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황하심수(黃河沈水)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물의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回
힘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高堂明鏡悲白髮
좋은 집 맑은 거울에도 흰머리가 슬프니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는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는 눈같이 희구나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의 뜻을 얻었을 때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莫使金樽空對月
금으로 된 술잔 헛되이 달과 대작케 하지 말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내게 내린 재주가 필히 쓰일 것이며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을 흩어 써 버려도 다시 돌아올 것이니
烹羊宰牛且爲樂
양을 삶고 소를 잡아 또 즐기자
會須一飮三百杯
한 번 술잔 기울이면 삼백 잔은 마셔야 하지 않겠는가」
―이백(李白), 〈장진주(將進酒)〉
1749년
경안(慶安) 18년 중하(仲夏)
대순제국(大順帝國)
이자성이 명의 북도(北都) 북경성을 함락시키고 직례에 진군하여 명조를 사실상 무너뜨리고 화북 일대에 패권을 수립하여 순(順)을 건국한 지도 어언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세 좋게 중원을 일통할 듯 거침없이 진군하던 이자성의 순군(順軍)이었으나, 이내 화남 일대에 들불 같이 일어난 군벌들에 의하여 진격이 막히고 회수(淮水)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군거를 돌려야 했다.
이자성은 곡창지대인 강남을 반드시 점령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도읍을 북경에서 옛 북송의 도읍인 개봉으로 옮겨 변경(卞京)으로 이름을 고치고 남방경략의 절치부심을 다졌으나, 이것은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자성 생전에 순군은 다시는 회수를 넘어 진격하지 못했고, 오히려 양나라를 건국한 정(鄭)씨들에 의해 강남의 곡창지대로의 접근이 완전히 봉쇄되어 대군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게 되었다.
사실상 대륙의 분할 체제를 인정하고 화북을 견고히 하는 것만이 사상누각인 순나라가 붕괴의 수순을 밟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더군다나 함부로 병력을 움직였다가는 언제고 산해관 너머의 12만 요동군이 순나라를 들쑤시러 들어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순나라로 하여금 사실상 남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대륙을 재통일하는 것을 일생의 갈망으로 삼던, 이 역졸 출신의 대순황제 이자성은 태조 영창제(永昌帝)라는 거창한 존호(尊號)로 개봉 북릉에 묻혔다.
이자성의 손자인 이조혁(李朝奕)이 그 뒤를 이어 1674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태광(泰光)이라 하고 국력의 일신에 나섰으나, 그의 정권은 이자성 이후로 해소되지 못한 각 지방을 근거로 하는 무신(武臣)들과 황실 종친들에 의해 사실상 권력이 분할되어 있는 형태였다.
개봉부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중앙부에 대해서만 실질적인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태광제 이조혁은 거국적인 개혁을 위해 칼을 잡았으나, 이내 사촌인 당왕(唐王) 이행군(李幸찴)이 규합한 반란군에 의해 결국 개봉이 함락당하고 몸만 간신히 건져 사천의 주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개봉을 함락시킨 당왕 이행군은 1683년에 연호를 원흥(元興)으로 건원(建元)하고 도읍을 개봉에서 잠시 자신의 근거지였던 서안(西安)으로 옮겼다가, 다시 한 해가 지나지 않아 도로 개봉으로 옮겼다.
서안은 옛 주나라로부터 한과 당나라를 거치는 유서 깊은 도읍지였으나, 그 땅이 지력이 쇠하여 국도(國都)로 삼기에는 그 운이 다한 곳이었다.
원흥제 이행군은 행정적으로 유능한 황제였으나, 그것이 곧 나라가 부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행군의 정치적 지략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교묘하게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사실상 할거된 군벌 체제를 인정하고 이들을 각 성(省)의 순무(巡撫)로 임명하여 봉건적 할거를 방조했다.
대신 이들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잠재적인 황족 내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외국과의 문을 닫아걸어 내적으로 결속을 도모했다.
원흥제의 이러한 조치 덕분에, 순나라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천에서부터 황해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전선을 방비할 병력을 지탱하기 위한 비용은 국고를 축내고 있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민간에 강압적인 통치를 강요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화북의 곡물 생산을 해소하기 위해 사실상 양나라에 세폐를 주어가며 비싼 값의 곡물을 사오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대외적으로 문을 열고 입헌주의적 개혁 작업과 함께 해양 진출과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양(梁) 나라나, 비옥한 토지와 중계무역의 이점을 누리며 상업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광동의 월(粵) 나라에 비해, 여전히 봉건제적인 제도를 고수하며 내정을 다지지 못하고 있는 순나라는 사실상 국력의 측면에 있어서도 장기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했다.
문을 걸어 닫은 탓에 순나라의 물자는 부족해지고,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군벌들이 제각기 멋대로 수탈을 자행한 탓에 민간의 질고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더군다나 약해진 순의 북방 방비를 노리고 몽골에서 매년 약탈자들이 내려오니 민심마저 흉흉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원흥제는 무리하게 군대를 충원하여 만리장성을 다시 정비하고 북방의 요새들을 강화시켰다.
이와 함께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서정(西征)을 단행해 동투르키스탄으로 들어가 일시적으로 위구르인들을 제압하고 「신강(新疆)」이라 이름 하여 복속시키려 시도했다.
1715년, 짧지 않은 통치 기간 끝에 원흥제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순나라는 위태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원흥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섬서의 군벌 조부(趙駙)와 산동 군벌 왕유심(王維諶)이 제각기 원흥제의 삼남과 오남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개봉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사이 황태자 이규(李赳)는 연호를 건명(建明)으로 하여 즉위하였으나, 이내 동서 양쪽에서 들고 일어난 군벌들과 극심한 내전에 휘말렸다.
이 내전의 승자는 건명제도, 조부도, 왕유심도 아니었다.
이들이 뒤엉켜서 서로 전력을 소진하고 있는 동안, 건명제의 오촌 당숙인 진왕(晉王) 이섬(李贍)이 군사를 일으켜 개봉부로 전격적으로 입성해 건명제에게서 선양을 약속받았다.
그 뒤 조부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키는 정치적 결단을 단행하여 병력을 합치고, 이를 모조리 이끌고 산동으로 쳐들어가 왕유심과 그가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던 이손(李푡)을 모조리 베어 토벌하고 개봉으로 돌아왔다.
1723년, 진왕 이섬은 공식적으로 연호를 평흥(平興)으로 삼고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러나 사실상 강제로 황제의 자리를 양위해야 했던 선황제 이규가 멀쩡히 살아서 절치부심하고 있었고, 결혼을 통해 힘을 합쳤지만 여전히 새로운 황제의 권위에 사사로이 도전하는 섬서 순무 조부의 존재도 골칫거리였다.
