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9장 남양신월(南洋新月) (70/82)

제69장 남양신월(南洋新月)

「초기 문명들에 대한 이러한 주관주의적 태도는 과학 정신에는 전혀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문명화된 민족과 문명화되지 않은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과장이며, 이는 특히 경제 영역에서 그렇다.

역사가들은 유럽 농업지대의 산업적 삶의 여러 형태는 최근까지도 몇 백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한결같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천성적 자질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회에 고루 나타나며, 인간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도 변함 없이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폴라니 카롤리(Polanyi Karoly),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London:1944)

1753년

홍문(弘文) 15년 중추(仲秋)

유구국 스이(首里)

가을인데도 남쪽 바다는 후덥지근했다.

남국의 높은 하늘에서 내려쬐이는 강렬한 햇살 아래, 돌섬이 바다에 물려 들어가는 언저리로, 태평양 저 먼 바다에서 밀려와 하얀 포말이 되어 부서져 내려갔다.

유구제도의 본도(本島)이자 유구국의 도읍이 자리한 우치나(沖엣, 오키나와)섬을 둘러싼 수려한 바다가 저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뻗어 있었다.

유구국은 진서의 남쪽 끄트머리에서부터, 대만도(臺灣島)에 이르기까지 늘어서 있는 유구제도(琉球諸島, 루추스토)에 자리한 나라였다.

15세기 무렵에 중개무역의 거점으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획득했으며, 이후 대한제국과의 조공책봉관계를 수립하여 한국이 형성한 인도양―태평양 무역 질서에 뛰어들게 되었다.

국토가 넓지 않은 일련의 좁은 섬들로 이루어진 탓에, 일찌감치 포화 상태에 이른 인구는 외부로 방출되기 시작했고, 영주로도 많은 유구인들이 건너가 척지(拓地)하고 정착하기도 했다.

종래에는 백여 년 전, 타완틴수유(泰琓國, 잉카)의 남쪽 해안 지대 일대에 영구적인 식민 정착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 식민지는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나오는 선박들의 중간 기항지로서 성장하기 시작했고, 유구국의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분봉(分封)되어 통치하는 형태로 독립적인 통치권을 영유하기도 했다.

「카지아가리누쿠니」라 이름 붙여진 이 식민 영토는 한자로 옮겨 적으면 곧 풍동지국(風東之國)으로, 속칭 풍동(風東)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또 가까운 대만의 북부 해안에 거점을 만들고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유구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본국과 식민 지역의 모든 인구를 합쳐서 채 100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유구인들이었으나, 그 활력만큼은 비상하게 대단해서 특히 대창해(大滄海, 태평양)을 중심으로 규모가 큰 상업선단(商業船團)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위 「루스」, 즉 유상(琉商)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불렀다.

또한 유구인들은 최근 들어 고래잡이[捕鯨]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유지(油脂)에 대한 수요가 주로 고래 기름으로 충당되고 있었고, 유구인들은 거의 태평양 일대에서 독점적으로 포경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 경제 속에서 나름의 독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유구인들은, 스스로도 유구인이라는 뚜렷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유구어는, 루추구치(琉球口)라고 했는데, 계통상 일본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나 사실상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언어로 갈라져 있었다.

더군다나 독립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이 등장한 이후로 이 유구어는 국어(國語)로서 매우 세밀하게 가다듬어졌다.

본섬인 우치나의 방언이 획일적으로 뭇 섬의 방언들을 제압하고 일상 언어로 등극했으며, 정교회 전래 이후 이루어진 유구어 성서(聖書)의 편찬과 왕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한 국사(國史)의 편찬 등으로 정교화된 문어(文語)로 유구어는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유구어는 대체적으로 일본어와 많은 음가를 공유하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상이했다. 특히 유훈(琉訓)이라 불리는 유구식 한자 훈독(訓讀) 방식은 일본어와는 매우 상이한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동녘 동(東)을 일본식 훈독으로는 「히가시」라 하지만, 유구어에서는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휘가시」라는 예외적인 읽기 방식 외에도 「아가리」라는 고유의 훈음이 있는 식이었다.

같은 한자도 유구어에서의 음운 법칙에 따라 상이하게 읽혔는데, 예를 들자면 오키나와는 우치나, 류큐는 루추, 왕성(王姓)인 「쇼(尙)」 씨는 「스」로 불리는 식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유구어의 배경 때문에, 유구국 출신의 귀족 계층 학자였던 키얀 페쿠미(喜屋武親雲上)는 이러한 유사성에 착안하여, 유구어, 진서어, 일본어의 세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이를 「열도어족(列島語族)」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유구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언어에 매우 열렬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해외 어디에 나가서도 그들의 결속력은 지속되었다.

