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0장 여명지대(黎明之代) (71/82)

제70장 여명지대(黎明之代)

「18세기 후반부의 동양에서 산업화가 가장 진척되고 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보통 요동을 거론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우선 셸든 쿠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여전히 1770년 시점에서도 면직물 생산은 요동보다 한국에서 2배 높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Cooper, 1926)

요동은 대체적으로 혁신적인 증기기관을 일찍 산업에 도입하고, 석탄과 철광 등의 광물자원을 풍부하게 생산해 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공업 규모에서 옛 내지의 생산력을 쫓아가지는 못했다.(Ghim, 1933)

적어도 19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이 잉글랜드가 아니라 플랑드르였던 것처럼, 동양에서도 다른 지역들에 비해 요동이 유난히 앞서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황성과 평양은 당시 동양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이었고, 요동의 성경은 이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앞서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이 뒤를 항주, 에도(江戶) 등의 도시에서 동양 도시 산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

―체자리 스테판치크(Cezary Stefa czyk),

《세계 산업사회의 구조적 기원》, (Krakow: 1937)

1761년

홍문(弘文) 2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평안도 평양부

1530년, 건양 7년에 제국 전역에 《건양력대편》에 따라 채택된 태양력 이후 제국은 230여 년간 역법을 새롭게 조정하지 않았다.

이 건양력은 채택 당시에 유럽에서 널리 쓰이던 율리우스력보다는 정확히 28일이 늦었다.

그해 음력 설날을 새로운 태양력의 정초(正初)로 삼았던 것이다.

이 역법은 후에 조금씩 고쳐져 1614년 일본이 음력을 폐지하고 채택했으며, 1660년에는 양 나라가, 1689년에는 월 나라가 채택을 했다.

근래에 동방에서 구역법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제 순나라뿐이었다.

허나 이 건양력도 점차 시대에 뒤처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역산(逆算) 방법이 율리우스력과 비슷했던 탓에, 오차도 딱 그만큼 났다.

유럽에서 그레고리력이 도입되고, 보다 정교한 그레고리력으로 여러 나라들이 역법을 바꾸기 시작하고, 종래에는 끝까지 역법을 바꾸지 않고 있던 영불 제국까지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한국의 학자들이라고 이러한 새로운 그레고리력의 우수성을 모를 리가 없었으나, 지난 수십 년간 여러 가지 요인으로 건양력은 굳게 고수되었다.

우선, 건양력 자체가 지금 동양 역법의 표준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건양력대편》을 순나라를 제외하고 극동 거의 모든 국가에서 받아가 제각기 수정하여 쓰고 있으니, 섣불리 역법을 서둘러 고칠 수가 없었다.

둘째로, 황제가 선포한 건양력을 버리고, 새롭게 그레고리력을 받아 오는 것은 그저 외국 역법을 수입해 오는 것이라 품위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차피 건양력도 율리우스력과 28일의 차가 있었고, 오히려 그레고리력을 서양 국가들이 채택하면서 39일 내외로 그 차이가 늘어났는데, 굳이 한 달이 넘는 날짜를 조정해 가면서까지 외국 역법에 맞출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홍문제(弘文帝) 즉위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를 따라 들어온 스웨덴 학자들이 정부에 의해 공식 채용되어 천문 역법을 담당하는 「관상국」에 종사하게 됨에 따라 논의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관상국의 기존 역관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역법 개정 문제를 주장하고 있었고, 스웨덴 학자들이 관상국 역관들과 함께 아예 새로운 역법의 편수에 착수하자,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보수적인 추밀원에서는 반대가 만만찮았으나, 「제도대학」의 천문학학유 민흘(閔屹)을 비롯한 학자들까지 나서서 역법 개정을 찬성하자, 결국 내각에서는 의결을 통해서 홍문 22년 11월 22일 다음 날을 홍문 23년 1월 1일로 하고, 서양제국(西洋諸國)과 날짜를 같게 하며, 그레고리력을 국내 사정에 맞게 새롭게 편수한 《홍문역법대편(弘文曆法大篇)》을 발행하고, 〈시헌칙령(時憲勅令)〉을 반포하여 역법을 공식적으로 제국 전역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역법의 사용은 더디게 진행되었는데, 의외로 요동국은 새로운 역법을 바로 받아서 적용했으나, 반대로 영주도독부에서는 척식평의회가 기존 역법을 고수할 것을 의결해서, 황제의 칙령과 의회의 각령으로 동시에 하달된 영주에서의 시헌법 적용을 거부했다.

제국의회에서 강력하게 척식평의회를 비난하고, 영주의 지속되는 자립주의노선을 단속하기 위해 병력의 파병까지 고려하자, 마지못해 영주도독부의 척식평의회는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영주에서는 9월에서야 날짜가 조정되게 되었고, 본토와는 다르게 9월 초에서 10월 중순의 한 달 반이 사라지게 되었다.

새롭게 바뀐 역법은 단순히 날짜가 며칠 사라진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매우 급변하고 있었다.

건양력이 채택되던 1530년이, 제국이 전 세계의 바다로 뻗어 나가던 영광의 절정기였다고 한다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인 1761년의 한국은 점차 저물어가는 제국이었다.

스웨덴과의 결혼 동맹으로 인도양에서의 이권을 잃어가는 속도를 조금 지연시킬 수 있었고, 여전히 대창해, 즉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제 본토가 식민지들을 손에서 쥐고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요동국도 제국의 일부였으며, 사실상 행정 권력이 척식평의회로 옮겨간 영주에도 명목상의 대도독을 파견하고 있기는 했다.

