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장 치본어산(治本於産)
「산업혁명의 촉발로 인해 가장 뚜렷하게 바뀐 것을 꼽으라면 바로 도시화의 진전일 것이다.
분명히 산업화가 농촌사회를 도시사회로 변화시키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생각보다 급격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생각만큼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설 무렵에, 경기(京畿)와 관서(關西) 지역은 도시화 비율이 거의 38%에 육박하고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에 속했다. 반면에 삼남에서는 이 비율이 고작 20% 남짓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당시 프랑스의 24%, 잉글랜드의 27%, 일본 칸토(關東)의 25%의 도시화율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19세기 초반부에 삼남 지역의 도시 지역 인구는 점진적으로 증가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도시의 생활환경에 직접적으로 산업혁명에 의한 변혁이 수반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체적으로 삼남 지역의 도시들에서는 공업보다는 전통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치적·상업적인 기능들이 강화되었다.」
―미야타니 야스지로(宮谷靖次郞)
《극동에서의 산업혁명》, (에도:新潮社, 1958)
1810년
융무(隆武) 20년 맹춘(孟春)
대한제국 황성부
우정개혁(郵政改革)에 관한 문제가 황성부를 뜨겁게 달군 것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기존의 가도(街道)를 다니는 역마차(驛馬車)들에 의한 제한적인 우편업이 이미 두 세기 이상에 걸쳐서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우편업은 몇 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제도적으로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상사(商社)나 해운업자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군용 역마까지 이 우편 업무를 제각기 수행하고 있었다.
가격도 천차만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는 개별적인 사업주들 때문에 이를 통제하거나 감독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가격 책정도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우편 요금은 매우 비쌌을 뿐더러, 지역적으로 제각기 취급 업체가 달라서 예컨대 목포에서 부친 우편을 함흥에서 받아 보려면 한 달 정도는 기다리기 일쑤였다.
여러 지역 업체의 손에 우편이 넘나드느라 시간이 지연될뿐더러 우편료 또한 폭등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우편물이 수령자에게 도착하고 나면, 수령자는 기간이 늘어난 만큼 손해를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늘어난 기간에 대한 소요 경비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러한 관례는 우편 용달 자체를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이 향유하던 때에 정착된 것이었으나, 급격한 도시화와 식자율의 증가와 함께 우편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하면서 이내 큰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편의적인 문제 외에도, 정부로서도 우편제도를 규율해야 할 필요성을 점차 절감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아직까지 대한제국은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검열제도가 상존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렇게 사적 기업체들에게 맡겨진 우편제도는 정부의 손 밖에 있었으며, 혹여나 반정부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이 이러한 우편을 이용하여 음모를 조직하더라도 정부로서는 감지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우편량이 폭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정부의 불안은 점차 커져만 갔다. 적어도 우편제도를 국가가 통괄한다면, 요주의 인물들에 한해서 선별적인 우편 검열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우정개혁이 이렇게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정부로서는 그것을 수행할 만한 마땅한 방책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존의 사기업체에 맡겨져 있던 우편 업무를 한순간에 국영으로 일괄 대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정부 입장에서는 독점적인 우편 기업체에게 이를 위임할 생각도 없었다.
“만약에 우편 업무를 누군가 통제해야 한다면, 그건 정부가 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우리 자유로운 시민들이 교환하는 서신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처럼 그냥 부패한 우편제도를 그냥 두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런 면에서 이 일을 맡아서 행할 만한 것은 성광사밖에 없습니다. 이미 성광사는 평양에서 황성부에 이르기까지 철도를 통해서 우편 업무를 하고 있지요. 더군다나 전국적인 우편망을 설계할 만한 충분한 자본도 있습니다.”
우정개혁의 냄새를 맡은 성광사의 후계자 김현은, 아버지 김시유를 대신하여 직접 내각과 교섭에 나섰다.
대체적으로 내각의 대신들은 성광사를 비롯한 다른 자본가들과 이런저런 경로로 밀착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무한정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는 것을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도 않았다.
전통적으로 작위가 있는 귀족가 및, 역대로 수많은 관료들을 배출해 내온 문벌(門閥) 출신이 많은 의회의 의원들과 그들로 구성된 내각(內閣)의 각료들은 근래에 들어 부상하고 있는 소위 재벌(財閥)들을 껄끄러워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존하고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귀족 및 전통 문벌들은 이제 퇴조하는 세력이었고, 신흥 자본가들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더군다나 한국 내지에 기반을 둔 사업체도 아닌 성광사에게 전국적인 우편망의 운영권을 준다는 것을 이들 각료들의 대부분은 지지할 수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편 업무는 국가 관할로 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졌소. 굳이 그대들의 자유로운 사업을 막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국가의 중요한 일대사이니 만큼 필요한 만큼의 규제는 언제고 행할 것이오. 이 일에서는 손을 일찌감치 떼는 것이 좋겠소이다. 다만 철도 우편에 관해서는 운송 위탁을 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으니 여기에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은 내지 마시오.”
관료들의 의견은 단호했다.
자유주의적 정당인 연합당 내각 시절이었다면 아마 자본가들의 논리를 조금 더 양해해 주었을지 모를 일이나, 현 내각 수반은 보수당의 거물이자 완고한 국가주의자인 하양백(河陽伯) 정후영(鄭煦榮)이었다.
총리대신의 직임을 맡은 지 이제 3개월째인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연합당 정권의 정책적 기조를 반대 방향으로 틀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1차적인 목표는 중간 계급의 성장을 제어하면서 동시에 기존 귀족 및 문벌 계층의 권익을 최대한 사수하는 것이었다.
총리대신 정후영을 비롯한 보수당 인사로 채워진 내각의 대신들이 우정 사업의 개편에 있어서 기존의 자본가들에게 독점권을 매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기존 연합당 정권하에서 있었던 정경유착의 관계를 잣대로 계산하여 우편사업권의 지분을 정부에 타진하던 성광사와 같은 재벌들은 별 소득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의 칙령에 따라 우편사무의 개혁을 담당할 임시 부서로 우정총국을 내부 산하에 설치하고, 금년 중에 우선적으로 경기 지역에서 통합된 국영 우편제도를 실시할 것을 목표로 삼아 정부는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추밀원(樞密院) ― 곧 상원(上院)에서 우정정책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여 등원(登院)한 자리에서 총리대신 정후영은 단호하게 우편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논란이 있었으나 보수당이 장악하고 있는 하원에서 무리 없는 동의 끝에 「우정체신법(郵政遞信法)」이 통과되었고, 이내 황제의 칙령으로써 반포되었다.
