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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윽.”
아직도 넋을 놓은 채 감탄을 하며 그림을 감상하는 은비를 슬쩍 본 시황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연기를 했다. 전문 연기자 앞이라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은비는 그림에 정신이 팔려서 자신이 어색한 연기를 했다는 건 모를 것이다.
“어머, 괜찮으세요?”
예상대로 은비는 시황이 일부로 엎어졌다는 걸 모른 채 다가왔고 그 순간 시황은 방금 호주머니에서 꺼낸 도구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은비의 손에 껴있던 1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16캐럿 다이아 반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간편 물건 소환기. 하나의 지정한 물건을 원하는 곳에 이동시켰다가 소환해주는 도구. 언제 어디서든 버튼을 한 번 눌리면 물건이 지정된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눌리게 되면 원래의 장소로 이동한다. 하루에 한 번 사용이 가능하다.]
시황은 물건 소환기 버튼을 곧바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물건 소환기 덕분에 방금 은비가 꼈던 다이아 반지는 시황의 아공간에 잘 이동해 있었다. 하지만 은비는 자신의 손에 다이아 반지가 사라진지도 모른 채 시황을 걱정해주는 척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괜찮아요. 은비 씨에게 걱정도 받고……. 너무 고마운데요.”
시황은 은비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음흉하기 그지없는 미소지만 은비의 눈에는 그저 순수하게 고마워하는 걸로 보였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은비는 자신의 손에 있던 반지가 사라진지도 모르고 시황에게 웃음을 지어주었다.
“제 부탁은 별 건 아니고…….”
시황은 은비가 반지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근처 테이블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은비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은비가 시황의 맞은편에 앉는다.
“소진이처럼 팬 카페나 트위터 같은 곳에 제 이름을 쓰지 말고 팬이 선물해 줬다고 간단한 글만 써주시면 돼요.”
“제가 받은 게 너무너무 많은데 그것만 해도 될까요? 너무 죄송해서…….”
어려운 것도 아니고 저번처럼 글만 써도 된다는 말에 은비는 겉으로는 아쉬운 척을 했지만 간단한 일이라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밥을 먹자는 것 같이 치근덕거리는 부탁이었으면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이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호텔에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오래 있기는 했지만 다음부터는 단 둘이 만나는 걸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시황도 나름 유명한 사람이니 이렇게 둘이 만났다가 스캔들이라도 생겼다가는 자신에게 큰 피해가 올 테니까.
“은비 씨하고 단 둘이서 이렇게 얘기하고 그림을 그려본 것만으로도 제가 영광이죠. 하하.”
시황은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는 은비가 눈치를 채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늦게 알아차리면 알아차릴수록 좋았다.
“어머, 아니에요. 노래 본좌님께서 이렇게 예쁜 그림도 그려주시고 저희 아버지를 위해서 약도 주셨는데 제가 더 감사드려야죠.”
은비는 이제 집에 가기위해서 슬슬 대화를 마무리를 했다. 나름 연예계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은비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만졌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조금 들었다.
“벌써 10시가 한참 넘었네요. 밤도 늦었는데 이제 옷 갈아입고……. 응? 왜 그러세요?”
시황은 말을 하다 말고 안색이 파리해진 은비를 보며 의아한 척하며 말했다. 은비가 흔히 짓는 그런 거짓된 표정이었다.
“네? 아, 아니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전에 잠깐 욱했던 것 말고는 평소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은비의 표정이 눈에 띨 정도로 굳어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아니요. 아, 아무 일도 없어요.”
시황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은비는 시황의 눈을 피했다. 방금 손을 만지고 허전한 느낌이 들어 손가락을 봤더니 10억 원이 넘는 16캐럿짜리 다이아 반지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 순간 끝없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암담하면서도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그 뒤로 은비는 혹시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시황이 말하는 틈틈이 살폈는데 그 어디에도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시황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려워서 어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구요. 이제 돌아가셔야 하니까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저, 저기 시황 씨. 조, 조금 더 얘기하면 안 될까요?”
“네? 얘기요?”
“네. 커, 커피라도 마시면서 조금만 더 얘기해요.”
은비는 혹시 시황이 눈치를 챌까봐 손가락이 안보이게 가리면서 말했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서 반지를 찾아놔야 했다.
“그럴까요? 그런데 벌써 11시가 다돼가는데 안 피곤하세요?”
시황은 은비가 왜 그러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 전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 일도 없고 시황 씨랑 좀 더 얘기해보고 싶어서요.”
은비는 지어지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지으면서 시황에게 말했다. 이대로 보석이 잃어버린 걸 들키면 자신은 파멸이다. 그 10억 원이라는 돈을 갚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뉴스 기사가 나가기라도 한다면 이때까지 쌓아올린 명성과 인기가 단번에 추락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군요. 이거 영광인데요. 그럼 부엌에 가서 커피를 타 올 테니까 잠깐 앉아계세요.”
“고마워요.”
시황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자 은비는 재빠르게 바닥을 뒤지면서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체면이고 뭐고 간에 그딴 거보다 다이아 반지를 찾는 게 더 중요한 일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손에 잘 끼고 있던 반지가 언제 사라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긋한 커피 향기가 거실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시황이 커피를 거의 다 만들어가고 있는데 반지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응? 은비 씨 뭐하세요?”
