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권-제72장 경달권변(經達權變) (73/82)

제72장 경달권변(經達權變)

「다양한 지식을 향한 피할 길 없는 충동이 나를 명백하게도 여러 분과 학문들에 대한 지식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식물학, 지질학, 화학, 천체의 위치에 관한 측정, 그리고 지자기학 같은 것들 말이다.

……지식을 향한 확고한 갈망 없이는, 이 모든 우주에 관한 거대하고 일반적인 관점들은 한낱 흐릿한 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코스모스(Cosmos)》, (Paris, 1831)

1775년

홍문(弘文) 37년 중추(仲秋)

대한제국 황성부

지난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였더니, 마치 한뎃잠이라도 잔 것처럼 온몸이 쑤셔왔다.

김시유는 퀭한 눈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는, 머리맡에 두었던 자리끼를 들이키고 나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기숙사의 좁은 방 안으로 가을바람과 함께 낙엽이 같이 날아들어 왔다.

손을 뻗어 힘없이 죽은 그 잎사귀를 들어 보았다.

생기 없이 죽은 가을 잎은 이내 손 안에서 바스러졌다.

재를 뿌리듯 창밖으로 낙엽 부스러기를 털어 버리고 나서, 힘껏 기지개를 켜 보았다.

몸이 조금 시원하게 풀렸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회중시계를 들어 보니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신변을 정리한 다음, 마치 망토처럼 생긴 짧고 품이 넓은 검은색 두루마기를 쇄골 아래쯤에서 대충 잡아 묶어 매고서는, 유건(儒巾)을 뒤집어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잘생겼다면 잘생긴 얼굴이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얼굴이다.

김시유는 늘 거울을 볼 때마다 미묘하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꽤나 미인이었고, 잘 기억나지 않는 부친도 헌앙하다고 들었지만, 섞어 놓고 나니 부모보단 못한 셈이었다.

“어디 보자, 왕십리로 내려가서 젊은 처자라도 희롱해 볼까 싶어 그렇게 멋을 내고 있냐?”

방 밖을 나오자, 옆방의 동기 주수겸(周收兼)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서 트집을 잡는다.

“일없다. 오늘 연암 선생님을 뵙기로 약속을 해놓았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제때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 그 신당동의 박 선생님 말씀이시냐?”

주수겸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한마디 덧붙였다.

“돌아와서 밤에 왕십리에 몰래 내려갈 생각 없냐?”

김시유는 아서라는 듯 손을 휘젓고서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한강으로 돌아 나가는 곳의 언덕 위에 자리한 「제도대학」의 전신은 바로 15세기에 세워진 「학습원(學習院)」이었다.

이 제도대학에 면한 살곶이다리로는 남동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도(官途)가 지나갔고, 인근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마를 키우는 목장이 있었다.

이렇게 주요한 시설들이 배치되어 있는 탓에, 제도대학의 문하촌(門下村)이라 할 수 있는 왕십리는 일찌감치 큰 마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곳은 동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었고, 동시에 제도대학의 학생들이 몰려다니는 거리이기도 했다.

여각과 객줏집, 주막과 각종 상점들이 번창하는 곳이었다.

황성부가 성장함에 따라, 외따로이 있었던 이 왕십리의 성시(城市)도 자연스럽게 황성부의 시가지에 편입되었지만, 여전히 이곳은 서울 동부에서 가장 번창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환경이니 만큼, 제도대학의 학생들은 더러는 이곳 왕십리에서 하숙을 치기도 했고, 학교에서 기숙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매일같이 내려와서 방종(放縱)의 의식을 치르곤 했다.

공부보다는 술이 늘 우선이었고, 인근 민가의 젊은 처자를 어떻게 꼬드겨 볼까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맹해 빠진 학생들도 흔했다.

가끔 그런 무리에 껴서 김시유도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밤새 술을 들이붓곤 했지만, 요즘에는 좀체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주수겸이 뭐라고 꼬드기든, 여하간 한동안은 술이고 담배고 입에 댈 생각이 없었다.

학교를 나와 왕십리로 나온 김시유는, 역전(驛前)으로 향했다.

왕십리 역사는 동남가도(東南街道)의 최종 종착지였고, 경상도 방향에서 올라온 역마차는 모두 이곳에서 멈췄다.

이곳에서 시내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근에 사대문 안을 향해 깔린 궤도마차(軌道馬車)를 이용해야 했다.

역마차를 타고 올라온 여객들뿐만 아니라, 왕십리와 뚝섬[纛島] 일대의 주민들도 이곳에서 십 분마다 출발하는 궤도마차를 곧잘 이용하고 있었다.

여덟 마리 말이 끄는 30인승의 기다란 마차는 종로까지 운행하고 있었고, 김시유는 그 중간쯤인 동대문 안쪽 신당동에서 내릴 생각이었다.

제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사승(師承)했던 스승 연암 박지원의 자택이 그곳에 있었다.

“어서어서 올라타시오, 종로 가는 마차가 지금 출발합니다!”

마부가 마차를 궤도 위에 올려놓고 호객하며 종을 울리자, 이내 마차를 타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화(銅貨) 열두 전이 삯이니 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다지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인지라 부담 없이 마부에게 값을 치르고서는 김시유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잖아도 스승과 약속한 시간에 늦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굳이 한 시간여를 걸어서 신당동까지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왔느냐.”

신당동의 연암 자택은 넓지는 않지만 잘 꾸며진 정원을 안고 있는 2층의 벽돌집이었다.

연암은 이 본채가 아니라, 마당 한쪽에 볕이 잘 드는 곳에 있는 옛 방식의 마루가 있는 별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서 난을 관상하고 있던 연암은 제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겼다.

“평안하셨습니까, 스승님? 그간 본의 아니게 격조했습니다.”

“제대에서 학업에 매진하는데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가끔 쉴 때는 술도 마셔야 하고 말이야. 한창 젊고 혈기 넘칠 때에 이런 책 냄새 풀풀 풍기는 뒷방을 들락거리는 것도 못할 일이야. 가끔 이렇게 찾아와 얼굴만 비춰주면 나는 충분하다.”

당대의 문사(文士)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연암 박지원은, 계몽주의의 마지막 총아(寵兒) 같은 인물이었다.

이제 불혹(不惑)의 나이었으나, 일찌감치 다양한 분야에 걸쳐 넓고 깊게 학식을 쌓은 그는, 《백과전서(百科全書)》를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총 30권 분량의 방대한 작업은 연인원 30명 남짓의 인원에 의해 박지원이 겨우 약관에 불과한 나이였던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거의 그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붓을 잡고 있던 탓에 일찌감치 오십견이 찾아온 박지원은, 요즘에는 대학으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려던 것도 잠시 미뤄두고서 집에서 요양을 하며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요양 생활이 시작될 무렵에 최수일을 통해 소개받은 요동의 신완군(愼琓君) 김시유를 가르치게 되었고, 그는 2년간 같이 김시유와 지내며, 제도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많은 분야에 걸친 교육을 시켰다.

“어깨는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그냥 그렇다. 가끔 저리다가, 따끔거리다가, 책을 한참 들여다보느라 목을 축 늘어뜨리면 이내 팔까지 저려오고…….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그만 온돌 생활을 접고 침대를 하나 놓았다. 바닥에 누워 몸을 눕히면 어깨가 잘 아파서.”

“어서 백과전서도 마무리 지으시고, 제도대학으로 돌아오셔서 강의도 맡고 하셔야지요.”

“뭐, 점차 나아지고 있으니 조만간 그럴 수 있겠지. 이놈의 돌팔이 같은 의원들은 이 병이 왜 생기는지도 모르고 치료하는 방법도 몰라. 내가 보기에 이건 약재로 나을 병이 아닌데, 그저 방도를 모르니 아편이 섞인 담배나 처방해 주고 말이야.”

