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요동신월(遼東新月)
「제1조. 공립학교는 각 부군(府郡)마다 세워져야 하며, 교장 및 교원은 행정 관아의 감독을 받도록 한다.
제2조. 학교의 설립 비용은 정부 재원 및 각 부군의 신사들이 갹출하여 충당하도록 한다. 이에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대지 및 학교의 운영 기금도 포함된다. 그 대가로 재원을 출연(出捐)한 이들에게는 출연한 금액에 따라 합당한 세금을 면제한다.
제3조. 법령의 발효 시점을 기준으로 성년이 되지 않은 자는 모두 의무적으로 4년간의 학교 교육을 필히 이수하도록 하며, 혹 성년이 지났으나 학교에 등록하기 원하는 자는 제한을 두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제4조. 보다 원활한 시행을 위하여 특별세를 신설하여 향후 10년간 부과하도록 한다. 특히 제3조에 따라 교육기관에 의무 등록해야 할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가중 조세를 부담한다.」
―〈신민교육교서(臣民敎育敎書)〉, (1703)
1695년
건희(建禧) 28년 계춘(季春)
요동국 경조로(京兆路) 성경부.
동양과 서양의 학문을 상호 진작시키겠다는 포부를 안고 현진설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자크 베르누이의 뜻은 생각만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북해도독부에서 시간을 꽤나 허비한 끝에, 영안대학교의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동안 현진설을 통해 알아보고 있던 요동의 성경왕립대학에 초빙되는 일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자부심 높은 요동의 학자들은 검증되지 않은 자크 베르누이를 선뜻 받아들이는 것에 난색을 표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내 바뀌었다.
자크 베르누이는 영안대학에서 강의하며, 뛰어난 논문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그는 이곳에서 스승인 라이프니츠와 동생 요한 베르누이와 지속적으로 서한을 교류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인 학자들과 논의를 거듭하며 수학적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복리(複利)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e 상수(常數)」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통계에 대한 논의도 진척시켜서, 《예측기술(Ars Conjectandi)》라는 책을 한국어와 라틴어 양본(兩本)으로 출간했다.
또한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을 상세하게 한국어로 설명한 《미적산주해(微積算註解)》를 펴냈는데, 라이프니츠의 기본 원고를 바탕으로 베르누이 자신이 주석을 곁들인 것이었다.
그의 논문과 책들은 한국과 유럽 양측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요동에도 흘러들어 가게 되었다. 요동대학의 산학자들은 이를 접하고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제야 뒤늦게 베르누이에게 성경왕립대학에 와줄 것을 부탁하게 되었다.
베르누이는 당초 이 성경왕립대학의 요구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앙금보다도, 설립 단계부터 참여하여 정이 든 영안대학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동왕의 친서까지 도착하자 계속해서 거절하기가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유명한 성경왕립대학에 몇 년간 체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요동왕은 김행으로, 아버지 경효왕(慶孝王) 김승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요동국 독립의 초석을 닦은 현양왕 김윤의 뒤를 이은 경효왕 김승은 요동국의 내치를 안정시키고, 산업을 진작시켰으나, 본인은 사실상의 현상 유지론자로, 특별히 혁신적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젊은 국왕 김행은 혁신적인 업적을 남기기를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요동의 의회인 공회(公會)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고, 본인의 두뇌 또한 명석했다.
비록 사생활이 그다지 깨끗하지 못하고, 여색을 좋아한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국가 운영의 능력만큼은 탁월한 사람이었다.
김행은 이즈음에 이르러 요동국 국가 전체의 학문 및 문화의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했고, 「요동왕립학예원(遼東王立學藝院)」의 설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영불연합왕국의 프랑스에 1635년 설치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 mie fran aise)」와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이것을 모델로 삼은 것은 김행이 요동국과 프랑스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세워진 것은, 바로 영불연합왕국 체제하에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문화가 잉글랜드의 천박한 문화(어디까지나 프랑스 사람의 관점에서)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때문에 프랑스 삼부회(三部會)는 국왕에게 탄원하여 프랑스의 문화적 규범의 보존과 전통의 계승이라는 명목으로 이 기관을 수립했던 것이다.
요동왕 김행은 요동이 문화적, 정치적으로 내지에 예속된 관계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요동만의 문화적 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구체화된 것이 바로 이 「요동왕립학예원」이었던 것이다.
김행이 베르누이를 초청하고자 직접 나서게 된 기저에는 바로 이 「요동왕립학예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요동의 독자적 문화는 바로 다양한 문화의 통곬을 통한 재창조에 있다고 김행은 보았고, 이것이야말로 전통에 얽매여 있는 내지와 차별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서양의 학자를 초빙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것은 김행이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행은 단순히 베르누이를 왕립대학에 초청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요동왕립학예원」에 참여시킬 구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김행이 직접 보낸 어필서한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까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우선 요동으로 와서 대학에 몸을 담고, 왕실에서 내어 주는 자금을 지원받아 연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 정도였다.
이렇게 직접 김행의 초청을 받은 베르누이는 고민 끝에 요동으로 잠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옛 심왕가의 군주들에 대하여 계몽군주(啓蒙君主)의 모델로 여기고 있던 라이프치히의 권유도 한몫을 했다.
베르누이는 몇 년 뒤에 다시 영안으로 돌아오기로 약속을 하고, 짐을 꾸려서 1695년, 건희 28년의 정초에 요동으로 가는 역마차에 올랐다.