진서나 북해 또한, 내지에 비하면 중앙 정부의 권력이 느슨하게 집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중앙 권력에 포섭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치가 좀 빠른 사람이라면, 이러한 체제가 결코 앞으로 더 지속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국의 균열은 이미 백여 년도 더 전에 시작되었고, 쪼개져 가는 제국을 사슬로 칭칭 묶어서 유지해 보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 전체의 유지 여부가 앞으로 촌각에 달리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제국 의회가 더욱 집중하여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식민지 유지보다, 내부적인 고름을 잘 짜내서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미 일찍이 태동한 한국의 원시산업주의는 이미 실질적인 산업혁명의 국면을 맞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선대제적인 공장들이 범람하고 있는 황성부에서, 증기기관의 혁신으로 인한 기계공업과 광산업의 부흥이 천천히 공업의 중심을 천천히 평양으로 옮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15세기에 김세훈에 의해 도입된 제철 방식은, 코크스를 이용한 선철(銑鐵)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이 단계에서 개량되었고, 이것이 평양을 중심으로 요동과 경기도에 보급되면서, 즉각적으로 철강 생산의 혁신이 뒤따랐다.

이렇게 혁신적인 철강 생산을 바탕으로 1761년, 평양 자본가들은 대동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鐵橋)인 「대동철교(大同鐵橋)」를 놓았다.

이 웅장한 철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곳에서만 찾아오지 않았다.

정신적인 이념의 변화도 급속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을 바꾸어 나갔다.

1759년, 최초의 근대적인 노동쟁의라고 할 수 있는 직공들의 파업이 평양에서 최초로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이를 주도한 사람을 철저하게 수사하여 교수형에 처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기존의 농민 반란과 다르게, 도시에서 이런 잠재적인 소요가 발생하면 전국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철교에서 파업에 이르기까지 평양은 기묘한 형태로 이전에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의 상징들을 쏟아내는 산실이 되었다.

철교가 세워진 1761년, 기존 황성부의 4대 학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 독점을 비난하면서, 최초로 평양에 근대적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평양대학교(平壤大學校)」가 세워졌다.

이 평양대학교는 하나의 단일한 학교가 아니라 몇 개의 대학(大學) 사이의 연합체였는데, 평양에 있었던 유서 깊은 용곡서원(龍谷書院)에 유래를 두고 있는 「용곡대학(龍谷大學)」, 평양을 근간으로 한 유상(柳商)들이 돈을 갹출하여 세운 「유경대학(柳京大學)」 등이 한데 모여 평양대학교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평양대학, 특히 유경대학은 특히 이 당시 자유주의 논쟁을 최전선에서 이끌고 있었다.

중상주의(重商主義)의 정책적 방침을 정부에 조언하고 있는 제도대학의 학자들에 반발해서, 유경대학의 학자들은 보호무역을 폐지하고, 정부의 간섭을 줄이고, 자유무역을 진흥시키는 것이 경제발전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학문의 변방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중앙에는 크게 반영되지 않았고, 학문적인 엄정함이 전혀 없는 그저 자다 깨서 하는 소리라고 비웃음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자유주의적 경제 이론은 조금씩 평양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펴낸 《국부의 본성과 원인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는 평양 학자들에게 알려진 뒤 즉각적으로 번역되어 《국부신론(國富新論)》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통칭 줄여서 《국부론》으로 알려진 이 책은 평양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유경학파(柳京學派)를 탄생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다음 세기에 크게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유경학파의 토대가 이 시기에 다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움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평양은, 그만큼 그늘이 짙은 도시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평양으로 많은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18세기 초반부에 20만 명 내외였던 평양의 인구는 1761년에는 거의 황성부와 맞먹는 4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평안도는 물론이거니와 황해도, 함경도의 빈촌에서 평양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매우 헐값에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매우 좁다란 판자촌에서 위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결한 생활을 하며,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별로 새로운 풍경도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기계 노동 때문에 기존의 직조공이나 대장장이, 갖바치 등은 먹고살 방법을 잃고, 거리로 주저앉아 노동자의 대열에 포함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분업(製粉業)에 기계가 도입되면서, 평양 일대에서만 1750년대의 10년간 방앗간이 500개 이상 사라지게 되었다.

“평양에서 생산되는 물품의 경쟁 품목이 황성에서 생산되고 있을 때는, 평양산을 황성에서 팔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주십시오.”

이 정도로 평양의 산업화가 가속되고 있다 보니, 웃기지도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전에 요동산 물품에 관세를 물린 것처럼, 황성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황성 및 경기도에 한해서라도 평양산의 시장 진입을 금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들이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몰락해 가는 황성의 선대제 공업을 살릴 수는 없었다.

자본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시대의 흐름을 잘 타는 이들은 일찌감치 증기기관을 도입하고 기계 설비를 갖추며 공장제공업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새롭게 마포 일대가 이러한 공장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롭게 조성된 경인운하를 통해 필요한 물자들이 곧장 배에 실려 마포까지 들어와 하역되고, 다시 이곳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마포부두를 통해서 실려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마포의 성장마저도 평양의 활황에 비하면 뒤처지는 것이었다.

1762년

홍문(弘文) 24년 계추(季秋)

요동국 남양로(南洋路) 여순부

여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2층 저택이 하나 있었다.

양풍(洋風)으로 지어진 석조 건물을 중심으로 한식(韓式) 별채가 외따로 있는 그런 집이었다.

