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장 영주지동(瀛洲之東)
「백 년 전만 하더라도 평화롭기 그지없고 세상의 다른 곳으로부터 은폐되어 있던 이 대륙은, 이제 모든 인종과 모든 문명의 각축장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동쪽 해안에서 서쪽 해안까지 횡단하는 데 성공한―이보다 몇 해 전에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의 횡단은 엔치나(Encina, 영주)의 테쿤츠(Tekunz, 대곡) 백작이 달성했다. 횡단 자체로만 놓고 보면 보아허르트는 두 번째이다.―네덜란드의 탐험가 판 던 보아허르트(H. M. van den Bogaert)는 그의 여행기에서 그가 3년 반 동안 마주쳤던 민족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동쪽 해안가에 난립한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착지로부터 시작해 호안가에 면한 모호크인과 휴런인들의 영토를 종단해…… 강성한 나라를 일으킨 만주인들의 넓은 토지를 지나 높고 험한 산맥을 넘어서면 대륙의 서부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일구어낸 한국인들의 영토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판 던 보아허르트는 그의 위대한 탐험해서 들은 언어의 숫자가 78개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그중 32개는 백 수십 년 전에는 이 땅에서는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말이었다.」
―헤르만 폰 아우트리츠, 《신대륙 풍물지》,
(함부르크:1650)
1628년 맹동(孟冬)
후금국(Amaga Aisin Gurun) 천경(天京, Abkai―Gemun).
1628년의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느 해와 다를 것 없는 해였으나, 유난히 서늘했던 여름은 일찍 물러가고, 가을이 길었다.
그러나 춥고 혹독한 겨울을 대비해야 하는 만주족의 이주민들은 포근한 가을을 그다지 즐길 수 없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이주민들을 대동하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지도 어느덧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누르하치의 깃발 아래 신대륙으로 넘어온 여진족의 숫자는 물경 이십만을 훌쩍 넘어서 삼십만에 가까웠다.
그중 일부는 누르하치가 아직 요동의 폐주 금녕군과 아귀다툼을 하던 때에 넘어온 이들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최근에 와서야 신대륙에 기회가 많다는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옮겨오기로 결심한 이들이었다.
시기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북해와 요동에 넓게 퍼져 살던 여진족들은 영주로 건너갈 충분한 사정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요동의 내전이 결정적이었으나, 실상 소빙기가 찾아옴에 따라 북방의 한지(寒地)에 터전을 꾸리고 있던 여진족들의 생계는 갈수록 곤란해져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모피 수렵의 엽사로 활동하는 것조차, 갈수록 모피 무역이 대규모 상단에 의한 조직적인 규모로 발전해 감에 따라 그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영주로 건너갈 결심을 했을 무렵 북해와 요동, 혹은 함경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의 인구는 도합 40만에 불과했다.
제국에 복속하지 않고 경계 지대에서 약탈과 수렵으로 생계를 잇던 해서여진 일부와 야인여진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 숫자는 60만을 넘지 않았을 터였다.
그중에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지난 30여 년간 영주로 건너온 것이었다.
그간 함주부나 영안부에서 출항해 영주도독부로 향하는 북방 항로의 선편에는 여진인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개중 일부는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기도 하고, 혹은 괴혈병을 비롯한 오랜 선상 생활에 수반되는 각종 질병을 앓아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기도 했으나, 대개는 희망 하나로 마음을 부여잡고 바다를 건너왔다.
대양을 건너는 배는 크기가 작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보통 100명 전후의 인원으로 항해를 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이 교관선들은 보통 300명의 승객을 태우기 일쑤가 되었고, 그중 대부분이 여진인들이었다.
매년 수천 명가량 꾸준히 건너온 여진인들은 제각기 영주에 짐을 풀고 누르하치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일부는 누르하치의 아래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넓은 개활지(開豁地)를 직접 개척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진인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 들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영주에 건너와서도 소수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창주공 해성군 김주현이 신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고, 황제의 명으로 영주도독부가 설치된 지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긴 해안선의 여기저기에 매우 작은 규모로 형성되었던 정착촌은 제각기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도로가 닦이고, 성곽이 축조되었다.
영주의 개척이 시작된 지도 물경 140여 년을 바라보는 지금은 영주의 인구가 80만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해안가에 있던 원주민들을 몰아내며 확장을 거듭했고, 특히 남쪽 해안의 온화한 지역에는 대규모 농업이 번성하게 되었다.
먼저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선주민들을 대개의 경우 비타협적으로 몰아낸 결과였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해서 자기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는 지난 백여 년간 영주 곳곳에서 자행되어 왔는데, 면역이 없는 구대륙의 질병에 의해 희생된 원주민 숫자에 버금가게, 원래 살던 땅에서 쫓겨나 죽음으로 내몰린 원주민 숫자도 적지 않았다.
아라곤의 상인들이 칼리포르니아(California)라 이름 붙인 반도와 그 북쪽의 해안에는, 영주도독부에서 설치한 남해도(南海道)와 정안도(靜安道)의 두 도가 있었다.
1500년대 후반부터 하나둘씩 설치되기 시작한 영주도독부의 도(道)들은 이즘에 이르러서는 가장 북쪽의 연양도(沿洋道)에서 가장 남쪽의 남해도에 이르기까지 총 7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넓고 비옥한 분지와 따뜻한 기후를 가진 정안도는 그야말로 곡창지대였고, 일찌감치 이곳으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한 이들은 모피 수렵을 포기하고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영주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쌀을 생산하기에도 적합한 기후와 토질을 가지고 있었고, 빈 땅이 천지에 널려 있다 보니 사람들이 앞다투어 건너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형성된 대농장들에는, 원주민들이 매우 헐은 품삯을 받고 노예에 준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경작 농업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갈수록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영주군에 의해 땅에서 내몰리거나 혹은 저항하다가 사로잡히기 일쑤였고, 그 결과 자유를 잃고 영주군과 매우 밀접하게 결탁하고 있는 조선인, 혹은 진서·유구인의 대농장에서 착취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이주민 대지주들은 손쉽게 대량으로 쌀을 비롯한 곡물들을 생산해 멀리는 바다를 건너 식량이 귀한 요동과 같은 지역으로 수출했고, 가깝게는 농업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고 모피 수렵이나 목축에 의존하는 창주부 같은 영주도독부의 북쪽 지역에 팔았다.
문제는 여진인들이 영주에 들어왔을 때는, 쓸 만한 땅은 이런 기존 이민자들의 손에 다 넘어가 있어서 사실상 별 볼일 없는 토지만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중 적지 않은 숫자가 빚만 잔뜩 지고 스스로 대지주에게 노동력을 팔아 원주민들과 같이 노동하며 혹사당하는 지경이었다.