“그대가 우리나라를 찾아주기를 과인은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었소. 대우를 섭섭하지 않게 할 테니 과인을 도와 요동국의 학문 진작에 힘써 주시오.”
베르누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동왕 김행은 그를 태안궁으로 불러 만찬을 베풀고, 공회의 의원들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다음 날로 바로 왕립대학의 왕실석좌교수(王室碩座敎授)의 자리에 베르누이를 앉힌 다음, 왕실의 내탕금으로 그의 연구 활동을 지원했다.
이 정도로 요동왕 김행이 대접을 해주자, 베르누이 또한 감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정도의 지원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여건이 갖추어지자, 베르누이는 정력적으로 연구 활동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학 연구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도 손을 뻗쳤다.
서경덕이 요동에 초빙되어 세운 뒤로, 요동의 역산(曆算)과 천문 연구의 중심이었던 「관천대(觀天臺)」를 오고 가며 천문망원경의 개량과 행성 운행의 계측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하는 한편, 무순 일대의 석탄 탄광을 순례하며 석탄의 지질학적 형성 과정을 논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이 석탄의 형성을 화산의 활동과 연관 지었는데, 적어도 당시에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었다.
베르누이의 학문적 활동을 눈여겨보고 있던 요동왕 김행은, 그를 불러 「요동왕립학예원」의 설립에 관한 자문(諮問)을 맡겼다.
이 자문역에는 베르누이를 비롯해 왕립대학을 중심으로 30여 인의 학자들이 포함되었는데, 이 가운데에 성리학을 연구하는 이는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김행은 사실상 요동국의 문화적 규범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 성리학의 영향을 배제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당초 심요도독부가 심왕부의 관장하에 놓인 이래, 요동 일대에는 서북학파(西北學派)의 영향력이 강했었고, 이 서북학파는 성리학의 탈피를 주장했던 이들이었다.
적어도 요동에서 이후로 유학 교육은 전체 교육 체계의 매우 협소한 부분으로 점차 줄어들어 갔고, 대신 격물학(格物學)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적인 학문이 요동의 주류로 올라서 있었다.
이러한 요동의 학문적 기반은 적어도 베르누이에게는 적응하기 매우 쉬운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그가 하는 연구에 있어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수학 및 화학과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좋은 편이었다.
진심으로 요동의 학문적 풍토에 감탄한 베르누이는, 성심전력을 다해서 김행의 학예원 설립 계획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미 영안에서 대학을 세우는 일에 참가한 경력이 있던 베르누이는, 요동의 제 학자들과 토론을 하며 과연 왕립학예원이 어떤 형태로 세워져야 할지 구체화를 시키기 시작했다.
요동왕 김행은 종종 이런 토론장에 나타나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방향을 주문하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개진하는 의견을 막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선 학예원의 관장 범위를 먼저 확립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학예원이 왕립대학의 상위기관으로서 대학교육의 방향을 관장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 그리고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예술의 분야에 있어서도 모범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인지의 문제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국가가 문화적 규범을 지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학예원은 단순히 학문과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로 남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상 전하께서도 넌지시 비추신 것처럼, 새로운 학예원은 자랑스러운 요동국의 모범적인 문화규범을 제시하고 이를 확산시킬 의무가 있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도력과 강제력이 있는 기관이 되지 않으면, 시중의 천박한 문화는 이내 요동의 정신을 좀먹게 만들 것입니다.”
자문관들은 밤낮으로 열성을 다해 토론했다. 더러는 이 기관의 기능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고, 누구는 강력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결국 회의 끝에 대략의 합의가 이루어져, 국왕 김행에게 상주되고, 공회의 의원들에게도 송부되었다.
그 내용은 학예원을 요동국의 학문과 문화를 수호하는 최고의결기관으로 확립한다는 것과 이 기관에 지도 편달을 할 권리와 강제권을 부여하여 건전하고 국가의 정신에 부합하는 문화를 진작시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요동국이 독자적인 문화를 확립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 더불어 이 학예원에서는 내지의 한국어와는 다른 요동의 방언에 근간한 국어(國語)의 정립을 진흥한다는 방침도 내세웠는데, 합의문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어(朝鮮語) 료동 방언(遼東方言), 특히 성경(盛京)의 신사 계층이 사용하는 어언적(語言的) 형태를 기(其) 골자(骨子)로 하야, 내지(內地)의 서울말과 구분되는 료동의 국어를 확립하고, 차(此)에 따라 어휘(語彙)를 채집(採集)하고 규범화하여 언어활동의 기본으로 삼게 하는 역할을 다 할 것.」
학예원의 방침은 내지에서는 이미 폭 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두음법칙(頭音法則)에 의한 어두자음의 음가가 바뀌는 현상을 배제하고, 두음법칙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요동말을 국어의 골자로 삼겠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요동만의 언어학적 규범을 확립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러한 합의문에 담긴 내용은, 요동왕 김행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이 외에도 베르누이가 독자적으로 개진한 의무교육에 대한 발안은 김행을 사로잡았다. 학예원에서 규정하는 문화규범을 전 국민에게 교육한다는 발상이었다.
“의무교육이라 하면 모든 백성에게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게 한다는 말인가?”
“현재도 일부 도입하고 있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스웨덴 같은 경우 교회를 중심으로 문자와 간단한 산술을 거의 모든 신민에게 교육시키고 있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경우에는 교구 단위로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보내게 하는 법률을 입법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문맹률을 줄이고 신민 모두가 기본적인 교육을 받게 한다면, 나라가 부강해지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자와 산술 교육은 병역을 지는 기간 동안 군대에서 교육받고 있는데, 무엇을 더 교육한단 말인가?”
