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장 창람효운(蒼藍曉雲)
「변동적인 산업 경제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합법적인 국가 통치 체제는 현대 국민국가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국민국가는 특히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유럽 대륙에서 발흥하기 시작하였으며, 극동의 봉건제 국가들도 이내 민족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유지하는 국민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꼭 민족 국가와 같은 형태로 등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에 등장한 많은 국민국가들은 민족주의를 함께 내포하고 있기도 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효율적인 동원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국민국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국가화되지 못한 구제국들은 민족국가로 분할되는 것을 면치 못할 수 없었으나, 반대로 여러 민족 구성원을 지녔으면서도 효율적인 통치 체제의 실현으로 국민국가로 거듭난 나라들도 있었다.」
―올로브 벤셀리우스(Olov Benzelius),
《근대세계의 형성》, (웁살라, 1936)
「학교 및 대학의 진보는 민족주의의 척도라 할 수 있는데, 학교와 특히 대학들이 민족주의의 가장 의식적인 옹호자가 되기 때문이다.
……적은 수의 엘리트 집단은 외국어로 활동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교육받은 관료 집단의 숫자가 충분히 늘어나면, 민족 언어의 존재가 부각된다.
따라서 민족어로 된 교과서나 신문이 처음 쓰여지는 순간, 혹은 그 언어가 어떠한 공식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첫 순간이, 민족의 진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단계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The progress of schools and universities measures that of nationalism, just as schools and especially universities became its most conscious champions.
……Small elites can operate in foreign languages; once the cadre of the educated becomes large enough, the national language imposes itself.
Hence the moment when textbooks or newspapers in the national language are first written, or when that language is first used for some official purpose, measures a crucial step in national evolution.」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혁명의 시대》, (1962), p.135.
1806년
융무(隆武) 16년 중추(仲秋)
요동국 남양로 요순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지루한 프랑스 혁명 전쟁의 화전(和戰)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은 1806년의 여름이었다.
코르시카섬 출신으로, 옥시타니아 공화국의 총재(總裁) 직위에까지 오른 뒤, 프랑스 공화국과의 통합 국면에서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일 프랑스 공화국의 제1총재의 자리에 올라 과두정치 끝에 혁명 전쟁에서 이룬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 제국의 황제(皇帝)의 직위에 국민투표로 오른 것이 네 해 전인 1802년의 일이었다.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유럽 전체를 휩쓸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는 스웨덴―오스트리아와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독일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탈리아와 아라곤에 개입하여 북 이탈리아와 아라곤 왕국을 프랑스 제국령으로 병탄했다.
카스티야 왕국은 나폴레옹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위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의 소공국들은 라인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프랑스의 병참기지화되는 수순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폴레옹의 성공가도는 스웨덴과 손을 잡은 프랑스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가 프랑스에 적대적 노선을 밟기 시작하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의 행동에 분노했고,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국토로 진격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러시아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도와서 출정하지 않았고, 점차 증진하는 나폴레옹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스웨덴마저도 미지근하게 지원해 옴에 따라서 나폴레옹의 대군은 폴란드에서 지루한 전황에 처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평원 지대에서 겨울을 맞은 나폴레옹의 대군은 역병과 병참의 부족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바르샤바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폴란드의 영토에서 헤매다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의 경과를 지켜보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폴란드와 화약을 맺은 다음에 도리어 폴란드 용기병대가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를 추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나폴레옹의 폴란드 전역에서의 패전은 유럽의 정세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노르웨이―덴마크 문제를 핑계 삼아서 나폴레옹의 편에서 이탈했다.
나폴레옹이 약속을 위반하고 이 지역에 괴뢰정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스웨덴은 말없이 군대를 코펜하겐과 크리스티아나(오슬로)에 진군시켜서 그곳에 공식적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왕위를 취했다.
나폴레옹은 스웨덴에 대해서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잉글랜드가 스웨덴과 구원(舊怨) 관계를 청산하고 반나폴레옹의 기치를 들고 협력하기 시작했다.
중립적이었던 동로마제국과 헝가리왕국마저 위협을 느끼고 반나폴레옹 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언함에 따라 나폴레옹에 대적하는 「신성동맹(神聖同盟)」이 결성되었고, 전황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이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아직 갓난아기인 나폴레옹 2세에게 물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은 퇴임하여 프랑스 밖의 엘베 섬으로 유배되는 데 동의했다.
아라곤 왕국은 다시 옥시타니아의 일부를 가져간 채로 왕권이 복원되었고, 카스티야와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는 다시 여러 공국들로 잘게 나뉘게 되었다.
이로써 임시적인 종전 처리가 끝나고 퐁텐블로 궁전에서 1806년 5월, 종전 조약이 맺어지게 된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것이 미치는 파급 효과는 단순히 유럽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극동 국가들에게 이것은 인도양을 둘러싼 패권 경쟁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도 문제에서 한 발 떼고 있던 잉글랜드가 다시 인도에 개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한국은 이에 대비해 지체 없이 말레이에 이어 실론에도 군대를 파병하여 식민지화했다.
실론에서 영국군을 완전히 축출한 다음 일방적으로 한국령을 선포한 한국 정부에 대한 비난이 런던으로부터 쏟아졌지만, 서울에서는 이것이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했다.
당연히 이러한 한국의 행동은 다른 열강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첨예한 세력 경합의 상황에서 이러한 불안감이 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잉글랜드의 인도 개입에 대한 우려로 한국은 실론의 식민화를 선택했고, 이것은 다시 잉글랜드의 공격적인 정책의 빌미를 주게 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제는 완연히 몰락한 네덜란드는 인도양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스웨덴은 한국과 함께 영국을 인도양에서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도 분할은 이제 시간문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허나 유럽 대륙의 상황이 이들이 본격적으로 인도양에 여력을 투자하게 해줄 정도로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불안의 씨앗인 나폴레옹을 엘베 섬으로 유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나폴레옹의 어린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옹립한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은 파리의 궁중을 중심으로 아라곤에 재병탄된 옥시타니아를 돌려받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정서가 깊게 개입되어 있었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주요한 산업지대인 불어권 저지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톨릭교도에 프랑스어를 상용하는 지역이 결국 네덜란드의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와 프랑스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여기에서 얻은 이익에 비하면 농업지대가 태반인 남 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아라곤이 다시 가서 잃은 이익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아라곤에게 기존 옥시타니아 공화국의 전역을 넘긴 것도 아니었다.
