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장 만리동풍(萬里同風)
「○의원(議員) 신문(申汶)이 중의원(衆議員)에서 연설을 하기를, 군사를 훈련시키고,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각국의 의학 기술을 배워 그 정묘한 기술을 취하고, 사치한 기풍을 억제하며, 개병(皆兵)을 실시하고, 도로와 교량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이 이치에 맞고 질박하다만 채택하기에는 부족하다. 폐단에 대해 말한 몇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깊이 유념하는 것이 좋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나라의 식산을 진흥하지 않으면 장래에 요동은 물론이거니와 일본과 양나라와 월나라에게도 욕을 보게 될 것이니, 신문이 하는 말이 옳기 그지없다.”라고 하였다.
○議員申汶演說於衆議院, 曰: 練軍事惠工商, 業醫技, 퇂各國而取其精妙, 抑奢侈, 施皆兵, 擴路橋. 或者對曰“言近樸實, 然殊欠裁擇. 數條說弊, 當體念矣.”, 或云 “不進國之殖産, 將來我朝必辱於遼倭梁패, 申汶曰言可當乎.”」
―《성종실록(成宗實錄)》, 52권,
천통(天統) 23년(1721) 6월 1일 네 번째 기사
「특정 지역에서 시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세계 경제를 위한 생산으로 포섭하여 만들어진다. 그리고 아주 만족할 만큼 높은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치 않다면, “이주”가 권장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2권.
1721년
천통(天統) 23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북방의 땅에도 다시금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잠시 얼어붙었던 바다의 잔 얼음도 멀리 물러가고, 녹음이 다시 짙어지는 계절이 온 것이다.
얀 피튀스 요나선 베링(Jan Vitus Jonassen Bering)은 영안부의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해송정」에 서서 시원한 봄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신대륙으로 건너가기 전에 찾아와 마지막으로 고향의 공기를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이 정자는, 이 영안항의 역사와 함께하며 거진 이백여 년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모국어인 덴마크 말보다는, 네덜란드어가 더 편안하고(그는 자신의 이름을 덴마크 식이 아니라 네덜란드어로 읽었다.), 그만큼 한국어도 익숙한, 전형적인 북해 이민 2세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통 이민 2세대와 다른 점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요나스 베링으로, 북해에 세관원으로 초빙받아 이민을 왔다가 이곳에 아주 정착한 사람이었다.
평소에 식견이 넓었던 요나스 베링은 요동대학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대학 재단의 재정 감리를 오랜 세월 맡아왔고, 그 덕에 얀 베링은 상당히 넉넉한 유복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날 수 있었다.
나이 스물셋인 1703년에 영안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학측의 추천으로 계영양행에 잠시 몸을 담아 대창해(大滄海, 태평양)과 남양(南洋, 남태평 양일대)를 두루 돌아다닌 뒤, 계영양행에서 나와, 잠시 하와이에서 농장의 감리(監理)로 지내며 머물기도 했다.
그가 지냈던 농장은 바로 안용복이 세운 농장으로, 그 아들인 안지흥(安智興)이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었는데, 베링은 이곳에서 거의 4년 가까이 머물며 좋은 대우를 받고 꽤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스물아홉이 되어 다시 고향인 북해로 돌아온 뒤, 그는 잠시 군대에 입대하여 이순신이 젊은 시절 근무한 것으로 유명한, 북해전대(北海戰隊)에서 하사관 계급인 해군참교(海軍參校, 하사)로 복무했다.
그는 이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내지로 보내져 해군상무관에 입교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이내 북해전대의 보급 책임자로 있으면서 정위(正尉, 대위)까지 진급했다.
이 무렵 그는 같은 이민자가 아닌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고, 정식으로 호적에 이름을 한국식인 백빈연(白濱緣)으로 올렸다.
금발 홍안인 백 정위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영안의 협소한 사교계 안에서 금방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백빈연―얀 피튀스 베링에게 북해대도독 박권(朴權)이 술자리를 청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박권은 베링에게 특수한 임무를 맡기고자 부른 것이었다.
“최근 황성 조정에서 영토의 정확한 계측을 하고 국경선을 엄정히 하기 위해 각지에 변계사를 보내어 지적사업을 하고 있네. 다른 지역에서는 이것이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영주에서도 거의 완료가 되어 가는데, 우리 북해도독부만 이를 처결하지 못하고 문제가 되고 있네. 워낙에 관할지가 넓은데다가, 탐사되지 않은 지역도 많고, 심지어는 주로 이용되는 항로를 제외하고는 정밀한 해도가 작성되지도 않고 있네. 때문에 이 문제를 맡아서 지휘해 줄 사람을 수배하다가, 해군 중에 그대만 한 인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네. 이미 북해전대와 해군 상부와도 이야기가 되었으니, 자네만 좋다면 바로 해군의 협조를 받아 이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박권의 말을 들은 베링은 이 일을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영안부의 군항에 있는 북해전대의 본부에서 행정 업무만 하는 생활이 질려가던 참이었다.
차가운 북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선상 생활을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이렇게 좋은 제안을 받게 되자 베링은 그 자리에서 수락을 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필히 이 일을 맡아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특히 최근에 모실도(貌室島)를 둘러싼 일본과의 국경 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에, 이 변경을 정확히 하는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영주도독부와의 정확한 경계도 명시되지 않았고, 혹여 이 북쪽 해안에 외국 함대가 나타나 정주지를 건설하고 영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에 대해 북해도독부의 수뇌부는 항상 긴장을 하고 있었다.
연신 북방 항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함대를 끌고 나타나는 일본 함대가 가장 그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빨리 북해도독부의 정확한 경계를 설정하고 확실한 행정 지배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 일은 어느 것보다 급선무로 진행될 필요성이 있었다.
베링이 총지휘관으로 임명되고, 총 10척의 범선으로 이루어진 변경 조사단이 이내 곧 준비가 되어 영안부를 출항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친 뒤, 출항을 앞두고 베링은 해송정에 올라왔다.
이번에 출항을 하게 되면 적어도 일 년 뒤에나 영안부에 돌아오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곳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은 생각에 베링은 이곳 해송정을 찾았던 것이다.
베링은 다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자신이 이끌게 될 10척의 탐사선을 보며 집에서 나오기 전 아버지 요나스 베링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항상 무뚝뚝한 아버지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베링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위험한 항해이니 부디 몸 성히 돌아오거라.”
베링은 그저 말없이 아버지의 늙은 몸을 끌어안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아버지의 눈물에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멘 탓이었다.
“백 정위님!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대도독 각하를 비롯한 내빈들께서 항구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내려가시지요.”