“그래서, 아편을 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아편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는 탁월하지만, 잠시의 편안함을 대가로 신심을 모두 갖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병증을 완화시키는 것 외에는 엄격하게 쓰지 못하도록 규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병을 낫겠다고 아편을 잡아 물던 사람들이 아편귀가 되어서 인생을 종치고 마는 것이 요즘 흔히 보이는 일 아니더냐. 병을 낫고도 그 맛을 못 잊어서 없는 병을 만들어 의원을 찾아가서는 몰래 가산을 다 털어 돈을 먹여 거짓 처방을 받아다가 아편을 주구장창 피워대니, 몹쓸 노릇이지.”

박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편 값이 금값이라더니, 그게 이유가 있었군요.”

“쉽게 구할 수는 없는데 찾는 자들이 많으니,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의원들도 함부로 아편을 처방했다가는 문패를 떼이고 다시는 의원 노릇을 못하게 되는 줄 알면서도,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제 신세 망치고 남의 신세도 망치고, 그리들 산다.”

제국 정부는 아편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부작용이 없는 마취제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었고, 때문에 외과 시술시 통각(痛覺)을 없애거나, 만성질환의 통증을 완화하는 제한적인 목적으로만 아편을 처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고 있었다.

이 이외의 목적으로 아편을 거래하거나 복용할 경우 심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반면에 제국 상인들은 여송(呂宋, 필리핀)이나 월(패)나라 등지에 인도산 아편을 암암리에 팔아 치우고 있었다.

이 국제적인 아편 무역에는 제국 상인들뿐만 아니라 요동 상인, 잉글랜드 상인, 스웨덴 상인들이 각기 지분을 가지고 복잡하게 개입하고 있었고, 지난 10여 년간 아편은 눈에 띄게 동부 유럽에서 북중국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국내에 파는 것이 아니면 상인들이 아편을 취급해도 좋다는 이율배반적인 법령인 소위 〈아편법(阿片法)〉은 제국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남의 나라에 아편을 마구잡이로 팔아 검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 자기 나라에 아편쟁이가 늘어난다고 해서 누굴 탓할 것도 되지 못하지요.”

김시유가 씁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인들이 손에 쥐고 있는 아편은 알게 모르게 국내 시장으로도 흘러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의사들에게서 합법적으로 아편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법적인 처벌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아편을 암시장에서 구해다 피우고 있었다.

“……돈이란 것은 잘 다루면 용재이나, 그것에 휘둘리게 되면 아귀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에 눈이 멀어 아편을 남의 나라에 팔고, 조정은 그것은 방조하였으니, 자업자득인 노릇이지. 정신을 어지럽히고 몸을 해치는 약물을 팔아 돈을 취하는 것이 얼마나 정순치 못한 노릇이냐. 여하간 차도를 보이지 않아도, 내가 아편을 태울 일은 없으니 걱정 말거라.”

박지원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년의 나이에 벌써 몸에 문제가 생기고 있으니, 제자인 김시유로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하간, 내가 오늘 널 부른 이유는 어렵게 구한 책 한 권을 주려고였다.”

박지원은 자개장에서 꺼내온 양서 몇 권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이게 다 무슨 책입니까?”

“네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다지 않았느냐. 요즘 내지에는 언어에 관심을 두는 학자가 없어서 공부하는데 방편이 좋지 않을 것이라 내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백과전서를 집필하는데 참고하려고 최근 구라파에서 나온 언어에 관한 서책들을 모아두었었는데, 나는 충분히 보았으니 네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주려 한다.”

김시유는 박지원에게서 받아든 책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1772년판 헤르더(J.G. Herder)의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Abhandlung ber der Ursprung der Sprache)》, 1773년판 몬보도(Monbodo)의 《언어의 기원과 진보에 대하여》, 그리고 나온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등 읽고 싶었으나 그간 구할 방법이 없어 보지 못하고 있던 책들이었다.

내지에서 양서(洋書)를 구해 보는 것이 사실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대가들의 저술은 그 출원이 동양이든 서양이든 막론하고 상호 충실히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난 석학의 저서라고 하더라도 최근의 것은 구해 보기가 힘들었는데, 그만큼 물리적인 거리를 짧은 시간에 상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훌륭한 저술도 평가와 인정을 받기까지는 자국 내에서도 적잖은 시일이 걸렸고, 이것이 번역되든 번역되지 않든 바다를 건너 움직이는 것은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출간된 지 몇 해 되지 않은 책들을 이렇게 한 번에 구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개인적으로 서지 사항을 알아다가 주문을 넣는 방법도 있었지만, 책 한 권 값이 대양을 건너서 오면 수십 배는 치솟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든든한 집안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이런 사치를 부리기는 김시유로서도 언감생심이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박지원이 보고 싶었던 책들을 내어 준 것이다.

“이런 책들을 어찌 다 구하셨습니까? 정말 제가 받아서 봐도 될는지…….”

눈앞의 책들에 욕심이 나면서도, 스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김시유였다.

“나보다는 네게 더 유용하게 쓰일 책들이니 사양 말고 읽어 보도록 해라. 그냥 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국어로 옮겨가며 천천히 읽으면 네 어학 실력도 점차 증진이 될 것이야.”

“유념하겠습니다.”

김시유가 제도대학에 들어가기 전 박지원의 문하에 있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공부한 분야가 바로 서양 언어였다.

박지원은 갈수록 동양과 서양은 서로 회피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때문에 한문이나 고전에 대한 소양만큼이나 서양어에 대한 교양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박지원은 기초적인 영어, 불어, 독어의 문법과 어휘들을 1년에 걸쳐 김시유에게 가르쳤고, 그 뒤로는 종종 이렇게 원서들을 건네주며 꾸준히 공부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시유는 언어 자체에 크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제도대학에 진학에서도 특히 언어학에 큰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전 언어학에도 족적을 남겼던 명재상 임승준 이래로 내지의 언어학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맥이 끊긴 상황이었고, 오히려 이 분야에 있어서는 진서나 요동 쪽이 훨씬 앞서 있었다.

유구 출신으로, 최초로 비교언어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유구어, 진서어, 일본어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열도어족(列島語族)」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낸 키얀 페쿠미(喜屋武親雲上)가 석좌 교수로 앉아 있는 진서대학이나, 키얀 페쿠미의 방법론에 착안하여 몽골어·여진어·튀르크어 등을 비교 연구하여 「북륙어족(北陸語族)」이라는 분류를 제시한 오관수(吳款洙) 등이 있는 요동의 왕립대학에 비해서 제도대학에서는 이렇다 할 연구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김시유는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임시방편으로 제도대학에서 수학과 고전을 전공으로 하고서도 계속해서 언어학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있었다.

새로운 분과 학문으로 막 태동하고 있는 단계인 언어학의 성과에 대해 김시유는 큰 관심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외국의 저술들을 구해 읽는 것이 난점이었는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박지원이 부러 책을 준비해서 김시유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너는 제도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어찌할 생각이냐?”

감격해서 책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시유에게 갑자기 박지원이 물음을 던졌다.

김시유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여순에 있는 어머니와도, 지척에 있는 스승 박지원과도 그러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었다.

막연하게 언어학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학교를 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순에 있는 어머니 유청령은 아마 김시유가 요동으로 돌아와 남성물산을 물려받기를 바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그의 아버지가 세우고 어머니가 지켜온 가업(家業)인 노릇이다. 그러나 딱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언질을 준 기억은 없었다.

요동으로 돌아오지 않고 황성에 남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제도대학 동기들이 관계(官界)로 진출할 것에 비하면 자신의 길은 난망(難望)하기 짝이 없었다.

허울뿐인 군작(君爵)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든 자신은 요동의 왕족이었다.

내지에서 출사해서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내지 의회나 요동 왕실이나 어느 쪽에서도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을 터였다.

두 가지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그냥 제도대학에 남거나 어디 다른 곳으로 학적을 옮겨 계속해서 공부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언어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제도대학에서는 학위 과정을 지도해 줄 학유(學諭, 교수)가 없으니 다시 유학길에 올라야만 했다.

