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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유산-100화 (1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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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지 않는 선에서 먹을 수 있는 파스타 전문점에 갔다. 3층에 위치한 이 가게는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가게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둑해진 거리에는 이미 간판의 불이 켜져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돌아다닌다.

“나 이런데 처음 와봐.”

“일반 가게랑 별로 다른 것도 없어요.”

테이블에 앉은 시황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찬미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한다.

직원이 메뉴판과 물을 가주다 주자 시황이 메뉴판을 펼쳤다. 이름이 어려운 파스타 몇 개와 스테이크 종류가 적혀 있었는데 가격들이 기본 9000원 이상이었다.

“뭐 먹을래?”

“전 해물 크림 스파게티 먹을게요.”

“그래? 난 그럼 까르보나라인가 이거 먹어볼게.”

시황이 까르보나라와 해물 크림 스파게티를 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그릇에 파스타가 조금 담겨서 나왔다. 해물 크림 스파게티가 9800원이고 까르보나라가 8900원인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황은 무식하게 양이 작다니, 이게 무슨 9000원씩이나 하냐니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유미는 어때? 공부 잘하고 있어?”

“하고는 있는데, 요즘 자꾸 딴 생각을 하는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래? 난 유미랑 같이 서울에 있는 대학 가고 싶은데.”

“열심히 해야죠.”

일단 찬미와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몰라 유미와 학업에 관련된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화라는 게 꼭 한 가지 주제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관심사로 시작해 점점 확장시켜 나가면 된다.

“청담동에 가봤어?”

“한두 번 가봤어요.”

“거기에 진짜 명품하고 비싼 거 많아?”

“네. 명품만 파는 백화점도 있고, 화려한 게 많아요.”

“그렇구나. 신기하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찬미가 흥미를 가지는 요소가 뭔지 찾아나갔다.

“찬미는 요즘 집에서 뭐해?”

“네? 그, 그냥 있는데요.”

“나 과외 시켜 주고 땡이야?”

“네.”

찬미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원래는 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강간을 당할 뻔한 이후로는 집 밖에 나가기가 겁이 났다. 그래서 간간히 부모님이 하시는 조그만 식당을 도와주거나 오후에 시황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는 게 다였다.

“그래? 할 거 없으면 우리 카페에서 바리스타 해볼래?”

“바리스타요? 저, 커피 어떻게 만드는지도 잘 모르는데…….”

“그거야 배우면 되지. 생각 있어?”

“글쎄요. 조금 생각해볼게요.”

“그래. 알았어.”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옆에서 계속 같이 지내다보면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남자 혐오증을 가진 찬미라면 특히 더 옆에서 다정하게 대해줘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맛있네. 다음에도 먹으러 오자.”

“아, 네.”

까르보나라의 양이 작기는 했지만 맛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 특히 이런 가게는 분위기가 좋아 여자랑 같이 오기에 적합했다. 왜 소개팅하면 이런 파스타 가게에 오는지 이해가 간다.

“다 먹었으면 가자.”

시황은 카운터로 가서 자연스럽게 찬미 거까지 계산을 하려고 했다.

“여기요.”

그런데 옆에 온 찬미가 만 원을 내밀었다. 더치페이를 하자는 거 같았다.

“고마워.”

찬미의 돈을 받아든 시황은 카드로 계산을 했다. 여기서 보통의 남자라면 허세를 부리면서 자기가 낸다고 하겠지만 찬미 같은 성격은 오히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더 싫어할 게 분명했다.

계산을 마치고 거리로 나오자 어두운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여자들이 남자, 혹은 여자인 친구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찬미만큼 예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한데 막상 가까이서 별로인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바로 술 마시러 가긴 조금 그러니까 영화라도 볼까?”

“보실 거 있으세요?”

“가서 정하지 뭐.”

찬미를 데리고 극장에 간 시황은 적당히 보기 무난한 영화를 골라 감상했다. 가족의 사랑을 다룬 영화였는데 엔딩이 너무 감동적이라 시황은 코끝이 찡해졌다.

엔딩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데 옆에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지은 시황이 쳐다보자, 얼굴 가득 감동한 표정을 한 찬미가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눈물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다. 평소 봐오던 찬미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모습이다. 찬미에게 저런 감수성이 있을 줄이야.