더군다나 짧지 않은 내란과 사방팔방으로 벌여 놓은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 순나라의 국고를 완전히 파산 지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평흥제 이섬은 이를 해결할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결국 순나라를 사단으로 몰고 간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섬서 순무 조부가 다시금 난을 일으키고 만 것이었다.
평흥제 이섬의 장남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킨 뒤로, 조부는 자신의 사위가 황태자에 봉해질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평흥제 이섬은 정치적인 모험을 단행해 장남을 사실상 승계 구도에서 밀어내고 삼남인 이민(李旼)을 황태자에 봉했다.
이에 분노한 조부는 결국 다시금 병력을 조직해 난을 일으켰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평흥제 이섬은 가까스로 조부의 난을 막아낼 수 있었다.
거의 조부의 다 무너진 군대를 섬서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밀어붙여 조부의 군대를 끝장내려고 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평흥제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사단은 터지고 말았다.
개봉에서 절치부심하고 있던 선황제 이규가 다시금 복위를 선언하고 평흥제 이섬에 대해 토벌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참에 새롭게 권력의 장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군벌들이 이를 거들고 나섰다.
직접 친정에 나섰다가 섬서에 고립된 평흥제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순나라 내부의 혼란을 틈타 발해(渤海) 일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순나라의 문을 강제로 열어 자국 제조업의 독점 시장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동군이 산해관을 넘어 순나라로 쳐들어 내려온 것이었다.
요동군의 노도와 같은 기세에 북평(北平, 구 북경)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 와중에 가까스로 개봉의 이규를 제압하고 다시 순나라의 유일한 황제가 된 평흥제였으나, 다 무너져 가는 군사력을 규합해도 요동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회수와 사천 방면으로 나가 있던 군사들을 모두 되돌리고, 신강에서 병력까지 철수해 가며 이를 막으려 했지만, 하북(河北) 일대를 점거하고 꿈쩍하지 않는 요동군에게서 도읍을 다시 찾아올 방법은 막연했다.
어쩔 수 없이 요동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강화를 맺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 결과 천진(天津)과 위해(威海)가 개항되었고, 이 두 항구에는 요동군 해군의 해군기지가 조성되었다.
요동은 이를 통해 발해만(渤海灣)과 황해(黃海)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순나라는 이로써 사실상 숨통이 조여지게 된 셈이었다.
값싼 요동의 직물 등이 대량으로 들어와 기존의 순나라 자생 경제를 완전히 붕괴시켰고, 약탈적인 요동 상인들에 의해 순나라의 재정이 좌지우지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순의 평흥제는 결국 숙원사업인 위구르 제압을 포기하고 신강에서 군 병력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방의 국경지대의 병력도 대규모로 감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실까지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이 결과 순의 병력이 줄어들면서 생긴 세력 균형의 미묘한 붕괴 때문에 가까스로 숨통을 붙잡고 있던 남명(南明)이 때를 노린 양, 월, 주 3국에 의해 분할되어 1728년 결국 멸망하고야 만 것이었다.
순은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이득을 얻지도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화남의 적들이 남명의 유지(遺地)를 분할하며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을 손가락만 빨며 지켜봐야 했다.
한 때의 걸출한 인재들도 떠나가고, 조야에 원성이 자자하며, 국토마저 유린당하고 말자, 곳곳에서 비적 떼가 일어나고 나라가 뒤숭숭해졌다.
이러한 마당이 되자 순황실이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은 결국에 자신들의 목을 죄고 흔들고 있는 요동밖에 없었다.
요동은 비적 토벌을 구실로 삼아 화북과 산동 일대에 군대를 잠정적으로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원흥제의 뒤를 이은 나약한 황제인 경안제(慶安帝)는 이를 허락했다.
1734년, 요동군의 하북 주차군(河北駐箚軍)과 산동 주차군(山東駐箚軍)이 제각기 북평과 곡부(曲阜)에 주둔지를 차리고 사실상 점령통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교적 효율적으로 이 일대의 비적 떼를 일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것은 순나라에게 있어서는 또다른 재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요동군은 주차군을 조직하면서, 자국의 병력을 많이 동원하지 않고 몽골 용병들을 대량으로 고용했다. 이들은 대체적인 요동군의 일반적인 기준에 비해 규율이 매우 잡혀있지 않았고, 사실상 비적 떼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렇다고 본토 출신 요동군의 주둔이 신사적이였냐 하면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들의 사실상 주요 목적은 화북과 산동에서의 요동의 이권 보호였으며, 순나라의 내정 안정에 기여하는 것은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이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순 조정에서 임명되어 부임한 하북 순무와 산동 순무가 시행하는 행정에 딴지를 걸기 일쑤였다.
특히 최근에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방곡령(防穀令)이었다.
순나라가 자리하고 있는 화북 일대는 인구에 비해 곡물이 모자란 편이었고, 때문에 명나라가 건재하던 시절에는 강남의 넘쳐 나는 곡물을 북쪽으로 가져와 화북을 부양했었다.
그러나 중국이 할분되고 순나라의 내정 불안이 지속화되면서, 화북의 곡물 생산은 급감하고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이 근래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회복 추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동안의 내전과 전란으로 순 나라의 인구가 급감한 탓도 있었고, 기근이 한동안 들지 않으면서 작물 생산량이 다시 상승세로 접어든 덕분이기도 했다.
허나 이렇게 생산된 식량이 정작 순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바로 요동국 때문이었다.
원체 쌀을 생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후대인지라 요동의 농업은 조와 옥수수, 밀, 그리고 보리와 기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넓은 땅의 거의 태반은 목축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농업 생산량이 많지 않은데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인구는 도시로 몰리기 시작해 식량의 많은 부분을 요동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내지나 양나라에서 사들이며 벌충해 왔으나, 이마저도 부족해지자 때마침 시장이 열린 순나라에서 대량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후한 값에 곡물을 쳐주었기 때문에 순나라의 지주들은 화북에서 생산된 곡물을 대량으로 요동 상인들에게 넘기기 시작했고, 덩달아 순나라의 곡가(穀價)도 뛰기 시작했다.
곡물의 태반이 요동으로 팔려 나가 정작 곡물은 부족한데, 곡물값은 천정부지이니 민간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요동과 가까운 하북과 산동 일대에서 심각했고, 때문에 하북 순무와 산동 순무가 방곡령을 내려 외국 상인에게 곡물을 파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순나라 경내에서 활동하는 상인은 요동 상인뿐이었으니, 이는 사실상 하북성과 산동성의 곡물을 요동에 파는 것을 금지한 조치인 셈이었다.