진서대학으로 가든 요동의 왕립대학으로 가든 둘 다 쉽다고 하긴 힘들었다.

진서대학의 키얀 페쿠미는 이미 나이가 예순이 넘은 노학자로, 은퇴해서 유구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요동의 왕립대학도 좋은 방편이었으나, 자기 같은 누더기 왕족이 아닌 진짜 성골(聖骨)의 왕실 종친들이 학업을 이수하고 있을 왕립대학에서 눈칫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 유청령이 자신을 굳이 왕립대학으로 보내지 않고 제도대학으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터였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김시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남과 같지 않은 신분이라 네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네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노릇일 게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는 네가 공부를 계속하여 대성했으면 한다. 그간 지켜본 바 너는 학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고도 넘친다. 분명히 언어학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로 공부를 하더라도 족적을 남길 것이라 나는 의심치 않느니라. 부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을 정해 보도록 하여라. 이 책들도 그러한 뜻에서 주는 것이니.”

스승의 말에 김시유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저 그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해가 저물 무렵 박지원의 신당동 저택을 나온 김시유는, 궤도마차를 타고 돌아갈 생각도 잊고서는 개천(開川,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한 시간여를 걸어가는 동안 김시유는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 보아도, 어떤 미래가 자신의 앞에 펼쳐질지 아직 그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1778년

홍문(弘文) 40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황성부

홍문제(弘文帝) 이혈이 열여섯 나이로 황제의 보위에 오른 지도 어느덧 마흔 해가 흘렀다.

구중궁궐에서 조용히 지내던 어린 황제는 이제 백발이 머리맡에 지기 시작한 오십 줄의 나이가 되었다.

그의 치세 40년간, 제국은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380여 년간 내려온 제국의 구질서와 제도는 균열 끝에 점차 무너져 내려가고, 새로운 시대가 그 문턱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홍문제 그 자신부터가 그랬다.

고려조(高麗朝)에 왕가가 몽골 황족과 통혼한 이래로 동국에서는 황족이 외국과 통혼한 바 없었다.

그러나 홍문제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혼례를 치름으로써 이러한 관례는 사실상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총리대신 이하 내각(內閣)과 의회(議會)의 양당이 주도하는 정치 구도는 완전히 정착했다.

산업은 육성되어 점차 수많은 공장이 지어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산업자본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광은 새로이 등장한 노동 계급의 피땀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조용한 농업사회는 이제 내리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한강 이북에서는 전통적인 대가족이 점차 해체되고, 핵가족 단위의 노동 계층이 이미 크게 성장해 있었고, 여전히 농업 중심인 삼남(三南)의 농민들조차도 아들 중 한둘은 도시로 보내 품삯을 받는 일을 시키곤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점차 황성, 평양, 대구 같은 공업 도시와 목포, 인천, 부산, 함주 같은 상업 도시들은 점차 크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새로운 모순들을 차츰 누적시키고 있었고, 제국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갖은 정치적 수단으로 사회운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내지만이 이러한 사회적인 변혁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홍문제의 치세 동안에 결국 영주도독부가 독립하여 「연공(聯共, 동영연방공화국)」을 건국하였고, 진서에서도 점차 진서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옛 제국은 이제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홍문제 치세 동안 장기 집권한 채제공의 보수당 내각은 이러한 전환기를 맞이하여 제국주의적인 정책들을 기초하기 시작했다.

한때 상업 제국으로서 대창해 양안(兩岸)에서 번창했던 제국의 외지 영토들은 이제 제각기 중앙 권력에서 이탈해 가고 있기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제국의 배후지가 필요하다는 것이 채제공 내각의 논리였다.

전통적인 식민지들이 상업적인 목적 및 국내의 과잉 인구 해소, 그리고 식량 및 사치품의 공급원으로서 개척되었으며,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지역을 막론하고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 비슷한 권리를 향유했던 것과 다르게, 채제공 내각이 비밀리에 입안한 계획들은 철저하게 착취적인 성격이 도드라진 것이었다.

새롭게 개척될 식민지들은 철저하게 중앙에서 파견된 군사적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면서, 내지로의 자원 공급을 담당하며 동시에 내지의 상품을 수입하게 될 일종의 약탈지(掠奪地)의 성격을 지니게 될 터였다.

이러한 계획의 1단계는 바로 상남을 중심으로 하여 개척이 용이한 말레이 반도였고, 그 다음이 바로 인도 아대륙(亞大陸)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개입이었다.

이 외에도 카스티야령이었던 필리핀 군도의 식민지를 전복(顚覆)하고 들어선 중국계 왕조인 여송국(呂宋國)에 대한 식민화 계획도 그 물망에 올랐다.

영주의 독립으로 위기감을 느낀 제국 정부는 이러한 계획을 점차 서두르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해군(海軍)의 증강과 함께 전통적인 징병 제도의 개혁 및 강화, 군비의 확충, 신식 무기의 개발 등이 뒤따랐다.

의회의 동의 없이 특별비(特別費)가 편성되어 군부에 투입되기가 일쑤였고, 이것이 여러 차례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러한 추세를 근절시키는 것에 실패했다.

오히려 보수당이든 연합당이든 할 것 없이 이렇게 큰돈이 움직이는 일에 어떻게든 발을 디뎌서 떡고물을 얻어 볼까 하기 일쑤였다.

거의 24년에 걸쳐서 장기 집권한 채제공의 보수당 내각은 결국 몇 해 전에 해산하고, 새로이 선거 끝에 이번에는 연합당이 승리하여 새롭게 조수한(趙粹翰)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국초에 김세훈이 주도한 반정의 주요 공신으로 영흥공(永興公)의 작위를 받은 조사의의 14대손이자 현 영흥공가의 당주(當主)로서 공작(公爵)의 작위를 지닌 조수한은 개혁적인 성향의 귀족으로 유명한 이였다.

그는 자유주의의 옹호자였으나, 동시에 기묘하게도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인물이기도 했다.

조수한의 연합당 내각은 자유주의적인 개혁들을 대거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군사 정책과 대외 정책에 관해서는 보수당 정권의 기본 방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오히려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조수한 내각하에서 군비 증강의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수한을 필두로 내부대신(內部大臣) 안장현(安將顯), 그리고 외부대신(外部大臣)인 정약현(鄭若鉉), 군부대신(軍部大臣)을 역임한 개성공(開城公) 이산(李蒜) 등의 젊은 준재들로 이루어진 연합당 내각은 이러한 식민 계획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개성공 이산의 주도로 수원에는 「화성대(華城臺)」라 불리는 새로운 군사 기지가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고, 여기에는 해외 출병을 목적으로 조직된 연대(聯隊)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다.

언제고 명령만 있으면 멀지않은 평택(平澤)에 조성된 해군기지를 통해 해외파병이 가능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홍문제의 즉위 40주년의 해가 밝아올 즈음의 분위기는 매우 차분했다. 태평한 세월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차분하지만 약간은 들뜬 가운데, 국민의 여론을 모으기 위한 정책적인 방편으로 성대하게 황제의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가 계획되었다.

그중 하나로 6월의 따스한 여름날, 수만의 인파가 광화문 앞 의정로에 모여든 가운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조금 떨어진 의정로 한쪽에 「칭경기념비전(稱慶記念碑殿)」의 준공식이 이루어졌다.

홍문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할 목적으로 세워진 이 비각(碑閣)의 안에는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송(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頌)」이라는 전액(篆額)이 사방으로 둘러 새겨진 장방형 대리석이 세워졌다.

이 전액은 나이 서른둘의 황태자 이굉이 직접 쓴 글씨였고, 나머지 서(序)와 송(訟) 부분의 비문은 총리대신 조수한이 짓고 외부대신 정약현이 쓴 것이었다.

