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장 역취군영(亦聚群英)
「○“또 평안도 우정체신국의 장계를 보니, ‘전선(電線)을 설치하는 공사 비용으로 각종 공화(公貨)를 취해서 썼는데 전무 대원(電務大員)이 산정(刪正)한 것이 3만여 원이고, 본청(本廳)과 벌목하는 여러 곳에서 소비한 것도 3만 원을 밑돌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다 기한 안에 상납하고 시급히 지방(支放)에 쓰일 비용이니 지금 조치하여 떼어 주어야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공사 비용을 대신 충당할 방도를 묘당에서 품처하길 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선을 늘리는 것은 큰 공사이니 비용도 그에 따라서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유독 평안도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경기(京畿)와 황해(黃海) 두 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쪽으로 대책을 강구해서 민간에 사업을 내어주어 충당하여 갖추면 어떻겠습니까?”
○“又見平安道郵政遞信局狀啓, 則‘電線役費, 取用於各樣公貨, 而電務大員刪正者, 爲三萬餘圓, 本廳及伐木諸處所費, 又不下三萬圓. 此皆有限上納與時急支放所需, 則及今措劃然後, 可免生梗. 役費充代之方, 請願廟堂稟處’矣. 電線, 鉅役也, 費用之從以夥多勢固然矣. 而此不獨平安道爲然, 畿, 海兩省, 亦一也. 以圖允備之意, 民間拂下何如?”」
―《혜종실록(惠宗實錄)》, 51권,
건명(建明) 15년(1829) 5월 9일 첫 번째 기사
1828년
건명(建明) 14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북해도독부 영안부
그해 태서(泰西)에서 들려온 소식은 조야(朝野)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어린 황제 나폴레옹 2세에 의해 유지되던 프랑스 제정(帝政)이 결국 또다시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식이었다.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유럽의 반프랑스 동맹군과 협상 끝에 스스로 추방됨을 선택함으로써 제위를 지켜낸 나폴레옹의 보람도 헛되게, 주변의 군주제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 프랑스 제실(帝室)은 결국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지고 추방되었다.
1828년은 혁명의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던 해였다.
유럽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영(造營)되었던 서부 독일의 군소국가의 집합체인 라인동맹은 극심한 혁명의 내홍에 시달려야 했고, 일시적으로 「라인연방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했다.
아라곤의 국도(國都) 바르셀로나에서는 왕정 폐지를 외치는 공화주의자들의 물결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스웨덴과의 연합을 해체하고 제대로 된 의회정치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시위대가 정부군과 싸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혁명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다시 공화국정부가 수립되는 데에 성공했으나, 중부유럽과 남부유럽에서의 혁명은 탄압 끝에 모두 진압되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공화주의자들의 목소리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훗날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혁명들은 본질적으로 산업화로 야기된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에 대한 항전(抗戰)은 아니었다.
1828년에 벌어진 일련의 혁명들은 봉건적인 구체제(舊體制)에 대한 산업시대의 총아(寵兒)인 부르주아지들의 혁명이었다.
공화제와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그들의 논리는 곧 옛 왕족과 귀족 계급을 몰아내고 그들에게 필요한 자유로운 시장을 내어 달라는 요구였다.
극동의 군주들은 유럽에서의 혁명이 불똥이 튀어 자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특히 아직까지 의회주의조차 채택하고 있지 않은 일본과 월나라 등지에서 더욱 우려는 심각했다.
일련의 반정부 인사들이 오사카에서 도막(到幕), 즉 막부를 쓰러뜨리자는 구호가 담긴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총살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칸사이 각 도시에서 반정부 봉기가 계획되었으나, 이마저도 막부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가담자는 모두 최소 호주로의 유형(流刑)에 처해졌으며, 많은 이들이 종신형을 선고받거나 총살되었다.
월나라에서는 의회를 설립하라는 건백서(建白書)가 조정에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시대적인 과거제를 철폐하고 학교의 확충과 관료 충원의 방안을 재고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것은 주변 열강들에 치여서 식민지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자국 정부에 대한 불만과 연관되어 있었다.
광동(廣東)의 실업가들은 국제무역경쟁에서 양나라나 한국, 일본에 심각하게 뒤처지고 있는 것이 정부의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정부가 무능한 것은 전제적인 왕권으로 비효율적인 국가 운영을 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소리가 높아지자 월나라의 숭통제(崇統帝, Sung Tung Dai) 경긍문(耿肯文, Gang Hoi Man)은 자유주의적 성향의 중신인 임칙서(林則徐, Lam Zak Ceoi)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內閣)을 설치하고, 곧 헌법의 제정과 함께 선거를 통한 의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내 시위가 잦아들자 숭통제는 다시 약속을 철회하고, 연내 수립하겠다던 의회를 15년 뒤로 미뤄 버렸다.
그나마 숭통제는 최악의 수를 두지는 않아 임칙서 내각은 잔존시켰는데, 그 덕분에 반정부운동이 재현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나라의 민심을 들끓고 있었고, 몇 차례의 쟁의 끝에 결국 1839년에 〈대월제국헌법(Daai Jyut Dai Gwok Hin Faat)〉의 제정과 함께 의회의 수립을 달성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공화주의적 목소리에 경계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의회에서는 참정권 확대를 고려해야만 했다.
반세기 이상 참정권 확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언제고 공화주의운동과 결합해 문제가 크게 비화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는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협회(韓國政治協會)」가 조직되었고, 여기에 무려 2만 인이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가입함에 따라 정부에서는 이 목소리를 무시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듬해에 이르러 결국 정부는 이 요구에 굴복해서 내각 주도로 참정권 확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828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들은 각국에서 작은 진보를 불러오기도 하고, 도리어 퇴보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혁명들이 목적한 성과를 달성한 곳은 오로지 프랑스뿐이었다.