하북 순무 조장석과 산동 순무 한식은 논의 끝에 〈요순통상장정(遼順通商章程)〉의 조항을 들어 사실 합법적으로 방곡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요동 상인들은 요동국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요동 정부는 개봉의 순나라 조정에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며, 여차하면 주차군을 움직이겠다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에 못 이겨 경안제는 방곡령을 내리는 것을 금지하고, 이 죄를 물어 하북 순무 조장석(趙章錫)을 좌천 발령내고, 산동 순무 한식(韓式)을 섬서 순무로 관직을 이동시켰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전국적으로 소요(騷擾)가 일 조짐이 보이자, 그제야 요동은 한 발짝 물러나 곡물을 산동과 하북에서만 수매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이 또한 그 해 생산량의 3할을 넘지 않겠다고 정해 두었다.
때문에 산동과 하북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요동 상인이 곡물을 수매하는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게 되었으나, 결론적으로 여전히 많은 양의 곡물이 꾸준히 요동으로 암암리에 새어 나가고 있었고, 특히 공식적으로 사실상의 곡물 수탈이 허용된 것이나 다름없는 하북과 산동의 소작농들의 생활은 갈수록 고충이 더해만 갔다.
지주들이 곡물을 대량으로 요동에 팔아치워 배를 불리는 것과 다르게, 힘들게 농사를 지어 이를 지주에게 바치고, 남은 쌀을 팔아서 그 돈으로 싼 곡물인 콩과 조 따위를 사서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요동에서는 쌀을 대량으로 사가면서, 비교적 남아도는 콩과 조를 순나라 시장에 풀었고, 이를 사실상 독점하고 가격을 책정함에 따라서 소작농들이 이 싼 곡물들을 결국에는 억지로 비싼 값에 사서 먹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개봉의 황제는 금을 뜯어가고, 북평의 요동 오랑캐는 쌀을 뺏어가고, 앞마당의 지주는 딸년을 들어간다.”
하북 일대에서는 끊임없는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저주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특히 한발(旱魃)에 농사를 완전히 망친 해는 더더욱 심했다.
1745년에는 대기근이 들어 하북성에서 20만 명, 산동성에서는 6만 명이 죽어 나갔다.
이른바 「경안대기근(慶安大饑饉)」이라 불리는 재해였다.
이 기근이 특히 끔찍했던 것은, 바로 시장에 충분히 사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살 돈이 없어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점이었다.
요동 상인들은 이 재해가 닥치고 넉 달이 흐르고서야 겨우 곡물 값을 내렸다.
1749년
경안(慶安) 18년 중하(仲夏)
대순제국(大順帝國) 하북성(河北省) 북평(北平)
한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 땅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황토고원에서 밀려온 황사 폭풍이 잠잠해지나 싶으면, 이내 짧은 장마 뒤에 숨 막히는 여름이 찾아온다.
이 뜨겁게 달구어진 대륙의 북쪽 끝자락에 바로 고도(古都) 북평이 있었다.
북평(北平)의 옛 이름은 계(쬀)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도읍지였다.
이후 원나라의 도읍 대도(大都)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명나라에 들어서 영락제가 이곳에 한 번 천도를 단행한 이후, 정치적 정세에 따라 남경과 북경으로 조정이 여러 번 움직였으나, 명실상부한 양도(兩都) 중 하나로써 기능했다.
특히 웅장한 궁궐 건축의 대명사인 자금성은 이 도시의 자부심이자 상징이었다.
허나 명의 몰락은 이 도시의 명성도 함께 가져갔다.
순나라가 아예 북경을 버리고 변경 개봉부로 천도한 뒤에, 아주 도시 이름마저도 격하하여 북평(北平)으로 개칭한 뒤로, 점차 이 옛 도읍은 몰락의 수순을 겪기 시작했다.
순나라의 지배력이 강화되면 이내 군벌과 관료의 수탈이 뒤따랐고, 순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지면 변장을 넘어서 지척의 몽골족들이 약탈을 내려왔다.
북평성 자체는 몽골족들에게 한번도 함락을 당하지 않았으나, 주변 일대는 여러 차례 이들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그 다음에 찾아온 이들이 바로 요동인들이었다.
요동 군인들은 북평성에 주차하고 심심찮게 소란거리를 만들었으며, 상인들은 곡식을 대량으로 매입해 가서 화북성 일대의 먹을 곡물의 씨를 말렸다.
하북 순무 조장석이 방곡령을 내려 이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이내 힘없고 부패한 개봉 조정에 의해 쫓겨나듯이 순무의 지위를 내려놓고 나와야 했다.
이어 닥친 경안대기근으로 인하여 북평의 시민들은 사상 최악의 고난을 맞았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북평 시민들은, 곡물 시장을 장악한 요동 상인들이 곡가를 내리지 않자 곡물을 사는 데 재산을 탕진하고, 이내 집안의 금은붙이마저 떨어지면 앉아서 굶는 수밖에 없었다.
두어 달 사이에 북평 성내에서만 수천 명이 아사해서 죽어 나갔다.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북평의 요동 상인들이 곡가를 헐하게 내어놓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극심한 소요가 한차례 벌어졌고, 이것이 화북 순무의 묵인하에 요동군에 의해 탄압되면서 사실상 북평은 죽은 도시나 다름없게 되었다.
경안대기근으로부터 벌써 4년이 흘렀지만, 흘러간 북평의 옛 명성과 번영은 다시 되찾기 요원했다.
그나마 북평 시민들의 자부심이자 오락거리였던 평극(平劇)의 공연마저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북평 주민들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아이들의 몸은 메말라 있었다.
요동국왕 김헌(金憲)의 셋째 아들인 정경대군(定景大君) 김우(金祐)가 요동군 육군 대위(大尉)의 신분으로 북평의 하북 주차군으로 발령받아, 북평성의 문루(門樓)를 넘은 것이 바로 그해, 1749년의 여름이었다.
요동군의 하북 진군(河北進軍) 이후, 군제개혁이 실시되어 기존의 계급 명칭과 복무규 정들이 일부 변환이 있었고, 내지와 다르게 정부참(正副參)의 계급 구분은 대중소(大中少)로 바뀌게 되었다.
이를테면, 김우의 대위 계급은 예전 계급제도하에서는 정위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왕족들도 장교로써 군에서 일정 기간 복무하도록 하는 명예법령(名譽法令)이 통과되었는데, 이 첫 대상이 된 것이 바로 김우를 비롯한 요동왕 김헌의 아들들이었다.