상원의 동의까지 얻고 나자, 정후영 내각으로서는 더 이상 정책을 실행하는데 거칠 것이 없었다.
새로이 발효된 우정체신법에 따라 정식으로 우정체신청(郵政遞信廳)이 내부 산하에 조직될 때까지 우정총국(郵政總局)이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되어 개혁 업무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 우정총국은 광화문 관가(官街)에서 운종로(雲鐘路)로 접어드는 길목의 기념비전(記念碑殿) 바로 맞은편에 설치되었다. 임시로 내부대신이 우정총판(郵政總辦)을 겸임했다.
우정총국이 설립된 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도성내의 주요 길목에 우편물의 수집을 위한 우체통이 설치되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우편물을 보내기 위해서는 우정총국으로 직접 왕래하거나 우체통을 이용하도록 강제되었다.
이와 함께 시내의 민간 사기업의 우체 업무는 정지되었으며, 어떤 형태로든 도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우정총국으로 인계가 되어 처리가 되도록 법령으로 규제되었다.
일괄적인 우편 업무의 금지가 사회적인 불만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에서는, 일부 대규모 우체 업무를 수행하던 자에게 지역의 우체국(郵遞局)을 운영할 권리를 계약으로 설정하도록 했다.
또한 장거리 우편 송달에 있어서 기존 우편업자들 역시 정부와의 계약 형식으로 끌어들여 역마차, 기차 및 증기선 따위의 업자들이 직접 우편 업무를 하는 것은 금지하되, 기존의 배송 기능은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주요한 변화로는 기존의 수령인이 거리 및 소요 시일에 따라 부과된 막대한 우편료를 부담해야 했던 것을, 단계적으로 국영 우편을 확대하여 그 관할 지역하에서는 거리를 막론하고 발신인이 붙인 동일한 우표 한 장으로 서신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811년, 융무 21년 1월 2일에 최초의 우표인 「오전표(五錢票)」가 발행되었다.
한화 다섯 전을 내고 우표를 사서 우편물에 붙이면 황성부와 경기도 전 지역 및 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사흘 안으로 수령인에게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효율적인 사업을 위하여 황성부 및 인천부, 개성부, 예성부, 해주부, 수원부, 안성군 등지에 지방체신소(地方遞信所)가 설치되었고, 우표가 발행된 1월 2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인 체신 업무가 시행되게 된 것이었다.
정부와의 협상 끝에 성광사는 기존에 부설된 인천―황성―개성―해주 사이의 철도를 통하여 야간우편열차의 운행권을 따낼 수 있었다. 각 도시의 우정국 간의 수송 업무의 많은 양이 성광사의 야간우편열차를 통해 실려 나갔다.
도리어 이렇게 되고 보니 각 기존의 우편 업체 입장에서도 다소 수입 감소를 각오해야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정부와 체결된 계약을 수주해서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각종 사기업체가 난립할 때는 각자의 우편 취급량의 전망도 불투명했을 뿐만 아니라, 과당 경쟁과 비효율적인 배송 체계에 따른 마진의 감소 등이 현실적인 문제였었다.
그러나 적어도 경기 지역에서 실시된 국영우편제도의 실시에 따라서 이 우편제도의 지방 우체국의 운영권을 따내거나 배송 업무를 계약한 업체의 경우는 확실히 경영 상태가 호전되거나 안정적으로 변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1년간의 시범 운영을 바탕으로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내각에서는 공식적으로 우정총국을 해산하고 우정체신청을 내부 산하에 설치하고, 초대 청장으로 서문행(徐文幸)을 부임시켰다.
관록 있는 관료인 서문행은 우정체신청장으로 부임하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관할 지역의 확대를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중앙의 우정체신청에서 각 도에 설치한 우정체신국(郵政遞信局), 그리고 주요 지역 중심지의 체신소(遞信所)를 거쳐 가장 말단의 우편국(郵便局)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완성시켰다.
말단의 우편국 운영을 제외하고 체신소까지의 상급기관의 운영은 국가에서 독점했으나, 각 체신국 및 체신소 간의 우편물 이동에 관해서는 종래의 방침대로 민간 위탁을 실시했다.
새롭게 정비된 우편 체계는 이내 큰 호응을 얻었고, 전국에 순차적으로 실시되어 이내 곧 내지 8도 및 제주자치국(濟州自治國:구탐라국)을 포괄하는 우편망이 완성되었다. 이것은 이내 정부에 적지 않은 재정 수입을 가져다주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비공식적이지만 주요 인사에 대한 우편 검열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보수당 정부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각 지방 체신소까지 하달된 검열 명부에 등록된 인사들과 관련된 우편물에 대한 목적지 및 우편 교류 빈도 등에 대한 조사가 수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우편검열제도는 공식적인 입법조치 없이 행정적 월권에 따라 이후 이십 년 이상 유지되었고, 이것은 한국 정부에 대해 검열제도의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1813년
분카(文化) 10년 중하(仲夏)
일본국 토카이도(東海道) 무사시노쿠니(武臧國) 에도(江戶)
이계현(李界鉉)은 제도대학을 졸업한 준재였으나, 일찌감치 기초학문에 대한 뜻은 접고 실용적인 기계설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학(工學)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대학교육에 공학부(工學部)를 설치하고 공학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직까지 보수적인 학문 체계에 대한 변혁에 회의적인 대학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또한 아직까지 실용학문에 대한 가치를 낮잡아 보는 귀족적인 인식이 잔존해 있었기에, 공업은 기술자들이 다뤄야 하는 분야지 학자들이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는 편견이 아직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계현은 각종 공업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을뿐더러, 공부(工部)의 주임관(奏任官)으로 근무하면서 오래되어 전면적인 보수가 필요한 황성부의 상하수도 체계를 정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최근에 등장한 파슬리(Paisley)의 완속사여과법(slow sans filtration)을 도입해 상수도 정비에 적용했다.