영주로 이주한 지 벌써 수세대가 넘어가는 유구인들이 그들만의 정착촌을 형성하고 문화와 고유 관습을 지켜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고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있는 그들의 출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큰 집단에 흡수되기 쉬운 여건하에서 오히려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인 결집력을 도모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의 포경업을 유구인들이 장악한 것 또한 철저하게 기술과 노하우를 그들 사이에서만 공유하고, 어장에 대한 정보 또한 유구인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구인의 공동체적 전략은 상당 세월 유효했고, 때문에 지속적인 성공을 유구인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늘 통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지역에 진출했을 때에는 이런 뭉치는 습성이 오히려 배타적인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던 것이다.

유구인들이 최근에 지속적으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곳이 바로 대만이었다.

가까운 지척에 있는 이 섬을 유구인들은 팽창 과정에서 놓치지 않고 일찌감치 왕국의 강역에 포함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다해 왔었다.

이미 15세기 말엽에 대만의 북부 지역에는 유구인들의 어항(漁港)이 들어서 있었고, 이러한 정착지들은 이내 도시로 성장했다.

복건성과 대만섬 사이의 항로의 보급 기지로서 이들 유구 정착지는 성장할 수 있었고, 16세기에는 관리가 파견되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만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저항적이었고, 호전적인 이들을 물리치고 적은 숫자의 이주민들로 섬을 장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비슷한 시기 유구인 정착지 인근에 식민지를 건설한 카스티야가 섬의 이름을 포르모사(Formosa)로 붙이고 유구인들과 섬의 식민화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카스티야인은 이내 유구국의 2만 병력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었으나, 그 사이 섬의 남쪽에는 네덜란드 식민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카스티야에 비해서 강적이었다.

원주민까지 삼자 간의 얽혀든 여러 번의 충돌 끝에, 잠정적으로 유구국과 네덜란드 정부 사이에서는 대략 섬을 남북(南北)으로 할분하여 서로 경계를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잠정적인 타협을 보았지만, 실상은 어느 쪽도 해안 지역의 몇몇 거점들을 제외하고는 섬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7세기 중엽, 캄차트 아슬라미에(Kamachat Aslamie)라 불리는 원주민 영웅이 나타나, 스스로 「레이란(Leilan)」, 곧 태양의 왕을 자칭하고 중부 평원 일대의 원주민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소위 「미다그(Middag) 왕국」으로 알려진 이들을 유구나 네덜란드 어느 쪽에서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들은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무시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다그 왕국은 해협 맞은편에 등장한 양(梁) 나라와 매우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대만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하고자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양 나라의 강무제(康武帝) 정성공(鄭成功)은 적극적으로 미다그 왕 캄차트에게 돈과 무기를 제공했다.

또한 많은 복건 출신의 양나라 사람들이 이 미다그 왕국의 영토로 건너가 정착했으며, 이들은 미다그 왕국에 관료제도를 이식해 주고 행정 관료 및 상업에 종사하며 왕국을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협력 관계 속에서 미다그 왕국은 화약무기로 무장하여 주변의 평원 지대의 대만 원주민들을 하나둘씩 통합해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유구와 네덜란드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네덜란드는 남부 지대의 거점지인 제일란디아(Zeelandia) 일대를 사수하는 것에 만족했다.

어차피 그들이 대만 전체에 식민 권력을 확장시킨들 별로 남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거점 지배 전략을 통해서 새롭게 문이 열린 대한제국의 내지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의 중계지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군사력을 투사해 가며 섬 전체를 통치하는 것보다 경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유구국에서는 북부 해안 지대에 이주하는 자국민의 숫자와 주둔 병력을 늘이고, 북부 지대에서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등의 극단적인 조취를 취해 가면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분투했다.

미다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구인 식민자들은 중부 산악 지대의 고산족(高山族)들을 이용해 이이제이의 전략을 시도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장기적인 분란의 씨앗이 되었다.

그 뒤로 백 년에 걸쳐 미다그 왕국과 유구인들, 그리고 산악 지대의 고산족 원주민들은 서로 견제하며 끊임없는 싸움을 벌였다.

이 끊임없는 전란을 통해 이득을 본 것은 네덜란드였다.

이들은 세 집단 모두에게 무기를 팔고, 보급 물자를 지원하고, 또 한쪽이 우세해지면 중재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편취한 것이었다.

유구국이 이백 년에 걸친 싸움 끝에 얻은 성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태평양 반대편에 개척한 풍동국이 훨씬 성장 속도가 빨랐다.

이곳에서도 유구인들은 지역 원주민인 마푸체(Mapuche)와 싸워야 했지만, 적절하게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한 평원 지대 장악을 대가로 마푸체족의 숙적인 타완틴수유와의 싸움에 쓰일 말과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일찌감치 안정적인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허나 유구국은 대만 북부를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곳의 기름진 농토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이미 유구국의 농업 생산의 7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갈수록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영토는 이들에게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중계무역과 포경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의 많은 부분을 다시 이 대만 경략에 탕진해 가면서도 이 식민지를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유구국왕 쇼 치(尙敬, Sjoo ii)는 이 대만 북부 식민지에 대한 확실한 영유권을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배타적으로 북부 지역에서 원주민을 몰아내는 추방 정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동화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곧 유구계 정착민들에 의하여 반발을 사게 되었다.

