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5장 정로지도(征露之道) (76/82)

제75장 정로지도(征露之道)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Еслижизньтебяобманет,

Не печалься, несердись!

Вденьуныниясмирись:

Деньвеселья,верь,настанет.

Сердцевбудущемживет;

Настоящееуныло:

Всемгновенно,всепройдет;

Чтопройдет,тобудетмило.」

―알렉산데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А. С. Пушкин),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Еслижизньтебя обманет)〉, (1824)

1801년

융무(隆武) 11년 맹동(孟冬)

요동국 북계(北界)

북륙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타이가(Тайг )라고도 불리는 끝 모르는 북방수림(北方樹林)의 수해(樹海) 위로 차가운 겨울의 눈이 내려앉고 살을 에는 바람이 대지 위로 몰아치기 시작하면, 감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엄두내지 못할 정도의 끔찍한 밤의 계절이 시작된다.

9월만 되도 눈 싸리가 날리기 시작하면서 기온이 영하를 향해 곤두박질치면서 이내 온도계가 얼어붙어서 기온을 재는 것 자체가 힘들게 된다.

특히 11월에서 3월에 이르는 5개월간은 아주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요동군 북방수비연대의 병사들은 밖으로 나서질 않았다.

이 연대는 소규모의 중대로 나뉘어서 북륙의 여러 방어 진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중 제2대대 제1중대는 소위 「회교도 중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80리 남쪽에 주둔하고 있는 제3중대에는 「몽골 중대」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회교도 중대, 몽골 중대라는 별명이 붙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703년, 러시아의 동진을 막아내고 있던 시비르 한국이 결국 러시아 카자키(казки) 기병들에 의해 무너지고 동방 진출이 가속화되면서 이 시비르 한국 출신의 타타르 회교도 전사들 중 일부가 자발적으로 요동군에 입대하면서 이 중대가 창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이들의 맥은 끊기고, 지금은 요동에서 징집된 병사들이 이 북서쪽 끝까지 끌려와 러시아 카자키들과 때때로 교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별명만큼은 남아서 이들은 회교도 중대라고 불리고 있었다.

반면 몽골 중대는, 여전히 몽골 출신의 용병들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는데, 몽골인뿐만 아니라 투바(Tuva)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이런 중대들은 예니세이강 유역 지대에 드문드문 짧게는 수십 리, 길게는 수백 리 거리로 흩어져서 월동진지(越冬陣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실상 요동군에서는 최악의 근무 환경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이 예니세이강 유역의 월동진지들는 모두 북방수비연대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이 연대의 휘하의 인원은 총 2천 8백여 명가량으로 일반 연대에 비하면 좀 많은 숫자이긴 했지만, 드넓은 예니세이강 유역을 방비하기에는 그다지 넉넉한 숫자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방어의 허점을 이용해 유격전을 즐겨하는 카자키 기병들이 시시때때로 비공식 국경인 예니세이강을 넘어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했고, 이런 문제 때문에 이곳에서는 무력충돌도 잦았다.

혹독한 기후 환경과 열악한 보급, 그리고 러시아 카자키의 위협 때문에 북방수비연대의 둔지들은 사실상 병역을 지는 곳이라기 보다는 유형지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잘게 쪼개져서 100명 내외 중대로 겨우내 둔지 방어를 맡아야 하는 북방수비연대의 병사들은, 병종에 따라서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 완전히 이곳에서 고립된 채로 추위와 고독, 그리고 카자키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 싸워야 했다.

요동군 15만 중에서 겨우 3천 명 남짓.

이 상황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이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이들은 거의가 아무런 힘도 가진 것도 없는 하층 계급 출신으로, 얼떨결에 징집되어서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이 북방의 야지로 던져진 이들이었다.

그래도 회교도 중대의 경우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이들은 북방수비연대 안에서도 정예로 이름이 나 있었다.

총과 굽은 칼로 무장하고 두터운 모자를 쓰고서 사방 150km에 달하는 광막한 지역을 순찰하고 방어하는 이들의 유명은 카자키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고, 가급적이면 이들의 방어 지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돌은 피할 수 없었는데, 작년에도 겨울이 되기 직전인 9월에 강을 넘어온 카자키를 격퇴하고, 10명 이상을 사살하기도 했다.

회교도 중대에서 희생자는 부상 2명에 불과했다.

자부심이야 넘쳤지만, 그렇다고 보급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여름내내 빠듯하게 사냥을 돌고 채집을 하며 겨우내 먹을 식량을 거의 자력 조달해서 쌓아 놓아야 했고, 술이나 담배 같은 기호식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것이 작년의 카자키 격퇴 이후 연대 본부에서 포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최일영(崔日映)은 이 회교도 중대 소속의 중사(中士)였다.

하사관에 지원했을 때만 해도 그냥 가난한 집의 입 하나 덜고 평생 군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들어왔었는데, 설마하니 이곳 북방수비연대에 떨어질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글렇게 반쯤 공황 상태에서 하사로 이곳 회교도 중대에 임관해 왔고, 겨우겨우 적응해 갈 무렵에 카자키 격퇴 작전에 참여했다가 2명 사살의 공적을 세워서 중사로 조기진급했었다.

혹여 진급보다는 다른 후방부대로 전출을 시켜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던 최일영이었으나, 연대에서는 진급을 통보함과 동시에 그에게 2년간 회교도 중대에서 연장 근무를 명했다.

