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3장 하현지국(下弦之國) (74/82)

제73장 하현지국(下弦之國)

「근대 제국들은 인공적으로 조직된 경제 기계가 아니었다.

서구(西歐)와 극동의 제2차 팽창은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정서적인 강압의 역사적 과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동시에 이 과정은 계측된 제국주의보다도 더욱 큰 영향을 주변부에 미쳤다.

개별 식민지들은 경제적 목적에 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식민지의 표면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이것은 보다 항구적인 측면에서의 국제 질서의 변화를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19세기가 밝아올 무렵부터 자본주의 세계 경제하에서 근대적인 초석을 다진 서유럽과 극동의 몇몇 국가들은 제각기 군대를 이끌고 세계를 분할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계의 일부였던 두 문화권이 다른 문화들을 압도하며 새로운 근대적인 문명과 비문명의 이분법적인 세상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국면에서 제국들은 경제적인 고려에 의하여 팽창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다른 열강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막대한 자원들이 세계 분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에 건설된 상업 제국들의 종국은 동영의 독립으로 확실시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포르투갈·카스티야 등의 옛 제국들의 몰락은 가시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말레이 정복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퍼져 나간 제국화된 국민국가들의 세계 분할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페인터(Painter, J.) &제프리(Jeffrey, A.),

《정치지리학(Political Geography)》, (2009)

1783년

홍문(弘文) 45년 맹하(孟夏)

대한제국령 말레이 반도 믈라카

적도의 작열하는 태양은 뜨겁기 짝이 없었다.

한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넘기 일쑤였고, 남쪽 바다의 습한 여름 공기는 몸을 무겁게 만들기 짝이 없었다.

최수일은 매우 적대적인 말레이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처지는 발걸음을 위압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총독부(總督府) 건물로 옮겼다.

영 내키지 않는 출장이었지만, 유청령의 간곡한 부탁에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배후지에 한국의 식민지가 건설된 탓에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상남의 분위기와 이곳 믈라카의 분위기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독립된 국가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였다.

어찌 되었든 외국인들에 의한 강압적인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한국인에 대한 시선이 좋을 리 없었다.

굳이 말레이에 지국을 만들겠다는 유청령의 뜻이 와 닿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최수일은 남성물산의 지점을 믈라카에 열기 위해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 한국군은 이곳 말레이 반도에 대한 출병을 단행해, 조호르 술탄국의 술탄 마뭇 샤 3세(Mahmud Shah III)를 완전히 제압하고 강제로 보호국조약(保護國條約)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열강들 사이에서 활로를 찾던 노력도 무상하게, 마뭇 샤의 조호르 왕조는 결국 한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희생양이 되고야 말았다.

종래 한국은 이 말레이 반도의 이권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미 말레이 반도의 남쪽 끝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길목의 매우 번창하는 무역항인 상남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말레이 반도를 굳이 차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지척인 믈라카에 들어왔을 때도 한국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거대한 중계무역지로 성장해 있는 상남에 믈라카를 비견할 바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믈라카나 아체 같은 경쟁 항구들은 결국 상남에 대적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거점 항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동과 서를 잇는 물동량의 대부분은 지난 수세기 간 믈라카나 아체가 아닌 상남을 거쳐 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16세기 중반에 믈라카의 경쟁자였던 포르투갈과 아체가 몰락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술탄국은 네덜란드와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체결했고, 더불어 한국과도 안정적인 우호 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말레이 반도와 그 해협 일대에서는 어떠한 대규모 전쟁도 벌어지지 않는 평화 시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랜 평화는 조호르 술탄국의 군사적 무기력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실질적으로 자체적인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네덜란드의 군사력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오랜 평화는 부산물로 내부의 지루한 권력 투쟁을 불러왔다.

17세기의 벽두에 이 치열한 권력 암투는 절정에 달했다.

1699년에는 믈라카 술탄국의 마지막 술탄 마뭇 샤 2세가 서거하면서 믈라카의 정세는 난국으로 빠져들었다.

미낭카바우와 부기스의 두 세력이 이 믈라카 술탄국의 승계 문제에 간여하기 시작했고, 술탄국은 이것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었다.

미낭카바우의 군주 라자 크칠(Raja Kecil)이 조호르의 술탄을 자임했고, 븐다하라 가문은 미낭카바우를 몰아내기 위해 부기스를 끌어들였다.

븐다하라와 부기스의 연합을 통해 븐다하라는 결국 미낭카바우를 몰아내고 조호르의 술탄국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으나, 이를 대가로 부기스에게 전례 없는 부왕(副王, Yang Dipertuan Muda)의 자리를 창설해 주어야만 했다.

소위 〈말레이―부기스 충성조약(Aturan Setia Antara Melayu dan Bugis)〉을 통해 이들의 연합 정권은 계속되었으나, 결론적으로 부기스인들은 븐다하라 술탄 가문의 외척인 동시에 부왕직을 통한 통치권 행사로 사실상 술탄을 무력화하고 조호르 술탄국의 실권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중요한 무역항 중 하나였던 리아우를 거점으로 한 부기스인들은 이곳에서 상업적인 특권을 취했으며, 국제무역에 관여하면서 상남의 한국인들과도 비교적 우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막대한 자금이 리아우와 상남 사이를 오고 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부기스는 조호르―리아우 술탄국 내부에서의 권력 기반을 좀더 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요 수출 품목으로 빈랑고를 특화한 플랜테이션을 주변 지역에 대규모로 건설하였고, 이곳에 수많은 말레이인과 인도인,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투입했다.

또한 향신료의 재배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사탕수수 또한 이내 18세기 중반기에 그들의 수출 품목에 추가되었다.

허나 부기스의 전성기는 18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결국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강력해진 부기스 일족을 두려워한 조호르―리아우의 술탄가는 부기스 일족을 경제적인 위협으로 본 네덜란드와 동맹하여 부기스를 축출했다.