자신들이 굴러들어 온 돌임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과 땅을 나눠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또다시 한 차례 학살이 벌어지고, 분란은 지속되었다.

유구국왕이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강제로 이를 중지시키고 나서야 소요가 잦아들었다.

유구의 조정 중신들은 대만 북부의 통치 방식을 재고할 것을 국왕에게 요청했고, 국왕 쇼 치는 결단을 내려서, 왕명으로 대만 북부의 식민 지역을 유구왕국의 정식 영토로 편입하고, 귀족인 아지(按司)들을 대만 북부에 봉하여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히 마을과 인구, 정착지와 농경지, 그리고 미개간지 및 원주민들의 취락 분포 및 행정 권력이 미치는 범위 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한국의 양전(量田) 사업을 본떠 대만 식민지 일대에 실시하고자 했다.

이 양전 사업에 경험이 있는 기술자들이 유구국 내에서는 매우 부족했고, 때문에 유구국에서는 외부 인력들을 초빙해 오기 시작했다.

주로 한국 내지에서 측량 기술 및 작도법(作圖法)을 익힌 사람들을 구해오는 한편, 요동에서도 사람을 구했다.

북평에서 제대한 뒤 정경대군을 따라 심양에 들어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측량술을 공부한 뒤, 의정부의 말단 관리로 촉탁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던 최수일도 얼떨결에 유구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인력 수급을 위해 성경에 주재하는 유구국의 고등판무관이 비공식적으로 의정부에 인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고, 이것이 정경대군 김우의 귀에 들어가자 그가 직접 최수일을 추천해 준 것이었다.

“이제 겨우 의정부 생활에 적응했는데, 갑자기 유구로 파견이라니요. 대군 나리도 너무하십니다요.”

갑작스럽게 김우를 통해 이 사실을 통보받은 최수일은 툴툴거리며 김우를 탓했다.

“내가 다 자네가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으라고 추천한 것인데 그리 입이 나올 것은 뭔가.”

“유구도 아니고 대만으로 간다면서요.”

“대신 유구국 정부에서 두둑하게 사례금뿐만 아니라 봉급도 지급하고, 거기에 더해서 각종 경비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하니, 가서 일 년을 머물고 혼인 자금이라도 마련해 온다면 좋지 않겠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수일도 구미가 조금 당기기는 했다.

일 년간 있는 조건으로, 요동화로 거의 80관에 달하는 거금을 요동국 정부에서 고용비로 주겠다고 하니, 박봉에 시달리는 최수일 같은 말단 관리에게는 썩 괜찮은 제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753년 가을, 최수일은 유구국의 도읍 스이성의 외항(外港)인 나화(那覇)에 다른 두 명의 요동인 측량 기사와 지도 제작자와 함께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보름간 나화의 접빈관에서 체류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이내 유구국 정부가 준비해 둔 선편으로 대만으로 향하게 되었다.

1754년

홍문(弘文) 16년 맹춘(孟春)

유구령 이리시마(西島)섬 유나바루(與那原)

대만 섬의 이름은 여럿이다.

대륙에서는 흔히 대만(臺灣)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서양에서는 포르모사(Formosa)로 알려져 있었다.

유구인들은 서쪽 섬이라는 뜻의 「이리시마」라 불렀다.

유구령 이리시마의 행정 중심지는 섬 북쪽 해안의 넓은 평원 지대를 끼고 있는 곳에 세워진 유나바루(與那原)였다.

인구 사만여 명의 이 항구에는 유구국왕이 직접 임명한 이리시마 척지방(拓地方), 즉 이리시마의 총독이 기거하는 둔소(屯所)가 있었다.

이 둔소는 원래 카스티야가 세운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요새였으나, 유구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행정청(行政廳)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요새 건물을 중심으로 유나바루의 항구가 조성되고, 많은 인구가 모여들면서 유구령 이리시마, 즉 북부 대만의 행정 중심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최수일이 처음 행장을 푼 곳 또한 바로 이곳, 유나바루였다.

동중국해와 면한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이 항구에는, 대만해협을 오고 가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부둣가에는 물자를 하역하는 인부들이 바쁘게 오고 가고 있었고, 항구에 면한 선창(船廠)에서는 대만해협에서 흔히 보이는 정크선이 바쁘게 건조되고 있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유구어의 향연 속에서 최수일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했다. 요동은 벌써부터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을 터인데, 유나바루에는 아직 훈훈한 바닷바람이 따뜻한 공기를 몰고 오고 있었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최수일은 적어도 이곳에서 겨울을 나게 된 것만큼은 매우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리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들께서 도착하시는 줄 알고 척지방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에서 다른 요동인 측량 기사 둘과 함께 내리자, 항구에 나왔던 조선말이 능숙한 하관(下官)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맞아들였다.

내리자마자 척지방을 만나라는 이야기에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격의 없이 쉽게 사람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척지방(拓地方)이란 직책은 사실상 이리시마의 총독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구왕국의 관직으로, 가장 높은 직책인 삼사관(三司官)의 세 관직과 거의 같은 항렬에 놓여 있었다.