마르세유 항구와 프로방스 일대, 코르시카는 프랑스에 잔류했고, 이로써 프랑스는 지중해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민족주의 정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영토를 다시 되찾을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을 터였다.
짧은 기간 나폴레옹의 승승장구로 인해 누렸던 제국의 영광을 프랑스인들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의 정세도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쟁을 거치며 뚜렷하게 쇠퇴를 드러낸 것은 폴란드―리투아니아였다.
폴란드가 채택하고 있는 귀족연방주의는 응집력 있는 다른 열강들에 비해 매우 느슨하고 반응이 느린 체제였다.
비록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지만, 이제 폴란드는 후방의 러시아를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의 폴란드 영향력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폴란드에 복속해 있던 왈라키아와 베사라비아는 독립 공국(公國)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러시아는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 재고를 노렸고, 폴란드의 힘이 빠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헝가리 왕국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세르비아와의 갈등은 점차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이 헝가리를 견제하도록 세르비아를 지속적으로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동로마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긴 했지만, 그들이 주로 상대한 적은 나폴레옹의 동맹군들이 아니었다.
동로마제국은 오스만 튀르크가 나폴레옹 군대에 식량을 매각했다는 핑계를 들어 마음대로 오스만 튀르크를 적으로 규정하고 군대를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시켰다.
옛 제국의 수도를 다시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내내 그리스는 오로지 오스만 튀르크를 상대로만 전쟁을 벌였고, 이들을 유럽에서 영영 쫓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오스만 튀르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버리고 앙카라로 궁정을 이전했고, 동로마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리스 민족주의가 광포하게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고, 튀르크인들은 학살되거나 추방되거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학살은 흉흉한 전설이 되어 남았지만, 앞으로 몰아닥칠 민족주의의 광풍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벌어질 더욱 잔혹한 일들의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최선을 다해서 유럽 대륙의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그러나 프랑스도 잃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도 세력권에서 벗어나 버린 상황에서 잉글랜드가 가질 수 있는 힘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합왕국의 영광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잉글랜드는 여전히 유럽 대륙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규율자의 역할을 하기에는 힘이 달렸다.
잉글랜드는 때문에 유럽 대륙의 강자로 부상한 스웨덴과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기묘한 연합의 방침은 간단했다. 유럽에서는 협력을, 유럽 밖에서는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반부에 있어서 이러한 열강의 경쟁 구도에서 가장 주된 핵심은 여전히 인도 아대륙이었다.
한국은 벵골 지역에서 영향권을 점차 강화시키고 있었고, 스웨덴은 고아(Goa)를 비롯한 포르투갈령 인도 도시들을 공격해서 강제로 할양받고는 서해안을 중심으로 영향력의 재고를 노리고 있었다.
영국은 트라방코르와 서북부의 구자라트 지역에서 무굴제국에 대해 적대적인 라자(Raja)들을 포섭해서 영국의 세력권 안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프랑스 등이 몇 개의 항구를 점유하고 있었다.
쇠퇴해 가는 무굴제국은 인도 전체에 힘을 투사하지 못하고 있었고, 대포로 무장한 군함을 이끌고 들어온 열강들은 인도를 조각조각 나눌 채비를 거의 마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섣불리 더 이상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못했는데, 지금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인도를 둘러싼 충돌이 극심해질 것을 내심 우려해서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나폴레옹 전쟁이 조금만 일찍 종전되었더라면, 한국의 실론 병합은 영국군이 인도에 대규모로 상륙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을 터였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합류한 국가들도 있었다.
순나라에 몇 개의 조차지를 가진 것 외에는 외부 영토를 지닌 적 없던 요동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팽창정책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국력 신장을 열망하는 당대 국왕 김회가 적극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자 한 데서부터 기인했다.
요동은 러시아와 협정을 맺은 뒤로 국경이 거의 확정되고 나고, 순나라에 대한 개입정책도 지속적인 결실을 맺자, 남는 힘을 외부로 투사하려고 했다.
내지와는 완전히 다른 「요동민족주의」가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
특히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요동민족의 기원을 고조선(古朝鮮)에서 찾으면서, 고구려―발해―요―금―요동으로 이어지는 반목반농의 대륙적 전통이야말로 요동의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지는 진(辰), 진한·변한·마한의 3한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예속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런 민족주의 정서는 역사를 정치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고 왜곡적인 역사관을 많은 요동인 들의 머릿속에 심어주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러한 가운데서 점차 요동 내부의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은 억압되어 가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제 실시되고 있는 의무교육에 의해 국가가 주입하는 국사(國史)를 통해 역사관이 교육되었고, 특히 요동 방언에 기초한 국어(國語)만이 유일한 상용 언어로서 인정되었다.
아직까지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던 여진어·몽골어 및 여러 퉁구스 방언들은 정책적으로 탄압되었고, 여진계와 몽골계, 퉁구스계 이름도 강제적으로 개명하도록 유도되었다.
국왕 김회를 비롯한 요동 정부는 이러한 정책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 이용했다.
이러한 흐름이 결국 팽창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1806년에 함대를 파견하여 브루네이(Brunei)의 술탄을 강제로 굴복시키고 보르네오섬 전체를 요동령으로 선포하게 된다.
한국과는 별도로 자신들도 이제 남양(南洋)에 식민지를 얻게 되었다는 소식에 요동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었다.