리아우의 부왕인 라자 하지(Raja Haji)는 네덜란드와 술탄에 대항하여 영웅적인 항전을 벌였으나, 라자 하지의 죽음과 함께 결국 네덜란드는 성공적으로 리아우를 패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군사적 성공이 무색하게도,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가 조호르―리아우 일대에 성공적인 영향권을 발휘하기도 전에 유럽 대륙이 프랑스 혁명으로 촉발된 일대의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네덜란드는 국내 문제에 치여 이곳의 정치적 문제에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리아우의 부기스 일족이 몰락한데다가, 네덜란드에 의존했던 무능한 조호르의 술탄은 이내 취약한 권력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고, 이내 술탄국의 분열적인 양상이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진공 상태는 이내 손쉽게 지척인 상남에 있는 한국인들에 의해 탐지되었다.

전혀 관심도 없었던 조호르의 술탄국이 연공(聯共, 동영연방공화국)의 독립으로 인한 국가적 패배감을 불식하기 위한 희생물로서 한국 정부에 의해 출정 대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우호국인 네덜란드가 이 지역을 통제한다면 전혀 한국으로서는 상관없는 문제였으나, 네덜란드는 손을 떼고 말았고, 이 권력 진공을 틈타 잉글랜드가 말레이 반도에 개입하려 한다는 움직임이 포착된 뒤로는 한국 정부는 진지하게 출정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러한 움직임을 탐지한 조호르의 술탄 마뭇 샤 3세는 한국 정부에 사절을 보내 관대한 대우를 호소하려 했으나, 상남의 유지들은 말레이 출병으로 인해 상남에 오게 될 막대한 이익을 생각해 이들 사절을 상남항에서 발을 묶어 버리고 오히려 출병을 탄원하는 건백서를 황성부에 보냈다.

결국 황제의 어극 40주년과 맞물린 국가적 기념의 해에 한국 정부는 위신을 드높이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고려하여 말레이 출병을 단행했고, 이 조용한 남양의 반도 국가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조호르 술탄가는 그 술탄의 직위를 세습하는 것은 인정되었지만, 일체의 정치적 영향력이 거세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황제의 신하로서 책봉을 받아야 하는 모욕을 뒤집어써야 했다.

조호르―리아우의 국토는 모조리 새로이 세워진 말레이 총독부[馬來總督府]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전반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하여 채 다섯 해가 지나기 전에 말레이 반도 전역에 대한 총독부의 통치를 확립했다.

네덜란드령 믈라카 시(市)도 공식적인 조약 체결을 통해 양도받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마지막 믈라카 총독인 피터르 헤라르뒤스 더브라윈(Pieter Gerardus de Bruijn)으로부터 평화적으로 믈라카 시의 통치권을 이양받음으로써 한국의 말레이 식민지 수립 작업은 일단의 과정을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최수일은 이 믈라카 시의 한복판에 들어선 한식(韓式) 건축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복합적으로 뭉쳐진 기괴한 총독부 청사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총독부 청사로 들어서면서도 믈라카 항구에서부터 마주친 지치고 퀭한 말레이인들의 눈빛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이들의 박탈감이 느껴지는 얼굴은 예전 순나라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에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착취에 노출되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눈이었다.

분명히 예전 순나라의 고통받던 삶을 직접 격은 유청령이, 이곳 믈라카에 상보(相補)적인 무역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남성물산의 지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사실은 최수일은 묻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다.

그 뜻에는 동감하는 바였지만 최수일은 이곳에 지부를 설립하는 것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애초에 한국의 내지를 위한 약탈지로서 세워진 말레이 식민지에 요동계 자본이 진출하기가 용이할 수 없는데다가, 특히 남성물산은 식민지 경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자본으로 낙인 찍혀 있는 상황이었다.

총독부에서는 말레이 반도에 대량의 한국 자본을 유치하려 하고 있었지만, 남성물산의 진출은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남성물산 자체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서라도 이 말레이 식민지로의 진출은 무리수이기도 했다.

남성물산은 인도양 무역에는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여송(呂宋, 필리핀)에 진출할 때만 하더라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끝에서야 겨우 지부를 정상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상남의 거대한 상업 자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말레이 반도에서 뜻하는 바 대로 공정한 무역을 도모해서 이익까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최수일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돈 먹는 하마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유청령 1인의 지배 체제인 남성물산에서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 회사 자체가 그녀가 키우고 생애를 바쳐 온 곳이었다.

설사 손실을 보더라도 그녀의 뜻을 저버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심 걱정하고 계신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저는 말레이로의 진출이 잘될 것이라 의심치 않아요. 성경의 왕실에서도 한국의 말레이 식민지 건설을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어요. 내지의 패권주의가 강화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지요. 때문에 여러 가지 목적으로 우리 상회의 진출을 왕실에서도 원하고 있어요. 일단 자본이 들어가면 사람이 움직이고, 아마 특무사 요원들도 우리를 통해 심어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듯싶어요. 별로 내키진 않지만 왕실에서 원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어쨌든 저 스스로도 말레이 반도가 약탈 자본에게 일방적으로 침탈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레이의 자생적인 토착 자본에 투자를 반드시 이뤄낼 생각입니다. 이것은 내지의 자본을 견제하는 동시에 말레이인들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될 것이에요.”

유청령은 최수일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다는 듯, 그가 믈라카로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신신당부를 했다.

이렇게 부탁을 받았으니 최수일로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성물산이요? 글쎄요, 아시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총독부 시책이 내지 자본을 우선적으로 우대한다는 것이라. 물론 지근거리의 상남 자본은 예외이긴 합니다만. 지금도 식민지의 대농장에 상남 자본이 많이 들어왔긴 하지요. 그런데 직접 투자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레이 토인들을 통해서 간접 출자하시겠다니요. 별로 총독부 입장에서 반갑지는 않습니다. 이 돈이 혹여 토인들의 무장화에 흘러들어 가거나 하면, 남성물산에서는 어찌 책임질 생각입니까?”

예상대로 총독부 관료의 대응은 쌀쌀하기 짝이 없었다.

예전 대한제국은 외부 식민지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했었다.

이것은 설치 시점에서는 새롭게 개척되어 대도독을 파견해 행정을 일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내지로 편입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제도였다.

예전에 당나라가 새롭게 개척된 지역에 도독부를 두고 통치했던 맥락과 닿는 것이었다.

일종의 중세적인 관료 기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도독부였다.