그러나 진통 끝에 수립된 프랑스 제2공화국의 정책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경계에서 오로지 산업자본을 우대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큰 진전을 본 것은 신대륙이었다. 유럽이나 극동의 식민모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이 가열되고 있었고, 많은 국가들이 자치권이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미 지난 세기에 독립을 쟁취한 동영연방공화국은 이러한 신대륙의 독립정책에 대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잉글랜드로부터 무력 충돌 끝에 1799년 뉴잉글랜드 공화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1802년에는 혁명전쟁으로 인한 모국의 혼란을 틈타서 프랑스령 퀘벡이 독립하여 「카나다 공화국(Republique du Canada)」을 수립한다.
니우 네덜란드, 뉘아 스베리예 또한 독립을 선언하고 일시적으로 연대하여 「북아메리카 연방공화국」을 1810년 선포한다.
남아메리카에서도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카스티야령 영토들이 쿠바, 테하스 등의 독립국가로 쪼개지고, 누에바 카스티야 부왕령(副王領)의 영토는 멕시카 왕국에 매각된다.
아라곤령 남아메리카 식민지는 「대콜롬비아 연방」으로 1819년 독립을 선포했으며, 포르투갈령 브라질은 1820년 포르투갈의 왕자를 동 페드루(Dom Pedro)를 황제로 옹립하여 「브라질 제국(Imperio do Brasil)」을 건립한다.
베네치아령 피우메 델라르젠토는 「아르젠티나 공화국(Repubblica Argentina)」의 건국을 1821년 선포하게 된다.
유구령 카지아가리누쿠니(風東國)은 유구정부와의 협상 끝에 자치정부의 수립을 같은 해 선포했고, 남아메리카 남부의 마푸체인들은 아르젠티나 공화국과 카지아가리누쿠니 자치정부의 남방개척에 반발하여 「마푸체연합국」을 1824년 선포한다.
대부분의 신대륙 식민지들은 이렇게 독립을 쟁취한 뒤 동영연방공화국과 뉴잉글랜드 공화국의 주도로 조성된 「대륙회의(大陸會議)」에 가입해서 구대륙 국가들에 대항하여 권익 사수를 도모하게 된다.
여기에는 비단 독립한 식민지 국가뿐만 아니라, 토착국가인 멕시카 왕국, 타완틴수유 제국, 하우데노사우니도 가입했다.
「만주제국(滿洲帝國)」으로 개칭한 후금국은 공화주의가 자국에 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가입을 미루다가 1830년에 이르러서야 마푸체연합 등과 함께 대륙회의에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가운데에 동영연방공화국은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무기의 판매 등을 통해서 경제적 실익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신대륙의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서북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지대의 생산력은 신대륙 제일을 자랑하고 있었다.
1819년에 수도인 창주와 대곡 사이에 철도가 놓인 이래,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구축되기 시작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 제재가 풀린 산업 방면의 성장은 구대륙의 그것을 쫓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구대륙 국가들이 더 이상 자유로운 신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신대륙 각국의 평화로운 연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동영연방공화국의 제8대 통령(統領)인 권경조(權慶兆)는 단호한 어조로 신대륙의 이권 사수를 주장하면서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이러한 기조 가운데에서 대륙회의가 창설되고, 각국의 독립운동의 완수를 지원했던 것이다.
신대륙 식민지의 독립은 구대륙국가들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손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한국이 경험한 것처럼, 구대륙의 열강들은 이미 모국의 과잉 인구를 배출하여 이민을 통한 식민지를 경영하는 옛 시대의 제국 경영 방식을 버리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이들은 대신에 남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를 헐값에 공급하고, 자국에서 생산된 제조품을 수입해 갈 충분한 인구가 있는 땅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 인도, 동아프리카의 오래된 왕국과 토착제국들은 이러한 열강들의 침탈에 하나둘씩 무너져 가고 있었다.
열강들은 제각기 보호국을 설치하거나, 총독부를 두어 직접 지배를 시도하거나 하면서 식민 지배에 나서고 있었다.
인도에만 하더라도 한국,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의 4개국이 들어와 아대륙(亞大陸)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었고, 동남아시아는 극동 열강들의 손에, 지브롤터 해협으로부터 희망봉에 이르는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 열강들 손에 하나둘씩 분할되어 찢기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국은 이러한 식민지 확보 경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미 제국의 확장에 있어서 동질성 확보는 문제가 아니었다.
옛 제국은 드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지와의 문화적 거리가 멀지 않은 지역들이었다.
제국은 이들 지역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그러나 옛 도독부들은 북해도독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독립을 쟁취하거나 자치권을 확보해 제국의 판도에서 떨어져 나갔다.
18세기 말부터 새롭게 제국의 영역에 들어온 식민지들은 옛 식민지들과는 운용 방식이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내지 정부는 이들에 대해서 일체의 동화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수탈적 지배뿐이었다.
말레이, 실론 등의 새로운 식민지에는 도독부 대신 총독부(總督府)가 설치되어 탄압적 정치를 실시했다.
태극기의 깃발 아래에 무자비한 수탈이 진행되었으며, 압도적인 무력은 일체의 독립운동에 가차 없는 공격을 가했다.
이와 함께 내지 정부는 마지막 남은 도독부인 북해도독부에 대하여 영속적인 지배를 꾀하며 진서 문제 때문에 입법되었던 「연합법」을 다시 끌고 나와 북해도독부의 내지병탄을 기도했다.
진서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실패로 귀결된 1818년의 연합법과 달리, 1830년의 연합법은 완전한 북해의 편입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위치는 불균등한 것이었다.
1824년의 「지방행정법(地方行政法)」에 따라 내지의 8도는 13도로 분할되어 있었다.
3,800만에 달하는 늘어난 인구에 대한 지배력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해 규모가 큰 도를 둘로 나누어 남북도(南北道)로 분할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북해도독부는 관할 인구가 650만에 달하는 꽤나 큰 규모의 지역이었으나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지지 못하고 일괄적으로 「북해도(北海道)」라는 단일 행정구역에 예속되었다.