왕세자이자 첫째 아들인 김회(金茴)는 예외적으로 바로 육군 대령(大領)에 임명되어 성경의 근위연대의 연대장을 1년간만 짧게 담당했다.
그러나 둘째인 정선대군(定善大君) 김기(金祺)는 해군 여순(旅順) 함대에서 복무하며, 대위(大尉)에서 중령(中領)으로 진급할 때까지 6년간을 군문에서 보냈다.
셋째인 김우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열여덟이 되던 해에 요동무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 교육을 받은 뒤, 스무 살에 대위(大尉)로 임관되었다.
명예 법령에 의해 왕족 장교는 소위가 아닌 대위의 신분으로 임관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형들처럼 본토에서 복무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에게, 임관과 함께 찾아온 것은 바로 하북 주차군으로의 발령 명령이었다.
부왕을 찾아가 본토 근무를 요구할 정도의 뻔뻔함은 없었던 김우는, 자신이 북평으로 발령나게 된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포기하고 순순하게 복무를 자처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북평은 산해관에서 지척이니 본국과 매우 가까운 편이라는 점이었다.
휴가를 받는다면 잠시 산해관을 넘어 본토에서 여가를 즐기고 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였다. 산동 주차군에 비하면 하북 주차군의 형편은 조금 더 나은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군 나리.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차군의 주둔지 입구에는 그가 올 줄을 알고 있었다는 듯, 대령(大領) 계급의 지휘관 하나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우를 보자마자 공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싹싹하게 다가와 경칭을 올려붙였다.
“이러시면 불편합니다. 저는 지금 군 복무 중이니 계급에 걸맞게 하대를 하여 주십시오. 군문에 있는 동안은 규정상 일체 왕족의 특혜가 정지되어 있습니다.”
“허허, 규정이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대군 나리께 그럴 수 있겠습니까.”
주광재(周光材)라는 이름의 이 뭉툭하게 생긴 대령은, 요동군 하북 주차군의 보급과 인사를 뭉뚱그려 담당하는 주차군 사단 본부의 중진이었다.
그런 이가 자신에게 와서 이렇게 초면에 아부하듯이 굴고 있으니 김우로서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군대의 규정에 맞게 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주 대령님.”
김우가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광재의 계급을 무시하는 아부는 계속되었다.
누가 보면 자신이 대령이고 주광재가 대위라 여길지도 모르겠다고 김우는 생각했다.
앞으로의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 느끼면서 김우는 주광재가 안내하는 사단 본부로 향했다.
옛 명나라 시절의 관청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는 사단 본부는, 곧 하북 주차군의 본부였다.
하북 주차군 자체가 요동군 제15사단이라는 하나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단은 소위 하북사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하북사단의 사단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바로 어재신(魚齋愼) 소장(少將)이었다.
“북평에 온 것을 환영하네. 성문을 통과해 부대로 오면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북평의 상황이 좋지는 않네. 별로 우리 요동군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고. 더군다나 부대 인원의 삼분의 일이 몽골 출신의 용병들이라 통제도 쉽지 않네. 심심하면 상인들이 자기네들 뒤치다꺼리를 해달라고 사단 본부를 찾아오질 않나, 부패한 하북 순무는 자기 잡무를 보는데 병력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지를 않나. 총제적으로 우리 군은 지금 별로 왕국의 명예를 고양하는 일에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네. 아마 전하께서도 북평의 실상을 보았으면 하는 뜻에서 자네를 이곳에 부임시키셨을 것이네. 부디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체 군인으로써 문제가 될 행동을 하지 말고, 부대 규율에 부족함 없이 행동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짧은 신고 절차를 마치고 나자, 어재신 소장이 한탄과 당부가 섞인 말을 늘어놓고, 일찌감치 쉴 수 있도록 김우를 배려해 주었다.
아직 어재신 소장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정확한 감이 서지는 않았지만, 대충 듣던 대로 북평의 실태가 엉망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다지 북평성문을 통과하여 부대로 오는 동안, 순나라 사람들이 그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 같긴 했다.
말을 타고 지나가니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호의적인 반응은 절대 아니었던 듯싶었다.
“어재신 소장은, 좋은 사람이긴 합니다만, 천상 군인이라 세상을 사는 법을 잘 모릅니다. 대군 나리께서도 보셨겠지만, 이놈의 순나라 토민들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미개하기 짝이 없어서 군화짝으로 잘 두들기지 않으면 도무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어재신 소장의 부대 운영 방식은 무르기 그지없어요. 대군 나리께서도 이제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사단 본부를 나오자,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주광재가 어재신 소장의 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김우는 그만 닥치고 군대 계급대로 행동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러는 것부터가 계급 질서를 역행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주재신이 주절거리는 말을 대충 한 귀로 흘려듣고, 김우는 어서 자신에게 배정된 관사로 가고자 서둘렀다. 가급적이면 이 구렁이 같은 대령과는 별로 말을 앞으로 섞지 않는 것이 좋을 성싶었다.
“오늘은 피로하기도 해서 먼저 관사로 실례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곳 생활에 대하여 또 좋은 충고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질려버린 김우가 주광재의 말을 끊고 이만 물러가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주광재는 멋쩍은 듯 비굴한 미소를 띠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 대군 나리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당연히 피로하시겠지요. 관사는 이곳에서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있습니다. 명나라 때 고관의 저택이었다는데, 그 건물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장교들이 관사로 쓰고 있지요. 아마 그 입구에 가면 사병들이 안내를 해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주광재를 가까스로 떨어 뜨려 놓고, 김우는 관사를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옛 북경의 도심지 일부를 군부대의 둔지로 징발하여 쓰고 있었기에, 아예 건물들을 허물어 버린 연병장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구도심의 복잡한 골목과 가택들이 부대 안에 남아 있었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기마 상태에서 부대 안을 오고 가는 것보다는 직접 걸어 움직이는 것이 용이했다.
김우도 사단 본부의 마사(馬舍)에 자신의 말을 두고서 천천히 관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광재의 말마따나 사단 본부를 나와 좌측으로 꺾어 얼마 가지 않으니, 장교 관사라고 쓰인 현판이 달린 고즈넉한 저택 하나가 나왔다.
지어진 지 이백 년은 족히 지나 보이는, 명말(明末)풍의 품위가 있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옛 가옥답게 저택 안은 여러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여기에 다시 벽을 놓고 담장을 수리해 여러 장교들이 나누어 쓰고 있는 듯했다.
아마 딱히 원치는 않지만, 개중 좋은 별채를 자신에게 배당했을 것이라고 김우는 짐작했다.
어찌 되었든 왕족이란 존재가 이들에게도 불편할 것은 당연했다.