그러나 심요도독부가 해체되어 요동국이 수립되고, 영주도독부도 독립전쟁 끝에 연공으로 재탄생하여 독립하면서, 기존의 도독부를 통한 통치 제도는 이제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지에서는 북해도독부의 내지 행정 체제로의 편입과 진서도독부에서 점증하는 진서민족주의운동에 대한 대처를 놓고 여러 가지 대처 방법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단행된 말레이 출병 이후, 새롭게 세워진 말레이 식민지에는 기존의 관례대로 도독부가 설치되지 않고, 대신 군사 관료의 성격이 짙은 총독이 파견되는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일체 지역에서 관료를 충원하지 않고,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내지의 중앙정부에서 직접 선임한 관료를 총독부로 내려 보내고, 동시에 총독에게는 군사 지휘권까지 이양하여 사실상 막대한 권한을 심어주고 잔혹한 식민지 통치를 지휘하게 만드는 무단통치(武斷統治)가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총독부 체제는 단순히 제도가 바뀐 것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한국이 상업제국(商業帝國)이 아닌 근대적 의미에서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시책의 변화는 내지의 일부 계층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착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했다.

내심 이러한 사실은 총독부의 관료들도 체득(體得)하고 있었고, 당연히 이러한 기조에 반하는 남성물산의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별히 총독부의 허가 없이 당장에 자본을 투자할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기본적인 상업 거래를 위해서 믈라카에 상관만 열 수 있도록 해주시면 우선은 충분합니다.”

“……상부와 한 번 상의는 해보도록 하지요. 기대는 많이 하지 마시구요.”

관료는 냉담한 얼굴로 최수일이 내민 서류를 한쪽에 밀어 놓고서 쌀쌀맞은 어투로 말했다.

최수일은 안색을 흩뜨리지 않고 살짝 비굴한 표정을 띄우며 준비해 두었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현금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는 종이 수표가 담긴 봉투였다.

관료는 잠시 그 봉투를 바라보더니 재빨리 서류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박봉의 총독부 관료이니 만큼 이러한 유혹에 약할 것이라 생각했던 계산이 주효했던 것이다.

“며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아시겠지만…….”

총독부 관료의 말이 한껏 누그러졌다.

최수일은 그가 말을 흐리자 알고 있다는 듯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자기 윗선에도 제공할 자금을 다음에는 준비해 오라는 소리일 터였다.

더러운 노릇이지만, 최수일 이외에는 이러한 일을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유청령은 이런 부패가 오고 가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재량껏 쓰라고 최수일에게 주어진 자금을 융통성 있게 운용하여 일이 잘되도록 처리하는 것이 바로 그가 할 일이었다.

애초에 믈라카로 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일을 또 하게 될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최수일은 돈 봉투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적대적이고 완고한 관료 집단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동시에, 대부분의 경우 인맥이 없는 이가 피해갈 수 없는 절차였다.

최수일은 그냥 기계가 잘 돌아가기 위해 기름을 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심 씁쓸한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1784년

홍문(弘文) 46년 계춘(季春)

대한제국령 황성부

김시유의 석사 과정 지도 교수였던 정약전이 제도대학 최초의 언어학 교수로 임명되어 1782년부터 고전학과 언어학의 교수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언어학 교수로 임명된 직후 정약전이 고전학 교수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정약전이 학교 측의 배려로 겸임을 유지한 것은 김시유의 박사 학위 논문이 끝나면 언어학 담당 교수직을 김시유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대학 측의 정책상 그 해에 새로운 교수좌를 늘리도록 되어 있었고,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다섯 자리의 새 전공을 위한 교수좌도 배정이 되었다.

이 중 이미 지질학(地質學)과 생물학(生物學)에 각각 두 자리씩이 할당되었고, 남은 한 자리가 문제였는데, 언어학이 그 한자리 몫으로 일찌감치 결정되었지만, 문제는 자리에 앉을 교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교수좌 증원에서 언어학 교수가 충원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족히 십 수년은 기다려야 했고,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정약전이 대학 본부 측과의 타협 끝에 임시로 언어학 교수좌에 앉았다가 김시유의 박사 학위가 수여된 뒤에 그 자리를 넘겨주기로 내정되었던 것이다.

이미 일찌감치 석사 과정을 끝내고, 제도대학 연구실에 틀어박혀 김시유는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로 본래 언어학 전공도 아닌 정약전이 그를 계속해서 지도해 주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이번 김시유의 박사 학위 논문의 심사도 고전학과 역사학 교수들이 심사하게 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각종 이두와 향찰 자료, 그리고 온갖 주변 언어의 문헌 자료에 둘러싸여서 김시유가 준비하고 있는 논문의 주제는 바로 한국어의 계통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비록 제한적인 자료의 양 때문에 확답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북륙어족(北陸語族, 알타이어족)과 열도어족(列島語族, 일본어족)의 그간 축적된 역사비교언어학적인 연구 성과와 석사 과정 당시 정약전과 함께 정리한 고대 및 중세 한국어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고대한국어의 계통을 추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떠오르고, 그에 해당하는 자료를 추렴하여 비교 대조하고, 다시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하여 분류하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박사 학위 논문의 제출일이 다가올 때까지 김시유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의외의 돌파구는 북해도독부에서 발간된 극북(極北)의 여러 민족들에 관한 인류학적인 탐사 자료에서 나왔다.

흑룡강 하구와 고혈도(庫頁島, 사할린) 북부에 거주하는 길랴크(Gilyak), 혹은 니브흐족의 단편적인 언어 채취 자료가 그 단서였다.

지금은 인구가 줄고 그 언어의 사용자도 절멸에 가까운 상황이 되어, 그 언어의 일모(一毛)를 50여 년 전 발간된 이 북해도독부의 조사 자료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북해의 영안대학에서도 길랴크어의 자료를 일부 채집해 놓은 것이 있어서 어렵사리 이 자료들에 보탤 수 있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이 길랴크어를 비롯한 극북 지역의 언어들은 비슷한 계통으로 여겨져 북륙어족으로 묶이는 몽골어, 튀르크어, 여진어를 포함한 퉁구스계 언어들과는 확연이 다른 것이었다.

김시유는 당초 한국어의 계통을 북륙어족에 연관 지으려 했으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것이 상당히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절절이 느끼고 있었다.

유사성이 많이 발견되긴 했지만, 단언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특히 기초 어휘의 일치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해·달 같은 천체나, 지형지물, 그리고 숫자는 잘 바뀌지 않는 어휘였다.