집의 지붕은 푸른색, 벽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보기에 빼어난 미관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이내 여순항의 명물로 소문이 났다.

사람들은 그곳에 누가 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대충 남성물산의 마나님이 사는 곳이라고들 했다.

혹여 남성물산이 현 국왕의 3남인 정경대군 김우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세운 기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대군의 마나님이 그 집에 살 리가 없다고 했다.

정경대군 김우는 주로 성경부에 머물면서, 오 년 전 성혼(成婚)한 명문가 심양한씨 출신의 부인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소문은 반쯤은 진실을 담고 있는 법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 집의 주인이 누군지 쉬쉬했다.

바로 김우가 결혼하기 전에 그의 아들을 가진 유청령을 위해서 김우가 마련해 준 안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우가 이 일로 입을 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지내고 있었다.

사실상 사생아가 된 김우와 그녀의 아들인 김시유(金是喩)는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는 현 요동왕가에 있어서 서얼(庶孼)이라는 것 자체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으면 서자라고는 하나 대군의 아들이니 이런저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이제 그마저도 없는 마당에 순나라 출신의 여자에게서 본 아들을 대군의 아들로 인정해 줄 리 없었다.

정경대군 김우는 평소에 올곧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이었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결국 해결을 보지 못하고 은근슬쩍 도망치고 말았다.

그가 순나라 출신의 여자에게서 아들을 본 것을 알고는 오히려 서둘러 결혼을 종용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추문이 퍼지기 전에 성경부에서 머물며 자숙하고 있으라고 강요했다.

그나마 왕실에서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여순에다 유청령 모자가 살 수 있는 저택을 구할 수 있도록 해주고, 김시유를 7촌쯤 되는 절손(絶孫)된 군가(君家)에 입적시켜 준 것이 전부였다.

왕족이라고는 하나 이미 대가 끊겨 돌봄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제사를 모셔야 할 상황이었고, 그나마도 아직 첩실제도가 있던 현양왕(賢陽王) 김유가 본 서자 중 하나인 항산군(沆山君)의 집안이니, 그 가문의 격도 낮은 셈이었다.

그나마 항산군의 손자가 서른둘로 남자 자손 없이 죽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 가문에서도 김시유를 입적시키겠다고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왕가의 족보인 《선원록》에 이름을 넣을 수는 있으니 아주 버림받지는 않은 셈이었다.

허나 김시유는 나이 일곱이 되도록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가끔 남성물산의 일을 보기 위해 여순으로 아버지 김우가 들르며 찾아보기는 했으나,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고 대군 나리라고 불러야만 했다.

김우는 둘이 있을 때는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으나, 유청령이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그녀는 이미 김우를 따라서 요동으로 올 때 이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녀는 김우를 사랑하고 있었고, 때문에 종국에는 그의 곁에서 머물 수 없음을 알았음에도 같이 길을 떠났다.

아직 나이가 서른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마음을 준 지아비를 몇 달 걸러 이렇게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야 했으니, 그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질면서도 똑똑했다.

김우가 심양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남성물산의 일을 뒤에서 돌보면서, 아들 김시유를 단단하게 키웠다.

그녀는 혹여 성경의 부부인(府夫人, 대군의 부인) 한씨를 염려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김우의 첩실 행세를 하고, 아들 김시유가 대군의 서자임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면, 한씨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살아도 죽은 것처럼 지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자기 몫의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아들이 있었고, 좋은 집과 풍족한 돈이 있었다.

남성물산의 운영에 많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고, 덕분에 순나라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이장하여 화장한 뒤 여순의 좋은 사찰에다가 모실 수도 있었다.

“한때는 뜻이 컸는데, 내가 요즘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만큼 대군이라는 지위가 한탄스러울 때가 없다.”

어느 날 여순에 온 김우는, 유청령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렇게 말을 했다.

그녀는 쓸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고 여린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화북에서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그에게 확실한 주관이 있었다.

그러나 요동으로 돌아온 뒤부터 그의 마음을 세상이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다. 완고하고 전제적인 아버지인 국왕 김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우는 발버둥 쳤었다.

때문에 요동에 돌아와서는 성경에 거의 머물지 않고 여순을 오고 가며 늘 생각해 왔던 사업인 남성물산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었다.

유청령과 사이에 김시유를 얻은 것도 그때였다.

어차피 대권을 물려받지 못하고, 정치에도 참여할 수 없는 아들이니 장사에 손을 댄다고 했을 때 국왕 김헌은 말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김우는 열심히 일했다. 군 시절 부관인 최수일을 통해 대만의 유나바루에도 지점을 열었고, 천진에도 지점을 열어 삼각무역으로 사업을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내 김우의 사업 방식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부당한 방법으로 순나라의 백성들을 말려가며 이윤을 취하고 있던 요동 상인들은, 김우가 사실상 헐값에 대만 곡물을 순나라 시장에 공급하고, 순나라에서 싼값에 철광과 석탄을 산 뒤, 천진에다 세운 공장에서 싼값에 선철(銑鐵)을 생산해 내 헐값에 요동에 팔아 폭리를 취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이 남성물산을 헐뜯고 나선 본질적인 원인은 김우 때문에 요동 상인들이 순나라 곡물 시장을 쥐고 흔들 수 없게 되었고, 동시에 요동에서 생산된 철괴를 비싼 값에 순나라에 팔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탄원이 빗발치자, 요동왕 김헌은 아들 김우를 불러다가 자중할 것을 권고했다.