원래 공적이 없어도 올해면 전근될 순번이었으나, 도리어 진급하는 바람에 발이 묶여 버렸으니 지독히도 운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최일영은 그날 목책진지의 유일한 초계탑(哨戒塔)의 근무였고, 때문에 12월의 끔찍한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 모피로 만든 외투를 네 겹 가까이 껴입고서 눈만 빼꼼 하게 내어놓은 채 먼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 근무를 서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편도 볼 수 있도록 사병 하나가 동행하게 되어 있었고, 그날 최일영과 같은 조로 짜인 것은 만수르(Mansur)였다.

그는 오즈벡(O‘zbek, 우즈베크)인으로, 카자키들의 종 노릇 하며 포로로 끌려 다니다가 작년 전투에서 요동군 손에 의해 구출되었고, 딱히 갈 곳이 없었기에 자원입대하여 이곳에서 병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만수르는 이 회교도 중대의 진짜 유일한 회교도 병사였다.

한국어는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민첩하고 눈이 재발라서 최일영은 그와 함께 근무를 서게 된 것에 만족했다.

운이 좋다면 바람이 잦아 들었을 때 만수르에게 초계를 일임하고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만수르는 실수나 빈틈이 좀체 없었다. 애당초 어쩌다 카자키들에게 붙들렸을지 의문일 정도로.

하긴 그 정도 재바른 사람이니 카자키들도 죽이지 않고 부려먹었을 테지만.

“정찰 나갔던 5조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중사.”

아직 말이 서투른 만수르가 반말로 말을 걸어왔다.

“……않고 있습니다. 최, 중, 사, 님.”

만수르의 말에 최영일은 그가 한 말을 고쳐서 되풀이하며 지적했다. 만수르는 별로 상관없지 않는가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해가 하늘 꼭대기, 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해 진다.”

만수르가 손을 위로 치켜세웠다가, 다시 서쪽을 향해 뻗었다.

과연 타이가 수림 아래로 붉은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영일은 별로 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해가 중천일 때랑 질 때가 엄청난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요즘 같은 한겨울에는 해가 겨우 꼴랑 세 시간도 떠 있지 않았다.

한두 시간 정도야 순찰을 나갔다가 늦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 걱정마. 곧 오겠지.”

최영일은 만수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나 순찰조는 몇 시간이 더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들어가고 밤이되어 더욱 공기가 차가워져서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는데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들어와야 초계를 그만두고 진지의 따뜻한 굴로 내려갈 수 있었다.

목책 안의 진지는 거의 지하층으로 이루어져서 온기를 보존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때문에 병사들은 이곳을 굴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초계가 끝난 뒤에 이 굴로 들어가 두터운 이불에 몸을 집어넣고 따뜻한 화롯불 곁에 누워 있는 것이 최영일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와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순찰조가 돌아오지 않았다.

최영일은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영일은 만수르에게 손짓으로 내려가서 보고하라고 하고서는 전방을 주시했다.

시커먼 어둠이 깔려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의 어두움뿐이었지만, 여린 달빛에 의존해서 최영일은 눈을 번득였다.

잠시 뒤, 내려 보낸 만수르가 어떻게 짧은 말로 내용을 잘 보고했는지, 중대장 김우천(金宇闡) 대위가 황급히 초계탑으로 쫓아 올라왔다.

최영일이 경례를 붙이자 김우천도 손을 까닥 올려 답례했다.

“추운데 경례는 생략해도 좋아, 최 중사.”

김 대위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만수르 상병이 내게 정확히 전달했는지 확신이 없어서 말이네. 순찰조가 안 돌아오고 있다고?”

“예. 아무런 기별도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으면 초계탑으로 대원 한 명을 보내 연락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김우천 대위는 오전에 근무를 마치고 취침하고 있었기에 순찰조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을 깨워서라도 이 내용을 보고해 준 것에 대해 최 중사와 만수르를 칭찬한 다음, 내일 짧은 해가 뜰 때까지 부대 전체에 경계령을 내리고 초계탑 근무를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충분히 오래 올라와 있었던 최 중사와 만수르는 굴로 내려가서 몸을 좀 녹이도록 하고, 김 대위가 병사 한 명을 대동하고 직접 초계 근무에 들어갔다.

보통 중대의 책임자면 굴에서 나오지 않고 명령만 내려도 좋을 일인데, 김우천 대위는 좀체 그렇게 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직접 진두지휘하고 일을 도맡아서 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쓸데없이 귀찮은 일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회교도 중대의 중대원들은 김 대위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적어도 장교랍시고 권위적이고 얄밉게 굴지는 않으니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영일이 짧게 눈을 붙이고 나서 일어난 뒤에도 특별히 무슨 일이 발생하지는 않은 듯했다.

이불을 치워 놓고 일어나니 때마침 김우천 대위가 초계탑에서 내려온 듯 굴로 들어오고 있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중대장님.”

“어둠이 짙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기색은 없었네. 카자키들이 야습을 준비하고 있다면 불빛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사방에서 빛나고 있는 불이라고는 달빛뿐이었네. 그나마도 조금 전에는 달도 져버려서 사실상 초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내려왔네.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아서 말이야. 일단은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동이 터봐야 해가 올라 있는 것은 서너 시간이다. 하지만 순찰대가 무슨 이유로 기동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면, 해가 뜬 뒤에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우선은 김 대위의 말대로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중대원들은 무장을 갖춘 채로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면서 뜬눈으로 굴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초계병도 내려왔으니 모두 깬 채로 혹여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찰대가 제때 돌아왔다면 충분히 휴식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일단 중대장의 경계령도 떨어진 상태이니 방심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쯤 흘렀을까, 해가 뜰 시간이 되어 다시 초계탑 위로 사람이 올라갔고,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급히 막사 밖으로 다들 뛰쳐나가니 초계병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순찰조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말 위에 거의 널브러져 있습니다!”