누르하치는 영주에 건너왔을 때, 이곳에 정착하는 것이 그다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해안 지대는 이미 무주공산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곳에서도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대지주들이 강력한 연합 관계를 형성하고 영주도독부 및 창주공가(蒼州公家)와 같은 개척 1세대의 귀족 집안과 결탁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새롭게 건너온 여진족들은 그저 싼값에 부릴 수 있는 노동력에 불과했고, 누르하치의 존재는 거슬리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내 정말 도와드리고 싶소만, 알다시피 북쪽에는 일찌감치 정착한 이들이 모피 무역이나 목축업에 견고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남쪽에는 쓸 만한 토지를 모두 대지주들이 차지해 남는 땅이 없으니, 손을 써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구려.”
누르하치는 영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움을 얻고자 창주공 김면(金沔)을 찾아갔었다.
사실상 본토에서 부임해 와 3년가량 임기만 채우고 돌아가는 영주대도독보다도, 영주를 개척한 초대 창주공 김주현의 증손자이자, 황제로 받은 특권이 막대한 김면이 영주도독부를 움직이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면은 여진인들이 자꾸 도래해 오는 것이 곤란스럽다는 눈치였다.
오는 것이 그렇게 반갑지도 않은데, 누르하치의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 달갑지 않다는 소리였다.
누르하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껏 희망을 품고 만리창파를 건너왔다. 초기에 건너온 여진인들은 일부 좋은 정착지를 손에 넣고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헐값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아무도 가지 않는 동쪽의 광막한 사막지대에 가까운 척박한 토지로 밀려나고 있었다.
“일을 쉽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여기서도 우리는 천덕꾸러기가 되었구나.”
누르하치의 한숨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를 따르는 막료들도 힘이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주로 건너와서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가고 있을 때, 아들 홍타이지가 누르하치를 찾아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대간을 넘어 동쪽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일찌감치 영주로 건너온 여진인들 중, 모피 수렵에 종사해 동쪽 산맥 너머를 드나들던 사람들이 산맥 너머에 드넓은 목초지가 풍성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곳은 영주도독부의 권한도 닿지 않는 곳이니, 일족을 이끌고 산을 넘어가 정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홍타이지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누르하치를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해안에서 몇 백 리를 들어가면 거대한 첩산(疊山)이 펼쳐져 있었고, 영주 사람들은 이 높고 험준한 산맥을 동령대간(東嶺大幹, 실제 역사에서의 로키산맥)이라 불렀다.
동령(東嶺)이란 이름은, 이 험준한 산맥에서도 그나마 사람이 건너갈 만한 고개에 붙은 이름이었다.
이 구불구불한 산로(山路)를 따라 모피 수렵꾼들이 철마다 드물게 산을 넘어가곤 했다.
이 동령을 넘어서면, 인적이 드물고 광활한 대평원이 펼쳐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숲이 드물어지기에 수렵꾼들은 멀리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 동쪽의 드넓은 땅의 존재는 익히 알려져 있었고, 홍타이지는 그곳을 눈독에 들인 것이었다.
영주도독부의 북쪽은 동령대간에 의해 경계가 지어져 있었고, 남쪽은 남동쪽에 자리한 거대한 남막(南漠)이라 불리는 사막지대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만약 동령대간을 넘어서서 그 동쪽의 땅을 개척해 나간다면, 사실상 누르하치와 여진족들은 간섭 없이 독립된 생활을 영유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으로서는 네 말이 가장 귀에 들어오는구나. 홍타이지, 네가 먼저 일부를 이끌고 동령을 건너가 보도록 하여라. 겨울이 오기 전에 일찌감치 건너가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남은 이들을 먹이고 있을 방법을 궁리해 봐야겠다.”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에게 수백의 장정을 딸려 동령대간의 너머로 보냈다.
남은 여진족 이민자들 또한 그들이 전해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입에 풀칠은 해야 했기에, 누르하치는 그동안 창주공을 비롯한 영주의 유지들에게 식량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비참함과 분노를 느꼈지만, 누르하치는 좀 더 마음을 다스리고 버티기로 했다. 내전에서 패해 매우 절망스러운 심정이 되었을 때, 누르하치를 찾아왔던 라마교 수도승은 말했었다.
“제자들이 문수보살께 부처의 세계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문수보살께서는 대답하시길, 여래의 세계는 깊고 광대하여 오로지 부처님만의 세계라고 가르치시며, 그 지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데 묶어 지나가기에, 부처의 세계는 과거의 업도 없고, 현재의 번뇌도 없고, 미래의 적멸도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사님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온갖 번뇌와 고통을 겪게 마련인데, 이는 과거에도 있어 왔고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한 번의 정념에 휩쓸려 스스로를 괴롭히면 그 자신만을 갉아 먹는 것일 뿐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고통스러움의 연속이니, 지금이라고 유난히 힘든 것이 아니오,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길 때조차 고통은 곁에 있을 것입니다.”
누르하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가진 신념이 아직 자신의 마음속에 머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삶에 당연히 따라오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고. 유난히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고. 그러하니 묵묵히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행(行)하리라고.
누르하치는 그래서 분노하지도 않고, 안달을 내지도 않았다.
그는 말없이 동요하는 여진족들을 달래며 홍타이지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겨울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봄이 되어 길이 열리자 홍타이지는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아버지 누르하치를 껴안았다.
“초지는 넓고, 짐승은 많습니다. 겨울이 매섭기는 하나, 그 추위가 우리 고향땅과 같으니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말과 소는 금방 자라날 것이고, 백 리 천 리를 나아가도 인적이 매우 드무니 빈 땅이나 다름없습니다.”
홍타이지의 말에 누르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먼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었다. 험하다고는 하나 산맥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봄이 끝나기 전에 많은 여진족들이 동령을 넘어갔다. 누르하치도 그 행렬의 가운데에 있었다.
영주대도독과 창주공 김면은 동령 너머에서 누르하치가 넓힌 땅만큼 모두 누르하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인가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도착하게 될 여진족들이 안전하게 동령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돌봐주는 대가로 5년 뒤부터 누르하치가 도독부에 세폐(歲幣)를 내기로 약정을 맺었다.
그들은 사실상 험준한 동령대간 너머의 토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농사를 짓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겨울은 지나치게 춥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을 누르하치가 어떻게 하든, 사실 그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갈수록 숫자가 불어 영주의 질서를 흔들 우려가 있는 여진족들이 알아서 동령 너머로 사라져 준다면,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었다.
그렇게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따라 동령 너머로 하나둘씩 건너갔다.
그 전후로 영주에 건너왔던 여진족 30만여 명 중 총 24만이 동령의 너머로 건너갔다.
건너가지 않은 이들은 제각기 영주의 기존 사회에 흡수되어 살아가게 되었다.
매우 적은 숫자의 여진인들은 어렵게 자리 잡아 상인 혹은 지주로 성공하기도 했고, 반대로 극단적인 경우는 대농장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착취당하며 노예나 다름없이 살아가기도 했다.
대부분은 어렵게 구한 손바닥만 한 농장과 목장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살아갔다.
그렇게 누르하치를 따라가지 않은 여진인들은 점차 영주의 사회에 동화되어 사라져 갔다.
동령대간의 서쪽, 즉 영주도독부의 관할지에 남지 않은 여진인들은 숫자가 준 대신 단단한 결속력을 얻었다.