더 이상 사업을 키우지도 말고, 다른 요동 상인들의 관습에 맞추어 장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국왕 김헌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왕족이 지나치게 시장에서 성공하게 되는 것도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괜한 의혹을 불러 일으켜서 왕실에 대한 반감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국내에서 왕실에게 쏟아질 비난만을 생각했지, 김우가 어째서 그런 일에 나서게 되었는지는 반 푼어치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우의 행동을 특무사를 통해서 감시했다.

이 과정에서 김우가 순나라 여인과의 사이에 아들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왕 김헌은 진노했다.

금욕적으로 국사에 전념하는 계몽군주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김헌이었다. 그는 결단코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김우는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추진력도 더 이상 예전 같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점점 소심해지고, 무기력해져 갔으며, 종래에는 남성물산에 대한 의욕마저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가 피폐하고 고통받는 순나라의 경제를 회생시키고, 일방적이 아닌 상호 간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하고자 마음먹고 시작한 회사였다.

그러나 점차 그런 패기와 헌신은 사라지고 그저 그런 왕족의 한 명으로 김우는 시들어갔다.

몇 달 걸러 한 번 여순으로 내려올 때마다 점차 죽어가는 김우의 눈동자를 보면서, 유청령은 점점 마음을 더 모질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김우가 점차 손을 떼고 있는 남성물산을 더 키워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김우에게는 그저 한때의 꿈일지 몰랐으나, 그녀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녀는 순나라에서 자라나던 시절 겪었던 고통들을 아직 고스란히 잊지 않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비적들에 의해 고통받고, 그런 그들을 지켜주어야 할 관리들에게 수탈당하는 것도 모자라, 요동군에게 약취당하고 상인들에게 고혈을 빨리는 그런 생활 말이다.

그녀는 남성물산이 진심으로 순나라와 요동에게 상호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상도(商道)를 아는 기업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우가 버린 꿈을 주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김우가 아니라 그의 꿈을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 또한 대군 나리의 패기에 반하여 이 일에 뛰어들었었는데…….”

지점 경영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여순으로 찾아온 최수일은 유청령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김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사실상 김우가 경영에는 손을 놓고 대군저에서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걱정도 늘어놓았다.

유청령은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회사는 굴러가고 있으니 우리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게밖에 말을 하지 못했다.

“대군 나리도 너무 무심하십니다. 하긴, 그분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러신 것은 아니겠지요. 저는 그분에게서 꿈을 보고 이렇게 희망을 얻어 가서 살고 있는데, 정작 대군 나리는 저리도 힘들어 보이시니. 왕족이란 것이 예전에는 그저 부럽고 구름 위의 사람들 같았는데, 지금 보니 차라리 얽매인 곳 없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최수일의 말에는 구구절절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유나바루 지점의 자금 사정은 괜찮지요? 이번에 천주와 마닐라에도 상관을 내기로 결정이 되었는데, 그쪽을 유나바루에서 좀 맡아서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우의 이야기를 더하고 싶지 않았던 유청령은 말을 돌렸다.

“그렇긴 한데…… 이런 방법으로는 확장에 한계가 있으니, 이 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자금을 확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요. 주식으로 자본을 대기 시작하면, 회사는 주주의 이윤을 가장 중요시하게 생각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렇잖아도 대군 나리께서 손을 떼시는 바람에 회사의 의사 결정 구조가 왜곡되어 있는데, 만약에 그 빈자리를 주주들이 차고 들어온다면 남성물산도 그저 많은 다른 요동의 상사들처럼 돈을 쫓아서만 움직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저 이 회사는 처음 세워진 목적이나 방향성도 다 잃고 그저 거죽만 남게 되겠지요.”

“어떤 뜻도 처음 세워진 대로 영원히 남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최수일은 입맛이 쓰다는 듯 앞에 놓인 홍차를 마시다 말고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일단 알겠습니다. 우선은 가까운 양나라 천주부터 지점을 열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좀 더 투자해도 안전할 정도로 자금이 모이면 마닐라 지점을 열도록 하지요.”

최수일의 말에 유청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라고 이윤을 쫓아다니는 것이 즐겁고 좋아서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보탬이 되는 기업이라는 것도 허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돈이 모인 곳에는 욕심이 따라붙고, 욕심이 생기면 다른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물욕이라는 것이 본래 그래서 이런 욕심들이 모이다 보면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라도 결국은 처음의 의도는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인 것이다.

최수일이 물러간 뒤, 저택 정원에 앉아서 뛰어노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유청령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자신 또한 다른 욕심에 붙잡혀서 이 남성물산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마음 내심 한구석에는, 이 남성물산을 아들에게 물려줄 기업(基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애써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일 터였다.

아들이 입적된 항산군의 가문은 왕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대가 끊긴 뒤라, 그 재산이 가문의 딸들에게 다 나누어 상속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들은 그 집안의 제사만 모실 뿐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미 된 입장에서 그런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대로 남성물산을 잘 이끌고 나가 아들이 나이가 찰 때쯤이 된다면, 아마 김우 또한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말에 반대하고 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그 나름대로 이 모자에 대한 죄책감이 한구석에 있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기에 잘은 모르지만, 이미 의욕이 떨어진 뒤에도 남성물산을 남의 손에 넘기지 않고 유청령이 경영하게 내버려 두고 가끔 들여다보는 것을 보면 적어도 남성물산을 두 모자에 대한 속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그 아무것도 아비로써 물려줄 수 없는 이가 해줄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것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거 보세요. 가발이 잘 어울려요?”

