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장 진서쟁란(鎭西諍亂)
「……우리 진서는 독립한 나라가 될 것이며, 진서 사람은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이로써 우리 민족이 한화(韓和)의 어느 일방(一方)에 속하지 아니하는 조국에 충성된 인민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독립의 기치를 만방에 두루 밝혀 새로운 국가의 가치로 주장할 것이다.
1천 3백만 진서 인민이 모두 단결되어 새로운 조국의 밝은 앞날을 확실하게 할 것이며,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자주와 평화의 의기(義旗)를 단단히 하고자 하니, 우리의 본래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할 것이며, 이제 떨쳐 일어나 광명의 길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1816년 7월 7일 진서임시독립정부
(...) Wori Zinsjonan tokuripusita naraga narubeki, Zinsjono hitoguminan zasjuzekin Minzokunwo sjononsu. Worinan birosi wori minzokuga Karanonarato Wanatono dono ibbjoe zokuserujanan sogukue cjugiseunan inmine saitanserun kot’ni naresi, Zajuja peidan, sonoue tokuripuno kisiwo manboni nori atare atarasi narano gasito senrubekida. 1,300manno Zinsjo inminga moda dangerusi, atarasi sogukuno akan maimichiwo dadorirusi, kogorono hawo pume katakun sinwo moke, Zazuto peiwano igiwo kakatunruto janoni, Worino bonrai gwanriwo mamore, onzenninaresi, ma sasato irote kwanmeino miciwo hjane arukunnarida!
1818nen 7ezu 7ni Zinsjo Insi Tokuripu Zeibu.」
―〈진서독립선언서〉, (박주Hakasju: 1816)
1814년
융무(隆武) 24년 중동(仲冬)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박주부
진서도독부가 기해동정으로 설립된 지 어언 4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일본 열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이 큰 섬, 속칭 구주도(九州島)는 지난 네 세기에 걸쳐 진서도독부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다.
내지 황성부에서 파견하는 대도독 이하 행정 관료들은 전반적인 진서도독부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직할령에 대한 행정권을 모두 행사하였지만, 여전히 진서의 절반 이상은 옛 토착 귀족들로 다이묘 계급 출신인 몇 개의 가문의 영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가문들은 일찌감치 한국 황제에게 종신(從臣)하여 작위를 받고 각기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얻었으며, 이 또한 네 세기에 걸쳐 불변한 채로 내려왔다.
16세기에 들어서서 진서는 매우 급격한 전환을 겪었는데, 지배층의 언어와 피지배층의 언어인 중세일본어, 그중에서도 큐슈 방언이 크레올화하여, 비교적 잘 바뀌지 않는 음운구조(音韻構造), 곧 일본어의 음소(音素)들은 그대로 남았으나 그 위에 어휘와 표현 등에 중세한국어의 잔재가 짙게 남은 진서어가 이 지역의 일상어로 대두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주나 박주 같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른바 가누비토(間人), 곧 중산 상인 계급을 중심으로 서양에서 전래한 가톨릭이 폭 넓게 수용되었고, 이것이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으로 퍼지면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진서인의 대부분이 가톨릭을 종교로 삼는 문화적 특색을 지니게 된다.
15세기 말에는 이뿐만이 아니라, 일본이 진서를 다시 되찾고자 일으킨 동란(動亂)으로 인하여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독자적인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한 진서인들은 일본에 복속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전쟁 끝에 대한제국의 일부로 남았었다.
그러나 역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민족의식은 갈수록 성숙하여, 독자적인 진서의 문화와 가치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갔을 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창달을 이루기 위해 대학을 설립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급격한 변화 끝에 안정된 진서어의 문법과 정서법을 정리하고자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진서대학을 중심으로 사전 편찬과 문어화(文語化)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성서가 모두 진서어로 번역되어 이미 사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기초로 삼아 확립된 진서어 문어체는 이내 폭넓게 보급되어 많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켰고, 종래에는 한국 본국 정부의 자제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서대학에서 편찬하는 각종 교과서와 학술지의 공식 언어가 되게 된다.
이 진서어 문어체는 기본적으로는 한자(漢字)와 한글의 병용을 원칙을 하고 있었으며, 진서어의 음을 모두 한글로 빌려 적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한병용(國漢倂用)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진서인 지식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진서의 독특한 민족적 정신이 한국의 것도 아니고 일본의 것도 아닌, 사백 년 역사의 진서민족만의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창출해 내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중립적으로, 알파벳을 빌려서 표기를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가톨릭 신자가 절대다수인 진서의 특성상 서양 알파벳에 대한 친숙도가 이미 높고, 또한 민족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도 이것이 훨씬 범용(汎用) 가치가 있는 수단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엽부터 일어난 이런 목소리는 영주도독부가 동영연방공화국으로 독립해 나가면서 외지(外地) 통치 문제에 대하여 민감해진 제국 정부에 의해 매우 혹독할 정도로 탄압되었으나, 그런 탄압이 지속될수록 이들은 사실상 제국 정부의 가혹한 사법 권력이 잘 닿지 않는 진서 귀족들의 영지로 숨어들어 논의를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태동하는 진서의 민족주의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것은 바로 진서 남부의 살주백(薩州伯) 시마즈 노 가얀(島津之嘉陽, Simazu no Gajan)이었다.
시마즈 노 가얀은 공공연하게 진서도독부로부터 압박을 받아가면서도, 도시 지역으로부터 탈주하여 그의 휘하에 모여든 혁명적 성향의 문사(文士)들을 몰래 숨겨주었다.
