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1장 혁명시대(革命時代) (72/82)

제71장 혁명시대(革命時代)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이여

영광의 날이 도래하였다!

우리의 압제자에게 대항하여

피 묻은 깃발을 들어라

그대, 들리는가, 저 들판에서,

흉포한 병정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그들이 그대의 딸과 아내를 죽이고저

코 앞으로 다가왔노라!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 !

Contre nous de la tyrannie,

L’ tendard sanglant est lev ,

Entendez―vous dans les campagnes

Mugir ces froces soldats?

Ils viennent jusque dans vos bras

gorger vos fils, vos compagnes !」

―프랑스 공화국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1771년

홍문(弘文) 33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평안도 평양부

그날 평양의 공기는 무거웠다.

사람들은 대동강변으로 몰려 나와서 모래사장에 설치된 교수형대(絞首刑臺)를 둘러싸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정오에 세 명의 반역도당에 대한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형의 집행 대상이 된 사람들은, 평양부민들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 있는 직공(職工)들과 부중에서 자기 사업을 하는 상인이었다.

멀쩡한 이웃들이 반역죄로 기소당해, 결국 재판 끝에 반역죄의 혐의가 확정되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는 것을 보면서 평양부민들은 동정과 연민,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감정을 한 번에 체험하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대를 물려 이름난 대장간을 운영해 왔던 야금장(冶金匠) 도성식(都誠息)에게 씌워진 반란수괴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경악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도성식은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었고 인망도 있었다.

비록 최근에 대규모의 제철소들이 평양 지척인 진남포 등지에 세워지면서 그의 대장간은 경영이 힘들어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평양의 자랑이 된 평양철교의 건설에 참가했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가 반란수괴로 지목되어 처형되게 되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기 그지없었다.

설마 하면서 대동강변으로 나온 부민들은 강바닥에 엎어져 하늘이 찢어져라 울고 있는 도성식의 늙은 어미와 가족들을 보고서는 정말 도성식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명 도성식 사건이라고 불린 일의 전말은 이러했다.

도성식은 대략 8년 전에 「유경교신협회(柳京交信協會)」라는 평양의 독립 직공 및 중산 계층들 사이의 정기적인 교류를 지향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이내 정치에서 소외된 평양의 중간 계층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엄격한 회원제로 협회원을 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이 협회에 가입한 회원이 평양에서만 300명을 넘어섰고, 진남포와 안주에도 협회의 지부가 개설될 정도였다.

주로 이 협회에 가입한 이들은 공장제 산업화의 부흥으로 몰락해 가고 있는 공인(工人)들, 상인이나 소규모 공장의 주인으로써 어느 정도 되는 재산을 모았으나 여전히 참정권을 얻지 못하고 있는 중소 규모의 자산가들, 그리고 몰락해 가는 구사족(士族) 출신의 하급 관리 등이었다.

이들은 장기적으로 참정권의 확대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공식적으로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유인물을 배포하고 출판물을 찍어내면서 평양 지역에 유포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한 평안도 정부에서는 이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나, 몇 년간 협회의 활동은 큰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교수대로 내몰릴 시간은 점점 기척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영주 독립을 전후해서 시작된 불안한 정세에서 여러 가지 시국 선언들을 이 유경교신협회가 발표한 것이었다.

그동안 물밑에서 폐쇄적인 활동을 하던 협회는 영주독립전쟁 당시에 내지에 부과된 각종 중세(重稅)와 강제 징병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이들은 차라리 영주의 독립이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개적인 벽서(壁書)가 교신협회의 명의로 평양성에 나붙자, 이들은 제국 중앙 정부의 시선에 바로 포착되게 되었다.

30여 년 전쯤, 요동의 정보 기관인 특무사에 대항하여 세워진 「 제국익문사」는 이들을 평양에서 퍼지고 있는 불안 요소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내사(內査)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분을 속이고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내부 정보를 캐내고, 이들의 동향을 샅샅이 살펴서 내부(內部) 산하의 감찰국(監察局)에 보고해서 올렸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도성식을 중심으로 한 협회의 수뇌부는, 지속적으로 영주로의 추가 파병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한편, 공화주의적 사상을 담은 책자들을 유포시켰다.

특히 금서로 지정된 이단적 공화론자인 일본인 이토 유키노부(伊藤行信)의 저술인 《공화론》을 번역해 펴낸 것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다.

결국 영주독립전쟁이 제국의 패배로 창주조약을 통해 결말이 지어지자, 내지의 의회정부는 이 패전이 국내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영주의 승리를 통해 자극받은 공화론자들은 교신협회에서 펴낸 이 《공화론》을 공개적으로 베껴서 게시하거나, 심지어는 평양대학교의 교정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서 낭독하는 등의 도발적인 행동을 시도했다.

더 이상 이 일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황성부의 내각 대신들은, 평양교신협회를 국가의 안녕을 위한 제물로 바치기로 결의했다.

만약 이러한 소요를 그냥 방치해 둘 경우 이러한 공화주의적, 혹은 참정권 확대를 위한 움직임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우려가 있었고, 이것은 패전으로 인하여 막대한 부채를 떠안고 휘청거리고 있는 현 의회정부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급적이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제국을 단단히 묶어 두기 위해서는 보수적 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할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던 의회의 「보수당(保守黨)」과 「연합당(聯合黨)」 양당은 사실상 만장일치로 내각에 불온서적들을 검열하고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본디 의회혁명 이후 의회의 우위권을 강조해 온 의회파에서 연원하는 보수당과 권력의 분산을 주장해 온 분립파에서 연원하는 연합당은 국가를 운영하는 정책의 문제에서 이래저래 대립하기 일쑤였으나, 적어도 점차 퍼져 나가는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보수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데에는 완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자유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연합당의 의원들조차도 공화주의에 대해서는 지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국을 운영하는 일종의 과두적(寡頭的)인 입헌주의 정치인들로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 당에 속해 있든지 관계없이 본질적으로는 끈끈하게 작위 귀족, 대토지 소유자, 일부 대상인 계층들 사이의 관료 엘리트들로 뭉쳐져 있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참정권 확대에 대해서도 매우 일관되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뿐더러, 당연한 이이갸이지만 제국을 해체하고 공화국 건설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공화주의적 주장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큰 해가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드물었지만, 영주의 독립혁명은 이들에게 큰 경각심을 심어 주게 되었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적인 사상에 침습당한 영주인들이 결국 제국 지배에서 탈피해 연방 공화국을 건국하는 과정을 그들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제 영주는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제국의 남은 지역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제국의 핵심 지역인 내지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평양교신협회는 바로 이러한 의회의 강압적 정책의 첫 희생자로 지목된 것이었다.

이들을 반역 단체로 규정하고 불법적인 이적물을 찍어내는 모임으로 지목함으로써, 의회는 전국의 공화주의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제국익문사에 의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들은 기소되어 재판정에 세워졌고, 반역죄를 처결하는 절차에 따라서 지방법원의 재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제도법원(帝都法院)에 세워진 도성식을 비롯한 세 명의 교신협회 수뇌부는 겨우 6시간의 약식재판 끝에 반역범으로 지목되고 교수형의 집행이 결정되었다.

