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학여역수(學如逆水)
「……(전략)…….
이미 앞서 논한 바처럼, 한국인의 자연철학은 이미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것은 유럽과 비견해서도 탁월하게 보일 정도이다.
중국의 문화가 여러 세기에 걸쳐 이 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하지만, 중국인들이 피워내지 못한 꽃이 한국에서는 피어났다.
철학자 서경덕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는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도 그것을 쓸 줄 모른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가진 것이 없어도, 부족하나마 갖고 있는 것으로 무언가를 빚어낸다.”
이것은 탁견이다. 적어도 지난 두 세기간 좁은 땅과 부족한 물자를 극복하고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창조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이들의 서적은 다시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폭넓게 읽히고, 유럽에도 소개되어지고 있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 W. Leibniz),
《한국인의 철학에 대한 서한》, (파리: 1704)
1680년 중동(仲冬)
네덜란드 공화국 라이던(Leiden).
북해에서 습기를 가득 머금고 내려온 구름이 저지대에 짙게 깔렸다.
겨울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낮이 짧아 사람들의 활동이 둔해지는 계절인데, 비까지 내리려 하니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텅 비어 스산한 라이던의 거리를 어떤 남자 홀로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요즈음 네덜란드에도 유행하기 시작한 가발을 뒤집어쓰고 풍성한 코트에 지팡이를 들고 있긴 했지만, 외모는 어디를 보아도 네덜란드 사람이 아니었다.
하얀 가발 아래의 피부는 살짝 그을려 있었고, 검은 눈썹이 짙게 이마 아래에 드리웠다. 코는 매끄럽게 솟아 있었지만, 입은 작았다.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신장은 탁월하게 컸는데, 이 독특한 외모 때문에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끔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이곳 라이던 대학의 최초 동양인 교수인 현진설(玄眞薛)이었다. 그는 특히 한국 의학에 대한 강의를 이 대학에서 설강하고 있었다.
현진설은 자신이 네덜란드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본래 음양오행론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반발하여 나와 경험주의적 의학 교육을 그 교육 이념으로 삼아 세워진 광혜원(廣惠院) 출신의 의관이었다.
광혜원에서 의학 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감에 따라, 광혜원의 의술은 이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한때 척을 지고 있었던 제중원으로 해부학을 강의하러 광혜원 출신의 교수가 강의를 나갈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현진설은 의생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광혜원에서 의학 공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환자를 진료하며 여생을 보낼 성격이 아니었고, 때마침 하와이에서 의사를 좋은 조건에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배를 타고 대창해를 건넜다.
그는 하와이에서 안용복이 세운 「할레 라아우」에 몸을 담았고, 이곳에서 지낸 몇 년 동안 풍토병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는 한편, 하와이 여왕의 등에 난 농양을 수술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꽤나 그곳 생활에 만족하며 몇 년간을 보내고, 또 나름의 명성도 쌓았지만, 현진설은 이내 하와이의 나른한 생활에 물리기 시작했다.
그때 상남으로 가는 내상의 무역선에 선의(船醫)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저 없이 다시 배에 탔다.
안용복은 훌륭한 의사를 잃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현진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무료한 뱃전 생활이었지만, 상남에 오자 현진설의 기운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상남에서 머물며 의원을 개설하여 선원들을 중심으로 진료를 하는 한편, 특히 그간 선상에서 살펴본 선원들의 고질병인 괴혈병(壞血病)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
현진설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그가 관찰해 본 결과 비교적 말린 과일을 포함한 다양한 식단을 선상생활 중에 섭취하는 선장 및 고등선원(高等船員)들이 괴혈병을 비롯해 각기병(脚氣病) 등의 발병률이 낮다는 사실을 직관했다.
그는 실제로 괴혈병 초기 증상으로 상남에 남겨진 선원들을 대상으로 말린 과일과 다양한 음식을 섭취시켜 봄으로써, 특히 과일이 이 병에 특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송상 및 내상 등에 이 처방을 권유하는 한편, 《선상질병신론(船上疾病新論)》이라는 국문저술을 남겨 자신이 밝힌 처방법의 보급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귀하께서 쓰신 책을 읽어 보았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바타비아로 오셔서 함께 논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한동안 상남에서 괴혈병 치료에 전념하고 있던 현진설에게 정성들여서 쓰인 한국어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동인도회사에 고용되어 바타비아에 머물고 있던 네덜란드 의사인 빌럼 텐 레이너(Willem ten Rhijne)였다.
그는 짧지 않은 기간을 목포의 동인도회사 상관에서 보냈고, 그동안 한국어를 습득 했을뿐더러, 동양의학,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했었다.
그러던 차에 현진설이 쓴 《선상질병신론》이 그의 손에 들어왔고, 그 책에 쓰인 방법을 동인도회사 선원들에게 적용시켜 본 결과 효능을 확인하고 직접 현진설을 바타비아로 청한 것이었다.
“책을 읽고 적지 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직접 선원들에게 처방을 내려 보니, 실제로 괴혈병의 발병률이 급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해 유럽에 소개하고자 하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너는 현진설이 바타비아에 도착하자, 그에게 번역을 맡겨줄 것을 강권했다.
현진설은 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그의 학설을 유럽에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대항해시대가 도래한 이래 선원들이 앓는 질환들은 항해의 고질적인 적이었다. 이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서로 다를 것이 없었고, 바타비아로 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이나, 호주로 가는 일본인 선원이나 할 것 없이 심각한 문제였다.
현진설은 이 참에 레이너에게서 네덜란드어와 라틴어를 배우며 그의 번역 작업을 도왔고, 이내 그 결실이 《해상 질환들에 대한 한국 학설의 의학적 열쇠(Clavis medica ad Coreanum doctrinam de maritimis morbis)》라는 제목의 책으로 맺어졌다.
