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권-제67장 서전공주(瑞典公主) (68/82)

제67장 서전공주(瑞典公主)

「봉천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의 혼인은 만대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기에 1백 채의 수레로 예를 치렀다. 생각건대, 나라의 근본은 짐에게서 나오고 교화의 근본은 배필에게 기초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장가드는 아들에 대한 글을 기록하였으니, 중대한 사명은 종묘를 받드는 데 있다고 하였고, 《시경(詩經)》에서는 시집가는 딸의 덕행에 대한 노래를 읊었으니, 풍화(風化)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나라에 확대된다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옛 성왕(聖王)이 같이한 바이니, 어찌 우리 제실(帝室)의 예법만 그러하겠는가?

……이것이 어찌 한 사람만의 사적인 기쁨이겠는가?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경사를 즐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혼조령(國婚詔令)〉, 1744년.

1741년

홍문(弘文) 3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황성부

황제는 젊었다. 선황 천통제가 뒤늦게 본 아들은 부황의 때 이른 죽음에 뒤이어 즉위했을 때 겨우 열여섯이었다.

제국의회는 젊은 황제의 등극을 축하했지만, 열여섯 어린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의회에서 결의한 사항에 대하여 인준 도장을 찍어주는 것뿐이었다.

이 어린 황제, 홍문제(弘文帝) 이혈은 그의 자리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특별히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의회에서 매년 계상(計上)하여 주는 황실의 내탕금은 족하다 못해, 홍문제가 사치를 부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 돈으로 홍문제는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가 황제에 등극하자마자 처음 한 일은, 바로 이궁(離宮)이었다.

수많은 전각들과 누각(樓閣)들, 그리고 첩첩이 둘러싸인 벽들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경복궁은 젊은 황제의 마음에 통 들지 않았다.

300년은 훌쩍 넘은 오래된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 외따로 앉아 드문드문 오가는 내관들의 그림자만 쳐다보고 있자니 울증(鬱症)이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의회가 황권과의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뒤로, 날개가 꺾인 후대의 황제들은 경복궁을 선호하지 않았다.

예전, 이 장엄한 궁궐은 제국의 심장이었고, 강력한 황제의 위상을 과시하는 하나의 기념비적인 건축이었다.

그러나 폐제 이휼이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하고, 의회에 의해 허수아비 황제가 세워진 뒤로, 경복궁은 그들에게 걸맞지 않게 되었다.

신료(臣僚)들이 입조하지도 않고, 궁궐에는 비빈(妃嬪)과 내관들만이 쓸쓸하고 넓은 궁궐에 남게 되자, 더 이상 이 경복궁에서의 생활을 견뎌내는 황제는 없었다.

서양에 깊게 매료되어 있었던 전 전대 황제이자 홍문제의 조부인 건희제는 경운궁(慶運宮)에 서양풍의 석조전(石造殿)을 짓고 그리로 옮겨가 살았었다.

머리를 깨끗이 밀고 연합 왕국에서 수입한 화려한 가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서는, 모피 코트와 자수정이 박힌 왕홀을 들고 이 석조전을 거닐었었다.

저잣거리에서는 이 건희제의 별난 취향에 대해서 쑥덕거렸지만, 그에 대한 관심도 고작 거기까지였다. 건희제는 죽을 때까지 경운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천통제는 창덕궁(昌德宮)에 틀어박혔다.

건희제와는 다르게 완전히 국수적인 심미안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영(造營)된 창덕궁의 은밀한 궁중들 사이에서 사람들을 별로 마주하지 않고 지냈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창덕궁의 비원(秘苑)을 가다듬는 일에 신경을 썼는데, 그 면적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진귀한 나무를 들여와 3만 그루가 넘었고, 조그마한 언덕과 연못, 그리고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만 누각들을 지었다.

이 비원에는 그를 비롯한 매우 소수의 인원들만이 출입이 허용되었다.

부황과는 떨어져서 홀로 경복궁의 동궁(東宮)에서 기거하고 있던 이혈은, 황제에 등극하면 언제고 다른 궁궐로 옮기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 답답한 구중심처(九重深處)에서 외롭게 자라난 홍문제는 황제에 등극하자, 미련 없이 경복궁을 버리고 할아버지가 조영한 경운궁의 석조전으로 옮겼다.

황제의 취향을 굳이 따지자면 부황보다는 조부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경운궁 석조전으로 옮겨온 지 만 2년, 황제는 이곳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다.

때로 경운궁 바로 지척의 정동(貞洞)에 들어와 있는 외교사절들을 불러다 만찬을 열기도 하고, 제국의 황제들 중에는 최초로 무도회(舞蹈會)를 열기도 했다.

꼭 놀기만 한 것은 아니고, 석조전 바로 지척에 제실장서관(帝室藏書官)을 조성하고 그간 황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과 문화재들을 한데 모았는데, 요동의 어립장서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유유자적하는 생활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실권 없는 황제라지만, 이런 느긋한 생활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에게도 주어지는 의무가 있었다.

홍문 3년 어느 봄날, 궁내부 대신이 황제에게 알현을 청하였고, 황제는 석조전에서 그를 맞이했다.

황제가 궁내부 대신을 불러들인 석조전의 3층에는 널따랗고 긴 복도를 따라 역대 황제들의 초상(肖像)이 차례대로 걸려 있었다.

태묘(太廟, 종묘)에 봉안(奉安)되어 있는 진영들을 모사하여 유화로 새롭게 그린 이 초상들은, 예수회 출신의 선교사로 입국하여 궁정화가(宮廷?家)의 지위를 얻은 낭세령(郎世寧)이 그린 것들이었다.

“석조전에 걸린 역대 황제 폐하들의 초상의 그림이 대단히 뛰어나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놀랍기가 짝이 없군요.”

궁내부 대신 박문수(朴文秀)가 감탄이 담긴 눈으로 황제의 초상들을 보며 말했다. 그는 의회에 의해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된 지 이제 겨우 한 달에 불과했고, 처음 직임을 맡을 때 황제를 알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황제와 독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린 황제는 이 중년의 기품 있는 대신이 괜히 멋쩍어서 그림을 핑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림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렇게 거창할 정도의 명작은 아니었다.

한국화의 재료로 서양풍의 그림을 그려내는 낭세령의 창작 방식은 신선한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카스틸리오네의 그림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공이 그렇게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낭 화공의 본명이 카스틸리오네입니까?”

“본디 출신이 밀라노로, 본명이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라 들었습니다.”

“가까이 두시고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양입니다.”

“종종 그를 불러 그림도 배우고, 담소도 나누고 있소. 벼슬이 높은 이들은 좀체 궁궐문턱을 밟지 않으니, 한가한 화공들이나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내 취미입니다. 좌우지간 그림 이야기는 그만하고, 짐을 찾아온 용건이나 이야기해 보세요.”

황제는 날카로운 말투로 박문수에게 본론으로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황제는 궁내부 대신이 직접 알현을 요청한 것이라면 만만찮은 일을 들고 왔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자신의 조용한 생활을 방해할 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었으나, 궁중에서 나고 자란 그의 신경만큼은 예민하게 돋아나 있었다.

“신이 오늘 폐하를 뵙고자 주청을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혼사 문제 때문이옵니다. 이제 보령이 벌써 열여덟이시니 황후를 정식으로 맞아들이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 저희 신료들의 생각입니다.”