사실상 유구왕국 내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척지방이 독특한 점은, 왕족과 웨카타(親房)라 불리는 최고위 귀족들이 투표로 선출하는 삼사관과 다르게, 척지방은 오로지 국왕의 교지(敎旨)에 의해서만 임명된다는 점이었다.

당대 이리시마 척지방은 대외적으로 사이 온(蔡溫, Sai On)이라는 당명(唐名, 중국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구시찬 웨카타 분챠쿠(具志頭親方文若)였다.

이미 삼사관에 선출되어 최고 관직을 역임한 전례가 있는 척지방 사이 온은 한당화(韓唐和, 한중일)의 삼언(三言)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유구왕국에 최초로 대학급의 고등교육을 도입한 사람이었다.

유구의 역사를 정리한 저술 《중산실기(中山實記)》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1682년(건희 15)생으로 이미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나,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일을 이리시마를 완전히 유구의 강역으로 다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이 섬으로 건너와 있는 사람이었다.

유구의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아 이미 주변 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진 바가 있어 최수일도 그 이름만큼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스페인인들이 지은 성이라고 해서 홍모성(紅毛城)이라고도 불리는 척지방 사이 온의 관저는, 유나바루의 항구에서 언덕을 타고 좀 올라간 자리에 있었다.

항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예전 스페인인들이 남겨둔 건물과 유구식의 관청들이 조화롭게 섞여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납작한 모양의 독특한 유구풍의 관모(官帽)를 쓴 관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고, 옛 요새 건물의 위에는 유구국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검고 붉은 줄 위로 곡옥(曲玉) 모양의 문양이 원을 그리며 맞물려 있었다.

소위 「삼파기(三巴旗)」라 불리는 깃발이었다.

“이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맙소이다. 나는 이곳 이리시마의 관방에 앉아 있는 늙은이올시다.”

책상에 앉아서 작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한서(漢書)를, 돋보기를 끼고 천천히 읽고 있던 사이 온은, 손님들이 당도했다는 소리에 그들을 집무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자신을 소개했다.

“요동에서 온 측량사와 작도관입니다. 이렇게 직접 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고 영광씩이나 보겠소. 우선 앉아 보시오. 내 직접 이리 뱃전에서 내리자마자 그대들을 부른 것은, 그만큼 이 일이 중하기 때문이외다. 사실 해안 지대의 많은 부분은 우리 유구 관리들과 한국에서 불러온 양전관들에 의해 거의 많은 부분에 양전이 끝났소. 그런데 문제는…….”

사이 온은 몸을 일으켜 한쪽에 펼쳐져 있는 지도로 향했다.

그는 허리춤에 꽂아 놓고 있던 접부채를 꺼내 들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대만 섬의 중북부쯤 되어 보이는 곳이었다.

빼곡하게 지명이 적힌 마을들이 표시되어 있고 도로가 그려져 있는 북부 해안 지대와 다르게, 이곳에는 어떠한 경계를 나타내는 선도 그려져 있지 않고, 듬성듬성 원주민 부족의 이름과 강과 산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지역이요. 이 일대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던 땅이오. 여러 번 이 일대에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우려고 노력해 왔지만, 열의 일곱은 생번들과의 끝없는 전투로 사라지고 말았소.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대략 스물두 개가량의 촌락이오. 이 마을들은 호전적인 생번들에게 둘러싸인 곳에서 우리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가장 중요한 거점들이오. 이번에 특별히 요동에 군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요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올시다. 이 지역으로 들어가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스스로 자기 몸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소. 아쉽게도 우리 유구국에서는 군대에서 측량 기술을 익힌 사람이 없소. 바다에서 해도를 그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많아도, 뭍에서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은 매우 부족하외다.”

그제야 최수일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 대만행이 추천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군 경력을 가진 사람을 요구했기에 자신을 선발했던 것이다.

그저 정경대군의 입김으로 얼떨결에 돈 벌러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최수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 될 성싶었다.

함께 온 다른 두 요동인도 조금 술렁이는 것이, 그들도 특별한 사전 지식 없이 온 것에 분명해 보였다.

“여하간 이런 이유로, 귀관들을 이렇게 초청하게 되었고, 한시가 급한데 인원은 부족한지라 세 분이 나누어서 이 지역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소. 물론 이리시마의 정병들이 여러분을 대동하며 수행할 일들을 도울 것이오. 건승을 빌겠소.”

사이 온의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며칠간의 휴식 뒤에 최수일이 배정받은 곳은, 그 남쪽의 험하다는 오지 중에서도 가장 원주민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이곳은 높은 동부 산악 지대에서 배타적으로 자신들만의 생활을 영위하는 고산족들을 제외하고는, 평야 지대에서 농경과 수렵을 병행하는 원주민들 중에서는 가장 전투적인 타오카스(Taokas)족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대만, 혹 이리시마의 원주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가 서쪽 해안을 따라 넓게 형성된 평야 지대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이고, 두 번째가 산악 지대에서 오로지 수렵과 전투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고산족들이었다.