파슬리의 완속사여과법은 물이 천천히 모래층을 통과하여 자연스럽게 여과되도록 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계현은 파슬리와의 장기간의 서신 교환 끝에 이 방법을 공학적으로 황성부의 상수도에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 건물 안으로 직접 상수도관(上水道管)이 들어가서 물이 공급될 수 있도록 펌프를 개량하여 보급하고, 금속제의 수도관을 정확한 규격으로 제작하여 매설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제정하는 데에 간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1805년부터 1811년의 6년에 걸쳐서 황성부의 상수도를 정비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이내 그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근대적 상하수도 체계의 전문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상하수도를 설계하려는 도시의 정책적 자문을 맡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1811년 9월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면서 상수도 체계가 아직 없던 전라도 나주의 상하수도 설비 사업을 지휘했다.
그에게 일본으로부터 고용 의뢰가 들어온 것은 나주의 상하수도 설비 사업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주는 인구 8만 남짓의 꽤 규모가 큰 도시였으나, 근처에 영산강이라는 좋은 취수원이 있는 데다가 도시 면적이 지나치게 넓지 않고 밀집된 건물이 많아 상하수도를 정비하기에는 꽤 편리한 환경이었다.
이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던 차에, 그에게 어떤 일본인이 찾아왔다.
“저희 측에서는 우선 3년 계약을 바라고 있습니다. 에도는 이미 인구가 5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이나, 도심을 관통하는 스미다 강을 제외하고는 취수원을 확보하기가 그다지 용의하지가 않습니다. 독자적으로 여러 차례 상하수도를 설치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전문적인 지식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 없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선생을 직접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에도번의 번주이자 칸토 지방의 10주를 통괄하는 칸토 칸레이(關東管領)의 지위에 있는 토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가 직접 인선하여 보낸 번신(藩臣)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꽤나 말쑥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일본식 상투인 촌마게를 틀지 않고 깔끔하게 잘라서 기름을 먹여 빗어 넘긴 흰머리와 풍성한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토쿠가와 이에나리의 가장 으뜸가는 가신으로서 에도 일대의 행정을 지난 20년간 지휘해 온 경륜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였다.
그런 그가 직접 한국까지 와서 사람을 발탁해 가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에도부(江戶府)에서 상하수도의 설치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막부를 건립한 이후, 그간 잠정적으로 동맹 관계에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꽤나 꺼림칙한 존재가 되었다.
때문에 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쿄토와 아즈치에서 최대한 떨어뜨려 놓기 위해 기존의 영지를 반납받고 대신에 관동 지방의 땅을 대신 주었다.
노련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실상 전국시대를 거치며 폐지된 칸토 지방의 독자적인 행정 기구인 카마쿠라부(鎌倉府)와 그 장관인 카마쿠라고쇼(鎌倉御所)의 자리를 놓고 오다 노부나가와 흥정에 들어갔다.
카마쿠라부는 지리적 및 물리적인 이유로 교토에 거주하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들이 칸토 지방을 통치하기가 용이치 못했기에 대리인인 카마쿠라고쇼를 상주시켜서 이 지방의 행정을 통괄하게 했던 것에서 기인하는데, 실상은 그 아래 직위인 칸토칸레이(關東管領)가 사실상의 권한을 쥐고 있었다.
당초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 뒤에 이 거추장스러운 카마쿠라부와 카마쿠라고쇼, 그리고 칸토칸레이의 직위를 모두 일괄적으로 폐지했었다. 헌데 자신이 칸토 지방으로 물러가 주는 대가로 이 직위를 달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요구해 오자 노부나가로서는 난처하다 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고려 끝에 둘 사이의 정치적 협상은 타결되었다.
명분상 이미 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폐지한 카마쿠라부와 관직들을 되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점을 고려한데다가, 자신이 쇼군에게 필적할 만한 다이묘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오다 노부나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본거지를 이미 주요한 거점 지역인 카마쿠라가 아닌, 일개 한촌(閑村)이었던 에도로 정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자, 오다 노부나가는 고민 끝에 이에야스가 요구한 바를 수정하여 새롭게 에도부(江戶府)를 열어주고, 부의 책임자인 에도구보는 쇼군이 임명한 오다 일족의 일원이, 사실상의 지휘 통괄은 칸토칸레이(關東管領)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토쿠가와가는 칸토칸레이라는 꽤 높은 직위와 칸토 지역의 넓은 영지를 보유한 유력한 다이묘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혜안을 지니고 확보해 놓은 이러한 위치는 그들 가문이 성장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드넓은 곡창지대인 칸토 평원을 바탕으로 토쿠가와 가문은 크게 세력을 일으킬 수 있었고, 종래 한 세기 가량이 지나서 쇼군이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에도부에 쇼군이 임명한 에도구보가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고, 이내 공식적으로 그 자리가 폐지되고 에도부, 혹 별칭으로 칸토부(關東府)의 공식적인 수장은 토쿠가와 씨의 당주가 겸직하는 칸토칸레이가 되었다.
사실상 후지산 이동(以東)의 드넓은 지역을 쥐고 흔드는 이 칸토칸레이라는 직위와 실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 때문에 토쿠가와 일가의 당주들은 이제 작은 쇼군[고쇼군, 小將軍]이라 불릴 정도가 되었다.
혹자는 이제 일본은 사이카이(西海, 진서)도 잃다 못해 칸토와 칸사이로 나뉘었다고 혹평을 마지않을 정도로, 칸토의 10국은 사실상 칸토칸레이가 지배하는 일본 내의 준자치국이나 다름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당대의 관동관령 ― 즉 칸토칸레이이자 에도번의 번주이며 토쿠가와 가문의 당주(當主)인 토구가와 이에나리의 대(代)에 이르러서 에도는 쿄토(京都)·오사카(大坂)·아즈치 등을 제치고 50만에 달하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도시이며, 태평양 항로의 주요한 거점 항구가 되어 있었다.