한참을 정원에서 뛰어다니며 혼자 놀던 아들은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서양 가발을 하나 머리에 뒤집어쓰고서는 유청령에게 달려와 잘 어울리는지를 물었다.

유청령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저 말없이 아들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1765년

홍문(弘文) 27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영주도독부 창해도 창주부

그레고리력을 채택하라는 제국 정부의 〈시헌법〉을 영주 척식위원회가 거부했다가 황성부와의 줄다리기 끝에 철회한 이후, 영주와 황성부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황성부에서는 갈수록 영주도독부가 제국의 지배 질서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음을 감지하고, 더더욱 세금의 항목을 늘이고 규제법령을 반포하여 본토에 옭아매려고 했다.

반대로 영주에서는 공화주의 사상이 은연중에 떠돌고 있었다.

이들은 불합리한 지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제국에서 독립하여 영주인의 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제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본국 정부에서 불합리하게 영주에 대해 부과하는 차별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요동국이 이미 한 일을 우리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영주 사람들은 대부분 본토에 대해서 혈통 외에는 빚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도 족보가 갈라진 지 오래이니, 우리 조상의 사당과 묘는 모두 이곳 영주에 있어요. 오래전 조상의 모국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내지에 대해서 이런 불공평한 처우를 감수하며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독립, 혹은 자치 주장은 1730년대 초엽에 영주의 실업가인 박장일을 중심으로 결성된 「남령사(嵐零社)」라는 결사체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창주부의 신사 계급들을 핵심으로 하는 이 남령사라는 단체는, 내지 정부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금지된 책들을 비밀리에 찍어내서 유통시켰다.

척식평의회의 일부 급진적인 의원들도 이 남령사에 가담하고 있었다.

당초에는 이러한 주장들이 매우 비밀스럽게 전개되었으나, 해가 거듭할수록 표면 위로 올라와 공공연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실상 영주의 안보가 내지에서 직접 파병한 병력보다는, 영주 출신의 자체적인 군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영향을 끼쳤다.

당초 내지에서는 영주에 꾸준히 병력을 파견해 왔으나, 의회혁명기 내전을 거치면서 영주의 2만 병력을 유지할 자금을 충당할 수 없었고, 이 시기 영주도독부에서는 자체적으로 병력을 구성하여 「영주방위대(瀛洲防衛隊)」를 결성했다.

당초에는 임시적으로 조직된 민병 수준의 조악한 군대였으나, 그 이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잘 훈련되고 해군까지 보유한 질이 높은 군대로 거듭났다.

당초 이들은 내지에서 파견된 장교들의 지휘를 받고, 이들의 명령을 따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장교단의 충원마저도 영주 내부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내지의 군부에 대하여 독립적인 군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영주방위대의 청년 장교들 또한 남령사에 가입해 있는 인물들이 많았고,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전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군대의 독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17세기 초반부에 제국 중앙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시금 영주의 군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제국은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꺼려 했지만, 영주의 군대를 통제 아래에 두고는 싶어 했다.

때문에 「특별군포(特別軍布)」라는 전례 없던 세금 제도를 창설하여 영주 주민들에게 기존의 3배에 가까운 안보세를 거두려고 했다.

이러한 조치에 찬성할 만한 사람은 적어도 영주 안에는 없었다.

본토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대상인과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이 특별세에도 불과하고 내지 정부는 결국 영주의 군권을 재장악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비용과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리만 가지려고 하는 정책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영주도독부가 자체적인 군사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최소한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첫 번째로, 그들은 안보적으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영주도독부가 반목을 거듭하면서도 본토에 매여 있었던 것은 주변의 만주족 같은 잠재적인 위협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방위를 중앙 정부에 위탁함으로써 안전에 대한 비용을 지불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성부 의회가 더 이상 안보 비용을 부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사실상 영주에서는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인 이득이었다.

굳이 본토의 군대를 불러와서 돈을 줘가면서 복무시키느니 훨씬 저렴하게 도독부 내의 잉여 노동력을 군대로 흡수하여 자주방위를 도모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제국 중앙 정부가 이제 영주도독부를 물리적으로 제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주방위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군대를 태평양을 건너서 실어 보내야 했다.

창주부 일대에 장기 주둔하고 있는 영주파견대의 1만 병력이 여전히 제국육군의 직할 부대로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지방의 군대는 모두 척식평의회의 명령을 받는 영주방위대의 3만 병력이 메우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유사시 제국 정부는 내지에서 2만 이상의 병력을 영주로 보내야만 했다.

더군다나 영주도독부 척식평의회와 후금국 정부 사이에서 채택된 장기적인 평화를 약속하는 우호 선언은 더더욱 영주도독부의 분리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후방이 안전하다면 더 이상 이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독립을 위한 불길이 치솟기 충분한 여건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 운동이 그간 조심스럽게 확산되었던 것은, 여전히 본토에 대한 신뢰와 의존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로 본토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본토에서 영주식민지에 부과하는 규제에 영향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보수적인 시골 지주들이었다.

내지에서 파견되어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영주도독부의 관료들은 당연히 이러한 분위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고, 내지의 해군력에 의지해 인도양까지 무역을 나가는 매우 소수의 대상인들 또한 내지와의 분리 독립에 반대했다.