살주백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데에는, 전통적으로 사실상 진서 지역의 영주들이 치외법권적인 지배권을 누려온 것에 더해서, 진서 전역에 민족주의적 정서가 깊게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주요 도시에서는 심심찮게 진서의 자치나 독립을 주장하는 진서어 벽보가 나붙기 일쑤였고, 진서대학은 심심찮게 독립을 주장하기 다른 학교들과 함께 동맹 휴학을 선언하기 일쑤였다.
진서도독부뿐만 아니라 본국 정부도 이러한 분위기에 위험함을 감지하고 있어서, 지난 20년간 진서에는 지속적으로 병력의 증강이 이루어져 당초 다 합쳐서 2만 8천 남짓 주둔해 있던 진서의 병력수가 이제는 거의 8만에 가깝게 늘어서 지방 작은 읍내까지 구석구석 병력이 들어가 있었다.
김효가 편지를 받고 영안부에서 출발하여 박주항에 다다른 것은 바로 진서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의 일이었다.
김효가 박주항에 다다랐을 때, 박주항의 경계는 상당히 삼엄한 수준으로, 무장한 병력이 심심찮게 도심을 순회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최근 들어서 태평양 무역에 일본이 진출함으로써 중계무역의 기지로서의 가치가 감소하고 경기가 심각하게 침체되면서 도독부와 내지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하여 동란이 점화할까 우려한 도독부와 진서군 군부에서는 경계 병력을 늘이고 수시로 반정부 인사를 잡아들이는 등 계엄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던 탓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진서도독부의 경계 인사 명부에 김효가 올라 있지는 않았는지, 김효는 어렵지 않게 입항 절차를 마치고 박주항에 오를 수는 있었다.
시내에 얼마 전 들어선 호텔에 여장을 풀고서 김효는 바로 편지에 적혀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항구에서 머잖은 주택지구에 일반 가정집 주소였다. 아마도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힘든 혁명론자들이 가정집을 중심으로 서로 간에 회동을 가지거나 하는 듯했다.
한 세기 전쯤 벽돌로 축조된 중류층의 거주지 골목 끝에 그 집이 있었다.
낡은 문 옆에는 「얀 시곤(梁施公)」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나무문에 달린 철 손잡이를 두드려서 김효는 사람을 불렀다.
이내 문이 살짝 열리더니 깔끔하게 면도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잔뜩 경계심이 드러난 모습으로 진서어로 김효에게 물어왔다.
“Nuinarisinika?(누구십니까?)”
“……편지를 받고 왔습니다. 북해에서 온 김효라고 합니다.”
김효는 진서어를 전혀 몰랐기에 한국어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한국어를 알아듣는 듯싶었다. 그는 이내 반색하더니 문을 활짝 열고 김효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제가 편지를 보낸 사람입니다. 얀 시곤이라 합니다. 양시공이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얀 시곤을 따라 들어선 집은 남유럽풍의 가구가 별로 없는 단정한 실내 장식을 가지고 있었다.
회백색으로 칠해진 벽에는 작은 화로와 식탁 따위가 있었고, 한쪽 벽에는 2층 침실로 올라가는 계단과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있었다.
“차려 드릴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우선 앉아 계시면 차라도 내어 오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효가 찾아오기 직전까지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책상 겸용으로 쓰는 듯 보이는 식탁 위에는 책 한 권이 펴져 있었다.
들어서 살펴보니 라인연방인 철학자인 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이 쓴 《정신현상학(Phanomenologie des Geistes)》이었다.
“아, 손님이 오실 줄 모르고 치워두지 못했습니다.”
김효가 펼쳐진 책에 시선이 가 있는 것을 보고서는, 녹차를 다려 나오던 얀 시곤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길에 혹시 급보를 들으셨습니까?”
“어떤 급보 말씀이십니까?”
“한국 황제가 급서했다고 합니다.”
얀 시곤은 바로 이틀 전 서거한 융무제에 대해서 황제 폐하라고 칭하지 않고, 완곡하게 한국 황제라는 말로 돌려 표현했다.
그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김효는 얀 시곤이 진서 독립을 염원하는 일군의 혁명가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융무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은 뉴스거리이기는 했다.
“배에서 내려 숙소를 잡은 뒤에 이곳으로 바로 찾아오느라 소식을 전연 듣지 못했습니다. 좀 놀랍군요.”
“예. 하지만 황제 또한 일개 자연인일 뿐, 그 죽음에 특별한 가치를 둘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저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진서혁명당이라는 지하조직이고, 저를 비롯해 총 5백 인에 가까운 사람들이 점조직 형태로 진서 각 지역에 흩어져서 진서의 자유독립을 위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이곳 박주의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몇 달 전 선생께서 쓰신 책을 진서에 밀반입하여 이곳 박주의 당원들을 중심으로 독회를 가질 수 있었고, 기주에 있는 당 지도부에도 선생을 초청하길 권하는 의견서와 함께 책 1부를 동봉하여 보냈습니다. 지도부에서도 긍정적인 회신이 도착했기에, 바로 선생께 편지를 써 와주시기를 초청했던 것입니다. 저희는 혁명을 정당화할 이론적인 체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동서를 막론하고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적인 저작들을 읽으며 당원들 간의 토의를 거쳐 왔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아내지는 못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선생의 저술을 읽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 책은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예.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선생의 저서를 통해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접했고, 노동 계급에 대한 이해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 혁명당의 의견은 확고합니다. 어떤 형태의 혁명이 되어서, 어떤 형태로 진서가 독립을 쟁취하던지, 일부 특정 계급이나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서인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당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가누비토 출신입니다. 가누비토는 바로 이 진서의 유서 깊은 중산 계급이지요. 대체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고 많은 당원들은 대학 교육도 받았습니다.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재산은 거의가 다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도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이 자유주의적으로 진서의 중산 계급의 의견을 대변해 줄 국가의 수립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서민족주의의 현주소이지요. 하지만 당지도부를 비롯해 저 같은 사람들은 가누비토들만을 대변하는 독립은 반쪽짜리라고 생각합니다.”