그들은 누르하치의 일가에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고 있었다. 산맥을 넘어가서 누르하치는 휘하의 여진족들을 팔기(八旗)로 나누었다.
드넓은 목초지에 들어선 팔기는 제각기 남북으로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건너온 말의 숫자는 사람의 숫자에 반의반도 되지 않았고, 소와 양의 숫자는 그보다 적었다. 때문에 이들은 당분간 패물을 팔아가며 산맥 너머 영주에서 식량을 사오고, 수렵을 하고, 필사적으로 말과 소의 새끼를 불리는 혹독한 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5년이 지나지 않아 이들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2년간 기후는 좋았고, 땅은 넓고 풀은 많아 가축의 숫자는 재빨리 불어 나갔다.
여진인들은 이 땅 위에서 그들만의 천국을 찾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1625년, 누르하치가 바다를 건너고 동령을 넘어온 지도 십여 년이 흘러, 새로운 정착지에서의 여진족 사회가 안정된 것을 확신한 누르하치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이 땅 위에 여진족을 위한 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는 우선 팔기의 제신(諸臣)들을 불러 모아 「니오얀기완 탈라(niowanggiyan tala, 綠野)」의 회합을 열었다.
푸른 들판이라는 뜻의 니오얀기완 탈라라는 지명은 누르하치 자신이 직접 붙인 것으로, 처음으로 팔기가 사방으로 흩어진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 우리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앞으로 여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를 만주라 부를 것이며, 옛 조상들의 위대한 나라였던 아이신 구룬을 이어받아 아마가 아이신 구룬이라 이름을 할 것이다. 이에 나는 그대들의 추대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올라 천지에 제사를 올리고자 한다.”
누르하치의 천명에 팔기의 수장들은 예를 갖추어 그 뜻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만주라는 족명(族名)은 누르하치가 마음 깊이 따르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온 것이다.
문수보살의 문수를 여진어로 만주(manju)라 읽기 때문이었다.
나라 이름인 「아마가 아이신 구룬」은, 말 그대로 후금국(後金國)이라는 뜻이었다.
송나라를 남쪽으로 패퇴시키고 중국의 북부에서 원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전성을 구가했던 여진족의 옛 나라인 금나라(Aisin Gurun, 大金國)을 이어받을 것을 천명한 것이다.
형식상 누르하치는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는 영주도독부에 세폐를 지불하는 것은 당분간 계속하기로 했지만, 바다 저 너머의 황성부 황제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도, 만주인들도, 모두 이곳에 세워진 그들만의 독립된 조국을 간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영주의 동쪽, 북아메리카의 대평원 저 너머에 만주족의 나라 후금(後金)이 세워지게 되었다.
풍진 삶을 견뎌내고, 결국 태어난 곳의 천만 리 바다 바깥에서 칸의 자리에 오른 누르하치는, 후금이 건국되고 칸의 자리에 오른 지 세 해만에 지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만주 팔기의 모든 백성들이 추모하는 가운데, 그의 장례는 새롭게 후금국의 도읍으로 정해진 「압카이거문(Abkai―Gemun, 天京)」에서 멀지 않은 들판 위에서 치러졌다.
유난히 바람이 모질게 부는 스산한 날이었다.
1629년
태정(太禎) 41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영주도독부 곡양도(谷陽道) 대곡부(大谷府).
누르하치의 후금국의 건국은 본토에서는 그다지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태정제가 누르하치에게 「동령금국국주(東嶺金國國主)」라는 칭호를 내려주었으나, 사실 이것은 누르하치가 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정제는 이 칭호를 자신의 신하였던 누르하치에게 줌으로 인해서, 머나먼 바다 바깥에서 황은(皇恩)을 입은 영토가 더 늘어났다는 식으로 치적을 부풀릴 수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고 영주로 보내진 칙사는 황제가 내린 금인(金印)을 지니고 동령을 넘어 후금의 도읍 압카이거문에 들어갔으나, 이미 누르하치는 죽고 그 아들 홍타이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뒤였다.
홍타이지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칙사를 맞이하고, 금인을 수령하기는 했으나 조공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천만 리 바깥의 황제는 이제 더 이상 홍타이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국의 내지와 후금국이 느끼는 이러한 거리감과 다르게, 바로 지척에서 후금국과 마주하게 된 영주도독부는 좀 더 진지하게 후금국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사실 대부분의 영주도독부 백성들은 동령 바깥의 광막한 초원지대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그것은 영주도독부를 이끌고 있는 영주의 귀족 가문과 대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누르하치에게 동령을 넘어가서 원하는 대로 땅을 넓히라고 부추겼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인들이 넓은 초지에 흩어져 유목생활로 돌아가는 것과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문제가 달랐다.
처음으로 영주도독부와 경계를 접한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 집단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영주도독부의 위정자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충분한 것이었다.
심지어 후금국에서 들어오는 세폐를 받지 않고, 충돌을 불사하더라도 영주를 거쳐 후금으로 들어가는 여진족 이민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후금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도독부의 입장이었으나, 이것은 향후의 양자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서 언제고 급격하게 선회될 가능성이 있었다.
위와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후금의 건국이 영주에 미친 영향은 바로 관심 밖에 있던 동령 너머의 광활한 대륙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게나마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영주도독부의 산업 근간은 크게 북부의 목축업과 모피 무역, 남부의 농업, 그리고 해안 지대의 항구들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중계무역이었다.
영주에서 생산된 농산품과 모피는 남쪽의 대정부나 북쪽의 창주부로 옮겨져 함상(咸商)과 내상(萊商)에 의해 본토로 실려 나갔다.
이러한 무역로는 영주에서 생산된 물건만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의 멕시카(Mexica, 아즈텍)와 타완틴수유(Tawantinsuyu, 잉카) 등에서 생산된 은·구리·유황·담배 등을 실어 나가는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타완틴수유의 리마(Lima, 利馬)항이나 멕시카의 악사야카틀란(Axayacatlan)항구에서 선적되어진 이런 물건은 창주부나 대정부에서 함상과 내각에서 매각되어 아시아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었다.
이 무역로에는 조선계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악사야카틀란에서 출항해 필리핀 마닐라로 가는 카스티야 상인들도 이용하고 있었고, 이들을 영주의 주요 무역항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영주도독부의 경제 근간이 바로 이러한 대창해(태평양) 무역로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영주인들의 관심은 동쪽보다는 영주―멕시카―타완틴수유로 이어지는 대륙의 남북축에 기울어 있었고, 이 항로를 유지하고 영주의 남쪽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는 카스티야나 아라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모든 외교적 노력이 기울어져 있었다.