“전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요동이 보다 독립된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신민 모두가 요동 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군주에게 충성하는 마음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국가에서 권장하는 표준적인 언어로 언중을 통일하는 일을 모두 의무교육 제도의 도입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대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육 과정을 학예원을 통해서 통제하겠다는 이야기로군. 기초적인 의무교육을 실시한다면, 국가에서 당연히 대학과 기초 학교 사이의 매개가 되는 중간 과정의 학교도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땅한 말씀이십니다. 전국 7로 1계에 내지의 상학에 상당하는 중등 교육기관을 개설한다면 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그대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겠다.”
요동이 내지와 구분되려면, 요동인이라는 자각을 갖는 국민을 형성시키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었다.
특히 한국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혈통적, 언어적으로 잡다한 민족이 뒤섞여 있는 요동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동국의 국민이 될 민족을 창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단일한 언어로 소통하고, 단일한 조국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말이다.
내부의 분열 소지를 분쇄하고, 같은 국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의무교육은 중요한 장치였다.
이것을 제안한 베르누이뿐만 아니라, 요동왕 김행도 그 의미를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김행이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요동은 중세와 근대의 경계선에 서 있는 봉건질서를 내포한 국가에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겪고 있었다.
근대국가라는 것은 국민을 장악하고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곧 신민(臣民)이 국민(國民)으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농지에 얽매인 백성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창출된 마음속의 조국에 충성할 수 있는 국민이어야 했다.
땅에 붙어 있는 농민은 지배자가 누구인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의 일부로서 자신을 투영시켜 보게 되면, 국가를 유지하고 사수하는 일에 국민 스스로가 몸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요동과 같이 주변 환경에 취약한 국가가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학예원의 설립과 의무교육의 시행이 잘 진행된다면, 징병제와 함께 국민 형성을 결정적으로 지원하게 될 터였다. 요동왕 김행은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이 일을 진행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696년
건희(建禧) 28년 중하(仲夏)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1696년(건희 28) 5월 26일, 성경부 내성(內城) 남문 앞 광장을 낀 곳에 웅장한 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 4층짜리 건물로 유럽의 바로크 양식을 본 딴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요동왕 김행이 즉위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정책의 결실인 「요동왕립학예원」이었다.
일부 성경왕립대학 교수진 및 신사 계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요동왕립학예원은 문화 및 학술 정책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를 위임받게 되었다.
총 50인의 매우 적은 숫자로 구성되는 학예원 회원은, 각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이들에게 종신으로 주어지는 자리였다.
이미 학예원의 설립에 관한 자문역을 맡았던 30인이 그대로 이 학예원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20명을 각계에서 말 그대로 천거(薦擧)받아 채웠다.
이미 예견된 대로 학예원이 처음 맡은 일은 요동의 국어 규범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국어어휘편람(國語語彙便覽)》이라는 대사전의 집필이 학예원의 적극적인 주도하에 개시되었다.
요동 방언에 기초한 한국어를 요동의 국어로 사실상 선포하고, 이에 맞추어 언어의 통일을 위한 규범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여기까지는 적어도 학예원의 주도에 대해 반발은 크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한 학예원의 노골적인 간섭에 대한 비판도 크게 제기되지 않았는데, 바로 이 학예원 종신 회원직에 앉아 있는 이들이 대개 성경왕립대학의 교수좌(敎授座)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학예원의 개입에 대한 반발은 대학의 담장 밖에서 터져 나왔다. 바로 시중의 문학과 공연에 대한 시시콜콜한 간섭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성경부 외성의 태서문(泰西門) 일대는 일종의 극장들이 줄을 지어 있는 공연가였다. 서문대로(西門大路)라고 하면 곧 연극 공연을 떠올릴 정도로 시중에서 그 인기가 자자했다.
이곳 서문대로에서 공연되는 연극들의 기원은, 원래 나례(儺禮)라는 이름으로 궁중에서 귀신을 쫓기 위한 연희(演戱)에서 출발한 전통적인 제의(祭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제국 초 공식적으로 조정 내에서 폐지됨으로써, 이에 종사하던 편놈[伴人]들이 이른바 산대(山臺)라는 이름의 가면극을 지방으로 순회하며 공연을 하게 되었고, 지역마다 제각기 분파되어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산대 패거리가 요동에까지 흘러들어 와 정착한 것이 바로 외성의 태서문 주변이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가면을 쓰고 탈춤을 놀던 이들은, 이내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마당 형태의 극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보다 정교한 각본(脚本)과 배우의 연기력에 의지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대개 「서문극(西門劇)」이라 통칭되는 정형화된 방식의 연극 공연을 행하고 있었다.
몇몇 유명한 작가들은 꽤나 좋은 대우를 받고 희곡을 써 이름을 드높였고,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 민낯을 드러내고 연기하는 배우들 중 빼어난 외모를 지녔거나 압도적인 연기력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시중에 그림이 모사되어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월산노인(月山老人)이니 해산옹(海山翁)이니 하는 작가들의 유명한 희곡인 《권용선전(權龍仙傳)》이나, 《토평동몽(討平東蒙)》같은 작품들은 거의 수십 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잉글랜드의 이름난 희곡작가였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번안되어 《리어왕》을 옮긴 《리왕전(李王傳)》, 《한여름 밤의 꿈》을 각색한 《중하야지몽(仲夏夜之夢)》등이 절찬리에 공연될 정도였다.
