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5장 좌조문도(坐朝問道) (66/82)

제65장 좌조문도(坐朝問道)

「팡글로스는 캉디드에게 말했다.

“여기에 세상에서 가능한 최상의 사건들이 이어진 결과가 있네요. 만약 당신이 퀴네공드 아가씨를 사랑한 것 때문에 좋은 성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당신이 이단심문관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아메리카 대륙을 두 발로 여행하지 않았다면, 또 당신이 모든 양을 잃게 되어서 엘 도라도에서 나오게 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여기서 잘 말린 시트론과 피스타치오 땅콩을 먹고 있지 않겠지요.”

“잘 말했어.”

캉디드가 대답했다.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천주의자》, (1748)

1710년

천통(天統) 12년 계추(季秋)

대한제국 황성부.

안개는 마치 춤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강을 건너서는 사방이 무중(霧中)이었다. 넓고 습기 찬 갈대밭은 깊게 잠겨 내려갔다. 가을이면 으레 올라오는 안개가 그날따라 유난했다.

강에서 밀려온 물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북으로 실려 가고, 들판 위에 듬성하게 서 있는 언덕은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같이 보였다.

그 언덕들 위에는 얼기설기 초가를 잇고 나무로 덧댄 낡은 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서 있었다. 그 집들을 뒤로하고 굴뚝과 좁은 골목길이 안개 사이로 뻗어 있었다.

한강 건너편의 저지에는 일교차가 심한 때면 이렇게 안개가 심했는데, 특히 이런 가을 무렵이면 새벽부터 시작된 안개는 아침나절까지 태양을 가렸다.

안개가 자욱한 이곳 노량진 일대는 황성부의 변두리였다.

지난 세기 말에 축조된 한강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제도대교(帝都大橋)를 건너서 강의 맞은편으로 건너오면, 최근에 완성된 경인거(京仁渠, 경인운하) 수운길의 종착지로 형성된 여의도(汝矣島)의 하항(河港)의 뒤쪽으로 음습한 골목길들이 사방팔방으로 뒤엉킨 서민 주거지가 나타난다.

이 일대에는 소규모 공방과 가난한 빈민들이 사는 허름한 집들이 처마를 잇고 있고, 그 사이의 오물이 넘치는 좁은 길들은 말 한 마리가 지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한때 황성부의 가장 빈곤한 계층이 모여들던 빈민굴은 이 노량진을 떠나가 보다 외진 사당골[舍堂洞] 방면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강북에서는 살 수 없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하네그려.”

“백 년이 넘게 이런 환경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지요. 강북의 사대문 안이나 성동 일대에서는 돈 많고 신분 좋은 이들이 호의호식을 누리는 한편, 이곳 강 건너와 서대문 밖은 물도 귀하고 거리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심심치 않게 역병이 도니 가히 수라도나 다름없습니다요.”

이 노량진 일대의 삭막한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마루 위에 서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량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동재기나루[銅雀津, 동작진]이라 불리는 나루터가 있었고, 이곳에서 노량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동재기 고개라고 불렀다. 이곳에 올라서게 되면 경강(京江, 한강)이 굽이치는 곳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판무관님께서 괜히 이 동네에 들어갔다가 문제가 커질 소지가 있습니다. 그냥 어서 누가 보기 전에 제도대교 건너서 강북으로 돌아가시지요.”

판무관이라 불린 사내는 다름 아닌 요동국에서 국왕 김행의 어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도승지를 지낸 전증이었다. 그는 동틀 녘부터 어쩐 일인지 수행원을 대동하고 강 건너로 나와 있었다.

“아니야, 아닐세. 이보게 장평강이, 정 겁이 나면 혼자 돌아가도 좋으이.”

전증은 씩 웃으며 장평강이라고 불린 남자에게 말했다.

장평강은 괜히 멋쩍은 듯 쓰고 있던 벙거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전국에 수배된 남자를 직접 나서셔 가지고 국경 너머로 보내는 일을 한다는 게 어디 쉬운 노릇입니까. 더군다나 요동국을 대표해서 직접 이곳에 주재하러 오신 분이요.”

“장길산이를 꼭 빼내야 될 이유가 있어. 일전의 사건에 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되네, 절대로.”

전증의 지금 신분은, 요동국을 대표해서 황성부에 주재하고 있는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이었다.

같은 제국 내의 국가 간에는 대사(大使)나 공사(公使)를 파견하지 않고, 대신 고등판무관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에 주재를 시키고 있었는데, 요동국과 제국 정부 사이에 고등판무관을 상호 주차하고 성경과 황성 양측에 상호 판무관실(辦務官室)을 상주하기로 한 것은 작년의 일이었다.

이 결과 초대 주차제도요동국고등판무관(駐箚帝都遼東國高等辦務官)으로 전증이 부임해 온 것이었다.

사실상 공식적인 임무는, 일반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 간의 상호 주차대사나 주차공사를 교환한 것처럼, 상대방 정부와 교섭해서 일반적인 외교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어야 하겠으나, 제국정부와 요동국 사이의 관계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었다.

관계 면에서도 확실히 요동국은 국가이긴 하나, 제국정부는 독립된 같은 단위의 국가로 요동국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때문에 판무관실을 설치하면서도, 한국 주재라는 뜻의 주차한국(駐箚韓國)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하고, 제국수도에 주재했다는 뜻으로 주차제도(駐箚帝都)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구국과 한국 정부와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애매한 제도를 창설해 가면서까지 황성과 성경이 상호 고등판무관을 주차시킨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요동국이 독립 노선을 걷게 되고, 황성부에서는 의회정권이 수립되면서 기존에 기묘하게 존재하고 있던 상호 간의 정치적 연결 고리는 거의 끊긴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가 족히 서른 해 가까이 이어져 왔었다.

예전에는 요동 사람이 내지로 건너가 벼슬하는 경우나, 그 반대의 경우도 흔했지만, 근래에는 자유롭게 건너가 벼슬을 하기는커녕 호조(護照, 여권) 없이는 압록강 국경을 넘어가서 장사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이니 기존에 존재했던 상호 정부 간의 비공식적인 교섭의 창구가 막혀 버렸고, 한 지붕을 이고 있으면서도 남보다 못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를 해소하고, 공식적인 교섭 창구를 열기 위해 십여 년이 넘는 준비 끝에 상호 판무관실을 주차시킨 것이었다.

물론 전증도 이런 목적에 따라서 겉으로 충실하게 본국 정부의 훈령을 받아 상대 정부에 전달하고, 교섭을 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꼭 이와 같이 겉으로 보이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이 판무관실이라는 것이 제국 내지에 대한 첩보 활동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황성 운종가 피맛골에서의 김일경(金一鏡) 암살 사건도 사실상 전증이 획책한 것이었다.

김일경은 제국 내지의 상공업 보호를 위해 요동에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한 관세를 현행보다 열 배 가까이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의회의 하원인 중의원(衆議院)에 진출해서 이미 의원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강경한 주장에 쏟아지는 지지를 등에 업고 내각의 탁지대신(度支大臣)으로 참여할 것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었다.

전증은 김일경이 탁지대신의 자리에 오를 경우, 그가 주장하던 사실상의 수입 금지나 다름없는 높은 관세를 물리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우려했다.

성경의 요동왕 김행으로부터 이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저지하라는 훈령을 이미 부임 당초부터 전증은 받았던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방책은 사고를 위장하여 김일경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직접 이런 일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동국에서 이곳 판무관실로 파견되어 사람들에 대한 신상 정보는 이미 제국 정부에서 파악을 하고 있을 터였다. 때문에 전증이 조심스럽게 접촉한 것이, 바로 이 시기 황성부를 비롯한 내지팔도에서 괴도(怪盜)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장길산(張吉山)이었다.

당초에 전증은 장길산에게 쉽게 접촉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팔도에 각종 죄목으로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사람인데다가, 워낙에 신출귀몰하여 종적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지의 정부에서도 잡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전증이 접촉할 수 있겠는가.

