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풍미사방(風靡四方)
「1653년, 포르모사(Formosa)로 알려진 대만(臺灣)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 명령을 받아 코르넬리스 카사르(Cornelis Caesar)는 스페르베르호에 올랐다.
배는 6월 18일 네덜란드령 바타비아항을 출항했다. 불행스럽게도, 스페르베르호는 태풍을 동반한 두 차례의 폭풍우를 만나 포르모사 동쪽 해역에서 한국의 제주도로 표류했고 한국 정부에서는 즉각 이들의 신병을 인수하였다.
이 당시 선원이었던 하멜이 쓴 표류기에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이를 계기로 한국 정부와 포르모사의 신임 총독 카사르는 재빠르게 협약을 체결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극동으로 진출한 이래 한국에 관심을 보여 왔었다. 동방 무역에서 한국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한국이 장악하고 있는 무역권역에 한국 정부와 공식적인 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1610년 12월 헤이그의 17인 위원회가 진서도독부에 한국 정부에 대한 관계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데 혼드(de Hond)호 등이 일시적으로 목포에 입항을 허가받기도 했다.
1627년에는 우베르케르크호가 난파하여 선원들이 한국에 귀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었다.
포르모사의 신임 총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지고 총독부 본성인 젤란디아로 귀환했다. 불행스러운 표류가 그에게는 행운으로 바뀐 셈이었다.
1654년, 한국 정부는 제주(濟州)에 제한적인 입항권을 네덜란드 상인에게 주었고, 2년 뒤인 56년에는 이것을 목포(木浦)로 확대했다.
카스티야·포르투갈 등이 이미 진서도독부로는 입항을 허가받고 있었지만, 한국 본토에 서양 선박이 공식적으로 무역 허가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완고하게 자국 선적의 상선에만 본토 무역을 허가하던 한국 정부가 상당히 개선적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에 진서에 있던 물동량의 많은 부분이 목포로 옮겨 오게 되었다.」
―안토니오스 트라고스, 《17세기의 세계무역질서》,
(아테네:1934)
1661년
태화(泰和) 11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전라도 목포부.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목포부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네덜란드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의 상관(商館) 발코니에서 목포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헨드릭. 이번에는 얼마나 조선에서 머물 것 같은가?”
항구 너머로 펼쳐진 서해의 바다를 보며 감상에 잠겨 있던 하멜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한국식 관복을 차려입고 시원하게 웃고 있는 적발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하멜보다 이미 30년 전에 표류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여 귀화한 뒤, 외부(外部)의 말직 관리 생활을 하고 있는 박연(朴淵,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었다.
“글쎄요. 이제 아주 바타비아에서는 저를 조선의 전문가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책 한 권을 내긴 했지만,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이번엔 한 삼 년쯤 머물 것 같습니다.”
하멜이 총관으로 있는 이곳 목포의 네덜란드 상관은, 대한제국의 내지에 최초로 세워진 서양인의 상관이었다.
일찌감치 한국은 원양 무역에 뛰어들었고, 유럽으로 가는 항로도 이미 백 년이 넘게 운용되고 있었지만, 자국 상단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내지로의 외국 상인의 입항은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모든 무역은 진서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격화되는 무역 경쟁과 조정의 거듭되는 경제적 실책으로 결국 나상이 무너지고 나자, 새롭게 들어선 황성의 의회정부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보호 무역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나상이 무너짐으로서 상업항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목포와 몰락하고 있는 제주의 경제를 건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제국, 특히 내지의 상업 체제는 나상·송상·경상의 3각 체제에서 송상·함상·내상의 3각 체제로 변모하고 있었다.
나상은 공식적으로 그 본부가 해산했고, 경상은 독자적인 무역 활동에서 철수해서 황성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매 시장과 중계 거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인도양을 거쳐 유럽까지 들어가는 서방 무역은 포르투갈과 결탁한 송상이 최종적으로 거머쥐게 되었다.
