되자 이들은 이윤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한의직은 항만 개발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김윤의 뒤를 봐주었고, 조정의 대신들을 움직여 여순항의 개발에 돈을 대도록 만들었다.

여순항의 정지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자, 김윤은 모피를 비롯한 요동국에서 생산된 물품을 외부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순항을 거치도록 법령을 통과시켰다.

예외가 되는 것은 택주(澤州)를 통해 북해로 반출되는 물품과 의주(義州)를 통해 내지로 들어가는 물품이었는데, 이곳에는 관세를 물리지 않는 대신 철저하게 의정부의 인가를 받은 상인들만 물자를 운송할 수 있도록 했다.

북륙의 각지로부터 반입된 모피는 여순에 모아져 일괄적으로 새롭게 설립된 「여순항관상맹(旅順港關商盟)」을 통해서 수출되도록 제도화되었다.

여순상맹의 지분은 국왕을 대리해 왕립요동은행이 51%, 한의직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이 40%를 가지고, 나머지 9%는 일반 시중에 매각되었다.

이들은 일괄적으로 모피를 수출할 때 관세를 왕립요동은행에 납세했다.

마지막으로 김윤이 손을 댄 것은, 요동내전 당시에 금양군에 의해 문이 닫힌 뒤로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던 어립심양문리과대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김윤은 대학의 이름을 「성경왕립대학」으로 고치고 흩어진 교원을 다시 불러 모으고 학생들을 모집해 다시 문을 열도록 했다.

김윤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 심양대학이 문이 닫혔을 때 요동에서 도망쳐 진서까지 흘러들어 갔던 대학자 민응로 또한 이 소식을 듣고 요동으로 귀환해 왔다.

“스승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거의 이십여 년만에 요동에 돌아온 민응로는, 어느덧 귀밑이 하얗게 샐 정도로 늙어 있었다.

이 노학자는 김윤의 앞에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전하, 전하, 소신 이날을 맞이하게 되니 오늘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어도 한끝의 미련이 없나이다.”

김윤은 민응로의 어깨를 부축해 직접 일으켜 세우며, 옛 스승을 다독였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스승께서는 학교로 돌아가시어 그곳의 대사성을 맡아 주십시오.”

대사성(大司成)이라 함은, 곧 대학의 총장(總長)이었다.

민응로를 기용하여 왕립대학의 총장에 앉힌 뒤에, 김윤은 대학의 학제 개편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왕립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 단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입인 성경(盛京)을 위시한 요양·건주·동녕·금주·여순의 5부(府)에 3년제의 예비학교(豫備學校)를 세웠다.

통칭 예교(豫校)라고 불리게 된 이 학교를 거친 학생들만이 입학 시험을 거쳐 왕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김윤은 과거제도에도 손을 대서 과거를 왕립대학의 졸업 시험으로 대체하도록 했는데, 때문에 내지와 다르게 이 왕립대학의 졸업 시험이 대과(大科)로 불리게 되었다.

대과를 치를 자격이 왕립대학의 졸업자에 한정되었으므로, 이는 곧 왕립대학을 졸업한 자만이 요동국의 관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전과 같이 내지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기용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요동국만의 독자적인 관료 체계를 운용하는 기틀로 삼고자 김윤은 이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렇게 왕위에 즉위한 뒤 몇 년간, 김윤은 요동의 정치를 완전히 재정비하는 데에 성공했다.

국왕인 김윤을 정점으로, 기존의 행정을 전담하던 도평의사사를 흡수 확대한 의정부(議政府)는 육조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 의정부에는 한의직과 같은 국왕을 견제할 수 있는 신료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김윤은 이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왕립요동은행과 성경왕립대학같은 직속 기구들을 확보하고 직접 감독했다.

이러한 상호 견제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재빠르게 요동에 자리 잡아 갔고, 지난 20여 년간 내전과 변란에 시달려 왔던 나라의 정세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요동의 백성들은 새로운 왕의 치세를 진심으로 환영하게 되었다.

1622년

태정(太禎) 34년 맹하(孟夏)

요동국(遼東國) 경조로(京兆路) 성경부(盛京府).

태정 33년(1621) 7월 1일, 요동의 새로운 행정 제도가 왕령으로 선포되었다.

기존의 심요도독부 산하의 부(府)·군(郡)·진(鎭)·보(堡)로 나뉘어 있던 제도를 혁파하고, 새 왕조에 걸맞는 행정 계통을 수립하려 한 것이었다.