반면에 영주의 동쪽 지역에 관해서는 많은 요동인들이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요동이 북륙에서 수렵한 모피를 대량으로 내놓고, 연합왕국의 일원인 프랑스의 식민지가 북아메리카의 동부에 건설되어 이들이 모피 무역에 전념함에 따라, 영주의 모피 생산은 격감하고 수익률도 저조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모피를 얻기 위해 동쪽으로 나가려는 의지는 갈수록 저하되고 있었고, 동령대간 너머를 사람이 갈 만한 곳으로 여기지도 않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후금국의 건국은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뒤흔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광활하고 야만적인 땅으로만 보고 있던 동령대간의 동쪽에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은, 곧 영주인들에게 그간 인식에 없었던 동쪽 지역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간간이 대륙의 반대편 끝에 서유럽과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개척자들이 건너와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저 흘려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원주민 부족들이 군거(群居)하고 있는 넓고 척박한 대지라는 대륙의 동쪽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여러 정치 세력들이 경쟁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무대의 등장이라는 위기감과 연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새로운 영주대도독으로 이수광(二쓱光)이 부임해 왔다.
나이가 환갑을 넘은 이 늙은 학자 출신의 관료는, 영주로의 발령을 자청했다.
외부대신까지 지낸 그가 영주대도독으로 오는 것은 사실 영전(榮轉)이라기 보다는 좌강(左降, 직급이 낮춰짐)이었다.
하지만 불명예가 될 수도 있는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수광이 태정제에게 영주로 가기를 청한 이유는 뚜렷했다.
외부대신들을 지내오며 뚜렷한 국제적 안목을 지니게 된 이수광은, 황성부 조정에서 유일하게 후금국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황제에게 무리해서라도 누르하치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라고 주청한 것도 그였다. 후금이 완전히 대한제국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또한 요동국의 수립에 직면하여, 언제고 북해·진서·영주 등도 그러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들 외지(外地)의 내지(內地)에 대한 자율성과 자립 경향은 그간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절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수광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영주도독부에 주목을 하게 되었고, 때마침 후금 문제가 맞물리면서 직접 이 상황을 살피고자 영주대도독을 자청해 온 것이었다.
“대대로 대도독은 황제의 칙지를 가지고 와 영주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 그 주관으로, 내정의 실무는 그간 우리 귀족들에게 맡겨져 왔었소. 그런데 갑작스레 영주도독부의 전반을 직접 관장하시겠다니요?”
이수광은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의욕에 차서 영주로 부임해 왔으나, 그의 적극적인 태도는 즉각적으로 영주토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선봉에 선 것이 사실상 영주의 통치자나 다름없는 창주공 김면이었다.
누르하치를 동령 너머로 보내주는 바람에 후금국의 건국을 초래했다는 소리 없는 비난을 의식하고 있던 그는, 이수광에게까지 치여서 권력의 몰락을 초래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때문에 직설적으로 이수광에게 역대의 대도독들처럼 조용히 임기를 채우고 다시 바다 건너 돌아가라고 요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수광 또한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직접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이곳 만 리 밖 영주에 대도독으로 부임해 왔는데, 창주공께서는 도대체 무슨 연유로 황제께서 내리신 칙지를 거부하고 대도독의 권한을 부정하려 하십니까? 내가 보기에 영주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100년이 좌우될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저 예전에 해온 대로 앞으로도 계속하시겠단 말씀입니까?”
몇 달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대도독 이수광과 창주공 김면은 서로의 의견을 절충한 타협책을 내어놓았다.
바로 도독부에 「척식평의회(拓植評議會)」를 창설하여, 이곳에서 합의된 안건에서만 정책으로 추진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의장은 1년씩 대도독과 창주공이 번갈아 하기로 하고, 그 구성원은 총 100인으로 도독부의 고위 관료, 영주 7도의 각도 감사(監司), 작위를 지닌 귀족, 그리고 충분히 척식평의회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는 대지주와 상인 등의 유지 및 학자로 결정되었다.
소위 「백인평의회」라고도 불리게 될 이 평의회에서 처음 심의된 안건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수광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정된 동부로 탐측대를 파견하는 문제였다.
“영주는 그 자체로도 넓고, 또한 거대한 대륙의 서쪽에 붙어 있으나,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였소. 아시다시피 북동쪽에는 동령대간, 남동쪽에는 남막의 광활한 사막이 영주를 고립시키고, 모든 무역 활동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만 이루어져 왔소.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영주는 유일하게 밝고 문명화된 땅이 아니게 되었소이다. 동쪽으로 북해에서 건너온 여진인들이 나라를 세우고,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서양인들이 제각기 식민지를 척지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소. 우리는 변화하는 이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방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필요가 있소. 그 시작은, 바로 정확히 대륙의 동부에 대해 광범위한 탐사와 교류를 실시하는 것이 될 것이오.”
이수광의 말에 딱히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세금을 더 내라는 것도 아니었고, 이수광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동부 문제에 대해서는 점차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던 탓에, 평의회의 의원들은 이수광의 안건에 쉽게 동의했다.
창주공 김면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수광의 발언에 동의하는 바가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이 지니고 있는 위기감의 이면에는 새로운 기회를 찾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동기 또한 있었다.
바로 동부에 등장하기 시작한 나라와 식민지들은 곧 시장의 확대와 돈을 벌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적잖은 식량이 벌써 후금국으로 팔려 나가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후금과의 무역 관계에서 영주가 손해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이 기회를 잘 살린다면 그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문제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 돈이 많고 권력 있는 평의회 의원들이 탐사대를 보내길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정보가, 곧 그들에게 투자의 기회를 만들어줄 터였다.
적절한 탐사대를 구성하는 문제를 놓고, 백인평의회의 의원들은 잠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그 탐사대장으로 대곡백(大谷伯) 윤회행(尹會幸)의 둘째 아들인 윤양일(尹揚一)을 선임하는 데 동의했다.
지도 제작자·본초학자·통역관 및 모피 수렵으로 잔뼈가 굵은 원주민 출신의 길잡이까지 총 80여 명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이듬해 봄에 바로 구성되었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 곡양도 대곡군에서 출발했다.
남동쪽으로 향해 사막과 면한 곳에 건설된 동강도 적산군(赤山郡)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보급을 받고 출정하여, 사막지대의 북쪽을 돌아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예정된 경로였다.
그 목표는 대륙의 동쪽 바다 끝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적게 잡아도 일이 년은 훌쩍 넘어갈 대장정이었다.
1631년 맹춘(孟春)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 이로쿼이 연맹).
동령대간의 남쪽, 황무지와 마주한 곳의 적산군(赤山郡)에서 출발한 윤양일의 탐사대가 미답지(未踏地)로 들어서 동부해안을 향해 나아간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탐험대의 여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그들은 우선 남막(南漠)의 거대한 사막지대를 북동쪽으로 거슬러 올라 초원지대로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영주에서 멕시카로 가는 무역로가 이 황량한 사막의 외곽을 따라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지만, 사막의 중심부를 횡단한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그만큼 그 계획은 무모한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행로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를 탐사대원들도 충분히 하고 있었지만, 안전한 행로만을 고집하는 것은 탐험대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에 대원들은 합의하고 있었다.