“감동적이지?”

“그, 그럭저럭이요.”

울고 있는 게 민망했는지 찬미는 시황의 눈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도 조금 눈물 나더라.”

“아, 안 울었어요.”

시황의 말에 찬미가 절대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뻔히 눈물이 자국이 다 있는데 저런 거짓말이라니. 귀엽다.

“자, 휴지.”

찬미는 휴지를 받더니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고 코도 풀었다. 그래도 눈이 빨갛다.

“가요. 오빠.”

“응.”

시황은 극장을 나가면서 시간을 체크했다. 11시가 다돼간다.

“이제 술 마시러 가자. 찬미가 아는 술집 있어?”

“아니요. 술을 잘 안 마셔서 모르겠어요.”

시내를 거닐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땅한 술집이 없었다.

“그럼 저기 갈까?”

시황이 가리킨 술집은 전에 지영과 갔었던 룸으로 된 곳이었다.

“전 아무데나 괜찮아요.”

찬미가 괜찮다고 하자 시황은 찬미를 데리고 그 술집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찬미는 신기한 듯 둘러봤다. 술집에 잘 안가서 이렇게 방으로 나뉜 곳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방으로 되어 있다고 일반 집처럼 방음이 제대로 되는 건 아니었지만 개방된 술집보다는 서로의 말소리가 훨씬 잘 들렸다.

“이런 데는 처음이야?”

“네. 제가 술을 잘 못 마셔서요.”

“뭐 먹을래?”

“전 다 괜찮아요.”

“알았어.”

시황은 직원이 들어오자 전에 지영과 먹었던 치킨 샐러드와 맥주 1700cc를 시켰다.

“오빠, 술 너무 많이 시킨 거 아니에요?”

직원이 나가자 찬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런가? 괜찮을 거야. 오늘은 왠지 맥주 좀 마시고 싶기도 하고.”

시황은 웃으면서 말했다. 찬미에게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찬미를 탐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직원이 치킨 샐러드와 맥주를 가져다주자 시황이 찬미의 맥주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아까 본 영화 얘기와 유미 얘기, 그리고 대학 진학에 관한 소소한 얘기들을 했다.

“찬미는 남자 친구 없어?”

“남자 친구요? 없어요.”

남자를 혐오하는 찬미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다음 질문을 위한 교두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남자 친구 사귀어 본 적도 없는 거야?”

시황은 맥주를 마시면서 물었다. 꼭 알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느낌으로 말했다.

“그건 아닌데…….”

아까처럼 찬미는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를 그렇게나 싫어하던 찬미가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는 게 놀랍다.

“아, 미안. 내가 기억하기 싫은 얘기를 꺼냈나보네.”

“아니에요. 옛날일인데요.”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으로 찬미가 대답한다. 분명 옛날 남자 친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휴학한지 얼마나 됐어?”

“1년 정도 됐어요.”

남자 친구 얘기 이후로 찬미가 계속 좋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맥주를 한번에 들이켰다.

“살기 너무 힘드네요. 오빠.”

“응? 왜, 왜 그래? 찬미야.”

술이 조금 들어가서 그런지 볼이 상기된 찬미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상처가 가득한 눈빛이다.

분명 남자와 관련된 일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슬픈 찬미의 얼굴을 보면 예쁘고 인기가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닌 듯 했다.

“찬미야, 너 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같은데…….”

“괜찮아요.”

시황의 걱정에도 찬미는 계속 맥주를 마셨다. 이러면 곤란했다. 원래 계획은 전에 지영에게 했던 것처럼 술에 잔뜩 취한 척 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찬미가 술에 취해 자신이 찬미를 데려다 줘야할 판이다.

“오빠……. 술 좀 더 시킬게요.”

어느새 1700cc를 다 비운 찬미가 시황에게 말했다. 시황이 맥주 두세 잔 마실 동안 찬미가 다 마셔버린 것이다.

“괜찮아? 찬미야?”

“괜찮다니까요.”

찬미가 살짝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 예전의 그 까칠하던 찬미 같았다.