이렇게 연극 풍토가 정착되어 가고, 신분이 높거나 재력이 많은 이들도 이런 연극 공연을 참관하고 때로는 투자하기도 하면서 배우에 대한 인식도 점차 개선되어져 이들을 천하게 보는 풍조도 사라졌고, 소위 옛 이름을 딴 산대(山臺)라 불리는 극단들이 구성되어 철저히 도제식으로 연기를 가르치는 문화가 조성되었다.
종종 이런 극단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는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성경산대(盛京山臺)는 현 국왕 김행의 숙부인 장현대군(章賢大君) 김헌(金獻)이 한동안 손에 쥐고 있기도 했었다.
허나 이런 분위기의 변화가 꼭 좋은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연극계 내부에서도 철저하게 고급스러운 공연만을 지향하는 무리와 보다 일반 대중에게 밀접한 연극을 하는 이들로 양분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탈춤을 여전히 공연하면서, 지배층을 풍자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조롱하는 일종의 희극(喜劇) 공연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일종의 일반 민중들의 여가수단으로서 마당놀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연극들은 이내 고급스러운 취향을 지닌 이들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다.
왕립학예원이 연극계에도 모범적이고, 요동국의 품위에 걸맞는 고상한 연극만을 공연할 것을 주문했을 때, 노도 같은 반발이 일어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단순히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공연을 하던 이들만 왕립학예원의 규제에 반발했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김만중(金萬重)의 소설 《구운몽》을 본인이 다시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이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공연하고 있는 산대 중에는 가장 고급스러운 공연만을 올린다고 정평이 자자한(거꾸로 말하자면 가장 재미없는 작품만을 올리는) 별산대(別山臺)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학예원에서는 이 김만중의 《구운몽》을 천박한 작품으로 규정하고, 가급적 출판을 지양할 것을 통보하는 한편, 공연 자체를 금지시켜 버리고 말았으니, 연극계 전체가 학예원의 횡포에 들끓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신 학예원이 주문한 것은, 요동국 역대 선왕들의 영웅적 행적을 찬양하는 공연을 제작해 올리거나, 혹은 일전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동몽으로 들어가 북원의 다얀 칸을 패퇴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토평동몽(討平東蒙)》 같은 작품만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왕가를 칭송하거나 요동국의 영웅적 서사시를 읊지 않으면 모범적인 작품으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편협한 주장이었다.
“아, 이거 요즘에는 좀체 서문에 가도 볼 만한 극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 배우들 연기하는 것도 맥도 빠지고 말이야.”
“독고진명이라고 그 유명한 배우가 요즘 아주 무대에 내비치지를 않고 있어. 듣기로는 아주 성경 바닥을 버리고 내지로 들어가 황성부에서 산대를 조직한다고 하던데, 아주 요즘 재미가 없어져 버렸어.”
별다른 유흥거리가 없는 성경의 서민들에게 공연 관람은 주요한 여가 중 하나였고, 이러한 재미가 학예원의 단속으로 시들해져 버리자, 이내 맥이 빠진 채로 삼삼오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성경 바닥에 심심찮게 보일 정도였다.
사실상 서문대로의 공연이 완전히 정지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자, 이내 각 산대에 투자해 두었던 상인들, 더러는 관료들까지 학예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손실을 볼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학예원은 이에 대응해서, 천박한 연극 공연이 매춘과 이어지거나, 혹은 지배층을 조롱하는 데 악용된다며 방어하고 나섰으나, 억지스러운 조치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결국 그 제재를 풀 수밖에 없었다.
일시적으로 이러한 조치는 무산되었지만,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연극뿐만이 아니라 문학 작품, 음악에 관해서도 사실상의 검열권을 쥐고서 학예원은 끊임없이 규제와 규율을 시도했다.
이러한 학예원은 양면적인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는데, 요동의 문화적 성격을 단일한 것으로 응집시켜 동질성을 확보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양성을 훼손하고 자의적인 고급 문화와 저잣거리의 문화를 구분하는 기준을 들이대어 예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적으로, 요동국 독립을 다룬 지루한 서사극인 《회군노정(回軍路程)》을 집필한 극작가 오부양(吳扶楊)은 이 공로로 학예원의 종신 회원직을 획득하였으나, 반대로 시중에서 인기가 좋았던 극작가인 해산옹(海山翁) 유채면(劉綵勉)은 끝끝내 학예원의 종신 회원에 들지 못했다.
해산옹 유채면의 작품은 문학적인 가치도 탁월하여, 진서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나 일본어로 번안되고, 종래에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인 《남원춘향》이 학예원 창설에 관여했던 자크 베르누이에 의해 불어(佛語)로 옮겨져 파리에서 공연되었음에도 그랬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정부 고관을 조롱하고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시답지 않은 이유로 학예원은 그의 작품이 오부양의 것보다 못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내가 그 학예원의 손발을 맞추어주느니, 내 차라리 길에서 빌어먹고 마련다. 내 작품을 사람들이 좋아하니,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유채면은 종래에는 아주 학예원을 조롱하는 구절을 자신의 희곡에 대놓고 써 넣을 정도로 비판하고 나섰다. 학예원은 이를 규제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유채면에게 재갈을 물릴 수도 없었는데, 반어적이게도 요동왕 김행이 유채면의 작품들을 즐겨 관람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학예원의 입장에서는 국왕 김행의 행동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는데, 국왕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에서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의 작품을 국왕이 직접 행차해서 관람한다는 것은 학예원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학예원은 국왕의 눈치를 보느라 유채면을 정면으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유채면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공공연하게, 다만 대놓고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 정도로 학예원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기실 학예원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반분되어 갑론을박하기 일쑤였고, 종래에는 국왕 김행 자신이 직접 중재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김행은 다시 한 번 학예원에 부여한 감독권을 재확인하면서도, 학예원 회원들에게 이 권한을 남용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권리는 주었으나 행사 하는데 좀 더 제약을 두자는 것이었다.