더군다나 동일한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계획은 미루어지고, 참정권은 1850년까지 20년간 동결된다는 차별적인 조치가 수행되었다.
더군다나 북유럽계 주민들에 대하여 한국명(韓國名)으로 호적을 등록할 것을 강요하는 「북해도 호적정비령(北海道戶籍整備令)」이 1832년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지자본이 북해도에 진출하는 것을 우대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사실상 내지의 발전을 위한 배후지로서 북해를 내부식민지(內部植民地)로 만들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당초에는 연합법을 통해서 내지와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된다는 것에 만족했던 북해의 주민들도, 도독부가 철폐된 뒤로 권리는 유예된 채 의무만 부과되자 점차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내지 시민들과 동등한 국적에 편입되었으니 징병령에 응해서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며 1835년에 「북해징병령(北海徵兵令)」의 시행이 예고되자 그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된다.
김효는 이러한 북해의 질곡을 바로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전혜린이 남긴 유산으로 영안부에다가 「북해신론사(北海新論社)」라는 언론사를 차리고 「북해신론(北海新論)」이라는 월간지를 펴내는 한편, 각종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책을 발간하고 있었다.
나머지 돈은 농지를 조금 사들이고, 자녀들의 향후 학비를 위해 은행에 예치한 뒤 돈을 묶어두고 있었다.
일부는 북해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또 일부는 영안대학에서 정치학 강좌를 증설하도록 비용을 대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워낙 전혜린이 남긴 돈이 적지 않은 터라, 김효는 자금적으로 숨통이 완전히 트인 상황이었다. 적어도 1830년 연합법이 발효되기까지는 그랬다.
연합법 발효 이후 김효는 이런저런 손실을 입게 되었다. 도독부의 느슨했던 검열제도는 까다로운 내지의 사전검열제도의 적용을 받게 되었고, 온갖 반정부적 논조를 싣고 있는 북해신론사에서 펴내는 잡지와 책들은 온갖 먹칠이 가득된 채로 나가기 일쑤가 되었다.
이것을 피해보려 한국어판의 발간을 포기하고 북해네덜란드어로만 간행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정부에서 확충한 검열 인력에 의해 이내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런 시도가 반정부적인 태도라는 이유로 10일간 정간(停刊)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안정된 한 국가로의 통합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내지에서는 제한적으로 허가되는 노동조합의 결성이 북해에만 10년 시한으로 금지되어, 김효와 동지들이 공들여왔던 북해의 노동조합운동은 일시 타격을 입게 된다.
더군다나 같은 이유로 1년간 북해인들의 자금 운용을 일시 정지하는 법률이 공표되어, 김효는 적지 않은 손실을 보기도 했다. 그는 북해신론사의 경영난을 해결하기 위해 토지를 일부 처분해야 했으나, 자금이 동결된 탓에 손실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선생님. 이제 이 일을 그냥 좌시하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연합법이 도리어 북해에서 영유되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영안대학의 학생들이 김효를 찾아온 것은 연합법이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30년 겨울의 일이었다.
이들은 북해신론의 열렬한 구독자일 뿐만 아니라, 개혁적인 성향을 다분하게 지닌 청년들이었다.
1830년 현재, 영안대학은 반정부적인 목소리가 다분히 높아져 있었다.
유난히 자치적인 성향을 자랑하던 영안대학이, 내지에서 적용되고 있는 「고등교육법(高等敎育法)」에 의해 교육제도가 조정되고, 심지어는 국립대학으로 수용(收用)된다는 소문까지 들리자 영안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연합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점차 키워 나가고 있었다.
김효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수 년 전 진서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진서독립운동의 최대 기폭제는 사실상 진서의 내지 병합을 기도했던 1816년의 연합법이었다. 하지만 북해의 상황은 이제껏 달랐다. 내지에 대한 분노는 있었지만, 북해에서는 그것이 한 번도 강하게 표출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분노는 내지에 대해서 독립을 이루지 못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지와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때문에 1816년의 진서와는 다르게 1830년의 북해는 연합법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황성부 정부는 북해를 잃게 될까 두려워서 긴급한 합병을 시도했지만, 그럴 만한 준비는 황성부도, 영안부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차별적이고 의무만 부과하는 조치들은 일찌감치 시행된 데 반해, 권리 보장에 대한 것은 대부분 보류되었다.
함경북도(咸鏡北道)는 115만 명에 불과한 인구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되었지만, 북해도(北海道)는 600만이 넘는 인구를 관할하고 있었다.
사실상 상당히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던 북해도독부를 온갖 통제와 의무만 부과해서 북해도청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내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통합이 되었는데, 북해도민들이 느끼는 차별은 현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내지에 대한 기대가 점차 무너져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효는 북해가 내지의 내부식민지로 머무느냐, 아니면 독자적인 독립을 쟁취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학생들을 앉혀놓고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김효의 의견에 강하게 동의하고 있었다.
모두들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이 시작되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1830년
건명(建明) 16년 맹동(孟冬)
대한제국 황성부
1830년 입안된 제2차 「연합법」을 통해 황성부 정부는 북해도독부를 폐지하고 이를 대신하여 북해도를 설치하고 내지에 편입시켰다.
명목상의 내지로의 합병일 뿐 실상은 차별적인 조치들이 딸려 들어온 이 연합법의 시행에 관하여 북해에서는 정작 옹호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으나, 내지에서는 연중 이를 통해 제국수호(帝國守護)를 창달하게 되었다는 환호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실상 내지의 지배층은 민족주의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인정하거나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볼 때, 진서의 경우는 명확하게 이 민족 문제가 두드러진 편이었으며, 진서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문제를 서울로 하여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었다.