법원은 당초에 이들을 황성부에서 비공개로 교수형을 집행하려 하였으나, 의회에서 압력을 넣어 굳이 그들의 고향인 평양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급격한 성장과 함께 불안한 분위기가 늘 감돌고 있는 평양에 대하여 전시적인 경고를 내리고자 했던 것이다.

“……도성식 및 죄인 2인은 불령되게도 존엄한 국체를 모독하고 평양부중 및 평안도 일대를 선동하여 모역을 꿈꾸었기에 홍문 33년 1월 18일, 선고받은 바대로 교수형을 집행한다.”

정오가 되자 도성식과 나머지 두 명의 협회원은 오랏줄에 묶여서 교수대 위에 세워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평양진위대의 병력이 나와 제지시키고서는 집행관이 교수대 위에 올라와 죄목을 낭독했다.

여기저기서 야유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일부는 신음을 토하기도 했지만, 집행은 방해받지 않고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입이 묶인 채로 가족에게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들은 차례로 교수대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날 이후로 다들 교신협회의 사건은 유야무야 잊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엄포는 효과가 있어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평양의 어둑한 골목에서는 이제 더 이상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거나 공화주의를 목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

선술집에 삼삼오오 모여서 시국을 논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알아서 입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성식을 처형시키고, 교신협회를 해체시킴으로써 여론 단속의 효과를 본 의회정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당장의 소요는 막을 수 있었지만, 독립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장기적인 불황기에 접어든 제국 경제가 사회적으로 불안을 지속적으로 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경제는 산업화 노정에서 변혁기를 겪고 있었고, 이런 전환기에는 대량 실업과 사회구조의 전반적인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소득 격차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기득권층부터 새롭게 신장한 중산 계층, 노동자와 농민에 이르기까지 불만을 가진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부는 그래서 다시 교신협회 사건을 꺼내 들었다.

9월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교신협회를 배후에서 지휘하고 지원한 세력을 밝혀냈다고 지목한 것이었다.

그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바로 남성물산의 최수일이었다.

여순을 기반으로 한 남성물산은, 꾸준히 극동 지역에서 지점을 넓혀가면서 무역업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정경대군 김우는 사실상 이 남성물산에서 손을 떼고, 북륙으로 사냥 여행을 다니며 소일하고 있었으나, 유청령과 최수일의 손에 의해 남성물산은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내지로의 진출을 고심하게 되었다.

적절한 투자처를 물색하던 중에 급속도로 공업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평양을 첫 진출지로 삼기로 내부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유청령과 상의 끝에 최수일은 그래서 2년 전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평양에 합리적으로 사업 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대공장주들보다도 몰락하고 있는 공방들을 연계시켜서 일종의 하도급을 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로 철괴의 주물과 직물 염색 등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최수일은 이러한 소공장의 직공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유경교신협회를 소개받아서 접촉할 수 있었다.

나름대로 이들과의 교섭은 효과적이었다.

대공장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판로를 찾아야 했던 이들은, 자금 경색과 열악한 판매 구조를 동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최수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최수일은 공식적으로 평양 서경로(西京路)에 남성물산 평양 지점을 세우고, 이곳을 통해서 교신협회의 회원들에게 합리적인 금액을 지불하고 물건을 주문했다.

철제 식기와 섬유 등이 주로 이들에게 주문된 품목들이었는데, 설마하니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이 시점에서는 전혀 아무도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남성물산 평양 지점은 도성식 사건을 지나면서, 이 일에 연류된 소규모 공방들이 줄도산하는 바람에 투자된 자금을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 부족한 자금을 여순의 본점에서 꾸려 와서 이들에게 저리로 대출하는 형식으로 빌려주었다.

최수일은 직접 평양에서 머물면서 이 일을 총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내사에 걸려 제국익문사를 통해 내부에 보고가 되고 있었고, 이 보고는 한참을 묻혀 있다가, 정국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내각 대신들에게 은밀하게 제공되었다.

“남성물산을 걸고넘어짐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이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올시다. 우선, 공식적으로 소유권이 요동왕의 삼남에게 있으니, 정치적으로 요동에 대해서 내지에서 반국가활동을 지원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있고, 둘째로 요동의 자본이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막고 국내산업을 보호한다는 인상을 내부적으로 줄 수 있을 것이오. 더군다나 앞으로 불안감을 조장하는 이들이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이만한 패가 우리에게는 없소이다. 지금이 이걸 꺼내 들어야 할 때요.”

총리대신 채제공의 결단은 단호했다.

양당제가 정착된 이후, 내각 재상의 지위를 대신하여 신설된 총리대신(總理大臣)의 권한은 강력한 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영주독립전쟁에서 패전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했어야 했으나, 의회 안에서의 당파를 초월한 지지를 받아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성식 문제 등을 거치며 채제공의 정책에 찬성표를 던져 주었던 야당인 연합당이 슬슬 채제공을 밀어내고 새로운 내각을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채제공은 정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카드를 집어들 필요가 있게 되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선택된 것이 남성물산이었다.

갑작스럽게 남성물산과 거래를 맺고 있던 공방들로 군인들이 보내져 체포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고, 남성물산의 평양 지점을 공식적으로 폐쇄한 뒤 자산을 동결시키고, 남성물산 소유의 부동산을 모두 압류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에 잠시 진남포로 내려가 있던 최수일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여순으로 건너갔다.

최수일이 이미 내지 밖으로 나간 것을 몰랐던 제국정부는 최수일에 대하여 현상금을 걸었다.

이 일련의 조치에 대해 깜짝 놀란 황성주재 요동국 고등판무관 한면(韓勉)은 공식적으로 정부에 항의했으나, 도리어 내각은 항의에 대한 회답을 해주기는커녕, 아무런 협의 없이 근거 없는 요동특무사의 개입설을 황성부중에 유포시켰다.

이른바 최수일이 정경대군 김우의 밀명을 받은 요동특무사에 의해 자금 지원을 받아서 평양의 반정부활동을 지원했다는 내용이 그 골자였다.

아무런 증거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간 요동특무사가 내지에서 문제를 몇 번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오히려 세간에는 설득력이 있게 다가왔다.

심지어 요동국 의정부에서도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특무사의 요원들을 불러서 심의하고, 정경대군 김우까지 호출하여 면담을 했을 정도이니 일이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셈이었다.

요동국에서는 자체적으로 이 일이 그저 남성물산의 사업 활동이었다는 것으로 내부적인 결론을 내렸지만, 내지 정부에서는 사실관계보다는 이 스캔들이 가져올 반향에 주목해서 사건을 이끌고 나갔다.

적반하장으로 공식적인 항의 사절이 성경부로 들어가서 즉각적인 내지에 대한 협잡 행위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일의 선후 관계가 어떻든 이 일로 요동왕 김헌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졌다.

그는 내지 사절단을 접견한 직후 바로 정경대군 김우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심하게 나무랐다.