현진설과 레이너는 이 책에서 좀 더 경험적인 자료를 보강하고, 말린 과일을 선상에서 부패하지 않게 보관하는 방법에 대한 보론(補論)도 실었다.
이 책은 이내 유럽에서 불티난 듯 팔려 나가게 되었고, 이 책에 저자로 등제된 킨셀루스 헤누스(Cinselus Henus)라는 이름은 유럽에서 레이너의 이름과 함께 회자되었다.
현진설은 이내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원을 받아 바타비아에서 레이너와 함께 선상질환에 대한 연구 및 한국 의학에 관련한 자료 수집과 번역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네덜란드에서 편지 한 장이 레이너에게 도착했다.
“현 선생! 이 편지 좀 보세요.”
레이너는 들뜬 목소리로 현진설을 불렀다.
그는 본국에서 온 편지를 주섬주섬 현진설에게 건네주었다. 이제는 네덜란드어가 꽤 익숙해진 현진설은 무리 없이 그 편지를 읽었다.
“그쪽 대학에서 보낸 초청장이라구요?”
“일전에 지나가는 소리로 바타비아에 온 모교 동창에게 현 선생이 서양 의학을 좀 더 깊게 공부해 볼 기회를 바란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돌아가서 대학의 평의회에 선생을 추천했나 봅니다. 이미 유럽의 대학에서 선생의 저술이 유명하니, 대학에서는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편지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의학으로 유명한, 레이너의 모교인 라이던 대학에서 현진설을 초빙하고자 하는 초청장이었다.
선상질병 및 한국 의학에 대한 강의를 맡아 주기를 라이던 대학에서는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글쎄요, 좀 갑작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현진설에게도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새삼스레 외국 의학을 다시 공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쉬울 리는 없었다. 그러나 현진설의 호승심은 그로 하여금 유럽으로 건너가도록 떠밀었다.
“네덜란드에 가서도 편지를 종종 하겠습니다.”
그간 정이 든 만큼, 현진설은 레이너랑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레이너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현진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마 내년 쯤 나는 귀국의 북해도독부로 건너가 아주 정착할 생각입니다. 그곳 이민지에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남은 반생을 보낼 곳으로는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국하시면, 꼭 그곳에서 다시 뵙도록 하지요.”
고별(告別)의 아쉬움을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열대의 바타비아에 내려두고, 현진설은 네덜란드행 배에 올랐다.
짧지 않은 항해 끝에 암스테르담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연락을 받은 라이던 대학의 교원이 현진설을 마중 하러 나왔다.
그렇게 라이던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사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낯설었던 겨울의 우중충한 날씨도 이제는 적응이 되었고, 유럽식의 복장도 이제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라이던의 음습한 겨울 길을 걸어 대학에서 자신이 머무는 집으로 돌아온 현진설은, 문을 열어준 부인에게 보슬비에 젖은 코트와 모자를 건넸다.
현진설은 이곳에서 라이던 대학의 교수가 중매해 준 그리트(Griet, 흐릿)이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라이던에 도착한 첫 해에 얼떨결에 결혼했었다.
한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집에서 하녀로 지냈던 여자였다.
워낙에 빼어난 미모 때문에 페르메이르가 자신의 그림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는 소문이 그녀의 고향인 델프트(Delft)에 자자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하녀 출신이라는 소리에 손을 내저었던 현진설이었으나, 이곳 자유민들이 삯품 파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것을 알게 된데다가, 처음 본 순간 그 미모에 푹 빠져 버렸다.
개신교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혼인을 한 두 사람은, 이곳 라이던의 대학 근처에 살림을 차렸고, 벌써 얀(Jan, 鳶秀)과 빌럼(Willem, 備廉)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독일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어요. 라틴어로 쓰여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종이 뭉치가 두툼한 게 꽤나 중요한 편지 같아 보이던데요.”
밀랍으로 밀봉된 편지를 아내 그리트가 건네며 말했다.
현진설은 편지를 받아 들고 혹시 레이너에게 온 것이 아닌가 했지만, 이내 아내가 독일에서 온 편지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서는 다시 겉장을 보았다.
“라이프니츠?”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름이었다.
현진설은 봉인을 뜯고 찬찬히 편지를 읽어 보았다. 유려한 필체가 유난히 돋보였다.
편지를 읽던 중 현진설은 잠시 감탄을 뱉어냈다. 그제야 편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오른 것이었다.
당대 유럽에서 철학자로 유명했던 라이프니츠가 그 주인공이었다.
간절히 라이던으로 찾아갈 테니 한번 만나 달라는 편지에 현진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자신이 부탁해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꺼내 들다가, 현진섭은 문득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문득 만리타향인 이곳에서의 생활에 몸도 마음도 많이 익숙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광혜원을 졸업하고 하와이로 건너간 뒤로 거의 십 년 넘게 본국에는 돌아가지를 않았다. 문득 고향 전라도 전주에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잘 계시는지, 또 이렇게 평생 라이던에서 살아갈 것인지, 머리가 잠시 복잡해졌다.
“왜 무슨 일이 있으셔요?”
“아니야. 아무것도.”
고향 생각에 잠겨 있던 현진설은 아내의 목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간 고향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현진설은 라이프니츠의 편지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라이프니츠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는 잘 받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렇잖아도 선생님의 자자한 명석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언제고 원하시는 때에 찾아오시면…….」
1681년 계춘(季春)
네덜란드 공화국 라이던(Leiden).
라이프니츠와 현진설이 편지 왕래를 시작한 겨울도 지나가고, 이듬해의 봄이 찾아왔다.
