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래곤의 유산-34화 (3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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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 운동, 지식, 마법

지금은 저 대화를 듣는 게 중요했다.

“어. 그래. 저년 집 먼저 알아낼 테니까.”

남자는 봉덕이라는 사람과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작당모의를 했다. 그런데 중간 중간 시황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하게 얘기해 무슨 말을 하는지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대충 들은 걸로 판단하기에는 저 남자가 찬미의 집을 알아낸 다음 뭔가 하려는 거 같았다. 그 뒤에 부분은 워낙 작게 말해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어떤 짓을 할지 상상이 갔다.

시황은 기가 찬 걸 넘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멀쩡히 법이 있고 정의가 있는 이 사회에 어떻게 저런 짓거리를 할 생각을 하는 걸까? 법이 무섭지도 않은 건가?

“야, 걱정 말라고. 우리가 이 일 한두 번 해보냐. 그년……. 벙긋 못하게……. 버리면 되니까. 쫄지 말라고. 이번이 진짜 마지막…….”

남자는 이 대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고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시황은 남자가 전화를 끊을 때 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친 듯 고개를 내리고 숨만 헉헉거리며 내쉬었다. 물론 페달을 빠르게 밟는 건 잊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부터는 아공간에 이어폰을 넣어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다. 그럼에도 남자가 자신을 슬쩍 쳐다본다는 게 느껴진다. 보이진 않았지만 확연히 느껴진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지금 바로 저 남자에게 뭐라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전에 화장품을 팔고 싶어 지영에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했다가 사기꾼으로 몰렸듯이, 아무생각 없이 화부터 냈다가 저 남자가 발뺌을 하면 자신만 정신 나간 놈이 되는 것이다. 지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저 말을 들은 건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는 자신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치밀해져야 한다. 좀 더 생각을 하고 나은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한다.

잠시 시황을 쳐다보던 남자는 걸음을 옮겨 헬스장 카운터로 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영겁처럼 길었다.

시황은 눈치를 계속 보다가 남자의 눈에서 최대한 안 띄면서 자신은 그쪽을 볼 수 있는 운동 기구에 누웠다.

레그 컬(Leg Curl)이라는 이 운동기구는 대퇴근을 발달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딴 건 시황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운동기구에 누우면 카운터와 남자가 아주 살짝 벽 옆으로 보였고 자신은 누워있으니 눈에 잘 띄지 않을 거 같아 선택한 거였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뭐라고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남자가 찬미의 집을 알아낸다고 한 걸로 봐서는 카운터를 맡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찬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거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안 된다고 거절할지 알았는데 남자가 몇 마디 하자 군말 없이 정보를 내어준다. 남자를 보고 잔뜩 겁먹은 듯하다.

“야, 알아냈다. 하던 거처럼 택배인 거처럼 해서…….”

남자는 역겨운 웃음을 짓고는 다시 봉덕이라는 사내와 통화하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제 씻고 나가려는 거 같았다.

남자와 찬미 둘 다 없는 걸 꼼꼼하게 확인한 시황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갔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세요?”

아르바이트생이라 그런지 근육이 많지 않은 평범한 청년이다.

“이찬미 씨 휴대폰 번호하고 주소 좀 알 수 있을까요?”

정공법을 택했다.

“죄송합니다. 다른 고객님의 개인정보를 가르쳐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까 그 남자한테는 쉽게 가르쳐 주는 거 같더니 자신에게는 강한 어조로 안 된다고 말을 했다.

“방금 전 남자도 이찬미 씨 개인정보 알아 가신 걸로 아는데요. 왜 그 분은 되고 전 안 되는 거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희는 고객님의 개인정보를 가르쳐 드리지 않거든요.”

알바는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시황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전 남자한테는 말 몇 마디에 간단히 가르쳐 주는 걸 분명히 봤는데 자기한테는 끝까지 안 된다니?

왜 그러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 남자는 생긴 거 자체가 험상궂은데다 문신까지 있으니 두려움에 그냥 가르쳐 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키도 썩 크지 않은데다 말랐고 여기에 유하게 생기다 보니 적당히 무시해도 되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네? 무슨 책임요?”

시황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알바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본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착한 걸 넘어 바보일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고객센터에 컴플레인을 제기하며 목소리만 크면 이긴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도 올바른 짓은 아니다.

화가 나도 침착하게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무조건 화를 낸다고 세상일이 풀리는 건 아니다. 찬미와의 일에서도 겪어본 바가 아닌가?

“만약 방금 그 사람이 이찬미 씨를 납치를 하거나 다른 범죄적 용도로 그 개인정보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니까 다른 고객님들 정보를 준 적이 없다니까요. 아, 진짜. 그리고 당신이 그런 짓 할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까지 얘기하는데도 아르바이트생은 오히려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바만 아니었어도 한판 붙을 텐데 하는 태도였다.

시황은 통감했다. 사회가 그렇다. 약육강식이라는 표현은 지능이 떨어지는 동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동물보다 더 한 게 바로 인간들의 약육강식이다.

무시 받지 않으려면 힘이든, 돈이든, 얼굴이든, 학벌이든 무언가가 특출 나야했다. 지금 자신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어디서든 무시 받을 뿐이다.

전형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런 아르바이트생과의 문제 해결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직장인도 아니고 겨우 몇 달 일하고 마는 알바생에게는 이러한 압박이 매우 효율적인 것이다.

