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제62장 남양일흥(南洋溢興) (63/82)

제62장 남양일흥(南洋溢興)

「○“오가는 길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어떤 곳인가?” 하니, 안용복이 아뢰기를, “그것은 하와이[荷蛙國]에 속하는 섬입니다.”하니, 하교하기를, “하와이는 작은 나라이다. 오가는 길에 과연 두루 보았겠는데 그 면적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안용복이 아뢰기를,“하와이는 바로 대창해 가운데 있는데 여러 섬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룬 것으로서 유구국이나 우리나라 제주(濟州)에 비교하여도 많이 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이 남양으로 갈 때에 배가 그 경계에 닿게 되어 머물었는데 항구와 수도가 매우 영락되어 있었습니다. 40년 전에 두창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근래에 들어서야 겨우 모양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敎曰: “沿路有檀香山云, 是何地耶?” 龍福曰: “是係荷蛙國屬島矣.” 敎曰: “荷蛙國, 是小國也. 來往之路, 果爲歷見, 而其地方幾何乎?” 龍福曰: “荷蛙是大滄海中, 合群島成一國者也. 較諸琉球國及我國之濟州, 似無過大. 而臣於行南洋時, 船泊其境, 碇泊其地, 而其港口與國都, 極其凋殘. 四十年前疱疾流行, 人民多損, 僅爲成樣云矣.”」

―《순종실록(順宗實錄)》, 22권,

건희(建禧) 15년(1682) 12월 5일 첫 번째 기사

1672년

건희(建禧) 5년 맹춘(孟春)

대창해(大滄海) 남방대륙(南方大陸).

바다는 잠잠했다. 마치 언제 폭풍이 휘몰아쳤냐는 듯,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해변에는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모래사장 저 너머로는 열대의 삼림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고, 사방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해변에는 파도에 떠밀려 온 나무 조각이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었다. 지난밤의 폭풍우 때문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는 잔해들만이 전날의 참사를 웅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용복(安龍福)이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그 해변에서였다.

분명히 태풍을 만나 밤새 사투를 벌인 것까지는 기억하고 있는데, 눈을 뜨니 녹초가 된 몸에서는 바닷물이 토해져 나오고, 기력이 쇠잔한 채 운신도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한참을 모래사장에서 기다시피 움직이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한참을 둘러보아도 자신이 타고 있었던 배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한 파편들만이 바닷가에 뒹굴고 있을 뿐, 자신과 같이 파도에 떠밀리어 온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한 명을 찾긴 했다.

하얀 피부에 성긴 수염을 가진 녀석이었다.

안용복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 젊은 백인 청년은 바타비아에서 선원으로 고용했던 네덜란드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안용복이 그를 발견했을 때, 이 수줍던 청년의 숨은 이미 끊긴 뒤였다.

안용복은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그 청년의 시신을 수습해 준 다음, 주변에서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도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이 대검과 밧줄 같은 잡동사니들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물에 잔뜩 젖은 화약 때문에 총은 도무지 쓸 수 없었고, 기름이 없는 상황에서 발화기 또한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한 가지 또 다행인 일이라면, 육분의(六分儀)와 망원경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용복은 육분의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측정해 보기 위해 애썼다.

남위 27도 16분, 동경 27도 가량이었다.

그가 숙지하고 있는 경도법은 황성부를 0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생각보다 먼 바다로 흘러 들어간 듯 생각되지는 않았다.

대창해의 남쪽으로는 드넓은 바다 위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흩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이런 외딴 무인도에 잘못 고립되었다가는 살아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안용복은 그런 상황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아직까지 육분의의 기술은 경도를 정확히 측정하기엔 오차가 많았고, 지역에 따라서 경도 1~2도 정도까지 오차가 나긴 했다.

그러나 안용복은 자신이 멀고 외진 섬이 아니라 최근 발견되어 일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남쪽의 대륙의 해안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배가 난파하기 전에 이 대륙의 동해안으로 접어들어 산호초들 사이로 움직이다가 폭풍을 만나 난파하고 말았으니, 분명히 그 해안가로 휩쓸리어 온 것일 터였다.

문제는 어떻게 이 드넓은 땅에서 네덜란드인이나 일본인들이 정착하고 있는 지역을 찾느냐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남쪽의 광막한 대지의 서북쪽 해안에 조그마한 초소를 만들었고, 일본인들은 동남해안에 항구와 정착지를 건설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직 그 크기조차 다 밝혀지지 않은 대륙에서 한 줌 같은 정착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들을 찾기 전에 우선 이 대륙에서 혼자 생존할 방법을 찾는 것부터가 우선이었다.

당장 타들어 가는 목을 식혀줄 식수부터 구해야 했다.

“기사회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이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날 한참을 돌아다녀 해안가에 면한 숲에서 맑은 물을 구해 목을 적신 다음, 멀리 나가지 않고 밤이 오자 안용복은 대충 잠을 청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대륙에서 아직 위험한 들짐승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했던 네덜란드인이 바타비아로 건너왔을 때 전한 바에 다르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猛獸)는커녕 코끼리나 들소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적어도 밤에 불을 틔워놓고 자는 동안 야수에 의해 목숨이 위험할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 안심이었다.

안용복의 예상대로, 넓은 열대 숲에서 잠을 청했음에도, 모기가 들끓는 점을 제외하고는 큰 위험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먹을 만한 식량을 구하는 것은 문제였다.

안용복은 이곳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어떤 것이 먹어도 안전하고 어떤 것이 위험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대로 사냥을 하기에는 사냥 도구도 부족했을뿐더러, 충분한 단백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동물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안용복은 대충 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고, 밧줄을 풀어 한 가닥을 뽑아, 활의 시위를 삼았다.

함께 바다에 쓸려온 대검이 있었으나, 이것만으로 사냥을 하거나 신변을 보호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철로 된 화살촉을 구할 수 없으니, 화살 또한 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것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대충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도구들을 만들고, 안용복은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쓸려온 것이 남방대륙의 동쪽 해안이라면, 이 바닷가를 따라 계속 내려가면 언젠가는 일본인들의 정착지를 마주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안용복이 표류한 곳은 열대기후 지역이고, 일본인들은 온화한 기후의 지방에 정착했다고 들었으니 줄잡아도 몇 달은 걸어야 할 길이었다.

그래도 우선은 살아남은 것이 중요했다. 아무리 모진 여정이라도, 지금으로서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운이 좋아 일본인들이 정착한 곳에 도달하게 된다면, 배를 얻어 타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용복은 주머니가 달렸으며, 곰과 닮았고, 키가 조그만 해서 나무에 들러붙어 사는 처음 보는 동물을 사냥했다.