또한 제국 칙령으로 귀족 작위에 봉해진 영주의 귀족 계층도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워 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의 주축이 바로 공화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내지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된 영주에 공화 정부가 들어섰을 경우에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분적 특권들이 모두 폐지될 것을 이들은 두려워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영주의 사실상 지배 기구인 척식평의회는 완전히 양분되고 있었다.

매우 일부의 소수 중립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독립은 시기상조이며 내지 정부와 꾸준한 협상을 통해 영주의 이권을 신장해야 한다는 결속파와 즉각적으로 내지에 대한 독립 쟁취에 나서야 한다는 독립파가 매일같이 설전을 벌였다.

특히 독립파의 주축인 남령사는 일종의 매우 오래된 기득권인 결속파의 귀족주의적 성향에 대하여 매우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이렇게 팽팽하게 20여 년이 넘게 이어진 양측 간의 갑론을박은 그레고리력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총체적인 난국을 드러냈다.

척식평의회의 독립파가 큰 목소리로 칙령을 거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가, 막상 내지에서 병력 파병까지 고려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결속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 뒤늦게 채택을 재결의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오래갈 수는 없었다.

제국의회는 스웨덴과의 결혼 동맹 이후, 지속적으로 인도양에서의 권력 신장에 몰두하고 있었다.

예전의 인도양 경영이 개별적인 상단들의 자율적인 진출에 의지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정부가 직접 나서서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1단계로 상남에 병력을 증원하여 말레이반도 일대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시도했으며, 그 다음이 바로 인도의 거점 항구와 실론 섬에 대한 군사 주둔 계획이었다.

인도에서 완전히 영불 연합 왕국의 이권을 몰아내고, 이것을 한국과 스웨덴 사이에서 나누어 가지기 위한 이 원대한 계획에 있어서 이러한 군사 행동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이렇게 군사력을 증강하여 해외 파병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국고의 재원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었다.

내지의 의회는 이 비용을 각 식민지에 전가하는 「애국세(愛國稅)」를 신설했다.

이 세금은 북해, 진서, 영주에 골고루 부과되었는데 각 도독부의 사정에 따라 세금 액수에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영주에는 유난히 높은 액수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북해와 비교해서 거의 1인당 3배에 가까운 세금을 이 애국세로 지불해야 될 형편이 된 것이었다.

이것은 금방 영주 전체를 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신대륙 서해안에 위치한 영주도독부는 사실상 인도양에서의 제국권력의 신장이 가져올 이점들에서 혜택을 볼 것이 거의 없었다.

영주 사람들에게 애국세를 내서 인도양에서 이권을 쟁취해 봐야 그 결과 영주에 혜택이 오는 것은 인도양에서 생산된 찻잎을 조금 더 싼값에 소비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차를 아무리 싸게 사 보아야 애국세로 내는 세금에 비교해 보면 손해에 가까웠다.

이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는 척식평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중앙 조정에서 압박을 받은 영주도독부의 관료들은 1763년부터 영주도독부 7도 전역에 대하여 세금 징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일이 말처럼 잘될 리가 없었다.

징세를 물리적으로 강제할 수단이 마땅찮았던 영주대도독은 결국 군부의 허가를 받아 창주의 영주파견대 병력을 움직여 세금 납부를 강제하려 했다.

내라는 세금을 잘 내지 않는다고 해서 총칼로 위압해 강제로 징발해 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영주도독부에서 실행에 옮긴 순간, 마치 기름 위에 불을 붙인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영주에서 가장 공업화된 도시이자, 그만큼 본국 정부에서 부과하는 각종 중세(重稅)와 규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창주부(蒼州府)에서 먼저 불길이 올랐다.

본래 창주에 주둔하고 있던 영주파견대의 병력이 지방으로 징세를 위해 출정하자, 창주부의 일부 시민들은 무장을 하고 영주도독부의 관청을 둘러싸고 애국세의 폐지와 기존의 과중한 세금을 환급할 것을 요청했다.

영주대도독인 문항일(文恒壹)은 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진 해산을 하자, 곧바로 영주파견대를 다시 불러들여 시위를 주동한 자들을 체포하고 구금하며 탄압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영주의 척식평의회까지 들고 일어나서 대도독 문항일에 대해 항의를 표시했으나, 1만 병력으로 창주부를 틀어쥐고서 문항일은 오히려 척식평의회의 의원들까지 체포하는 극단적인 수를 내밀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창주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소문이 지방으로 퍼져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영주방위대가 들고 일어나서 창주 진격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고, 일부 농민들과 상인들은 직접 무장하고 민병대를 꾸려서 영주방위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특히 창주부와 인접한 창해도(蒼海道)와 곡양도(谷陽道) 일대에서 반발이 극심했다.

이들은 이내 3만이 넘는 세력으로 늘어났고, 곡양도의 수부(首府)인 대곡부(大谷府)에 행정청을 설치하고 창주 진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영주대도독 문항일은 본국 정부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자신은 창주부에서 몸을 피해서 창주부 앞 바다에 떠있는 섬인 예도(銳島)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의 요새에서 무장한 병력들과 함께 영주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1767년

홍문(弘文) 29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영주도독부 서해도 정주부(晸州府)

영주도독부는 여러 개의 도(道)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북쪽에 설치된 연양도(沿洋道)로부터 시작해서, 행정 및 문화적 중심지인 창주부를 포괄하는 창해도(蒼海道), 그리고 창해도의 바로 남쪽에 인접한 역시 오래된 식민 지역인 곡양도(谷陽道), 서쪽 해안에 면한 서해도(西海道)와 정안도(靜安道), 그리고 가장 남쪽의 남해도(南海道), 마지막으로 동쪽의 광막한 개척 지대에 세워진 동강도(東疆道)까지 총 일곱 개의 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일곱 도를 대표하는 100여 명의 대표단이 완전히 독립군의 손에 장악된 서해도 정주부(晸州府)로 모여든 것은, 1767년 1월 18일의 일이었다.