해답은 의외의 장소에서 나왔다. 장길산에게 미끼를 물린 것이었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도적이라고 한들 십수 년에 걸친 수배령에는 지쳐 있을 것이라는 게 전증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어떻게든 몸을 빼낼 방법이 있다면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이라고 전증은 판단했다.

포도청(捕盜廳) 같은 곳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전증은 양나라 출신의 상인을 이용했다. 그는 제물포 일대에서 반은 공식적인 무역을 하고, 반은 밀수를 하는 좀 뒤가 구린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밑바닥의 인물들과 연결되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전증은 그 상인에게 대금을 주고서는 어떻게든 장길산에게 미끼를 던질 것을 주문했다. 거의 석 달이 걸려서야 장길산에게서 연락이 왔고, 어렵사리 모처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두말하지 않겠네. 아직 자네 수족들이 살아 있을 것이야. 그들을 움직여 김일경을 처리해 준다면, 자네를 포함하여 그 일에 가담한 모두를 요동으로 빼주도록 하지.”

“그게 정말이오?”

“왜, 내가 포청에서 나온 사람일까 싶어 두려운가?”

“내 그 정도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면, 진즉 포도관에게 사로잡혀서 북방으로 유형당했을 것이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라, 일이 잘되든 못되든, 하여간 결과가 나오면 입을 싹 씻고 팽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외다.”

장길산은 듣던 대로 머리의 회전이 빠른 남자였다. 전증은 장길산이 의심을 벗겨주기 위하여 요동국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직인이 찍혀 있는 위명호조(僞名護照)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언제고 일이 틀어지면 신분을 사칭해 알아서 국경을 건너라는 소리였다.

결국 전증이 지시한 대로 장길산은 김일경을 암살할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고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와 인적이 끊긴 매우 깊은 밤에 벌어졌다.

기생집에서 대취(大醉)한 김일경을, 시비 붙은 척 거리 외진 곳으로 끌고 나온 것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이라 목격자도 없었다.

“네 이놈들. 천하의 불의한 놈들이 아니더냐. 어찌하여 까닭 없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냐!”

김일경은 여러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호통을 쳤다. 김일경이 대동한 젊은 무관 한 명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뛰쳐나왔지만, 이내 복면 쓴 사내들의 칼에 의해 김일경보다 먼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놈들, 무슨 놈들이냐! 어떤 까닭으로 날 공격하는 게야! 죽어도 그것은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일경은 설마하니 요동에서 꾸민 일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품에서 권총 하나를 뽑아 들고 저항을 시도했다. 김일경을 둘러싼 사내들은 누가 보기에도 지저분한 일들을 사주받아 처리하는 자들임에 분명했다.

다음 날이 되어 날이 개었을 때, 김일경과 젊은 무관의 시신은 청계천 도랑에 던져진 채로 발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목격한 것이 술집 기녀들이니 좀체 포청에서도 수사를 진전시키기가 힘들었다.

결국 황성부 전역을 이 잡듯이 뒤져서 의심 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심문했으나 결국 사건을 밝혀낼 수는 없었다.

대신 포청에서는 그날 광통교 아래에서 술에 취한 채로 칼을 쥐고 자고 있던 정신이 조금 나간 박수무당 하나를 죄인으로 지목하고 허겁지겁 목을 베어 버렸다.

억울한 사람이 대신해서 죽은 셈이 되었지만, 어쨌든 장길산 일당에게까지 그 의심이 미치지는 않았다.

일이 잘되었음을 확인한 전증은 노량진에 이들이 숨을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숨어 있기를 5개월여, 오늘이 바로 약속한 대로 배를 태워 경인거를 빠져나가, 제물포에서 양나라 상인의 밀수선으로 갈아탄 뒤 요동으로 그들을 빼주기로 약속이 된 날이었다.

그동안 이들과의 접선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던 전증이었으나, 마지막 매듭은 직접 지어야 했다. 내키지 않아 하는 호위무관 장평강을 억지로 끌고 나온 것도 바로 이 책임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동재기 고개를 넘어 노량진의 골목 사이로 스며들자, 약속한 장소에 이미 장길산과 그 수하 네 명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이들은 매우 불안한 몸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전증은 이들에게 수신호를 보내 도착했음을 알리고 안심시킨 뒤, 장평강에게 뒤를 보게 하고, 이들을 재빨리 제도대교 아래에 대어둔 쪽배에 실었다. 경강을 오고 가는 흔한 화물선이었다.

전증은 이들이 안전하게 탑승한 것을 확인한 뒤, 장길산에게 단단히 일렀다.

“엉뚱한 곳으로 빠지지 말고, 안개가 짙은 틈을 타서 화물선인 양 경인거로 들어가 태연하게 노를 젓게. 수문이 나올 즈음에 아마 양나라 밀수선이 하나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걸세. 그 배가 자네들을 요동 요순항에 내려줄 걸세.”

“고맙소이다. 나으리.”

장길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태연스럽게 수하 한 명을 뱃사공으로 변복시키고는, 돛을 펴고 짐 상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 곧 안개가 걷히고 해가 밝게 사방을 비출 터였다.

전증은 이들이 걸리지 않고 잘 빠져나가기를 바라면서 장평강과 함께 다시 강북의 공관으로 돌아갔다.

“그 양나라 밀수상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화물을 요순항에 잘 내렸답니다.”

한 달 뒤 장평강이 전증에게 장길산 일패가 요순까지 잘 도망갔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전증은 눈을 찌푸리면서 장평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잘 끝났으니 말인데, 우리가 황성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다는 것처럼, 내지 놈들도 성경에서 똑같이 수작을 부리고 있지 않을까?”

“글쎄요. 혹시 모를 일이지요.”

장평강이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1712년

천통(天統) 14년 중하(仲夏)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요동의 도읍인 성경부 신남가(新南街)에 진귀한 외국 흑차(黑茶)를 파는 가게가 생긴 것은 요 최근의 일이었다. 「가배(珈琲)」, 혹은 「가비」라고 불리는 이 차는 다름 아닌 커피였다.

17세기 초반, 커피는 오스만 제국과 대치하고 있던 동로마제국을 통해서 처음으로 유럽에 발을 디뎠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 지척인 테살로니키( )에 처음으로 그리스인이 경영하는 카페가 등장했다.

이내 십수 년이 지나기 전에 동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진 커피는 이내 헝가리 왕국에 상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로 건너간 뒤 유럽 전역에 퍼졌다.

1642년에 이르면 대학이 자리한 옥스퍼드, 영불연합왕국의 정치적 양대 중심지인 런던과 파리에 성업하는 카페들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커피의 존재는 인도양 무역은 물론이거니와, 유럽인들과 직접적인 교역이 많은 한국 및 일본, 양나라 등에도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 다만 원두 자체를 이슬람 세계에서 독점하고 있었기에 비싼 기호식품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매우 희소한 계층만이 즐기는 차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요동만큼은 예외였다.

제조업 기반의 경제가 자리 잡은 요동에는 산업자본 가계 층이 등장하고 있었고, 교육받은 사무직 근로자들도 다른 주변 국가에 비해 많았다. 더군다나 전체적으로 노동자나 농민을 제외한 중간 계층의 소득 수준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 높았기에, 커피 같은 수입 기호식품을 소비할 여력이 되는 소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때문에 커피는 일찌감치 성경 시내의 여러 식료점(食料店) 같은 곳에서 지속적으로 팔리고 있었는데, 이것을 전문적으로 판매하고, 쉬다 갈 자리를 내어 주는 카페도 결국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1708년 최초로 성경부 신남가에 문을 연 이 카페가 바로, 「장안차헌(長安茶軒)」이었다.

이곳은 이내, 성경부 내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랑방 구실을 하게 되었는데, 성경왕립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부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집안의 핏줄이었고, 또 일부는 집안의 족보는 그다지 좋지 않으나, 재력을 바탕으로 아낌없이 공부를 마친 이들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렸고, 외국어에 어느 정도 능통했으며, 또한 비판적 사고를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성경부에 출현한 계몽주의자 집단이었다. 이들은 소위 커피나 즐기며 한량 노릇을 한다는 뜻으로 은연중에 비꼼을 담은 「끽차계(喫茶契)」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 불리고 있었는데, 그들 스스로도 이 이름을 애용하고 있었다.