코가 크고 꼬리가 없는 것이 신기해 안용복은 그냥 이 동물에게 멋대로 개곰이라 이름 붙였다. 검고 윤기 있는 코가 개의 코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놈의 고기를 구워 허기를 달래고, 가죽은 잘 다져서 혁낭(革囊)으로 만들어 수통 대용으로 삼았다. 맑은 물을 충분히 그 안에 담은 다음, 안용복은 남쪽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적도의 북쪽과는 판이하게 다른 하늘이라, 별들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항해 중에 배워둔 몇 개의 별자리들이 아니었다면 안용복은 더욱 고생했을 터였다.

그나마 육분의가 있기에 안심이었다. 대충 밤중에도 어느 쪽이 남쪽인지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태양에 의지해 걸었다. 남반구에서는 대낮에 태양이 남쪽에 오르지 않고 북쪽으로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안용복은 태양을 등지고 걸었다.

며칠을 그렇게 걸었을까, 안용복은 어느 순간 날짜를 세는 것을 잊었다.

남양(南洋)의 맑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저 남쪽으로 걷는 일은 매우 지루한 것이었다. 그나마 지치고 힘들면 어떻게든 식량을 구해 배를 채울 수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슬슬 열대의 웅장한 숲이 끝나가고, 남쪽에서 가을바람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남반구에서는 계절이 반대이니, 여름 무렵이 되가는 지금이면, 이곳에서는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안용복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열대지역을 벗어난다는 말은 곧 겨울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이곳의 겨울이 어떨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일본인들이 기후가 비교적 자신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정착했다고 했으니, 겨울이 따뜻하지는 않을 터였다.

두우우―

안용복이 걱정하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어디선가 처음 들어 보는 기괴하고 낮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자 화들짝 놀랐다.

처음에는 처음으로 기괴한 맹수와 접하게 되는가 싶었으나, 가만히 들어보니 동물이 내는 소리가 아님에 분명했다. 매우 낯설기는 하지만 악기에서나 날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신비롭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안용복은 호기심이 치솟는 것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미지의 상대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것은 디제리두(Didgeridoo)라고 불리는 남방대륙 원주민들의 전통악기였다. 나무에서 흰개미가 파먹은 부분을 관(管)으로 삼아 입으로 공기를 불어 부는 것인데, 그 낯선 소리에 안용복이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안용복은 창을 꼬나 쥐고, 대검에는 손을 가져간 다음, 조용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남방대륙에도 선주민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해준 네덜란드인은, 거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야만인들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들뜨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널찍한 공터에 검은 인영(人影)이 열 명 남짓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또한 갑작스럽게 안용복이 나타나자 눈이 휘둥그레져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간 적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안용복은 손바닥을 펴 보이며 나쁜 감정이 없음을 전달했다.

이들은 처음 보는 노란 피부의 사람의 존재에 당황한 듯했다. 이내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를 조심스럽게 자신들이 앉아 있던 나무 그루터기로 불러와 앉히고, 먹을 것을 내어 주었다.

안용복과 이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았지만, 온갖 몸짓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안용복이 얻은 정보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리(Murri)라고 불렀으며, 피부는 검고 흰색 염료를 벗은 몸 위에 펴 바르는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소리를 내고 있던 악기의 이름은 디제리두였고, 남자 넷에 여자 여섯의 조촐한 무리를 지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안용복의 존재에 관심이 지대하게 많았다. 그를 만져 보기도 하고, 안용복이 입고 있는―표류한 뒤로 지금은 넝마나 다름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면 옷에도 관심을 보였다.

안용복이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대검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안용복은 이 대검으로 이들의 디제리두의 표면에 아름다운 장식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반대로 육분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그저 마법사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안용복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 같은 존재였다.

“나와 같은 피부의 사람들을 본 적 있소?”

안용복은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고, 이들과 함께 몇 달을 머물며 천천히 남쪽으로 향했다. 원주민들은 때마침 남쪽을 향해 가는 길이었고, 안용복이 동행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어느 정도 안용복이 이들의 말을 배워가며, 기초적인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원주민들이 일본인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마법사님, 아니오. 근데 다시 꿈의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까? 당신과 같은 존재들이 다시 돌아오는 겁니까?”

원주민들은 안용복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했다.

나중에 말을 어렵사리 알아듣게 된 뒤 안용복이 들은 바에 따르면, 이들에게 내려오는 전승 때문에 이들은 안용복을 귀신처럼 여기고 있었다.

전승이란, 바로 아주 오랜 옛날 바이암(Baiam)이라는 신과 그들의 동료들이 꿈을 꾸면서 천지를 창조했고, 지금은 바위와 동물로 돌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오는 때가 바로 「꿈 시간(夢幻時, Tjukurpa)」라 불리는 때라는 것이다.

원주민들은 안용복을 꿈 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기 위해 광물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마법사로 여겼다.

안용복이 가진 대검이 바로 광물의 정기를 뽑아온 것이고, 그가 가진 기괴한 마법사의 문양들이 새겨진 육분의는 감히 사람이 만져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안용복은 이에 대해서 가히 부정하려도 들지 않았고, 긍정하려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 부정하기에는 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매우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안용복이 여태까지 접해 보았던 언어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들의 언어를 몇 달 사이에 완벽하게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삼 개월 정도를 함께한 뒤, 어느 큰 강의 하구에 마주쳤을 때 안용복은 이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그 강을 건너지 않으려 했고, 안용복은 그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법사의 말이더라도,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 강을 건너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안용복을 따라 건너갈 수 없다고 했다.

아쉬운 노릇이지만, 안용복은 그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며칠을 강가에서 그들과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며 뗏목을 만든 안용복은, 조심스레 노를 저어서 강을 건너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가는 길마다 옛 신들의 마법사님께 함께할 겁니다.”

안용복은 이들의 환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문명과 동떨어진 야만인에 불과했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삶의 방식이 다를 뿐 이들 또한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용복은 깨달았다.

이들은 똑같이 인간의 감정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증오하고, 때로는 연민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오해 섞인 환대이긴 했지만, 안용복은 이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인정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물론 적대적으로 부딪혔다면 이들도 적대적으로 나왔을 터였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접어들자, 완연한 늦가을의 날씨가 계속되었다.

걸칠 수 있는 가죽으로 최대한 몸을 두르고 나서, 안용복은 서둘러 발걸음을 바삐 했다.