김 대위는 황급히 병사들로 하여금 요새의 문을 열도록 했다.

무겁게 닫혀 있던 나무문이 열리자 기진맥진하여 거의 탈진한 상태의 도근배(道勤培) 하사가 말 머리에 몸을 기대고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몇 명의 병사가 달라붙어 도근배 하사를 말에서 내려 모포를 덮어주고 상처를 살폈다.

허리에 자상(刺傷)이 있었지만 다행히 출혈이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동상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발이 문제였다.

심하면 발을 도려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굴 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도근배 하사가 기력을 차라기를 기다렸다가 중대장 김우천 대위가 물었다.

도 하사는 어렵사리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어제 해가 중천일 때쯤, 서쪽 100리쯤 밖에서 카자키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5명의 조원들 중 저만 겨우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 바위 사이에 몸을 숨겨 겨우 버텼다가 귀환했습니다.”

“카자키들이 들어와 봐야 열 명 남짓으로 돌아다니는데 우리 순찰대가 모두 전멸했다고?”

“아닙니다. 이번에는 보통이 아닙니다. 강 저편에 거의 족히 천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 병력이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러시아 말을 조금 할 줄 아니 들은 것이 정확하다면, 아마 그럴 것입니다. 저희를 습격한 카자키들의 숫자만 해도 족히 스무 명은 되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데다가 머리수도 밀려서 방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약간 횡설수설하는 감이 있긴 했지만, 도근배 하사가 하고 있는 말의 심각성을 중대원들 모두는 알아들었다.

한겨울에 카자키 천 명이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겨울에는 서로 꼼짝 않고 강 양쪽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굳이 이 겨울에 그런 적지 않은 숫자의 병력을 움직이면서 예니세이강을 넘어와 습격을 자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심상찮은 일이었다.

무거운 공기가 막사 안에 짙게 깔렸다.

“아무래도 대대 본부에 긴급히 전령을 보내야겠다.”

김우천 대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1802년 계춘(季春)

러시아 제국 서부 시베리아 관구(管區) 옴스크

북륙의 광활한 대지 사이로 난 북륙임도(北陸林道)를 따라 요동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전의 일이었다.

한해(瀚海, 바이칼호)에서 발원하여 북빙양으로 흘러 나가는 큰 강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동쪽에 있는 열나하(列拿河, 레나강)였고, 다른 하나는 앙가라강이었다.

그중 앙가라강은 몽골 고원 북쪽 끝에서 발원한 예니세이강과 합쳐져 북빙양으로 흘러 나간다.

요동의 동쪽 국경은 흑룡강의 북쪽으로부터는 북해도독부와 관할 시비 끝에 열나하를 가로지르는 동경 130도 선으로 잠정적으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문서상으로만 그럴 뿐, 이 열나하 유역에는 북해나 요동 어느 쪽도 제대로 된 개척을 한 바 없었고, 퉁구스인들과 교역하기 위한 여름 한철의 무역소만이 쓸쓸하게 강 유역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서쪽이었다. 서쪽 국경도 흑룡강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몽골과 경계를 이루는 대흥안령을 따라서 흑룡강까지, 요동의 북륙임도는 이 지역에 대한 요동의 강고한 지배의 상징이었다.

16세기 말, 한의직(韓宜直)이 당시 대군이었던 폐주 금양군의 명을 받아서 북륙의 광막한 지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했고, 이 길이 요동 북쪽의 대주보에서 흑룡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 모피 무역로를 개척한 뒤로, 이 길을 따라 여러 요새가 세워지고, 무역 거점들에 병사가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공식적으로 북륙임도의 일대는 요동국이 독립한 뒤에 북계(北界)라는 군사 행정 구역에 편입되었다.

북륙임도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쌍성보(雙城堡)는 인구 1만의 쌍성부(雙城府)로 그 급이 올랐고, 북계(北界)의 안찰사가 바로 이 쌍성부를 수부로 삼고 북계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 쌍성부를 중심으로 북륙임도 일대의 개척은 속개되어 시발점인 대주에서부터 북륙임도의 마지막 종착지인 흑룡강 연안의 애혼보(愛琿堡)에 이르기까지 예전의 요새와 성채, 즉 진과 보들은 이제 인구 규모가 꽤 되는 정착촌으로 거듭나서 군현(郡縣)이 설치된 곳도 많았다.

그러나 애혼보 건너, 즉, 흑룡강을 넘어서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곳은 여전히 많은 요동인들의 관점에서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성경부의 조정 입장에서 이 땅은 계륵(鷄肋)과도 같은 것이었다.

버리자니 아깝고, 쥐고 있자니 성가신 그런 곳이었다.

한때 시비르 한국이 강고하게 러시아를 막고 버티고 서 있고, 모피 무역이 큰 이윤을 남기던 때에는 이 땅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무역을 관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그러나 모피 무역이 쇠락하고 시비르 한국마저 러시아에 의해 무너지면서부터는 이 지역이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요동 정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흑룡강 이북의 극북 지역에 접근했다.

몽골과는 대략 오논(Onon)강과 잉고다(Ingoda)강이 합류하여 흑룡강의 주요 지류인 실카(Shilka)강을 이루는 지점에서부터 한해, 즉 바이칼호의 허리 부분에 이르는 선을 대략적인 국경으로 합의보았지만,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가 없었다.