정자 아래서 부관이 외치는 소리에 베링은 감상에서 퍼뜩 깨어났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니 시각이 벌써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해송정에서 말에 올라 급하게 항구로 내려온 베링은 시간에 늦지 않게 출항을 위한 사열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정복을 차려 입고 북해대도독 앞에 선 베링은, 경례와 함께 출항 신고를 마쳤다.
대도독 박권은, 건투를 빈다는 말과 함께 항해에 지쳤을 때 선원들을 달래라며 소주를 궤짝으로 하사했다.
사열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보급 물자가 모두 적재되었는지 확인한 다음, 베링은 배에 올라 닻을 올리고 출항하도록 지시했다.
항해의 예정된 첫 목적지는 고혈도(庫頁島, 실제 역사에서의 사할린 섬)을 거쳐 모실도(貌室島, 실제 역사에서의 홋카이도)로 가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일대의 기존 해도를 수정하고, 특히 모실도에서 정확한 국계(國界)를 설정하는 것이 베링의 임무였다.
사실상 내해나 다름없는 이 지역의 바다를 항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최근에 발전을 거듭한 작도법(作圖法)에 기반하여 새롭게 해도를 수정하는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며, 탐사대에 속한 열 척의 배를 각기 나누어서 분산 작업을 시켜 효율을 도모했다.
베링은 새롭게 작성되는 해도에 한국어 정본(正本)뿐만 아니라, 서양 국가들에 대해서도 확실한 지역의 영유권 근거를 남기기 위해 지명 따위를 네덜란드어로 전사한 이본(異本)도 병행해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라틴 문자로 옮기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지명은 네덜란드어로 윤색해 옮기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고혈도는 「쿠헬란트(Koehelland)」로, 모실도는 「Merchiland(메르힐란트)」로 옮기는 식이었다.
훗날 베링이 작성한 이 해도에 근거하여 유럽어권에서는 이 지명들이 공식 표기로 정착되게 된다.
고혈도를 한 바퀴 돌며 해도를 완성한 베링의 함대는, 280여 년 전 가경연간에 임한기가 개척하여 세운 고혈도의 중심지인 가경(嘉慶)에 잠시 기항하여 일주일을 머물렀다.
가경은 군(郡)급 고을이었는데, 북방어로의 중심지가 되어 인구가 불어나 관청과 상관 따위가 늘어서게 되자 보(堡)에서 진(鎭)으로, 다시 군(郡)으로 승급시킨 것이었다.
이곳에는 북해도독부의 주임관(奏任官)급 관료인 안찰관(按察官)이 나와서 고혈도와 모실도, 그리고 천도제도(千島諸島, 실제 역사에서 치시마 열도 혹 쿠릴 열도)의 모든 행정을 주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충분한 보급을 마친 다음, 베링은 남쪽으로 해로를 틀어 모실도로 향했다. 이번 탐사에서 모실도는 주요한 관건이 되는 지역이었다.
본래 아이누어로 「아이누 모시르(Ainu Mosir)」, 즉 「인간이 사는 대지(大地)」라는 장엄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땅은, 일본에서는 아이누를 오랑캐로 비하하여 「에조」라 부르는 데서 나온 멸칭인 「에조치(蝦夷地)」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이 섬을, 아이누어의 지명에서 음역(音譯)하여 「모실도」라 부르며, 북해도독부의 관할로 여기고 있었다.
임한기가 이곳에 기항지를 조성한 이래, 모실도에는 모피를 구하는 엽사들과 아이누와 무역을 하기 위한 상인들, 그리고 모피 무역이 쇠퇴한 이후 대안재로 성장하기 시작한 북방어로에 종사하기 위하여 건너온 어민들이 이 섬의 북쪽 해안가를 따라 몇 개의 항구와 정착촌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200년이 넘는 정착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이곳의 많은 한국인들은 모실도에서 대대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하게 이 섬을 북해도독부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섬이 당연하게 북해도독부에 속한 곳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방적으로 소속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섬의 남쪽에는 일본의 마츠마에(松前) 가문이 이미 무로마치 시대 말엽에 이 섬으로 건너와 마츠마에 번(松前藩)을 세우고, 아즈치 막부에게 이 지역에 대한 지배자로 공인받고 있었다.
이들 또한 일본 본국과 아이누인들 사이의 중개무역을 지역 산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고, 더러는 아이누인들을 핍박하여 갈취에 가까운 상행을 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일본과 마츠마에 번의 공식 입장은, 모실도, 즉, 에조치가 일본의 공식 영토로 마츠마에 번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북쪽의 한국인과 남쪽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압박을 받으며, 때로는 무력을 통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아이누인들이 섬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원래 몫을 찾기 위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669년에는 동부 아이누의 수장인 삼쿠사이누(Samkusaynu)가 다른 아이누족을 규합해, 한국인들을 통해 수입한 수석총으로 무장하여, 마츠마에 번을 시부차이(Shibuchari)강 유역에서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 승리를 계기로 삼쿠사이누는 독립적으로 산개해 있던 아이누 부족들을 차근차근 제압, 혹은 포섭해 갔고, 사실상의 아이누족의 군주로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북쪽 해안에는 한국인들이 버티고 있었고, 일본 혼슈와 면한 남서쪽 반도에는 마츠마에 번이 영역을 강고히 하고 있었다.
때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들과 싸우고, 어떨 때는 반대로 한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을 공격하기도 하면서, 아이누인들은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삼쿠사이누의 손자인 오니비시(Onibishy)가 섬 동남해안의 피라투루(Piraturu) 지역의 니푸타이(Niputay)에 사실상의 도읍을 정하고 이곳에서 아이누 씨족들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은 지역에서 관리하고 있는 지도와 도로망, 아이누들과의 무역소에 대한 자료를 제게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북해대도독 박권에게 위임장을 받아 놓았고, 또한 고혈도 가경군에서 모실도를 관할하는 안찰관에게도 허가를 받아 놓았기에, 베링은 모실도에서 가장 큰 한국인 정착지인 강정진(康晶鎭)에 이르자마자 그곳 관리에게 상황 파악을 위한 자료를 요구했다.
강정진의 아전직은 그곳의 유지들이 사실상 세습으로 물려받고 있었고,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지 오래된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지도나 기록들이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베링의 예상대로 강정진과 일대의 다른 정착촌에서 관리해 온 자료는, 양은 많지 않았지만 충분히 내실이 있는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범위가 한국인이 정착하고 있는 지역이고, 어떤 곳에서 아이누인들과 무역행위가 이루이지고, 또 충돌이 발생하는지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실상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는군요.”