그간 배워둔 원주민 말이 남쪽에서 마주친 원주민들과 소통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제각기 수많은 방언으로 갈라진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기본적인 대화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자 황색 피부를 본 원주민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처음 안용복에게 적대적인 접근을 했다. 분명히 일본인들과 마찰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간신히 이들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시도한 안용복은, 일본인들이 머지않은 곳에 정착지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주민들은 안용복에게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 것을 강요했다. 안용복이 그들과 같은 무리가 아니라면, 그곳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우 사납고 적대적인 무리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용복은 그곳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평생 이곳에서 원주민들과 섞여 대지를 떠돌며 살 수는 없었다.

늦은 밤 원주민들이 잠든 사이 몰래 평원을 향해 도망친 안용복은, 무작정 남쪽으로 걸어갔다.

사흘 남짓이 지났을까, 강을 끼고 도는 평원 저 너머에서 회색의 연기가 멀찍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몇 줄기 길게 솟아오르는 것으로 보아 원주민들이 피우는 불씨가 아니었다. 거의 다섯 달에 걸친 여정 끝에 일본인들의 정착촌에 다다른 것이었다.

1672년

칸분(寬文) 11년 맹동(孟冬)

일본령 호주 난요도(南洋道) 히라자와(平澤).

겨울이 지나가고 여름이 왔다. 북반구라면 한창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일 테지만, 남반구는 뙤약볕이 대지를 태우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안용복이 일본인 정착촌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몇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다지 환대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일본인들은 안용복을 심할 정도로 처음에는 경계했다.

갑자기 나타난 한국인의 존재가 이들로서는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남방대륙의 소유권을 놓고 네덜란드와 이런저런 설왕설래가 오가는 차에, 한국인들이 이곳에 진출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안용복의 등장과 함께 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안용복이 일본어에 능숙한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원래 소싯적에 내상에 몸을 담아 진서와 일본을 오고 간 적이 있었던 안용복은, 진서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다.

가까스로 자신이 그저 표류해 와서 어렵사리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을 그곳의 일본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착촌의 지도자로, 부교(奉行, 봉행)의 직분을 가진 치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은 안용복을 반구금 상태에서 풀어주지는 않았다.

호주의 남동 해안에는 「난요도(南洋道)」라는 일본 행정기구가 설치되어 있었고, 치카마츠는 난요도의 제5대 부교다. 그러나 사실상 난요도 속하에는 5개의 정착촌과 3,000명 남짓의 인구가 전부였다.

치카마츠 몬자에몬은 원래 「닌교죠루리(人形淨瑠璃)」라 불리는 인형극으로 유명했던 극작가로, 원래 그저 그런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라, 높은 벼슬을 할 신분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풍류를 즐겼던 아즈치 막부의 제5대 쇼군인 오다 노부나리(織田信就)가 그를 매우 좋아해서, 주요 관직으로의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치카마츠 몬자에몬은 노부나리의 어여쁨을 받으며 승승장구했으나, 이내 막부의 기존 관리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정쟁(政爭) 끝에 결국 이 머나먼 바다 바깥으로 사실상 유형(流刑)에 처해져 개척지의 부교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상의 좌천이다 보니 치카마츠는 자신이 남방대륙에 와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공적을 세워서 일본 본토로 돌아가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정착지를 안정화시켜야 했다.

치카마츠는 내키지는 않지만 정력적으로 척식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 땅에 고슈(濠洲)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치카마츠였는데, 기존에는 네덜란드어 「아우스트랄리어(Australi )」를 단순히 「난포타이리쿠(南方大陸)」라고 불리던 것을 「고슈(濠洲)」, 즉 호주라고 명명했다.

이와 함께 치카마츠는 본국에 정착민을 좀 더 보내줄 것과 무기를 공급해 줄 것을 꾸준히 상신했고, 난요도와 본국을 잇는 중간 기항지를 확보하기 위해 해군 증강론도 펼쳤다.

이것은 효과가 있어서 영국 범선 기술의 도입으로 건조된 일본의 함대가 벨라우(Belau, 팔라우)를 점령하고 이곳을 중계지로 삼게 되었다.

서부 대창해[西太平洋]의 해역은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장악되어 있었고, 일부 일본 상선을 제외한 군함들은 유구국에도, 대만일대에도, 심지어 필리핀에도 기항하기가 힘들었었다.

때문에 대양을 횡단하는 항해에서 보급을 받기가 곤란했고, 이것은 네덜란드와 공동으로 개척한 꼴이 된 호주로 진출하는데 심각한 장애였다.

그러나 벨라우를 확보함으로서 일본은 독자적인 항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결국 이 덕택에, 호주로 이민 오는 일본인 정착민들의 숫자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치카마츠가 난요도에 부임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정착민 인구는 3천가량에서 8천가량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치카마츠는 곧 막부의 신임을 되사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돌연, 한국인이 호주에 나타난 것이었다. 안용복의 존재는 치카마츠로 하여금 놀라다 못해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미 해외에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이 충분하고 경험이 많은 한국이 호주에 진출하면 일본 정착지는 순식간에 도태되어 버릴 터였다.

치카마츠는 안용복이 그러한 일환으로 호주로 파견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안용복은 그저 표류 선원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치카마츠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본국으로 바로 송환은 못 시켜드리겠소. 내가 일본으로 귀환하는 길에 함께 동행하셔서 막부의 심문을 거친 뒤에야 돌아갈 수 있으실 것이오.”

“내가 죄지은 신분도 아니고, 밀정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 일본까지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안용복은 그야말로 기가 찰 지경이었다.

고집불통인 치카마츠를 설득하는 것은 진즉 포기했지만, 그래도 일본까지 끌고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돌려 보내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잠시 몇 달 일본에 머물며 조사를 받자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불쾌한 일입니까?”

되레 치카마츠가 물어오자, 안용복은 그만 말문을 잊었다.

치카마츠의 요구가 통상적인 관례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안용복이 아는 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표류민의 송환(送還)에 대해서 체결된 공식적인 협약이 없었다. 그저 관례적으로 특별한 밀정행위나 밀수행위 등의 혐의 사항이 없는 한 즉각 돌려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니 본국에 가서 이런 혐의를 자세히 심문받은 뒤에 한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한다고 치카마츠가 뻗대는 것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안용복의 송환 문제가 외교적 결례로 비화할 정도로 중요한 신분 출신이 아니었기에, 안용복은 그저 불쾌해 지금은 참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순순히 치카마츠의 뜻을 따라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곳에 분명히 네덜란드령 바타비아로 가는 상선이 삼 개월에 한 번씩 들어오고, 이것을 타고 바타비아로 가면 나는 곧장 우리나라 땅인 상남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굳이 한참을 돌아가 일본을 거쳐 그곳에 머무른 다음 조사까지 받고 귀환하란 소리요?”