이러한 부분에서 대응이 부족하다는 것은 확실히 한국어가 북륙어족에 속한다고 단언하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한자 어휘를 대량으로 받아들이기 전의 원형적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고대한국어, 특히 신라의 삼한통일 이전의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고 단편적으로 그것만으로 언어의 실태를 추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이었다.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른 언어와의 주된 비교는 채 4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중세 국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교착 상태에서 길랴크어 자료는 김시유에게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다.

길랴크어의 기초 어휘와 한국어의 대응 관계에 주목했고, 극동아시아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선주민의 언어, 즉 길랴크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 위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 집단의 남하로 인하여 언어가 변화되지 않았냐는 것이 김시유가 세운 가설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어의 기층에는 북륙어족의 요소 이전에 이미 아시아 선주 민족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박사 논문의 핵심이었다.

아쉬운 대로의 결론이었지만, 적어도 한국어 계통 문제에 있어서는 최초로 발표되는 논문인 것임에는 분명했다.

그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문제에 환기를 시킨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도대학의 유수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이 논문을 기대하게 만들게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대의 시선 속에서, 그해 봄, 김시유는 제도대학에 박사 학위 논문 〈국어의 역사적 근원 문제와 그 토대의 기층 언어에 관하여〉를 제출했다.

이내 정약전을 포함한 세 명의 교수에 의해 논문은 철저하게 검토되는 심사 과정에 들어갔다.

애초에 통과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는 했지만, 심사위원들은 호평 일색으로 논문을 극찬했다.

심사에는 채 열흘도 걸리지 않았다.

“김 군, 정말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제대로 잘해주었어. 한동안 이런 수준의 논문은 다시없을 거야.”

정약전은 김시유의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그를 얼싸안았다.

얼떨떨하게 논문 통과 사실을 알게 된 김시유는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빨리 통과 결정이 나고 학위가 수여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이거 한 학기 정도는 내가 언어학 강좌를 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박사 학위 논문이 조속하게 통과된 덕분에 자네가 학유로 임명될 자격이 충분해졌고, 바로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내 언어학 교수좌가 자네에게로 이전될 걸세. 이미 학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왔어.”

정약전에 말에 김시유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제가 바로 강의를 맡게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강의만 맡다마다. 자네는 이제 제도대학의 유일한 언어학 교수일세. 아니, 그러고 보니 내지를 통틀어서도 자네가 유일하구만.”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진서대학에 키얀 페쿠미가 키운 제자들인 언어학 교수가 두 명이 있었고, 요동 왕립대에는 언어학 담당 교수가 한 명이 있었다.

넓게 보아 한국 학계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언어학 교수가 통틀어 세 명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시유는 내지에서 최초로 언어학 교수에, 그것도 매우 젊은 나이에 앉게 된 셈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요동에 잠시 다녀오려 했는데, 이거 그렇게 하기가 힘들겠는데요.”

“흠, 그것도 듣고 보니 그렇군. 논문 쓰는 내내 다녀오지 못했을 텐데 자당께서 섭섭해 하시겠구만.”

자당(慈堂)이란 남의 어머니를 높이 올려 부르는 존칭이었다.

근자에 들어 잘 쓰이지 않는 말이었지만, 고전학을 전공한 교수답게 정약전은 예법에 맞는 어휘를 늘 골라 쓰느라 고심하는 사람이었다.

고민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정약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김시유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이번 논문이 통과될 때까지 또 한 번 이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 뭐, 자네가 내 제자라기 보담도 같이 학문을 하는 동료 아니겠는가. 날 좀 편히 대하게.”

“허허, 천천히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그래도 석사 학위를 지도받은 선생님께 결례를 범할 수야 있겠습니까.”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그나저나 이제 미뤄 두었던 결혼도 슬슬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만혼(晩婚)이 점점 일반적인 추세가 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시유의 나이 올해 스물여덟이었으니,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아 결혼의 때를 크게 놓친 것은 분명했다.

보통 양가의 자제들이 남자의 경우 스물둘에서 스물다섯 사이, 여자의 경우 열아홉에서 스물셋 사이에 보통 혼례를 치르곤 했으니, 김시유의 나이면 충분히 노총각의 대열에 들 만한 것이었다.

“때가 되면 다 하겠지요, 하하.”

김시유는 멋쩍은 듯 덥수룩해진 머리를 긁었다.

논문을 쓰는 동안 좀체 태를 돌보지 않아 지저분한 산발(散髮)이었다.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머리부터 깔끔하게 다듬어야 할 듯했다.

원래 전통적으로 성인 남성의 머리 형태였던 상투는 지금에 와서는 거의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미 16세기 초반부터 군대의 풍습이 밖으로 번져 나와 혼례를 치르지 않은 남성은 댕기를 땋지 않고 단발을 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일반적인 풍토로 정착되어 18세기 초반에 와서는 상투가 도리어 희귀해진 상황이었다.

전통적인 갓의 형태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대부분의 성인들은 말총으로 짠 전통적인 흑립(黑笠) 외에도 모직물 및 모피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속관(俗冠), 혹은 모자(帽子)를 쓰고 다녔다.

한때는 일시적으로 서양풍의 가발이 유행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풍조는 지금에는 거의 퇴색된 상황이었다.

대신에 사람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기 위해 기름을 찾기 시작했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부분 기름으로 정돈한 단정한 머리가 선호되고 있었다.

구태어 멋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김시유는 적어도 머리를 정리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도 다듬을 겸 남대문으로 나가서 옷도 한 벌 맞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정약전과 헤어지고 나서, 으레 그렇듯 왕십리로 나와 궤도마차에 김시유는 올랐다.

광화문 의정로까지 나간 다음에 그곳에서 다른 궤도마차로 갈아타고 남대문으로 갈 생각이었다.

일전의 증권 소동으로 인하여 얼떨결에 손에 쥐게 된 삼만 원에 가까운 돈이 크게 까먹은 것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김시유는 그 돈을 함부로 쓰기가 영 께름칙했다.

때문에 제도대학에 가까운 행당동(杏堂洞)에다가 집을 하나 사둔 것을 제외하고는, 그만큼 돈이 있으면 부릴 만한 개인 마차와 마부도 두지 않았다.