기어이 송상은, 1558년 나상에서 분리되어 숙주를 기반으로 독자적으로 인도 무역만을 전담해 왔던 「인도고금상사(印度股金商社)」를 1659년 인수함으로써, 나상의 시대는 드디어 종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함상은 몰락의 신호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었으나, 북해(北海)를 근간으로 하는 모피 무역과 대창해를 건너는 동북 항로를 손에 쥐고 영주 무역에도 손을 대고 있었기에 아직 버틸 만한 상황이었다.
함상은 사실상 세훈의 둘째 아들 현도가 세웠던 「계영양행」과 같은 조직을 공유하고 있었고, 상인들의 연합체라기 보다는 단일 상사(商社)와 같은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이들의 경쟁력은 바로 이러한 기업의 일원적인 지배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모피 무역은 요동 모피와 경쟁해야 했고, 영주의 무역로는 내상과 공유하고 있었기에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간 축적된 자본과 의사 결정의 집중으로 여러 상단이 몰락하는 가운데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상은 신대륙의 신천은광을 손에 거머쥔 데다가, 영주 개척에 일찌감치 뛰어들었고, 그에 이어서 아라곤 등과 연대하여 신대륙의 서해안 무역, 즉 타완틴수유―멕시카―영주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뒤이어 함상이 이용하고 있는 북방 항로에 비견하여, 소위 남방 항로라 불리는 북회귀선(北回歸線) 정도의 위도를 항해하는 무역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내상은 이 항로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하와이를 중간 기항지로 선택했고, 새롭게 등장한 하와이의 통일왕조와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국적이나 다른 상단 소속의 선박의 입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카스티야 뱃사람들이 멕시카에서 출발하여 대창해를 건널 때, 중간 기항지 없이 곧장 필리핀으로 항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아직까지 상남을 중심으로 남방 무역에 종사하는 호상, 대일(對日) 무역을 독점하고, 대한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 선박의 무역 거래를 전담함으로써 부를 축적한 박상, 경상도 일대를 상업적으로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상 등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위의 송상, 함상, 내상 정도였다.
허나 이중에서도 인도양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완전히 송상의 독점 체제에 놓여 있었기에, 의회에서는 나상의 몰락 이후로 전라도와 제주의 상인들이 끊임없이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특히 제주는 심왕가에서 작위를 분봉(分封)받아 고씨 일가가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당대의 국주인 고해겸(高海兼)은 만약 조정에서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상단을 제주에 유치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추밀원에는 제주를 근원지로 삼는 탐라 귀족들의 지분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제주와 전라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제 막 의회정치를 시작한 조정에는 이런 압박이 부담스러웠고, 나상을 재조직하는 등의 방법을 궁리하던 차에, 때마침 표류해 온 스페르베르호에 네덜란드의 대만 총독이 승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황성으로 불러들여 공식적으로 협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그간 무역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내지에는 입항 허가를 잘 주지 않던 황성의 조정으로써는 결단을 내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나상의 공백은 컸던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를 선택한 것은, 근간의 영주와 네덜란드 사이의 동맹 관계도 고려되었다.
황성부 조정에서는 가급적이면 어느 지역에서든 특정 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 함께 이익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새롭게 동맹 관계의 물망에 오른 네덜란드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주와 목포로 차례차례 입항 허가를 내준 뒤, 조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목포부 유달산 아래에 예전 나상에서 운영하던 부지를 매수해서 네덜란드에 내어 주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상인들은 여전히 좋은 기항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지 상단들에 비해서 차별은 감수해야 했다.
내지 선적의 배가 내지 항구에 입항할 때는 하역하는 물품에 15%의 관세만 물면 되었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은 33%의 관세를 물어야 했다.
때문에 네덜란드 상인들은 서양에서 물건을 수입해 오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도자기·대포·시계·인쇄기 등을 수입해서 유럽으로 판매하는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포의 네덜란드 상관 총책임자로 부임해 온 것이 헨드릭 하멜이었다.