“고혈도와 접한 곳에서 천도제도로 이어지는 북쪽의 해안지대만 한국인들이 정착해 있습니다. 진이 세 개고, 보가 열두 개, 그리고 해안과 내륙의 조그만 마을들이 도합 하여 마흔여덟 개소가 있습니다. 호적대장에 올라온 바에 따르면 이 모든 곳을 합쳐서 대략 구천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 정착지에서 살면서 한국 호적에 올라와 있는 것은 비단 조선 사람뿐 아니라, 아이누 출신도 있고, 드물지만 니브히나 일본인, 그리고 이곳 강정에는 정위님처럼 태서에서 이민 온 홍모인도 두 명 있습니다.”
북해로 이민 온 유럽 출신의 사람들은, 그 외모 때문에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란 뜻으로 홍모인(紅毛人)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베링은 이민자들이 더러 정착에 애를 먹고 북해도독부에서도 변방으로 흘러들어 간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곳 모실도에도 들어와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지만, 개인적 호기심보다는 하루 바삐 이곳의 영유권 문제에 대한 조사를 마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베링이 제국 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곳의 아이누 군주와 일본 대표를 불러서 공식적인 국경 협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자세하게 조사를 하여 훗날의 협상에 대비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베링은 원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고, 모실도의 정착촌들을 돌며 토지 소유에 대한 양전(量田)을 직접 실시했다.
내지 팔도에서는 이미 임승준이 재상으로 있었던 이래, 수적양전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이후로도 호적의 실태와 토지의 소유 관계를 확인하는 전국적인 조사가 십 년 걸러 한 번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해도독부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모실도에서는 이런 작업이 제대로 진행된 바가 없었고, 때문에 토지 근거가 관습적이고 사적인 문서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행정 관할이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베링은 이 모실도 일대의 호적과 토지 소유 관계를 확실하게 문서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베링이 모실도에 들어온 4월 무렵부터 시작하여 꼬박 여름 내내 진행되어 8월이 될 무렵에서야 끝났다.
이렇게 만들어진 확실한 호적과 지적도, 그리고 관계 자료를 묶어서 베링은 영안부로 송부했다.
8월이 끝나갈 무렵, 베링은 모실도의 강정진을 떠나서 임석(任碩, 실제 역사에서 캄차카)까지 늘어서 있는 천도제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이번 1차 탐사의 최종 범위는 이곳 천도제도까지였다.
모실도의 동쪽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임석반도의 남단(南端)으로 이어지는 이 열도에는 총 쉰여섯 개의 섬이 있었다.
베링은 모실도와 접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제법 규모가 있는 정착지가 있는 구나실(丘那室, Kunashir) 섬에 지휘부를 차리고, 배들을 제도의 각 섬으로 보내어 해도를 작성하도록 했다.
베링은 모실도에서 무리한 탓에 몸이 좋지 않아져, 직접 나가지 못하고 이곳 섬에서 요양을 취하며 해도 작성 작업을 지휘해야만 했다.
이 구나실 섬에는 예전 임한기가 가경 5년(1449)에 이곳에 처음으로 도달하여 세워둔 목비(木碑)가 남아 있었다.
「가경오년대한제국계영양행지행적(嘉慶五年大韓帝國啓永洋行之行蹟)」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칠해져 있는 이 목비는, 세월의 풍파에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좀을 먹고 글씨가 많이 지워져 있었는데, 베링은 남는 시간에 이 목비를 보수하여 세워두었다.
그 옆에는 혹여 보수한 목비가 다시 상할까 우려하여, 같은 글씨를 돌에 새겨 석비(石碑)도 세워 두었는데, 뒷면에는 천도제도의 개척사를 간략히 새겨 넣고, 베링 자신의 한국식 이름인 백빈연이 쓴 글이라 이름도 넣어 두었다.
다시 바람이 급격히 쌀쌀해지는 10월 중순이 되자, 천도제도에 대한 해도 작성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베링은 북쪽에서 유빙이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영안부로 귀항하여 그간의 결과를 북해도독부에 보고했다.
1724년
천통(天統) 26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베링의 1차 탐사는 성공적이었다.
그가 고혈도, 모실도 및 천도제도 일대를 다니며 작성한 해도와 지도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모실도에서 양전 사업까지 수행하여 모실도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안도독부에서는 〈북방 영토의 경계 비정에 관한 건백서〉라는 이름의 상주문을 황성부 의회에 올렸고, 의회에서는 이를 근거로 삼아 이듬해 경계 비정 문제를 논의할 책임자로 유기맹(劉起盟)을 북해로 보냈다.
유기맹은 직접 이곳에서 베링이 취합한 자료를 살펴본 뒤, 베링을 자신의 보좌관으로 붙여 달라고 북해도독부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베링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베링은 다시 모실도로 건너가, 유기맹과 함께 국경비정협상에 참가하게 되었다.
유기맹은 이곳 모실도로 건너와 황제의 칙서(勅書)와 의회가 발부한 각령(閣令)을 근거로 협상을 열 것을 아이누와 일본 측에 제안했다.
일본으로는 공식적으로 협조문이 외부를 통해 이미 발송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일본 정부에서도 마츠마에 번주인 마츠마에 노리히로(松前矩廣)와 아즈치 막부에서 직접 파견한 관헌들로 협상에 임했다.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인받을 기회라고 생각한 아이누의 지도자인 오니비시도 직접 수하들을 대동하고 협상장에 나올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1722년, 천통 24년 7월 23일에 이들은 섬의 중서부에 위치한 삿포로(Sat poro)에 모였다.
아이누어로 「건조하고 습한 대지」라는 뜻의 이 지역에는, 아이누와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들의 교역로가 모이는 회시(會市)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회담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논쟁 끝에 결국 삼자 간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우선, 남서부의 오시마 반도(渡島半島)에 대한 마츠마에 번의 지배를 인정하여 이 반도는 일본령으로 확인하고, 반도가 끝나는 곳에서 국경을 긋기로 결정했다.
북부 해안 지대는 북해도독부에 귀속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는데, 해안과 바짝 면한 산맥이 자연스러운 경계를 지어 주었다.
이 외에도 동해(東海)에 면한 상음도(上吟島)를 위시한 네 개의 섬이 한국령으로 귀속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아이누인들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었는데, 이 회담의 결과로 오니비시는 한국과 일본에게 아이누의 정식 지도자로 추인되었다.
그는 땅 이름으로 불리던 「아이누 모시르」를 국명으로 삼고, 스스로 대왕(大王)을 칭했다.
정식 수도는 니푸타이로 삼고, 이궁을 삿포로에도 두었다.