일본어가 가능한 안용복은 그간 난요도의 행정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이곳, 히라자와의 이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치카마츠를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안용복은 혹여 치카마츠가 자신을 본국으로 돌아갈 때의 일종의 개선 전리품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호주로 진출할 의도로 밀정을 파견했는데 그것을 자신이 색출해서 끌고 왔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만둡시다. 어차피 내 허락 없이는 이곳 히라자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요. 두 달 뒤에 새로운 난요부교(남양봉행, 南洋奉行)가 부임해 오면, 그가 타고 온 배를 타고 나는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무조건 함께 일본으로 가야 할 거요.”

치카마츠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손을 휘젓고 나서 안용복을 내쫓았다.

그 뒤로 안용복은 수시로 치카마츠에게 접견 신청을 넣었으나, 치카마츠는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히라자와의 허름한 객사(客舍)에서 멀리 보이는 남양의 바다 냄새를 맡으며 안용복은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즐기지 않는 일본인들의 식습관상 차려진 밥상은 입댈 것이 없었고, 겨울임에도 외풍이 부는 허름한 목조 객사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버틸 만했던 것은, 안용복과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나누어 보려고 찾아오는 히라자와의 젊은 일본인들 때문이었다.

“치카마츠 님이 난요부교로 부임해 오신 뒤, 고슈가 확실히 성장을 하긴 했습니다. 이곳 히라자와에는 변변한 울타리도 없었는데, 목책이나마 튼튼하게 세워졌고, 본국에서 총과 화약도 넉넉하게 지급되어 원주민들을 서쪽으로 몰아냈지요. 이번에는 파종도 잘되어서 처음으로 쌀을 수확했습니다. 낱알은 충분치 않지만요. 하지만 답답한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사실상 치카마츠 님은 이곳 고슈에 전혀 애정이 없습니다. 이곳을 키워낸 것도 오로지 막부의 환심을 사서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지요.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과수를 하겠다던가, 혹은 밀 농사를 지어보겠다는 것을 절대 허락해 주질 않습니다. 본국에서는 오로지 농사가 잘되고 말고를 생산된 쌀의 양으로 판단을 하니까요.”

특히 안용복과 친해진 것은 야나기타 하치로(柳田八郞)라는 청년이었다.

토사의 말단 사무라이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던 그는 도저히 고향에서 먹고살 방책을 세울 수 없어 결혼도 포기하고 일찌감치 호주로 옮겨온 이었다.

글을 배운 바 있기에 그는 이곳에서 난요도 관부의 서리(胥吏)로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윗줄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꿰고 있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야나기타 선생이 보기에는 내가 어찌 될 것 같습니까? 치카마츠 부교가 날 전리품 삼아 돌아가려는 것 같습니다만.”

야나기타와 어느 정도 친해졌다는 확신이 든 뒤에, 안용복은 넌지시 그에게 자신의 신변 처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말단 서리인 야나기타가 아는 것에는 한도가 있을 터였지만, 워낙 좁은 정착촌 바닥이니 만큼 듣는 게 없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야나기타는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안용복의 귀에 입을 가져다댔다.

“저도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허나 늘 조심하십시오. 혹여 항해 중에 빠져나갈 기회가 있으면 차라리 그러시는 편도 괜찮을 겁니다. 벌은 받지 않더라도, 우리 일본 본국의 사법이란 게 아직까지 굼뜨고 제멋대로인 면이 없잖아, 한번 심문이니 재판이니 받기 시작하면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야나기타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더욱 조심스럽게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카마츠 님은 본인의 입신영달을 위해서는 앞길에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도 이득이 될지 안 될지를 따져볼 사람입니다.”

야나기타와 대화 끝에 안용복은 내심 마음을 굳혔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번도 쉬지 않고 갈 수 없으니, 어딘가에는 기항을 할 터였다. 하다못해 일본이 개척한 기항지인 하라오(벨라우, 拂尾)에는 들릴 터인데, 이곳에는 드물게나마 유구국이나 네덜란드 선박이 기항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만 맞다면, 이들을 이용해 탈주하는 것도 가능했다.

어찌 되었든 곱게 일본으로 순순히 끌려가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치카마츠의 그간 성품을 보았을 때, 자신을 밀정으로 몰아붙여 자기 정치적 경력에 한 줄 덧붙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일본에서 몇 년이고 붙들려 조사를 받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안용복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새로운 난요부교로 에도 기반의 다이묘인 도쿠가와 가문의 후손이자, 막부에서 영향력 있는 신하 중 하나인 토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가 부임해 오게 되었다.

치카마츠가 난요도를 키워 놓자, 일본 조정에서의 난요도에 대한 인식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이 일찌감치 장악한 대창해의 동서횡단항로(東西橫斷航路)에 대항해 남북종단항로(南北縱斷航路)를 성장시키고자 했고, 그 종착지로 호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치카마츠가 좌천당하다시피 호주로 내려온 것이 엊그제인데, 막부의 중신 중 하나인 토쿠가와 이에노부가 직접 호주로 건너온다는 것은 그만큼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 되었든, 치카마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토쿠가와 이에노부가 부임해 오자마자, 관인(官印)을 내어놓으며 한국 밀정을 자신이 잡아두었다고 치카마츠는 토쿠가와 이에노부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오? 반드시 조정에 상신해서 대책을 의론해 보아야 할 것이오.”

토쿠가와 이에노부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이 난요도의 부교로 있는 동안 이곳에 한국이 진출하기 시작한다면 매우 골치 아픈 노릇이었다. 때문에 토쿠가와 이에노부는 은근슬쩍 치카마츠의 공으로 미루어주며 정부에 빨리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막부의 귀에 빨리 들어가면 갈수록, 자신이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책임질 여지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미 토쿠가와 이에노부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치카마츠는 쌍수를 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본국으로 죄인을 압송해 가서 심문을 받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토쿠가와 이에노부와도 협의가 끝나자, 이제 치카마츠는 완전히 안용복을 죄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그에게 차꼬를 채우고 돌아가는 배에 가두어 버렸다.

안용복은 아무런 언질도 못 받은 채, 그 배에 갇혀 있다가 갑작스럽게 호주를 떠나게 되었다.