사실 시비르 한국이 명맥을 잇고 있는 동안에 이곳에는 어떠한 행정 권력이 투사될 필요도 없었다.

몽골, 요동, 시비르 세 국가는 암묵적으로 이 지대를 자유롭게 이용했다.

열나하, 즉 레나강에서 예니세이강에 이르는 횡단 거리 1,800km에 이르는 지대가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비르 한국이 무너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러시아의 동진을 우려한 요동은 몽골의 협력을 받아 북방수비연대를 창설하고, 옛 모피 무역의 거점들을 따라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

특히 예니세이강을 따라 이러한 진지들이 포진되었고, 이 강을 경계 삼아 러시아로 하여금 더 이상 동진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는 달성할 수 있었다.

허나 예니세이강은 요동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선으로, 어느 쪽도 명문화되게 합의된 바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몽골 고원 서북쪽에서 발원하는 예니세이강의 본류와 그 중요 지류인 한해(바이칼호)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강 사이의 넓은 지대였다.

북쪽으로 흘러가던 앙가라강이 어느 지점에서 서쪽으로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600km를 곧장 흘러가 예니세이강으로 합류하기에, 러시아에서는 앙가라강까지 진출할 권리가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꾸준히 되풀이하면서 예니세이강의 상류를 넘나들며 앙가라강까지 무역상을 보내거나 카자키 군대를 흘려 들여보내거나 했던 것이다.

요동 입장에서도 예니세이강을 국경으로 삼자고 주장할 명분이 약했다.

일단은 군사를 보내 예니세이강 유역까지 주둔시키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요동령이라서 가능하다기 보다는 이 지역에 대해 역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몽골과의 합의하에 러시아를 막기 위해 주둔시킨 것이었다.

이 예니세이강과 앙가라강 사이에는 어떠한 공식적인 국경 조약도 체결된 바 없었고, 요동, 러시아, 몽골 어느 쪽도 실효적인 지배를 한 바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지역은 퉁구스계 수렵 민족인 에벤키(Evenki)인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드넓은 지대에 채 2만 명이 안 되는 숫자가 흩어져 살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요동은 최소한의 병력인 연대급 병력만을 차출하여 이 드넓은 지역에서 오로지 러시아의 동진을 막는 목적으로 수십 년에 걸쳐 방어를 해왔던 것이다.

이 황폐한 대지야 어찌 되도 좋을 노릇이지만, 러시아인들이 한해나 아무르강까지 진출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오로지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존재하는 계륵(鷄肋)과도 같은 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얼마 전까지는 이런 상황을 유지할 만은 했었다.

러시아에 한때 표트르 대제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국력을 신장하고 발트해로 나가는 좁은 출구를 확보하여 상트―페테르부르그라는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천도(遷都)까지 단행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폴란드와 스웨덴이라는 양자의 압박에서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폴란드와 스웨덴이었지만, 놀라우리만치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 있어서는 합심하곤 했던 것이다.

발트해로 나가는 출구를 얻었지만, 발트해 자체는 스웨덴 해군에 의해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고, 흑해로 나가는 길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의해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폴란드 기병과 스웨덴 해군은 러시아 상인들을 노략하기 일쑤였고, 사실상 바다로부터 봉쇄되어 밖으로 나갈 출구를 얻지 못한 러시아는 심하게 고립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끊임없이 유럽지향적인 정책을 펼치며 자국의 국력을 신장시키려 애써 왔다.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시비르 한국을 꺼꾸러뜨리고 우랄 산맥 동쪽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예니세이강 유역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요동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 순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스웨덴과 폴란드의 압박 때문에 동쪽 문제를 신경 쓰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러시아의 관심은 오로지 흑해에 항구를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

크림 반도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접전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벌여가면서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스웨덴과 폴란드도 그 전쟁에 끌려 들어가면서 러시아에게는 전에 없던 운신의 자유가 생겼다.

대충 동쪽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Александр I)는 카자키 기병들을 예니세이강 너머 진군시킬 계획을 세우고 이번 봄을 그 실행의 때로 잡고 있었다.

이런 계획들이 수립된 것은 단순히 젊은 차르의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 때로부터의 러시아 정치는 서구화에 대한 열망과 좌절의 역사였다.

러시아의 전통 사회의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문화는 여전히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서구화된 궁정과 귀족, 그리고 지식인 계급은 완전히 그와는 유리된 서구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 때로부터 러시아 차르들은 서구화를 전제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여겨 왔었으나, 서유럽의 문화에 큰 변화가 생겨 계몽주의가 확산되고 심지어는 군주정을 부인하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태까지 촉발되자 러시아는 이런 서구의 사상을 소화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기존의 서구화 정책도 소화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새로운 물결까지 들이닥치자 러시아 현실에는 전혀 실효성이 없는 평등이나 자유의 개념, 농노제에 대한 비판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 인구의 절대다수가 거주하는 농촌은 중세 이래의 농노제가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였고, 끔찍할 정도로 높은 문맹률과 빈곤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지식 계층에서 터져 나오는 개혁적 요구와 러시아 기층의 보수적 전통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후진하고 낙후된 러시아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날로 힘을 얻어 갔지만, 상트 페테르부르그 밖의 농촌 러시아에서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서구의 제도를 본 딴 행정 제도를 정비하려고 했고, 노보실체프, 스트로가노프, 차르토리스키 등을 기용하여 행정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이내 반발에 부딪혔다.