이들은 또다시 서로 제각기 다른 방언들을 사용하는 독립적인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주로 식민 정착민들과 부딪히게 되는 이들은 바로 평야 지대의 원주민들이었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유구나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산 속 깊은 곳의 원주민들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먼저 가장 북쪽 해안에 있던 케타갈란(Ketagalan), 바사이(Basay), 쿨론(Kulon)의 세 부족은 유구인들의 정착이 가속화됨에 따라 이미 한 세기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남쪽에 있는 시라야(Siraya) 부족은 네덜란드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고 식민 지배자들과 동화되었다.

중부에 있는 파폴라(Papola), 바부자(Babuza), 호안야(Hoanya)의 세 부족은 연대하여 미다그 왕국의 초석을 쌓았다.

이렇게 해안 지대의 원주민들은 사라지거나, 동화되거나, 혹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건국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유일하게 독립적으로 남아서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 바로 타오카스족이었다.

이들은 유구령 이리시마와 미다그 왕국 사이의 공백 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양쪽 모두를 적대시했다.

그러나 유구와 미다그 왕국 또한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탓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유구인들은 고산족 원주민들을 부추겨 가면서 이 타오카스족과 미다그 왕국을 공격해 영토를 넓히려고 시도했지만, 이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끊임없는 진퇴의 연속 끝에 타오카스족을 조금씩 밀어내며 그들의 영역 여기저기에 전진기지격인 정착촌들을 세우긴 했지만, 때로는 전투 끝에 마을이 사라지고, 혹은 몇 달씩 고립되거나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최수일이 양전 사업을 행하러 가게 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위험하겠는데…….’

안정되게 농사를 짓고 있는 마지막 정착촌을 떠나온 뒤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평원 지대가 뚝 끊기고는 우거진 숲과 계곡이 나타나는가 하면, 언제 닦였는지도 모를 임도(林道)는 풀이 무성해 흔적도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언제 활과 창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한 이틀쯤을 행군하곤 해야, 두터운 목책을 두르고 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유구인들의 거점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양전 사업을 하란 말입니까?”

농사를 짓기는커녕 거의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반은 군인인 정착민들이, 가끔 내려오는 보급을 기다리며 원주민들과 싸우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이곳에서 무슨 양전을 한다는 것인지 최수일은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원주민들과 마주치지 않고 깊은 숲에 자리한 거점인 우나다키(恩納岳)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최수일은 자신을 수행하여 이곳까지 따라온 유구군인 미에구스쿠(三重城)에게 툴툴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널찍한 어깨와 쌍꺼풀 짙은 눈매를 지닌 전형적인 유구인인 미에구스쿠는 웃으면서 최수일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해야지요. 농지를 계량하는 양전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측량하고 지도를 그려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경험을 떠올려 찾아오지, 참고할 지도도 하나 없어요. 적어도 우리 땅이라면 산과 강, 그리고 마을을 그린 제대로 된 상세한 지도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에구스쿠의 말에 최수일은 일전 사이 온의 집무실에서 봤던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이리시마의 유구인 정착지, 그리고 중부의 미다그 왕국과 남부의 네덜란드인 식민지는 비교적 상세하게 지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동부 산악 지대는 거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공간이었다.

그리고 최수일이 오게 된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미다그 왕국과 유구령 식민지 사이에 제대로 그려진 것이 없는 지도의 빈 공간. 그 곳이 바로 최수일이 채워 넣어야 할 부분이었다.

허나 말이 좋아서 쉬운 일인지 매우 곤란스럽게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목책으로 둘러싸인 우나다키 마을만 벗어나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울창하게 사방을 향해 뻗어 있는 숲은 끝 간 데를 몰랐고, 어디서 타오카스족이 나타나 독이 묻은 화살을 날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수일은 이곳에서 첫날 밤 온갖 문신을 한 원주민들이 독이 묻은 화살을 쏘는 꿈을 꾸고 나서 미에구스쿠에게 말했을 때, 그는 코웃음 치며 이렇게 대답했다.

“화살요? 아니요, 생번들도 총을 씁니다. 분명히 네덜란드나 미다그의 추장 놈이 팔았음에 분명해요. 좋은 총은 아닙니다. 그냥 화승총이에요. 그래도 놈들이 그걸 쥐고 있는 이상 싸움이 쉽지는 않습니다.”

미에구스쿠는 타오카스 인들을 꼬박꼬박 생야만인이라는 뜻의 생번(生蕃)이라고 불렀다.

미다그의 국왕도 추장(酋長)으로 폄칭했다.

이러한 사고는 유구인들에게 매우 일반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최수일도 그런 것이 썩 낯설지 않다고 느꼈었다.

순나라에서 복무하던 시절에, 요동인들은 순나라 사람들을 되놈이라 부르며 멸칭했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반미개인이라는 것이었다.

생번이든 타오카스든 아직까지 보지 못한 이들은 최수일에게도 공포스러운 대상이긴 했다.