물론 그 배는 치카마츠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타게 된 귀국선(歸國船)이었다.

치카마츠는 의기양양하게 본국으로 돌아가서 안용복을 막부 심문관에게 떠넘기며 자신은 공적만 챙겨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죄인 신분으로 선창(船倉)에 갇혀서 그저 배가 항구를 떠난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1673년

엔포(延寶) 원년 맹하(孟夏)

일본령 하라오제도(拂尾諸島) 카츠우라 다이칸쇼(勝浦代官所).

해가 지나고 안용복을 태운 배는 남대창해의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북상하기 시작했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열대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선창에 갇혀서 최소한의 물과 식량으로 버티고 있는 안용복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시키는 대로 심문을 받을 터이니 제발 차꼬를 풀고 먹을 만한 음식을 내어 주시오.”

안용복은 결국 죄를 자백하겠다는 조건으로 선창 밖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치카마츠는 으레 능글맞은 웃음으로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좋은 음식을 대접하며 구슬렸다.

“밀정 행위를 했다고 자백한다면, 본국에는 돌아가지 못해도 몇 년 옥살이를 하고 난 다음에 일본에 정착시켜 줄 것이야. 아내도 얻고, 그렇게 조용히 살면 될 일 아닌가. 알겠지?”

거의 굶주리다시피 몇 달을 선창에 갇혀 있었던 안용복은 그저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며 치카마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치카마츠는 이제는 완전히 고압적인 어조로 안용복을 하대 하고 있었다.

안용복이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자, 치카마츠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안용복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배에서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배 안에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 내 나름 많이 배려하는 것이니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고.”

“알겠소이다. 시키는 대로 하겠소. 잠만 편하게 재워 준다면 그걸로 만족하오.”

안용복은 퀭한 눈동자로 치카마츠에게 약속했다.

치카마츠는 이제 안용복이 반항을 포기하고, 완전히 뜻대로 움직인다고 확신했는지, 그날로 썩 괜찮은 선실을 내어 주고 푹신한 요도 깔아 주었다. 족쇄는 풀어주었고, 원한다면 하루 몇 시간이든 갑판에 올라가 햇볕을 쬐는 것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안용복은 마치 길들어진 개처럼 치카마츠의 눈에 거스르지 않게 조용히 행동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노라고 당당했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굴종과 완연한 패배감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처음에는 혹여 안용복이 엉뚱한 행동을 할까 감시까지 붙여 두었던 치카마츠도, 두어 달이 지나가자 안용복이 완전히 모든 것을 체념했다고 확신했다.

여름의 고된 항해 끝에 귀국선이 일본의 남대창해 전진기지인 하라오에 다다른 것은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물론 이곳은 적도에서 멀지 않은 남쪽 바다였기에 여전히 날씨는 뜨겁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마주친 육지인지라, 선원들과 승객들은 앞 다투어 항구로 내려갔다.

“배에서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곳에서 머무는 보름 동안 술이든 뭐든 원한다면 내어 줄 테니, 푹 쉬어두어.”

하라오에는 난요도(南洋島, 호주)의 부교에 비해 한 직급이 낮은 다이칸(代官)이 사무를 주재하고 있었다.

치카마츠는 이 다이칸이 기거하는 다이칸쇼(代官所, 대관소)에서 머물기로 되어 있었고, 보름 내내 하선해 있을 작정이었다. 때문에 안용복에게 마지막으로 배를 떠나지 말 것을 경고하고 간 것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배를 탈출해 봐야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안용복은 그간 순순한 모습을 보여왔었다.

“그렇게 하겠소.”

안용복은 기가 죽은 모습으로 치카마츠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그의 복종적인 태도를 보고, 치카마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띄우며 배에서 내렸다.

안용복은 가만히 치카마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라오의 다이칸쇼가 설치된 이곳 항구의 이름은 카츠우라(勝浦)라 불렸다.

이곳은 천혜의 항구로, 안용복이 보기에도 중간 기항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항구에 기항해 있는 배들에는 모두, 아즈치 막부가 국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주인기(朱印旗)가 내걸려 있었다.

붉은 해의 모양과도 같다고 해서 소위 히노마루노하타(日の丸の旗)라는 별칭으로도 더 잘 알려진 깃발이었다.

원양 항해를 하는 배들은 선적(船籍)을 나타낼 국기를 내거는 것이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고, 때문에 일본에서도 최근 의무적으로 주인기를 내걸도록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태극기(太極旗)를 배에 걸었다. 이것은 김세훈이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 원양으로 나가는 배가 한국의 관허(官許)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깃발이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이를 거의 국기(國旗)로 삼고 있었다.

배에서 탈출해 보아야, 이곳은 고립된 섬이고, 정박하고 있는 배는 모두 일본 선적이니 사실상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혹여 의심이라도 살까 싶어 안용복은 밤이 되자 조심스럽게 선실로 돌아왔다.

모두 항구로 내려가, 안용복이 타고 있는 배에는 채 서너 명의 선원들만이 당직으로 탑승하고 있었기에, 안용복은 그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간 언제고 탈출 기회를 잡고자 안용복은 치카마츠에게 굴복한 시늉을 계속해 왔었다. 굴욕스러운 일이었지만, 계속 선창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치카마츠가 자신에 대해 별 의심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더군다나 카츠우라에 입항한 뒤로 선원들의 경계가 상당히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상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일본 선적이 아닌 배가 하나 들어오기만 한다면…….’

보름 내로 일본 선적이 아닌 배가 입항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대창해를 가로지르는 배들은 보통 이곳 하라오제도를 거치지 않고 다른 항로를 이용했다.

일본 선적의 배는 한국과 그 동맹 국가의 항구에 어지간해서 입항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안용복을 하늘이 도와주려 했는지, 보름 동안의 기항 일정은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

하라오 근해(近海)에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태풍을 피해, 평소에는 이곳 하라오로 오지 않을 외선(外船)이 하나 입항 허가를 받아서 들어왔다. 필리핀에서 출항한 카스티야 선박이었다.

카스티야 선박이 입항한 사실을 안 안용복의 눈은 번뜩 뜨였다. 저 배를 타기만 한다면 일본으로 압송당하지 않고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시기였다. 그리고 저들이 자신을 일본 관헌에게 넘기지 않고 받아들여 줄지도 문제였다.

안용복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배에는 일본인 선원들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하선해서 항구로 내려가 있었고, 있어 봐야 한둘 정도이니 시선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치카마츠는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지 그간 배로 한 번도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그간 원양 항해를 다니며 경험한 바, 태풍이 걷히면 카스티야 배는 바로 출항할 것을 안용복은 확신하고 있었다.