학예원의 설립 이후 일어난 일들이 국왕 김행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 것에 대한 불만도 조금은 그 조치 안에 담겨 있었다.
김행은 요동의 문화 규범을 강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지, 획일화하고자 하는 뜻까지는 없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미 경고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예원이 등장하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문화 및 학술 전반에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 요동왕립학예원은 삐걱거리면서도 종래에는 어떻게든 굴러가기는 시작했다.
순수한 원로 학자 및 예술가들의 명예로운 모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시시콜콜 훈장질을 해대는 까다롭고 보수적인 노인네들의 사랑방으로 남을 것인지, 학예원 자신부터가 사실 혼란스러운 노릇이었다.
“영안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가?”
베르누이는 학예원의 종신 회원직을 반려하고 북해의 영안부로 돌아가겠다고 작심한 뒤 김행을 찾아왔다.
학예원은 이제 자리를 잡았다면 잡았고, 그렇지 않다면 아직 부족한 마당이었다. 그러나 베르누이는 적어도 자기 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고, 더군다나 최근에 벌어지는 소동에 대해서는 진력이 난 느낌이었다.
“염치불구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영안으로 돌아가 한 해쯤 머문 뒤에 유럽으로 아주 돌아갈까 합니다.”
요즘 들어 베르누이가 느낀 것은, 바로 스승인 라이프니츠가 여겼던 것처럼 요동의 군주들도 절대 계몽군주의 모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나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균열이 있고 파행이 있었으며, 기득권자와 박탈된 자 사이의 갈등, 생김새와 언어에서 오는 차별, 남녀 간의 불평등의 각종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혹자들이 비문명적인 나라들이라 폄훼하는 곳이나, 소위 발전했다는 극동이나 유럽 같은 곳이나, 베르누이가 보기에는 한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
복잡한 요동의 정세를 그간 지내며 이제는 다 알아 버렸기에, 이곳에 대한 신비감도 더 이상 없었다. 베르누이는 이제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다시 바젤대학의 교편을 잡을 생각이었다.
“종종 안부를 과인에게도 전하여 주게.”
요동왕 김행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군주다운 절제된 모습으로 담담하게 베르누이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베르누이는 이 젊은 군주가 나이가 차고, 세상의 복잡 미묘함을 좀 더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변화할지 갑자기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을 뒤로하고, 베르누이는 영안을 거쳐,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연구와 강의를 하고 그간 모아둔 자료를 정리한 뒤, 이듬해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1698년
건희(建禧) 30년 맹추(孟秋)
대한제국 황성부
황성에서 황제가 붕어(崩御)하여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늦가을 무렵의 일이었다.
의회는 3개월간의 휴정(休廷)에 들어가고, 국상이 선포되어 장례가 치러지는 9일간 전 신민이 상복을 입고 애도를 표하도록 임시 법률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황제의 권한이 내각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때의 호사스러운 장례는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정확히 9일간의 장례 기간이 끝나자, 능역(陵域)에 고이 안장했을 뿐이었다.
죽은 건희제는, 송시열의 의회 정권에 의하여 최초로 옹립된 황제인 태화제, 혹 현조(顯祖) 의황제(義皇帝)의 뒤를 이어, 의회 정권하에서 두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 앉은 이였다.
1668년 즉위한 이후 무릇 서른 해를 용상에 앉아 있었으나, 그의 치세 기간 동안 황제는 완전히 상징적인 존재로 굳어졌다.
그는 칙령(勅令)으로 반포될 법령들과 혹은 매우 중요한 선언문 따위에 옥새를 찍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도리어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서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기벽(奇癖)이었다. 서양 언어를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서양 음식을 먹고, 심지어는 서양 여자를 불러다 잠자리하는 것까지, 건희제는 서양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직접 손을 대보고 즐겨야 했던 것이다.
서양 교수들이 설립 과정에 참여했다는 영안대학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내탕금으로 지원하거나, 휘호를 내리거나, 혹은 직접 찾아가며 얼쩡거렸던 것도 다 이 기벽 때문이었다.
허나 이러한 황제의 기벽은 그저 상스런 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제국 신민들은 점점 신하된 백성[臣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점점 황제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그들은 당대의 정치 현실이 더 이상 황제의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게 의회에 앉아 있는 소위 의원 나리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점차 구름 위로 솟아 올라간 존재가 되어 버렸고, 아무도 경복궁 안의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독자 노선을 공인받음으로써 거리감이 생긴 요동국에 있어서, 존재감 없던 황제가 죽은 사실이 큰 화젯거리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으로 요동은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는 산하(傘下) 국가였으며, 그 위치는 유구국(琉球國)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상국의 황제가 죽었는데 조문을 보내기는 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족히 천 명에 가까운 조문단을 꾸려서 국경을 넘어 황성으로 입시(入侍)하도록 보냈을 터인데, 이제는 고작 서른 명의 조촐한 인원이 생색내는 셈으로 꾸려진 것이 고작이었다.
