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장 소광세서(消光歲序) (82/82)

종장 소광세서(消光歲序)

「……근대는 이제 전 세계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4세기 전에 발흥한 역사적 자본주의는 19세기의 중반부에 이르러서 확고한 전성기에 이른 듯이 보였다.

이제 흘러간 세상은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구대륙 극동과 극서에서 자본 계급은 완연한 세계적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수많은 회사들이 세워지고, 철도가 대륙을 관통하고, 해저전선이 깔리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영원한 승리의 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19세기의 중산 계급의 자신감은 사실 유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모순들이 여기저기서 쌓여가고 있음을 눈여겨 본 사람은 드물었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계는 이제 그 모순의 해결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러한 일들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앨런 포스터,《지구적 근대의 형성》, (Cambridge: 2012)

「거듭,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34년

건명(建明) 20년 계춘(季春)

대한제국 황성부

겨울바람이 북쪽으로 물러가고 봄이 찾아왔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된 불확실성의 시대는 점차 물러가고 역사는 자본주의 대호황의 시대로 점차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바다와 육지를 통해서 수송되는 물품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엄청난 양의 곡물들이 적재되어 잉글랜드와 프랑스로 흘러들어 갔으며, 인도에서는 목면(木棉)이 대량으로 양나라와 잉글랜드로 흘러들어 갔다.

월나라의 차는 세계를 향해 팔려 나갔고, 한국의 면제품은 세계 어느 시장에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세계적인 무역로에 위치한 항구들은 전에 볼 수 없던 양의 화물을 처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런던, 캘커타, 상남, 창주, 보스턴과 같은 도시에는 대륙 간을 오고 가는 범선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기선(汽船)은 범선의 시대를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향후 수십 년 안에 바다를 오고 가는 대형 선박의 주종은 기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과 잉글랜드 같은 전통적인 해운국들의 국적 기선의 총 톤수는 점차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자본과 기술의 승리를 활짝 열어젖히며 강렬하게 등장한 것은 바로 철도였다.

세계 최초의 상업 철도인 송예선이 지난 세기 말에 영업을 개시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철도산업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미 한국이나 요동, 잉글랜드에는 철도의 총 연장이 1,000km를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철도를 부설하면서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철도 회사들이 극동과 서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성광사와 같은 거대 철도 재벌은 여러 국가에 걸쳐서 수천km의 철도를 건설했거나 건설 중에 있었다.

경제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이 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산업화에 적응할 체력이 있었던 국가들은 이 혜택을 고스란히 입고 있었다.

서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극동,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양쪽 해안에 위치한 신흥국가들은 미친 듯이 세계의 재화를 쓸어 담고 있었다.

소위 「문명국(文明國)」이라 자부하는 이런 나라들은 이제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세계 시장에 속해 있지 않은 지역에 자본주의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 전파하고 있었다.

일본령 호주(濠洲)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수많은 이민자들이 호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세계 시장에서 매우 미미한 역할만을 했던 호주는 일순간에 불어난 인구와 수요로 인하여 세계 경제에 매우 빠른 속도로 편입되고 있었다.

이 현상이 촉발된 것은 금에 의한 유인(誘引)이었으나, 사실 금은 이 시장을 팽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실상 예전 연공(聯共)에서 금맥이 터졌을 때처럼 사람들은 실상 금을 손에 쥐지 못했다.

그러나 호주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그곳에서 도시를 건설하고, 목초지를 개간하고, 공장을 세우며 경제 자체를 팽창시켜 나갔던 것이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주요 항로들이 지나가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토적인 이유로 오랜 세월 세계 경제의 매우 변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주요 수출품은 노예와 상아였으며, 더욱 내륙으로 들어갈 경제적 동인이 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상인과 탐험가들은 이제 그곳에서 없던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신조처럼 삼고 있는 문명의 전파는 곧 구매자를 창출해 낸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었다.

벌거벗은 토인들에게 유럽식 모자와 양복을 입게 하면서 선진국가들은 집단적으로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명화라는 것은 곧 많은 전통사회들이 필요치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구매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계는 점차 두 지역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소위 문명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은 경제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전례 없는 장밋빛의 번영기에 들어서고 있는 반면, 그 외의 지역들은 격차가 점차 벌어져 가고 있었다. 한때는 건강하고 활력에 넘쳤던 옛 문명들이 아시아 각지에서 쓰러져 가고 있었다. 이 무기력함은 그들 자신의 무능함 때문은 아니었다.

폭발적인 자본주의의 성장 앞에서 어떤 방향으로 대처를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쉽지 않은 판단이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요구되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배외(拜外) 감정과 사대주의가 꼬리를 물고 나선을 돌아 나가듯이 나타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페르시아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중남미에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러한 폭발적인 산업과 자본의 성장의 중심부들에서는 수많은 혜택을 누리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런던, 파리, 서울, 성경, 스톡홀름, 항주, 에도, 창주, 니우 암스테르담, 보스턴 같은 도시들은 급속한 팽창을 경험하고 있었다.

인구, 자본, 생산능력의 모든 면에서 그랬다.

서울의 인구는 물경 100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난 세기 말에 이 도시의 인구는 그 절반에 불과했었다.

런던의 생산력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으며, 거미줄 같은 철도망이 20년 사이에 런던과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1834년에는 최초로 해저 전선의 설치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내 수년 내에 부산과 진서자치국의 수도 박주(博州) 사이에 해저 전신이 부설될 터였다.

이미 용기 있는 투자자들은 희망에 차서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의 해저 전신을 설치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신과 철도는 점차 물리적인 거리를 무효화시키고 있었다.

아직까지 런던에서 인천까지의 항해는 족히 4개월 이상을 잡아야 하는 노정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교통 능력이 혁신되어 왔음에도 그랬다.

스웨덴과 한국 사이에 가장 빠른 교신 방법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육로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한 달 안쪽으로 상대편의 소식이 전해진 적이 없었다.

몽골제국의 역참제도 이래 600년간 대륙을 관통하는 정보의 속도에서 큰 혁신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신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전신이 들어가지 않는 강원도 산골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소작쟁의보다도, 훨씬 멀리 떨어진 요동의 성경에서 벌어진 시위에 관해서 황성부에서는 훨씬 빨리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강원도에서 인편과 역마차를 통해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빨라야 하루 이상이 걸릴 터였으나, 성경에서 타전한 전보가 서울에 도달하기까지는 중간의 계류를 고려하더라도 길어야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호외요, 호외, 내각이 총사퇴 결정! 김조순 총리 사임 표명!”

그날 오전의 내각 사퇴 결정은 정오 무렵이면 의주와 부산의 지역신문사에서 활자화되어서 거리에서 팔려 나갔다.

각 지역의 증권거래소는 긴밀하게 중앙과 연동되어 가고 있었고, 이제 몇 천km 밖에서 일어난 일이 곧장 시장의 시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감은 곧 눈으로 드러나는 현시적(顯示的) 표상으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서울의 한강변 용산에는 웅장한 「제국의회(帝國議會)」의 건물이 축조되고 있었다. 건물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족히 500m가 넘는 규모였다.