정확한 국경에 대한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적어도 각기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과 반목을 격화시켜 오던 역사에 일단의 종지부는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각 국경의 길목에는 정계비(定界碑)가 한국어, 일본어, 아이누어의 세 언어로 씌어졌다.
아이누어에 독자적인 문자가 없었기에, 일본 측 경계에는 아이누어가 카타카나를 빌려 쓰여졌고, 한국 측 경계에는 한글을 빌려 쓰여졌다.
훗날 중립적인 라틴 문자를 공식적으로 표기 기준으로 삼기 전까지, 이것은 아이누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카타카나와 한글이 혼용되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 협상에서 유기맹을 보좌하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와 그에 앞서 선행된 1차 탐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베링은 2계급 특진하여 해군 부령(副領, 중령)으로 진급했다.
적어도 그가 속한 북해전대에서는 거의 계급 순으로는 네 번째 서열이었다.
군대에서 충분히 진급을 하였으니, 이에 만족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베링은 1차 탐사보다 가혹한 조건이 될 2차 탐사를 자청해서 맡았다.
2차 탐사는, 비교적 북해도독부의 수부와 가까운 지역에 면한 곳의 해도를 작성했던 1차 탐사와는 다르게, 북쪽의 유빙들이 떠다니는 험한 지역을 3년에 걸쳐 장기간 탐사하는 쉽지 않은 계획으로 잡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북쪽이라는 뜻의 삭방(朔方)으로 불리는 임석(壬碩)반도를 포함한 고혈도 북쪽의 삭방해(朔方海, 실제 역사에서 오호츠크 해)를 끼고 있는 해안가가 일순위였다.
그 다음의 목표는 영주도독부와의 정확한 경계를 나누기 위한 실측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대륙(新大陸)과 구대륙(舊大陸)이 붙어 있는지, 아니면 나뉘어져 있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이 여러 가지 가설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임한기와 창주공 김주현 이래 북방을 오고 간 수많은 배들은 빙산(氷山)과 유빙(遊氷)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위험한 이 북쪽 끝의 바다로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혹여 여름의 절정기에 북위 70도에 가까운 지역까지 들어간 배들도, 정확한 해도를 남긴 바가 없었다.
때문에 더러는 해류의 흐름과 드물게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구대륙과 신대륙이 나뉘어져 있음을 확신하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정확히 확인된 바가 없기에, 북해도독부에서는 이 일대를 확실히 탐사하는 것을 목표에 포함시켰다.
분명히 쉽지 않은 대장정이 될 터이기에, 베링 자신도 긴장했을 뿐만 아니라, 탐사 대원들도 가장 북쪽 풍토에 적응이 되어 있고, 오랜 기간 선상 생활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수렵 활동도 해본 경험이 있는 노련한 인물들로 뽑았다.
때문에 인원수는 오히려 1차 탐사 때보다 줄은 200명에 불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링은 오히려 이들의 자질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제2차 함대는 공식적으로 영안부를 1724년(천통 26) 3월 14일에 떠났다.
고혈도와 대륙 사이의 좁은 해협을 관통하여 북쪽으로 올라간 이들은, 흑룡강 하구의 오래된 정착지인 특림(特林)에 기항했다가 삭방해(실제 역사에서 오호츠크해)로 들어섰다.
이 삭방해에 면한 해안가에는 총 여섯 개의 한국인 수렵꾼, 혹은 장사치가 들르는 몇 개의 거점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이 거점들은 여름 한철만 사람이 기거했다가, 겨울에는 거의 비워지는 장소들이었는데, 개중 한두 군데 정도는 한겨울에도 사람이 남아 있는 곳이 있기도 했다.
베링은 이런 거점들을 중심으로 해도를 작성하고, 주변의 토착민들에 대한 민족지(民族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렇게 삭방해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다 보니,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한 해가 흘렀다.
베링은 겨울이 찾아오자 특림으로 함대를 철수시켜서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삭방해의 둔지에서 겨울을 날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혹여 혹한이 시작되면 북방의 얼음낀 바다에서 배가 못 쓰게 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무리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가 되자, 베링은 보급을 마치고 특림에서 다시 함대를 출발시켜 임석(壬碩)으로 향했다. 임한기가 처음으로 이곳에 도달해 이름을 붙인 이후로, 이곳에는 몇몇 개척자들이 잠시 들어와 살거나 하기도 했지만, 영구적인 정착지가 세워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곳 정착촌의 주민들은 서른 명 남짓으로, 거의가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베링은 이 임석의 땅 이름을 네덜란드어로 「노르델레이크로이츠(Noordelijkrots)」라 옮겨 적었다. 「북쪽바위」라는 뜻인데, 정착촌 뒤에 커다란 바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임석반도, 혹 노르델레이크로이츠 반도를 한 바퀴 돌며 해도를 작성한 베링은, 예전 신대륙으로 향했던 창주공 김주현이 항해했던 항로를 따라 안력제도(岸礫諸島, 알류샨 열도)로 향했다.
이곳 섬들을 조사한 뒤 안력제도 안쪽의 그 미답지에 가까운 바다로 들어서기로 베링은 결심했다.
7월 하순의 가장 따뜻할 때로 시기를 택하고, 나머지 배들을 안력제도에 대기시켜 놓은 뒤, 두 척의 배와 정예로 꾸려진 30명의 탐사대만을 대동하여 훗날 베링해로 불리게 될 바다로 그는 들어섰다.
매우 조심스러운 항해 끝에, 베링은 구대륙과 신대륙을 가르는 해협에 다다라 이곳을 선회(旋回)하여 잠시 육로를 통해 북극해(北極海)에 접하는 지역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탐사한 이 지역은, 훗날 서구권에는 「베링해」와 「베링해협」으로, 한국을 위시한 동양권에는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백빈연 해협(白濱緣海峽)」, 혹은 「백연해(白緣海)」와 「백연해협(白緣海峽)」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이 해협 양쪽에 준비해 온 석비(石碑)를 세웠다. 일종의 정계비로, 이곳에서 영주도독부와 북해도독부 사이의 경계를 짓고 대륙이 바다에 의해 나눠지는 것을 확인했다라는 내용이 담긴 비석이었다.
다행히도, 서른 명의 대원 중에 두 명을 제외한 스물여덟 명이 안전하게 짧은 여름이 끝나기 전에 안력제도로 회항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가을이 시작될 무렵 함대는 동쪽으로 향했다.