반면에 북해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서울, 곧 황성부의 입장에서 북해는 내지의 연장선상이었다.
분명히 북해가 당초 영진도독부로 개척된 이래로 이곳은 야만적인 여진인들이 득시글한 유배지(流配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었으며, 두 세기 전부터는 내지인들이 원하지 않는 땅에 백인들이 이주해 들어와 사는 땅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러한 편견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는 것이었는데, 16세기 초반부 이래 실질적으로 조선계, 즉 내지에 혈통적 기원을 두고 있는 인구는 북해도독부 전체 인구에서 절반을 넘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의 사람들이 북해를 내지의 일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최근의 또 다른 편견이 조성된 이유에는, 구(舊) 제국의 판도가 해체되고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북해 특유의 문제도 한몫을 했다.
실상 내지 사람들은 말레이반도나 실론, 그리고 인도양으로의 진출에 대해 신(新) 제국이 폭탈(暴奪)적인 침략의 경로로 나가는 것에 환호는 했지만, 이내 그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당시의 정서라는 것은 민족주의적 성향의 연설가 모영근(毛英根)의 연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한 열대의 미개한 나대지에서, 문명의 개화를 받지 못한 반흑인(半黑人)들이 나태함을 벗어던지고 근면함을 배우며,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 우리 한국이 그들에게 베푼 가장 큰 선물입니다.
남양(南洋)에서의 일은 이와 같이 문명국에 의한 야만종족의 개화를 달성하고자 하는 숙념의 사업이고, 그 일에 한국만큼 적합한 국가도 없습니다.
우리 조국이 가장 문화적이고, 문명화되었으며, 빛나는 업적을 이룬 것을 어느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미개인들에 대한 문명화사업에 나서기 전에 우리 조국의 현실을 조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룩한 영광스러운 제국이 지금 사분오열되어 국체를 손상시키고 국력을 탕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주를 잃고, 요동을 잃고, 진서를 잃었습니다. 그런 조국의 훌륭한 영토들을 잃은 뒤에 토인들이 사는 남방의 덥고 습한 땅에서 하는 문명화사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단언합니다. 만약 내가 이 나라의 정책을 담당하는 자라면, 이제 하나 남은 옛 강역(疆域)인 북해를 인도와 맞바꾸자 하더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 북해가 어떤 땅입니까? 가진 것이라고는 가슴속의 열정뿐이던 조상들이 극심한 추위와 거친 오랑캐들과 싸우며 개척한 땅이 아닙니까?
우리 제국의 훌륭한 문화에 감복하여 태서에서부터 배를 타고 제국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한 이민자들이 들어온 땅이 아닙니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줄기가 우뚝 솟아 있는 곳이 아닙니까?
또 위대했던 가경연간의 신대륙 척지를 이룩한 탐험가들과 뱃사람들을 양성해 냈던 땅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북해를 버리겠습니까. 그것이 인도가 아니라 중국 전토가 제국의 판도에 들어온다고 한들 우리가 어떻게 북해를 방기(放棄)하겠습니까.」
다소 자극적인 단어들을 선별해 대중을 선동하길 잘했던 모영근이었으나, 실상 당시의 내지인들의 인식은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마지막 남은 옛 제국에 영광된 시절에 대한 향수와도 같은 것에다가, 제국의 중심부면 으레 있기 마련인 주변부에 대한 지독한 편견이 뒤범벅되어 있는 것이었다.
내지 사람들은 심지어 북해에서 그렇게 넓게 네덜란드어에서 분화해 나온 「북해어(Aquilliaans)」가 사용되는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며, 북해의 지명들이 천년도 더 된 옛 여진인들이 붙인 이름부터 시작해서 이민자들이 정착한 지역에 따라 네덜란드어, 저지독일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들이 보는 지도에는 한국식 한자로 반듯하게 찍혀 나온 군현(郡縣)의 명칭들뿐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북해의 인구 태반이 백인이나 혼혈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큰 관심사는 아니었다.
북해의 교육받은 이민계 후손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외모로 보아도 피가 뒤섞여 유럽인들과는 슬쩍 보아도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순혈 한국인만은 못하겠지만, 충실하게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의 지배에 순종하며, 그 험한 북쪽 땅에서 열심히 농사짓고 우마를 치는 사람들이면 아량 있게 포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실상은 모르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오히려 북해의 내지계 인구들은 북해어를 어느 정도 상용할 줄 알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북해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언어층위는 공식적이고 내지와 연관되는 모든 상부의 일에서 사용되는 한국어와 일상에서 은밀하게 통용되는 북해어로 완전히 분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북해어뿐만은 아니었다. 북해의 한국어 방언은 소위 「영진방언」이라 불리는 것으로 지독하다고 할 정도의 사투리였다.
이런 영진 방언을 사용하는 화자들은 사실상 학교 교육을 통해 서울말을 새로이 다른 언어처럼 습득해야 했다.
내지의 관료들이 만나는 사람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북해의 엘리트들로, 이들은 피부색과 상관없이 내지의 어느 엘리트들 못지않게 온갖 고전을 인용할 줄 알며, 고급 한국어 어휘를 사용하고, 전문적인 대화를 아무 문제없이 장시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들을 보고 북해가 내지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었다.
그 북해의 엘리트들은 내지의 문화만큼이나 북해의 토착문화에도 동조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실상 집에 가서 사용하는 말은 세련된 황성부 신사들이 사용하는 서울말이 아니라, 지독하게 알아듣기 힘든 영진 방언이나, 아예 계통이 다른 북해어거나 했던 것이다.
여하 간에 위와 같은 편견이 항시 내지인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기에, 연합법이 발효되었을 때 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해야말로 제국의 판도에 영원히 속해 있을 땅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북해는 고조선 이래로 천부(天賦)로 부여받은 땅이었다.
그것이 실제 역사와는 유리되어 있는 생각일지라도 편견은 그러한 인식을 정당화시켰다.