“언제고 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알고 있었소만, 지금 시점에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표정을 잘 바꾸지도 않는 황제였으나, 궁내부 대신이 들고 온 이야기에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슬슬 혼사를 치르라고 재촉이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의회에서 궁내부 대신을 밀어세우며 독촉할 것이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미 정략적인 이유로 자신의 배필을 이미 의회의 늙은이들이 결정해 두었다는 말일 터였다.

“어느 대신이 이런 심심한 궁궐에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합니까?”

아무리 실권 없는 황제라고는 하나, 제실과 혼사를 맺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었다.

적어도 적잖은 명예를 가질 수 있었고, 황제의 장인이 되기만 해도 부원왕(府院王)의 작위를 받아 종신토록 추밀원에 들어가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 상원의장)을 겸직할 수 있으니 이만한 결혼 상대가 없는 셈이었다.

“그게, 이번에는 외국과 통혼을 맺게 될 것 같습니다.”

“외국이랑 통혼이라뇨?”

고려 때에는 몽골 황실과의 통혼이 빈번했으나, 조선이 건국된 이래로 황제나 제실의 후계자의 배필은 반드시 작위가 있는 왕공족(王公族) 안에서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심심찮게 바깥 핏줄이 섞인 요동왕가와는 다르게, 제국 황제의 통혼은 철저하게 국내정치적인 요인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황제의 권력이 추락했다지만, 외국과의 통혼을 의회에서 권유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스웨덴의 왕녀를 심중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황제의 낯빛이 변했다. 뜬금없이 찾아와서 외국 여인과 결혼을 하라니 어이가 없어도 유분수였다.

박문수는 말없이 조그만 초상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왕녀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웨덴의 왕녀는 아니고 오스트리아 대공녀입니다. 올해 나이 열일곱입니다.”

초상 속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자 한 명이 그려져 있었다.

생기 있게 붉은 얼굴에는 기묘한 기품이 서려 있었고, 맑은 눈동자는 정면을 당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단아함과 도발적인 매력이 동시에 그림 속에는 담겨 있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서양에서도 그 미모가 소문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홍문제 이혈은 박문수가 보내준 초상을 보고, 처음에는 감탄했으나, 이내 눈동자에는 쓸쓸함이 깃들었다.

황제의 반응에 의아해진 박문수가 물었다.

“폐하?”

“미모가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고, 그런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저기 카스틸리오네의 그림들을 보세요. 박 대신께서도 선황 폐하의 용안을 기억하시지요? 그림 속의 부황께서는 준마에 당당하게 갑주를 입고 올라 훌륭한 풍채를 자랑하고 계시지만, 사실 늘 무기력하게 창덕궁 비원에서 난이나 치고 계셨지요. 그림 속의 외모에 반해 황후를 천만리 밖에서 불러 온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못되고 슬픈 일입니까. 풍습과 언어도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요. 그마저도 그림이 진실된 것인지도 모를 노릇이구요. 아마 스웨덴국 국왕 전하께도 따님을 시집보낼 상대라며 내 초상을 그럴싸하게 그려서 보냈겠지요? 모두 그렇게 이미 결정된 겝니까?”

“이 혼사는 쉽게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현 스웨덴의 국왕이신 칼 13세 전하께서는, 본래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삼 년 전에 스웨덴 왕가의 유일한 후손인 울리카 엘레오노라 공주 전하와 혼례를 치르고 스웨덴의 정식 국왕으로 지난해 등극하셨습니다. 칼 전하는 울리카 엘레오노라 전하와 결혼하기 이전의 비 전하와 사별을 하셨는데, 그 사이의 외동딸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이십니다.”

홍문제는 말없이 박문수에게서 등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봄비가 말없이 추적추적 땅을 적시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정원의 잔디들은 오랜만의 비를 흠뻑 들이마시고 있었다.

“비가 이리도 오니 돌아가는 길이 힘드시겠습니다. 더 비가 짙어지기 전에 길을 서두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의 불편한 심중을 눈치챈 박문수가 꾸벅 예를 표하고서는 재깍 물러났다.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진척을 볼 일은 아니었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다음에 또 보지요.”

박문수가 물러가는 길에도 황제는 그에게 눈을 맞추지 않았다.

관복 위로 검은색 가죽 우의를 뒤집어쓰고 석조전을 나가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정원 바깥으로 가기 위해 걸어 나가는 박문수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황제는 복도의 한쪽에 걸려 있는 종을 울려 내관을 불렀다.

“화공 낭세령을 불러오라.”

황제의 명령에 내관은 명을 받잡고 카스틸리오네를 불러들였다.

낭세령―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경운궁 바로 좌편의 제실도화국(帝室圖畵局)에서 그림을 그리고 화생(畵生)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가, 황제의 부름이 있으면 언제고 달려오곤 했다.

거리가 지척이라 내관이 그를 부르러 간 지 채 일다경(一茶頃)이 지나지 않아 그는 황제 앞에 입시했다.

황제는 조용히 손짓으로 그를 응접실로 불러들이고서는, 나머지 사람들을 물렸다.

“궁내부 대신 박문수가 들어와서 날더러 스웨덴 공주랑 결혼하라는군. 이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인가? 도대체 의회의 의원과 내각 대신들의 꿍꿍이를 알 바가 없군. 하도 답답해서 그대와 상의를 해볼까 해서 불렀네.”

예수회 수사이자 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郎世寧]는 마르고 키가 훌쩍 큰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맞은편에 조심스레 앉고서는 황제의 용색을 살폈다.

이 조심스러운 성미의 신부는 종종 이렇게 마땅한 친구가 없는 황제의 상담역을 하곤 했다.

그는 본래 밀라노 공국(公國)의 산 마르첼리노(San Marcellino) 출신으로, 카를로 코르나라(Carlo Cornara)의 문하에서 건축 및 회화를 배운 다음에, 예수회에 입문하여 신부가 되었다.

이미 그 화가로서의 명성이 유럽에 알려진 뒤에, 그는 예수회의 명을 받아 최근에야 선교 입국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제국의 내지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경운궁에서 머지않은 명동에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을 건축하는 일과 그 내부의 회화 작업을 맡아서 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궁내부 관리들에 의해 이곳 석조전에 걸기 위한 역대 황제의 초상을 의뢰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황태자였던 현 황제 이혈과 안면을 트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황실에 딸린 일종의 예술학교이자 그림공방인 제실도화국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 뒤로 이혈이 황제가 되어 경운궁으로 옮겨 오자, 종종 황제의 말상대 노릇을 해주며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종의 황제의 친구 역할도 하는 궁정 화가인 셈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라면 그 미모가 매우 뛰어난 여자라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배필을 구할 나이가 되었다고 하던데, 설마하니 폐하께 시집을 보내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잖아도 보내온 초상은 보았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그저 보기에 즐거운 것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선은 마음대로 결정한 뒤에 내게 그저 통보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고, 둘째로는 워낙 전례 없는 일인지라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좋은 결혼이 될까 하는 걱정이 드네. 이것이 꼭 궁내부 대신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불쾌하고 우려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사실이네. 더군다나 내 모후께서도 이미 일찍이 돌아가셔서, 황실에 이런 일을 중재해 주실 어른이 없다는 것이 더욱 쓸쓸하기 짝이 없네.”

궁녀가 내온 찻잔을 조심스레 들이키며 카스틸리오네는 황제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가 보기에 홍문제는 자신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부황과는 창덕궁과 경복궁에 동떨어져 지내며 별다른 부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고, 모후는 일찍이 세상을 떠서 모정이라는 것도 별로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쓸쓸한 궁궐에서 내관과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답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나이답지 않게 성정이 냉철하고 메마른 면이 있었다.