잉글랜드에서는 1838년으로 예정된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정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정궁(水晶宮)이라고 불리게 될 유리와 철골로 된 혁신적인 형태의 구조물이 런던에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학적인 혁신에 기초한 도개교가 템즈 강변에 들어서고, 철도역들은 점차 화려하고, 더욱 사람들을 압도하는 형태로 세워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제안은 매우 채산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구두와 양말을 실론의 토인들에게 팔 수 있어요. 이들은 아직 이런 제품의 착용에 익숙하지 않지만, 곧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뿐만입니까? 이제 곧 그들은 회중시계와 모직 양복, 그리고 펠트천으로 만들어진 중산모와 수염을 가다듬을 포마드 기름과 그것을 담을 종지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겁니다. 우리 회사는 이런 물품들을 실론에 팔기 위한 무역사무소를 곧 개설할 겁니다. 지금 투자하지 않으시면 황금을 낳는 거위를 놓치게 되시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업 제안들이 서울, 성경, 런던, 파리에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때만큼 사기꾼들이 남의 돈을 긁어모으기 쉬웠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북극의 신선한 산소를 병에 담아서 대도시에 가져와 병원의 환자들에게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어처구니없는 회사 발기인들에게 무려 100만 원이라는 돈이 투자되기도 했다.

재빠른 사업가의 손에 경원선에 접속되는 관광 철도가 놓인 금강산으로는 서울의 돈 많은 유락객들이 기차를 타고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호텔과 별장이 세워지고, 하루에 천 원 정도 쓰는 것은 우습게 아는 성공한 자본가들이 이곳에서 사치스러운 주말을 보내는 것은 이제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중심부는 번창하고, 또 번창하고, 그 기세를 모르고 기고만장해져 가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강령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자본 계급은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구대륙에서 많은 옛 귀족과 지배자들은 이제 자본 계급과 공생하지 않으면 예전의 호화롭던 삶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철골과 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자본가들의 신전(神殿)이 화려한 가구와 빼어난 그림으로 도시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인간 역사의 승리라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인고(忍苦)의 시작일 뿐이었다.

욕조 안의 마개를 뽑으면 차 있던 물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듯이 모든 것이 중심부로 휩쓸려 나가는 세상에서 주변부는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835년

건명(建明) 21년 중하(仲夏)

진서자치국 하카슈(Hakashu, 박주)

1835년, 건명 21년 7월 1일, 「박주성모대성당(博州聖母大聖堂)」의 높이 솟은 종루에서는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조종(弔鐘)이 타종되고 있었다.

고요한 시내에는 추도의 종만이 적막 사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 집에서, 그리고 길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간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모했다.

1819년 7월 1일 진서자치국의 수립을 위한 조약이 체결된 후 14년간 진서는 내전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제국에서 이탈하지 않고 자치국을 수립한다는 타협적 결과물은 적지 않은 이들을 분노케 했고, 독립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했던 이들은 좌절감에 휩싸여야 했었다.

이들은 이내 민족혁명전선이라는 무장 단체를 구성하고 동부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기나긴 항쟁에 돌입했었다.

대마, 일기, 그리고 오도열도와 기주부의 지역이 자치국의 영역으로 인정되지 않고 경상도에 편입되어서 진서가 분열된 데다가, 자치국 수립으로 인하여 영원히 한국의 수위(首位)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은 많은 진서인들의 가슴에 항쟁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진서 전체는 이제 자치국체제에 만족하는 사람과 완전독립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고,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한 일상이 되었다.

독립전쟁 당시보다도 지난 14년간 내전으로 인해 죽은 인구가 훨씬 많았다.

자치국 수립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제국육군은 모두 철군했기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진서자치국의 신생 군대는 반군과 비등한 싸움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테러가 빈발했고, 도심지에서도 납치와 살인이 듣기 힘든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친정부인사 여럿이 처참한 몰골로 효수된 채 길가에서 발견된 다음 날이면, 반군이 굴비 엮듯이 잡혀 들어와 공개 총살되는 잔혹도가 진서에서 지난 10여 년간 펼쳐졌던 것이다.

새로운 자치국의 수도가 된 박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자치국의 제2대 국무령이자 진서자유당 소속의 자유주의 운동가였던 리타 미노(李多閔露)는 박주 시내에서 연설하던 도중에 민족혁명전선의 저항운동가가 터뜨린 폭탄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세월 동안 정치적 발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독립이나 자치냐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섣부르게 드러냈다가는 집단린치를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때 여성의 몸으로 반군에 가담했다는 경력이 알려진 어떤 젊은 여인은, 야심한 밤에 자치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길가에 끌려 나와 머리카락이 잘리고 윤간(輪姦)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에 분노한 박주의 독립주의자들은 보복에 나섰다.

윤간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청년 세 명의 목이 잘려서 박주시 한복판의 광장에 던져졌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모두가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이제는 이 산을 내려갈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산할 방법을 찾지 못해 산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입니다. 누구도 하루 앞을 예측할 수 없고, 우리가 바라는 독립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내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누구의 목이 잘려 나갈지 모르는 그런 공포감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숙이 각인되었습니다. 이것만큼 제국이 진서민족에게 남긴 큰 상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간교하다고 비난하고 그저 분노를 태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토가 분열되고, 단결이 해체되고, 이제 동족이 서로 불신하는 시대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만큼 독립이나 자치냐의 문제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회복되어 번영의 시대가 찾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합니다. 그때가 되면 웃으면서 선생님을 초청해 함께 식사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얀 시곤으로부터 어렵사리 전달된 편지를 읽은 김효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서에서 같이 고락을 나누었던 때를 생각해 보니 까마득하게 예전 일 같았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는 하루도 편하게 잠들지 못한 채 투쟁을 벌여왔을 터였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는 고통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서는 고통을 받았을 것이었다.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그를 떠민 사람이 없었지만, 시대는 얀 시곤으로 하여금 그런 길을 살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픈 것은 진서에서 연일 계속되는 무정부적인 혼란이었다.

제국군에 대항했던 전쟁 끝에 남은 것은 이런 비탄해 마지않을 상황이었다. 진서 민족이 진정으로 해방될 날은 아직 요원해 보였다.

평소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죽이고서 동영공화일보의 논조에 어울리는 절제된 공화주의적인 논설을 쓰던 김효는, 그 편지를 받은 다음날은 평소와 같이 하지 않았다.

매우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문장으로 그는 진서의 비통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태평양 건너편의 이 작은 나라에 대해 연공의 사람들은 아마 관심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김효는 진서의 사람들 또한 자유를 누리고 평화 속에서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더라도, 잠시 이 비참한 국민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지길 바랐다.

〈오늘 하루 목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는 유례없는 한 면을 가득 채운 논설이 《동영공화일보》에 다음 날 실렸다.

이 글을 받아 본 신문사의 관계자들 중에 아무도 이 논설을 게재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감정적이지만 단호한 어조로, 제국주의적 정책이 한 민족에게 어떠한 영구적인 폐해를 남기고 있는지를 비판한 이 글은, 아마 단기간에 불과했겠지만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적어도 그 이후 한 달간, 여러 신문에서는 진서의 상황을 다룬 기획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언론사에서는 경쟁적으로 취재원을 진서로 보내 송고(送稿)를 받기도 했다.

각지에서 진서의 안정을 바라며 보낸 구호금이 공화일보사에 도달했고, 김효는 이것을 허투루 하지 않고, 자치국정부도, 반군도 아닌 중립적인 위치에서 중재를 시도하고 있는 조그만 정당인 「시민당(市民黨)」에 송금했다.