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전은 3중의 기단 위에 전통적인 한식(韓式)으로 전각(殿閣)을 세워 올렸다.

남쪽의 정문에는 석축(石築)의 돌로 된 양식(洋式) 기둥 사이로 황실 문양인 이화문과 국장(國章)인 태극문이 나란히 새겨진 철문이 세워졌다.

이 기념비전의 기공식에는 직접 황제 부처와 황족들, 그리고 종친 및 작위 귀족과 원로 대신들이 모두 행차하였으며, 내각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광화문 앞에서 황제의 만수(萬壽)를 기원하는 예포가 아홉 발 발사되었고, 이와 함께 연도에 나온 인파의 환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자리에 나온 황제 부처의 입장이 이루어졌다.

황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자리에 나온 적이 없는 황태자 이굉을 처음으로 옆에 대동하였다.

아버지의 체격과 어머니의 미모를 빼어 닮아 준수하면서도 기품 있게 생긴 황태자 이굉은, 이제 서른 줄의 나이에 젊어들어 당당한 왕재(王才)를 뽐내고 있었다.

황실 일족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요란한 군악대의 대취타(大吹打) 연주와 함께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요동 및 유구의 제도주재 고등판무관(高等辦務官)은 물론이거니와 순·양·월·일본·스웨덴·네덜란드 및 포르투갈의 대사들이 모두 나와 황제의 어극(御極) 40주년을 기념하는 친서와 예물을 전달하였다.

총리대신 조수한이 그 뒤를 이어 나와 연단에 서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사를 읊었다.

“……폐신을 비롯한 내각 제신과 의회의 참의들, 그리고 사해에서 폐하의 위업을 받드는 모든 신민들이, 폐하의 장수를 기뻐하고 세월의 흐름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금일 이렇게 충정을 담아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갚고자 이렇게 폐하의 어극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금상폐하의 크나큰 공로와 훌륭한 업적은 고금에 뛰어났습니다. 고래의 내려오는 국업을 일신하시어 새롭게 하시었으며, 내외방의 신민들을 두루 살피시어 자녀같이 아끼셨습니다. 대업은 날이 더할수록 무궁하게 되었고, 황통은 강고하였으며, 원구단에서 조상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내고, 역대 황제의 예법을 받들었으니, 모든 귀신들이 흠향하고 예법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선대를 훌륭하게 받들고 황통을 물려받아 큰 자리에 올라 덕치의 공적을 쌓아 전대의 업적을 더욱 빛내고 자손만대로 무궁하게 태평성대를 누리고 즐길 터전을 닦은 것으로도 이미 하늘과 땅에 그 예를 다한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황제의 권한을 부족한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시어 줄일 것은 줄이고 보탤 것은 보탠 바, 온갖 법도가 이제 질서 정연하게 정돈되었고 제국의 위엄은 만방에 떨쳐, 그 혜택이 백성에게 크게 베풀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폐하의 덕업이 아니겠습니까? 재물이 크게 늘고 산업은 일신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군대는 강고하며 문화는 찬연하니 이것이 모두 폐하의 높고도 큰 공로입니다. 이에 삼가 폐신을 비롯한 제국 신민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제국의 찬란한 발전을 앞으로도 견마지로로 달성하고자 하니, 봉천승운황제께서는 무궁토록 그 성업을 칭송받으시옵소서. 만세, 만세, 만만세!”

조수한이 지극하게도 무거운 목소리로 엄숙하게 만세 삼창을 연호했다.

이내 기념식에 참가한 신료 및 황성부민들도 모두 조수한의 연호를 따라 만세를 삼창했다.

그것은 일종의 장관이었다.

의회 혁명 이래로 황제가 이렇게 전면에 부각된 적은 없었다.

이를테면 여태껏 보위에 40년을 올라 있었던 황제야 무릇 여럿이나 되지만, 이렇게 지극하게 대우를 받은 바는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수한의 연합당 내각이 이렇게 황제를 부각시킨 정치 행사를 준비한 것에는 다 연유가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제국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 국론을 뭉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의회 혁명 직후 한때 한물 간 봉건제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 황제였으나, 지금은 국체(國體)의 상징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물론 이 기저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제국의 해체되어 가는 질서는 개방적인 문화를 종식시키고 매우 국수주의(國粹主義)적인 조류를 불러오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수한 내각은 민족주의를 적극적인 정치 수사로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연일 국기의 게양이 강조되고, 자발적인 입대가 독려되며, 민족적인 자부심이 정부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요동의 사례를 모방하여 시범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의무교육의 첫 과목은 기초적인 한자와 국문(國文)을 배우는 것으로, 주된 내용은 바로 황제와 의회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하에서 황제의 상징적인 지위는 애써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번의 어극 40주년 기념 행사는 그 절정판이었던 것이다.

이 행사를 물밑에서 진두지휘한 것은 바로 내부대신 안장현도, 총리대신 조수한도 아닌, 군부대신 이산이었다.

그 자신이 먼 황실 종친이자 개성공의 작위를 지니고 있는 이산은 이번 행사를 황제의 등극 40주년 기념식일 뿐만 아니라, 제국의 새로운 국제 전략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자리로 만들고자 했다.

바로 그 상징으로서 채택된 것이 바로 황태자였다.

활달하고 강직한 성품에 키가 크고 매우 잘생긴 황태자 이굉은 새롭게 부흥하는 제국 군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뛰어난 승마 실력과 사격술을 지닌 인물로 황태자는 포장되어 있었고, 현 황제인 홍문제가 제국 번영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황태자 이굉은 제국의 강고한 국방력을 나타낼 인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려한 축전 행사가 끝날 무렵, 총리대신 조수한 및 군부대신 이산의 인도를 받아 황태자는 단상에 올랐다.

그는 부황(父皇)을 향하여 예를 다한 다음, 연단에서 중요한 조칙(詔勅)을 황제를 대신하여 발표하게 되었다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귀를 곤두세웠다.

설마하니 이 요란한 행사 뒤에 어떤 선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약간은 느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외국 대사들도 갑작스러운 발표가 무엇일까 싶어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행사에서 황태자를 전면에 내세워 선포하는 내용이라면 가볍지 않은 내용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황태자 이굉이 봉천승운황제를 대리하여 칙유를 내린다.”

황태자 이굉이 선언문을 봉독하기 시작하자 이내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모두들 귀를 곤두세우고 무슨 말이 떨어질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레이 반도는 바로 우리나라 상남과 조호르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정치가 산란하여 치안이 불안하고 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이것은 만방의 교화를 떨쳐야 할 황제의 덕업에 누대로 손상이었다. 이미 백 수십 년간 상남서의 신민들이 반도의 육지에 상륙하여 식민하고 생업을 일구고 있었는데, 이제 잉글랜드의 노략자들을 등에 업은 조호르 술탄의 관리들이 이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있으니, 상남서의 시찰관들은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이를 해결할 것을 주문하여 탄원을 거듭해 왔다.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여 볼 때 이미 흥정 연간에 믈라카의 토왕이 해협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매각하였고, 이에 따라 상남 양안에 대하여 결수에 따라 세를 정하여 거두고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이제 와서 그 경계가 흩어져 제멋대로 잉글랜드 상인과 조호르 술탄의 병력이 반도 남단에 활보하니 이것은 제국의 위신에 대한 엄중한 훼손으로 조치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 수만 호 십여 만 명의 신민들에 대한 교화를 선포하고 외적의 침탈을 막으며, 또한 관청을 세우고 군사를 두어 많은 백성을 위로하여 생계를 잇도록 도와야 할 것이라 조정 내외로 뜻이 함께하였기에, 내각 군부대신 개성공 이산과 총리대신 영흥공 조수한 및 제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짐은 말레이 반도로의 출정을 선포하노라.”