한국과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일본과도 데면데면한 카스티야인들이었다.

덕분에 태풍을 피해 일본의 전략적 항구인 이곳 카츠우라에 입항할 수 있었을 터이지만, 반대로 이곳 하라오의 다이칸도, 카스티야 선주도 오래 머물기를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직 태풍이 몰아치는 데도 카스티야 선원들이 배로 보급품을 나르고 있는 것이 안용복에게 확신을 주었다. 천천히 머물다 갈 생각이라면 이 폭풍 속에서 보급품을 싣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때는 날이 갠 바로 그 순간이다.’

여름이면 흔하게 오는 태풍이니, 이것이 지나가면 날씨는 급격하게 맑아질 것이었다.

폭풍의 세기로 봐서 다음 날 아침이면 걷힐 것이라고 안용복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탈출의 기회를 빨리 잡아야 했다.

안용복은 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원 둘을 꼬드겨 술을 함께 마셨다. 최대한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선원들을 골아떨어지게 하는데 주력했다.

다행히도 항구에 내리지 못하고 남아 있는 선원들은 어린 잔챙이들이었고, 이들을 구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안용복이 예측한 대로 동틀 녘이 가까워 오자, 태풍은 빠르게 물러가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이제 막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차였다.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카스티야 배가 출항을 해야 했다.

그 짧은 시간만이 안용복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안용복은 갑판 한구석에 서서 카스티야 배를 주시했다.

밤새 분주하게 보급품을 실어 날랐던 선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정오에 가까워져 오자, 안용복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선원들이 곧 깨어나기 시작할 터였다. 그리고 혹시 지난밤 폭풍에 배가 손상을 입은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 다른 선원들이 배에 오를 수도 있었다.

“아!”

그렇게 오만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때, 카스티야 배의 선수(船首)에 출항을 알리는 깃발이 오르고, 선미(船尾)로 닻이 걷혀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안용복의 눈에 띄었다.

안용복은 주저할 것 없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그가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헤엄쳐서 카스티야 배로 향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카스티야 배가 항구를 막 빠져나가려 하는 차, 안용복은 배의 근처까지 헤엄쳐 가서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배에 탈 선원들을 태우고 항구에서 나오던 보트의 카스티야 선원들이 그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고 부둣가로 다시 태워줄까를 물어보던 카스티야 선원들은, 안용복이 유창한 네덜란드어로 거절을 밝히며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다고 말하자, 대충 알아듣고서는 일단 자신들과 함께 카스티야 배에 올려 보내주었다.

“당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소? 내가 당신을 일본 관헌에게 넘기지 않고 내 배에 태워야 할 마땅한 근거가 있냐 말이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깜짝 놀란 배의 선장이 달려 나왔다. 디에고 고메스라는 이름을 가진 선장은 안용복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안용복은 고메스 선장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입을 열었다.

“작년 여름에 바타비아를 출항해 오스트랄리어의 근해에서 실종된 프린스 빌럼 호를 기억하십니까?”

“아, 마닐라에 있을 때 그 배가 사라진 사실을 들었지. 발견된 생존자가 아무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 배에 타고 있었소?”

안용복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난파된 배에서 주어서 가지고 있던 대검을 꺼내 고메스 선장에게 보여주었다. 배에 실려 있던 대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약자인 VOC의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었다가 표류해서 일본인들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면, 그대가 죄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소. 좋소, 승선을 허락하리다. 그런데 우리 배는 멕시카로 직항하는 배인데, 괜찮겠소? 하와이에 가면 한국 상인들이 있을 테니 그곳에서 귀국을 할 수 있겠지만, 알다시피 그대 나라 상인들은 하와이에 우리가 입항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말이오.”

고메스의 뼈 있는 말에 안용복은 순간 낯이 뜨거워졌다.

안용복은 한때 내상에 몸을 담은 적이 있어서, 내상이 하와이 정계에 깊숙이 간여하며, 그곳을 자신들만의 기항지 삼아 타국 선박이 절대 입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입항 금지령이 특히 노리는 대상인 카스티야 선박에 목숨을 구명받게 되었으니, 안용복으로서는 뜨끔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요……. 상관없습니다. 태워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지요.”

안용복은 애써 난처한 기색을 지우고서는,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카스티야 배 산타 마리아(Santa Maria)호가 카츠우라 항구를 막 벗어나서, 원양으로 접어들려 할 무렵에 카츠우라 항구에서 포가 쏘아져서 정선(停船)을 권고했다.

이내 일본 관헌과 병졸들이 산타 마리아호에 접근해서 혹시 탈주한 죄인이 이 배에 탔는지 검수해도 될지를 선장에게 물었다.

고메스 선장은 안용복을 선장실의 커다란 상자에 숨어 있도록 도와주고서는, 배를 마음껏 살펴보라고 일본 관헌에게 말했다. 전통적으로 타국 선적의 배를 검수하는 것이 예의도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을 무릅쓴 마당에 선장실까지 뒤지는 것은 그들로서도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설마 안용복이 고메스 선장의 호의로 선장실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일본 관헌은,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고메스 선장에게 쩔쩔 매며 사과를 하고서는 배에서 내려 항구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붙들릴 일은 없을 것이오.”

일본 관헌을 돌려보내고 다시 출항을 속개할 것을 지시한 뒤, 고메스 선장은 선장실로 돌아와 안용복에게 말했다. 안용복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메스 선장의 손을 꼭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갈아입을 옷을 내어 주겠소. 저녁 때는 나와 식사하며 이야기나 나누도록 합시다.”

고메스 선장의 말에 안용복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줄 떨어졌다. 그야말로 구사일생한 것이었다.

1674년 맹하(孟夏)

하와이 왕국(Aupuni M‘ o Hawai‘i)

단향산(檀香山, Honolulu)

안용복이 하라오제도의 카츠우라 항에서 탈출한 지도 어느덧 한 해 가까이 흘렀다. 그는 카스티야 선적의 산타 마리아호에 의해 구명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지 않을 수 있었고, 디에고 고메스 선장의 호의를 입어 멕시카 왕국의 악사야카틀란(Axayacatlan)항에 도달하기까지 좋은 대우를 받으며 항해를 즐길 수 있었다.

목숨을 건 탈출이 성공한 뒤, 안용복은 마치 새 삶을 얻은 기분이었다.

여우 같은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꼼짝없이 밀정의 누명을 뒤집어쓸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안용복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릴 정도였다.

