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장 제국재흥(帝國再興)
「○그 국중(國中)의 한 뙈기 땅도 버리지 말 것이며, 그 땅에 심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심어서 잘 자라날 수 있는 곡물을 가려내야 한다. 또한 상공(商工)을 천시하지 않아, 이들이 물건을 생산하고 이를 마음껏 내다 팔게 할 수 있는 연후에, 나라의 곳간에는 자연스럽게 곡식과 재보가 쌓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만세(萬歲)에 이어질 것을 장담키 어려우니, 금은을 캐고 정련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황종희, 《경제학안(經濟學案)》
1640년
흥안(興安) 원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태정제(太禎帝)의 휘는 기(琪)로, 1561년(건양 38) 겨울 황성에서 건양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학습원에서 수학을 하며, 요동의 인양군을 비롯한 여러 준재들과 교류를 맺었다.
형인 선정제가 매독에 걸려 급서(急逝)하자, 황제를 물려받게 된 조카 폐제(廢帝) 권(챡)을 대신하여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이후 차근차근 권력을 장악해 나가, 종래에는 반정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재위 도중에는 안정적인 황권 도모에 심혈을 기울여, 이후 제국의 정치 질서의 초석을 닦았다.
그는 훈구당과 사림당을 번갈아 흔들어 종국에는 해체시켜 버렸다. 그는 내각의 힘을 줄이고 황권을 장기적으로 강화시키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전제왕권의 모범이 되고자 했다.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권력 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허균은 태정제의 정치를 칭송하는 《정치신편(政治新編)》이라는 책을 써서 황권은 하늘이 직접 내리는 것이며, 강력한 황권이 있어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재위 중에 태정제의 권력을 흔들기에 충분했던 왜란(倭亂)과 서북변란 등의 군사적 충돌이 진서와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행스럽게도 그 위기를 잘 모면할 수 있었다.
대신 태정제는 요동 및 진서 등의 외지(外地)에 강력한 황권을 투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율성을 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변전시켰다.
이 결과 진서에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대학이 세워질 수 있었으며, 요동에서는 도독부가 폐지되고 요동국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대신 태정제는 자신의 권력을 내지에 집중시켰는데, 이로써 내지의 정치는 완전히 황제를 거치지 않고는 기능하지 않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무려 51년간 제국을 통치한 그의 치세는, 군제 개혁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법제의 개혁 정책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정책 중에서는 분명히 퇴보를 가져온 것도 적지 않았다.
한때는 전국적으로 인쇄술의 보급과 함께 널리 퍼져 있던 신보(新報)들이 태정제의 통치 기간 중 모두 금지되었다.
오로지 남은 것은, 황성부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하는 관보(官報)뿐으로, 이외에 내지에서 발행 가능한 것은 고권(股券, 주식)의 시세 변동을 공지하는 시보(時報)로만 제한되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내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 대해 학부(學部)의 사전 심사를 받게 하는 검열 제도를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내지에서 요동화를 포함한 외래 화폐의 통용을 일체 금지시키고, 공식적인 환율로 태환(兌換)된 제국정부에서 발행하는 통보(通寶)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태정제의 정책은 전반적으로 상업 활동의 저하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언로(言路)가 위축되고 전체적으로 체제가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태정제의 통치가 대내외적으로 위기 국면에 처해 있던 제국의 상황을 타개하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해가 갈수록 강력한 전제통치를 추구하면서 황권의 강화를 달성한 태정제는, 일흔아홉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시호가 올려지니, 곧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이다.
황태자 휼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니, 새롭게 선포된 연호는 「흥안(興安)」이었다.
흥안제 이휼은 즉위 시에 이미 나이가 마흔여섯으로,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통치를 보좌하면서 이미 정치 권력에 대해서는 잔뼈가 굵었다.
그간 황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단대에 그쳤던 것은, 후계자의 능력이 전대 황제에 미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흥안제는 이미 아버지의 통치 기술을 이십여 년에 걸쳐 철저히 전수받았을 뿐만 아니라, 태정제가 숨을 거둘 무렵에는 사실상 부황을 대신하여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미 아버지 태정제가 내각에서 훈구당과 사림당을 사실상 해체시켜 버렸기에 내각은 이미 흥안제의 사람들로 채워진 뒤였고, 내각이 황제를 견제하는 것은 사실상 힘든 상황이었다.
흥안제는 이렇게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권력을 보다 강화시킬 방법들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가 먼저 떠올린 방법은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한 추밀원(樞密院)을 폐지시키는 것이었다.
흥안제는 그저 조상의 공으로 대대로 작위를 습작하고 있는 한량들이 국정에 간섭할 근거를 앞으로 남겨두길 원하지 않았다.
“이백 년을 내려온 추밀원을 갑자기 닫으시겠다니요. 아니 되옵니다. 폐하.”
“이곳의 공후들이 대대로 나라를 위해 바쳐 온 충성을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평소에는 추밀원에 의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식읍으로 내려가 황성에는 올라오지 않던 추밀원 의원들이, 추밀원이 폐지된다는 소리에 황급히 경복궁 앞으로 달려와 머리를 찧으며 황제를 만류하고자 나섰던 것이다.
추밀원은 기능을 하든 그렇지 않든 작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의 귀족 계급으로 편입된 이들이 공식적으로 관직에 나설 수 있는 통로였다.
더군다나 관직에 오래 몸을 담거나 공훈을 세워 당대에 작위를 받게 되면, 사실상 은퇴 후의 영전(榮轉)하여 추밀원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아닌 일반 대신들도 추밀원의 폐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황성부가 소란스러울 정도로 추밀원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으나, 흥안제는 단호하게 폐지를 밀어붙였다.
그는 내심 이백 년간에 걸쳐 온 신료와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을 이제는 종식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권으로 추가 기운 이때에 확실한 도장을 찍지 않으면, 앞으로 언제고 황권에 도전하는 신료들은 황제를 배제하고 정치를 좌우하려 들 것이고, 그렇다면 어느 순간엔가는 황제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흥안제는 내다보았다.
당연히 황제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굳이 황제의 자리를 유지하고 내탕금을 내어줄 이유도 없었다.
신권이 득세하면 득세할수록 제정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흥안제는, 전적으로 황권에 대한 천부설(天賦說)을 주장하며 전제정권을 수립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짐의 나라를 통치할 권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명에서 나오는 것이지, 땅의 뭇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니, 설사 황제가 부덕하다고 하더라도 덕으로 이끄는 것이 제신들이 할 몫이지, 부덕함을 질타하며 황제를 겁박하는 것은 신하의 노릇이 아니니라. 황권은 신성한 바, 어찌 감히 천명을 받은 짐에게 가당 부당을 논하겠느뇨?”
흥안제의 주장은, 이미 그 아버지인 태정제 시대에 허균이 《정치신편》에서 황권을 옹호하기 위해 설파한 소위 「천부설(天賦說)」의 가정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동양의 전통적인 천명(天命)의 관념 위에다가 전제적인 색깔을 강하게 덧붙인 이 천부설은, 동시대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왕권신수설」과도 상당히 유사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흥안제가 이토록 전제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그가 당시 목격하고 있는 주변의 정세 또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었다.
지근거리에 있는 명나라는 사방에서 일어나는 온갖 반란에 직면하며 나라가 해체 직전에 놓여 있었고, 황제는 아무런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천황에게 아무런 실권이 주어지지 않고, 아즈치 막부의 오다 가문이 쇼군의 자리를 세습하며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반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며 절대주의를 확산시키고 있었으니, 흥안제가 보기에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최대한 황권의 전제성을 강조하는 유럽식 모델이었던 것이다.
온갖 소동 끝에 흥안제는 추밀원의 문을 닫았고, 다음으로 지체 없이 그 화살을 내각으로 돌렸다.
“폐하. 내각은 이 나라 정치의 근본이옵니다. 문을 닫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추밀원이 문이 닫힐 때만 해도 그게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계산만 하고 있던 내각 대신들은, 예상치 못하게 칼날이 날아오자 황급히 사모관대를 갖추고 황제의 앞으로 달려가 내각의 보존을 주장했다.
그러나 흥안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내각 해체를 단행해 버렸다.
물론 그가 이렇게 저항을 고려하지 않고 독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데에는, 전대 황제인 태정제가 내각에서 군부를 떼어다가 황제의 직속으로 편성해 둔 덕이 컸다.
흥안제는 아예 군부대신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두고, 본격적으로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흥안제가 추밀원이나 내각의 폐지 등 전격적인 정치 행동에 나설 때면, 아예 경복궁에서 어가(御駕)를 용산의 군부청사로 옮겨와 그곳에서 숙식하며 군의 행동을 통제했을 정도였다.