이들이 입을 타게 된 것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며 「장안차헌」에서 하루 종일 생산성 없는 시간 낭비를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핏줄 좋고 재력이 있으니 시간이나 흘려보내면 좋을 일인데, 처음에는 조심하더니, 근래에 와서는 공공연하게 세상 돌아가는 바에 대한 시평(時評)을 「장안차헌」의 앞뜰에서 외치거나, 자기들끼리 대자보를 붙이며 전복적인 주장을 하는 등 행동거지가 점점 위험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이 태안궁의 국왕에게까지 들어갈 정도였으니, 나름대로 이들의 행동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장안의 할 일 없는 한량들이 죄다 그곳 장안차헌에 모여 앉아서 국정을 논하고, 의원들과 대신들을 헐뜯는다고?”

요동왕 김행은 볕이 잘 드는 누각에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맛보고 있었다. 요동을 휩쓰는 커피의 열풍에서 김행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마땅히 미리 이들이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지 못한 소신의 잘못이나이다.”

앞에 놓인 커피잔은 식도록 놓아둔 채로, 도승지 장평강이 대답했다. 그는 일전 내지 황성부에서의 일을 잘 처리한 공으로 영전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의 자리에 오른 전증이, 도승지 자리에 장평강을 천거했었다.

김행은 장평강의 됨됨이를 살펴본 다음에 주저 없이 도승지의 자리에 앉혔는데, 장평강이 요즘 시대에 드문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재사(才士)였기 때문이었다.

장평강은 스물 하나의 나이에 일찌감치 무관학교를 졸업하여 요동군 육군 참위(參尉,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가, 북계(北界)의 전방 요새에서 퉁구스인들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공을 세워 일거 승진하여 스물 셋의 나이에 정위(正尉, 대위)까지 계급이 올랐다.

그 뒤 돌연 군직에서 예편한 뒤 성경왕립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스물여덟에 졸업과 함께 정기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조정의 관리로서 장평강이 처음 맡게 된 일이, 바로 군 경력을 살려 전증의 호위무관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껏 높은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왕립대학을 졸업한 뒤 정기 과거를 쳐서 들어왔더니, 맡기는 일이 군 경력을 들어 호위무관이나 시킨다고 불평했던 장평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관을 잘 둔 탓에, 오히려 출세 길이 펴게 된 셈이었다. 전증은 황성부에 있는 동안 이래저래 장평강을 굴리며 써 보았고, 충분히 검증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귀국길에 주저 없이 그를 승정원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그 젊은 장평강을 승정원의 최고자리인 도승지에 앉혀 놓은 것은 국왕의 뜻이었다. 장평강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전증조차도 그렇게 파격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렇게 막상, 국왕의 명으로 도승지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 놓고 보니, 아무리 재주 좋은 장평강이라 하더라도 진땀이 빠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혹여나 실수하여 책이라도 잡힐까 잠도 못 자고 일에 매달려 있는 날이 수태였다.

오히려 승정원의 하급 관료들보다도 수장인 장평강이 관청에 더 오래 남아 있기 일쑤였다.

본래 성격과 맞지 않게 일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 장평강은, 국왕 김행이 지나가는 소리로 「끽차계」를 언급하자 순간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젊은 놈들이 무슨 원한이 있어 자신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드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대가 딱히 뭘 잘못했겠는가. 원래 젊은 나이에는 다들 혈기방자해서 이런저런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법인데, 일전에는 거리에서 그런 말을 나눌 장소가 없다가 근래에 갑작스레 모일 장소가 생겼으니 두드려져 보일 따름이지. 사실 뒤에서 웅얼대는 것 보다는, 이렇게 과인의 귀에 들려와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국왕 김행의 두루뭉술한 말에 그만 장평강은 진땀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상관으로 치면 김행은 좋은 상관이 절대로 아니었다. 은근슬쩍 일을 떠밀고, 마치 떠보듯이 이것저것 눈치를 봐서 알아서 행동하게 만드는 김행의 일을 지시하는 습관이, 장평강에게는 그야말로 곤죽이 날 일이었다.

방금 말만 해도, 그래서 내버려 두라는 것인지, 아니면 잡아다가 족치라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는 하오나, 그들을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장평강은 국왕 김행에게 뻔뻔하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심중을 알 노릇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원하는 것을 들어서 행해야 했다.

장평강의 이런 태도가 그저 재미있다는 듯, 국왕 김행은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걸고서는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곰방대를 들었다. 이내 옆에서 시립하고 있던 궁녀가 곰방대 위에 연초를 재워 넣고, 발화기로 불을 붙인 다음, 곰방대에 붙인 불씨가 잘 트이도록 부채를 부쳐 바람을 만들었다. 이내 연기가 끔뻑끔뻑 올라오자, 김행은 궁녀를 다시 물러가게 한 다음, 탁자 위의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나서 담배를 빨았다.

“휴, 가비차에 연초라, 이만큼 궁합이 좋은 것도 따로 없지. 옛 선왕들은 어찌 이 맛을 모르고도 선정을 행하셨는지 알 도리가 없네. 그나저나, 뭐라 그랬는가, 도승지?”

“그, 끽차계라는 한량들을 어찌 조치할까 하는…….”

“끽차를 할 테면 분명히 끽연도 할 테고, 그렇다면 과인의 벗인 셈이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저 혈기 방자한 탓에 그러는 것이니 그냥 내버려 두게. 다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하던 김행의 눈매가 다시 좁아졌다. 그는 장평강에게 알 듯 모를 듯한 시선을 던졌다.

“다만이라 하오시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도승지는 또 신언서판이 훤하고, 나이도 얼추 비슷하니 그들에게 환영받지 않을까 해서 말이네. 근데 또 가만 생각해 보니, 도승지는 장안에서 너무 유명해서 말이네. 그 자리에 들어다 앉힌 과인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전하.”

김행의 말을, 자신을 질책하는 소리로 들은 장평강은 얼굴이 시퍼래져서는 풀이 죽는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잘해주고 있네. 직접 그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면 뭐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면 되겠지. 과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이런 일을 전담할 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과인이 궁궐 안에만 앉아 있다 보니 좀체 저잣거리의 물정에는 통하는 바가 없네. 그렇다면 내 귀가 되고 눈이 되어 줄 이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 승정원으로는 부족하지.”

김행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자, 도대체 임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평강은 그제야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움직일 이들이 필요하단 말씀이시옵니까.”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생각해 볼 일이지 않겠는가? 과인은 그저 끽차 끽연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니 말이네. 저자거리의 소문이 궁금하긴 하지만 군주가 어슬렁거릴 자리는 아니지. 그런데 가비차는 도대체 왜 한 모금도 들지 않고 있나? 아깝게 말이야.”

항상 국왕을 독대할 때면 느끼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장평강은 완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물러 나와야 했다. 처음에는 승진이 그렇게도 하고 싶었는데, 막상 고속승진을 하고 나니 앉은 자리가 가시 방석 같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그에 걸맞게 특출한 능력으로 일을 해내야 할 것 같은데, 위에서 내려오는 국왕의 지시는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고, 자기 능력도 충분하지는 못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국왕이 자신을 직접 앉혀다 놓은 자리였으니, 능력이 없으면 짜내서라도 일이 굴러가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임금을 욕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도 대충 막연한 지시를 받아들여 놓고, 장평강은 시름에 잠겼다.

‘그니까 간자들을 꾸리거나 시중의 소문을 수집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인데. 몰래 하라는 소리면 따로 공회에서 예산을 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면 전하께서 내탕금이라도 내어 주시겠다는 이야기인지…….’

은밀하게 받은 명령이니 어디 가서 상담할 데도 없고 골치 아프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단독으로 무작정 일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장평강은 정치적 은사(恩師)라고 할 수 있는 우의정 전증을 찾아갔다.