유구인들은 끊임없이 최수일에게 그들이 야만적이고 호전적이라고 강조했다.

최수일이 들은 이야기들 중에는, 생번이 어린아이를 잡아서 산채로 골을 까서 삶아 먹는다는 괴담까지 있었다.

최수일은 유구인들이 생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멸시와 공포가 동시에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곰방대에 담뱃잎을 쑤셔 넣고 발화기로 불을 붙인 다음, 최수일은 목책에 올라 멀리 숲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디선가 분명히 타오카스인들이 살고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1년간 머물며 측량과 작도 작업을 하는 동안, 언제고 한 번은 마주치게 될 터였다.

최수일은 공포보다는 그 순간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1755년

홍문(弘文) 17년 맹춘(孟春)

유구령 이리시마(西島)섬 우나다키(恩納岳)

최수일은 1년간 우나다키에서 지내며, 유구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는지를 두 눈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이곳의 측량 작업을 하고 지도를 그려, 매달 한 번씩 인편으로 이리시마의 중심지 유나바루로 보내는 동안, 우나다키 마을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 최수일이 도착했을 때 우나다키로 접근하는 제대로 된 길도 없었을뿐더러 이곳에는 젊은 남자가 대부분인 30여 명의 주민밖에 없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이곳 우나다키로 오는 안정적인 도로가 뚫려 있었고, 우나다키의 주변에서는 농지가 확보되고 농사가 시작되었으며, 인구는 2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중 30명은 군인으로서, 언제고 원주민들에게 대처하고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사수할 수 있게 주둔지를 이곳에 확보하고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유구인들이 겁을 주었던 것과 다르게, 타오카스족보다는 유구인들이 최수일이 보기에는 더욱 호전적이었다.

타오카스인들은 소금과 철을 얻기 위해서 오히려 유구인들을 찾아와 사냥감을 내어놓고 거래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유구인들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사를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주거지에서 자꾸 남쪽으로 몰아내고 핍박하는 것은 유구인들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신들이 멀쩡히 머물러 살고 있던 곳에 들어온 외지인들이 공격적으로 행동하며 쫓아낸다면, 어느 누구라도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최수일이 보기에 오히려 원주민들에 대해 조성된 편견은, 그들이 호전적이어서가 아니라 몰아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농경도 하지만 수렵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은, 정착 농경을 하는 유구인들과 상생이 좀체 맞지 않았다.

수렵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부양하는 데도 넓은 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반대로 정착 농경은 상대적으로 많은 인원을 같은 땅으로 먹일 수 있었다.

때문에 유구인들이 농사를 지을 땅을 조금씩 가져가게 되면, 그만큼 수렵민인 타오카스족은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농경이 이루어진 땅에서는 더 이상 수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점점 남쪽으로 밀려난 타오카스족들은, 또 다른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중부 지역에서 중국 문화와 이주민을 흡수해 중앙집권적 국가를 건설하고 있는 미다그 왕국에 의해 가로막혀 더 이상 밀려 나갈 공간도 없게 되었다.

같은 원주민이지만, 이들도 타오카스족을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유구인 못지않게 핍박했다.

이러한 지경에 처했으니, 타오카스족이 호전적이지 않은 것이 최수일이 보기에는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물론 충돌은 심심찮게 있었지만, 들은 것처럼 어린아이를 잡아다 뇌를 뽑아 먹는 귀축(鬼畜)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를 생번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우리를 그냥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최수일은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난히 깊은 숲속으로 지도를 그리기 위해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곳에서 스무 명 남짓한 타오카스족 사냥꾼들과 마주쳤었다.

그중에는 유구어를 조금 말할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과 마주쳐서 공포감에 질렸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호의적으로 함께 앉아 고기를 나눌 것을 권했다.

만약 이번 사냥이 잘되지 않았다면, 당신들 때문에 부정을 탔다고 생각하고 죽여야만 했었을 터이나, 이번에는 사냥이 잘되었기에 대접을 한다는 이야기에 다른 유구인들은 나중에 역시 생번은 어쩔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최수일은 조금 다르게 생각을 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유구인들과 함께 야만인들이라며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북에서 상관으로 모셨던 정경대군 김우와 지낸 시간은 그의 생각을 많이 바꿔 놓았다.