“저는 결국 이런 시대가 도래할 줄 알았습니다. 정경대군께서도, 유 부인께서도 결국 폭력의 씨앗이 여기저기 뿌려져 좀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풍조가 만연하리라 말씀하셨지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요동도 다른 제국들을 욕할 바가 못 됩니다. 다른 어느 나라 사람만큼이나 요동인들도 남을 찍어 내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요. 국왕 전하께서는 낙후한 보르네오섬에 선정을 펼쳐서 요동의 선진된 문명을 전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글쎄요, 제가 볼 때는 요동의 보르네오 통치는 한국의 말레이 통치보다 더 잔혹하면 잔혹했지 덜하진 않을 것입니다. 벌써 탐욕적인 요동 상인들이 보르네오에 지점을 개설하고 있어요. 부디 부탁하건데 그들과 같이 행동하진 마십시오.”
보르네오에 식민지를 설치한다는 소식이 요동에 전해진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지팡이를 짚고 여순 중앙로의 성광사 본사 건물로 찾아온 최수일이 김시유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거대한 자본 집단으로 성장한 성광사는, 예전의 소탈한 목적을 가지고 있던 남성물산의 색깔이 이미 많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최수일로서는, 김시유마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들어가서 마음껏 착취하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우리가 들어가서 좀 더 관대하고 공정하게 거래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원래 순나라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까?”
김시유의 되물음에 최수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당초 남성물산을 세우고 순나라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그때의 순나라의 상황이 완전히 아비규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늘 굶어야 했고, 그 이득은 모두 요동의 상인들과 순나라의 부패한 관리들이 가져갔지요. 기근과 죽음, 수탈과 부패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러니 만큼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하자고 시작했던 일이 남성물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순나라에서의 어지간한 사업은 정리한 성광사가,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보르네오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보르네오에 대한 수탈은 진행형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광사가 보르네오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아직 이익이 기대되지도 않는 일에 일찌감치 발을 들여 놓아서 나중의 수탈에 참가에 이윤을 보겠다는 부정직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지금 성광사는 철도사업에 투자하는 것만으로 하더라도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으니 고통에 고통을 더 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은퇴한 뒤로 여순 근교에서 목장을 경영하면서 불교로 귀의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있던 최수일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정경대군의 공양을 올리면서 그가 생전에 해주었던 말을 늘 곱씹고 있었다.
불가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였다.
욕심을 부려 남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귀의 도(道)에 다름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일이 정경대군과 유청령이 남긴 유산인 성광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최수일은 바라지는 않았다.
점차 자본가적인 생각이 굳어져 가는 듯한 김시유를 보면서 최수일은 잠시 그로 하여금 남성물산을 물려받게 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대안은 없었다.
김시유가 물려받지 않았다면, 성경과 요양의 탐욕스러운 자본의 손에 남성물산이 기어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경영자의 입장에서 걱정하고 있는 것은 단순합니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우리 회사가 보르네오에 진출하지 않는다면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서 성경이나 요양의 회사들에 투자할 겁니다. 성경상공회의소에서는 이미 보르네오에 담합 진출을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어요.”
“그래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김시유는 마지못해 최수일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만약 지금 투자하고 있는 경평선 철도공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면 보르네오에 관해서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손을 대고 있는 일들이 잘되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언제 또 때가 되면 찾아뵙도록 하지요.”
최수일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김시유는 늙은 노인을 깎듯이 나가는 길로 배웅했다.
요즘 부쩍 잔소리와 걱정이 늘긴 했지만, 양친이 이제 모두 세상에 없는 김시유에게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최수일뿐이었다.
그의 늙어 굽은 등을 보며 김시유는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르네오에 대한 진출 계획은 일단 무기한 보류를 해야겠다고 김시유는 마음을 먹었다.
1806년
융무(隆武) 16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강원도 원산부
겨울 바다의 차가운 파도가 해안에 밀려와 하얀 포말을 뿌리며 부셔져 내리고 있었다.
금강산과 가깝고 조용한 환경을 지니고 있는 원산부는 휴양지로 이름이 높은 고장이었다.
왕공 귀족이나 신흥 자본가들의 별장이 원산 바닷가의 이름 높은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주변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겨울이라 이곳에 내려와 머무는 사람이 드물긴 했지만, 요양이나 휴식차 별장에 내려와 있는 사람들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김시유의 장남인 김현(金賢)과 차남 김효(金曉)도 겨울철 원산에 와 있는 몇 안 되는 외지인 중 하나였다.
장남 김현은 올해 나이 스물하나로, 부친이 나온 제도대학에 진학하여 한참 공부를 하고 있었고, 차남 김효는 열일곱으로, 대학에 가기 전에 정약용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둘은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라고 하기에는 많은 것이 달랐다.
형인 김현은 매우 명석하고 똑똑한데다가 계산이 재발랐다.
당연하게 언젠가는 성광사를 제가 물려받겠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좋은 머리를 공부하는 데 쓰기 보다는 돈을 버는데 쓰고자 하는 욕심이 확고한 인물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을 매우 혐오하는 편이었다.
요동 왕가의 종친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우월감도 은근히 묻어 나오는 인물이었다.
그에 반해 김효는 하나부터 열까지 형이랑 비교되는 인물이었다.
머리는 좋은 편이었지만, 그다지 공부에 열심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제가 관심 가는 분야에만 집중하는 편이었다.
계산이 빠르다기 보다는 남에게 잘 퍼주는 편이었고, 특별한 권위의식도 없었다.
이런 형제 중에 장남인 김현은 아버지인 김시유에게 이미 후계자로 낙점이 된 상황이었다.
두 아들뿐만 아니라 딸인 김민혜까지 공히 공평한 애정을 나누어주는 김시유였지만, 앞으로 성광사를 물려받아 더욱 키워 나갈 재목으론 장남인 김현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반면에 형제의 어머니인 전혜린은, 눈에 띄게 둘째인 김효를 예뻐했다.
그녀는 때때로 장남인 김현의 번득이는 눈이나 아이 같지 않은 냉정함이 무섭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어미 품을 벗어난 장남이었다.