라이던 대학 교정에도 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그날도 현진설은 으레 그렇듯 네덜란드어로 해부학을 강의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간 현진설은, 라이던 대학에서 보다 심화시킨 네덜란드어 실력을 바탕으로, 광혜원을 설립한 건양연간(1524~1565)의 명의 박세거가 편찬한 《인체도설》을 《해부학도표(Ontleedkundige Tafelen)》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재편집해 묶었다.
실제 시체를 직접 해부할 기회가 매우 드물었기에 이러한 책을 바탕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체도설》은 그간 보기 힘들었던 정밀한 인체에 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한 책이었고, 이 책을 바탕으로 한 현진설의 강의는 호응을 얻고 있었다.
머릿속에 뒤죽박죽되어 있는 신체 기관의 한자명을 라틴어명으로 바꾸어, 다시 네덜란드어 강의 속에 섞어 말하는 것이 좀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강의를 마치고 나면 현진설은 잔뜩 진이 빠지곤 했다.
그래도 훌륭한 의학자로서 대접을 받으며 네덜란드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재들을 가르친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최근에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저지(低地) 독일과 북프랑스에서도 수많은 유학생들이 라이던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방금 학생 한 명이 선생 집 앞으로 웬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도착해 있다고 하던데?”
교정에서 잠시 나른한 햇살을 즐기고 있던 현진설에게, 동료 교수 한 명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현진설은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의 얼굴들을 떠올려 보다가, 짚히는 바가 있어서 황급하게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라이프니츠라고 합니다.”
현진설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니라 라이프니츠였다.
그는 칼렌베르크 공국(F rstentum Calenberg)의 하노버 궁정에서 고문관(顧問官)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최근 직책을 사임하고 잠시간의 휴식을 즐기던 차였다.
때마침 생긴 여유 덕에 라이프니츠는 벼르고 있던 현진설을 찾아서 라이던으로 가는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편하게 머물다 가십시오. 집이 초라하긴 하지만 성심껏 대접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현진설은 정말로 기쁜 듯이 웃었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명성이 유럽 전역에 자자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현진설은 그런 그가 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지 뚜렷이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대학자의 호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선생께서 펴내신 책은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의학에는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동방의 철학에 대하여는 매우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때마침 시간이 비는데다, 유람을 떠나기 좋은 계절이라, 한번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할까 싶어 이렇게 걸음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동방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는 한국 및 중국과 관련된 문헌을 샅샅이 찾아서 읽어보았고, 직접 한자까지 익힐 정도로 이 주제에 관하여 열성이었다.
중국이나 진서로 전교 활동을 나갔던 예수회 신부들이 정리한 문헌이나, 적지 않게 라틴어로 번역된 한국의 서책들, 그리고 예전 동로마제국에 입경(入境)했던 한학정이 그리스어로 옮겼던 《논어》·《춘추》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그의 방대한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에 현진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라이프니츠는 한국에서 의학자 한 명이 라이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일찌감치 접하고, 현진설이 옮긴 책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현진설은 의학 서적 외에도 서한(西漢) 시절의 경세서(經世書)의 일종인 《염철론(鹽鐵論)》이나 임승준의 《대국방략》 등의 책도 라틴어로 옮긴 바 있었다. 그 책을 구해 읽은 라이프니츠가 편지를 보낸 끝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공자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경에서 다루고 있는 개념에 있어서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꼭 질문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최근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역경(易經)》이었다. 《역경》은 이십여 년 전, 양나라 복단대학의 학자인 만사동(萬斯同)에 의해 라틴어로 옮겨졌고,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저본으로 삼고 있었다.
현진설은 이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라이프니츠와 며칠에 걸쳐 토론을 나누었다. 만사동의 번역본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만사동이 번역할 때 예수회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사실상 중역(重譯)한 탓에, 명료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현진설은 이런 부분들에 대하여 라이프니츠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토론을 하며 바로 잡아줄 수 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팔괘의 원리가 명쾌하게 이해가 갑니다. 사실 이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수리 체계를 고안하는 과정에 있는데, 이제 그 결과물을 내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역경에 나오는 팔괘(八卦)에 착안하여 고안한 수체계란, 다름 아닌 이진법(二進法)이었다. 0과 1의 두 가지 숫자로만 표현되는 이 간단한 방식은, 수리적인 명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역경의 개념에 빚지기는 했지만, 라이프니츠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역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수리학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현진설이었지만, 라이프니츠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이진법 체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10진법 이외의 수 체계는 생각해 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한국에도 소개한다면 산학자들이 깜짝 놀랄 겁니다.”
라이프니츠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현진설에게 이진법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진설은 라이프니츠가 가진 천재성에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세계의 물리적 법칙이 뉴턴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일법칙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좀 미심쩍긴 했지만, 나머지는 명쾌한 통찰력을 담은 것들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지금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를 놓고 영불연합왕국의 뉴턴과 시비가 붙어 유럽 전체를 들끓게 하고 있는 미적분(微積分)에 관한 개념에 대해서도 현진설에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라이프니츠가 현진설에게 배우러 왔다기 보다는, 언제 부턴가 사실상 현진설이 라이프니츠에게 한수 배우고 있었다. 정말로 기꺼운 마음으로 현진설은 라이프니츠를 대접했고, 두 사람은 한 달이 넘게 라이던에서 함께 지내며 많은 교류를 나누었다.
“언제 한 번 한국으로도 선생님을 모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래저래 얽매인 곳이 많아 독일 밖으로 나오는 것만 해도 이렇게 수고스러웠습니다. 유럽 밖으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한 번 가보고 싶긴 한데…….”