호봉이 좋은 편인 제도대학의 평균적인 학유(요즘에 흔히 부르는 말로 교수)들이 한 달에 받아가는 돈이 금화 10원 내외였다.

이 돈을 다른 데 쓰지 않고 30년을 바짝 모아도 겨우 3,000원 내외였으니 김시유가 손에 쥐고 있는 돈이 터무니없는 액수이기는 했다.

이제 아마 대학에 자리를 얻었으니 평생은 몰라도 한동안은 제도대학의 교원으로서 지내게 될 터였는데, 아마도 지금 가진 재산에 비춰보아 그 월급은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저 돈보다는 개인적으로 제국 최고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명예가 더욱 귀중한 자산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궤도마차는 동대문을 지나 도성 안으로 들어섰다.

번잡한 종로 일대를 지나가는 동안 김시유는 그간 종로의 거리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지난 20여 년간 종로에는 수많은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목조 건물은 거의 사라졌고, 최신 건축 공법으로 축조된 3층에서 높게는 7층에까지 이르는 거대하고 높은 건물들이 종로의 대로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주로 대형 상단들의 건물이거나, 혹은 은행, 증권소 같은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광교 쪽에 이르면 새롭게 신축된 제도법원(帝都法院)의 건물이 있었고, 종각 쪽에는 제국의회(帝國議會)의 웅장한 건물이 깔끔하게 정비된 개천(開川, 청계천)의 북안(北岸)을 향해 서 있었다.

이러한 건물들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는 거대한 상업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고, 제국의 심장답게 유동 인구도 많았다.

수많은 마차와 인파가 쉴 새 없이 거리를 오고 가고 있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형태의 거리의 노점들도 연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골목에는 수많은 다방(茶房, 카페)과 온갖 종류의 협회(協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김시유의 목적지는 종로가 아니었다.

제국의회 건물과 제도법원을 지나자 이내 곧 종로와 의정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눈에 보였다.

이곳에 여러 해 전에 어극 40주년을 기념하여 출정이 반포되었던 기념비전이 들어서 있었고, 그 뒤로 의정로에는 차마(車馬)의 통행이 금지되고 광장이 들어섰다.

광장의 동남 쪽에는 이 기념비전이, 중앙부에는 말레이에서의 전승을 기념하여 진서전쟁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고, 서남쪽에는 이 궤도마차의 환승 정거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널찍한 광장의 안쪽에 경복궁 광화문이 서 있었고, 그 뒤로 웅장한 옛 궁궐과 수려한 북한산 줄기가 그대로 조망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제국의 모든 도로와 측량의 원점이 되는 도로원표(道路元標)도 세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중심지였다.

오랜만에 나와 본 의정로인지라 이래저래 풍경이 낯설기는 했지만 어렵잖게 김시유는 남대문을 향하는 궤도마차로 갈아탔다.

널찍하게 잘 닦인 의정로는 이곳에서부터 숭례문, 혹 속칭으로 남대문까지 이어져 있었고, 이 대로를 중심으로 하여서는 각종 행정 및 정치적 목적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내부, 외부, 문부 등의 각종 정부 부처(部處)의 건물들이 연이어 서 있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지금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경운궁(慶運宮)이 나타났다.

그 맞은편에는 황성부청(皇城府廳)의 건물이 서 있었고, 조금 더 아래쪽에는 1657년에 송시열 내각에 의하여 세워진 중앙은행인 「제국은행」의 본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국은행에서 지척에 바로 숭례문이 서 있었고, 이 제국은행을 감싸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각종 의류를 파는 재단사들의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오늘 김시유의 목적지는 이곳이었다.

소위 명례방(明禮坊)이라 불리는 이 일대에는 각종 고급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간만에 기분을 내기 위해 들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기술 좋은 이발사부터 찾아가서 머리를 깔끔하게 다듬은 뒤, 면도까지 마치고 김시유는 옷을 맞추기 위해 재단사를 찾아갔다.

전통적인 한복(韓服)은 16세기 이래로 많은 변형이 이루어졌고, 시대가 지나갈수록 복식의 유행도 점차 빨라졌다.

어떤 부분은 서양 복식의 장점을 흡수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형태가 과장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다리에 붙는 형태의 바지가 유행이었고, 서양에서 들어온 혁대(革帶)는 남성복에서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있었다.

이런 바지 위에 비교적 품이 넓은 철릭을 입고 경우에 따라 그 위에 코트 형태로 개량된 두루마기를 걸치고 관을 대용한 모자를 쓰는 것은 현재의 유행이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안경이나 시계를 휴대하기도 했고, 넉넉하게 붙어 있는 주머니에 발화기나 최근 등장한 성냥 따위를 넣고 다니며 짧은 곰방대에 담배를 붙여 피우는 장면도 보기 흔한 것이었다.

지팡이도 크게 유행하고 있었고, 가죽 구두는 이제 보편적인 신발이었다.

이런 유행에 맞추어 옷을 살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아낌없이 여기저기서 옷을 맞추어 두었다. 특히 상의로 애용되는 철릭 같은 경우에는 재단사의 손길에 따라서 이래저래 태가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몸에 맞는 옷을 입기 위해서 이런 전문가의 손을 빌리는 것은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이 정도 쓰기에 김시유의 주머니는 차고 넘쳤다.

명례방을 한 차례 돌며 머리도 하고 옷도 맞추고, 또 전에는 써본 적이 없던 향수까지 구매한 뒤, 다시 제국은행 쪽의 큰길로 나가서 남대문으로 돌아 나갔다.

남대문 바로 바깥에 남성물산의 황성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대문 바로 앞의 널찍한 광장을 낀 대로의 좌측에 3층짜리 석조 건물이 있었고, 그곳의 1층과 2층이 바로 남성물산의 황성 지점이 세 들어 있는 곳이었다.

“어, 이게 누구십니까? 도련님 아니십니까?”

족히 백여 명은 근무를 하고 있는 이 점장에서 김시유를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남성물산의 업무에는 관여랄 것을 한 바가 없었고, 이 서울 지점에도 매우 가끔 집에서 보낸 우편환을 수신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들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이곳 남성물산에 근무하는 사환이 김시유가 머무는 거처로 오고 가며 심부름을 하곤 하였으니 이곳까지 올 일은 통 없었고, 당연히 이곳 직원들도 남성물산의 주인댁 아들이 황성부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얼굴은 몰랐다.