“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드냐는 말이다. 네가 일찌감치 그 장삿일에서 손을 떼고 내가 말한 대로 자중하고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 회사를 정리하지 않고 남의 손에 맡겨 놓고 있다가 일을 이렇게 만드냐는 말이다!”

부왕의 분노에 김우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김우는 모든 세속에 대한 미련을 끊고, 사실상 무념무상으로 도락을 즐기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생아인 김시유에게 물려줄 유일한 유산인 남성물산을 정리할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었다.

더군다나 사건의 맥락을 짚어보니, 이 일에 남성물산이 잘못 행동한 것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이것이 그저 내지의 정치적 공세라는 사실을 아시잖습니까? 대관절 무슨 이유에서 남성물산이 공화주의자들에게 정치 자금을 지원할 것이며, 또 무슨 이유에서 특무사와 연관을 맺고 있겠습니까?”

“애시나절에 그 남성물산이 시장의 관례를 무시하고 높은 값으로 그 공화주의자들의 공장에서 물건을 사드리는 바람에, 그 차액이 고스란히 정치 자금으로 지원됐다고 저들이 주장하지 않느냐? 왜 그냥 다른 상단들이 하는 것처럼 헐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지를 않느냔 말이다. 뭐가 모자라서 그렇게 못해!”

요동왕 김헌은 길길이 날뛰면서 벼루를 김우에게 날렸다. 김우는 벼루를 맞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부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고정하십시오. 아바마마.”

좀 지나친 것을 스스로도 느꼈던지, 김헌은 숨을 가다듬고서는 김우를 내보냈다.

김헌은 한 치라도 정도에서 벗어난 것을 용납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계몽군주로서의 자신의 역할은 훌륭한 도학(道學)으로 신민을 계몽시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선친 태강왕(泰康王) 김행이 조정에 끌어들인 계몽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자라났었다. 그의 왕세자 시절 시강학사(侍講學士)를 맡아 자신을 가르친 것이, 바로 성호 이익(李瀷)이었다.

김헌은 자라나 부왕을 이어 왕위를 승계한 뒤에도, 금연과 절주를 몸소 행했을 뿐만 아니라, 흔히 국왕 정도 되는 높은 신분이면 몇은 거느리고 있는 애첩조차 두지 않았다.

왕실에 대한 신민들의 존경심을 높이기 위해 명예법령을 입안시켜서 왕자들을 모두 군대에 보내 복무시켰다.

어떻게 보면 모범적인 군주였으나, 그만큼 김헌은 앞뒤가 막힌 사람이었다.

그는 도저히 돌발 행동을 보이는 삼남 정경대군 김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머지 두 아들은 아비가 시키는 대로 왕실의 일족으로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우는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순나라 계집이랑 사생아를 만들지를 않나, 기존의 상례를 무시하는 기업을 운영해 가며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이키기도 했다.

그 일에서 손을 떼게 했더니 이제는 문안도 잘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나돌면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김헌은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잘못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들 김우였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간의 김우에 대한 불만이 치솟아 폭발한 것일 뿐, 김우나 남성물산이 모두 제국에서 주장하는 일들에 하등 관련이 없음은 국왕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소? 내지의 입장은 이쪽에서도 잘 이해하고 있소. 충분히 이용하였으면, 정치 공작에 형제국을 이용하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둡시다.”

다음 날 요동왕 김헌은 직접 성경 주재 제국고등판무관을 초치(招致)하여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주문했다.

한숨을 쉬면서 깔끔한 해결을 요구하는 요동왕 김헌의 앞에서 고등판무관은 더 이상 내지의 공식적인 정치 입장을 되풀이하며 발을 뺄 수는 없었다.

김헌의 압박이 주요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보름여 뒤에 이 사건은 유야무야 마무리되고 말았다.

최수일에 대한 수배령은 해제되었으며, 부당한 방법으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죄목으로 옛 교신협회 출신의 인사들이 또다시 형벌을 받고 노역형에 처해졌다.

이를 틈타 채제공 내각은 사실상 대공장의 독점을 조장하는 〈수가법(收價法)〉을 통과시켜 산업자본의 지지를 획득했고, 정국 전환에 성공해 연합당의 정치 공세를 회피하고 내각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일련의 사태로 무너진 평양의 옛 도제식 공업은 다시는 성장할 수 없었다.

이들이 밀려난 자리에는 공장제 기계 공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렸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평양의 대자본은 이를 계기로 정계와 유착하여 더욱 많은 이권을 챙기면서 급속도로 자본을 증식해 나가게 된다.

1772년

홍문(弘文) 34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황성부

1772년 여름, 한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인 제도대교(帝都大橋)의 인근 동재기나루[銅雀津]에는 황제와 황후 및 황태자, 총리 대신과 내각의 여러 대신들 및 국공(國公) 등의 제국의 최상층부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한강을 향해 시야가 탁 트인 강변의 광장에는 천막이 들어서고 내빈들이 편히 한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쌍안경이 제공되었다.

그날의 행사는 다름 아니라, 최초로 증기기관을 함선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사용한 기선(汽船)의 시연을 위한 자리였다.

3년 전 동래의 기술자 전보현(全普賢)이 대만제 정크선에 시범 삼아 증기기관을 설치하고 나선노(螺旋櫓, 프로펠러)를 이용하여 최초의 증기선을 시험해 본 것이 기선의 시초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고, 일반 범선이나 노를 저어가는 배에 비해서도 속력이 뛰어나지 못하고 연료 대비 효율이 좋지 않아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낙동강의 수운(水運) 사업에 뛰어들 구상을 하고 있던 전보현은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소형 범선을 사다가 개조해서 이번에는 나선노 대신에 물갈퀴차를 달아서 증기기관의 동력을 전달해 보았다.

두 번째의 시도는 꽤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이내 그는 물갈퀴차를 장착한 소형 기선 다섯 대를 부산포를 기점으로 낙동강과 대마도 사이에 투입하여 실제로 운용했다.

일반 범선 등으로 내륙 수운에 종사하고 있던 이들이 이 증기선의 도입에 반발하여 단체로 동래부청에 청원을 넣기도 했으나, 전보현에게 발부된 특허장과 사업 허가는 취소되지 않았다.

이내 이 증기선은 부산포의 명물로 떠올랐고, 황성에서도 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전보현에게서 증기선을 사들인 경강(京江, 한강)의 수운업자가 지난해 한 대의 기선을 마포나루에서 경인운하를 거쳐 제물포로 이어지는 구간에 투입했고, 이내 예성부에서 해주를 잇는 여객선도 도입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선에 대한 관심은 폭증되기 시작했고, 마치 금세기 기술력의 총결산인 것처럼 과장되기도 했다.

종래에는 정부 관료들까지 관심을 보이게 되자 전보현이 직접 부산에서 건조한 전장 55m의 중형기선(中型汽船)을 바다를 거쳐 한강으로 직접 끌고 오는 시연회를 열겠다고 청했다.