어느 가을에 잠시 불어왔던 이 진서에 대한 관심의 환기는, 이내 시들해져 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지만, 김효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유래와 현재의 현상에 관한 논고를 정리하는 한편, 진서에 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안정화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형태로의 지원이든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김효의 노력 덕분은 아니었으나, 점차 진서의 대중적인 평화를 위한 노력은 성과를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쪽을 협상장으로 끌어오기 위한 시민당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때로는 회색분자니,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는 조롱 섞인 비난을 들으면서도 평화를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끝내 그 결실이 맺어진 것이 올해 1835년의 일이었다. 중립적인 지역인 남부 항구도시 녹아도(鹿兒島, Gagusimi)에서 자치국정부 대표와 민족혁명전선의 대표가 나란히 앉아서 국가의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물론 양쪽의 의견은 평행선을 나란히 하고 있었고, 타협의 여지는 매우 희박해 보였다.

제국 내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자치국 정부로서는 경상도로 편입된 진서의 영토에 대한 반환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을뿐더러, 당장의 독립은 아니더라도 황성부로부터 독립을 목표로 그 날짜를 확정받으라는 민족혁명전선 측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민족혁명전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선 무장부터 해제하고, 내전을 종식시킨 다음에 문제를 논의하자는 자치국정부 측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그간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의외의 돌파구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협상이 진행되던 중에 북해의 영안부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고, 시민 200여 명이 정부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북해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으면서 내지 정부는 북해에 막심한 정치적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북해가 안정화되기 전에 진서에서 또 다른 불씨가 퍼지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박주에 주재하는 주차진서고등판무관을 자치국 정부에 보내 혹여 진서의 안정화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대마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을 제외하고 기주부에 대해서는 반환을 할 의지가 한국 정부에 있으며, 또 당장은 가능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독립 일정에 대해서 기탄없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한 것이다.

이러한 내지 정부의 방침을 확인한 자치국 정부는 이것을 혁명전선 측에 전달했고, 아쉬운 대로 그때부터 협상은 진전을 보기 시작했다.

우선은 협상이 완료되기 전에 기주부를 공식적으로 반환받도록 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양측은 임시정전(臨時停戰)에 동의했다.

자치국 정부에서는 향후 양측이 동의할 만한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면 반군이 무장을 해체하고 원하는 자에 한해서 정부군에 편입되는 것을 궁극적인 방향으로 하고, 대신에 현재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승인하고, 무장해제를 당분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양측은 철저하게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협상에 성실하게 임할 것을 동의한 뒤 1835년 7월 1일, 정전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지금은 형편이 형편인지라 전향적인 협상 조건을 내걸었지만, 과연 진서가 종국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까요?”

얀 시곤은 어떤 젊은 반군 병사가 종전협정 뒤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어왔을 때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비록 밤은 지나가고 해가 저 멀리서 떠오르고 있기는 했으나, 여전히 사방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상황이 달라지긴 했으나 아직 앞을 분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독립보다도 아물지 못할 큰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더 우선일지도 몰랐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진서인들은 동포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다 못해, 이제는 혹여 제국 치하에서의 삶이 더 좋았노라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네. 우리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투쟁했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의 목숨 값 또한 가벼이 여기지 않았는가. 독립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요, 대의이지만, 그 명분 앞에서 스러져 간 혼령들 앞에는 또 누가 사죄할 것인가.”

얀 시곤은 입안이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젊은 병사는 지금도 그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밤마다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은 그 자신도 그랬다. 정전협정 덕분에 그는 십 수 년 만에 그가 나고 자란 박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는 익숙한 골목길로 들어서서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골목의 안쪽에 그의 옛 집이 서 있었다. 다만 이제 그 집의 명패에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낯선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듣기에 예전에 막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 집은 역도의 집이라고 해서 진서도독부에 의해 징발되었다가, 이후 아마도 진서자치국 정부에게로 소유가 이전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내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자치국 정부에서 이 집도 누군가에게 매각을 했을 터였다.

얀 시곤은 차마 그 집의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안에 살고 있는 것이 누구든, 이제 더 이상 그 집이 얀 시곤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것을 안 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지난 내전이 남긴 흔적들이었다. 이제 기나긴 투쟁의 세월은 아마도 끝이 났을 테지만,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얀 시곤에게는 없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던 날 이 집을 비우고 떠나가면서 얀 시곤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리라 맹서(盟誓)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러 고향집에 찾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서 박주성모대성당의 조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얀 시곤의 눈가에도 뜨뜻한 습기가 번졌다.

1836년

개국(開國) 420년 중춘(仲春)

요동국 경조로 성경부

옛 원나라 시절의 심양성(瀋陽城)은 꾸준히 개축되어 가며 살아남아 성경부의 내성(內城)을 이루고 있었다.

이 내성의 성내(城內)는 이미 15세기 후반부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이후 훨씬 넓은 둘레의 외성(外城)이 축조되게 되었다.

이제는 그 외성마저도 넘어서 시가지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랜 일이 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요동의 도읍 성경부의 심장은 그 내성이었으며, 이 내성 안쪽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크게 모습이 달라지지 않고 고요히 시간을 버텨오고 있었다.

사실 내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들은 거의 16세기 초반에 조영이 끝난 국가의 기념비적인 상징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개의 주된 광장을 중심으로 궁성인 태안궁, 종묘와 사직, 성사도대성당, 왕립장서각(王立藏書閣)과 그곳에서 갈라져 나온 왕립박물관, 그리고 왕립대학(王立大學) 및 왕공족(王公族)의 오래된 사저(私邸)들이 좁은 내성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 성경부 내성은 요동이 지니고 있는 국가적 가치가 집약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의정부 청사와 국회, 그리고 학예원 같은 국가 정치의 주요 기관들마저 내성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어 내성과 가까운 외성의 안쪽에 들어선 것을 생각해 볼 때, 내성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성 안의 몇 안 되는 저택들은 모두 왕실 종친이거나 전통적인 대문벌의 소유였으며, 여기에는 전혀 예외가 없었다.

대문벌 출신이 아닌 신흥 재벌가들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매물이 없는 이 내성 안의 저택을 구매할 수가 없었다.

허나 여순현남 김현의 경우는 여태 내성 안에서 보기 힘들던 인물군상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왕실 종친이기는 했지만, 실상 그 가문이 종친부의 배려 덕분이라기 보다는 삼대에 걸친 요동제일의 재벌 가문의 완성으로 이름이 높아진 것을 생각해 볼 때, 내성 안의 사람들과 썩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작고한 성광사의 전대 사주이자, 김현의 아버지인 김시유가 부득불 심양의 거처를 내성 안에 마련하지 않고 외성 바깥의 부유층들이 모여 사는 교외지대에다가 거처를 구해둔 것은 내심 이런 내성 안의 공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현은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충분히 자신이 내성 안에서의 매우 고취향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생각하며 수십만 환을 훌쩍 넘기는 성내의 대저택을 구매할 용의가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과시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욕구를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출신 배경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김현에게 있어서는 내성 안에 저택을 마련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무시할 수 없는 보상이 있었다.

요동에는 소위 「성내오족(城內五族)」이라는 성어가 있었다. 내성 안에서 사는 가문이 다섯 개라는 의미였다.

첫째로는 당연히 왕족(王族)인 김해 김씨로, 그것도 국왕과 매우 밀접한 촌수 안의 종실(宗室)에 한했다.

둘째는 역대로 권력의 중심부에 항상 밀접하게 접근해 있었으며, 지금도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 세력들과 결탁해 있는 왕권을 견제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의 정당인 국민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심양 한씨였다.