“예전, 내 선조되시는 성명대왕께서 탐라에서 거병해 폐주 이방원을 내쫓았을 때, 사람들은 섬 오랑캐가 분수를 모르고 설친다고 했었다. 신복한 지 오래지 않은 탐라는 미개한 도이들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했던 게지. 그 뒤 명나라가 개입했을 때의 명분은, 이적의 나라에 황은의 교화를 내려 폐륜을 바로 잡겠다는 것이었네. 그들에게 조선은 동쪽 오랑캐의 나라였지. 여진은 어떠했는가. 한때 금나라를 세워 대륙의 절반을 호령했던 그들은, 매양 몽골을 북적이라 부르며 천시했네. 그러나 그 결과 모든 땅과 명예를 잃고 쫓겨나 도로 천시받게 되었지. 요동에서도 여진인들이 오랜 세월 경원시되지 않았던가. 누르하치가 배를 타고 결국 영주로 건너간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일세. 지금은 어떠한가? 한때 송나라 사람들을 남인이라 부르며 멸시했던 몽골인들은 순나라 사람들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지. 내지에서는 여진 잡종이라 불리며 멸시받고, 중국인들에게는 그저 동쪽 오랑캐로 불리던 우리가 지금은 이 몽골인들을 데리고 와서 순나라 사람들을 되놈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있네. 이 되놈이라는 것이 원래 여진족에게 붙여 멸칭하던 말인데, 이제 요동에 여진인들이 거의 없으니 순나라 사람더러 되놈이라고 부르고 있네. 무슨 이유로 오랑캐였던 이들이 고상한 인종이 되고, 한때는 고상한 인종이 오랑캐가 되었는가? 아마 그런 것은 없을 걸세. 그저 어느 나라에는 일찍이 운이 있었음이고, 또 어느 나라는 흥성할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게지. 그런데도 잠시 영달을 이루었다고 주변을 괄시하면, 나중에 영락하였을 때 또다시 오랑캐 소리를 듣게 된들 누구를 탓하겠는가?”

최수일은 가만히 정경대군 김우가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아마 헌현에서의 일이 있은 뒤 몇 달쯤 지나서였던 것 같다.

완연히 이제는 군문의 일에 실증이 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김우는, 평소에는 잘 피지도 않던 담배를 물고서 늦은 밤 마루에 앉아 있었다.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던 최수일을 붙잡고서 김우는 반쯤 넋두리 삼아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때 최수일은 별로 김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왜 그런 시답잖은 문제에 복잡하게 얽매여 있냐는 것이 최수일의 생각이었다.

솔직히, 대군이라는 신분에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속 편한 생각을 한다고 여겼었다.

화북 주차군으로 발령받아 이 진흙구덩이에서 같이 살을 비비고 있는 사람들은 별별 사연들이 많았다.

대부분 뒷배가 없거나 능력이 없어 이런 외지 근무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당연하지만 배운 바도 없었고, 부대에 뒤섞여 있는 몽골인 용병들과도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순나라에 와서 온갖 비행을 일삼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정경대군 김우가 겪어본 적이 없던 삶일 터였다.

그러나 최수일은 이곳 우나다키에서 지낸 1년 간, 김우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구인들은 대체적으로 요동에서 온 자신에게 친절하고 싹싹했다.

그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기술이 좋고 재주가 있다고 하며 감탄하곤 했다.

반대로 이들은 원주민들은 생번이라고 부르며 별로 인간 취급을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어릴적부터 길들여 노예로 부리면 개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같은 조상을 지니고 있을 미다그 왕국의 원주민 귀족들이 가끔 고산지대로 인간 사냥을 나서서 굴비 매듯이 다닥다닥 사람을 매어다가 중국 대륙이나 네덜란드 상인, 더러는 유구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긴다는 사실이었다.

중국 문화와 네덜란드 문화의 영향을 받고 부유한 궁정 생활을 즐기는 미다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고산지대 원주민들과 같은 핏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문명인이었고, 저들은 야만인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우습다면 우습고, 슬프다면 슬픈 노릇이었다.

그간 이곳 외떨어진 우나다키에서 지내면서 최수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불가(佛家)의 책도 많이 읽었다.

이곳에 자신을 호종해서 따라와 친하게 지냈던 유구인 무관 미에구스쿠가 죽었을 때 최수일은 생각이 복잡했다. 그는 밤새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잠을 이루어보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미에구스쿠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번을 경멸하다 못해 질려 했다.

그의 어머니가 어느 원주민들에게 끌려가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새롭게 우나다키에 당도하는 이주민들을 맞이하러 나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목숨을 잃고 돌아왔다.

듣자하니 원주민들과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아무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아마 평소 치를 떨었으니 원주민들과 마주쳤을 때 좋은 반응이 나가지 않았을 터였다.

“……내일이면 유나바루로 돌아가신다구요. 아쉽게 되었습니다. 최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신데, 이제 보지 못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프기 짝이 없네요.”

이곳 우나다키에는 유구 옷을 입고, 유구어를 쓰며, 유구인들과 섞여 살려고 하는 원주민 청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반쯤 시종 삼아 부리고서는 형편없는 삯을 주었지만, 그는 부족에서 무슨 이유로 쫓겨나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수밖에는 없다고 했다.

그는 유난히 최수일을 좋아했는데, 아마 받는 대접이 서로 다르긴 해도 똑같이 이곳에서 이방인이란 점에서 뭔가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네. 그간 내 일도 이래저래 도와준 것이 많아 자네한테는 고맙기 짝이 없네.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받아 두게나.”

그렇잖아도 그가 눈에 밟혔기에, 가기 전에 그간 짐도 져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온갖 신경을 다 써준 것에 대해 성의라도 표하고자 금화 몇 닢을 따로 준비해 두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저는 품삯을 바라고 선생님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저한테도 친절하게 해주시니, 저도 그만큼 보답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돈을 받게 되면 그간의 우정과 믿음이 값으로 계산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 돈은 품에 두시고 노잣돈으로 쓰시는 것이 저에겐 더욱 좋습니다.”