애국세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촉발된 독립운동은 지난 2년간 영주의 전 지역을 휩쓸며 불붙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행정 권력이 마비되었고, 임시적인 정부들이 제각기 세워져 식민 권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은 차츰, 척식평의회와 영주방위대를 구심점으로 하여 모여들었고, 이내 독립에 반대하는 일부 의원들을 제명하고 해산한 척식평의회와 영주방위대의 장성들이 정주를 중심으로 모여 「독립공회(獨立公會)」를 결성함으로서 내지의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독자적고 실효성 있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들 사이에서도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것을 목표로 할지, 아니면 자치권의 확대를 위한 투쟁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노선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내지에서 병력 1만 5천이 증강되어 창주에 도달하는 바람에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고,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독립공회는 각 도에서 대표단을 선출해 앞으로 영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이에 여러 지역에서 호응하여 대표를 선출해 정주부로 보냈다.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연양도와 창해도, 그리고 곡양도 일부에서는 대표단을 선출하지 못해 기존의 지역 출신 대륙공회의원들이 임시로 대표의 자격을 지니고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모여든 이들이 3층 석조 건물인 정주의 동헌(東軒)에 모여서 열흘 밤낮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토론을 개진했다.

이곳에서 영주의 가장 명문인 창주공가 출신이자, 동시에(이율배반적이게도) 열렬한 공화주의자인 김정신(金正愼)이 독립공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고, 이를 보좌할 5명의 상임위원(常任委員)으로 조혁(趙赫), 서주열(徐朱說), 민굉일(閔宏日), 구천수(具千手), 박장일(朴張壹)이었다.

이 중에서도 박장일은 영주에서 가장 부유한 실업가 중의 한 명인 동시에, 일찌감치 남령사를 세워 독립운동의 사상적인 기초를 영주 전역에 보급시킨 인물이었다.

20대에 영주로 건너와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뒤, 60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정력적으로 전면에서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지도부를 단단하게 구성하고 난 뒤 128명의 대륙공회의원 및 각도 대표부는 공화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에 서명했다.

독립선언문은 본토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날 때까지 임시적으로 모든 권력을 독립공회에 위임하고, 이후 「동영 연방 공화국(東瀛聯邦共和國)」, 약칭 「연공(聯共)」을 건국할 것을 결의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충분한 총과 대포가 있고, 화약과 총탄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도 있습니다. 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서 병력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니, 지구전으로 버틴다면 이내 채 일이 년이 흐르지 않아 우리에게 확실한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영주방위대의 지휘관 출신인 구천수는 강경하게 지금대로 전선을 이끌고 나간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주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내지식의 용어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고, 바다 이름도 대창해가 아닌 태평양(太平洋)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같은 바다라고 하지만, 대창해는 마치 대한제국의 내해(內海)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태평양은 새로운 독립을 향한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구천수 위원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이 병력을 상륙시켜 장기전을 수행하기는 힘들어도, 해안은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영주의 해외 교역은 전면 차단된 상황이고, 오로지 남아 있는 물자로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구 위원의 말씀대로 일이 년 사이에 이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그때는 고갈된 자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주열의 반론에 박장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 위원의 말씀이 맞소이다. 후금의 만주족들로부터 용병 지원을 받기로 결정되었으나, 이들은 본디 땅이 척박하고 산업이랄 것이 없어 효율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데는 큰 도움을 줄 수가 없지요. 우리도 신대륙 내에 우리를 지원해 줄 수 있는 동맹국을 만들어 자금 및 물자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박장일의 말에 위원들은 술렁였다.

전통적으로 한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신대륙에서 영주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네덜란드와 아라곤 식민지였다.

이후 결혼 동맹을 통해 스웨덴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모두 신대륙에서 영불 연합 왕국과 카스티야를 견제하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이제 영주가 독립노정을 밟게 되면서 네덜란드나 스웨덴에게는 더 이상 유효한 지원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영주는 기존의 동맹을 버리고 새로운 동맹자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예전에는 적이였던 자들 중에서 골라야 할 것이었다.

“……사실상 신대륙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감당해 줄 수 있는 것은 연합 왕국의 식민지들뿐입니다. 버지니아에서 물자를 실어서 카스티야 상인들을 통해 남부 지역으로 공수받으면 보다 장기전을 수행하는데 유리해질 수 있습니다.”

위원장인 김정신이 입을 열었다.

연합 왕국은 오랜 기간 신대륙에 있어서 영주도독부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연합 왕국과 대한제국이 인도양에서부터 신대륙에 걸치기까지 해양 패권을 놓고 이권 경쟁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본국에서 독립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제 연합 왕국은 하나의 동아줄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대륙공회는 은밀하게 연합 왕국으로 사절을 보냈다.

사절단장은 조혁이 맡았다.

그는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기에 이 교섭을 진행할 최고의 적임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조혁을 비롯한 10여 명의 사절단을 태운 마차는 4월 15일 밤 은밀하게 정주부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달려 남해도 조주부에 다다랐다.