그래서 북해에서 이 연합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내지의 많은 사람들은 처음엔 당황했고, 종래에는 이들을 반역자들로 몰아세우며 법정에 세우라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해가 연합법에 반대한다는 것은, 갑자기 경상도가 독자성을 내세우며 내지에서 갈라져 나가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북해의 여러 단체들이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어요. 대체적으로 이민계의 반발이 높습니다. 영안대학은 자치성이 훼손되었다고 주민들을 선동하고 있구요. 더 이상 신문지상에서도 연합법에 호의적인 논설을 싣지 않습니다. 심지어 정부의 인가도 받지 않고 사투리로만 쓰여진 신문을 발간하는 곳도 있습니다. 특히 요주의 인물이 몇몇이 있는데 그중에는 성광사 사주의 동생인 김효라는 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심지어는 반역분자들이 죄 북해로 모여들어서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는 첩보도 있어요.”
“어느 계통에서 나온 정보입니까?”
“어디서 나오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눈이랑 귀만 있으면 영안부 시가지에서 일주일만 있어도 다 알 수 있는 정보입니다. 내지가 생각보다 귀가 어두워요. 물론 그냥 뜬소문을 옮기는 건 아닙니다. 이미 제국익문사의 첩보원들 일부가 영안부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들이 양질의 정보를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내각 대신들의 회의실에는 담배 연기가 부옇게 밤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 이상으로 북해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진서처럼 북해도 그,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독립이니 자치니 운운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직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유예된 조치들을 시행하고, 내지와 곧바로 동일한 대우를 펼쳐서 이반된 민심을 다시 돌려놓아야 할까요. 예컨대, 그, 참정권 같은 것을 쥐어 준다던가 말입니다. 행정 문제로도 말이 많다던데 좀 더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북해도를 몇 개의 도로 쪼갠다던가 말입니다. 관할 구역으로 보아도 북해도가 좀 지나치게 넓기는 해요.”
“무슨 말씀을요. 그건 그저 당근을 쥐어주는 것일 뿐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될 수 없어요. 우리가 목적해야 할 것은 북해의 완전한 통합입니다. 시혜정책이 아니라 지금은 채찍을 들 때에요. 아시겠지만 세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황성부에서 북해의 영안부까지 가려면 육로로 빨라야 열흘을 걸리는 길이었지요. 군대를 움직이든, 정보를 보내든, 뭘 해도 빠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요? 우리에게는 몇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철도를 깔고 전신을 설치할 수 있어요. 특히 전신은 넓은 영역을 통제하는 데 비상하게 유용합니다. 몇 시간이면 영안부에서 벌어진 소요에 관한 전보를 이곳 내각회의실에서 받아 볼 수 있고, 곧바로 조치 사항에 대해서 북해도청이나 북해에 주둔한 군부대에 전달이 가능합니다. 지금은 무슨 자금동결법이니, 참정권유예니 하는 것들을 풀어줘서 저들을 기고만장하게 할 것이 아니라, 예정된 철도와 전신을 보다 빠르게 깔아서 북해에 대한 장악력을 달성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보수당 출신의 내무대신(內務大臣)인 김정희(金正喜)는 공격적인 어조로 북해에 대한 강압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의회는 보수당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총리대신(總理大臣) 김조순(金祖淳)도 이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내무대신의 말이 내게도 옳게 들립니다. 하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어요. 지난해 예산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해서 황성부에서 의주까지 전신을 설치하는 일을 정부사업에서 민간사업으로 전환한 일을 기억하시지요? 전신을 영안까지 깔 계획은 아직 없었기에 예산부터 제대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 모자라면 민간에 매각하되 절대로 정부의 목적에 합치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매우 친정부적인 기업에 부설권을 팔아야 할 겁니다. 철도도 문제에요. 철도야 이미 일찌감치 부설권을 매각해서 어느 정도 진척이 이루어지고는 있지요. 근데 황성에서 영안까지 가는 철도를 달성기륜, 함흥기선이니 계영양행이니 몇 개의 회사에 나누어져서 부설권을 주었단 말입니다. 달성기륜이 공사한 황성부에서 원산까지 가는 철도는 이미 완공되었지요? 그런데 함흥기선이나 계영양행이 자본이 그다지 튼실하지 못해서 지금 몇 년째 공사가 진척이 없어요. 뭔가 손을 쓰고 싶으면 당분간 삼남 등지에 쓸 예산을 동결해서라도 함경도와 북해에 부어야 합니다. 정부 지원금을 주어서라도 철도 부설을 빨리 마치도록 하고, 전신을 설치하는 일도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안 되오.”
위정자들은 넓은 국토를 통치하는 일에 새로운 기술적 수단들이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었다.
요동에서 전신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정부에서는 재빠르게 한국에서의 전신 특허권도 쥐고 있는 우한기를 어르고 달래 거금을 쥐어주고 특허권을 20년간 정부에 임대하도록 했다.
물론 20년 후에는 특허권이 우한기에게로 돌아가겠지만, 한국 정부는 그 20년간 전국 방방곡곡에 전신을 충분히 설치하려는 복안을 계획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철도만큼은 아니지만 전신 설치도 꽤나 국가적인 비용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전신주를 설치하기 위한 벌목사업이 강원도와 함경도 산간지대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한편, 순나라 등지에서 값싼 노동자들을 불러와 철도 부설과 전신설치사업에 고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정부주도로 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고, 많은 부분을 민간에 사업권을 주고 불하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러한 정책적 계획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이제는 철도와 전신을 깔겠다는 사업자가 있으면 법적으로 가능한의 지원을 다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것이 국가의 향후를 좌우할 사업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로 통치에 이익이 되지 않는 기술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제국의 통치에 이득이 될 만한 기술에 대해서는 예리한 후각으로 탐지해 내는 것이 수 백 년에 걸쳐서 제국을 운영해 온 광화문 앞 관가(官街)의 의뭉스러운 관료들의 장기였다.