“김 대위님! 가장 안쪽에 널따랗고 큰 안채가 김 대위님께서 지내게 되실 곳입니다. 직접 보시면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를 맞으러 나온 병장(兵長) 하나가 큰소리로 경례를 붙이고서는, 관사가 쩌렁쩌렁 울리게 말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대위의 신분에 맞지 않게 분에 넘치는 관사가 주어진 것에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내된 안채는 가장 안쪽에 자리한 화려하고 독립된 공간으로, 옛 주인이 남겨둔 것이 분명한 고급스러운 도자기와 진귀한 서책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 건물이 징발되어 주차군의 주둔지로 편입된 이후로는, 아무 장교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청소만 되어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없이 깨끗했다.
이 안채에만 딸린 방이 8칸이나 되어 보였고, 독립된 마당은 안정감 있는 담으로 둘러쌓여 있어 외부에 방해가 될 요소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안채의 뒤쪽에 있는 쪽문을 통하면, 바로 부대 밖의 소로(小路)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김우는 그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대 안팎을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셈이었다.
대위쯤 되는 장교이니 출입이 크게 통제될 이유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편이었다.
“저, 근데 김 대위님께서 대군 나리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정말이십니까? 이 안채를 주광재 대령님께서 눈독들이고 있었는데, 바로 군말 없이 대위님이 부임해 오시자마자 두말없이 내준 것을 보면 정말 소문이 맞는 것 같은데…….”
김우가 안채를 둘러보는 동안, 마당에 서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던 병장이 김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궁금함을 못 참겠다는 듯 속사포처럼 물음을 쏟아냈다.
“나는 그냥 요동군 육군 대위다. 밖에서의 신분이 그렇게 중요한가?”
“아, 아닙니다! 무례한 행동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김우의 날카로운 지적에 표정이 굳은 병장을 물려 보내고, 김우는 마루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 관사도 주 대령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거란 말이지. 그는 내가 나중에 뒷배라도 봐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군……. 골치 아프게 되었어.’
군모를 벗고 김우는 땀에 절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곳 북평의 여름은 유난히 덥게 느껴졌다. 앞으로의 생활이 좀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김우는 답답한 심경이었다.
1749년
경안(慶安) 20년 맹하(孟夏)
대순제국 하북성 하간부(河間府) 헌현(獻縣)
1749년의 초여름은 매우 가혹했다.
작년 내내 계속된 가뭄으로 땅바닥이 눌어붙고 강물이 말라 전체적으로 농사가 대흉(大凶)이었는데, 이번에는 큰 장마가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쏟아붓기 시작해 달포가 지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비가 너무 오는 것 자체도 농사에 좋을 것이 없었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순나라의 중심을 관통하는 젖줄인 황하가 요통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황하의 물길은 비교적 평탄한 화북의 평야 지대를 흐른다. 넓은 평원을 지나는 강이니 만큼, 그 물길이 거세지면, 종종 둑을 부수고 범람하기 일쑤였다.
특히 대홍수라도 날라 치면, 제방을 무너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해하(海河)에서 회수(淮水)에 이르는 화북 평원 지대의 다른 강물의 유로를 빼앗아 완전히 강이 흐르는 방향을 틀어 버린다.
사서에 기록된 것만 하더라도 하도(河道)의 변천이 스무 회가 넘고, 그중에서 큰 변화만 꼽아 보아도 8회에 이르니 황하의 강물이라고 고래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의 황하는 소위 북송 이래 「황하탈회(黃河奪淮)」라 불렸다.
이 말은 곧 황하가 회수의 하구를 통해 바다로 나간다는 뜻이었다.
지난 수백여 년간 황하는 산동반도의 남쪽으로 곧장 흘러 회수(淮水)의 하류 유역에서 물줄기를 합쳐서, 예로부터 회수가 하구로 삼았던 곧을 통해 황해로 흘러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1749년의 대홍수는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겨우내 말라 붙어 있던 강물이 다시 갑자기 많은 양으로 불어나자, 강물은 급작스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황하의 제방들은 터져 나가고 강물은 제멋대로 흐름을 바꾸어 천 리 북쪽으로 내달렸다.
황토고원에서 평야 지대로 나오는 황하 중류에서 크게 바뀐 물길은 산동반도 북쪽의 대청하(大淸河)의 수계(水系)를 빼앗아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 물줄기가 하도(河道, 물길)을 바꾸고 말았으니 순나라 조정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이러한 천재지변이 따로 없는 노릇이었다.
황하가 하도를 옮기는 가운데 든 대홍수로 수십만이 죽고 다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원 지대의 농사가 풀썩 망하고야 말았다.
“이것이 다 요동 오랑캐 때문이다!”
“관리는 부패하고 황제는 인망이 없으니, 황하의 신령도 노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간 쌓여왔던 불만은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큰 피해를 본 하북과 산동 일대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두 성에서는 여전히 방곡령을 시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런 와중에도 곡물은 끊임없이 요동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한발에 이은 대홍수로 황하의 물길까지 바뀌자 요동 상인들도 분위기를 보아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이문이 나는 곳에 위험을 무릅쓴다는 신조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질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주차군이 하북과 산동 일대를 오고 가며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이들과 함께 각 성의 순무가 이끄는 순나라 병졸들도 덩달아 패악질을 부리니 그야말로 한동안 하북과 산동은 지옥도(地獄道)를 방불케 했다.
조금 머리가 잘 돌아가고 운이 좋은 자들은, 농사를 일찌감치 접고 요동의 조계(租界)가 있는 천진이나 위해로 가서 날품팔이를 시작했다.
일은 여전히 고되고, 때로는 모욕도 감수해야 했으나, 적어도 품삯이 꾸준히 들어와 굶을 일은 없으니 차라리 나았다.
일부는 또 죽을 각오를 하고 회수를 건너 국경 너머 양나라로 탈출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집과 가족을 잃었고, 재산이고 농지고 모두 엉망이 되어 사실상 유랑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어 비적 떼로 비화했고, 하북성 일대는 사실상 행정 권력이 마비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 큰 강물이 하북성을 관통하게 된 겁니까? 설마 북평의 주둔지 지척에서 황하가 흐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놀랍지 않은가? 황하는 본디 저 황토고원에서 싣고 나오는 흙의 양이 엄청나기에 갑자기 평지로 강물이 들어가게 되면, 토사가 바다까지 쓸려가지 못하고 강 주변에 쌓이게 되어, 강이 주변 지면보다 높게 흐르는 천정천이 되지. 이런 천정천은 매우 불안한 하천이라 가뭄이 들면 강물이 쉽게 마르고, 홍수가 지면 흘러넘쳐 버린다. 그래서 고래로 중국에서는 치수를 매우 중히 여겼던 거야. 이 물길을 다스리지 못하면, 올해와 같은 대재난이 언제고 닥칠 수 있었기 때문이야. 순이 우의 치수하는 것을 보고 선양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이지.”