군부, 특히 시위대(侍衛隊)를 장악한 황제의 행동에 내각은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전대 황제인 태정제 시절부터 계속해서 독자적인 실권을 잃어가고 있던 내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제 아주 문이 닫히고, 각부(各部)는 재상도 없고 협의할 수 있는 내각이라는 기구도 없이, 각 대신이 직접 황제에게 임명받고 황제와 개별적으로 협의해야 하는 기묘한 체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의 중대사가 황제가 없는 곳에서 논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황제를 거쳐야 했고, 신료들이 서로 연대하여 황제를 압박하는 권력 견제도 불가능해졌다.
“요동은 탕평이라고 하여 파당을 마음껏 짓는 대신에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는데, 오히려 내지에서는 파당이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신하들의 입마저 틀어 죄려고 하니, 이 폭정이 분명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이면 흥안제의 정치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서울의 부민들 또한 전제황권을 지지하는 자들과 신권의 재강화를 논하는 자들로 암묵적으로 정치적인 견해가 크게 나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식적으로 주장을 펼칠 공간은 완전히 제약되어 있었고, 황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도전하는 주장을 담은 책은 학부의 사전 검열에 걸려서 밖으로 나오기는커녕, 글쓴이가 잡혀가서 취조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성부중에 익명의 벽서(壁書)가 나붙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공연하게 황제에 대항하는 주장을 담은 이런 벽서를 쓴 사람을 찾아내기는 좀체 쉬운 일이 아니었고, 황성에서 시작된 이런 벽서는 이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반황제의 시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벽서뿐만이 아니라 내각과 추밀원, 그리고 황제의 3각 정치를 주장했었던 옛 재상 임승준의 주장을 담은 《대국방략(大國方略)》이 황제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한때 강력한 내각에 대항하기 위해 소흥제의 황권 강화를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던 임승준의 주장이었건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전제적인 황권을 꿈꾸는 흥안제에게는 이마저도 불민한 주장이 되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황제의 검열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통제책을 무력화시킨 것은, 바로 익명으로 출판되어 뒷골목으로 유통되는 정치 서적들이었다.
이러한 책들은 거의 음란한 춘화(春畵)의 모음집이나 도색서적(桃色書籍) 등으로 위장하고 팔려 나갔다.
유통망 자체가 권력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고, 사람들이 입을 담기 꺼리는 음서(淫書)들과 뒤섞여 있었기에 아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설사 이 책들을 발각하더라도, 황제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그저 판매상을 족치는 것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그 판매상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사람과 장소를 바꾸어가며 출몰하는지라 잡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경로를 통해 황성부중과 전국으로 퍼져 나간 책 중에 단연 으뜸은, 황제의 모든 권력을 제한하고 내각과 추밀원의 기능을 합친 의회를 수립하여 나라를 통치하자는 주장을 담은 《국회신론(國會新論)》이었다.
사실상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의회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이 주장은, 당시로서도 파격적인 것이었으나,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로부터 크게 인용되기 시작했다.
익명으로 출판된 책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문장의 유려함을 보고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이 분명하다고 수군댔다.
그러나 근거 없는 이런 소문으로 이미 충청도에서 명망을 날리고 있는 학자를 잡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 황제는 그저 두고 보자며 세작(細作)을 여기저기 붙여서 감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상 흥안제는 인기 있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 아버지 태정제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갖추었던 사람이었다. 50년에 걸친 철권통치를 차근차근 구축하면서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정치적 결정은 신중하게 내렸었다. 때문에 전란을 두 번이나 겪고, 경제가 침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감히 태정제를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결정적으로 태정제는 거센 반발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권력 집중을 위한 마지막 한 수만큼은 두는 것을 피해왔으니, 바로 명목상이나마 유지되고 있던 추밀원과 내각의 존재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태정제가 피해왔던 것을 흥안제는 하나둘씩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것도 성급하게 말이다.
사실 흥안제의 생각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가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무리 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고, 흥안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허나 시중에서는 이미 태정제 때부터 누적된 문제들에 대한 원인으로 흥안제가 지목되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황권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삶은 나아지는 것 전혀 없이 갈수록 나빠진다고 느낀 중상류 계층의 황제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결정적으로 흥안제가 잘못 취한 정책은 바로 상업 억제 정책이었다.
그는 그간 내각과 상업자본이 결탁 관계에 있다고 보았고, 이곳에서 부패가 발생해 민심이 흩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일부 부패한 관료와 상인들을 잡아들이기도 했으나, 흥안제의 상업 탄압의 결과는 잔혹했다.
그간 숨이 끊어질 듯 말 듯하며 겨우 버텨오던 나상이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포르투갈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인도양 무역의 지분 축소로 힘겨워하던 나상은, 사업 부문의 분리를 통해 자구책을 도모하고 있었으나, 국내의 시장마저 어려워지자 결국 예전의 위세를 잃고 이류상단으로 전락하고 있던 차였다.
나상은 신대륙이나 유럽에 아무런 지분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결국 갈수록 국내와 연해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태정제 시기 전란기를 거치며 더욱 자금 사정이 곤란해진 나상은, 무리를 해서라도 조정에 연을 대어 돈이 될 만한 사업을 확보하고자 했었다.
이 와중에 흥안제에게 시범조로 걸리고 만 것이었다.
흥안제는 나상의 상업 활동의 금지를 명했고, 막대한 과징금을 물렸다. 그리고 나상과 연류되어 있던 관료 안긍(安肯)을 특별재판에 회부하여 총살형에 처했다.
부패에 대해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겠다는 목적이었다.
흥안제는 석 달이 지나서야 나상의 거래 금지를 풀어주었으나, 이미 나상은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지게 된 상황이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용과 신뢰마저 모두 잃은 나상은, 세훈의 측근이었던 오상복이 「동영주상행계(東瀛洲商行契)」로 시작한 지 242년 만인 1645년(흥안 6)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 한때 동서 무역의 황금기를 주도했던 상단은 역사의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그 흔적은 이미 100여 년 전에 독립하여 숙주를 근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도고금상사(印度股金商社)」에서밖에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흥안제는 내심 이러한 숙정 활동으로 자신의 도덕성과 청렴성,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치켜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흥안제의 행보는 민심을 터지기 직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늘 민심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보통은 이것을 백성의 마음이라 알고 있으나, 교육제도로부터 사실상 격리되어 있고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능동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든 빈농(貧農)들에게 있어서 황제의 정책이 가지는 함의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오히려 흥안제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민심이란, 바로 중간 계층 이상의 그것이었다.
대한제국은 때때로 부침을 겪긴 했으나, 지난 200년간의 사회적 변전으로 인하여 상인·지주·직능인 등으로 이루어진 소위 중간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혁파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적 계층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몰락한 양반들로부터 성공한 백정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포괄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핏줄보다는 자금력이 그 계층의 판단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들은 태정제 이래로 상업의 천시 풍조가 되살아나고, 내지의 물품이 요동 및 진서 등과 경쟁에서 밀림에 따라 상당히 피곤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태정제가 이들의 미움을 사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아들 흥안제가 오히려 한술 더 뜨고 나오자 이들의 불만은 이내 수면 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상의 몰락은 큰 충격을 이들에게 주었고, 자신들보다 권력이 한층 위에 있는 귀족과 관료들이 사시나무 떨 듯이 황제의 명 앞에 쓰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서는 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혹자는 요동으로 짐을 싸서 도망가기도 하고, 누구는 영주로 재산을 모두 들고 이민 가겠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지에 남아서 살아가야 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면한 문제였다.
고을마다 「향약(鄕約)」이라 불리는 모임이 넓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방의 유지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상남에서 쓰이기 시작해 요동을 거쳐 수입된 신사(紳士)라는 단어로 불리는 중간 계급의 남성들은, 그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양반 및 귀족과 결탁해 이 향약의 이름 아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단순히 이 향약을 통해서 사교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흥안제에 대한 반황제적인 의견들을 교환했다.
이러한 향약이 삼남을 중심으로 크게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황제는 뒤늦게 이를 탄압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정적으로 삼남의 진위대들이 황제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 그 기폭제가 되었다.
영남과 호남의 귀족 및 신사들은 각기 자청하여 이 삼남 진위대들에 군자금을 대고 장교로 복무하기를 자청하여 입대했다.
강력한 의회주의자로 이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암 송시열이 그 반란군의 지휘관으로 옹립되어 도성을 향해 시시각각 행진하기 시작했다.
황성부 조정에서, 흥안제는 서북의 진위대를 황성으로 불러 모으는 한편, 시위대로 하여금 한강에 결사의 방어진을 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도강을 허락하지 말 것을 명했다.