“이 참에 우정체신청을 체신부로 독립시켜서 우정업무뿐만 아니라, 도로, 교통, 전신, 철도 등을 모두 관할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앞으로 이 사무가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게 될 것 같은데요.”
원래 내부 관할하에 있는 우정체신청을 떼어놓자는 말이 내무대신의 입에서 나왔으니, 다른 대신들의 의견도 굳이 다를 이유가 없었다.
대신 자리 하나가 더 생긴다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김정희의 의견대로 우정체신청은 곧 독립관청으로 떨어져 나왔고, 체신부가 설치되어 이내 내각회의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주도적으로 처결하기 시작했다.
1830년의 한 해가 끝날 무렵에 이미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정부가 국채를 매각해 설립한 「제국전신공사(帝國電信公社)」가 체신부의 감독 아래에 황성부와 영안부 사이의 전신 공사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본래 국영철도로 놓고자 했던 대구―안동 간의 철도 공사를 무기한 연기하고 이에 소모될 자금을 모두 사업이 부진한 계영양행과 함흥기선에 지원하여 이미 철도가 놓여진 원산에서부터 영안까지의 연장선을 조기에 완공하도록 독려했다.
정부의 이런 적극적 조치는 비단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고, 북방 지역의 군부대들이 재편되어 북해도독부의 주요 도시에 병력에 증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해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검열 또한 한층 엄정하게 집행되기 시작했다.
1832년 계하(季夏)
동영연방공화국 창주특별자유시
1830년의 끝 무렵, 김효는 영안대학의 학생들과 노동조합의 대표들과 함께 「북해자치동맹(北海自治同盟)」이라는 결사를 구성했었다.
이 단체는 연합법의 철폐와 함께, 항구적인 북해의 자치권 확보, 궁극적으로는 독립까지 지향한다는 정강과 함께 시민권의 보장,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법정 근로 시간의 제정 등을 골자로 하는 주의주장을 김효가 소유한 월간지인 「북해신론」이나, 독립적인 북해의 자유주의신문인 「예닝스타트 다흐블라트」등을 통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곧 대대적으로 북해도의 공안기관의 주목을 끌어냈으며, 채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북해신론은 폐간되고, 예닝스타트 다흐블라트는 정간 조치되는 소동이 빚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북해자치동맹에 공식적으로 해산 명령을 내려서 1개월 내로 단체의 문을 닫지 않을 경우 압수수색 및 체포도 불사하겠다는 통지문까지 정부로부터 전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도달해서도 김효는 이에 응하지 않고 사재를 털어서 북해신론을 몰래 펴내 영안부 도심에서 공개적으로 배포하는 등의 투쟁을 벌였다.
결국 그는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어쨌든 법적으로는 요동국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금고형은 받지 않았으나 북해로는 다시 입국을 금지하는 영구추방명령이 사법부에 의해 내려졌다.
이와 함께 김효의 한국시민권 또한 말소되었다.
자기 사업과 삶의 터전을 모두 잃은 김효는 어렵사리 남은 재산을 처분해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한국 정부가 베푼 호의는, 자산동결법의 예외 대상으로 김효를 지정해 주어서, 남은 자산을 헐값에 북해도에 넘길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실제 시가의 반의 반값도 되지 않는 가격에 북해도 내에 있는 김효의 모든 자산을 북해도에서는 수용해 갔으며, 북해신론사 건물은 마치 조롱하듯이 영안부에 새롭게 설치될 전신총국(電信總局)의 건물로 단장되었다.
이제 어머니 전혜린이 남겨준 자산은 거의 사분의 일로 줄어들은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옮겨서 생계를 꾸릴 처지는 된다는 것이 그나마 김효에게는 위안이었다.
문제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요동으로 가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돌아가서 형에게 굴종한다면 하다못해 성광사의 지분을 조금 내어 받지는 못하더라도, 요동왕가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조금의 연금 혜택을 받을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김효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처음 떠오른 목적지는 진서였다. 짐을 싸야 할 날이 다가오기에 진서자치국 정부에 입국허가를 신청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보기 좋게 반려되고 말았다.
진서자치국은 아직까지도 완전독립을 요구하는 「민족혁명전선(民族革命戰線)」과 내전 중이었고, 진서자치국 정부에서는 김효가 예전에 이 단체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가 가네 루베이(金留丙)라는 가명으로 반군에 종군하고 자치국에 반대하는 선동문을 썼다는 사실까지 이제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히 진서자치국의 공안당국에서는 그의 입국을 허가할 생각이 없었다.
김효와 같은 혁명가들이 갈 만한 곳은 이제 어디에도 마땅치 않았다. 아직까지 대부분 군주정체(君主政體)를 유지하고 있는 극동의 제국(諸國) 어디에도 김효와 같은 불순분자를 반기는 정부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바다를 건너 신대륙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미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더군다나 독립전쟁의 기억 때문에 한국 정부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연공(聯共), 즉 동영연방공화국에서는 김효의 입국을 거부하지 않았다.
식솔을 모두 거느리고 태평양을 건너는 배에 오른 김효는 심장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약 본가에 남아서 어떻게든 아버지와 형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불의에 눈을 감을 수 있었다면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 수는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버리고 뛰쳐나온 것은 단순히 젊은 날의 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또렷하게 부각되는 모순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
예리한 눈은 성장하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생산력과 파괴력을 동시에 포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통제되지 않는 열정은 지난 구시대의 모든 건물들을 허물고 웅장하고 위압적인 건축물을 지구상에 세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본가들의 성전(聖殿)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이 수반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때로는 민족적인 탄압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때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차마 못 본 척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한 가지 김효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남았다면, 그것은 바로 아내와 자녀들에 관한 것이었다.