얀 시곤이 하는 말을 김효는 가만히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김효 또한 사회주의가 어떤 식으로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복안이 없었다.
전통적인 정전제(井田制)가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산업노동을 하고 있는 새로운 노동 계급에 의한 통치가 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평등한 권리를 확보하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 것인가?
그날 밤새도록 얀 시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효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뚜렷한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추진하고 있는 진서의 독립운동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신이 입당해서 혁명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좀 편협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 당에 입당하기 위해서는 진서어를 상용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배우겠습니다.”
김효의 말에 얀 시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시겠다는 분을 저희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몇 달 정도 머무시면서 박주의 저희 동지들과도 만나보시고 진서어도 배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해가 바뀌어서 때가 되면 기주의 지도부에 연락해서 입당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얀 시곤의 말에 김효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북해에 남겨둔 만삭의 아내와 집안 문제가 잠시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갔지만, 김효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 진서혁명당이 진서 독립운동에 어떤 역할을 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효는 박주에 상륙하는 순간, 곧 이곳에 변혁의 물결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을 받았다. 그 순간에 이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확고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1815년
건명(建明) 원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기주부
김효의 진서어 실력은 반년 사이에 많이 늘었다. 대부분의 일상 대화를 하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었고, 라틴 알파벳으로 쓰인 어렵지 않은 진서어 팜플랫을 조금씩 읽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김효는 내심 입당 절차에 진서어 상용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일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9할이 넘는 진서인들이 지역 성당에 출석하고 있었으며, 일요일만 되면 박주의 혁명당원들도 빠짐없이 성당에 미사를 올리기 위해 나가곤 했던 것이었다.
김효는 확고한 무신론자로서, 평생 종교를 가지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관 속에서 종교란 고등미신(高等迷信)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불평등한 계급 구조나 착취를 은폐하기 위해 상위 계급의 정신적인 지배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진서에 한정 지어서 가톨릭을 비판하기는 애매한 점이 많았다.
적어도 김효는 이곳에서 종교가 진서민족주의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가 심심찮게 이 혁명가들을 몰래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교회는 나름의 계산이 있을 터였다.
서양 종교에 대하여 별로 호의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진서도독부에 비해 진서의 독자정부가 집권한다면 가톨릭교회의 영향력도 늘어날 것이라는 판단이 분명 작용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심의 의중은 차치하고서라도 가톨릭 교회의 진서독립운동에 대한 보이지 않는 헌신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각지에 산재한 성당들은 사실상 공공연하게 독립주의자들이 모여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해가 바뀌어 건명 원년의 3월이 되었을 때, 진서혁명당의 지도부로부터 정식으로 입당 허가가 나서 기주에 입당 절차를 밟기 위해 찾아갔을 때, 김효의 입당을 수락한 것 또한 기주의 성당 사제였다.
자신을 바울로 신부라고 밝힌 그는, 그 자신 또한 진서혁명당의 주요한 간부라고 말했다.
“대부분이 혁명운동에서 신앙과 함께하고 있지만, 이것은 권고사항일 뿐 꼭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몇몇 동지들은 비록 신앙의 형제는 아니지만, 헌신적으로 혁명운동에 종사하고 계시지요.”
김효가 혹여 입당과 함께 가톨릭에 입회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자, 바울로 신부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김 선생님께서도 신앙을 가지시면 삶이 좀 더 풍족해지실 겁니다. 아, 이제는 동지라고 해야 하나요.”
옆에서 그의 입당 절차를 지켜보고 있던 얀 시곤이 웃으면서 말했다.
“종교라는 것이 저에게는 좀 생소해서…….”
김효가 멋쩍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찌 되었든 김 동지께서도 혁명대업에 함께 동참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진서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비밀리에 고해성사를 빙자하여 입당 절차를 마친 뒤에 김효는 기주부의 시내로 나와서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이곳의 삼엄함은 박주부보다 더욱 심각했다. 도독부 청사의 소재지이자 진서 경략의 최고 거점이어서 그런지, 헌병(憲兵)들이 골목마다 깔려 있었고, 심지어는 도시의 길목에 초소가 세워져 있기도 했다.
그만큼 불심검문도 수시로 이루어지고 했는데, 김효도 붙잡혀서 자신의 북해도독부 시민권을 증명해야만 했다.
붙잡힌 이유는 두리번거리면서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닌다는 것이었는데, 만약 진서인이었다면 두들겨 맞은 다음에 감방에 강제로 구금될 수도 있었다는 헌병의 웃으면서 하는 말에 등골이 서늘했다.
한때 진서인은 내지에서도 그렇게 섭섭한 대접을 받지는 않았었다. 임한기 같은 인물은 진서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해체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러한 편견과 민족적 차별은 점차 증대되기 시작했다.