그러니 만큼 카스틸리오네는 황제가 배필을 잘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황제에게 가장 좋은 배필이 될 수 있을지는 그 또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유럽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왕후세가의 일들과는 전연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는 카스틸리오네로서도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다만, 스웨덴과 한국이 이 결혼을 논의하게 된 배경으로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소신 또한 벌써 유럽에서 떨어져 이곳 한국에서 지낸 지가 거의 십오 년에 이르는 노릇이라, 귀가 어둡고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지 못하나, 이 혼사가 논의되기 시작한 이유는 집히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가? 한 번 말해보게.”

“현 스웨덴의 국왕이신 칼 전하께서는 이번에 결혼 동맹을 통해 새롭게 스웨덴 국왕에 즉위하시게 되셨지요. 이로서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스웨덴 왕국은 단단히 결속하게 되었고, 국력은 신장되었을 겁니다. 이 결혼 동맹의 목적은 자명합니다. 바로 폴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지요. 듣기에는 이것이 결실을 보아 스웨덴령 북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보헤미아 왕국을 손에 넣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국력 신장은 자연스럽게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지요. 여전히 폴란드는 스웨덴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고, 전통적으로 스웨덴, 네덜란드, 영불 연합 왕국 사이에서 유지되던 세력 균형은 최근에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해 네덜란드가 뚜렷이 몰락하고 영불 연합 왕국이 급격히 신장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북해의 패자로 등극하게 된 스웨덴이라고는 하나, 폴란드와 연합 왕국 사이에서 활로를 찾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지요. 아마 스웨덴의 칼 국왕은 네덜란드의 빈자리를 메우며 연합 왕국과 제해권전쟁을 할 겁니다. 혹여라도 폴란드와 연합 왕국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어 스웨덴을 압박하기 시작하면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할 터인데, 유럽 안에서는 결정적으로 스웨덴의 손을 들어줄 만한 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아라곤 왕실은 지금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내전 중이고, 네덜란드는 이제 이빨 빠진 사자이지요.”

“그래서 동방무역의 제해권을 신장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결정적으로 연합 왕국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우리와의 결혼 동맹을 추진하고 있단 말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연합 왕국이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나 신대륙의 경우에는 한국에서도 오랜 진출 역사가 있고, 연합 왕국이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스웨덴과 한국, 그리고 세가 많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네덜란드의 삼각 동맹에 의해 행동이 제약되겠지요. 스웨덴으로써는 이 혼인 동맹이 성취되면 잃을 것은 전혀 없고, 얻을 것만이 있습니다. 한국으로써도 마찬가지지요. 송구한 말씀이오나, 옛 영광에 비해 폐하의 제국은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든 상황입니다. 이러한 강고한 동맹 없이는 떠오르는 무력인 연합 왕국의 함대를 동인도에서 견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지요. 때문에 전례 없는 동서 간의 통혼을 통한 결혼 동맹으로 이 위기를 뚫어보자고 스웨덴과 한국 사이에 논의가 오갔을 겁니다.”

이 결혼 동맹이 도출되게 된 국제적 정세는, 거슬러 올라가면 카스틸리오네의 말마따나 매우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이 한창 황권과 신권과의 줄다리기 끝에 내전의 수순을 밟고 있던 17세기 초반, 유럽에서는 1609년부터 1649년에 걸쳐서 소위 40년 전쟁이라는 전례 없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당초에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신, 구교 간의 충돌로 시작된 전쟁이었으나, 이내 각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전쟁에 휩쓸렸고, 그 결과 전쟁 후에는 새로운 전후 질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당초 전쟁이 시작된 계기는, 바로 보헤미아의 국왕직을 겸임하고 있던 구교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에 대해 보헤미아의 신교 제후들이 반발하면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의 모든 세력이 뒤엉킨 이 전쟁의 종말은 합스부르크 패권의 종식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오스트리아 대공직과 유명무실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를 제외하고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이미 사실상 독립국이었던 스위스 연방과 네덜란드가 전쟁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에서 떨어져 나갔고, 보헤미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제국 내의 제후국들이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됨으로 인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장식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존심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베네치아를 공격해 해상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완강한 베네치아의 저항과 그들의 동맹인 헝가리 왕국의 개입으로 인해 사태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국고만 탕진한 채 오스트리아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다시 반전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지금은 스웨덴 국왕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된 칼 13세였다.

그는 당초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유명무실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일찌감치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공녀와 결혼하여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두고 있었으나 아들은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낳은 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대공비는 산욕열(産褥熱)로 죽고 만다.

대공비의 죽음에 비통해 할 겨를도 없이, 대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주요 보루인 카스티야의 계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절치부심하던 차에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 바로 스웨덴이었다.

스웨덴 팔츠 왕조(Pfalziska tten)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칼 12세(Karl XII)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인 울리카 엘레오노라(Ulrika Eleonora)가 유일한 상속자였다.

칼 12세는 당시 발트해의 제해권과 북독일의 지배권을 놓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 격렬한 전쟁 중이었고, 결국 왕국의 상속권을 걸고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이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아내를 잃고 사면초가에 처한 오스트리아 대공 칼이 스웨덴 왕국의 상속자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재혼하여 아드리아해에서 북극에 이르는 하나의 권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장인 칼 12세의 뒤를 이어 칼 13세로 등극하였고, 폴란드와의 전쟁 끝에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재확립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웨덴과 보헤미아의 국왕 및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지는 동시에, 안정된 제국을 수립하기 위해 그는 연합 왕국을 견제하고 인도양 및 신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할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재혼한 울리카 엘레오노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이나 두었기에,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스웨덴―오스트리아의 확장을 지원할 결혼 동맹을 이룰 주요한 카드였다.

처음에는 유럽 내에서 먼저 아라곤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거론되었고, 나중에는 포르투갈, 헝가리, 심지어 반쯤은 적국인 덴마크까지 거론되었지만, 거대한 해양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연합 왕국을 견제하기에는 모두 부족한 카드들이었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을 칼 13세에게 추천한 것은, 스웨덴 궁정에 초청되어 와 있던 볼테르였다.

딸을 기독교 국가도 아닌 먼 타국에 시집보낸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던 칼 13세였으나, 거국적인 전략에서 허황된 소리가 아님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전 세계는 사실상 유럽의 몇몇 국가들과 극동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분할되어져 가고 있었는데, 유럽과 대서양에서 떠오르는 제국이 바로 영불 연합 왕국이었으며, 극동과 태평양에서 비록 쇠락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제해권을 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이었다.

칼 13세가 보기에 이 무자비한 영불 연합 왕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스웨덴과 극동의 한국이 결탁하여 영불 연합 왕국의 인도양 진입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에 네덜란드를 끌어들여 연합 왕국을 견제하게 하고, 유럽에서는 헝가리와 러시아로 하여금 폴란드를 묶어두게 한다면, 스웨덴은 자유롭게 해양 제국으로 비상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직접 칼 13세가 보낸 밀사가 네덜란드 선편으로 한국 내각에 비공식적인 접선을 넣었고,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확실한 동맹으로서의 보증이 가능하다는 계산에 다다르자 한국 의회도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아마 이 세기의 결혼의 지참금은 나상의 개척으로 제국령에 편입되었던 인도양의 소코트라 섬, 즉, 숙주도(宿州島)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상 한국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무가치해진 이 섬을 인도양에 거점을 확보하기 원하는 스웨덴에게 넘기고, 한국의 인도양 거점은 거대한 중계무역항인 말레이 반도의 상남에 집중시키는 것이 제국 경영에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결혼에 당사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의회가 궁내부 대신을 통해 거의 일방적으로 황제에게 통보를 한 것부터가, 홍문제로서는 비위가 상할 만도 한 노릇이었다.