또한 에도를 중심으로 한 칸토 지방에는 제지업(製紙業)·제련업·면사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공장들이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화 비율도 일본에서 가장 높아, 칸토에 속해 있는 10개 지역의 총인구 중 1/4이 도시 지역에서 거주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대적인 발전을 바탕으로 당초에는 천황과 막부가 나란히 앉아 있는 칸사이(關西) 지방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열세를 어느 정도 칸토 지방은 극복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체적인 균형추를 동쪽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서 아즈치 막부의 영향력은 점점 차감되어 가고, 반면에 칸토부의 토쿠가와가 가진 능력은 점점 신장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서 최초로 에도에다가 상하수도를 매설하겠다고 토쿠가와 이에나리가 나선 것은, 그동안 쌓인 자신감을 자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황이 자리하는 쿄토나, 아직까지도 일본 제일의 상업도시인 오사카·사카이(堺), 그리고 쇼군의 거소인 아즈치 같은 칸사이의 도시들이 아닌 에도에 최초로 이러한 근대적이고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는 시설을 오로지 토쿠가와 가문의 재력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29년 전 아즈치막부는 일본국 전역에 엔(円)을 법정 화폐로 통용할 것을 명령하고, 동시에 금본위제를 채택하여 20엔, 10엔, 5엔, 2엔, 1엔의 본위금화(本位金貨) 또한 찍어내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 엔화는 오로지 아즈치 막부가 일본의 최고 금융가인 사카이에 세운 「대일본중앙은행(大日本中央銀行)」에서만 발행할 수 있었어야 했지만, 이 과정에서 금본위제를 도입하기 위한 금의 수량이 부족하여 칸토의 토쿠가와 가문의 금고에서 대량의 금을 차입하는 대신에 그 수량만큼의 화폐 발행권을 토쿠가와 가문이 가져가면서, 칸토 지역에서는 독자적으로 「에도 오쿠라 은행(江戶大藏銀行)」이 발권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때문에 토쿠가와 이에나리는 화폐의 발행을 조절함을 통해서 칸토 지방의 경제적인 추이(推移)를 입맛에 맞게 기획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러한 결과로 충분히 용재(用財)가 쌓인 턱에 쿄토나 아즈치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말이 쉬워 대규모 토목사업이지 그 규모가 엄청난 것임은 사실이었다.
상하수도가 존재하지 않던 50만 인구가 사는 대도시에 이러한 기반 시설을 기획해서 깐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술 및 공학적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줄잡아 이 일에 들어갈 시간은 5년 이상이었고, 들어갈 예산 또한 금화 1,800만 엔 이상이었다.
그중에서 최고 책임자로 이계현을 초빙하는 비용만 해도 22만 엔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최고 수준의 기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불러오는 비용으로는 전혀 많지 않다는 것이 토쿠가와의 판단이었다.
한화(韓貨)로 환산하여도 대략 18만 원에 달하는 돈이니 이계현으로서도 구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돈을 한몫에 받을 수 있는 일이 흔치 않았다.
“공학적인 업무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통역관을 한 명 붙여주시고, 일의 전반적인 지휘 체계가 저한테 집중되어 일체 혼란이 없을 것이라는 것만 약속해 주시면 응락하겠습니다.”
일부러 조금 튕겨보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합시다.”
몇 달 뒤 이계현은 목포에서 부산과 사카이를 거쳐 에도까지 가는 범선에 올랐다. 점점 증기선이 여러 항로에서 크게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범선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새로이 늘어나는 물동량은 상당 부분 증기선에 흡수되고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범선을 운용하던 항로에서는 아직 퇴역하지 않은 옛 범선들이 지속적으로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에도에는 원래 초대 번주셨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공께서 에도의 시민들의 마실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나무로 된 수도의 설치를 명하신 이래로 간다 상수와 타마가와 상수의 두 상수가 도심에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에도 상수라고 이르지요. 그런데 이 물은 정수 과정이 없고 천연에 노출된 채로 나무관을 통해 도심으로 흘러와 그대로 음용될뿐더러, 그 용량이 에도 전체의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해 많은 부민들이 우물물을 음용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오물 수거꾼들이 에도 부내에만 거의 팔천에 이를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하수도의 정비로 해결할 수 있다면 들이는 돈이 전혀 아까울 턱이 없지요.”
에도에 도착해서 다시 만난 마츠다이라는 이계현에게 직접 인력거를 태워 에도 시내를 구경시키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꼼꼼히 말해 주었다.
대충 도심지의 규모와 형태 등을 살펴보고 이계현은 정확한 지도를 에도부의 행정관서로부터 구해 보고, 취수원이 될 만한 곳에 대해 답사를 시작했다.
요도바시·혼고(本鄕)·시바(芝)의 세 지역에 정수장의 설치가 내정되었고, 「수도개량사무소(水道改良事務所)」를 설치하여 이계현이 소장에 앉아 총지휘를 감독하기 시작했다.
취수원에서 끌어온 물은 정수장을 거쳐, 매설되는 총연장 280km에 달하는 수도관을 통해 에도 전 지역에 공급되도록 계획되었다. 이와 함께 하수도의 설치도 병행되었다.
이듬해 겨울에는 칸토칸레이 토쿠가와 이에나리가 기거하는 에도성(江戶城)에도 수도관이 들어갔고, 3년이 더 흘러서는 에도의 거의 전지역에 상수도관과 하수도관이 매설될 수 있었다.
마지막 정비 작업까지 1년을 더 소모하여, 총 4년 반의 대역사가 끝난 뒤에, 에도의 대부분의 지역에 수도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초에는 우물의 사용에 익숙하여 상수도의 사용이 생각만큼 원활하지 않았으나, 그 편리성과 청결함이 이내 에도 부민들에게 주지되기 시작했고, 특히 토쿠가와 이에나리가 치적 홍보용으로 이 대상수도(大上水道)를 선전함에 따라 이용율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계현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포상으로 30만 엔이라는 거액의 금액을 추가로 지불받았으며, 이 명성을 바탕으로 훗날 여순(旅順)·항주(杭州) 그리고 태평양 건너 창주(蒼州) 등의 상하수도 개량 및 건설 사업을 지휘하게 된다.
훗날 이계현은 이를 바탕으로 황성부 망원동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최초의 공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황성공업전수학교(皇城工業傳受學校)」를 설립하게 된다.
1814년
융무(隆武) 24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김효가 원산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형 김현과 완전히 결별하고 제도대학으로의 진학을 포기한 뒤 북해로 건너온 지도 어느덧 여러 해가 흘렀다.
김효는 가끔 어머니 전혜린과 서신 교환을 하기는 했으나, 그 뒤로 한 번도 황성이나 여순의 집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가 부치는 우편환을 통해 학비와 생계에 보태기는 했으나, 요동과 한국을 통틀어서 재산 규모가 한 손에 꼽히는 본가의 재력에는 거의 의탁하지 않고 나머지는 스스로 벌어서 충당해 썼다.