황하의 새로운 물길이 지척에 보이는 둔덕 위에 말을 타고 올라선 두 사람의 군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름 아니라 하북 주둔군의 2년차 대위로써 이번 황하변도(黃河變道) 사건에 대하여 실측 조사를 명받고 나온 정경대군 김우와 그의 부관 최수일(崔水壹) 하사였다.
원래 최수일은 김우의 관사병으로 처음에 그를 안내했던 병장 계급의 사병이었다.
김우는 그 최수일을 적잖이 마음에 들어 했고, 아예 하사관에 지원하게 하여 전속 부관을 삼았던 것이다.
좀 순진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에 든 것에 비해서는 눈치도 재빠르고 말하는 품새도 똑똑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리 아는 것이 많으십니까? 역시 대군 나리라 그러신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입니다.”
“또 그놈의 대군 타령이냐. 내가 혹시 떡고물이라도 떨어뜨려 줄 성싶어 들들 볶는 것은 주 대령으로 충분하니 그만 좀 하거라.”
“하하. 소인 같은 잡배 출신이 보기에는 그저 대단해 보여 그렇습니다.”
“내가 공부는 어련히 가르쳐 주고 있지 않아. 네가 어느 정도 학식이 쌓이면 왕립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줄 터이니 군문을 나서거든 학업을 계속 쌓도록 해라.”
“아이고, 저는 그냥 대위님 따라다니면서 배운 측량술만으로도 충분히 군문을 나서서 먹고 살 만할 것 같습니다. 공부를 더했다가는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최수일의 엄살에 김우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쨌든 이 지역의 측량은 이제 끝난 건가?”
“예. 사방 30리의 대략적인 지도를 제작하고 수로의 흐름을 파악했으니, 이제 오늘은 하간부 성중에 들어가서 밤을 나고, 내일 남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측량 작업을 마친 뒤에 천진을 거쳐 북평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최수일의 설명에 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 본부의 명령에 따라서 이들은 거의 보름 가까이 하북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변경된 황하 수로에 대한 탐측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슬슬 해가 떨어질 때이니 하간성으로 들어가서 쉬도록 하자. 내일부터 또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
김우와 최수일은 말을 달려서 지난 홍수로 피폐해진 평원 지대를 지나갔다.
하북성 하간부(河間府)의 부중(府中)인 하간성은 이곳에서 머잖은 지척에 있었다.
지난 사흘간 이곳 하간부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를 중심으로 일대를 탐사했었다.
이제 대략의 새로운 하안(河岸)에 대한 예비 측량이 끝났으니, 오늘은 하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인 셈이었다.
“워, 워. 뭔가 주변이 어수선합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쪽으로 저물고 있었다. 하간성에 당도하기 전 길목에 있는 헌현(獻縣)에 이르렀을 때 최수일은 달리던 말을 멈추고 뒤쫓아 오던 김우에게 소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반쯤 허물어져 가는 쇠락한 헌현의 현성 안에서는 불이 피어오르고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심상치 않으니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헌현을 둘러싼 토성은 그야말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문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이번 대홍수 때문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유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허물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상 없느니만 못한 상황이었다.
아무런 제지 없이 현성 안으로 들어선 김우와 최수일은 깜짝 놀랐다.
성 안에는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명 소리가 저쪽에서 들립니다.”
할 말을 잊은 최수일이 어안이 벙벙해져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내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김우에게 말했다.
“나도 들었다. 어서 가보도록 하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희는 지금 고작 두 명입니다. 혹여 위급 지경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매우 곤란합니다. 일단 하간성으로 들어가서 헌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다. 이곳에서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을 알았는데, 어찌 진상을 알아보지 않고 신변의 안위를 들어 물러나겠는가?”
최수일의 대답은 듣지 않고, 김우는 바로 말을 달려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불타는 헌현의 옛 현청 앞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 하북 주차군임에 분명한 병졸 열댓이 여자 한 명을 겁탈하려 하고 있었다.
이들은 낄낄거리며 여자의 가슴팍을 주물럭거리고, 머리채를 잡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욕을 보이고 있었다.
“這家㎹, 別쵸我! 把쵴的手松開!(이놈들, 날 끌지 말고 이손을 놓아라!)”
여자는 절규하며 이들을 향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김우는 주저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일발 장전하고서는 공중에다 쏘았다.
여자를 겁탈하려 하던 병사들은 이내 허겁지겁 바지춤을 끌어 올리고 바닥에 던져 놓았던 총을 쥐기 시작했다.
“누구냐, 이놈!”
이들은 자신들이 재미 보는 것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며 권총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이내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의 군복을 보고서는 아연이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북 주차군의 고급 장교임에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무리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 하나가 엉거주춤 나머지를 제지하고서 앞으로 나와 김우에게 물었다.
“15사단 상사 도무생입니다. 어디 소속의 어느 분 되십니까?”
“사단 본부 작전계 대위 김우다. 도대체 무슨 경위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가?”
상사 도무생은 김우의 관등성명을 듣고는 그만 얼굴에 피가 싹 빠지는 느낌이었다.
15사단에서 김우는 알게 모르게 유명인사였다.
본인도 별 티를 내지 않고, 사단 본부에서도 김우의 신분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놓았지만, 주광재 대령 같은 기회주의적이고 입이 싼 사람이 있는 이상 알려지지 않을 턱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단 병력들은 김우 대위가 국왕의 삼남인 정경대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것이, 저희는 하북 순무의 요청으로 일대의 비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차출된 병력 중 일부인데, 오늘 정오에 이곳 헌현에 비적 떼들이 잠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당도해 비적 떼를 소탕하고 잠시 쉬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댓 명의 인원으로 인원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비적을 소탕하고 여인을 겁간하려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그대들의 지휘관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일개 소대 병력이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가?”
“저희는 연주명 대위가 이끄는 특무중대 소속입니다.”
“연주명 대위와 나머지 중대원들은 어디 있는가?”
“저, 아마 지금 창주 일대에서 주둔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왜 이곳에 따로 떨어져 와 있는가?”
“…….”
김우의 신문에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말이 없었다.
김우는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들은 비적을 소탕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마을을 덮쳐서 불태운 것임에 분명했다.
진급을 위해 상급자에게 뇌물을 공여하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존재했고, 특히나 연주명 대위의 직속상관인 주광재 대령 같은 경우에는 그런 뇌물을 당연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자금을 모으기 위해 비적 소탕을 핑계로 멀쩡한 마을을 약탈한 것이었다.