“이건 그래도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

어느새 차는 식어 있었다.

홍문제는 거의 차를 한 모금도 들지 않고 있었다.

카스틸리오네는 자신의 잔만 비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괜히 멋쩍어졌다.

그러나 황제는 찻잔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멀리 창 밖으로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정 그러하시면, 먼저 서신 교환이라도 해보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아직 이야기가 막 나온 단계이니 설사 결혼이 성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그때까지 족히 서너 해는 걸릴 겁니다. 이 참에 독일어나 스웨덴어도 배워 보시고,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에게도 한국어를 익혀보라 권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바다를 건너 편지가 오고 가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릴 터인데?”

“글쎄요. 빠른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가는 데 한 달 반, 오는 데 한 달 반, 이렇게 석 달이면 되는 방법이 있지요. 저도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요동국에서 최근에 성업하는 우편마차가 황성부에도 들어옵니다. 이 우편마차를 통해서 요동국 성경으로 편지가 도착하면, 이곳에서 요동 상인들의 손에 의해 북륙 저 너머까지 정기적으로 이송됩니다. 대륙을 관통한 뒤 러시아 상인들에게 이 편지가 넘어가면, 이것이 다시 스웨덴으로 보내져서 유럽 각지로 흘러들어 갑니다. 배를 통해서 보내는 것보다 매우 비싼 값으로, 철저히 상인들의 인편에 의존해서 보내야 하지만, 설마 폐하께서 그 편지 값을 걱정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괜찮은 방법이지요.”

“별 희한한 방법이 다 있군.”

“한 번 공주와 편지로라도 말씀을 나누어 보시면 어쩌면, 생각이 조금 더 달라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카스틸리오네의 말에 홍문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국 이 혼사마저도 내가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각의 대신들이 권한다면 내가 막아설 방법이 있겠는가.”

1741년

홍문(弘文) 3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황성부

황제가 결혼 문제에 대해 확답을 내려주지 않은 상황에서, 의회는 이미 스웨덴과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외부 대신 고회신(高會信)과 궁내부 대신 박문수를 필두로 하여 전례위원회(典禮委員會)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741년 여름에 스웨덴에서 파견된 특명전권대사 칼 구스타프 테신(Carl Gustaf Tessin) 필두의 사절단을 직접 최근에 새롭게 수도의 입항지로 조성된 제물포에서 맞아 들였다.

결혼 문제에 대하여 석 달이 넘게 확답을 내려주지 않고 있던 홍문제는, 의회가 스웨덴에서 특명전권대사까지 파견되었다는 것을 들어 압박을 넣자, 금명간에 전권대사 칼 테신을 직접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해 왔다.

칼 테신은 스웨덴의 유명한 바로크 건축가인 니코데무스 테신(Nicodemus Tessin)과 스웨덴 백작가의 영애인 헤드비그 엘레노오라 스텐보크(Hedvig Eleonora Stenbock) 사이에서 태어난 출중한 스웨덴 정치가로,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와의 결혼 동맹에 깊게 관여하고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6세를 스웨덴 국왕 칼 13세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는 당대 스웨덴에서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고, 볼테르와 같은 프랑스인을 스웨덴 궁정에 소개하는 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탁월한 정치인이자 연설가인 칼 테신을, 스웨덴 국왕 칼 13세는 딸의 혼사 문제를 책임질 인물로 선발하여 막중한 임무를 맡겨 먼 동쪽 끝까지 보낸 것이었다.

테신은 제물포에서 예포(禮砲)와 군악대에 의해 영접을 받고 바로 경인가도를 통해 한국 정부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수행단과 함께 황성에 입경(入京)했다.

그들의 숙소는 숭례문 바로 안쪽에 있는 「제국영빈관(帝國迎賓館)」으로 정해졌다.

널찍한 방과 한국에서는 그다지 선호되지 않는 침대까지 갖추고 있는 이 숙박 시설은 지은 지 30년쯤 된 건물로, 당시로서는 가장 최고급의 국빈급 손님들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Comment pensez―vous de S oul, l’ambassadeur?(서울은 어떠십니까?, 대사 각하.)”

그날 밤 영빈관에서 마련한 만찬에서, 외부 대신 고회신은 능숙한 프랑스어로 테신에게 물었다.

제주 고씨 출신으로, 외교가에서는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국초에 명나라와의 종전 교섭을 맡았던 고봉지 이래로 이들 가문은 외교계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

고회신 또한 일찌감치 외학원에서 서양어를 전공하여, 프랑스어 및 영어와 라틴어에 능통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일찌감치 관가에서 탁월한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이내 얼마 전에는 외부 대신으로 영전(榮轉)되었는데, 이번의 스웨덴과의 결혼 동맹의 성사 여부가 그의 관료 경력의 성패를 가늠하게 될 터였기에, 모든 신경을 여기에 쏟고 있었다.

“Vous m’a tonn ! Vous parlez tr s bien fran ais. Je pense que S oul est l’un des plus belle ville du monde.(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어가 정말 유창하시군요.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도시 중 하나 같아요.)”

칼 테신은 깔끔한 발음의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고회신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소통에 문제가 있을까 싶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스웨덴 외교관을 두 명이나 동행시킨 차였다.

그런데 직접 불어로 상대측 외부 대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분위기가 한껏 밝아지자 칼 테신은 평소의 유명한 입담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정말 빈말이 아니라 놀랐습니다. 런던, 파리, 빈……. 여러 도시를 돌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잘 정비된 도시는 처음 봤습니다. 역시 유서 깊은 제국의 도읍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 한번 저희 측에서도 스톡홀름을 방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한 번 오셔야지요. 서울만은 못해도 발트해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도시입니다. 서늘한 여름에 오시면 교외의 저희 별장으로 한 번 초청하지요.”

“꼭 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만찬은 직접적으로 외교적 사안을 논의하지는 않고, 그저 즐거운 분위기에서 서로의 친분을 다지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의 외교 관례란 으레 그러한 것으로, 공식적이고 대외적으로 외교 사안을 발표하는 것도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당사자 간의 합의 뒤에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비밀 외교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전문적인 외교관보다는 대체적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귀족 출신의 정치인들이 외교 사안을 논의하러 각국을 순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러한 논의 과정은 협상장에 마주 앉는 것보다는 무도회나 만찬 등을 통해서 은밀하게 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옛 조공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한국의 패권도 내리막을 걷고 있는 지금, 어느 정도 수평적인 관계가 수립된 동양의 나라들은 엄격한 격식에 따른 외교 협상보다는 신중하고 지속적인 접촉을 더욱 선호했다.

황성부 정동에는 요동과 유구에서 온 고등판무관뿐만 아니라, 일본, 양, 월 등의 나라에서 주차대사(駐箚大使)를 주재시키고 있었다.

3년 전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에서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대사가 파견되어 정동에 대사관을 연 상황이었다.

정동을 중심으로 한 외교가에서 본국 정부의 훈령을 받은 대사들이 수시로 서로 연회를 열고 친분을 도모하며 필요한 정보를 거래하는 장면은 이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흔한 풍경이었다.