농촌을 근간으로 하는 토지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을 약하게 할 수도 있는 농노제 폐지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개혁에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차르 자신조차도 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권력을 내어놓아야 할 것이 꺼림칙했다.

그러나 개혁을 중단한다고 해서 러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결국 선택한 것은 군사적 행동을 통한 통치력의 과시와 내부 결속의 도모였다.

어느 정도는 성공이 따라 주었다.

그루지야를 병탄하여 흑해로 나가는 출구를 기어코 손에 넣은 데 이어, 중앙아시아에서는 이슬람 토호(土豪)들을 압박해 가며 러시아의 지배력을 신장시켰다.

그 성공의 연장선상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예니세이강 너머로의 동진(東進)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쇠락한 모피 무역이라지만, 여전히 동쪽으로 진출할 매력의 요소는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군사 행동들로 일시적인 인기를 얻어 통치력 재고를 달성한 알렉산드르 1세로서는 매우 매력적인 카드였던 것이다.

“카자키만으로는 부족해. 가급적이면 예니세이를 넘어 앙가라 유역까지, 더 가능하다면 레나강까지는 우리 군사들을 진출시키고 개척지를 확장했으면 하네. 어차피 한국인들이 먼저 들어간 지역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그들도 확실한 지배를 하고 있지 못하지 않은가? 시비리를 횡단해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게 된다면, 몽골 이래로 최초로 동서 양 대륙을 횡단하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걸세.”

물론 알렉산드르 1세 또한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루지야 정벌과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에 대한 군사적 승리로 인한 자신감이 그로 하여금 이 계획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만들었다.

예니세이강 유역에서 요동의 중심지까지는 무려 직선 거리만도 3,000km에 달하는 먼 거리였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많은 산과 강, 그리고 울창한 타이가를 넘어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우랄 산맥 너머 시비르 한국을 정토(征討)한 뒤로 이 지역에 관한 보다 효율적인 접근 방법을 획득했다.

오브강 수역과 예니세이강 수역 사이에는 너른 평야를 중심으로 수많은 강의 지류들이 뻗어 있었고, 이러한 수로를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많은 병력과 물자를 상대적으로 요동에 비해 효율적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카자키 기병뿐만 아니라 징집된 일반 보병들도 시비리(Сиб рь, 시베리아, 북륙)에 투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긴 겨울철에는 무리이겠지만, 늦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몇 개월을 중심으로 군사 작전을 펼친다면 승산이 있었다.

아마 그 짧은 여름 동안 요동에서 이를 막기 위한 증원군이 도달하긴 힘들 터였다.

효과적으로 예니세이강과 앙가라강 유역의 요동 요새들만 분쇄하고 나면, 다시는 요동이 군사적으로 이 지역에 재진출하기 힘들어질 터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은퇴한 백전노장인 수보로프 장군을 불러들였다.

나이 일흔의 수보로프 장군은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 튀르크와의 수많은 접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명장이었다.

그는 러시아군의 일부를 근대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을뿐더러, 전략에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Алекс ндр В. Сув ров)의 이름은 그야말로 러시아 군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을 통해 제국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보로프로서는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군사 행동이 가져올 이익이 마땅치 않았다.

황량한 시비리의 수림 지대를 손에 넣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이익이 있을까.

모피 무역을 다시 손에 쥐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러시아에 대단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키 힘들었다.

“물리적인 실익은 황량한 영토뿐이겠지만, 정신적인 이득은 막대하겠지요. 장군.”

알렉산데르 1세는 손가락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는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 앞으로 다가가서 예니세이강 유역 부분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서는 오른쪽으로 쭉 손가락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손이 다다른 곳은 레나강이었다.

“1차적 목표는 이 일대로 하겠소. 나는 장군의 역량을 믿소이다. 2만에 달하는 군대가 투입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 넓은 지역을 방비하는 적의 군대는 겨우 삼천 남짓이라고 합디다. 물론 이들이 정예병이긴 하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도 카자키가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럽 전체가 나폴레옹을 상대로 대단결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동쪽에 신경을 쓰셔도 괜찮겠습니까?”

“우리 군대는 폴란드가 미적거리는 동안은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없소. 폴란드가 프랑스 편을 들면 우리는 그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고, 폴란드가 반프랑스의 깃발을 들면 우리는 프랑스 편에 설 것이오.”

“저들도 마찬가지로 후방을 우려해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먼저 결정을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은, 예니세이 너머에 집중해 주시오.”

황제의 단호한 말에 수보로프 장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이제 일은 결정되었으니 명령을 따르는 일만 남았다.

전대 차르인 파벨 1세와의 불화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은퇴했어야 했던 수보로프였으니,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는 조금 늙고 기력이 없다는 기분도 들었다.

더군다나 황량하기 짝이 없는 시비리의 삼림 지대를 헤매는 것이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마지막 전쟁이 되려나…….’

황제의 명령에 다시 보병대장에 임명된 수보로프 장군은, 지휘봉을 잡고서 파병 준비를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했다.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총과 포가 이미 황제의 명에 의해 원정군에 하달되어 있었다.

군비의 상태를 확인한 수보로프는 지체 없이 오브강 유역에 있는 카자키 부대에 전갈을 보내 가급적 많은 병력으로 겨우내 예니세이강 유역에 대한 모든 탐사를 끝내 놓으라고 명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이듬해 봄의 작전을 짤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회교도 중대의 순찰조가 카자키에게 당하고 만 것은, 바로 이 수보로프가 내린 탐측 명령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적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수보로프는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각심이 아무리 치솟는다 한들, 본질적인 물량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수보로프의 판단이었다.