셋째는 요양 성씨였다. 본래 고려계로서 원나라 때에 요동에 건너와 기반을 다진 가문으로, 심요도독부 설치 이래 중시조(中始祖) 성린(成隣)의 대에 상업적 기반을 크게 다진 뒤 정계서도 관직을 살았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후손들이 요동 거대 자본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요양 성씨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은행과 기업들의 숫자만 해도 족히 열 손가락은 넘어갔다.

네 번째는 순천(順天) 김씨로, 국초에 심왕가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고, 격물학의 계통을 따르는 관서학파의 거두(巨頭)이기도 했던 순천공 김종서의 방계 후손들이었다.

순천공가의 적통은 내지에 남았으나, 김종서의 손녀딸과 문덕왕 김서윤이 혼례를 맺은 뒤, 그 가문의 일부가 요동에 들어왔고, 이후로도 인물들을 배출하며 명문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귀족 계열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줄곧 왕실을 지지하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당성(黨性)으로 보아도 국민당 계열이 아닌 자유당 계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지막이 동녕(東寧) 지(池)씨로, 요양 성씨와 마찬가지로 원나라 때 요동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 지항(池恒)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요동에 심왕부가 세워진 후, 청요직(淸要織)을 두루 거치며 관리를 배출해 왔었다. 대대로 이들 또한 요동에서 이름 있는 명문세가 중 하나였다.

이렇게 위와 같은 다섯 가문 외에는 성내에서 명패를 걸기가 쉽지 않았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의정부(議政府)에서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명재상(名宰相) 반열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나마도 다섯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대대로 성내에 저택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보통 족히 50칸은 넘어가는 집들이 대다수였고, 그 집안에 고용된 하인들만 하더라도 수백은 넘어가기가 일쑤였으니, 그만한 세도가 없다면 경제적 부담을 지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만큼, 요동에 실권이나 특혜는 없으나, 명예적인 작위 제도가 논란 끝에 도입되었을 때도, 이 내성에 있는 주요 집안의 가주들은 거의가 작위를 수여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내성 안에 살기에 작위가 나온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사회적인 위치와 혈통이 보증된 이들만이 내성 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김현은 반드시 내성 안에 들어가 살고자 했었다.

김현은 명분상 왕족이긴 했으나, 그 집안은 왕실 가운데에서는 은근히 천시받는 핏줄이었다.

당초에 김현의 조부인 정경대군 김우가 조모인 유청령과 혼외로 낳은 것이 바로 김현의 부친 김시유였다. 원래는 왕실 일가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를 뻔한 것을, 그나마 증조부인 효공왕 김헌이 절손된 종친인 항산군(沆山君)의 집안에 김시유를 입적시켜 준 덕에 계보에 이름이나마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입적된 항산군 집안 또한 종친부 내에서도 격이 낮은 집안이라, 성내는커녕 심양 외성 안에도 그 저택이 없었고, 본가(本家)는 심양 교외의 3천 평 장원이 딸린 토지에 있었다.

더군다나 그 아버지인 김시유와 결혼한 어머니 전혜린은 족보가 탄탄하지 않은 신흥 자본가 집안 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모계 쪽에 단단히 김현은 혈통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본인은 아내를 개성공가에서 맞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그렇게 한다고 해서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종친 중에서도 격이 높은 대우를 받고자 했고, 그런 심리 때문에 내성 안의 저택 중에 매물이 나오자 바로 96만 환이라는 거금을 들여 그 집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남작이라는 품계 낮은 작위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으나, 내성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돈으로 해결 가능했던 것이다.

“그나마 김현이야 어쨌든 종친이고, 뭐, 작위라도 있소만. 이제 온갖 시정잡배들이 돈을 좀 벌었다고 내성 안에다가 집이라도 마련하려 들자고 한다면 그 꼴을 어찌 보아야 할지…….”

“그러게 말입니다. 여하간 그자 덕분에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려는 사람이 늘면 안 될 텐데 말입니다.”

김현이라고 내성 안에서 오고 가는 뒷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돌수록 김현은 자신이 내성 안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안에 들어와 있으니 그런 말이 들리는 것이다. 아주 심양의 내성에 기거하지 않고, 여순에서 머물기로 작정했다면 왕국의 중심에서 돌아가는 일을 이만큼 가까이서 듣지 못했을 터였다.

잘난 명문세가들의 입방정은 시간이 가면 해결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하면 영원히 주변부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 김현의 지론이었다.

그는 그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 집안을 건사해서 대대손손 물려줄 것은 자신뿐이었다.

동생인 김효부터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터무니없는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다가 북해에서 추방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힘을 쓴다면 동생을 구제해 줄 수 있었지만, 김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쓴맛을 보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생을 쉽게 동아줄을 내려 구해줘 봐야 고마운줄 모를 것이라는 게 김현의 판단이었다.

더군다나 동생을 싸고 돌던 어머니도 세상을 뜬 지금에야.

이제 돈은 충분히 있고, 내성의 매우 좁은 사교계에도 온갖 무시를 받아가면서도 발을 내민 김현은, 적극적으로 명예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 그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자본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대부분 심양 한씨, 요양 성씨, 동녕 지씨 등의 벌족가문과 깊게 연계가 되어 있는 이들과의 불편함을 청산하지 않으면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사업과 가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현이 진정 바라는 것은 과거에 조부와 조모가 일으켰던 남성물산과 같은 기업이 아니라,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세계적 자본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사업체였다.

이러한 그의 목적성은 차라리 요동 대자본들과 성격이 부합하는 것이었다.

김현은 가능하다면 이들과 일종의 공동 출자를 통한 신디케이트를 조직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는 철도라는 부의 창출 수단이 있었으며, 언론·우편·전신 등의 사업에도 이미 손을 뻗히고 있었다. 비록 요동과 한국에서 전신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재빠르게 김현은 일본·양·월 등지의 특허제도가 있는 국가에다가 우한기의 기술을 그대로 도용해서 특허를 출원한 뒤, 해당 국가의 정부기관과 돈을 매개로 한 긴밀한 유착관계를 조성하고 전신사업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부친 대에 만든 신완재단에서 자금을 다시 출자하여 「요동매일신문(遼東每日新聞)」이라는 언론사도 세워 간접 지배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제도신문(帝都新聞)」등을 매입하는 등 언론시장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김현이 목표로 하는 이러한 성광사의 기업 운영 방침에는 결정적으로 정부나 다른 자본의 훼방이 있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대부분 성광사에서 손을 대고 있는 사업들은 초기 투자 비용이 매우 큰 것들이었고, 자금이 회수되기 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무산되거나 지연될 경우 져야 하는 손실이 막대한 것이었다.

김현의 입장에서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서 자기자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본을 유치받을 필요성이 있었고, 또한 정치적인 외압을 받는 것은 곤란했다.

그가 거주지를 여순에서 내성으로 옮기고, 장기적으로 성광사의 본사를 성경부로 옮겨오려고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고려 때문이었다.

그 자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김현이 계획한 일들은 다소의 성과가 있었다.

그는 집중적으로 요동의 자본 흐름을 꽉 쥐고 있는 족벌가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으며, 얼마 가지 않아 국왕이 주재하는 정례 만찬에 초대받을 정도로 위신이 상승했다.

물론 그는 이름뿐이지만 작위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왕족이라는 신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예전 같은 보이지 않는 신분 질서가 완고하게 버티고 있던 성경부 내성의 분위기였다면 그는 그런 영예를 누릴 수는 없을 터였다.

하다못해 왕실에게 큰 규모로 자금 지원을 항상 해왔던 아버지 김시유조차도, 가끔 국왕이 초청해 올 경우에만 한해서 이 정례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물려줄 것이다. 너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어.”