이미 북방항로를 통해 영주도독부로 가는 배들에 의하여 잘 알려진 바다였기에 항해는 무리가 없었고, 겨울을 영주도독부의 창주부로 들어가서 난 뒤에, 다시 봄이 되자 북방항로를 거슬러서 베링은 영안부로 귀항했다.
만 2년에 걸친 제2차 탐사는, 수많은 새롭게 작성된 지도와 주변의 실태를 보고한 글, 그리고 베링의 명성을 남겼다.
그는 이 공적을 다시금 인정받아 정령(正領, 대령)으로 진급했다.
항해에서 돌아온 뒤 베링은 자신의 북방 탐사 기록을 《북극권항해일지(北極圈航海日誌)》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그의 생전에 14개 국어로 옮겨져 동서양을 막론하고 탐독되었다.
그는 그 뒤 해군상무관에서 생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잠시 종사한 뒤, 나이 쉰의 나이에 참장(參將, 소장)으로 예편했다.
다시 고향인 영안부로 돌아온 그는 예서 모교인 영안대학(예닝스타트대학)의 지리학 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748년, 예순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28년
천통(天統) 30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영주도독부 창주부
평화로운 10년이었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어디에서도 파국적인 전쟁이 없었다.
이제껏 유럽에서든 아시아에서든 전쟁은 늘 일상이었다.
국가 조세의 절반 이상이 군비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적이 병력을 늘리면 혹여 나를 칠까 전전긍긍하며 적의 갑절로 군마와 총포를 늘리려 했다.
그러나 서로 물고 물리며 영역을 확장하고 시장을 키우기 위한 전쟁이 적어도 유럽과 극동에서는 잠시 멎었다. 갈등 끝에 일시적인 평형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북유럽에서는 영불연합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스웨덴 왕국 사이의 기묘한 세력 균형이 잠시 이루어졌다.
그간 연합왕국은 네덜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었다.
온 유럽이 한 데 뒤엉켜 싸웠던 1609년에서 1649년에 걸친 40년 전쟁 끝에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이미 네덜란드는 유럽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나 있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경제적 패권은 감히 도전할 자 없는 아성이었다.
연합왕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의 패권에 대한 주요한 도전자였다.
같은 국왕을 모시고,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여전히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그러나 국왕과 최상부의 행정 관료는 이미 일체화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략적으로 잉글랜드의 산업을 육성하고, 프랑스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시장으로 삼았다.
잉글랜드에서 철과 석탄을 캐고, 양모로 모직물을 짜내고, 그들의 선박들이 대서양 삼각무역에 종사하는 동안, 프랑스는 밀을 재배하고, 왕국의 영광을 위한 병력 자원을 제공하고, 귀족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세금을 바쳤다.
이런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고, 튜더 왕가와 최상부 법복귀족(法服貴族)들은 여기에서 나오는 이윤을 프랑스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를 통제했다.
프랑스는 독립된 의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별반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프랑스 삼부회(三部會)는 영국 의회만큼의 권한을 지니지도 못했을뿐더러, 으레 10년씩 폐정되기 일쑤였다.
그들이 그간 이루어낸 성과는 프랑스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법을 몇 개 통과시키고, 프랑스어와 문화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설립한 것 정도였다.
진저리가 난 위그노교도(프랑스 신교도)들은 배를 타고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건너갔다.
잉글랜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프랑스 식민지인 이곳에서, 그들은 종교적 차별과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고자 했다.
이렇게 프랑스를 발판으로 삼아, 잉글랜드는 전례 없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네덜란드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의 가톨릭 신자들이 오란여(Oranje) 가문에 굴복하고 신교로 개종한 뒤, 이 영토는 몰락하는 카스티야에게서 영구히 네덜란드로 복속되었다.
전쟁 와중에 네덜란드는 라인 강 유역과 북독일 일부에도 진출했고, 이들 영토 중 일부도 네덜란드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사분오열된 독일을 배후시장으로 삼고, 이미 동인도와 아메리카에 개척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이윤, 그리고 독점적인 금융 시장을 손에 쥐고 있다는 이점이, 네덜란드 부흥의 씨앗이 됐다.
적어도 네덜란드가 전성기를 누리던 한 세기 동안, 유럽의 어느 누구도 네덜란드의 패권을 의심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늘 한 발짝 뒤처지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연합왕국의 국왕 리처드 4세(Richard IV)는 재위 중 두 차례나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프랑스가 동요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불만이 가득 쌓인 프랑스의 하위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는 언제고 네덜란드 편을 들어 연합왕국에서 이탈할 궁리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잉글랜드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비록 하향세라고는 하나 패권을 질기게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프랑스 정세의 도움이 컸다.
물론 프랑스만이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발틱해를 완전히 장악한 스웨덴은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다툼 가운데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인 북해(北海)의 정세가 어지러워지면 곧 스웨덴 경기에 불안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는 목재가 고갈 상태였고, 때문에 조선업에 사용할 목재와 역청 따위를 스웨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구리나 철광석의 일부도 스웨덴 없이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잠재적 목재 자원이 될 만한 북아메리카의 삼림지는 네덜란드와 스웨덴 손에 있으니, 잉글랜드로서는 국운이 달린 조선업에 스웨덴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찌어찌 패권을 유지하고 있으나, 독자적으로 잉글랜드를 패퇴시키는 것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웨덴은 철저히 네덜란드의 동맹 요청을 묵살했다. 스코틀랜드 또한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주요한 세력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가 대륙에 집중하는 동안 스코틀랜드 국왕은 아일랜드에 진출하여 아일랜드 국왕의 왕관을 쓸 수 있었다.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인 아일랜드를 통해 스코틀랜드 식민자들은 끊임없이 북대서양의 어업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했다.
북아메리카 북동쪽 끝에 세워진 사실상의 어업 기지인 노바스코샤(Nova Scotia), 혹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알바 누아흐(Alba Nuadh)가 바로 그들의 숨통이었다.
언제고 간신히 안정된 상태를 이룬 이 왕국이 잉글랜드에게 점탈(占奪)당할지 모른다는 위압감이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늘 잉글랜드를 견제하게 만들었다.
스코틀랜드는 연합왕국이 무너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고, 때문에 프랑스 내의 독립분자들을 지원하고, 잉글랜드의 손아귀에 있는 웨일스에도 첩자를 심어 두었다.
이들은 17세기 후반부 내내 끊임없이 싸웠지만, 일시적으로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쟁은 잠시 멎어들었다. 남부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대서양으로 나가는 좁은 길목인 지브롤터 해협을 중심으로 제 살을 깎아먹는 전쟁을 벌였던 이베리아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화약을 맺었던 것이다.