그간 영주에서 무관심에 묻혀 있었던 대륙의 심장부를 낱낱이 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령대간을 넘어가는 산로(山路)가 혹여 후금에 의해 차단될 경우에 대비해 남쪽의 사막지대를 통해 육로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지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했고, 방향도 뚜렷했으나, 그 과정은 쉽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열흘 정도면 북쪽으로 횡단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사막지대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남막, 예전에는 동막이라고도 불렸던 이 황량한 광야는, 구대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모래사막은 아니었으나, 불모지라는 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대지 위로 어쩌다가 보이는 선인장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열사의 대지 위로 쪼아 내리는 가혹한 햇빛에, 사람보다 말들이 먼저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자란 수분을 대신하기 위해 말의 피를 마시고, 밤에는 급격히 식어 내리는 사막의 차가운 밤을 견디기 위해 죽인 말의 가죽을 몸에 덮고 견뎌내야 했다.
열흘이면 끝나리라 생각했던 남막 횡단은 보름을 훌쩍 넘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한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나마 희망이라면, 그들이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뿐이었다.
사막과 초원이 마주하는 경계 지역이 어렴풋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윤양일과 대원들이 한숨을 돌릴 즈음에, 사납기로 소문난 남막의 원주민들이 그들을 습격해 왔다.
무리한 행군에 이미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있던 대원들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들은 소위 푸에블로(Pueblo)라는 이름으로 카스티야 식민자들에 의해 이미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테하스(Texas, 텍사스)에 식민 개척을 시작한 누에바 카스티야의 정복자들은, 북쪽으로 경계를 넓히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푸에블로인들과 부딪히게 되었던 것이다.
멕시카와 북아메리카 대륙이 접하는 경계에 넓게 퍼져 살던 푸에블로인들은 거듭되는 카스티야 식민지와의 대립 과정에서 외부인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조선인의 출현은 이들로 하여금 결코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예기치 못한 충돌에서, 다행히 가지고 있던 보총의 힘을 빌려 이들을 겨우 격퇴할 수 있었으나, 윤양일의 탐험대가 입은 손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제 80명의 탐험대 중, 살아 있는 사람은 겨우 32명에 불과했고, 말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짐들을 최대한 줄이고,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만 챙겨서 생존자들은 사막의 경계 끝으로 향해갔다. 다행히 사흘이 지나지 않아, 물이 있는 초원지대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나오긴 했지만, 탐험대장인 윤양일에 대한 대원들의 신뢰는 거의 무너져 있었다.
무리한 탐사로를 잡은 것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사막에서의 횡단 과정과 푸에블로인들과의 충돌시에 지도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불신이 대원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윤양일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젊고 의욕에 넘치는 청년이었으나, 집단을 이끄는 일에 서툰 면이 없잖아 있었다.
“내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지도자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평의회의 명령을 받아 도독부를 위해 이렇게 떠난 길인 이상 함께 협력해서 탐사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질책은 언제든 달게 받겠으니 부디 함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해 주십시오.”
초원지대로 들어서 숙영지를 처음으로 꾸린 날, 윤양일은 남은 대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말했다.
윤양일의 말에 수긍하는 대원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대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분만큼은 잠시 피해갈 수 있었다.
분란은 어렵사리 봉합되었지만, 탐사는 수월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막을 빠져나온 탐사대는 북쪽으로 초원지대를 거슬러 올라가 후금국의 영역으로 향했다.
사막에서 말을 모두 잃었기에, 두 발에 의지해서 수천 리를 넘게 걸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탐사를 더 이상 원하지 않고, 영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후금국에 도착해 갈라지기로 합의한 뒤에야, 윤양일은 이 고된 여정을 지휘해 나갈 수 있었다.
사막지대를 벗어나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만주족의 취락을 만나기까지, 이들은 거의 세 달에 걸쳐 사냥에 의존해 행군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서른두 명의 인원은 다시 서른 명으로 줄었다. 사막에서 이미 병을 얻은 늙은 말잡이 대원이 한 명 죽었고, 멕시카 출신의 아즈텍인으로 남부 원주민들과의 통역인으로 참가했던 페칼이란 이름의 청년은 대열에서 이탈해 어느 날 사라졌다.
이 고된 행군 끝에, 오색 형형한 깃발이 펄럭이는 조그마한 취락이 눈에 들어왔을 때, 탐험대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영주를 떠난 지 족히 너다섯 달만에 보는 정착촌이었다.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마을의 청년들이 말을 타고 몰려 나왔다.
이곳은 겨우 서른 명 남짓의 조그만 만주족 부락으로, 개척된 지 얼마 안 되는 곳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에서 사람들이 나타나자 경계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Ya ba i niyalma?(어디서 온 이들인가?)”
“Solho i niyalma.(조선인이로군.)”
이들은 서로 만주어로 쑥덕대더니, 탐험대원들의 용모나 복색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멀뚱하게 서 있는 윤양일과 대원들에게, 개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장년의 만주족 남성 하나가 다가와서는 능숙한 조선어로 입을 열었다.
“영주 사람들이신가?”
오랜만에 듣는 조선말에 윤양일은 눈물이 날 뻔했다.
그는 그 장년의 남성에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사정을 말했다.
“우리는 동쪽의 변경을 탐사하기 위해 남쪽의 사막과 평원을 네 달이 넘게 걸어왔소. 여든 명이 출발했는데, 이제 남아 있는 건 고작 서른 명뿐이구려. 말도 없고, 식량도 없소. 부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후금의 도읍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우리의 도성으로 갈 셈이었으면, 애초에 동령을 넘어오면 될 텐데 무엇하러 남쪽의 광막하고 황량한 땅을 둘러 오셨소.”
“그저 도읍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간 사람들이 다닌 적 없는 대지를 조사해야 할 임무가 있었소. 부디 많은 것을 묻지 말고 우리를 도와주시오.”
윤양일의 말에 장년의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마을로 안내했다.
만주족들 대부분은 후금의 건국과 함께 팔기로 나뉘어 사방으로 흩어졌었다.
윤양일이 도착한 마을은 팔기 중에서도 가장 남쪽으로 향한 정남기(正藍旗, gulun lamun i g sa)에 속해 있었다. 정식 이름도 없고 그저 작은 마을이라는 뜻의 「아지거 호톤 (小城, ajige hoton)」이라 불리는 취락이었다.
이들은 정남기 중에서도 가장 남쪽의 변경으로 향한 몇 개의 집단 중 하나로, 정착지를 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목축과 소규모의 농경을 하고 있었다.
사실 윤양일의 탐험대는 이곳에서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이들이 대부분 어렵사리 영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밀어내듯이 동령 밖으로 보낸 사실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요동과 북해에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탄압을 받아, 수천만 리 바다를 건너 영주에 왔는데, 그곳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에 겪은 시련들은 만주족이 스스로를 제국의 신민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에 동령의 바깥에 새로운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나서,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에 대한 꺼림이 생긴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연유로, 아지거 호톤의 만주인들은 갑작스럽게 남쪽에서 나타난 조선인들을 약간 기피하며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거 호톤의 주민들은 탐험대에게 여분의 말도 팔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도 거저주다시피 했다. 남쪽의 사막을 건너온 이들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일주일간 머물며 상처를 치료하고 피로를 회복한 탐험대는, 북동쪽으로 한 달 거리에 자리한 만주족의 수도 압카이거문으로 향했다.