요동국의 전체를 7로(路)와 1계(界)로 나누어, 각 로(路)에는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고, 계(界)에는 병마사(兵馬使)를 파견하도록 했다.

도읍인 성경부를 중심으로는 경조로(京兆路)를 설치하고, 남쪽의 요동반도에는 여순부를 수부(首府)로 삼아 남양로(南洋路)를 두고, 동쪽에는 건주부를 수부로 삼아 동림로(東林路), 서쪽에는 금주부(錦州府)를 수부로 하여 안서로(安西路), 북쪽에는 철령군(鐵嶺郡)을 철주부(鐵州府)로 고쳐 강북로(江北路)를 두었다.

이 외에도 경조로 남쪽의 요양부를 중심으로 경남로(京南路)를 두고, 경남로와 동림로 사이에 동녕군을 수부로 삼아 동녕로(東寧路)를 설치했다.

이 7로에 속한 지역에는 기존의 진과 보를 모두 폐지하고, 일괄적으로 수부는 부(府)로, 일반 고을은 군(郡)으로 만들었다.

금양군의 시절에 철주부 너머로 「북륙임도」를 중심으로 개척된 북륙 지역에는 북계(北界)를 설치하여 요동군의 관할하에 두었는데, 요동육군의 부장(副長) 계급에 해당하는 이를 병마사(兵馬使)로 파견하여 행정과 북방의 방비를 담당하도록 결정되었다.

이곳에는 일반적인 군이 설치되지 않고, 진과 보를 여전히 두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요동국 전체적으로 호적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경조로 88만인, 경남로 65만인, 동녕로 48만인, 남양로 54만인, 동림로 35만인, 안서로 70만인, 강북로 29만인, 북계 18만인을 도합하여 7로 1계의 전체 인구가 400만여 명이었다.

호적에 포함되지 않고 여전히 북계와 강북로, 동림로 등에 잡거하는 수렵민들의 숫자를 포함한다면 요동국 경내(境內)의 인구는 500만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은 당대의 내지의 인구 2,800만여 명, 진서의 인구 700만여 명에 비하면 적은 숫자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가, 현 심왕의 증조부 되는 경흥왕 김진영이 몽골과 전쟁을 치른 때의 심요도독부 관할 내의 전체 인구가 180만 남짓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0년 사이에 그 인구가 두 배가 넘게 불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인구가 급증한 저간의 사정에는 생활이 안정됨에 따라 요동의 자체적인 인구성장이 있었던 것도 있고, 또한 호적 조사가 예전에 비해 좀 더 치밀하게 수행됨에 따라 그간 잡히지 않았던 인구가 계산된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큰 요인은, 바로 일자리를 찾거나 빈 땅을 찾아서 요동으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이주 행렬에 있었다.

특히 이런 추세는 요동내전이 종식되고 요동의 정치가 안정된 뒤로부터 더욱 거세졌는데, 많은 인구를 필요로 했던 요동에서는 이를 크게 제재하지 않았다.

그중 많은 이들이 인구압에 시달리고 있는 내지의 삼남(三南)에서 왔고, 또 적지 않은 숫자의 명나라 한인(漢人)들이 만력제(萬曆帝) 치하의 폭정(暴政)을 피해 요동으로 흘러들어 왔다.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요동에서는 꾸준히 이주를 받아들여 왔었다.

이들은 주로 큰 성읍에 자리를 잡고,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제조업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유리·인쇄·도자기·직물·제지 등의 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성경부의 동쪽에 있는 무순(撫順)을 중심으로 한 석탄 채굴 등의 광업(鑛業)에도 많은 이민자들이 종사했다.

서장섭(徐壯燮) 또한 그렇게 요동으로 새롭게 흘러들어 온 이민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영월 일대의 산골 출신으로, 열다섯 나이에 경상도 예천으로 데릴사위로 장가를 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기를 굽는 법을 배우고, 석공(石工)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생활이 좀체 변변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일찍이 처자를 부양해야 했기에, 군역을 지는 대신에 군포(軍布)를 내고 병역을 빼는 수밖에 없었는데, 빈한한 생활에서 다른 세금과 함께 군포를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던 와중에 동리에서 금전 관계로 문제가 생겨 곤란한 지경이 되었고, 결국 요동으로 가족을 이끌고 야반도주를 감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장섭이 요동에 흘러들어 온 것은, 아직 서북변란이 일어나기 전으로, 막 요동내전이 끝나가던 때였다.