이렇게 「근황당(勤皇黨)」과 「의회당(議會黨)」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648년
흥안(興安) 9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1646년(흥안 7), 송시열이 이끄는 의회당의 반란군이 황성부로 진격하면서 시작된 내전은 3년을 끌었다.
전국의 진위대가 근황당과 의회당으로 나뉘어져 싸웠다.
삼남(三南)의 신사들은 반란의 근원으로 강력한 의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고, 대체적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민심도 이를 따라 움직였다.
그에 반해 평안도와 황해도는 근황파의 근거지나 다름없었다.
이 가운데에 놓인 황성은 여러 차례 점령군이 바뀌면서 사실상 수도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결국, 이 난전 끝에 의회파가 최종적으로 승기를 잡고 흥안제를 안주(安州)에서 붙잡아 황성부로 끌고 온 것은 1648년 겨울의 일이었다.
의회당의 중진들에 의해 섭정공(攝政公)으로 임시 추대된 송시열은, 이 전쟁의 뒷수습을 궁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직까지 유교적 전통 질서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제국에서, 황제의 처결 문제는 그 화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흥안제는 사로잡았으나, 여전히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근황파의 강력한 반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언제까지고 황제에 대한 처분을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었다.
고심을 거듭한 송시열은, 결국 흥안제를 재판정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황제가 주장하는 천명(天命)받은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법치(法治)밖에 없었다.
내전을 겪으면서 도학주의자에 가까웠던 송시열은, 법가(法家)의 통치를 이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고, 안정되고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주나라 제후들이 려왕(견王)의 빈자리를 대신해 집정했던 공화(共和)의 이상과 나라를 법으로 통치하는 상앙의 형명학(刑名學)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공화의 이상은 곧 의회제의 수립을 통해 이룩될 것이오, 상앙의 형명학은 사법의 개혁을 통해 달성될 터였다.
송시열은 그 첫 단계로, 황제에게 예속되어 있던 사법제도를 이용해 황제를 심판하고자 했다.
제국의 사법제도는 예전 서거정(徐居正)이 초석을 닦은 바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그 역할과 의미가 크게 축소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정에 황제를 세운다는 것은 그 함축된 의미가 상당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본래 황성부의 제도법원(帝都法院)은 어전법원(御殿法院)의 이름이 고쳐진 것으로, 가장 상위의 특별한 재판인 국가·황실·조정·고위 관리·황족·귀족에 대한 심결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러나 제도법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반역죄를 심사하기 위해 열리는 특별 법정이었다.
송시열은 바로 이 특별 법정을 열어서 흥안제를 그 법정 위에 세웠다.
“가, 감히 어찌 짐을 이런 법정 위에 세울 수 있느냐! 특별법정이라는 것은 황제가 스스로 반역자를 심판하기 위해 열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너희는 어찌 무슨 근거로 황제를 특별법정에 세운다는 말인가?”
수치스러움과 모욕감에 사로잡힌 흥안제는, 잔뜩 흥분해서 의회당의 반역자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황제가 앉을 자리에 대신 최고재판관의 자격으로 앉은 송시열은, 눈 하나 꿈뻑 하지 않고 재판을 속개(續開)했다.
“본디 역사를 상고하기에 황제가 부덕하여 반정이 일어나면, 그 면류관과 패옥을 빼앗고 먼 낙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그 목숨을 거두는 것이 빈번하였는데, 이렇게 폐주를 스스로 변론하라 재판정에 세워준 것부터가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소?”
송시열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가 이 재판을 통해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한제국의 어느 누구라도, 그것이 설사 황제라고 하더라도 법의 통치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법치국가가 의회의 합의에 의해 조율되는 것, 그것이 송시열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국가의 전범이었다.
법의 차가움을 선비들의 덕으로 교화시키는 것. 그런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안제가 추진했던 것과 같은 황제전제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재판 내내 흥안제는 재판 자체가 근거가 없으며,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름간의 기나긴 재판 끝에, 흥안제는 사약형(死藥刑)을 받게 되었으며, 형이 집행되기 전에 그 종질(從姪)인 회군왕(懷群王) 승(엷)에게 선양(禪讓)을 하도록 했다.
흥안제는 끝까지 선양을 거부했고, 때문에 재판정에서는 강제로 황제의 옥새를 빼앗아 회군왕 승에게 이를 넘기고 황제로 옹립시켰다.
다음 날 바로 흥안제는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그 또한 시호가 추존되지 않았다.
허나 이 재판 과정을 두고 다시 의회당은 두 개의 파벌로 갈라졌다.
송시열 등을 주축으로 황권을 완전히 제약하고 의회의 우위를 공식화하자는 「의회파(議會派)」와, 전통적인 임승준식의 황권, 사법, 내각 사이의 분립 체계를 선호하는 「분립파(分立派)」로 나뉘었던 것이다.
전자인 의회파는 주로 상공인 계층 출신의 신사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분립파는 전통적인 귀족 및 관료를 배출하는 명문가들이 주도했다.
이를테면, 의회파는 급진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으며, 분립파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면한 서북 지역의 근황파 잔당을 처리하는 동안은 서로 대립하지 않기로 약정을 맺었다.
겨우 마지막까지 서북에서 저항한 늙은 근황파 장수 임경업(林慶業)을 평양에서 총살하고 나서야 의회주의자들의 권력 지배는 확고해졌다.
송시열을 비롯한 의회당의 집권은 이내 요동의 지지를 받아냈고, 전통적으로 자유적인 기풍이 강한 진서에서는 이내 내지의 혁명에 동조하고 나섰다.
반면 북해와 영주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선은 내지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 당연한 노릇이다.
송시열은 공식적으로 섭정공의 자리에 올라 제국의 질서 개편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650년 회군왕 승이 공식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송시열은 새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대권환봉장정(大權還封章程)」에 옥새를 찍게 만들었다.
이 문서의 요지는, 곧, 황제는 영세토록 국가 권력에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의회와 사법의 분립 및 그를 통한 나라의 통치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추밀원(樞密院)이 부활되어 의회의 상원(上院)이 되었고, 매우 제한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하원(下院)으로 중의원(衆議院)이 구성되었다.
추밀원은 여전히 황족 및 작위 소지자로 그 구성이 엄격하게 규정되었고, 하원 또한 재산 5만 냥 이상의 상학(庠學) 이상 교육을 받은 30세 이상 남성으로 그 선거권이 제한되었다.
하원인 중의원의 의석은 총 90석에 불과했고, 황성부 10석과 각 도별로 10석이 할당되었다.
외지 영토는 의회에서 대표권을 가지지 못했다.
내지의 총 인구 2,950만 중에, 이때 선거권을 얻게 된 인구수는 겨우 1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혁명적인 것은 확실했다.
세습직인 추밀원의 의원은 거의 분권파가 차지했고, 반대로 신사 계층의 지지를 받고 의회에 들어온 의회파는 하원인 중의원에서 우위를 점했다.
송시열은 처음에는 분권파를 몰아내고 추밀원을 폐지할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다시 두 번의 내전으로 치닫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타협적인 정치를 실시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의회가 안정적으로 구성되자, 의회에서는 새로운 내각(內閣)이 선출되었다.
송시열이 섭정공과 내각재상의 지위를 겸직하여 당분간 과도 체제를 이끌도록 결정되었고, 각 부 대신은 의회파와 분권파가 엇비슷하게 가져갔다.
새롭게 구성된 내각은 송시열의 지휘 아래에 의회제 국가의 초석을 닦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매진했다.
이제 더 이상 황제가 국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확고한 이상을 가진 의회파와 황제가 그래도 권력의 일부는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분권파 사이의 견해 차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적어도 안정된 의회 제도가 지금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가 복잡해지리라는 데는 이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송시열이 착수한 것은, 제국을 굴러가게 할 두 바퀴의 나머지 한쪽인 사법제도였다.
기존의 《홍범(洪範)》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국가의 정체(政體)를 규정하는 내용을 담은 《대한국헌법(大韓國憲法)》을 의회가 제정했다.
이의 하위 법 체계로 기존의 모든 법령을 정리하고, 《경국대전》을 수정 반포했다.
이에 따라서 기존의 외지부라 불리던 일종의 변호사(辯護士)가 「대변인(大辯人)」이란 이름으로 공식적인 사법제도의 일부로 인정되었고, 소송 제도가 완전히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기존에 법관을 양성하던 유일한 기관이었던 개성의 「육전학당(六典學堂)」은 「송도법학원(松都法學院)」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었고, 이외에도 경내사학 및 진서대학 등에 법학을 가르쳐서 법리학거인의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양성되는 법학자의 위계는 분명했는데, 송도법학원이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은, 군부를 아예 황제가 손을 댈 수 없도록 내각에 종속시켜 버렸다. 심지어 군부대신은 전시 상황이 아닐 경우에 내각의 다른 대신들의 동의 없이는 꼼짝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강경책이었다.