“주상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지?”

전증은 좀체 커피나 담배를 즐기지 않았기에, 대신 평소에 곁에 아껴 두는 녹차를 내어놓고 장평강을 맞았다. 확실히 국왕과 독대할 때에 비해서 편한 자세가 된 전증은, 녹차를 홀짝이며 전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뜻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도대체 어찌 일을 실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회의 의원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될 것이고, 그러자니 이를 운용하기 위한 인력이나 자금을 어찌 조달해야 할지도 문제가 되고 해서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군부는 왕가의 편에 서 있었으니, 군의 협조를 받는다면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력의 조달도 용이할 걸세. 자네가 군에 있는 인맥을 동원해 보게. 그동안 나도 요동군 수뇌부와 접촉하여 무관학교 졸업생들 중 우수한 자들을 이적해 달라고 요구를 하겠네. 이들을 다시 승정원 직하에서 교육시켜서 잘 편달하면 곧 이런 일에 쓸 만한 사람들이 될 걸세.”

“당장은 그리될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자금 문제가…….”

장평강이 말끝을 흐리자, 전증은 웃음을 머금고서는 장평강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무 앞일을 걱정하지는 말게. 관직에 나아간 자는 미리 헤아려 행하는 것이 마땅하나, 혹 너무 걱정이 과하면 가만히 있느니만 못할 수도 있네. 왜 그 양나라의 대학사 황종희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군주가 말로도 하지 않고, 그 뜻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레짐작하여 그 비위를 맞추고자 하는 것은 충신이 하는 행동이 아니라 간신배나 하는 행동이라고 말이네. 전하께서 넌지시 던지신 바가 있으니 그에 걸맞게만 하면 될 일이야. 늘 지나침은 화근의 싹이라는 것을 유념하게.”

장평강은 전증의 조언에 마음이 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전증은 장평강에게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주며 한 번 일독을 권했다.

「그러므로 내가 나서서 벼슬하는 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지 군주를 위한 것이 아니고, 만백성을 위한 것이지 한 성씨를 위해서가 아니다. 천하 만민의 견지에서 의견을 내는 것이라, 그 도리가 아니면, 만일 군주고 말과 몸짓으로 나를 강제하더라도, 감히 그를 쫓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행동도 하지 않고 말로도 지시하지 않음에야! (故我之出而仕也爲天下非爲君也爲萬民非爲一姓也. 吾以天下萬民起見非其道郞君以形聲强我未之敢從也況於無形無聲乎!)」

집에 돌아와 책을 펴 놓고 한 구절을 읽어 본 장평강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과연 전증은 심계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저 단순히 국왕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 능력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에 안달복달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군주를 제대로 섬기려면 먼저 백성을 섬기는 자세로 돌아가라, 라는 것이 바로 전증이 하고 싶은 말일 터였다.

장평강은 아직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하의 백성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국왕의 사욕을 채워주기 위한 것인지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마음가짐은 다잡을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국왕 김행이라면 의뭉스러운 면은 있어도 비도(非道)를 행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음 달, 전증이 요동군과 접촉하여 나온 결과를 은밀하게 장평강에게 통보해 왔다.

금년의 무관학교 졸업 예비생들 중 10인을 서류상 내직(內職)으로 발령시켜 놓을 터이니 그들을 따로 교육시켜 쓰라는 것이었다. 대신 조건으로 임금의 옥새가 찍힌 밀서를 요구했기에, 장평강은 직접 김행을 찾아가 경과를 전해야 했다.

“기왕에 일이 진행되었으면 과인이 말릴 이유는 없는 것이지. 본격적으로 착수되면 내탕금을 은밀히 내어 주겠네. 다만 그 활동에 있어서 신변의 위협이 없는 한 무력은 허용하지 않겠네. 과인이 부탁한 것은 어디까지나 눈이 되고 귀가 되라는 것이지, 내 손발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닐세. 알겠는가? 눈이 보고 귀가 들으면, 머리가 판단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이지, 눈이 손을 움직이고, 귀가 발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이례적으로 김행은 단정적인 어조로 장평강에게 말했다.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진 터라, 예전만큼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김행의 말에 손에 일순 땀이 나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리하겠습니다.”

“사람이 뽑히면 승정원 도승지의 직속으로 비공식적인 부서 하나를 편성하게.”

“예, 전하.”

국왕 김행이 고개를 끄덕이고, 장평강에게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궐각을 나온 장평강은, 한숨을 쓸어내리고서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막연하게만 느꼈던 권력 중심부에서의 움직임들이 그에게 베일을 벗은 채로 다가오는 순간, 그는 우선 공포를 느꼈고, 그 다음에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이런 권력과 힘을 잘못 다룬다면 그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고, 설혹 잘 다룬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원한이 되는 일로 남을 것이었다.

자신이 만만치 않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유난히 실감하면서 장평강은 승정원 본국(本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듬해 연초에, 승정원 산하에 특무사(特務司)라 불리는 부서가 생겼다. 대외적으로는 승정원의 일지를 편수하는 주서사(注書司)로 알려졌다. 왕명을 출납하고 관가의 행정 사무를 적실하게 기록하여 보존한다는 명목이었다.

표면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것이 전부였기에, 공회에서도 특별히 일지를 편수하는 주서사를 승정원 산하에 만든다는 데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이 특무사의 실상은 국왕과 우의정 전증, 승정원 도승지 장평강, 그리고 군부의 몇몇 수뇌부밖에 알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조정 내부의 내사(內査)를 맡고 있는 사헌부(司憲府)에서도 알지 못했다.

훗날 내지의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와 함께 첩보전의 시대를 열 「요동특무사(遼東特務司)」의 비공식적인 탄생이었다.

이 「특무사」가 처음으로 착수한 임무는 다름 아닌, 훈련받은 요원들을 「장안차헌」을 중심으로 번져 나가고 있는 젊은 계몽주의자들의 집단 안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차적인 목적은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취득하여 국왕에게 직속으로 보고하는 데에 있었지, 이들을 소탕한다던가 잡아들이는 데에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무력 사용이 허가되지 않은 비밀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차헌」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끽차계」에 대해 김행이 특별히 우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이 정확히 무슨 논의를 전개하는지, 그들이 어떤 글들을 찍어내고 있는지는 알고 싶어 했다.

끽차계는 사실상 같은 시기 유럽에서 번져 나가고 있는 계몽주의자들의 살롱과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민권(民權)」, 「진보」, 「과학」 등의 전에 없던 용어를 창조해 가며 자신들의 사상을 가다듬고 발전시키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서경덕(徐敬德), 이수광(李쓱光)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이들이었다.

이 외에도 양나라의 황종희(黃宗羲), 영불연합왕국의 세인트 앨번 자작 프렌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 등의 저서들도 폭넓게 흡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험주의(經驗主義)와 합리주의(合理主義)의 절충적인 노선을 취하며, 소위 과학적방법론(科學的方法論)이라 불리게 될 지식 탐구의 방법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인간이성을 신뢰했기에, 이들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과 이에 따른 인간사회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이 보기에 기존 사회의 많은 부분에 걸쳐 존재하는 몽매(蒙昧)와 악습을 걷어내고 계몽(啓蒙)으로 백성을 밝혀 깨우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면면이 살아남은 유교적 덕치군주(德治君主)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계몽자(啓蒙者)로서의 군주를 결합하여 계몽군주(啓蒙君主)라는 새로운 대안을 내어놓고자 하고 있었다.

허나 이들의 서책은 아직까지는 철저히 그들 동아리 내에서 비밀리에 출판되어 회람되고 있었고, 공식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정부 기관에 의해 배격되고 있었다.

이러한 실상은 특무사의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게 국왕에게 전달되기 시작했고, 요동왕 김행은 이들의 몇몇 주장에 대해서 급진적인 느낌을 받으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을 빌려 자신이 계몽의 옷을 입는다면, 깨우친 군주로서 사실상의 귀족 계층이 된 관료와 공회 의원들의 벌족(閥族)을 견제할 수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그가 학예원을 만들고 의무교육을 도입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1715년

천통(天統) 17년 맹춘(孟春)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이익(李瀷)의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로, 본관은 여주이다.