라이프니츠도 늘 동방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까지 유럽에서 동방을 한 번 왕복해서 다녀오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해는 족히 잡아야 하는 여정이었다.
더군다나 해상에는 어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섣불리 큰 용기 없이 대륙 간 항해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서양과 동양의 학문이 보다 교류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비등하게 발전하고 있는 양자의 학문 체계를 통합한다면 보다 인류 전체로 보았을 때 발전의 폭이 늘어날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었다.
“……제 문하생 중 한 명을 선생님의 소개를 통해 한국으로 보내어 공부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하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본인이 직접 갈 형편이 되지 않지만, 혹여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을 현진설을 통해 한국에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수년 내로 귀국해 아퀼로니아에 정착할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이나 북독일 사람이 많은 아퀼로니아라면 아내나 자녀들도 무리 없이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퀼로니아(Aquilonia)는 북방면(北方面)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북해도독부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이후, 유럽의 북해(North Sea)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국의 북해도독부를 의역(意譯)한 지명이었다.
최근 유럽에서는 이 아퀼로니아라는 지명이 일종의 목가적인 이상향으로 시나 산문에서 비유적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물론 척박한 북해도독부의 실상은 그 이상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넓은 토지와 목초지는 그만큼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잖아도 바타비아에서 크게 신세를 졌던 네덜란드 의사 레이너가 이미 이민 행렬에 동참해 영안부에 정착해 개업을 하고 있었다.
현진설은 귀국을 결심한 뒤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백인 이민자들이 적지 않은 북해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기왕 돌아갈 것이라면, 가는 길에 라이프니츠의 제자를 동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스위스의 바젤에 베르누이라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기꺼이 동양에서 몇 년이고 머물겠다고 할 사람입니다. 한 번 서편을 보낸 다음에 선생에게 소개하겠으니, 부디 귀국길에 함께 동행하여 주십시오.”
라이프니츠의 부탁을 현진설은 거절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 뒤라, 도리어 청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라이프니츠 선생님의 제자라면, 분명히 뛰어난 학자이리라 생각합니다. 베르누이 씨와 함께 본국에 귀환해서 동서의 학문을 서로 깊게 이해한다면 필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이프니츠에게도, 현진설에게도 아쉬운 일이었지만, 라이프니츠의 라이던 생활은 더 이상 오래 갈 수 없었다.
하노버의 군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가 라이프니츠에게 어서 하노버로 돌아와, 자신의 방대한 가문사(家門史)를 다룬 역사서를 집필해 줄 것을 종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라이프니츠는, 더 이상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하노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노버로 돌아간 다음에도, 바젤의 베르누이와 라이던의 현진설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베르누이에게 직접 현진설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라이프니츠의 권유를 받은 베르누이는, 이듬 해 직접 라이던을 찾아 현진설과 교류를 가지고, 이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자, 현진설도 라이던 대학에서의 직무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내인 그리트의 결심도 필요했고, 라이던에 있는 가산의 정리도 필요했기에 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베른 대학의 교직까지 그만두고 라이던으로 베르누이가 찾아오자, 현진설은 더 이상 귀국을 지연할 수 없어 1683년 3월, 암스테르담을 출항하여 바타비아를 경유해 목포로 가는 동인도회사 선적의 「탄생호(더 헤보르터, De Heboorte)」에 베르누이와 함께 몸을 실었다.
1685년
건희(建禧) 18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귀국하여 돌아온 현진설의 가족은, 북해도독부의 수부인 영안부에 자리를 잡았다.
인구 2만 남짓의 이 북쪽 도시에는, 네덜란드와 북독일, 혹 더러는 덴마크 출신의 유럽 이민자들이 꽤나 자리 잡고 있었다.
특별한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농민 출신의 이민자들은 예전 여진족들이 산개해 있던 초장(草場)으로 들어가 목장을 경영하거나 했지만,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이민 행렬에 뒤섞여 온 유대인들을 포함한 직능(職能)이 뚜렷한 이민자들은 영안부의 도심지에 자리를 잡았다.
영안부의 인구 중 1/6에 달하는 삼천여 명의 백인들은 이제 이 도시의 어엿한 한 구성원이 되어 있었다.
1683년에 북해의 삭막한 기후에 적응한 북독일 품종의 밀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수확되었고, 이미 널리 재배되고 있는 보리의 소출도 꽤나 되었다.
북독일 출신의 이민자들은 수확한 밀과 보리에서 처음으로 잉여분이 나타나자, 이내 영안부에 맥주를 빚어내는 양조창을 건립했다. 이 「영안양조창」, 혹 네덜란드어로 「예닝스타트 브라우에레이(Jeniengstad brouwerij)」라 불리게 된 이 맥주 양조장에서 빚어낸 맥주는 그 품질이 좋아 이내 이민자들 사이에서 크게 호평을 받게 되었고, 이내 처음 접하는 맥주라는 것임에도, 북해의 조선인들 사이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영안부 항구에 면한 곳에, 네덜란드 이민자가 세운 「산들바람 여관(Taverne de Bries, 타베르너 더 브리스)」은, 이 예닝스타트 맥주를 파는 선술집을 겸하고 있었다.
예닝스타트(Jeniengstad)는 영안부(永安府)의 네덜란드식 이름으로, 곧 예닝스타트 맥주는 내지에는 영안맥주(永安麥酒)라는 상호로 알려져 있었다.
이내 내지를 비롯한 여러 다른 지역에서 영안부에 찾아온 애주가들은 항구변의 「미풍여각(微風旅閣)」에서 「영안맥주」를 한잔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기를 구가하는 영안맥주를 매일같이 즐겨 마시는 사람들 중에는, 몇 년 전 이곳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의사 빌럼 텐 레이너도 있었다.