그 동안에 형이나 아버지와는 사이가 완전히 벌어져서 사실상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특히 영안부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인 「예닝스타트 다흐블라트(Jeningstad Dagblad, 영안일보)」에 매우 공격적인 논조로 자본가 계급을 비판하는 논설을 실명으로 실으면서부터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네덜란드어와 한국어의 두 언어로 발행되는 이 신문의 사본이 황성부의 김현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곧 김시유의 귀에도 들어가면서 어머니 전혜린이 보내던 우편환마저 끊기고 말았던 것이다.
김효는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어렵사리 고학(苦學) 끝에 영안대학의 법학부를 졸업한 뒤, 경제문제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당시 대개의 대학들에서는 경제학이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았고, 대부분 법학부에서 법학, 경제학, 정치학 등이 모두 포괄적으로 강의되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법학부에서 공부를 하면서 김효는 특히 법학 자체보다는 경제학과 정치학에 좀 더 치우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위 또한 정치경제에 관한 논문으로 받았던 것이다.
당시의 북해도독부는 예전에 비해 인구도 크게 늘어났으나 여전히 벌목, 조선(造船), 목축 등의 조야한 산업에 크게 경제가 의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철광 및 탄광 등의 개발로 광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는 했으나, 그 대우가 열악하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지·탐라·요동·진서·영주·북해의 옛 제국 6주(州) 중에서 북해도독부는 항상 가장 빈한한 지역이었으며, 제국이 해체일로를 걷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내지에 대한 경제적 의존 때문에 독자적인 자치권 확보 운동 또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북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의 후손들과 북해에서 3대 이상에 걸쳐 살아온 조선계 북해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점차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 들어온 산업자본들이 북해의 기간 시설과 교통망을 장악하고, 북해에서 산출되는 얼마 안 되는 수입을 모두 자기 수중에 쓸어 넣고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그랬다.
북해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손에 남는 돈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주의(社會主義)적인 사상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릇이었다.
기존의 정치적인 구도가 옛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보수주의적 사상과 새롭게 등장한 자본 계급 중산층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사상 간의 대립이었다면, 점차 일어나고 있는 사회주의의 조류는 바로 노동 계급의 형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 이론가 생시몽 백작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의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저술들이 이곳 북해도독부에서는 쉽게 번역되어 유통되고 있었고, 내지에서 일어났던 원산쟁의(元山爭議) 이래로 노동 계급의 단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처음으로 영안부 일대에서 사회주의(Socialism)이라는 단어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이내 북해도독부 관청에서 이 단어에 대해 사용 금지 처분을 내리면서부터 오히려 더더욱 넓게 언중(言衆)에 파고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김효는 점차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계급적인 격차가 완전히 철폐되고, 생산 수단이 모든 인민의 손에 함께 공유되며, 동시에 거기서 산출되는 이익 또한 함께 나누어 가지는 세상이었다.
노동의 강도는 동등하게 배분되고, 상호 호혜적인 연대 속에서 피부색과 출신 국가를 초월한 인류 사이의 단합이 이루어지는 세계였던 것이다.
물론 김효 자신 또한 이것이 어쩌면 허황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사 그러한 세상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대의를 향해서 한 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부과된 숙명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에 만나서 결혼한 아내 안드레아 마스(Andrea Maes) 또한 그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을 지닌 여자였다.
그녀는 네덜란드계 이민 6세로, 부친은 옛 누르하치 일가의 장원이었던 목씨장 인근의 넓은 초지에서 크게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매우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닌 부친 빌럼 마스(Willem Maes)는 딸인 안드레아 마스에게도 남자 못지않은 교육을 시켰다.
영안대학에 다니던 안드레아의 오빠인 얀 마스(Jan Maes)와 김효는 같은 법학부에 재학 중이었고, 이를 인연으로 안드레아 마스와 연애 끝에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상 이들 마스 가문도 다른 네덜란드나 북유럽계 이민 가정과 마찬가지로, 언어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민계로 분류되고 있을 뿐, 외관상으로는 코카서스인과 몽골로이드 사이의 완연한 혼혈(混血)적 특징이 드러나 있었다.
짧게는 3대에서 4대, 길게는 8대가 넘게 이민사를 이루고 있는 탓에, 조선계 북해인들과 통혼 관계가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안드레아 마스만 하더라도 조모가 내지 출신 한국인이었고, 외증조부는 그 가문의 연혁이 원나라 시절 몽골 세후(世侯)까지 올라가는 지역 유지였다.
당연히 언어 또한 그들의 옛 모국인 네덜란드어와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와 북유럽 다른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의 방언의 영향을 짙게 받은 이들이 사용하는 네덜란드 방언은 소위 「북해어(Aquilliaans, 아크빌리안스)」라 불렸다.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이 쓰는 「아프리칸스어」와 함께 네덜란드 이민자들의 언어가 분화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히는 언어였다.
북해의 북유럽계 백인들은 대부분 이 북해어를 상용하였지만, 대체적으로는 한국어, 특히 북해방언을 아무 무리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중 언어 구사자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숫자의 조선계 북해인들 또한 북해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북해는 검열제도가 내지에 비해 느슨한 것이 전통적인 특징이었다.
특히 북해어로 쓰인 서적류에는 거의 검열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았고, 때문에서 영안대학, 즉, 예닝스타트 대학에서도 많은 강좌들이 북해어 서적에 기반하여 정부의 손아귀 밖에서 자유롭게 강의되고 있었다.
소득 수준에 비해서 북해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며, 이례적으로 식자율 또한 55%를 넘어가고 있었다.
내지의 식자율이 60% 남짓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인 요동의 식자율이 82% 남짓임을 감안해 볼 때 북해의 식자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이것은 당대의 프랑스나 영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그만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였다.
이것은 정부 차원에서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이미 이민자나 토착민이나 할 것 없이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교회 및 서당(書堂)을 통하여 적지 않은 인구가 기초적인 문자와 산술 교육을 받고 있는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
고등교육기관인 대학 또한 북해도독부 전체에 영안대학 하나뿐이었지만, 그 대학의 교육 수준은 내지나 요동의 어느 주요 대학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수준의 교육열과 양질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내지와 요동 자본에 의해 경제가 잠식되어 있는 상황, 그리고 일반 소농들이 토지를 버리고 노동자가 되어 헐값에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자본가들에게 저당잡힐 수밖에 없는 여건이 북해인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도 당연했다.
때문에 북해에서는 점차 유럽계, 조선계의 인종적인 구분이나, 농민, 노동자, 소상인, 교육자의 직업적인 구분을 초월하여 반정부적인 정서가 점차 팽배해지고 있었다.