그는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을 역임한 이상의의 증손이고, 의회정권의 초기에 온건파의 중진이었던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었다.

이런 가문의 배경 덕분에, 이익의 유년기는 평탄한 편이었다. 의회에 의하여 「학습원」이 개편된 「제도대학(帝都大學)」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집안의 배려로 진서와 일본, 유구를 거쳐 양나라까지 두루 유람하며 명사들과 사귀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익은 유럽의 합리주의와 국내의 격물학의 영향을 짙게 받아 계몽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부분적으로는 귀족제도의 철폐와 선거권의 확대 및, 의무교육의 실시와 유교 전례의 철폐 및 유교 교육에 대한 비판을 공공연하게 행했고, 태정제의 금령 이래 의회정부에서도 금지되고 있던 신보(新報)를 불법으로 간행하여 구금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런 결과 그의 비판적인 행동이 종국에는 크게 문제가 되었고, 심지어 그 아버지인 이하진에 대한 탄핵(彈劾)으로까지 비화되면서 더 이상 이익은 내지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어졌다.

때문에 그는 자발적으로 의회정부의 묵인하에 요동으로 몸을 옮겼고, 이곳에서 때마침 부흥하고 있던 끽차계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주의자의 일단과 어울리며 그동안 억눌러왔던 목소리를 마음껏 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 존재가 사방으로 알려질 판이었는데, 특무사에 의해 그의 거동은 낱낱이 국왕 김행의 귀에 들어갔다.

심지어 국왕 김행은 그가 〈교안록(敎案錄)〉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기적으로 동아리 회원들에게 내어놓는 계몽주의적 저술까지 입수해서 읽었다.

허나 이익은 특무사의 존재도 몰랐고, 자신의 행동이 모두 음어화(陰語化)되어 국왕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갑작스럽게 떨어진 입궐령(入闕令)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끽차계의 동인(同人)들도 자신들이 요즘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도 있었고, 조금은 즐기기도 했지만, 갑작스럽게 그 영수격인 이익이 국왕에게 불려가게 되자 지레 발이 저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국왕의 의중을 지레짐작하고는, 이것이 정치 탄압의 서곡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집단으로 영주로의 밀항을 계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진전은 보지 못한 채 시시각각 입궐을 명받은 날짜는 다가왔고, 결국 이익은 적어도 다시 감옥에 갇힐 것은 각오하고 의관을 정제하고서 태안궁으로 입궐하게 되었다.

“삼가 신 이익, 주상 전하를 배알하옵나이다.”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한 노릇이다. 두려워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이익은 정전에 들어서서 김행이 앉아 있는 옥좌로 나아가는 동안, 점점 마음이 가라앉았다. 홀(笏)을 꽉 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도 조금은 풀렸다.

“내 그대 위명을 많이 들었도다. 가까이 와 앉아 보라.”

김행은 이익을 옥좌가 놓여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불러 와서는 자리를 권했다.

내관이 가져다 놓은 방석 위에 조복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앉고 나니, 그제야 이익의 눈에 국왕 김행의 용안이 드러나 보였다.

아직 한창 나이인 요동왕의 얼굴은 젊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숱이 짙은 수염은 기름으로 빗겨져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시원한 눈썹 아래 짙은 눈은 번뜩이면서 이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익은 겉으로는 내색을 못하였지만, 속으로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설마하니 이렇게 왕자(王者)의 기운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사람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알지 못했겠지만, 내 이미 그대가 쓴 글들을 종종 구해다 읽어 보았다. 재미있는 글들을 쓰더군.”

“그저 천한 졸필로 빚어낸 모자란 글이옵니다.”

“그래? 그렇다고 생각했으면, 당당히 자네 동아리 안에서 당당히 회람시키지 않았을 터인데?”

요동왕 김행이 의뭉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귀로 들을 때와 직접 그것을 겪을 때는 느끼는 기분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풀어졌던 마음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이익은 입을 열었다.

“소신이 감히 그런 글을 내어 보인 것은, 진정으로 그것이 도리에 합치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옵니다. 허나 나랏일에 어지러움을 부추기고 감히 임금을 비판하려 한 것은 아니었기에, 시중에 활자로 찍어 내지 않고 직접 손으로 내려쓴 것을 몇 명에게 돌려 보였을 뿐입니다. 그것을 전하께서 직접 회람하셨다면, 필히 누군가 그 뜻이 옳다고 생각해 전하께 전하였거나, 혹은 동아리 안에 말과 행동이 다른 이가 있어 소신에게 죄를 물리고자 고변한 것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 아니겠습니까. 가히 마땅히 심려하신 바가 있어 소신을 이곳까지 부르셨을 터이니, 전하께옵서 심중에 두신 처분이 있으시다면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이익은 정공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영문도 모른 채 희롱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죄가 있고, 죄가 없다면 죄가 없겠지. 그걸 판단하는 것은 여(余)니라. 내 그것을 글로만 판단할 수 없어 그대를 불러들였으니, 날 잘 설득해 보인다면 오늘 네 앞에 등용문이 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치죄당할 것이니, 필히 네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내어 보여야 할 것이다.”

“제 생각은 글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래? 귀족제도를 폐지하자고 강변하던데, 요동에는 오등작의 제도가 이태 없었느니라. 그래서 나는 내지의 예를 쫓아 작위를 서품하여 공훈 있는 자들에게 마땅한 보훈을 내리려 했었다. 그럴 자격이 마땅한 자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이 어디가 나쁜가?”

“공이 있는 자들을 치하하기 위해 작위를 내리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세습되어, 아무런 공이 없는 자손이 누대에 걸쳐서 조상의 은덕 하나로 온갖 혜택을 다 누리니, 내지의 폐단을 보면 이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국초에 작위에 서임된 이의 자손들이, 지금도 공입네 후입네 하며 십 수대에 걸쳐서 아무런 노력 없이 추밀원의 의원직을 얻어, 국사에 간여하고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의뭉스러운 일들을 꾸며대니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옳은 일이 아닙니다. 본디 오등작이란 것은 주나라 때에 드넓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 제후들을 분봉한 것이 그 시작인데, 지금은 다스릴 땅 대신에 온갖 특권으로 갚아주니, 그 폐단이 만만치 않게 된 것입니다. 다스릴 백성과 땅이 없으니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제후로서의 소명은 없이 그저 귀족이라는 이름값만 즐거워하게 되었으니, 실상은 식읍에서 그 소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곳간으로 작위가 있는 자들을 대대로 먹여 살리는 셈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아도 옛날 음서보다 좋지 않은 것이니, 혁파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익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담담하게 김행의 질문에 대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좌하여 앉은 그는,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듯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치자. 세습이 문제라면 이 작위의 물려받음을 삼대로 제한하고, 이후의 자손이 공적이 없으면 이를 삭탈한다면 괜찮겠는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먼 훗날까지 내다본다면, 삼대 안에 과분한 이들은 작위를 물려주지 못할 것이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한 시절을 놓고 본다면 삼대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할아비의 공으로 손자가 그 덕을 보는 것은 실상은 음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공은 5대로 내려 보내고, 후는 4대, 이렇게 줄여 나가서 공훈이 모자란 자작은 아들에게까지만, 남작은 당대에 한정한다면 어떠한가?”