아라곤과 동맹 관계였던 베네치아가 지브롤터를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에게서 뜯어 왔고, 아라곤은 모로코를 얻었다.
몰락하는 카스티야 왕국은 새롭게 동맹이 된 포르투갈의 지원이 없었다면 쇠락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이 와중에 가장 득을 본 것은 동로마제국이었다.
서인도제도의 몇 개 섬들의 귀속 문제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인 끝에,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중립적인 동로마제국의 손에 이를 넘기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시한부적 조치였는데, 조약상에서 할양이 아닌 위탁으로 명시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일시적 평화를 맞은 것은 유럽뿐만은 아니었다. 중국 대륙에서도 명나라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요동과의 일시적 전쟁 끝에 취약해진 순나라와 남부 지역의 양·주·월 사이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려 있는 상황이라 도발은 곧 자멸을 의미했기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평화기를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한국과 일본이었다. 카스티야가 아라곤과 수십 년에 걸친 다툼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한국의 상단들은 완전히 태평양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일본과 양나라는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둘러싸고 소모전이 지속되었지만, 적어도 큰 관점에서 한국 주도하의 거시적 평화가 일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 동쪽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일본―오가사와라제도―필리핀―호주를 잇는 태평양 남북 항로에 집중했다.
양나라는 그 사이 거대한 시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공화주의적 성격이 짙은 개혁과정을 통해, 명나라 멸망 후 황제에 등극한 정씨 일가와 의회의 조율하에서 이들은 상공업에 막대한 금을 쏟아부었다.
새롭게 주요한 수출 품목으로 등장한 차(茶)는 끊임없이 세계로 팔려 나갔고, 이는 고스란히 다시 양나라의 제조업에 투자되었다.
한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겉보기에는 완전한 우위를 누리고 있었지만, 점차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그 위기는 외부보다는 내부에서 먼저 찾아왔다.
영주도독부는 그간 내지 정부에 있어서 그다지 필수적인 고려 대상도 아니었을뿐더러 대창해, 즉, 태평양 무역의 반대편 기지인 동시에, 내지에서 생산된 물품을 팔아치우는 시장 정도에 불과했다.
충분한 시장이 되려면 소비력이 필요했기에, 그간 내지에서는 영주로의 이주를 권장해 왔다. 그러나 철저하게 영주가 내지에 비견되는 공업, 혹은 상업적 발전은 하지 못하도록 억제를 시켰는데, 요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이는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때문에 17세기까지 영주는 중남미의 카스티야, 혹은 아라곤 식민지에서 흔히 목도되는 엔코미엔다(Encomienda)식의 착취적 농장들만이 번성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을 농장 노동에 동원하여 쌀과 여러 종류의 곡식, 그리고 차와 설탕 등을 재배해서 내지와 일본, 중국 등지에 팔아넘기는 것이 영주의 산업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러나 내지에서 의회정권이 들어서는 동안 영주에 대한 통제력은 잠시 흔들렸고, 더군다나 배후에 후금국이 생기면서 독자적인 생존 노선에 대해 고려하게 된 영주의 분위기 때문에 황성부 조정은 갈수록 영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먼저 잡음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업이었다.
농장 경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일부 영주의 호족가문들이 창주부를 중심으로 조선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이것은 내지 상단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낮은 임금과 풍부한 목재는 이곳에 무역 기지를 가진 내상이나 계영양행이 영주에서 선박을 건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렇게 영주의 토착 자본과 내지의 상단의 자본이 함께 영주도독부의 선박업에 투자되면서, 영주의 조선업은 중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결과 내지 상단들은 자기 발등에 도끼를 찍은 꼴이 되고 말았다.
영주도독부의 토착 자본이 가진 이점은, 바로 동령대간(로키산맥)에서 나오는 막대한 목재에 독점적인 접근권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내지 상인들은 이들이 제공하는 싼값의 노동력과 목재가 아니면 선박 건조가 불가능했다. 이런 우위를 이용하여, 이들 토착 자본은 내지 상단인 내상과 계영양행의 무역 독점을 비집고 들어가 독자적인 무역을 하고자 시도했다.
이들은 기존 대창해 왕복 무역에 뛰어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성공적으로 신대륙 서해안을 종단(縱斷)하는 해안 무역과 하와이와 신대륙을 연결하는 중거리 무역에서 점점 점유율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영주 상인들은 점차 지역적 연고와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는 영주에 뿌리를 박고 있는 독립 상단들과 거래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그만큼 내지 기반의 상단들은 점유율이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찾아온 것이 바로, 내지가 독점하고 있던 제조업을 영주에서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최근 들어 북서유럽과 극동에서 기계의 발전이 거듭된 것이 영주도독부가 적극적으로 제조업에 투자하기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내지의 의회는 끊임없이 이를 제약하기 위해 제조업을 제한하라는 명령을 영주도독부에 송부하였으나, 사실상 영주의 독자적 의회로 기능하기 시작한 평의회(評議會)는 이런 명령들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평의회의 협조 없이는 제대로 정책을 집행할 수 없는 영주대도독은 중간에서 곤란함만 내비치며 황성부와 영주의 이견 사이에서 버티다가, 임기가 끝나기 무섭게 내지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런 시기가 지속되자, 영주의 산업은 점차 식민지적인 한계를 딛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영주도독부 남부의 정안도(靜安道)에서 근래에 발견된 사금(砂金)이었다.
막대한 금에 대한 기대가 곧 이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내지나 요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과 양나라, 심지어는 유럽인들까지 떼 지어 몰려들어 사금을 채취하는 일에 몸을 내던졌다.
대부분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으나, 일부는 아니었다.
이 금맥(金脈)을 쥐게 된 몇 명의 사람들은 영주에서 산업에 투자하기 위한 자금을 조성하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이들은 성장하는 영주의 공업에 아낌없이 자본을 출자하고, 영주의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를 닦고, 더러는 대학까지 세웠다.
1690년대까지 영주에는 단 하나의 고등 교육기관도 없었지만, 1703년 최초로 창주척식대학(蒼州拓植大學)이 창주공가의 출자로 세워진 이후, 1730년까지 무려 네 개의 대학이 영주 각지에 세워졌다.
이들은 각각의 규모는 작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영주의 고등 인재들이 배를 타고 내지로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영주도독부에서 열림에 따라, 이민 행렬은 점차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잠시 머무르기 위해 영주에 왔던 사람들도 영주에 뿌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박장일(朴張壹)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박장일의 부친은 북해대도독을 역임한 박권(朴權)이었다.
그는 북해대도독의 임기가 끝난 직후, 황성부 의회의 명에 의해 곧바로 영주대도독으로 부임받게 되었다.