황태자 이굉의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이내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군사력 증강이 출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는 나오고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여 대규모 출정을 실시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심지어 미리 언질조차 받지 못한 외국 대사들도 어안이 벙벙해 사태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란은, 내각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선동꾼들이 질러내기 시작한 만세 소리에 곧 묻히고 말았다.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연호하는 선동꾼들의 목소리에 이내 일반 시민들까지 휩쓸려 들면서, 이내 황제의 어극 기념식은 해외 출병을 환호하는 제국주의적 열망을 발산하는 장으로 변했다.

이내 마치 준비되기라도 한 듯한 출병을 지지하는 가두행진이 종로 일대를 뒤덮었고, 공식적인 칙령에 이어 내각의 각령(閣令)까지 그날 오후에 선포되어,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는 정식으로 「상남파견연대」의 칭호가 붙고 공식적으로 출정의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이들은 속개하여 평택의 군항에 준비된 함대에 승선하기 시작했고, 이 출정식 또한 직접 황태자 이굉이 참석한 가운데에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이미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고자 초석을 다지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격렬한 어조로 항의를 표시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로 복잡해져 가는 유럽 정세 때문에 한국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19세기를 목전에 두고 단행된 한국의 말레이 출정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포성이기도 했다.

증기선(蒸氣船) 등의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함대가 남양으로 출항한 것 자체가 격변을 알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다음 세기에 지속될 열강들의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침탈 전쟁을 예고하는 서곡(序曲)이기도 했다.

1778년

홍문(弘文) 40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말레이반도로 진출한 제국군의 승전보는 연일 내지로 전해져 왔다.

물리적 거리로 인하여 정확한 진상을 알 수는 없으나, 성공적으로 반도 전체에 군사력을 투사하고 조호르 술탄을 인질로 잡아 제국에 대한 신복(臣僕) 서약을 받고 총독의 통감정치(統監政治)를 인정하게 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내지는 이미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으나, 상하(常夏)의 남쪽 전장에서는 지금도 그침 없이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전국이 말레이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귀추에 귀가 쏠려 있는 가운데 김시유는 제도대학의 졸업을 위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학습원(學習院)」을 그 전신으로 하는 제도대학은 원래 전통적으로 3년을 기본으로 하는 예과(豫科) 과정과 본과(本科)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본과는 정해진 수학 기간이 없었고, 제각기 뜻하는 만큼 머물러 공부하여 언제고 졸업 시험인 「통람(通覽)」을 쳐서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통람은 여러 가지 과목의 시험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제각기 배운 만큼 이 과목들을 마음껏 시험 쳐서 여러 개의 학위를 받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통람의 성적에 따라 석차가 매겨져, 좋은 성적을 받으면 관료 등용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최고 단계인 전시(殿試)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동시에 학습원의 교수라고 할 수 있는 학유로 선발될 자격도 주어졌다.

학습원을 졸업하면 주어지는 「진사(進士)」의 학위는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 덕분에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는 양성지(梁誠之)로, 산학(算學, 수학), 궁학(窮學, 철학), 물학(物學, 물리학), 유학(儒學), 역학(曆學)의 다섯 과목에서 진사의 학위를 한번에 받고, 학습원 학유로 봉직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학습원이 제도대학으로 이름을 고쳐 달고, 근대적인 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기존의 제도는 상당 부분 바뀌게 되었다.

우선 예과 과정이 2년으로 줄어들었고, 본과 과정도 유연하게 적용되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는 4년으로 확정되었다.

각 과목을 자유롭게 응시하여 시험 치던 통람의 시험 제도는 일종의 졸업과 낙제를 가르는 매우 기본적인 시험 절차로 간소화되었고, 대신에 졸업 논문을 심사받도록 하는 제도가 구체화되었다.

의회정부 이래 과거 제도가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새롭게 등장한 행정 관료를 뽑는 「고등고시(高等考試)」가 각 대학에 동등하게 문이 열림에 따라서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는 진사(進士)의 학위도 폐지되고 대신에 졸업과 함께 「학사(學士)」의 학위를 받도록 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이 제도대학 학사 출신자들은 진사라는 별칭으로 불리고는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이 구제도는 완전히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제도대학의 학생들은 점차 통람이나 졸업 논문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일찌감치 고등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이들이 많았고, 알게 모르게 과거 폐지 이후에도 고등고시 응시자 중 제도대학 출신자를 우대하는 암묵적인 정책 덕분에 크게 혜택을 보고 있었다.

과거 제도하에서의 공식적인 우대가 없어져도 제도대학의 석권(席卷)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관료로 진출할 생각이 없는―정확히 말하면 요동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사실상 기회가 없는―김시유는 동기들이 낙제만 면하고 통과만 하자는 생각으로 임하는 통람과 졸업 논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여순의 어머니로부터 공부를 중단하고 졸업과 함께 돌아오라는 이야기가 없었기에, 일단은 학사의 학위를 받고 진서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이곳 제도대학에 남아서 독자적인 연구를 할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통람 성적과 졸업 논문의 성과는 중요했다.

더군다나 김시유의 경우 정치철학과 고전, 그리고 수학의 세 과목에 졸업 논문을 심사받을 것을 신청해 놓았기에 더욱 잠을 줄여가며 논문을 준비해야만 했다.

졸업 논문은 통람에서 통과한 과목으로만 제출할 수 있었는데, 보통은 대충 용이한 한 과목만 통과해서 졸업 논문도 한 과목으로만 제출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김시유의 경우 이미 위의 세 과목을 모두 출중한 성적으로 통람을 통과했기에 졸업 논문도 세 과목을 내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언어학이 통람 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김시유는 언어학을 중점적으로 준비했겠으나, 아쉽게도 제도대학에 언어학은 수강 편람에도 중요한 과목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독자적인 통람 시험이나 학위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간 공부를 열심히 해왔던 다른 과목들로 김시유는 졸업을 준비했던 것이다.

“제군의 정치철학과 고전, 수학의 통람 성적은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데 굳이 언어학을 공부하지 말고 위의 학문들 중 하나를 선택해 이곳에서 훌륭한 학유들의 지도를 받아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어떤가?”

한참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 어느 날 학장과의 면담에 호출되었을 때, 학장 왕세근(王世瑾)은 에둘러 김시유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시유는 언어학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지도 교수를 선택하지 않고 제도대학에 남을 수 있다면 굳이 다른 학교로 갈 생각은 없었으나, 반드시 지도교수, 즉, 자신이 제자로 들어갈 학유가 전공하고 있는 학문으로만 공부를 해야 한다면 굳이 제도대학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우선은 졸업 논문을 통과한 다음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시유는 우선은 학장에게 대답을 미뤘다. 대부분의 학생이 고등고시에 집중하고 관료가 되기를 원하는 탓에 갈수록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는 우수한 학생이 줄고 있었기에, 왕세근은 어떻게든 김시유를 붙잡아 두고자 했다.

더군다나 재력이 탄탄한 집안의 아들이니 제도대학에 기부금도 풍족하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물질적인 계산도 있었다.

김시유는 이러한 압박을 받지 않고자, 아주 가을 무렵부터는 완전히 짐을 싸서 기숙사에서 나와 스승인 박지원의 자택으로 들어가 졸업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박지원의 건강은 꽤나 차도가 있었지만,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백과전서》의 집필을 핑계로 연암 박지원은 제도대학의 학유 자리를 고사하고 있었다.

김시유는 틈틈이 자신이 공부한 주제와 관련된 백과전서의 항목 집필을 도우면서 졸업 논문에 매진했다.

“진서대학의 키얀 페쿠미 교수로부터 답신이 왔다.”

겨울로 막 접어든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논문의 집필을 하고 있는 김시유에게 박지원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와서 전해 주었다.

혹여 졸업 뒤에 진서대학으로 가서 언어학의 대가 중 한 명인 키얀 페쿠미 교수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 하여 그것을 문의하는 편지를 몇 달 전 보내두었던 것이다.