“이 참에 일이 잘되면, 상호 대사관을 각국 수도에 설립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에 혼인 동맹을 협상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칼 테신 또한 대사관 수립의 정초 작업을 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상호 동맹이 결성된다면, 서로 간에 대사를 파견하여 지속적인 연결 고리를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측에서도 이를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머물고 계시는 동안 천천히 한 번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칼 테신의 서울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이틀 뒤 낮이 되자, 그를 한 번 접견하고자 한다는 황제의 초청장이 궁내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국영빈관에 전달되었다.

칼 테신이 온갖 격식을 차린 문장으로 찾아뵙겠다는 응락의 의사를 표시하자, 이내 경운궁에서 바로 준비된 마차가 영빈관 앞으로 당도했다.

숭례문에서 경운궁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걸어서도 일다경 남짓이면 도달하는 거리이니, 마차는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통과해 석조전까지 당도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 가셔야 합니다.”

석조전의 정문 회랑 앞에서 궁내부 관리의 설명을 듣고 칼 테신은 마차에서 내려야 했다.

하마석(下馬石)이 세워진 곳부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

석조전의 내전(內殿)을 둘러싼 회랑형의 건물을 통과하자, 이내 넓은 중정(中庭)이 등장했다.

화려한 조각품과 대리석들로 조영된 이 안뜰을 천천히 감상하며 칼 테신은 발걸음을 옮겼다.

건축가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심미안으로 칼 테신은 궁전의 조영을 평가해 보았다.

석조전의 본궁(本宮)은 널따란 안뜰에 둘러싸여 5층의 바로크양식으로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동서가 절충된 양식의 정원이 아름답고 조성되어 있었다.

이 본궁과 안뜰의 사방을 훌륭한 형태의 장식적인 외궁(外宮)이 둘러싸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석조전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건축된 경운궁의 나머지 건물들과 훌륭한 형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스웨덴 국왕이 기거하는 드로트닝홀름스 궁전(Drottningholms slott)과 비교해서도 뛰어난 매력이 있었다.

그 궁전은 바로 테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 건축을 맡았던 곳이기에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북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궁전 건축으로 칭송받는 그 궁전에 비해서도 이 석조전이 손색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서양풍의 건물을 건조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한국의 건축가들이 서양 건축가들에 비해 전혀 떨어질 것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비록 영불 연합 왕국의 국왕 루이스 2세(Louis II)가 지난 세기에 세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하면 소박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경운궁 석조전은 정궁이 아니라 별궁(別宮)인 셈이니 비교하는 것이 옳지 않았다.

경운궁이 아니라, 제국의 역사가 기둥마다 스며들어 있는 경복궁(景福宮)이야말로 한국의 궁전 건축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정원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서 석조전 내궁에 들어서자 내관이 나와서 칼 테신을 영접했다.

화려한 홀을 통과해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에 도달하자, 스웨덴 대사가 당도했음을 내관이 “입시요!”하는 소리로 알렸다.

이내 황제의 윤허가 떨어졌는지 문이 열리고 대사는 곧 응접실 안으로 안내되었다.

“V lkommen till mitt palats, ambassad r.(내 궁전에 온 곳을 환영하오, 대사.)”

황제가 스웨덴어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자 칼 테신은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설마하니 한국의 황제가 스웨덴어로 자신을 맞이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놀랄 것 없소. 짐이 할 줄 아는 스웨덴 말은 그게 다오. 대사가 당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렵게 몇 마디 배워 보았소. 나머지는 역관의 실력을 믿어봅시다. 어서 앉으시오.”

당황하는 바람에 허둥지둥했던 칼 테신은 정신을 차리고 황제에게 제대로 예를 표했다.

서양과의 외교적 접촉이 빈번해진 이래, 한국의 황제들은 서양 사절을 접견할 때 까다로운 동양식 예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살짝 무릎을 꿇고 황제의 손에 입을 맞추고서는 칼 13세가 직접 보낸 친서를 홍문제에게 전달하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홍문제는 까다롭고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보다는, 최대한 이 스웨덴 대사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외국 사절이 황제와 응접실에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지만, 그 사이 시대는 흐르고, 황제의 권한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젊은 황제인 홍문제는 격식과는 조금 거리가 먼 편이기도 했다.

“먼 곳에서 오느라 아직 피로가 남아 있을 터인데, 이렇게 이곳까지 걸음하라 하여 미안하게 되었소.”

“아닙니다. 이렇게 초청하여 주신 폐하의 친절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소탈하다고는 하나, 황제는 황제였다.

계몽주의적인 절대군주가 직접 전제 권력을 행사하는 스웨덴과는 다르게 한국은 황제가 의회에게 권력을 내어 준 지 오래이기는 했다.

그러나 제국의 상징으로서 황제가 지니고 있는 위엄과 가치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칼 테신은 이 젊은 황제에게서 매우 긍정적인 첫인상을 받았다.

시원한 눈썹과 오뚝한 콧날이 매우 잘생긴 남자였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미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떠난 수려한 미남이었다.

곧게 뻗은 등의 위로는 널찍한 어깨가 있었고, 키 또한 꽤 큰 편이었다.

족히 5.7피트(175cm)는 되어 보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시의 남자들의 평균적인 키가 5.3피트(162cm)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홍문제는 신체적으로 전혀 흠잡을 데가 없이 탁월해 보이는 인물임에는 분명했다.

칼 테신이 높은 구두를 신고 황제 앞에 섰음에도 황제의 키가 조금 더 컸을 정도였다.

“한국 정부에서 보내온 폐하의 초상을 뵈었을 때 매우 헌앙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그림이 오히려 다 담아내질 못한 것 같습니다.”

“과찬이시오. 내 궁정화가인 밀라노 사람 카스틸리오네가 아마 그 그림을 그렸을 것이오. 내 초상은 그에게 맡겼던 것이 전부이니, 다른 그림일 리는 없지. 카스틸리오네가 못난 얼굴을 억지로 그럴싸해 보이게 그리느라 고생이 많았소.”

입바른 아부를 에둘러 잘라 내고 나서, 홍문제는 칼 테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대사께서는 내 혼사 문제를 아국 정부와 논의하기 위해 입국하셨다고 들었소.”

“예.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아직 폐하께서는 비답을 내려주시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폐국을 대표해서 귀국에 온 저는 물론이거니와 폐국의 국왕 전하로부터 신민들에 이르기까지 이 혼인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앙망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야, 찬성하는 자도 있고, 반대하는 자도 있지 않겠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어찌 생각하고 있느냐가 아니겠소? 내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서, 만약 아국 정부가 날더러 수만 리 떨어진 귀국으로 시집가서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라고 한다면, 아마 심경이 복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오. 나야 이곳에서 신부를 맞아들인다고는 하지만, 과연 귀국 공주는 어떠할지 모르겠소.”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께서는…….”

칼 테신은 입에 침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예상치 못했던 황제의 이야기에 당황한 탓이었다.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지배층에서 정치적인 이유를 배제하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결혼을 논하는 것은 전혀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칼 테신이 생각하기에는 황제나 공주나 그것이 이득이 된다면 이 결혼을 망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앞에서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담담하게 이 결혼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시집을 가겠노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웨덴의 국왕이시며 오스트리아 대공이신 부왕 전하의 뜻에 따르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럴 리가.”