북해대도독으로서 북방 영토 문제를 매듭짓는 데 세운 공을 사서, 갈수록 내지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있는 영주도독부의 시정을 잡으라는 의회의 뜻이었다.
박권이 영주도독부에 무사히 도착했다면, 황성부 의회는 잠시나마 뜻대로 영주를 통치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박권은 무리한 항해로 인하여 앓고 있던 당뇨 합병증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당시 당뇨는 불치병이었고, 명확한 원인이나 치료가 불가능했다.
부임 중 박권이 사망함에 따라, 오히려 영주도독부는 의회의 뜻과 다르게 권력 공백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고, 평의회는 사실상 몇 달 동안 기존의 법령들을 무효화시키면서 영주도독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켰다.
이 와중에 박권이 부임하기 위해 타고 오던 배에 그 막내아들인 박장일이 함께 타고 있었다.
별로 좋지 못한 성적으로 간신히 아버지의 임지인 북해도독부에서, 영안대학을 졸업한 박장일은, 포부도 없고 특별히 장기도 없는 그런 배포 없는 사내였다.
관직은 고사하고 학계에 남을 능력도 되지 않았기에 박장일은 아버지의 부임길에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그곳에서 황금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한 번 거기에 손을 대어 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부친이 선상에서 죽게 되었고, 부친이 영주에 부임하게 되면 필요한 잡기를 사고,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지참하고 있었던 돈이 고스란히 박장일의 손에 떨어졌다.
부친을 잃은 슬픔도 잠시, 사실상 영주에 혼자 떨어진 박장일은 내지의 가족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아주 부친이 남긴 돈으로 영주에 자리 잡고자 마음을 먹었다.
“이 돈으로 요즘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비록 도중 객사하였으나, 영주의 대도독으로 오던 조정 대관(大官)의 영식(令息)이니, 영주 척식평의회의 의원들도 박장일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긴 했다.
박장일은 이렇게 안면을 튼 의원들 몇 명에게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묻고 다녔다.
“제국통보로 금화 500냥이라. 그 돈으로 농장을 살 수도 없고, 공장을 세울 수도 없네. 도매 정도는 해봄직하겠군.”
그동안 영주의 물가는 내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 올라 있었다.
제국통보로 금화 500냥이면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집 하나를 구하고, 물건을 사들일 종자돈 정도면 금방 사라질 양이었다.
이 돈으로 돈이 될 만한 직물공방이나 철공소(鐵工所) 따위를 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무슨 품목이 좋겠습니까?”
“그야 나도 장사치가 아니니 잘 모르지. 원한다면 내 이 창주부 일대에서 돈 좀 굴리는 상인을 한 명 소개시켜 줌세.”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돈을 크게 굴린다는 상인을 만나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정도는 박장일도 잘 알고 있었다.
세도가인 평의회 의원들의 눈치를 봐서 쑤다 남은 죽을 좀 줄는지는 몰라도,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으면, 내지에서 떵떵거리는 본가로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았다.
한 달쯤 창주부 항구에 면한 여각에다가 잠시 거처를 꾸려 놓고, 빈둥거리며 여기저기 굴러가는 형편을 보러 다니니, 이래저래 성에 차는 것은 없고, 눈에 확 뜨이는 돈 될 만한 거리도 없었다.
처음 생각했던 정안도로 금맥을 찾으러 가는 일은, 일만 고되고 허황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이곳에서 지내며 눈칫밥으로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띈 것이 바로 창주부에서 거래되는 어패류였다.
영주도독부에서 어업은 그간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북대서양에서 잡은 고기를 쉽게 서유럽으로 내다 팔 수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드넓은 대창해의 북부를 횡단해 내지로 실어 나르는 것은 채산이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영주도독부의 인구가 급증하여 100년 전 80만 명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물경 230만 명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것은 충분히 영주의 독자적인 어업 산업을 지탱해 줄 정도가 되었다.
때문에 눈치 빠른 이들은 돈을 쥐고 시골로 내려가 어업기지를 개척하곤 했는데, 이러기 시작한 역사가 아직 얼마 되지는 않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대로 잔꾀는 잘 돌아가는 박장일이 이를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직 그의 수중에는 제국통보 320냥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 사이 30냥을 탕진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사금 줍다가 패가망신한 이들 중에, 어로 경험이 있는 이들을 추려다가 시골로 내려가서 조그만 어업기지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박장일은 320냥 중에 220냥을 털어서 조그마한 어선 5척을 발주하고, 남은 돈으로는 정안도에서 실패를 겪고 창주부로 일을 구하러 올라온 이들을 추려서, 1년 계약으로 우선 서른 명가량 고용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농사짓기에는 기후가 적합지 않아 인구가 희박하고 땅은 넓은 가장 북쪽의 연양도(沿洋島)로 들어갔다.
복잡한 연양도의 해안선의 안쪽에 자리 잡은 연양도의 행정 중심지인 미포군(尾浦郡)에서 삼 백여 리 떨어진 인구가 천 명 남짓한 교도현(嬌島縣)을 그 목적지로 삼았다.
교도현은 교도(嬌島)라 불리는 큰 섬 하나가 통째로 한 고을이었는데, 현급의 고을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현청이라 봐야 네 칸짜리 기와집이 다였으니 매우 궁벽한 시골이었다.
이곳은 북대창해(북태평양)을 순환하는 난류와 북극 방면에서 내려오는 한류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박장일은 이곳이면 풍부한 어장이 될 것이라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일을 벌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교도현에서도 인적 드문 해안가에 직접 고용한 어부들을 데리고 조그마한 선착장을 짓고, 기거할 숙소를 세운 박장일은, 힘겨운 첫해를 보냈다.
성미가 드세기 그지없는 어부들을 통솔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워낙에 기반이 없는 곳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해내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해부터 어로는 풍작이었다.
원체 고깃배도 드문 곳이라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바글바글 딸려 올라오기 일쑤였다.
박장일뿐만이 아니라, 어부들도 신이 나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이 고기를 내다 팔 만한 거래처를 찾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까운 미포군의 어시장은, 협소하기 짝이 없고 고기의 단가도 낮았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이것을 창주부까지만 가져가 팔 수 있다면 크게 이윤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허나 첫해에는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미포군에서 헐값에 팔아 겨우 어부들의 몸값을 대고 조그만 이윤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박장일은 쉽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첫 해의 잡힌 고기들을 면밀히 따져 보고서, 여름에는 난류를 타고 들어오는 고등어를 중점적으로 잡고, 가을과 겨울철에는 한류가 밀려오면 이곳 바다로 들어오는 명태에 집중하기로 어부들과 합의를 보았다.