외지의 도독부들이 독립행로를 걷기 시작하면서, 사활적 이익이 마지막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진서나 북해에 대해서 점점 예민한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진서에 대한 경계는 갈수록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진서는 내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이제 황성부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진서민족문화에 대한 탄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공공장소에서 알파벳으로 쓰인 진서어 문서를 게재하는 것은 최대 10년형 이상의 실형을 살 수 있는 범죄가 되었으며, 모든 진서어 문서는 국자(國字), 즉 한글과 한자(漢字)로 병용되어 쓰여야 한다는 것이 도독부에서 권고하는 방침이었다.
그나마도 공공문서나 도독부에서 행정 언어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한국어로서, 진서어로는 소장, 호적, 대지문서, 기타 등등의 어느 공식적인 문서도 효력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비공식적으로 발간되던 진서어 신문들도 모두 폐간 명령을 받은 상황이었으며, 진서어로 된 책을 발간하는 것도 매우 지독한 검열을 통과해야만 가능했다.
이러한 가운데 경제적으로도 진서는 갈수록 침체하고 있었다. 내지에는 사방으로 깔리고 있는 철도도 진서에서는 단 1리조차 깔리지 않았으며, 우편제도 또한 도독부에서 「우정체신에 관한 시행령」이 잠정적으로 조만간 시행될 것이라는 훈령만 내려왔을 뿐, 아무런 제도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혁명당 당원들은 도독부가 관장하는 우편제도에 대해 반대하고 있기는 했다. 당연하게 도독부에서는 우편검열을 시도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진서 상인들, 곧 기주 기반의 기상(崎商)이나 박주 기반의 박상들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이들 중 일부는 근대적인 공업에 투자하여 어느 정도 손실을 만회하기도 했으나, 기주와 박주, 두 항구의 중계무역지로서의 지위는 이미 손실된 지 오래였다.
“지금 진서는 총체적인 난국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익을 대변해 줄 정부도 가지고 있지 않고, 탄압적인 식민지 기구만을 우리 머리 위에 이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경제는 몰락했고, 사람들은 점차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진서의 귀족들이 지배하는 영지에서 농민들은 생계를 영위해 나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내지 자본이 점차 상륙해서 이들을 위협해 나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걱정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이제는 점차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어요. 순나라에서 일어나는 요동 상인들의 착취가, 이제 내지 상인들에 의해 진서에서 벌어지는 일도 머지않았단 말입니다.”
기주의 분위기를 보고 성당 근처의 숙소로 돌아온 김효에게 얀 시곤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방법은 오로지 독립뿐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동지들의 의견은 확고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착취적인 식민 기구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진서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겠지요. 어쩌면 일본이 군사적 개입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고 말입니다.”
“일본과 다시 한 나라를 이루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진서인들은 대체적으로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죠. 진서인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진서인 자신에 의한 완전한 독립 쟁취밖에 없습니다.”
김효는 순간 먹먹한 심정이 들었다.
그 해는 유난히 진서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기주에서 머물던 중에 아내의 해산일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혹여 문제가 생길까 싶어 위명(僞名) 신분증을 구해서 북해에 잠시 다녀오기로 한 뒤, 김효는 출항 전에 진서의 지방을 한 바퀴 돌아볼 결심을 했다.
대체적으로 진서의 내륙지역의 상황은 더욱 참혹했다. 특히 도독부 직할령의 많은 농토들은 내지인 지주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는데, 이들 내지인 지주들은 이곳 진서에는 일 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고 내지에서 머물면서 오로지 소작료만 주기적으로 걷어가곤 했다.
이들은 소유지 관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진서에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손에 의해 내지로 유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겨울의 혹한 때문에 올해의 농사는 거의 망해가는 지경이었다. 심각한 기근이 진서의 농촌지대에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벌써 수만 명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더러는 아예 생업의 터전을 버리고 동영 공화국으로 가는 이민선에 오르기도 한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행된 지 100년이 다되어 가는 「항해법(航海法)」은 진서의 숨통을 완전히 조여 놓고 있었다.
이 악법은 내지 상품의 진서로의 수출에는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는 반면에, 진서에서 생산된 상품은 농작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엄격히 내지로 수출되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서인들이 내지에 대한 반감이 일으키지 않고 순순히 도독부의 위압적 통치에 복종해 주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일견 보기에 지금 진서의 상황은 북해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적어도 북해에서는 검열을 피해서 자유롭게 학문을 논하고, 가진 것이 없으나 넓은 땅을 재산 삼아서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북해인들은 그래도 소작농이 아니라 자영농이었고, 일부는 임업에, 많은 이들은 목축업에, 또 다른 이들은 수산업에 종사하면서 착취에서 벗어나 생업을 꾸릴 환경은 조성되어 있었다.
가난이 족쇄처럼 북해에서도 민중들을 옭아매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진서에서처럼 그것이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할 죄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한 석 달 뒤에 다시 박주로 찾아오도록 하지요.”
“그때만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박주에서 다시 귀항 선편에 올라 영안으로 가는 김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며칠간의 항해 끝에 다시 거의 일곱 달 만에 가족이 있는 목씨장으로 돌아온 김효는 아내 안드레아의 해산을 곁에서 지켰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처음 얻은 아이를 보자 김효는 굳은 결심이 섰다. 적어도 이 아이에게 압제적인 정부와 조국을 물려주지는 말자는 생각이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진서가 독립을 쟁취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북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진정으로 옛 제국의 봉건적인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부가 세워질 터였다.
김효는 아들에게 북해어와 한국어의 두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 읽어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렇게 김요섭(金堯燮), 또는 요세이프 김(Joseef Ghim)이 그해 세상의 빛을 보았다.