특히 건설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요동이나 영주의 사례와 자신들의 처지가 늘 비교되면서 더욱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요동 출신인 김효가 이민계 후손인 안드레아 마스와 결혼하는 것은 이러한 북해의 연대정서 속에서는 유난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가 식구들에게는 달랐다. 김효의 조모인 유청령이 순나라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김시유나 김현의 마음속에서 자신들은 요동왕족의 방계로서 계급 구조의 정점에 서 있다는 귀족주의적 정서가 매우 강했다. 그런데 북해의 유럽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가 인종을 떠나서 신분적으로 보아서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는 이미 연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는 본가에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고 간단히 서편으로 결혼을 했음을 통보했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아주 영안을 떠나서 처가인 목씨장 인근의 농장으로 들어가 책과 씨름하며 저술 작업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 진척이 있으세요?”
“아. 조금씩은요. 당신이 얼마 전에 구해다 준 책들 덕분에 조금은 생각을 정리할 여력이 생겼어요. 그런데 좀체 내가 프랑스어를 몰라서 생시몽의 책들을 읽기가 힘드네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요.”
두 부부는 항상 존대를 깍듯이 하며 서로를 존중했다.
안드레아는 김효가 하는 일을 성심껏 도왔고, 김효 또한 아내를 항상 동반자로서 동등하게 대했다.
사실상 김효가 읽고 쓰는 내용의 많은 부분이 안드레아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생활면에서도 마찬가지로, 김효는 정기적으로 「예닝스타트 다흐블라트」 같은 신문지에 주기적으로 칼럼을 싣는 것 빼고는 따로 고정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처갓집에서 지원해 주는 돈으로 생계를 사실상 꾸려 나가고 있었다.
부부는 처가에서 머지않은 곳에 농막(農幕)에서 살면서 양을 치는 일도 병행하고 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이들은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삶을 꾸려 나가고는 있었다. 다만 책을 사는 데 들어가는 돈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김효는 1814년 여름무렵에 《산업과 노동 계급, 그리고 자본에 관한 논고》를 펴낼 수 있었다.
영안에서 출판된 이 책은 김효가 쓴 한국어 판본과 안드레아가 이를 옮긴 북해어 판본으로 동시에 출판되었고, 이내 석 달이 지나지 않아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회수될 때까지 총 200부 남짓이 팔렸다.
느슨한 검열 체계를 지닌 북해도독부로서는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조취하여 판매 금지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겨우 200부만이 팔린 채 폭넓게 읽히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함도 잠시, 그해 가을 무렵에 멀리서 온 편지 한 통이 김효에게 당도했다.
아직 내지와 다르게 우편제도가 미미한 북해에서 바다를 건너온 편지에 우편료를 지불하는 것이 적잖은 부담이었지만, 멀리서 온 편지를 거절하기도 힘들어 김효는 지갑을 털어 우편료를 지불하고서는 봉투를 뜯어보았다.
지불한 우편료 때문에 살짝 짜증이 섞여 있던 그의 표정은 이내 놀라움에 잠겨 들었다.
편지는 진서의 박주에서 발신된 것이었다.
발신지만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내용 또한 김효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서에서 모종의 혁명적 모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부디 진서로 내왕하여 의견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진서까지 충분히 다녀갈 수 있을 여비가 우편환으로 동봉되어 있었다.
편지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진서인 중산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모임이며, 혹여 모를 검열을 피하여 자세한 내용은 싣지 못한다고 적혀 있었다.
만약 우편환까지 동봉된 채로 편지 내용에 훼손 없이 도착했다면, 검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 터이니 믿고 와도 좋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초청하는 말에 더해서 혹시 몰라 비싼 값을 주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영(私營) 우편을 이용하였으니, 혹여 지출할 편지 수령 비용까지 포함하여 우편환을 넉넉히 보냈으니 무례를 용서하라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이들은 김효가 출간한 책의 200부 중 한 부를 구해서 읽어 보았다면서, 부디 박주로 찾아와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편지를 맺고 있었다.
“정말 기주로 가질 생각이세요? 지금 당신도 북해도독부의 요주 인물로 등록되어 있어서 도항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니, 국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도항 허가가 무슨 말이요? 설마하니 북해도독부에서 그런 치사한 수작을 부리겠어요?”
“그거야 모르지요. 진서에 가셨다 오시는 길에 입경을 허가하지 않을 수도 있는 노릇이구요.”
부인인 안드레아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녀는 지금 막 첫아이를 가져서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아이만 아니었으면 부인 또한 동행해서 진서로 건너갔으면 했던 김효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혼자 움직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로서는 아이를 가진 상황에서 남편과 한동안 떨어져 있으려니 온갖 불안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걱정은 말고 계세요, 부인. 내가 해산일 전까지는 꼭 돌아오겠어요.”
“부디 몸 성하게 다녀오세요.”
그 편지를 받은 뒤로 김효는 어딘가 모르게 들떠 있었다.
자신의 책을 읽고 처음으로 그 내용에 공감하여 초청을 해온 독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만나서 혁명적 사상을 공유하고, 동시에 진서의 상황과 분위기도 보고 오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틀어박혀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부인과 뱃속의 아이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가 진서로 가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14년, 융무 24년 10월 18일, 김효는 영안부를 출발하여 진서도독부 박주부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도 이듬해부터 진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견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1814년
융무(隆武) 24년 계동(季冬)
대한제국 황성부
융무제 이굉(李宏)이 예순여덟의 나이로 승하한 것은 김효가 영안부에서 박주로 향하는 배에 오른 지 며칠 뒤인 10월 24일의 일이었다.
황제는 그날 저녁 몸이 좋지 않아 경운궁 석조전의 침실에 일찍 들어갔으나, 그날 밤 뇌출혈로 인하여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제의 초휘(初諱)는 굉(宏), 자(字)는 명정(明淨)으로, 선황제인 인종 현황제(顯皇帝)와 계성황후(啓聖皇后)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탐라국주 고섭(高燮)의 여식을 태자비(太子妃)로 맞이하였으니, 곧 예현황후(禮顯皇后) 고씨이다.
융무제 이굉의 치세 동안 대한제국은 영주 독립의 여파를 불식하며 제국의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었고, 말레이반도와 인도양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은 이제 가시적으로 제국의 모든 일상생활을 바꾸고, 새로운 계급을 창출하고, 막대한 자본의 축적과 혁명적인 기술의 발전을 가지고 왔다.