내각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고, 채제공 내각은 이러한 시연회를 흔쾌히 허가했다.

신대륙에서의 패전 이후 가라앉아 있는 국내 분위기를 전환시킬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 시연회는 처음에 전보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거창하게 준비되기 시작했다.

황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직접 이 시연회장에 나타나겠다고 했을뿐더러, 덩달아 총리 대신 채제공도 시연회장에 참석하겠다고 하면서 준비는 매우 공을 들여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내빈석(內賓席)을 제외한 주변의 언덕 일대 등이 일반 황성부민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고, 그날 황성부내에 영업을 하는 전장이 없다고 할 정도로 흥분 속에서 사람들은 동재기나루로 몰려 나왔다.

심지어는 제도대교의 교각 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마차고 수레고 통행을 하지 못할 지경이 될 정도였다.

전보현은 이렇게 생각보다 일이 커지자 속이 쭈그러드는 느낌이었다.

혹여라도 처음 시도하는 중형기선에 문제가 있어서 가다가 멈추거나 가라앉기라도 할 경우에는 그런 망신이 따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선은 제대로 움직였다.

엄청난 석탄이 소모되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자신의 기선을 전국적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까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이 중형기선을 계속해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황성까지 가는 동안 중간에 두 번 정도는 석탄을 보급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기선이 등장한 지도 몇 년이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렇게 장거리로 움직이는 경우는 없었기에, 부산에서 황성부까지 가는 항로에 저탄소(貯炭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이 요란한 행사를 위해서 전보현은 빚을 져가며 직접 저탄소를 목포와 대천에 조성했다.

부산에서 석탄을 잔뜩 싣고 목포까지 항해한 뒤, 그곳에서 다시 석탄을 보급받고 대천까지 항해해, 그곳에서 다시 보급을 마친 뒤 곧장 제물포로 가서 경인운하를 타고 경강으로 진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그냥 가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행사 시간에 맞게 차질 없이 동재기나루까지 도착해야 했다.

혹여 늦을까 싶어서 전보현은 일정보다 넉넉하게 출발했다.

전보현을 포함한 총 선원 24인, 거기에 부산의 유지들 10여 명을 포함한 증기선 「동광호(東光號)」는 예상대로 순조롭게 목포에 도달해 보급을 마친 뒤에, 대천까지 항해했다.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기관상의 문제가 발생해서 수리하는 데 하루를 지체하긴 했지만, 원체 넉넉하게 일정을 잡고 출발한 터라 전보현은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항해에 큰 문제는 없었다.

제물포 근방으로 접근하면서 한 번 암초에 좌초될 뻔했지만 다행히도 노련한 조타수가 배를 끌고 잘 빠져나왔다.

경인운하의 인천 쪽 입구에 정박했을 때에는 적어도 이틀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예상대로 안전하게 도착한 셈이었다.

행사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전보현은 일부러 배를 이곳에 하루 묶어두기로 결정했다.

새벽 일찍 운하로 지나 경강으로 들어가면, 정오에는 동재기나루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전보현의 계산대로, 기선은 확실히 제 시간에 제도대교 앞을 지나서 시연장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백 년 전, 지난 세기의 기술력이 집약되어 세워진 제도대교 아래로, 금세기에 등장한 혁신적인 기술의 상징인 증기선이 연기를 내뿜으며 물살을 가르고 나타나는 모습은, 확실히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기 하기에 충분했다.

제도대교의 다리 위에서부터 동재기나루에 이르기까지 이 장면을 보고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이 증기선의 제도입성을 환영했다.

수년 전에 공식적으로 제국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를 높이 게양하고, 우렁찬 소리로 물바퀴차를 돌리며 시연장 앞을 지나가는 증기선에는 선원들이 모두 갑판으로 나와 패랭이를 벗어서 흔들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저 기선이 등장해서 해군에 보급할 수 있었다면, 영주의 반역도들을 제압하는 데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쌍안경을 들고 기선의 매끄러운 움직임을 바라보던 군부 대신 이용(李勇)이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총리 대신 채제공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영주는 붙들고 있어 봐야 이제는 제국에 손해만 끼치는 그런 존재일세. 차라리 이쯤에서 각자 제 갈 길을 가기로 한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나은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전비가 엄청나게 소모되었고, 내지의 산물을 팔 주요한 시장 하나도 잃었습니다. 나라의 경제 사정이 영주의 독립 이후로 눈에 띄게 좋지 않아요. 위로는 간교한 요동이 똬리를 틀고 앉아서 어떻게든 내지에서 하는 것은 그대로 훔쳐 모방하고 있지요. 어디 요동뿐입니까. 가까이는 일본에 양나라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연합 왕국까지 제국에 도전하는 나라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이용의 말을 듣고 있던 채제공은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아직까지 대한제국은 예전의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세계적인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동안 집적된 자본도 만만찮을뿐더러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도 다른 어느 나라에 비교해서 뒤지지 않았다.

적어도 10만 이상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요동과 연합 왕국, 그리고 양 나라뿐이었다.

더군다나 해군은 연합 왕국과 함께 아직까지 쌍벽을 이루며 대창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영주를 잃게 된 것을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까요. 이대로 제국이 쇠퇴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가는 뒤쫓아 오는 많은 나라들에게 이내 제처지고 말 겁니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홍문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채제공에게 물어왔다.

황제는 자랑거리인 멋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채제공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채제공은 별로 당황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몸을 살짝 기울여서 황제에게 되물었다.

“폐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야 그저 장식품인데 내가 정책을 내어 놓는다고 해서 실행이 되겠소?”

약간의 비꼼이 담겨 있긴 했지만, 웃자고 하는 소리였다.

실상 황제는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고, 의회나 내각에 대해서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옆에서 황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깔깔 웃었다.

“어찌 되었든 이 제국은 바로 폐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저희 신료들은 황실의 안위와 제국의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총리 대신의 말대로 유지하는데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갈뿐더러, 제조업이나 해운업에서 내지와 경쟁하기 시작한 영주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일이었어요. 놓아 줄 때가 되었던 겁니다. 국내의 산업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원자재를 싼값에 식민지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영주는 도리어 배를 건조하고 공산품을 생산해서 내지에 팔려고 하니 채산이 안 맞는 노릇이지요. 황후가 옆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영불 제국을 견제하고 스웨덴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인도양 경략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겁니다. 예를 들자면, 말라카는 어떻습니까? 실론도 좋지요.”

황제의 말에 채제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국가의 전략을 고려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제국에 필요한 것은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본토와 경쟁을 하려는 식민지들이 아니라, 유지 비용은 저렴하면서도 그 식민지를 경영함으로써 최대한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곳이 중요했다.

그렇잖아도 군부에서는 말레이 반도나 스리랑카의 식민지화를 검토하고 있었다.

지금 제국에게 필요한 식민지는 바로 싼값에 원료를 공급받을 수 있고, 식량 기지로서 제국의 노동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곡물을 생산해 내고, 마지막으로 제국의 공산품을 판매하는 시장이 되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대한제국이 손에 쥐고 있는 식민지들은 하나같이 해당되는 곳이 없었다.