그는 항상 여관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혼자 의학서를 펴놓고 중얼거리면서 맥주를 들이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내 이 괴짜 같은 의사의 테이블에 몇 명의 주당들이 더 합류를 하게 되었으니, 바로 귀국하여 영안부에 정착한 현진설과 그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자크 베르누이(Jaques Bernoulli)였다.
이 외에도 북해도독부의 주임관(奏任官) 벼슬을 하고 있던 권상하(權尙夏) 같은 이도 현진설과 연을 맺어 이들의 모임에 끼어들었다.
이들은 한국어·네덜란드어에 한문이나 라틴어가 뒤섞이는 현란한 대화를 이 맥주집에 앉아서 나누곤 했는데, 이내 이들에 대한 소문이 영안부 내에 자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지내고 있는 데는 조금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보수적인 내지의 학당들이, 현진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베르누이를 초빙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현진설은 당분간 베르누이를 영안부에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현진설은 꾸준히 광혜원 동기 출신으로 요동국에 건너가 심양에서 의원을 열고 있는 민기혁(閔起赫)을 통해 혹여 요동의 왕립대학에 베르누이가 교원 신분으로 초청받을 수 있는지를 타진하고 있었다.
이 일이 생각보다 길어져, 매일같이 맥주집으로 나와 한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평소 이민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권상하가 소개를 통해 끼어들었고, 이렇게 네 명이 주축이 되어 「산들바람 여관」의 고정 단골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 서른의 젊은 나이인 베르누이가 이곳 생활에 큰 불만 없이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별로 대학의 교직을 찾는 일에 조바심을 내지 않았고, 이곳 영안에서 학문적인 대화를 동료들과 나누며 보내는 시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내년에도 또 천여 명이 영안항으로 들어온다지요?”
“이번에는 노르웨이 사람까지 끼어서 온다더군. 저지독일말이나 네덜란드말이나 큰 차이가 없어서 그간 이민자들끼리 크게 부딪히는 일이 없었는데, 노르웨이 말은 반쯤 밖에 통하질 않으니……. 이민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툴까 걱정됩니다. 그렇잖아도 유대인들은 이곳에 와서 따로 모여 지내는데.”
현진설이 무심코 꺼낸 말에, 레이너가 걱정을 한가득 담아서 대답했다.
크게 보자면 게르만 계통이 주로 이주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배경이 제각기였다.
특히 그렇지 않아도 유럽에서처럼 북해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다만 유대인들에게 좀 더 나은 여건은, 적어도 백인이 아닌 이곳 북해의 한국계를 비롯한 본토민들에게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멸시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유대계 이민자들은 철저히 다른 백인 이민자들과는 교류하지 않고, 영안부 성곽 동쪽에 자기들끼리 무리를 짓고 살면서 조선인들 하고만 교류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이내 소규모 대금업(貸金業)으로 지역의 소상공인들에게 파고들었고, 이들이 운영하는 소위 「전장(錢庄)」은 금융업을 취급하며 지역 간이나 국제적인 환금업을 하고 있는 「계영양행」같은 대형 상단들과 소상공인 사이의 매개자로 성공적인 진출을 했다.
다른 기독교도 출신의 유럽 이민자들과 달리, 이렇게 유대인들은 북해도독부에서 재빠르게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것은 유대인 이민자들과 다른 백인 이민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골이 파이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적어도 이런 대립이 표면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자들의 성분이 다양해질수록 이민 집단이 분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민자들 사이에는 폭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영안부에 그 유명한 스피노자의 조카가 와 있다면서요? 그 삼촌 때문에 여기 유대인들에게 사실상 조리돌림 당하고 혼자 근근이 살고 있다던데 말이에요.”
유대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만히 듣고 있던 베르누이가 말을 꺼냈다.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으로 베르누이를 바라보았다. 스피노자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권상하는 베르누이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스피노자라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화란 출신의 유대인인데, 명석하고 그 사상이 심오하여 그 이름이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 이설을 내어놓는 바람에 자기가 속해 있던 유대인 집단에서도 추방당하고, 그리스도교의 교회와 각국 정부에 의해 그가 쓴 책들이 금서로 지정당했지요.”
권상하의 질문에 아직 한국어가 짧은 베르누이를 대신해 현진설이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위험한 인물 아닙니까?”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이니만큼, 권상하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장을 꺼내 놓는 사람에 대해 조금은 꺼리는 면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피노자라는 자가 국가제도를 공격했다면 쓴 책이 금서로 지정당하거나 추방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적어도 이곳 북해에서는 스피노자의 책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던데요. 라틴어나 네덜란드어로 찍혀 나오는 서적에 대해서는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레이너의 말에 권상하가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권상하도 이곳 이민자들이 무슨 책을 찍어내 유통시키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읽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검열하고 금서로 지정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내지에 비해 사상적 기풍이랄 것이 없던 북해이니 만큼, 검열제도도 미비하기 짝이 없었고 출판에 대한 특별한 제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외국어로 쓰인 책은 사실상 국가 검열 기관의 통제 바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잖아도 내지에서는 금서로 지정된 도서들이 세관이 없는 북해도독부와의 경계를 통해 밀반입되는 통에 황성부에서 북해도독부에 감찰관을 보내는 소동까지 있었었다.
그 뒤로 검열제도에 대한 갑론을박이 영안부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식자층이라 봐야 한 줌 같은 이곳 북해에서 설사 검열제도가 시행된다 한들 효력은 없다고 보아야 했다.