어찌 되었든, 요동뿐만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유구국과(지방관을 대신해 국주(國主) 고씨가 세습하여 지배하는) 탐라국의 조문 사절들이 정식으로 입조(入朝)하여 조의를 표했고, 장례 기간 동안 닿을 수가 없어 도착하지 못한 영주도독부의 조문단을 제외한 북해 및 진서 도독부의 조의 표시가 이어졌다.
이외 일본·양(梁)·월(패)·네덜란드·포르투갈 등에서 급하게 한국 내에 체류 중이던 인사들로 조문단을 꾸려서 인산(因山)길에 동행했다.
건희제의 시호는 순종(順宗) 정황제(定皇帝)라 하였다. 그 살다간 삶만큼이나 색깔 없는 묘호(廟號)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황제의 뒤를 이어 황태자 신(愼)이 황제의 위에 즉위하니, 연호는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1701년
천통(天統) 3년 맹춘(孟春)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과인은 올해 정사를 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치를 학무에 두고, 이를 백성들에게 고루 펴는 법제를 시행하여 두루 덕이 미치도록 할 것이오. 공회의 제경들과 관부의 제신들은 나를 도와 이를 이행함에 있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어야 할 것이외다.”
1701년, 새해 첫 조회(朝會)에서 요동왕 김행은 신하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는 일전 베르누이로부터 제안받은 의무교육안에 대해서 그간 함구한 채 고심을 거듭해 왔다.
그동안 요동국 내에서 국왕이 진지하게 의무교육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국왕 김행이 갑작스레 자신의 통치가 안정되었다는 판단이 들자 갑작스럽게 이 문제를 원단의 대조례에서 갑작스럽게 공론화시켜 버린 것이다.
아무런 사전 조율 없이 갑작스럽게 던져진 국왕의 발표에 공회의 의원들과 조정의 대신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아무 말을 하지 못하다가, 조례가 끝나고 귀가 하는 길에 삼삼오오 모여서 국왕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도대체 의무교육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 아닙니까. 도대체 정확히 그게 의미하는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거야 저라고 알 도리가 있겠습니다. 백성들에게 의무로 교육을 시키고 학교를 다니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예전 학예원처럼 제대로 자리가 잡힐 때까지 또 한 번 고생을 해보셔야 이렇게 큰일을 또 들고 나오지 않으실 텐데…….”
“그러게 말이외다. 그나저나 승정원을 통해서 의무교육에 대한 내용을 담은 회람문이 작성되어 내려온다는데, 이게 나올 때까지는 무어라 예단은 할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보통 건수가 아닌 듯싶은데 말이오.”
심양의 관가(官街)가 술렁이든 말든, 국왕 김행은 일체의 언로를 차단한 채 국왕의 비서기관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에 임명해 둔 몇 명의 측근들과 함께 비밀리에 의무교육에 대한 대강(大綱)을 잡았다.
공회에 송부(送付)하여 법령을 심사하게 하고, 이를 통과시키게 한다면 어느새 누더기가 되거나 지지부진 시간을 끌다가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될까 우려했던 것이다.
때문에 김행은 편법을 이용하여, 법안을 승정원을 통해 작성하여 국왕의 명령문인 교서(敎書)로 반포하고, 공회에는 사후 추인을 받을 작정이었다. 이미 반포된 교서는 국왕의 다른 교서 없이는 철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추인하고 이행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전하. 교서로 반포를 하게 된다면 필히 제신들의 반발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승정원 내부에서도 김행의 공격적인 정책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실상 김행의 수행 비서 노릇을 하는 가장 밀접한 측근으로, 나이도 젊고 충성심도 뚜렷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들에게도 요동의 전 백성에게 의무적인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분명히 이를 시행하기 위한 자금을 확충하는 것이 어려울 터이고, 이는 곧 막중한 세금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고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 부유한 자들에게 자진해서 세금을 내거나 땅을 바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로서는 가히 그러고자 할 충분한 이유가 없습니다.”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전증(全繒)이 김행에게 엎드려 아뢰었다.
그는 왕명을 받아 의무교육에 대한 교서의 초안을 잡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제대를 잘못 시행한다면, 마치 수나라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같은 과중한 토목사업과 같은 노릇이 될 수도 있었다.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확충하고, 거기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이를 유지하려면 들어가야 할 재원이 산더미였다.
“만약 시행해 보고 더러 문제가 있으면 이를 고쳐 나가면 될 것이네. 아는가, 도승지? 과인은 설마하니 시행하자마자 반발 없이 이 일이 잘 시행될 것이라고 여기지 않네. 어쩌면 학교를 만들어도 어리석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보내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시작도 하지 않고 어찌 겁부터 내겠는가.”
김행의 의지는 확고했다. 전증도 더 이상 추상같은 임금의 명령에 더 이상 토를 붙일 수는 없었다.
“삼가 명을 받들어 확고히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두교서(年頭敎書)에서 의무교육의 방안을 언급한 지, 석 달이 지나고, 성경의 모든 관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천통 3년 왕령 제4호로 「료동국 신민의 의무교육 제도의 시행에 관한 교서」라는 제목의 교서가 반포되었다.
이는 이내 시중에 파란을 몰고 왔다.