김현은 자신의 장남이자 왕립대학에 재학 중인 김지형(金智炯)에게 항상 습관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기이하리만치 아버지를 닮은 김지형은, 매우 빠른 속도로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을 익히곤 했다.

잘생긴 외모와 능글맞은 웃음으로 위장을 하고 있긴 했으나, 사실상 그 아버지보다 더한 속물적이고 냉정한 두뇌가 그의 머리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직 대학 재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완재단의 이사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재단의 운영자로 앉아 있었고, 순나라로 전신사업을 진출할 계획을 직접 입안해서 이미 실질적으로 착수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줄 성광사가 사분오열되길 원하지 않았고, 일찌감치 형제들을 승계구도에서 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 김현도 그것을 사실상 방조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은 성광사 전체 규모에 비하면 아주 적은 정도의 유산을 미리 물려받은 뒤, 유언장에서 그 이름을 제했을 뿐만 아니라, 학업 또한 요동이 아닌 한국으로 보내서 밟도록 했다.

정작 김지형 그 자신은 아버지의 바로 곁에서 붙어서 사실상 성광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지형은 내성 생활에도 오히려 아버지보다 쉽게 적응했다. 그는 이미 내성 안에 있는 왕립대학에 출석하면서 내성의 분위기에 익숙했던 데다가, 내성 안의 사교계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뒤에서는 근본도 없는 자본가의 아들이라는 흉을 보던 이들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감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더군다나 비슷한 연배로 현 국왕 김호의 장남인 왕세자(王世子) 김건(金虔)과도 친분을 과시하고 있으니, 김지형의 앞에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겉보기에는 총명하고 뛰어나나, 오로지 관심사는 권력과 재물, 명예에 치중되어 있는 김지형의 삶이었으나, 적어도 그가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질투와 시기를 할지언정, 그가 가지게 될 것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1839년 맹춘(孟春)

동영 연방 공화국 창주특별자유시

올해 스물둘의 김요섭은 상주(喪主)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 김효가 유행성출혈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 김요섭은 삼 일 밤낮을 뜬눈으로 지냈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을뿐더러, 거의 실신할 지경인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피고 장례를 제대로 치르려면 정신을 멀쩡히 차리고 있어야 했다.

김요섭은 아버지를 땅에 묻고 나서도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릴 때 한 번 본 기억밖에 없는 요동의 큰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써 보내긴 했지만 무슨 답장이 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그 집안에서는 무슨 돈이라도 구걸하는 거지 취급을 하고도 남을 터였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그 집안에 뭘 바라지 말라는 말을 가시가 박히도록 들은 김요섭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고된 삶을 자처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러운 굴종을 하느니 부끄러움 없이 깨끗하고 고상한 삶을 사는 편이 옳게 여겨졌다.

조모 덕분이긴 하지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밥을 굶은 적은 없었다. 김요섭에게는 그만하면 충분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김요섭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북해에서 추방당한 뒤 가족 모두가 연공으로 넘어와야 했을 때, 가지고 온 재산보다는 잃고 온 것이 많았었다. 그러나 김효가 다행이도 동영공화일보에 직장을 얻은 덕에 식구들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가진 재산을 축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창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산 집도 남아 있었고, 손아래 누이 하나는 이미 시집을 간 상황이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적어도 연공은 기회가 많은 땅이었다.

곧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게 되면 일자리를 구하는 것 정도는 걱정 없을 터였다. 문제는 바로 김요섭 자신이었다.

“대학에 돌아가 마저 공부를 마치는 것이 어떻니? 학비야 어떻게든 내가 마련해 보도록 하마.”

어머니 안드레아는 남편의 죽음에서 겨우 회복해 기운을 차린 뒤, 바로 김요섭에게 학업을 계속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부쩍 주름이 는 어머니에게 김요섭은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요. 저는 따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사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기 직전까지 김요섭은 창주연방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특별히 아버지처럼 정치적 의식이 뚜렷한 것도 아니었기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서 앞으로 생업을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공부에 대한 회의감이 진하게 밀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무리를 해서라도 공부를 마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어떻게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면, 적어도 창주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공부를 마쳤으면 한다. 제발 어미의 소원이니 그렇게 해다오.”

학교를 휴학해 놓은 뒤 한참을 나가지 않고 이런저런 고민에 사로잡혀 있던 김요섭에게 어머니는 계속해서 학교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차마 그런 어머니의 부탁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던 김요섭은 마저 1년을 다니고, 예정되어 있던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해서 변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고용주였던 공화일보의 사주 윤성수의 배려로 법률사무소에 취직할 수도 있었다.

그 뒤 아무런 생각 없이 한동안 김요섭은 집안의 생계를 위해 일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유일한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었고, 이를 상환하기 위해 김요섭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게 부족할 것이 없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변호사 일은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명예가 따라오는 직업이었고, 보수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안정된 직업이었기에 선 자리도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그런데 김요섭의 마음은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에 대한 묘한 부채의식이었다.

학교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던 것도 실상은 그 때문이었다. 한동안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몰랐었고, 그저 고민만 계속했을 뿐이었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갈수록 그것은 점차 또렷해져 가면서 김요섭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상선회사와 새롭게 세워진 철도회사 사이의 합병 건에 대한 사무를 처리하고서 늦은 밤 집에 들어온 김요섭은, 한동안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서재에 문득 들어섰다.

부친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의 상태대로 남겨진 그 서재는, 이따금 어머니가 청소를 위해 들어설 뿐 가족들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방이었다.

자녀들이 이제 그 방을 정리하는 것이 어떠할지 권하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늘 고집불통이었다.

남편의 자취를 온전히 남기고 싶어 하는 그 기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김요섭은 내심 그 부분이 불만이었다.

그 서재가 요즘 들어 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던 탓이다. 무언가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 서재를 통해 말을 걸려 하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늘 들고 있었다.

“…….”

그렇게 거의 2년 만에 들어선 아버지의 서재는, 마지막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의 규모에 걸맞지 않는 서재였다. 벽돌로 지어진 집임에도 불구하고 1층에 위치한 서재는 온돌이 놓여 있었고, 방은 한식(韓式)으로 꾸며져 있었다. 방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무늬의 붉은 주단(朱丹) 커튼이 여전히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선 김요섭의 입술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이 방에 들어오면 우울한 기분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북해에서 나오면서 그 많던 책을 다 챙겨오지 못한 터라, 아버지의 서재는 예전 북해시절에 비하면 많이 단출해진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의 삼면을 가득 메운 책장에는 빼곡하게 여러 언어로 쓰인 책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책장들 한가운데에 아버지가 쓰던 책상이 있었다.

김요섭은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무언가 원고를 열심히 쓰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마 어머니가 이 방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책상 서랍에 원고가 고이 놓여 있을 터였다.

예상대로 원고는 서랍 속에 잘 정리된 채로 놓여 있었다. 그냥 슬쩍 보기에도 책 두 권 분량은 됨직해 보였다.

김요섭은 무엇엔가 홀린 듯이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원고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아직 탈고된 원고가 아니었기에, 어느 부분은 깔끔한 문장으로 각주까지 달린 채로 잘 정돈이 되어 있는 한편, 또 어떤 부분은 매우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마구잡이로 쓰여 있기도 했다.