반면에 김효는 나이가 들어서도 어미를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닮아서 감수성이 깊고 예술도 좋아했다.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숫자를 계산하는 걸 더 좋아하는 김현과는 대조적인 아이였다.
전혜린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김효에게 집중되었다.
그 가족 구성원 중에서 전혜린과 김효의 관계가 가장 끈끈했다.
늘 겨울이 되면 바쁜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족이 모두 원산으로 종종 놀러오곤 했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두 형제뿐이었다.
어머니 전혜린은 형제의 외할아버지인 전보현이 노환으로 병상에 누워 있어 그 수발을 드느라 황성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형제의 누이인 김민혜는 수신학원에 들어가 기숙 생활을 하고 있기에 이제 한동안은 원산으로 올 수가 없었다.
형제 단둘이서 원산의 별장으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형, 원산 부내로 나가서 놀다 오지 않을래?”
형제 사이는 별로 살갑다기 보다는 거리감이 있었고, 이것이 못내 불편했던 김효가 먼저 형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김현은 별로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지저분한 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으니 나는 여기 있으련다. 너라도 나가려면 나갔다 오거라.”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형에게 그만 기가 죽은 김효는 그 뒤로 별장 안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형에게 좀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어릴 적을 돌아보면 꽤나 서로 우애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형이 황성으로 먼저 나가 공부를 하기 시작한 뒤로는 뭔가 둘 사이에 휑한 거리감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미 성년의 나이인 김현은 아직 동생이 어리고, 철없고, 사랑만 받아서 세상을 똑바로 볼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동생이 무슨 말만 하더라도 철없는 소리로 치부하기 일쑤였고, 이 때문에 동생 김효는 갈수록 형과의 거리감만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효는 괜히 원산에 내려왔다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스승인 정약용 선생 댁에 남아 있었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뻔했다.
정약용은 김효의 아버지인 김시유의 학문적인 후배였고, 이런 인연으로 김효가 제도대학의 시험을 칠 때까지 지도를 해주고 있었다.
김시유가 연암 박지원에게서 대학 입학 전에 사사를 받았던 것처럼, 상학 정도 수준의 학교를 졸업하거나 어릴 적부터 가정교육을 받은 뒤에, 학계에 닿아 있는 훌륭한 스승에게서 개인적으로 1~2년 가르침을 받는 것은 흔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적당히 교육시키는 것에 만족했지만, 정약용의 경우는 갖은 신경을 써가면서 김효를 가르쳐 주었다.
그 공부가 살짝 지겨워져서 원산에 다녀오겠노라 핑계를 대고 빠져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차라리 정약용과 앉아서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이곳에 와서 벌써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는데도, 형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김효는 애써 형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원산까지 내려와서 불쾌한 기분만 잔뜩 느끼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복되어 있던 형제 간의 갈등은 어느 날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말았다. 그날 그 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김효는 형의 숨어 있는 얼굴을 애써 외면하고 긍정적으로 보려 노력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꿎게도 하필 두 형제만 원산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원산은 휴양지로도 이름이 높았지만, 그뿐 아니라 동해 어로(漁撈)의 전진기지이자, 함경도와 강원도를 잇는 물류 거점도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 들어 주철(鑄鐵) 공장 등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의 유입도 늘어나고 있었다.
한적한 해안가 고을이었던 원산은 이제 물경 10만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각종 노동으로 밥을 벌어 먹는 노동 계층에 속해 있었다.
내지의 어디를 가더라도 노동 계층의 삶이 열악하고 교육 수준이 낮으며, 그 대우가 형편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원산의 노동자들은 특히 고난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대부분이 강원도 산골 출신의 문맹자인 원산의 노동자들은, 과포화 상태에 이른 산간의 인구압 때문에 쫓겨나듯이 도시로 밀려나온 이들이었다.
노동 인력은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비해, 일자리는 부족한 편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이들은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 더욱 적은 돈을 받았다.
그나마도 급료가 화폐로 지급되면 나은 편이었다.
대부분은 한 달의 품삯을 곡식으로 받기 일쑤였고, 이나마도 부정확한 계량에 의존해서 원래 받아야 할 양보다 깎이기 일쑤였다.
그래도 원산의 노동자들은 최근까지 이러한 상황을 감내하고 있었다.
허나 설을 앞두고 근방의 유일한 조선소에서 두 달 연체된 급료를 일시에 지불하면서, 그나마도 설이라 더욱 챙겨주는 것이라 생색을 내고 지급했다.
말처럼 받기나 했으면 괜찮았을 터인데, 실상은 도정된 백미(白米)는 거의 1/3도 들어 있지 않고 쌀과 눅은 보리만 잔뜩 섞인 것이 급료라고 나왔다.
신년이라 더욱 많이 담아주었다고 하는데도 무게를 달아보면 지난 두 달간 연체된 급료에 상당하는 양에도 못 미쳤다.
설조차 제대로 나기 곤란해진 노동자들은 분노해서 사측과 협상하기 위해 파업을 시도했지만, 조선소 측은 완전히 복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주도자로 지목된 이들이 해고되었고, 배를 건조하지 못하여 나오는 손실을 보상받겠다고 노동자들을 을러댔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알음알음 서로 간에 유대 관계가 있던 원산 지역의 숙련공들과 임금 노동자들은 연대 파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날품팔이인 부두 하역에 종사하는 이들까지 여기에 가세하면서 1807년의 새해가 밝아올 무렵에 원산의 도시 기능은 완전히 마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원산 부윤이 직접 나서서 원산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진위대 병력의 동원을 요청했다.
정부에도 이 일단의 소요 사태가 직접적으로 보고되어 올라갔으며, 이내 황성부에서는 사태를 관망하기 보다 직접적으로 탄압하여 그 씨앗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원산의 노동자들의 귀에 들어가자 이들은 더욱 분노했다.
마치 불 위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파업은 이내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을 불태우는 폭동으로 번져 나갔다.