시황은 카운터에 있는 아령의 끝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크롬으로 도금된 이 아령의 재질이 뭔지는 몰랐지만 충분히 우그러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내공이 부족해 장시간동안 그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지만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힘을 내는 건 가능했다.

갑자기 시황이 아령을 잡자 알바가 움찔했다.

“CCTV 돌려볼까요? 아니면 그 남자 데리고 와서 삼자대면이라도 하면 되겠습니까?”

말을 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단전에 있는 대부분의 내공이 노도와 같이 팔로 흘러들어오자 그 무엇이든 부수고 우그러트릴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난다.

끼긱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아령에서 흘러나온다. 인간의 물렁한 살과 근육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싼 아령은 주철을 사용해 만들지 모르나 지금 시황이 쥐고 있는 아령은 알루미늄과 니켈을 혼합해 만들다보니 강도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물론 그래봤자 일반인의 악력으로 우그러트리기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말씀해보시죠?”

그 단단한 아령을 어린애 손모가지 비틀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황이 우그러트려버리자 알바는 뭐라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사장이라도 부를까요?”

“죄, 죄송합니다. 야, 약간 착오가 있었네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cctv니, 삼자대면이니 하는 시황의 말도 압박이었지만 저 말도 안 되는 괴력에 엄청난 두려움이 일었다.

만약 자신한테 화가나 저 손으로 때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인생이 끝나는 거다. 얻어맞으면 합의금 받을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내는 손에 맞기라도 한다면 어디 하나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져 불구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만약 저 손에 얻어맞고 평생 침대에서 누워 지내기라도 한다면 합의금을 받아봐야 뭐하는가?

시황의 손이 움직이자 알바생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재수 없게 저 손에 잡힐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덥지도 않은데 알바생의 이마에서 땀이 주룩 흘러 볼을 타고 내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 가르쳐 드릴게요.”

알바생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찬미의 정보를 찾아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시황에게 주었다. 그런데 시황이 손을 들어 종이를 잡으려 하자 깜짝 놀라 종이를 놔버리고 말았다.

지구의 중력 때문에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알바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 죄송해요. 고, 고의는 아니었어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시황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고는 탈의실로 갔다.

이런 식으로 힘을 써본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정말 무식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이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아까 그 남자처럼 무식하게 힘만으로 모든 건 해결하려고 하는 건 당연히 잘못된 게 맞지만 지금 자신처럼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힘을 이용한 건 괜찮은 판단인 거 같았다. 만약 힘이 없는 과거였다면 저 알바생이 하는 말에 굴욕만 당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으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힘을 쓰는 건 좋지 않으니 그 밸런스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강한 열의가 피어났다. 이때까지는 별 생각 없이 그냥 경험치도 쌓을 겸 하면 좋을 거 같아 운동을 하고 내공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힘! 힘이 중요했다. 물론 그 힘이 무력만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지식, 재력 등 이 모든 게 힘에 속했다. 이런 힘이 없다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 영원히 찌질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뿐이리라.

탈의실에 들어가자 문신이 잔뜩 있는 남자가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 있었다.

온 몸에 근육이 가득했다. 프로필을 살짝 훑자 키 185cm에 90kg이라는 말도 안 되는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시황과 비교하면 거의 2배 가까이 몸집이 컸다.

옷을 입고 있을 때와는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황은 본능적으로 내공부터 점검했다. 저런 사람을 상대로 기본적인 근력만으로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조금 내공을 썼다고 하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한번 쌓아올린 내공은 사용한다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다시 차오르나 운기조식을 통해 그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

옷을 벗으며 남자를 슬쩍슬쩍 관찰하던 시황은 큰 덩치와는 다르게 그의 성기가 매우 작다는 걸 발견했다. 자신도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거보다 2배 가까이 작았던 것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시황은 샤워를 하면서 어떤 식으로 찬미를 도와줘야할지 고민했다.

문신한 남자는 한참 전에 헬스장을 나간 걸 확인한 시황은 카운터 앞에 있는 의자에서 찬미를 기다렸다.

탈의실에서 뭘 하는지 찬미는 30분이 다돼가도록 나오지 않아 혹시 아까 전에 나갔나 하는 의문까지 생겨 알바에게 물어봤지만 아직 안 나갔다는 어색한 답변만 받을 수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타블렛을 꺼내 퀘스트를 체크하고 있는데 갑자기 찬미가 나와 급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찬미는 더러운 걸 본다는 표정을 짓더니 시황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로 갔다.

“잠깐만요. 전에 제가 죄송했어요.”

시황이 말했지만 찬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평소에도 표정이 무표정하고 까칠했지만 아까 전 일 때문인지 지금 유독 더 쌀쌀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시황은 찬미와 함께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시황과 찬미뿐이었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적막이 감돈다.

“전에 실수하고 화낸 거 정말 죄송해요. 제가 약간 욱 하는 게 있어서 그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말 큰 실수한 거 같더라구요.”

시황은 찬미가 자신을 무시하든 말든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귀는 있으니까 자신이 하는 말을 분명 듣기는 할 테니까.

“정말 죄…….”

시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춰 섰고 찬미는 그냥 나가버렸다.

“어쩌지.”

말이라도 받아주면 어떻게 위험을 알려주겠지만 자신을 아예 없는 듯이 대하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시황은 조심스럽게 찬미의 뒤를 밟았다. 언제 그 남자가 나타나 찬미에게 위협을 가할지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큰데다 긴 생머리를 가진 게 눈에 너무 띄여 찬미의 위치를 놓치지 않고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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