김효는 잠시 집에서 머물며 아내와 아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 진서는 여전히 돌덩어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좀 더 있다 가라는 아내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김효는 결국 석 달이 지나기 전에 다시 진서로 가는 배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출항은 예정된 날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진서에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탓이었다.
의외로 봉기는 혁명의 기운이 높은 박주나 기주의 도독부 직할령이 아닌 풍주백령(豊州伯領)의 중심지인 부내(府內, 부나이)에서였다.
풍주백인 다이우 노 유(大遇之維)는 공식적으로 봉기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의 자발적인 봉기를 막지도 않았다. 이들이 성공하면 지원하고, 실패하더라도 책임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어찌 되었든 이 봉기의 물결은 상당히 거센 모양이었다. 영안에 발이 묶여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된 김효로서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진서혁명당의 동지들도 봉기에 동참하기 위해 분연히 부내로 가는 길에 올랐을 터였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제한적으로 들려오는 소식에 「진서독립정부(鎭西獨立政府)」라는 임시정부가 부내에 세워졌다고 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진서군의 주둔 병력이 적은 편이었던 풍주백령에서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축출하고, 적지 않은 영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고 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항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다름없었다. 그러나 김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정상적인 항로를 거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편에 올랐다. 시모노세키의 바로 맞은편은 진서도독부였다. 그곳에 가면 어떻게든 진서로 밀입국할 방법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 김효의 판단이었다.
1816년
건명(建明) 2년 맹하(孟夏)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박주부
진서의 독립 투쟁은 점차 격화되었다.
진서독립정부는 진서군의 대대적인 투입에 따라 부내를 잃고 산간 지역으로 쫓겨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병력을 재조직해서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느낀 내지 정부에서는 진서도독부를 폐지하고 진서를 내지에 합병하는 「연합법(聯合法)」을 급하게 통과시키고, 기존의 사실상 자치 지역이었던 진서귀족들의 영지도 유상몰수하여 국고에 귀속시키고, 대신에 이들 귀족들에게는 충분히 보상한다는 방침을 내어놓았다.
또한 진서 일대에 도(道)와 부군(府郡)을 설치하여 내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통치하겠다는 방침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물론 이 연합법이라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법이 통과되더라도, 진서인들에게는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을 터였으며, 호적에도 진서 출신이라는 것이 정확히 명기된다는 것은 차별이 여전히 상존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어의 강제와 탄압적인 교육, 그리고 강력한 동화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는 것의 전조에 불과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던 진서의 귀족들도 이제 완전히 내지 정부에 등을 돌리게 한 계기가 바로 이 연합법이었다.
자신들의 영지를 해체하고 국가 소유로 직접 통치한다는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할 귀족들은 없었다. 방관적인 위치를 자임하고 있던 풍주백 다이우 노 유가 먼저 자신의 거성을 버리고 가신들을 이끌고서는 무장한 채로 아예 산속의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이어서 독자적인 무장함선을 거느리고 있는 살주백 시마즈 노 가얀이 도독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내전이 종식되기까지 시마즈 영지에 대한 모든 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언제고 반군이 자신의 영지에 들어와서 제국군의 공격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더라도 막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허나 모든 주요 귀족들이 반정부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도독부와 매우 끈끈한 유착관계에 있던 축주후는 사재를 내어놓으며 반군 탄압에 앞장섰다.
본인 스스로부터 진서의 영지보다는 내지의 별장에서 기거하는 날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1816년의 시점에서 진서의 동부 산간지대는 완전히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진서임시독립정부(Zinsjo Insi Tokuripu Zeibu)」에 의해 장악된 상황이었고, 나머지 70%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도독부가 진서군 및 제국 본토에서 증파된 병력을 바탕으로 계엄통치를 수행하고 있었다.
진서는 완전히 분열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독립군은 극적으로 부내를 탈환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옛 진서탐제(鎭西探題)하에 놓여 있었던 서해도의 율령 9개국, 즉 구주(九州, 큐슈)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분고(豊後), 히젠(肥前), 히고(肥後), 휴가(日向), 오스미(大隅) 그리고 사쓰마(薩摩)의 아홉 지방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노란 별과 자유독립을 상징하는 푸른 바탕의 국기(國旗)를 제정하고 이를 부내 성에 내걸었다.
이와 함께 부내에서 여러 임시정부의 유력 인사들이 서명한 〈진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진서는 독립을 지향할 것을 천명하게 된다.
이 〈선언서〉는 오로지 라틴문자로 쓰인 진서어로 작성되었으며, 한국어의 이본(異本)은 애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이것을 입수한 진서도독부의 첩보 관료에 의하여 번역된 연후에야 이 내용이 상세하게 내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완전히 사방으로의 항로가 차단된 진서로 밀입국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다다른 김효는 그곳에서 한 달가량을 발이 묶인 채로 있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에 갈수록 물자가 부족해지자, 일본을 통해 밀수를 하려는 진서 상인들이 몰래 선편을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구한 것이었다.
어렵사리 그들과 접선한 김효는 웃돈을 주고서 그 배를 얻어타고서야 진서에 상륙할 수 있었다.
박주부로 들어와 예전 얀 시곤이 머물던 집을 찾아갔지만, 얀 시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집 문에는 역도(逆徒)의 집이라는 붉은색의 글씨가 흉물스럽게 쓰여져 있었고, 곧 도독부의 명령에 따라 군용으로 징발될 것이라는 공고문만이 쓸쓸하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이 진서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서혁명당의 동지들과 접선하거나, 아니면 무리해서 전란이 가중되는 중부 지역을 뚫고 동부로 잠입하여 독립군 진영에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그간 진서어를 배워둔 것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옆에서 조력해 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움직이려 하니 그만큼 도움이 되는 기술도 없었던 것이다.