이들은 우선 정남기의 군주라고 할 수 있는 버이러(貝勒, 패륵)를 찾아가 후금의 영내를 통과하는 것을 인가하는 호조(護照)를 발급받았다.
이곳에서 충분히 다시 보급을 마치고, 정남기 버이러의 배려를 받아 모자란 말의 숫자도 채워서 압카이거문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하루 거리마다 하나둘 정도 드문드문 만주족 취락이 서 있는 광대한 초원을 이들은 한참 달려 겨울이 시작될 무렵 천경, 혹 압카이거문으로 불리는 만주족의 도읍에 다다랐다.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척박한 나라의 도성인지라, 흙으로 대충 쌓여 있는 외성은 둘레가 얼마 되지 않았고, 인구도 2천 명에 불과한 도시였다.
하지만 그 규모와 상관없이, 이곳은 왕족인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愛新覺羅)씨가 살고 있는 팔기의 중심이자, 누르하치가 묻힌 만주족의 새로운 고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 대칸의 자리에 오른 홍타이지는 윤양일과 탐험대를 적당히 대접해 주었다.
탐사대는 오랜만에 깨끗한 물과 따뜻한 음식, 신선한 야채를 섭취할 수 있었다.
“영주에서 동방 탐사를 결행하고 사람들을 보냈다는 소식은 이미 일찌감치 들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궁색한 차림으로 남쪽에서 올라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더 동쪽으로 갈 생각이라면, 어차피 고(孤) 또한 사절들을 동방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한가?”
윤양일과 탐사대원들은 간만에 편안한 휴식을 즐기며, 만주족 고관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압카이거문에 체류한 지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대칸 홍타이지가 직접 윤양일을 불러들였다.
아버지 누르하치를 쫓아 요동내전에도 참전했으며, 이후 신대륙 이주를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만주족들을 이 새로운 낙토에 이르게 한 영웅이었다.
세월의 연륜이 잔뜩 묻은 그의 얼굴에서는 날카로운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윤양일은 그 앞에서 기세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전하께서 뜻하시는 바를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로서도 감읍할 일이나이다.”
윤양일은 차마 이번 탐사대의 목적 중에 후금의 전력을 파악하고 허실을 탐지하는 것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윤양일은 이제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홍타이지가 붙여준 만주족 관료들과 동쪽 탐험에 동행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윤양일은 이를 거절할 수가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홍타이지의 위압감도 위압감이지만, 그것보다도 압카이거문에 도착하면 다시 영주로 돌아가겠다는 조건으로 윤양일의 지시를 따라온 탐사대원들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서른 명의 탐사 대원 중 무려 절반이 넘는 열일곱이 이곳에서 안전한 동령의 산로(山路)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윤양일에게 마지막으로 통보해 온 상황이었다.
윤양일은 이들을 끌고 대륙 끝까지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남은 열셋만으로 움직이기는 곤란한 상황이니, 홍타이지의 배려 아닌 배려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윤양일과 함께 동방으로 갈 사절단의 대표로, 그의 이복동생인 도르곤(Dorgon, 多爾袞)을 지목했다.
도르곤은 그에게 속한 팔기군의 일부와 관료 몇 명을 포함한 40명의 인원을 추렸다.
추운 겨울이 찾아왔기에, 이들은 출발을 미루고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해가 지나 봄이 찾아오자, 윤양일과 도르곤은 각기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박차를 가했다.
윤양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도르곤은 사람이 호인이었고, 윤양일과도 성격이 잘 맞았다.
도르곤은 영주로 건너온 다음에 태어났기에 조선말을 직접 접할 기회는 없었으나, 훌륭한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능숙하게 조선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윤양일 또한 도르곤에게서 직접 만주어를 배우며 서로 교분을 쌓아갔다.
이제 막 틀을 갖추기 시작한 후금국은 적은 인구가 넓은 영토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고, 팔기를 통해 연맹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것은 곧 그 나라가 시작되고 끝나는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주족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원주민들의 취락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했고, 어느 순간에는 이 새로운 정복자들에게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들이 습격을 가해오기도 했다.
반대로 만주족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부족들도 있었고, 이러한 점이지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완연히 화사한 기후의 온대지역으로 탐사대는 들어서고 있었다.
동쪽으로 마지막에 있는 만주족 마을을 통과한 뒤, 윤양일과 도르곤은 속도를 늦추어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갔다.
윤양일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던 진서 출신의 지도 제작자 강험(姜驗)이 주변의 지형을 샅샅이 살피며 기록했다.
도르곤의 부탁으로 윤양일은 강험에게 이 지도의 사본을 만들어 건네주도록 했다. 일이 늘었으나, 강험은 자신이 이 넓은 땅의 지도를 처음으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이것을 잘 기록하고 만들어두면, 혹여 진서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진서대학의 교원으로 발탁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주족의 영역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두 달을 더 가서, 그들은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는 옥토(沃土)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는 새롭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나라가 형성되고 있는 참이었다.
오대호(五大湖)의 북쪽에 자리 잡은 프랑스인 정착민들로 부터 이로쿼이(Iroquoi)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들 중에서도, 호수 연안에 자리 잡은 다섯 부족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긴 집에 거하는 사람들’이란 뜻의 「하우데노사우니」라고 칭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이로쿼이 연맹은 데가나위다(Deganawida)와 히아와타(Hiawatha)라 불리는 영웅적인 두 사람에 의해 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위대한 평화의 법」이라 불리는 가르침을 서로 다투고 있던 이로쿼이 종족들에게 전했고, 결국 세네카(Seneca), 오논다가(Onondaga), 오네이다(Oneida), 카유가(Cayuga), 그리고 모호크(Mohawk)의 다섯 종족을 한데 모아 연맹을 창설했다고 한다.
이들의 느슨한 연맹은, 이렇게 이미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그러나 이들이 강력한 연맹을 구성하고 점진적으로 국가의 형태를 취해 나가게 된 중요한 이유는 인접한 지역에서 유럽인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유럽인들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강력한 연대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때문에 이로쿼이 연맹의 결속력은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쿼이 연맹은 남쪽의 해안가에 정착한 네덜란드인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과는 적대적인 부족인 웬다트(Wendat)와 대립하고 있었다.
웬다트인들은 이로쿼이 연맹의 제부족과 같은 선조를 공유하는, 이로쿼이 계통의 민족이었으나, 연맹과는 오랜 반목을 겪고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와 손을 잡은 연맹과는 달리 프랑스와 손을 잡고 있었다. 모피 무역의 권리를 둘러싼 대립은 이들 사이에서 갈수록 치열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윤양일과 도르곤이 이로쿼이 연맹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들은 이미 멀리서부터 국가에 버금가는 조직을 구축하고 있는 강력한 원주민 동맹에 대해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앞으로 동부의 역학 관계에서 이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마주하기 전에, 먼저 이들과 접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먼 곳에서 손님들이 찾아왔으니 반갑소이다.”