물론 무기의 질이나 병사의 훈련 강도를 따져 볼 때 요동군이 우세하기는 했다.

그러나 겨우 1개 연대 병력으로 수보로프가 끌고 갈 러시아 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저들은 중대 단위의 병력으로 나뉘어져 여기저기 흩어져 주둔하고 있었다. 수보로프는 이러한 요새들을 일일이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는 요새들은 완전히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오로지 예니세이강에서 앙가라강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 여기에 다시는 뚫리지 않을 방어 태세를 구축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다음에 여력이 된다면 레나강까지의 영역을 접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노련한 카자키를 포함해 핀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추위에도 강하게 단련된 보병 부대를 포함한 러시아군이었다.

수보로프는 쉽지는 않더라도 저들을 결국에는 이기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네덜란드를 통해 수입한 무기로 무장했으니 적군과의 무기 질의 차이도 생각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수보로프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1801년의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1802년이 밝아 왔다.

이 북국에 봄이 찾아오려면 아직 몇 달은 기다려야 했지만, 수보로프는 차츰차츰 군대를 조심스럽게 우랄 산맥 너머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사열대까지 나와서 이들을 격려했다.

봄이 되자마자 작전의 전개가 가능하도록 상대적으로 길 또한 잘 알려지고 보급도 원활한 데까지 병력을 미리 겨우내 이동시켜 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 손실을 감수하긴 해야 했다.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보병은 움직이는 데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추위에도 취약했다.

동상자가 나오기 일쑤였고 최대한 보급을 충분하게 유지하려 했음에도 영양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병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보로프는 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만약 시비리 삼림 지대의 안쪽으로 진출하게 되면 이들은 요새의 주둔 병력이 되어 남아야 할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단순히 전투용의 소모 병력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동방 지배를 위한 초석이었던 것이다.

봄이 되기 직전 수보로프의 군대는 옴스크(Омск)에 도달했다.

이곳은 시비리 총독의 행정부가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시베리안 카자키, 곧 시비르스키예 카자키(Сибрские казак )들의 주둔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예니세이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카자키들은 모두 이곳, 옴스크를 주둔지로 삼아 활동하고 있었다.

수보로프는 이곳에서 카자키들로부터 겨우내 정찰 활동의 결과물을 보고 받을 수 있었다.

카자키들은 예니세이강 일대의 적의 진지들의 위치와 병력 사항을 대강은 파악하고 있었고, 엉성하지만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담은 지도도 가지고 있었다.

수보로프는 카자키 대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예니세이강을 도하하여 본격적으로 행군을 시작할 시점과 그 경로를 고민했다.

최대한 남쪽으로 행군하여 요동의 군사력이 미치지 않는 몽골의 서북부, 투바(Tuva)인들의 영역을 통과하여 동북쪽으로 강의 유역을 따라 북상하여 앙가라강으로 가는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북상 과정에서 주요하게 상대해야 할 부대로 카자키 대장은 몽골 중대와 회교도 중대 등이 포함된 제2대대를 지목했다.

이 제2대대가 예니세이강 상류 유역 지대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돌파하지 않으면 투바인들의 영역으로 우회한 것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결국 앙가라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들 제2대대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수보로프는 4월 20일을 본격적인 작전 전개 시작의 날로 잡았다.

그때까지 병력은 조금씩 옴스크에서 남동쪽으로 행군할 것이다.

여름은 짧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은 촉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보로프는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1802년

융무(隆武) 12년 중하(仲夏)

요동국 북계(北界) 예니세이[銳耐娑, 예내사]강 유역

러시아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대해서 성경의 요동 정부에서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겨울에 회교도 중대로부터 올라온 보고가 제2대대와 북방수비연대의 본부를 거쳐서 북계(北界)의 행정 중심지인 쌍성부의 안찰사에게 전달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즉각적으로 요동 군부와 의정부(議政府)에 보고되어 국왕 김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를 위한 대책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국왕 김회는 특무사를 이용해 몽골 일대와 북륙 일대에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러시아의 영역 안으로까지 정보원을 침투시키는 것은 힘들었으나, 대충의 정보를 취합한 결과는 러시아군이 봄에 군사 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징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그 규모나 진로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에 정보가 불충분했고, 때문에 요동군 내에서도 대처 방향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고 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관료들과 요동군 수뇌부에서는 이 러시아군의 진격 작전에 대해서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일부 소장 장교와 명령권자인 국왕 김회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방심하고 있다가 예니세이강, 즉 예내사강의 방비선이 뚫릴 경우에 한해(瀚海, 바이칼호)까지 러시아군이 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예니세이강 유역이야 사실 요동에 있어서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이곳을 버린다는 사실은 곧 종국에는 러시아와 직접적인 국경선을 맞대게 되고, 그들의 활동반경을 넓혀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 자명했다.

“예니세이강의 방비는 북방수비연대에게 일임하되, 혹여 모를 일에 대비해 앙가라강을 제2방어선으로 삼고, 이곳에 쌍성보에서 군대를 증원하여 대략 5천에서 1만가량의 방비군을 봄까지 파견하도록 하고, 몽골의 칸에게도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부탁하도록 하라.”

요동왕 김회의 최종적인 결정은 무리해서 예니세이강 유역까지 병사를 보내지는 않되, 언제든지 그 방어선이 뚫릴 경우 어떠한 경우에도 적이 앙가라강을 넘어 한해에 다다르는 일은 막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몽골의 칸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문제는 몽골이 지금 수십 년에 걸쳐서 동―서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원(北元)의 마지막 대칸이었던 에제이(Ejei) 칸이 1657년 적법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 서부 몽골의 오이라트 계열의 부족들이 대거 몽골의 연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었다.