원산부 내의 병기고가 이들의 손에 털렸고, 제각기 단순한 정도로라도 무장을 한 노동자들은 원산 부윤 모을환(毛乙煥)을 두들겨 패서 원산부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되어서도 이들이 모두 이성을 잃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명사십리에 늘어선 자본가와 귀족의 별장들은 습격당할 뻔도 했지만, 이내 임시적으로 구성된 노동자들의 대표부에서 보낸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들과 협상을 하고자 보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일찌감치 느끼고 원산 밖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을 제외하면, 별장촌에 남아 있는 이들은 김현과 김효 형제를 비롯해 열댓 명 내외에 불과했다.
겨울철이라 사람이 적은 편이었는데, 그나마도 며칠 사이에 빠져나가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
평소 주변과의 교류도 없고 김현의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별장 밖으로 출입도 하지 않았던 두 형제는 원산을 빠져나갈 때를 놓쳤고, 분노한 노동자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별장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녀자였고, 다 늙어서 요양을 와 있던 거동이 불편한 어떤 귀족을 제외하고는 젊은 남자라고는 김현과 김효 형제가 전부였다.
노동자 대표는 김현이 성광사 사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에게 정부에서 관대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고 요구했다.
원산의 노동자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요구는 원산을 포위하고 있는 진위대 병력에 의해 상부로 전달되지 않고 모두 반려되고 있었기에, 이렇게 편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정부를 협상장에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람답게 먹고사는 것뿐이오. 많은 걸 바라지도 않거니와, 조정에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혹사당하는 우리들에게 마땅한 구제를 약속해 준다면 언제고 무기를 버리고 물러날 생각이오. 그러나 원산은 지금 완전히 격리된 상태이고, 우리가 내는 목소리는 이 도시 바깥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이런 방법까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야겠소. 이 별장촌의 사람들은 귀한 몸들이니 설마하니 조금이라도 다치는 것을 진위대에서도 원하지 않을 것이오. 이러한 우리의 의지를 당신이 원산 진위대장에게 직접 전달하고, 가급적이면 정부에도 당신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하여 우리의 뜻을 알리도록 하시오. 저쪽에서 협상 자세로 전환한다면, 여기 사람들은 모두 안전하게 풀어드리도록 하리다.”
눈빛이 형형한 노동자들의 지도자인 허월수(許月水)의 말에 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다 이해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알겠소이다. 내 그리하리다. 그럼 나를 어서 진위대 병력에게 인도하시오.”
김현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뒤, 나머지 인질들에게 별 시선을 주지도 않고 외투를 차려입고 허월수를 따라나섰다.
문 밖을 나서기 전에 동생에게 무심한 시선을 잠깐 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김효는 형이 이렇게 순순하게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했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자들의 상태만 보아도 김효는 이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살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다 큰 성인 남성의 키가 이제 십대 후반인 자기 키보다 작았다.
앙상한 어깨에는 반복된 노동으로 주릅 잡힌 팔뚝이 매달려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희망 없는 절망감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김효는 진심으로 형이 그들의 의견을 대변해 주길 원했다.
꼭 인질이 된 상황에서 풀려나고 싶은 것보다도, 저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를 받게 해주는 사람이 형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간 차가운 형의 성격에 쌓였던 응어리도 까짓 쉽게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렇게 인질로 잡힌 상황에 공포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효는 이 노동자들이 자신을 해치는 것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허월수를 따라 김현이 별장촌을 나선 뒤로 김효는 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원산부내를 향해 병력을 투입할 것 같던 진위대가 잠잠한 것을 보고 형이 제대로 이들의 의견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1월 5일 새벽, 진위대 병력은 원산부내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고, 무장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거나 반항하면 총을 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김효와 인질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언제고 분노한 노동자들이 협상 실패를 핑계 삼아 자신들을 죽여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인질을 감시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아무 말 없이 이들을 풀어주고서 각기 무장한 채 시가지로 내려갔다.
다른 인질들은 얼떨결에 찾은 자유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지만, 김효는 순간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방문을 열어주던 젊은 노동자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없이 문을 열어주고서는 다 낡은 가래를 무기 삼아 들고서는 시가지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몸은 자유로워졌지만 혼란에 빠진 원산부 어디로도 함부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기에, 김효는 그날 하루를 두려움과 기묘한 죄책감에 휩싸인 채로 보냈다.
그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야 원산 시내에 여기저기서 올라오던 불길이 잦아들고 총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진위대의 참위(參尉) 한 명이 찾아와 안전하게 원산 밖으로 별장촌의 유객(遊客)들을 호송했다.
그렇게 진위대 주둔지로 가고 나서야, 김효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형인 김현은 애초부터 노동자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진위대 주둔지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려는 허월수를 붙잡아 두고 자신이 진위대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이에 혹한 허월수는 잠시 판단력이 흐린 상태로 진위대 둔지에 몸을 들이고 말았고, 이내 허월수와 그 동료들은 붙잡힌 몸이 되고 말았다.
김현은 여기서 발을 빼지 않고, 오히려 진위대장에게 몇 가지를 조언해서 노동자들의 봉기를 완전히 와해시키고자 했다.
노동자들의 봉기를 지도했던 허월수와 그 동료들을 즉각적으로 비밀리에 황성부로 압송한 뒤, 원산부내의 노동자들에게는 허월수와 협상하기 위한 관료가 지금 도착하여 진위대 병영에서 처우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알렸다.
이 계획은 김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감히 요동의 종친이자 성광사를 물려받게 될 자신이 원산의 하찮은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위협당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동생을 비롯한 인질들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사회의 분란을 조장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분노와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데서 온 자존심에 대한 상처가 그를 적극적으로 원산봉기를 탄압하는 일에 나서게 만들었다.
“……몸 성히 나왔으니 된 일 아니냐.”
며칠이 지나서야 김효를 찾아온 김현은, 분노 어린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에게 시큰둥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는 동생이 인질로 있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서 뿔이 났다고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형을 향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그런 것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김효는 이제 그것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종친, 장남, 상속자, 제도대학 출신의 엘리트. 이 모든 것들이 형 김현의 의식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끝 간 데 모르는 거만함과 냉정함, 이성을 빙자한 냉혹함, 그리고 피붙이에게까지도 베풀 줄 모르는 인정 없음이 이 며칠 사이에 고스란히 김효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허월수를 비롯한 이들은 그래도 김현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었다.