그간 친해졌던 우나다키 주민들에게 배웅을 받아, 들어올 때에 비해 한껏 넓어지고, 오가는 사람도 늘어난 길을 따라 그는 유나바루로 향했다.

우나다키뿐만이 아니라 유구인들의 식민지는 점차 번창하고 있었다.

숲들은 점점 베어져 나가고 있었고, 한때는 그저 잡초만 무성했던 벌판 위로는 마을이 세워지고 도로가 닦이고 있었다.

북부 해안뿐만 아니라 이제는 동부 해안에도 유구인들의 정착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하니 1년 사이에만 해도 많은 성장이 있었던 셈이다.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는 이리시마의 식민지는 아마 언젠간 처녀지의 옛 흔적을 잃고 유구제도의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은 풍경으로 바뀌게 될 것이었다.

유나바루에 도착한 뒤, 그간 1년간 일한 품삯을 이리시마의 관리들에게 정산받고, 척지방 사이 온에게 수고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듣고 나서 홍모성을 나오는 길에, 최수일은 어쩐지 시원함보다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이곳 생활도 많이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춥고 겨울이 긴 성경의 삭막한 관료 생활로 돌아가느니, 따뜻한 이곳 이리시마에서 태양을 즐기며 느긋한 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였다.

결국에는 배를 타고 요동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우선은 이제 수중에 돈도 넉넉하고, 시간도 좀 남았으니 유나바루에서 달포 정도는 머물다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최수일은 숙소를 잡았다.

다음 날, 항구의 연락소에서 연락이 와 나가 보았더니, 별로 기대치도 않았던 편지가 도착해 있는 모양이었다.

“요동 성경부에서부터 편지가 보름 전에 이곳으로 도착해 있습니다.”

편지를 받아들고 누가 썼는지 보니, 정경대군 김우였다.

굳이 연락소에서 맡아두고 자신이 유나바루로 나오길 기다렸다가 전해주는 것을 보니 좀 심상치 않다 싶어 최수일은 바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안부 인사는 간략하고, 요동의 요즘 돌아가는 일들에 대해 시덥잖은 말들이 조금 첨언된 뒤, 김우는 편지에서 직설적으로 최수일에게 부탁할 것을 적어두고 있었다.

편지를 천천히 읽어보던 최수일은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유나바루에 머물고 싶었는데 일이 잘 풀린 셈이었다.

김우는 화북에 있을 때부터, 남아도는 곳에서 물건이 사서 필요한 곳에 파는 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었다.

장사의 기본이 그런 거 아니냐고 최수일이 되물었을 때, 김우는 돈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가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었다.

없이 자란 사람이라면 코웃음치고 말 그야말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최수일은 그런 김우의 생각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었다.

허나 요동으로 돌아와서도 설마하니 장사를 할 생각을 계속하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김우는 박봉을 받으며 말단 관리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그냥 다음 달에 나오는 선편으로 요동으로 오라고 하면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편지의 뒷부분을 읽어 보라고 했다.

별 생각 없이 뒷부분을 읽어 나가던 최수일은 자신더러 유나바루에다가 지점을 하나 차리라는 글을 보고 흠칫 놀랐다.

편지에는 요동화 2천관에 상당하는 금액을 환전할 수 있는 우편환(郵便換)이 들어 있었다.

처음으로 생긴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우편환은, 낯선 곳에서 신용을 확실하게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해외에서는 수수료가 매우 비쌌고 사용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이미 그것을 수수료가 지불되고, 신용이 확인된 상태의 우편환으로 동봉해 바로 부쳤다는 사실은, 김우가 이 일을 진지하게 고려해서 최수일에게 맡기려 한다는 증거였다.

이미 그 사이 김우는 여순에다가 상사를 하나 차린 모양이었다.

천진에도 지점을 하나 내었다고 했다.

그 다음이 유나바루였다.

김우는 상호 간에 이득이 될 만한 삼각무역을 생각해 놓았다고 했다.

요동의 제조품을 대만에다가 팔고, 대만에서 풍족한 쌀과 곡식을 사서 싼값에 순나라에 팔겠다고 했다.

그리고 순나라에서는 다른 요동 상인들처럼 곡식을 사지 않고 석탄을 사오겠다고 했다.

최수일도 상인 출신이 아닌지라 이것이 타당한 소리인지 아닌지는 감이 서지 않았다.

확실히 최근에 각종 증기기관이 제조업과 광업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석탄의 수요가 치솟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심양 지척에 무순 같은 거대한 탄광 도시가 여전히 석탄을 끊임없이 캐내고 있는데 순나라에서 사오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될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는 아직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은 편지에 적힌 대로 「남성물산(南星物産)」의 지점을 세우고 볼 일이었다.

최수일은 어쩐지 즐거워졌다.

유나바루 항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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