“그 또한 편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고자 하신다면 전하께서도 자손 6대까지만 왕위를 물린 뒤 내려놓으셔야 할 것입니다. 양나라의 국사였던 황종희는 왕과 공 사이나 공과 후 사이나 똑같이 한 등급의 차이였을 뿐인데, 지금은 마치 황제나 왕은 넘볼 수 없는 하늘의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자고로 넓은 땅을 다스리는 자는 왕이라 불렀고, 그보다 조금 못한 땅을 다스리는 자는 공후로 불렸던 것입니다. 단지 그 차이가 있었을 뿐인데, 지금은 땅이 넓으나 적으나 모두 왕 한 사람이 다스리니 제후가 필요 없어지고, 그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굳이 다시 작위의 제도를 다시 만들면서 원칙대로 시행하지 못할 것이라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이 조정의 여러 관직에 두루 나가게 되면, 능력이 있는 일반 백성의 출사길이 그만큼 줄어들게 됩니다. 어찌 보아도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 만약 능력이 없는 자가 핏줄을 방패로 삼아 국록을 축낸다면 그도 곤란한 일이지. 좋다. 작위제도에 대한 그대의 생각을 들었으니, 이제는 군역에 대해 물어보도록 하겠다. 아조의 인구는 이제 물경 육백팔십여만 명에 이르렀으나, 군대는 여전히 십 이만 명만을 유지하고 있다. 해군은 부실하여 제국함대에 의존하게 되고, 앞서가던 군사력도 이제는 기술면에서나 군사 숫자에서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면 말해보라.”

“요동의 선왕들께서 지난 백 년간 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으신 것은, 내외가 안정되어 있는 성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속적인 위협이었던 명나라는 산산조각이 나 중국 내륙의 국가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없는 형편이니 감히 산해관을 넘어 요동을 두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것은 몽골뿐인데, 이들은 우리와 전통적인 맹약 관계로 우리에게서 무기를 사 중국을 노략하기도 하고, 서쪽으로 가는 육로 무역에 우리와 함께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무엇을 보아 군대를 굳이 늘리겠습니까. 다만 12만의 병력을 항상 예비해 놓은 것은 혹여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듣기에 현재 태서는 항시 전쟁 중이라, 연합왕국, 네덜란드, 아라곤, 스웨덴 같은 강국들은 연간 예산의 7할, 8할을 전비로 쏟아붓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하니 사방의 바다를 오가며 돈을 벌어 와도 이내 공중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내지 또한 마찬가지 형편이라, 그 방대한 항해로를 유지하기 위해 갈수록 육군의 수를 줄이고 해군의 수를 늘리는데, 육군에 비해 해군은 들어가는 돈이 갑절로 많습니다. 때문에 지속적으로 화폐개혁을 시도하고 조세제도를 바꾸고, 끝내 중앙은행까지 만들어 군비 부담을 은행에서 싼값에 꾸고, 안정된 조세 수입을 이자 삼아 군비로 진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머리를 굴린 끝에서야 그 해군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해 쓰는 나랏돈의 오 할을 이 국방비가 차지합니다. 뒤늦게 이를 쫓아가는 일본과 양나라도 힘겹게 해군을 증강하고, 양나라는 또한 대륙의 전쟁판에 뛰어드느라 육군력을 기르는 데 힘겹습니다. 가히 이런 상황이니, 요동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세금이 많이 걷히며, 은행의 제도가 충실하게 굴러가 국고에 돈이 많이 넘쳐 나니, 기술을 개량하고 해군을 좀 더 충실히 하는 데 돈을 푸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줄 압니다. 한 번 일을 위해 백 번을 방비한다 하였으니, 감당할 수 있는 부분 안에서 내고의 재보를 푸는 것은 절대 과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수석총 한 자루로 훈련받은 군인이면 옛 화승총을 든 열 명을 감당하니, 군사의 숫자뿐만 아니라 기술에도 투자하는 것이 우선일 줄 압니다.”

한 번 입을 열면 청산유수였다. 김행에게는 이익이 글보다 오히려 말이 재변(才辯)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행은 이익에게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국가 운영의 방책에 대해서 꼼꼼히 따져 물었다. 사실상 이익을 등용하기 위해 한 번 떠보려 부른 것이었으나, 갈수록 그가 하는 말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대 하는 말은 잘 들었다. 불경한 주장도 더러 있으나, 여는 대체로 그대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쉴 새 없이 질문을 하며 그의 생각을 들었던 김행이,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깍지를 낀 채로 등을 편하게 옥좌에 묻었다.

이익은 순간 자신이 펼쳐 놓은 말들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치죄를 면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다는 것이 어느새 열변을 토하며 치국책을 왕에게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지였으면 의회의원들에게 토로했어도 구금형에 처해질 만한 발언들을, 요동왕 김행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오히려 만족스럽다고까지 말했다. 김행의 말을 되씹어 본 이익의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를 호조참의에 등용하고자 하니, 의관을 정제하고 통보하는 날 공회에 가서 인준을 받도록 하라. 귀찮지만 참의급의 당상관을 임명하려면 공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니 별수가 없다.”

“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이익은 그저 치죄당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인정받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직을 주겠다는 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소식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익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입궐하면서 그나 동료들이나 몸 성히 잘 돌아오기만 한다면 잘된 일이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익의 주장에는 급진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고, 요동이 그 정도 의견을 흡수할 사회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한 가지 충고는 하도록 하지.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도록 하라. 내 선조이신 성명왕께옵서는 뛰어난 분이었으나 그렇다고 나라를 단숨에 발전시키지는 못하셨고, 내지의 조광조 같은 뛰어난 재상도 나라를 전부 뜯어 고치지 못하고 결국 분란의 불씨를 남겼다. 요동은 어떠한가? 폐주 금양군은 주변에 사람도 있고 재물도 있었으나, 결국 제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왕작을 박탈당하고 죽었지. 허나 중용을 지키는 자는 오래가는 법이니라. 심양한씨는 내전기에 양다리를 걸쳐 살아남았고, 지금도 그 세도가 대단하다. 허균이나 이수광은 어떠한가? 위로는 황제를 잘 섬기고, 아래로는 내각을 잘 굴려서 특별히 이룬 바가 많지 않음에도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승준을 두 번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늘그막에 출사를 했다가, 온갖 정치공세에도 불구하고 무리하지 않은 중용의 자세로 자리를 지켜 결국 칭송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대가 조광조가 될지, 임승준이 될 지는 죄 그대 하기 나름에 달린 것이라, 이 말이니라. 출사를 그리 기뻐하니, 여는 좋은 신하를 얻게 된 듯하여 기쁘다만, 좋은 신하도 나쁜 신하도 한 끗 차이 아니겠는가.”

김행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는 이익이 가진 계몽주의적 사상이 자신의 왕권과 국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국정 운영 노선에 뒷받침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급진적일 수도 있는 이익의 사상을 무릅쓰고 등용을 결정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익이 지나치게 과하여 모든 방면에 주제넘게 손을 대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등용하지 않으니 만 못한 상황이 될 터였다.

그리되면 김행은 공회의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국정은 파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의무교육 문제로 공회 및 의정부 관료들과 씨름을 해본 김행이었다. 그가 나이를 먹고 좀 더 능수능란해지면서, 관료 임명권을 가지고 의정부는 점차 왕의 뜻에 맞는 사람들로 채워 놓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호시탐탐 매의 눈으로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공회는 여전히 곤란한 존재였다.

혹여 이익이 이런 미묘한 균형을 제멋대로 깨뜨리고 자신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까 해서, 김행은 미리 넌지시 일러두는 것이었다.

“옛 한나라의 건국대업 때 맹활약했던 회음후 한신은, 젊은 시절에 과하지욕을 견디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소신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유념치 마시옵소서.”

과하지욕(袴下之辱)이란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는 치욕도 참아낸다라는 뜻이다.

한신이 비루하게 빌어먹고 다니던 시절에, 시장바닥에서 그를 조롱하기 위해 왈짜들이 그를 불러 가랑이 밑을 기어가게 하는 모욕을 주었다. 한신은 그러나 이를 견뎌냈다. 한순간 고개 숙이는 것이 무에 어렵겠느냐는 이익의 의중이 이 고사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익이 굳이 한신을 언급한 데에는 더 복잡한 의중이 숨어 있었다.