그 답장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박지원으로부터 황급하게 편지를 받아들고서 김시유는 허겁지겁 그 내용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아쉽게도 제자를 받을 수 없다는 거절의 내용이었다.

“키얀 교수가 받아 준다고 하나?”

“……아니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여 유구국으로 돌아가 조용히 은거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아쉽지만 제자로 받아 줄 수는 없다는군요. 건강도 좋지 않아 최근엔 폐렴 증상까지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제자를 길러낼 여력이 없답니다. 혹여 괜찮다면 유구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후학들에게 연결시켜 줄 수는 있다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굳이 키얀 페쿠미 교수에게 지도받을 수 없다면 진서대학으로 갈 이유는 없겠지요.”

조금은 낙담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상 일신의 이유로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요동의 왕립대학을 제하고 나면 제대로 언어학을 공부해 볼 수 있는 곳은 진서대학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키얀 페쿠미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제도대학에 남아서 어떻게든 독자적으로 공부를 지속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도대학의 정약전 학유에게 사사를 청해보는 것이 어떠냐?”

낙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시유에게 박지원이 넌지시 물었다. 박지원의 말마따나 그나마 이 과정을 지도해 줄 만한 교수는 제도대학에서 고전을 강의하는 젊은 학유인 정약전(丁若銓)밖에 없었다.

현 외부대신인 정약현의 동생이자, 이른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제도대학을 졸업하여 고전학의 학유가 된 나이 서른 줄의 정약전은, 중국 고전에도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어에도 큰 관심이 있어 여러 가지 학문적 성과를 남기고 있었다.

정약전은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을 떠서 그 내력을 밝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래하는 신라의 향가(鄕歌)를 해석한 논문도 폭넓게 인정받고 있었다.

이두와 향찰에도 능통했으며, 심심하면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돌며 백제목간(百濟木簡)을 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주 전공인 고전학보다는 국어사(國語史)의 분야를 사실상 개척해 가며 인정받고 있는 이였던 것이다.

그나마 제도대학에서 언어학에 가장 가까운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것은 이 정약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정약전 선생이 저와는 나이 차가 매우 적어서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

김시유가 정약전에게 흔쾌히 학문을 청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정약전과 그의 나이 차가 채 열 살도 나지 않는 탓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김시유의 말을 듣고서는 호통을 쳤다.

“배움을 청하는 데 나이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너보다 어리더라도 학문이 뛰어나면 고개를 숙이고 가서 배움을 구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이거늘 겨우 몇 살 손위라고 껄끄러워 하면서 무슨 학문을 하겠다는 것이냐. 나도 백과전서를 집필하면서 네 지식을 빌리는 것을 부끄러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가르친 제자임에도 그랬는데, 너보다 먼저 앞서서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 학문을 청하는 것이 그리도 부끄럽단 말이냐?”

박지원의 말이 옳았다.

김시유는 스승의 통렬한 지적에 눈을 바로 뜰 수 없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정약전 선생을 찾아가 손하에서 배움을 계속하고 싶다고 청하거라.”

박지원의 말에 김시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학생은 내가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통람의 고전학 부분을 내가 직접 채점을 했어요.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찾아오지 않으면 내가 학생을 찾아가서 진학을 권해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니 나야말로 정말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정약전은 김시유가 찾아오자 도리어 지극히 환대를 했다. 그는 진심으로 김시유를 자신의 제자로 받고 싶은 듯 보였다.

괜히 껄끄러워 찾지 않았던 김시유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정약전은 김시유에 대한 기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사실상 연구되지 않은 국어사란 분야를 내 손으로 개척하다시피 하면서 언어학적인 이론에 대한 정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동의 왕립대에서는 몽골어 같은 북륙어족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있고, 진서대학에서는 열도어족에 대한 학문적 정립이 이루어진 상황인데, 정작 학문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제도대학을 비롯한 내지의 대학들에서는 국어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비교적인 역사언어학이 반드시 앞으로 중요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로서 보다는 학생과 내가 서로 동료로서 이 분야를 앞으로 개척해 내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키얀 페쿠미 교수로부터의 거절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던 김시유는 정약전과의 만남 뒤로 크게 격려를 얻고 힘을 되찾았다.

제도대학에 남아서 언어학을 공부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가 전공하게 될 것은 고전학이었으나, 사실상 역사언어학의 분야를 개척하는 공부를 정약전과 함께 계속할 수 있었다.

국어의 계통사를 전공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나, 정약전과의 만남 뒤에 그 분야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이 김시유는 굳어졌다.

거취가 잠정적으로 결정된 뒤로, 김시유는 열정적으로 졸업 논문의 마무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수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논문은 마무리를 짓고, 정약전에게 제출하게 될 고전학에 대한 논문에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치통감》에 대한 논문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아주 그 내용을 갈아 엎고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고지명들에 대한 개괄적인 고찰을 담은 내용으로 그 방향을 틀었다.

막바지에 논문 주제를 바꾼 터라 시간은 촉박했지만, 김시유는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논문을 집필할 수 있었다.

12월 20일로 예정된 논문 제출일에 맞추기 위해 김시유는 3일간을 철야 작업한 끝에 결국 기일을 맞춰서 대학 당국에 졸업 논문 3종을 제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통과는 따놓은 당상인지라, 이제 졸업과 함께 정약전의 문하로 들어가 고전학 석사 과정을 밟을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기치 않게도 요동으로부터 온 최수일의 방문은 김시유의 일상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1779년

홍문(弘文) 41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최수일의 방문은 매우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박지원과의 다리를 놓아 김시유를 제도대학으로 진학시키기 위에 맡긴 뒤로, 최수일과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찾아와서 근황을 묻는 정도가 만남의 전부였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연말에 갑작스럽게 최수일이 찾아올 것이라고는 김시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군 나리께서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마님께서 매우 궁금해 하십니다. 요즘 통 서찰도 보내지 않으셨다면서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 코밑의 수염이 하얗게 샌 최수일이 김시유에게 약간은 질책하듯이 물었다.

“졸업 논문을 준비하느라 통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마님께서 도련님께 만 냥에 달하는 증권을 송부하셨습니다. 그 수속을 하고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예? 만 냥이라니요?”

그간 종종 생활비를 대신해 남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고권(股券, 증권)을 소량 보내주곤 했었지만, 만 냥이나 되는 금액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군비 증강을 위해 정부에서 여러 해에 걸쳐 대규모로 예산을 늘인 탓에 화폐 가치가 전례 없이 떨어지기는 한 상황이었지만, 한화(韓貨)로 금화 1만 원이라는 것은 꽤 큰 규모의 사업을 하나 차리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

그런 큰 돈을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자신에게 부쳤다는 것이 김시유는 좀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마하니 이 돈으로 저에게 이곳에서 사업을 하라는 이유는 아니겠지요? 아직 어머님과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만, 저는 남성물산에서 일을 할 생각이…….”

“마님께서도 굳이 도련님께 가업을 물려받을 것을 강요하실 생각은 없으십니다. 아직 마님께서는 정정하시고, 남성물산의 일도 잘 돌아가고 있으니 굳이 도련님께서 들어오셔서 직접 일을 하실 필요는 없으시다는 것이 마님의 판단이십니다. 다만 도련님께서 스스로 돈을 운용해 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 마님의 의견이셨고, 때문에 앞으로 생활비는 일체 지원하지 않을 터이니 지금 건네 드리는 고권으로 생계를 꾸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자식에게 생활비를 대어주는 용도라고 하지만 이 정도 자금은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이 정도 돈이면 황성부중에다가 황제의 궁궐 부럽지 않은 대저택을 짓고도 남는 돈이었다.

자신이 아는 어머니라면 이런 돈을 이유 없이 쥐어주지 않을 터였다.

“분명 무슨 조건이 있을 텐데요.”

“예. 사실 마님께서는 이 만 냥에서 잃는 액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탓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만…….”

“다만?”

“혹여 이 돈이 불어나게 되면 그중 불어나는 부분의 절반은 남성물산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까?”