안용복은 원래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벼슬을 한 적도 없고, 경상도 영일(迎日)에서 근처 어부들에게 배를 빌려주고, 잡아온 고기를 나누는 정도의 소규모 수산업을 한 것이 그의 젊은 시절 경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뒷배도 없고, 교육이라고 받은 것도 일천했으나,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수산업을 정리하고 동래부로 건너가서 혼자 상학(庠學)을 뒤늦게 마치고, 내상의 고용인이 되어 배의 서기(書記) 노릇을 하며 여러 바다를 오고 갔었다.

그러다가 상남(湘南)으로 건너가서 네덜란드와의 중계무역에 관여했다가, 그 인연으로 동인도회사(VOC)에 통역관으로 고용되어 대창해 이곳저곳을 탐사하는 프린스 빌럼(Prins Willem)호에 승선했다가, 호주 연안에서 태풍을 맞아 표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용복은 국가의 보호라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자신과 같은 별 볼일 없는 신분의 사람이 일본에서 화를 입는다고 한들, 나라가 나서서 구제해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하다못해 그런 사실을 모를 가능성도 높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주차공사(駐箚公使)를 선임해서 서로 대사관을 설치하는 문제는 벌써 10년째 논의만 되고 있을 뿐 표류 중이었다.

사실 황성부의 의회도, 아즈치의 막부도 그다지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제1차 진서전쟁[경인동정, 庚寅東征]과 제2차 진서전쟁[을미왜란, 乙未倭亂]을 겪으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깊은 불신의 뿌리가 남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정에서 일본에 장기간 억류되어 있는 국민의 신원을 파악하고 구명을 해줄 가능성이 안용복은 사실상 없다고 보았다.

밀정의 죄를 뒤집어쓰고 낯선 이국에서 희생양이 되느니,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안용복의 탈출은 성공적이었고, 겨울이 될 무렵에는 산타 마리아호에서 하선해 악사야카틀란에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재회를 기약하며 고메스 선장과 산타 마리아호의 뭇 선원들과 헤어지고서, 이곳에 있는 내상의 상관을 찾아가 자신의 신분과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았다.

다시 봄이 찾아오자, 안용복은 내상 선적의 배를 얻어 타고 영주도독부의 조주항(潮州港)을 거쳐 한국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에 다다랐다.

안용복은 귀국할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민 끝에 하와이에 머무르기로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이곳에서 지내보며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해 볼 참이었다.

일찌감치 내상이 신대륙으로 건너가는 항로의 중간 기항지로 개척한 하와이는, 내상의 영향력이 상당히 뿌리가 깊었다. 하와이 본도(本島)를 중심으로 한 토착 세력이 하와이제도 전체를 정복하고 단일 왕국을 세우는 데 내상이 결정적인 도움을 줬을뿐더러, 지금도 신천은광에서 나오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하와이 왕실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안용복은 한때 내상에 몸을 담고 있었고, 그때의 인맥을 바탕으로 내상의 도움을 받는다면, 하와이에 자리 잡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요즘 이곳 분위기가 그다지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십 년 전에 두창이 심하게 창궐해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고, 그것이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어요. 주민들은 가난하고 왕실은 부패했습니다. 이곳에 기항하는 배의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돈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안용복은 우선 내상의 상관을 찾아가서 자금 지원을 요청해 보았다. 그러나 그곳의 행수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별로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만 바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본국에 의뢰하여 제국통보 금화 3백 원만 대부해 주시오. 본국 동래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집과 자산이 조금 있으니, 그것을 저당잡으면 아마 금화 2백 냥 정도의 값은 할 것이외다. 이 정도면 큰 부담은 아니지 않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상관 행수는 잠시 고민하는 척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우선 제 재량으로 이곳에 예치되어 있는 백 냥을 먼저 내어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이백 냥은 본국에 연통을 보내서 안 선생님의 재산을 확인한 뒤에 담보 설정이 완료되면 이곳을 통해 지급하겠습니다.”

“좋소.”

안용복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곳에 투자하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어 보였다. 비록 심한 두창으로 인해 하와이의 경제는 파탄을 겪었고, 그 회복이 더디긴 하지만, 대창해 한복판의 유일한 기항지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어떤 사업을 벌일 생각이십니까?”

“단향을 취급해 볼 생각이오.”

“이곳에 단향이 많이 나서 한때 본국이나 중국으로도 많이 실어 보냈습니다. 때문에 이 일대에 단향산이라는 별칭도 붙었지요.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미 채산이 맞지 않아 이제 더 단향을 재배하는 농가가 없습니다. 좋은 선택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곳에 노동력도 없고, 영세하게 단향을 재배해서 분명히 위기가 오면 견디지를 못했을 것이오. 내가 가만히 보니 금화 삼백 냥 정도면, 꽤나 많은 땅을 사들여서 충분한 인원을 고용해 크게 재배를 해볼 수 있을 성싶소. 더군다나 혹여 안 된다면, 본국의 삼을 들여와 이곳에서 재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소.”

“인삼을 말씀이십니까? 질 좋은 삼은 송상에서 독점하고 있어 그 종자를 내어 주지 않습니다.”

“산삼을 좀 들여와서 내가 직접 개량해 볼 생각이오. 본국이나 일본, 중국에는 송상이 비싼 값에도 팔 수 있을지 몰라도, 영주로 건너가면 인삼 값이 폭등을 하니, 여기서 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삼을 다량 재배하면 분명히 팔 구멍은 있을 것이오.”

안용복의 말에 행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래나 저래나 내상 상관의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혹여 안용복이 성공이라도 한다면, 거래를 트고 수출을 내상에서 전담할 수 있는 데다, 빌려준 돈의 이자까지 두둑이 받을 수 있으니 나쁠 것은 없는 거래였다.

이튿날, 내상 행수는 안용복에게 선금으로 금화 백 냥을 건네주고, 그를 호놀룰루 시가지로 안내했다. 그를 하와이의 군주인 케아케알라니 와히네(Keakealani Wahine) 여왕에게 소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상의 자금 및 무기 지원을 바탕으로 하와이를 일통(一統)한 케아케알라니 여왕의 조상들은 강력한 왕조를 이 땅위에 세울 수 있었다.

왕실은 하와이 모든 땅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그 거래를 일일이 감독했는데, 이것은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용복이 이곳에서 땅을 사들이고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상에 몸을 담고 있던 이라면, 적어도 나의 친구라는 소리네. 지금 땅을 지니고 있는 주인들이 땅을 팔겠다고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허락해 주겠네.”