칼 테신의 말에 황제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는 어찌 왕족 출신이 아닌 그대가 공주나 자신의 마음을 알겠느냐는 비아냥이 어쩐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칼 테신은 괜히 속마음이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주께서는 필히 이 결혼을 기꺼워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지. 아마 나나 그녀나 이 결혼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이니 말이오. 남들의 위에 서 있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 그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이 적지 않으니 말이오. 물론 나는 귀국의 국왕 전하처럼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니 더욱 쓸쓸한 형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황실의 어른들이 이 결혼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회와 내각에서 결정해서 이를 내게 통보해 준 것이 전부이니 말이오. 결혼을 하라면 해야겠지.”

“폐하…….”

황제의 푸념에 칼 테신은 잠시 말을 잊었다.

역관이 적당히 황제의 약간은 날카로운 비난을 에둘러 조금 완화해서 테신에게 전했으나, 황제가 어떤 기분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칼 테신은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기왕 해야 될 결혼이라면, 짐은 그리하도록 하겠소. 그래서 겸사겸사 스웨덴어도 배워볼까 하오. 아닌가, 공주는 오스트리아에서 자라나서 독일어를 쓴다고 했소?”

“두 언어 모두 유창하게 쓰십니다. 그 외에도 프랑스어에도 능숙하십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서 학자를 초빙하여 한국어도 배우고 계십니다.”

“그녀도 그리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구려. 나는 마음을 먹었으니, 대신들과 잘 결론을 지어보시오.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내 궁정화가이자 친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를 소개하리다. 함께 정찬을 들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칼 테신은 황제의 권유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742년 중하(仲夏)

스웨덴 왕국 스톡홀름

드로트닝홀름스 궁(宮)

북국(北國) 스웨덴에 짧은 여름이 찾아왔다.

무덥지 않고 선선한 여름철이 되면, 겨우내 긴 추위에 움츠려 있었던 스톡홀름의 거리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발트해의 온갖 물자가 모여드는 스톡홀름 도심지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별장과 피서지가 늘어선 교외에도 삼삼오오 몰려나온 사람들이 여름햇볕을 즐기곤 했는데, 그것은 왕족이 기거하는 드로트닝홀름스 궁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주님. 오늘 같이 날씨도 좋은 날 나가서 같이 햇볕도 좀 쬐고 그러시는 것이 어떠세요?”

드로트닝홀름스 궁의 별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체 이 별채 밖을 잘 나서지 않았다.

그날도 말동무인 비에르네보리(Bjrneborg) 백작가의 영애인 크리스티나가 그녀에게 산책을 권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그냥 이곳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낼래.”

“그래도 앞으로 스웨덴에 계실 날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고향의 정취를 충분히 즐기시는 것이 어떠세요?”

“크리스티나, 내 고향은 오스트리아지 스웨덴이 아니야.”

올해로 열여덟이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그녀의 나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스웨덴으로 건너간 아버지와 떨어져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홀로 지냈었다.

그 후 부친이 스톡홀름으로 불러 옮겨오기는 했으나, 이곳 스톡홀름에서의 생활은 빈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교도로 둘러싸인 스웨덴 궁정에서 유일한 가톨릭신자였다.

아버지는 스웨덴과 보헤미아의 왕관을 쓰는 대가로 흔쾌히 로마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와서도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종교적인 문제만이 그녀가 이곳 스톡홀름에서 별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웨덴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린 이복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의 재혼으로 얼떨결에 스웨덴의 공주가 된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옮겨온 뒤 금방 스웨덴어를 익혔지만, 그녀의 서투른 억양을 두고 궁중의 시녀들까지 입을 대고 있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버지 칼 13세는 그녀에게 매우 극진하게 애정을 쏟았고, 그녀가 불편한 것이 없도록 잘 돌봐주었지만, 국사에 바쁜 아버지를 붙잡고 사소한 불편까지 하소연할 수는 없었다.

말붙일 사람도 별로 없는 이 쓸쓸한 북쪽 나라에서 생활하는 것에 어렵사리 적응했지만, 아직도 말동무는 크리스티나뿐이었다.

“너무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벽을 쌓고 지내시니, 다른 이들이 공주님을 어려워하지 않겠어요. 잘생긴 귀족 청년들이 공주님께 반해서 밤낮을 상사병을 앓아도, 감히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그 동쪽의 먼 나라로 시집가기 전에, 이곳에서 잘생긴 청년들과 말이라도 섞어 보시지 그래요. 그곳 남자들은 눈도 찢어지고 타타르 사람들처럼 생겼다는데.”

쾌활한 크리스티나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말을 별로 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제는 별로 그녀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국 황제 폐하의 초상을 보았는데 충분히 잘생기신 분이야. 그리고 그곳에 가게 되면 여기서 동양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이상하게 볼 텐데, 나부터 그런 편견을 가지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겠니.”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도도 아닌걸요.”

“이곳 스웨덴에서는 나만 구교도야, 크리스티나. 스톡홀름의 드로트닝홀름스나 한국의 궁정에서나 나는 홀로 가톨릭 신자이니 별 차이가 없지 않겠니. 차라리 그곳에는 예수회 수사들이 한국 황제 폐하에게 등용되어 궁정에 상주하고 있다고 하니, 나에게는 그곳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에 크리스티나는 입을 뾰족이 세우고서는 투덜거렸다.

“공주님도 참. 저도 공주님 따라서 한국으로 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냥 이곳에 남는 것이 낫겠어요. 공주님 같이 매정한 분이랑 평생을 어떻게 함께 지내겠어요? 제 말에는 항상 지적만 하시니.”

“네가 따라가고 싶어 해도, 네 부친 비에르네보리 백작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마, 크리스티나. 그리고 너의 우정과 헌신은 항상 내가 고마워하고 있으니 매정하다고 말하지는 마렴.”

“공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아, 참.”

크리스티나는 손뼉을 마주치고서는,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이국적인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낯선 형태였다.

“이게 무어니, 크리스티나?”

“놀라지 마세요. 그 타타르 황제가 보낸 구애 편지랍니다.”

“크리스티나,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네, 네. 어쨌든 부유하고 매우 친절한 황제임에는 틀림없을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어머, 저는 편지 봉투에서 직감했는걸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종이는 유럽의 어느 궁정에서도 보기 힘든걸요. 이 종이 질을 보세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답지 않나요. 더군다나 편지를 이렇게 깔끔하게 스웨덴까지 빠르게 부치려면 매우 많은 돈이 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크리스티나의 말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뜯어보았다.

약간 붉은빛이 감돌게 염색된 부드러운 한지 위로는 정성이 담긴 필체로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일부는 독일어로, 일부는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칼 테신이 귀국하여 공식적으로 황국 황제의 비답도 받았으며, 한국 정부와 혼인 동맹을 완전히 약속했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 황실에서 스웨덴 국왕에게 보내는 각종 폐물과 함께 돌아온 뒤로,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와 한국 황제의 결혼은 조야 간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스웨덴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녀가 먼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는 소리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반대로 스웨덴에서는 국왕의 전처에게서 난 구교도 오스트리아 공주가 스웨덴의 동맹을 위해 한국으로 시집을 간다는 소식에 잘됐다는 분위기였다.

별로 탐탁찮은 공주를 먼 곳으로 시집보내고 스웨덴의 국익을 신장시킬 수 있다면 스웨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보다 수지맞는 거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혼인의 성사 소식이 새어 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영불 연합 왕국의 국왕 리처드 4세가 자신의 어린 10살짜리 왕자에게 마리아 테레지아를 시집보내라고 외교적인 압박을 가해 오는 소동이 있었으나, 칼 13세는 단호하게 이 은근한 요구를 거절했다.