공회에서는 즉각적으로 개회(開會)를 공포하고 의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 교서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기 시작했고, 조정 관리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이 교서의 내용을 놓고 갑론을박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국고에서 전액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유지 및 신사 계층에서 이 의무교육에 대한 자금을 부담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실상 손 안 대고 코풀겠다는 심보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도대체 왜 일반 백성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도층에서 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부터 제기되었다. 사실상 국왕에게 충성심을 고양하는 내용의 교육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어째서 이것을 사족(士族)들이 돈을 대어 시켜야 하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의 맥락은, 바로 산업사회의 직전 단계에 도달해 있는 요동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모순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사실상 자본이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단순한 노동력의 충원을 바라지, 굳이 글과 숫자를 아는 교육받은 노동자를 원하지 않았다.
단순히 방적기로 면을 짜내고, 도자기를 빚을 줄 알고, 유리를 다듬을 줄 아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이런 것이 의무교육을 통해 얻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문자와 산술은 매우 한정된 계층만이 독점하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허나 국왕 김행이 내다보고 있는 것은 한발 더 나아간 요동국의 미래였다. 지금과 같이 사실상 누더기 같은 혼종 국가에 지나지 않는 요동국을 명실상부한 일체화된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의무교육의 시행은 필수라고 김행은 느끼고 있었다.
공회 의원들과 관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행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문제는 공회 의원들이 추인을 거부하고 잠정적으로 공회를 무기한 휴정해 버린 것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이들의 반응에 김행은 적잖이 당황했다.
요동의 공회의 의원 중 1/4은 국왕이 임명하는 서임의원(敍任議員)이었다. 더군다나 또 다른 1/4은 국왕의 입김이 닿는 왕당파인 서당(西黨)에서 지명하는 의원이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국왕 권력을 견제해 온 심양한씨가 주축이 된 동당(東黨)의 1/4 뿐만이 아니라, 제한된 참정권을 통해 선거인단에 의해 선발되어 공회에 올려 보내진 1/4의 무당파 의원들과 서당의 일부 의원들이 동당의 반대 정책에 동조하고 나섰다.
매우 소수의 부유한 이들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져 있었기에, 무당파 의원들은 스스로가 의무교육 법령에 의해 재산을 갹출해야 할 위치에 있었던 데다가, 그들을 공회로 올려 보낸 같은 지주 계층의 이해관계에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이 의무교육령에 반대하는 동당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교서의 추인이 점차 요원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공회가 교서를 추인하지 않아도, 왕이 내린 명령이 곧 법률에 편입되는 요동국의 법 제도하에서 교서는 반포된 순간 이미 효력을 가지게 된다.
문제는 공회의 추인이 없으면 그에 수반되는 세부적인 법령을 제정할 수 없어 공중에 붕 뜬, 의미가 없는 법이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설마하니 국왕이 뜻을 물릴 때까지 추인 자체가 불가능하게 공회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릴 것이라고는 김행은 전혀 예견하지 못했었다.
“도승지는 공회를 소집하라는 왕명을 의원들에게 전달하라. 내가 직접 공회에 출석하여 이들과 협의하겠다.”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국왕 김행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김행은 이미 의회제도가 정착된 나라에서 군주가 절대적인 권력을 확보하려고 시도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미 내지에서의 사건들을 통해 충분히 유념하고 있었다.
반세기 전 내지의 의회 권력은 황제를 붙잡아 사약을 내렸었다.
물론 요동은 내지와 달랐다. 요동은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한 곳이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왕권이 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제도가 유지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리에 앉아 있던 임금들이 가급적 합리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금양군 김제가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고, 무리한 군사행동을 시도했을 때 그 반응은 반정(反正)으로 돌아왔었다.
반정으로 집권한 김행의 조부인 현양왕 김윤이 내지의 의회를 본 딴 공회제도를 자발적으로 실시하고, 권력을 분산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잠재적인 권력 간의 충돌을 사전에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서 오히려 왕권의 효율적 집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김행이라고 이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공회의 딴지가 짜증스럽긴 했지만, 대립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것은 국왕에게 불리한 판이었다.
김행은 절치부심하고, 어렵사리 공회의 의원들을 불러 모아 강제로 개회시키고, 직접 출석하여 앉았으나, 아니나 다를까 의원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전하. 재고하여 주십시오.”
“이대로 시행할 경우 민심이 이반되고, 과중한 조세에 신민들이 허덕일 것입니다. 역대로 상고해 보건대, 이러한 제도는 전에 시행된 바도 없을뿐더러, 지금도 제대로 운용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는 악법은 아니나, 그렇다고 양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소격란국의 법령은 실지 시행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나 효력이 없어 백성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각 관구의 유지들만이 무리한 부담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무리한 제도를 본 따서 시행하려 하십니까.”
소격란(蘇格蘭)이란 다름 아닌 스코틀랜드다. 이미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들은 이제 왕이 스코틀랜드의 교육령을 참고했음을 알고 있었다.
공회에 앉아 있는 의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정보 수집력을 지니고 있었고, 더러는 유럽까지 닿는 연락선이 있었다.
특히 왕령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동당을 중심으로 이미 이 스코틀랜드의 법령에 대하여 검토를 마치고 공회에 출석한 뒤였다.
“제경들은 들으시오. 과인이 교서를 반포한 것은 이미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요동에서는 적합하게 시행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소. 과인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이미 학예원의 현유들과 승정원의 관리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이를 반포했는데, 어찌 시행해 보지도 않고 문제부터 있다고 트집을 잡겠소?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긍정적으로 시행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 주었으면 하니, 제경들은 필히 냉정한 마음으로 검토하여 주시오.”