김효는 무리해서 기주까지 들어가서 성당의 바울로 신부와 접선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신부는 혁명당의 당원임이 발각되지는 않은 듯, 기주 밖을 벗어나지는 말라는 당국의 명령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곤란을 겪고 있지는 않은 듯 보였다.
또다시 고해성사를 빙자해서 성당을 찾아간 김효는 바울로 신부로부터 며칠 뒤에 독립군에 지원할 청년들이 몇 패로 나뉘어서 기주를 출발해 부내로 향하기로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섞여서 제가 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혁명당의 훌륭한 당원이신 동지께서 그 독립군의 행렬에 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레쯤에 책임자가 저를 찾아와 마지막 조율을 하기로 했으니, 모레 오후쯤 해서 성당으로 찾아오십시오. 제가 알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로 신부는 목소리를 낮춰 조곤하게 말했다. 성당 안에 신자를 빙자해 헌병이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는 일부러 과장되게 밖에 들리라는 듯 큰소리로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사에는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미혹되셔서는 안 되지요. 요즘 같은 중차대한 시국에 찻집에 앉아서 다른 여자에게 수작을 거시다니요, 형제님. 절대 안 될 일입니다.”
김효는 바울로 신부의 말에 그만 피식하고 웃을 뻔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표정이 굳게 굳어 있는 신부를 보면서 차마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 바울로 신부가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밖에 사복을 입은 헌병대가 기웃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부디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즘 같은 때에 누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혹시 얀 시곤 동지의 행방은 아십니까? 신부님.”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마 부내에서 봉기가 일어난 시점에서 일찌감치 그쪽으로 움직여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으로 알고는 있어요. 그 뒤로는 별 탈 없이 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가호 가운데 아무 일이 없으셔야 할 텐데…….”
바울로 신부의 말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고해성사를 빙자한 만남이었기에 오래 체재할 수가 없어 아쉬운 대로 성당을 나선 김효는, 교외의 조그만 민박에서 머무르며 약속한 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통행증 따위의 검열을 하러 들이닥칠까 걱정했었으나, 다행히도 그동안 헌병대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시내가 아닌 교외의 조그마한 민박을 잡은 것이 잘한 일인 듯싶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성당을 찾아가자, 웬 수염이 시커먼 남자 한 명이 바울로 신부와 함께 있었다.
다행히도 성당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화하기에는 안전해 보였다. 바울로 신부는 그 남자에게 김효를 소개시켜 주었다.
“북해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건너오셔서 혁명당에도 입당하신 김효 동지입니다.”
“반갑소. 나는 신 노 카구유라 하오.”
“김효입니다.”
신 노 카구유(愼之珏謂)는, 동부 지역의 소영주 집안 출신으로, 나름대로 제국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 또한 많은 진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도독부 행정에 불만이 많았고, 일찌감치 혁명당에 가담하여 영지에서 나오는 소출을 당의 경비에 지원하곤 했다.
그는 독립전쟁이 발발하던 당시에 기주에 있던 바람에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같은 처지에 놓인 동지들을 규합해서 전선을 뚫고 독립군 진영으로 가기 위해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 놓은 뒤, 이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지금 바로 머무는 곳으로 가셔서 짐을 챙긴 뒤에 기주성 동문 바깥의 방앗간으로 오십시오. 그곳에서 준비된 마차를 타고 최대한 이동한 뒤 두세 명 단위로 흩어져서 각기 부내를 향해 산을 타야 합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서두르십시오.”
신 노 카구유의 지시를 받아 김효는 서둘러 짐을 챙겨 나온 뒤에, 바울로 신부에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약속한 장소인 방앗간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신 노 카구유는 지원병들을 고향으로 피난하는 난민으로 위장시켜서 마차에 태우고서는 동쪽으로 길을 잡고 출발했다.
다행히도 기주의 교외지대를 빠져나가는 동안 두 차례에 검열이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 제국군에 입대해서 반군과 싸우지 않고 고향으로 소개한다며 침을 뱉고 비난하는 장교에게 모욕을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 없이 시골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농민들은 대체적으로 전란 분위기에 불만이었으나, 최근의 심각한 기근으로 인하여 반정부적인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때로는 이들 농민들로부터 조촐한 잠자리와 식사를 대접받을 수도 있었고, 때로는 작은 시골마을까지 들어온 제국군 때문에 일부러 마을을 피해서 질은 길을 둘러 가야 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사흘을 마차를 통해 조심스럽게 움직인 뒤, 산악지대에 다다르자 신 노 카구유는 30명 남짓한 지원병들을 3명씩 쪼개서 지도를 한 장씩 나눠주고 간단한 독도법에 대해 설명한 다음 흩어질 것을 명했다.
“김 동지는 나와 함께 갑시다.”
바울로 신부에게서 부탁받은 의무감 때문인지, 아니면 북해에서부터 멀리 독립운동에 참여해 주러 온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신 노 카구유는 직접 김효를 챙기려 했다.
진서어가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좀체 낯선 지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관통하려 하니 부담감이 느껴졌던 김효 또한 카구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응락했다.
“휴가의 산간지대를 북동쪽으로 통과해야 독립군들의 점거지로 다가갈 수 있소.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히 이 산길의 길목까지 제국군이 들어와 있지는 않지만, 언제 그들이 이곳까지 차단하려고 할지 모르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소.”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틈틈이 선잠을 자는 것 외에는 하루 종일 드문드문 있는 산속 마을들을 피해서 동물처럼 산을 타는 일의 연속이었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는 것은 약과였다.