도무생과 그 조무래기들은 그 와중에 자신들도 패물을 좀 챙기고 여자를 겁탈하며 재미도 좀 보자고 이 일에 자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김우는 겁탈 당할 뻔했던 여자를 자신 앞에 데려오라고 했다.
“請問芳名?(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김우는 2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익혀둔 관화(官話)로 여자에게 물었다.
옷고름이 풀어헤쳐진 채로 여자는 독기 서린 눈으로 김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我叫劉靑鈴.(유청령이요.)”
“到底發生了什큯事?(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유청령이 전해 준 이야기는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이곳 헌현의 조그만 서당을 운영하는 선비의 외동딸로, 그날 아침만 해도 조용하게 그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헌현은 그간 기근과 대홍수로 인하여 사람들이 많이 떠나가 겨우 삼백여 명 정도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으나, 밥을 굶긴 해도 분란은 없었다고 했다.
그녀 또한 아버지에게 점심으로 내어 갈 풀죽을 쑤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을에 말을 탄 병사들 열댓 명이 난입해서는 비적을 찾는다며 젊은 남자들을 총으로 쏘고 집집마다 문을 열어 패물들을 털기 시작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병사들은 물러서기는커녕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찍어 내리고 마을에 불을 붙였다.
아수라장 속에서 일부는 도망치고, 또 일부는 총과 검에 죽어 나갔다.
겨우 15명에 불과한 병력이었으나, 비무장 상태인 헌현의 주민들은 이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숨어 있다가 늙은 아버지가 걱정되어 나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울면서 아버지의 시체를 수습하려는 마당에, 그녀를 발견한 요동병들이 이곳으로 끌고 와 겁탈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젠장맞을, 일단 튀어!”
여자가 눈물로 김우에게 호소하는 것을 보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것을 직감한 상사 도무생이 휘하 병력에게 도망치라고 명령했다.
아무리 군기가 해이하다고는 하나, 국왕의 아들을 죽여서 이 일을 묻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 마당에 곧장 붙잡혀서 사단 본부로 인계되어 형벌을 받는 것도 곤란했다. 이 정도면 불명예 제대는 기본이고 본토로 이송되어 군 형무소에서 족히 십여 년은 썩어야 할 수도 있었다.
“감히 네놈들이 도망친다고 멀쩡할 성싶으냐?”
김우는 주저 없이 최수일과 함께 총을 장전해서 병사들이 도망치기 위해 올라탄 말의 다리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한번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병력을 두 명이서 제압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도무생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도망치고 겨우 두 명만을 낙마시켜서 포박할 수 있었다.
“이들을 연주명 대위에게 데려갈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에게 데려다 주면 이들의 입을 막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겠지. 그냥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측량 작업을 중단하고 내일부로 북평의 사단 본부로 가서 사단장께 직접 보고하겠다.”
“이 여인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여기 그냥 두면 또 모진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최수일이 측은하다는 듯이 주저앉아 있는 유청령을 바라보았다.
김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서는 물었다.
“這早晩沒人照顧, 女子單身必定危險, ?我來.(이제 돌보아 줄 사람도 없고, 여자 홀몸은 반드시 위험할 것이니, 함께 갑시다.)”
김우의 말에 유청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750년
경안(慶安) 21년 계춘(季春)
대순제국 하북성 북평부(北平府)
헌현 사건으로부터 다시 한 해가 흘렀다.
김우는 곧장 측량 작업을 중단하고 포박한 두 명의 병사를 이끌고 북평으로 향해서, 이들을 바로 사단 본부로 끌고 가 사단장 어재신 소장 앞에 세웠다.
어재신 소장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즉각 연주명 대위를 창주에서 소환하고, 그 직속상관인 주광재 대령을 소환해서 일의 경위에 대해서 다그쳤다.
그러나 주광재 대령은 뻔뻔스럽게도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하며 연주명 대위가 병력 운용을 잘못한 것이라고 부하의 책임으로 몰아세웠다.
연주명 대위는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자, 또다시 자신은 그런 일을 지시한 적이 없고 탈주병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변명했다.
일은 그렇게 유야무야 묻히는 듯했다.
어재신 소장은 증거 없이 주광재 대령과 연주명 대위를 처벌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이 일을 묵과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 죄는 고스란히 김우가 붙잡아 온 두 명의 졸병에게 씌워졌다.
마음대로 부대를 이탈하여 민간을 약탈했다는 죄목으로 이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총살당했다.
이들은 분명히 죄가 있으나 꼬리를 잘라 버리고 이 사건에 대해 본질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은 면피를 한 셈이었다.
더욱 어이가 없는 일은 적반하장으로 주광재 대령이 김우를 찾아와 일을 크게 만든 것을 따지고 든 것이었다.
“아니, 대군 나리. 제가 이제껏 대군 나리의 편의를 봐 드리기 위해 한 것이 얼마인데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까짓 버러지 같은 되놈들 마을에서 조금 소동이 있었다고 멀쩡히 군문에서 충성하고 있는 장교들을 절단내려 하십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앞으로 이 일은 묻어주십시오. 이래저래 실망이 많습니다.”
주광재가 갑자기 찾아와 성토를 하고 간 뒤, 김우는 그저 얼이 빠져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그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왕국의 군대라는 것이 이 모양이라는 것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요동군은 그간 강병으로 이름이 높았고, 군 기율이 엄정하고 신사적인 군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김우는 이제 그것이 본토 안에서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는 주차군은 순나라 백성들에 대해서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해도 그저 편견이려니 하겠는데, 종래에는 아주 부패한 순나라의 지방 장관들과 결탁해서 민초들을 약탈하고 겁박하고, 제멋대로 행세하고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헌현에서의 일은 그저 일부일 뿐이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분명히 하북 순무의 귀에도 이 일이 벌어진 사실이 들어갔을 터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북성의 관리들은 조용했다.
하기야, 순 조정에서 심지 굳고 백성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하북이나 산동에 순무로 보내려 하더라도, 요동군에서 압력을 넣어 부패한 인사를 발령내도록 할 터였다.
듣기에는 요동군과 연줄이 닿아 있는 부패한 조정 관료들에게 요동군에서 직접 뇌물을 괴어서 다루기 쉬운 사람을 순무로 보내도록 한다고 했다.
지금의 하북 순무 박희래(薄熙來)도 그러한 인물이었다.