기존의 군부가 권력의 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치를 어지럽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송시열과 의회파 의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대신 군대의 권익은 여전히 분권파 의원들에 의해 옹호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발언권을 사실상 상실한 군부를 대신하여 군대의 이득을 지켜주었다.
나라의 안존 자체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군대에 대한 예산 삭감 및 병력 축소 등의 강경책은 결국 동원되지 않았다.
“이제 정치가 안정되었으니, 검열 제도 및 신보의 발행에 대한 금지 처분 등을 풀어서 자유롭게 언로를 터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가자, 의회파 의원들은 점차 언로를 틀 것을 주장하며 송시열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 점에 있어서는 의회파와 의견을 달리하고 분권파와 이해를 함께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상적 국가에 대해 확실한 신념이 있었던 송시열은, 국가의 단합을 해칠 수도 있는 신보의 발행이나 출판의 자유 등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황제가 이를 시행할 경우에는 죽어 마땅하나, 자신이 이를 시행한다면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기괴한 논리임에 분명했으나, 적어도 급작스러운 자유를 주는 것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그 숫자가 많았다.
특히 상원인 추밀원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송시열은 이 검열 제도를 유지할 것을 법령에 삽입했고, 의회파 의원 몇몇은 이에 반대하여 의석을 내놓고 낙향해 버리는 소동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반대로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중상주의(重商主義)를 전면에 내세우고 송시열 내각은 국가 경제의 전면적인 개편에 착수했다.
이들은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4할까지 높이는 극단적인 보호 무역을 시행했고, 이를 통해 내지의 상공업자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기에, 이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취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이제 국내 시장이라기보다는 주요 경쟁자가 되어 버린 요동에 대해서도 관세를 물리는 조치를 취했는데, 요동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확고하게 이것을 밀어붙였다.
요동의 질 좋은 제조품이 자꾸 압록강을 건너 내지로 들어와 팔리면,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는 내지의 제조업이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더불어 송시열 내각은, 요동의 「왕립요동은행」을 본따서 본격적인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은행」을 1657년에 세우고, 기존의 통보를 폐기한 뒤 요동을 뒤쫓아 화폐제도를 금은복본위제로 바꾸고, 금화를 원(圓), 은화를 냥(兩), 동화를 전(錢)으로 하는 통화를 1560년에 출범시켰다.
이렇게 거의 10년에 걸친 개혁 작업이 끝나갈 무렵, 송시열은 퇴진 압력을 받게 되었다.
과도기가 끝나고 의회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송시열이 독재적 권력을 반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의회파나 분권파나 할 것 없이 의회 전체에서 높았다.
군대를 장악하고 의회를 폐쇄할 의지까지 보였던 송시열이었으나, 결국 섭정공의 인을 반납하고 작위를 받아 상원의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개인적인 권력욕과 무관하게, 이 의회정치의 확립을 주도했던 그의 사상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속된 말로 송자(宋子)라고까지 불리며 대한제국 정치사상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가 입안한 의회와 사법제도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정치 체제는 후대로도 여러 정치가들에 의해 보안되게 된다.
이백 년에 걸친 황권과 신권과의 싸움은, 결국 신권의 승리로, 그리고 다시 권력의 분산으로 이어져 갔던 것이다.
1656년
태화(泰和) 6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제국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동안, 중국에서도 역사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간 명나라는 가장 거대한 은둔의 제국으로, 주변 국가 및 포르투갈 등과의 지엽적인 교류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거대한 국토는 지대박물(地大博物)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명나라의 땅은 넓고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없으니, 오랑캐 나라들과 구태여 교역하고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위정자들에게 심어주었다.
비록 장거정이 정권을 잡은 당시, 제한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이는 곧 실패로 돌아갔고, 무능한 황제들이 연이어 집권하고 환관 정치에 휘둘린 명조(明朝)는 이제 그 죽음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대명(大明)의 황제에 오른 신종(神宗) 만력제의 통치 초기에 그를 보좌했던 것은 명재상 장거정이었다.
요동에서 돈을 꾸어 오기까지 하면서 그는 양세법(兩稅法)과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을 시행하여 정부의 재정을 호전시키고, 그의 정치적 역량 하에 내외 정세를 안정시켰다.
허나 1582년 장거정이 죽고, 친정(親政)이 시작됨과 동시에 만력제는 기행을 일삼기 시작했다.
무리한 토목공사와 사치를 일삼고, 내궁에 틀어박혀서 칩거한 채 국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사치와 명예를 유지하는 일에는 지나칠 만큼 민감해, 광감(鑛監)과 세감(稅監)이라 불리는 환관 출신의 세리들을 전국에 보내 사치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케 했다.
이는 곧 광감과 세감이 전국에서 부패를 자행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짐에 따라 국사는 돌보지 않고 고혈만 빼먹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달했고, 영하(寧夏)와 귀주(貴州)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만력제는 단호하게 이 반란들을 진압하고, 엄청난 양의 자금을 동원해 토목공사를 더 크게 벌였다.
이런 가운데 명나라 내부에서는 태자 승계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 소위 동림파(東林派)와 비동림파로 나뉘어 파벌 싸움이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환관 정치 또한 발호하여 그 심각성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내부의 산업이 완전히 정체됨에 따라 제조업을 일으키고 있는 인근 국가, 즉 요동·한국·일본 등지로의 국부의 유출 또한 심각한 상태에 다다랐다.
이런 와중에 암군(暗君) 만력은 드디어 1620년 숨을 거두었으나, 그 뒤를 이은 태창제(泰昌帝) 또한 한 달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만력제의 손자이자 태창제의 아들인 희종 천계제(天啓帝)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그 7년 치세 동안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전횡은 극에 달했다.
천계제의 치세는 명실공히 명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우둔한 이들조차 알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갈수록 반란이 줄지어 일어나고, 민생이 파탄에 이른 이 때에, 천계제가 죽고 그 동생이 제위를 이어 연호를 숭정(崇禎)이라 했다.
그는 위충현의 세력을 몰아내고, 관리 등용에 다시 엄정을 기하려는 등 죽어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으나, 이미 때늦은 일이 되었다.
대륙에는 가공할 만한 한발(旱魃)과 병충해가 도래하여 수습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창궐하고 있었다. 도처에는 기민이 늘어나고 아사한 시체가 길마다 늘어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팔대왕(八代王) 장헌충, 틈왕(闖王) 고영상 등의 농민 출신 군벌이 일어나 전국을 휘저으며 황제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고영상은 명 관군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었으나, 그 세력은 고스란히 그 생질(甥姪) 이자성이 물려받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결국 1644년, 이자성은 서안(西安)에서 나라를 세워 순(順)이라 이름 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이 당시 숭정제가 주도한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남경에서 다시 북경으로 도읍을 옮겼던 명 조정은, 개혁 정국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극렬한 궁정 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자성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북경에 입성했고, 숭정제는 결국 몸을 피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요동과의 국경을 책임지고 북경의 지근거리에 주둔하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아버지 오양(吳襄)의 권유를 받아 이자성의 순왕조에 입조를 결심하고 북경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자성과 그 휘하들의 실태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 이들은 화북 일부만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고, 지방에서는 난세를 틈타 군벌들이 기회를 잡아 제각기 발흥하고 있었다.
이자성에게 실망을 금치 못했던 오삼계는, 심지어 이자성 본인조차도 오삼계에게 입조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자, 자기가 이끌고 있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오삼계는 서촉(西蜀) 방향으로 진군해 내려간 이때, 남경에서는 명 황족 주유숭(朱由崧)이 봉양총독(鳳陽總督) 마사영(馬士英)에게 옹립되었다.
처음에 주유숭은 감국(監國)을 칭하며, 사실상의 명나라 임시 정권을 이끌었으나, 북경의 황실이 무너졌음이 확실시되자 연호를 「홍광(弘光)」이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즉위했다.
여기에 예전 정권 다툼에서 밀려났던 원대월(院大鉞) 등의 명나라 신료들이 다시 참여하여, 북경의 정치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정쟁을 되풀이했다.
165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회수(淮水)를 그 경계로 한 순왕조와 남명 정권 사이의 교착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화북을 거의 평정한 이자성의 순군(順軍)은 북경(北京)에서 옛 송나라의 도읍이었던 개봉(開封)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쪽 경략을 위한 기반 다지기에 들어갔다.