“예. 마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게 전부입니다. 허나 제가 하나 조언을 드리자면 당분간 고권의 값이 매우 떨어져도 쉽게 매각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요즘 요동 증권가의 분위기가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님께서 군 나리께 양도하신 증권의 대부분은 저희가 출자하고 있는 황성 및 평양의 업체들의 것입니다. 이 고권은 일종의 신뢰 관계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니, 혹여라도 성급하게 매각하지는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님께서도 돈을 잃는 것은 상관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사치를 위해 매도하시거나, 혹여 돈을 잃을까 두려워 성급하게 고권을 매각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최수일이 전한 바는 그것이 다였다.

갑작스럽게 큰돈을 손에 쥐게 된 김시유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이내 새해가 밝아오고 졸업 논문의 심사가 끝나 진학 문제가 대두되면서 최수일은 1만 원의 고권에 대해서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새해가 밝아온 지 3일쯤 지날 무렵, 인천항에서 급하게 내린 파발 하나가 황성부의 증권가로 들어섰다.

종로 일대에서 번창하고 있는 주식 거래 시장에 다다른 이 파발은 말레이 반도에서 잉글랜드군이 갑작스럽게 개입을 결단하여 제국군을 패퇴시키고 조호르 술탄의 신병을 확보해 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설마하니 술렁이던 사람들은 이내 이 소문에 동요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시장의 큰손들이 이 소문과 함께 매도 신청을 내어놓기 시작하자 주가는 급속도로 폭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동요가 없는 듯하였으나, 날이 지나갈수록 증권의 가치는 폭락하기 시작해 소문이 전해진 날에서 3일쯤 지난 뒤에는 거의 그 값이 1/5로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공황 상태였다. 정부에서도 아직 공식적으로 말레이 반도의 전황에 대해서 통보를 받지 못한 터라 이 증권 시장의 폭락에 속수무책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유럽에서 프랑스 군대를 막느라 여력이 없는 잉글랜드군이 말레이 반도에 개입했을 턱이 만무한데?”

증권 시장에서 적지 않은 지분을 지니고 있는 정부 고관들까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위기감에 고권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거의 황성부의 증권가가 공황 상태에 빠질 즈음, 갑작스럽게 매수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매수자가 나타난 것에 의문을 지녔지만, 더 값이 떨어지기 전에 팔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이 매수자에게 헐값에 고권들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인천으로 입항한 군함이 공식적인 전황 보고를 들고 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소문과 다르게 잉글랜드군이 말레이에 상륙한 일은 없으며, 오히려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하고 조호르―리아우 술탄국(Kesultanan Johor―Riau)의 술탄 마뭇 샤 3세의 신병을 확보하여 말레이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있는 협상을 개시하고자 명령을 청한다는 내용의 승전보였다.

이내 증권 시장은 미친 듯이 반등(反騰)하기 시작했다.

헛된 소문에 헐값에 고권을 매도한 사람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사흘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졸업 논문의 심사를 준비하느라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김시유는 고권가가 바닥을 찍을 무렵 허겁지겁 손실을 메우고자 매도 처분을 하려 종로를 찾아갔으나, 때마침 그때 승전보가 전해지면서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걸 알고 최 선생님이 성급하게 고권을 팔지 말라고 한 것이구나……!’

김시유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휴지 조각이 될 뻔했던 만 원 가치의 고권은 이제 미친 듯이 반등하여 3만 냥의 가치로 폭등해 있었다.

‘필시 여기에 요동 상인들이 개입해 있음이 틀림없다!’

김시유는 사실상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그 패전의 거짓 소문을 퍼뜨린 이들은 바로 요동 상인들의 하수인들일 터였다.

이 소문 때문에 떨어진 고권을 헐값에 사들여서 분명히 막대한 폭리를 취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동향을 일찌감치 어머니 유청령과 최수일은 파악하고 있었음이 틀림없고, 때문에 남성물산의 황성 지부에서 시장 상황에 휘둘려서 고권을 헐값에 처분하지 못하게 하고 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김시유에게 명의를 옮겨 놓은 것일 터였다.

값이 떨어지더라도 팔지 말라고 언질을 주어 놓으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데다가, 황성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혈족인 김시유밖에 없기에 이러한 방법을 택했을 터였다.

만약 폭리를 취할 목적으로 가담했다면 일찌감치 김시유에게 고권을 팔아 치우고 폭락장에서 헐값에 되사들이라고 했을 터였으나, 남성물산은 본래의 기업적 가치 때문에 이러한 더러운 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 시장 상황에서 돈을 부지불식간에 잃을 수도 없었기에 김시유를 통한 편법적 보호를 택했을 터였다.

유청령이나 최수일이나 황성 지부에 붙어 있을 수 없었고,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고권의 처분 문제는 황성 지부의 임원들에게 달려 있으므로, 만약 유청령이나 최수일이 파악하고 있는 요동 상인들의 음모가 진실이라면 순식간에 고권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흘렸다가 역공을 맞을 수도 있기에, 이 일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대신 김시유를 통해서 고권을 보호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도련님 덕분에 큰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일련의 사태가 지나간 뒤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최수일은 다시 황성부를 찾아와 김시유를 만났다.

“어머님과 최 선생님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계셨지요? 왜 적극적으로 정부에 제보하여 막지 않으셨습니까?”

김시유의 말에 최수일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동의 벌족인 한씨 가문이 주축이 되어 투자한 금융 회사가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은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이런 형태로 벌어질 것이라고는 예단할 수 없었습니다. 혹여 정확한 정보가 있어도,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것을 흘리면 오히려 저쪽에서 잡아떼고 저희가 모함한다고 역공을 할 수 있는 노릇이라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일전의 평양의 교신협회 건으로 제국 내지에 출입은 할 수 있지만 지부의 운영은 허가를 받을 수 없고, 마님께서 직접 황성부에 와 계실 수도 없으니 도련님을 통해서 고권을 보전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황성부에 있는 지국 임원들에게 언질을 주는 순간 시장에 소문이 흘러들어 가는 것은 순식간이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큰일은 막지 못하고 저희 고권만 지키기로 했습니다.”

“혹여 제가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헐값에 팔아 치웠으면 어쩌시려고 하셨습니까?”

“그랬다면 큰 손실을 보았겠지만, 도련님이 책임을 느끼고 남성물산으로 돌아와 일을 배우게 될 터이니 장기적으로 보면 큰 손해는 아니지요. 하지만 이렇게 일이 잘되었으니, 저희는 돈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자산을 불렸고, 도련님께서는 공부를 지속할 큰돈을 얻으셨으니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저희는 상황에 편승해 돈을 벌었으니 깨끗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것은 평소의 어머님의 방침에도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저희는 사실 이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번 것이 아닙니다. 승전보가 전해지면 어차피 증권가는 폭등하게 되어 있었지요. 다만 작전을 부리는 이들에게 넘어가지 않아 헐값에 손실을 보지 않은 것뿐입니다. 저희는 아무런 매도도 매수도 하지 않았으니 시장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겠지요. 물론 이 일을 대충 짐작하고서도 막지 못한 도의적인 책임은 있겠습니다만…….”

사실이 그랬다.

대충 일이 돌아가는 판을 짐작하고 있었다면 저들의 흐름에 맞추어서 가지고 있는 고권을 팔아 치우고 헐값에 저들이 사들일 때 같이 사들였으면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남성물산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다.

“도련님께 건넨 고권가가 당초 1만 원이었으나 현재 가치는 거의 4만 8천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곧 시장이 진정되면 다시 그 값이 떨어지겠지요. 어찌 되었든 당초 말씀 드린 대로 이윤이 난 3만 8천 원 중의 절반인 1만 9천 원어치의 고권은 다시 남성물산에서 회수해 가겠습니다. 회사로서도 1만 원의 고권이 1만 9천 원이 되었고 손실을 보지 않았고, 도련님께서도 2만 9천 원의 자산이 생기셨으니, 성급히 고권을 팔지 않으신 것이 잘된 노릇입니다.”