황성부 조정에서는 이 헨드릭 하멜과 협의하여 무역을 관리할 요량으로 목포부윤에 네덜란드에서 귀화해 온 박연을 보임시켰다.
그 뒤로 급격히 친해진 두 사람은 목포의 동인도회사 상관이나 목포부 동헌에서 만나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도 없으시고 갑자기 오셨네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툴툴대는 하멜에게, 박연은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좀 중요한 안건이네. 북해도독부에서 황성부 의회로 건백서를 보냈네. 그곳 상황이 요즘 심히 좋지 않아서 말이네.”
“그렇습니까? 근데 그게 저희와…….”
“끝까지 들어보게. 이미 알지도 모르겠지만, 북해 일대는 모피 무역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고,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던 여진인들이 신대륙으로 대다수 이민 가서, 인구는 격감하고 소출은 감소하여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네. 때문에 황성의 조정에서 이주민을 보내줄 것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강제 이주를 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자발적으로 북해로 갈 이주민을 모집했었네. 그런데 요동이나 진서로 가려는 사람은 있어도 북해로 갈 사람이 없으니, 꽤나 곤혹스러운 노릇이지. 그래서 어제 황성부 조정에서 사람이 내려와 내게 혹여 네덜란드 이민을 북해로 받을 수 있는지 자네에게 타진해 보라고 했네.”
박연의 말을 들은 헨드릭 하멜은 순간 얼떨떨해졌다. 그런 제안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땅을 준다고 이민을 모집하면, 가려는 자들은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국민을 타국으로 이민 보내는 데, 그 조건도 중요합니다. 아시겠지만, 제 독단으로 처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타비아를 거쳐 본국에도 보고를 해야 할 사안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구체적인 협상을 하지 않았지만, 몇 천 명 규모라면 내어 줄 땅은 충분히 있다고 하네. 정착 후 5년간은 세금도 면제하고, 이민 당대에 한해서 군역도 면제하도록 한다는군. 영안부에 네덜란드 상관의 설치도 허락하고, 특히 목축 및 제조업에 종사할 사람이면 좋겠다고 하네. 다만, 그 이후로는 네덜란드 시민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국적이 등록되어 북해도독부에 영주해야 한다고 하네.”
“꼭 네덜란드인이어야 합니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이민자 숫자는 제한적이고, 최근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독일 일대에서 독일인 이민자를 구한다면 숫자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그 문제는 한 번 조정에 상주해 보겠네. 자네도 바타비아로 들어가는 선편에 이 문제를 보고하는 서한을 꼭 보내주게.”
박연의 말에 헨드릭 하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꾼이라는 것이 꼭 물건만 거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력 산업도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물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노예 무역에는 손을 대고 있지 않았지만, 이민 사업이라면 괜찮았다.
일이 잘 추진된다면 북방 항로로 접근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한창 성장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 이민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네덜란드는 이미 신대륙에 독자적인 식민지인 니우 네덜란드를 확보하고 있었고, 향료제도 일대에도 진출해 바타비아 항을 세우고 동방 항로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보내는 이민자들의 숫자도 채우기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면 이민을 하고자 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럽은 지난 40여 년간 긴 전쟁에 시달린 직후였다. 1604년 보헤미아에서 발발하여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를 끌어들인 이 소위 40년 전쟁은, 결국 1644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가운데에서 주요 전장이 되었던 독일 일대의 소제후국들은 참혹한 황폐화를 겪었고, 그곳의 주민들은 아직도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덴마크나 북독일 일대에서 이민자를 구한다면, 충분히 기후 조건이 그나마 비슷하고 적어도 땅을 얻을 수 있는 북해로 건너오겠다고 할 사람은 있을 터였다.
물론 박연과 하멜의 계산과는 다르게 일은 그렇게 손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멜의 서간이 바타비아를 거쳐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는 본국 헤이그로 도착하기까지 거의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고, 다시 그곳에서 평의회에 안건이 회부되어 공식적으로 한국과의 협상단을 꾸려서 내한하기까지 다시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사이 북해대도독으로 있던 윤선도(尹善道)가 황성부로 올라와 의회의원들에게 이민 계획에 대한 주청을 다시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문제에 관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3년만인 1664년, 바타비아를 통해 보내왔다.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바타비아 총독은 1등 서기관 자카리아스 바게나르(Zacharias Wagenaer)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목포로 보냈다.