적어도 이 잘생긴 외모의 황제가 옥좌에 앉아 있는 동안 제국은 번영을 누리는 듯 보였다.
허나 동시에 그의 치세 기간 동안 제국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었다. 아무도 구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문제들을 매듭지은 사람이 없었다.
의회에서는 보수당과 연합당이 서로 내각의 관직에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정책을 엎었다 뒤집었다 하기 일쑤였으며, 점차 증가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도시 노동자들의 구제에 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주로 작위를 받은 귀족가의 대장원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 유지들에 의한 토지 소유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대체적으로 소작으로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많은 빈한한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어 공장이나 광산에서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 매우 적은 품삯을 받고 일하고 있었으며, 14세 미만의 아동들도 하루 12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기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융무제의 치세 기간 동안 새롭게 등장한 자본 계급은 번창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 시대를 사랑했으며, 자신들의 역량과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유주의적 논조의 신문들이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문의 부고(訃告)를 너 나 할 것 없이 전면에 앞세워 실은 것만 보더라도 이들의 애착을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을 터였다.
융무제의 시호는 「문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철현무성헌인영효혜황제(文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哲顯武成獻仁英孝惠皇帝)」로 올려졌으니, 곧 문종 혜황제이다.
문종 혜황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 곧 황태자인 이협이 보위에 올라, 연호를 「건명(建明)」이라 했다. 이협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황제의 죽음을 맞아 그렇잖아도 곤경에 처해 있던 보수당 내각은 총사퇴를 하고, 다시 선거가 이루어져 이번에는 연합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기조가 상대적으로 짙었던 편인 융무제 시대에 비해 새로운 시대에는 어떤 반동적인 정치가 횡행할지 모른다는 자본 계층의 불안감이 자유주의 정당에 몰표를 밀어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연합당은 성공적으로 재집권했으며, 소위 야경국가(夜警國家)론을 내세워 국가의 기능 축소를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도입될 예정이었던 경찰제도는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했으나, 이 외에 중앙은행에 사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경제기획법(經濟企劃法)」을 위시로 한 시장 통제적인 조치들을 담거나, 빈한한 노동 계급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법안 등은 모두 하원에서 계류되거나 표결에서 반대 처리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연합당은 철도부설권을 사기업에게 대규모로 매각하기 시작했는데, 국가의 돈을 들이지 않고 기간 시설인 철도를 전국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서 정부는 국고의 보조 없이 철도를 전국에 깔 수가 있고, 동시에 자본가들은 철도에 투자하여 수익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결여되는 통일성의 부재와 비용의 상승 등은 연합당 정부나 자본가들에게나 큰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바로 평양―의주 간의 철도와 황성―부산 간, 그리고 황성―목포, 마지막으로 황성―영안 간의 철도였다.
내지 전역을 X자로 철도망을 까는 것이 정부의 목표점이었고, 일개 기업이 독점할 수 없도록 이 네 철도망을 각기 다른 자본에게 부설권을 매각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러한 장거리 철도를 건설하는 데 비용을 댈 만큼의 충분한 자본을 지니고 있는 기업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특히 황성―부산이나 황성―영안 간은 지형이 험난할뿐더러 연장 거리도 엄청나 건설할 능력이 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성광사뿐이었다.
“계획대로 부설권을 매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용이하지가 않소이다. 1820년까지 네 개의 철도를 건설하려고 했던 계획을 달성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아요. 성광사에서는 이번에는 별로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쪽에서는 어느 쪽 철도를 타고 오든 황성부 주변에서는 자기네 철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아쉬울 게 없단 소리 아니겠소이까. 일찌감치 철도에 투자해서 핵심적인 구간에 부설을 해놓은 덕에 우편 수송에서도 많은 물량을 불하받을 수 있었고 지금은 또 모든 계획된 철도가 성광사 철도에 부속되게 생겼으니 당연히 저렇게 큰소리칠 만도 하지 않겠소?”
정부에서도 연일 이 문제를 놓고 각료들 사이에 토론을 벌였지만 딱히 해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부설권을 매입할 회사를 찾지 못하자 X자형의 철도기간망 건설에 대한 계획은 일부 수정되어, 평양―의주와 황성―부산 간을 1820년까지 1차로, 황성―목포 간을 ‘25년까지 2차로, 마지막으로 북해도독부 영주까지의 철도 건설을 ‘30년까지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기로 수정 입안되었다.
일종의 최초로 국가가 제시한 경제개발의 로드맵인 셈이었는데, 문제는 자유주의적인 연합당 정권에게는 이를 밀어붙여 실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20년 전에 최초로 송도와 예성부 사이에 철도가 생긴 이래로, 많은 기업가들이 철도에 투자하여 많은 선로를 부설해 놓았지만, 이를 전국적으로 접속할 만한 기간 철도가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현재 요동국에서 부설하고 있는 철도와도 의주를 통해 철도가 접선될 수 있게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국가가 철도 부설권을 매각하면 이를 통해 기간 철도를 선점하여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을 터인데 왜들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인지…….”
요컨대 정부의 입장은 간명했다.
철도 부설권을 정부로부터 사서 알아서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되, 이익은 마음껏 가져가고 정부에는 세금만 적당히 내라는 것이었다.
당초 정부에서는 「경인선」 철도 등을 이미 국영화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식민지 확장 정책 등으로 국가 재정에 위기가 오자 이를 성광사에 일괄적으로 이미 매각한 상황이었다.
경기 지역의 철도 및 황성―개성―해주―평양으로 이어지는 「경평선」 선로는 모조리 성광사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이 외에 대구―포항 간의 철도를 부설한 옛 구상(邱商) 기반의 기업인 「달성기륜(達城機輪)」, 나주―목포 간의 철도를 소유한 「호남실업(湖南實業)」 등이 철도 자본으로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특히 성광사의 경우 요동 철도에도 많은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독자적으로 황성부와 요동의 성경부를 잇는 철도망을 구축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광사가 평양―의주 간 철도 매입에 뛰어들지 않는 것은, 연합당 정부를 좀 더 길들이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간보기에는 예비 입찰 대상이었던 달성기륜, 호남실업, 송도상공회의소, 경성물산(京城物産) 등이 모두 이러한 성광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입찰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내각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파악하고서는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총리대신인 김재찬(金載瓚)은 직접 성광사 사주 김시유를 불러다가 다그치겠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김시유의 경우 요동의 군작(君爵)이 있는 요동왕의 종친 신분이기 때문에 총리대신인 김재찬으로서도 함부로 초치(招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대신 불려 들어온 것이 황성에서 아버지를 대리하여 성광사의 내지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김현이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멋들어진 안경을 착용하고 깔끔하게 성장(盛裝)하고서는 풍성한 수염을 기른 김현의 모습은 일반적인 요즘 시대의 자본가의 상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듣기로 이미 성광사를 비롯한 기업체들이 담합하여 입찰을 미루기로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도대체 정부로부터 뭘 얻고자 하는 것이오? 그렇게 버티고 있다 보면 헐값에 모든 이권을 내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오?”