조용히 집에 박사 학위 취득과 교수 임용에 관한 내용을 적은 서찰을 부치고 가려 들렀는데, 우연찮게도 종종 그 심부름을 맡았던 사환이 점장에 나와 있었다.

직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김시유에게로 돌아갔다.

“쉿, 조용하게. 오늘 조용히 여순의 모친께 부칠 서찰을 가지고 온 것뿐이니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여순으로 가는 가장 빠른 선편이나 역마차를 통해서 보내주도록 하게.”

사환을 옆에 불러다가 주의를 주고서 그의 손에다가 편지를 맡긴 다음, 김시유는 허겁지겁 건물을 나왔다.

뒤늦게 말을 들은 지점장이 어떻게 얼굴도장이라도 박아둘까 싶어 건물을 나와 김시유를 찾는 것을 숨어 보고서는, 김시유는 오늘 산 모자를 얼굴 깊숙이 눌러쓰고서 괜히 길을 둘러 서소문 쪽으로 가서 궤도마차를 탔다.

좀체 이런 대우가 적응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서소문 앞에는 「수신학원(修身學院)」이라는 여자 학교가 있었다.

정식으로 교정(校庭)을 꾸리고 개교한 것은 채 열두어 해 남짓이었다.

제국 전역에서 유일하게 여성에 대한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학교가 이곳이었다.

이 수신학원의 전신은 이미 15세기 초엽에 북촌의 내당(內堂)에서 세훈의 며느리인 백제공의 여식 에히메가 수신당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반가의 여자아이들을 모아다 기초적인 교육을 시킨 것이었으나, 그 이래로 삼백여 년에 걸쳐 이 수신당은 백 명도 되지 않은 매우 적은 숫자의 귀족 및 관료의 여식들을 모아다가 교양 교육을 시키는 역할만을 담당해 왔다.

일종의 현모양처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여자 학당으로서, 당연하게도 남자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가르치는 선생들 또한 남편의 뒷바라지를 다 하고 자식까지 모두 길러낸 늙은 귀부인들이었다.

그러나 점차 여성 교육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었고, 중산 계층이 성장함에 따라 이 폐쇄적인 귀족 여성 교육기관인 수신당에 줄을 대어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내각의 권유로 수신당은 서소문에 정부로부터 부지를 기증받아 여학교인 수신학원을 세웠다.

북촌의 답답한 내당에서 나와 기숙형 학교로 널찍하게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곳에서 공부하는 10대의 여아들은 엄격하게 선발되어 출입이 통제되고 함부로 외부 인물과 접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이니 만큼, 그날 우연찮게 서소문까지 오게 되어 궤도마차를 기다리고 있던 김시유가 그녀를 본 것은 일종의 천운(天運)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허락을 받아서 집으로 가는 길인지 아주 젊고 예쁜 여학생이 하녀 두 명과 함께 궤도마차를 타기 위해 정거장으로 왔던 것이다.

분명히 엄격해 보이는 복장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신학원의 여학생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체 그 아름다운 외모를 숨기기는 힘들었다.

김시유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그쪽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을까, 한 열일곱에서 여덟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하녀의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김시유는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덜 민망스럽게 때마침 궤도마차가 저쪽에서 달려와 멈춰 섰고, 남녀의 탑승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기에, 여학생은 뒤쪽으로, 김시유는 앞쪽으로 올라탔다.

그렇다고 차 내가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힐끔힐끔 쳐다보면 칸막이 저쪽의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

김시유는 주책맞게도 계속 시선이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종래에는 그 여학생이 김시유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볼 정도였다.

그녀는 눈을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한 눈빛으로 김시유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방금 명례방에 나가서 깔끔하게 단장하고 온 것이 그렇게 다행스럽게 여겨질 수가 없었다.

“아씨,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종로 어디쯤 왔을까, 그녀는 하녀의 재촉에 궤도마차에서 내렸다.

착각이었을까, 김시유는 그녀가 내리던 순간에 그를 돌아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운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멍한 상태가 되어 그는 왕십리에 도착할 때까지 그 얼굴만을 곱씹어 보았다.

종각 부근에서 내려 피맛골 뒤쪽으로 가는 것 같았으니 아마 북촌(北村) 쪽에 있는 명문가의 여식이거나, 아니면 종로 뒤쪽 인사동 방향에 살고 있는 돈깨나 번 자산가의 여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다시 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김시유는 그저 한숨이 앞섰다.

어떻게든 하녀에게라도 말을 붙여 누구 집 여식인지 알아둘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정약전 말마따나 혼사를 서두르긴 해야 할 성싶었다.

좀체 공부만 하다가 어린 여학생의 방향(芳香)에 이렇게 하루 종일 멍한 상태가 될 정도이니 독신 생활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1785년

홍문(弘文) 47년 계하(季夏)

대한제국 상남서(湘南署)

한국의 말레이 반도 침략 이후로 적도 아시아 일대에서는 열강의 식민지 확장 정책이 점차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엠마뉘엘 시에예스(Emmanuel Siey s)가 총재(總裁)로써 이끌고 있는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노골적인 주변 적대 국가들에 맞서서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고, 유럽 전체가 이 프랑스 혁명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적도 일대의 아시아 확장 정책은 대부분 극동 국가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다.

1779년 공식적으로 한국이 조호르 술탄에게서 국권을 빼앗고 말레이 총독부를 설치한 이래, 소위 「번병론(藩屛論)」이라는 제국주의적 논쟁이 극동을 휩쓸었다.

번병이라는 것은 울타리로 삼아 지킨다는 말로, 말레이 반도에 대한 잉글랜드의 야욕이 언제고 현실화될지 모르기에 방어적 목적에서 미리 말레이를 선점하여 해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이자 방패로 삼겠다는 기괴한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단어였다.

이 말은 이내 어용학자들에 의해 거창한 논리로 포장되기 시작했고, 이내 이러한 서적이 양·월·요동·일본 등의 지식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국들 또한 동남아시아, 태평양, 혹은 인도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거느려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의 말레이 침탈은 주변 국가들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한국의 뒤를 쫓아 제국주의적 행동에 나서게 만들고 있었다.