이곳에서 임기가 연장된 총관 헨드릭 하멜과 함께 협상단을 꾸린 바게나르는, 위임장을 들고 황성부로 향했다.
황성부 의회에서 이루어진 협약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북해도독부 간의 양자조약이 이루어지고, 이 협약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대한제국 의회의 도장이 추가로 찍혔다.
이 이민 협약서는 세계 최초로 공식적으로 이민 문제를 명시한 조약이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서 1668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이민자 모집이 이루어졌고, 이듬해에는 덴마크와 북독일 일대로 확대되었다.
당초 생각대로 반응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던 네덜란드 본국에서도 많은 이민자들이 모여들었을 뿐만 아니라, 덴마크와 북독일에서도 이민을 신청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 문제를 직접 현장에서 감독하기 위해 대사로 파견된 박연은 최초로 대한제국이 유럽에 공식적으로 주재시킨 전권 대사가 되었다.
박연은 헤이그에 대사관을 조직하고 이곳에서 3년간 머무르며, 오랜만에 고향의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이렇게 1671년 1차로 선발된 네덜란드인 680명, 덴마크인 140명, 독일인 251명 총 971명이 총 일곱 척의 배에 나뉘어 바타비아를 거쳐 북해로 이주했다.
이 가운데에는 훗날 북해를 중심으로 북극권 탐사의 업적을 쌓게 되는 비투스 얀센 베링의 아버지인 요나스 스벤센 베링(Jonas Svendsen Bering)도 타고 있었다.
덴마크의 세관원이었던 요나스 베링은 북해의 항만에 세관 감독관의 자리로 가는 조건으로 이민을 하게 되었다.
그와 그 가족은 영안부의 시가지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아들 비투스 얀센 베링[白濱緣]을 얻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영안부로는 북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틈틈이 들어왔다.
이들은 예전 여진족이 넓게 퍼져 살던 땅으로 흩어졌고, 혹자는 모피 무역에 종사하고, 또 일부는 영안부에서 상인·관리·교육자 등의 전문직종에 진출하기도 했다.
대개는 밀·보리농사와 목축업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최초로 1685년 영안부에 맥주를 만드는 양조창을 세우게 된다.
이후 영안 맥주는 제국 최고의 명주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1662년
태화(泰和) 12년 맹춘(孟春)
요동국 성경부.
김윤의 치세 동안 요동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개 번왕(藩王)에 불과한 심왕이 심요대도독을 겸작하며 기형적으로 운용되어 왔던 요동의 기존 정체(政體)가 종식되고 요동국이 세워졌다.
번왕이었던 그 품계 또한 국왕(國王)으로 올라갔고, 정식으로 도읍에 종묘와 사직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변혁의 초석은 김윤이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부터 계속되어 왔던 변화의 결과에 불과했다.
오히려 가장 큰 공헌은 한 것은, 김윤이 몰아낸 폐주 금양군이었다.
요동을 황성으로부터 분리해 하나의 독자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여러 가지의 정치적 요인과 무리한 본토 침공으로 인하여 그는 몰락을 자초했고, 결국은 내심 가장 꺼려 하여 죽이려 했던 핏줄인 김윤에 의해 도로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다.
황성의 태정제는 내전의 확산을 막고 금양군의 실각을 이루어내기 위해 어차피 언젠간 주었어야 할 요동의 공식적인 자치권을 김윤에게 쥐어줬었다.
이 이전의 김윤의 삶 또한 파란만장한 것이긴 했으나, 그는 꽤나 젊은 나이에 이러한 정치적 격변의 유산을 상대적으로 손쉽게 권력을 손에 넣었다.
