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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지
약속 시간은 1시였지만 이틀 전부터 잔뜩 기대한 시황은 20분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모임이 중간고사를 위한 건전한 팀플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황은 그저 은지를 따먹기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고사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시황은 어제 산 옷을 입고 혹시 몰라 이것저것 준비한 가방까지 메고 학교 정문에 서서 지나다니는 커플들을 쳐다봤다. 별 말 없이 그냥 걸어가는 커플도 있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마디 할 때마다 웃겨 죽는 커플이 있었다. 물론 남자, 여자 둘만 다닌다고 다 커플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통 둘이 다니면 처녀인 여자는 많지 않았다.
1시가 되기 5분정도 남았을 때 은지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눈에 띄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라운드넥 니트를 입은 평범한 복장이었다. 분홍빛의 알록달록한 니트 덕분에 귀여움이 급상승하긴 했지만 시황이 기대했던 그런 옷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은지가 먼저 시황에게 인사를 하자 시황은 기쁜 마음에 만면에 웃음을 짓고 인사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하루를 못 봤지만 은지의 처녀성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인사 뒤로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은지는 이게 편할지 모르겠지만 시황은 둘만 있는 이 타이밍에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런 침묵은 어색해 죽을 거 같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뭐라 말을 걸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뭐 생각하신 주제 같은 거 있으세요?”
소개팅이 아닌지라 결국 가장 무난한 말인 오늘 팀플레이 얘기를 꺼냈다.
“몇 개 생각한 게 있긴 한데……. 오빠는요?”
갑작스럽게 나온 은지의 오빠라는 말에 시황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았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미치도록 기분이 좋아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 한 것이다.
“저도 하나 생각한 건 있어요.”
“어떤 거요?”
생각보다 말이 안 끊어지고 잘 이어졌다. 대화라는 게 단답형으로 끝이 나면 안 된다. 간혹 무뚝뚝한 사람은 네, 아니요로 대화를 하는데 이러면 상대방이 상당히 힘들어한다. 대화를 계속 이끌어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단한 건 아니고 여행하고 관련해서 조금 생각을 했거든요.”
“여행이요?”
“네. 그게 뭐냐면…….”
“벌써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시황이 막 말을 하려는데 나머지 팀원인 여자 2명까지 다 왔다. 그 중에 활달한 여자애는 이틀 전만해도 섹스 횟수가 8회였는데 지금은 9회로 변해있었다. 어제나 이틀 전 밤에 섹스를 한듯했다.
“저희도 방금 왔어요.”
시황이 대답했다.
“어디 가실래요? 주말이라 강의실이 문을 안 열어서 학교는 가봐야 소용없거든요. 혹시 자취하시는 분 있으세요? 자취방 가서 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저랑 효주는 자취를 안해서요.”
섹스 9회한 여자인 민영은 활달하고 리더쉽이 좋은지 팀을 이끌고 있었다.
“전 자취를 하긴 하는데 고시원이라 방이 너무 좁아요. 그래서 제 방은 곤란할 거 같아요.”
시황은 미친 듯이 아까웠다. 방이 조금만 더 컸어도 자신의 방으로 부를 수 있었을 거고 그렇다면 생각한 계획을 실행하는데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은지 씨는요?”
섹스 9회한 여자인 민영이 기대감에 차 은지를 쳐다봤다.
“자취를 하긴 하는데…….”
“우와! 거기서 하면 안 될까요? 카페 같은 데는 시끄럽기도 하고 컴퓨터가 없어서 하기 힘들 거 같거든요.”
은지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그렇게 썩 데려가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시황은 무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제발 거기로 가지고 빌고 빌고 또 빌었다.
“알겠어요.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돼요.”
은지는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결정했다. 남자인 시황이 없었다면 별 고민 없이 결단을 내렸을지 모르나 남자라는 존재를 방에 들이기 꺼림칙해서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럼 가죠!”
은지가 앞장서고 그 옆에 시황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효주 씨는 말이 없으시네요?”