누군가 마음먹고 산간오지로 들어가 책을 찍어낸다면 단속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실효성 있는 단속은 내지로 밀반입되는 책들을 압수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스피노자가 유럽에서는 지나치게 공격을 당하긴 했지만, 이곳 한국에서 그의 생각을 수용하기는 유럽보다 훨씬 수월할 겁니다. 한국인들은 사실상 무신론자 아닙니까? 아니면 이신론자라고 해야 하나요. 신학적으로 꺼리길 것이 없는데다가, 정치 면에서도 이미 입헌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스피노자의 말이래야 별로 파격적이지도 않지요.”
베르누이가 살짝 비꼬듯이 말했다.
아직까지 종교가 일상에 깊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한국은 국교를 유교라고 명시하고는 있으나 사실상 무신론자들이 횡행하는 나라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었다.
조상신에게 제사를 모시긴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을 신에 대한 숭배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상 숭배도 아니고 아주 신이라는 것을 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지독한 근본주의자라면, 세속적으로 타락한 국가라고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베르누이의 말은 어느 정도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다소 한국의 종교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이와 같이 종교 문제에 대해 자유스러운 한국의 분위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스피노자의 조카라는 친구, 우리가 한번 만나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한동안 말없이 잠자코 있던 현진설이 입을 열었다.
“왜요, 우리가 그를 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전히 스피노자에 대해 체제비판자라는 선입견을 지우지 못한 권상하가 손사래를 저었다.
“그를 만나보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일을 위해서 그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요.”
현진설의 말에 좌중이 동시에 무슨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때가 많은 현진설이었지만, 그가 자신들 모르게 무언가를 진행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우리에게 여태 말도 없이 있었소?”
레이너의 말에 현진설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이곳 북해에 와서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눈에 들어와서 말입니다.”
현진설의 말에 권상하가 살짝 불쾌하다는 듯 말을 받아쳤다.
“우리 북해도독부의 관원들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데 문제가 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조정에서는 이곳을 거의 버린 땅 취급하여 지원도 없고, 세수는 부족한데, 이래저래 곳간에서 빠져나갈 돈은 많으니 어찌 모든 일을 두루 살펴보겠습니까?”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앞으로 북해가 흥성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진설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곳 북해에 정착해 조금 살아 보니, 이곳에는 제대로 된 교육제도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지는 말할 것도 없고 요동이나 진서에도 대학이 있고, 규모가 있는 고을에는 상학이 다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 북해는 어떻습니까? 그나마 영안부에 하나 있던 상학도 오십여 년 전에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뛰어난 인재는 함경도 함주로 건너가 상학을 다니고, 그나마도 매우 드물어 상학을 마치고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은 북해에서 몇 년 가야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이제 자리가 잡혀가는 유럽 출신 이민자들은요? 교회를 중심으로 자녀를 교육시키기도 하지만, 사실상 학교라는 기관에서 공부할 기회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북해도독부 전체가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현진설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
어느새 주점 안의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이야긴가 싶어 현진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이참에 나는 북해에 제대로 된 교육기관을 세우는 일을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아직 나는 스피노자의 조카라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 잘 모르지만, 그를 만나보고 도움이 되어줄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고라도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뜻이 있다면 제가 하는 일에 함께 동참해 주셨으면 합니다.”
레이너, 권상하, 베르누이 등은 갑작스러운 현진설의 토로에 어안이 벙벙하게 앉아 있었다.
의외의 반응은 술을 마시고 있던 다른 이민자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현진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하나둘 현진설의 연설 아닌 연설이 끝나자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해도독부로 이민을 와서 영안부에 정착해, 틈틈이 이곳 「산들바람 여관」에 들러서 맥주를 기울이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유럽에서 어느 정도 전문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영안부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종적 장벽을 넘고 한국인들의 교육기관에 진학하는 것도 사실상 어려움이 많은 노릇인데, 북해도독부에는 진학할 만한 학교조차 없었다.
“요나스 스벤센 베링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연설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제 자식들이 커 가는데 교육 문제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 우리 이민자 사회뿐만 아니라, 이곳 북해도독부에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거들고 싶습니다.”
덩치가 큰 덴마크 억양의 사내가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다가와서는 현진설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털이 수북한 두터운 손을 얼떨결에 맞잡고는 현진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지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스피노자의 조카라는 사람이, 얼마 전 세관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분명 삼촌만큼은 아니더라도 뛰어난 사람으로는 보였습니다만, 전문적인 회계 지식이 없어 일단은 돌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내가 한 번 그와 다리를 이어 보겠습니다.”
요나스 베링이 호기롭게 말했다.
현진설은 답답함에 꺼낸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크게 번진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쩐지 괜히 들뜨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내 레이너와 베르누이도 함께하겠다고 동참하고 나섰다. 다만 권상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현 선생의 뜻은 좋습니다만, 분명히 이래저래 부딪히는 것이 많을 겁니다. 진서 사람들이 대학을 세울 때는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돈 많은 상공업자들이 지원을 하여 결국 조정을 설득하고 진서대학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만, 여기 북해는 어떨까요. 혹여 진정 그 일을 추진하시려거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셔야 할 겁니다.”
“황권이 비등하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않소이까. 북해의 뜻을 하나로 모은다면, 의회에 청원을 하여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권 선생께서도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
현진설의 말에 권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1687년
건희(建禧) 20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스피노자의 조카인 니콜라스 스피노자(Nicolaas Spinoza)는 그 무렵 서른 살을 갓 넘긴 나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삼촌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네덜란드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결국 북해행을 결심하고, 삼촌이 세상을 떠나자 먼 동쪽 끝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가진 재산도 없는데다가, 삼촌과 비슷한 생각을 지닌 그는 유대인 집단에서도 배척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일자리를 구해 보았지만, 그마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나스 베링을 통해 현진설이 니콜라스 스피노자에게 연락해 온 것은 바로 그 즈음의 일이었다.