인질로 잡혀서 요구받은 것이 고작 그들의 목소리를 전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굳이 그들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애써 그들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선 것은 김효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누구도 형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라고 요구한 적이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너는 지난 며칠간 느낀 바가 전혀 없나? 공장을 불태우고, 기계를 때려 부수고, 한때 월급을 주는 주인을 겁박하고, 애꿎은 사람을 협박해대고,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저들에게 무슨 자비가 필요하단 말이냐? 언제고 저런 이들이 우리 회사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요동에서도 선동받은 일꾼들이 일어나서 왕조를 뒤엎지 않으라는 확신이 네게는 있어? 제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지 않으면 이러한 일들은 언제고 반복될 것이다. 철부지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갈 준비나 하도록 해라.”
“…….”
그것이 두 형제 사이의 마지막 대화였다.
황성부로 올라온 뒤, 김효는 다시는 형을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제도대학으로의 진학 공부도 포기했다. 대신 그는 멀리 떨어진 영안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부모를 설득했다.
둘째인 김효에 대해서는 큰 기대가 없는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제도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가 버거워서 그런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는 김효에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오히려 원산에서의 소요로 큰 충격을 받았겠거니 하는 듯 보였다.
반면에 어머니 전혜린은 둘째 아들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원산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두 아들이 모두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항상 맑게 웃고 천진난만하던 둘째 아들이 무언가 변해서 돌아왔다는 사실은 어머니인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만류해 보려 했지만, 김효의 의지는 이미 굳건했다.
한동안은 황성에도, 여순에도 가고 싶지 않고 멀리 떨어진 북해도독부의 영안대학으로 가서 공부에만 신경 쓰고 싶다는 것이 김효의 말이었다.
“정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그래도 어미에게 자주 편지 쓰는 것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전혜린도 김효가 하고자 하는 대로 허락해 주는 수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말릴 수만 있다면 아들의 선택을 말리고 싶었다.
어쩐지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추론인지라 괜히 예민해졌나 싶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아들의 북해행을 허락해 주면서도 마음이 어딘가 미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듬해, 김효는 영안대학으로 정약용이 써준 추천서를 들고 홀로 떠났다.
그 길을 떠날 때까지 김효는 끝끝내 형에게는 찾아가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김현도 동생이 떠나가는 길에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1809년
융무(隆武) 19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황성부를 감아 도는 경강(京江, 한강)을 유일하게 가로지르는 다리는 바로 제도대교(帝都大橋) 하나뿐이었다.
육중한 돌들을 쌓아 올려 만든 이 다리는, 그것이 지어지던 시대의 가장 훌륭한 기술자들과 장인들이 최신의 공법을 적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가장 혁신적이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다리는 평양을 가로지르는 철교(鐵橋)가 되었다.
대동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강철 구조물은 그 위압적인 외관만으로도 제도대교의 위용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석조 다리인 제도대교는 황성 부민의 자랑이었고, 전통 없는 철제 건축물보다 훨씬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훌륭한 유산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으레 황성 시민들이 평양을 떠올릴 때는 끔찍한 굴뚝들에 점령된 삭막한 도시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있었다.
철과 기계, 그리고 석탄 분진으로 자욱한 그런 곳으로 말이다.
철제 다리는 그래서 경강이 아닌 대동강에나 어울리는 다리라고 생각되었다.
시대가 점차 바뀌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인 토대가 변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생각은 그 뒤를 쫓아 바뀌게 된다.
18세기 말, 경강에도 철교를 건설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황성 부민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허튼소리로 치부했었다.
그것은 400년 도읍에 어울리는 다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밝아온 지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아무런 반발 없이 경강을 가로지르는 웅장한 철교가 세워졌다.
바로 「경강철교(京江鐵橋)」였다.
황성 부민들의 생각이 바뀐 이유는, 폭발적인 시대의 힘을 고스란히 상징하는 철도의 위용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1795년 개성[松都, 송도]과 예성부 벽란도를 잇는 「송예선」이 준공된 이래 철도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평양에서도 사동탄광의 석탄을 평양부로 운송하기 위한 철도가 개설되었고, 조금 더 지나서는 기존의 송예선을 황해도 해주(海州)까지 연장된 「송해선」이 개통되었다.
그 뒤로 인천과 황성을 잇는 철도의 부설이 논의되었고, 처음 부설된 「경인선」의 노선은 경강을 건너지 않고 노량진 근방에 세워진 「영등포역」을 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철도의 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던 황성 부민들이, 제도대교를 건너 영등포까지 가서 철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대한 불편을 이내 느끼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송해선과 경의선을 이어서 노량진역에서 개성 남대문역까지 철도를 부설하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경강에 기차가 통과할 철교를 놓는 논의도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의외로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경강에 철교가 놓여지기를 바랐다.
자연스럽게 철도업계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성광사가 자연스럽게 철도 부설권을 얻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철도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된 정부가 직접 국유 철도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철도 부설과 운영은 성광사가 맡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자본은 제국 정부에서 투자해 철도를 국유화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계획에는 자연스럽게 영등포에서 경강을 건너는 철교의 건설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광사는 당초에는 이러한 계획에 반발하여, 독자적으로 철도를 놓겠다고 고집했으나, 그렇게 된다면 철도 증설 허가를 내어 주지 않고 국가가 직접 다른 사업자를 선임하여 철도를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에 결국 내지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803년 착공된 황성―개성 구간의 철도는 줄잡아 6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그간 축적된 기술 덕분에 일반적인 구간의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으나, 영등포에서 노량진을 거쳐 용산으로 넘어가는 철교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연인원 3만 2천 명의 노동력과 한화 75만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 대공사였다.