일본의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한 칸토(關東) 지역, 그리고 양나라의 중심부인 장강(長江)의 델타 지대, 그리고 월나라의 주강(珠江) 하구는 거대한 상업 도시를 낀 산업지대가 발달하고 있었고, 이들 나라 또한 노동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을 포함한 공업 원료의 획득과 상품 수출을 위해 배후지를 절실히 필요하고 있었다.

먼저 이를 목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감행한 것은 바로 월나라였다.

이들과 국경을 접한 월남(越南, 베트남)은 북쪽의 레(黎) 왕조가 지배하는 다이비엣(大越, 대월)과 남쪽의 지방 정권으로서 레 왕조에 반기를 든 응우옌(阮) 씨가 다스리는 꽝남(廣南, Qu ng Nam)으로 나뉘어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월나라는 이를 틈타 월남의 내정에 개입하기를 원했고, 일시적으로 레 왕조에 대항한 월나라와 꽝남의 응우옌 씨 사이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월남의 북부를 병탄하려 했던 월나라의 뜻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오히려 레 왕조의 몰락과 응우옌 씨의 월남 전역의 지배를 달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다.

월나라는 응우옌 씨에게 약속했던 지원을 다하지 못했고, 이것은 사실상 월남 전역에 통치권을 수립하기 직전에 있었던 응우옌 씨의 당주 응우옌 푹 아인(阮福映, 완복영)에게 반감을 심어주었다.

말로만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충분히 도와주지도 못한 주제에 월남을 침탈하려 한다는 것이 응우옌 푹 아인의 월나라에 대한 인식이었다.

더군다나 월나라의 팽창을 우려한 양나라가 개입하여 응우옌 푹 아인에게 군수품과 군량을 쥐어주면서 월나라와 관계를 단절하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월나라는 결국 본전도 건지지 못한 채 월남을 영향권에 넣는 데 실패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레 왕조를 완전히 몰아내고 월남의 북중부를 석권한 뒤, 월나라 세력까지 쫓아낸 응우옌 푹 아인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가륭(嘉隆)」이라 하고 근대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대학이 세워지고, 은행의 설립을 비롯한 금융 제도의 정비 등이 속개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외세를 일단 방비해 내고 통일을 이룩한 월남과 다르게 캄보디아의 상황은 별로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월남에서 월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한 뒤, 양나라는 확실히 동남아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군함을 이끌고 메콩강 델타 지대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월남과 크메르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던 지대였다.

인구압을 감당하고 식량 생산에 유리한 지대를 획득하기 위해 월남인들은 끊임없이 크메르 왕조의 영역을 잠식하며 남하하고 있었고, 쇠약해진 크메르는 이를 막아내는 데 급급해 하고 있었다.

양나라의 도움을 얻은 월남의 새 군주 응우옌 푹 아인이 이곳의 중심 정착지이자 주변 크메르 정착지에 의해 고립되어 전략적 가치를 상실한 사이공(柴棍, 시곤) 시를 양나라 군대에 조차(租借)해 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군함과 병력을 주둔시킨 양나라 군대는 캄보디아 왕 나라야나자라 3세 앙 엥(Preah Bat Samdech Narayanaraja III Ang Eng)을 겁박하여 강제로 개항 조약에 서명하게 하고 수도인 우동(Udong)의 40km 동남쪽의 프놈 펜(Phnom Penh)에 새로운 식민 도시를 조영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사실상 양나라의 보호국화된 캄보디아는 왕자를 양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불리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여 반식민지화되었다.

양나라는 1785년 유대괴(劉大魁)를 캄보디아 통감부(眞臘統監府, 진랍통감부)를 설립하고 초대 통감으로 보내 식민화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사실상 국왕 나라야나자라 3세는 이 유대괴의 허락이나 감독 없이는 아무런 캄보디아 통치에 대한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양나라의 뒤를 이은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호심탐탐 남방 항로의 경략(經略)에 애를 쏟고 있었고, 오가사와라 제도, 하라오 제도 등을 식민화하고 네덜란드 세력의 후퇴에 따라 호주(濠洲) 전토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그 길목에 있는 여송(呂宋)이었다.

본래 필리핀 제도 중에서도 루손(Luzon)섬은 카스티야의 식민지였으나, 이곳의 강성한 중국―말레이계 혼성의 상인 집단이 결국 카스티야 식민 통치에 불만을 품고 18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걸친 반카스티야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여송(呂宋, 루손)이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수도인 마닐라(Maynila, 麻里)를 중심으로 루손섬뿐만 아니라 필리핀 군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강고히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카스티야 식민 시기의 잔재인 카톨릭 종교를 기저에 깔고, 인종적으로는 토착민과 말레이계, 중국계로 나뉜 여송국의 정치는 연일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이 틈을 타서 1790년, 포함 운요마루(雲揚丸)를 비롯한 일곱 척의 흑선(黑船)을 이끌고 루손 섬의 지척인 세부 섬으로 가서 토착 군주를 겁박하여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당연히 세부 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던 여송국은 크게 반발했으나, 일본은 도리어 물러나기는커녕 함대를 이끌고 마닐라 항을 봉쇄하고 강제로 마닐라에 일본 조차지를 허락할 것과 무역 거래에 있어서 관세 특권을 줄 것을 요구했다.

여송국왕 펀 혹 닛(潘學日, Fhan Hoc Nit, 반학일)은 결국 이러한 요구에 수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필리핀 제도 진출은 이번에는 한국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왔다.

동영의 독립으로 인하여 비교적 예전에 비하여 태평양의 패권 유지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가는 한국이었으나, 일본의 남북횡단항로로 인하여 동서항로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레이 주둔군 및 상남파견대가 1791년 상남항과 믈라카항에서 각각 출항하여 우선은 북상해 아유타야로 가서 시암과 공식적으로 대사교환각서 및 〈한국―시암 수호통상조규(韓國·泰國修好通商條規)〉를 체결했다.

말레이 반도를 완전히 식민화시킨 것에 비하면 그나마 우호적인 편이었으나,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명기한 명백히 시암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시암과 통상조규를 체결한 뒤, 한국 함대는 다시 남하하여 동맹국인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에 기항했다가 향료 제도로 접어들어서 포르투갈령 티모르 식민지를 공격했다.