오히려 영주 독립 이후로 진서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그 불씨가 옮겨 붙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용이 들었으면 들었지 기존의 오래된 외부 영토들을 유지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의 우리 거점인 상남을 중심으로 말레이 반도에 영향력을 투사하고, 그 다음에는 버마와 스리랑카, 최종적으로는 스웨덴과의 합작하에 인도를 분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개성공(開城公) 이산(李뽁)이 거들었다.

20대의 헌앙하고 잘생긴 청년인 그는 개성공가의 당주로서 문무를 겸비하고 학재(學才)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조부의 뒤를 이어 추밀원에 세습 의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대학에서 학유(學諭)의 지위도 지니고 있었다.

평소 홍문제는 황태자 이염(李琰)의 말동무이자 같이 공부할 친구로서 이산을 가까이 붙여 두고 있었다.

“개성공의 식견이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지금 당장 다시 군대를 동원해 외지에 보내기에는 국고가 부족할뿐더러,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채제공은 다시 쌍안경을 집어 들고 한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쌍안경에 렌즈에는 기선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비춰져 있었다.

1771년

홍문(弘文) 33년 계동(季冬)

요동국 남양로 여순부

북쪽에서 내려온 찬바람이 여순항의 바닷물을 마치 얼려 버릴 듯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유청령은 거실 창문 밖으로 멀리 항구에 시선을 두고서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정경대군 김우가 북륙에서 사냥하던 중에 낙마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막 들은 차였다.

지난 이삼 년간은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지아비로 여기고 있던 사내였다.

채 생의 절반도 다 살지 못하고 나이 마흔 줄에 죽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패기 넘치던 모습은 어느 순간 다 사라져 버리고, 이미 거죽만 남은 마음이 죽은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어디선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사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낙마 사고 따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진 칼날이 이미 그를 죽이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지만, 정실인 부부인 한씨가 유청령과 아들 시유를 장례식장에 불러줄 리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부부인 한씨는 김우와의 사이에서 남자 아이를 낳지 못했다.

듣기에 관계가 소원했다는 부부 사이에는 딸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 남편이 이제 세상을 떠나가 버렸으니, 아마 한씨는 그 원망을 유청령에게 돌리고 싶을지도 몰랐다.

남편이 남겨두고 간 것은 딸 하나인데, 천한 계집이 그 씨를 이은 남자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속에 부아가 치밀지 않는다면 거짓일 터였다.

허나 유청령이라고 딱히 통쾌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갔던 김우와 부부인 두 사람의 삶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들도 신분과 명예라는 허울 속에서 제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부부인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김우는 확실히 그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완전히 죽어 버렸던 김우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유청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물 한 방울이 맺힌 눈가가 시큰했다.

이제 김우의 정경대군가(家)를 이을 자손이 없다고 하나, 아마 부부인 한씨가 반대를 할 터이니, 김시유가 그 가문에 다시 입적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작(君爵)을 받을 가능성은 없을 터였다.

사실 유청령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아들이 왕가의 족쇄에 얽매여서 우호적이지 않은 왕실 어른들에게 눈치를 보며 성경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기를 그녀는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다.

이제 겨우 아들의 나이 열넷이었다. 총명하고 재간 있는 아이였으나, 그런 모진 어른들의 품성을 견뎌낼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마님. 최수일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감상에 잠겨 있던 유청령은 문밖에서 들려온 하녀의 목소리에 하던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니 최수일도 아마 김우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이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 또한 일전의 평양에서의 사건에 연류된 뒤로, 페를 끼쳤다며 부부인의 눈 밖에 났을 터이니 아마 장례식에는 참석할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는 중년이 되어 뱃집이 조금 붙고, 얼굴에는 성긴 수염이 자라난 최수일이 입고 온 두루마기를 하녀에게 건네주고서는 꾸벅, 하고 유청령에게 인사했다.

“최 선생님도 그간 안녕하셨어요? 오랜 기간 격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수일을 본 지도 일 년 만이었다.

그는 평양에서의 일을 겪은 뒤로 한동안 회사 일에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다시 업무 일선에 복귀해 유나바루로 건너가 그곳의 지점 일에만 집중했다.

보다 큰일을 맡기려고 해도 떠맡으려고 하지 않으니 좀체 여순에서 볼 일도 없었다.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최수일의 물음에 유청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북평의 관저에서 세 명이 앉아서 함께 밥상을 나누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말입니다.”

최수일의 표정은 유난히 침통해 보였다.

사람이 뜻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원래 쉬운 것이 아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난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체념이 주름처럼 알알이 배어 있었다.

아마 김우를 향한 원망과 그리움의 그물이 그 마음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을 터였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돌아가서 따져 물어볼 사람도 없어진 셈이었다.

그저 무지렁이로 군복무가 끝나면 고향인 무순으로 돌아가 아버지처럼 광부가 될 생각이었던 최수일을 키워낸 것은 김우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볼 때, 과연 지금 인생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최수일은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는 이제 많이 자라셨지요.”

“예. 지금은 교외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지내고 있어요. 교육 방침이 엄격한 곳이라 이 년 정도는 그곳에서 공부를 제대로 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버지 없이 자라서 그런지 아직까지 응석도 많고 해서…….”

“잘 생각하셨습니다. 좀 더 도련님이 자라면 성경의 왕립대학에도 진학시키셔야지요. 그래도 왕족은 왕족이니 아마 특례로 입학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최수일의 말에 유청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성경에는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복잡한 생각을 하며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아요. 차라리 내지로 보내서 공부시킬까 생각 중이에요. 요동을 떠나서 좀 더 널찍한 세상을 보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길 원해요.”

유청령이 가진 고집이라면 고집이었다.

그녀는 절대 아들을 의뭉스러운 국왕 일가가 있는 성경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경계인의 삶이 지워진 것이라면, 차라리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는 편이 아들에게도 좋을 터였다.

남성물산을 물려받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장사꾼이라는 것은 원래 국경이 없는 몸이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찾아가고, 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또 어디든지 간다.

신분만 왕족일 뿐인 아들이 성경에서 복잡한 인간 군상들 속에서 상처받고 고뇌하는 모습을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저 대륙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옛 왕들의 도읍지에서 그 무게감을 견디느니, 차라리 여순항 저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면, 제대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학교야 어디라도 좋겠지요. 평대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대라 함은 제도대학이고, 평대라 함은 평양대학이었다.

보통 훌륭한 집안 출신의 관계나 학계로 진출할 이들은 제도대학을 비롯한 역사가 오래된 명문인 「경내사학」으로 진학을 했고, 반대로 새로 부흥하고 있는 실업가들이나 중산 계층의 자녀들은 평양대학으로 진학을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훌륭한 선생을 초빙해서 일이 년 정도는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고 진학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렇잖아도 황성부에 훌륭한 학자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소개를 한 번 해볼까 했었습니다.”

“어떤 분이신가요?”