시황도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효주는 심각하게 말이 없었다. 섹스는 132번이나 해놓고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얘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이해 좀 해주세요.”
“그렇군요.”
평범하게 대답을 했지만 사실 시황은 낯을 가리는 애가 섹스를 132번이나 했냐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프로필이 뜨고 난 이후로 시황은 대부분의 생각을 지금처럼 섹스와 연관 짓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처녀라면 야하고 노출있는 옷을 입어도 왠지 순수해 보였고 아무리 얼굴이 청순하고 착해보여도 섹스를 많이 했으면 그렇게 썩 좋은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시황이 섹스를 많이 해보고 여자에 대한 경험이 쌓였다면 이런 이상한 방식의 사고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모태솔로인 가련한 남성인지라 섹스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건물이에요.”
은지가 가리킨 건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오피스텔이었다. 1층과 2층에는 다양한 음식점과 편의점이 있었고 그 위의 층들이 주거용인 구조였다. 딱 봐도 시황이 지금 살고 있는 한 평 정도의 고시원과 차원이 다른 수준의 집이었다.
“우와, 집 좋네요? 이런데 비싸죠? 보증금하고 월세 얼마나 해요? 정말 부럽네요.”
민영은 정말 부러운지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시황의 추측으로는 요즘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와 같이 살고 싶어 저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동거라……. 동거의 반은 섹스다. 보는 사람 없는 집에 서로 좋아 죽을 거 같은 커플이 산다면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애인이 동거를 한 사실이 발각되면 크게 싸우거나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걸 인터넷의 글로 읽었었다. 나중에 발각되든 말든 제발 동거를 해보고 싶은 게 지금 시황의 마음이었다.
“보증금 500에 월세 50이에요. 친구하고 같이 사는 거라 크게 부담되지는 않아요.”
“앗, 그럼 지금 집에 친구 분도 있어요?”
민영이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아니요. 친구는 나중에 밤이 돼야 올 거에요.”
“다행이네요. 괜히 민폐 끼칠까봐 조금 걱정했어요. 헤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오른쪽 집. 701호였다.
시황은 혹시라도 까먹을까봐 계속해서 701호라고 되뇌었다.
오피스텔이라 그런지 방은 컸다. 시황이 사는 고시원보다 10배는 더 커보였다.
“와, 집이 2층도 있네요? 위에가 잠자는 데에요?”
“네. 1층은 거실이고 2층에서 자요.”
깔끔했다.
간혹 TV에 보면 엄청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은지는 안 그런 성격인 듯해서 다행이라고 시황은 생각했다.
오피스텔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화장품 냄새 같기도 한 그건 홀아비냄새가 나는 시황의 방과 천지차이였다.
조그만 탁자가 있는 거실에 모두 앉았다.
시황은 의도적으로 은지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노력했다.
“바로 시작하죠! 뭐 생각해 오신 거 있으세요?”
“오빠가 있다고 하던데요.”
은지가 시황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시황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떤거에요?”
“그게…….”
꿀꺽
여자 3명이 쳐다보고 있으니 시황은 긴장해서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여행 관련 된 건데요. 커플 둘이 여행을 가면서 독특한 사람을 만나는 식으로 할까 하고…….”
그렇다. 은지와 커플이 되고 싶어서 준비한 거였다.
“오, 나쁘지 않네요. 만나는 사람 설정만 잘하면 나름 재미있을 거 같아요. 이걸로 할까요?”
“저도 괜찮아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시험도 많은데 여기에 크게 시간을 뺐기긴 싫은 거 같았다.
“그럼 커플 중에 남자 역은 오빠가 하시구요. 여자 역은 누가 할까요? 은지 씨랑 하실래요?”
시황은 민영이가 참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걸 저렇게 잘 이끌어 줄까? 이 오피스텔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민영의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네.”
은지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자 시황은 순간 입으로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시황과 은지가 커플을 맡기로 확정되자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대사내용까지 생각하는 단계까지 갔다.