한여름이라 산속에는 모기가 기승이었고, 어디서 맹수가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단검을 손에 항상 꼬나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총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이레 정도를 산속에서 헤맸을까, 어떤 산의 정상 근처에 올라 주변 지세를 보고서는 신 노 카구유는 이제 오스미의 접경, 즉 풍주백령의 경계에 들어섰으며, 이제는 안전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대로 다행히 산을 내려가자마자, 작은 마을에는 독립군 일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새 정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1817년
건명(建明) 3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진서도독부 풍주백령 부내(府內, Bunai)
김효는 자원병으로 진서 독립군에 입대했다.
그는 철저한 신원 파악 끝에 신 노 카구유와 독립군 본영에 있던 얀 시곤 두 사람에 의한 혁명당원이라는 증명 끝에 독립군에 공식적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김효는 그의 역량을 고려한 지휘부의 판단 아래에 참모부에 배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교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 전투를 나가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곳 본영에서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일을 도와주시는 것 또한 피를 흘리는 것만큼 값진 일입니다. 필히 머지않은 날에 임시정부는 새로운 국가의 정식 정부가 될 것이고, 우리 군은 동시에 그 나라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세를 판단하고 정치적, 군사적인 전략을 계획하는 데에는 많은 고급 두뇌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아쉬운 마당에 김 동지는 전선보다는 이곳 본영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미 참모부에 들어가 있던 얀 시곤은 김효가 아쉬워하자 단호한 어조로 설득했다.
신 노 카구유는 전선의 중대장으로 배속받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북부 해안지대로 파견되었으며, 함께 기주를 출발했던 30명의 지원병들도 속속들이 도착하여 제각기 직임을 맡아서 전선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모두가 안전히 이곳에 다다른 것은 아니었다. 7명은 끝끝내 행적을 알 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러는 제국군에게 생포되어 취조당하거나, 혹은 전쟁에 가담할 용기가 사라져서 오는 길을 포기하거나 했을 터였다.
“혹시 모르니 가명을 쓰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 가담하신 것을 제국 정부에서 알게 되면 영영 북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얀 시곤의 말이 옳았다. 김효는 자기 이름을 내세워서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으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진서식으로 가명을 지어 가네 루베이(金留丙)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독립군 명부에 등록한 김효는 예정대로 중위(中尉)의 계급으로 참모부에 정식 배속되었다.
참모부는 부내의 독립군 본영에 속해 있었고, 이곳은 제국군에게서 재탈환한 뒤로 상대적으로 매우 안정이 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원래 이곳 부내에서부터 독립운동이 촉발된 것이기도 했고, 이 도시 자체도 원래 풍주백령의 수부(首府)로서, 그 주인인 풍주백 자신부터가 독립군의 중장(中將)이자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總長)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이니 만큼 부내는 완전히 독립혁명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새롭게 구성된 임시정부의 의회(議會)에는 김효가 당적을 두고 있는 「진서혁명당」을 비롯하여 「진서민족당(鎭西民族黨)」, 「구주자유당(九州自由黨)」, 「독립당(獨立黨)」 등의 지하정당들이 모두 공식적으로 당을 조직하고 의회에 의원을 내고 있었다.
“의회는 구성되었지만, 적어도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각 당과 의회는 모두 정부와 군부의 최고지도부에서 결정된 사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전쟁 수행에 임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중위님께서도 우선은 당적을 임시 정지하시고 군에 입대하셔야 합니다.”
김효는 권고를 받은 대로 우선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초에는 분명히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을 진서독립군이었을 테지만, 지금 김효의 눈에는 충분히 정규군에게도 대적이 가능할 정도로 체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과 동영연방공화국에서 지원을 받아 온 것이 분명한 총기와 대포, 그리고 화약이 가득 부내의 무기고에 적재되어 있었고, 체계적인 지휘 체계가 확립되고 보급선 또한 정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공(聯共), 즉 동영 공화국이나 일본국으로서는 진서가 독립하기를 바라 마지않을 터이나, 한국 정부의 눈을 의식해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한다거나 군사 개입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생산된 무기를 직접 지원하지는 않고, 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한 뒤 그것을 연안 지역을 통해 몰래 진서독립군에게 전달했다. 이러한 지원에는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등의 물자 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겨울이 될 때까지 전선은 고착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0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진서에 상륙해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있었지만, 족히 비등한 숫자의 독립군 또한 산간지역을 확고하게 사수하며 제국군이 동쪽의 해방지구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무장 상태나 기율, 보급은 제국군이 월등했으나, 진서의 동북부에 드넓게 펼쳐진 산악지대를 바탕으로 유격전을 펼치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독립군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내지 정부에서는 당초 계획대로 연합법을 통과시키고, 진서도독부를 공식적으로 해산시킨 다음에, 진서도(鎭西道)를 설치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공식적으로 진서 귀족들의 영지자치권을 폐지하고 독립군에 가담한 귀족들의 작위를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진서도독부의 수부인 기주부가 그대로 진서도의 수부가 되었으며, 대도독 대신에 정부에서 임명한 도지사(道知事)가 선임되어 기주로 부임해 왔다. 진서군 또한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제국육군에 흡수되었다.