한신은 결국 유방의 밑에서 승승장구하여 한나라 건국대업의 초석을 닦았으나, 결국 팽(烹)당하여 일가가 멸족당하고 만다. 그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동북의 제와 조 땅을 점령하고 있을 때 괴철이 그에게 와 유방의 욕심이 끝간 데를 모르니, 지금 기회가 왔을 때 독립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한신은 결국 그런 호기를 부리지 못했고, 나중에 괴철의 예견대로 한나라가 건국된 뒤 목숨을 잃게 된다.

이익은 이 한신을 굳이 언급함으로서, 자신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과연 일이 잘되어도 나를 팽하지 않겠느냐, 라는 질문을 은연중에 김행에게 던진 것이었다.

김행이라고 이를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김행은 그저 대답 없이 슬그머니 미소만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1717년

천통(天統) 19년 계동(季冬)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이익(李瀷)은 국왕 김행의 비호로 궐문에 들어선 지 채 삼 년이 지나지 않아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어느새 그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니, 그에게 의정부를 감찰할 칼자루를 김행이 쥐어준 셈이었다.

더군다나 대사헌은 국왕과 독대를 할 자격이 되는 벼슬이었으니, 사실상 여러모로 힘을 실어준 셈이었다.

그렇다고 김행이 이익만을 오로지 믿고 밀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시에 오래된 충신인 전증을 영의정으로 만들어 두었고, 도승지 장평강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직을 옮겨가 있었다. 의정부에 이렇게 서로 간의 견해가 다른 자기 사람을 심어 놓음으로 인해서, 김행은 파벌 간의 충성 경쟁을 기대할 수가 있었다.

한 측에는 전증과 장평강으로 이어지는 구신단이 있었고, 다른 한 측에는 이익과 함께 굴비 엮듯이 딸려 들어온 장안차헌에 모이던 계몽주의자들이 있었다.

국왕 김행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파벌 경쟁이 과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들이 먼저 상황을 헤아리고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에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익을 둘러싼 계몽주의자라는 극약 처방을 중화시킬 수단으로 전증이나 장평강이 있어 주고 있기에 더러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대립을 격화시킬 때인데, 구조상 이들과 국왕 김행에게는 공통된 적인 의회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큰 그림에서는 안정된 연합이 가능했다.

김행이 계몽주의자들을 정부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반발은, 곧 요동의 선거권을 가진 기득권층들로부터 불거져 나왔다.

그렇잖아도 의무교육 문제부터 시작해서, 김행의 집권 이후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 문제 등으로 이들은 종신으로 묶여 있는 1/4의 선출 의원직 중 결원이 날 때마다, 국왕의 견해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어놓는 보수적인 의원을 선출해 공회로 보내왔다.

김행이 집권한 이후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선거로 뽑혀 온 의원 숫자는 채 10명 남짓이었으나, 이들의 목소리는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추세 때문에 국왕에 대한 견제 심리와 계몽주의자들이 조정에 범람한다는 우려가 조성되었고, 이에 더 힘을 실어준 것이 동당이었다.

부유한 지주 계층은(이들만이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진지하게 국왕의 정책이 파행으로 치닫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아직 아무런 정책이 입안된 바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가열하게 쏟아놓았다.

동당의 영수인 한상철(韓尙哲)은 정당정치를 공식적으로 입법화하는 전략을 취하며, 동시에 자신의 정당을 보수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개혁주의자들이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여지는 의정부에 대해 견제를 위해서는, 보수적인 정책을 시끄럽게 주장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여하간, 1/4이나 되는 국왕이 직접 서임하는 의원 숫자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국왕과 가까우면서도, 중재 역할을 잘 수행했던 서당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동당과 무당파가 연합해서 공회의 과반 이상을 장악하고 사실상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내지에 비해서 요동의 왕권은 상당히 공회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공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에 당상관 이상의 관료를 임명할 때 공회에서 추인받기가 힘들어졌다. 동당에서 순순히 계몽주의자들이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터였다.

계몽주의자들이 처음 의정부에 입성하던 때의 공회 분위기와 지금의 그것은 많이 달랐다.

요동에서 특히 발달한 대농장의 지주들이 지지근간인 동당과 선출의원들로서는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이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내지에서 촉발된 의회주의를 좀 더 진작하고, 요동의 식산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기득권을 확대하기 위해서이지, 그것을 훼손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때문에 이들은 적극적으로 계몽주의자들을 견제하는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훗날 계몽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게 된 이익을 비롯한 끽차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사류(士類)들도, 엄밀하게 말해서 단일한 사상으로 뭉쳐진 이들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지식의 진보와 교육을 통한 인간의 발전에 대한 생각은 공감하고 있었지만, 국가 운영의 정책 면에 있어서는 왕정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에 가까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특히 이익뿐만 아니라, 정부 내의 구신파인 영의정 전증과 더욱 밀접하게 행동했는데, 이들은 때에 따라서는 이익의 주장에 호응하지 않고, 중도적인 공회의 서당(西黨)을 움직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애당초 계몽주의자라 하는 것은 훗날 편의상으로 개혁적인 성향의 젊은 사류들을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계몽(啓蒙, Enlightenment)」라는 단어 자체가 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개념에 대하여 영불연합 프랑스 왕국의 뒤보(Dubos)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제거한 불어 「Lumires」를 옮긴 「조광(照光)」이란 말이 훨씬 넓게 쓰이고 있었다.

혹자는 조광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오고, 이것이 불어 뤼미에르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 한편, 혹자는 이것이 뒤보의 글을 옮겨 오며 국내에 들어왔다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축약한 개념으로 「조광」을 선호한 것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정부에 들어간 이들 인사들이 「조광파」라는 통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끽차계라는 다소 조롱이 담긴 호칭보다, 신진사류는 점차 조광파라는 이름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즐겨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훗날의 계몽주의자로 묶이게 되는 부류보다는 좀 더 협소한 부류로, 바로 이익과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신진사류에 국한된 개념이었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이들은 국왕 김행의 배려로 쉽게 정부 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때로는 구신파에 속하는 전증 일파와 대립하기도 하고 힘을 합치기도 하면서, 요동국의 국가적 질서를 정비하는 일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규정하기 위해, 다양한 토론 끝에 수많은 전시대의 학자들의 사상을 규합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영향을 미친 것이 양의 대학사 황종희(黃宗羲), 영불연합왕국의 존 로크(J. Locke)였다.

이익과 함께 끽차계의 일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은 존 로크의 Two Treatises of Government를 《통치이론(統治二論)》이라는 제목으로 옮겼다.

황종희의 《명이대방록》과 함께 이 책은 곧 계몽주의자들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우선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먼저 전증 등 구신파와 정치적 연대를 추구하면서,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서당(西黨)과 연결을 시도했다.

동당의 보수주의적 경향에 대항해 서당은 이들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존 로크의 개념에서 나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 결과 서당은 중도적 입장에서 보다 개혁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이런 사상적 대항 무기를 앞세워서 서당은 의회에서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다시금 조광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재가 끝에 조광파의 일원인 김동원이 총대를 메고 국왕의 서임의원으로 공회에 들어가서, 서당과 함께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정치 상황에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현재 투표권을 지니고 있는 매우 소수의 지주들에 비해, 도시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은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동당의 주장에 대해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다.

참정권을 확대하고, 지명제를 철폐하여 정기적 선거를 실시한다면, 공회에서 보다 계몽주의자들과 서당의 목소리를 확대할 수 있다는 계산과 자본가들의 이해는 맞아떨어졌다.

“나라에 충분한 세금을 내지도 않고, 조상들이 국가에 공헌한 것도 없는, 그저 장사와 물건 만드는 일에 몰두할 뿐인 이들에게 무슨 참정권을 준단 말인가?”

참정권 확대 문제가 불거지자 동당에서는 이 논의에 반대 깃발을 펼쳐 들고 나섰다.