여자 치고는 묵직한 소리의 여왕은, 이미 내상 행수가 괴어둔 상납금 때문인지, 별다른 트집을 잡지 않고 안용복에게 정착에 관한 인가를 내어 주었다. 그녀는 늙고 몸집이 육중한 편이었는데, 그다지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볼일이 끝났으면 물러나 가보도록.”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힘든지, 여왕은 이내 지친 표정으로 안용복과 내상 행수에게 물러날 것을 명했다. 그녀가 기거하는 할레 알리(Hale ali‘i, 궁정)의 신하들이 그녀의 명을 받아 정중하게 안용복과 내상 행수를 밖으로 인도했다.

“여왕의 건강이 좋지 않습니까?”

안용복은 여왕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상기하고는, 행수에게 물었다.

“듣기에는 변비도 심하고, 몸이 너무 살이 쪄서 거동도 곤란하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요즘에는 등에 농양까지 생겨서 편하게 잠을 들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행수의 말에 안용복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이곳 하와이에 와서 제대로 된 의료 기관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이곳에서는 병증의 치료를 주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아마 수십 년 전 심하게 창궐했던 두창도, 만약 제대로 된 의사가 있었다면 심각하지 않게 그저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곳에 제대로 된 의원이 없소?”

“시원찮은 선의들이 가끔 머물다 가긴 하지만, 본국에서도 귀한 몸인 의원 나리들이 어디 이곳까지 오려고 하겠습니까. 제중원이나 광혜원에서 공부를 한 훌륭한 의원들은커녕, 대충 배운 사람도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나저나, 일이 잘되었으니, 본국에서 연락 오는 대로 나머지 자금도 내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소.”

내상 행수는 약속을 지켰다. 채 반년이 지나가기 전에 본국과 교섭을 끝내고, 자금을 지원받아 행수는 안용복에게 장기로 저리 대출을 해주었다.

이렇게 내상으로부터 받은 제국통보 300원으로, 안용복은 우선 하와이 섬의 남쪽 해안가에 넓은 지대를 사들였다. 그는 이곳에 단향과 삼을 재배하기 위한 농장을 지은 다음, 하와이 원주민과 멕시카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기로 약속하고 고용해 온 멕시카인들을 도합하여 천여 명의 인부를 꾸렸다.

한동안 소출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삼이 이곳 토양에 적응해 충분히 성숙하기까지는 십 년은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은 단향으로 수익을 내야 했다.

제사 때 피우는 향목(香木)의 일종인 단향은 특히 중국에서 수요가 많았고, 우선은 재배한 단향의 판로를 중국에 뚫어야 했다.

내상에 지속적으로 설득한 끝에, 농장을 꾸린지 삼 년째 되던 해에, 양나라 항주에 나가 있는 내상의 상관을 통해 단향을 팔기로 하고 처음으로 바다 건너로 선적해 보냈다.

거의 자금이 바닥나던 차였으니, 만약 이 배가 침몰하기라도 한다면 안용복은 길거리에 나앉을 상황이었다.

다행히 차츰 경제가 안정되어 가고 있던 양나라에서 단향은 꽤 좋은 값에 팔려 나갔고, 장기적인 거래처도 확보할 수 있었다.

안용복은 이곳에서 하와이 여인과 결혼도 하고, 농장의 규모도 키워 나갔다. 단향의 재배와 판매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더불어 인삼 또한 소출이 나기 시작하면서 안용복의 재산은 순식간에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저 농장 운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아주 이 땅에 뿌리를 박아야겠다.’

토착민 아내를 맞이하고, 그 사이에서 아이들까지 생긴데다가, 이곳의 사업이 잘되어 가자 안용복은 하와이에 영구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왕 정착할 바에는, 이곳에서 영향력 있는 귀족 계층에 편입되는 편이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관계를 아주 끈끈하게 끌어올려야 했다.

안용복이 그 수단으로 삼은 것은, 자비를 들여 하와이 왕실과 이곳의 주민들에게 의료를 제공해 줄 의원들을 모셔오는 것이었다. 그는 내상을 통해 본국에서 보다 좋은 대우를 약속하고 의원 10여 인을 하와이로 불러 왔다.

그중에서는 매우 양질의 교육을 받은 광혜원이나 제중원 출신의 의원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안용복은 호놀룰루에 최초로 병원을 세웠다.

단순히 병원이라는 뜻을 지닌 「할레 라아우 라파아우(Hale l au lapa`au)」, 약칭 「할레 라아우」는 처음에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광혜원에서 의술을 배운 젊고 뛰어난 의사인 현진설(玄眞薛)이 여왕의 농양을 제거하는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이내 이 의원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곳의 한국인 의사들은 안용복의 지원을 받아가며, 지역 풍토병에 대한 치료법의 연구를 시작했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적어도 종두법을 보급하여 두창을 방비하는 등의 성과를 짧은 시일 내에 거두기도 했다.

당연히 기존에 병의 치료를 담당하던 주술사들의 반발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한국인 의사들을 적대하는 분위기를 부추겼고, 이들에게 치료를 청한다면 신들이 노여워 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내 여왕의 분노가 이들에게 떨어졌다. 거의 십 년 가까이 그녀를 괴롭혔던 농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의사들이 처방한 약재를 통해 변비도 한층 나아져, 몸이 한결 건강해진 그녀는 근대의학의 철저한 옹호론자를 자임했다.

여왕의 비호 속에서 「할레 라아우」는 성공적으로 하와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여왕은 직접 이 병원을 운용하는 자금의 일부를 대겠다고 안용복에게 제의해 왔다. 안용복은 이를 통해 여왕과의 관계를 보다 심화시켰고, 케아케알라니 여왕은 안용복에게 왕실의 관직까지 내려줄 정도로 신뢰 관계가 두터워졌다.

이렇게 하와이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안용복은, 가산을 정리하고 좀 더 투자를 받기 위해 본국으로 잠시 들어갔는데, 이미 오가는 내상을 통해 안용복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기에 황제가 직접 안용복을 궁중으로 초청하기까지 했다.

안용복은 반년 가까이 황성부에서 체류하면서, 동인도회사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호주에 표류한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하와이로 건너가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경험담을 《창해표류담(滄海漂流談)》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고, 이내 장안에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가고자 하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고, 대부분은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다 결국 돌아오기는 했지만, 일부는 안용복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정착해 단향·인삼뿐만 아니라 사탕수수 등의 농작물을 길러내는 큰 농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들은 결국 하와이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한인 집단의 1세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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