오삼계의 군대는 서안(西安)에서 머물며 순나라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남명 정권의 신하를 자처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영역 구축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복건(福建)성에는 정지룡(鄭芝龍)이란 이름의 걸출한 상인이면서 동시에 해적이었던 전략가가 나타났다.
그는 해안 지대에서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영역 구축에 나서고 있었다.
이때 홍광제 주유숭의 남명 정권은 순군이 회수를 넘어 압박해 오자 남경을 버리고 상강(湘江) 유역의 장사(長沙)로 도망쳐 탄경이라 그 이름을 고쳤다.
이 빈틈을 타, 정지룡은 경계무(耿繼茂)와 연합 정권을 구성하여 남경을 점령하고 동남해안 지대를 석권했다.
갈수록 추동력을 잃고 있던 이자성의 순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군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서안에서 근거지를 옮겨 사천으로 들어간 오삼계는 복명 세력과 유적(流賊)들을 소탕하며 사천을 장악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스스로를 평서왕(平西王)이라 칭하며 남명 정권의 요구를 더 이상 듣지 않았고, 오히려 장사의 탄경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렇게 1644년의 북경 함락으로부터 10년 남짓한 사이, 대륙은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개봉을 중심으로 이자성의 순(順)은 화북에 자리 잡았고, 사천에는 이자성의 주(周)나라가 세워졌다.
여전히 명왕조는 양자강 중류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강남(江南)의 대부분은 정지룡이 세운 양(梁)왕조의 손에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지룡과 결탁했었던 경계무는 이에 반발해 광동으로 들어가 월(패)나라를 세웠다.
순식간에 무너진 명의 빈자리를 벌 떼처럼 일어난 군벌들이 이렇게 제각기 나라를 세우고 매웠으나, 일시적인 분할은 곧 또 다른 싸움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화북을 차지하고 앉은 순나라는 농민 반란에서 근원한 한계 때문에 본격적인 추동력을 얻기 힘들었다.
황제를 자칭한 이자성을 비롯한 순의 수뇌부는 대부분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었고, 때문에 반란의 와중에서 얻어진 야전 지식만으로는 통일을 향한 확장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군문에서 잔뼈가 굵은 주나라의 오삼계나, 강남에서 확고한 세력을 구축한 양나라의 정지룡에게 반격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순은 지금 획득한 영토라도 지켜내기 위해서 확전을 그만두고 내부적 결속을 다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끊어지기 직전의 숨통을 겨우 튼 것은, 탄경(옛 장사)에 자리한 남명이었다.
북으로는 순, 동으로는 양, 남으로는 월, 서로는 주나라와 사방을 마주하게 된 남명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여 꼼짝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탄경 조정이 앞으로 백 년을 버티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자신들조차 잘 알고 있었다.
대륙은 이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오대십국(五代十國)에 버금가는 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진한(秦漢)의 통일왕조가 무너진 뒤, 삼국(三國)의 난세가 찾아왔고, 서진(西晉)이 무너진 뒤에는 오호십육국의 혼란이 도래했었다.
이 뒤로 수당(隋唐)이 몰락하고 난 자리에는 오대십국의 군웅이 병립(竝立)했었다. 송(宋) 또한 천하를 홀로 가지지 못하고 요금(遼金)과 남북을 나누었으니, 그 뒤로 찾아온 원명(元明)의 통일왕조도 성쇠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몰락하고, 난세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제각기 난립한 왕조들은 그 정통성이 매우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기에, 주변의 이웃 세력과의 경쟁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민감한 세태의 냄새를 맡고 일찌감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양의 정지룡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남경의 탄경 정부를 구슬려 양왕(梁王)의 칭호로 일단은 만족했다.
스스로 정당성을 구할 수 없으면, 그나마 명분을 가지고 있는 명나라 황실에서 그것을 얻어오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꽤나 먹혀들었고, 사실상 양왕 정지룡은 탄경 조정에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않고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강남의 유사들과 복명(復明)운동을 지지하는 계층으로부터 신임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가 오래갈 수 없음은 정지룡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탄경의 남명 정권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고, 만약 그때까지 양나라가 살아남아 있다면 자연스레 제 갈 길을 가게 될 터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혼란기에 정치적 무리수를 두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 다음, 양왕 정지룡이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운 강남(江南)을 손에 넣은 이점을 살리는 것이었다.
그는 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봉쇄했던 대운하의 수운을 살려서 순왕조에게 강남에서 생산된 넉넉한 곡식을 수출했다.
순에게 있어서는 이 강남의 곡식은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양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하려던 차에 정지룡이 한발 물러서 곡식을 팔기 시작함에 따라 내부 문제로 다시 침잠해 들어갔다.
이렇게 북방을 안정시킨 정지룡은, 아들 정성공(鄭成功)을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임명해 항주(杭州)에 부임시켰다.
항주는 명 말의 혼란한 와중에 온전히 살아남은 도시였고, 항구를 배경으로 무역을 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친 정지룡의 명을 받든 정성공은, 이곳에서 전면적으로 해금령(海禁令)을 해제하고 상업 활동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만(臺灣)을 양분할하고 있는 네덜란드와 유구국(琉球國)에 접선해 이들의 무역선을 항주로 끌어들였다. 그 다음은 진서와 한국 내지 상인의 순서로 항주의 무역로를 개방했다.
정성공은 기본적으로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상인 출신이었고, 무조건적인 개방은 곧 상업의 자생력을 빼앗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무역은 자유롭게 하도록 허하되 수입 물품에는 높은 관세를 물리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처음에 요동왕 김윤이 40여 년 전에 처음 도입한 이래, 내지의 송시열 내각이 그 뒤를 이어 채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보호무역주의는 그 효과가 이미 검증되고 있었다.
대내적인 중상주의와 맞물린 이러한 자국 산업의 보호 정책은, 상업 및 제조업의 촉진을 위해서는 당연시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정책을 일찌감치 채택한 요동 및 유럽의 영불 연합 등에서는 적잖은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에 한국 내지가 뒤늦게 가세했고, 그 뒤를 아라곤 및 카스티야 등이 뒤쫓아 고관세와 무역 장벽을 특징으로 하는 보호 무역을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성공은 양(梁)나라를 중원의 다른 왕조들에 비해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세치국(經世治國)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성공의 생각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당시 거유(巨儒)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황종희(黃宗羲)였다.
황종희의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로, 본래 절강성(浙江省) 여요(余姚) 사람이었다.
부친 황존소(黃尊素)는 명말 동림당의 주요한 일원이었던 까닭에, 1626년 위충현(魏忠賢)의 탄압을 받아 옥사했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까스로 몸을 건진 황종희는 고향으로 낙향했고, 그곳에서 허가 없이 몰래 도항하여 진서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박주에 막 세워져서 한참 학문적인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있는 「진서대학」에 가명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서를 오가며 밀무역을 하고 있던 정지룡이 그를 알게 되어 학비를 대주면서 황종희는 정씨 일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바르토뮤 카르세레스·귤강조·조시진 등의 진서대학 학유들에게 가르침을 사사받았다.
이곳에서 5년간의 공부를 마친 뒤, 다시 명으로 밀입국하여 돌아온 황종희는, 당대 최고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 알려진 유종주(劉宗周)에게 가르침을 한동안 받았다.
그러나 황종희는 스스로를 관념에 치우친 양명학자로 여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진서에서 유행하는 서학풍의 격물학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정체성은, 그로 하여금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학문을 이끌어 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고향에서 공부에 정진하고 있던 차에, 명나라가 무너지는 거대한 혼란이 발생했다. 고향인 절강성을 장악하고 양나라를 일으킨 것이 때마침 정지룡이었고, 그로부터 입조를 권유받은 황종희는 망설임 없이 그의 군문으로 들어섰다.
“앞으로 나라를 곧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허름한 명분론과 천하론을 버리고, 사해로 나아가 분투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일입니다. 이미 요동과 한국이 날개를 펼치고 앞서 나아가고 있으며, 일본이 그 뒤를 쫓기 시작하였는데, 그동안 명나라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오늘의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를 유념하시어 나라를 좋은 길로 이끌어 가셔야 합니다.”
황종희는 항주에서 앞으로 양나라를 이어받게 될 세자 정성공의 머리 노릇을 했다.
그는 정성공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하며, 그가 왕재(王才)가 될 수 있도록 채찍질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항주를 중심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른바 「절동학파(浙東學派)」라 불리기 시작했다.
황종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진서에서의 유학 경험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정지룡, 정성공 부자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항주에 대학을 세웠다.