“연암 선생이라고……. 성함은 박지원이라고 하고, 황성의 명문가 출신에 제도대학을 졸업해서 학유를 지내다가, 잠시 관가에서 벼슬을 한 뒤 지금은 홀로 연구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계십니다.”

“어떤 연구를 하시는 분인가요?”

“가리지 않고 관심이 있는 분야에는 모두 손을 대시는 것 같습니다. 화석을 모으고 분류하는 것에서부터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박람강기하다고 명성이 높습니다.”

“그런 분이 맡아만 주신다면 고마운 노릇이지만, 시유가 과연 그분의 학문을 쫓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듣기에 도련님의 총기가 대단하다고 하던데,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사숙하며 학문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것이니, 큰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반년 뒤면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 그때 아이가 생각이 있다면 한 번 꼭 최 선생님을 통해서 부탁 드릴게요.”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최수일은 여순의 겨울 추위에 감기가 들었는지 저고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닦았다.

“여순이 많이 춥지요.”

“이놈의 요동의 추위가 실어서 남쪽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필 왔더니 또 겨울이라…….”

최수일은 말을 잇다가, 김우가 참 추울 때 비명을 달리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말끝을 흐렸다.

죽은 사람을 자꾸 입에서 되뇌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나 유청령이나 그 죽은 이가 가는 길을 배웅할 처지도 되지 못하지 않는가.

“유나바루 지점은 일이 잘 돌아가고 있지요?”

최수일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이, 유청령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가 괜히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늘 그렇습니다. 몇 년째 이윤이 남는 폭은 거의 같지요. 말이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혹시 성경의 대군저에서는 회사를 어찌하겠다고 말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대군 나리께서 마치 예견이라도 하신 모양으로, 두 달 전에 회사의 운영권을 저한테 넘기셨어요. 찾아오시지도 않고 그저 서류를 몇 장 보내신 게 전부였지만 말이에요. 이제 남은 것은 이 남성물산뿐이네요.”

유청령의 말에 최수일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적지 않은 세월을 이 남성물산과 함께 보냈었다.

평양 사건으로 고통을 받고서도 회사를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것은 그만큼 이 남성물산에 미련이 남아서였다.

최수일은 차라리 어쩌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김우의 그림자를 털고서 다시 남성물산을 일으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김우 생전에는 성경 왕실의 눈치를 보느라 사업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온갖 이유를 들어서 기존의 사업가들과 관료들로부터 견제가 들어오니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우가 얽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운신의 폭이 좁아진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회사를 정리하지 않고 남겨주기 위해 남성물산을 보호해 준 김우를 탓할 수도 없었다.

왕실의 눈밖에 벗어났으니 일찌감치 회사가 사라져 버리는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껏 잘 버텨 온 것도 김우가 이 회사로 몰아치는 파도는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사건만 하더라도 회사의 존폐가 걸릴 정도의 위기였으니 김우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터였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봐야겠지요. 예전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나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유청령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여순으로 올라오는 길에 들었는데, 한국 의회에서 조만간 말레이 반도로의 출병을 결의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출병이 이 년 뒤가 될지 삼 년 뒤가 될지 아니면 바로 내년 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보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까요?”

“결국 그렇게 되나요. 영주를 잃은 손실을 보전해야 하니 그렇게 가겠지요. 하지만 남을 침략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기회라고 보아서 뛰어들고 싶지는 않네요. 차라리 저는 독립한 연방 공화국과 무역 관계를 뚫어볼 생각이에요. 어차피 요동 기반의 회사인지라 내지 회사처럼 동영 연방 공화국에 대한 금수 조치가 걸려 있지도 않으니, 차라리 자유롭게 접근해서 물건을 들여와 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지난 독립전쟁과 뒤이은 무역 금지 조치로 인해서 기존에 신대륙 무역에 종사하던 계영양행과 내상이 거의 손을 떼고 몰락하고 있으니, 차라리 이참에 우리가 뛰어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지긋지긋한 전쟁 놀음에 같이 놀아나느니, 공화주의자들과 손을 잡겠습니다.”

“하하, 그것도 괜찮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공과의 무역에 뛰어들게 되면 저는 평양 사건도 있고 아주 공화주의자로 찍히겠는데요.”

최수일이 처음으로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유청령의 말에 뭔가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공화주의자면 뭐 어떻고, 왕당파면 뭐 어떻겠어요. 우리 같은 장사치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지요.”

유청령의 말에 최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창문을 두드릴 정도로 세차게 불던 겨울바람도 잔잔하게 멎어들고 있었다.

1775년 중하(仲夏)

영불 연합 왕국 프랑스 파리

영주독립전쟁으로부터 시작된 공화주의의 혁명적인 바람은 바다를 건너 이리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극동과 유럽 각지에서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서적들이 검열을 피해 발간되어 읽히고, 기존의 전제적인 정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시민혁명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목숨을 건채 사상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쉽게 기존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이 세워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심지어 공화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구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공화국의 기치를 올리는 때가 언제가 될지, 또 어디가 될지 알지 못했다.

아직 세상에서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불만의 목소리는 각지에서 넘쳐 났지만 이를 하나의 혁명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절대군주와 미적지근한 입헌정을 포괄하는 앙시앵 레짐(Ancien R gime)은 여전히 이 시대의 강대국들을 통치하는 기본 질서였다.

이렇게 강고한 체제를 영주와 같은 식민지도 아닌 본국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1775년의 해가 밝았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프랑스에서 혁명이 터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런던에 있는 연합 왕국의 국왕 리처드 5세에 대한 불만은 파리에서 갈수록 고조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연합 왕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프랑스에서 쫓아낼 수 있는 혁명이 물리적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여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등한 관계로 합방(合邦)을 하여 동군연합(同君聯合)을 이룬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었으나, 사실상 행정 권력의 중심지는 런던에 있었고, 이제 파리는 왕국 내에서 정치적인 위상을 잃어가고 있었다.

낭트와 같은 대서양 연안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산업도시들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이익을 더욱 중요시 하는 연합 왕국의 런던 정부는 프랑스를 사실상 내부 식민지화하여 공업 생산을 억제하고, 농업에 생산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런던에서는 프랑스에 한해서 대토지 귀족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었으며, 잉글랜드에서 펼치는 중상주의적인 정책들과는 상반되게 프랑스에서는 철저하게 중농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프랑스의 부는 철저하게 가장 높은 봉건 계급의 상층부에 종속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중산 계급의 자본이 발흥하는 것이 정부에 의해 억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가진 역량은 런던 정부가 제약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었다.

프랑스의 도시들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상업 자본과 공업 자본들이 점차 발전했다.

또한 파리는 여전히 유럽대륙의 문화 중심지로서 위대한 철학자들과 계몽 사상가들이 이 파리의 골목골목에서 새로운 시대를 밝힐 사상을 유럽 전역으로 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리가 꼭 혁명의 발원지가 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1775년이 밝아오는 시점에서 파리의 중산 계층은 다시 삼부회(三部會)가 국왕의 명령에 의해 소집될 것이라는 소식에 흥분에 들떠 있었다.