물론 직전까지 목숨이 경각에 놓여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그 과정이 결코 쉽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장인인 한의직이 세자와의 대립을 이유로 폐주 금양을 배신하고 김윤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를 통해 군권까지 손에 넣은 김윤을 제지할 수 있는 세력은 요동 안에는 적어도 없었다.
김윤의 즉위와 요동국의 설립을 통해서, 요동이 그간 갈망해 왔던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고, 대립도 수면 아래로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요동의 대내적인 상황뿐 아니라, 김윤의 아버지인 인양군 대로부터 황성부에 다져져 있던 강력한 인맥은 태정제가 거느리는 황성부의 조정과도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김윤의 치세가 시작된 것은 요동이 그간의 수렁과도 같은 내전과 분란의 시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1617년, 처음으로 요동왕의 면류관을 쓰고, 성경 태안궁의 용좌에 김윤이 처음으로 앉았을 때, 그의 권력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사실상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의직을 둘러싼 심양한씨들이 강고한 벌족(閥族)을 이루고 김윤과 공히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동왕 김윤은 일찌감치 심양한씨들의 과도한 권력이 한의직의 시대가 지나가면 차츰 무너져 갈 것으로 예측했다.
한의직의 나이 이미 환갑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자명했다.
약한 왕권, 혼란이 막 종식된 사회, 그리고 요동의 취약한 자생력에도 불구하고 김윤의 정치는 성공적으로 순항했다.
결정적으로 주효했던 것은, 김윤 스스로가 왕권 강화의 의지를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심양한씨의 권세를 분산시키는 것에 신경을 썼다.
1631년, 한의직이 중풍으로 사망하자, 김윤에게는 권력 구조를 재편할 기회가 찾아왔다.
김윤은 「공회(公會)」를 설치하고 권력의 분산을 시도했다. 김윤은 심양한씨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취하지는 않았다.
한의직 사후 심양한씨의 주축이 된 한의직의 조카 한재흠(韓載欽)을 구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왕권에 기댄 편법적인 권력 대신 공회로 직접 진출하여 공식적인 권력을 향유하라는 것이었다.
한씨 일문에 공회의 세습 의원직을 줄 테니, 자발적으로 이 공회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대신 이 과정에서 동시에 김윤은 공회를 구성할 의원의 1/3을 왕명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
한씨를 주축으로 한 「동당(東黨)」과 김윤 속하의 세력인 「서당(西黨)」이 각기 공회에 진입한다면, 김윤 자신이 임명하는 의원과 서당 출신의 의원들을 포함해 국정 장악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공회에서 합의된 사안의 결정권은 결국 왕이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켰다.
물론 한재흠으로서도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설사 왕이 서임의원(敍任議員, 왕이 직접 임명하는 의원)과 서당을 통해 공회를 장악하고자 하더라도, 숫자가 많은 동당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재흠은 대신 서임의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의원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아예 동당과 서당을 공식화하고, 의원추천권을 당에 주도록 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나머지 2/3의 의원을 서당과 동당이 1/3씩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재흠으로서는 동시에, 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동당에서 1/3의원을 공회에 항상 내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제도화된 권력 분산을 통해, 김윤은 정치적 충돌 없이 왕이 주도하되 권력 계층 전체가 참여하는 국가적 개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권력자들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화폐제도에 있어서 전권(專權)을 행사하는 왕립요동은행은, 동양에서 최초로 세워진 근대적인 중앙은행이었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는 1609년 수립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Amsterdamsche Wisselbank)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은행에 축적된 금 및 은을 함부로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인출하지 못하게 한 점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것이었다.
왕립요동은행에서 국고를 엄격하게 보유 및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이를 바탕으로 발행되는 요동화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었다.
이는 상업적 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었고, 화폐를 주조할 때 발생하는 세금만으로도 왕실의 내탕금을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김윤의 선택은 탁월한 면이 있었다.