그러나 국왕이 서임의원들을 동원해 서당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전증과 이익이 장악한 의정부에서는 이들을 지원함으로서, 동당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협상판으로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던 동당은, 참정권 확대가 불가피하다면, 최대한 그 폭을 좁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공회의 총 의원직은 200석으로, 50석씩 서임의원, 서당지명의원, 동당지명의원, 선출의원이 나누어 가지고 종신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50명의 선출의원에 대한 선거권은, 당시 요동화로 금화 300관이라는 거금을 매년 세금으로 낼 수 있거나, 퇴직 관료, 왕명으로 서훈을 받은 자의 매우 소수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것을 서당과 조정에서는 매년 납세량이 금화 50관 이상인 자로 대폭 폭을 넓히자고 주장했고, 반대로 동당에서는 200관 이상 정도로 내리고, 대신 혹여 가산이 몰락하더라도 부친이 선거권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들이 선거권을 대물림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 당시 요동의 도읍인 성경부의 내성(內城) 안에 있는 매우 고급 주택의 한 채 가격이 금화 1천 5백관 내외였으니, 참정권의 제한을 300관에서 200관으로 내린다 해도 이것을 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많이 늘지 않았다.

그저 지주에 근접한 부농(富農) 일부와 최근 부흥하고 있는 산업계에서 치부를 한 거상(巨商)들 정도나 일부 편입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면 금화 50관으로 참정권의 기준을 정할 경우, 참정권에 포함되는 숫자는 지금 참정권을 지닌 사람의 숫자를 4배로 늘릴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전체 인구의 2% 남짓에 불과했으나, 전체 성인 남성으로 인구 집단을 줄여 놓고 볼 경우 거의 8%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이 정도면 각 중심도시에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상사나 공장을 운영하는 자산가들이 포함될 수 있었다.

때문에 소위 「금화논쟁」이라 불리는 참정권 논쟁이 불붙게 되었고, 예전에 검열제도의 활성화로 불법으로 금지되게 된 신보를 대신하여, 임시적인 개혁 조치로 간행이 허가된, 신문(新聞)들이 논쟁을 거들고 나섰다.

국왕의 인가로 새롭게 간행권을 얻은 신문은 딱 두 종류였는데, 1710년에 최초로 간행을 시작한 「요동매일신보(遼東每日新報)」와 그보다 좀 더 뒤늦게 간행 허가를 받은 「성경신문(盛京新聞)」이었다.

이 중 「매일신보」는 동당의 입장을 극렬하게 변호하는 논조로 유명했고, 반대로 「성경신문」은 서당과 조광파를 지지하는 어조로 이름을 날렸다.

이 양 신문을 통하여 「금화논쟁」의 진행 상황은 시시각각 대중에 보도가 되었는데, 비록 이 신문들을 상시적으로 접하고 있는 인구가 소수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곧 큰 파급력을 낳기 시작했다.

서당이 주장하는 새로운 참정권이 시행된다면 바로 그 혜택을 받게 될 성경 및 요양 등지의 중산 계급이 대거 연판장에 서명하여 정부에 건백서(建白書, 건의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내용이 다시 「성경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여론은 급격하게 참정권의 급진적 확대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동당뿐만 아니라, 국왕 김행과 서당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동당을 견제하는 데 여론의 힘이 실렸기 때문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지만, 이 여론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그 파괴력이 자신들에게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김행은 개혁 세력을 불러다가 은밀하게 지시를 내렸고, 때문에 서당이 잠정적으로 참정권의 부분적 확대를 동당과 합의하게 되었다.

가장 급진적인 금화 30관을 기준으로 한 참정권 확대를 주장했던 이익 또한, 더 이상 이 협상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또한 국왕의 심중이 움직인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고, 몸을 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협상의 속도는 진전을 보게 되어, 1720년에 이르러 금화 125관 이상의 세금 납부자로 그 참정권이 확대되게 되었다.

대략 3만 명 남짓이던 기존 선거권자는 이로써 대략 10만 명 남짓으로 확대되었는데, 700만에 조금 못 미치는 요동의 인구를 생각해 본다면 대략 1%를 조금 넘는 숫자였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개혁은 기존 의원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동당과 서당의 지명의원제도를 폐지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의원의 종신 지위도 폐지되었다.

이런 선거제도의 변화로 인하여 각 지역에 새롭게 선거구가 조정되어 설치되었고, 전체 150개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침이 타결되었다.

대신 50석은 여전히 국왕이 임명하는 서임의원이 차지하고 있게 되었는데, 이들만큼은 국왕의 명령에 의해서만 교체되는 사실상 종신직의 지위를 여전히 누릴 수 있었다.

대신 국왕 김행 또한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잠정적으로 동당이든 서당이든 그 당적과 상관없이 정치적 명망을 쌓은 중진 의원들을 이 서임의원으로 의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결과 1720년, 최초로 총선거가 이루어졌다. 내지와는 다르게 행정부가 공회의 감시를 받기는 하나 국왕의 정부에 종속되어 있었기에,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의 존재가 없었다.

선거도 규칙적으로 10년에 한 차례씩 하도록 결정되었다. 공회의 이름도 이와 함께 요동국국회(遼東國國會)로 변경되었다.

제1대 총선거 결과 선거로 선출하는 150개의 의석 중 동당이 88석, 서당이 62석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서당과 연대하고 있는 국왕서임의원의 50석이 추가되므로, 개혁주의자들이 112석을 차지하여 과반 이상으로 공회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제1대 국회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국왕이 새롭게 인사 개혁을 단행하여 전증을 영의정(領議政), 이익을 좌의정(左議政), 장평강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개혁 인사를 추인했다.

이와 함께 초대 국회의장으로 서임의원직을 보존하고 있던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조광파를 중심으로 한 폭넓은 계몽주의자들과 기존 왕당파 관료들, 그리고 서임의원과 서당까지 포괄하는 거국적인 개혁 정권이 구성될 수 있었다.

국왕 김행은 이 정점에 서서 사실상 개혁정책을 주관하고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제도하에서 취학 대상 연령 중 채 5%에 미치지 못하는 진학률을 보이고 있는 의무 교육제도를 좀 더 강화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법률로 못 박았다.

이로써 현실적으로 10만에서 20만에 이르는 병력을 상시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고, 이중 증강되는 부분은 거의 해군에 투입되었다.

전통적으로 해군이 매우 약했던 요동은 해외에 거느리고 있는 식민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무역조차도 내지의 해군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요동은 경제적인 이득을 꾸준히 보기 위해서는 내지의 힘을 등에 업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을 겪고 있었다.

이것을 타개하고 내지에 대해 보다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을 강화하고, 식민지를 확보하지는 못하더라도, 독점적인 시장을 해외에서 늘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던 것이다.

기존에 동당이 주장하던 보수주의적인 중농주의(重農主義)적 정책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정부 정책은 급격히 중상주의(重商主義)로 전환되었었다.

새롭게 전열을 정비한 요동군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순(順)나라에 대한 군사 행동을 단행하여, 산해관을 넘어 10만 대군을 투입시켜 일시 북평(北平, 구북경)을 점령하고, 정전조약을 맺어 천진(天津)과, 한적한 어촌이었던 위해(威海)를 개항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항구에 요동군 해군의 자유 입항을 요구했는데, 그 결과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황해(黃海)까지 효율적으로 제해권을 확보하는 요동해군의 성장 발판이 다져지게 되었다.

이 결과 순(順)은 일시적으로 국력이 침체되었고, 붕괴된 북방의 방어선 때문에 몽골의 침입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것을 막기 위해 순은 서북(西北)과 남쪽 회수(淮水) 일대의 병력을 북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신강(新疆)이라 명명하고 영토를 확대하던 작업에 있던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 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남쪽의 군사적 긴장이 일시 이완되고,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 내일모레 하던 남명(南明) 정권의 몰락이 초래되었다.

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사천을 중심으로 한 주(周)나라가 먼저 움직여 이 남명 정권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쳤고,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광동의 월(패)과 강남의 양(梁)이 줄지어 개입함으로써, 결국 남명정권이 지배하고 있던 상(湘, 호남성의 별칭) 일대는 1728년 공식적으로 삼분(三分)되게 되고, 명조는 360년간 이어진 왕조의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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