교명은 《상서(尙書)》의 「해와 달의 빛나는 기운이 날마다 서릴지라(日月光華旦復旦兮)」라는 구절에서 가져와 「복단대학당(復旦大學堂)」이라 이름 했다.
황종희는 정지룡과 정성공 부자의 지원을 받아, 이렇듯 그 자신이 생각했던 개혁정책을 양나라의 국정에 투사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자금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이 외에도 인재의 부족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종희가 바다를 건너 한국의 황성부로 보내진 것 또한 그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동국과 강남은 우의가 두터운 땅이라, 예로부터 고려와 송나라는 지음의 관계였소. 지금에 이르러 다시 그 옛정을 살리고자 이렇듯 바다를 건너오셨으니 어찌 반기지 않겠소.”
그렇잖아도, 격변하는 중국 정세에 대하여 민감하게 후각을 기울이고 있던 송시열을 비롯한 내각의 수뇌들은, 양나라에서 가장 먼저 국정을 수습하고 사절을 보내왔다는 소식에 황성부로 바삐 불러 맞아들였다.
섭정공과 내각재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상원인 추밀원의 의장격이라 할 수 있는 추밀사(樞密使)의 자리를 송시열은 지니고 있었다.
내각의 재상 자리가 궐석인 상태에서 그가 사실상 재상의 신분으로 황종희를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호의를 보여주시니 정말로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경복궁 앞 의정대로에서 황종희를 반기는 의전을 베풀어 주러 나왔던 송시열은, 황종희의 입에서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조선말에 적잖이 놀랐다.
“우리말을 하실 줄 아십니까? 깜짝 놀랐습니다그려.”
“실은 소싯적에 밀항하여 진서대학에서 유학을 했었습니다.”
배포 좋게 껄껄 웃는 황종희의 여유에, 송시열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이 먼 길을 찾아왔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죽지 않는 기개가 마음에 들었던 탓이다.
“여흥을 준비해 두었으니, 천천히 머물며 즐기도록 하시지요. 진미와 좋은 술을 황상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어 경복궁 경회루에 연회를 열도록 하셨습니다.”
송시열의 말에 황종희의 얼굴에 잠시 답답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내 안색을 굳히고 송시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송 공. 저는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 술잔을 기울이며 세월을 읊조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귀국의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주연을 베푸셨으니 혹여 예가 아닌 일이 될까 두려워 오늘 정성껏 사모관대를 갖추고 주연에 참례하겠사오나, 부디 이와 같은 일은 오늘 하루로 족하게 하여 주십시오.”
심각한 얼굴로 황종희가 말하자, 송시열은 그만 말문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내심 그가 오기까지 얕잡아 보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다 무너져 가는 명나라의 한쪽 구석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나, 그 나라의 군주든 신하든 뭐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는 심보였다.
송시열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황종희를 맞아 들였던 것을 돌이켜보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종희를 직접 마주하자 그 기개에 감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인품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초 송시열은 그에게 몇 번 연회를 베풀어주고 적당히 패물을 쥐어 다시 강남으로 돌려보내려 했었다. 그러나 정말 나라를 생각해서 이곳까지 달려온 진심이 그에게도 절절이 느껴졌다.
송시열은 공손한 품을 잡고 황종희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귀공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무리한 일을 권하였소. 내 불찰을 용서하시오.”
황종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간 송 공께서 걸어오신 행적을 흠모해 마지않았습니다. 스승과 같은 분이 이렇게 고개를 숙이시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종희의 말 또한 허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서대학에서 유학하던 당시, 한국의 정치 체계를 깊게 연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제정치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김세훈이 닦아 놓은 한국의 황권의 견제 장치는 때로는 무뎌지고, 전제정권의 손에 휘둘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그 제도가 세월의 힘에 무너지지 않고 더욱 강성해져, 송시열과 같은 이들에 의해 혁명적으로 의회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황제의 독단적인 전제정이 그 제 구실을 못하고 처참하게 명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황종희는, 일찌감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기존의 정치 체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민의(民意)에 근간을 두고 이를 적절히 국가를 운용하는 제도에 반영하여 나라를 통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황종희에게 있어서, 그가 생각하는 민의 중용의 정치를 현실에서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이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그러니 황종희에게 있어서 송시열은 일종의 사상적 스승이요,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은 동지였던 것이다.
다만 황종희는 방법적 측면에서 송시열과 같은 반정(反正)을 일으키기 보다는 그가 섬기는 양왕부 정씨 일가를 덕치의 길로 교화(敎化)하여 자연스럽게 성세를 구가한다는 온건적인 입장에 서 있기는 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그 뒤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국가의 방략(方略)을 논하기 시작했다.
비록 절차적으로 의회에 가부를 물어 양나라에 보낼 차관의 규모를 결정해야 했으나, 송시열은 황종희를 진심으로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황종희는 제국통보 금화 70만원이라는 전례 없는 규모의 차관을 제국은행으로부터 10년에 걸쳐 7만원씩 받기로 하는 의회의 결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이율도 상당히 낮았다.
이 정도 규모의 차관을 저리로 해주는 조건은 양나라에 입항하는 한국 내지 선적의 상인들에게 그 수출입 관세를 낮춰주는 조건이었다.
여기에는 요동 및 진서의 상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렇게 내지로부터 양나라로 흘러들어 간 자금은 강남 부흥의 초석을 닦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양나라 조정은 황종희의 절동학파가 주장하는 실학(實學)을 가르치는 학교를 전국적으로 세우고, 원양 항해가 가능한 조선 기술을 전수해 줄 기술자를 유럽에서 초빙하고, 북방의 순나라 및 광동의 월나라에 비해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고, 항주, 천주(泉州), 남경 등을 중심으로 선대제수공업의 등장 및 유통망의 확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성과를 바탕으로 양나라는 명나라의 잔재 위로 떠오른 오국(五國) 중에서 가장 먼저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황종희는 이러한 과정에서 양의 재상(宰相)으로 활약했고, 결국 그 생애 중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양나라에 한국식 의회제를 도입하고자 노력을 했었다.
그는 또한 정치 중에서도 특히 민생을 돌보는 기술을 학문적으로 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장자》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란 구절에서 따와 이를 「경제학(經濟學)」이라 명명하고, 이에 대해 매우 선험(先驗)적인 가설 몇 가지를 남겼다.
그 자체는 조야하기 매우 그지없어 당대에 꼴을 충분히 갖추지는 못했지만, 황종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복단대학을 그 축으로 하는 절동학파는, 이후 동방에서 자생적 경제학의 씨앗을 틔우게 된다.
1660년
태화(泰和) 10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경상도 대구부.
밤새 눈이 쌓인 모양이었다.
신경석은 빗자루를 가져다가 발목만큼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한참 눈을 치우고 있는데, 문득 울타리 틈으로 대가릴 들이민 검은 괭이랑 눈이 마주쳤다.
놈이 퀭한 눈동자로 노려보는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빗으로 한 대 후려칠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니 놈의 눈빛이 그새 처연하게 바뀌었다.
밤새 부엌이라도 도둑질할 요량으로 눈길을 헤치고 왔다가 그만 싸리로 엮어 놓은 울타리에 머리가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몸을 낮춰 놈에게 위압을 줘도 놈은 어지간해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제까짓 게. 괭이라는 것이 요물이라니까.’
설부터 까치라는 녀석은 날아들지 않고 이런 놈이 걸려들었으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신경석은 그놈을 잡아다가 두들겨 버릴 요량으로 목덜미를 팍 쥐었다가, 괜한 기분에 조심스레 놈의 몸을 빼다가 놓아줘 버렸다.
제 몸이 울타리에서 풀려난 걸 알았는지 놈은 재빠르게 훌쩍, 장독대를 뛰어올라 금방 사라졌다.
“정초부터 재수 없긴.”
불평해 봐야, 놈은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괭이 따위는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설이라 할 일이 많았다.
마당의 눈을 쓸어내고 나서, 꽁보리밥에다 간장으로 아침을 때우고서는 읍내에 나갈 요량으로 채비를 시작했다.
누덕누덕 기워진 것이긴 하나 두툼한 솜옷도 대어 입고, 눈이 쌓였으니 짚신은 치워놓고 나막신을 신고 나가야 할 터였다.
땔감을 팔고 올 셈이니 지게에 질 것도 많았다.
땔감 판돈으로 간고등어라도 사서 먹을 요량이었다.
반 정도는 첨지 어른 댁에 갖다드릴까 생각도 해 보았다.
새해니 문안도 드릴 겸, 올 한 해도 땅을 잘 부탁드립사하고 얼굴이라도 비춰야 할 듯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위패는 모시지 못해도 설이니 차사(茶祀)는 올려야 했다.