“나는 유대인이고, 더군다나 삼촌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기는 했지만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현진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 스피노자는 별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사래 치는 그의 말과 다르게, 니콜라스가 가진 재능은 탁월했다.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할뿐더러,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익혀 본토인들과 대화 하는데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철학 및 수학에 비상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종교 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도 탁견(卓見)이었다. 이래저래 대화를 나누어 볼수록 현진설은 그를 꼭 끌어들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유럽의 대학들은 오랜 기간 유대인들을 그 문 안으로 들여 보내주지 않았죠. 그런데 저는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 양쪽에서 경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이곳에 대학을 설립하는 일에 참여한다면 세워지는 대학에 대한 비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북해는 유럽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국 내에 세워진 대학들은 신분에 의한 불평등한 입학은 있었을망정 핏줄에 의한 차별은 없었습니다. 이곳 북해에 세워지게 될 대학은 유대인이든 그리스도교도든, 본토민이든, 무신론자이든, 아무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이 힘을 보태주어야 합니다. 제도에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제 삼촌을 암스테르담의 유대교회에서 추방할 때 그들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니콜라스는 마른침을 삼키고서는, 마치 유대교 랍비가 말하듯이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며 영원히 우리들에게서 추방한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저주받을지어다. 누구도 그와 교제하지 말고 한 지붕에서 살지 말라!”
“…….”
분노와 회한이 일렁이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며 현진설은 차마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우습지 않습니까? 네덜란드에 계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은 천시받고 배척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자기들 안에서 약자를 만들어 견제하고 조리돌림을 놓지요. 이곳 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백인 이민자들은 아직 낯선 이방인들이지요. 자리를 잡은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본토민들과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는 서로 척을 지고 서로 돌아보지 않고, 그 안에서도 네덜란드인은 우대받고 노르웨이나 북독일 시골 출신은 은근히 천시받지요. 유럽에서도 갈 곳 없었던 저는, 지금 여기서도 몸을 붙이고 누일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육은 확실히 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까요? 제 삼촌께서는 재미있는 주장을 하나 하셨죠. 인간 세상이 언뜻 복잡해 보이고 불가해 하지만, 그 안에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이걸 사회물리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사회물리학의 근본 법칙 중 하나가 인간의 무리 짓기인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서열을 정하고, 또 자기네 보다 약하거나 뛰어난 자를 멸시하고 밀어내지요. 대학 말입니까? 분명히 인간의 지식을 가르쳐서 후세에 전달하는데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지혜와 함께 독선과 편견도 가르치지요. 머리가 좋지 않은 자는 돈과 신분을 등에 업고 이곳에서 배우고 나와 자신이 뛰어나다는 착각을 하게 되고, 머리가 좋은 자는 이곳에서 오만과 독선만 배워서 나오게 됩니다. 대학이 만들어진다고 한들, 과연 그것이 현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희망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요?”
“사회의 법칙을 이야기하시니, 저도 한마디 거들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또 다른 사회의 법칙이 있다면, 바로 인간 사회는 진보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중국의 유학자들이라면, 옛 시절이 좋은 때고 지금은 타락한 세상이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의 좁은 식견으로 보았을 때는 적어도 인간 세상은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자는 점점 풍족해지고, 농업은 풍성해지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많은 나라에서 공화제에 대한 의식이 움트고 있고, 사람들은 보다 평등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대학이란 바로 이러한 진보를 가속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북해도 그런 진보에 뒤처지지 않고 함께 나아가고, 혹은 선도할 수 있는 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설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진설의 말에 니콜라스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현진설을 향해 예민한 시선을 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흥분해서 외쳤다.
“그렇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보세요. 인간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약자끼리 연대하지도 않습니다. 인간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먹이사슬이에요!”
자신이 흥분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니콜라스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입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신대륙을 보면 어떨까요. 당신네 한국인들도 서해안에 들어가 원주민들을 밀어냈고, 유럽인들은 동해안에 들어가 원주민들을 밀어냈습니다. 한국, 카스티야, 아라곤, 네덜란드, 스웨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기심에 찬 인간들이 이 나대지에 깃발을 꼽고 이기심을 정당화시켰습니까? 그런데도 멕시카나 잉카 같은 나라는 이들 구대륙 사람들을 떠받들면서 아래로는 자신과 같은 피부를 가진 다른 원주민들을 학대하고, 학살하고, 유럽인의 농장으로 매매를 중계했지요. 서아프리카의 상아해안은 어떻습니까? 그곳 토착 군주들이 자기와 같은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유럽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도대체 여기에 어떤 희망이 있습니까? 네덜란드에서 북해로 오는 길에 인도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에 있을 때 매우 놀라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검은 피부의 무어인 노예가, 자기 포르투갈인 주인을 모시고 가면서 으스대다가, 같은 검은 피부의 헐벗은 노예를 보고서는 침을 뱉고 마구 때리더군요. 유럽인을 섬기는 자기한테 충분한 예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도로 개종하지 않은 검둥이는 인간이 아니라고 욕하는 겁니다. 자기도 같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대학이 세워지면 어떨까요? 분명히 재력 있고 신분 좋은 자들이 공부하기 위해 찾아올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제공해 주어도 이들은 만약 내지의 유수한 학당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면 그리로 학적을 옮기겠지요. 또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이곳 북해의 대학을 나와서 내지의 학당들처럼 정부 고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같은 북해에서 난 밀과 보리를 먹고 사는 동포들을 배우지 못한 자로 멸시하겠지요. 나는 정말 현 선생님의 열망에서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무딘 신경은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자꾸만 경고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스피노자를 설득하러 온 현진설이 도리어 그의 의견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할 정도로 그의 웅변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현진설은 그렇게 비관적으로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니콜라스를 꼭 이 일에 참가시켜 함께하고 싶었다.