상공부(商工部)의 1년간 예산을 훌쩍 넘는 수치였다.
철도 건설 비용의 조달을 위한 국채가 중앙은행에서 발행되었고, 기존의 도로 부설 계획들을 백지화해 가면서 철도 건설에 모든 자본이 집중 투입되었다.
이렇게 6년간의 대공사 끝에 세워진 경강철교는 남대문 바로 바깥의 「중앙역(中央驛)」으로 이어졌다.
전통적인 한국 건축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절묘하게 결합된 2층 역사는 이내 경강철교와 함께 황성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제도역에서 경인선은 새롭게 부설된 「경송선(京松線)」으로 이어져서, 꼬박 하루에 걸쳐서 인천에서부터 해주까지 가는 직통 열차도 개통되었다.
1809년 3월 1일, 공식적으로 이 철도의 완공을 축하하는 행사가 계획되었다.
이 개통식 행사에는 니셉포르 니에프스(Nic phore Ni pce)와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라는 두 프랑스인도 참석했다.
니에프스는 나폴레옹 전쟁의 종전 이후, 보나파르트당(黨)으로 지목되어서 프랑스에서의 거취가 곤란해지자, 1806년부터 잠시 포르투갈에 건너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포르투갈 정부에 의해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자, 몇 달 뒤 인도로 건너가서 한국까지 흘러들어 온 참이었다.
그는 인천에 정착하여 몇 가지 기술의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망명길에 오르기 전에 매우 기초적인 단계의 사진술을 발명했었다.
1803년 그는 스스로 「헬리오그라프(heliograph)」라 명명한 초기 단계의 사진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 해 생루프드바렌느(Saint-Loup-de-Varennes)의 자신의 집 창문을 통해 찍은 〈르 그라스의 창문을 통해 본 전경(View from the Window at Le Gras)〉은 최초의 사진 작품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자원해서 입대했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퇴역하여 가업인 석판 인쇄에 전념하고 있었으나, 원화를 수작업으로 석판 위에 옮기는 일을 간편하게 하고자 기술을 이용해 원화를 석판 위로 투영시켜 전사하는 방법을 연구한 결과 사진술의 단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술을 보급시키고 발전시킬 여유도 없이, 열성 보나파르트 당원으로 전쟁에 직접 자원했던 이력 때문에 해외를 떠돌게 되었던 것이다.
니에프스는 한국에 도달하기까지도 사진술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는 않았는데, 최초에 그가 찍었던 사진이 8시간이라는 엄청 긴 시간의 노출을 필요로 한데다가 선명도도 떨어지는 문제를 그다지 효과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한국에 도달해서 루이 다게르라는 젊은 화가를 만난 뒤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다게르는 아시아 여러 지역을 떠돌며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효율적으로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카메라 옵스쿠라라 불리는 투영 장치를 사용했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광학 장치를 통해서 실제 풍경을 전사(轉寫)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운이 좋게도 마침 다게르가 인천에 머물던 때에 니에프스와 조우하게 된다.
둘은 곧 인천에 셋방을 얻어서 사진술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결국 1808년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은을 사용한 「은판사진술」의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매끄러운 은판 위로 요오드 증기를 쏜 뒤, 카메라의 초점면에 놓아 빛에 노출시킨 뒤, 이것을 수은 증기를 통해 현상하면, 수은과 은이 혼합된 아말감이 생성되면서 화상(畵像)이 드러나게 되는 방법이었다.
이것을 식염수로 정착시키고 나면, 깔끔한 흑백 화면을 얻는 것이 가능했다.
수 시간의 노출 시간이 이를 통해 20분 내외로 단축되었으나, 여전히 충분한 노출이 빠른 시간에 가능하게 만들어줄 렌즈 기술을 이들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정물(靜物) 사진은 찍어낼 수 있어도, 20분 동안 사람을 움직이지 않게 하면서 깔끔한 초상을 얻어내는 것은 힘들었다.
“자금을 지원해 주시면 좋은 결과물을 내보이겠습니다. 저희가 찍어낸 그림들을 보고 한 번 판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체류 비용도 슬슬 바닥나기 시작하고, 자금난과 기술적인 한계로 더 이상의 연구의 지속이 힘들어지자, 니에프스와 다게르는 결국 누군가에게서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이들은 고민 끝에 철도산업에 투자하고 있는 성광사의 문을 두드렸다.
철도 같은 신기술을 추진하는 회사라면,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를 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초의 대답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황성부 남대문의 성광사 지점까지 찾아가서 그들이 가진 기술에 대해 설명하였으나, 그들의 짧은 한국어로 기술의 충분한 가치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을 맡은 직원 하나가 카메라 한 대와 은판들을 본사로 보내기 위해서 맡아두었으나, 특허를 매입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사람이 따로 없었기에 한동안 이 기기들은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때마침 여순으로 화물을 실어 보내야 하는 때가 되었고, 그때 함께 묻혀 가지 못했더라면 당분간 이들의 사진술은 빛을 보기 힘들 뻔했다.
여순의 본사에는 특허 사무를 전담하는 직원이 있었고, 이 카메라와 은판이 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연대(黃連岱)라는 이름의 이 젊은 직원은 기술에 대한 관심이 특별히 많았고, 동봉되어 있던 다게르가 직접 불어로 쓴 설명서를 다른 직원에게 부탁해 번역한 뒤에 직접 이 카메라와 은판으로 실험해서 깨끗한 화질의 사진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이 기술의 가치에 금방 매료되었고, 바로 서류를 올려 사장인 김시유에게까지 전달했다.
김시유는 처음에는 그저 별난 기술이긴 하나 굳이 자금 지원을 해가면서 이들의 연구를 도울 필요가 있는가에 의문을 느꼈지만, 직접 황연대가 얻어낸 사진들을 보고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재빨리 사람을 보내 니에프스와 다게르를 요동국 여순으로 초청했다.