이 외에도 여순에 요동의 입구가 될 항구를 조성하고, 도로를 재정비하며, 부흥하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일에 신경을 씀으로 인해, 김윤 치하의 요동은 제2의 번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종종 김윤의 치세는, 그의 현조부(玄祖父, 5대조)인 문덕왕 김서윤의 통치와 비견되곤 했다.
문덕왕은 처음으로 심양에 내려와 직접 통치를 시작한 심왕가의 왕이었으며, 지금까지 내려오는 요동의 여러 제도와 문물을 정비한 왕이었다.
심양대학 또한 그의 손에 의해 세워졌으며, 어립장서각 또한 그가 공들여 모은 서적 및 물품들로 채워졌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어디까지나 중세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세훈과 현도가 중앙에서 시도했던 개혁 정책들의 요동 식 변형에 불과했었다.
허나 김윤의 정책들은 본질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국제적 정세에서도 단연 앞서 나가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가 통치하기 이전에, 이미 요동에서는 자생적으로 개혁적 토양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거름 위에서 근대적 요동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바로 김윤이었다.
제조업의 융성과 직업 노동자들의 증가, 그리고 상업자본의 집중과 화폐제도의 발달, 의회제도 등은 모두 이 시기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간다고 할 수 있는 일부 지역 및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김윤은 이러한 근대적 현상들을 제도화하여 국가의 공식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이것을 장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요동의 정책적 성공에 비견할 만한 나라는 네덜란드 정도였다.
“급격한 개혁은 나라의 안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내지의 정세를 가감 없이 알려 도리어 오해가 없도록 하고, 다만 요동이 태평한 것임을 민간에 알게 하라.”
내지에서 혁명적인 황권 전복이 일어나, 황제가 유명무실한 상징적 존재로 격하되고 의회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요동왕 김윤은 요동의 언로를 오히려 틔워놓았다.
내지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의회주의 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이미 김윤 또한 탐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언문으로 쓰인 벽서(壁書)가 성경부 내에 여러 차례 나붙고 있었다.
이러한 익명의 글들은 왕과 일부 대신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공회의 의석의 문을 좀 더 넓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현재의 요동은 번창하고 있었고, 변란에 시달리는 내지에 비해서 매우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김윤은 내지의 정세를 일반에게 오히려 널리 알림을 통해, 요동이 반대로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를 납득시키고자 했다.
그러는 동시에 국왕, 서당, 동당이 각기 1/3씩 나눠 가지고 있던 지명제의 공회를 개선하여, 기존의 지명권자들의 권한을 1/4씩으로 줄이고, 그리하여 새롭게 남는 1/4의 의석을 매우 제한된 것이긴 하나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고쳤다.
선거권자 및 피서권자는 매년 납세를 요동화로 금화 15관 이상을 내는 자, 퇴직 관료, 왕명으로 작위 및 서훈을 받은 자로 제한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내지의 의회에 비해 더욱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해당되는 사람의 숫자는 오히려 내지에 비해 많았다.
그동안 요동에서는 요동화로 금화 300관 이상을 매년 세금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부유한 사람이 증가했던 것이다.
총 2만 4천여 명의 선거인단이 전국적으로 명단으로 작성되었고, 내지에서 첫 의회선거가 열린 1653년보다 조금 늦은 1655년, 첫 선거가 실시되었다.
다만 피선거 된 의원은 임기가 종신직이었으므로, 이들이 사망하거나 특수한 사정으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지역별로 재선거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공회에 대한 개혁 조치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내지에서 불어 올 수도 있었던 혁명의 파도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김윤은, 내지가 네덜란드 선적에 대하여 제주 및 목포에 입항 허가를 내리자, 뒤질세라 여순항을 어떤 국가의 선적이든 무관하게 입항할 수 있는 자유항으로 선포했다.
다만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에 대해서 세금만큼은 엄격하게 매겼는데, 여순항의 관세가 요동의 국고를 채우는 주요 재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목포에 거점을 마련한 네덜란드보다도 이에 재빠르게 반응한 것은, 가장 뒤늦게 동방 무역에 뛰어들기 시작한 영불연합왕국이었다.