3일간의 포격전 끝에 무력으로 티모르 섬 전체를 접수하고 포르투갈을 축출한 다음 말레이 총독부에 티모르를 종속시키고는, 뉴기니섬 방면을 향해 진출했다.

일본의 남방항로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전초기지로서, 뉴기니섬과 호주 사이의 해협 지대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것이 이 항해의 목적이었다.

뉴기니 해안가에 요새를 건설하고 솔로몬 제도에까지 나가서 해도를 작성하고 한국령이라는 깃발을 꽂은 다음 이 사실에 대해서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당연히 일본은 길길이 날뛰고, 채 그 해가 지나가기도 전에 솔로몬 제도를 일본령에 편입한다는 공시(公示)를 띄웠다.

“이놈의 한국 도적 떼를 제대로 견제하지 않고서는, 종단항로가 두고두고 방해받을 것이다. 당장에 함대를 출항시켜 대응하도록 하라.”

아즈치 막부의 당대 쇼군인 오다 카즈시게(職田勝重)는 길길이 날뛰면서 1세기에 걸쳐 일본이 육성해 온 대양해군을 전력을 다해 남양(南洋)에 투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내 이들 함대가 뉴기니 해협에 파병되었고, 이내 한국과의 지루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이 일대를 둘러싼 요새 및 소규모 정착지와 항구들이 매일같이 주인이 바뀌며 접전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계속해서 일본의 살을 깎아먹지 않으면 넓은 대창해(혹 태평양)의 제해권을 내어 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종단항로가 한국에 의해 중간에 끊어져 버려 호주 식민지가 방기(放棄)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이 지루한 소모전은 1815년에 이르러 뉴기니 섬을 양분(兩分)하여 동쪽 절반과 솔로몬 제도는 일본이, 서쪽 절반과 티모르를 포함한 인근 군도는 한국이 가지는 것으로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떠오른 것이 바로 독도(獨島) 문제로, 일본이 제멋대로 이곳에 어업도해(漁業渡海)를 남발하면서 불거져 나온 것이었다.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는 이곳을 강원도 울릉군의 속령으로 당연하게 여겼지, 공식적으로 영토라고 선포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 어선들이 마음대로 독도에 드나들자, 이 섬의 중요성을 재차 인식하고 공식적으로 칙령을 통해 울릉군의 일부로 선언한 다음, 이 섬에다가 등대와 포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반발하면서 군함까지 보내 위협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매우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며 일본 군함을 내쫓았다.

이 뒤로 두고두고 이 독도 문제는 한일 간의 갈등 요지가 되었지만, 이후 1815년에 뉴기니 문제를 협상하면서 일본이 더 이상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일단락되게 된다.

이렇게 각국이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나가서 식민화 작업을 하는 동안 요동은 순나라에 대한 침탈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청도(靑島)와 천진의 조계지에는 수많은 수탈물자들이 가득 쌓였다. 그나마 이런 물자들을 제값을 치르고 사가는 것은 남성물산 정도가 전부였다.

요동 상인들은 여전히 강고한 카르텔을 맺고서 헐값에 물자들을 사들여서 요동으로 실어 날랐다.

순나라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을뿐더러, 나라 자체도 끊임없는 내란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천의 내륙에 고립된 주(周)나라와 요동에 의해 침탈되고 있는 화북의 순나라는 갈수록 쇠락하고 몰락하고 있는 반면, 해안 지대에 위치하고 곡창지대를 끼고 있는 양나라와 월나라는 산업화와 팽창 전략을 병행하며 극동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은 빈한한 내륙 지역과 부유하고 강력한 해안 지역으로 양분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중국 대륙을 정치적인 국경들로 이루어진 분할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분절(分節)된 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강남을 중심으로 가장 성공적인 국가를 건설한 양나라는 민어(뙤語)·오어(吳語)에 기초한 〈신국어규범(新國語規範)〉을 선포하여 화북 지역의 전통적인 관화(官話)를 배격하고 자신들만의 언어 규범을 수립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가난하고 고립된 화북 지역의 순나라 민중들과 분리된 독립적인 양나라의 국민들로 여기고 있었다.

전통적인 중국의 일부라기 보다는 민남과 오월의 지역 전통에 기반하는 독자적인 해양 문명으로 자신들을 규정 짓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전 문어에 기반한 문학적 전통이 빠르게 무너지고 그 자리를 항주(沆州) 방언을 최고의 모범으로 삼은 양나라의 국민 문학이 대체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과 관공서의 문서 또한 〈신국어규범〉에 따라 작성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발화(發話)되는 언어뿐만 아니라 문자로도 중국 대륙의 나머지와 양나라는 소통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추세는 월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월나라의 급진주의자들은 더욱 앞서 나가고 있었다.

급진주의자들은 그들의 전통을 중국의 한당(漢唐)에서 찾지 않고, 한 나라 시대에 광동 지역에 있었던 독자 정권인 남월(南越)을 국가의 기원으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월어(패語), 혹 광동어(廣東語)를 표기하는 데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라틴 문자를 쓸 것을 주장하는 등 완전히 그 지역의 정서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부채질 했다.

대륙과 정신적으로 분리되어, 한국이나 일본의 모범 사례를 쫓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특히 월남 개입의 실패는 이들의 주장에 불을 붙였다.

양나라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양나라의 개혁정책을 훨씬 뛰어넘는 고강도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월나라에서는 국민국가화가 서둘러 진행되기 시작했다.

적색 바탕에 용과 좌우(左右) 세 개의 괘(卦) 문양이 그려진 「황괘적룡기(黃卦赤龍旗)」가 공식적으로 월나라의 국기로 선포되고, 광동어[廣東語, 월어]가 공식적인 국어로 선포되었다.

다만 전통 논자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한 라틴문자의 채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극동에는 한국·요동·양·일본의 네 열강국(列强國)과 유구·월나라 등의 중견 국가가 미묘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는 열강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제각기 서로 민족주의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상대에 대한 경쟁심과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내부 결속과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들 열강에 의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군도, 그리고 중국 내륙은 제국주의적 침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제국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이 모든 것이 정당화되기 시작했다.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처절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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