원고의 여백에는 문득 문득 떠오른 착상을 정리하고자 한 듯 메모가 곁들여져 있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 달의 월봉(月俸)에서 얼마간을 긴요하게 지출해야 할지 적어놓은 부분도 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 김효에 대한 회상에 젖어서 김요섭은 앉은 채로 밤을 지새가며 그 원고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나가는 소리로 지금 막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을 종합해서 학술적으로 다룬 글을 쓰려고 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지금 보니 마지막까지 쓰고 있던 원고가 바로 그 책을 위한 것이었다.

문득 김요섭은 얼마 전 읽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젊은 학자의 《공산당선언》이라는 글을 떠올렸다.

처음에 아버지가 쓴 원고는 마치 그 글과 같은 전복적인 사고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초 목적과 다르게 원고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꾸만 글의 방향을 고치고자 했던 것 같이 보였다.

당초의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분석에 대한 부분은 많이 지워지고 국가와 민족, 혁명과 같은 정치적 주제들이 더욱 심도 깊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아마 이렇게 주제가 바뀐 것에는 진서혁명 시절의 동지였던 얀 시곤과의 편지 교류가 영향을 끼친 듯 보였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요섭은 아버지의 글에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민족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들어와서 강조되기 시작한 개념임에는 분명하다.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계급적 분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간파한 바처럼 민족이라는 것은 자본 계급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국가관에 복무하기 위해 창조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최근에 벌어진 혁명적 저항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진서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곳에서도 완전한 민족 독립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은, 그 민족주의가 매우 자본적인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진서 부르주아지[間人]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치국 수립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자마자, 당초 동원했던 민족주의적 수사들을 재빠르게 수정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러한 민족의 창출과 조직화는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봉건체제를 벗어나서 중산 계급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게 근대적인 국가들은 모두 이러한 민족주의의 창출에 매진하고 있다.

먼저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 뒤를 쫓아 열강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2류 국가들, 그리고 피지배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각 제국 내의 정치적으로 각성한 집단들에게까지 민족주의의 개념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다.

……필연적으로 내부동질성의 확보와 타자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는 내부의 소수집단에게는 재앙이고, 외부적으로는 새롭게 창출된 민족들을 서로 충돌하게 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역사적인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금세기는 이러한 민족주의적 열광의 시대가 될 것이며, 자본주의의 복음가들은 문명과 번영을 선전하면서 우등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의 줄을 세우기 시작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보기에 젊고 열렬한 마르크스와 같은 혁명가들이 예견하는 계급 투쟁과 연대의 시대는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직관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것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민족들 간의 장기적인 충돌이다.

결과론적으로 민족들 간의 투쟁은 파국을 불러올 것이다. 이것을 극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신흥 자본가 지배 계급에게 이 민족의 관념을 주입하는 것은 제국의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노동자와 빈민 계급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신성한 가치를 강조함으로 인해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도외시하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

반대로 물론 민족주의는 진서의 경우와 같이 저항의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그것이 반쪽의 성취라도 이룩하고 난 다음에는, 제국을 밀어내고 등장한 새로운 지배 계급의 손쉬운 정치적 권위 확보의 수단으로 전용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사례를 진서에서 보았고, 다음에는 보헤미아나 덴마크에서 보게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매우 각성된 스웨덴 제국 내의 각 민족들은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 결과는 만족스러운 경우에도 진서가 성취한 바를 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보고 싶은 것은 (이 부분에서 김효는 매우 망설인 듯이 글을 멈춘 흔적이 남아 있다. 며칠에 걸쳐서 고쳐 쓴 듯 여기저기 색이 다른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다. 김요섭은 아마도 아버지가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학술적이고 건조한 문체가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문장으로 바뀌고 있었던 탓이다.) 북해의 상황이다.

혈통이나 언어적으로 일치하지 않고, 이념을 주도할 만한 자본 계급도 부재하는 북해에서 자치, 혹은 독립을 향한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민족주의에 기초하지 않은, 오로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억압받던 이들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고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바로 이곳 북해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어떠한 형태로든 그들이 목적한 바를 성취하길 바라며, 설사 그것이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 될지라도, 그것을 감내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피부색도 다르고 서로 쓰는 말도 다른 시민들이 같은 정치적 신념으로 뭉친 전례는 이전에는 없었다. 비록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 조직력이 강하지 못했고, 번번이 탄압과 실패의 궤적 속에서 수십 년간 좌절을 겪어왔으나, 군홧발과 억압, 그리고 강제로 북해의 인민들을 한민족에 동화시켜 민족주의의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북해의 혁명을 더욱 타오르게 만들 것이다.」

원고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뒤로는 참고 문헌을 적어 놓은 쪽지들과 난삽한 형태의 개념들만이 적혀 있는 종이 뭉치들만 있을 뿐, 문장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부분은 아니었다.

김요섭으로서는 아버지가 쓰고 있던 책이 마무리되었을 때, 어떠한 걸작이 되었을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김요섭의 마음속에 들고 있는 생각처럼 아버지는 상당히 세상을 잘못 읽어내고 그럴싸한 문장으로 이런 모순을 덮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현재의 세계를 통찰력 있게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요섭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부채가 무엇인지를 원고를 읽으며 명확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변모하고 있는 시대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물론 아버지 김효는 한 번도 그러한 길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풍족한 삶을 버리고 뛰쳐나와 쉽지 않은 인생을 선택한 그의 삶을 아들에게 강제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들이 그를 쫓아 살아가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물론 김요섭은 그대로 아버지의 바람을 멀리 미뤄놓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 연공의 신문에 일제히 오른 뉴스는 그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북해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한국군에 의해 물경 천 명에 가까운 영안의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1840년

건명(建明) 26년 중춘(仲春)

대한제국 북해도 영안부

몇 년 만에 밟는 고향땅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릴 적의 불투명한 기억들만이 파편처럼 남아 있는 땅이었으나, 그곳에 도착했을 때 김요섭은 매우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이 물러가고 있는 영안의 항구로 불어오는 따스한 동남풍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김요섭이 북해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어머니 안드레아와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김요섭의 손을 꼭 부여잡았었다.

“네 몸에 흐르는 피는 속이지 못하겠구나. 이곳에서 마음 편히 네 인생을 살아주었으면 했다만…….”

그녀는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북해도 모령군(毛怜郡) 목씨장면(目氏庄邑)에 있는 그녀의 본가(本家) 주소를 써서 김요섭의 손에 들려주었다.

물론 오랜 세월 보지 못했던 일가친지들에게 부치는 편지도 포함해서였다.

“가서 네 아버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잘하렴. 네 덕분에 다시 북해에 좋은 날이 오면 나도 돌아가서 고향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혹여 김요섭의 마음이 무거워져 가기를 주저할까 싶어, 안드레아는 아들의 뒷모습도 보지 않고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창주의 항구를 바라보면서 김요섭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할 일을 이제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요즈음 부쩍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한동안 좋은 감정으로 지내며 약혼까지 갈 뻔했던 동료 변호사의 여동생의 모습도 떠올랐다.

김요섭이 그녀에게 북해로 가고자 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울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가슴속의 열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김요섭은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북해행을 택했던 것이다.

언젠가 연공의 심장, 창주로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요섭은 태평양을 건널 배가 닻을 올리고 바다로 미끄러져 간 그때 이후로, 뒷날에 대한 생각은 가슴 한편에 접어 두었다.