“연합 왕국과 혼인 관계를 맺어서 우리가 이득 볼 것은 하나도 없지. 혹여 내 딸을 빌미로, 나중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승계권을 연합 왕국에서 주장하고 나오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일세. 어차피 런던으로 시집가나, 서울로 시집가나, 내 딸을 앞으로 다시는 보지는 못할 터인데, 차라리 내 딸을 위해서라도 그 비열한 영국인들의 궁정에 시집을 보내느니 한국 황제에게 시집을 보내고 말지.”

이런 소동이 벌어지든 말든 당사자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담담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외모만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머리도 명석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만리타국의 외국 황제와의 결혼이 갑자기 결정되었다고 해서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될 리 만무하지만, 그렇다고 철없는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믿어야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국 황제를 직접 만나보고 온 칼 테신의 말에 따르면, 그만큼 훌륭한 신랑감은 없다고 했다.

나이도 그녀와 별 차이가 없었고, 서양인의 눈에서 보아도 충분히 흠 잡을 데 없이 품위 있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데다가, 부유하고 총명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동양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황제로부터 일반 신민에 이르기까지 의회혁명 이후로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였다.

한국 출신 후궁과의 애정 다툼을 벌일 일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만한 신랑감도 없는 셈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이미 결정된 일인 이상, 담담하게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신분의 여자는 언제고 외국 어디로 시집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장소가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 된 것뿐이었다.

라이던 대학에서 학자까지 초청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가게 될 곳이라면 미리 말 정도는 배워 두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편지를 보고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것이 자신만의 노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국 황제는 적어도 사려 깊은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그녀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직접 익혀서 적은 것이든, 대필하게 한 것이든, 적어도 이 편지를 통해 그녀에게 성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황제의 편지는 거창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인다거나, 그녀의 미모를 칭송한다거나 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하게 되었으니 미리 한국의 관습에 적응하고 오라는 식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말도 없었다.

황제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일상을 편지에서 묘사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독일어를 공부하고, 자신의 궁정화가인 예수회 수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종종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들, 그리고 아침마다 수염을 가다듬는 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것까지 말이다.

“어떤가요. 한국 황제가 공주님의 미모가 아름답다고 어서 시집오라고 편지로 재촉하고 있어요?”

편지에 몰두하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고개를 빼꼼이 들이밀고 물어오는 크리스티나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처음 받아보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매우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만약 그가 크리스티나의 말처럼 허황된 입발림으로 그녀에게 환심을 사고자 했다면, 그녀는 불쾌함을 느꼈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문체로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독일어로.

“아니, 수염을 다듬는 일이 귀찮으시다는데.”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독일어를 읽지 못한다고 지금 놀리시는 거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편지에는 손바닥만 한 그림이 한 장 동봉되어 있었는데,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경운궁 석조전의 그림이었다.

그녀가 시집을 가게 된다면 살게 될 곳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한참을 그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게 어딘가요?”

“한국에 있는 황제 폐하의 궁전이라는구나.”

“그냥 유럽 궁전 같은데요?”

“폐하의 조부께서 유럽풍으로 조영하신 궁전이라는데.”

“아, 기억나요. 칼 테신 경이 한국을 다녀오셔서, 그곳에 드로트닝홀름스 궁전에 못지않은 멋진 궁궐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때는 그냥 허풍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칼 테신 경이 좀 허세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림대로라면 정말 멋진 궁전이긴 하네요. 한국 황제 폐하도 취향이 좀 고상하신가 봐요.”

“커피도 좋아 하신다는데.”

“별걸 다 편지에 쓰셨네요. 그런데 공주님은 커피보다는 홍차를 좋아하시지 않아요?”

“여기서 보다는 그곳에서 홍차를 구하기 쉬울 거야. 실론이 스웨덴보다는 한국에 훨씬 가깝잖니. 온갖 찻잎이 많이 있을 터이니 입은 심심하지 않겠구나.”

“공주님도 답장을 쓰셔야겠지요?”

“그러게. 내 한국어 실력이 폐하의 독일어 실력만큼 될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당연히 답장을 써야지. 펜과 종이를 어디 뒀더라?”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고마워 크리스티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활짝 웃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공주가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웃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정원에는 짧은 여름을 맞아 꽃들이 활짝 만개해 있었다.

1744년

홍문(弘文) 6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황성부

공식적으로 한국과 스웨덴 양국 간에 혼인 동맹이 약속된 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서울과 스톡홀름에는 공식적으로 대사관이 세워지고, 양국에서 파견된 대사들이 상주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숙주도, 즉 소코트라의 지배권을 스웨덴으로 인계하는 것도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대신 한국과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까지의 3국 연합함대는 포르투갈령 고아를 공격하여, 포르투갈 총독의 항복을 받아내고 4국이 고아와 캘리컷을 공동으로 통치한다는 조약문에 서명을 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홍문제와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 사이의 서신 교환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빠르면 두 달, 늦으면 넉 달은 족히 걸리는 편지였으나,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그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각별한 신뢰와 두터운 우정이 둘 사이에 생긴 것은 확실했다.

더 이상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결혼이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바로 양국의 국내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한국으로 시집보낸다는 소식에 오스트리아의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칼 13세는 직접 오스트리아로 다시 가서 귀족들을 만나고 설득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칼 13세가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루터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관계가 소원해졌던 교황은 처음에는 심하게 이 결혼에 대해서 딴지를 걸고 나섰다.

로마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제동을 걸 것이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이내 구교도인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게 됨에 따라서 동방 선교에 얻게 될 이득을 감안해서 반대 입장을 철회했다.

어찌 되었든 로마와 빈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대 여론은 한동안 스톡홀름에 적잖은 부담을 주었고, 때문에 결혼을 진행하는 것이 한동안 미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국의 옛 영광에 집착을 하는 지방의 신사계층에게는 이 결혼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을 향해 있던 사대주의는, 지난 삼백여 년간 한국이 대외적으로 거둔 성취로 인하여, 국수주의적 성격이 짙은 제국주의 심리로 변질되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한국은 찬란한 문명의 중심이었고, 바다 바깥의 종족들은 개화되어야 할 야만인에 불과했다.

비록 중국인과 유럽인만 해도 반쯤은 문명화된 사람들로 보기는 했으나, 일본이나 여진족에 대한 멸시도 상당했고, 흑인은 아주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랑캐 신부가 제국의 황후가 된다는 사실은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경상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반발이 지대했다.

이들은 이 결혼을 추진한 의회에 대해서 규탄하는 성명을 벌이기 일쑤였고, 심지어 안동에서는 시위대가 일시적으로 관청을 점거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국내적인 반발 요인 때문에 황성의 내각은 잠시 결혼 문제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거국적인 관점에서 사고하는 관료들은 이 혼인을 통한 동맹이 스웨덴과 한국 상호간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혹자는 굳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동맹을 할 수 있다고 하며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으나, 밀실 외교가 일반적인 현실에서 결혼은 일종의 공식적인 보증수표였다.

대외적으로 결혼이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적어도 이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에 양국은 함부로 상호간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게 될 터이기 때문이었다.

여하간, 이 전례 없는 결혼은 이내 큰 이슈가 되어 극동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뒤흔들었다.