그날의 열띤 대화 이후 니콜라스는 좀체 현진설을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현진설은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이 니콜라스 스피노자를 제쳐 놓고 대학 설립 작업에 착수하자고 했지만, 현진설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며 니콜라스를 설득하는 일에 매진했다.
오죽하면 부인 그리트가 고집을 꺾으라고 타박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결국 니콜라스 스피노자는 어렵게 마음을 열었다.
“한 번 선생님을 믿고 따라가 보겠습니다. 분명 실망스러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 꿋꿋한 의지로 세상 사정에 휩쓸리지 않고 세워질 대학을 지켜내 주신다면, 저는 끝까지 함께 있어 보겠습니다.”
니콜라스 스피노자의 동의를 받아낸 이후, 현진설은 대학을 설립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재원이 부족하고 많은 것을 갖출 수 없었기에, 영안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3층짜리 바로크풍의 건물 한 동을 짓는 것으로 출발했다.
현진설·빌럼 텐 레이너·자크 베르누이·니콜라스 스피노자·권상하·요나스 베링의 6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우선은 비인가 학교였기에, 대학의 이름을 달지 못하고 조촐하게 강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출발은 했지만, 난관은 산재해 있었다. 생각보다 북해의 시민들이 보내는 반응은 뜨뜻미지근했고, 정부에서는 좀체 인가를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교 운영비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다. 발기인들이 사재를 털어가며 학교를 겨우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적자 끝에 파산하게 될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이런 상황에 동아줄을 내려 보내준 것이 바로, 계영양행이었다.
사실상 함상이라 불렸던 동북지방의 상인 집단은 이 계영양행의 깃발 아래 모두 흡수되어 있었고, 여전히 함경도와 북해도독부 일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영양행이었으나, 계영양행은 내상과 신대륙 무역 경쟁에서 밀림으로 인해 몰락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계영양행은 때문에 본질적으로 체질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국제적인 무역보다 근거지인 함경도와 북해도독부, 그리고 영주도독부 북부의 지역 경제에 집중하고자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 지역의 복리를 위해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설립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어 주었다.
계영양행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던 어대근(魚岱勤)이 자신의 막대한 사재를 털어 지원을 하고, 동시에 황성부 의회 및 북해도독부의 수뇌부와도 연줄을 틔워 줌으로써 일은 급속도로 진척을 보기 시작했다.
절실한 지원을 어대근이 베풀어 주었기에, 대학설립의 발기인들은 어느 정도 어대근과 타협을 보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현진설과 어대근이 공동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사립학교로 나가는 방침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니콜라스 스피노자의 격렬한 반대로 재단을 계영양행의 통제하에 두는 방안은 철회되었다.
어대근이 사재를 출연하여 재단을 독립시킴으로써, 계영양행과는 독립적으로 대학 운영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지부진했던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하고, 결국 의회로부터 인가가 나게 되어, 1688년 정초에 정식으로 「영안대학교(永安大學校)」가 출범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어로는, 「위니베르시테이트 예닝스타트(Universiteit Jeniengstad)」라고 했다.
영안대학교는 출범 초기부터 다른 대학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제도를 채택했는데, 독립된 학과를 나누지 않고, 해당되는 과정에 개설된 특정 학점을 이수하고 시험을 치면 학위를 주는 제도였다.
예를 들자면, 의학 과정에 개설되어 있는 이수 학점과 법학 과정에 개설되어 있는 학점을 자유롭게 동시 이수할 수 있었고, 충분한 학점을 이수하고 나면 두 가지 학위의 시험을 동시에 치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문 인력이 부족한 북해의 사정을 고려하여 가급적 대학 교육을 받는 이들이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현진설과 레이너 등이 의학 과정, 니콜라스 스피노자가 철학 과정, 자크 베르누이가 수학 과정의 주임 교수로 자리 잡았다.
요나스 베링은 대학 재단의 회계 감사를 맡게 되었고, 이내 권상하도 관직을 사임하고 해당 대학의 법학 과정의 교수로 부임해 오게 되었다.
내지·요동·진서 등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뒤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학자들도 이 대학의 교원이 되고자 문을 두드렸는데,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의학 교육을 하는 광혜원, 법학 교육을 전담하던 송도법학원 출신의 전문 인재들도 영안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한국에서는 최초로 일반 대학에서 유럽식으로 법학·의학 교육을 포괄하는 대학이었던 것이다.
자크 베르누이는 대학의 표어를 제정했다.
「삶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는 이 표어는 대학 정문에 세워진 두 개의 기둥에 각기 새겨졌는데, 왼쪽 기둥에는 라틴어로 「Dum vita est, virtus est.(둠 비타 에스트, 비르투스 에스트)」, 오른쪽 기둥에는 한문으로 「眞理在生(진리재생)」이라고 음각(陰刻)되었다.
의회정권하의 두 번째 황제로, 사실상 정치적 권력이 하나도 없이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던 건희제(建禧帝)는 유난히 이 영안대학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 자신이 서양 문물의 애호가였기 때문이었다.
라틴어 공부까지 스승을 초빙해 하고 있던 건희제는 이 대학의 설립 소식을 듣고는 직접 친필로 라틴어와 한문 표어를 써서 하사했는데, 정문 기둥에 새겨지게 된 것이 바로 황제의 글씨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북해로 거동하여 이 대학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비록 허울뿐인 황제이긴 하나 그의 관심 덕분에 영안대학은 빠르게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