북해에 도착해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북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騷擾)는 잠시 사그라졌다가, 다시 불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최근에 벌어진 가경부(嘉慶府)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학살사건 이후로, 북해도 전역은 사실상 계엄 상태에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입출국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추방 명령을 받았던 것은 아버지 김효뿐이었던지라, 김요섭은 구북해도독부의 호적을 이어받아 아직까지 한국 시민으로서의 국적이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미리 발급받아 두었던 한국 정부의 직인이 찍힌 호조(護照, 여권)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문제는 북해도로 들어갈 방법은 마땅찮다는 데에 있었다.

내국인조차도 지금은 북해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두만강을 넘어서 북해도의 경내로 들어설 수 없었다.

허나 넓기 그지없고, 태평양 연안에 조그만 어업기지들이 섬을 따라 나란히 늘어서 있는 북해의 특성상 모든 방면에서의 입국을 차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김요섭은 일본을 경유해서 밀입국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 달 남짓한 항해 끝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의 에도 항에 도달한 뒤, 그곳에서 막 완공된 토호쿠센(東北線) 열차를 타고 에조치, 즉 모실도가 마주 보이는 곳에서 일본령 오시마 반도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아이누 국(Ainu Mosir)을 통과해 모실도 북쪽 해안지대의 한국령으로 넘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가난하고 수입원이 마땅치 않은 아이누 관리에게 뇌물을 주면 쉽게 통행허가증을 내주었고, 이것을 가진 채로 아이누 국의 간선도로를 따라 모실도를 횡단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북쪽 해안을 따라 서 있는 산맥을 건널 때, 몰래 국경을 넘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만 구하면 감쪽같이 모실도 북쪽의 한국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실도 동북쪽의 강정현(康晶縣)에는 아직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이 없었고, 이곳은 북해도 관할이라 아직까지 갈수록 매서워지는 통제에도 불구하고 영안까지 가는 배편이 있었다.

김요섭은 친정부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부러 내지에서 유행하는 옷으로 갖춰 입었다.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만큼, 영안항에 내릴 때 수검(受檢) 따위를 심하게 받지는 않아도 되었다.

선적이 확실한 배인 데다가, 출발지가 북해도 관할인 강정현임을 확인하고서 항만에 나와 있던 군 장교는 짐만 대충 확인하고서는 승객들을 영안부로 들여보내 주었다.

혹여 문제될까 싶어서 어머니가 써준 글들만 품속에 단단히 숨겨두고서, 일부러 옷가지만 들고 온 김요섭이었던지라 크게 입항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본까지 오는 데 한 달, 또 거기서 이곳 영안까지 오는 데 한 달이 더 걸렸지만, 어쩐지 피곤하다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용케 영안에 아무 문제없이 도착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다행히 아직 외국인의 입국이나, 내국인의 출국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주요 항구나 도시마다 군인들이 잔뜩 상주하고 있기는 했지만, 북해도 경내에서의 움직임은 크게 통제받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물론 도심지에서 불심검문은 일상이었다. 조금만 수상하게 보여도 시가지를 순찰하는 헌병(憲兵)에게 신분 조회를 당하거나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김요섭은 최대한 티가 안 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일부러 시가지에 오래 머무르지도 않고, 바로 영안역(永安驛)에서 하루 두 차례 운행하는 간선철도의 객차를 잡아탔다.

영안부에서 북쪽으로 100km 남짓한 상온군(上溫郡)까지 철도가 놓여 있었고, 그 선로의 중간에 목씨장역(目氏庄驛)이 있었다.

목씨장 읍내에서 마차를 얻어 타거나 해서 다시 20km 정도를 들어가면 바로 외가가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 김요섭이 자란 곳이기도 했다.

김요섭이 어렸을 때, 이곳에서는 철도는커녕 하루 한 번 영안부를 왕복하는 역마차가 목씨장 읍내까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사방으로는 너른 초지를 따라 목장들만이 듬성듬성 서 있었기에, 읍내에서 집까지 가는 길도 그다지 편하다고는 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고향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예로부터 모령군의 동쪽 중심지였던 목씨장읍은, 한때 목씨장현(縣)으로 분할되어져 나갔다가, 다시 읍(邑)으로 행정 단위가 바뀌어 모령군에 예속된 곳이었다.

지금은 신대륙으로 건너가 이민왕조(移民王朝)를 세운 아이신기오로 씨(氏), 즉 목씨(目氏)가 세거(世居)하던 곳이었기에 목씨장이란 이름이 붙었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간 뒤로 이 일대의 토지는 한동안 북해도독부에 귀속되어 있었고, 점차 쇠락해 가던 고을에 한 세기 뒤, 북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들이 토지를 불하받아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던 곳이었다.

김요섭의 외가인 마스(Maes) 가문 또한 1680년대에 네덜란드로부터 이곳에 건너와 정착한 가문이었다.

김요섭이 외갓집에 다다른 것은 밤이 늦어서였다.

그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외조부 빌럼과, 외삼촌 얀은 깜짝 놀라서 그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편지를 그들에게 전해주고 나서, 김요섭은 밤을 새워가며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괜찮겠느냐. 사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저 바다 건너 연공에서 잘 지내주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이다. 요즘 이곳 상황이 말이 아니야. 얼마 전에는 유례없이 영안대학의 교수가 정치범으로 법정에 세워졌다. 아니, 대학 교수를 재판정에 세우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단 말이야.”

“상황이 그러니 직접 나서서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건너에서 한 몸 편히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곳 상황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잠을 이루겠습니까. 외삼촌.”

원래 영안부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얀 마스였으나, 최근의 시국이 불안정해지자 분위기가 살벌한 그곳 생활을 접고 아예 고향으로 낙향해서 그 또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목장 일만 하더라도 이리저리 손댈 것이 많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 딱히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본래 유난히 자유주의적 기풍이 드세던 집안이었다. 당연히 연합법에도 반대하던 외가였고, 집안에 앉아서는 공공연하게 반정부적인 이야기를 하기 일쑤였다.

“정말 결심이 섰다면, 내가 몇몇 사람들과 연결시켜 줄 수는 있다. 사실, 네 사촌 암브로스도 지금 영안부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떤 이들입니까?”

김요섭의 질문에 얀 마스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서는, 담배를 깊숙이 들이킨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응접실 안으로 부옇게 연기가 번져 갔다.

“네 부친과 함께하던 영안대학의 학생들이 지금 대부분 지하운동을 하고 있다. 연합법이 발효되고 강제로 북해가 내지에 병탄된 이래로 이들은 끊임없이 저항을 하고 있어. 물론 수단이 많지 않기는 하다. 북해 바깥까지 잘 전해지지는 않았겠지만, 얼마 전에는 영안부 시가지에서 소규모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런 저항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가 않아……. 오히려 언제 목숨을 잃을까 항상 걱정해야 하는 삶이지.”

“그런데 암브로스도 그곳에 가담하고 있단 말이세요?”

“너도 네 어미가 말렸을 것이 분명한데도, 멀쩡히 변호사라는 직업도 던지고 북해까지 들어오지 않았느냐. 네가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자란 걔가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노릇이지.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다들 이런 운동과 관련이 되어 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몇 개의 독립을 지향하는 지하정당들도 결성이 되어 있다.”

김요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문득 아버지 김효가 진서의 독립전쟁에 가담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진서보다 북해의 독립은 훨씬 더 요원하고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심지어 독립은 양보하고 자치권만 얻어내는 것도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국 정부에게 있어서, 이곳 북해는 일종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물론 새롭게 인도양 일대에 구축하고 있는 식민지들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 제국의 일부로 결속되어 있던 북해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무리해 가면서까지 연합법을 발효시켜서 내지로 편입시키고, 전례 없는 공안정국을 조성해 가면서까지 진서의 각종 자주운동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넘게 이러한 움직임이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서 김요섭은 희망을 느끼고 있었다.