시황은 1700cc를 하나 더 시켰다. 직원이 맥주를 가져오자마자 찬미는 자기가 자신의 잔에 붓고는 들이킨다.

“오……빠, 남자들은 다 왜, 왜 그런 거에요?”

“응? 뭐가?”

술을 마시던 찬미가 뜬금없이 말했다.

“남자새끼들 정말 다 죽었으면 좋겠어요.”

“차, 찬미야. 진정해.”

아까 전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조신하던 찬미였는데 술이 들어가자 갑자기 옛날의 그 무섭던 찬미로 돌아와 버렸다.

“전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런 버러지새끼는 성기를 잘라버려야 돼요.”

“누구 말이야?”

“오빠……. 오빠는 제 알몸 봐서 아시죠? 저 거기에 털 없는 거.”

취하기는 확실히 취했는지 찬미 뻘건 얼굴로 평소라면 절대 못할 말을 스스럼없이 꺼냈다.

“아, 응. 그게 왜?”

“그 버러지새끼가 할 거 다 해놓고 학교에 뭐라고 소문 퍼트렸는지 아세요? 저보고 창녀래요. 전……. 전 그때 처음이었는데 거기에 털이 없다고, 처녀막이 없다고…… 아무 남자하고 자는 창녀라고 소문을 퍼트렸다고요.”

찬미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흐른다. 아까 전 영화를 봤을 때 흘렸던 눈물이 감동의 눈물이었다면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은 억울함과 분함이 가득 담긴 눈물이었다. 찬미는 눈물을 닦더니 다시 술을 계속 들이켰다.

시황은 이제야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갔다. 프로필에 나와 있는 1이라는 섹스 횟수는 방금 말한 전 남자 친구와 했을 것이다. 그 전 남자 친구는 찬미에게 음모가 없는데다 섹스를 했는데 처녀막도 없고 피가 전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아마도 약간의 배신감 같은 걸 느낀 거 같았다. 그래서 섹스를 하고 나서 학교 친구들에게 찬미가 쉬운 여자라는 식으로 말했을 테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을 것이다. 원래 이런 소문이 빨리 도는 법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찬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 시황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소문 들은 남자들이 저랑 한번 자보겠다고 얼마나 달려들었는지 아세요? 친하던 친구들도 그 소문 듣고 저한테 말도 안 걸고…… 남자들은 저랑 자고 싶어서 달려들고……. 오빠 아까 저한테 왜 휴학했냐고 물으셨죠? 그래서 휴학했어요.”

“그 놈이 누군데?”

시황은 정말 화가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가자 성기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단지 음모가 없다고 창녀라고 소문을 내다니? 인간쓰레기도 그런 인간쓰레기가 없다.

“그 놈이 문제겠어요. 남자들이 다 그렇죠. 꼭 그 놈만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남자들이 얼마나 추근거리고, 역겨운지 오빠는 모르실 거에요.”

슬픈 얼굴로 덤덤히 말을 내뱉는 찬미를 보니 깊은 연민이 생긴다. 처음 헬스장에서 만났을 때 자신에게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고 화를 내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간다.

학교에 창녀라고 소문이 나서 휴학까지 했는데 집에서 강간을 당할 뻔 하다니……. 찬미가 너무 불쌍하다.

“오빠, 술 좀 더 시켜줘요.”

“그래.”

시황은 술에 입을 대지도 않았는데 찬미는 또 어느새 다 마셨는지 1700cc를 다 비워버렸다. 술을 별로 못한다더니 저렇게 먹고도 더 먹으려고 한다. 너무 많이 마시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황은 찬미의 말대로 직원을 불러 1700cc를 하나 더 시켰다.

술이 오자 아무런 말도 없이 찬미는 맥주만 계속 마셨다.

“찬미야, 괜찮아? 이제 갈까?”

“뭐! 싫어! 안 갈 거라고!”

============================ 작품 후기 ============================

추천, 선작, 코멘트, 그리고 쿠폰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편 더 올릴게요.

저도 많이 올리고 싶은데 쓰던 소설 마무리를 지어야 돼서 조금 바쁘네요...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몰랐는데 벌써 100회나 되었군요. 다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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