굳이 해도 되지 않을 고생을 가장 때문에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책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고, 분명히 밝혀야 할 일들을 큰 목소리로 외치는 건 죄가 아니에요. 저는 이런 삶에 차라리 자긍심이 있네요. 조금 힘들면 어때요.”
추방령이 떨어지고서, 차마 아내까지 고향 친정과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어서 혼자 떠나겠다고 했을 때, 부인 안드레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진서도 아니고 태평양을 건너가야 해요.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요. 추방 명령을 받고 시민권이 박탈된 건 나뿐이니 당신과 아이들은 이곳에 남아 있어도 되요. 다행히 어머니의 유산을 조금이라도 남길 수 있었으니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는 할 수 있을 거요. 나는 가서 혼자 어떻게든 벌어 쓰겠어요.”
“괜찮아요. 당신이랑 떨어지느니 함께 가서 고생하겠어요. 아니, 고생이랄 게 뭐 있나요. 언제고 한번 연공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날씨도 좋고 사람들은 활기차다면서요. 이런저런 기회도 많다고들 하던걸요. 거기 가서도 지금 여기서 살던 것처럼 조그만 땅을 사서 목장을 하던지, 아니면 당신 능력이면 그곳 신문사에도 취직할 수 있을 거예요.”
“장인어른이 많이 섭섭해 하실 텐데…….”
“아버지에겐 제가 알아서 잘 말씀 드릴게요.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아시잖아요. 모든 걸 다 이해해 주실 거에요.”
아내의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김효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아내를 껴안고 입술을 맞췄다. 따뜻한 온기가 입술을 통해 전해져 오자 김효에게 애틋함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미안해요, 미안해. 언젠가는 내가 당신의 고생에 보답할 날이 있으려면 좋으련만…….”
김효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내를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이튿날이 밝자 영안부 치안국의 순경이 찾아와서 보름 내로 추방 명령에 따라서 출국을 해야 한다는 통지를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부러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절망감을 느끼고 있던 김효는 그 순경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기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 공안기관의 말단 직원이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와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관료제도라는 것이 그랬다.
공문이 내려오면 집행을 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어렵사리 배편을 수배해서 3일 뒤에 이제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 북양항로(北洋航路)를 통해 창주로 가는 무역선에 어렵사리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여객(旅客)은 받지 않는다는 것을 겨우 설득해서 웃돈을 얹어주고 탈 수 있었다.
20일 뒤에는 매달 연공으로 가는 정기선이 있었지만, 지정된 출국일 이전에 북해를 떠나야 했기에 그 배는 탈 수가 없었다.
어렵게 탄 배는 원래 여객선이 아니라 화물선인지라 객실이 따로 없었고, 선원들이 쓰는 침실 칸을 하나 빌려서 온 가족이 새우잠을 청해가며 대양을 건너야 했다.
장장 한 달은 훌쩍 넘기는 항해인지라 그 생활이 편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처음 타는 배에서 지독한 멀미를 했고, 아내는 부실한 식사 때문인지 황달기가 있었다.
김효 자신도 장염 때문에 큰 고초를 치러야 했다.
그나마 선상생활이 길어지지 않고 예정된 날짜에 창주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831년 2월 16일, 김효와 그 가족들은 창주부 항구에서 하선했다. 이민국의 심사는 매우 간결한 편이었고, 주거지를 등록하여 신원 증명이 되면 언제든지 연공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어차피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면, 연공의 시민권을 취득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노릇이었다.
어차피 부평초같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된 인생이었다.
요동의 시민권이야 어차피 다시 돌아가지 않을 터라 쓸 데가 없게 된 지 오래였고, 한국 국적은 이번에 박탈되었으니 사실상 김효는 지금 무국적자 신세였다.
“이 정도면 괜찮은 집입니다. 최근에 이 창주시 도심의 집세가 많이 올라서 꽤나 높은 값을 주지 않으면 좋은 집을 얻을 수는 없어요. 그래도 다세대주택가 사는 주택이 아니고, 단독주택인데다가, 방이 세 개에 조그만 정원까지 있으니 이런 집을 이 가격에 다른 데서 구할 수는 없어요. 적어도 창주시 주변에서는 그렇습니다.”
연공의 수도인 창주특별자유시는 최근 급격히 성장하며 번창하고 있었다.
주로 극동지역으로부터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민자들이 창주항을 매달 수천 명씩 내리고 있었고, 태평양을 건너며 오고 가는 화물들이 창주항에 수천 톤씩 적재가 되어 있었다.
창주시의 인구는 물경 동시대로서는 상당히 많은 숫자인 30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독립전쟁 당시에 10만이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폭발적인 성장이었다.
신대륙에서 이에 필적할 만한 도시는 뉴잉글랜드 공화국의 수도인 보스턴이나, 북아메리카 연방의 연방의회 소재지이자 대서양 연안의 금융 중심지인 니우 암스테르담, 멕시카왕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이니 만큼 물가가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적 성장은 곧 인플레이션과 동일한 말이었다.
지난 10년간 연공, 특히 창주의 물가는 거의 2배 가까이 치솟고 있었다.
특히 밀려든 인구 때문에 부동산의 가격이 끊임없이 오르는 중이었다. 그나마 창주의 교외에 남쪽으로 농장을 경영하러 간다는 부부가 상대적으로 헐값에 내어놓은 집을 구한 것이 운이 좋다고밖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북해에서 가지고 있던 집과 토지를 모두 합친 값을 넘는 가격이었지만, 이 정도만해도 창주에서 집을 구하려면 당연히 치러야 할 값이었다.
“괜찮은걸요. 방도 세 개나 있고. 더군다나 수도까지 들어오다니!”
아내는 정말로 괜찮다고 했다. 북해에서 살던 집보다 명백히 형편없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살림이 괜찮은 처가와 어머니 전혜린이 물려준 유산 덕분에 북해에서는 썩 좋은 집에 살았었다.