이곳에서 은판사진술의 특허에 대한 권리를 나누었는데, 은판사진에 대한 권리는 고스란히 니에프스와 다게르가 반반씩 가지도록 하고, 그 뒤 성광사의 투자를 통해 개발될 노출 시간을 줄여줄 렌즈에 대한 권리는 성광사에서 가지기로 되었다.
이 일이 잘 진행되면, 성광사에서는 직접 자본을 출자해서 카메라와 렌즈, 그리고 은판을 생산해 내는 회사를 니에프스와 다게르와 함께 설립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약하에서 여순 교외의 한적한 곳에 연구실이 주어졌고, 막대한 자금과 렌즈 개발을 위한 인력의 영입도 이루어졌다.
요동은 원래부터 유리 기술로 유명한 나라였고, 특히 성경과 요양에는 렌즈를 다루는 공장이나 장인들이 수태로 많았다.
결국 1809년이 막 밝아올 무렵에 노출 시간을 3분까지 줄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곧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시제품이 제작되었고, 때마침 자신이 공사를 진행했던 경송선 철도가 준공을 맞이하게 되자, 김시유는 준공식에 니에프스와 다게르를 초청해 이 행사를 사진술에 대한 시연의 장으로 이용할 생각을 했다.
“성광사 사주 신완군이 무슨 프랑스 사람들이 만들어낸 재미진 걸 오늘 준공식 행사에서 보여준다는 데 말이야.”
“하여간 그 사람 별난 건 좋아해서…….”
이내 준공식에 프랑스 사람들이 저절로 그림을 그려내는 기계를 만들었다는 식의 소문이 황성부 사교계에 퍼지게 되었다.
제국의 수도를 지나는 최초의 철도 노선이 세워지는 행사이니 만큼 황족(皇族)과 왕공족(王公族), 총리와 주요 대신을 비롯하여 상원인 추밀원(樞密院)의 작위 귀족들과 하원의원들 및 각료 등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될 터였다.
김시유는 그런 자리에서 사진술을 선보인다면 그 파급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장남인 김현에게 이 준비를 일임했다.
김현은 원래 성격이 냉정하고 까다로운 만큼, 군더더기 없이 일을 처리하는 수완은 좋았다.
오히려 학문을 하다가 늦게 장사를 배운 아버지 신완군 김시유에 비해서, 오히려 손익을 따져 보는 눈은 훨씬 높았다.
황성에 도착한 니에프스와 다게르와 함께 사진술을 직접 시험해 보고서는,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초상 사진도 찍어 보았다.
마치 거울 위로 비추어 본 것 같이 선명한 자신의 모습이 은빛으로 현상된 것을 보고 김현은 내심 감탄을 느꼈다.
감정의 흔들림이 거의 없는 그도 이 혁신적인 기술에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현은 남대문 중앙역 역사 앞에 마련된 준공식장 한편에 지체 높은 인사들을 위한 사진 촬영장을 만들었다.
직접 기술을 개발한 니에프스와 다게르가 특별히 선택된 인물들에게 그들의 초상을 남길 기회를 제공하게 될 터였다.
내심 김현은 이 자리에 황제나 총리가 왕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사진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사진술 자체가 주목을 받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고대하던 준공식 날이 찾아왔을 때, 다행히도 햇빛은 충분히 밝았고 공기는 맑았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중앙역의 역사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역을 나서는 기관차가 충분히 잘 보일 수 있도록 철로 변에 면해 설치된 객석 주변으로는 마차에서 내리는 관람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9시쯤이 되어서는 여순에서 엊그저께 황성에 도착한 김시유와 그 부인 전혜린이 식장에 도착해서 준비 상황을 점검했고, 김현은 미리 그들에게 사진기를 설치한 장소를 보여주었다.
현상이 바로 가능하도록 가건물도 설치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부부는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 남겼다. 정오로 예정된 준공식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점차 모여들었고, 융무제까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정오 직전에 도착함에 따라 이내 행사는 속개되었다.
화려한 음악의 연주와 함께 온갖 축사가 연단에서 읊어졌고, 영등포에서 출발해 경강철교를 넘어온 기관차가 제도 중앙역사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이내 환호성을 지르고 열광했다.
그 사이 이미 철도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점차 입소문이 난 사진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기차 구경을 그만두고 공짜로 얼굴을 남기고자 가설 사진관을 찾았고, 그중에는 고관대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도대학의 대사성(大司成, 총장)의 자리에 오른 정약전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이 기술에 대해 이미 김시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 직접 시험해 볼 기회만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3분에서 5분간 움직임을 멈추고 계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설명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거의 5분간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약전은 꼿꼿이 앉은 자세로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제도대학 대사성까지 사진을 찍었다는 소문이 준공식장에 돌자, 융무제마저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자리에서 직접 사진을 찍지는 않았는데, 언제 부르는 날에 입궐(入闕)하여 경운궁 석조전의 화상과 자신의 용안(龍顔)을 남겨주었으면 한다고 김현에게 전달했다.
이 날, 준공식에 참여한 사람들 중 총 서른두 명이 자신의 사진을 남겼고, 재현상이 불가능한 은판사진의 특성상 이들은 유일무이한 자신의 사진을 받고서는 매우 귀중하게 보관했다.
이 사진을 구경한 사람들 사이로 입소문은 점차 번져 나가기 시작했고, 기술적인 연구를 보완한 끝에 카메라와 은판을 생산하는 공장이 성광사에 의해 여순 근교에 세워졌다.
이곳에 「성광은화공업(成光銀畵工業)」의 간판이 내걸리고, 니에프스, 다게르, 그리고 김시유의 장남 김현까지 3인이 공동 사주로 운영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들이 소량으로 생산해 내기 시작한 카메라와 은판은 이내 순조롭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고, 직접 사진술을 익히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들 중 몇몇은 황성부와 성경부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최초의 사진관(寫眞館)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그 비용이 매우 비싸고 제한된 사람만이 접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기술임에는 분명했으나, 마치 철도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 사진술 또한 이내 빠른 속도로 보급될 것을 선구자들은 의심치 않았다.
≪대한제국 연대기 1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