에제이 칸 이후로 칭기즈칸 이래로 내려온 황금씨족, 즉 보르지긴 일족의 핏줄이 끊겼으니 더 이상 몽골 전체를 지배하는 대칸은 없다는 것이 이들 오이라트 네 부족의 의견이었다.

예전 대칸의 직접 지배를 받던 동몽골의 할하 부족들은 초그투 콩 타이지(Tsoghtu Khong Tayiji)를 몽골의 대칸에 추대했으나, 오이라트 부족들은 이에 극렬히 반발했다.

이로 인하여 몽골은 동의 할하와 서의 오이라트로 분열되었고, 다시 서쪽의 오이라트 일족들은 준가르 일족에 통일되어 준가르 한국을 세우게 된다.

이 준가르의 지배에 반발한 오이라트 부족들 중 일부는 카스피해 부근까지 진출해 칼미크 한국을 세웠다.

이 결과 초원 지대에는 세 개의 몽골 정권이 수립되었다.

할하, 준가르, 칼미크가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할하와 준가르의 충돌은 지속되었고, 18세기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서로가 정당한 몽골의 대칸임을 자처하면서 몽골 고원 일대를 놓고 격렬하게 다투었던 것이다.

준가르의 지배자들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받고 정당한 라마교의 수호자임과 전 몽골의 정신적인 군주임을 내세웠고, 반대로 할하군주들은 인접한 요동국에 정치적·경제적으로 의지하며 이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싸웠다.

이들은 비록 지금의 할하 칸들이 황금씨족의 부계 혈통은 아니지만, 모계 혈통을 통해 가장 황금씨족에 근접한 혈통을 지니고 있음을 강변했다.

누군가 칸이 되어야 한다면 바로 할하 몽골인들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동은 공식적으로 할하의 칸들을 지원했다.

심지어 할하 칸들은 요동왕의 신하를 자처했다.

이들은 요동국에 내몽골의 땅들을 내어 주는 것도 불사하면서 막대한 지원을 받아서 준가르와 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많은 할하 청년들이 몽골 용병으로써 요동 군대에 복무했다.

사실상 동몽(東蒙), 즉 할하와 요동은 혈맹 관계였다.

당연히 할하 몽골의 칸인 바트바야르(Batbayar)는 요동군의 병력 지원 요청에 당연하게 응했다.

5천의 기병을 앙가라강 유역으로 지체 없이 파병했던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에게도 똑같이 쓸 수 있는 패가 있었다는 점이다.

수보로프 장군은 볼가강 유역으로 진출한 뒤 러시아에 복속한 칼미크 몽골의 군주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칼미크에게서 2천의 기병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준가르 또한 할하 몽골과 요동 세력을 격퇴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고 러시아 군대에게 자발적으로 지원을 제공했다.

이렇게 러시아―칼미크―준가르의 3각 동맹과 요동―할하 사이의 연맹군이 중부 시베리아의 소유권을 놓고 싸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성광사의 경영에 집중하고 있던 김시유에게도 가급적이면 왕실 일원의 군복무를 의무로 삼는 〈명예법령〉에 의거하여 장교로써 이 전쟁에 참전하라는 통지가 날아왔다.

〈명예법령〉의 대상자가 일반 왕가 종친(宗親)으로까지 확대되어서 김시유 또한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었다.

김시유는 부인인 전혜린과 이제는 다 늙어 은퇴해 있던 최수일에게 잠시 다시 경영을 맡긴 채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말만 종친이지 별로 그것에 대해서 큰 느낌이 없었던 김시유였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직접 입대를 사실상 강제하는 마당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예우를 받아 대위(大尉) 신분으로 보급 장교로 차출되었고, 전선 일선보다는 쌍성부에서 전쟁 물자의 보급을 담당하게 되었다.

군 복무 또한 정확히 반년만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후방에 있었기에 크게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전방에서는 꽤나 치열한 접전이 여러 차례 벌어진 듯싶었다.

봄이 되자마자 5월이 되기도 전에 수보로프의 군대는 투바인들의 영역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통과해 동북쪽으로 북상했다.

할하 용병들로 채워진 몽골 중대가 접전 끝에 완전히 붕괴되고, 회교도 중대를 포함한 2대대의 모든 병력이 개활지에서 진을 치고 대포까지 동원해 막았지만, 큰 손실만 입고서 적들의 예니세이강 중부 유역으로의 진출을 막지 못했다고 했다.

러시아인들은 예니세이강과 앙가라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진출해서 크라스노야르스크(Краснорск)라 이름 붙인 주둔지를 건설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고 했다.

6월이 되자 할하의 바트바야르 칸이 보낸 기병대가 앙가라강 유역에 도착했고, 쌍성부에 설치되어 있던 지휘부도 보다 효율적인 진두지휘를 위하여 한해 유역의 외성진(巍城鎭)으로 옮겨갔다.

김시유도 지휘부를 따라 외성진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앙가라강 유역에 진을 치고 있던 1만 군대가 예니세이강을 향해 전개되기 시작했고, 사실상 붕괴된 북방수비연대의 진지들을 러시아와 함께 서로 빼앗고 빼앗으며 8월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접전을 벌였다.

양측 모두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양쪽 모두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 이 지역은 러시아에게도, 요동에게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오지였다.