평소의 지론과는 조금 어긋나는 것이긴 하지만, 으레 많은 당대의 중산 계급이 그렇듯 하녀도 서넛 거느리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내가 직접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해야 했고, 하녀는 언감생심이었다.
각자 방이 있던 아이들도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나마 북해의 집에 비해서 좋은 점이라면 상수도가 집안까지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마당에 있는 펌프로 바로 물을 끌어다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미안하게 되었어요.”
김효는 그저 아내의 얼굴만 보면 송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강인했다. 분명히 먼 타향으로 와서 심신이 지쳤을 텐데도, 항상 웃는 낯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무기력함에 사로잡힌 것은 김효였다.
그는 창주에 도착해서 거의 보름을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져온 돈을 바닥날 때까지 빼서 쓰는 상황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봄이 되어 날씨가 조금 풀리기 시작하자, 김효는 어렵사리 결심을 하고 창주 시내로 나섰다.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그나마 믿고 있는 것은 예전 북해신론사를 경영하던 당시에, 창주에 있는 중견언론사인 「동영공화일보(東瀛共和日報)」의 경영자인 윤성수(尹成洙)와 서면으로나마 연락을 주고 받던 사이라는 것이었다.
윤성수는 원래 연공 독립 이전에 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영주의 구귀족가인 대곡백가(大谷伯家) 출신이었다.
그러나 으레 많은 영주 귀족가 출신들이 그랬듯이, 윤성수의 부친 또한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으며, 독립전쟁에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윤성수의 아버지 윤지형(尹知亨)은 초대 연방 공화국 측량위원회(測量委員會)의 위원장을 역임한 뒤에 퇴직하여 제도(製圖)회사 및 언론사를 차려서 경영하기 시작했고, 연공 전 지역에 관하여 정밀지도를 작성하는 일에 관여하기도 했다.
윤성수는 그런 부친으로부터 공화주의적 성향과 함께 언론사를 물려받아서 지금의 중견 신문사인 동영공화일보를 키워낸 장본인이었다.
공화일보는 상대적으로 국제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는 신문이었고, 북해지역의 사정을 전해줄 언론사로 김효가 운영하던 북해신론사와 제휴를 맺었던 것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김효와 윤성수는 서로 서신을 종종 교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니, 정말 김 선생님 맞습니까? 어쩐 일로 창주에 와 계신 겁니까?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공화일보사로 찾아가서 사주를 만나기를 청하자, 약속이 되어 있지 않다면 자리를 만들 수 없다고 퇴짜를 맞게 된 차에, 때마침 윤성수가 지나가다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바람에 결국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염치없지만 한국 정부의 북해에 대한 언론 탄압이 심해져서 회사가 폐쇄되고 저는 추방령을 받아 연공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럼 집은 구하셨구요?”
“예. 다행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뵙고 염치없는 줄은 알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성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화일보의 논설 주임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직접 취재를 다닐 필요 없이 좋은 급여를 받고 일주일에 네 번 논설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윤성수가 당부한 것은 단 한 가지로, 자신들의 독자층이 주로 상공업자들로, 급진적인 논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조금만 무딘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윤성수의 호의를 받았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공화일보에 취직한 뒤로 망명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몇 달 뒤에 연공의 시민권을 취득했고, 모든 30세 이상의 시민권을 지닌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연공의 제도상 이듬해 열리게 된 의회 총선거에도 김효는 투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참정권이 없는 북해에서 쭉 살아왔던 터라 처음 투표를 행사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효는 과연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몇 달간 지켜본 결과, 연공의 정치제도는 상당히 민주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대부분이 상업자본의 이득을 대변하는 정당이었고, 노동문제는 거의 취급되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음에도 황인종과 백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인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김효는 놀랐다.
한때 농장노동이나 광산노동, 혹은 최근에 들어서 새롭게 수요가 폭증한 철도 건설 등의 수요로 인하여 연공으로 흘러들어 온 흑인, 신대륙 원주민, 혹은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은 시민권은커녕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극동지역 열강국가 출신의 황인종 남성들이나 적지 않은 숫자의 백인 이민자들이 포괄적인 시민권을 누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확연한 대조임에는 분명했다.
그 자신은 요동 출신에 한국에서 높은 교육을 받은 황인종 남성이라는 이유로 쉽사리 시민권을 취득한 반면에, 많은 유색인종들은 시민권 취득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연공도 그나마 구대륙에 비해서는 민주적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피지배 계급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아쉬운 대로 그나마 시민권 문제에 다소 전향적인 정당의 후보자에게 투표를 하고 나서 집에 돌아온 김효는 씁쓸하다는 듯 아내에게 말했다.
“세상 어딘들 그렇지 않을까요. 가진 재산으로, 피부 색깔로, 하다 못해서 조상의 족보를 들춰가면서까지 자기의 우월함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지요.”
안드레아의 말에 김효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그는 라인동맹 출신의 젊은 논설가라는 카를 마르크스가 동료인 엥겔스와 함께 발표한 〈공산당선언〉이라는 팜플렛을 구해볼 기회가 있었다.
연공이 좋은 점이라면, 이러한 문건이 검열 없이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대단결을 주장하면서 쓴 이 〈선언〉은 노동 계급이 단결해서 결국에는 자본가 계급이 봉건 귀족들을 몰아내고 역사의 일시적 승리자가 되었듯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다음 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효는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약간의 흥분감이 감도는 기분을 느꼈었다.
과연 그 말대로 인류가 공히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김효는 생각했다. 그가 점차 가다듬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한쪽 접합점에 마르크스의 생각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김효는 그 생각을 다시 재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인간이 그 본성을 이겨내고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순 가득한 사회를 계속 이끌고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을 테지만…….’
김효는 잠시 접어두었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점차 하고 있었다.
진서혁명에 참전한 이후로 이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있던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