그간 말을 해두려고 벼르고 있었던 총리대신 김재찬은, 김현이 집무실로 들어와 능글맞은 얼굴을 들이밀자마자 속사포처럼 쏟아붓기 시작했다.
“저희 사업가들은 다 애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득이 남을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은 일에 자본을 쏟아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런게지요…….”
“조정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게요? 그 일의 내막이 설마하니 내 귀에는 안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김재찬은 마뜩찮은 눈으로 김현을 노려보고서는, 마호가니 원목 위에 고급 가죽을 덧댄 자신의 의자에 몸을 풀썩 던지듯이 앉았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밀봉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서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김현에게 보란 듯이 앞으로 밀었다.
김현은 그 문서를 보고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정부의 첩보 기관인 제국익문사에서 철도 담합에 대하여 조사한 장문의 보고서였던 것이다.
“사업한다는 사람들, 항상 보면 조정을 얕잡아 보는 그런 경향이 있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까? 이 대한제국의 정치라는 것이 국초 이래로 온갖 정변과 개혁, 그리고 아귀다툼 속에서 버텨온 것이 사백 년이 훌쩍 넘소. 그 과정에서 쌓아온 유산들을 절대 얕잡아 봐서는 안 될 것이오.”
“…….”
“내가 한 가지 조언을 하리다. 당신들이 우리 연합당이 정권을 쥐고 있는 동안에 철도 부설권을 불하받아 가지 않으면, 다음 보수당 정권에서는 아예 이 계획을 백지화하고 주요 지역의 철도를 국유화하여 국가에서 직접 부설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오. 만약, 국영회사가 이를 감독하게 된다면 그 지분은 당신들과 같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추밀원의 고귀한 작위 있는 나으리들이 가져가겠지. 정말 그걸 바란다면 말이오, 나로서도 더 이상 철도 문제 따위에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으니 이만두겠소만. 보고서를 보자하니 평양과 의주 사이의 철도가 국유화되거나, 아니면 어용기업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글쎄, 성광사의 장기적인 계획에도 곤란함이 있지 않겠소이까?”
이렇게까지 총리대신에게 듣고 나니 김현으로서도 피해갈 궁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이 젊고 재기 바르며, 이해타산이 철저한 젊은 기업가는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 담합을 저희 성광사에서 먼저 깨 버리도록 하지요. 대신에 평양―의주 간 철도와 황성―부산 간 철도의 매설권은 성광사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동 성경부에서 부산까지 가는 철도를 독점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우리가 그걸 들어줘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성경부에서 동래부까지의 철도를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관리하겠습니다. 성광사에서 반쯤은 독립적인 업체로 말입니다. 그 철도회사에 대한 지분의 삼분의 일가량을 총리대신 각하를 비롯하여…….”
“알겠소.”
김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재찬 총리는 손을 들어서 알겠다는 표시를 보냈다. 잘 알아들었으니 그 말대로 하자는 소리였다.
김현이 여순의 김시유에게 간략한 내용을 보고해 결재를 맡자마자, 이 내용은 내각의 철도사업부에도 보고되었고, 총리 김재찬의 명령으로 이튿날 내각에서는 철도 부설권 매각에 관한 고지를 내렸다.
다른 기업들은 담합을 한 대로 이번에도 응하지 않았으나, 예상치도 못하게 그날 사무가 끝나기 직전에 성광사가 입찰에 나섰다.
갑작스럽게 담합을 주도했던 성광사가 그 담합을 깨고 입찰에 나섰다는 소식에 막판에 주식시장은 폐장되기 직전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광사의 주식이 폭등하고 다른 철도 관련 기업주들이 폭락하는 가운데 시장이 닫혔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현을 비롯한 이 정보를 이미 손에 쥐고 있던 연합당의 주요 각료들이 큰 이득을 본 것도 사실이었다.
원칙대로면 바로 다음날 입찰을 추가로 받는다는 고시가 나와야 정상이었으나, 정부에서는 성광사와 미리 이야기가 된 대로 완성된 철도를 「제국철도회사(帝國鐵道會社)」를 새롭게 설립하여 운영하는 조건으로 기존 황성―평양의 철도에 접속되어 평양―의주로 연장되는 노선, 곧 경의선 철도와 황성―동래 간 철도, 곧 경부선 철도의 부설권을 모조리 성광사에게 넘겨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자 뒤통수를 맞은 다른 철도기업들에서는 난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합당 내각은 한참을 뜸을 들인 뒤에야 나머지 철도 구간에 대한 매각 공지를 내었고, 이번에는 서로 앞다투어 철도부설권을 사겠다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각축 끝에 기존 계획이 다소 수정되어, 황성―원산 구간은 달성기륜이, 원산―함주 구간은 「함흥기선」이, 함주에서 영안부까지의 구간은 가까스로 회사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번을 사운이 반등할 기회로 삼은 계영양행에 매각되었다.
이 외에 추가로 경원선에서 갈라져 나와 내금강까지 관광 철도를 운행하는 계획이 상정되어, 이것은 황실 종친 중 한 명인 연안공 이흥(李興)이 운영하는 회사에 매각되었다.
성광사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철도 부설권을 매입한 것은 호남실업이었는데, 황성부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철도의 모든 부설권을 얻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러한 철도 부설 계획은 5년 뒤 성광사에 의해 경의선이 완공된 것을 시작으로, 1820년대와 30년대의 20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시행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와 같이 많은 철도 재벌들이 부를 축재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부 관료들의 잇속이 고려된 시혜적인 정책의 시행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연합당 정권이 물러가고 다시 보수당이 집권한 뒤에도 같은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매우 끈끈한 형태의 정경유착이 점차 견고해져 가며, 정치 권력 또한 재벌 집단의 성장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