연합왕국은 국왕만 같이 섬길 뿐,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치가 이원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군대·사법·의회 등 모든 부분을 별도로 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요동의 무역에 큰 관심을 보이고 여순에 상관을 재빠르게 수립한 것은 잉글랜드의 동인도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였다.
여순부윤을 지내기도 했던 한재흠이 공식적으로 이들과 협상하고, 같은 조건으로 소위 요상(遼商)들이 잉글랜드 도버(Dover) 및 사우샘프턴(Southampton)항에 입항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
이를 계기로, 요상은 처음으로 기존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원양 항해에 사용하던 교관선에 서양식 대형 범선의 요소를 많이 도입한 요동형 범선을 건조하여 선발주자들이 넘쳐 나는 국제적 원양 무역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재빠르게 양나라 항주, 상남서, 인도 등지에 상관을 세웠고, 북방 무역에는 내상에 밀리기 시작하는 계양양행에 대규모 자본을 출자하여 사실상 계열회사(系列會社) 형태로 만들어 함상의 조직에 크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요상은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직접 유럽 무역에 참여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도버와 사우샘프턴에 상관을 세우고 주재원을 파견했다.
또한 유럽의 금융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는 요상의 사무원이 국왕의 교지(敎旨)를 받아 반공식적인 대사(大使)로 주재하도록 했다.
사실상 동양 최초로 유럽에 상주하는 외교관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한창 발전하고 있는 요동의 경제와 맞물려 막대한 효과를 창출해 냈다.
1661년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Amsterdamse effectenbeurs)를 본따 심양에 「왕립고권거래소(王立股券取去來所)」를 세우고, 그 분소를 여순에도 두어 거래를 원활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고금(股金, 주식) 가격의 변동은 이틀 걸러 한 번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그동안은 공시된 가격으로만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거래가가 지나치게 변동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기도 했지만, 심양과 여순의 양 거래소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상황을 시차 없이 취합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거래가 끝나자마자, 심양과 요양에서는 각자 급편(急便)으로 전령을 보내 밤새 달려 다음 날 아침에 거래 결과를 취합하는 기묘한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다.
거래소 간의 결과 전달 외에도 공식적으로 우편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었고, 때문에 이즈음에 이르러 기존에 이미 깔려 있던 석조가도를 중심으로 우편마차가 등장하게 된다.
최초의 우편 기관은 요동에서 나라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개인 사업으로 시작되었고, 이렇게 생겨난 몇 개의 우편 취급업자들은 역마차가 운행하는 길을 따라 주요 도시에 우편 취급소를 세우고 자신들이 직접 임대하거나 사들인 우편 마차를 통해 전국으로 실어 날랐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은 우편 제도가 아직 미숙한 내지에 진출하여 내지의 우편 수요를 장악하기 시작할 정도가 되었다.
이 시기 요동의 발전상은 놀라울 정도였고, 당시 요동을 여행했던 아벨 얀스존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은 경이롭다는 어조로 심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럽에서 이곳과 비견할 수 있을 만한 도시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암스테르담조차도 심니안(Simniaan, 심양)에 비해서는 그 빛이 바랄 정도다. 혼 강(Hoon―Rivier, 혼하)의 북안(北岸)에는 세워진 지 수백 년이 넘은 훌륭한 성곽도시가 서 있고, 이를 중심으로 수십만에 가까운 인구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깨끗한 돌로 닦인 훌륭한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으며, 이 길을 따라 전국에서 올라온 역마차가 심양에 들어온다.
건물들은 단정하나 사치스럽지 않고, 주민들의 위생 상태는 깨끗하다.
상하수도가 도시 전역에 뻗어 있고,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오물(汚物)의 집하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모인 오물은 심니안의 외곽에 위치한 여러 작업장에서 수분을 걸러내고 비료로 만들어져 농가로 판매된다.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왕궁의 정문과 마주한 광장의 둘레에는 요동이 자랑하는 왕립대학과 백 수십 년 전 선대 국왕이 직접 조영한 훌륭한 도서관 겸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 정교의 교구좌 성당이 매끄럽고 고풍스러운 자태로 서 있다.