내전의 혼란함을 틈타 심양에 자리 잡은 서장섭은, 성 밖의 오두막에서 살면서 어렵사리 심양의 도자기 공방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수입 자체는 예천에서 살 때보다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지만, 내전의 와중이라 세금 부담이 덜했고, 요동의 호적에도 이름이 오르지 않아 군역에 동원되지도 않았기에 서장섭은 큰 근심 없이 일할 수 있었다.

평생 이렇게 도공(陶工)으로 남게 될 수도 있었던 서장섭에게 기회가 온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내전이 종식되고, 요동의 상업이 다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됨에 따라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간 기술을 충분히 닦아놓았던 서장섭은 독립하여 공방을 차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심양의 남쪽을 지나는 혼하(渾河)에 면한 곳에 조그마한 공방을 차렸다.

“빚은 잔뜩 지고, 호적에도 이름이 올라 이제 세금도 내게 생겼으니 앞으로 살림을 어찌 꾸려 나갈까요. 아이가 벌써 여덟인 걸요.”

의기양양하게 공방을 차린 서장섭이었으나, 그가 기대했던 수익은 좀체 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밤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서장섭을 타박했다.

문제는 서장섭과 같이 공방을 독립적으로 차리고 나선 장인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도자기를 굽는데 필수적인 원료인 고령토(高嶺土)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주로 내지의 남쪽에서 산출되는 고령토를 수천 리 떨어진 요동까지 실어오면 그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서장섭과 같은 소규모의 공방에서는 그 고령토를 매입해 도자기를 굽고 나면 수익이 나기는커녕 손해 보기가 일쑤였다.

공방을 차린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서장섭은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부인이 앓아눕게 되었다.

고기를 사다가 먹일 형편이 되지 않았던 서장섭은, 근처에 있던 도축장에서 소뼈를 사다가 거기에 붙은 얼마 안 되는 힘줄 따위를 부인에게 먹였다. 그러나 부인의 병세는 좀체 호전되지 않았다.

“에이, 제기랄!”

서장섭은 공방을 닫을 결심을 하고, 온갖 공방의 집기들을 모아다가 고로에 넣고 태워 버렸다. 그중에는 부인에게 먹이고 남은 소뼈도 들어 있었다.

겨우 분을 삭이고, 고용인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고로를 정리하러 들어간 서장섭은, 거기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소뼈와 고령토를 던져 넣은 곳에 하얀 자기(磁器) 덩어리가 구워져 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장섭은 도축장에서 버리는 뼈를 잔뜩 얻어다가 고령토와 화강암을 넣고 구워 보았고, 이내 자기가 구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인, 이제 살았소. 우리는 살았단 말이요!”

서장섭은 흥분해서 집으로 달려와 부인에게 외쳤다.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부인은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서장섭에게 앓는 소리를 했지만, 서장섭의 귀에는 더 이상 그것이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내보냈던 공방의 장인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서장섭은 비싼 고령토의 비율을 줄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뼈를 많이 넣어 자기를 일부 생산해 보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기존 도자기의 반값으로 생산된 서장섭의 자기는, 싼값에 매물로 내어놓을 수 있었고, 이내 시장에서는 반향이 오기 시작했다.

도자기는 생산량이 많은 내지 및 중국에서도 민초들이 쉽게 가질 수는 없는 고급 물품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 도자기 산업이 정착된 요동이나, 아직 이를 만드는 기술이 없는 서양에서는 사치품에 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은 반으로 줄였음에도 품질에는 큰 차이가 없는 서장섭의 자기는 이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뼈를 섞어 굽는다고 해서 「골회자기(骨灰磁器)」라는 이름이 붙은 서장섭의 자기는 요동을 시작으로 점차 외부로까지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돈이 모이기 시작한 서장섭은, 좋은 의원을 수배해서 부인의 병도 치료하고 이제 막 장성하기 시작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때마침 서북변란이 종식되고, 요동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 정치가 안정되면서 서장섭은 좋은 투자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심양에 자리했던 공방을 요양(遼陽)으로 옮겨 큰 규모로 확장했다.

「요양서가자기(骨灰徐家磁器)」라는 상호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장섭은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보다 고급의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채색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알려진 화학 지식을 습득한 선비들을 초빙해 기술을 배우고, 유약을 개발하는 일에 전념했다.