연맹의 회합(會合)이 이루어지는 「긴 집」의 지붕 아래에 연맹의 추장들이 모여 앉았고, 윤양일과 도르곤은 이들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백인들의 위협적인 공세와 오래된 적 웬다트들과의 전투에 지쳐 있소. 지금 보니 그대들도 백인들처럼 총을 가지고 있구려. 네덜란드인들이 우리에게 총과 화약을 건네주고 모피를 가져가지만, 여전히 그 양은 부족하고 웬다트나 프랑스인들과 맞서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오. 그대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소?”
오논다가의 추장이 윤양일을 향해 물었다.
그는 도르곤과 눈빛을 교환한 뒤, 그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영주에서 생산되는 보총을 만주족을 거쳐 이들에게 수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불충분했다.
“그 대가로 당신들은 저희에게 무얼 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모피와 담배밖에 없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윤양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모피를 사서 영주를 거쳐 다시 본토로 보내 그곳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곳의 유럽인들은 대서양만 건너면 이를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모피를 소비하는 주요 시장인 유럽에 수출할 수 있지만, 이것을 영주로 가져가 유럽으로 보내게 되면 같은 모피를 지구의 2/3를 돌아서 수출하게 되는 것이다.
윤양일은 때문에 이 거래를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도르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윤양일의 거부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을 잠시 제지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모피든 담배든 무엇이든 좋소. 다만 우리가 총과 화약을 넘겨줄 테니, 만주와 하우데노사우니 사이의 영원한 친구의 맹약을 맺읍시다.”
도르곤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의 동쪽에 단단한 동맹을 만들고 싶어 했다. 설사 총과 화약을 손해 보고 넘겨주더라도, 강력한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도르곤이 생각하기에는 먼저였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후금과 이로쿼이 연맹,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어지는 동맹 관계는 아메리카 북부를 관통하는 무역의 황금 루트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었다.
“도르곤 님, 그러나…….”
윤양일은 괜히 죽을 쑤어 남 주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로쿼이와 언제고 접할 수 있는 만주인들과 다르게, 영주는 직접적으로 교류관계를 맺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도르곤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만주인들이 이로쿼이에 총을 팔려면, 그것을 영주에서 사가야만 했다. 영주에 있어서 이 맹약이 꼭 손해는 아니었다.
윤양일은 내심 영주로 돌아가면 총기창을 차려서 보총을 생산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계산을 해 보았다.
도르곤과의 인맥을 통해 만주로 수출하는 총기의 생산을 독점한다면 꽤나 많은 이윤이 남을 터였다. 이런 좋은 거래에 도장을 박아야 할 이유는 이제 충분했다.
“그렇다면 그 동맹에 저희도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서쪽 끝에 있는 우리 한국인들 또한 당신들과 영원한 우정을 쌓기를 바랍니다.”
윤양일은 혹여나 도르곤에 뒤쳐질세라,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연맹의 추장들을 향해 말했다.
1633년
태정(太禎) 45년 계추(季秋)
대한제국 영주도독부 창해도(蒼海道) 창주부.
윤양일의 탐사대가 긴 여정을 마치고 영주로 돌아온 것은, 출발한 지 네 해나 지난 1633년 가을의 일이었다.
후금을 거쳐 이로쿼이 연맹(하우데노사우니)과 우호 관계를 약속한 윤양일은, 도르곤과 갈라져 이로쿼이 연맹의 소개를 받아 네덜란드 식민지와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남쪽의 해안가로 내려간 윤양일은, 「네덜란드서인도회사(GWIC, Geoctroyeerde Westindische Compagnie)」가 전략적으로 개척하고 있는 니우 네덜란드(Nieuw―Nederland) 식민지의 경내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서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는 니우 암스테르담(Nieuw―Amsterdam)의 도시에 도착한 윤양일은, 그 스스로를 영주대도독의 전권을 위임받은 특임대사로 소개하며, 이곳의 총독 판 트빌러르(W. van Twiller)와 면담했다.
만하탄(Manhattan) 섬에 자리잡은 니우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니우 네덜란드의 식민지 영역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번창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로쿼이 연맹과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북아메리카에서 안정적인 식민 개척을 이룩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던 본국과의 무역 관계도 차츰 정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니우 네덜란드의 전체 이민자를 통틀어도 그 숫자는 겨우 1만 명이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대륙 동부에서 가장 활력 넘치게 성장하는 식민지임에는 분명했다.
이제 막 이곳에 정착한 지 30년 남짓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윤양일은 판 트빌러르와 함께 영주, 후금, 이로쿼이 연맹,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황금동맹(黃金同盟)을 구상했다.
만약 이것이 결성된다면, 대륙의 동과 서를 횡단하는 하나의 강력한 동맹 벨트가 구축될 수 있었다.
북쪽으로는 프랑스인, 동북쪽으로는 스코틀랜드인들과 잉글랜드인, 그리고 남쪽으로는 스웨덴인들의 식민지가 개척되고 있는 마당에서 네덜란드로서도 이러한 강력한 안보장치는 절실한 것이었다.
“좋습니다. 우선 본국에 보고한 뒤 긍정적인 답신을 받아 오겠습니다.”
판 트빌러르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이 반갑기 짝이 없었다.
한국의 식민지인 영주와 연결된다는 것은, 곧 신대륙에서는 가장 오래된 동맹 관계인 영주 도독부와 아라곤령 콜롬비아의 양자 동맹에 새로운 멤버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만주와 이로쿼이와의 동맹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만약 영주―콜롬비아―니우 네덜란드의 삼각 동맹이 등장한다면, 신대륙에서의 네덜란드 식민지 팽창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될 터였다.
판 트빌러르와 우호적인 회담을 나눈 뒤, 윤양일은 동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니우 네덜란드의 남쪽에는 뉘아 스베리예(Nya Sverige), 즉 뉴 스웨덴이라 불리는 스웨덴 식민지가 팽창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막 크리스티나 요새(Ft. Christina)를 중심으로 잉글랜드령 버지니아와 네덜란드령 니우 네덜란드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한 이들은, 주로 가난한 핀란드 출신 이주자들을 앞세워 식민지 개척에 나서고 있었다.
윤양일은 동부 해안에서 영주도독부의 파트너로 네덜란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도독부의 백인평의회는 그가 결정한 바에 따라가 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지금 동부 해안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갖추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윤양일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스웨덴인들과는 기본적인 접촉만 취하고, 곧바로 잉글랜드령 버지니아를 거쳐 카리브해를 건너는 배에 올라 아라곤령 콜롬비아의 파나마로 들어갔다.
파나마에는 지난 수십 년간 영주도독부에서 영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윤양일이 파나마로 들어왔을 때, 때마침 이곳에 영사로 보내져 있던 것은 바로 윤양일의 큰형인 윤형일(尹衡一)이었다.
다음 대의 대곡백 작위를 잇기로 내정되어 있는 윤형일은, 영주의 정계에서 요구하는 경력을 쌓기 위해 파나마로 나와 외교 경험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윤형일은 수완이 좋아, 콜롬비아 총독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신천은광에서 리마를 통해 실려 나오는 은의 무역량의 관리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네 소식이 한참을 끊겨서 영주에서는 모두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좋기 그지없구나. 여기 머무는 동안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가도록 해라.”