시황이 커피를 가지고 온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반지를 찾던 은비는 시황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긴장 때문에 은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데다 안색까지 창백한 게 누가 봐도 이상함을 느낄 정도였다.
“아, 아니에요. 보, 볼펜을 떨어트려서요.”
“그래요? 볼펜은 놔두고 커피부터 드세요. 그런 거야 나중에 찾으면 되죠. 보석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요. 하하.”
시황의 말에 은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지금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시황에게 고백을 했을 때 시황이 화를 낸다거나 바로 경찰에 신고라도 한다면 그걸로 자신은 끝이다.
단순히 보석을 잃어버린 걸 넘어 시황과 밤늦게까지 단 둘이서 호텔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밝혀질 테고 그렇게 되면 온갖 구설수에 오를 게 분명하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은비는 시황과 일단 커피를 마셨다. 반지를 낀 왼손은 보이지 않게 숨긴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온통 반지로 가득 차 있어서 시황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벌써 커피 다 마셨네요.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은비 씨.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벌써 11시 30분이 다돼가요.”
“헤, 헤어지려니까 너무 아, 아쉬워서요. 조, 조금만 더 얘기해요.”
“아니에요.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죠. 이제 옷 갈아입으시는 게…….”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은비와 그런 은비를 집에 보내려는 시황의 치열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시황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걸 전혀 모르는 은비는 그저 애가 타서 죽을 것만 같았다.
“절 그렇게 빨리 보내고 싶으세요? 얘기나 좀 더 하자니까요!”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자꾸 집에 보내려는 시황의 말에 참지 못하고 은비가 버럭 소리를 쳤다. 친한 사람 아니면 절대로 내보이지 않는 본래의 성격이었다.
“아, 그, 그렇게 해요.”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어, 어머. 죄, 죄송해요. 시, 시황 씨랑 계속 있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저도 모르게 실례를 했네요.”
자신이 소리치고 나서 당황한 은비가 바로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하. 과자라도 드실래요?”
“네. 고마워요.”
시황이 또 과자를 가지러 가자 은비가 다시 샅샅이 바닥을 찾았지만 반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엄청난 절망감에 은비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더니 눈물이 찔끔 나와 버렸다.
“볼펜은 나중에 찾으시고, 여기 과자 드세요.”
시황이 테이블에 과자가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자 은비가 황급히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요.”
“네. 그러세요.”
화장실에 간 은비는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 내었다.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었지만 시황이 들을까봐 그런 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됐는지 정말 억울하고 답답해서 죽을 거 같았다. 시황이 보석을 보여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전부 시황 잘못이다.
눈물이 좀 잦아들자 은비는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다시 깔끔하게 한 뒤에 화장실을 나왔다.
“피곤하세요? 눈이 빨개요.”
“아니에요.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런가 봐요.”
“아? 그래요? 안약 드릴까요?”
“아니요. 이젠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은비는 이제 가식적이고 거짓된 웃음을 짓지도 않고 시황에게 대답했다.
“과자 드셔보세요. 맛있어요.”
시황의 말에 은비가 생기 없는 표정으로 과자를 몇 개 집어 먹었다. 분명 이 방 안에 반지가 있을 텐데 시황 몰래 반지를 찾으려니 너무 힘이 든다. 순간, 은비의 머리에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시황이 잘 때 반지를 찾으면 되지 않겠는가? 아까 시황이 피곤하다고 했으니까 분명 이렇게 얘기하다보면 꾸벅꾸벅 졸지도 모른다. 그때 반지를 찾아서 돌려주면 된다.
그래서 은비는 시황이 잠이 오게끔 일부러 따분한 얘기들을 했다. 시황이 잘 모를 법한 연기자의 고생이라든가, 연기할 때의 힘든 점 등 관심 없는 사람이 들으면 대번에 잠이 올법한 그런 얘기들이었다.
“와, 그래요? 정말 고생하시네요. 은비 씨 정말 대단하세요.”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시황은 오히려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너무 잘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서인지 긴장이 되면서도 은근히 얘기하는 재미가 있어서 어느덧 시간이 12시가 지나버렸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생각에 아예 여기서 잔다고 말해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아이디어까지 떠오른다.
“아함, 그런데 은비 씨. 제가 이제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이제 슬슬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조, 조금만 더 놀아요.”
평소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은비는 무조건 시간을 끌어야 했기 때문에 시황에게 더 놀아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했다. 조금만 더 얘기하면 분명 꾸벅꾸벅 졸 거 같은 분위기다.
“죄송해요. 너무 잠이 와서 이제 안 되겠네요. 내일 아침에 제가 녹화도 있고 해서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또 얘기해요.”
“아, 안 돼요. 조금만 더요. 네?”
은비는 사정을 하다시피 했다. 평소에 하던 그런 가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표정과 말이다.
“곤란한데…….”
“그, 그럼 오늘 너무 늦었는데 저도 여기서 자고 갈게요.”
“네?”
“여기서 자고 간다고요. 어차피 12시 넘어서 집에 가기 곤란한데, 잘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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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