야심만만하게 부상하고 있는 스웨덴과 내리막을 걷고는 있지만 여전히 저력이 있는 한국 사이의 결합은 강력한 화학적 촉매가 되어 국제 정세를 급변시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세기의 결혼이었다.

스웨덴 및 한국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던 국가들은 이 결혼에 쌍수를 들고 찬성했고, 반대로 영불 연합과 일본과 같은 나라들은 심한 불쾌감을 공공연하게 표시했다.

결혼을 둘러싼 이런저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결국 1744년의 여름날로 결정되었다.

궁내부 대신 박문수를 필두로 하는 한국의 공식 사절이 1743년의 늦은 가을에 스웨덴으로 출발했고, 이내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국왕 부처를 알현하고, 공식적으로 양국 간의 우호와 동맹을 약속하는 도장을 찍은 뒤, 스웨덴 측의 수행단과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를 모시고 이듬해 봄에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칼 13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에게 막대한 지참금만을 딸려 보냈을 뿐만 아니라 ―물론 이것은 인도양의 소코트라 섬을 결혼을 통해 얻은 것을 생각하면 마땅한 지참금이었다.―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오스트리아 출신의 시녀 30명은 물론이거니와 5명의 가톨릭 신부와 35명에 달하는 화가, 학자, 음악가를 딸려 보냈다.

그 외에도 결혼식을 전후하여 1년간 체류할 예정으로 보내진 수행단의 숫자만 하더라도 거의 500여 명에 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를 태운 배는 스톡홀름 항에서 1744년 2월 8일에 출항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아 4월 15일에 인도 고아 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스웨덴과 한국 관료들의 영접을 받은 뒤에, 다시 배는 동쪽으로 향하여 4월 29일에 상남항을 거쳐 6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성대한 환영과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그날로 황성부에 들어와 공식적으로 결혼식 때까지 제도영빈관에서 스웨덴 사절단과 함께 머물도록 되었다.

결혼식은 7월 1일로 정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스웨덴 왕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공주인 마리아 테레지아입니다.”

사흘 뒤, 공식적으로 경운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환영연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와 홍문제는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주는 한국어로, 황제는 독일어로 서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꽤나 기묘한 경험이었다.

둘 다 내심 실망하더라도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마주앉은 자리였다.

아무리 편지를 지난 이 년간 교환했다고는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막상 상대방을 보면 후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처음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묘한 친숙감에 금방 마음을 열었다. 거의 천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한 환영연회에서, 서로만 따로 앉아 몇 시간에 걸쳐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결혼식이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때까지의 시간도 아쉽다는 듯, 연회 이후로 매일같이 서로를 만났다.

대부분 공주가 경운궁의 석조전으로 초청을 받아 갔지만, 때로는 황제가 직접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아침부터 제국영빈관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나는 결혼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어요. 황제라는 신분에서 누군가와 결혼하게 되더라도 내 뜻대로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처음에는 의회에서 공주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해왔을 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먼 나라에서 낯선 곳으로 공주를 불러 왔을 때, 우리는 서로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괜한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이 결혼을 하기로 한 것이 매우 잘한 선택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정된 결혼식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6월 말의 밤, 석조전의 안뜰 정원에 앉아서 황제는 공주에게 말했다.

꾸준히 공주와 함께 대화를 나누어 매우 익숙해진 독일어였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도 매우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린 시절에 내가 크게 되면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 많은 상상을 했었죠. 머나먼 곳에 커다란 궁전을 가지고 있는 멋진 왕자가 부왕께 찾아와서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자라나면서 점점 그 꿈을 잊게 되었습니다. 언제고 저의 뜻과는 다르게 외국 왕족에게 시집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제 혼인 상대로 거론된 사람 중에는 열 살짜리 코흘리개 왕자도 있었고, 쉰 살이 다된 머리가 벗겨지고 살찐 왕도 있었습니다. 모두 신분과 혈통은 좋았지만, 그런 결혼은 매우 형식적이고 희생을 요구하는 것들이었어요. 처음에 폐하와의 결혼이 스톡홀름의 궁정에서 거론되었을 때, 저는 내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유럽 밖으로 시집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거든요.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낮에는 멍하게 창밖을 보며 지냈습니다. 어린애나 중늙은이에게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게 되었으니 울어야 할 일일까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의외로 마음이 담담했습니다. 저는 이내 평정을 찾았어요. 그저 제 운명이니 하고 받아들이려고요. 그건 체념이었어요. 때문에 한국어도 배우기 시작했고, 부왕께도 반대하는 의사를 표하지 않았어요. 적어도 젊은 황제에게 시집가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다고 말이에요. 사람들은 폐하의 초상을 보고 생긴 것이 준수하다고 말을 하곤 했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사실 폐하의 어진이 아니었습니다. 제 걱정을 완전히 풀어준 것은, 바로 폐하께서 보내신 편지였어요. 그 담백한 편지를 읽으며 저는 이 사람에게는 시집가더라도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제발 폐하께서 이 편지와 같은 사람이기만을 바라며 신께 매일 밤 기도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폐하께서는 꼭 그 편지와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평생 지내게 된 것이 이제는 즐겁답니다. 궁전도 아름답고, 사람들은 친절해요. 폐하께서는 제게 독일어로 말을 걸어주시고, 저는 한국어로 대답하겠지요. 언젠가는 이곳의 정원에서 수십 번의 겨울이 지난 뒤에 참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제 모습을 한 번 그려보았어요.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고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저도 이 결혼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 마음은 즐겁기 그지없어요.”

황제는 공주의 손을 붙잡고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깊게 빛나고 있었다. 황제는 그 눈동자 아래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보았다.

이틀 뒤, 7월 1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명동의 주교좌성당에서 공주의 바람대로 서울대주교에게 축성을 받은 뒤, 두 사람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통과하며 시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막상 공주가 한국에 들어와 결혼이 국가적 경축 행사가 되자 반대하는 목소리는 사그라졌다. 적어도 황성부 안에서 만큼은, 모든 시민들이 연도로 나와 결혼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보냈다.

광화문에서 마차에 내린 두 사람은, 전통적인 궁중 혼례 방식대로 정식 혼례를 치렀다.

광화문에서 근정전을 향해 두 사람이 가마에 올라 이동하는 동안, 대취타대가 예악(禮樂)을 연주하며 혼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근정전 앞에서 두 사람은 동뢰연(同牢宴)을 치러 서로 술잔을 교환하고, 정전에 올라 문무백관이 만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의 예를 받았다.

궁내부 대신 박문수가 공식적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며 만수(萬壽) 복록(福祿)의 기원을 담은 축문(祝文)을 낭독했다.

경복궁에서의 공식적인 혼례 행사가 끝나자, 이내 두 사람은 다시 마차에 올라 장소를 석조전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결혼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각국 외교관과 한국의 고관대작들, 그리고 황족과 귀족, 스웨덴의 결혼사절단이 모두 참석한 이 대연회에서는 한국의 아악뿐만이 아니라 서양 악기를 익힌 협주단(協奏團)의 연주도 함께 이루어졌다.

풍성한 먹을거리와 많은 술, 그리고 여름밤의 시원한 공기가 더해져 그날의 연회는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었다.

특히 이 결혼에 참여하기 위해 요동국왕 김헌(金憲) 부처(夫妻)가 직접 예방하였다. 이들은 황제 부처를 공식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성경부를 찾아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1744년, 홍문 6년 7월 1일, 수만 리의 거리를 뛰어넘어 세기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홍문제 이혈의 나이 스물하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나이 스물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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