최수일의 말에 김시유는 허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머니의 심계를 자신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 돈을 잃었다면 꼼작 없이 남성물산으로 불려가 일을 배워 가업을 물려받게 될 판국이었다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노릇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시기 전에 마님께서 한 번 뵙기를 원하시니 요동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제가 이곳에 온 것도 도련님을 대동할 목적도 있어서이니 괜찮으시다면 한 달 정도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요동을 마지막으로 찾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간 너무 무심하게 지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김시유는 최수일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마침 졸업 논문의 통과도 확정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석사 과정을 밟을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지금이 적시이긴 합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덕분에 마님께 제 면목도 서게 생겼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고 이미 선편을 알아보고 준비를 다 마쳐 놓았습니다. 몸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최수일은 김시유의 대답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최수일은 한 발짝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김시유가 봐온 최수일은 그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성물산에서 일하는 것에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김시유 일가의 사정도 가장 최측근에서 돌봐주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김시유의 부친인 정경대군 김우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적어도 정경대군 김우가 일찌감치 불의의 사고로 떠나간 뒤로 그 집안의 대소사를 누구보다 살뜰하게 챙겨준 것이 최수일임은 부인할 수 없었다.

최수일은 뒤늦게 가정을 꾸리고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책임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남성물산에 눌러 붙어 있었다.

그러한 이이니 만큼, 최수일 본인의 말마따나 그의 얼굴을 봐서라도 요동 가는 길에 동행해야겠다는 것이 김시유의 생각이었다.

바로 사흘 뒤 김시유는 최수일이 준비해 둔 배편을 타고, 황해를 건너 여순으로 향했다.

여순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은 인천항이 아닌 예성항에서 출발했다.

비록 경인거(京仁渠, 경인운하)의 개통 이후로 황성의 외항(外港) 역할을 인천에게 빼앗긴 예성항이었으나, 고려 때의 벽란도 이래로 유서 깊은 항구도시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예성부는 여전히 주요한 항구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다.

특히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오래된 상단인 송상이 이 예성항을 개성부와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에 걸쳐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고 있었다.

최근에 남성물산도 이곳에 조그마한 지부를 설치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최수일이 미리 수배해 둔 선편을 타고 지체 없이 김시유는 여순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예성항에서 여순까지는 중간에 해주부에 하루 기항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중간 기항 없이 3일간의 쾌속 항해였다.

황해의 물결을 헤치고 발해(渤海)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 요동반도 끝자락의 여순항은 북중국과 바다를 잇는 주요한 거점 무역지인 동시에, 요동국의 가장 크고 중요한 항구로서 대외무역이 집중되어 있을뿐더러 요동 해군의 기지가 들어서 있기도 한 도시였다.

동시에 요동반도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행정 구역인 남양로(南洋路)의 수부(首府)이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국제도시이기도 했다.

최근에 들어 여순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 성장세에 힘입어 남성물산의 본사는 여순부 일대에 큰 투자를 단행하여 적지 않은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여순부 항구에서 부청(府廳)으로 향하는 중심 대로인 중앙로(中央路) 일대에는 은행·금융 회사·무역 회사 등의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는데, 남성물산 또한 이곳에 본사 건물을 새롭게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설립한 중견 규모의 사은행(私銀行)인 「남성은행(南星銀行)」의 사옥도 지금 막 건설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화재(火災) 및 선박(船舶) 보험에도 진출해 있었기에 남성물산은 여순을 비롯한 요동의 경제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중추적인 집단 중 하나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중의 많은 자금들이 남성물산과 직간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간 견고했던 요동 상인들의 카르텔을 깨트리고 성공한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에는 부분적으로 일찌감치 떠난 아들에 대한 회한이 생긴 요동국왕 김헌(金憲)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셋째 아들에 대해 엄격한 훈육을 핑계로 충분한 애정을 나누어 주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던 김헌은, 칠순을 지나 늘그막에 후회가 막심했다.

더군다나 정경대군 김우가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비명횡사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뒤로 김우의 정부였던 유청령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인 김시유에 대한 분노가 완전히 걷힌 김헌은, 여러모로 남성물산에 대해 편의를 봐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억지로 김우와 결혼시켰던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사실상 김시유가 김우가 남긴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헌으로서도 이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실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현실적으로 남성물산과 아들 김시유를 위한 선택으로 유청령은 왕실에 대해 고분고분하게 협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묘한 유착 관계 덕분에 왕실을 뒷배로 하여 남성물산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고, 종래 지금에 와서는 금권(金權)을 바탕으로 왕실과 조정의 정책에도 압력을 행사하려 하는 요동 상인들의 카르텔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남성물산이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유청령은 이제 곧 왕위를 계승하게 될 국왕 김헌의 장남이자 왕세자인 김회(金茴)에 대한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협력 관계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김회는 내심 일찍 간 동생의 아랫도리 사정으로 만들어진 관계라 하여 유청령과 김시유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결국 이러한 협력이 훗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략적인 판단이 그로 하여금 그간의 편견을 뛰어넘도록 만들었다.

더군다나 국왕 김헌이 고령으로 인한 중병으로 지금 국사를 돌보지 못하고 내전에서 침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회는 급작스러운 왕위 계승을 대비해 취약한 금전적인 문제를 유청령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해관계하에서 특히 남성물산은 은행 설립과 보험업 진출에 큰 도움을 받았고, 그에 대한 답례로 왕실의 내탕금으로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오자마자 미안하게 되었구나.”

이러한 상황에서 여순에 도착한 김시유는, 오랜만에 마주앉은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김시유가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그의 집으로 도착하기 직전에, 성경부에서 내려온 전령이 다녀갔던 것이다.

다름 아니라 중병에 걸려 있던 요동왕 김헌이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서거하고야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할바마마께서 결국 돌아가셨다구요?”

조부인 김헌에 대한 특별한 증오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애정이랄 것도 없는 김시유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에는 서출로 할아버지로부터 천시당했고, 김헌이 마음을 바꾼 뒤로는 줄곧 황성부에서 공부를 하며 요동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할아버지라는 김헌의 얼굴을 직접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 내키지는 않겠지만, 내가 성경에 가기는 그러니 네가 대신해 다녀와야겠다. 국장에 종친이 참석하지 않는 것은 큰 불경이니 어차피 너는 다녀와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의 말에 김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껄끄러운 종친들을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서 차가운 시선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김우의 아들로써가 아니라 절손(絶孫)된 종친 가문을 양자로 입적하여 이은 신완군(愼琓君)으로서 가야만 했다.

예기치 않게 여순으로 오자마자 다시 급하게 성경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야 했던 김시유는, 여독(旅毒)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1779년 2월 4일, 거의 50여 년에 걸쳐 요동국을 통치하고 근대국가의 초석을 닦은 요동왕 김헌(金憲)의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그의 눈을 감은 나이 일흔여덟이었다.

시호는 「효공왕(孝恭王)」으로 추증되었고, 그 주검은 역대 국왕이 묻혀 있는 능역(陵域)에 안장되었다.

김시유는 말없이 그 국장에 참여하여 묵묵히 종친으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성군(聖君)이 떠나갔다며 슬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억지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 어쩐지 눈물 한 줄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거리감이 느껴졌던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효공왕 김헌의 뒤를 이어 넉 달 뒤 이미 나이 오십 줄에 가까운 세자 김회(金茴)가 요동왕의 보위에 올랐다.

어쩔 수 없이 새 왕의 등극 때까지 성경에 머물러야 했던 김시유는 대관식이 끝나자 서둘로 여순으로 내려갔다.

선왕의 승하와 새 국왕의 즉위로 인해 불가피하게 석사 과정으로의 진학이 늦어진 탓에, 여름까지 김시유는 여순에서 머물 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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