차사라는 것은 곧 차례를 말하는 것으로, 신분 있는 집에서는 사당에다가 온 일족이 모여 크게 그믐날 밤에 제사를 올리고 설날 아침에 또 한 번 큰 상을 차려 제사를 모시곤 하지만, 소작농 신분에야 떡국에 꽁보리밥이 올라간 상이 전부였다.
아무리 상놈이라 해도 제대로 된 집에서는 진설하는 제물 수도 꽤 되고, 위패는 모시지 못하더라도 헌작(獻酌)은 하는 모양이지만, 홀몸인 신경석에게는 모든 일이 부담이었다.
그나마 제사상을 올리는 것도 설과 부친의 기일 뿐이었다.
갈 길이 급한지라 얼른 재배를 올리고 젯밥을 아침 삼아 먹고 나서 신경석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신경석(申經石)은 이번 설을 쇠면 열일곱이었다.
아버지는 상주 출신 석수장이로, 예천, 안동, 봉화 같은 양반이 많다는 예향(禮鄕)을 두루 떠돌며 이름 있는 선비들 묏자리 묘석을 세우는 일을 도맡아 하던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꽤나 그 솜씨가 좋았던 모양이다. 기술이 좋아서였는지, 아내도 어떤 거농(巨農)의 수양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문경 사람 윤씨였다.
그러나 그 뒤로부턴 어쩐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내는 신경석을 놓고 산후를 잘못 치러 풍이 드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가 삼 년을 앓다 죽었다. 아버지가 재가를 꿈도 못 꾼 것은 으레 그 석수질을 하다 실수로 제 손가락을 뭉개 버렸기 때문이었다.
배운 것이 돌 깎는 것뿐인데, 그 일을 못하게 됐으니 살 길이 막막했다.
마누라는 죽고 새끼 하나가 딸려 있었다.
결국 신경석을 데리고 아버지는 대구로 내려왔다.
예전 묘지에 비석을 세워준 연으로 최첨지 댁에 줄을 닿아 땅을 조금 빌려 소작하는 것을 허락받고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손이 부자유스러운 사람이 쟁기질이나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어린나이에 농사일을 배워 아버지가 노름하는 동안 밤낮으로 경석이 일한 덕분에,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생활이었다.
결국 인생을 허비하다 못해 아버지는 삼 년 전 겨울에 대취(大醉)해 도랑에 엎어져 자다 얼어 죽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땅을 조금 줄이는 대신 계속 소작을 부칠 수는 있게 최첨지가 허락해 주었기에, 어린 나이에 떠돌지 않고 농사라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먹일 가족 없이 혼자 땅을 부친다는 것이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거들 사람이 없으니 많은 땅을 일궈낼 수는 없었다. 논 네 뙈기에 밭 한 뙈기가 그가 부치는 땅의 전부였다.
지루지골[鵲村] 일대에 구십 정보나 되는 땅을 가진 최첨지에게 있어서는 별로 눈에도 안 들어오는 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석은 필사적이었다. 매년 소출이 나면 삼분의 일을 최첨지에게 갖다 바치고, 남은 걸 가져다가 양식도 삼고 모자라는 것은 와룡산(臥龍山)에 가서 땔감을 해다가 성내에 가져가서 팔아 충당했다.
그래도 형편은 궁색하기 짝이 없어, 먹는 것 외에는 다른 데에 돈을 쓰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설만큼은 좋은 반찬에 포식하고 싶은 맘에 지난 며칠간 잔뜩 해놓은 땔감을 지게에 지고 성내로 나섰다.
대구부(大邱府) 성내까지는 걸어서 거의 지게를 지고선 족히 한 시진 거리였으나, 요행히도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정오 무렵엔 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예전 달성(達城)이라 불리던 이 읍은,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경삼감영이 상주에서 옮겨 오게 된 뒤로 나날이 번창해 인구 십만이 사는 거성이 되었다.
이 대구 읍성의 서문(西門)에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큰 장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서문에 있다 해서 서문시라고 불렀다.
이곳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를 휘어잡고 있는 구상(邱商)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황성(皇城)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이 서문을 통과해 대구를 지나가고 있었고, 이곳의 장은 갈수록 커져 상점이 들어서고 객줏집이 열려 상설화되어 있었다.
길목이 좋은 탓에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영남의 돈은 모두 서문시에서 움직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루지골에서 안당골을 거쳐 달서천(達西川)을 따라오면 바로 이 서문시가 나왔고, 신경석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짊어지고 온 물건들을 팔았다.
경석도 시장 모퉁이에다 지고 온 땔감을 풀어놓고 흥정에 들어갔다.
“땔감 사시오, 땔감. 잘 타고 오래가는 땔감이올시다.”
신경석은 땔감을 풀어놓고 호객을 시작했다.
성내에 사는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 땔감을 해오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가, 설이라곤 해도 아직은 날이 춥고 사나운 터라 파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래에 들어 부잣집에서는 나무를 때지 않고 석탄(石炭)이란 놈을 사다가 오래 불을 틔운다고 하지만, 성내의 부민들에게 여전히 나무는 주요한 땔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신경석이 좌판을 벌린지 채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아 땔감은 다 팔렸다.
그럭저럭 장사가 잘되어, 어물전에서 간고등어 한 두름을 사고 나서도 돈이 꽤나 남았다. 허리춤에 두름을 묶고 어물전을 나서려는 차에 경석의 발꿈치를 작대기 하나가 두드렸다.
“어르신이십니까.”
경석은 누군지 확인하기 무섭게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어르신이라는 것은 바로 최첨지 밑에서 소작을 관리하는 마름 김씨 노인이었다.
경석이 부쳐 먹는 땅도 이 김씨의 손아귀에 달린 땅이라 경석은 이 욕심 많은 늙은이를 대할 때마다 늘 기가 죽어 버리곤 했다.
게다가 이 노인은 기세 좋게 이죽거리는 것이 장기라, 구변(口辯) 좋지 않은 아랫사람을 다룰 때는 늘 말하는 것이 함부로 나오곤 했다.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날씨가 추우면 나오면 안 될 일이라도 있나? 설이고 하니까 새로 두루마기나 맞춰 볼까 싶어서 나왔다. 근데, 그건 뭐꼬?”
시력이 좋지 않아 반쯤 찡그린 눈으로 경석을 훑어보던 마름의 시선이 허리춤에 묶인 간고등어로 향했다.
바짝 마르고 주름진 입술 사이로 혀를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모양이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설이고 하니 반은 제가 반찬 삼아 먹고 나머지는 첨지 어른 댁에 가져다드릴까 싶어서…….”
신경석의 대답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전히 고등어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으데 첨지 으른이 정초부터 자네 같은 사람이 가져온다고, 이런 잡어를 잡수시기야 하긋나. 오늘 제사상만 해도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리 놨든데. 그 친지분들이 죄다 세배 올리러 선물을 싸들고 찾아뵙고 있을 낀데, 괜한 헛수고 하지 말고. 그거 마실로 돌아오거든 자네 먹을 한 마린 재어 놓고 나머진 나한테로 가져온나. 내년 땅 부칠 이야기라면 내가 잘 여쭈어 볼 테니까.”
죽을지 살지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늙은이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마지막에 본심을 드러낸 이 늙은 마름이 말하는 것이 경석은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작농의 주제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예, 그리합지요.”
“카믄 내는 술이나 좀 한잔 걸치고 천천히 들어갈 테니까, 먼저 가그라이.”
마름은 짧은 곰방대를 빼어 물고선 시장통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 사라졌다.
한참을 그가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던 경석은 왠지 모를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라도 살아 계셨으면 이 고등어를 잡숫고 좋아했을 텐데, 오늘 이 고등어는 첨지 어른도 아니고 죄다 마름 김씨의 차지였다.
마름이란 것은 원래 사음(舍音)에서 나온 음차로, 본래 황실의 내장전에나 두던 전호(田戶)를 감독하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넓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늘어나면서 차츰 사전(私田)에도 두게 되었다.
최첨지의 구십 정보 땅은 거진 죄다 이 마름 김씨가 삼십 년이 넘게 맡아 오고 있었는데, 썩 그 술수가 좋아 소작료를 받을 때는 마당통으로 수북이 받아다가 최첨지에게는 평두량으로 담아 건네주고, 남는 것으론 제 배를 불렸다.
최첨지는 그저 세상일 관심 없이 옛 전적이나 들추고 어설픈 한시나 짓는 것을 업으로 삼는 천상 양반인지라, 제때 소작료가 들어오기만 하면 마름이 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최첨지의 소작들에게 이 마름 노인의 말은 거역하기 힘든 것이 되었다.