연합 왕국의 국왕 리처드 5세는 프레더릭 노스(Frederick North) 내각에 명하여 프랑스에서도 잉글랜드 의회와 대등한 수준의 의회를 구성할 방법을 강구하게 했다.

사실상 영불 제국의 통치가 잉글랜드 의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의 삼부회가 다시 수립되는 것에 대한 기대가 파리의 조야에 퍼져 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삼부회는 영불 연합 왕국의 수립 이후 100년여 간은 꽤 정기적으로 열렸었지만, 이후로는 사실상 폐지된 상태로 부정기적으로 가끔 소집되다가, 지난 50년간은 한 차례도 소집되지 않았다.

대신 국왕이 직접 겨울의 3개월간은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으로 이궁(離宮)해서 정무를 보고, 나머지 국왕이 부재하는 9개월 간은 국왕이 임명한 프랑스 왕국 국새상서(Lord Gardien du sceau priv )에 의해 통치되었다.

사실상 총독이나 다름없는 국새상서는 파리를 중심으로 귀족 관료 집단을 이끌면서 프랑스의 행정 업무에 종사했고, 대개 이 국새상서가 행하는 정책들은 프랑스의 일반적인 이익에 복무하기 보다는 런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50년 만에 삼부회가 다시 소집된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국새상서에 의한 절대주의 통치가 종식되고, 잉글랜드와 같은 입헌 의회정이 프랑스에도 도입된다는 이야기였다.

삼부회가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 의회로 거듭나게 된다면 프랑스는 자율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심사하여 프랑스 왕국을 위한 통치를 실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프랑스 중산 계급이 열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의회통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산업과 전문 직종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정부를 원했다.

어디까지나 잉글랜드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면, 프랑스 중산 계급이 가질 수 있는 한계 또한 명확했다.

만약, 의회정부가 수립된다면 적어도 이들은 프랑스 왕국의 식민지인 퀘벡의 군대가 잉글랜드 식민지인 버지니아의 방위를 담당하기 위해 차출되는 우스운 꼴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프랑스 왕국의 독자적인 이익이 연합 왕국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보호받지 못하고, 오로지 잉글랜드를 위해서 존속하는 현재의 체제를 끝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리처드 5세가 의회소집이라는 카드를 파리를 향해 내민 데에는 연합 왕국이 봉착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해양 패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연합 왕국의 시도는 번번이 스웨덴―네덜란드―한국 간의 3각동맹에 의해서 제약되어 왔었다.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연합 왕국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이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연합 왕국은 동영 연방 공화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였으나, 결론은 전비를 축내가며 공확국을 독립시키긴 했으나 기대했던 삼각동맹의 세력 축소를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부적으로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들이 과중한 세금을 물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전반적으로 만연해 있었고, 이를 수습하고 무마한 뒤에 재정 위기를 타파하는 세금을 프랑스에 부과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삼부회 소집이라는 패를 꺼내 든 것이었다.

리처드 5세의 프랑스 국새상서인 샤를 알렉상드르 르 칼론은 삼부회를 통해 기존의 특혜를 누려왔던 프랑스 대토지 귀족들에게까지 세금을 물리고자 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리처드 5세가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결국 4월 봄날에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을 의원으로 구성하여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표결의 처리를 둘러싸고 삼부회는 시작부터 진통을 겪기 시작했는데, 귀족과 성직자들은 계급별 투표를 주장했으나, 평민 대표들은 1인 1표를 주장하여 회의가 시작부터 파행에 접어든 것이었다.

삼부회가 시작되기만을 벼르고 있던 평민 대표들은 막상 삼부회가 소집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로 옮겼다.

이들은 이곳에서 농성하면서 「국민의회」를 조직해 삼부회를 실질적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며칠 뒤에 이곳에는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제와 귀족의 일부도 합류하였고, 공식적으로 이들은 「프랑스 왕국 제헌국민의회(Assemble nationale constituante)」를 구성하여 잉글랜드와 대등한 프랑스의 입헌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제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새상서 르 칼론은 이를 무시했고, 이러한 행위는 반역죄에 상당한다고 주장하며 군대로 테니스 코트를 둘러싸고 의회가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르 칼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초에 프랑스 의회의 재건과 함께 중상주의적 정책을 프랑스 내부에서 펼치기 위해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를 공식적으로 해임했다.

이것은 단순히 일개 재무총감이 해임된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왕국 국민들의 염원을 거부하고, 다시 대(對)잉글랜드 종속 상태를 심화시키는 중농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제헌국민회의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르 칼론은 공식적으로 런던으로 사람을 보내 무력 진압에 대한 허가를 요구했다.

결국에 리처드 5세의 재가를 받아낸 국새상서 르 칼론은 즉각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테니스 코트의 제헌의회에 대한 진압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은 즉각적으로 파리시 전역에 퍼져 나갔고, 제헌국민의회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7월 14일, 결국 항의의 표시로 들고 일어나 정치범 수용소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파리에서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즉각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하시던가, 아니면 저들과 협상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곧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파리에서는 런던 정부에 대한 비타협적인 분위기가 점차 조성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혁명의 물결이 파리 일대를 중심으로 프랑스 전역에 번져 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이번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국새상서 르 칼론이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속속들이 런던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런던의 프레더릭 노스 내각은 전전긍긍하며 사태의 수습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법률적으로 보았을 때, 사실상 잉글랜드의 의회와 내각이 프랑스 왕국의 실질적 국정에 수많은 입김을 불어넣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의회는 잉글랜드 왕국만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프랑스 왕국의 내정 문제를 결정 지을 권한은 없었다.

때문에 같은 연합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잉글랜드의 편파적인 연합 왕국의 국왕들에 의해 프랑스 왕국은 전제적으로 통치되어 왔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내부 식민지화하는 데는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이제는 도리어 개입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프랑스의 제헌의회가 구성되어서 직접 그 정부의 수권자인 리처드 5세와 대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잉글랜드 의회가 공식적으로 개입할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후약방문적인 방법으로, 우선 개입한 뒤에 프랑스의 국정을 안정시키고 나는 것이 성공한다면 그 후에 이를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정당화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수상 프레더릭 노스와 그 내각은 이 결단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지고 싶지 않아 했다.

성공해도 장기적인 불안요소를 떠안아야 했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내각의 해산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공동 왕, 위대한 연합 왕국의 유일하신 임금이신 리처드 전하께서 프랑스의 불안한 내정을 위무하시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실 줄을 믿으며…….”

프레더릭 노스는 은근슬쩍 그 책임을 리처드 5세에게 전가시켰다.

이제 나이 겨우 서른 줄인 리처드 5세는 프랑스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는 온갖 궁중의 각료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묻기 시작했다.

더러는 군사 개입을 지지하기도 하고, 더러는 파리의 제헌의회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이렇게 지지부진한 논의들만이 계속되는 동안, 파리의 상황은 갈수록 격렬해져 가고 있었다.