어부들 중에는 고등어를 염장(鹽藏)하는 법과 명태를 북어나 동태로 만드는 법을 아는 자들이 있었다.
다음 해는 결과가 좋았다. 여름에는 소금에 잘 절인 고등어를 창주부로 가져다 팔았고, 겨울에는 동태를 내다 팔았다.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먼 창주부까지 옮길 수 있으니, 물고기 값도 꽤나 쳐서 주었다.
창주부 상인들도 이 고기들이 염장되거나 얼려져 바짝 마른 상태이니 내륙 지역까지 내다 팔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박장일은 수완이 썩 좋은 편이었고, 어부들에게도 수당을 높게 쳐 주어, 갈수록 이곳에 모여드는 어부들이 늘었고 점점 박장일의 어업기지도 커져 갔다.
아주 「완포(碗浦)」라는 마을이 들어설 정도였다.
박장일은 여기서 차근차근 종자돈을 모았고, 이내 오 년이 지나지 않아 수중의 자본이 제국통보로 금화 8,000냥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고 여기서 어업에 계속 종사해도 좋으련만, 박장일은 좀 더 큰일을 벌여보기로 결심했다.
완포의 어업기지 운영은 박장일을 따라 뒤늦게 내지에서 건너온 사촌 동생 박회(朴檜)에게 위탁하고, 자신은 팔천 냥을 가지고 창주부에다가 화장용 백분(白粉)을 집에서 만드는 노파들을 고용해서 「흥해백분사(興海白粉社)」를 차렸다.
이 백분은 납에 열을 가하면 나오는 하얀 가루인 납꽃을, 칡가루, 쌀가루 등과 섞여 새하얀 가루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을 물에 개어서 얼굴에 발라 화장품으로 쓰는 것이었는데, 박장일은 이것을 아주 공장을 차려다가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녀자 백여 명을 고용해서 창주부 외각에서 백분을 만들어다가, 이것을 「박가분(朴家粉)」이라는 이름으로 내다 팔기 시작했다.
박장일이 굳이 이 백분을 만들기로 작심한 것은, 백분이 황성부 조정에서 영주도독부에서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품목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금지하는 품목이라고 실상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좀체 인가를 받기가 쉽지 않았을뿐더러, 대도독이 잘못 부임해서 평의회와 알력을 일으키게 되면 온갖 덤터기를 쓰기 딱 좋은 것이 금산품목(禁産品目)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여기에는 방직물(紡織物), 차(茶), 인쇄기(印刷機) 따위가 폭 넓게 포함되어 있었고, 박장일은 그런 품목들을 피해서 백분을 택한 것이었다.
아직 납 중독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던 때였고, 더군다나 효능 좋은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기에, 영주도독부 일대에서 이내 박가분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1만 갑이 팔려 나갈 정도로 성황이 되자, 이내 박장일의 재산도 크게 불어났다.
8천 냥으로 시작한 자본금이 서너 해가 지나가자 거의 15만 냥 가까이로 늘었던 것이다.
박장일은 그 돈을 어업에 재투자해, 「흥해백분사」와 완포의 어업기지를 같은 회사로 묶어서 「흥해실업」을 창설했다.
이내 박장일에게 돈줄이나 꾸어 보려고 그의 집 문전이 성시를 이루게 되었고, 박장일이 하는 일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 사람도 줄을 섰다.
박장일은 무리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돈을 운용하면서, 광산 개발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석탄(石炭)이나 철광(鐵鑛)을 확실히 채산성이 있는 광물이었고, 혹여 구리 광산이라도 괜찮은 노릇이었다.
동령대간의 골짜기마다 사람을 보내 광산을 탐색하게 했고, 이내 성과가 있어 맥이 깊은 철광 하나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곳에서 철광을 캐다가 박장일은 철괴를 주조하는 공장을 차렸다. 이내 석탄광과 구리 광산도 개발이 되었고, 여기서 나온 수익으로 박장일은 정안도의 금맥 찾는 일에 사람을 투입했다.
자금과 인력이 대규모로 동원이 되자, 그렇게 터지지 않을 것 같던 금맥도 3년 만에 결국 박장일의 손에 들어왔다.
박장일이 광산업에 손을 대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도입한 기계적 채굴 방식이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요동의 무순 탄광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화력식 증기기관을 즉각적으로 도입해 왔다. 그는 이것을 복제하여 자신이 소유한 각 광산에 도입시켰고, 개량 끝에 당시 광산에 차 있는 물을 배수하기 위한 증기기관으로는 최고 수준의 능력인 60마력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와 함께 그는 탄광에 궤도(軌道)를 부설하여 말이 끄는 광차(鑛車)가 채광된 원석들을 밖으로 실어 나를 수 있도록 했다.
박장일은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다양한 사업에 재투자하기를 반복했다.
더러는 실패하고, 더러는 성공해서 어업, 화장, 광업, 제지 등의 몇 가지 사업이 유례없이 번창하게 되었다.
박장일이 영주도독부에 정착한 지 십오 년쯤 지나서는, 영주도독부 전체에서도 박장일과 자본을 겨룰 만한 사람이 몇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박장일은 이 재력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영주 척식평의회에 입회할 수 있었고, 정계에 쌓은 인맥을 통해서 정치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박장일과 같은 영주의 실업가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내지에서 부과하는 각종 법령들이었다.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황성부 의회는, 내지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상 영주도독부를 식민지 취급하고 온갖 불공정 무역을 강요했다.
영주도독부에서는 내지의 산업곽 경쟁이 될 만한 물건을 생산할 수도 없었고, 그저 원자재를 수출하고 내지의 제조업자들이 생산한 물품을 사들이는 시장으로서의 역할이 강요되었다.
물론 영주의 자본가들은 이런 법령에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당연히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박장일은 영주 대학에서 듣고 배웠던 자유주의적 사상을 영주의 지식인층에 전파하는 한편, 손해를 볼 줄을 알면서도 출판업에 뛰어들었다.
한 세기 전 세워진 영주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사인 「창주박문서관」을 인수하여 연합왕국, 요동, 그리고 북해도독부 등지에서 출간된 자유주의 사상을 담은 서적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장일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독립지향적인 정치관을 지닌 영주도독부의 유지들과 지식인들의 「남령사(嵐零社)」라는 교우 단체를 설립하게 된다.
반쯤은 공식적이고, 반쯤은 비공식적인 이 단체는 이내 영주에서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훗날 영주도독부가 독립을 향한 일보(一步)를 내딛게 하는데 강력한 인적, 사상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한제국 연대기 1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