지금 경석이 소작 부치는 땅도 아버지가 직접 최첨지에게 받은 땅이라고는 하나, 이 땅을 핑계를 대서 도로 빼앗아 다른 집에 주는 것도 마름이 제멋대로 할 수 있었다.
이런 탓에, 최첨지에게 땅을 빌려준 것에 사은할 요량으로 사온 고등어 한 두름이 죄다 이 마름이 꿀꺽해 버려도, 경석은 불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갖다 바쳐야 할 형편이었다.
마름을 욕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겨울이라 놀리는 논밭은 휑하다 못해 어제 쌓인 눈이 얼어붙기까지 했다.
찬바람에 말라서 튼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추웠다. 정초부터 일진이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오늘 하필 장에서 마름을 만났나 생각해 보니 문득 아침에 봤던 그 검은 괭이가 생각이 났다.
그래, 그게 다 그놈 때문이었다. 새해 처음 본 것이 그런 놈이니 일이 잘 풀릴 턱이 없었다.
정초부터 이렇게 운수가 사나우니 무당이라도 불러 굿으로 액땜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덜렁거리는 간고등어 두름이 괜히 얄미웠다.
이제 제 것도 아닌 걸 귀찮게 허리춤에 차고 마름에게 운반해 주는 꼴이었다.
이제 간고등어가 없으면 구실이 없으니 첨지 어른을 찾아뵐 수도 없다. 물론 최첨지야 경석 같은 소작이 문안을 오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을 인물이지만, 그래도 땅을 부치게 해준 것에 대한 이쪽의 성의였다.
그래야 신경석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못된 마름 놈이 중간에서 간고등어를 홀라당 해먹겠다고 나섰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서나 요동으로 가면 맨몸으로도 입에 풀칠은 해 먹고 살 수 있다는데…….’
집에 들어와 벌렁 누워 잠을 청해 보았으나, 신경석의 마음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허탕을 치고 마름 좋은 일만 시킨 것 같아 기분이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눈은 감았어도 정신은 말똥한지라, 신경석은 가만히 누워 나름의 계산을 짜 맞추어 보았다.
지금처럼 마름의 비위를 맞춰 가면서 코딱지만 한 땅을 부쳐 먹고 산다면,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은 가능했다.
흉년만 아니라면, 제국통보로 은화 쉰 냥 정도는 해마다 벌 수 있었다.
물론 대충 그중에서 스무 냥은 소작료로 나갈 것이고, 남은 서른 냥 중에서 열 냥은 군역을 지지 않는 대가로 내는 군포(軍布) 같은 세금이었다.
이래저래 떼고 나면 대충 열여덟에서 스무 냥 정도가 매년 신경석에게 떨어지는 돈이었다.
허나 이 정도로는 혼례를 치르고 가정을 꾸리기는 빠듯했고, 그나마도 흉년이라도 들면 생계를 지탱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홀몸이니 이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이었다.
신경석은 괜히 비어 있는 윗머리를 만지작거려 보았다.
요즈음의 풍속이란 것은, 이미 장가가지 않은 남자가 댕기를 하지 않은 지는 오래였고, 보통 총각은 단발(短髮)을 치고 다녔다. 그러다가 장가를 들면 머리를 길러 상투를 틀고, 제각기 품에 맞게 관을 쓰고 다니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에 상투를 짜볼 날이 있으려나? 이대로 가다가는 그 성깔 드런 마름한테 골수나 쫙, 하고 빼어 먹히다 죽고 말지.’
괜히 답답한 마음에, 신경석은 한동안 물지 않았던 연초(煙草)를 물었다.
짧은 곰방대에다가 신경질적으로 담뱃잎을 재워 넣고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발화기에 기름을 조금 부어 불을 틔웠다.
이내 발화기에서 옮겨 붙은 불이 곰방대 위에서 하얗게 담뱃잎을 태우기 시작했다.
한 모금 훅, 하고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신경석은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그는, 차례를 지내고 나서 마름에게 주기로 했던 간고등어를 샅샅이 발라 먹었다.
간만에 배부르게 포식하고서는, 신경석은 그간 틈틈이 어렵게 모아두었던 은화 서른 냥을 조심스레 고간에 매어둔 조그만 주머니에 넣고서, 두터운 솜옷을 입고 행랑을 짊어졌다.
세간이래 봐야 옷 몇 벌이랑 이부자리가 전부이니, 따로 챙길 것도 없었다.
신경석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막상 먼 곳으로 도망치듯이 가려니 여기저기 밟히는 얼굴들이 많았지만, 괜히 얼굴을 보고 인사하면 마음이 무뎌질까 싶어 새벽녘을 틈타 바쁘게 대구부로 향했다.
신경석은 그곳에서 황성으로 가는 역마차를 탈 생각이었다. 역마차는 서문 밖의 달성역(達成驛)에서 정기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황성으로 가는 마차가 하루에 두 번 있는데, 개중 오전 것은 보통 전날 경주(慶州)에서 출발해 밤에 대구에서 손님을 재운 뒤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니, 지금 서두른다면 충분히 탈 수 있을 성싶었다.
신경석은 문득 멀리서 비쳐 오는 아침 햇살을 보며 기묘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분명 새해 첫날인데 설렘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동트기도 전에 쥐 새끼 혼례 치르듯이 아버지 차례 상을 대충 치르고 나온 게 맘에 조금 걸릴 뿐이었다.
우선은 황성으로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그곳에도 마땅한 것이 없으면 아예 허가 없이 월경해서라도 요동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리해도 안 되면 군문에 몸을 투신하거나, 도박하는 셈 치고 뱃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뱃사람이라는 것이 대우도 좋지 않고 거의 인신매매처럼 선원으로 끌려가는 이들도 많았지만, 운이 좋다면 대양을 건너 영주에 정착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렇게 이 시골구석에서 마름의 눈치나 봐가면서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렇게 신경석처럼 생각하고 고향을 떠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전국의 전답에서 대지주 소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갈수록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땅을 잃은 자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그리고 여기서도 희망을 못 느낀 사람들은 보다 나은 여건과 대우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시라고 하더라도 형편이 그다지 나아질 것은 없었다.
능력 없고 기술 없는 이들은 도시의 하수와 오물을 청소하거나, 혹 상수도가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 물지게를 나르는 잡일을 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운이 좋다면, 방적기로 천을 짜내는 일을 하는 공장에 취직할 수 있을 터였다.
기계로 앉아서 하는 일이라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그것도 일이 고되기는 마찬가지긴 했다.
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려 기생집에 넘겨지는 딸아이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특히 가난하고 궁색한 백성이 많은 강원도(江原道)가 심했다.
산골의 화전민들의 딸들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황성부를 비롯한 내지 도시들은 점차 팽창하기 시작했다.
황성부 인구는 어느덧 물경 50만을 넘어서고 있었고, 개성부나 평양부 같은 몇몇 도시들 또한 10만이 넘는 인구가 상주하고 있었다.
이런 도시들의 외곽 지대에는 빈민촌과 함께 공장제·선대제수공업·가내수공업의 작업장이 혼재되어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이러한 일들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낮에는 공장에서 천을 짜고 품삯을 받고, 밤에는 같은 공장에서 일을 받아와 집에서 수를 놓는 식이었다.
특히 용산의 건너편인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에 이런 공방(工房)과 주거지가 뒤엉켜 있는 일종의 빈촌(貧村)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신경석 또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는 남대문 밖 역마차 정류장에서 몸을 내렸으나, 갈 곳은 허름한 빈민굴인 노량진밖에 없었다.
막 용산에서 노량진 방향으로 축조되고 있는 한강을 건너는 최초의 영구적인 석조다리가 지어지는 광경을 입을 벌리고 보면서, 신경석은 역마차를 타고 건너왔던 배 위로 널빤지를 대어 강을 건너도록 만든 부교(浮橋)를 도로 건너갔다.
그때 신경석의 머릿속으로 갑작스레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석공 기술을 어릴 적 눈여겨 배웠던 기억이 난 것이었다.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돌을 다룰 줄은 안다고 비벼볼 정도는 되었다.
저 다리를 짓는 일에 품을 팔 수 있으면, 생각보다 황성에 일찍 정착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노량진의 허름한 오두막 벽에 판자때기를 덧대 붙여 만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을 하나 얻고서, 신경석은 다음 날 바로 석교를 공사하는 현장으로 나갔다.
다행히 그곳에서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고, 앞으로 족히 5년은 더 걸릴 다리 공사장에서, 몸만 성하다면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