“암브로스 사촌과 연결해 주십시오. 어떤 형태로든 직접 운동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김요섭의 결심은 굳었다.

얀 외삼촌도 더 이상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지체 없이 바로 영안 교외에서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과 연결시켜 주었다.

어릴 적 이후로 보지 못해 얼굴도 가물가물했던 사촌 암브로스가 나와서 김요섭을 그들의 거점으로 데리고 갔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막(農幕)처럼 보이는 그곳이 바로 사촌이 몸담고 있는 「자유북해동맹(自由北海同盟)」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조직이 영안부 시가지에서 작전을 펼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곳이었다.

“이 폭탄들이 완성되면 일부를 잠입시켜서 오는 두 달 뒤에 있을 연합법 10주년 기념행사식장에서 터뜨릴 생각이다. 그것을 기점으로 각 지역의 조직들이 연대해서 정식으로 자치권 협상을 위한 봉기를 일으키기로 약속되어 있다.”

턱과 뺨에 굵고 갈색빛이 도는 수염이 자랑인 암브로스(Ambroos)는, 바로 얀 마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김요섭보다 세 살 터울로 나이가 더 많았는데, 이곳에서는 조직의 중책으로서 내지병탄 1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테러를 사실상 지휘하고 있었다.

“혹시 한국군이 탐지할 여지는 없어요?”

김요섭의 물음에 암브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형태로든 촉을 잡고 있겠지. 제국익문사의 요원들이 이곳 북해에도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어. 그런데 문제는 그놈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지. 요세이프, 근데 말이야. 모든 정보는 다 새어 나가게 되어 있어. 우리는 그래서 날짜만 서로 공모한 뒤에 북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조직들 사이에 연락을 최대한 하지 않고 있다. 기념식에 대한 행동이 성공하든 못하든, 이미 이야기된 대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날 거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곳에서 바로 시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대략 150명에 가까운 우리 조직원들이 무장을 하고 기념식이 있는 날 시내 각지에서 대기하기로 되어 있어. 각기 흩어져서 숨어 있는 장소는 우리도 서로 어디인지 모른다. 한 번에 소탕되면 안 되니까. 다만 폭발 소리가 들리면 약속한 대로 영안역과 북쪽으로 가는 간선철도를 점거하고 철길을 끊어놓기로 했어. 이 일은 가담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성공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당장의 목적은 영안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행동반경을 최대한 좁혀놓고 퇴각하는 것이니 멀쩡한 산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일은 아니야. 네가 그때 함께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총기를 다루는 법에 대한 훈련 정도는 받아 놓는 것이 좋을 거다.”

암브로스의 말에 김요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1840년 8월 9일, 수은주가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였다.

꽤나 북쪽에 위치한 이곳 영안에서, 여름이라 하더라도 날씨가 30도에 육박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법의 발효를 통해 북해가 내지에 흡수된 지 10주년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시국이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북해도청 앞 광장에서는 기념행사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북해도지사, 제국 육군의 장성들, 황성부에서 온 내부대신과 각료 몇 명, 황제가 직접 치하하기 위해 내려 보낸 칙임관(勅任官) 따위가 하나둘씩 오전 11시로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광장으로 마차를 타고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부분 강제로 동원되어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은, 무더운 여름 공기에 땀을 훔치면서 매우 굳은 표정으로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평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라 왔지만, 차마 잘못 내뱉었다가는 행사장 주변에 깔려 있는 헌병에게 연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무도 불만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동해에서 밀려온 후덥지근한 공기와 뜨거운 햇빛, 그리고 앞뒤로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김요섭도 그러한 군중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들어가 있었다.

그의 품속에는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혹여 날씨가 더운데 복장을 껴입고 있는 것을 의심받을까 싶어서, 일부러 서양풍의 양장(洋裝)으로 걸쳐 입고 나왔다.

아마 이 중에 누군가는, 서로 모르지만 아마도 이 행사와 함께 시작될 봉기를 위해 숨어들어 와 있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또 영안역과 그 주변 지대에서 매복해 있다가 폭발음이 울리면 바로 점거에 나서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 신호탄을 울릴 것인지는 김요섭으로도 알 수 없었다.

사촌형 암브로스에게 여러 번 물어봤지만, 그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하게 될 일이고,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이마 위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차 수십 대가 지나간 것 같은데도, 아직 그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편안하게 남이 끌어주는 마차를 타고 와서 바로 차양막 아래로 들어갈 테지만, 연도에 선 시민들은 헌병들의 강제에 의해 끌려 나와서 익숙하지 않은 북해의 여름 햇살을 견뎌내고 있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부조리해 보였다.

긴장한 채로 멀리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마지막 즈음해서 들어오는 마차에 탄 사람과 김요섭의 눈이 마주쳤다.

광장에서 내리고 있는 그는 어디선가 본 듯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낯설지 않은 얼굴의 젊은 남자와 그 아버지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잠시 기억 속을 헤집어 가던 김요섭은, 이내 그 중년의 신사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바로 선명한 상흔(傷痕)으로 김요섭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큰아버지 김현이었다. 아마 성광사가 투자하기로 했다는 영안―성경 간의 철도 부설에 대한 건을 위해 기념식에도 참석하는 듯 보였다.

화려한 마차를 타고 와서, 매우 고급스러운 재단의 옷을 입고 카펫 위를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백부(伯父)와 사촌의 모습은 김요섭에게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태양이 유난히 뜨겁게만 느껴졌다.

아마 어디선가, 그의 다른 쪽 사촌, 암브로스는 북해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깃발을 들기 위해 안광을 번득이고 있을 터였다.

김요섭은 이 모든 것이 순간 장난처럼만 느껴졌다. 품 안의 권총으로 손이 올라가면서 벌벌 떨렸다. 왜인지 모르게 저 냉담하고 가차 없는 귀신같은 큰 아버지를 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에 김요섭은 사로잡혔다.

요란한 박수 소리와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 그리고 펄럭거리며 흔들리는 태극기의 소리가 모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귓가에서 멍멍거렸다.

김요섭은 숨소리가 거칠어져 갔다.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오늘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금부터 북해합방 10주년 기념행사를 시작하도록……!”

“북해에 자유를!”

연단에 누군가 올라와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 김요섭이 또렷하게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김요섭의 손이 권총을 뽑기 위해 거의 다 올라갔을 즈음, 어디선가 매우 익숙한 모습이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튀어 올라왔다.

헌병들이 제지하려는 것도 잠시, 그는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연단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이내 큰 폭발음과 함께 부연 연기가 연단 바로 앞에서 피어올랐다.

이내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은 사람들의 비명으로 뒤덮였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김요섭은 순간 이성을 놓은 채 연단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아마 그것은 암브로스였을 것이다. 연단으로 튀어 올라 폭탄을 던지기로 예정되어 있다던 그 열사가 설마하니 그였을 줄은 몰랐다.

정확히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외치던 목소리만큼은 김요섭이 또렷하게 알고 있는 그의 것이었다.

그의 곁으로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헌병들의 고함 소리와 사람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에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화약 냄새와 부연 연기 사이에서, 김요섭은 권총을 꺼내 들기 위해 가져갔던 손을 다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의 뒤편으로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북해독립만세!”

“북해독립만세!”

김요섭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혀 떨어졌다. 그는 그것이 자욱한 연기와 먼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大韓帝國年代記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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