이내 서장섭은 골회자기에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채색 자기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것이 호평을 받음에 따라서 요동에서 손꼽히는 거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요동왕 김윤도 서장섭의 자기를 보고 감탄하여, 그를 초청해 칭찬을 마지않았을 정도였다.

“과인이 보기에도 이 자기의 품질이 매우 훌륭한 데다가, 천하에서 그대만이 빚어낼 수 있으니 우리 요동에도 복된 일이다. 앞으로 궁중과 관청에도 이 자기를 납입하도록 하라.”

왕실에까지 자기를 납품하게 됨에 따라, 서장섭의 명성은 치솟기 시작했다.

김윤은 그에게 요동 최초로 명장(明匠)에게 주는 국장(國匠)의 칭호를 주었다. 나라에서 살펴주어야 할 뛰어난 장인이라는 의미였다.

국장으로 불리게 된 서장섭에게는 자연스럽게 부와 명예도 뒤따라왔다.

그는 자기 사업에서 축적한 돈을 바탕으로 직접 뼈를 싼값에 조달하기 위해 요양 서쪽에 막대한 토지를 사들여 목장을 경영하기 시작했고, 자기의 원료가 되는 풍화화강암과 고령토를 요동 내에서 구하기 위해 광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3남 5녀 모두에게 좋은 선생을 붙여주고 공부시키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장남인 서수형(徐修衡)은 서장섭의 일을 도우며 공방을 물려받게 되었고, 차남인 서수직(徐修織)은 요양예교를 나와 왕립대학으로 진학해 관계(官界)로 진출했다.

막내아들인 서수민(徐修旼)은 요동무관학교에 진학해 요동해군의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서장섭은 다섯 딸들을 모두 요동의 관계와 상계의 주요 가문들과 전략적으로 혼인 시켰는데, 그중 미모가 빼어나고 기품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둘째 딸 미령(美怜)은 정계의 거물인 한의직의 손자인 한재응(韓渽應)에게 시집갔다.

이 시기를 전후해 요동에서 사업을 벌여 성장하기 시작한 인물은 비단 서장섭뿐만은 아니었다.

모피 가공과 직물공업에서는 왕양(王暘)이라는 명나라 산동 출신의 이민자가 크게 성공해, 주로 명나라를 교역 상대로 삼아 서쪽 안서로 금주부에서 그 사업을 번창시켰다.

유리공업에는 일찌감치 심양에 자리 잡은 명가(名家)들이 성경부의 서문을 중심으로 뻗은 서문로(西門路)에 자리 잡아 심양유리의 명성을 이어갔다.

요동이 금은복본위제로 전환하던 시점에 금광을 개발해 큰 이익을 얻은 안항로(安恒露)는 요동 광업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이러한 요동 공업의 부상과 더불어,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무역을 행하는 거상들이 성경과 여순을 중심으로 출현하기 시작했고, 내지의 상인들과 견주어 소위 「요상(遼商)」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요동에서 이렇게 상업자본의 출현과 함께 부를 쌓기 시작한 것은, 공인들과 상인들 뿐만은 아니었다.

요동은 한랭한 기후 탓에 벼 같은 작물 농업의 생산성이 낮았다. 때문에 일찌감치 요동에서는 목축업과 특용작물의 위주의 농업이 크게 성행했고, 주로 재배되는 곡물 또한 쌀이 아닌 밀과 보리가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소규모의 자영농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지방의 토지는 대부분 거대한 목장(牧場)이나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농지 및 목축지는 소규모의 부농(富農) 및 지주들이 점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토지 자본을 근간으로 한 지방의 유지 계급으로 손쉽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점차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행정에도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신사(紳士)」라 불리는 계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자제들은 거의가 각 로의 수부(首府)에 설치된 예비학교, 즉 예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중 적지 않은 숫자가 성경왕립대학에 진학해 관료층으로의 진입을 노리게 된다.

요동국의 수립과 함께 시작된 요동왕 김윤의 치세하에서 요동내전과 서북변란 등의 혼란기에 무너진 기존 질서를 대체해 이러한 금권계층(金權階層)이 등장하게 되었고, 요동에서 갈수록 자본의 중요성은 증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극동의 상공업 중심지는 내지에서 점차 근대적인 자본이 등장하기 시작한 요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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