김행이 직접 단상에 올라 의원들을 질타했으나, 여전히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들은 차마 국왕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했으나, 의무교육령에 대한 반발감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좋지 않게 말한다면 축재한 재산을 이런 일에 내어놓기 싫다는 것이고, 조금 돌려 말하자면 불필요한 일에 돈을 낭비할 수 없다는 나름의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시행은 하되,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회의가 길어지고, 김행의 안색이 무거워지자, 슬슬 왕명으로 공회 의원으로 임명받은 서임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자리에 앉은 것이 왕명에 의한 것임을 알기에 국왕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합리적으로 개정이 된다는 전제하에 국왕의 기분에 맞추어주는 것이 이들 자신에게 유리한 일이기도 했다.
회의는 그날로 끝나지 못하고, 한 달에 걸쳐서 개정과 휴정을 반복하며 길어져 갔다.
의원들도 결국 협상에 동의하고, 서임의원들의 주도하에 중재안을 마련하는 데 동참했지만, 서로 간의 의견 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실제 업무를 집행하게 될 국가 관료들이 이 회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집단으로 조정에 등청하지 않으면서 일은 더 복잡해져 갔다.
결국 국왕 김행과 공회 의원들은 육조(六曹) 판서들이 공회에 출석하여 회의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다행이라면, 그래도 논의에 속도가 조금씩 붙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가장 중요한 관건은 바로 의무교육의 연한과 제도의 시행을 위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문제였다.
당초 김행은 교서에서 이 의무교육 연한을 6년으로 정하고, 약관이 되지 않은 신민은 모두 나이 불문하고 이 6년간의 의무교육을 이수하는 방안을 들고 나왔었다.
그러나 공회 의원들과 관료들이 보기에 이 기간은 터무니없이 길었다.
정말 김행의 말대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사상을 심어주고, 문자를 깨우치며, 간단한 셈을 가르칠 목적이라면 6년의 기간은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6년 동안 노동에 투입할 수 있는 아이들을 학교에 가만히 앉혀 놓는다는 것은, 농장주나 도시에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저렴한 아동 노동력이 희소해지고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잠재적인 비용 손실뿐만 아니라, 당초의 교서에서는 국고에서는 거의 돈을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세금을 추가적으로 거두지 않고, 오로지 유산 계급이 반강제적으로 이 의무교육을 위한 재원을 대도록 되어 있었다.
공회 의원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이유가 바로 이 조항 때문이었다.
양쪽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양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타결되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져야 했다.
결국 공회에서 무한정 의무교육 문제만을 다룰 수는 없었기에, 각기 대표자를 선출하여 「교육심의위원회」를 임시로 구성하고, 비정기적으로 이 문제가 타결될 때까지 토의하도록 방편이 마련되었다.
국왕 김행은 승정원을 독촉해서 이 교육심의위원회에서 목소리를 내도록 했고, 반대로 그 대척점에 있는 동당의 심양한씨들은 대리인도 내세우지 않고 직접 대표 자격으로 위원회에 출석해서 반대 의견을 꿋꿋이 고집했다.
해를 넘기고, 또다시 한 해를 더 넘기고 나서야, 이 교육심의위원회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타협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의무교육을 강권하되, 부득불 자녀를 보내지 않는 부모에게는 소정의 벌금 형식의 세금을 걷고, 국고와 지역 유지들이 적당한 비율로 초기 학교 설립들의 자금을 부담하고, 이후에 제도가 정착이 되면 이를 바탕으로 국가 비용으로 운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6년으로 당초 제안되었던 의무교육 연한은 4년으로 축소되고, 여성은 배제하고 남성만을 해당시켰다.
또한 전반적인 제도 자체도 당장 즉각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20년간의 유예를 두고 점진적으로 도입해 나가기로 결정되었다.
국왕 김행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결론은 아니었지만, 결국 이 정도 양보를 받아 시행할 수 있게 되자 결국 위원회의 결정에 승복했다.
그것은 공회 의원들과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상으로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고 대립국면을 길게 하는 것은 이들로서도 피곤한 일이었다.
결국 반쪽자리이긴 하지만, 결국 의무교육 제도가 〈신민교육교서〉라는 이름으로 1703년, 천통 5년에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요동국의 7로 1계에 속한 각 부(府)와 군(郡)마다 1개의 의무교육을 담당하는 소학교(小學校)를 설치하도록 결정되었다.
인구가 희박한 북계(北界)를 제외하고 7로에는 각기 수부(首府)에 6년제의 중학교(中學校)와 사범학교(師範學校)를 설치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소학교를 나온 이들 중에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중학교를 졸업해야 입학 자격을 주도록 결정되었다.
사범학교는 소학교 졸업자들 중에 후일 소학교의 교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개설되었는데, 이 학교의 운용만큼은 초창기부터 전원 국고에서 비용을 부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외에도 중학교 및 사범학교를 졸업한 자에 한해서 성경왕립대학뿐만 아니라, 장교를 배출하는 요동무관학교, 그리고 새롭게 개설된 「왕립의학원(王立醫學院)」과 「왕립법학원(王立法學院)」에 진학할 수 있도록 결정되었다.
이로서 요동국의 교육 체제는 형태적으로 완성되고, 근대적인 구조화를 이루었으나, 동시에 출발부터 삐걱거린 탓에 호응은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첫 해에 소학교 입학 대상자에 해당하는 인원 중에 소학교에 들어간 것은 채 8%에 불과했다. 요동이 전인구를 대상으로 4년의 의무교육을 완전히 달성하기까지는 앞으로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