자신은 북평성의 화려한 저택에서 처첩들을 거느리고 온갖 위세를 부리며 살면서, 정작 민생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부패로 불린 돈을 가지고 요동 상인들에게 투자해 기근이나 홍수 시기에 이들과 함께 곡물을 매점매석하여 배를 불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만큼, 순나라에 체류하는 많은 요동인들은 순나라의 민생이 고달픈 것이,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부패한 순나라 권력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순나라 조정과 관료가 썩어 있지 않다면 이런 환란이 지속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들은 물자를 유통시키고 상업을 진흥시키며, 군대를 파견해 순나라의 치안을 보호해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실상은 요동의 제국주의적 정책과 부패한 순나라 권력이 결탁하여 나라를 완전히 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요동의 대군으로서 김우의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요동의 왕실 일족으로서, 자신은 모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요동인의 기상은 진취적이고 불의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적인 군주와 문명의 발전에 앞장서는 신민들이 불리한 자연적 환경 아래에서도 위대한 나라를 건설했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국경 바깥에서 요동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직접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난 뒤, 김우는 매우 찹찹한 심정이 되었다.
우국(憂國)의 논리에 편승하여 이러한 일들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매우 쉬웠다.
내지의 부당한 대우에 저항한 요동은 번국(藩國) 속지에서 벗어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고, 식산과 흥업을 전진시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학문은 뛰어나고, 군대는 탁월하여 불리한 지정학적 요건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발전했다.
점차적으로 보급된 의무교육 제도에 의해 국민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었고, 왕권과 의회 권력의 조화로 인하여 내치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경의 밤거리는 유등(油燈)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 풍족한 물자가 부민들의 살을 찌웠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요동인들이 뛰어나고, 훌륭한 국민들이라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누구나 순나라에 입경하여 농촌 지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가난함과 나태함에 깜짝 놀랄 것이었다.
거리에는 오물이 넘쳐 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적떼기 같은 옷을 걸치고 다녔다. 요동의 가난한 노동자들도 이렇게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심양에서도 신발도 없이 맨발로 쓰레기를 줍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걸하는 사람도 흔했다.
그러나 지금 이 세계에서 그렇지 않은 도시가 있던가. 적어도 요동에서 이런 가난이 보편적으로 만연해 있지는 않았다.
이 구질구질한 삶을 보고 나서 순나라의 사람들을 폄훼하는 것은 간단했다.
무지몽매한 봉건군주와 관료들, 그리고 지능이 모자라고 나태한 백성들의 합작품이 바로 이 무너져 가는 나라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이 정말 그러한가? 이 땅위에 한때 문명의 씨앗이 뿌려졌었고, 찬란한 군주들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제국을 경영했었다.
이 몰락이 모두 그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잘못하고 미개한 탓이니 요동의 수탈이 정당화된단 말인가.
김우는 한동안 그러한 생각에서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이라면 어떠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왕위에 오를 가능성도 없는 그저 왕가의 삼남일 뿐이었다.
아직까지 국왕의 영향력이 상당한 요동이었으나, 대신 승계 구도에서 벗어난 일반 왕족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김우의 앞으로의 인생은, 군복무를 마친 뒤에 성경으로 돌아가 연금을 받으며 왕족으로서의 한가한 인생을 즐기거나, 학문을 수양하거나, 더러 숙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 것이 최선이었다.
복잡한 김우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바로, 그가 헌현에서 데려온 유청령이었다.
그녀는 이제 열일곱의 나이임에도 속이 깊고 마음 씀씀이가 넓었다.
한동안 헌현에서 겪은 모진 일들 때문에 입을 꼭 다물고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으나, 점차 안정을 찾은 뒤로는 도리어 김우의 복잡한 마음을 헤아려서 다독여 주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익혀 나갔고, 휑한 김우의 관사를 사람 냄새 나게 조금씩 바꿔 나갔다.
처음에는 그녀를 후견해 줄 만한 훌륭하고 인품 좋은 신사를 하나 수배해서 보내려 했으나, 점차 김우는 그녀를 내보내는 일에 미적거리게 되었다.
그녀가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마음도 한층 밝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옛말에 군주는 시름하지 말고 헤아리라고 했어요. 근심하여 몸과 마음을 해치는 것보다는, 도량 있게 널리 보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해요.”
그녀의 속 깊은 한마디 한마디가 김우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는 슬슬 군문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 왕립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다시 이곳 순나라로 돌아와 제민(濟民,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윤을 남기고자 남을 빼앗는 장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남이 굶지 않게 돕기 위해 하는 장사를 할 생각이었다.
“이곳 생활에서 더 이상 낙을 찾지 못하겠다. 청령아. 나와 함께 요동으로 가지 않으련? 그곳에서 내 살림을 좀 돌봐주었으면 좋겠다. 공부가 끝나면 다시 하북으로 돌아와 천진에서 업장을 하나 열 생각이다. 남을 돕는 제휼의 장사를 해보려 한다.”
그녀는 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날 이후로 몸을 어디 의탁할 데 없는 부평초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김우를 품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지금 그를 떠나서는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가야 할지 그녀 자신으로서도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요동의 대군인 그의 부인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듣기에는 요동에서는 첩실을 두는 것이 금지 되어 있다 하니, 아마 첩실이 되기를 바라기도 힘들 터였다.
그래도 홀로 살며 욕을 보느니, 그의 곁에 있는 편이 나았다.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1750년 가을, 정경대군 김우는 소령(少領) 진급과 함께 출군문(出軍門)의 의사를 표명했다.
명예법령은 복무 연한을 명시하고 있지 않았기에 김우가 군문을 나서겠다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4년 가까이 하북에서 군 생활을 하였으니, 김우는 대군으로서 제 할 몫을 다 한 셈이었다.
정식으로 요동 군부에 장계가 올라가고, 의정부에서 전역 명령을 하달하고, 국왕의 인가까지 받음으로써 김우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그와 함께 그의 부관이었던 최수일도 중사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김우는 최수일과 유청령을 데리고 천진항에서 요동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기 전에, 잠시 남행하여 황하를 찾았다.
도도한 물줄기는 마치 언제고 그 자리에서 흘렀던 것처럼, 짙은 황토를 품은 채로 여울져서 파도가 몰아치는 발해(渤海)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이백은 황하의 도도한 물결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한탄하며, 짧은 인생을 마음껏 누릴 것을 권했었다.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힘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도 이와 같아 한 번 머리가 세어지면 다시는 검게 되지 못한다. 이러한데 어찌 하루하루 기꺼이 살아가지 않겠는가.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날들인데. 그 아까운 날들을 근심하며 보내기 보다는 헤아리면서 살아가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일 터이다.
김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떠 보았다.
황하가 바다로 흘러 나가는 하구 위로 널따란 토사(土砂)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로 파도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