조주부에서 이들은 상인으로 변복하고 멕시카 왕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카스티야 선박을 통해 버지니아로 들어갔다.

버지니아의 총독과 일차 면담 이후에, 이들은 직접 대서양을 건너 영불 제국의 수도인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연합 왕국정부와 협상을 개시했다.

그렇잖아도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의 세 바다에 걸쳐서 한국―스웨덴―네덜란드의 3각 동맹에 의해 지대한 훼방을 받고 있던 연합 왕국은 영주의 독립이라는 카드를 들고 온 사절단을 대환영했다.

연합 왕국의 수상 채트햄(Chatham) 백작 윌리엄 피트(William Pitt)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화려한 만찬을 베풀고, 국왕 리처드 5세를 설득해 지원을 이끌어 냈다.

영불 연합 왕국은 내부적으로는 런던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프랑스로부터의 소요에 직면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삼각동맹에 의해 견제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주의 독립을 지원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돌파구가 되어 줄 수 있었다.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서로 간의 우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옛 질서를 강요하고 압제를 행하는 우리 공통의 적들에 대항하여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며, 연합 왕국의 국왕 전하 및 전하의 내각과 새로이 건국될 동영 연방 공화국의 임시적 정부인 독립공회는 앞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건설하기 위한 맹방을 견고히 할 것을 엄숙히 선언 합니다.”

조혁이 런던의 왕국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이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동맹조약을 이끌어 냈다.

연합 왕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동영 연방 공화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서로 간의 협력과 동맹을 공식적으로 약속했던 것이다.

이 일은 연합 왕국, 적어도 잉글랜드 내에서는 크게 이슈가 되었는데 이날 조혁의 연설과 피트 수상의 답사(答辭)는 활자화 되어 런던 시가지에 뿌려질 정도였다.

연합 왕국이 공식적으로 독립전쟁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시적으로 런던의 주식은 폭등(暴騰)했고, 전시 특수를 기대하는 무기 상인들이 조혁의 숙사 앞에 줄지어 섰다.

이 소식은 이내 네덜란드와 스웨덴으로도 전해졌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다시 제국 내지에도 전해졌다.

황성부의 채제공(蔡濟恭) 내각은 이내 이 급박한 소식을 접하고서는 영주로의 병력 증원(增員)을 결의했다.

그간 국정에 전혀 목소리를 내지 않던 황제 홍문제마저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함께 조칙(詔勅)을 내려가며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했을 정도였다.

황성부 일대에서는 유지 비용만 잔뜩 들고 내지 산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저항을 지속하며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는 영주를 손에 쥐고 있느니 독립시켜 놓아주자는 목소리도 없잖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식민지가 연합 왕국과 연대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면서 진압전(鎭壓戰)을 촉구했다.

이렇게 다시 5만의 병력이 편성되어 목포항 및 부산항을 통해서 출정길에 나섰다.

제국 정부는 이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전시병력징용법(戰時兵力徵用法)〉을 통과시키고, 이 병력의 거의 3할이 넘는 3만 6천 명을 각지에서 강제 징집해 신대륙으로 보냈다.

전쟁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독립공회는 거의 영주도독부의 8할에 달하는 지역을 장악하고 이미 행정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창주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안 지역의 항구와 주요 지역은 아직 제국군의 손에 놓여 있었다.

새로 증파된 제국군을 지휘하는 육군 부장(副將) 이정보(李鼎輔)는 세심한 병력 운용과 해군과의 협조를 바탕으로 한 해안 봉쇄를 강화하면서 판도를 뒤집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한창 전투가 치열하게 이루어진 1670년에는 구영주파견대를 포함한 제국군의 병력은 총 9만 8천여 명이 전선에 동원되어 있었고, 여기에 스웨덴 및 네덜란드의 지원 병력 4천여 명, 그리고 유구 및 요동에서 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우회적으로 지원한 2천 명의 병력을 도합해서 10만 명 이상이 진압군으로 동원되어 있었다.

독립군 측에는 영주방위대 및 각종 의용대와 민병대로 15만 명이 영주 각지에 산개해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여기에 독일 용병을 포함한 영불 연합 왕국의 지원 병력 2만 6천,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병 3천 명, 멕시카 왕국의 기마대 1천 5백 명을 도합 하여 거의 18만 명 이상이 제국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들 중 많은 숫자가 전사했고, 또 그보다 많은 숫자가 창궐하는 전염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영주의 핵심 도시인 창주부를 점령하기 위한 거의 여러 차례에 공방전 끝에, 1771년 6월 18일, 마침내 독립군은 창주부 시내에 진입하여 공화국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제국군은 다시 연양도로 퇴각하여 전투를 준비했지만, 이내 사실상 패배를 인지한 본국 정부는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1772년 1월 15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연방 공화국의 신생 정부의 대표가 스웨덴, 네덜란드, 카스티야, 연합 왕국, 멕시카의 대사들이 임석한 가운데 독립을 추인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조약에 조인했다.

이른바 「창주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은 영주도독부를 폐지하고 이에 속해 있던 영주 칠도(七道)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영주 칠도는 각기 동등한 자격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 공화국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다음 날인 1월 16일 「동영 연방 공화국」을 건국했다.

임시정부 역할을 했던 독립공회는 곧 연방의회로 재편성되었으며, 삼권분립에 기초한 공화주의적 정부가 새롭게 구성되어 통령(統領)으로 박장일을 선출하였다.

신대륙에서 최초로 식민지에서 독립정부를 구성한 국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국제정세에 적지않은 파급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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