오히려 혈전을 벌인 것은 할하 몽골과 준가르 몽골의 기병들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추격하고 척살하는 데 온 신경을 썼다.

전체적인 전략에서 움직이기 보다는 이 전쟁을 자신들의 주도권 다툼을 매듭지을 좋은 기회라고 보는 듯했다.

이렇게 예니세이강과 앙가라강 사이의 울창한 수림 지대에서 소규모의 전투들이 석 달간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이 전투들에서 전설적인 성과를 남긴 것은 바로 회교도 중대였다.

이들은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펼쳤다.

전쟁 초반기에 100여 명의 중대원 중에 이미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후 남은 인원들이 결사적으로 적의 후방을 공격하거나 하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던 것이다.

중대장 김우천 대위는 신출귀몰하며, 종래에는 적의 보급 거점이 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들어가 보급 창고를 불태우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도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 긴 겨울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계절이 찾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8월 말이면 이미 가을은 시작되고, 10월이 될 무렵이면 겨울이 시작된다.

한 달 반 동안 양측은 대충 현재 점거하고 있는 요새들을 중심으로 진지를 확고히 하는 데 집중했다.

양측 모두 전사 및 부상병들을 제외하고, 후방으로 철수시킨 병력들까지 더해서 당초 투입되었던 병력의 1/3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겨울철이 되면 이 일대에서 그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보급도 끊기고, 식량도 없는 곳에서 많은 인원을 먹이고 부상병을 돌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수보로프 장군이나, 요동군 지휘부나 그 정도의 판단 능력은 있었다.

대부분의 몽골 용병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네 고향 초원으로 돌아가고, 긴 겨울 동안의 휴지기가 찾아왔다.

김시유는 그 사이 군복무를 끝내고 전역 신청서가 수리되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겪은 전투라고는, 외성진에서 전방 요새까지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한 보급을 할 수 있도록 수송 작전을 지휘하다가 러시아군의 잔당들과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김시유는 이들을 사로잡아서 외성진으로 붙잡아 갔다.

김시유는 전쟁에 짧게나마 몸을 담으면서 이 전쟁의 끝에는 결국 북륙을 둘러싼 국경 확정과, 지역 질서의 수립이 뒤따라올 것을 직감했다.

러시아는 아마도 앙가라강 동쪽으로는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할 것이었고, 할하와 준가르 몽골은 이제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요동은 확실히 지배 가능한 영역으로 물러날 것이지만, 더 이상 예니세이강 유역까지 방어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안정된 국경을 보장받게 될 것이었다.

중심부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말이다.

요동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 적대 가능성이 있는 국가가 가까운 지역까지 진출하는 것이었으므로, 충분히 어느 정도의 영역을 희생하는 대신에 러시아와의 국경 협상에 임하리라는 것이 김시유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 지역의 공식적인 무역로가 재개되고 도시가 재건되고, 도로가 닦이는 것이 수순이었다.

러시아와 평화 협상이 완결된다면 요동에서 즉각적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도 꿈은 아닐 터였다.

물론 김시유는 이것이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오지를 관통하여 철도를 놓는 데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부담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이것이 큰 이익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군복을 벗고 여순으로 김시유가 돌아오자, 가족들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그를 맞았다.

혹여나 전쟁 중에 어디 몸이라도 상할까 싶어 걱정이 산더미 같았던 부인과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종친에 대한 예우를 받아 후방의 보급 부대에서 근무했던 그로써는 딱히 전쟁에 대해 크게 실감한 바는 없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경영 일선으로 다시 복귀한 김시유는 조심스럽게 정전 협상이 어찌 진행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겨우내 동안에는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에서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봄이 되자 스웨덴의 중재로 공식적인 협상이 진행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상황이 안정되면 김시유는 벌목(伐木) 사업권을 취득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방의 삼림에서 안정된 목재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북륙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부에서도 진출을 허락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김시유의 예측대로 봄이 되자 정전 협상이 진행되었고,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크라스노야르스크 조약〉에 의해 요동과 러시아의 경계는 예니세이강이 아닌 앙가라강으로 하고, 대신 앙가라강과 예니세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북극해까지는 추후 협상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이 국경은 동경 95도 일대로 잠정 결정되었고, 훗날 수십 년에 걸친 몇 차례의 추가 교섭 끝에 국경이 확정되게 된다.

할하 몽골과 준가르 몽골은 요동과 러시아 양측의 압박하에서 상호 간을 인정하기로 하는 협약을 체결했고, 할하 몽골은 몽골 고원 일대를 영역으로, 준가르 몽골은 중가리아 분지 일대를 영역으로 확실한 구분을 맺었다.

러시아―요동―중가르―할하 몽골 사이의 국경 지대가 만나는 곳에 거주하는 투바 인들을 중립 지대로 독립시키고 탄누 투바(Tannu Tuva)라는 국가를 건국시켰다.

이렇게 예니세이강을 둘러싼 요·러 전쟁은 상호 간에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결과를 내고 끝났다.

이 작전이 치러지던 1년간 알렉산드르 1세는 국론을 통제할 수 있었고, 프랑스 편에 서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론을 내리고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불패의 명장 수보로프 장군은 큰 승전도 거두지 못했지만, 대신 큰 패배도 겪지 않아 자신의 명성을 지킬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이겼기 때문이었다.

중가르와 할하 사이의 분쟁은 일시적으로 일소되었고, 투바인들은 독립국가의 건설과 함께 잠시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요동은 실익 없는 땅에서 조금 물러난 대신에 확실한 국경의 확정과 북방 지역의 안정된 정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인 순나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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