런던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내어놓지도 않고, 권한을 위임받은 적절한 협상단도 보내지 않자, 이를 사실상 프랑스의 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파병하기 위해 숨고르기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 파리의 공기는 점차 뜨거워져 갔다.

공식적으로 제헌의회는 의회주의적인 정부의 재구성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여기에 언제고 시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부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저항권을 명시했다.

이것은 사실상 왕권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리처드 5세는 이를 마지못해 승인했다.

리처드 5세가 차일피일 공식적으로 파리의 상황에 대한 대책을 미루고 있는 사이, 선언문의 저항권 명시를 리처드 5세가 추인(追認)한 것을 사실상 의회주의의 승리로 착각한 프랑스 제헌의회는 공식적으로 1776년 3월 3일, 기존의 봉건적특권이 모두 종식되었음을 선언하고, 〈프랑스 인권선언(D 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채택했다.

5월에 이르러서는 미라보 백작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Honor Gabriel Riqueti)를 프랑스 왕국 수상으로 하는 거국내각(擧國內閣)이 구성되었고, 미라보 백작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귀족 출신으로 혁명에 가담했던, 라파예트 후작 길베르 뒤 모티에(Gilbert du Motier)가 프랑스 왕국군 총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시점, 런던에서는 파리에서 미라보 내각이 출범하는 것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사실상 군사 개입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던 리처드 5세로서는 적어도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는 미라보 내각과는 타협의 소지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1776년 11월 15일에, 리처드 5세는 전 수상이었던 피트를 파리로 보내 미라보 내각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어떠한 경우에도 프랑스 왕국의 새로운 의회는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합 왕국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과 다음으로, 인권 선언을 폐지하고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을 의회에서 제명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여건을 미라보 내각이 충족시킨다면, 런던의 국왕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의회를 허락하고, 이후 잉글랜드와 마찬가지로 입헌주의적이고 자치적인 프랑스 정부를 공식적으로 구성하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놓고 이듬해가 될 때까지, 프랑스의 입헌의회는 밖으로는 잉글랜드에서 오는 압력과 안으로는 공화주의자들의 맹공 속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미라보 내각은 피트와의 회담을 몇 차례 연기해 가면서도 확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연정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오.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은 연합 왕국에서 완전히 독립한 프랑스 공화국의 설립을 바라고 있고, 런던에서는 제헌의회가 결의한 혁명의 토대들을 완전히 부정하길 바라고 있소. 이 상황에서 입헌군주제와 연합 왕국 안에서의 자치를 주장해 보아야, 현실적인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기에 앉아 있는 제군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이제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하오. 그러나 결론은 이미 나 있을 줄 아외다. 런던과 진실하게 협상에 임하는 것만이 끔찍한 피의 충돌을 예방하고 안정적인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는 최선의 수단이오.”

앞으로 프랑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확실한 결단을 내려놓지 못하는 미라보 내각에 대해, 입헌주의를 주장하는 온건파인 푀양 클럽(Club des Feuillants)의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직자 출신인 엠마뉘엘 시에예스(Emmanuel Siey s)가 미라보 내각의 결단을 요구했다.

이 건의를 받아들인 미라보 백작은 결국 1777년 6월 1일, 런던 측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피트에게 언명했다.

미라보 내각과의 구두 합의를 마친 피트는 공식적인 선언문을 오는 9월 15일에 서명하기로 하고 런던으로 잠시 돌아갔다.

이 사실이 파리 시내에 퍼지자 이내 공화주의자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롱드파와 자코뱅파 등의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는 파벌들은, 이내 자신들이 의회에서 몰려나 반역자로 처단당할 것을 우려했다.

파리 시민들 또한, 미라보 내각의 정책 방향이 결국 구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9월 15일에 공식적으로 협정문이 조인되면, 이내 탄압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 공화주의자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들은 파리 시민들을 조직하여 기존 내각에 대한 전복을 꾀했고, 열흘간의 파리 시가전 끝에 성공적으로 파리 시를 점유하고, 미라보 내각을 중심으로 한 푀양파의 거두들을 모두 형장으로 보냈다.

“우리는 이제 거국적으로 프랑스 공화국의 건국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것을 선언하며, 동시에 압제적인 연합 왕국의 기존 체제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새로운 프랑스인민들만의 국가를 건설할 것을 맹세한다. 동시에 아라곤 왕국의 전제주의적 정부로부터 신음받고 있는 남프랑스의 동포들을 다시 해방하여 프랑스 공화국의 깃발 아래에 집결시킬 것을 주장한다.”

급진적인 언론인이자, 동시에 새롭게 구성된 국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신문 《인민의 벗(L’Ami du peuple)》에 논설을 발표하며, 프랑스 공화국이 곧 수립될 것을 언명했다.

또한 프랑스 민족주의적 정신에 입각하여 200여 년간 아라곤 왕국에 편입되어 있었던 지중해 연안의 프로방스 지역을 다시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로 되찾아 올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라의 주장은 이내 국회에 진출한 급진적인 자코뱅당, 특히 산악파의 정책적 입장이 되었다.

이제 혁명은 잠재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런던은 공화주의의 불꽃을 피운 2차 혁명에 경악했다.

당초 9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협정문은 폐기될 수밖에 없었고, 이제 군사적인 개입으로 파리의 의지를 좌절시키지 못한다면 연합 왕국의 해체는 불 보듯이 뻔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독립을 용인한다면 연합 왕국의 체제하에서 상당한 이득을 누려왔던 잉글랜드의 산업과 금융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미적지근한 대처를 해왔던 프레더릭 노스 내각은 결국 해산되고,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내각이 입각하여 대(對)프랑스 군사 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자코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지롱드파가 집권에 성공했으나, 전쟁의 불길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급진적인 정파들의 의견을 수렴한 지롱드파는 공식적으로 독립과 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1778년 1월 1일, 남프랑스에서 혁명에 동조한 마르세유의 독립파(獨立派)가 아라곤 왕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임시적인 옥시타니아(Occit nia)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마르세유에 정부를 세운 이들 혁명군은 파리와 즉각적인 협력과 우호 관계를 약속했고, 동시에 수년 내로 대등한 자격으로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남프랑스의 동참으로, 프랑스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자코뱅당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지롱드의 입지를 위협하는 가운데 아라곤이 공식적으로 프랑스와 옥시타니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부응하여 이미 프랑스로의 군사력 투입의 준비를 마친 잉글랜드도 선전포고가 아닌, 내전 진압을 명목으로 강력한 군사 개입이 이루어질 것임을 국제적으로 선언했다.

프랑스의 혁명적 주장에 위협을 느낀 스웨덴―오스트리아는 연합 왕국의 해체를 찬성하면서도 프랑스 공화국의 급진적인 노선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불만을 토로했다.

잉글랜드와 대립하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선언을 했고, 이 전쟁을 틈타 다시금 중부유럽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한 폴란드는 프랑스를 도울 것을 선언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둘러싸고 유럽의 열강들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상실하고 전쟁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혁명의 시대가 이제 막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제 영원히 그들이 예전과 같지 않은 다른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대한제국 연대기 1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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