“맞다! 제가 혹시나 해서 차를 가져 왔는데 다들 차 드실래요?”
시황은 이대로 가다간 그냥 헤어질 거 같은 분위기가 돼버리자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약간 뜬금없긴 했지만 이제 생각난 척 행동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손님 불러놓고 마실 것도 안 가져 왔네요. 그런데 집에 마실 게 없어서…….”
은지가 당황하며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마실 거라도 줘야 한다는 걸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제가 차를 가져와서 그냥 말을 꺼낸거에요. 진짜요.”
은지가 당황해 하지 시황도 당황했다.
“무슨 차인데요?”
“삼촌이 보낸 준 건데요. 이걸 마시면 피로가 풀린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진짜 피로가 풀리는 건 모르겠고 맛이 엄청 좋아요. 차라고 하면 뭔가 쓰고 그렇잖아요? 이건 유자차처럼 달콤하면서 향이 좋다보니까 제가 정말 매일 마시거든요.”
시황은 차에 대한 자랑을 막 늘여놓았다.
“그래요? 마셔보고 싶은데 티백을 가져오신 거에요?”
“아니요. 이건 티백으로 된 건 아니고 그냥 찻잎이에요. 물에 넣고 같이 끓이기만 하면 돼요.”
“찻잎 주시면 제가 끓여 올게요.”
은지가 말했다. 집주인으로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가서 끓여 올게요. 그 도구가 어디있는지만 가르쳐 주시겠어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사실 시황은 여러 상황에 대비해서 찻잎과 찻잎을 우려낸 물을 같이 들고 왔었다. 지금은 우려낸 물을 주기보단 직접 끓여서 주는 게 훨씬 나을 거 같아 일부러 우려낸 물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오피스텔이다 보니 부엌과 거실이 같이 붙어 있었다. 옆에서 은지가 부엌을 뒤지더니 물을 끓이는 조그만 주전자를 주었다.
이러고 있으니 왠지 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자 시황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여기요.”
“이젠 제가 할게요. 가서 앉아 계세요.”
“그래도…….”
“하하, 괜찮아요.”
“그럼 제가 컵하고 스푼하고 준비할게요.”
“그걸 깜빡했네요. 부탁드릴게요.”
은지는 주전자에 물을 담아 찻잎을 끓이는 시황 옆에서 컵을 준비했다.
많은 양의 물이 아닌지라 금방 끓기 시작했고 시황의 심장도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끓이는 차는 수면용 차였다. 이걸 마시게 되면 1시간 정도 지나 다 자게 될 것이고 3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도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와, 향기 엄청 좋네요?”
거실에 있던 민영이 부엌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 수면차도 끓기 시작하자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한 번 맡으면 그 감미로움에 푹 빠지게 되는 냄새였다.
“향기 괜찮죠?”
“무슨 차에요?”
은지도 생각보다 냄새가 너무 좋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황을 쳐다봤다.
“글쎄요. 외국에 계신 삼촌이 보내주신 거라 잘 모르겠어요.”
대충 얼버무린 시황은 차를 컵에 따르고 거실에 있는 탁자로 가 하나씩 건네주었다.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짓던 여자들은 한 모금씩 차를 마셨다.
“맛있다!”
셋 다 동시에 말했다.
시황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시간을 정확히 체크했다.
2시 22분이었다.
“정말 진짜 너무 맛있어요. 효주야, 은지 씨 그렇죠? 진짜 맛있죠?”
민영은 감탄했는지 끊임없이 차에 대해 찬사를 늘여 놨다.
“네. 정말 맛있어요. 차가 이런 맛을 내는지 처음 알았어요. 설탕을 안 넣어서 그냥 쓰기만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달짝지근하고 풍부한 맛이 날까요?”
말이 별로 없는 은지도 차를 마시고 감동을 받았는지 끊임없이 칭찬했고 효주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제 것도 드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