이 도시에서는 모든 민족을 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전혀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때 동인도회사의 촉탁을 받아 심양에 상관을 설치하는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심양에 왔던 타스만은, 요동에 깊은 감탄을 하고 정착을 하길 원해, 교섭이 완료되면 요동국 정부에서 직접 자신을 고용해 줄 수 없는지를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타즈만 본인과 요동 모두에게 불행스럽게도 이 일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동인도회사에서도 심양에 상관을 설치하는 문제에 소극적으로 변함에 따라, 타스만은 더 이상의 요동 체제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바타비아에서 동인도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뒤늦게 원양 무역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함대를 육성하고자 하고 있던 일본의 아즈치 막부에서는, 타스만을 큰 비용을 들여 고용했고, 그에게 함대를 내어 주어 이미 경쟁이 치열한 신대륙과 동인도 일대를 피해 남방을 탐사하도록 했다.
바타비아의 동인도회사와도 협상을 거쳐, 타스만은 일본과 네덜란드의 연합 함대를 꾸려 바타비아를 출항해 남동쪽 바다로 향했다.
향료제도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간 타즈만은 거대한 대륙으로 추정되는 섬(실제 역사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을 찾아 항로도를 그렸고, 훗날 그의 이름을 따 태즈먼 해(Tasman Sea)라 불리게 될 바다를 건너 마오리족이 거주하고 있는 아오테아로아(Aotearoa: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이름)에 다다랐다.
그는 이 땅을 네덜란드의 지명을 따서 니우 젤란드(Nieuw―Zeeland)로 명명했다.
일본어로는 마오리 지명을 그대로 옮겨 아오테아로아(蒼手阿呂阿), 약칭 아오테(蒼手)로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어권으로 건너와 창수국(蒼手國)으로 불리게 된다.
어찌 되었든 네덜란드와 공히 최초로 남방 대륙을 발견하게 된 일본은, 훗날 대남양주(大南洋洲,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다투게 된다.
이 소식을 뒤늦게 들은 요동왕 김윤은 그다지 이 일을 아쉬워하지 않았는데, 훗날 이 지역이 지니게 될 가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독자적인 원양 항해의 능력이 아직도 모자라 외국인 선장을 고용해 네덜란드와 연합 함대를 꾸려 탐험하는 일본에 대해서 비웃었다.
“섬 근처에서 물고기나 잡던 이들이 큰 바다로 나오자니, 그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 타즈만이란 자는 우리나라에 먼저 귀순하기를 청하였으나 그 능력에 대해 확신이 없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갈 곳이 없으니 일본으로 갔구나.”
그러나 아무리 요동의 개혁기를 꽃피운 김윤이라고 하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일본은 대양 함대를 꾸준히 갖춰 나가기 시작했고, 진서와 북해에 의해 막혀 있는 대륙 방면이 아니라 드넓게 뚫려 있는 대양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신대륙과 아시아를 잇는 대창해의 동서를 관통하는 항로에 공을 기울이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남방 항로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훗날 필리핀[呂宋]과 남양군도(南洋群島), 대남양주, 혹은 호주(濠洲)와 니우 젤란드를 둘러싼 본격적인 식민지 경쟁에 일본이 일찌감치 뛰어들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그의 치세 동안 남긴 수많은 공과(功過)를 뒤로하고, 요동왕 김윤은 1662년, 일흔둘의 나이로 서거했다.
시호는 「현양왕(賢陽王)」으로 올려졌다.
김윤의 아들로, 그 해 마흔하나의 나이었던 김승(金엷)이 왕위를 이었다.
현양왕 김윤이 성경의 태안궁에서 조용한 임종을 맞이하고, 세자 김승이 왕위를 이은 그 해, 최초의 일본인 개척자들이 고슈(濠洲, 호주)의 동북해안에 상륙했다.
120명의 규모였다.
≪대한제국 연대기 1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