연합법이 통과되고 대한제국의 진서에 대한 지배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나자, 독립군은 더욱 맹렬하게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1817년이 밝아오고, 봄이 찾아오자 진서 독립군은 맹렬한 총공세를 개시하여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임시정부는 남쪽에서 중립을 지키며 웅크리고 있던 살주백 시마즈 노 가얀을 설득해 임시정부에 합류시키고 진서 남쪽의 살주 전 지역에 독립군을 진주시켰다.
이제 완전히 동쪽과 남쪽은 독립군이, 서쪽과 북쪽은 제국군이 점거한 형태로 진서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문제는 어느 쪽도 완전히 우세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에 있었다.
제국 정부는 진서가 계속해서 전비를 소모하는 수렁이 될까 봐 점차 우려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일대에서 벌여놓은 식민사업에 막대한 국고가 지출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지에서 벌여 놓은 기간 산업에 대한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데다가, 이 전쟁 때문에 추가로 징집해서 늘인 병력 때문에 전비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효과적으로 독립군을 진압하고 있지 못하자, 내지에서도 소모적인 전투를 그만하고 진서임시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라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의 보루로 진서에 대한 지리적 가치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제국 정부는 미지근한 상태로 교착 상태를 2년 가까이 더 유지했다.
그러나 전선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점차 제국군도, 독립군도 지쳐 가기 시작하자, 결국 정전을 협상하기 위한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주요 관직에 앉아 있던 칸조쿠 다이묘인 풍주백 다이우 노 유와 살주백 시마즈 노 가얀, 그리고 독립당의 당수로서 최초로 부내 봉기를 주도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했던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인 테이 헨지(泰賢治), 그리고 자유당의 당수이자 가누비토 출신의 중산 계급 혁명운동가인 리타 미노(李多閔露) 등이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이 협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진서혁명당과 진서민족당의 두 당 출신의 운동가들은 이 협상 자체를 부당한 협상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독립 진영을 양분할 수는 없었기에 이들은 협상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것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1819년 7월 1일, 독립선언서가 부내에서 낭독된 지 대략 3년이 경과한 때에 이르러, 양측의 협상은 타결되고 〈한국―진서 협약〉이 조인되었다.
이 협약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제국 정부는 구진서도독부와 현 진서도 정부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진서는 제국을 이탈하지 않고, 연방(聯邦)을 구성하여 공식적으로 「진서자치국(鎭西自治國)」을 설립하고 국가 원수를 대한제국 황제로 하여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내지의 제도와 같이 상원과 하원의 양원을 두고 진서자치국의 총리, 곧 국무령(國務領)을 선출하도록 했다.
다만 새로운 진서자치국의 영토에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 그리고 기주부와 기타 여러 개의 도서 지역은 제외되었다.
이곳에 대하여는 내지의 경상도(慶尙道)에 귀속되며 내지 정부의 배타적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진서인들은 아쉬운 대로 이 조약에 찬성했다. 새로운 자치국 정부가 박주부를 수도로 하여 구성되었으며, 이곳에 의회와 행정부, 그리고 새로운 자치국 군대의 본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혁명당과 민족당의 양 당은 의회선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자치국 신군대의 독립군 해산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고서 산간지대를 여전히 점거한 채로 협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 기나긴 전쟁 끝에 다시 한국 황제를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이 협약에서 고통받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존재는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오로지 자유주의 자본 계급을 위한 협약이고, 그들의 이권을 위한 자치국 수립이오, 진서민족의 독립을 영구적으로 제약하는 민족적 반역이 아닙니까!”
얀 시곤은 매우 분노해서 혁명당 동지들에게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김효 또한 이에 절절히 동감하는 바였다.
사실 그에게는 자치국이든 공화국이든, 완전한 독립이든 제국 내 자치이든의 문제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얀 시곤의 말마따나 이 조약은 독립전쟁에 앞장선 동부의 빈곤한 농민들을 위한 협약이라기 보다는, 옛 진서의 귀족들과 서부 해안도시의 가누비토들을 위한 절충적 결론에 가까웠다.
그것은 당초 김효가 진서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했던 계급적 해방을 위한 전진에는 배치되는 결론이었다.
“사실 서부 해안의 중산 계급과 봉건적인 영주들에게 있어서는 민족 독립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그것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제국 내에서 번영하던 옛 과거를 되찾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기만적인 타협을 하고, 자치국 정부라는 위선적인 기관을 세워 공식적인 진서의 민족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자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정부와 연대하는 것은 민족적 반역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었다.
김효는 이들을 위해서 독립군에 입대할 때 사용했던 가네 루베이라는 가명으로 호소력 짙은 항전결의문을 작성해 진서 각지에 뿌렸다.
김효 자신이 이제는 완숙해진 진서어로 작성하고, 일부분을 얀 시곤이 가다듬은 이 글은 독립선언문에 못지않은 명문(名文)이었다.
이 항전결의문에 담긴 내용대로 구독립군의 일부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았고, 자치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혁명당과 민족당의 잔류 세력은 합당(合黨)을 결행하여 「민족혁명전선(民族革命戰線)」이라는 도발적인 단체명을 내걸고 완전한 진서의 독립을 쟁취할 날까지 전투를 결행할 것을 각오했다.
이들은 동부의 산간지대를 점거하고 이 지역을 자치국 정부에 양도하지 않은 채로, 각종 테러와 유격전을 무기로 삼아서 기나긴 투쟁국면에 돌입하게 된다.
이른바 진서내전의 기나긴 노정의 시작이었다.
김효는 민족혁명전선에서 가네 루베이라는 이름으로 3년 여를 더 활동한 뒤, 수배령이 떨어져 자치국 정부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본래의 신분으로 제국령으로 남아 있는 기주에 잠입하여 북해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