파나마에 동생이 입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형일은 버선발로 항구로 뛰쳐나갔다.
오랜만에 해후한 형제는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윤형일은 동생과 탐험대원들에게 영사관의 예산을 모두 털어가며 대접해 주었다. 좋은 숙소를 내어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매일같이 진귀한 음식을 대원들에게 차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윤양일과 탐험대원들이 그리워했던 것은 바로,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집 밥이었다.
“언제까지고 여기 머물 수는 없으니 이제 그만 영주로 돌아가는 길에 올라야겠습니다. 형님.”
윤형일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으나, 윤양일은 벌써 떠나온 지 3년이 훌쩍 지난 고향이 그리웠다.
지금 채비를 서둘러 출발하더라도 영주에 도착할 때면 이미 여정이 4년차로 접어들 터였다.
그나마 탐험대를 발족시키고 일을 추진했던 대도독 이수광이 임기를 연장해 가며 아직까지 영주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이수광이 뒷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채 영주를 훌쩍 떠나가 버렸다면, 어렵사리 만들어진 평의회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았고, 윤양일의 탐험을 통한 공로도 인정받기 힘들 터였다.
적어도 이수광이 아직 영주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가 생각하고 있던 방향으로 영주의 정치가 잘 굴러가고 있다는 소리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로는 처음 탐사를 출발할 때에 비해서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콜롬비아 총독부에서 보내준 아라곤 총병들이 그들을 멕시카 왕국의 경계까지 안내해 주었다.
멕시카 왕국에서는 아무런 제제 없이 윤양일 일행은 내륙 지대를 마차에 올라 안락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사흘간을 머무르고, 대창해(大蒼海, 태평양)에 면한 악사야카틀란 항구에서 창주부로 가는 내상의 선박을 통해 이들은 4년만에 고향으로 안전히 귀환할 수 있었다.
후금국에 들어갔을 때, 살아남은 일행의 절반 이상이 동령을 통해 먼저 귀환해 버렸고, 때문에 영주의 사람들은 윤양일을 비롯한 나머지 탐험대가 동쪽으로 무리하게 전진했다가 사라져 버렸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연락이 닿을 길 없는 먼 동쪽에서 그런 소수의 인원으로 몇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사실상 이들이 어디선가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었다.
그러나 윤양일을 비롯한 열세 명의 탐험대는 아무도 몸 상한 곳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창주부의 항구에 나타났다.
창주의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들이 평의회에 출석하여 그간의 탐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에는 창주부중의 사람들이 대거로 몰려들어 조금이라도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이들이 백인평의회에서 보고한 사항은,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필사본으로 적혀 창주부중에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윤양일과 탐험대원들은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만찬을 대접받았다.
윤양일의 지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먼저 돌아갔던 대원들이 무색하게도, 끝까지 탐험을 마친 윤양일과 나머지 대원들은 영주 전체에서 영웅이 되었다.
탐험대의 귀환과 함께 창주부에서 벌어진 일대의 소란이 점차 잦아들어 가기 시작할 무렵, 윤양일은 탐험 중에 수많은 지도를 남긴 지도 제작자 강험과 함께 여행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대도독인 이수광이 직접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발문(跋文)을 써주었다.
강험이 그린 삽화와 지도가 채색되어 수백 장 이상 삽입된 이 여행기는, 《외동녕기(外東寧記)》라는 제목의 8책 24권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책을 찍어내기 위해, 창주부에 처음으로 인쇄기와 활자가 본토에서 수입되어 들어왔고, 삽화 및 지도를 그린 강험이 직접 출판사를 차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주 최초의 출판사 「창주박문서관(蒼州博文書館)」은 이후로도 신대륙의 각종 문화와 전통을 소개하는 책들을 찍어냈다.
윤양일 이후로, 개인적으로 신대륙의 오지로 탐험을 떠나는 사람들이 영주에서는 부쩍 늘기 시작했고,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모험담을 책으로 찍어내길 원했다.
그간 신대륙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본토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영주인들에게, 윤양일의 탐험은 자신들이 터를 잡고 있는 신대륙이라는 공간에 대해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니우 네덜란드에서 윤양일에 대한 답례 사절로 파견한 판 던 보아허르트의 사절단이 후금을 거쳐 동녕을 넘어 영주에 도착함에 따라 절정에 달했다.
판 던 보아허르트의 사절단은 유례없는 환영을 받으며 창주에 들어왔고, 이들은 이곳에서 무려 일 년 가까이 머물면서 영주의 지도층과 교류했다.
판 던 보아허르트는, 특히 자신보다 몇 해 앞서 대륙 횡단을 달성한 윤양일에 대해 깊은 감명을 표시했다.
창주에서 머무는 동안 거처마저도 윤양일의 자택에 꾸린 판 던 보아허르트는, 대도독인 이수광의 초청에도 응해서 그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백 년의 우의를 약속하며 좋은 대접을 받고 귀환길에 오를 수 있었다.
판 던 보아허르트는 또 니우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길에, 파나마에서 윤양일의 형인 윤형일 영사와 콜롬비아 총독 콘셉시오 데 자멜(Concepci de Jamel)과 회동하여 영주도독부―아라곤령 콜롬비아―니우 네덜란드 사이의 신대륙 3각 동맹을 체결했다.
영주도독부는 네덜란드와 아라곤과 연합하여 신대륙에서의 안보와 무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고, 아라곤은 전통적으로 중부 아메리카에서 경쟁해 온 카스티야뿐만이 아니라,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한 포르투갈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아라곤의 묵인 아래에 베네치아가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포르투갈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아라곤 또한 이러한 동맹의 확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시점이었다.
네덜란드 또한 이미 신대륙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된 세력들과 연합을 구축함으로 인해서, 북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의 극렬한 식민지 개척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건국은 영주도독부를 자극해, 윤양일의 탐험을 발족시키게 만들었고, 이 탐험은 신대륙에서의 본격적인 합종연횡의 시작과 함께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구대륙에서 건너온 식민지 개척자들과 일찌감치 국가 체제를 구성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일부 신대륙 원주민들에게는 영광의 세기로 기억될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대륙의 오랜 잠을 깨우는 나팔 소리는, 이 대륙에서 만 년간 삶을 꾸려오던 대다수의 신대륙 원주민들과 노예 무역으로 동부 해안에 팔려오기 시작한 아프리카 원주민에게는 저주의 나팔 소리에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들은 수 세대에 걸쳐 삶의 터전에서 추방되고, 바다 건너로 팔려 나가고, 착취를 당하게 될 운명이었다.
영주의 조선인들 또한 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운명이었다.
니우 네덜란드와 콜롬비아와의 삼각 동맹이 체결되던 그 해, 영주의 평의회에서는 도독부의 평의회가 인정하는 요건에 충족하는 대지주들에 대하여 노예의 소유를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빚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넘긴 원주민 수천 명이 영주부의 노비대장에 기록되었고, 다시 여러 해 뒤에는 파나마를 통해 최초의 흑인 노예가 영주 남부의 조주항을 통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